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어대전 번역본 유감(遺憾)

조어대전 번역본 유감(遺憾)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이 쓴 ‘The Complete Angler’는 국내에서 조어대전(釣魚大全)이란 제목으로 2014년에 작고하신 안동림 교수님과 이재룡씨가 번역한 2권의 책이 출판되었었습니다.

두 분의 번역본을 감히 평가할 수는 없지만 아쉬운 부분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사실이고 특히 이재룡씨의 번역본에는 미흡한 부분이 많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과연 어떤 판본을 번역한 것인지 의구심마저 들게 만듭니다.

안동림 교수님의 번역본은 일본어판을 다시 번역한 것으로 일본판은 아마도 아이작 월턴이 많은 수정을 가한 5판을 번역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이재룡씨의 번역본은 5판을 번역한 것이라면 너무 빠진 부분이 많고 다른 판본을 번역한 것이라면 없어야 할 내용들이 많이 있다는 이상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00이다’를 ‘00이 아니다’로 번역하는 등의 오류가 많고 문맥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점도 단점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수달을 사냥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서 아쉽다고 번역해야 할 “I am sorry that there are no more otter-killers”를 “유감이지만 저는 더 이상의 수달 사냥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로 번역하는 형편없는 수준의 번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를 예로 들면, 뒤의 문장까지 읽은 다음, 금어기간은 언제(몇 월)을 말하는 겁니까?로 번역해야 할 “Why, Sir, what be those that you call the Fence-months?”를 “선생은 왜 산란기 때 그들이 무엇을 한다고 하십니까?”는 웃픈 수준의 번역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니라 두 분의 번역본에서는 물고기와 수초(水草)에 대한 번역을 잘못한 부분들이 자주 발견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부들로 해석해야 하는 것을 막대기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들 수 있으며 일부는 통째 빠진 상태로 번역이 되어있는 부분도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두 분의 번역본에는‘ 호색한이었던 솔로몬이 회개하고 아가(雅歌)라는 사랑가를 지었는데 이것이 이치에 맞다면 모세와 예언자 아모스도 어부였다고 봐야 한다.’고 공통적으로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원본에 있는 ‘in which he says his beloved had eyes like the fish-pools of Heshbon.’를 빠뜨리고 번역한 것이며 특히 이재룡씨의 번역본에 많은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원본에 빠진 부분을 포함하여 구성하면 “회개하기 전의 솔로몬은 호색한이었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난 뒤로는 하느님과 교회 사이의 영적인 대화를 노래한 구약성경의 아가(雅歌: Song of Songs)를 지었는데 그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의 눈은 헤스본의 연못 같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치에 맞다면 욥기를 작성한 모세와 예언자 아모스도 어부였다고 보는 것이 합당할 것입니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뒤의 내뇽을 모두 읽더라도 쉽게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아이작 월턴이 지나치게 낚시를 옹호하려던 생각이 바탕에 깔려있던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구약성경의 아가에 나오는 ‘Your eyes are the pools of Heshbon by the gate of Bath Rabbim(그대의 두 눈은 헤스본의 밧 라삠 성문 가에 있는 못)’이라는 표현을 아이작은 연못에 사는 물고기를 닮은 눈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고 있다고 보면 그 뒤의 문맥이 순리에 맞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00년도 훨씬 이전에 출판된 책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일부 잘못된 원작의 내용은 수정하지 않고 번역하는 것은 옳다고 생각되지만 이재룡씨의 번역본처럼 오류가 많고 누락된 부분이 많은 책은 유감스럽다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줄리아나 버너스 수녀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줄리아나 버너스 수녀

블로그를 통해서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는 ‘성 알반스의 책(The Boke of St. Albans)’을 펴낸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라는 수녀에 대해서는 아이작 월튼에 관한 연재를 함에 있어서 조금 더 자세한 소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유럽에서 낚시와 관련한 가장 오래된 책이 바로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가 쓴 ‘성 알반스의 책(The Boke of St. Albans)’ 재판(再版)에 수록된 ‘Treasyse of Fysshynge With an Angle’이다.

중세영어와 사투리 표현이 섞여 있는 이 책은 국내엔 번역본이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낚시에 관한 내용은 23페이지에 불과해서 조금만 열심히 노력하면 완벽하지는 않아도 소개할 수 있는 정도의 해석을 끝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예를 들면 무더운 날씨라는 뜻의 표현이 ‘swoly hote weder’라고 되어 있는 등 다소 난해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현재 인터넷에서 구할 수 있는 서지학 영인본(facsimile)은 낚시에 관한 내용이 없는 1486년의 초판(初版)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낚시에 관한 내용을 보려면 ‘Treasyse of Fysshynge With an Angle’를 검색해야만 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책과 지은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영국인들은 의외로 많지 않으며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 수녀가 생활했던 소프웰 수녀원(Sopwell Nunnery)은 폐허가 되었기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처럼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지니는 책과 지은이에 대하여 알고 있는 영국인들은 의외로 많지 않으며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 수녀가 생활했던 소프웰 수녀원(Sopwell Nunnery)은 폐허가 되었기에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세인트 알반스(St. Albans)는 런던에서 기차나 자동차로 30분~1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는 도시로, 언덕 위에는 유명한 세인트 알반스 대성당(The Cathedral & Abbey Church of Saint Alban)이 있고 그 앞을 베르 강(River Ver)이 흐르고 있으며 그 앞쪽에 소프웰 수녀원(Sopwell Nunnery)이 자리잡고 있었다.

세인트 알반스 대성당

줄리아나 수녀는 책에서 사냥, 매사냥, 덫을 놓아 잡는 새사냥과 낚시를 비교하면서 그 중의 최고가 낚시라고 설파하고 있는데, 설령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들꽃의 향기를 맡으며 편안한 산책을 했다는 것만으로 적어도 건강에는 도움이 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낚싯대와 바늘 등 도구를 만드는 방법과 낚시하는 방법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는데, 아이작 월튼의 ‘The Complete Angler’ 또한 이런 포맷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여성으로써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만 했던 수녀원의 생활에서 재의 수요일부터 시작하는 46일간의 사순절 동안처럼 금식을 하는 기간에는 물고기가 유일한 수녀님들의 단백질원이었을 것이므로 어쩌면 남성들보다 낚시를 자주할 수 있는 바탕을 지니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금욕기간에 육식(肉食)을 하지 않는 풍습은 계속해서 이어져 아이작 월튼이 살던 엘리자베스 1세 때에는 금요일을 물고기의 날(Fish Day)로 지정하고 이를 어길 시에는 3파운드의 벌금 또는 3개월의 징역형에 처한다고 법으로 정하기까지 하였다.

아이작 월튼에 대한 연재가 마무리되면 이어서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 수녀가 쓴 ‘성 알반스의 책(The Boke of St. Albans)’ 재판(再版)에 수록된 ‘Treasyse of Fysshynge With an Angle’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기로 약속하면서 주말의 포스팅을 마친다.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낚시를 글로 배우기는 어렵다.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낚시를 글로 배우기는 어렵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유럽에서 ‘The Complete Angler’가 출판된 것은 스웨덴, 덴마크, 핀란드 등에서는 1940년대에 와서야 출판되었고 프랑스에서는 1964년이 되어서야 출판되어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에 작고하신 우당(愚堂) 안동림 교수가 번역한 것이 1980년에 출판되었었다.

아이작 월튼이 쓴, 독자들에게 드리는 글 중에는 책을 통해 낚시를 배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유명한 펜싱선수였던 조지 헤일(George Hale)이 쓴 책과 비교하여 말하는 내용이 있다.

아주 뛰어난 펜서(fencer)였던 조지 헤일(George Hale)은 1614년에 ‘The Private School of Defence’란 책을 발표하여 이를 통해 펜싱을 가르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런 그의 노력은 주위의 냉소를 받고 말았는데 그 책에는 유용한 내용들이 아주 많음에도 불구하고 냉소를 받았던 것은, 원문에서 Art로 표현하고 있는 예(藝) 또는 도(道)라고 번역할 수 있는 것은 글이 아니라 행동(연습)으로만 배울 수 있다고 믿는 당시의 사회상 때문이라고 아이작 월튼은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아이작 월튼이 또 강조하는 것은, 자신은 책을 통해 낚시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할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지만 대부분의 낚시인들이 지나치고 있는 방법(정보)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히고 있다.

‘The Complete Angler’을 새롭게 재해석하여 번역해보려는 내게 아이작 월튼이 소개하는 물고기들을 인두치(咽頭齒)의 유무에 따라 분류를 해보는 것도 의의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처브나 바벨, 잉어와 같은 물고기는 인두치가 있고, 번역이 조금 아쉽게 생각되는 부분인 곤들매기로 번역되어 있는 파이크(Pike)와 농어로 번역되어 있는 퍼치(Perch)는 인두치가 없는 어종이기 때문에 이에 따른 해석을 곁들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원문의 내용 중에는 저녁 식사용으로 두 시간 가까이나 낚시를 해도 입질조차 없자, 제자가 스승에게 참새를 잡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스승은 “낚시란 때론 참을 줄도 알아야 하며, 참지 못하고선 좋은 낚시꾼이 될 수 없다.”고 대답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빙그레 미소가 번지는 것을 피하지 못했는데, 초보 조사나 낚시에 문외한인 지인들과 함께 낚시를 하면서 조과가 좋이 않을 때, 내가 즐겨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아이작 월턴의 직업

아이작 월턴의 직업

설날 연휴를 이용하여 아이작 월튼에 관한 604페이지로 이루어진 영문서적 1회독을 마무리 지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오래된 자료를 스캔하여 만들어진 것이기도 하지만 고어(古語) 표현과 활자체가 읽는데 시간을 걸리게 만든 것도 하나의 변명거리였다고 할까?

뿐만 아니라 인쇄하기 전에 교정(校正)을 보지 않았는지, 오탈자가 상당히 많은 것도 완독(完讀)하지 못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2/3 정도 읽은 상태에서 아이작 월튼의 어머니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나마 큰 수확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동안 아이작 월튼의 어린시절과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으므로 이번에 새롭게 취득한 정보는 조금 더 고증(考證)을 거친 다음에 포스팅하기로 하면서 오늘은 카더라 정보만 난무하는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의 직업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아이작 월튼의 정확한 출생지와 생일에 대해서 아직도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한 것은 그의 아버지가 신분이 낮은 하층계급이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영문판 위키피디어에는 아이작 월튼의 아버지는 펍(pub)과 여관을 운영하였다고 나오는데 정확하게는 티플러(tippler)였다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다.

※ 티플러(tippler)는 술은 팔지만, 식사는 제공하지 않으며 숙박시설이 없는 술집을 말한다.

그러므로 위키피디어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사실관계의 확인 없이 여관주인이었다거나 여관을 경영했다고 하는 것은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두 달 전에 포스팅한 글을 통해 “아이작 월튼은 15세에서 20세 사이에 누나를 따라 런던에서 재봉사의 도제공으로 생활했던 것으로 보이며 그 후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의 견습생이 되어 1618년 11월 12일에는 철기상(Ironmongery)조합의 자유조합원(freebrother)으로 가입하면서부터 경제적으로 여유를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했는데 여기서 주목할 부분이 그린젤(Grinsell)이라는 성(姓)이다.

아이작 월튼의 직업에 대하여 철물상이라고 하는 부분은 현재까지의 조사에 의해서만 판단하더라도 틀린 것이라고 조심스레 지적할 수 있다.

10대의 나이에 런던으로 온 아이작 월튼은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 경영하던 원단가게에서 재봉사로 일하던 누나에게서 일을 배웠는데 실질적인 주인은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었으므로 그의 밑에서 도제공(徒弟工: apprentice) 생활을 했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 철물상조합의 회원이었고 아이작 월튼도 나중에 매부의 도움을 받아 조합에 가입하였던 것에서 비롯되어 그의 직업이 철물상이었다는 잘못된 정보들이 퍼져나갔던 것으로 판단된다.

런던에는 예로부터 동업자 단체 및 길드로 구성되는 리버리 컴퍼니(Livery company)라는 것이 있는데 세분되는 업종만 100개가 넘으며 일반적으로 Worshipful Company of 업종명으로 표시를 한다.

이러한 리버리 컴퍼니(Livery company) 가운데 철물상들로 이루어진 조합(Worshipful Company of Ironmongers)의 회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이작 월튼보다 12살 많은 매부였고, 그를 따라서 아이작도 나중에 가입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이작 월튼의 직업에 관한 영미권의 정보는 위키피디어를 비롯하여 어느 곳도 철물상이라고 얘기하는 곳은 없으며 저자에 따라 원단도매상(a wholesale linen draper)이었다거나 재봉사(Sempster), 혹은 여성용 모자를 제작·판매하는 사람(milliner)이었다고 함으로써 전부가 섬유와 관련한 업종에 종사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작 월튼이 철물상조합의 회원으로 가입을 하기는 했지만 철물점을 운영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주관적인 추론(推論)은 어디에서 근거하는 것일까?

아이작 월튼이 런던에 왔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시기는 그의 나이가 15세 되던 1608년에서 20세였던 1613년 사이였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이런 판단의 결정적인 근거는 철물상조합(Worshipful Company of Ironmongers)의 역사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문서에 있다.

동문서에 의하면 “1618년 11월 12일, 토마스 그린젤의 도제공이었던 아이작 월튼은 조합의 가입을 허락받아 입회비 12펜스를 납부하고, 성실한 출석과 활동에 대한 이행보증금으로 10실링을 지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사적인 기록을 토대로 당시의 도제공(徒弟工: apprentice)이 보통 7년의 기간을 봉사하도록 되어 있었다는 점에 주목하면 아이작 월튼이 조합원으로 가입하였던 1618년 11월 12일에는 그가 가진 자산(資産)이 철물점을 경영하기에는 모자라는 수준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작 월튼은 철물상조합(Worshipful Company of Ironmongers)의 조합원으로 가입을 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당시에 조합원으로 가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동종 업종을 경영하지 않아도 된다는 암묵적인 규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다음으로 역사적인 기록에 근거하면 아이작 월튼이 운영한 매장은 런던의 챈서리 레인(Chancery Lane)과 플릿 스트리트(Fleet Street)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아이작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 시작했던 것은 1617년 또는 철물상조합원으로 가입했던 1618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즉, 이것은 섬유사업을 하면서 동시에 철물상조합원으로 활동하던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 밑에 적을 두고, 일은 누나에게서 배운 다음 독립하여 가게를 운영하기 시작했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공개된 자료에만 근거하더라도 아이작 월튼이 철물상이었다는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왜 그의 직업이 철물상이었다는 잘못된(?) 정보가 전해지고 있는 것일까?

이 점에 있어서는 낚시업계와 낚시문화에 짙게 드리워진 일본의 그림자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고, 직접 경험하거나 읽지 않은 정보에 근거한 카더라 정보를 양산하는 식자(識者)들의 잘못도 적지 않다는 것이 아이작 월튼과 조어대전을 연구하는 범부(凡夫)의 생각이다.

범부의 생각을 밝혔으니 하나만 더 덧붙이면 아이작 월튼은 정말 장가를 잘 갔다는 것이다.

아이작 월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존 던(John Donne)의 보좌신부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아이작의 조카 사라 그린젤(Sarah Grinsell)과 결혼함으로써 상하의 귀천이 엄격히 분리된 시대에 상류층으로 쉽게 흡수될 수 있었던 것도 있지만 매부인 토마스 그린젤(Thomas Grinsell)이 없었더라면 아이작의 런던에서의 성공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최근에 읽은 책이 김재식씨가 쓴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라는 책이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다.

 

하지만 이런 어려운 인간관계를 생의 마지막까지 유지한 사람이 아이작 월튼이다.

다음 시간에 자세히 알아보겠지만 인쇄기가 아주 드물었던 당시, 그의 명저(名著) 조어대전(원제: The Compleat Angler)이 출판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조카사위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보좌신부로 근무하고 있던 성 던스턴 서부교회(St Dunstan-in-the-West)가 인쇄기를 가지고 있었고, 그가 찬양에 가까운 전기(傳記)를 써주었던 존 던(John Donne)이 그 교회의 교구신부를 역임하고 있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뿐이 아니라 조어대전(원제: The Compleat Angler)을 맡아서 출판해주었던 출판사의 2세 경영인이었던 리차드 매리어트(Richard Marriot)와 그의 부친 존 매리어트(John Marriot)의 도움도 절대 간과할 수는 없다.

물론, 나중에는 아이작 월튼의 전문출판사로써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아이작 월튼은 특히 리차드 매리어트(Richard Marriot)에 대한 고마움을 그의 유언장을 통해 10파운드의 유산을 나누어주도록 명시하는 방법으로 밝히고 있다.

아이작 월튼에 대한 평가는 문학, 종교, 정치적으로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 다양하게 이뤄지고 있으나 청교도혁명의 시기, 현실도피를 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이 존재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가능하면 담백하게 그를 조명해보고, 마지막에는 그가 쓴 조어대전(원제: The Compleat Angler)에 대하여 살펴볼까 한다.

재미는 없는 글이지만, 해야 할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는 것만 달성하더라도 지금 연재하는 글의 성과는 달성하는 것일 테니 아무튼 계속해 볼 생각이다.

또한 “예술가로 태어난 사람이 없는 것처럼, 낚시꾼으로 태어난 사람도 없다.”는 아이작 월튼의 말처럼,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하다 보면 변해 있을 나의 새로운 모습이 궁금하기도 하기 때문에 재미없는 글이지만 계속 업글할 생각이다.

아이작 월턴과 청교도혁명

아이작 월턴과 청교도혁명

유명한 강과 하천이 많은 영국의 중부, 미들랜드에서 성장한 아이작 월튼은 어린 시절부터 낚시를 즐기며 성장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결혼 전까지는 꾼의 경지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낚시가 취미인 사람으로서 아이작 월튼과 그가 쓴 조어대전(The Complete Angler)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을 바로잡았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연재를 시작하였는데, 오늘도 포털의 잘못된 정보 하나를 먼저 알아보고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하자.

네이버에서 조어대전을 검색하면 1655년에 제2판이 출판되었으며 다시 C.코튼이 속편을 1676년에 발행하였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이작 월튼의 낚시제자라고 할 수 있는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속편을 발행하였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지만 정확한 것도 아니다.

1653년에 초판이 발행된 The Complete Angler는 1655년에 개정증보판인 2판이 발행되었고, 1661년에 3판, 1668년에 4판이 발행되었다. 그리고 1676년에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플라이피싱에 관한 내용을 쓰고 아이작 월튼이 가필(加筆)한 것을 제2부로 합본한 5판이 발행되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어대전의 원형을 가진 최초의 판본이라 할 수 있다.

어디서 생산되고 전파된 정보인지는 몰라도 백과사전이란 이름 아래에서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제 오늘의 주제인 아이작 월튼과 청교도혁명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유언장에서 “청교도혁명의 시기, 왕당파였던 월튼은 런던을 도망치다시피 떠나야만 했고, 일요일에는 사냥을 하거나 낚시를 하는 등의 일체의 스포츠나 엔터테인먼트 활동을 법으로 금지하던 시기였기에 낚시를 하고 또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는 일은 청교도 정부에 반항하는 것으로 비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Iz. Wa란 익명으로 제4판까지 발행하였던 것이며 1676년 제5판에 와서야 본명을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즉, 아이작 월튼의 낚시에 관한 이야기는 종교를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며, 그의 생애 전체를 종교와 별개로 조망한다는 것은 제대로 된 평가를 할 수 없다는 것이 되는데, 아이작 월튼과 종교와 관련하여서는 영국내전, 좁게는 청교도혁명을 이해하여야만 한다.

그럼, 여기서 간략하게나마 아이작 월튼과 영국의 약사(略史)를 살펴보고 가자.

 

1593년 8월 9일 아이작 월튼 탄생

1608년에서 1618년 사이에 런던으로 이주(15~20세)

1620년 청교도에 대한 탄압이 심해지자 필그림 파더스는 미국으로 이주

1626년 12월 27일 레이첼 플로이드(Rachel Floud)와 결혼

1628년 권리청원

1640년 2월 5일, 47세에 던전(John Donne의 전기) 출간(최초)

1640년 8월 22일 첫 번째 아내 사망

1642년 청교도혁명

1647년 Anne Ken과 재혼

1649년 찰스 1세 처형, 크롬웰 공화정 선포

1653년 조어대전 초판 발행

1660년 왕정복고, 찰스 2세 즉위

1662년 4월 17일 두 번째 아내 사망

1665년 런던 페스트 유행

1666년 런던 대화재 발생

1683년 12월 15일 아이작 월튼 사망

 

 

1644년 마스튼 무어 전투(Battle of Marston Moor)에서 왕당파가 패배하자 아이작 월튼은 런던에서의 사업을 접고 Shallowford에 거처를 마련하고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였으며 말년에는 윈체스터에 있는 사위의 집에서 살았다.

런던을 떠나 시골에서 낚시를 하면서 글을 쓰는 생활은 언뜻 보면 평화로워 보이지만 영국내전으로 인한 심각한 대립으로 파괴와 약탈이 벌어지던 정치적, 종교적으로 혼란을 겪던 시대에 의회파와의 타협을 거부하던 왕당파의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은거하며 살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에게 참고 인내하라며 보냈던 메시지가 바로 조어대전의 제일 끝에 적인 침묵을 배우십시오(Study to be quiet)라는 표현인 것이다.

 

쉽게 말해 경거망동하지 말고 죽어 지내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인데 The Complete Angler의 주요 키워드인 낚시친구란 표현이 국교회(國敎會)의 은유적인 표현이면서도 좁게는 몰리, 쉘던, 해먼드와 같은 우정으로 맺어진 친구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조어대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1662년 아이작 월튼은 ‘The Experience’d Angler or Angling Improv’d’라는 책을 쓴 로버트 베너블즈(Robert Venables)에게 자신도 30년 이상이나 낚시를 해오고 있다는 편지를 보냈다.

1662년이면 그의 나이가 69세일 때이니 30년 전부터 낚시를 했다고 가정하면 그의 나이가 39세인 1632년부터 낚시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고 볼 수 있고, 그보다 조금 일찍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사업의 성공으로 얻은 경제적 안정과 1626년 결혼하여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아이작 월튼이 낚시를 한 것은 종교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한다. 영국은 1628년에 권리청원으로 인해 왕권이 약화되고 청교도혁명이 일어날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하는 어수선한 시절이었는데 아이작 월튼은 왕당파의 일원이었다는 점에 우리는 주목하여야 한다.

아이작 월튼은 1626년 12월 27일 33세의 나이로 레이첼 플로이드(Rachel Floud)와 결혼을 하였는데 그의 장모는 켄터베리 대주교였던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 가문의 출신이었다.

아이작 월튼은 결혼 전에 존 던(John Donne)을 만나 국교회와 관계를 맺었는데 결혼으로 인해 국교회와의 관계는 결정되어버렸으며 이것은 청교도혁명 당시 아이작 월튼이 런던을 떠나게 만드는 원인이자 낚시를 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존 던(John Donne)을 만난 이후로 아이작 월튼의 인생은 크게 바뀌었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사실로 존 던(John Donne)과 아이작 월튼에 관한 이야기는 ‘아이작 월튼이 전하는 말-Study to be quiet’에서도 소개한 적이 있는데, 아이작 월튼은 47세였던 1640년 2월 5일에 전기작가(傳記作家)로서 최초의 작품인 존 던(John Donne)傳을 출간하면서부터 작가로서도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존 던(John Donne)

 

존 던과 아이작 월튼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얘기하면, 존 던(John Donne)은 1624년부터 1631년에 사망할 때까지 성 던스턴 서부교회(St Dunstan-in-the-West)의 교구신부(Rector)를 맡았고,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은 1629년부터 1644년까지 이 교회에서 간사를 비롯한 여러 직책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존 던(John Donne)의 보좌신부였던 헨리 발렌타인(Henry Valentine)이 아이작의 조카 사라 그린젤(Sarah Grinsell)과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기 때문에 존 던(John Donne)과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의 관계는 아주 밀접하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며 이러한 관계를 기반으로 그의 명저(名著)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편찬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이 퓨리턴(청교도 :Puritans)을 비난한다고 해서 퓨리터니즘(Puritanism) 자체를 비판한다고 판단해서는 그와 그의 작품해석에 있어서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사실에 주의하여야만 한다.

이것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과 유언장에서 밝힌 바가 있는 것으로 The Compleat Angler를 직접 번역하기 위해서는 그가 쓴 다른 책들을 함께 봐야 하고, 영국의 청교도혁명과 영국내전의 역사를 비롯하여 휘그주의와 토리주의 같은 역사관 및 영어의 고어표현을 이해해야만 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이작 월튼이 비판했던 것은 퓨리턴(청교도 :Puritans)들의 타협하지 못하는 편협함과 독선적인 사고, 평화와 질서가 아닌 폭력과 파괴를 일삼는 것이었으며 그는 퓨리턴의 사상가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기조차 했다.

이와 함께 역사에 대한 아이작 월튼의 사고는 역사가인 에드워드 하이드 백작(Edward Hyde, 1st Earl of Clarendon)과 같은 시각으로 영국내전을 바라보고 있는데 내전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스코틀랜드 맹약파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영국의 역사를 함께 돌아봐야 하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영국내전에 대한 아이작 월튼의 생각은 그의 저서 사랑과 진실(Love and Truth)을 통해 잘 드러나고 있으며 그는 내전을 우발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적으로 평가하는 아이작 월튼은 대단히 관용적인 인물이었으며 자신이 직접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지성과 경험을 보탠 다음 형성된 냉철한 시각과 판단력을 갖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검색을 통해서 볼 수 있는 아이작 월튼의 초상화는 제이콥 휘스만스(Jacob Huysmans)가 그린 말년의 모습으로 런던의 국립 초상화 미술관(National Portrait Gallery)에 전시되어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① 스탠드 업 스타일의 창시자 마샤 비어만(Marsha Bierman)

세계의 유명 낚시인① 스탠드 업 스타일의 창시자 마샤 비어만(Marsha Bierman)

세계의 유명 낚시인들에 대한 첫 번째 글의 주인공으로 여성 낚시인 마샤 비어만(Marsha Bierman)을 선택한 이유는 남자들도 힘들다는 “빅게임 피싱”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마샤가 그녀의 남편 레니 비어만(Lenny Bierman)과 함께 개발한 스탠드 업 스타일의 낚시, 다른 말로는 숏 로드 피싱(short rod fishing)이라고 하는 기술은 1986년에 알려진 것인데 이전까지의 빅게임 피싱이 대부분 파이팅 체어라고 하는 의자에 앉아서 7피트 이상의 로드를 사용하던 것을 5피트의 로드를 이용하여 선 채로 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녀가 숏 로드 피싱을 시작하게 된 동기는 남편과 함께 방문한 플로리다에서 친구가 운영하는 낚시가게에 들렀을 때 짧은 낚싯대로 한 번 도전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는 친구의 추천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신장 167cm, 체중 56kg의 다소 작은 체격인 마샤는 처음으로 시도한 숏 로드 게임에서 100kg을 넘는 물고기를 낚았다고 합니다만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처음으로 해본 기술에 매료된 마샤는 짐벌과 하네스(벨트)를 연결한 장비를 허리에 두르고 낚시를 하는 방법을 보다 실용화시키기 위해서 많은 연구와 시도를 거듭했으며 장비의 개발과 함께 기술의 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전까지는 없던 낚시의 기술이었기에 근육을 어떻게 사용하는가에서 부터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한 릴의 사용과 드랙의 설정 등 세부적인 점까지 연구를 한 결과 현재 많은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샤는 바하마에서 열리는 새치를 잡는 빌 피시 챔피언십(Billfish Championship)에서 우승한 최초의 여성이지만 원래부터 낚시를 즐겨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1964년부터 1969년까지는 미식축구 구단 뉴욕자이언츠와 마이애미 돌핀스에서 코치와 매니저로 활동을 했으며 낚시에 입문한 것은 1975년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짧게 묶은 머리와 검게 탄 피부, 그리고 즐겨 입는 반바지가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마샤 비어만이 개발한 숏 로드 테크닉(short rod technique)이라고 하는 스탠드 업 스타일의 기술이 개발되고부터 여성낚시인들도 빅게임 피싱에 도전하는 사례가 증가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녀가 잡은 새치(Billfish)는 2,500 마리가 넘으며 그 가운데 300여 마리는 대서양녹새치와 백새치인데 이들 모두에게 꼬리표를 달아 돌려보냈다는 점이 그녀를 “세계의 유명낚시인”을 소개하는 글의 첫 번째로 택한 또 다른 이유입니다.

플라이 낚시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하디(Hardy)

플라이 낚시의 롤스로이스로 불리는 하디(Hardy)

낚시광장에 있는 “명작과 괴작-현대 스피닝릴의 시조 Hardy Altex”란 글을 보면 하디사에서 만든 알텍스(Altex)를 롤스로이스(Rolls-Royce)에 견주고 있다.

하디사의 알텍스(Altex) 릴이 자동차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롤스로이스(Rolls-Royce)에 버금갈 정도로 뛰어난 제품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만 이런 표현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은 롤스로이스와 하디(Hardy)사의 역사적 관계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통치시대에 탄생한 하디(Hardy)사의 역사와 제품에 대한 얘기는 수십 편의 글로도 부족하지 않을까 생각하지만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플라이 낚시용품의 롤스로이스라고 불리는 동기를 한 번 알아볼까 한다.

세계적으로 플라이 낚시용품의 3대 메이커라고 부르는 곳으로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영국의 하디(Hardy)사와 오비스(Orvis) 및 레오나드(Leonard)를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창업년도로는 찰스 오비스(Charles F. Orvis)가 1856년에 설립한 오비스(Orvis)가 가장 빠르고 그 다음이 하이람 루이스 레너드(Hiram Lewis Leonard)가 1869년에 창업한 HL Leonard Rod Company가 두 번째이며 1872년에 창업한 하디(Hardy)사가 가장 늦게 창업을 했다.

영국 노섬벌랜드주에 위치한 소도시인 안윅(Alnwick)에서 창업한 것이 1872년의 일이었지만 처음에는 총포상으로 출발을 하였고 낚시용품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1874년의 일이었으니 하디사의 역사는 정확하게는 1874년부터라고 봐야 옳을 것 같다.

어제 올린 글 “대나무 낚싯대의 역사와 여성 낚시인”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하디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성장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뛰어난 낚싯대를 생산한 것이 그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영국에는 하디(Hardy)사가 창업하기 32년 전에 설립된 팔로우(Farlows)라는 업체도 있었지만 하디(Hardy)사가 큰 성공을 거두게 된 요인으로는 왕실납품업체로 지정되었던 것이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

팔라코나(Palakona)

 

팔라코나(Palakona)로 이름붙인 하디사의 대나무 낚싯대는 1883년과 1884년에 영국에서 열렸던 ‘국제 낚시박람회(International Fisheries Exhibition)’에서 연속으로 금메달을 수상했고 이어서 1885년에는 낚시대회에서 월등한 기록으로 우승을 하게 되면서 명성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906년에는 조지 5세가 황태자이던 시절 하디사의 용품을 사용했던 것을 계기로 1910년에 영국의 왕실에 납품하는 것을 필두로 유럽 각국의 왕실에 납품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디사가 릴을 생산한 것은 1880년에 출시했던 모델 ‘Bronzed Gunmetal’이 최초였는데 스피닝 릴의 생산은 1932년에 영국의 알프레드 홀덴 일링워스(Alfred Holden Illingworth)가 출원한 스피닝 릴의 특허가 만료됨과 함께 출시했던 모델인 알텍스(Altex No.1)가 처음이었다.

 

물론 알텍스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형태의 풀 베일 암(full bail arm)의 특허를 취득하여 경쟁업체들이 따라올 수 없는 성능을 단독으로 보유할 수는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낚시용품계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을 얻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8년 하디사는 사업을 확장하여 항공부품산업에도 진출을 하게 되는데 불안과 긴장이 고조되던 당시의 국제정세는 1940년부터 하디사가 군수산업에 참가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군용항공기의 엔진을 제작하고 있던 롤스로이스사의 하청업체로 지정되어 그동안 쌓아온 기술력을 바탕으로 품질이 우수하면서도 납기를 단축시키는 성과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2차 대전의 종전과 함께 재건에 힘을 쏟은 하디사는 1951년에 런던에 다시 매장을 열 수 있게 되는데 그 때 롤스로이스사가 그간의 양사의 관계를 고려하여 카탈로그의 촬영을 했던 곳이 바로 새롭게 문을 연 하디사의 런던매장 앞이었으며 그곳에서 롤스로이스사로부터 “하디는 낚시분야의 롤스로이스고, 롤스로이스는 자동차 분야의 하디”라는 찬사를 듣게 된다.

물론 이 말은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발언한 것이었기에 이때부터 하디사는 낚시업계의 롤스로이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던 것이며 이러한 역사를 지닌 하디사의 이야기는 2008년에 “하디의 잃어버린 세계(The Lost World of Mr. Hardy)”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로도 제작이 되었다.

우리나라와는 조금 거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플라이 낚시 분야의 이야기이긴 해도 앞으로 계속해서 하디사를 비롯한 세계 3대 메이커들의 역사에 대해서는 기술해보고 싶다.

 

스코틀랜드의 낚시에 남아 있는 귀족문화 길리(GILLIE)

스코틀랜드의 낚시에 남아 있는 귀족문화 길리(GILLIE)

주로 송어와 연어를 잡는 낚시로 알려진 플라이낚시(Fly Fishing)가 대중들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1899년에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가 출판한 책 “Fly Fishing”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플라이낚시의 대중화에 큰 공헌을 한 것은 릴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낚시용 릴의 역사”에서도 다룬 내용이지만 조어대전(The Complete Angler)에서 아이작 월튼(Izaak Walton)이 휠(Wheel)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연어낚시를 하는 많은 사람들이 휠(릴)을 사용하고 있다.”고 소개하는 것처럼 이전에는 문헌의 설명으로만 존재하던 릴에 대한 내용이 그림으로 처음 기록되었던 것은 1662년 로버트 베나블(Robert Venables)이 쓴 “The Experienced Angler”이란 책입니다.

 

그 후 영국에서는 기어를 사용하는 릴이 영국최초의 릴 제작사인 오네시무스 유스턴손(Onesimus Ustonson)이란 회사에 의해서 1750년부터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플라이낚시가 더욱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그 이전부터 플라이낚시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존 데니스(John Dennys)가 쓴 “낚시의 비밀(The Secrets of Angling)”의 각주에 “cast a fly”라거나 “fish with an artificial fly”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영국 면적의 1/3을 차지하는 스코틀랜드는 긴 해안선과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로크(Loch)라고 하는 3만개가 넘는 호수와 수많은 강들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낚시문화가 발전해왔습니다.

 

스코틀랜드는 특히 대서양연어가 풍부한데 일반적인 연어의 치어가 강에서 1년을 잔류하는 것에 비해 스코틀랜드의 북부에서는 4년까지도 생활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연어가 풍부하다보니 예로부터 귀족들이 연어낚시를 즐겼으며 지금도 스코틀랜드의 연어낚시에는 길리(Gille 또는 Ghillie)라고 하는 귀족문화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 오늘은 그것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연어낚시를 할 수 있는 기간은 지방마다 그리고 강에 따라서 금어기가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1월 1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거의 1년 내내 연어낚시를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금어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요일의 연어낚시는 금지되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민물낚시는 공공장소에서 하는 것과 사유지에서 낚시를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특히 사유지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에는 규정이 까다롭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격하게 제한되는데 이런 곳에는 길리(GILLIE)라고 하는 일종의 가이드들이 있습니다.

 

 

길리(GILLIE)라고 하는 스코틀랜드 표현은 귀족들이 소유하는 땅에서 밀렵을 감시하고 농작물을 해치는 동물들의 접근을 차단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던 말이었는데 주로 강에서 낚시를 할 때 동행하여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오랜 역사를 지닌 길리(GILLIE)란 말은 현재는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사냥과 낚시를 할 때 가이드를 하는 것을 뜻하며 단순한 가이드가 아니라 어떻게 플라이낚시를 하는지, 어떤 플라이를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 그리고 어떤 포인트가 좋은지 등등에 관한 전반적인 조언과 잡은 고기를 요리하는 일도 함께 하는 그야말로 전문안내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길리(GILLIE)는 주로 낚시클럽들이 관리하는 강이나 낚시터를 소유하고 있는 호텔 등에 소속되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잉어도 이빨이 있다는 걸 아세요?

잉어도 이빨이 있다는 걸 아세요?

잉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International Union for Conservation of Nature and Natural Resources)이 지정한 세계 100대 악성 침입 외래종(100 of the World’s Worst Invasive Alien Species)에 포함된 8종의 어류 가운데 하나라는 것은 “배스는 나쁘고 잉어는 착하다?”란 글을 통해 알아보았다.

도심 주변의 하천에서 심심찮게 목격되는 잉어의 모습은 생물의 다양성이란 측면에서는 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은 이미 여러 나라의 사례를 통해 알려지고 있으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잉어로 인한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부족한 것 같다.

잉어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이 규정하고 있는 악성 침입 외래종의 공통적인 특징인 저서생물과 수생식물을 마구 먹어치우는 습성 및 저온에 대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크기가 60㎝를 넘으면 천적이 거의 없어진다.

낚시를 즐기는 사람으로서 잉어를 잡을 때 사용하는 미끼는 대부분이 식물성인 경우가 많지만 루어로도 잡은 경험이 있으며 지렁이는 물론이고 우렁이에도 잡힐 정도로 잉어는 잡식성이다.

잉어는 조개나 우렁이와 같이 딱딱한 먹이를 어떻게 먹을 수 있는 것일까? 그대로 삼켜서 소화시키는 것일까?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잉어는 위가 없어서 먹은 것이 바로 장으로 가기 때문에 포만감을 느끼지 못하므로 계속해서 먹이활동을 하는 대식성을 가진 어종이다. 게다가 잡식성이다 보니 잉어가 서식하는 곳에는 다른 어종이 많지 않은데 대표적인 사례는 글의 말미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잉어가 생태계를 파괴하는 것은 먹이활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잉어가 먹는 먹잇감 중에는 잠자리나 반딧불이 또는 그 유충도 있으며 일본에서는 반딧불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잉어의 방류를 금하고 있는 지자체도 있다.

ホタルの生息環境を守ってます

반딧불이의 서식환경을 지키고 있습니다.

鯉など放流しないで下さい

잉어 등을 방류하지 마십시오.

일본에서는 2003년에 번진 잉어 헤르페스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잉어가 집단폐사한 이후부터 다른 하천이나 연못에서 잡은 잉어와 잉어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발생한 양식장에서 양식된 잉어 및 PCR검사에 의해 헤르페스 바이러스가 검출되지 않았음이 입증되지 않은 잉어를 방류하는 것을 법으로 금하는 지역이 증가하고 있다.

잉어 헤르페스 바이러스는 줄여서 KHV(Koi Herpes Virus)라고도 하는데 Koi가 일본어로 잉어를 뜻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KHV 때문이 아니라 생태계를 보호하고 생물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잉어의 방류를 금지하는 곳이 점차 증가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잉어의 이빨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다 보니 잉어는 다슬기나 우렁이를 통째 삼킬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지만 이런 생각과는 달리 잉어는 우렁이나 다슬기의 껍질을 쪼개서 삼키는데 그때 사용하는 잉어의 이빨이 바로 인두치(咽頭齒: pharyngeal tooth)라고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목(=인두: 咽頭)에 있는 이빨(齒)이라는 뜻의 인두치는 잉어의 아가미에 붙어있으며 인간의 어금니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것을 이용하여 조개류의 단단한 껍질을 깨뜨린 다음 삼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젠, 위에서 말했던 잉어가 서식하는 곳에는 다른 어종이 많지 않다는 대표적인 사례를 알아보기로 하자.

2009년 10월 31일, 일본 나고야에 있는 하야토저수지(隼人池: はやといけ)에서는 서식하는 생물을 확인하고, 외래생물을 제거하며 환경교육을 위한 목적으로 저수지의 물을 빼는 행사가 열렸다.

모두 490㎏의 외래어종을 제거한 이날의 결과를 보면 잉어로 인한 생물다양성의 파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저수지의 물을 빼고 잡은 물고기 가운데 일본의 재래종은 110마리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외래어종이었다고 하는데 그중에서 송어와 배스는 합해서 74㎏ 남짓이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잉어였다고 한다.

이 결과에 대해서 일본 환경성 산하의 생물다양성지구전략기획실(生物多様性地球戦略企画室)의 담당자는 “애착이 가는 물고기지만 이대로 내버려 두면 잉어밖에는 없는 저수지가 될 것이다.”라고 인터뷰했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호수인 이바라키현에 있는 가스미가우라(霞ヶ浦) 호에서 실시한 실험에 의하면 잉어가 감아올리는 진흙에 의해 햇빛이 잘 들지 않게 되고, 배설물로 인해 플랑크톤이 증가함으로써 수질이 바뀌게 되어 결국에는 식물이 자라기 어렵게 됨으로써 생태계가 파괴되어 복원하기 어렵게 변한다고 한다.

잡식성에다 대식가인 잉어는 수초는 물론 다른 물고기의 알이나 유충을 비롯하여 단단한 인두치(咽頭齒: pharyngeal tooth)로는 갑각류는 물론 딱딱한 조개류의 껍질도 쪼개어 먹음으로써 생태계에 미치는 문제가 심각하므로 이제부터라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해결책을 찾아야 할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웨일 폴(Whale fall): 죽어서도 자연을 지키는 고래의 일생

웨일 폴(Whale fall): 죽어서도 자연을 지키는 고래의 일생

직역하면 고래의 추락이라고 할 수 있는 웨일 폴(Whale fall)은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고래의 죽음으로 인해서 해저로 가라앉은 고래의 사체 주위에 생물체가 몰려들어 서식하는 군집현상을 일컫는 말인데 우리말로 표현하자면 고래 사체의 생물군집이라고 할 수 있는 fauna of whale fall로 표현된다.

지방이 많은 고래가 죽게 되면 지방조직이 분해되는 과정에서 메탄이나 황화수소와 같은 물질이 생성되는데 이런 고래의 사체 주변에 독자적인 새로운 생태계가 형성되는 것을 가리켜 포너 오브 웨일 폴(fauna of whale fall), 줄여서 웨일 폴(Whale fall)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웨일 폴(Whale fall)은 1987년 캘리포니아의 산타 카탈리나 만(Gulf of Santa Catalina)의 수심 1,240m 지점에서 하와이대학교의 크레이그 스미스(Craig Smith)가 이끄는 탐사팀에 의해 최초로 발견된 이래 2022년까지 세계의 바다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2019년 심해탐사선 노틸러스호의 무인탐사정인 헤라클레스는 몬터레이만의 심해에서 길이 4~5m 정도 되는 고래의 사체를 발견하였고 며칠 전 영상의 리마스터판을 유튜브에 공개하였는데 고래의 사체에 남은 부드러운 조직을 문어나 심해어가 천천히 먹어치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고래의 사체 주위와 뼈에는 박테리아와 수중생물들이 자라면서 마치 아바타의 수중 씬을 보는 듯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심해에 서식하는 생물체들은 언제나 먹잇감이 부족하지만 고래의 죽음은 다른 생명체들이 살아갈 수 있는 좋은 여건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을 이 영상은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에 영상을 공개한 곳은 EVNautilus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비영리 조직인 The Ocean Exploration Trust로써 운영하고 있는 홈페이지의 주소는 노틸러스라이브(nautiluslive.org)이며 이번에 공개한 리마스터링 영상은 아래와 같다.

한편 탐사팀은 2019년에 발견한 웨일 폴을 2020년 10월에 다시 찾아가 봤는데 고래의 조직들이 모두 사라지고 갈비뼈와 척추는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것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밍크고래의 사체라는 것이 확인되었는데 관련 영상 또한 유튜브에 올라와 있으며 아래의 영상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