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꾸미 금어기간을 일본과 비교해본다.

주꾸미 금어기간을 일본과 비교해본다.

2019년 4월 2일자 YTN뉴스에는 “어판장 바닥 가득한 알 벤 주꾸미 논란…자원회복 위해 현실적인 금어기 재조정 필요”라는 제목의 기사가 났는데 기사의 본문 중에는 “최근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낚시인들이 뿔났다. 다름 아니라 어판장 바닥에 가득한 알 밴 주꾸미 때문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미지 출처 YTN

그러나 이 기사를 본 나를 포함한 낚시인들이 뿔이 난 이유를 상세히 설명하는 내용이 있었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

이 같은 아쉬움을 가지는 이유는 어민들이 이렇게 많은 알밴 주꾸미를 잡았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족자원의 보호라는 기본취지와는 동떨어진 정책을 펼치고 있는 정부당국에 대한 불만 때문이다.

나는 몇 번에 걸쳐 해양수산부에서 시행하고 있는 관련정책들에 대하여 쓴 소리를 해왔다. 하지만 정부의 시책에 흠결이 있다고 하더라도 국민 된 의무로 충실히 이행해야 한다는 뜻과 함께 산란기를 맞은 어종들은 자연으로 돌려보내자는 말도 실천과 함께 해오고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바다에 개체수가 많지 않은 무늬오징어에 대해서는 낚시로 잡은 무늬오징어가 암컷인지 수컷인지를 구별하는 방법에서부터 암컷이라면 산란을 마쳤는지 마치지 않았는지를 구별하는 법과 놓아줄 때도 가급적 피해가 적게 온전히 자연으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한 글도 작성한 적이 있었다.

이번에 YTN의 기사를 보았고,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금어기간의 재조정에 대한 청원이 올라와 있는 것을 보았기에 주꾸미의 금어기간에 대하여 다시 몇 자 의견을 적어보려 한다.

주꾸미의 금어기와 관련해서는 우리 낚시인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기에, 법과 제도라는 울타리 안에서 규범을 준수하는 국민의 의무를 다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주꾸미의 어획량 감소가 낚시인들의 가을철 낚시로 인한 영향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어민들이 봄철 산란기의 주꾸미를 남획하는 것에 의한 영향이 더 큰가에 대한 조사와 검증된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정책을 시행해달라는 것이 대다수 낚시인들의 공통된 의견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민들과는 달리 일치된 의사표시를 행동으로 옮길 수 없는 낚시인들은 입법과 정책을 펼치는 국회와 행정당국에 그 힘을 전달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쉽게 얘기해서 선거철에 표심으로 표출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해양수산정책에는 추산하기로 700만 이상이라는 낚시인들의 의견은 전혀 반영되지 않고 있기에 나는 이런 점을 지적하여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서도 낚시협회의 승격은 이뤄져야 합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지만 우리 정부에서는 2016년에 “낚시는 체육인지 여부가 불투명하고, 경기력 발전성 및 정회원 단체로 인정의 필요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으로 국민생활체육회의 정회원이던 낚시단체를 준회원으로 강등시키는 시대와 세계의 흐름과는 역행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낚시인들로 인한 주꾸미 자원의 고갈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에 대한 연구조사와 그 결과에 대한 발표도 없이 일방적으로 시행하는 정부의 정책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과, 어민들이 산란을 하려는 암컷 주꾸미의 습성을 이용하여 소라껍질로 잡는 것은 더 많은 자원을 고갈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관련당국에서는 모르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여기서 나는 산란기의 주꾸미를 잡는 것이 자원고갈의 더 큰 원인인지? 아니면 가을철 낚시인들이 잡는 것이 더 큰 원인인지를 일본의 사례와 한 번 비교해봄으로써 생각해볼까 한다.

그러나 일본의 정책을 홍보하거나 더 좋다는 것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경우와 한 번 비교해보고 판단하자는 뜻으로 글을 작성함을 밝혀둔다.

일본에서 자원고갈로 인해 법적인 규제는 아니어도 자율적으로 규제하고 있는 대표적인 어종으로는 무늬오징어가 있다.

사면이 바다인 일본은 어족자원이 우리나라에 비해서는 풍부하지만 개체수가 감소하는 어종들이 증가하고 있고 특히 무늬오징어의 자원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인공산란장을 설치하는 등의 노력을 정부에서 지원하고 있는데 이것이 가장 먼저 우리나라와 다른 점이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예를 들면 일본 효고현에는 일본에서 7번째로 큰 ‘아와지섬(淡路島)’이 있는데 무늬오징어의 포인트로 유명한 곳이다. 그런데 이 섬에 있는 ‘미나미아와지시(南あわじ市)’에서는 해마다 7월 1일부터 9월 20일까지를, ‘스모토시(洲本市)’와 ‘아와지시(淡路市)’에서는 7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를 무늬오징어의 낚시를 금지하는 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금지가 아니고 협조(お願い)를 구하고 있으며 연중 내내 ‘몸통의 크기(외투장의 길이)’가 15㎝ 미만인 것들도 놓아줄 것을 부탁하고 있다.

왜 이곳에서는 7월부터 9월까지를 무늬오징어 낚시를 금지하는 협조를 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7월이 금어기인 갈치도 낚싯배는 잡으면 안 되고 어선은 조업을 해도 되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낚시인들이 무늬오징어를 잡는 것만 규제하고 있을까?

우선 아와지섬에서는 무늬오징어의 인공산란장을 바다에 설치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어민들이 소속된 어업협동조합과 각 시청의 수산과에서도 금어기간을 준수하려는 노력과 계도를 하고 있다는 점이 우리와는 크게 다른 점이다. 즉 우리와는 달리 어민들도 무늬오징어의 조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금어기간으로 지정한 기간도 가을철 어린 무늬오징어(참고: 무리를 이루어 생활하는 가을철 무늬오징어)를 잡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산란기의 암컷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우리나라와는 또 다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산란기의 무늬오징어는 산란을 위해 얕은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낚시로 잡히는 것들이 많아서 낚시인들의 자발적인 협조를 요청하고 있는 것인데 일본의 경우 지역에 따라 수온이 달라 무늬오징어의 산란기도 차이를 나타내지만 대략 4월~8월 사이가 가장 많고 특별히 오키나와에서는 10월~12월을 제외하고는 연중 내내 산란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이 말은 일본에서는 무늬오징어의 자원보호를 위해서는 가을철 어린 무늬오징어를 잡는 것보다도 산란을 마치지 않은 암컷을 잡지 않는 것이 자원보호에 더 효과가 크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무늬오징어와 주꾸미는 어떨까? 같은 연체동물 문에 속하지만 무늬오징어는 오징어과에 속하고 주꾸미는 문어과에 속하기 때문에 산란기의 암컷을 잡는 것보다 가을철 낚시로 잡는 것이 개체수 감소의 더 큰 원인일까?

그 판단은 이 글을 읽으실 분들께 맡기며 글을 마친다.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서도 낚시협회의 승격은 이뤄져야 합니다.

어족자원 보호를 위해서도 낚시협회의 승격은 이뤄져야 합니다.

낚시로 잡았다가 방류한 물고기가 다시 잡힐까?

그렇다면 그 물고기는 어디에서 잡혔을까?

또 얼마의 기간 만에 잡힌 것일까?

만일 잡혔다면 방류 후 몇 번이나 다시 포획된 것일까?

다시 포획된 물고기의 이동경로와 회유하는 반경은 얼마나 될까?

이러한 의문들로부터 시작되어 어족자원의 보호와 즐거운 낚시환경을 후대에게 물려주기 위한 움직임은 이웃나라인 일본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국제게임피시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and Fish Association)의 일본지부인 JGFA는 1985년부터 어족자원을 보호하기 위하여 잡은 물고기에 꼬리표를 달아 방류한 후 그 생태를 추적·조사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데 이 프로그램에서 기록된 최장기간에 다시 잡힌 물고기는 3,279일(약 9년) 만에 잡힌 농어로써, 다시 잡혔을 때의 크기가 53cm에서 87cm로 성장했었다고 합니다.

9년 만에 37cm을 성장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원의 보호를 위해서도 잡은 후 놓아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새삼 깨닫게 해주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렇게 자원을 보호하고 건전한 낚시문화를 조성하기 위하여 민간단체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시행하는 계몽활동이 활성화 되고 있는 일본에 비해서 한국에서는 2016년에 “낚시는 체육인지 여부가 불투명하고, 경기력 발전성 및 정회원 단체로 인정의 필요성이 부족하다’는 판단으로 국민생활체육회의 정회원이던 낚시단체를 준회원으로 강등시키는 일이 일어나는 등 시대와 세계의 흐름에는 역행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안타깝기만 합니다.

물론, 낚시인들의 자정노력으로 캐치 앤 릴리즈(Catch and Release)가 점차 확산되고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구심점을 통하여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쉽기만 합니다.

물론 어족자원의 보호뿐만 아니라 자연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쓰레기의 무단투기 등도 강력하게 제재되고 자제되어야 할 일임은 분명하지만 오늘은 어족자원의 보호를 위한 문제에만 집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상기에서 언급한 일본과 같은 일련의 활동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금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가장 중요한 조직과 시스템이 구비되어야만 하는데 아직도 국내의 수산행정과 낚시를 바라보는 관료들의 시선은 타율로 규제하려는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서 자율적인 활동의 전개가 제약받고 있다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습니다.

일본에서 시행하고 있는 어족자원 보호를 위한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① 잡아서 가져가는 마릿수를 자율적으로 제한하는 BAG LIMIT ② 캐치 앤 릴리즈(Catch and Release) ③ 태그 앤 릴리즈(TAG & RELEASE)를 통한 과학적인 추적과 조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먼저 BAG LIMIT를 살펴보면 이것은 이름 그대로 가방의 크기를 제한하는 것입니다. 일본도 한국과 같이 아직은 낚시의 면허제가 도입되지 않았기에 낚시로 잡는 물고기의 크기와 마릿수에 대한 규제들이 잘 지켜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인식하여 법률적인 크기의 제한뿐만 아니라 낚시인들 스스로가 잡아서 가져가는 마릿수도 지키자는 운동인 것이며 JGFA가 시행하고 있는 바다 어종의 권장기준을 간략히 알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어종
권장 크기
권장 마릿수
쥐놀래미
20cm 이상
5
가다랭이
3
잿방어
40cm 이상
2
감성돔
30cm 이상
1
만새기
1
농어
50cm 이하
1
갈치
5
부시리
40cm 이상
2
넙치
40cm 이상
2
참돔
40cm 이상
2
벵에돔
30cm 이상
1

 

두 번째 캐치 앤 릴리즈(Catch and Release)

이미 많은 낚시인들이 실천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작고한 IGFA의 회원이며 자연보호 운동가이기도 했던 리 울프(Lee Wulff)가 한 “대형 물고기는 너무도 소중한 것이어서 한 번 낚으면 끝이라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는 말에서 보듯이 본인에게 즐거움을 준 물고기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 감동과 희열을 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방류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또 하나의 나눔의 미학이 아닐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세 번째 태그 앤 릴리즈(TAG & RELEASE)

정부 산하기관에서 시행하는, 인식표를 달아 방류하는 사업은 상업적 가치가 높은 어종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는 제약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 역시도 이러한 제약 때문에 JGFA의 사업시행 초기에는 관계기관의 도움을 받았으나 이제는 독자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현재 85가지 어종에 16만 마리에 달하는 물고기에 인식표를 달아 방류하여 그 생태의 보호와 과학적인 자료의 축적을 위해 공헌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무엇보다 낚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필요한 일이지만 체계적인 관리와 지속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구심점이 필요하고 관에서 시행할 수 없는 상업성이 떨어지는 어종의 관찰과 보호를 위해서는 더욱 낚시인들의 자율적인 협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따라서 어족자원을 보호하고 환경을 지키기 위해서는 낚시협회의 승격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가수 김연자씨는 낚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가수 김연자씨는 낚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다.

10여 년 전, 웹서핑을 하던 도중, 일본의 연예인들 중에서 낚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명단에서 키무라 다쿠야 다음으로 나오는 김연자란 이름을 보고 놀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김연자씨가 낚시를 좋아한다고?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낚시를 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없는데…

그때부터 야후 재팬에서 폭풍검색을 했었으나 결과를 얻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갑자기 다시 궁금증이 생겨 검색을 한 결과, 가수 김연자씨는 낚시를 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오늘은 그와 관련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어로 김연자+낚시를 검색해보면 관련한 두 권의 책이 검색되는데, 두 권 모두 요시노 타카시(芳野隆)라는 사람이 쓴 것으로 작자는 1969년, 낚시인을 위한 숙박업소를 운영하기 시작하여 나중에 동일본 낚시민숙연합회의 특별상담역과 관광협회 이사를 역임하였으며, 지금 보시는 사진의 가운데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오늘 얘기에 등장하는 스포니치라는 신문은 1948년에 창간한 일본 최초의 스포츠 일간지로서 마이니치 신문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이며, 정식명칭은 스포츠닛뽄이지만 줄여서 스포니치라 부릅니다.

그 전에 먼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에서 발행된 책들을 읽을 때면 자주 느끼게 되는 일로,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몰라서 그러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사실관계가 잘못된 부분들을 버젓이 적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도 김연자씨와 관련한 부분은 틀린 곳들이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럼, 책에 나오는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1989년 김연자씨는 가수활동을 쉬고 있던 미야코 하루미가 프로듀싱한 암야행로를 발매하였고, 일본에서 첫 히트작이 되어 NHK의 홍백가합전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속사 사장으로부터 지면은 어디라도 좋으니 김연자씨를 어필해달라는 전화가 스포니치의 낚시 담당기자에게 왔다고 하는데, 기자와 그 사장은 친구사이였다.

기자는 “연자씨를 낚싯배에 태우고 갈치를 잡자”고 제안하였고, 이렇게 해서 김연자씨는 갈치낚싯배를 운영하고 있던 연합회 소속의 가나자와팔경 가모시타마루호에 승선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뱃멀미를 했고, 얼굴은 창백해져 있었다.

고육지책으로 기자가 낚아 올린 대형 갈치를 연자씨에게 들려 겨우 촬영할 수 있었다.

이 사진이 스포니치 낚시면에 ‘이것으로 백팀(홍백의)을 한칼에’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신문의 지면은 화려했고, 그로 인해 (작자가 운영하는) 낚시민숙의 인지도가 높아졌으며, 김연자씨는 인기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결국, 이 한 장의 연출된 사진으로 말미암아 김연자씨는 일본 최대의 낚시정보 사이트인 교넷(GyoNet)에 낚시를 좋아하는 연예인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고, 어떤 곳에서는 낚시를 좋아하는 여자 연예인 탑 5에 이름이 올라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김연자씨가 출연했던 1989년의 제40회 홍백가합전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사라질 수 있었던 일화가 있습니다.

NHK의 15대 회장이었던 島桂次(시마 케이지)는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홍백가합전을 폐지하고, 미국의 CNN에 대항할 수 있는 GNN을 일본에서 실시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1986년에 60% 밑으로 떨어진 시청률도 한몫했다고 합니다. 시청률 60%가 만족할만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기만 합니다.

그 대신에 시마 케이지 회장은 연말에 국제적인 아시아음악제를 하는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이런 회장의 심기를 헤아린 불쌍한 NHK의 연예부 담당 실무진들은 홍백가합전에 아시아의 스타들을 5명, 참가시키는 것으로 기획하게 되었고, 그 결과 홍콩의 알란 탐을 비롯하여 대한민국의 가수 4명이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라고 합니다.

1989년, 홍백가합전에 출연했던 대한민국의 가수는 오늘의 주인공인 김연자씨를 비롯하여, 패티 킴씨가 처음으로 출연하였고, 계은숙씨는 두 번째 출연을 하게 되었으며, 조용필씨는 3회 연속으로 출연하는 기록을 세웠고 1990년에는 4회 연속으로 참가한 기록을 세웠답니다.

김연자씨의 낚시와 관련한 일화가 실려 있는 또 다른 책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담겨 있는데, 김연자씨의 전 남편, 이름은 岡宏(오카 히로시)인데, 책에서는 岡本(오카모토)라고 적고 있다는 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날은 내륙 출신인 인기가수 김연자씨의 남편 오카모토씨도 타고 있었다.

오카씨는 연자씨가 처음으로 NHK의 홍백가합전 출연이 결정되었을 때, 스포니치의 ‘김연자 백팀을 한칼에’라는 기획기사를 위해 처음으로 바다낚시를 체험하였다.

이후, 낚시에 빠지게 되어 연자씨로부터 “남편을 물고기에게 빼앗겨 버렸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오카씨는 물고기를 먹는 것보다 단지 잡는 것이 좋다고 하지만, “연자가 광어의 지느러미살을 정말 좋아하니 열심히 해야지!”라며 진지함 그 자체였다.

두 번째 책에 나오는 내용을 보면 연자 누님께서는 광어 지느러미살을 좋아하신다고 한다.

 

누님, 혹시 입맛이 변하지 않으셨다면 자연산 잡으면 연락 한 번 드리겠습니다.

배신자로 낙인 찍혔던 낚시인

배신자로 낙인 찍혔던 낚시인

어제 포스팅한 “가수 김연자씨가 낚시를 좋아한다고?”란 글의 말미에서 일본의 유명한 여성 낚시인 ‘코지마 레이코(児島玲子)’에 대하여 잠깐 언급했었다.

일본 내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낚시인이라고 부르는데 이견이 없는 ‘코지마 레이코(児島玲子)’에게는 2014년부터 한동안 배신자란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그 이유는 10년 이상이나 후원관계를 맺어오던 시마노와 헤어져 2014년에 다이와의 필드테스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녀가 시마노에서 다이와로 옮겨야만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서 대중들은 그동안 ‘시마노 걸’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그녀가 다이와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배신자로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지마 레이코(児島玲子)’가 낚시와 인연을 맺게 된 동기는 연예계에서 활동을 하던 도중 1997년에 TV도쿄에서 제작하던 ‘낚시로망을 찾아서(釣り·ロマンを求めて)’란 프로에 출연하게 되면서부터이다.

TV도쿄의 ‘낚시로망을 찾아서’란 프로그램은 1989년에 첫 방송을 시작한 장수 프로로서 그녀는 3년 동안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본격적으로 낚시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2000년에 시마노사의 필드테스터가 되면서 ‘시마노 걸’이란 이미지를 쌓게 되는데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시마노가 ‘낚시로망을 찾아서’란 프로그램의 제작을 후원하던 스폰서업체였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자연스럽게 시마노와 인연을 맺고 관계를 이어왔던 ‘코지마 레이코(児島玲子)’가 2014년에 다이와로 적을 옮긴 가장 큰 이유 또한 그녀가 새롭게 출연하기로 되었던 방송의 후원업체가 다이와였기 때문이었다.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시마노가 후원하던 TV도쿄의 프로가 2010년에 폐지가 되면서 한동안 그녀는 고정 프로그램을 맡지 못하고 있던 차에 2014년부터 다이와가 후원하고 있던 TV오사카의 ‘THE 피싱’에 출연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마노가 아닌 다이와를 후원업체로 선택하게 된 것이었다.

그래도 시마노가 후원하던 방송이 폐지된 후에도 3년 동안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봐서는 ‘코지마 레이코(児島玲子)’로서는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리고 다이와가 후원하는 방송에 출연하게 되면서 시마노의 후원을 받고 있던 그녀가 시마노 제품을 방송에서 전혀 쓸 수 없었던 것도 그녀에겐 큰 부담감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란 추론은 충분히 현실성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그녀는 다이와의 필드테스터가 되기로 결정하지 않았을까?

 

물론 더 깊은 속사정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유만으로는 결코 그녀를 배신자로 낙인찍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함께 동호회 활동을 한다는 이유나 아니면 낚시관련 기업의 필드테스터라는 동질감을 가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다른 동호회나 다른 업체의 제품에 대하여 심하게 배척을 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무조건 잘못된 것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삼성전자매장에서 LG제품이 좋다고 하면 좋아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일임을 인정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배척이 때로는 맹목적인 이유로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는 것은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이보다 더 염려스러운 일은 시대의 변화에 따른 현상이라고는 해도 낚시용품의 소비에 있어서 주변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밴드왜건 효과(bandwagon effect)’를 넘어 SNS의 발달과 함께 인기인이나 유명인들이 사용하는 제품과 같은 것을 사용하려는 수요가 발생하는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가 만연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위해 하는 취미생활이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힐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취미생활로 만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뒤처지지 않으려고 하는 ‘고립공포감(FOMO, Fear of Missing Out)’도 여기저기서 쉽게 목격할 수 있는데 동질감으로 비롯된 사회생활의 관계가 공포감으로 변하게 되는 것은 집단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을 보일 때면 어김없이 겪게 되는 일이란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좋으면 왜 좋은지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순 없다고 해도 최소한 좋다 나쁘다를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그저 “우리 것이 좋다.”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옳다.”로 귀결시켜 타사제품이나 경쟁사의 제품은 맹목적으로 폄하하는 일들은 이젠 사라지기를 바란다.

그러한 생각과 행동은 또 다른 우리사회의 ‘배신자 코지마 레이코(児島玲子)’를 만드는 일일 것이며 배신자로 낙인찍히는 사람은 어느 순간 당신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세계최초의 낚시학교, 하디사의 캐스팅 스쿨

세계최초의 낚시학교, 하디사의 캐스팅 스쿨

현대 낚시의 기초가 되는 이론이 책으로 처음 편찬된 것은 지난 번 “대나무 낚싯대의 역사와 여성 낚시인”이란 글에서 알아보았던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라는 수녀가 1496년에 펴낸 ‘성 알반스의 책(The Boke of St. Albans)’이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낚시의 바이블이라고도 하는 아이작 월튼의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이 편찬된 1653년보다 40년 전인 1613년에 문호 셰익스피어와 함께 낚시를 즐겼던 존 데니스(John Dennys)란 사람이 쓴 ‘낚시의 비밀(The Secrets of Angling)’이란 책도 있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서양의 낚시문화는 전통을 이어오면서 발전한 것에 비해 유교사상에 의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계급으로 인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낚시문화가 전통의 맥을 이어오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유럽과 이후에 미국에서도 성행하는 낚시의 장르는 우리에게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도 할 수 있는 플라이낚시가 주류를 이루는데, 현대 낚시문화에 한 획을 그었다고도 평가받는 ‘플라이 낚시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하디(Hardy)’라는 회사가 세운 캐스팅 스쿨이 공식적으로는 최초의 낚시학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지금은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는 플라이낚시를 지도하는 학교들(사설학원이란 표현이 더 적합하겠지만)이 많이 운영되고 있고, 일본에는 2년 과정의 전문 낚시학교가 있으며 국내에서도 일부 프로들에 의해 낚시학교가 운영되기도 하지만 단발성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 일본에는 낚시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하디사가 낚시학교의 문을 연 것은 1920년대 런던에 있던 매장에서 운영했던 것이라고 기록으로 남아있으나 정확한 시기는 불명이다.

학교가 문을 열 때 낚시를 지도하던 강사는 틸턴(Tilton)이란 사람이었고 1930년대 후반에 와서 플라이낚시계의 거장이라 알려져 있는 에드워즈(T.L. Edwards)가 강사로 부임하게 되는데 에드워즈는 1960년에 펴낸 ‘앵글러즈 캐스팅(The angler’s cast)’이란 책으로도 유명하다.

또한 에드워즈(T.L. Edwards)는 각종 낚시대회를 석권한 챔피언이기도 했지만 벤츠 자동차를 만드는 다임러의 테스트 드라이버이기도 했는데, 다방면에 뛰어난 소질을 보인 에드워즈(T.L. Edwards)의 부임과 함께 체계적인 수업이 진행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수업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디사의 낚시학교는 실전에 나서기 전에는 골프장에서 기본적인 이론과 실기를 배웠고 실제 연습은 영국 내의 전용낚시터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곳 중의 하나가 바로 시온공원(syon park)이었다.

강의를 하는 에드워즈(T.L. Edwards)

그 뒤 캐스팅 스쿨은 조니 로건(Johnnie Logan)이 맡아서 1981년까지 운영하다가 스코틀랜드 출신의 앤드류 머레이(Andrew Murray)에게 물려주었고 현재는 하디사의 프로팀(Hardy Pro Team)에 소속된 사람들이 그 맥을 이어나가고는 있으나 이전처럼 그리 활발하지는 않고 프로팀 소속의 인원들이 저마다의 피싱스쿨을 운영하고 있다.

하디사 프로팀의 구성원 중에는 우리나라에 와서 강의를 한 사람도 있는데 2010년 2월에 내한하여 충주호에서 플라이낚시 강의를 한 이안 고든(Ian Gordon)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낚시를 즐기는 인구의 증가와 함께 환경문제가 대두됨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고기를 잘 잡느냐 하는 것보다 낚시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익힐 수 있는 이런 기관은 우리나라에도 도입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글을 마친다.

일본에는 낚시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일본에는 낚시를 가르치는 학교가 있다.

낚시와 관련한 방송프로들이 인기를 끌면서 국내 낚시인구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지만 이웃 일본에서는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낚시와 관련한 산업분야는 우리보다 규모가 훨씬 크고,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프로앵글러들의 숫자도 훨씬 많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인이 보유한 낚시 관련 세계신기록”이란 포스팅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제게임피싱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Fish Association)에서 인정하는 세계기록을 보유한 우리나라 사람은 단 2명에 불과한데 비해서 일본은 100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계기록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본에서는 낚시를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원이 있는데 오늘은 일본의 낚시학교(피싱 칼리지라고 함)에서는 과연 어떤 것들을 가르치는지를 한 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낚시를 전문으로 교육하는 학교는 교육을 기반으로 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일본증시 자스닥에 상장되어 있는 휴먼홀딩스(Human Holdings Co., Ltd.)란 회사로서 오늘 종가기준으로 한화로 200억 정도의 시가총액을 가지고 있으며 휴먼 홀딩스(Human Holdings Co., Ltd.)의 자회사 중의 하나인 휴먼 아카데미(Human Academy Co., Ltd.)란 회사가 바로 낚시를 교육하는 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휴먼 아카데미(Human Academy Co., Ltd.)는 우리로 치면 직업전문학원 정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낚시뿐만 아니라 미용, 애니메이션, 성우, 메이크업 등 다양한 분야의 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1998년부터 2017년까지 졸업한 학생들 모두가 100% 취업을 할 정도로 산학연계가 잘 되어 있다고 합니다.

아울러 휴먼 아카데미에 진학하는 학생들은 금융기관을 통한 학자금대출은 물론이고 일본정부에서 운영하는 학자금대출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하며, 입학금과 수강료를 납부한다고 해서 모두 입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고등학교장의 추천이나 성적평균이 3.0 이상이어야만 지원할 수 있으며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통과하고 최종적으로 면접에 합격하여야만 입학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낚시과정에 입학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교장의 추천이나 성적이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낚시학교의 강사진은 일본낚시협의회 부회장인 히토시게 라이타씨를 비롯하여 각종 대회에서 다수의 우승기록을 가지고 있는 낚시인 및 이론과 실전에 정통한 전문가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낚시학교의 학과는 각종대회의 입상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토너먼트프로 전공과 루어를 제작하는 학과, 낚시 가이드를 양성하는 학과, 낚시와 환경을 교육하는 학과 및 낚시와 관련한 경영을 지도하는 학과 등 모두 8개의 학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수하는 과목을 살펴보면, 자연환경에 대한 것과 낚시문화, 낚시관련 법률을 모두 공통으로 이수해야 하고 1년차에는 주로 어류학이나 기상학과 같은 이론을 학과 별로 배우게 되고 2년차에는 실습위주의 과목으로 교육이 진행된다고 합니다.

현재는 오사카를 비롯하여 후쿠오카와 후지카와구치코의 세 곳에 낚시학교가 있는데 낚시와 관련하여 집중적으로 교육하는 과목 중에는 배스낚시개론Ⅰ·Ⅱ, 배스낚시의 기술Ⅰ·Ⅱ와 낚시장비의 전반에 대한 과정이 눈에 띕니다.

프로낚시인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은 토너먼트프로 학과나 낚시가이드 학과를 지망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낚시가이드 학과를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은 일본에서도 낚시대회의 상금만으로는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초보자들에게 낚시를 지도하면서 비용을 충당하려는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낚시를 스포츠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 정부에서는 이런 학교가 생긴다고 해도 학자금대출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낚시인들의 뜻과 마음이 모여서 작지만 전문교육기관이 우리나라에서도 생긴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자세한 내용은 휴먼 아카데미의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냉동생선은 절반만 해동하고 조리하는 것이 좋아요.

냉동생선은 절반만 해동하고 조리하는 것이 좋아요.

‘냉동 생선의 올바른 해동 방법’과 ‘식품의 냉동보관과 해동에 관한 기본지식’이란 글을 통해서 냉동 생선을 해동할 때는 수분(해동액: 解凍液)을 얼마나 적게 나오도록 해동하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오늘은 냉동 생선이나 냉동육류가 녹으면서 나오는 해동액(解凍液)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고 이어서 냉동 생선을 조리할 때 반만 해동시키고 조리하는 것이 왜 좋은지를 알아보도록 할까 한다.

냉동식품을 해동할 때 나오는 수분은 냉동과 해동하는 과정에서 손상된 조직이 보습력을 잃어버려 수분이 흘러나오는 것으로 식품의 종류와 냉동과 해동하는 방법에 따라 그 양이 달라진다.

생선이나 육류를 해동할 때 나오는 물기는 식품 내의 근육세포의 단백질이 변성된 것인데 이처럼 변성된 단백질은 근육섬유의 수분을 재흡수하는 능력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재흡수되지 못한 수분이 영양분과 함께 흘러나오게 되어 맛과 식감이 저하되는 것이다.

생선이나 육류의 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식품의 냉동보관과 해동에 관한 기본지식”에서 언급했던 것과 같이 효소반응이 일어나기 쉬운 온도대(10℃~40℃)를 빠르게 통과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생선과 육류를 비교하면 육류에 비해 조직에 포함된 수분이 더 많은 생선이 더 쉽게 수분(해동액: 解凍液)이 나오고 단백질도 더 쉽게 변성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생선을 끓일 때 하얗게 거품이 끼는 것을 제거해주곤 하는데 바로 이것이 끓는 물에 의해서 녹은 생선의 단백질이 응고하면서 생기는 것이다.

이 단백질은 알부민이라고 하는 것으로 계란의 흰자를 가열하면 하얗게 변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오보트랜스스페린을 함유하고 있는 계란의 흰자는 60℃ 부근에서 흰색으로 변하지만 생선은 이보다 높은 80℃ 부근에서 알부민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냉동생선은 얼마나 해동한 다음 요리하는 것이 좋을까? 이것은 흰살생선인지 붉은살생선인지에 따라서도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뼈를 제거한 것인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특히 뼈를 제거한 생선은 완전히 해동하게 되면 살이 짓물러지기 때문에 구울 때 뒤집는 과정에서 살이 으스러질 수도 있어서 절반만 해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많은 주부님들이 궁금해하는 내용으로 생선을 구울 때 불조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는 것이 있는데 숯이나 장작을 이용하여 생선을 굽던 옛날에는 센 불로 멀리서 굽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도구가 발달한 지금은 생선구이는 무조건 중불에서 굽는 것이 좋다.

그리고 “생선을 달라붙지 않도록 굽는 방법”에서 얘기한 것처럼 식초를 이용하여 구우면 달라붙는 것을 줄일 수 있고, 마지막에는 약불로 익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히 불을 끄고 잔열을 이용하여 수분을 날려주면 맛있는 생선구이를 만들 수가 있다.

그럼, 냉동 생선을 해동하는 정도에 따라서 구웠을 때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100% 해동한 생선은 중심부의 온도가 0℃, 절반 정도를 해동한 것은 중심부의 온도가 –3℃~-4℃ 정도로, 흘러나오는 수분의 양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시중에서 판매하는 냉동 만새기를 절반만 해동한 다음 각각 중불과 약불로 굽고, 다른 하나는 해동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불로 구웠을 때를 비교해보면 아래와 같다.

즉, 절반만 해동한 생선을 약불로 굽는 것보다는 냉동상태로 중불에서 굽는 것이 더 적은 수분이 배출되고, 가장 좋은 방법은 절반해동한 것을 중불에서 굽는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일 마지막으로 중요한 사항은 1마리를 통째로 굽든, 토막생선을 굽든 뒤집는 횟수는 적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가장 좋은 것은 한 번만 뒤집어 굽는다는 것이다.

생선구이가 익숙하지 않을 때에는 타지 않을까 걱정되어 여러 번 뒤집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내부의 기름기도 빠져버리고 살점도 푸석해지기 때문에 피해야 하는 사항이란 점을 꼭 기억해두고 활용하시기를 바라며~~~~~~~.

식품의 냉동보관과 해동에 관한 기본지식

식품의 냉동보관과 해동에 관한 기본지식

제철을 맞은 주꾸미는 경기도의 노력으로 가까운 시화방조제에서도 조과를 올리기가 예전보다 수월해졌는데데 어쨌거나 주꾸미는 낚시인들의 가정에 있는 냉장고의 냉동실에 보관된 어종 중에서 단연코 1등을 차지하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정용 냉장고에서 냉동하여 보관한 주꾸미는 상업용으로 급속냉동한 것과는 맛에서 큰 차이를 보이는데 오늘은 가정에서 식품을 냉동하거나 해동할 때 알아두면 도움이 될만한 기본적인 사항들을 알아볼까 한다.

모 언론사에서, 얼리면 맛이 좋아지는 식품이란 내용의 기사를 작성하면서 그 예로 두부를 소개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가정용 냉장고를 이용하여 냉동시키면 맛은 유지되지 않고 저하된다는 것을 알리지 않은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된다.

두부를 잘라 가정용 냉장고에서 냉동한 것(좌)과 상업용 급속냉동고를 이용하여 냉동한 것(우)을 비교하면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천천히 냉동된 두부는 조직이 거칠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가정용 냉장고의 냉동실은 완만냉동이 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상업용 급속냉동기와 같이 급속동결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즉 가정용 냉장고의 냉동실은 냉동식품의 보관에 적합한 것이지 식품을 냉동시키는 것이 본래의 기능은 아니란 것이다.

급속냉동이란, 냉동시키려는 식품이 얼기 시작하면서 얼음의 결정이 가장 커지는 –1℃~-5℃의 온도대를 30분 이내에 통과하는 것을 뜻하는 말로 가정용 냉장고의 냉동실 온도가 –18℃에 맞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상온의 식품을 냉동실에 넣어 그 온도가 –5℃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위에서 본 두부의 사진처럼 조직이 거칠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가정용 냉장고로는 급속동결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으로 이런 이유로 ‘바지락의 올바른 보관방법’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금속제의 트레이를 사용하는 것이 냉동을 조금이라도 촉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지만 호일을 감싸서 냉동시키는 것은 효과가 있기는 커녕 저해시킨다는 것을 알아두는 것이 좋다.

식품의 온도가 –1℃~-5℃ 정도가 되면 함유하고 있는 수분의 80% 이상이 얼음으로 바뀌게 되는데 급속냉동을 시키면 얼음결정의 크기가 작아지기 때문에 식품의 조직손상을 억제할 수 있어서 좋은 품질을 유지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가정에서 냉동하게 되면 완만냉동되기 때문에 얼음의 결정이 커져서 식품에 손상을 가하기 때문에 품질의 저하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정에서 식품을 냉동보관하기 위해서는 가능하면 빨리 냉동시킬 수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는 냉동시킨 식품을 해동하는 방법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냉동했던 식품을 해동할 때도 냉동할 때와 마찬가지로 얼음의 결정이 가장 크게 형성되는 –5℃~-1℃ 사이를 얼마나 빨리 통과시키는가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점이다.

그러나 해동할 때는 이것과 함께 고려해야 하는 사항으로 효소반응이 일어나기 쉬운 온도대(10℃~40℃)를 빠르게 통과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즉 식품이 변질되기 쉬운 온도대 또한 재빨리 통과시키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냉동 생선의 올바른 해동 방법”이란 제목의 글에서 전자레인지를 이용하여 해동하는 것은 비추이고 가장 좋은 해동방법은 요리하기 전에 미리 냉장실로 옮겨서 해동하는 것이지만, 시간이 없을 때에는 얼음물에 담가 해동하는 것을 추천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부나 한천, 곤약과 같은 젤 타입의 식품은 냉장실에서 해동시키면 식감이 나빠지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보리멸을 뜻하는 일본어 키스(キス)의 어원

보리멸을 뜻하는 일본어 키스(キス)의 어원

보리멸을 잡았다는 소식이 이곳저곳에서 들려오는 것을 보니 이제 여름으로 접어들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블로그를 통해서 낚시용어의 무분별한 일본어 사용을 자제하고 대체 가능한 낚시용품은 국산품을 사용하자는 주장을 계속해오고 있다. 그리고 일본제품을 사용하더라도 무슨 뜻인지, 어떤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정도는 알고 사용하자고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여러 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일본의 합사 이자나스(IZANAS)는 일본의 건국신화에 나오는 창조신 부부인 남편 이자나기(伊邪那伎)와 아내인 이자나미(伊邪那美)에서 따온 것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 의미를 알고서도 쓰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오늘은 국내 원투낚시인들 사이에도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 키스○○○이란 제품명에 붙어있는 보리멸을 뜻하는 일본어 키스(キス)의 어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 한자 표기에 따른 어원

보리멸을 뜻하는 일본어의 한자표기는 서두어(鼠頭魚)와 희(鱚)가 있는데, 서두어(鼠頭魚)는 머리 모양이 쥐를 닮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리고 물고기 어(魚) 변에 기쁠 희(喜)를 붙여서 만든 희(鱚)는 행운을 가져다주는 물고기라고 해서 사용되는 것으로 특히 도쿠가와(徳川) 가문에서는 아침식사에 필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또한 생직(生直)이란 한자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솔직하고 꾸밈이 없다는 뜻의 일본어 키스구(きすぐ: 生直)에서 구(グ) 대신에 물고기를 뜻하는 어미(魚尾)인 고(ゴ)를 붙여서 사용하다가 어미를 뗀 키스(きす)로 불리게 되었는데, 키스고(キスゴ)란 표현은 지금도 간사이와 시코쿠 및 큐슈 등지에서 사용되고 있다.

■ 일본의 낚시인들이 사용하는 표현

지역별로 보리멸을 부르는 표현이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현재는 키스(キス)가 통용되고 있다. 그러나 일본 낚시인들은 큰 것은 히지타타키(ヒジタタキ), 작은 것은 삔기스(ピンギス)라고 부른다.

 

삔기스(ピンギス)는 몇 cm까지로 한다는 규정은 없으나, 대체적으로 10~12cm 미만의 것들은 잡아도 놓아주어야 한다는 것이 일본 낚시인들 사이에 형성되어있는 공감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 미만의 것들을 잡아서 먹는 사람도 많다.

루어용 훅(Hook)의 대명사, 머스타드(Mustad) 훅의 역사

루어용 훅(Hook)의 대명사, 머스타드(Mustad) 훅의 역사

머스타드(Mustard)는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겨자씨로 만들어 매운맛을 내는 샐러드드레싱이지만 스펠링에서 r이 빠진 머스타드(Mustad)는 낚시에서 사용되는 훅(Hook)을 의미한다.(정확히는 훅이 아닌 제조회사의 이름이다.)

루어낚시에 사용하는 훅의 대명사와도 같은 머스타드(Mustad) 훅을 만드는 회사의 역사를 살펴보면 부족한 기술과 산업인프라 속에서 얼마나 끊임없이 노력과 혁신을 거듭하였으며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단순히 루어낚시용 훅을 만드는 낚시용품 회사로만 알고 지나칠 수도 있는 이 회사는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6륜 자동차를 만들기도 했으며 마가린 제조공장을 비롯하여 금속, 식품, 기계공업 등 다각화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거나 했던 가족회사다.

19세기 초 노르웨이는 산업 인프라의 태부족으로 인해 필요한 대부분의 물품들을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조달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는데 이런 시대적인 상황에서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낚시용 바늘을 만드는 회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 140㎞ 떨어진 예비크(Gjøvik)에서 농장을 운영하고 있던 한스 스키켈스타트(Hans Skikkelstad)라는 사람이 1832년에 설립한 회사가 머스타드 훅의 출발점이라고들 하지만 정확하게는 3대 사장을 맡았던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1832년 한스 스키켈스타트(Hans Skikkelstad)가 세운 회사는 못과 말굽에 사용하는 편자 등의 소형 금속제품을 제작하고 있었는데 편자를 자동으로 생산하는 기계를 개발하면서 경쟁력을 확보하게 됨으로써 유럽 각국으로의 수출을 통해 사업이 급속하게 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방경찰로 재직하고 있던 한스 스키켈스타트의 사위인 올레 머스타드(Ole Mustad)가 회사를 인수하면서 회사명을 이전의 ‘Brusveen Spigerog Staltradfabrikk’에서 ‘O. Mustad’로 변경하였는데 그의 아들인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가 합류하면서부터 이름을 ‘오 머스타드 앤드 선(O. Mustad & Søn)’으로 바꾸게 된다.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

올레 머스타드(Ole Mustad)가 경영하던 회사는 예비크(Gjøvik)의 지역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고 이에 따라 회사는 기존의 소형 철물과 금속제품의 생산에서 업종을 다각화하기 시작했으며 그 중의 하나로는 그로부터 100년이 넘게 운영하였던 버터산업 분야가 있다.

1905년의 머스타드 마가린 광고

그러나 제3대 사장인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가 회사를 이끌던 시기는 1873년대부터 시작되어 1890년대까지 장기에 걸쳐 유럽 여러 나라와 미국을 휩쓴 심각한 불경기인 대불황(Great Depression)의 시기였고 이때 돌파구를 찾고자 했던 분야가 바로 낚싯바늘의 제조였다.

이를 두고 머스타드의 후세들은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의 뛰어난 선견지명 덕분이었다고들 말하지만 다소 과장된 측면은 있어도 지금의 삼성전자가 있기에는 반도체를 주력사업으로 선정한 이건희란 인물이 있었던 것과 같이 지금의 머스타드 훅이 있기까지에는 한스 머스타드란 사람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한스 머스타드 외에 마티아스 톱(Mathias Topp)이란 인물을 빼놓고는 머스타드 훅(Mustad Hook)을 이야기할 수는 없다.

정확한 연도를 알지는 못하지만 1860년대에 입사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티아스 톱(Mathias Topp)은 이전까지 모두 수작업으로 생산하던 낚싯바늘을 자동으로 생산하는 기계를 개발하였는데 그때가 1877년이었다.

한쪽으로 와이어를 집어넣으면 반대쪽에서 낚싯바늘이 만들어져 나오는 기계를 개발하면서 경쟁업체들의 모방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청사진을 암호화하고 기계의 위치를 비밀에 부치는 등 극도로 보안의 유지에 힘을 기울였다.

마티아스 톱(Mathias Topp)과 그가 개발한 기계

그러나 마티아스 톱(Mathias Topp)이 개발한 낚싯바늘 제조기계는 세밀한 부분의 기술이 필요하였고 이 기계의 사업성과 발전가능성을 확신했던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는 헤인즈 헨리(Haynes Henry)를 비롯하여 영국으로부터 많은 기술자들을 영입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낚싯바늘의 최대소비자들이었던 어부들은 보수적인 경향이 강해 이전까지 사용하던 낚싯바늘을 쉽게 바꾸기를 꺼렸지만 더 낮은 가격에 더 좋은 품질의 제품이란 사실은 그들도 끝까지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에 더하여 회사의 직원들은 전세계를 발로 누비며 어떤 낚싯바늘을 사용하고 있는지를 조사하면서 샘플을 수집하였는데 당시 전세계에서 6만 개 이상의 낚싯바늘을 수집하여 생산에 참고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1950년대에 이르러서는 전세계 생산량의 50%를 머스타드 훅이 차지하게 되었으며 사업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는 제품의 포토폴리오에만 105,000개의 제품이 수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예비크(Gjøvik) 소재의 머스타드 공장의 모습

머스타드 일가를 제외하고 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을 꼽으라면 단연코 마티아스 톱(Mathias Topp)이란 인물임은 맞지만 그가 만든 낚싯바늘을 제조하던 기계도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 사장이 없었더라면 크게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유럽에 대불황이 휩쓸던 시기, 한스 머스타드(Hans Mustad)는 유럽 전역에서 300개 이상의 경쟁업체들을 인수하였고, 1920년대 중반에는 13개국에서 8천여 명의 근로자를 고용하는 수준으로 성장하여 전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머스타드 훅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머스타드 훅은 6대 사장인 한스 홀스 머스타드(Hans Holth Mustad)에 의해 낚싯바늘 사업이 매각되었는데 당시에는 퓨어피싱이나 라팔라에서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나 실제로는 노르웨이의 투자회사인 뵈레 노르트하임 라르센(Børre Nordheim-Larsen)에 인수가 되었고 그 뒤인 2017년에는 북유럽의 사모펀드인 베르다네 캐피털(Verdane Capital)에 인수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1877년 10월 16일에 예비크(Gjøvik)에서 처음으로 생산을 시작한 머스타드 훅은 1972년에 싱가포르에 공장을 설립하면서 한때 1,400여 명에 이르렀던 예비크(Gjøvik)의 근로자들은 감소하기 시작하였고 뵈레 노르트하임 라르센(Børre Nordheim-Larsen)에 인수된 이후인 2011년 12월에는 18명만이 남게 되었다.

그리고 2014년에는 35대의 나머지 기계가 중국공장으로 이전되면서 예비크(Gjøvik)에는 이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몇 대의 기계만 남게 되었다.(사진은 예비크(Gjøvik)에서 생산된 마지막 제품을 들고 있는 근로자들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