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 가공된 2장의 강판을 용접해서 만든 연료통을 일컫는 제리캔(Jerrycan)은 독일군을 뜻하는 속어인 제리(Jerry)가 사용하는 통(Can)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오늘은 이 제리캔(Jerrycan)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제리캔이 없었더라면 독일의 블리츠크리크(Blitzkrieg: 전격전)를 뚫고 프랑스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초기에 영국군이 사용하던 연료통은 얇아서 기름이 누출되는 일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부을 때는 깔때기와 같은 도구들이 있어야만 했는데 이런 이유로 비하하여 조잡하다 또는 엉성하다는 의미의 플림지(Flimsy)로 불렸다.

 

이 연료통이 얼마나 부실했는가 하면 영국의 임페리얼 갤런(imperial gallon=4.546 l)으로 7만 갤런을 운반하는 도중 연료의 누출로 3만 갤런만 수송할 수 있었던 것을 두고 한 병참장교가 이것조차도 좋은 결과라고 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연료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군대의 이동은 멈추게 된다. 나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기존의 디자인을 개량한 연료통의 개발에 나섰는데 이렇게 개발된 연료통을 베르마흐트 아인하이츠카니스터(Wehrmacht-Einheitskanister)라고 불렀다.

영어로 군용 연료통(Armed Forces Unit Canister)이란 뜻을 지닌 베르마흐트 아인하이츠카니스터(Wehrmacht-Einheitskanister)가 흔히 제리캔(Jerrycan)이라고 부르는 연료통의 정식 이름인 것이다.

제리캔은 나치의 입찰을 따낸 쉬벨름에 있던 회사(Schwelmer Eisenwerk Müller & Co. AG)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빈첸츠 그룬포겔(Vinzenz Grünvogel)이 이끌던 기술진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제리캔(Jerrycan)의 손잡이를 보면 3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치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나치는 “1명이 빈 통은 4개, 연료가 가득 찬 통은 2개를 들 수 있어야 하며, 두 사람이 함께 들 수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3개의 손잡이를 만든 것이었다.

 

물론 기존에 독일군들이 사용하던 삼각형 모양의 연료통에 비해 휴대 및 차량의 적재가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도 급유할 수 있는 등의 편의성도 뛰어났던 베르마흐트 아인하이츠카니스터(Wehrmacht-Einheitskanister) 즉, 제리캔은 극비리에 생산되어 1차로 5,000개가 테스트를 위해 일선부대로 보내졌고 만족스런 결과에 따라 양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왼쪽 삼각형 모양이 독일군이 사용하던 기존의 연료통

 

양산은 개발한 회사가 아닌 ABP(Ambi-Budd Presswerk Berlin)가 맡았었는데 나중에는 흰색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것은 물통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프랑스군은 ‘VIN’으로 표시한 와인 전용의 통을 사용하기도 했다.

 

플림지(Flimsy)로 비아냥을 받던 연료통을 사용하던 영국군은 1940년 노르웨이 전역(Norwegian campaign)에서 제리캔을 입수한 이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나중에서야 카피하여 생산한 것을 사용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제리캔을 복제한 영국의 연료통

 

1939년 독일에서 근무를 마치고 귀국을 앞두고 있던 미국인 엔지니어 폴 플라이스(Paul Pleiss)는 독일인 동료를 설득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인도까지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동하는 도중에 필요한 식수를 담을 통이 없자 독일인 엔지니어는 템펠호프 공항(Tempelhof Airport)에 제리캔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곤 수완을 발휘하여 3개를 구한 다음, 식수를 담고 길을 떠나게 된다.

두 사람이 11개 나라를 통과하여 인도까지 절반쯤 갔을 때 괴링이 보낸 비행기 편으로 독일인 동료는 귀국을 해야만 했는데 그는 떠나면서 폴 플라이스(Paul Pleiss)에게 제리캔의 제조에 필요한 정확한 사양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혼자 남은 폴 플라이스(Paul Pleiss)는 여행을 계속하여 캘커타에 도착하였고, 차는 캘커타의 창고에 보관시키고 고향인 필라델피아로 귀향하였다.

1939년의 여름은 나치가 폴란드 침공을 앞둔 시점으로 전운(戰雲)이 유럽을 휘감던 시기였기에 귀국한 폴 플라이스(Paul Pleiss)는 독일군의 제리캔에 대하여 군에 정보를 제공하였으나 샘플이 없이는 판단할 수 없다는 관료주의에 막히고 만다.

이에 폴 플라이스는 캘커타의 창고에 보관 중이던 차에서 제리캔만 떼내어 미국으로 가지고 올 계획을 세웠지만 운송하는 과정에서 분실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차를 통째 가지고 오기로 결정하여 1940년 여름, 뉴욕에 도착시킨다.

그리고 3개의 제리캔 중 1개를 군 관계자들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개량된 미국의 연료통으로도 전쟁을 수행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함에 따라 진전을 보지 못했고, 또 다른 샘플 1개는 영국군에 보냈지만 영국군은 만드는 것보다도 쉽게, 많은 수량의 독일군이 사용하던 제리캔을 노획하여 쓸 수 있었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1942년이 되어서 중동의 정유공장에서 품질관리를 맡고 있던 리차드 다니엘(Richard Daniel)이란 사람이 “연료통의 결함으로 인해 운송 도중에 40% 가까운 연료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자 그때서야 미국과 영국은 제리캔의 생산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45년 유럽의 작전전역(ETO: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에서만 1천9백만 개가 사용되었던 제리캔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한때는 200개의 공장에서 만들어지기도 했었는데 1953년에 작성된 미국병참대(Quartermaster Corps)의 공식보고서에는 제리캔을 블리츠캔(blitz-can)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국군이 노획한 것을 받았다고 되어있을 뿐 폴 플라이스(Paul Pleiss)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는 이유로 일부에서는 폴 플라이스(Paul Pleiss)의 이야기가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