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작 월턴과 청교도혁명

아이작 월턴과 청교도혁명

유명한 강과 하천이 많은 영국의 중부, 미들랜드에서 성장한 아이작 월튼은 어린 시절부터 낚시를 즐기며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결혼 전까지는 꾼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낚시가 취미인 사람으로서 아이작 월튼과 그가 쓴 조어대전(The Complete Angler)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연재를 시작하였는데, 오늘도 포털의 잘못된 정보 하나를 먼저 알아보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네이버에서 조어대전을 검색하면 1655년에 제2판이 출판되었으며 다시 C.코튼이 속편을 1676년에 발행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이작 월튼의 낚시제자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속편을 발행하였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다.

1653년에 초판이 발행된 The Complete Angler는 1655년에 개정증보판인 2판이 발행되었고, 1661년에 3판, 1668년에 4판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1676년에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플라이피싱에 관한 내용을 쓰고 아이작 월튼이 가필(加筆)한 것을 제2부로 합본한 5판이 발행되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어대전의 원형을 가진 최초의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어디서 생산되고 전파된 정보인지는 몰라도 백과사전이란 이름 아래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아이작 월튼과 청교도혁명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유언장에서 “청교도혁명의 시기, 왕당파였던 월튼은 런던을 도망치다시피 떠나야만 했고, 일요일에는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등의 일체의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던 시기였기에 낚시를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는 일은 청교도 정부에 반항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Iz. Wa란 익명으로 제4판까지 발행하였던 것이며 1676년 제5판에 와서야 본명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즉, 아이작 월튼의 낚시에 관한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며, 그의 생애 전체를 종교와 별개로 조망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되는데, 아이작 월튼과 종교와 관련하여서는 영국내전, 좁게는 청교도혁명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럼,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아이작 월튼과 영국의 약사(略史)를 살펴보고 가자.

 

1593년 8월 9일 아이작 월튼 탄생

1608년에서 1618년 사이에 런던으로 이주(15~20세)

1620년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필그림 파더스는 미국으로 이주

1626년 12월 27일 레이첼 플로이드(Rachel Floud)와 결혼

1628년 권리청원

1640년 2월 5일, 47세에 던전(John Donne의 전기) 출간(최초)

1640년 8월 22일 첫 번째 아내 사망

1642년 청교도혁명

1647년 Anne Ken과 재혼

1649년 찰스 1세 처형, 크롬웰 공화정 선포

1653년 조어대전 초판 발행

1660년 왕정복고, 찰스 2세 즉위

1662년 4월 17일 두 번째 아내 사망

1665년 런던 페스트 유행

1666년 런던 대화재 발생

1683년 12월 15일 아이작 월튼 사망

 

 

1644년 마스튼 무어 전투(Battle of Marston Moor)에서 왕당파가 패배하자 아이작 월튼은 런던에서의 사업을 접고 Shallowford에 거처를 마련하고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였으며 말년에는 윈체스터에 있는 사위의 집에서 살았다.

런던을 떠나 시골에서 낚시를 하면서 글을 쓰는 생활은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영국내전으로 인한 심각한 대립으로 파괴와 약탈이 벌어지던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을 겪던 시대에 의회파와의 타협을 거부하던 왕당파의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은거하며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 참고 인내하라며 보냈던 메시지가 바로 조어대전의 제일 끝에 적인 침묵을 배우십시오(Study to be quiet)라는 표현인 것이다.

 

쉽게 말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죽어 지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인데 The Complete Angler의 주요 키워드인 낚시친구란 표현이 국교회(國敎會)의 은유적인 표현이면서도 좁게는 몰리, 쉘던, 해먼드와 같은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조어대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1662년 아이작 월튼은 ‘The Experience’d Angler or Angling Improv’d’라는 책을 쓴 로버트 베너블즈(Robert Venables)에게 자신도 30년 이상이나 낚시를 해오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1662년이면 그의 나이가 69세일 때이니 30년 전부터 낚시를 했다고 가정하면 그의 나이가 39세인 1632년부터 낚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고, 그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사업의 성공으로 얻은 경제적 안정과 1626년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이작 월튼이 낚시를 한 것은 종교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영국은 1628년에 권리청원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청교도혁명이 일어날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어수선한 시절이었는데 아이작 월튼은 왕당파의 일원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아이작 월튼은 1626년 12월 27일 33세의 나이로 레이첼 플로이드(Rachel Floud)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장모는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가문의 출신이었다.

아이작 월튼은 결혼 전에 존 던(John Donne)을 만나 국교회와 관계를 맺었는데 결혼으로 인해 국교회와의 관계는 결정되어버렸으며 이것은 청교도혁명 당시 아이작 월튼이 런던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자 낚시를 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존 던(John Donne)을 만난 이후로 아이작 월튼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존 던(John Donne)과 아이작 월튼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작 월튼이 전하는 말-Study to be quiet’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아이작 월튼은 47세였던 1640년 2월 5일에 전기작가(傳記作家)로서 최초의 작품인 존 던(John Donne)傳을 출간하면서부터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존 던(John Donne)

 

존 던과 아이작 월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얘기하면, 존 던(John Donne)은 1624년부터 1631년에 사망할 때까지 성 던스턴 서부교회(St Dunstan-in-the-West)의 교구신부(Rector)를 맡았고,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1629년부터 1644년까지 이 교회에서 간사를 비롯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존 던(John Donne)의 보좌신부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아이작의 조카 사라 그린젤(Sarah Grinsell)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기 때문에 존 던(John Donne)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며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그의 명저(名著)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편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이 퓨리턴(청교도 :Puritans)을 비난한다고 해서 퓨리터니즘(Puritanism) 자체를 비판한다고 판단해서는 그와 그의 작품해석에 있어서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유언장에서 밝힌 바가 있는 것으로 The Compleat Angler를 직접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다른 책들을 함께 봐야 하고,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영국내전의 역사를 비롯하여 휘그주의와 토리주의 같은 역사관 및 영어의 고어표현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작 월튼이 비판했던 것은 퓨리턴(청교도 :Puritans)들의 타협하지 못하는 편협함과 독선적인 사고, 평화와 질서가 아닌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것이었으며 그는 퓨리턴의 사상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기조차 했다.

이와 함께 역사에 대한 아이작 월튼의 사고는 역사가인 에드워드 하이드 백작(Edward Hyde, 1st Earl of Clarendon)과 같은 시각으로 영국내전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전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스코틀랜드 맹약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역사를 함께 돌아봐야 하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영국내전에 대한 아이작 월튼의 생각은 그의 저서 사랑과 진실(Love and Truth)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으며 그는 내전을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아이작 월튼은 대단히 관용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지성과 경험을 보탠 다음 형성된 냉철한 시각과 판단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검색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아이작 월튼의 초상화는 제이콥 휘스만스(Jacob Huysmans)가 그린 말년의 모습으로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 전시되어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① 스탠드 업 스타일의 창시자 마샤 비어만(Marsha Bierman)

세계의 유명 낚시인① 스탠드 업 스타일의 창시자 마샤 비어만(Marsha Bierman)

세계의 유명 낚시인들에 대한 첫 번째 글의 주인공으로 여성 낚시인 마샤 비어만(Marsha Bierman)을 선택한 이유는 남자들도 힘들다는 “빅게임 피싱”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마샤가 그녀의 남편 레니 비어만(Lenny Bierman)과 함께 개발한 스탠드 업 스타일의 낚시, 다른 말로는 숏 로드 피싱(short rod fishing)이라고 하는 기술은 1986년에 알려진 것인데 이전까지의 빅게임 피싱이 대부분 파이팅 체어라고 하는 의자에 앉아서 7피트 이상의 로드를 사용하던 것을 5피트의 로드를 이용하여 선 채로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녀가 숏 로드 피싱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남편과 함께 방문한 플로리다에서 친구가 운영하는 낚시가게에 들렀을 때 짧은 낚싯대로 한 번 도전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친구의 추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신장 167cm, 체중 56kg의 다소 작은 체격인 마샤는 처음으로 시도한 숏 로드 게임에서 100kg을 넘는 물고기를 낚았다고 합니다만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해본 기술에 매료된 마샤는 짐벌과 하네스(벨트)를 연결한 장비를 허리에 두르고 낚시를 하는 방법을 보다 실용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연구와 시도를 거듭했으며 장비의 개발과 함께 기술의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없던 낚시의 기술이었기에 근육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서 부터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릴의 사용과 드랙의 설정 등 세부적인 점까지 연구를 한 결과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샤는 바하마에서 열리는 새치를 잡는 빌 피시 챔피언십(Billfish Championship)에서 우승한 최초의 여성이지만 원래부터 낚시를 즐겨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는 미식축구 구단 뉴욕자이언츠와 마이애미 돌핀스에서 코치와 매니저로 활동을 했으며 낚시에 입문한 것은 1975년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짧게 묶은 머리와 검게 탄 피부, 그리고 즐겨 입는 반바지가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마샤 비어만이 개발한 숏 로드 테크닉(short rod technique)이라고 하는 스탠드 업 스타일의 기술이 개발되고부터 여성낚시인들도 빅게임 피싱에 도전하는 사례가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녀가 잡은 새치(Billfish)는 2,500 마리가 넘으며 그 가운데 300여 마리는 대서양녹새치와 백새치인데 이들 모두에게 꼬리표를 달아 돌려보냈다는 점이 그녀를 “세계의 유명낚시인”을 소개하는 글의 첫 번째로 택한 또 다른 이유입니다.

플라이 낚시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하디(Hardy)

플라이 낚시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하디(Hardy)

낚시광장에 있는 “명작과 괴작-현대 스피닝릴의 시조 Hardy Altex”란 글을 보면 하디사에서 만든 알텍스(Altex)를 롤스로이스(Rolls-Royce)에 견주고 있다.

하디사의 알텍스(Altex) 릴이 자동차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Rolls-Royce)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제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런 표현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롤스로이스와 하디(Hardy)사의 역사적 관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시대에 탄생한 하디(Hardy)사의 역사와 제품에 대한 얘기는 수십 편의 글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플라이 낚시용품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는 동기를 한 번 알아볼까 한다.

세계적으로 플라이 낚시용품의 3대 메이커라고 부르는 곳으로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영국의 하디(Hardy)사와 오비스(Orvis) 및 레오나드(Leonard)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창업년도로는 찰스 오비스(Charles F. Orvis)가 1856년에 설립한 오비스(Orvis)가 가장 빠르고 그 다음이 하이람 루이스 레너드(Hiram Lewis Leonard)가 1869년에 창업한 HL Leonard Rod Company가 두 번째이며 1872년에 창업한 하디(Hardy)사가 가장 늦게 창업을 했다.

영국 노섬벌랜드주에 위치한 소도시인 안윅(Alnwick)에서 창업한 것이 1872년의 일이었지만 처음에는 총포상으로 출발을 하였고 낚시용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1874년의 일이었으니 하디사의 역사는 정확하게는 1874년부터라고 봐야 옳을 것 같다.

어제 올린 글 “대나무 낚싯대의 역사와 여성 낚시인”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하디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낚싯대를 생산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국에는 하디(Hardy)사가 창업하기 32년 전에 설립된 팔로우(Farlows)라는 업체도 있었지만 하디(Hardy)사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된 요인으로는 왕실납품업체로 지정되었던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팔라코나(Palakona)

 

팔라코나(Palakona)로 이름붙인 하디사의 대나무 낚싯대는 1883년과 1884년에 영국에서 열렸던 ‘국제 낚시박람회(International Fisheries Exhibition)’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수상했고 이어서 1885년에는 낚시대회에서 월등한 기록으로 우승을 하게 되면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에는 조지 5세가 황태자이던 시절 하디사의 용품을 사용했던 것을 계기로 1910년에 영국의 왕실에 납품하는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왕실에 납품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디사가 릴을 생산한 것은 1880년에 출시했던 모델 ‘Bronzed Gunmetal’이 최초였는데 스피닝 릴의 생산은 1932년에 영국의 알프레드 홀덴 일링워스(Alfred Holden Illingworth)가 출원한 스피닝 릴의 특허가 만료됨과 함께 출시했던 모델인 알텍스(Altex No.1)가 처음이었다.

 

물론 알텍스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풀 베일 암(full bail arm)의 특허를 취득하여 경쟁업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성능을 단독으로 보유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낚시용품계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8년 하디사는 사업을 확장하여 항공부품산업에도 진출을 하게 되는데 불안과 긴장이 고조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1940년부터 하디사가 군수산업에 참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군용항공기의 엔진을 제작하고 있던 롤스로이스사의 하청업체로 지정되어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품질이 우수하면서도 납기를 단축시키는 성과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재건에 힘을 쏟은 하디사는 1951년에 런던에 다시 매장을 열 수 있게 되는데 그 때 롤스로이스사가 그간의 양사의 관계를 고려하여 카탈로그의 촬영을 했던 곳이 바로 새롭게 문을 연 하디사의 런던매장 앞이었으며 그곳에서 롤스로이스사로부터 “하디는 낚시분야의 롤스로이스고,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분야의 하디”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물론 이 말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이었기에 이때부터 하디사는 낚시업계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지닌 하디사의 이야기는 2008년에 “하디의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 of Mr. Hardy)”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플라이 낚시 분야의 이야기이긴 해도 앞으로 계속해서 하디사를 비롯한 세계 3대 메이커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술해보고 싶다.

 

스코틀랜드의 낚시에 남아 있는 귀족문화 길리(GILLIE)

스코틀랜드의 낚시에 남아 있는 귀족문화 길리(GILLIE)

주로 송어와 연어를 잡는 낚시로 알려진 플라이낚시(Fly Fishing)가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1899년에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가 출판한 책 “Fly Fishing”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라이낚시의 대중화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낚시용 릴의 역사”에서도 다룬 내용이지만 조어대전(The Complete Angler)에서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이 휠(Wheel)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연어낚시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휠(릴)을 사용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처럼 이전에는 문헌의 설명으로만 존재하던 릴에 대한 내용이 그림으로 처음 기록되었던 것은 1662년 로버트 베나블(Robert Venables)이 쓴 “The Experienced Angler”이란 책입니다.

 

그 후 영국에서는 기어를 사용하는 릴이 영국최초의 릴 제작사인 오네시무스 유스턴손(Onesimus Ustonson)이란 회사에 의해서 1750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플라이낚시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부터 플라이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존 데니스(John Dennys)가 쓴 “낚시의 비밀(The Secrets of Angling)”의 각주에 “cast a fly”라거나 “fish with an artificial fly”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 면적의 1/3을 차지하는 스코틀랜드는 긴 해안선과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로크(Loch)라고 하는 3만개가 넘는 호수와 수많은 강들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낚시문화가 발전해왔습니다.

 

스코틀랜드는 특히 대서양연어가 풍부한데 일반적인 연어의 치어가 강에서 1년을 잔류하는 것에 비해 스코틀랜드의 북부에서는 4년까지도 생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연어가 풍부하다보니 예로부터 귀족들이 연어낚시를 즐겼으며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연어낚시에는 길리(Gille 또는 Ghillie)라고 하는 귀족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오늘은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연어낚시를 할 수 있는 기간은 지방마다 그리고 강에 따라서 금어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1월 1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거의 1년 내내 연어낚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어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요일의 연어낚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민물낚시는 공공장소에서 하는 것과 사유지에서 낚시를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특히 사유지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에는 규정이 까다롭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격하게 제한되는데 이런 곳에는 길리(GILLIE)라고 하는 일종의 가이드들이 있습니다.

 

 

길리(GILLIE)라고 하는 스코틀랜드 표현은 귀족들이 소유하는 땅에서 밀렵을 감시하고 농작물을 해치는 동물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던 말이었는데 주로 강에서 낚시를 할 때 동행하여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길리(GILLIE)란 말은 현재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사냥과 낚시를 할 때 가이드를 하는 것을 뜻하며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라 어떻게 플라이낚시를 하는지, 어떤 플라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어떤 포인트가 좋은지 등등에 관한 전반적인 조언과 잡은 고기를 요리하는 일도 함께 하는 그야말로 전문안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길리(GILLIE)는 주로 낚시클럽들이 관리하는 강이나 낚시터를 소유하고 있는 호텔 등에 소속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잉어도 이빨이 있다는 걸 아세요?

잉어도 이빨이 있다는 걸 아세요?

잉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이 지정한 세계 100대 악성 침입 외래종(100 of the World’s Worst Invasive Alien Species)에 포함된 8종의 어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배스는 나쁘고 잉어는 착하다?”란 글을 통해 알아보았다.

도심 주변의 하천에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잉어의 모습은 생물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는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알려지고 있으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잉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한 것 같다.

잉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규정하고 있는 악성 침입 외래종의 공통적인 특징인 저서생물과 수생식물을 마구 먹어치우는 습성 및 저온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크기가 60㎝를 넘으면 천적이 거의 없어진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잉어를 잡을 때 사용하는 미끼는 대부분이 식물성인 경우가 많지만 루어로도 잡은 경험이 있으며 지렁이는 물론이고 우렁이에도 잡힐 정도로 잉어는 잡식성이다.

잉어는 조개나 우렁이와 같이 딱딱한 먹이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 것일까? 그대로 삼켜서 소화시키는 것일까?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잉어는 위가 없어서 먹은 것이 바로 장으로 가기 때문에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므로 계속해서 먹이활동을 하는 대식성을 가진 어종이다. 게다가 잡식성이다 보니 잉어가 서식하는 곳에는 다른 어종이 많지 않은데 대표적인 사례는 글의 말미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잉어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먹이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잉어가 먹는 먹잇감 중에는 잠자리나 반딧불이 또는 그 유충도 있으며 일본에서는 반딧불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잉어의 방류를 금하고 있는 지자체도 있다.

ホタルの生息環境を守ってます

반딧불이의 서식환경을 지키고 있습니다.

鯉など放流しないで下さい

잉어 등을 방류하지 마십시오.

일본에서는 2003년에 번진 잉어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잉어가 집단폐사한 이후부터 다른 하천이나 연못에서 잡은 잉어와 잉어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발생한 양식장에서 양식된 잉어 및 PCR검사에 의해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았음이 입증되지 않은 잉어를 방류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는 지역이 증가하고 있다.

잉어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줄여서 KHV(Koi Herpes Virus)라고도 하는데 Koi가 일본어로 잉어를 뜻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KHV 때문이 아니라 생태계를 보호하고 생물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잉어의 방류를 금지하는 곳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잉어의 이빨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다 보니 잉어는 다슬기나 우렁이를 통째 삼킬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생각과는 달리 잉어는 우렁이나 다슬기의 껍질을 쪼개서 삼키는데 그때 사용하는 잉어의 이빨이 바로 인두치(咽頭齒: pharyngeal tooth)라고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목(=인두: 咽頭)에 있는 이빨(齒)이라는 뜻의 인두치는 잉어의 아가미에 붙어있으며 인간의 어금니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이용하여 조개류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린 다음 삼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젠, 위에서 말했던 잉어가 서식하는 곳에는 다른 어종이 많지 않다는 대표적인 사례를 알아보기로 하자.

2009년 10월 31일, 일본 나고야에 있는 하야토저수지(隼人池: はやといけ)에서는 서식하는 생물을 확인하고, 외래생물을 제거하며 환경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저수지의 물을 빼는 행사가 열렸다.

모두 490㎏의 외래어종을 제거한 이날의 결과를 보면 잉어로 인한 생물다양성의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저수지의 물을 빼고 잡은 물고기 가운데 일본의 재래종은 110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외래어종이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송어와 배스는 합해서 74㎏ 남짓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잉어였다고 한다.

이 결과에 대해서 일본 환경성 산하의 생물다양성지구전략기획실(生物多様性地球戦略企画室)의 담당자는 “애착이 가는 물고기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잉어밖에는 없는 저수지가 될 것이다.”라고 인터뷰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이바라키현에 있는 가스미가우라(霞ヶ浦) 호에서 실시한 실험에 의하면 잉어가 감아올리는 진흙에 의해 햇빛이 잘 들지 않게 되고, 배설물로 인해 플랑크톤이 증가함으로써 수질이 바뀌게 되어 결국에는 식물이 자라기 어렵게 됨으로써 생태계가 파괴되어 복원하기 어렵게 변한다고 한다.

잡식성에다 대식가인 잉어는 수초는 물론 다른 물고기의 알이나 유충을 비롯하여 단단한 인두치(咽頭齒: pharyngeal tooth)로는 갑각류는 물론 딱딱한 조개류의 껍질도 쪼개어 먹음으로써 생태계에 미치는 문제가 심각하므로 이제부터라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웨일 폴(Whale fall): 죽어서도 자연을 지키는 고래의 일생

웨일 폴(Whale fall): 죽어서도 자연을 지키는 고래의 일생

직역하면 고래의 추락이라고 할 수 있는 웨일 폴(Whale fall)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고래의 죽음으로 인해서 해저로 가라앉은 고래의 사체 주위에 생물체가 몰려들어 서식하는 군집현상을 일컫는 말인데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고래 사체의 생물군집이라고 할 수 있는 fauna of whale fall로 표현된다.

지방이 많은 고래가 죽게 되면 지방조직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메탄이나 황화수소와 같은 물질이 생성되는데 이런 고래의 사체 주변에 독자적인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을 가리켜 포너 오브 웨일 폴(fauna of whale fall), 줄여서 웨일 폴(Whale fall)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웨일 폴(Whale fall)은 1987년 캘리포니아의 산타 카탈리나 만(Gulf of Santa Catalina)의 수심 1,240m 지점에서 하와이대학교의 크레이그 스미스(Craig Smith)가 이끄는 탐사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이래 2022년까지 세계의 바다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2019년 심해탐사선 노틸러스호의 무인탐사정인 헤라클레스는 몬터레이만의 심해에서 길이 4~5m 정도 되는 고래의 사체를 발견하였고 며칠 전 영상의 리마스터판을 유튜브에 공개하였는데 고래의 사체에 남은 부드러운 조직을 문어나 심해어가 천천히 먹어치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래의 사체 주위와 뼈에는 박테리아와 수중생물들이 자라면서 마치 아바타의 수중 씬을 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심해에 서식하는 생물체들은 언제나 먹잇감이 부족하지만 고래의 죽음은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여건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을 이 영상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영상을 공개한 곳은 EVNautilus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조직인 The Ocean Exploration Trust로써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의 주소는 노틸러스라이브(nautiluslive.org)이며 이번에 공개한 리마스터링 영상은 아래와 같다.

한편 탐사팀은 2019년에 발견한 웨일 폴을 2020년 10월에 다시 찾아가 봤는데 고래의 조직들이 모두 사라지고 갈비뼈와 척추는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밍크고래의 사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관련 영상 또한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며 아래의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

 

 

서해안 낚시의 대표어종인 우럭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

서해안 낚시의 대표어종인 우럭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은 것들

가끔씩 찾는, 시화방조제나 석문방조제를 비롯한 서해안 낚시의 대표어종은 원투낚시나 찌낚시, 루어낚시를 막론하고 우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대상어종은 우럭이라고 하더라도 가장 잘 잡히는 것은 망둥어겠지만 말입니다.

우럭 루어낚시를 하는 분들의 의견을 종합해보면 대체로 폴링 바이트와 리액션 바이트가 많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럭의 시축(視軸)이 정면보다는 약간 위를 향하고 있는 생태적인 특징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다음 기회에 어류의 시야(視野)와 시축(視軸)을 좀 더 상세히 다루겠지만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물고기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양안시야의 한가운데를 시축(視軸)이라고 하는데, 이 시축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지, 아니면 위나 아래를 향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물고기의 주된 유영층이 나뉘어집니다.

시축이 아래를 향하는 대표적인 어종으로는 원투낚시의 인기어종이기도 한 감성돔을 비롯한 참돔 등의 돔류이며, 시축이 위를 향하고 있는 어종으로는 농어와 전갱이가 대표적이고, 정면을 향하고 있는 어종으로는 방어, 쏨뱅이, 벵에돔 등이 있습니다.

우럭의 시축과 관련해서는 현재 일본 긴키대학의 수산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토리사와 신스케(鳥澤眞介)씨가 홋카이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의 논문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우럭의 시축은 정면보다는 약간 상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럭의 학명을 보면 쎄바스테스 쉴레겔리 힐겐도르프(Sebastes schlegelii Hilgendorf, 1880)라고 되어있는데 이것은 독일인 프란츠 힐겐도르프(Franz Hilgendorf)와 헤르만 쉴레겔(Hermann Schlegel)의 이름을 딴 것입니다.

이 중에서 헤르만 쉴레겔은 일본에서는 일본동물지(日本動物誌)란 제목으로 편찬된 파우나 야포니카(Fauna Japonica)란 논문을 썼고, 힐겐도르프는 1873년에 도일(渡日)하여 1876년까지 지금의 도쿄대학 의학부의 전신이 도쿄의학교에서 동식물학을 강의했던 인물입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우럭은 난태생으로 갓 태어난 새끼는 10일~15일이 지나면 1cm의 크기로 성장하고 한 달이 지나면 2cm 정도로 성장합니다.

 

이렇게 부화한 우럭의 치어는 각종 기관이나 단체에서 방류사업의 일환으로 대량으로 방류하기도 하는데, 수산연구원 등에서 방류할 때는 방류 이후의 변화를 관찰하기 위한 표식을 합니다.

어류의 표식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으나 대량으로 방류하는 경우에는 비용문제로 대부분 배지느러미의 가시를 제거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제부턴 낚시로 잡은 우럭의 배지느러미에 가시가 다 있는지를 살펴보시는 것도 또 다른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은 블로그를 통해서 한 번 소개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크기가 작은 우럭의 경우에는 볼락과 구별하기 어렵다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는데, 구분하는 방법은 우럭의 눈물뼈를 보면 됩니다.

한자로 누골(淚骨)이라고 표기하는 눈물뼈는 볼락에는 없고 우럭에만 있는 특징으로, 특히 조피볼락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눈 밑에 3~4개의 뾰족하게 튀어나온 뼈가 있습니다.

 

 

초보자들은 물고기를 잡았을 때, 가급적이면 맨손으로 잡지 않는 것이 좋은데, 바닷고기는 대체로 가시가 뾰족하여 위험하지만 등지느러미를 제외한 배나 항문에 가까운 쪽의 지느러미에는 쉽게 보이지 않는 숨은 가시들도 있으므로 주의하여 다루는 것이 좋습니다.

 

 

한편, 우럭의 경우에도 등지느러미는 지금 보시는 것처럼 아주 날카로운 가시를 쉽게 발견할 수 있어서 주의하게 되지만 잘 보이지 않는 배지느러미와 뒷지느러미에도 날카로운 가시가 있으므로 주의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럭은 영역의식이 강한 물고기여서 우럭을 잡은 포인트에서는 다시 우럭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알아두시기 바랍니다.

크기가 큰 우럭일수록 자신의 세력권에 대한 의식이 강해 루어의 리액션 바이트에 무의식적으로 강한 반응을 보이는 습성을 가지고 있으며, 큰 녀석을 잡았다고 하면 그 뒤에는 다른 녀석이 그 지역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아 활동하므로 대물 우럭이 잡힌 포인트에서는 다시 대물을 잡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영역의식이 강한 큰 개체의 주변에는 세력권을 가질 수 없는 소위 말하는 잔챙이들도 많다는 것도 알아두시면 조과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은 우럭을 잡았던 것은 입파도에 있는 청춘좌대가 오픈하고 얼마지 않아 방문하여 팔이 아플 정도로 잡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주변에 나눔하고 저는 딱 3마리만 포를 떠서 가져갔답니다.

요리할 때 바지락은 언제 넣는 것이 좋을까?

요리할 때 바지락은 언제 넣는 것이 좋을까?

제철을 맞은 바지락을 재료로 요리를 할 때 언제 바지락을 넣어야 할지를 궁금해하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다.

냉동 바지락은 ‘바지락을 해감하는 방법과 올바른 보관법’에서 강조한 것처럼 무조건 센 불로 단번에 가열하여야 하고, 자연해동 시키거나 천천히 가열하면 바지락이 열리지 않으므로 된장국을 끓일 때도 바지락은 반드시 물이 끓고 난 뒤에 넣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냉동 바지락이 아닌 경우에는 언제 넣어야 맛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을까?

 

요리할 때 바지락을 언제 넣는지는 바지락을 어떻게 먹을 것인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물이 끓기 전에 넣을 수도 있고, 끓은 후에 넣을 수도 있다.

즉 맛있는 국물을 만들 것인지, 아니면 바지락 살을 맛있게 먹기 위함인지에 따라 넣는 타이밍이 달라지는데 맛있는 국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넣고 끓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바지락 살을 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물이 끓은 후에 바지락을 넣는 것이 좋은데 아래에서 보는 것처럼 처음부터 넣고 끓인 바지락과 물이 끓은 뒤에 넣은 바지락의 살은 확연하게 차이를 보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맛있는 육수나, 국물을 만들려면 처음부터 바지락을 넣고 끓인 것이 더 진한 맛을 낸다.

 

마지막으로 바지락 살을 쉽게 발라 먹기 위해서는 끓는 물에 넣기 전에 해감을 마친 바지락을 한쪽 방향으로 1분 정도 저어주면 바지락의 관자를 깔끔하게 제거하고 먹을 수가 있으며 이 방법은 바지락뿐만 아니라 다른 조개류에도 적용할 수 있다.(그러나 100%는 아니다.)

 

때론 낚시에도 수학이 필요하다.

때론 낚시에도 수학이 필요하다.

수학(數學)이 과연 우리의 실생활에서 얼마나 필요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들도 많다는 것을 최근 활동하고 있는 동호회를 통해 다시 한 번 알게 되었다.

그래서 오늘은 재미없고 딱딱하게만 생각되는 수학이 우리 낚시인들에게도 때론 필요하다는 것을 한 번 얘기해볼까 한다.

선상낚시를 하거나 자연식좌대에서 내림낚시를 하는 경우에 조류가 빠르면 봉돌이 흐른다고들 하지만 과연 봉돌은 얼마나 흐르는 것인지를 수치로 정형화하여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저 조류가 빨라 봉돌이 엄청 흐른다고만 할뿐~

그런데 이럴 때 수학을 활용하여 조류가 초속 몇 m로 흐르는지와 사용하는 채비의 무게를 공학계산기에 입력하면 사용하는 낚싯줄(라인)의 규격에 따라 어느 정도의 각도로 흐를지를 계산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상참돔낚시에서 사용하는 타이라바 채비나 내림낚시에서 사용하는 카고채비는 특히 조류의 세기에 따른 영향을 많이 받는 것 중의 하나인데 채비를 무겁게 사용할수록, 사용하는 라인의 호수를 줄일수록 조류의 영향을 덜 받는다는 것을 수학을 통해 증명할 수 있다.

아마도 선상낚시를 하거나 수상좌대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이상적으로 채비가 안착하는 모습은 수직으로 똑바로 내려가는 것이겠지만 현실은 조류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아래와 같이 수직이 아닌 상태로 바닥에 안착하게 된다.

 

이와 같이 조류에 의해서 채비가 흐르는 경우를 분석해보면 라인을 수면으로 끌어올리려는 모멘트와 채비(봉돌)의 중력(정확히는 부력을 뺀 값)이 수직으로 작용하는 힘의 모멘트에 의해서 낚싯줄의 각도가 결정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기에 더하여 많이 사용하는 합사(PE)에 걸리는 모멘트를 수면에서 채비(봉돌)까지의 모멘트를 합사에 작용하는 중력은 가볍기 때문에 계산을 조금이라도 단순화하기 위해 제외하고 적분하여 계산해보자.

우선 카고낚시의 채비나 선상낚시에서 사용하는 봉돌의 종단면적을 S, 액체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물체가 유체에서 받는 항력을 나타내는 항력계수를 Cd₁이라고 하고 그 값을 작은 원통형의 항력계수인 0.67 정도라고 하자.

그리고 그 다음으로 고려하여야 하는 유체밀도를 p(1024㎏/㎥), 유체속도(m/sec)를 U라고 하면 조류에 의한 채비(봉돌)의 항력계수는 아래의 수식으로 계산할 수 있다.

그리고 합사(PE)의 모멘트는 아래의 공식에 의해 수면에서 채비(봉돌)까지의 모멘트를 적분하여 계산하면 된다.

한편 합사(PE)의 항력계수인 Cd₂(이 부분의 계산은 설명이 복잡하고 길기 때문에 생략)는 1.2가 되는데 이상의 계산에 의해 식을 산출하면

그런데 이런 복잡한 수식으로는 조류의 빠르기에 따라 수중에서 채비(봉돌)가 얼마나 흐르는지, 그리고 그 각도는 얼마나 되는지를 알기가 어렵다. 따라서 이해하기 쉽게 상기의 수식을 사용하여 구한 수중에서 조류의 흐름에 의한 채비의 각도를 그래프로 나타내면 아래와 같다.

우리는 이 수식으로 구한 그래프에서 봉돌(채비)이 무거울수록, 사용하는 라인의 직경이 작을수록 조류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는 평범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조류의 속도가 1노트(51㎝/sec)인 경우

조류의 속도가 2노트(102㎝/sec)인 경우

물론 이런 계산은 할 필요가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루어를 제작하는 업체에서는 이런 사항까지도 계산하여 설계에 반영하고 있으며, 수중의 모습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낚시를 하더라도 이제는 상기의 그래프에서 나오는 채비(봉돌)의 각도를 기억하고 있으면 낚시할 때 조금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수학은 이처럼 실생활에서도 얼마든지 요긴하게 쓸 수가 있는 것이다^^

낚싯바늘에 의한 부상원인과 예방책

낚싯바늘에 의한 부상원인과 예방책

지난번에는 무단으로 폐기하는 낚싯바늘에 의한 동물들의 피해와 올바른 낚싯바늘의 폐기방법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오늘은 낚싯바늘에 의하여 사람이 부상을 당하게 되는 원인과 예방법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낚싯바늘에 의하여 사고가 일어나는 경우를 열거하자면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 캐스팅 할 때 후방주시를 하지 못해 뒤에 있는 사람에게 날아가 박히는 경우

▶ 낚싯대를 강하게 세울 때 자신을 향해 날아와 박히는 경우

▶ 밑걸림이나 혹은 주변의 지형지물에 걸린 경우를 탈피하기 위해 낚싯대를 당길 때 자신을 향해 날아와 박히는 경우

▶ 낚싯바늘이 붙어있는 물고기를 손으로 들 때 물고기가 날뛰어 손가락에 박히는 경우

▶ 잡힌 물고기에 걸린 바늘을 뺄 때 손가락에 박히는 경우

▶ 다른 사람과 라인이 얽혔을 때 풀면서 손에 박히는 경우

▶ 동행이 있을 경우 채비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이 로드를 들어 바늘이 박히는 경우

▶ 바늘과 라인을 연결할 때 손가락에 박히는 경우

▶ 맨발로 낚시터를 걸을 때 발에 박히는 경우

이외에도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대체적으로 상기의 원인으로 인해서 낚싯바늘로 인한 부상을 당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낚싯바늘로 인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안전을 확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낚시터는 위험한 장소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낚시를 하지 않는 분들도 주변에 낚싯대를 던지고 있다거나 낚시를 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항상 주의하여야 할 것입니다.

낚싯대를 캐스팅할 때 일어나는 사고는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주의를 소홀히 하여 일어나는 것입니다만 캐스팅하는 사람은 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습니다.

캐스팅으로 인한 사고의 피해자가 되지 않도록 하려면 낚시터에서는 낚시꾼의 움직임을 잘보고 캐스팅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을 멀리하여야 합니다. 캐스팅하는 사람이 반드시 안전을 확인할 것이라는 과신은 금물입니다.

그리고 낚시인의 경우에는 캐스팅 할 때는 반드시 주위에 사람이 있는 지를 확인 후 하여야 하며 만일 사람이 지나가고 있으면 그 사람이 지나갈 때까지 캐스팅하지 않도록 하고 혹시라도 지나가려던 사람이 캐스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으면 “먼저 지나가십시오”라는 의사표시를 하여 안전을 확보하여야 합니다.

낚시인들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지만 여름 휴가철이 시작되면 낚시터를 맨발로 걷거나 아니면 얇은 샌들 등을 신고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낚시터에는 함부로 버려진 낚싯바늘이 곳곳에 떨어져 있을 수 있으며 떨어져 있는 바늘은 찾기가 힘듭니다.

따라서 낚시터를 맨발로 걷는 것은 아주 위험한 행동이므로 금하여야 하며 갯벌과 밑걸림이 많은 해저면에도 버려진 낚싯바늘과 장치 등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안전에 유의하여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낚시는 위험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낚시는 물고기를 낚을 수도 있지만 반면에 물고기를 해칠 수도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물고기를 해칠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을 해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낚싯바늘이 박혔다면 무리하게 빼려고 하면 오히려 상처가 악화될 수 있으므로 즉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도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자력으로 바늘을 빼는 방법은 올바른 대처법이 아닙니다.​

 

낚싯바늘에 의한 부상을 최소화하려면 상기의 부상이 생기는 원인을 숙지하고 본인의 액션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생각하며 낚시를 하는 것이 필요하며 특히 잡힌 물고기에서 바늘을 제거할 때는 도구를 이용하도록 하며 낚싯바늘로 인한 부상을 당했을 경우를 대비하여 응급처치약을 상비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제 장마도 끝나고 본격적인 더위와 함께 휴가철이 시작되면 강과 바다를 찾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며 이와 함께 낚시터도 사람들로 붐빌 것입니다.

특히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의 경우 사고를 당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낚시를 하는 우리 낚시인들이 더욱 안전에 유의하여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