밑밥에서 사용하는 마키란 무슨 뜻일까?

밑밥에서 사용하는 마키란 무슨 뜻일까?

활동 중인 동호회의 게시판에 마키란 용어가 무슨 뜻인지 문의하는 글을 보고 아는 선에서 몇 자 적어본다.

짐작하는 것과 같이 마키란 말은 일본어이다. 그러나 낚시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마키라는 단어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우선 마키(撒き: まき)라고 하는 것은 뿌린다는 뜻을 가진 일본어 동사 마쿠(撒く: まく)의 명사형으로 일본의 관서지방에서 성행하고 있는 살아있는 생새우를 뿌려서 농어와 같은 어종을 잡는 새우뿌림낚시(エビまき釣り: 에비마키즈리)에서 마키(撒き: まき)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흔히 밑밥을 혼합할 때 사용하는 크릴을 가리키는 마키라는 표현은 정확하게는 마키에(まき餌: まきえ)라고 하는 것으로 이것은 뿌리는 미끼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감성돔 찌낚시 등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바다낚시에서 사용하는 밑밥이란 말에는 뿌린다는 의미가 이미 함축되어 있고, 크릴은 마키가 아니므로 부정확한 일본말인 마키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명태의 고갈을 예언했던 민정중과 명태의 어원

명태의 고갈을 예언했던 민정중과 명태의 어원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 정부가 포획을 금지할 정도로 귀한 존재가 되어버린 명태는 2018년에 냉장상태의 생태를 3,664톤이나 수입했다는데 그 중에서 96.8%를 일본으로부터 수입했다고 하는데 지금이라도 관계당국이 나서 원산지표시위반을 강력히 단속하겠다고 하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숙종 때의 판서를 역임하였던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은 “300년 뒤에는 명태가 귀해질 것이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아예 씨가 말라버렸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민정중의 명태에 대한 예언은 조선말기의 문신 이유원(李裕元)의 수록류(隨錄類)를 모아 만든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나오는데 그와 함께 명태(明太)란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도 밝히고 있다.

임하필기(林下筆記)는 모두 39권 33책으로 되어 있으며 명태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제27권은 춘명일사편(春明逸史編)인 제25권~제30권에 속하는 것으로 임하필기(林下筆記)의 다른 글들이 대부분 이미 쓰여진 저술에서 발췌한 것이었는데 비해서 춘명일사편(春明逸史編)은 이유원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한 사실들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가장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임하필기(林下筆記) 춘명일사편(春明逸史編) 권27에 나오는 명태(明太)란 제목의 글을 원문과 함께 알아보도록 하자.

林下筆記 卷二十七(임하필기 권27)

明太(명태)

명천어부유태성자(明川漁父有太姓者).

명천에 사는 어부 중에 태씨란 성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조일어(釣一魚). 사주이공도백(使廚吏供道伯). 도백심미지(道伯甚味之). 문기명(問其名). 개부지(皆不知). 단도태어부소득(但道太漁夫所得).

하루는 물고기 한 마리를 잡아 고을의 아전으로 하여금 도백(관찰사)에게 드리게 하니 도백이 매우 맛있어 하며 물고기의 이름을 물었으나 아무도 알지 못하고 단지 태씨란 어부가 잡았다고만 대답할 뿐이었다.

도백왈명위명태가야(道伯曰名爲明太可也).

이에 도백이 말하기를 명태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자시차어세득루천석(自是此魚歲得屡千石). 편만팔로(遍滿八路). 호위북어(呼爲北魚).

이때부터 이 물고기가 해마다 수천 석씩 잡혀 팔도에 두루 퍼지면서 북어라고 불렸다.

민노봉지언(閔老峯之言). 삼백년후차어상귀촉령(三百年後此魚常貴亍令). 기언예험(其言預驗).

노봉(老峯) 민정중(閔鼎重)이 말하기를, “300년 후에는 이 물고기가 지금보다 귀해질 것이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그 말이 들어맞은 셈이 되었다.

여과원산(余過元山). 견어적여오강지치시(見魚積如五江之峙柴). 불계기수(不計其數).

내가 원산을 지나면서 이 물고기가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마치 오강(지금의 한강 일대)에 쌓인 땔나무처럼 많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민정중이 명태의 고갈을 예견하고 300년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서 임하필기를 쓴 이유원(李裕元)은 남획되는 명태의 모습을 보았고, 그로부터 다시 300년이 못 된 지금은 아예 명태의 흔적을 찾을 수조차 없을 지경이니 다시금 고전(古典)을 통해서 소중한 어족자원의 보호를 되돌아보는 바이다.

낚시와 빛(조명)의 관계

낚시와 빛(조명)의 관계

집어등을 사용하여 낚시를 하는 것은 특정한 장르이기 때문에 이것은 제외하고 일반적인 조명과 빛은 낚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루어낚시에 있어서는 야간조명을 비롯한 빛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이며 빠뜨릴 수 없는 전략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데 현재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는 크롬으로 만든 루어나 홀로그램을 이용한 것들은 빛이 나게 하는 어필을 지향하는 것들이며 블레이드와 같이 빛이 반사될 수 있도록 한 것들은 지난번에 알아본 “루어의 플러싱(flushing) 효과”를 활용하는 것들입니다.

이처럼 대상어종의 리액션 바이트를 유도하는 플러싱(flushing) 효과에 있어서는 빛이 매우 효과적으로 작용하지만 그 이외에는 낚시의 조과에는 유용하지 않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이유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바로 수중의 시야와 빛이 관련이 있기 때문인데 동물들은 먹이활동을 할 때에도 본능적으로 육식동물(어종)로부터 자신을 숨기려고 하기 때문에 수중의 시야가 밝은 곳을 피해 바위나 구조물 등이 있는 그늘 속에서 움직이는 습성이 있고 수심이 깊은 곳에서는 도망칠 수 있는 공간이 많지만 얕은 곳에서는 도망칠 마땅한 장소가 부족하므로 수심이 얕은 지역에서의 데이게임은 좋지 못한 조과를 올리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빛이 적어 수중의 시야가 좋지 못한 포인트에 있는 베이트 피시들은 먹이활동에 경계심을 풀게 되고 농어와 같은 육식어종들은 이런 베이트 피시를 먹기 위해 몸을 숨기려는 필요성이 적어지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의 낚시는 비교적 조과를 올리기 쉬워지는 것입니다.

 

농어를 예로 들면 기본적으로 빛을 싫어하는 습성으로 인해 시야가 밝은 곳에서는 몸을 숨기고 먹이활동을 하므로 얕은 곳에서 수중시야까지 좋다면 조과를 기대하기가 어렵고 깊은 수심의 포인트라고 하더라도 구조물로 인해 그늘이 진 곳이나 하단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조명이나 빛이 없는 밤에는 미끼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낚시가 어려워지는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사용하는 미끼가 냄새(찌낚시나 원투낚시)가 나지 않는 루어라고 하더라도 인간에 비해 약한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물고기들에게는 선명하지 않아도 보이는 것이며 특히 루어낚시에서는 물에 착수하는 소리와 수중에서의 진동을 통해 존재여부를 알게 됩니다.

단지 낮과는 달리 조명이 없는 야간에는 루어의 움직이는 속도를 조절하고 사용하는 색상을 밝은 것으로 변경하면 데이게임과 같은 격렬한 저크나 트위치 액션을 주더라도 조과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빛으로 인한 수중시야의 차이와 함께 조과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흔히 물색이라고 하는 물의 탁도(濁度)를 들 수 있는데 빛이나 조명으로 인한 차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추후 이와 관련한 글을 다시 작성하겠지만 오늘은 물색이 맑은 경우만 잠깐 살펴보도록 하면, 일반적으로 많은 낚시인들은 사용하는 루어가 물고기에게 진짜 미끼로 보이는지, 가짜 미끼로 보이는지를 크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이 부분은 물고기가 아니기 때문에 “이것이 맞다!”라고 명확하게 정의할 수는 없으나 약한 물고기의 모습을 연출하는 트위치 액션을 계속해서 동일한 속도로 동일한 움직임을 연출할 때의 조과가 좋다는 것을 보면 루어를 진짜 미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닐까 추측은 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점은 바로 “목줄의 굵기와 색깔은 정말 조과에 영향을 미칠까?”에서 알아보았던 것과 같이 목줄(쇼크리더)의 두께는 가늘수록 좋고, 가급적이면 색깔이 없는 투명한 것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데 이와 같이 물색이 맑은 경우 특히 데이게임에서 사용하면 좋은 액션은 빠른 속도의 리트리브와 리액션 바이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좀 더 상세하게 설명하면 라인이 중층에 떠있는 경우에는 물고기들의 입질을 유도하는데 좋지 않기 때문에 사용하는 라인도 비중이 무거운 것이 좋다는 것이며 빛이 밝고 물색이 맑은 경우에는 역으로 보면 바닥에서 수면이 잘 보이기 때문에 립리스 미노우를 사용하는 것이 조과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저의 개인적인 것이지만, 루어낚시의 쇼크리더로 많이 사용되고 있는 플루오르카본 라인의 재료인 폴리불화비닐리덴은 화학반응이 거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염분에 강한 특성은 가지고 있으나 그만큼 생태계에서는 분해되지 않고 그대로 남게 된다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서 이제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세계최고의 요트를 만들어 기부하는 기업가

세계최고의 요트를 만들어 기부하는 기업가

프리미어리그의 명문구단 첼시의 소유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Roman Abramovich)가 소유한 호화요트 이클립스(Eclipse)를 밀어내고 2013년 4월 5일에 진수한 현 아랍에미리트의 대통령인 “할리파 빈 자이드 나하얀”이 소유한 길이 590피트(180미터)의 호화요트 아잠(Azzam)이 현재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호화요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클립스(Eclipse)

 

아잠(Azzam)을 건조하는 데는 약 6억 달러의 비용이 들었고 기간만 4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아잠(Azzam)은 94,000마력으로 길이 300피트 이상의 요트 중에서는 가장 빠른 시속 31.5노트(시속 58km)의 속도를 자랑하고 50개의 객실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2020년이면 1위의 자리를 물러나게 될 것 같습니다.

아잠(Azzam)

 

2020년에 건조를 마칠 것으로 예상되는 새로운 세계최고의 호화요트는 세계의 갑부들이 요트를 가지는 이유와는 달라서 관심도 가고 흥미롭기도 합니다.

네덜란드의 갑부로 27억 달러에 달하는 자산을 가진 잉아 뢰캬(Kjell Inge Røkke)가 REV Ocean사에 2017년에 주문한 배는 길이가 아잠(Azzam)보다 2미터 정도가 긴 세계최고 길이의 요트로 기록되겠지만 그보다도 중요한 점이 잉아 뢰캬(Kjell Inge Røkke)가 이 배를 건조하는 이유가 기부를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있습니다.

지난 8월에 동력을 공급할 4개의 발전기를 설치했다고 하는 이 배는 건조를 마치게 되면 세계자연기금(WWF: World Wide Fund For Nature) 노르웨이본부에서 운용을 하게 될 예정으로 연구탐험선(REV: Research Expedition Vessel)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합니다.

 

제가 이 배에 대한 정보를 알게 된 동기는 배의 기능 중에서 해양플라스틱을 하루에 5톤씩 수거하여 처리하는 시설을 갖출 것이라는 보도를 접하고서입니다.

18세 때부터 어부로 일을 시작한 잉아 뢰캬(Kjell Inge Røkke)는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하였지만 그가 얻은 물질적인 풍요가 모두 바다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사회에 환원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하며 환원사업의 하나로 이 배를 건조하는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최근에 연이어 불거지는 국내 재벌들의 갑질을 보다가 이런 통 큰 기부를 보니 참으로 부럽기만 합니다.

또한 건조 중인 REV는 길이도 세계에서 제일 길지만 총 톤수도 16,000GT로 세계최고가 될 것이라고 하며 90명의 인원이 승선하여 최장 114일 동안 바다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하는데 언제나 연구탐사 활동에만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가끔은 잉아 뢰캬(Kjell Inge Røkke)가 개인적으로 사용하기도 할 것이라고 합니다.^^

교황청은 포유류인 카피바라와 비버를 물고기로 분류한다.

교황청은 포유류인 카피바라와 비버를 물고기로 분류한다.

성당은 다니지만 신앙심은 두텁지 않은 흔히 말하는 발바닥 신자에 불과한 나의 세례명은 안드레아다.

그러나 오늘 얘기의 주제는 종교에 관한 것이 아니라 로마교황청에서는 무엇 때문에 포유류인 카피바라(Capybara)와 비버(Beaver)를 물고기로 규정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는 것이다.

중세에는 사순절 기간 동안 육식을 금지하고 생선을 먹는 것만이 허락되었는데 지니월드를 통해 여러 차례 소개한 적이 있는 줄리아나 버너스란 수녀가 낚시에 관한 책을 쓸 수 있었던 것도 사순절이 하나의 동기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만 했던 수녀원의 생활에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46일간의 사순절 동안처럼 금식을 하는 기간에는 물고기가 유일한 수녀님들의 단백질원이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남성들보다 낚시를 자주 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단종되었다가 2021년 4월 1일에 재출시된 맥도널드의 필레오피시(Filet-O-Fish)버거도 사순절 기간 동안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매출이 떨어지는 것을 타개하고자 개발된 메뉴이며 파파이스에서 판매하는 케이준 플라운더 샌드위치(Cajun Flounder Sandwich)도 같은 이유로 출시된 상품으로 플라운더라는 이름에서 보듯이 가자미를 재료로 만들고 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진출하면서 특히 중남미에는 많은 성직자들이 함께 나갔는데 그 중에서 베네수엘라로 선교활동을 떠났던 스페인 출신의 성직자들은 사순절 기간 동안은 물론이고 언제나 먹을 것이 부족하자 그곳에 많이 서식하고 있던 카피바라(Capybara)가 수생동물이란 점에 주목하고는 바티칸에 편지를 보내게 된다.

그들이 주목한 것은 12세기 웨일즈의 대주교였던 웨일즈의 제럴드(Gerald of Wales)가 “육식을 금하는 동안에도 수생동물인 비버(Beaver)의 꼬리는 물고기와 같은 색과 맛을 가지고 있으므로 먹어도 된다.”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비버와는 달리 카피바라는 꼬리가 없었는데 성직자들은 같은 수생동물이란 점에 착안하여 부족한 식량난을 타개하기 위해 사순절 동안에도 카피바라는 먹을 수 있도록 물고기로 분류해달라는 편지를 바티칸으로 보냈다.

그리고 1784년에 바티칸은 이것을 공식적으로 허락하기에 이르렀고 이로 말미암아 수생 설치류는 금육하는 동안에도 먹을 수 있게 물고기로 분류되었던 것이며 물론 비버도 물고기로 분류하고 있다.

바다낚시와 조위편차

바다낚시와 조위편차

흔히들 골프가 잘 될 때나 잘 되지 않을 때에는 수백 가지가 넘는 원인이 있다고들 말하는데 하물며 대자연을 상대로 하는 바다낚시에서의 조과가 좋고 나쁨에는 그 이유가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을 것임은 명확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대물을 잡거나 많은 양의 물고기를 잡는다는 것은 낚시인의 실력도 물론 중요하겠지만, 경험 많은 노련한 낚시인들로부터는 요행히 운이 좋아 모든 조건이 우연히 맞아떨어진 것일 뿐이라는 겸손한 말을 종종 듣는다.

나 또한 마찬가지의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낚시인들이 물때표를 보고 출조를 할 때, 같은 조위를 보이는 날이라고 하더라도 여러 요인에 의해서 조과는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자연 앞에 더욱 겸손해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란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은 본인의 예상과는 다른 조과를 보이게 만드는 원인의 하나인 조위편차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남들에 비해 조금 더 나은 조과를 올린다고 하는 것은 자랑할 일도 아니며, 조금 못 잡는다고 해서 자신의 실력 없음을 나무랄 일도 아님을 지적하고자 한다.

조위(潮位)란 조석(潮汐)에 의해서 변화하는 해수면의 높이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를 예측한 추산조위와 실제 높이를 측정한 실측조위를 비교하여 발생하는 편차를 조위편차(潮位偏差)라고 한다.

사례를 들어보면 지난 8월 23일의 완도와 울산의 조위를 예측한 결과와 실제 측정한 결과는 아래의 그림과 같이 편차를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천안함 피격사건이 있었던 지난 2010년 3월 26일, 대청도의 조위편차는 아래와 같이 아주 컸음을 볼 수도 있다.

낚시인들은 주로 물때표에서 간조와 만조시각이나 몇 물인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당일의 낚시에 대한 결과를 예측하는데 이것은 고려해야 하는 많은 요인 중의 하나일 뿐임을 인식하여야 한다.

낚시에 대한 경험이 조금 쌓인 사람들 중에서“조금이고 사리이니 낚시가 어떨 것이다.”라는 단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가끔 볼 수 있는데 그럴 때면 나는 속으로 “낚시를 배워도 한참 더 배워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보통, 사리는 유속이 빠르고 세며, 조금은 이와는 반대라로 알고 있지만 조수간만의 차이가 가장 적은 조금 때일지라도 물흐름이 빠른 경우가 있는데 이 때가 바로 추산조위와 실측조위의 차이로 인해 발생하는 조위편차(潮位偏差)가 큰 날에 해당한다.

바로 이와 같은 점에서 보듯이 바다낚시에서는 대체로 그렇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반드시 그렇다고 하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데 이런 평범한 진리를 망각하는 낚시인들을 의외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면 조위편차(潮位偏差)는 어떤 원인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일까? 먼 바다가 아닌 해안에서 가까운 방파제 등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에는 무엇보다도 강수량을 가장 빈번히 발생하는 조위편차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많은 비가 내리고 난 뒤에는 일반적으로 낚시가 어렵다는 것이 정설이다.

 

※ 많은 비가 온 뒤에 바다낚시가 어려운 이유

 

이처럼 조위의 변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천체의 인력으로 인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고 강풍이나 기압의 급변 등 기상적인 요인에 의해서도 발생하는데 이런 이유로 인해서 발생하는 조위변화를 전문용어로 기상조(氣象潮: meteorological tide)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직전 만조보다 간조 시각의 물높이가 예보로는 -50㎝였는데 실제로는 -100㎝가 된다면 루어낚시를 하는 분들에게는 예상과는 달리 의외의 조과를 안겨다줄 수 있는 물때가 되는 것이어서 단순히 물때표를 보는 것만으로 모든 것을 확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기상조(氣象潮: meteorological tide)의 원인은 기압의 변화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많은 정보들을 인터넷으로 확인할 수 있기에 여기서는 설명을 생략키로 하고 일반적으로 낚시인들이 잘 모르는 것들만 살펴본다.

 

■ 난수성·냉수성 소용돌이

2016년 6월 2일 국립해양조사원에서는“동해 주요 해류를 따라 위성뜰개 2기가 이동한 궤적을 통하여 울릉도 남쪽 부근에서 울릉 난수성 소용돌이가, 그 남동쪽에 독도 냉수성 소용돌이가 발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는 보도자료를 배포하였는데 대표적인 난수성·냉수성 소용돌이로는 울릉도 남서쪽에서 빈번하게 관측되는 ‘울릉 난수성 소용돌이(Ulleung Warm Eddy)’와 독도 남쪽에서 가끔 뚜렷하게 발생하는 ‘독도 냉수성 소용돌이(Dok Cold Eddy)’가 있는 것으로 국립해양조사원은 밝히고 있다.

국립해양조사원이 제공한 그림에서 보는 것과 같이 난수성 소용돌이가 일어나면 수위가 상승하고 냉수성 소용돌이가 발생하면 수위는 하강한다.

 

사진출처: 해양수산부 보도자료

■ 부진동(副振動-세이시: seiche)

한국해양학회에 따르면 부진동이라고 하는 것은 ① 만(灣)이나 항만 내부의 수면이 기상이나 파랑의 작용에 의해 일으키는 고유 진동. ② 호수나 반폐쇄형 만에서 갑작스런 교란을 받았다가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면서 정해진 고유 공명주기로 움직이는 출렁임이라고 한다.

이런 부진동을 영어로는 ‘세컨드리 언듈레이션(secondary undulation)’이라고 하며 흔히 줄여서 세이시(seiche)라고도 한다.

세이시라고 부르게 된 동기는 호소학(호수와 늪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의 창시자인 스위스의 프랑수아 알퐁스 포렐(François-Alphonse Fore)이 우리에게는 레만호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제네바 호수(Lake Geneva)에서 이 현상을 관찰한 이후 스위스 프랑스어의 방언으로 이리저리 흔들린다는 뜻을 가진 세이시(seiche)로 이름 붙여 1890년에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 에크만 수송(Ekman transport)

찬 해수가 아래에서 위로 표층해수를 제치고 올라오는 현상인 용승(湧昇: upwelling)의 원인은 유빙이나 해저화산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중에서 우리나라의 바다에서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는 에크만 수송(Ekman transport)이란 것이 있다.

이것은 쉽게 말하면 바람에 의해서 해수면의 수위가 변동하는 것으로 해상에서 바람이 불면 코리올리 효과에 의해 북반구에서는 바람의 방향과 오른쪽 직각방향으로 해수가 이동하고 남반구에서는 왼쪽 직각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단순히 물때표를 보는 것만으로는 대자연의 현상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따라서 낚시에 대한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더욱 겸손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특정지역의 조위편차를 살펴보면서 얘기를 마칠까 한다. 아래의 그림은 모 지역의 조위편차를 나타낸 그래프로써 빨간색 동그라미가 쳐진 22일은 사리 때였지만 간조 시에는 조위의 편차가 없고 만조 때에 조위편차가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즉 그래프가 해당하는 달에 물흐름이 없는 날이어서 별다른 조과를 기대하지 않고 출조를 나간 사람들도 간조 때에는 커진 조위편차 때문에 제법 괜찮은 조과를 올렸을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넘치는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잘못된 정보들을 마치 사실인양 전달하는 방송들을 보면서 조금은 더 겸손한 자세로 콘텐츠를 꾸며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조위편차를 예로 들어 글을 적어보았다.

일본의 날조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은어낚시

일본의 날조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은어낚시

제가 낚시를 주제로 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은어 놀림낚시 또는 꾐낚시를 일본에서는 토모즈리(友釣り)라고 부르며, 일본이 발상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일본의 허위·날조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은어낚시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토모즈리(友釣り)란 말이 등장하는 것은 1832년이 처음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은어를 잡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일본 에가와 가문의 사료에는 야나료우(梁漁)라는 구조물을 설치하여 은어를 잡던 어부들이 토모즈리로 은어를 잡아대는 사람들 때문에 세금을 내지도 못할 형편에 처해 있으므로 이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탄원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나료우(梁漁)는 지금 보시는 사진과 같은 것으로 산란을 위해 하류로 내려가는 은어를 잡는 데에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는 지자체들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운영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입니다.

4세기경 삼한(三韓)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물은 진구황후(神功皇后)로 일본에서조차 지어낸 인물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사기(古事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가짜(위서:僞書)라는 평가를 일본 내에서도 받고 있지만, 오늘은 은어낚시에만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은어낚시는 진구황후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진구황후가 신라 원정에서 돌아온 다음 현재 사가현의 가라쓰시(唐津市) 강가에서 옷의 실을 뽑아 낚싯줄을 만들고, 바늘을 구부려 낚싯바늘을 만든 다음, 밥알을 미끼로 은어를 잡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진구황후가 밥알을 끼운 낚싯바늘을 강에 던지며 “신라 정벌이 성공한다면 물고기가 이것을 먹을 것이다.”고 말했고, 은어가 잡히자 “신은 우리 편이다. 정벌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고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민물고기 중 일본에서 가장 많이 먹는다는 은어는 민물어획고의 25%를 차지할 만큼 일본인에게 사랑받아온 물고기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날조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진구황후가 정벌이 성공할 것이라면 물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한 뒤 은어가 잡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일본 내에서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4세기 경 일본에서 배를 타고 신라로 오기 위해서는 동풍이 불어야만 했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은어를 아유(あゆ)라고 하는데, 이전에는 동풍(東風)도 아유(あゆ)라고 불렀죠.

이런 이유로 일본의 사학자들 중에는 진구황후가 “동풍은 아직인가?”라고 물은 것을 “은어는 아직인가?”라고 생각하여 날조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봐도 이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 밖에도 나무위키의 표현을 빌면 과장과 주작이 많다는 일본서기에는 은어와 관련한 또 하나의 얘기가 나옵니다.

일본의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아마노카구야마(天香久山)에서 나는 흙으로 술병을 만들고, 술을 담아 강에 가라앉힌 뒤 물고기가 떠오르면 무기가 없어도 일본을 평정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종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이에서 비롯되어 일왕의 즉위식에 등장하는 깃발인 만세번(万歳幡)에도 은어가 그려져 있는 것이죠.

 

이처럼 은어는 일본인의 생활과 밀접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었기에 은어낚시와 관련한 것들은 모두가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에서는 3백여 년 전에 이미 토모즈리가 성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채비의 설명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1907년의 일본어류도설이 최초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 등장하는 은어(銀魚)는 낚시에 관련한 내용은 전무하며 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공물의 진상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죠.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5년인 1433년에 은어를 천신(薦新)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장시켰으나 진상한 생선이 썩어 문드러져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얼음을 저장하던 곳을 혁파하였다고 나오거나 문종이 즉위한 해인 1450년에는 독약을 사용하여 은어를 잡는 것을 금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보다 앞서 은어를 먹거나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독약을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어떻게 잡았는지 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죠.

고기만 잘 잡으면 되지 낚시에서 무슨 역사를 논하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냐고 힐난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우리의 고유한 낚시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제대로 전달하고 싶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⑨ 플라이 낚시를 즐긴 리츠 호텔의 찰스 리츠 회장

세계의 유명 낚시인⑨ 플라이 낚시를 즐긴 리츠 호텔의 찰스 리츠 회장

리츠호텔이란 이름보다는 리츠칼튼이란 이름이 더 잘 알려진 호텔은 스위스 출신의 세자르 리츠(Cesar Ritz)가 프랑스 파리의 맨션을 인수하여 1898년 6월 1일 개관했던 호텔 리츠(Hotel Ritz)가 그 효시였다.

세자르 리츠(Cesar Ritz)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플라이낚시를 즐긴 것을 뛰어넘어 전문가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낚시에 심취한 인물로 환경보호에도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이란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연재한 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니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며칠 전에 올린 ‘피더낚싯대에 표시된 파운드(lb)의 의미’란 글에서 다루었던 테스트 커브(test curve) 때문이었다.

 

낚싯대의 끝이 수평에서 90도 각도로 휘어지는데 필요한 무게를 뜻하는 테스트 커브(test curve)란 개념의 체계적인 정리는 리차드 워커(Richard Walker)가 쓴 책(Still-Water Angling)에 잘 나와 있는데 잉어낚시용 로드를 만들 때 이 개념이 사용된 것은 1950년대 무렵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테스트 커브(test curve)는 측정하는 방법과 그 수치를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는 기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 낚싯대를 만드는 소재가 대나무에서 유리섬유를 거쳐 탄소섬유로 발전하면서 로드를 만드는 블랭크의 무게나 탄성계수 및 사용된 가이드에 의해서도 측정치가 달라질 수 있는 큰 흠결을 가진 불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테스트 커브(test curve)를 로드의 제원으로 표시하고 있는 유럽의 제품들을 구매할 때는 이런 점을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오류가 많은 측정치인 테스트 커브(test curve)를 적용하지 않고 낚싯대를 제작해서 판매한 인물이 오늘의 주인공이자 프랑스 파리 리츠호텔의 회장이었던 찰스 리츠(Charles Ritz)란 사람이다.

찰스 리츠(Charles Ritz)가 만들었던 플라이 로드는 기존의 로드들과는 달리 초릿대의 끝부분은 경사(테이퍼: Taper)가 지지 않도록 평행하게 만들고 초릿대의 끝부분을 아주 딱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1917년 호텔경영을 배우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전당포에서 구입한 낚싯대를 수리한 다음, 재판매를 하였다고 하니 사업수완도 수완이지만 낚시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아주 높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1927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포부흐그 셍또노헤 가(Rue du Faubourg Saint-Honoré)에 신발가게를 차렸지만 가게의 뒤편에는 낚싯대를 만들고 수리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플라이 낚싯대 제작의 장인인 짐 페인(Jim Payne)의 도움을 얻어 그 유명한 파라볼릭(Parabolic) 로드를 세상에 선보이게 되고 이를 선물 받았던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았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로부터는 “내가 아는 최고의 플라이 낚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짐 페인(Jim Payne)

 

이것뿐이었다면 찰스 리츠(Charles Ritz)를 세계의 유명 낚시인이라고 소개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이에 더하여 그는 플라이낚시에 있어서 필독서라고 할 수도 있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1953년 프랑스어로 프리스 수르 르 비프(Pris sur le Vif)란 제목으로 펴낸 책이 그것으로 캐스팅 챔피언들의 자세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하이 스피드와 하이 라인과 같은 현대 캐스팅 이론을 구축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플라이낚시에 관한 정보와 그의 추억 등이 담겨 있다.

그 뒤 이 책은 1955년에는 독일어로, 1959년에는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가까운 일본에서도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나 불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영문판인 ‘A Fly Fisher’s Life’를 구해서 읽어보았다.

 

이론과 실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환경보호에도 앞장섰던 인물이어서 유명 낚시인으로 소개하기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1958년, 강의 수질과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친한 낚시인들과 함께 국제파리오클럽(International Fario Club)을 결성하고 매년 프랑스 파리에서 모임을 개최하였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를 편집자로 초빙하여 플라이낚시에 관한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폐간이 되었다.

 

찰스 리츠(좌)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우)

 

1976년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기 위해 국제파리오클럽(International Fario Club)은 찰스 리츠(Charles Ritz)의 이름을 딴 상(The Prix Charles Ritz)을 제정하여 수생환경의 보호와 개선에 이바지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하여 매년 시상을 하고 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⑧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

세계의 유명 낚시인⑧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서 코발로브스키의 이름을 들어본 국내 낚시인들은 극히 드물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8번째로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개발한 릴이 특히 빅게임 피싱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빅게임 피싱(혹은 스포츠 피싱이라고도 부른다)은 주로 새치류를 잡는 낚시를 말하는데 배를 타고 트롤링으로 새치(Billfish)류를 잡는 것은 비용문제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잡을 수 있는 지역이 없다는 것이 국내에서 빅게임 피싱(Big Game Fishing)에 대한 관심도가 높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국과 남미를 비롯하여 일부 유럽의 국가와 일본에까지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낚시인으로 제인 그레이(Zane Gray)란 사람이 있는데 그동안 세계의 유명 낚시인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언급은 했으나 아직 소개는 하지 않고 있는 이 사람은 명실상부하게 빅게임 피싱(Big Game Fishing)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6번째로 소개했던 올브라이트 노트의 개발자인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 역시도 제인 그레이(Zane Gray)의 영향으로 낚시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처럼 지대한 영향을 끼침과 함께 수많은 공적을 남긴 제인 그레이(Zane Gray)는 낚시에 관한 기술을 집약해놓은 책(Zane Grey’s Adventures In Fishing)에서 코발로브스키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위대한 코발로브스키(The great Kovalovsky)’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니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가 빅게임 피싱에 미친 영향이 컸던 것만은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낚시인들 사이에서 코발로브스키(Kovalovsky)라는 단어는 사람의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릴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는데 이 릴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아서 코발로브스키였음은 짐작하는 그대로다.

1881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금속세공사로 일을 하던 코발로브스키는 1904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자동차기술자로 일을 했는데 1918년에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하고 자신의 가게를 직접 개업하여 자동차 수리업을 운영하면서 평소에 즐기던 낚시의 장비개발에도 나서게 되는데 그 결과, 1928년에 자동차의 디스크 브레이크와 유사한 구조의 드랙시스템을 갖춘 2단 구조의 72파운드 라인이 500m 정도 감기는 기어비 2:1의 릴을 선보이게 된다.

기존의 릴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지녔던 코발로브스키의 릴은 손잡이 부분이 2단으로 되어 있었고 위에는 나사 같은 것이 달려있었는데 이 나사가 드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아래의 큰 손잡이는 스풀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고도 드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선을 보였던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가 개발한 릴은 낚시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마침내는 제인 그레이(Zane Gray)도 그의 고객이 되게 된다.

그러던 중 계속해서 자동차수리점을 운영하던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는 밀려드는 주문 때문에 본업이 뒤로 밀리게 되자 릴을 개발한지 3년 뒤인 1931년에는 아예 릴을 생산하는 사업을 아들인 오스카 코발로브스키(Oscar Kovalovsky)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코발로브스키(Kovalovsky)란 상품명은 홍보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유명한 낚시인이자 그의 고객이었던 제인 그레이(Zane Gray)와 상의하여 ‘코발로브스키 제인 그레이 릴’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게 된다.

1930~1940년대의 릴을 개발한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시계를 만들던 사람이었거나 보석을 가공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에 비해 자동차 기어와 브레이크의 원리 및 시스템에 밝았던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가 만든 릴은 기존의 릴들과는 차별화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함께 재료의 공급이 끊기게 되어 릴의 생산은 중단되게 되었으며 종전과 함께 생산이 재개되었으나 이전의 명성을 회복할 수는 없었고 1958년에 77세의 나이로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오스카 코발로브스키(Oscar Kovalovsky)가 명맥을 이어나가면서 1981년에는 그의 아버지인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릴을 출시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골동품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제품이 되고 말았다.

오스카 코발로브스키(Oscar Kovalovsky)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의 릴에 대한 우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Zane Grey’s Adventures In Fishing’이란 책인데 이 책속에서 제인 그레이는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물고기와 싸우기 위한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코발로브스키 릴의 드랙을 7파운드까지 올리기로 했는데 이런 드랙 값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으로 최초의 경험이다.”

아래의 사진은 1936년에 제인 그레이가 코발로브스키 릴을 사용하여 잡은 무게 470㎏의 타이거 상어와 함께 찍은 것이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⑥ 지미 올브라이트와 그가 만든 매듭법

세계의 유명 낚시인⑥ 지미 올브라이트와 그가 만든 매듭법

사진의 오른쪽이 지미 올브라이트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란 사람이 만든 매듭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올브라이트 노트가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매듭법은 그가 만든 네일 노트(Nail Knot)라는 것으로 블루길 크기부터 참치를 잡는데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지만 튜브나 도구를 필요로 한다는 점 때문에 아마도 국내에서는 많이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지미 올브라이트에 대해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가 개발한 올브라이트 노트(정식명칭은 올브라이트 스페셜: Albright Special)의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미 올브라이트가 대중으로부터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미국의 31번째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를 비롯하여 영화배우 지미 스튜어트(Jimmy Stewart)와 머나 로이(Myrna Loy) 등에게 낚시를 가르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였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와의 인연과, 현대 플라이낚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조 브룩스(Joe Brooks)와 함께 1946년부터 바다낚시를 함으로써 조 브룩스(Joe Brooks)가 1950년에 유명한 저서 “Saltwater fly fishing”을 출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사실 지미 올브라이트보다도 유명한 사람이 조 브룩스(Joe Brooks)지만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 모두를 Saltwater fly fishing의 개척자라고 부르는 것에는 대부분이 동의를 합니다.

두 사람 이전에는 플라이낚시를 바다에서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는데 특히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하면서 플라이낚시와 관련한 10권의 책을 발간하고 골프선수 잭 니클라우스와 가수 빙 크로스비를 비롯하여 지미 올브라이트와 친분이 깊었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와도 친구가 되었던 조 브룩스(Joe Brooks) 덕분에 널리 보급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1902년 인디애나에서 태어난 지미 올브라이트는 1935년 마이애미로 이주하여 인명구조원으로 근무하다가 스포츠피싱의 선구자였던 제인 그레이(Zane Gray)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참고: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낚싯배의 선원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플로리다 주에 정착한 지미 올브라이트가 바다에서 플라이낚시로 본피시(여을멸)를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지미에게 연락을 해와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낚시를 하며 본피시(여을멸)와 타폰을 잡았지만 당시 바다에서의 플라이낚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던 터라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본피시를 잡은 테드 윌리엄스

 

타폰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는 만일 군에 복무하지 않았더라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깰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통산 521개의 홈런을 때린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모두 5년이라는 시간을 해병대에서 조종사로서 복무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시즌 중임에도 비행훈련을 다시 받으면서 자원하여 참전을 준비하였는데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가진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열렸던 경기는 “테드 윌리엄스의 날”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미 올브라이트가 살던 플로리다의 아일라모라다는 당시 전기와 수도사정이 원활하지 못했고 지미 또한 자기의 배를 소유하지 못하고 남의 배를 몰던 때라 수입이 많지 않아 생활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관계로 거주하던 집은 지붕에 구멍이 나있을 정도로 열악했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집을 수리해주었다고 합니다.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는 ‘국제게임피싱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Fish Association)’이 선정하는 명예의 전당에 해당하는 상(LC&C Award)을 사망한 이후인 2013년에 수상을 하였는데 그가 개발한 올브라이트 매듭은 IGFA의 라인 클래스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LC&C는 Legendary Captains and Crew의 약자입니다.)

※ IGFA(국제게임낚시협회) 낚시규정(영문)번역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가 개발한 매듭법 중에서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올브라이트 매듭법의 정식명칭은 올브라이트 스페셜이고 이것의 변형으로는 알베르토 매듭법이 있는데 올브라이트 노트의 자세한 방법은 아래의 사진이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직결 매듭법-올브라이트 노트(Albright K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