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날조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은어낚시

일본의 날조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은어낚시

제가 낚시를 주제로 하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영상을 통해 은어 놀림낚시 또는 꾐낚시를 일본에서는 토모즈리(友釣り)라고 부르며, 일본이 발상지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일본의 허위·날조된 역사 속에 등장하는 은어낚시에 대해서 얘기해볼까 합니다.

일본의 역사기록에서 토모즈리(友釣り)란 말이 등장하는 것은 1832년이 처음입니다. 물론 이전부터 은어를 잡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일본 에가와 가문의 사료에는 야나료우(梁漁)라는 구조물을 설치하여 은어를 잡던 어부들이 토모즈리로 은어를 잡아대는 사람들 때문에 세금을 내지도 못할 형편에 처해 있으므로 이것을 금지시켜 달라는 내용을 담은 일종의 탄원서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나료우(梁漁)는 지금 보시는 사진과 같은 것으로 산란을 위해 하류로 내려가는 은어를 잡는 데에는 아주 효과적인 방법이라 할 수 있으며, 현재는 지자체들이 관광상품으로 개발하여 운영하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본의 역사왜곡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는 임나일본부설입니다.

4세기경 삼한(三韓)을 정벌하고 임나일본부를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인물은 진구황후(神功皇后)로 일본에서조차 지어낸 인물이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고사기(古事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가짜(위서:僞書)라는 평가를 일본 내에서도 받고 있지만, 오늘은 은어낚시에만 집중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은어낚시는 진구황후에 대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입니다.

진구황후가 신라 원정에서 돌아온 다음 현재 사가현의 가라쓰시(唐津市) 강가에서 옷의 실을 뽑아 낚싯줄을 만들고, 바늘을 구부려 낚싯바늘을 만든 다음, 밥알을 미끼로 은어를 잡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는 여기에 머물지 않고, 진구황후가 밥알을 끼운 낚싯바늘을 강에 던지며 “신라 정벌이 성공한다면 물고기가 이것을 먹을 것이다.”고 말했고, 은어가 잡히자 “신은 우리 편이다. 정벌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고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민물고기 중 일본에서 가장 많이 먹는다는 은어는 민물어획고의 25%를 차지할 만큼 일본인에게 사랑받아온 물고기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날조된 역사는 바로잡아야 하겠지요.

진구황후가 정벌이 성공할 것이라면 물고기가 잡힐 것이다라고 말한 뒤 은어가 잡혔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주장이 일본 내에서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4세기 경 일본에서 배를 타고 신라로 오기 위해서는 동풍이 불어야만 했을 것임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은어를 아유(あゆ)라고 하는데, 이전에는 동풍(東風)도 아유(あゆ)라고 불렀죠.

이런 이유로 일본의 사학자들 중에는 진구황후가 “동풍은 아직인가?”라고 물은 것을 “은어는 아직인가?”라고 생각하여 날조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나 객관적으로 봐도 이 주장이 훨씬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까?

이 밖에도 나무위키의 표현을 빌면 과장과 주작이 많다는 일본서기에는 은어와 관련한 또 하나의 얘기가 나옵니다.

일본의 초대 진무천황(神武天皇)은 적에게 포위되었을 때 “아마노카구야마(天香久山)에서 나는 흙으로 술병을 만들고, 술을 담아 강에 가라앉힌 뒤 물고기가 떠오르면 무기가 없어도 일본을 평정할 수 있다.”는 꿈을 꾸었다고 하는데, 그의 시종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이에서 비롯되어 일왕의 즉위식에 등장하는 깃발인 만세번(万歳幡)에도 은어가 그려져 있는 것이죠.

 

이처럼 은어는 일본인의 생활과 밀접하고,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함에 있어서도 중요한 것이었기에 은어낚시와 관련한 것들은 모두가 일본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는 것이라는 생각에 도달하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일본에서는 3백여 년 전에 이미 토모즈리가 성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채비의 설명이 그림으로 그려진 것은 1907년의 일본어류도설이 최초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 등장하는 은어(銀魚)는 낚시에 관련한 내용은 전무하며 주로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공물의 진상에 관한 것들이 대부분이죠.

예를 들어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세종 15년인 1433년에 은어를 천신(薦新)하기 위하여 특별히 저장시켰으나 진상한 생선이 썩어 문드러져 쓰지 못하였기 때문에 얼음을 저장하던 곳을 혁파하였다고 나오거나 문종이 즉위한 해인 1450년에는 독약을 사용하여 은어를 잡는 것을 금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상소가 나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일본보다 앞서 은어를 먹거나 임금에게 진상했다는 기록은 나오지만 독약을 사용했다는 것 외에는 어떻게 잡았는지 하는 자료는 거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죠.

고기만 잘 잡으면 되지 낚시에서 무슨 역사를 논하고, 역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냐고 힐난하실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우리의 고유한 낚시문화와 역사를 기록하고 제대로 전달하고 싶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⑨ 플라이 낚시를 즐긴 리츠 호텔의 찰스 리츠 회장

세계의 유명 낚시인⑨ 플라이 낚시를 즐긴 리츠 호텔의 찰스 리츠 회장

리츠호텔이란 이름보다는 리츠칼튼이란 이름이 더 잘 알려진 호텔은 스위스 출신의 세자르 리츠(Cesar Ritz)가 프랑스 파리의 맨션을 인수하여 1898년 6월 1일 개관했던 호텔 리츠(Hotel Ritz)가 그 효시였다.

세자르 리츠(Cesar Ritz)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플라이낚시를 즐긴 것을 뛰어넘어 전문가란 평가를 들을 정도로 낚시에 심취한 인물로 환경보호에도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이란 시리즈를 마지막으로 연재한 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니 정말 오랜만에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 동기는 며칠 전에 올린 ‘피더낚싯대에 표시된 파운드(lb)의 의미’란 글에서 다루었던 테스트 커브(test curve) 때문이었다.

 

낚싯대의 끝이 수평에서 90도 각도로 휘어지는데 필요한 무게를 뜻하는 테스트 커브(test curve)란 개념의 체계적인 정리는 리차드 워커(Richard Walker)가 쓴 책(Still-Water Angling)에 잘 나와 있는데 잉어낚시용 로드를 만들 때 이 개념이 사용된 것은 1950년대 무렵부터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테스트 커브(test curve)는 측정하는 방법과 그 수치를 해석하는 방법에 따라 달라진다는 기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 낚싯대를 만드는 소재가 대나무에서 유리섬유를 거쳐 탄소섬유로 발전하면서 로드를 만드는 블랭크의 무게나 탄성계수 및 사용된 가이드에 의해서도 측정치가 달라질 수 있는 큰 흠결을 가진 불완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행적으로 테스트 커브(test curve)를 로드의 제원으로 표시하고 있는 유럽의 제품들을 구매할 때는 이런 점을 면밀하게 살필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이처럼 불완전하고 오류가 많은 측정치인 테스트 커브(test curve)를 적용하지 않고 낚싯대를 제작해서 판매한 인물이 오늘의 주인공이자 프랑스 파리 리츠호텔의 회장이었던 찰스 리츠(Charles Ritz)란 사람이다.

찰스 리츠(Charles Ritz)가 만들었던 플라이 로드는 기존의 로드들과는 달리 초릿대의 끝부분은 경사(테이퍼: Taper)가 지지 않도록 평행하게 만들고 초릿대의 끝부분을 아주 딱딱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다.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1917년 호텔경영을 배우기 위해 미국 뉴욕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남는 시간을 이용하여 전당포에서 구입한 낚싯대를 수리한 다음, 재판매를 하였다고 하니 사업수완도 수완이지만 낚시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아주 높았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1927년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포부흐그 셍또노헤 가(Rue du Faubourg Saint-Honoré)에 신발가게를 차렸지만 가게의 뒤편에는 낚싯대를 만들고 수리하는데 필요한 도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이후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플라이 낚싯대 제작의 장인인 짐 페인(Jim Payne)의 도움을 얻어 그 유명한 파라볼릭(Parabolic) 로드를 세상에 선보이게 되고 이를 선물 받았던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았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로부터는 “내가 아는 최고의 플라이 낚시인”이라는 찬사를 받기에 이르렀다.

 

짐 페인(Jim Payne)

 

이것뿐이었다면 찰스 리츠(Charles Ritz)를 세계의 유명 낚시인이라고 소개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이에 더하여 그는 플라이낚시에 있어서 필독서라고 할 수도 있는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1953년 프랑스어로 프리스 수르 르 비프(Pris sur le Vif)란 제목으로 펴낸 책이 그것으로 캐스팅 챔피언들의 자세를 관찰하고 분석하여 하이 스피드와 하이 라인과 같은 현대 캐스팅 이론을 구축한 것이 가장 큰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으며 그 외에도 플라이낚시에 관한 정보와 그의 추억 등이 담겨 있다.

그 뒤 이 책은 1955년에는 독일어로, 1959년에는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고 가까운 일본에서도 번역본이 출판되었으나 불어를 하지 못하는 나는 영문판인 ‘A Fly Fisher’s Life’를 구해서 읽어보았다.

 

이론과 실기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었던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환경보호에도 앞장섰던 인물이어서 유명 낚시인으로 소개하기엔 부족함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찰스 리츠(Charles Ritz)는 1958년, 강의 수질과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하여 친한 낚시인들과 함께 국제파리오클럽(International Fario Club)을 결성하고 매년 프랑스 파리에서 모임을 개최하였으며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를 편집자로 초빙하여 플라이낚시에 관한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폐간이 되었다.

 

찰스 리츠(좌)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우)

 

1976년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그를 기리기 위해 국제파리오클럽(International Fario Club)은 찰스 리츠(Charles Ritz)의 이름을 딴 상(The Prix Charles Ritz)을 제정하여 수생환경의 보호와 개선에 이바지한 개인과 단체를 선정하여 매년 시상을 하고 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⑧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

세계의 유명 낚시인⑧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서 코발로브스키의 이름을 들어본 국내 낚시인들은 극히 드물 것으로 생각이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8번째로 소개하는 이유는 그가 개발한 릴이 특히 빅게임 피싱에서 큰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다소 생소한 빅게임 피싱(혹은 스포츠 피싱이라고도 부른다)은 주로 새치류를 잡는 낚시를 말하는데 배를 타고 트롤링으로 새치(Billfish)류를 잡는 것은 비용문제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잡을 수 있는 지역이 없다는 것이 국내에서 빅게임 피싱(Big Game Fishing)에 대한 관심도가 높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미국과 남미를 비롯하여 일부 유럽의 국가와 일본에까지도 잘 알려져 있는 유명한 낚시인으로 제인 그레이(Zane Gray)란 사람이 있는데 그동안 세계의 유명 낚시인 시리즈에서 여러 차례 언급은 했으나 아직 소개는 하지 않고 있는 이 사람은 명실상부하게 빅게임 피싱(Big Game Fishing)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으며 6번째로 소개했던 올브라이트 노트의 개발자인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 역시도 제인 그레이(Zane Gray)의 영향으로 낚시의 세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처럼 지대한 영향을 끼침과 함께 수많은 공적을 남긴 제인 그레이(Zane Gray)는 낚시에 관한 기술을 집약해놓은 책(Zane Grey’s Adventures In Fishing)에서 코발로브스키의 이름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위대한 코발로브스키(The great Kovalovsky)’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니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가 빅게임 피싱에 미친 영향이 컸던 것만은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다.

낚시인들 사이에서 코발로브스키(Kovalovsky)라는 단어는 사람의 이름을 말함과 동시에 릴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으로 통하는데 이 릴을 개발한 사람이 바로 아서 코발로브스키였음은 짐작하는 그대로다.

1881년 헝가리에서 태어나 금속세공사로 일을 하던 코발로브스키는 1904년 미국으로 이민하여 자동차기술자로 일을 했는데 1918년에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를 하고 자신의 가게를 직접 개업하여 자동차 수리업을 운영하면서 평소에 즐기던 낚시의 장비개발에도 나서게 되는데 그 결과, 1928년에 자동차의 디스크 브레이크와 유사한 구조의 드랙시스템을 갖춘 2단 구조의 72파운드 라인이 500m 정도 감기는 기어비 2:1의 릴을 선보이게 된다.

기존의 릴과는 다른 독특한 구조를 지녔던 코발로브스키의 릴은 손잡이 부분이 2단으로 되어 있었고 위에는 나사 같은 것이 달려있었는데 이 나사가 드랙을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아래의 큰 손잡이는 스풀을 회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핸들에서 손을 떼지 않고도 드랙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이렇게 하여 세상에 선을 보였던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가 개발한 릴은 낚시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마침내는 제인 그레이(Zane Gray)도 그의 고객이 되게 된다.

그러던 중 계속해서 자동차수리점을 운영하던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는 밀려드는 주문 때문에 본업이 뒤로 밀리게 되자 릴을 개발한지 3년 뒤인 1931년에는 아예 릴을 생산하는 사업을 아들인 오스카 코발로브스키(Oscar Kovalovsky)와 함께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코발로브스키(Kovalovsky)란 상품명은 홍보에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유명한 낚시인이자 그의 고객이었던 제인 그레이(Zane Gray)와 상의하여 ‘코발로브스키 제인 그레이 릴’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를 하게 된다.

1930~1940년대의 릴을 개발한 사람들의 이력을 보면 시계를 만들던 사람이었거나 보석을 가공하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에 비해 자동차 기어와 브레이크의 원리 및 시스템에 밝았던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가 만든 릴은 기존의 릴들과는 차별화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 참전과 함께 재료의 공급이 끊기게 되어 릴의 생산은 중단되게 되었으며 종전과 함께 생산이 재개되었으나 이전의 명성을 회복할 수는 없었고 1958년에 77세의 나이로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그의 아들인 오스카 코발로브스키(Oscar Kovalovsky)가 명맥을 이어나가면서 1981년에는 그의 아버지인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릴을 출시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골동품가게에서나 볼 수 있는 제품이 되고 말았다.

오스카 코발로브스키(Oscar Kovalovsky)

 

아서 코발로브스키(Arthur Kovalovsky)의 릴에 대한 우수성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은 ‘Zane Grey’s Adventures In Fishing’이란 책인데 이 책속에서 제인 그레이는 이렇게 표현을 하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엄청난 물고기와 싸우기 위한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나는 코발로브스키 릴의 드랙을 7파운드까지 올리기로 했는데 이런 드랙 값은 이전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것으로 최초의 경험이다.”

아래의 사진은 1936년에 제인 그레이가 코발로브스키 릴을 사용하여 잡은 무게 470㎏의 타이거 상어와 함께 찍은 것이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⑥ 지미 올브라이트와 그가 만든 매듭법

세계의 유명 낚시인⑥ 지미 올브라이트와 그가 만든 매듭법

사진의 오른쪽이 지미 올브라이트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란 사람이 만든 매듭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우리에게는 올브라이트 노트가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세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매듭법은 그가 만든 네일 노트(Nail Knot)라는 것으로 블루길 크기부터 참치를 잡는데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되지만 튜브나 도구를 필요로 한다는 점 때문에 아마도 국내에서는 많이 사용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지미 올브라이트에 대해서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그가 개발한 올브라이트 노트(정식명칭은 올브라이트 스페셜: Albright Special)의 방법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미 올브라이트가 대중으로부터 인지도가 높아진 것은 미국의 31번째 대통령이었던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를 비롯하여 영화배우 지미 스튜어트(Jimmy Stewart)와 머나 로이(Myrna Loy) 등에게 낚시를 가르친 것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는 메이저 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의 선수였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와의 인연과, 현대 플라이낚시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조 브룩스(Joe Brooks)와 함께 1946년부터 바다낚시를 함으로써 조 브룩스(Joe Brooks)가 1950년에 유명한 저서 “Saltwater fly fishing”을 출간하는데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사실 지미 올브라이트보다도 유명한 사람이 조 브룩스(Joe Brooks)지만 거의 동시대를 살았던 두 사람 모두를 Saltwater fly fishing의 개척자라고 부르는 것에는 대부분이 동의를 합니다.

두 사람 이전에는 플라이낚시를 바다에서 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는데 특히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하면서 플라이낚시와 관련한 10권의 책을 발간하고 골프선수 잭 니클라우스와 가수 빙 크로스비를 비롯하여 지미 올브라이트와 친분이 깊었던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와도 친구가 되었던 조 브룩스(Joe Brooks) 덕분에 널리 보급되었다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1902년 인디애나에서 태어난 지미 올브라이트는 1935년 마이애미로 이주하여 인명구조원으로 근무하다가 스포츠피싱의 선구자였던 제인 그레이(Zane Gray)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참고: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낚싯배의 선원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플로리다 주에 정착한 지미 올브라이트가 바다에서 플라이낚시로 본피시(여을멸)를 잡았다는 소식을 접한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지미에게 연락을 해와 두 사람은 처음으로 함께 낚시를 하며 본피시(여을멸)와 타폰을 잡았지만 당시 바다에서의 플라이낚시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많았던 터라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지는 못했습니다.

 

본피시를 잡은 테드 윌리엄스

 

타폰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는 만일 군에 복무하지 않았더라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깰 수 있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통산 521개의 홈런을 때린 그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포함하여 모두 5년이라는 시간을 해병대에서 조종사로서 복무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시즌 중임에도 비행훈련을 다시 받으면서 자원하여 참전을 준비하였는데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한국으로 떠나기 직전에 가진 레드삭스의 홈구장인 펜웨이 파크에서 열렸던 경기는 “테드 윌리엄스의 날”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미 올브라이트가 살던 플로리다의 아일라모라다는 당시 전기와 수도사정이 원활하지 못했고 지미 또한 자기의 배를 소유하지 못하고 남의 배를 몰던 때라 수입이 많지 않아 생활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던 관계로 거주하던 집은 지붕에 구멍이 나있을 정도로 열악했는데 이런 사실을 알게 된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가 모든 비용을 부담하여 집을 수리해주었다고 합니다.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는 ‘국제게임피싱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Fish Association)’이 선정하는 명예의 전당에 해당하는 상(LC&C Award)을 사망한 이후인 2013년에 수상을 하였는데 그가 개발한 올브라이트 매듭은 IGFA의 라인 클래스 기록에 도전하는 사람들에게는 표준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LC&C는 Legendary Captains and Crew의 약자입니다.)

※ IGFA(국제게임낚시협회) 낚시규정(영문)번역

 

지미 올브라이트(Jimmie Albright)가 개발한 매듭법 중에서 국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올브라이트 매듭법의 정식명칭은 올브라이트 스페셜이고 이것의 변형으로는 알베르토 매듭법이 있는데 올브라이트 노트의 자세한 방법은 아래의 사진이나 링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직결 매듭법-올브라이트 노트(Albright Knot)

세계의 유명 낚시인⑤ 최단기간 월드 슬램을 달성한 러스 헨슬리(RUS HENSLEY)

세계의 유명 낚시인⑤ 최단기간 월드 슬램을 달성한 러스 헨슬리(RUS HENSLEY)

배를 타고 트롤링으로 새치(Billfish)류를 잡는 것은 비용문제 때문에 쉽게 접근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국내에서는 잡을 수 있는 지역이 없다는 것이 국내에서 빅게임 피싱(Big Game Fishing)에 대한 관심도가 높지 않은 이유일 것입니다.

즉, 간단히 말하면 시간과 자금력이 없으면 하기 어려운 종목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스포츠 피싱의 선구자인 제인 그레이(ZANE GREY) 이후에 활성화되기 시작한 빅게임 피싱은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기록들을 양산하고 있는데, 오늘은 한국의 낚시문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이 분야에서 최단기간 내에 월드 슬램을 달성한 러스 헨슬리(RUS HENSLEY)를 소개할까 합니다.

 

먼저 월드 슬램이라는 것은 9종류의 새치(Billfish)를 모두 잡는 것을 말하며 그랜드 슬램은 하루에 녹새치, 백새치, 돛새치를 모두 잡는 것을 말하고, 슈퍼 그랜드 슬램은 그랜드 슬램의 3종류에 황새치를 포함하여 하루 동안에 잡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트리플 그랜드 슬램이라고 하는 것은 그랜드 슬램을 3일 연속으로 달성한 것을 말하는데 이 모든 것을 달성한 러스 헨슬리(RUS HENSLEY)는 이전까지의 기록을 깨고 불과 5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9종류의 어종을 모두 잡는 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그리고 흥미 있는 것은 트리플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날은 공식적으로 그가 소유했던 길이 55피트의 배 “비스터마스터(Beastmaster)”가 은퇴하기 전날이었다고 합니다.(월드 슬램보다도 트리플 그랜드 슬램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아쉽게도 러스 헨슬리가 활동한 모습이 사진으로 남은 것은 별로 없으며 주로 잡지에 게재된 작은 사진뿐이어서 보여드릴 수는 없지만

 

지금은 그의 아들 클레이 헨슬리(Clay Hensley)가 대를 이어 낚시를 하고 있으며 그는 아예 다니던 석유회사도 그만두고 “FREED’EM”이란 가게를 운영하면서 2001년에는 “후커(Hooker)”로 명명된 배를 구입하여 아버지인 러스 헨슬리가 선장을 따로 고용하여 낚시를 했던 것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선장으로써 배를 몰면서 주로 대서양의 카보베르데(Cape Verde Islands)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9종류의 새치(Billfish)를 모두 잡는 월드 슬램을 달성한 사람의 숫자는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아주 적다는 것만 알고 있는데 이웃나라 일본에서도 다카하시 이치로(高橋一郎)란 사람이 월드 슬램을 달성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러스 헨슬리(RUS HENSLEY)는 태그 & 릴리스를 모범적으로 실천한 것으로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는 미국의 낚시용품 회사인 AFTCO (American Fishing Tackle manufacturing Company)가 수여하는 태그 어워드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며 1991년에는 360마리 이상의 빌피시에 태그를 붙여 놓아준 기록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월드 슬램을 달성하기 위해서 잡아야 하는 새치류는 아래의 7종류이며 돛새치(Sailfish)를 태평양과 대서양의 것으로 구분하고, 녹새치(Blue Marlin)도 대서양과 인도-태평양의 것으로 구분을 하여 모두 9종류가 되는 것입니다.(한국명이 없는 어종도 있어서 모두 영어로 표기하였습니다)

▶ Sailfish

 

▶ Shortbill spearfish

 

▶ Longbill spearfish

 

▶ White marlin

 

▶ Striped marlin

 

▶ Blue marlin

 

▶ Black marlin

세계의 유명 낚시인④ 카이트 피싱(kite fishing)의 선구자 밥 루이스(Bob Lewis)

세계의 유명 낚시인④ 카이트 피싱(kite fishing)의 선구자 밥 루이스(Bob Lewis)

밥 루이스는 IGFA에서 제정한 기포드상(Tommy Gifford Award)의 수상자이기도 한데 이 상은 전설적인 선장과 선원(LEGENDARY CAPTAINS AND CREW)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전설적이라는 표현보다는 “명예의 전당”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은 상입니다.

연을 이용한 낚시법은 태평양의 원주민들이 사용하기도 하고 오래전 이집트에서도 사용하였다는 기록은 있으나 체계적으로 기술을 다듬어 사용한 것은 1949년부터 밥 루이스에 의해서 부터라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사우스 플로리다 해역에서 돛새치를 잡기 위해 연(카이트)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그의 아들인 지미 루이스(Jimmy Lewis)가 전수받아 맥을 이어나가고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운영하는 사이트(Lewis Fishing Kites)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루이스 부자

 

한국에서는 너무 생소한 낚시방법이어서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면 여행상품이 먼저 나올 정도인데 미국과 뉴질랜드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는 방법이며 특히 미국은 배에서 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뉴질랜드에서는 바닷가에서 하는 카이트 피싱을 즐기는 사람들이 많으며 매년 카이트피싱 대회가 개최되기도 합니다.

해변에서 카이트 피싱을 하면 원투낚시로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거리보다 훨씬 멀리 캐스팅할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며 뉴질랜드에서는 10배 정도 멀리 보낼 수 있다는 정보도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배에서 하는 카이트 피싱은 멀리 던질 필요는 없고 살아있는 생미끼를 사용하여 수면 근처에서 움직이도록 만들어 낚시를 하는데 이때 생미끼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연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연을 사용하여 낚시를 하는 것은 허가를 득해야 하는 주낙(연승:延繩이라고도 함)의 일종으로 판단되기에 일반인들이 이 방법으로 낚시를 하는 것은 국내법에 저촉되는 불법행위가 될 공산이 크다는 생각이며, 조만간 관계부처에 이와 관련한 질의를 해보고 결과가 나오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어떻게 카이트 피싱을 하는가를 알아보도록 하겠는데 아래에 게재하는 사진은 맨 밑에 첨부된 유튜브의 영상을 캡처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그리고 연을 날리는 방법도 모두가 같지 않고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특히 배에서 하는 카이트피싱은 연을 날릴 때에도 로드를 이용한다는 점이 해변에서 하는 방법과의 또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우선 연을 띄우는데 바람이 없어서 연이 바다에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헬륨이 든 풍선을 달아주기도 하는데 이것은 배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며 해변에서 할 때에는 크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헬륨가스가 든 풍선을 함께 달아주면 연줄이 끊어졌을 때 연을 회수할 수도 있기 때문에 배에서 카이트 피싱을 하는 경우에는 필수라고 생각이 됩니다.

 

2.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도구라고 할 수 있는 릴리스 클립(release clip)을 연줄에 연결을 해주는데 릴리스 클립은 아래와 같이 물고기가 바늘을 삼키고 격렬하게 움직이면 라인이 이탈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 숙련도에 따라 사용하는 릴리스 클립의 개수를 늘여 여러 개의 바늘로 공략할 수 있습니다.

 

3. 부력이 있는 찌 등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페트병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사진과 같이 목줄과 바늘을 연결하고 생미끼를 단 다음 릴리스 클립에 라인을 넣고 바다에 던져줍니다.

 

4. 그 다음 연줄과 낚싯줄을 모두 풀어주는데 이렇게 풀려나간 라인의 위치를 쉽게 확인하기 위해서 부력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5. 라인의 움직임이나 부력재의 물에 잠기는 모습과 로드의 움직임 등으로 입질을 확인하고 챔질을 하면 되는데 이후의 동작은 일반적인 낚시의 방법과 동일합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③ IGFA의 설립자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

세계의 유명 낚시인③ IGFA의 설립자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

‘국제게임피싱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Fish Association)’이란 단체는 국내의 낚시인들에게는 조금은 생소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유명 낚시인을 소개하는 글의 세 번째 주인공으로 IGFA의 설립자인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를 소개하는 이유는 “물고기에 대한 연구”라는 IGFA의 설립목적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그 이전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대형물고기들에 대한 학술적인 연구를 함으로써 ‘해양과학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낚시인’으로 선정되어 국제해양학재단(International Oceanographic Foundation)이 수여하는 최초의 수상자였기도 하고 어족자원의 보호를 위해 낚시인들이 지켜야할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가 IGFA를 설립한 동기는 최초로 IGFA의 사무실이 설치되었던 장소인 미국의 자연사박물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1935년 비미니에서 잡은 대서양녹새치의 박제를 박물관에 기증하고 싶다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에 대한 자문을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가 하게 되었고 그 후 6년 동안 호주와 뉴질랜드로 다랑어류의 연구를 박물관과 함께 진행하면서 그 관계가 깊어지게 되었는데 그와 함께 탐사를 했던 자연사박물관의 윌리엄(William King Gregory) 박사는 IGFA의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마이클 러너가 하던 당시의 빅게임 피싱은 부유한 자들이 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것이었는데(저 같은 서민에게는 지금도 그렇지만) 그가 이런 낚시를 즐기고 설립한 IGFA에 많은 금액을 기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성용 패션업체인 ‘뉴욕 앤 컴퍼니(New York & Company, Inc.)라는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연사박물관과 함께 총 7번에 걸친 탐사를 통해 해양학에 공헌을 했을 뿐만 아니라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는 낚시로도 유명한데 아래의 사진은 그가 캐나다의 노바스코샤 주에 있는 웨지포트란 곳에서 일주일 동안 낚시로 잡은 참다랑어들이라고 합니다.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의 업적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해양학에 관한 공헌보다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에 미국의 모든 구명정에 비치되었던 “서바이벌 피싱 키트(Survival fishing kits)”를 개발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이 개발된 것은 일본으로부터 진주만공격을 받은 직후에 펜실베니아의 주지사를 지냈던 기포드 핀초트(Gifford Pinchot)가 당시에 사용하던 군용 구명장비가 모두 구식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에게 새로운 구명장비를 개발할 위원회의 책임자를 맡아줄 것을 부탁하면서 부터입니다.

아무튼 캔에 담겨 있는 것을 꺼내어 구명조끼 위에 착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서바이벌 피싱 키트(Survival fishing kits)”는 현재 미국의 모든 선박과 항공기에 비치하는 키트의 표준이 되었으며 이것을 사용함으로써 표류하면서 생존할 수 있는 기간이 대폭 늘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세계의 유명 낚시인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소개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여성 편력이 심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는 아내인 헬렌 러너(Helen Lerner)와 함께 낚시를 즐겼는데 아래의 사진은 두 사람이 노바스코샤 주의 케이프 브래턴에서 낚시로 잡은 황새치의 사진으로 아내가 잡은 오른쪽의 것이 134kg, 왼쪽의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가 잡은 것은 89kg라고 합니다.

 

대성양의 서쪽에 황새치의 산란장소가 있다는 것을 최초로 밝힌 것으로 해양학의 발전에 공헌한 마이클 러너(Michael Lerner)는 마이애미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는데 그가 설립한 아직은 한국의 낚시인들에게는 생소한 ‘국제게임피싱연맹(IGFA: International Game Fish Association)’의 참여가 앞으로는 활발해졌으면 하는 생각을 전하며 글을 마칩니다.

고전(古典)을 통해 알아보는 선조들의 낚시문화

고전(古典)을 통해 알아보는 선조들의 낚시문화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으로는 소동파로 널리 알려진 북송시대의 문인 소식(蘇軾)이 쓴 동파전집 23권 강교(江郊)에 나오는 아래의 구절을 들 수 있다.

의조망어(意釣忘魚), 악차간선(樂此竿綫), 優哉悠哉(우재유재), 玩物之變(완물지변)이 그것으로 “고기는 잊고서 낚시만 생각하며, 낚싯대와 낚싯줄만 즐기노라. 조용하고도 한가로이, 사물의 변화를 즐겨 구경하노라.”라는 말이다.

이는 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낚싯대를 드리우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낚시인들의 마음을 잘 표현한 것이라 생각되는데 오늘은 우리의 고전 속에 나오는 선조(先祖)들의 낚시문화를 알아보도록 하자.

■ 조선왕조의 시조회(始釣會)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조 19년, 1759년 3월 10일에 내원(內苑)에서 모두 54명이 모여 꽃구경을 하며 낚시를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가 네 마리를 잡았고 물고기를 잡을 때마다 음악을 연주하고 잡은 고기는 다시 놓아주었으며 이 행사는 밤이 되어서야 끝났다고 한다.

원문의 내용을 일부분만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경인(庚寅)/소제각신(召諸閣臣), 상화균어우내원(賞花鈞魚于內苑).

여러 각신들을 불러 내원(內苑)에서 꽃구경과 낚시를 하였다.

上曰(상왈). 여자설치내각이래(予自設置內閣以來), 범재시직자(凡在是職者), 시동가인(視同家人), 금일지회(今日之會), 당용가인지례(當用家人之例). 각신자제(閣臣子弟), 개허여연(皆許與筵).

임금이 이르기를 짐이 규장각을 설치한 이래로 이 직책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집안사람처럼 생각하였으니, 오늘의 모임도 마땅히 집안사람의 준례를 적용하여 각신의 자제들도 모두 이 자리에 참여하기를 허락하노라.

정조가 만든 규장각(奎章閣)은 송나라의 천장각(天章閣)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천장각에서 매년 봄과 여름에 후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를 했던 것을 따온 것이다.

 

■ 문종은 낚시동호회의 회장?

예종실록 3권에는 예종 1년이던 1469년 1월 22일 당시 세자의 신분이었던 문종이 밤에 신하들을 불러 경회루(慶會樓) 연못에서 낚시를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 문종은 조선왕조의 낚시동호회를 만들었던 것일까?(ㅎ)

원문: 시문종위세자(時文宗爲世子), 야여제군(夜與諸君), 조경회루지(釣慶會樓池), 소사복관원형입견(召司僕官元亨入見).

 

■ 성종도 릴낚시를 즐겼을까?

“낚시용 릴의 역사”에서 잠깐 살펴보았던 조거(釣車)는 원래 조어거(釣魚車)라고 하는 것으로 일본의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남송시대의 화가 마원(馬遠)이 그린 한강독조도(寒江獨釣圖)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세계 최초로 낚시에 릴을 사용하였다는 기록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런데 조선왕조 역대 임금들의 시문을 모아놓은 열성어제(列聖御製)에도 성종(成宗)이 쓴 소상팔경(瀟湘八景)에써 조거(釣車)라는 표현이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半碎收漁網(반쇄수어망): 반쯤 부서진 어망을 거두며

長歌揮釣車(장가휘조거): 크게 노래하고 낚싯줄을 당긴다.

乾坤無特緖(건곤무특서): 세상에 특별한 마음이 없어

風月自然斜(풍월자연사): 바람과 달에 자연히 기우는도다.

■ 최초의 선상낚시 실족사

안전한 낚시는 시대와는 상관없이 언제나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문신 김종직이 쓴 점필재집(佔畢齋集)에는 선상낚시를 하다 실족하여 익사한 한권(韓卷)이란 분의 기록이 있다.

원문: 한권위인불기(韓卷爲人不羈). 유문무재(有文武材). 역대간(歷臺諫). 만위소산군사(晩爲所山郡事). 승주조어익사(乘舟釣魚溺死).

한권은 됨됨이가 무엇에도 얾매이지 않았으며 문무를 겸비하였는데 대간(臺諫)의 직을 역임한 뒤 만년에 소산군사가 되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다가 익사하였다.

 

■ 선조들도 밑밥을 사용하였다.

조선후기의 학자 이덕무가 쓴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권35에는 궁궁이를 사용하여 낚시를 한 모습이 엿보인다.

책에 따르면 “궁궁자석민하어(芎窮自昔憫河魚)”라는 구절이 있는데 궁궁(芎窮)은 천궁(川芎)이라고도 하는 것으로 동물을 통한 약리작용실험에서 중추신경계통에 작용하여 진정효과가 있는 것으로 밝혀진 식물로 냄새가 좋아 선조들은 이것을 가루로 만들어 물속에 뿌리고 고기가 모이게 하여 낚시를 했다고 한다.

 

■ 농어낚시의 달인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선전기의 남효온(南孝溫)이 쓴 시문집인 추강집(秋江集)에는 농어낚시의 달인에 관한 아래의 내용이 나온다.

세종 24년과 25년이던 1442년과 1443년에 한 남자가 천민복장을 하고 벼랑 아래에서 낚시를 하였는데, 그가 잡은 것은 모두 농어였다. 그는 잡은 고기를 음식과 바꾸었고, 이튿날 또 잡으면 다른 집으로 가서 역시 그렇게 했으나 굳이 제값을 다 받지는 않았다는데 사람들이 이름을 물으면 “나는 농어 아비다.”라고 하였다.

원문: 世宗壬戌(세종임술),癸亥年間(계해년간). 有一男子(유일남자). 위천자복(爲賤者服). 조어어석벽하(釣魚於石壁下). 기소조필로어(其所釣必鱸魚). 득칙지왕인가이역식(得則持往人家以易食). 명일우득측우지타가역여시(明日又得則又之他家亦如是). 불필진기직(不必盡其直). 인문기명측왈(人問其名則曰). 아로어부야(我鱸魚父也).

 

■ 생선회를 즐겼던 퇴계 이황(退溪 李滉)

조선중기의 학자 권호문(權好文)이 쓴 송암집(松巖集)에는 권호문이 24살 되던 1555년 7월 5일에 물고기를 잡아 회를 뜨고 국을 끓여 퇴계(退溪) 선생과 함께 먹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안동시 도산면 온계천(溫溪川) 하류에 있는 섬처럼 큰 반석(盤石)인 청음석(淸吟石)에 올라 물고기를 잡았다고 하니 혹시 쏘가리를 드셨던 것은 아닐까?

원문: 칠월오일 선생승황묵지가 소계상조어청음석 호호문등거망이어득 일반혹회혹갱요찰방급온계사오인공향(七月五日 先生乘黃墨之暇 溯溪上釣於淸吟石 呼好文等擧網而漁得 一盤或膾或羹邀察訪及溫溪四五人共餉)

7월 5일, 퇴계 선생께서 글을 읽으시는 도중에 여가를 내어 온계천을 거슬러 올라 청음석에서 낚시를 하셨다. 호문 등을 불러 투망으로 물고기를 잡으라고 이르시기에, 한 소반의 분량을 잡은 다음 회를 뜨고 국을 끓여 찰방과 온계사람 4~5명을 불러 함께 먹었다.

 

■ 낚시터의 음주는 반드시 절제를…

특히 밤낚시를 하는 경우에 가벼운 음주를 즐기는 낚시인들도 있는데 물가에서는 안전을 위하여 지나친 음주는 반드시 삼가야 하는 일이지만 선조들도 낚시를 하면서 술을 즐겼던 모습은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중기의 학자였던 홍여하(洪汝河)가 쓴 목재집(木齋集)을 보면 이웃이 가져온 술을 마시며 함께 낚시를 한다는 “파주동린래조반(把酒東隣來釣伴)”이란 내용이 있고 조선후기의 학자 조임도(趙任道)가 쓴 간송집(澗松集)에는 아래의 원문과 같이 아예 동이채 술을 마시는 모습이 나온다.

원문: 세우기두주일준(細雨磯頭酒一罇)-가랑비 내리는 낚시터에서 술 한 동이를 비웠다.

다음 시간에는 우리 고전에 등장하는 낚싯바늘에 관한 이야기를 “찌낚시 이야기-찌의 역사”를 통해 잠깐 소개했던 남구만이 쓴 조설(釣說)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자.

냉동새우를 미끼로 사용할 때 주의할 점

냉동새우를 미끼로 사용할 때 주의할 점

수도권의 대부도와 인천권을 중심으로 많이 산재해 있는 유료낚시터는 잠깐 짬을 내어 낚시를 즐길 수 있으면서 손맛도 어느 정도는 보장이 된다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으며, 일부 매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유료낚시터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미끼는 지렁이와 냉동새우인데 특히 ‘지새조합’이라고 불리우는 지렁이와 새우를 함께 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해서 많이들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오늘은 이 점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지렁이와 새우를 함께 낄 때, 또는 냉동새우 만을 단독으로 낄 때 모두 새우의 껍질을 벗기고 머리와 꼬리를 떼어내고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것은 정말 참돔의 본능과는 거리가 먼 미끼의 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돔을 공략할 때 냉동새우를 미끼로 사용하는 것은 일본에서부터 유래된 것으로 일본에서는 참돔을 공략하는 낚시 방법으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타이라바’라고 하는 방법과 ‘텐야낚시’의 하나로써 새우를 미끼로 사용하는 ‘참돔텐야’ 또는 ‘히토츠텐야’ 라는 방법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 참돔을 잡기 위해 냉동새우를 미끼로 사용하는 것을 알아보기 이전에 의미도 잘 모른 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텐야낚시’에 대해서 잠깐 알아보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텐야낚시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우선 갈치낚시를 떠올리고 갈치낚시에 사용하는 채비가 텐야라고들 알고 있지만 텐야낚시의 시작은 참돔낚시부터입니다.

텐야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루어낚시에서 사용하는 지그헤드처럼 봉돌과 바늘이 하나로 연결된 채비를 이용하여 낚시를 하는 것을 말하며 특히 참돔을 잡는 것을 일컫는 ‘히토츠텐야’라고 하는 것은 새우를 미끼로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국에서 참돔낚시에 언제부터 새우를 미끼로 사용하였는가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그리 오래되지 않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유료낚시터에서 비책처럼 여겨지는 지렁이와 새우를 함께 사용하는 ‘지새조합’에서 잡은 참돔은 과연 지렁이에 반응을 한 것인지? 냉동새우에 반응을 한 것인지? 아니면 지렁이와 새우를 함께 사용하면서 나오는 특이한 무엇인가에 대한 반응인지? 그 실체를 모르고서 지렁이와 새우를 함께 사용한다는 것은 그리 합리적인 낚시의 방법은 아니라고 할 것이며 참돔의 특성을 모르고 낚시를 하는 것이라고 감히 단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텐야낚시라고 하는 것은 일종의 루어낚시로써 사용하는 새우미끼가 바닥에서 움직이는 모습을 연출하여 참돔을 유인하기 위한 것인데 새우의 껍질도 벗기고 머리와 꼬리도 떼어낸 후 미끼로 사용하는 것은 새우가 참돔을 유인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야 정확할 것입니다.

그러면 참돔이 좋아하는 먹잇감인 새우를 살아있는 것이 아닌 냉동을 사용할 때에는 어떻게 운용해야 좋은 조과를 올릴 수 있을까요?

가장 핵심적인 내용은 유료낚시터에서 냉동새우를 해동시키면서 자외선에 노출되도록 하는 바람에 열화에 의해서 색깔이 검게 변하도록 만든다는 것이 첫 번째로 해서는 안 되는 점이며 다음으로는 열화에 의해서 쉽게 새우의 머리가 떨어지게 되는데 이처럼 머리가 떨어지거나 떼어내게 되면 참돔은 잘 먹지 않는다는 것이 중요한 두 번째 사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전에 포스팅한 “치어방류사업, 문제점은 없는 것일까?”에서도 지적한 것과 같이 양식으로 태어나는 치어들은 종의 유전자 다양성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양식 되는 과정에서의 먹이활동으로 인해 껍질을 제거한 새우를 먹잇감으로 삼을 수는 있겠으나 참돔의 본능은 살아있는 새우나 살아있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에 더 좋은 반응을 보인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란 것입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새우나 냉동새우를 미끼로 사용할 때 왜 머리는 그대로 두고 꼬리는 반드시 떼어내고 사용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그 이유는 살아있는 새우를 미끼로 사용하면 꼬리지느러미에 목줄이 엉키는 현상이 생기기 쉬운 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특히 선상낚시의 경우 고패질을 하게 되면 새우가 회전을 하면서 상하로 움직이기 때문에 더욱 목줄에 엉키는 현상이 발생하기 쉽기 때문에 제거를 해주는 것인데 이런 내용을 모른 채 새우미끼는 무조건 꼬리와 머리는 제거를 해야 한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잘못 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냉동새우를 미끼로 사용할 때에는 쿨러에 담아 사용할 양만 꺼내어 조금씩 해동시키며 낚시를 하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유료낚시터에는 가벼운 차림으로 가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쿨러를 가지고 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해동할 때, 가급적이면 냉동새우가 햇빛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으며 성급한 마음에 많은 양을 한꺼번에 해동시키는 것도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찌낚시 이야기-찌의 역사

찌낚시 이야기-찌의 역사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파장이 대한민국 사회를 흔들고 있는 요즘, 일본산 낚시용품의 사용을 자제하자는 낚시인들의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이전부터 나는 낚시용품의 대일본 무역역조가 심화되고 있으며 이는 일본제품을 선호하는 소비자들뿐만 아니라 제품명에 일본어를 사용하는 것과 같은 안일한 방식으로 운영하고 있는 국내 조구업체들 및 낚시를 주제로 하는 무분별한 방송에도 책임이 있다는 점을 지적해오고 있었다.

낚시용품의 생산과 공급은 단지 한 가지 재화의 생산과 공급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대중에게 널리 보급되면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는다는 점 때문에 특히 낚시용품을 생산하는 업체들은 문화를 창출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는 점이 아쉽기만 하다.

아이폰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삼성이나 LG 것을 사용하라거나 BMW나 벤츠를 모는 사람에게 현기차를 타라고 강요할 수 없는 것처럼 낚시용품의 사용도 강제하거나 애국심에만 기댈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제품을 선호하는 이러한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국내 낚시용품 업체들의 입지는 더욱 축소될 것이고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제품의 출시는 더욱 요원할 것이다.

차제에 일부 연예인들이 협찬이라는 미명하에 온통 도배하다시피 외국 브랜드의 용품을 입고, 들고 나오는 낚시를 주제로 한 방송 프로그램들도 사회적 공익에 대하여 반추해보는 시간을 가짐과 아울러 우리 낚시인들이 국내업체의 제품에 조금 더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만으로도 국내기업들에게는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찌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의 서론이 너무 길어진 것 같지만 낚시용품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은 것의 대표적인 사례로 찌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 사설이 길어진 이유이다.

찌낚시는 어디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얼마나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를 알아보는 것이 오늘의 주제지만 스크롤의 압박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하여 미리 말씀을 드리고 시작할까 한다.

낚시의 역사, 그 중에서도 찌낚시의 역사는 서양보다 동양이 앞선다고 생각하거나 서양에서는 찌낚시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절대 그렇지 않다.

한국어로 찌는 미국에서는 바버(bobber), 영국에서는 플로트(float)로 부르며 일본어로는 우키(浮き), 중국어로는 유퍄오(鱼漂)라고 하는데 그 뜻은 모두 물에 뜬다는 의미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낚시에 사용하는 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재질과 모양에 따라 부르는 이름도 천차만별인데 오히려 그 명칭의 다양성은 동양보다 서양이 더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새의 깃털이나 나뭇가지 등을 찌로 사용하였다는 정보들은 전해지고 있으나 그 근거를 명확하게 밝히지는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문헌으로 나타난 것을 근거로 동서양의 찌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한다.

찌가 사용되었다는 것이 문헌으로 처음 기록된 것은 우리나라도 중국도 일본도 아닌 영국인데, 글을 통해서 여러 번 소개한 적이 있는 줄리아나 버너스(Juliana Berners)란 수녀가 1496년에 쓴 낚시에 관한 논문(Treatyse of Fysshynge Wyth an Angle)에 찌에 대한 얘기가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 뒤로 제럴드 벤틀리의 책과 아이작 월튼의 조어대전에도 찌에 대한 내용이 나오고 있는데 주로 개인들이 자작(自作)하여 사용하던 것이 1920년경에 와서는 대량으로 생산한 제품들이 선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찌를 사용하기 시작했을까? 문헌 상으로 찌가 처음 나타난 것은 1670년(현종 11년)에 지은 남구만(南九萬)의 문집 약천집(藥泉集) 권28 조설(釣說)이다.

그 책을 보면 부륜지유계개야(夫綸之有繫䕸也), 소이정부침이지탄토(所以定浮沈而知吞吐)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해석하면 “낚싯줄에 찌를 다는 것은 떠오르고 가라앉는 것을 일정하게 하여 물고기가 바늘을 삼켰는지 뱉었는지를 알기 위함”이란 뜻이다.

여기서 사용된 륜(綸)은 낚싯줄을 가리키는 것이고 겨릅대(䕸: 껍질을 벗긴 삼대)를 낚싯줄에 묶는다(䕸)는 것에서 이것이 찌를 말함이라는 것과 1670년대 이전부터 찌낚시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찌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은 1820년경 조선후기의 실학자 유희(柳僖)가 여러 가지 사물을 한글과 한문으로 풀이한 일종의 사전인 유씨물명고(柳氏物名攷)다.

한편 일본에서는 헤이안시대 초기에 물에 뜨는 돌인 경석(輕石)에 구멍을 뚫은 다음 실을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이것을 찌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는 있으나 이는 신뢰도가 현저히 낮은 것이며 현재 사용하는 것과 비슷한 형태의 찌가 생산된 것은 1931년부터였다고 볼 수 있다.

교토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던 스가하라 쿠루마토라지로우(菅原寅次郎)란 사람이 이전까지 사용되던 누울찌가 아닌 자립형의 찌를 취미로 만들고 있었는데 1931년에 그가 사망하자 아들인 스가하라 요이치(菅原与一)가 본격적으로 이것을 만드는 일에 뛰어들면서 바이스케(馬井助)란 이름의 찌를 판매하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관동에서까지 큰 인기를 끌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1931년이란 연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은 1902년에 영국과 영일동맹을 맺었고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으로부터 전쟁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신의주까지의 철도 건설을 계획하게 되는데 선로의 폭, 즉 궤간(軌間)을 일본 내에서와는 달리 동맹을 맺었던 영국이 청나라에 건설한 표준궤와 동일한 선로를 건설하는 것이 군수물자의 수송에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1,435mm의 표준궤로 결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1918년 10월 17일에는 영국이 개발한 “마크Ⅳ”전차가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전차개발 100년의 역사가 시작됨과 함께 그들의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KTX의 궤간(軌間)

※ 일본의 전차(戰車) 개발사

 

이처럼 조선침탈이 극에 달했던 시기의 일본은 영국과의 교류가 활발하였고 이것은 민간부문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바, 1920년경부터는 영국의 유명한 하디(Hardy)에서는 낚싯줄의 소재로 사용하기 위한 비단(실크)을 일본에서 대량으로 수입하였고 고베에 그들의 대리점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하디의 역사를 소개한 책을 보면 1937년에 고베에 설치했던 대리점에 관한 정보가 나오는데 이 시기를 통해 영국에서 생산한 찌들이 일본으로 유입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그럼으로써 이전까지는 없었던 지금의 구멍찌와 유사한 형태의 찌들이 일본에서 생산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577년 제럴드 벤틀리(Gerald Eades Bentley)가 쓴 책 아트 오브 앵글러(Arte of Angling)에는 백조의 깃털을 이용하여 찌를 만드는 방법이 소개되고 있는데 키스 하우드(Keith Harwood)의 책(The Float)에 의하면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찌의 보급이 대중화 되었던 것으로 나온다.

서양의 찌를 소개하고 있는 위키피디어의 글을 보면 찌의 종류로 워글러(waggler)라는 것이 있는데 이 이름은 딕 보우커 주니어(Dick Bowker Junior)란 사람이 붙인 것으로 1975년에 빌리 레인(Billy Lane)이 쓴 책 ‘Match Fishing to Win’을 통해 대중들에게 조금씩 알려졌다.

 

왜 워글러(waggler)를 꼬집어 얘기하는가 하면 수많은 찌의 종류들 중에서 워글러(waggler)를 사용하는 낚시를 ‘워글러 피싱(waggler fishing)’이라고 부르며 이를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하려는 영국의 시도를 우리나라의 조구사들도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2007년 한국다이와의 대표이사였던 아베 코이치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했던 “한국 조구업체는 단순히 경쟁사보다 한두 가지 기능을 향상시킨 제품을 만드는 데만 집중하고 있다. 창의성이 부족하다.”는 말처럼 일본제품을 능가하는 것을 만드는 것에만 몰두하는 것보다는 새로운 장르, 새로운 낚시문화를 창달(暢達)하려는 시도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언젠가 대한민국(Korea)에서 만든 찌(Float)가 코플로트(Kofloat)란 이름의 새로운 낚시문화를 창조하지 못하란 법도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현재 일고 있는 일본불매운동은 어느 누구에게도 강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에 기대어 안주한다면 기업의 성장과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특히 오징어를 대신할 표현을 찾지 못해 이카란 단어를 제품명에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창의력 부족의 몽매한 마케팅으로는 절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아니 국내 낚시인들에게 사랑받을 만한 제품을 만들 수 없음을 대한민국의 조구사들은 알아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