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전에는 낚싯대의 길이를 나타내는 칸(間)이란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1칸=1.8미터로 정해진 것은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란 점을 알아보았습니다.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고유의 척관법이 있었는데 고종 6년인 1902년 10월에 척관(척근)의 단위를 미터법에 맞추어 새롭게 정하면서 1자(尺)를 20㎝로 하고, 1보(步)는 6자인 1.2m, 1칸(間)은 10자인 2m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일본의 척관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1자(尺)는 30.3㎝, 1칸(間)은 6자인 1.81m미터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광복이 되고 6·25전쟁과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4년 1월부터는 미터법을 국가 표준 단위로 사용하는 것을 공식화 했는데, 22대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박충훈이 중앙계량국을 통해 규정한 도량형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부정하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왜 중앙계량국이 규정한 도량형이 애국가를 부정하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준공식장에서 처음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을 하기 전까지는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따라 불렀고, 작사자는 아직까지 미확인으로 남아는 있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과 윤치호 선생 두 분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세간의 정설입니다.
이런 애국가 가사의 후렴부에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구절이 있는데 1964년 쿠데타 정권에서 규정한 도량형에 따르면 대한민국 삼천리금수강산은 12,000㎞에 달해 거의 서울에서 미국 뉴욕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가 됩니다.
지금 다음이나 네이버의 단위환산을 보면 1리(里)는 0.39㎞라고 나오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펴낸 도량형은 이것의 10배인 3.9㎞라고 규정을 하였습니다. 당시 일반에서 사용하던 통념과도 맞지 않는 이런 기준을 그들은 왜 제정했던 것일까요?
제2공화국에서 제정한 기준, 1리(里)=3.9㎞는 일본의 척근법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친일(親日)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무지의 소치였던 것일까요?
조선시대의 척근법으로는 황종척, 주척, 영조척, 조례기척, 포백척 등이 있었는데 어제 “낚싯대 1칸은 왜 1.8미터일까?”란 글에서 언급했던 황종척은 세종대왕 재위 기간에 박연이 만든 것이지만 주로 사용되었던 곳은 악기의 제조와 음률의 교정, 그리고 시신을 검시할 때였으며 거리를 표시할 때에는 주로 주척(周尺)을 사용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도량형”이란 책을 보면 조선시대의 각종 척근법의 1척(尺)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황종척은 34.7㎝, 영조척은 31.2㎝, 조례기척은 28.6㎝, 포백척은 46.7㎝이며 일반적으로 거리를 표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주척은 20.7㎝로 되어 있고 이런 주척의 사용은 대한제국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서 널리 사용하던 주척에 기반 하여 고종 6년, 1902년 10월에 도량형 규칙을 미터법에 맞게 재 정의하면서도 1리(里)를 420미터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척에 기반한 대한제국의 도량형에 의하면 “무궁화삼천리”는 1,260㎞에 달하는데 정확하게 2천7백 또는 2천8백리라고 하면 음률에 맞지 않으니 “무궁화삼천리”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일본식 척근법의 단위를 사용하면서부터 1리(里)의 거리는 3.9㎞가 되었으나, 일본에서도 조선의 10리(里)가 일본의 1리(里)에 해당한다고 했던 것을 굳이 일본의 단위를 그대로 사용했던 제2공화국의 규정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고종이 도량형 규칙을 새롭게 만든 1902년의 규정에 의하면 삼천리금수강산은 1,260㎞가 되는데 순종 3년인 1909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제정된 일본식의 척근법을 그대로 따른 1리(里)를 적용하여 “무궁화삼천리”를 12,000㎞(대략)로 만든 박정희 정권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을까요?
대한제국 순종 3년이던 1909년 9월 21일에 개정된 도량형법은 1926년 2월 27일 “조선도량형령”이 공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일본식 미터법이 사용되게 되었지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이후에도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주척(周尺)에 기반한 1리(里)=400미터를 부정하고 일본의 것을 그대로 따른 1리(里)=3.9㎞란 기준을 만든 쿠데타 세력들의 태도는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친일(親日)성향에 따른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우리나라 헌정 사상 초유로 대법관 2명의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있었습니다. 기각될 것이란 예상은 했으나 국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결정으로 또 한 번 사법부의 불신을 초래하게 만들고 말았으며,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한 재판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 및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앤장이 서로 공모(?)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씁쓸하다 못해 분노가 치밉니다.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의 행정부요 대한민국의 사법부였는지?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조선(朝鮮)의 제도와 관습을 부정하려고 했던 5·16세력과 무엇이 다른지? 매서워진 한파와 함께 읽은 아침뉴스를 보고 주절거려보았습니다.
춥지만 힘들 내시고, 경기가 어렵고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더라도 주변을 살피고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