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어대전의 진실과 거짓

조어대전의 진실과 거짓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이 쓴 The Compleat Angler(조어대전)를 번역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동기 중에는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에 대한 잘못된 정보들이 확대·재생산되어 전파되고 있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그중에서 가장 잘못된 정보는 네이버의 지식백과에도 나와 있는 “1653년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13장으로 구성되었다가 25년에 걸쳐 다섯 번의 수정판이 나와 1676년에는 21장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역시 네이버의 지식백과에도 나오는 “낚시 친구인 C.코튼이 가필한 증정판(1676)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는 내용이다.

두 가지 내용이 일견, 동일한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으나, 첫 번째는 조어대전이 21장으로 늘어난 것은 1676년이 아니란 점이며, 두 번째는 찰스 코튼이 가필한 증정판이 아니라 아이작 월턴이 가필한 것이라는 점이 잘못된 내용이란 것이다.

먼저 “1653년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13장으로 구성되었다가 25년에 걸쳐 다섯 번의 수정판이 나와 1676년에는 21장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내용의 오류에 대해서 알아보자.

아이작 월턴의 The Compleat Angler(조어대전)은 1683년 아이작 월턴이 사망하기까지 1653년의 초판을 필두로, 1655년에 제2판이 나왔고, 제3판과 제4판은 1661년과 1668년에 각각 출판되었으며, 제5판은 1676년에 출판되었다.

초판에서 13장(章)에서 불과하였던 것이 전체 21장(章)으로 늘어난 것은 1676년의 제5판이 아니라 1655년의 제2판이었고, 페이지 수도 100페이지 이상이나 증가하였다. 그리고 1661년의 제3판은 변화가 없었으며, 1668년의 제4판은 단지 정오표(errata)만 추가된 것이었다.

그리고 1676년에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제5판이 출판되었는데 아이작 월턴이 집필한 부분은 단지 내용만 10페이지가 추가되었을 뿐 장(章)수는 제2판과 같은 전체 21장(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1653년 처음 출판되었을 때는 13장으로 구성되었다가 25년에 걸쳐 다섯 번의 수정판이 나와 1676년에는 21장으로 늘어났다.”고 하는 내용은 잘못된 정보로 수정되어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두 번째, 1676년의 제5판은 “낚시 친구인 C.코튼이 가필한 증정판”이 아니란 점이다. 제5판은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플라이피싱에 관한 내용을 쓰고 아이작 월튼이 가필(加筆)한 것을 제2부로 합본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조어대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만 소개하면, 큰 오류를 범하게 되므로 제5판에 대하여 보다 정확한 내용을 소개해야만 한다는 생각이다.

1676년에 나온 제5판은 아이작 월턴이 쓴 제1부와 찰스 코튼이 쓴 제2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로버트 베너블즈(Robert Venables)가 쓴 “능숙한 낚시인과 낚시기술의 향상(The Experience’d Angler or Angling Improv’d)”이란 책을 제3부로 합본하여 출판되었다.

 

그러므로 전체 장(章)수가 21장이라고 하는 정보도 아이작이 쓴 내용만 21장이라고 해야 정확한 것이며 찰스 코튼이 가필한 것도 증정한 것도 아니란 것이 올바른 정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가가 아닌 군인이었던 로버트 베너블즈가 쓴 제3부는 아이작 월턴과 찰스 코튼의 글에 비해 문학성에 있어서 너무 떨어진다는 비판이 제기되어 2쇄부터는 제외하고 출판됨으로써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이 쓴 The Compleat Angler(조어대전)의 제5판은 그가 쓴 1부와 찰스 코튼이 쓴 2부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또한, 1676년에 나온 제5판의 1쇄는 제목도 The Compleat Angler(조어대전)가 아니라 ‘The Universal Angler, Made so by Three Books of Fishing.’였으며, 2쇄는 제1부와 제2부로만 구성되었고, 3쇄는 찰스 코튼이 쓴 제2부만으로 출판되었다.

다시 네이버의 지식백과로 돌아가 보면, 아래의 삽화가 다락원에서 출판한 조어대전에 삽입된 그림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이 삽화는 The Compleat Angler(조어대전)에 삽입된 것이 맞긴 하다. 그러나 조어대전을 출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다.

위의 삽화는 아이작 월턴의 연재를 통해 소개한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라는 수녀가 쓴 성 알반스의 책(The Boke of St. Albans)의 1496년 증보판에 삽입된 것으로 줄리아나 수녀의 이름 앞에 수식어(Dame)를 붙인 윈킨 드 워드(Wynkyn de Worde)가 책을 출판하면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1760년에 존 호킨스(John Hawkins)란 사람이 The Compleat Angler(조어대전)을 출판하면서 이 삽화를 집어넣었던 것인데, 이런 전후사정을 모르는 채 만들어진 정보들이 이 삽화를 조어대전에 수록된 것이라고만 소개하는 바람에 목판화의 진실은 가려지게 되었던 것이었다.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현실을 도피했던 것일까?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현실을 도피했던 것일까?

‘The Compleat Angler’를 쓴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에 대한 평가를 할 때 청교도혁명 당시, 투쟁 대신 일신의 안위를 택하였다는 비판을 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그런 평가와는 달리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이 왕당파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는 일화가 있음 또한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가 부족한 그에 대한 평가는 아직은 유보함이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아이작이 왕당파를 위해 목숨을 걸었던 일화도 그의 친구를 통해 전해진 것이어서 과장된 부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일화를 하나만 살펴보도록 하자.

‘The Compleat Angler’의 초반부에서 아이작은 자기 친구 중에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이란 사람이 있으며 그가 신기한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고 적고 있다.

 

엘리아스 애쉬몰(Elias Ashmole)

 

애슈몰린 박물관(Ashmolean Museum)

 

이 같은 인물이 1672년에 펴낸 자신의 저서 ‘가터 훈장의 역사’에서 아이작 월턴이 왕당파를 위해 목숨까지 걸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으니 허구(虛構)는 아니라는 판단이다.

우스터 전투(Battle of Worcester)에서 올리버 크롬웰에게 패배한 찰스 2세는 프랑스로 망명하게 되는데 도주하는 과정에서 신원이 탄로날 것을 우려해 토마스 블레지(Thomas Blagge) 대령은 레서 조지(Lesser George: 일명 가터 훈장)를 조지 발로우(George Barlow)의 아내에게 맡겼다.

 

토마스 블레지(Thomas Blagge)

 

레서 조지(Lesser George)

 

그러나 찰스 2세는 무사히 빠져나갔지만 토마스 블레지(Thomas Blagge) 대령은 붙잡혀 런던타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한편 그가 맡겨놓았던 찰스 2세의 레서 조지(Lesser George)는 로버트 에스콰이어(Robert M. Esquire)에게 전해졌고, 그는 이것을 다시 아이작 월튼에게 건네주었다.

당시 도주하던 찰스 2세에게는 1천 파운드의 현상금이 걸려있었고, 그의 도주를 도운 사실이 드러나면 최대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아이작 월튼이 동료들이 피 흘려 싸울 때 유유자적했다는 평가와는 다른 행동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책에서 설명하는 것을 보면, 찰스 2세의 레서 조지를 전달받은 아이작은 런던타워에 갇혀 있던 토마스 블레지(Thomas Blagge) 대령에게 이것을 은밀하게 전달하였고 토마스 대령은 런던타워를 탈출하여 그것을 망명 중인 왕에게 전했다고 한다.

만일 아이작 월턴의 이런 행동이 발각되었더라면 그는 최악의 경우, 사형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비겁자의 길을 택했다는 평가와는 상반되는 행동을 보인 것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이에서 보듯이 아이작 월턴에 관한 역사적 자료는 상당히 부족하여 아직은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기에는 모자란다는 것이 개인적인 견해다.

이제 다시 번역하고 있는 ‘The Compleat Angler’로 돌아가 보자.

몇 차례 소개한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는 초판과 5판을 번역한 두 권이 다락원과 강마을을 통해 출판되었다.

그런데 원본에 나오는 사냥꾼을 뜻하는 Venator를 역자(譯者)인 안동림 교수님과 이재룡씨 모두 나그네라고 번역하고 있는 것은, 이것을 나그네(旅人)라고 번역한 일본의 영향이 컸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10편으로 마무리하려는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에 대한 글이 벌써 8번째에 이르렀다. 찰스 코튼(Charles Cotton)이 쓰고 아이작이 가필(加筆)한 2부에서 찰스 코튼은 “책에 나오는 사냥꾼(Venator)은 바로 자신이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인 낚시꾼(Piscator)은 아이작 월턴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데, 만일 The Compleat Angler의 초판에 나오는 사냥꾼(Venator)도 찰스 코튼이었다면 60세의 스승과 23세 제자의 격의 없는 모습에서 얼마나 아이작이 찰스 코튼을 좋아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의 자녀들이 대부분 일찍 세상을 떠난 이유도 있겠지만 찰스 코튼을 아들이라고도 불렀던 아이작 월턴의 모습에서 찰스 코튼은 그에게 제자이자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는 것을 잘 알 게 만든다.

비 내리는 일요일, 창가에 부딪는 빗방울을 보면서 스스로 자문해본다.

내겐 찰스 코튼 같은 사람이 있는가?

셰익스피어도 낚시를 즐겨 했을까?

셰익스피어도 낚시를 즐겨 했을까?

조어대전(The Compleat Angler)을 쓴 아이작 월턴(Izaak Walton)과 동시대에 살았던 문호(文豪) 셰익스피어도 낚시를 즐겨 했을까? 하는 것은 영국인들 사이에서는 오래된 궁금증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셰익스피어가 1564년 4월 26일에 태어나 1616년 4월 23일에 사망하였고, 아이작 월턴이 1593년 8월 9일에 태어나 1683년 12월 15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셰익스피어가 아이작 월턴보다 대략 30살이 더 많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살아있을 때는 아이작 월턴이 낚시를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던 시기도 아니었으며, 전기작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것도 셰익스피어가 죽고 난 뒤 25년 후의 일이니 두 사람 사이의 접점은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작 월턴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었을 가능성은 아주 높으니, 그 속에서 대문호의 낚시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았을 수는 있었을 것입니다. 만일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에 낚시에 관한 얘기들이 있다면.

셰익스피어가 과연 낚시를 즐겨 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영국인들의 생각은 정확하게 반반으로 나뉘어 있어서 아직은 그 누구도 단언할 수는 없으나 연구가 계속되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진실을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데, 저는 셰익스피어가 낚시를 즐겨 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그럼, 이제부터 셰익스피어가 낚시를 좋아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셰익스피어가 태어나기 1년 전인 1563년, 영국에서는 매주 수요일에는 생선을 반드시 먹어야 한다는 법이 제정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중을 위해 제정되었던 것은 아니고, 어업을 통해 걷어 들이는 자금의 규모를 확대하여 정치자금 및 군사자금으로 사용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법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이 법이 시행되고 있을 때 태어났던 셰익스피어는 생선을 어려서부터 자주 먹고 성장했을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가 생활하던 ‘엘리자베스 시대’의 사회분위기는 ‘낚시란 시간을 낭비하고 시대의 흐름과도 맞지 않는 것’이라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인진 몰라도 영국 문예 부흥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이란 평가를 받는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를 비롯하여 윌리엄 브라운(William Browne) 같은 작가들은 그들의 작품에서 낚시를 언급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그가 낚시를 즐겨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근거의 하나인 것이죠.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 낚시에 대하여 언급을 한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행을 조롱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에서 낚시를 무척 좋아했기 때문이라는 어찌 보면 아전인수격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셰익스피어가 작품 속에서 낚시에 대하여 언급한 것으로는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셰익스피어와 클레오파트라’에서 소개한 것처럼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의 2막 5장에 나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의 하나인 오셀로의 2막 1장에는 ‘대구 대가리가 좋다고 연어 꼬리를 내주지는 않는 분별력을 갖추고 마음속을 다스릴 줄 아는 여자’라는 표현이 있고, 햄릿의 2막 1장에는 ‘거짓말을 미끼로 진실이라는 잉어를 낚자는 심사’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도 그가 낚시를 좋아했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의 헛수고(Loves Labour’s Lost)와 리어왕에서는 모두 6번이나 장어에 대한 표현이 나오고 있으며, 그의 작품 전체를 통틀어서는 적어도 12번 이상이나 물고기와 낚시에 관련된 표현이 나옵니다.

특히 윈저의 즐거운 아낙네들(The Merry Wives of Windsor)에서는 낚시용 부츠를 만드는 내용이 나오고 베니스의 상인에서는 “그 우울증을 미끼로 평판이라는 하찮은 모샘치를 낚는 흉내는 행여 말게나.” 하는 표현이 나옵니다.

셰익스피어가 낚시를 즐겨 했을 것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의 의견처럼 저 또한 셰익스피어가 낚시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이처럼 다양한 어종에 대한 표현이 나오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낚시용 부츠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기술적인 묘사는 낚시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다면 나올 수 없는 표현이어서 셰익스피어는 낚시를 즐겨 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가 낚시를 즐겨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근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저 일방적인 추측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 글을 읽으신 분들은 어떻게 생각되십니까? 셰익스피어는 낚시를 좋아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에 대한 저의 탐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셰익스피어와 클레오파트라

아이작 월턴과 조어대전-셰익스피어와 클레오파트라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의 ‘The Compleat Angler’는 출판된 지 300년이 훨씬 지난 책이기 때문에 지금의 시각으로 볼 때는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본문의 내용 중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금어기(fence months)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연어가 산란을 위해 바다에서 강으로 오는 3, 4, 5월을 말합니다.”라고 대답하는 장면이 있다.

이 부분은 오류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3월~5월은 연어의 산란기가 아니란 점이 그것이다. 물론 아주 드물게는 3월에 산란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4월과 5월에 산란하는 연어는 거의 없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350여 년 전의 낚시인이 정확히 모를 수도 있다고 이해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싶다. 이런 부분까지 지금처럼 발달한 과학 수준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아마도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의 ‘The Compleat Angler’는 문학서로만 가치를 지니게 되지 않을까?

또한 그가 했던 낚시방법을 보면 과연 저렇게 채비를 운용하고도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 또한 지금의 시각으로 해석하려 든다면 번역서보다는 차라리 비평서(批評書)를 내는 것이 나을 것이란 생각이다.

오늘도 서론이 길어졌는데 오늘의 주제인 셰익스피어와 클레오파트라의 얘기에 집중해보도록 하자.

아이작 월턴(Izaak Walton)은 ‘The Compleat Angler’에서 클레오파트라에 대하여 두 번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낚시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Antony and Cleopatra)의 2막 5장에 나오기도 한다.

아이작이 썼던 원문을 보면 “And he that reads Plutarch shall find that angling was not contemptible in the days of Mark Antony and Cleopatra.”라고 적고 있는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도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시대에도 낚시는 천한 것이 아니었다고 한다.”고 번역할 수 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의 낚시하는 모습은 FTV의 다큐멘터리 ‘호모 하미오타-인류와 낚시’ 2부에서도 소개가 되고 있는데 아이작 월튼의 조어대전과, 아마도 국내에서는 본인이 최초로 번역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줄리아나 버너스 수녀의 책에 대한 이야기도 나오기 때문에 낚시의 역사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시청을 권한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래 제목은 대비열전(對比列傳)으로 라틴어로 비테 파랄렐레(Vitae Parallelae)가 원제(原題)인데 그 이유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유명인들을 2명씩 서로 비교하면서 적었기 때문이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나오는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낚시하는 모습은 대략 아래와 같다.

어느 날 클레오파트라는 안토니우스를 그녀의 배에 태우고 작은 어선들을 동반하여 나일강으로 낚시를 하러 나갔다. 이전에도 그녀와 낚시를 하면서 조과가 신통찮았던 안토니우스는 어부들에게 돈을 주고 물속으로 잠수하여 자신의 낚싯바늘에 물고기를 걸도록 시켰다.

클레오파트라는 이 모든 것을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하면서, 겉으로는 크게 감탄하며 내일은 훨씬 많이 잡을 것이라고 말하고는 모든 사람들을 다시 초대했다.

그리고 다음날 클레오파트라는 하인들에게 명령하여 안토니우스의 낚싯바늘에 소금에 절인 생선을 걸도록 하였다.

이런 것을 몰랐던 안토니우스는 그날도 자신 있게 낚싯대를 올렸으나 걸려온 물고기는 소금에 절인 것이었으니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꽤나 고생했을 것이 분명하다.

모멸감을 느꼈을 안토니우스를 달래기 위해서 클레오파트라는 “낚시는 가난한 이집트인에게 맡기십시오. 당신이 낚을 것은 많은 도시와 국가와 대륙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위와 같은 내용을 책에서 읽었던 아이작 월턴은 ‘The Compleat Angler’에서 이를 인용했던 것이며 마찬가지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을 읽었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그의 비극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2막 5장에서 아래와 같이 표현하고 있다.

클레오파트라:

And when good will is show’d, though’t come

too short,

The actor may plead pardon. I’ll none now:1060

Give me mine angle; we’ll to the river: there,

My music playing far off, I will betray

Tawny-finn’d fishes; my bended hook shall pierce

Their slimy jaws; and, as I draw them up,

I’ll think them every one an Antony,

And say ‘Ah, ha! you’re caught.

줄리아나 버너스의 낚싯줄을 만드는 방법

줄리아나 버너스의 낚싯줄을 만드는 방법

이 글은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가 쓴 ‘낚시에 관한 논문(The treatyse of fysshynge wyth an angle)’ 중에서 낚싯줄을 만드는 방법 중의 일부분만 발췌하여 번역한 것으로 중세영어로 작성된 원문은 아래와 같으며 이하는 그것을 번역한 것이다.

낚싯대를 만든 후에는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낚싯줄을 염색하면 됩니다.

먼저 흰말의 꼬리털 중에서 가장 가늘고 긴 것을 고르는데 둥근 것일수록 좋습니다.

이런 것을 구하면 그것을 여섯 가닥으로 나누어 각각을 노랑, 초록, 브라운, 황갈색, 적갈색, 회색 등 마음에 드는 색으로 염색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초록색으로 염색하고 싶을 때에는 다음과 같이 하면 됩니다.

작은 냄비에 1쿼트의 에일(맥주)을 넣고 0.5파운드의 백반을 더한 다음, 말의 꼬리털을 넣고 30분 동안 끓인 다음 꺼내어 건조시킵니다.

그 다음에는 냄비에 물 0.5갤런을 넣고 목서초와 같은 염료식물을 두 줌 넣은 다음 돌로 눌러준 상태에서 30분 정도를 끓입니다. 그리고 노란색의 물이 떠오르면 이번에는 녹반가루 0.5파운드를 함께 넣어 반 마일 정도의 거리를 걷는데 소요되는 시간 만큼 더 끓여주십시오.

이 과정이 끝나면 불을 끄고 5시간~6시간 동안 천천히 식혀줍니다. 그리고 나서 털을 꺼내어 건조시키면 됩니다.

그러면 낚시용으로는 최고의 녹색으로 염색되는데 이때 녹반을 많이 넣을수록 좋지만 산화한 구리의 겉에 있는 푸른 녹을 사용해도 됩니다.

이와는 별도로 다음과 같이 하면 더 밝은 녹색으로 염색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연한 납색의 나무통에 말의 꼬리털을 넣은 다음,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염색하면 되는데 이때는 위에서와 같이 녹반이나 산화한 구리의 겉에 있는 푸른 녹을 넣지 않아도 됩니다.

노란색으로 염색하기 위해서는 작은 냄비에 1 쿼트의 에일(맥주)을 넣은 다음, 호두나무잎 세 줌을 넣고 원하는 색이 나올 때까지 담가두면 됩니다.

(이하 생략)

대략 이와 같은 방법으로 낚싯줄을 만들고 염색했다고 하며 책에는 낚싯줄을 어떻게 묶는지 하는 매듭법의 그림도 함께 기록하였다고 되어있으나 목판을 조각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때문에 빠지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도 번역한 것을 공개하려 하였으나 줄리아나 버너스와 관련한 책의 출판에 대한 제의가 있어서 그 결정에 따라 공개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지금은 생략한다는 점을 말씀드린다.

줄리아나 버너스의 낚싯대를 만드는 방법

줄리아나 버너스의 낚싯대를 만드는 방법

이 글은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가 쓴 ‘낚시에 관한 논문(The treatyse of fysshynge wyth an angle)’ 중에서 낚싯대를 만드는 법에 대한 부분만 발췌하여 번역한 것으로 중세영어로 작성된 원문은 아래와 같다.

9월 29일부터 시작되는 성 미카엘 축일로부터 주님의 봉헌 축일인 2월 2일까지 9피트(2m 70cm) 정도의 곧은 모양의 나뭇가지와 양팔을 뻗은 길이만큼의 자작나무, 버드나무, 물푸레나무의 가는 가지를 잘라와서 오븐에서 가열하여 바르게 펴주십시오.

그리고 그것을 식힌 후 한 달 정도 건조시킨 다음 새를 잡기 위한 그물을 만들 때 사용하는 끈(콕슈트)으로 단단히 감아서 긴 나무의자 위나, 아니면 요철이 없는 평평하고 굵은 나무에 묶어두십시오.

※ 새를 잡는 그물을 만들 때 사용하는 끈을 cokshote(현대영어로 cockshoot)라고 한다.

그런 다음에는 배관용 와이어의 한쪽 끝을 갈아서 숯불 속에 넣고 하얗게 될 때까지 가열한 뒤, 그것을 묶어 놓은 나무 막대기의 양쪽 끝으로 넣어 구멍을 뚫습니다. 이때 양쪽의 구멍이 잘 맞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 작업이 끝나면 새를 구울 때 사용하는 꼬챙이를 사용하여 갈수록 구멍이 가늘어지도록 테이퍼(Taper)가 지게 하십시오. 그리고 이틀 동안 식힙니다.

그런 다음엔, 감았던 콕슈트를 풀고 천장(다락)에 올려 연기로 충분히 말려주십시오.

다음은 같은 시기에 따온 녹색 개암나무의 가지를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가열하여 곧게 한 후, 손잡이 부분과 함께 건조시킵니다.

건조가 끝나면 그것을 정확히 손잡이의 절반 길이로 잘라, 손잡이 안에 딱 맞도록 위로 갈수록 가늘어지게 깎아주십시오.

이것이 끝나면 자두나무, 돌능금나무, 모과나무, 향나무의 가지를 잘라와서 곧게 펴줍니다.

그리고 이것을 먼저 만들어둔 손잡이 안에 넣은 다음 묶어주고 바깥쪽을 깎아 끝이 가늘어지도록 테이퍼를 줍니다.

그리고 양 끝에 쇠붙이나 라톤(구리, 아연, 납 및 주석의 합금)으로 만든 고리를 페룰 부위에 연결하여 보강해주십시오.

이때 손잡이 부분을 강하게 고정하고 페룰 부분을 깎아서 1절 부분이 들어갈 수 있게 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6가닥의 말총으로 단단히 감아서 보강하고 초릿대의 끝에는 다른 실을 달아 매듭을 만들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렇게 하면 낚싯줄을 연결할 수 있게 됩니다.

이상으로 낚싯대를 만드는 것이 끝났습니다. 이렇게 하면 낚싯대를 가지고 다녀도 전혀 눈에 띄지 않고, 어디를 가더라도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원할 때마다 언제든 손쉽게 낚시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끝으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림을 첨부합니다.

낚시할 때 참고하는 해수면 온도는 수심 몇 m에서 측정한 것일까?

낚시할 때 참고하는 해수면 온도는 수심 몇 m에서 측정한 것일까?

바다낚시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특히 계절이 바뀌는 환절기의 바닷물 온도를 출조 전에 반드시 확인하실 때가 많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흔히 보시는 해수면 온도를 나타내는 사진은 얼마나 되는 수심에서 측정한 것인지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오늘은 바로 이 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해수온이란 표현은 바다의 표면에 가까운 물의 온도를 말하는 것으로 해수면온도라고도 합니다.

그러면 해수면과 표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해수면과 표층은 같은 의미일까요?

이에 대해서는 해양과학기술연구원의 문의게시판에 좋은 질문과 답변이 기록되어 있는데, 아래에 주소를 기재해두었으니 참고하시기 바라며, 해양과학기술연구원의 답변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해양과학기술연구원 문의게시판

“문의하신 해수면 수온과 관련하여 ‘해수면’, ‘해수 표층’ 또는 ‘해표면’에 대해서 명확한 구분을 가지고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영어로는 모두 SST(sea surface temperature)로 표현합니다.

다만, 관측 방법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에 구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해수의 수온은 해양환경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기술이 개발된 것은 해양학 발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수온측정은 1990년대 직전에 개발된 전도온도계가 시초입니다.

현재는 전기적인 센서를 이용한 CTD가 일반적으로 사용됩니다.

이러한 방식은 바다에 나가 여러 위에서 많은 관측을 하여야만 공간적인 분포를 얻을 수 있기에 많은 자원과 시간이 요구됩니다.

또한 수심에 따른 수온의 구조를 관측하는 목적으로 활용되지만 표면에 아주 가까운 수심의 수온을 관측하는 것에 제한이 있습니다.

때문에 표층에서 가장 가까운 수심의 수온을 ‘표층(surface layer)’으로 보고 분석합니다.

이때의 표층은 환경에 따라 1~3m 정도의 수심이 될 수도 있습니다.

현대에는 인공위성을 이용하여 넓은 영역에 대한 수온의 공간 분포를 관측합니다.

인공위성은 해수의 흑체복사에 의한 적외선을 분석하여 수온을 측정하는 원리입니다.

이론적으로 해양에서 대기로 방출되는 적외선의 경우 수 mm를 넘을 수 없어 인공위성에서 관측되는 수온은 해수 표면의 1mm 이내의 수온으로 간주되므로 해수면(또는 표면, skin) 수온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현재는 두 수온값이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이는 해양 상층은 지속적인 혼합이 유지되고 있어 표층 내에서의 수온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혼합이 활발하여 수온의 변화가 크지 않은 상층 부분을 표면혼합층이라고 부르는데 해역에 따라 시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경우에 따라 수십 또는 수백 미터까지 나타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 CTD, 인공위성 원격탐사 등 관측에 사용한 방법을 명확히 표현할 필요가 있지만 ‘해수면 수온’ 또는 ‘해수 표층 수온’을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지는 않습니다.”

답변 중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으로는 낚시인들이 쉽게 접하는 해수면온도를 나타낸 사진은 인공위성에 의해 관측된 것으로 해수 표면의 1mm 이내의 수온이란 것과 표면혼합층의 수온은 거의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그럼 인공위성으로 관측한 해수 표면의 1mm 이내의 수온과 수심 5m, 10m의 수온은 얼마나 차이가 날까요?

사실 이 부분이 바로 낚시인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점일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수온의 차이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으며 해수 표면의 1mm 이내의 수온과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수심까지를 표층이라 부르는데 더 정확하게는 표층혼합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표층혼합층은 그 깊이가 일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 정의하는 것과 기상관측에서 정의하는 것이 다르므로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과학적으로 해면 부근에는 깊이 방향으로 수온 변화가 적은 층이 있는데 이것을 표층혼합층이라 하며 겨울철에는 표층혼합층이 두껍게 형성되지만 여름철에는 두께가 얇아집니다.

조금 더 과학적으로 정의하자면 표층은 표층혼합층에 섭입대(subduction zone)의 깊이를 더한 것을 말하며 아열대에서는 0~100m의 표층혼합층+섭입대 600m인 700m가 표층을 이루고, 아한대에서는 0~200m의 표층혼합층+섭입대는 0이므로 200m가 표층이 되고 우리나라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광범위하게 정의하다 보면 사실 해수온도를 실생활에서는 활용하기 어려워지죠.

그래서 실생활에서는 바닷물의 밀도가 해수면보다 0.5℃ 낮은 바닷물의 밀도와 같아지는 깊이까지를 표층혼합층의 두께로 정의하여 사용하고 있답니다.

1982년부터 2010년까지 29년 동안 우리나라 연근해의 표층혼합층의 두께는 여름철에는 지금 보시는 사진과 같이 10m 이하를 기록하고 있으며, 겨울철은 남서해는 여름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나 동해에서는 100m를 넘기는 곳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의 포스팅을 마무리해보겠습니다.

해안이나 방파제에서 원투낚시나 루어낚시, 찌낚시를 즐기는 분들이라면 인공위성에 의해 관측된 해수면온도를 그대로 참고하시면 되므로 큰 문제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글을 올리느냐고 물으실 수 있으실 텐데 앞으로 갯바위낚시나 선상낚시를 하실 수도 있을 것이므로 인공위성 사진에 나타낸 데이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조과에 차이가 날 수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함이었다고 답변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해수면온도에 대해 자세히 알아두는 것도 나쁘진 않잖습니까?

약천집(藥泉集) 제28권 잡저(雜著) 낚시이야기-조설(釣說)

약천집(藥泉集) 제28권 잡저(雜著) 낚시이야기-조설(釣說)

우리 선조들께서 사용했던 낚싯바늘에 관한 내용은 조선후기의 문신이었던 남구만(南九萬)이 쓴 약천집(藥泉集)에 있는 조설(釣說)에 나오는 것을 대표적인 것으로 들 수 있다. 그러나 조설(釣說)에 나오는 “(주부들이 사용하는)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들었다.”는 것은 최초의 문헌은 아니다.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든다는 내용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당나라의 시인이었던 두보(杜甫)가 쓴 강촌(江村)이란 시다.

그 시를 보면, “늙은 아내는 종이에 그려 바둑판을 만들고, 어린애는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든다(老妻畫紙爲碁局 稚子敲針作釣鉤: 노처화지위기국 치자고침작조구).”는 내용이 있는데 이 구절을 차용하여 우리의 선조들께서도 많은 시문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려후기의 문인이자 학자요 정치가였던 목은(牧隱) 이색(李穡)이 쓴 목은시고(牧隱詩藁)로 제6권의 즉사(卽事)에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드는 꾀는 엉성도 하여라.(고침작조계우소: 敲針作釣計迂疎)”는 구절이 나온다. 바로 이 표현이 두보의 시 강촌(江村)에서 따온 것이다.

따라서 두보의 시로 미루어볼 때 신라시대부터 이런 낚싯바늘을 사용하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어떤 형태의 바늘인지 전해지는 것이 없어서 정확한 모양은 확인할 길이 없다.

한편 남구만(南九萬)이 쓴 조설(釣說)은 낚시를 소재로 하여 도를 깨닫는다는 것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래도 당시의 낚시에 대한 다양한 면들을 볼 수 있어서 중요한 사료(史料)라고 생각이 된다. 이에 약천집 제28권 잡저(雜著)편에 있는 조설(釣說)을 원문과 함께 기록해본다.

■ 약천집(藥泉集) 제28권 잡저(雜著) 조설(釣說)

세경술여귀전결성(歲庚戌余歸田潔城) 가후유지(家後有池) 종광수십무(縱廣數十武) 이심천육칠척이하(而深淺六七尺以下) 여장하무사(余長夏無事) 첩왕견엄우지(輒往見噞喁之).

경술년(1670년, 현종11년)에 고향인 결성으로 돌아오니, 집 뒤에 넓이는 수십 보요 깊이가 6, 7척이 조금 못되는 작은 연못이 있었다. 긴 여름철 할 일이 없을 때면 종종 연못에 가서 물고기들이 입을 뻐끔거리며 떼 지어 노는 것을 구경하곤 하였다.

일일인인작죽일간(一日隣人斫竹一竿) 고침위조이증여(敲鍼爲釣以贈余) 사수륜어련의간(使垂綸於漣漪間) 여재경사구(余在京師久) 미상지조구장단활협만곡지도여하(未嘗知釣鉤長短闊狹彎曲之度如何) 이린인지증위선야(以隣人之贈爲善也) 수지경일(垂之竟日) 부득일린언(不得一鱗焉).

하루는 이웃 사람이 대나무 하나를 잘라 낚싯대를 만들고 바늘을 두드려 낚싯바늘을 만든 다음 나에게 주면서 물결 사이에 낚싯줄을 드리우게 하였다. 나는 오랫동안 서울에 살았던 터라 낚싯바늘의 길이와 너비와 굽은 정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으므로 그저 이웃 사람이 주었다는 것에 기분이 좋아져 하루 종일 낚싯대를 드리웠다. 하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는 못하였다.

명일유일객래견구왈(明日有一客來見鉤曰) 시의불득어야(是宜不得魚也) 구지말태곡이향내(鉤之末太曲而向內) 어탄지수역(魚吞之雖易) 토지역불난(吐之亦不難) 필사기말소언이향외내가(必使其末少偃而向外乃可) 여사객고이향외(余使客敲而向外) 우수지경일(又垂之竟日) 부득일린언(不得一鱗焉).

다음 날 한 손님이 와서 낚싯바늘을 보고 말하기를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낚싯바늘의 끝이 너무 굽어 안으로 향했으니, 이것은 물고기가 바늘을 삼키기도 쉽고 뱉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반드시 끝을 조금 펴서 밖으로 향하게 해야 합니다.”고 알려주므로, 내가 그 손님으로 하여금 낚싯바늘을 두드려 밖으로 향하게 한 뒤, 하루 종일 낚시를 하였으나 역시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명일우일객래견구왈(明日又一客來見鉤曰) 시의불득어야(是宜不得魚也) 구지말기향외이곡지권차태활(鉤之末旣向外而曲之圈且太闊) 불가이입어지구의(不可以入魚之口矣) 여사객고이착기권(余使客敲而窄其圈) 우수지경일(又垂之竟日) 재득일린언(纔得一鱗焉).

다음 날 또 한 손님이 와서 낚싯바늘을 보며 말하기를 “고기를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낚싯바늘의 끝이 밖으로 향하기는 하였으나 바늘의 굽은 둘레가 너무 넓어서 물고기의 입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알려주므로, 나는 손님으로 하여금 낚싯바늘을 두드려서 바늘의 둘레를 좁게 한 다음 또다시 하루 종일 낚시를 했지만 겨우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 뿐이었다.

명일우이객래(明日又二客來) 여시이구(余示以鉤) 차어지고(且語之故) 기일객왈시의득어소야(其一客曰是宜得魚少也) 구지억이곡지야(鉤之抑而曲之也) 필단기곡첨(必短其曲尖) 사근가이벽립(使僅可以擘粒) 차측곡첨태장(此則曲尖太長) 어탄지불몰(魚吞之不沒) 필차토의(必且吐矣) 여사객고이단기첨(余使客敲而短其尖) 수지양구(垂之良久) 탄구자루의(吞鉤者屢矣) 연인륜이추지(然引綸而抽之) 혹탈이락언(或脫而落焉).

다음 날 또 두 명의 손님이 왔기에 나는 낚싯바늘을 보여주면서 그동안의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랬더니 한 손님이 말하기를 “물고기를 많이 잡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낚싯바늘을 눌러서 굽힐 때에는 반드시 굽힌 곡선의 끝을 짧게 만들어 싸라기 하나를 끼울 만하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은 굽힌 곡선의 끝이 너무 길어서 물고기가 삼키려 해도 삼킬 수가 없기 때문에 틀림없이 내뱉었을 것입니다.”고 하기에, 나는 그 손님으로 하여금 낚싯바늘을 두드려서 뾰족한 부분을 짧게 한 다음 한동안 낚시를 하였다. 이에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여러 번 물기는 하였으나 낚싯줄을 당겨 들어 올리면 빠져서 떨어지곤 하였다.

방일객왈피객지언(旁一客曰彼客之言) 어구야득의(於鉤也得矣) 어추야유의(於抽也遺矣) 부륜지유계개야(夫綸之有繫䕸也) 소이정부침이지탄토(所以定浮沈而知吞吐) 범동이미침야(凡動而未沈也) 탄혹미진(吞或未盡) 이거추지측위미급(而遽抽之則爲未及) 침이소종야(沈而少縱也) 탄차부토(吞且復吐) 이서추지측위이과(而徐抽之則爲已過) 시이필어기욕침미침지간이추지가야(是以必於其欲沈未沈之間而抽之可也) 차기추지야(且其抽之也) 항기수이직상지(抗其手而直上之) 칙어지구방개(則魚之口方開) 이구지말미유소지(而鉤之末未有所搘) 어순구이장간(魚順鉤而張齦) 여상엽지탈조(如霜葉之脫條) 시이필측기수세(是以必側其手勢) 약범수연이추지(若汎篲然而抽之) 연칙어방탄구어후중(然則魚方吞鉤於喉中) 이구내전첨어합리(而鉤乃轉尖於呷裏) 좌격우촉(左激右觸) 필유소섬엽이파견언(必有所㨛擸而爬牽焉) 차소이필득무실야(此所以必得無失也).

이것을 본 옆의 또 다른 손님이 말하기를 “저 손님이 설명한 낚싯바늘에 대한 것은 맞기는 하나 낚싯줄을 당기는 방법이 빠졌습니다. 낚싯줄에 찌를 매다는 것은 부침(浮沈)을 일정하게 하여 물고기가 바늘을 삼켰는지 뱉었는지를 알기 위한 것으로 찌가 움직이기만 하고 잠기지 않은 것은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아직 다 삼키지 않았다는 것으로 이때 갑자기 낚싯줄을 당겨 올리는 것은 너무 빠른 것이고, 찌가 잠겼다가 약간 움직이는 것은 바늘을 삼켰다가 다시 뱉을 때로 이때는 천천히 당기면 늦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반드시 잠길락 말락 하는 때에 당겨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당겨 올릴 때에도 손을 높이 들고 곧바로 들어 올리면 물고기의 입이 벌어져 있기 때문에 낚싯바늘의 끝이 제대로 걸리지 않아 고기가 낚싯바늘을 따라 입을 벌리면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지듯이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반드시 손을 마치 비질하듯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여서 들어 올려야 하고, 이렇게 하면 물고기가 낚싯바늘을 목구멍으로 삼킨 다음이어서 낚싯바늘의 갈고리 부분이 목구멍에 걸려 좌우로 요동을 치면서 펄떡거릴수록 더욱 단단히 박힐 것이니, 놓치지 않고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여우용기법(余又用其法) 수지이귀(垂之移晷) 득삼사린언(得三四鱗焉) 객왈법칙진어시의(客曰法則盡於是矣) 묘유미야(妙猶未也) 취여간이자수지(取余竿而自垂之) 윤여륜야구여구야이여이야(綸余綸也鉤余鉤也餌余餌也) 좌지처우여처야(坐之處又余處也) 소역자특지간지수이(所易者特持竿之手耳) 어내영구이상(魚乃迎鉤而上) 병수이쟁선(騈首而爭先) 기추이취지야(其抽而取之也) 약탐지어광이수지어반(若探之於筐而數之於盤) 무류수언(無留手焉).

내가 그 방법대로 하였더니 낚싯대를 드리운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서너 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손님이 말하기를 “법은 여기서 다하였지만 묘리는 아직 다하지 못하였습니다.” 하고는 내 낚싯대를 가져다가 스스로 드리우니, 낚싯줄도 나의 낚싯줄이요 낚싯바늘도 나의 낚싯바늘이고 미끼도 나의 미끼요 앉은 곳도 내가 앉은 자리였고 단지 낚싯대를 잡은 사람의 손만 바뀌었을 뿐인데도 낚싯대를 드리우자마자 물고기가 미끼를 보고 올라와서 머리를 나란히 하고 서로 물기를 다투면서 잡혔다. 낚싯대를 들어 올려 물고기를 잡는 것이 마치 광주리 속에서 물고기를 집어서 소반 위에 올리는 것과 같아 손을 멈출 틈이 없었다.

여왈묘개지차호(余曰妙蓋至此乎) 차우가이교여호(此又可以敎余乎) 객왈가교자법야(客曰可敎者法也).

내가 말하기를 “기묘함이 이 정도란 말인입니까? 이것도 또한 저에게 가르쳐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손님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묘기가교야(妙豈可敎也) 약가교야(若可敎也) 우비소위묘야(又非所謂妙也) 무이측유일설(無已則有一說) 자수오지법(子守吾之法) 조이수지(朝而垂之) 모이수지(暮而垂之) 전정적의(專精積意) 일루월구이습습이성(日累月久而習習而成) 수차적기적(手且適其適) 심차해기해(心且解其解) 부여시측혹가이득지(夫如是則或可以得之) 여(與) 기미득지여(其未得之與) 혹가이달기미이진기극여(或可以達其微而盡其極與) 오기일이매기이삼여(悟其一而昧其二三與) 기혹일미유소지이반유이자혹여(其或一未有所知而反有以自惑與) 기혹황연자각이불자지기소이각자여(其或恍然自覺而不自知其所以覺者與) 차칙재자오하여언(此則在子吾何與焉) 오소이고자자지어차의(吾所以告子者止於此矣.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법(法)이니, 기묘함을 어찌 말로 가르쳐 드릴 수 있겠습니까? 만일 가르쳐 드릴 수 있다면 그것은 기묘함이 아닌 것이지요. 기어이 말하라고 한다면 한 가지 할 말이 있으니, 그대가 나의 법을 지켜 아침에도 낚싯대를 드리우고 저녁에도 낚싯대를 드리워서 온 정신을 쏟고 마음을 다하여 날이 쌓이고 달이 오래되도록 익힌다면 손이 우선 그 알맞음을 깨닫고 마음은 그 풀이를 터득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같이 하더라도 기묘함을 터득할 수도 있고 못할 수도 있으며, 혹 그 은미한 것까지 통달하고 지극한 묘리를 다할 수도 있을 것이나, 그 중 한 가지만 깨닫고 두세 가지는 모를 수도 있을 것이며, 혹은 하나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스스로 미혹될 수도 있고, 혹은 스스로 깨닫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흐릿하다면 깨달음의 이유를 자신도 알지 못할 수도 있으니, 이는 모두가 그대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찌 제가 간여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대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올시다.

여어시투간이탄왈선부(余於是投竿而歎曰善夫) 객지언야(客之言也) 추차도야(推此道也) 해특용어조이이재(奚特用於釣而已哉) 고인운소가이유대(古人云小可以喩大) 기약차류자비야(豈若此類者非耶).

이에 나는 낚싯대를 던지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손님의 말씀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 도를 미루어 어찌 낚시하는 것에만 쓸 뿐이겠습니까? 옛사람이 말하기를 작은 것으로 큰 것을 비유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어찌 이와 같은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객기거(客旣去) 식기설이자성언(識其說以自省焉).

손님이 떠난 뒤에 나는 그 말을 기록하여 스스로를 돌아본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우리에게는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친숙한 헤밍웨이는 낚시를 즐겨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헤밍웨이가 낚시를 좋아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동기는 쿠바에서 보낸 시절 동안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헤밍웨이 청새치 낚시대회(Ernest Hemingway Marlin Fishing Tournament)”에 쿠바의 지도자 피엘 카스트로와 80년대 그에 관한 책을 소지만 하고 있어도 잡혀가야 했던 체 게바라가 참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 청새치 낚시대회(Ernest Hemingway Marlin Fishing Tournament)”는 195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제10회 대회에 헤밍웨이의 초대를 받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참여하였던 것이며 이 대회 이전에는 낚시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카스트로가 우승을 하면서 헤밍웨이가 카스트로에게 우승컵을 수여하는 사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헤밍웨이의 낚시를 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많은 사람들이 그가 20여년 이상을 생활한 쿠바를 떠올리고 소설 노인과 바다를 연상하게 되는데 사실 헤밍웨이가 낚시에 심취하고 왕성한 집필로 큰 성과를 거둔 곳으로는 플로리다에 있는 키 웨스트(Key West)를 꼽을 수 있습니다.

1928년 4월부터 1939년 12월까지 헤밍웨이의 30대 시절을 보낸 키웨스트의 생활 동안 그가 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 알고 있는 것들인데대충 살펴보면 1929년에 출판된 무기여 잘 있거라’, 1936년 킬리만자로의 눈’, 1940년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들 수 있습니다물론 이들 외에도 1935년에 발표한 수필집 아프리카의 푸른 언덕을 비롯하여 1938년에 발표한 그의 유일한 희곡 5(The Fifth Column)’ 등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시기가 바로 키웨스트에서 거주하는 기간 동안이었습니다.

사실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하여 얘기를 하면 그의 여성편력에 대하여도 얘기를 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여기서는 주된 내용이 낚시에 관한 것이니 생략하기로 하면서 조금만 살펴보면 그가 왕성한 집필을 하는 동안의 부인은 1926년 두 번째 결혼으로 만난 폴린과의 결혼생활 동안이었으며 그녀와 이혼하고 만난 세 번째 부인 마사와 1940년 쿠바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쿠바로 건너간 1940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제가 블로그에서 여러 차례 소개하고 있는 국제게임피싱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Fish Association)의 부회장직을 역임하였던 것입니다.

헤밍웨이는 어려서부터 사냥과 낚시를 즐겨하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본격적으로 대물 새치를 잡는 낚시에 빠지게 된 것은 키웨스트에 사는 동안에 구입한 필러(Pillar)’라고 명명된 보트를 구입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1930년대의 환율과 화폐가치로 계산해보면 현재 원화로 4억 5천만 원이 넘는 금액인 7,495$에 구입한 이 보트는 헤밍웨이가 3,195$를 지불하고 나머지 4,300$는 에스콰이어지로부터 원고료를 선불로 받아 인수하였는데 헤밍웨이는 1933년 가을부터 총 17편의 글을 에스콰이어지에 게재하였고 그 가운데 5편은 청새치 낚시와 관련한 것이며, 4편은 아프리카에서 사냥한 것에 대한 글이었다고 합니다.

헤밍웨이가 보트를 구입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동기는 금주법이 시행될 시기에 주류밀수를 하던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가 가지고 있던 배를 타고 낚시를 하면서라고 하는데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가 배를 소유한 것은 낚시를 하기 위함이 아니고 바다에서 술을 몰래 들여오기 위한 수단이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에서 술과 도박을 즐겼던 헤밍웨이와 그 친구들을 주변에서는 더 몹(The Mob)’이라고 불렀다고 하며 헤밍웨이는 소박하면서도 개성이 강한 그들이 좋았다고 합니다.

낚시를 좋아했던 문호(文豪헤밍웨이는 1961년 7월 2일 심한 우울증으로 자신의 집에서 엽총을 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의 낚시경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 노인과 바다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내장이 상하지 않게 전복을 손질하는 방법

내장이 상하지 않게 전복을 손질하는 방법

전복은 이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는 해산물의 하나지만 손질은 그리 만만하지가 않은데 주부님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은 아마도 관자를 분리하는 일과 내장이 터지지 않도록 분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래서 오늘은 전복을 어떻게 손질해야 내장을 터뜨리지 않고 분리할 수 있는지, 모두가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전복의 입은 과연 제거해야 하는지 등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전복을 세척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인터넷의 정보를 참고하는 것으로 하고 제일 먼저 전복의 내장이라고 하는 간을 터뜨리지 않고 제거하는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자.

전복을 손질하는 방법에 대한 글들을 보면 살과 껍질 사이에 숟가락이나 칼을 넣어 분리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여기에 가장 중요한 부분이 빠져있음을 주목하도록 하자.

전복의 살과 껍질을 분리할 때 숟가락이나 칼을 어느 방향에서 넣는가 하는 것이 전복의 내장을 상하지 않도록 분리하는 관건이다.

먼저 전복을 뒤집어 보면 여러 개의 구멍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이 부분의 안쪽에 전복의 아가미와 내장이 있어서 호흡을 하고 배설물을 배출하며 내장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 부분의 껍질이 반대쪽보다 두꺼운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흔히 전복의 내장이라고 하는 간이 상하지 않도록 분리하기 위해서는 전복의 껍질이 얇은 쪽으로 숟가락을 넣어서 분리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두도록 하자.

다음으로 중요한 사항은 숟가락이나 칼을 넣어 관자를 분리한 후에도 계속해서 돌려가며 전복의 살을 분리하는데 이렇게 하는 것도 내장을 터뜨리게 되는 원인이 되므로 반드시 관자가 분리된 후에는 손가락으로 떼어내는 것이 좋다.

칼이나 숟가락으로 관자를 분리한 후에 손가락으로 분리하는 경우 간혹 아래와 같이 내장이 떨어지지 않는 수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내장을 눈으로 보면서 분리할 수 있으므로 터뜨리지 않고 분리할 수가 있다.

떼어낸 전복의 간에는 모래주머니가 있는데 모든 전복의 모래주머니에 모래가 들어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리재료로 쓰려면 제거해주는 것이 좋다.

그다음 많은 분들이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고 말하는 전복의 입은 가장 딱딱한 부위여서 식감 때문에 제거하기도 하지만 먹을 수도 있으며 칼이 아니라 손으로 제거할 수도 있고 아니면 가위를 사용하여 잘라내도 된다.

끝으로 해산물의 손질에 익숙하지 않은 분들은 자칫하면 다칠 수도 있으므로 가급적이면 목장갑을 착용하고 전복을 손질할 것을 권유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