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 1837년에 쓴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접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이처럼 친숙한 인어는 영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월트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P. T. 바넘이란 사람은 세상을 상대로 가짜 인어로 한탕 사기극을 크게 펼친 인물이다.

P. T. 바넘이란 인물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 영화 위대한 쇼맨이 바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했던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던 P. T. 바넘의 풀네임은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으로 영화에서는 휴 잭맨이 역을 맡았었다.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

 

영화 위대한 쇼맨의 포스터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따라다니는 P. T. 바넘이 친 사기극 중에서 오늘은 가짜 인어로 대중을 기만한 일과 그것이 인어를 가지고 세상을 농락했던 첫 번째는 아니었다는 숨은 얘기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17세기경까지도 인어의 존재는 유럽에서는 당연시되고 있던 것이어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도 세계의 박물관들에는 인어의 표본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시 중인 인어의 표본은 100% 가짜들이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P. T. 바넘이 만든 피지 인어라고 하는 것인데 영어로는 Feejee Mermaid, Fiji Mermaid, FeJee Mermaid로 표기한다.

1842년 바넘의 박물관에 전시될 때의 모습은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이 보이는 상태에서 오른손은 오른쪽 뺨에, 왼손은 왼쪽 턱 아래에 두고 있었으며 남태평양 피지 근처에서 잡은 것이라고 뻥을 치면서 피지 인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데 1865년 7월 13일에 있었던 박물관의 화재로 소실되어 현존하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P. T. 바넘보다 먼저 피지 인어를 이용하여 사기를 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라는 미국인 선장이었다.

언제 누가 피지 인어를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인원의 상체에 물고기의 몸을 꿰어 만드는 것은 일본과 동인도 어부들 사이에서는 종교적으로 행해지던 일이었으며 바넘의 피지 인어는 아마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1810년대 무렵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일본과 교역하는 유일한 서양인들이었고,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게 만든 페리 제독으로 인해 일본이 더 많은 교역을 하면서부터 서양에 더 많은 피지 인어가 나타났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아무튼 일본에서 가짜 인어를 구입한 네덜란드인이 선원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니 침몰한 네덜란드 상선의 승무원들을 구조하면서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 선장은 가짜 인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822년 1월 그것을 6천 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하게 된다.

1822년의 1달러를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22.15달러가 되고 당시의 6천 달러는 지금 가치로는 132,900달러가 되니 오늘자 매매기준율에 따르면 우리 돈으로 1억 6천이 조금 안 되는 금액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는 돈이 없었던 까닭에 배를 팔아 돈을 지불했고 여비가 떨어진 그는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가짜 인어를 전시했는데 이를 본 어느 영국선교사가 인어는 진짜라는 신문기사를 작성해줌으로써 사무엘 선장은 여비도 넉넉히 챙기고 인어를 전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가짜 인어를 가지고 1822년 9월, 사무엘 선장은 영국에 도착하여 커피숍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관람료는 1인당 1실링이었다.

1822년의 1실링은 지금의 6.39파운드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우리 돈으로는 대략 1만 원 정도가 되는데 이런 큰돈을 지불하고서도 관람하겠다는 사람들이 매일 수백 명씩 몰려들면서 사무엘 선장은 크게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지만 욕심이 화를 부르는 사건이 생기고 만다.

런던에 도착한 사무엘 선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어의 표본은 진짜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으나 권위 있는 박물학자들로부터 인증을 받으면 더 큰돈을 벌 것이라 생각해서 몇몇 학자들을 찾아다니지만 그들은 모두 사무엘 선장이 가지고 있던 인어를 가짜라고 판명하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 선장은 조금은 급이 떨어지는(?) 학자들로부터 진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전시에 이용하게 되는데 여기서 멈추었더라면 그나마 성공한 사기극이 될 수 있었겠지만 사무엘 선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저명한 박물학자이자 외과의사였던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도 진품으로 인증하였단 개뻥을 치기 시작한다.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

 

그리고 이런 사기극에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은 격노하여 사무엘의 인어는 가짜라는 기사를 각종 신문과 출판물에 기고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무엘의 가짜 인어를 보려는 사람들이 격감하면서 1823년 1월, 불과 5개월의 기간 만에 사무엘의 사기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아래의 그림은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사무엘 선장이 주간지 더 미러(The Mirror)에 게재했던 광고인데 이 광고가 게재된 것이 1823년 1월이고 광고의 시작과 함께 그의 사기극도 끝이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 선장이 가짜 인어의 구입대금으로 지불했던 6천 달러는 배가 그만의 것이 아닌 공동소유였던 때문으로 다른 소유주에 의해 소송을 당하면서 결국 돈을 상환하지 못한 사무엘 선장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배를 타야만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빚을 상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사무엘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인어 표본은 2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데 사무엘 선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가짜 인어 밖에 없었던 그의 아들이 그것을 1840년대 초 보스턴에 박물관을 가지고 있던 모세 킴벌(Moses Kimball)에게 팔면서 다시 한 번 가짜 인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1842년 모세 킴벌(Moses Kimball)은 박물관을 구입하였다는 친구인 P. T. 바넘을 만나기 위해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가면서 가짜 인어를 가지고 가서 인어를 이용한 전시회를 함께 개최해볼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위대한 쇼맨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던 P. T. 바넘은 가짜 인어를 이용한 사기극을 성공시키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가공의 인물인 그리핀 박사(Dr. Griffin)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P. T. 바넘은 이미 그 이전부터 사기극의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던 레비 리먼(Levi Lyman)을 그리핀 박사(Dr. Griffin)로 둔갑시켜 인어가 진짜라는 것을 대중이 믿도록 만드는 한편 박물학자들에게도 감정의 의뢰한다.

그리고 감정을 한 박물학자들은 인어가 가짜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이빨과 지느러미 등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어서 가짜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감정결과를 내놓게 되고 P. T. 바넘은 대중은 진짜라고 믿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매주 12.5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친구인 모세 킴벌(Moses Kimball)로부터 가짜 인어를 임대하게 된다.

가짜임은 분명한데 가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감정가들의 결론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인어가 가짜라는 것을 P. T. 바넘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인어의 진위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그것을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그리핀 박사(Dr. Griffin)라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P. T. 바넘은 사람들을 시켜 그리핀 박사(Dr. Griffin)가 포획한 이상한 물체가 있다는 것을 각 언론사에 제보하도록 하는데 얼마나 치밀했는가 하면 발신하는 장소를 각기 달리하여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리고 레비 리먼(Levi Lyman)이 둔갑한 가공의 그리핀 박사(Dr. Griffin)가 필라델피아의 호텔에 투숙한다는 정보를 흘리자 그가 묵었던 방에는 언론사의 편집자들이 줄을 서게 되는 진풍경이 일어났고 P. T. 바넘과 레비 리먼은 5일 동안만 일반에게 공개하기로 하고 뉴욕의 콘서트홀에서 전시를 하는데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P. T. 바넘의 뉴욕박물관과 모세 킴벌(Moses Kimball)의 보스턴박물관을 오가며 20년 가까이 전시되었는데 영국에서 가짜라는 판정을 받고 사무엘 선장이 다시 배를 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가짜 인어는 1859년 P. T. 바넘에 의해 런던에서 다시 전시되면서 큰 인기를 끄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1858년의 바넘박물관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미국으로 돌아온 P. T. 바넘은 피지 인어를 1859년 6월에 킴벌의 박물관에 반환하였고 그 이후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1865년의 화재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다.

왜 그런가 하면 1859년 6월에 킴벌의 박물관에 가짜 인어를 반환하고 다시 임대한 적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1865년에 일어난 바넘박물관의 화재와 피지 인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1880년대 초에 일어난 킴벌의 보스턴박물관 화재와 함께 소실되었을 가능성인데, 이것도 1897년, 킴벌의 상속자가 피지 인어를 하바드 대학교의 피바디박물관에 기증을 함으로써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피바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피지 인어가 P. T. 바넘 이전에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 선장이 보유하고 있던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가짜에서 출발한 인어 사기극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언제 또다시 대중을 기만하는 새로운 사기꾼들과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지 언어라는 단어는 가짜 인어를 뜻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