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가(王家)에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영어 숙어(熟語)에는 보라색이란 단어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Born to the purple=Born into the royal family)
왕족이란 뜻을 나타낼 때 보라색이란 단어가 사용된 역사는 고대로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이어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관식에서 썼던 왕관도 보라색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Ⅱ)의 전임자였던 조지 6세(George Ⅵ)의 공식초상화를 봐도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작고한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도 보라색 복장을 한 장면이 나온다.
조지 6세(George Ⅵ)의 초상화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한 장면
지중해의 페니키아인들이 뮤렉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라는 소라의 일종에서 추출하여 만든 보라색 염료인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은 가격이 어머어마하게 비쌌기 때문에 평민들은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로마황제 중에는 혹시라도 시민들이 보라색 옷을 입기라도 하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왕족과 치안관들이 착용하던 보라색 복장의 전통은 비잔틴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들에게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카톨릭의 주교들도 보라색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464년 교황 바오로 2세는 더 이상 염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떡갈나무에 기생하는 곤충에서 취한 적색의 동물성 염료인 케르메스(kermes)와 백반으로 만든 주홍색(scarlet)의 옷을 입도록 선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던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은 얼마나 비쌌던 것일까?
1온스의 티리안 퍼플 염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25만 개의 뮤렉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가 필요했다고 하는데 다른 재료로 만든 염료와는 달리 오래도록 색이 바래지 않고 지속되었던 것이 왕실이나 귀족들이 선호하였던 이유지만 뮤렉스 브란다리스의 껍질을 깨뜨려 보라색을 생성하는 점액을 추출한 다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햇빛에 노출시켜서 만들어야만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3세기 말과 4세기 초 로마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은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의 생산을 국유화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의 통치기간 동안 티리안 퍼플로 염색한 양털 1파운드(453g)은 금 1파운드의 가치가 있었고 티리안 퍼플 염료 1파운드는 금 3파운드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금 3파운드는 1,360g이니 어제인 10월 19일의 국내금시세로 환산하면 티리안 퍼플 염료 1파운드는 9천5백3십 만원 정도에 해당하고 1g의 가격은 21만 원 정도인 아주 값비싼 염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의 망토와 클레오파트라가 거느리던 기함의 돛에도 사용되었던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의 탄생은 페니키아의 전설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헤라클레스와 동일시하는 티레(Tyre)의 주신(主神)이었던 멜카르트(Melqart)는 어느 날 개를 데리고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개가 조개를 물어뜯었더니 개의 입과 코가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본 멜카르트(Melqart)의 연인이었던 님프가 자신의 옷을 물들이기 위해 보라색 염료를 달라고 부탁하자 멜카르트(Melqart)가 이에 응답하여 티레(Tyre)에 뮤렉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가 많이 서식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아래는 네덜란드 화가 테오도르 판 튤덴(Theodoor van Thulden)이 그린 헤라클레스의 개가 발견한 보라색 염료(Hercules’s Dog Discovers Purple Dye)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테오도르 판 튤덴(Theodoor van Thulden)은 루벤스와 공동제작을 했던 경험이 많았던 때문인지는 몰라도 루벤스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보라색 염료인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은 지중해 근처의 나라들로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알렉산더 대왕도 왕권의 상징으로 티리안 퍼플로 물들인 옷을 입었으며 로마공화국에서는 집정관 및 관직자들은 흰색 바탕에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토가 프라에텍스타(toga praetexta)를 입었고, 개선장군들은 전체를 보라색으로 염색한 토가 픽타(toga picta)를 입는 것이 허용되었다.
토가 프라에텍스타(toga praetexta):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서두에서 언급했던 왕가(王家)에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영어 표현인 Born to the purple이란 숙어는 동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황제가 된다는 것은 보랏빛으로 기른다는 것이었고, 황제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보랏빛에서 태어난다(born in the purple) 것이었다.
그러나 표현의 기원은 불분명하며 동로마 제국에서는 보랏빛이 황실의 문서에 사용되었고 보라색 무늬가 있는 옷을 착용하는 것은 주교나 황실의 행정관 외에는 금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왕가(王家)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영어 표현 Born to the purple이나 Born in the purple은 혜택과 축복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벗어나야 할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의 능력과 권력 및 재력에 의해 그들의 미래가 미리 결정지어져 버리는 것은 결코 축복은 아닐 것이며 평범한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없도록 길러지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들이 한때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아빠찬스’니 ‘엄마찬스’니 하는 것들은 로마의 멸망처럼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