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과 금육기간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함으로써 여러 가지 질환에 걸리는 것이며 특히 우리 영국에서는 채소와 샐러드 및 생선을 먹는 다른 현명한 나라들과는 달리 유명한 의사들이 물고기를 먹는 것은 피해가 많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국가의 번영을 위해서도 사람들은 생선을 주식으로 삼아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기 11장 9절의 “물에 사는 모든 것 가운데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수 있다. 물에 살면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바다에서 살든 개울에서 살든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말씀과 신명기 14장 9절의 “물에 사는 모든 것 가운데에서 이런 것은 너희가 먹을 수 있다.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무엇이든 먹을 수 있다.”는 말씀에서 보듯이 예로부터 생선을 최고의 성찬으로 여겼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고기라 해도 코끼리보다 세 배나 큰 고래도 있는데, 고래는 클 뿐만 용맹스럽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호화로운 향연은 생선요리로 이루어졌었는데 절정기의 로마인들은 철갑상어, 칠성장어, 숭어를 연회석에 내놓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물고기들을 사기 위해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하는데 마크로비우스와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가 쓴 책을 보면 로마인들이 생선과 물고기를 키우는 양어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철학적인 얘기를 하면 논지와는 다른 얘기를 하게 되는데 제가 그만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저는 최근에 낚시를 이해하는 좋은 친구인 와튼 박사를 만나 얘기를 나누었었는데, 어려운 얘기는 그만두고, 논지를 벗어나지 않는 좀 더 편안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진 물에 대한 얘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제일 먼저 목욕의 효과를 필두로 바다의 이용가치는 열거하기도 어려운데 교통이란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바다가 없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을 정도이며 바다는 인간에게 식량과 약품을 제공하고,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족시켜주기도 합니다.
피렌체의 아름다움과 기념비들과 골동품과 그 밖의 많은 진귀한 것들도 바다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모르고 지나쳤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아직도 로마 근처에 남아있으며 너무 많아서 전부를 보려면 1년이나 걸릴 정도인데 그것들을 함께 생각해보면 독실한 성 예로니모의 첫 번째 소원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뵙는 것이었고, 두 번째 소원은 성 바오로의 설교를 듣는 것이며, 세 번째 소원은 로마의 영광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는 이유를 알게 될 것입니다. 로마의 영광은 아직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습니다.
역사학자 리비우스와 최고의 웅변가인 키케로의 비석과 베르길리우스의 무덤에 우거진 월계수를 보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학문에 뜻을 가진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기뻐할 것입니다.
그러나 독실한 기독교인들에겐 성 바오로가 살았던 초라한 집과 그를 기념하여 만든 조각상들을 보는 것 이상으로 성 베드로가 잠들어 있는 장소를 보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들은 실제로 로마 근처에 있으며 그곳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살았고 시온 산과 예루살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묻힌 그곳에서 매일 바쳐지는 예배에 참가하고 싶지 않은 기독교인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논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여기서 멈추지만, 영국이란 섬나라는 바다가 없었더라면 제가 얘기한 것과 같은 사실들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논의라면 오래도록 계속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저 자신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는 물고기에게는 말을 하신 적이 있으나 짐승에게는 단 한 번도 말을 건네신 적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언자 요나를 니네베로 보내기 위해 고래를 배처럼 이용하셨습니다. 얘기하고픈 것은 많지만 마침 테오발드의 집도 보이므로 이쯤에서 마치겠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매사냥꾼: 천만에요. 모두가 동감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유감이지만 당신과 같은 낚시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작별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두 분 모두 안녕히 가십시오.
낚시꾼: 그럼 이제 사냥꾼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시겠습니까?
사냥꾼: 아닙니다. 낚시는 예로부터 내려온 완벽한 예술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쉽게 이르기는 어렵다고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다음 얘기를 계속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낚시꾼: 예 분명히 그렇게 말했지요. 만약 몇 시간만이라도 선생과 더 얘기할 수 있다면 낚시의 오랜 역사와 기예를 연마하는 예술로서의 낚시에 대한 얘기를 해드릴 수가 있을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현명한 사람이라면 낚시를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려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사냥꾼: 그렇게 하시죠. 초가집까지는 아직 5마일이나 남았으니 선생께서 하시고 싶은 얘기를 계속해주시기 바랍니다. 가는 동안 선생의 말씀을 잘 듣고 낚시가 배울만한 예술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면 하루나 이틀을 선생의 제자로서 함께하면서 낚시를 배우고 싶습니다.
낚시꾼: 낚시가 배울만한 예술이란 점은 분명하며 인조미끼로 송어를 낚는 것은 훌륭한 기예일 것입니다. 송어는 어떤 매보다 눈이 좋고, 기운차고 용맹한 쇠황조롱이보다도 조심성이 많으니까요. 그래도 저는 친구의 아침식사를 위해 몇 마리는 문제없이 잡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낚시란 선생이 배울만한 것임은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당신이 배울 자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낚시는 시를 짓는 것과 같아서 천부적인 자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낚시를 하거나 시를 짓는 것은 모두 토론과 경험을 쌓으면 어느 정도까지는 발전하지만 훌륭한 낚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탐구심과 관찰력이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자신감과 인내심과 낚시에 대한 애정과 강한 호기심을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즐거움으로 인해 멈출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낚시를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냥꾼: 점점 재미있어집니다. 그럼 예술로서의 낚시에 대해서 먼저 얘기해주십시오.
낚시꾼: 바라시는 순서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낚시의 역사에 대해서 긴 얘기는 하지 않겠지만 이것만은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데우칼리온의 홍수가 있던 날 포세이돈의 아들인 벨로스가 이 놀이를 만들었다고도 하고, 아담의 아들 셋(Seth)이 후손들에게 낚시를 가르쳐 오늘에 이르렀다고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 따르면 셋(Seth)이 수학과 음악, 기타 귀중한 지식과 함께 그가 세운 기둥에 새겨서 남겨두었는데 그것이 하느님의 가호로 노아의 홍수 때에도 유실되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설들은 낚시를 입증할 수 있는 것보다 오래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낚시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탄생보다도 오래되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아모스서에는 낚싯바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에 살았던 모세가 마지막 부분을 썼다는 욥기에도 낚싯바늘에 관한 얘기가 나옵니다.
※ 아모스서 4장 2절: 주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을 두고 맹세하셨다. “보라, 정녕 그때가 너희에게 다가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끌어가고 너희 가운데 마지막 한 사람마저 낚시로 채 가리라.”
※ 욥기 40장 25절: 너는 갈고리로 레비아탄을 낚을 수 있으며 줄로 그 혀를 내리누를 수 있느냐?
누구나 자기의 조상을 자랑스러워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지적이고 겸손하면서 용감하고, 예절 바르고 덕이 있는 신사임을 자랑하고 싶어하듯이 제가 낚시에 대해서 그 오랜 역사의 존엄성을 말씀드리고 싶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의 행복은 명상에 있는가, 행동에 있는가 하는 논쟁이 이루어져 왔지만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행복은 명상에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은 모방을 통해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행복해진다고 말하므로 그들은 하느님의 무한함과 영원함, 전지전능한 능력과 선량함과 같은 것들을 명상함으로써 만족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지식이 많은 수도승들은 행동보다 명상을 중시하는 것 같고, 그리스도께서 마르타에게 말씀하신 것에서 보듯이 많은 성직자들도 이 주장에 찬성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루카복음서 10장 41, 42절: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행동에 중점을 둔다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의약의 효과를 시험해 보고 그것으로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여 즐거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자신과 타인을 위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하기 위한 조건이라 말합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행동은 예술과 덕을 가르치는 교리이자 인간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불가결한 것이므로 명상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두 가지 견해에 저의 개인적인 의견을 덧붙이진 않겠지만 두 가지 설 모두가 모순되는 것이 아니므로 낚시도 명상이자 행동이라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누구나 인정하겠지만 조용한 강가는 명상에 빠지지 않는 장소이며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유혹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피터 뒤 물랭(Peter du Moulin)은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무언가 계시하고자 하실 때, 반드시 그들을 사막이나 해변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번잡한 세상으로부터 조용한 곳으로 데리고 오면 마음의 평안을 얻어 계시를 받기가 쉽다고 그의 저서 ‘예언의 실현’에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37절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얘기가 나오는데 그들은 흥겨운 음악과 소란을 멀리하고 바빌론 강가의 버드나무에 걸어놓은 비파를 조용히 연주하면서 폐허가 된 시온과 자신들의 슬픈 처지를 깊이 명상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치 넘치는 스페인 사람은 “강과 물은 현자(賢者)를 명상하게 만들지만 어리석은 사람들은 이것을 지나친다.”고 말합니다. 저는 현명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부러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우선 강과 물고기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릴 테니, 당신이 이것을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강에 대해 말하면, 강에 관한 경이로운 일들과 그곳에 서식하는 여러 생물들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저술하고 있으며 그중에는 후세에 몰려줄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피루스에 있는 강은 이름 그대로 켜진 횃불은 끄고, 꺼진 횃불에는 불을 밝힌다고 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강은 그 물을 마신 사람을 미치게 만들고, 어떤 강물은 취하게 하며, 또 어떤 강물은 웃음병에 걸리게 만들어 미쳐서 죽게 만든다고도 합니다.
셀라루스 강물은 몇 시간이면 막대기나 지팡이를 돌멩이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며 우리의 캠던 강도 이와 비슷한 일이 아일랜드의 로크미어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라비아의 어떤 강에서는 그 물을 마신 양의 털이 주홍색으로 변했다고도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견되는 현인에 의하면 엘루시나란 유쾌한 강이 있다고 하는데 그 강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거품을 내면서 모래를 휘젓다가도 음악이 끝나면 춤도 멈춘다고 합니다.
게다가 캠던은 웨스트모얼랜드의 커비 근처에 있는 우물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는 우물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요세푸스 못지않게 박학한 유대인이 얘기하는 강은 일주일 동안 6일은 대단한 기세로 흐르지만 안식일에는 하루 종일 고요한 상태를 유지한다고 합니다.
강에 대한 이야기는 이 정도로 마치고, 다음은 그곳에 사는 괴물이나 물고기에 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철학자 플리니우스(Pliny the Elder)는 그의 9번째 저서의 제3장에서 인도양에는 발라에나 또는 월풀이라고 불리는 고래가 산다고 하는데 그 체표의 면적이 2,500여 평이나 된다고 하며 갠지스강에는 9미터나 되는 장어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큰 장어는 평소에는 모습을 보이지 않다가 폭풍우가 급류를 몰아칠 때만 바닥에서 모습을 보인다고 하며, 이 강 근처에 사는 카다라 섬의 사람들은 이 물고기의 뼈로 집을 짓는다고 하며 엄청나게 큰 장어 수천 마리가 나타나서 움직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한편, 돌고래는 음악을 좋아해서 먹이를 주는 사람들이 음악을 연주하면 그 음악만 듣고도 다가오며, 화살처럼 빨리 헤엄칠 수도 있다고 하는데 이런 내용은 1670년경에 출간된 카조봉 박사의 ‘믿거나 믿을 수 없는 이야기(Of Credulity and Incredulity)’에도 실려있습니다.
우리 영국 사람들은 이런 불가사의한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지만 존 트러데스컨트나 제 친구인 엘리아스 애쉬몰 같은 사람들은 이런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습니다. 엘리아스 애쉬몰은 런던에서 가까운 램버스에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데 그곳에 오시면 그 불가사의한 사실에 대한 믿음이 생길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놀래기, 돔발상어, 돌고래, 코니피쉬, 비늘돔, 상어, 독이 있는 물고기, 황새치와 같은 신기한 물고기들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롱뇽, 여러 종류의 따개비와 북방가넷, 극락조와 희귀한 뱀과 새의 둥지를 볼 수 있는데 그것을 보신다면 제가 하는 말도 저절로 믿게 될 것입니다.
어쨌거나 물이란 신비를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보고니까요. 지루하시다면 이쯤에서 시인 조지 허버트의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사색’을 인용하여 정리해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