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

​음식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

아랍 제국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지금도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진 병아리콩으로 만든 후무스(Hummus)란 음식을 두고서도 분쟁이 있다.(정확히는 분쟁이라기보다는 다툼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후무스(Hummus)의 기원을 두고 다투는 것을 보면 발바닥 신자이긴 하지만 성당을 다니는 내가 볼 때도 이스라엘의 주장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랍과 이스라엘이 각기 후무스(Hummus)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 이스라엘의 주장

후무스(Hummus)는 미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요리인데 미국시장에서 후무스 판매의 60%를 차지하는 회사로 사브라 디핑(Sabra Dipping Company, LLC)이란 곳이 있다.

연간 우리 돈으로 1조가 넘는 매출을 올리는 이 회사는 2005년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식품제조업체인 스트라우스 그룹(Strauss Group Ltd.)으로 인수가 되었는데 사브라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아랍인들보다 2배 많은 후무스를 소비한다고 주장한다.

아랍의 할랄푸드(Halal food)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겐 식사와 관련된 율법인 카샤룻(kashrut)에 따라 먹기에 적합하다는 것으로 결정된 코셔(Kosher) 또는 코셔푸드(Kosher food)라는 것이 있는데 후무스가 바로 코셔푸드일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문화적 공통성과 결속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후무스가 유대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구약성서의 롯기 제2장 14절에 있는 ‘끼니때가 되자 보아즈는 롯에게, “이리 와서 음식을 들고 빵조각을 식초에 찍어 먹어라.” 하고 권하였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 기독교의 성경에는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라고 되어있다.

이 중에서 빵을 식초에 찍어 먹어라고 권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그것은 성경에 있는 hometz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식초를 뜻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실제론 hometz가 후무스(Hummus)를 말한다고 이스라엘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중동을 비롯하여 유럽 및 세계 각지의 후무스 레시피들이 이스라엘에 모여들면서 이스라엘의 후무스 문화가 풍부해진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 2015년 이스라엘의 영화감독 오렌 로젠펠드(Oren Rosenfeld)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후무스 더 무비(Hummus the Movie)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즐기는 후무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 아랍권의 주장

이스라엘의 주장에 비해 아랍의 주장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아랍이 후무스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14세기 이집트의 칸즈 알 화이드(Kanz al-fawaid)라는 사람이 쓴 요리책에 후무스와 비슷한 레시피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번역가인 나왈 나슬랄라(Nawal Nasrallah)가 “Treasure Trove of Benefits and Variety at the Table”란 제목으로 번역한 책이 판매되고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아마존으로 가시면 될 것 같다.

 

■ 후무스 전쟁(Hummus Wars)

위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이 주장하는 후무스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판단은 어떤지 궁금한데 이번에는 후무스를 둘러싼 조금은 재미있는 다툼을 알아보도록 하자.

후무스를 두고 벌이는 다툼을 후무스 전쟁(Hummus Wars)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사들이 벌인 경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후무스 전쟁(Hummus Wars)의 발단은 서두에서 소개했던 사브라 디핑(Sabra Dipping Company, LLC)이 펩시와 손잡고 판촉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후무스를 만들었다고 홍보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홍보를 보고 있던 또 다른 이스라엘의 식품업체인 오셈(Osem Investments Ltd.)이 그보다 더 큰 400㎏에 달하는 후무스를 만들어 기네스에 등재되자 이스라엘의 언론들이 이를 두고 후무스 전쟁(Hummus Wars)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

400㎏ 크기의 후무스

 

이스라엘이 후무스의 원조라고 주장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후무스를 만들고 또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어 세계로 널리 알려지게 되자 아랍권에서는 이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중에서 레바논의 관광부장관을 지낸 사업가 파디 아부드(Fadi Abboud)는 “이스라엘은 영토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비롯한 아랍의 모든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주축이 되어 ‘우리의 요리에서 손을 떼라(Hands off Our Dishes)’로 명명한 캠페인을 추진하였다.

2009년 10월에 완성된 이 캠페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2톤짜리 후무스를 만들어 이스라엘이 세운 기록을 깬다는 것이었고 그 캠페인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두고만 보고 있었을까? 당연히 그냥 보고 있지만 않았고 2010년에는 4톤짜리 후무스를 만들어 또다시 레바논이 세운 기록을 갈아치워 버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레바논이 300명의 요리사를 동원하여 2011년 5월 18일에 10톤 크기의 후무스를 만들어 새로운 기록을 수립하였다.

1년에 10일만 볼 수 있다는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

1년에 10일만 볼 수 있다는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

매년 4~5월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의 하나라고 하는 할레보스(Hallerbos)는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라벤더와 비슷한 색깔을 가진 꽃 블루 벨(Bluebells)로 물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간은 단지 10여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할레보스(Hallerbos)는 네덜란드어로 ‘할레 숲(Halle fores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언론이나 블로그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할레보스 숲(Hallerbos forest)’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할레보스(Hallerbos)는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 인근의 할레(Halle)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블루 벨은 주위의 나무나 꽃들이 싹을 피우기 전에 잠깐 만개하였다가 지기 때문에 주로 이른 봄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블루 벨의 아름다움으로 물드는 할레보스(Hallerbos)도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할레보스를 관리하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숲의 주인은 7세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하는데 최초의 주인은 686년 ‘세인트 발트루디스(Saint Waltrudis) 수도원’이었다가 이후 ‘아렌베르크 공작(Duke of Arenberg)’의 소유에서, 1851년에는 네덜란드령이 되었다가, 1831년에는 다시 아렌베르크 공작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9년, 아렌베르크 공작 가문의 모든 재산은 독일의 배상금에 대한 보증으로 벨기에 정부에 의해서 압수되어 벨기에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미 그 때는 숲의 대부분은 파괴되고만 상태였다.

 

파괴된 숲을 되살리기 위해 벨기에 정부에서는 그 후 20여 년 동안 조림사업을 실시하였는데 1968년 브뤼셀과 파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또 다시 24ha가 파괴되어 지금은 총면적이 542ha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할레보스(Hallerbos)에서 블루 벨(Bluebells)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공식사이트(Hallerbos)를 방문하면 할레보스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고 지도도 다운 받을 수가 있다.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을 보기 원한다면 네덜란드의 유튜버인 ‘Pieke’씨가 만든 아래의 영상을 보는 것이 홈페이지에 있는 영상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비핵화를 넘어 남과 북이 공존·공영하면서 통일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뜻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다시는 이 땅이 할레보스(Hallerbos)처럼 전쟁에 의해 2번이나 파괴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결렬된 하노이회담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노력을 관심 갖고 지켜보려고 한다.

설탕이 갈라놓은 형제 사이

설탕이 갈라놓은 형제 사이

미국의 시리얼 제조업체인 켈로그(Kellogg’s)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가 1922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바뀌게 되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보다 앞선 켈로그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은 마침 바로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태어난 날이다. 1860년 4월 7일 출생한 그는 1930년에 사업에서 번 돈으로 ‘W. K. 켈로그재단(W. K. Kellogg Foundation)’을 설립하였는데 1934년 그가 재단에 기부한 6천6백만 달러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

켈로그의 처음 회사명에 ‘배틀 크리크(Battle Creek)’란 단어가 들어있는 이유는 의사였던 형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관리하고 있던 미시간 주의 요양원 이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 형제가 태어난 곳이 미시건(Michigan)주의 배틀 크리크(Battle Creek)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내용이지만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뿐만 아니라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함께 근무를 하였다.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그러나 이 요양원이 1866년 9월 5일에 처음 문을 열 때에는 요양소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부건강회복연구소(Western Health Reform Institute)’란 이름으로 개원하였는데 1902년 화재로 다시 문을 열게 되면서 처음으로 요양소(Sanitarium)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1876년부터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소장으로 재임하게 되었고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경리직원으로 근무를 했던 것이다.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

 

켈로그 형제가 공동으로 설립한 최초의 회사는 1898년에 창업한 ‘배틀 크리크 요양소 건강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Health Food Company)’였고 이것이 1901년에는 ‘배틀 크리크 요양소 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Food Company)’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1899년에 혼자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던 회사(Sanitas Nut Food Company)와 합병하여 1908년 7월에 회사이름을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 다시 회사명을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형제간의 갈등임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욕심 때문이었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켈로그(Kellogg)’란 회사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을 설립한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며 동생이 별도로 1906년에 기업을 창업하게 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간의 갈등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동생이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형도 그의 개인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던 회사와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형과 동생은 사이좋게 회사를 공동운영다가 무슨 이유로 결별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맛의 개선을 위해선 설탕을 사용해야 한다.’는 동생의 의견과 채식주의자이면서 금욕주의자였던 형의 ‘설탕은 탐욕을 증가시킴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의견이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설탕의 사용을 두고 형제간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는 동생에게 요양소에 있는 환자들 외에는 시리얼을 공급하지 말라고 통보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동생이 별도의 회사를 차리게 되었지만 레시피는 동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동생의 회사는 1909년에 이름을 ‘켈로그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Kellogg Toasted Corn Flake Company)’로 바꾸면서 1908년부터 회사명에 ‘켈로그’를 쓰고 있던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와 또 다른 갈등을 겪게 된다.

이름도 비슷하고 포장과 내용물까지 유사한 두 회사의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하여 마침내 1920년, 동생이 형을 고소하여 승소하게 됨으로써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결과의 하나로써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는 1921년부터 회사이름에서 켈로그를 빼고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었고 동생의 회사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사명을 변경하고 ‘켈로그(Kellogg’s)’란 이름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던 켈로그 형제는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말년에 형제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지만 그의 비서가 보내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90세를 일기로 1943년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동생이 그 편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욕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바랐던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을 앞두고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새삼 떠오른다.

있을 때 잘하자~^^

영국해군의 잠수함은 왜 해적기를 게양했을까?

영국해군의 잠수함은 왜 해적기를 게양했을까?

이미지 출처: 플리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대퇴골 아래, 용맹을 상징하는 칼을 그려 넣은 해적기 졸리 로저(Jolly Roger)를 군에서 사용한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시절 프로이센의 제10(마그데부르크)검기병연대의 폰 루쉬(Von Ruesch) 대령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착용했던 모자에는 독일어로 해골을 뜻하는 토텐코프(Totenkopf)를 그려 넣었고, 나치 독일군이 사용한 것으로는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의 휘장이 대표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는 해골문양의 휘장을 사용하였으며 에스토니아의 쿠페르야노프 보병대대는 1918년 이래로 해골을 휘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 가장 익숙한 것은 미해군의 VFA-103 비행중대의 별명인 졸리 로저스(Jolly Rogers)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백골부대로 불리는 대한민국 육군 제3보병사단일 것이다.

이처럼 해골문양을 군대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잠수함에서 졸리 로저(Jolly Roger)를 처음으로 사용한 기록은 영국해군이 가지고 있다.

1901년 영국해군이 최초의 잠수함인 HMS Holland 1을 운용하였을 때, 아서 윌슨(Arthur Wilson)제독은 잠수함을 가리켜 “은밀하고 불공평하며 영국식이 아닌 무기”라고 혹평하면서 “적국의 잠수함 승무원들은 해적들을 처형하던 것처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은 HMS Holland 3

신사의 나라 영국은 전쟁에서도 기사도를 발휘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해군의 잠수함 승조원들 또한 해적과 같은 취급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했겠지만 영국해군의 잠수함 승조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9월 13일, 맥스 호튼(Max Horton) 함장이 지휘하던 영국해군의 잠수함 HMS E9는 독일의 순양함 SMS Hela를 격침시키고 이어서 10월 6일에는 구축함 SMS S-116을 침몰시켰는데 이것은 영국해군 잠수함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맥스 호튼(Max Horton) 함장의 가슴속에는 잠수함 승조원들을 해적에 비유한 아서 윌슨(Arthur Wilson) 제독에 대한 불만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맥스 호튼(Max Horton) 함장은 부하들에게 졸리 로저 (Jolly Roger)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해적기를 게양한 채로 입항하였는데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영국해군의 잠수함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전통은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HMS Utmost의 사진이 널리 알려졌는데 졸리 로저 (Jolly Roger)에 그려 넣은 기호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막대 모양은 어뢰공격을 뜻하는 것으로 붉은색은 군함을, 흰색은 상선을, 검은색은 U보트를 격침시켰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HMS Utmost호의 승조원들이 들고 있는 해적기에 새겨진 단검은 작전명 ‘망토와 단검’을 통해서 8척을 침몰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른쪽 제일 아래에 있는 구명튜브는 1척을 구조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참전한 나라들에도 전해져 폴란드의 잠수함들도 졸리 로저 (Jolly Roger)를 게양하였다.

한편 영국해군의 잠수함이 졸리 로저 (Jolly Roger)를 게양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1982년에 일어났던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이었는데 전쟁 당시 영국의 원자력잠수함 HMS 컨커러(HMS Conqueror)가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를 격침시킨 다음 해적기를 게양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이익을 앞세워 시작했던 전쟁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인은 모두 649명이 전사하였고 영국해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인해 전사한 숫자는 민간인 2명을 포함한 323명으로 전체 전사자의 절반 가까이나 되었다.

그리고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 중 772명은 아르헨티나의 해군과 인근을 항해하던 칠레 해군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술집을 해방시킨 헤밍웨이와 독일의 스파이 코코샤넬

술집을 해방시킨 헤밍웨이와 독일의 스파이 코코샤넬

이미지 by vasse nicolas,antoine

 

프랑스 파리의 한복판에 있는 리츠호텔은 세계토픽에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호텔입니다.

호텔 소유주의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는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연인이었고 그녀의 마지막 만찬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으며 2018년 1월에는 호텔에 보관 중이던 60억 원 상당의 보석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범인들 중의 3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아무튼 파리의 리츠호텔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던 전력이 알려진 디자이너 코코샤넬을 비롯하여 문학가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곤 하는데 오늘은 프랑스 파리의 리츠호텔과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알아보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편에서 헤밍웨이는 금주법이 시행될 시기에 주류밀수를 하던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낚시를 즐겼다는 것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술을 아주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의 잡지 콜리에(Collier)의 종군특파원으로 전쟁에 참가를 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도 술을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화가 한 가지 있지만 이런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를 않은데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파리 리츠호텔에 있는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에 관한 것인데 흔히들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기 때문에 이 바의 이름이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일 것이라 생각을 하지만 헤밍웨이가 즐겨 찾아서 붙은 이름이 아니고 헤밍웨이가 이곳을 해방(?)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 의해 4년 동안 점령되었던 파리를 프랑스군이 해방시켜야 한다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Eisenhower)장군의 주장에 따라 미군이 먼저 입성할 것을 주장했던 패튼(Patton) 장군의 주장은 뒤로 밀리게 되고 프랑스의 제2기갑사단이 파리 입성의 주력부대로 선정되게 됩니다.

이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프랑스에 와있던 헤밍웨이는 일련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부대가 무기도 없고 조직적이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가 미군의 대령인 것처럼 속이고 랑부예(Rambouillet)로 레지스탕스를 이동하여 주둔시키고 미군의 도움을 받아 기관총과 수류탄 등의 무기로 무장을 시킵니다.

 

중앙이 헤밍웨이, 가장 왼쪽이 OSS의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

 

당시 파리에만 2만여 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무장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독일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꺼려하고 대신에 독일군이 사용하는 차량의 바퀴에 구멍을 내거나 통신선을 자르는 등의 소극적인 활동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드디어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군과 일부 미군이 입성함으로써 파리는 해방을 맞게 되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가 있는 리츠호텔에 처음으로 입성한 사람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였던 것입니다.

 

그가 지휘하던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OSS의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와 미육군 대령이었던 마샬(Marshall)과 함께 8월 24일 랑부예(Rambouillet)에서 파리로 진격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카페를 발견하면 헤밍웨이는 “술을 찾았는가?(Marshall, for God’s sake, have you got a drink?)”라고 마샬 대령에게 소리쳐 묻곤 하였다고 마샬(Marshall)은 회고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파리로 진격했던 레지스탕스 대원은 헤밍웨이가 “나는 파리에서 최초로 리츠를 해방시킨 사람이 될 것이다(to be the first American in Paris and liberate the Ritz)”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이라 그들이 파리로 가는 도중에 발견한 것이라곤 한 병의 스카치와 몇 병의 샴페인에 불과하였습니다.

드디어 리츠호텔이 있는 캄봉거리(Rue Cambon)에 차량이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뛰어내리면서 헤밍웨이는 “리츠를 해방시키러 왔다(Come to liberate the Ritz.)”고 말했다고 당시 호텔의 중역이었던 클로드 라울렛(Claude Roulet)은 회고하고 있으며 이전부터 헤밍웨이를 알고 있었던 당시의 매니저인 클로드 오젤로 (Claude Auzello)는 헤밍웨이에게 “총을 두고 들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특히 클로드 오젤로 (Claude Auzello)는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코코샤넬로 인해서 큰 불행을 겪었는데 그녀의 아내 블랑쉬 오젤로(Blanche Auzello)는 호텔에서 취득한 정보를 연합군과 레지스탕스에게 전달하거나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들의 탈출을 돕는 등 독일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코코샤넬의 밀고로 유태인이란 사실이 발각되어 게슈타포에 체포, 고문을 받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악명이 높았던 “Fresnes Prison”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블랑쉬 오젤로가 구금될 당시에 공산주의자였던 그녀의 친구도 함께 붙잡혔는데 블랑쉬는 친구에 대한 정보와 그녀가 유대인인라는 것을 실토한 후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호텔을 떠나 은퇴하기를 희망했던 남편과는 달리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호텔을 떠나기를 극구 반대했던 블랑쉬는 그녀의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가자 1969년 5월 29일 남편 클로드 오젤로(Claude Auzello)가 권총으로 그녀를 먼저 죽인 다음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블랑쉬 오젤로(Blanche Auzello)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는 “파리에서 리츠호텔에 머물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즐겨 찾았던 리츠호텔에 있는 지금은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로 이름 붙여진 술집은 이전까지는 그냥 자그마한 바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파리에 입성한 다음날인 8월 26일 헤밍웨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텔의 바에서 그가 좋아하는 술을, 그와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어윈 쇼(Irwin Shaw)를 비롯한 언론사의 기자들과 어울려 마셨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리츠호텔의 작은 바는 1994년부터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로 불리게 되었으며 2012년 보수공사를 시작하면서 문을 닫았다가 2016년 6월 8일 다시 개장함과 동시에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는 그의 흉상과 그가 즐기던 낚시를 하는 사진들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리츠호텔에는 총 4개의 바가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입니다.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낚시와 어업에 대한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도중에 1979년 8월 18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함지박 타고 바다낚시’란 제목의 기사를 발견했는데 내용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섬마을 어린이들에게는 바다를 누빌 배가 필요 없었다. 높이 50㎝에 직경 70㎝가량인 둥그런 물통이 배를 대신했다. 속칭 다라이라는 이 플랙스틱 함지박 안에 올라앉아 길이 2m가량의 대나무막대기를 노삼아 양쪽으로 저어 어디든지 오갔다. 그러면서 손낚시로 고기를 낚아 집안의 밥상에 올릴 찬거리를 마련했다.

집 앞 발아래의 바다가 이들의 여름철 놀이터이자 어장. U자형의 해안선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오른쪽에 조선, 왼쪽에 입석부락을 두르고 그 중심인 바다 복판에 8자형의 작은 옥섬이 건너다보인다. 세 부락에서 옥섬까지의 거리는 2백m 안팎이고 그 사이의 수심은 깊어야 30m. 이 일대를 마음대로 타고 다니며 놀다 상·하오의 밀물 때를 맞추어 도미와 도다리, 볼락어 등 고기를 하루 20~30마리씩 낚고 있는 것이다.

안전장비도 없이 수심 30m의 바다에서 위험한 낚시를 하는 것을 기사로 쓴 것에서 당시의 안전불감증을 엿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바구니를 타고 낚시를 하는 얘기에만 집중해보자.

바구니 보트, 또는 바구니 배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의 관광상품이 된 뚱차이(thúng chai)를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 베트남 어부들이 배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만든 뚱차이는 흔히들 영어로는 basket boat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이런 바구니 형태의 배를 가리키는 말로는 코러클(coracle)이란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웨일스어에서 유래하여 16세기 초에 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하는 coracle이란 말은 시저가 영국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림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는 존 카셀(John Cassell)이 설립한 출판사에서 펴낸 책(Cassell’s Illustrated History of England)에 남아있는 아래의 그림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런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상품으로도 판매 중으로 부르는 이름은 파리살(parisal)이다.

 

그밖에도 기원전 450년경 헤르도투스가 바빌론을 방문한 뒤 기록한 이라크의 바구니 보트가 역사적으로는 시저 다음의 기록이라 생각되는데, 영어로는 쿠파로 부르며 다른 나라의 것들에 비해 아주 큰 것이 특징으로 노아의 방주가 쿠파의 일종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 참고: BBC의 Coracles: The surprising history of Britain’s strangest boat

 

신문기사로 전해지는 함지박낚시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낚시를 즐기고 있겠지?

빵 클립(Bread clip)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 클립(Bread clip)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을 담은 봉투를 보면 플라스틱으로 밀봉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흔히 빵 클립이라고 부르는 이 작은 플라스틱 제품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 클립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회사로는 미국의 퀵록(Kwik Lok Corporation)과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럽의 슈테(Schutte bagclosures BV)가 대표적인데 두 회사 모두 제품명으로 백 클로저(Bag Closures)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빵클립으로 불리고 있는데 빵 포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품의 포장에 사용되고 있는 빵 클립(Bread clip)이라 불리는 백 클로저(Bag Closures)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195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식품의 포장기계 사업을 하고 있던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기내에서 땅콩을 먹기 위해 봉지를 뜯었다.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

 

그러나 땅콩 봉지를 다시 밀봉할 수 없게 되자 지갑을 뒤져 기한이 만료된 카드를 꺼내고 주머니칼(pen knife)로 카드에 구멍을 뚫은 다음 봉지를 다시 밀봉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은 워싱턴에 있는 사과농장으로부터 사과를 봉지에 담은 다음 쉽게 밀봉하는 방법이 없는지 의뢰를 받게 되는데, 그가 기억해낸 것이 바로 비행기에서 땅콩 봉지를 다시 밀봉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퀵록(Kwik Lok Corporation)의 일본지사에서는 사과농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하고, 영문판 위키피디어에서는 과일 포장업체인 퍼시픽 프루트(Pacific Fruit)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퀵록에서 밝히는 자사의 역사에 더 신뢰가 간다.

아무튼 플로이드 팩스턴은 그의 기억을 되살린 아이디어를 상품화시켜 1950년대 초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던 식품의 자동포장에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빵 클립(Bread clip)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특허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는데 그 결과 클립(Bread clip)을 세상에 선보인지 5년 뒤인 1957년에 네덜란드에서 요하네스 슈테(Joannes Schutte)란 사람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의 집 지하실에서 빵 클립(Bread clip)이라 불리는 백 클로저(Bag Closures)를 만들어 빵집에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슈테(Schutte bagclosures BV)가 있도록 만든 모체였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열등감

미국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열등감

우리는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일본의 아베총리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에 이어서 일본의 대기업 7개를 미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해도 내가 보기엔 아베 정권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해바라기와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나는 종종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두 번에 걸친 일본의 항공모함 개조에 관한 글에서는 미군을 위한 것이라는 개인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분명 일본으로서는 최선의 정치적·외교적 선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1853년 개항을 요구한 이후 1854년에 미국과 일본의 국교가 맺어지는데 1941년 진주만공습을 지휘한 일본 제국해군의 연합함대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했던 독백이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

 

“진주만 공습이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독백은 자라면서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자라고 있었던 열등감의 발로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태평양전쟁의 패배 이후 미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킹콩을 이기기 위해 영화 고질라를 만든 것처럼 지금의 아베정권에게도 이와 같은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이란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노자키 분조(野崎文蔵)’는 ‘오사나에키반코쿠바나시(童絵解万国噺)’라는 책을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린 삽화를 넣어 발간하였다.

 

책의 줄거리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국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독립과 건국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타국의 역사를 이처럼 과장되게 묘사한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만의 그 무엇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들의 열등감이라고 본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童絵解万国噺)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請求記号:文庫11_a0380_0002

※ 童絵解万国噺 上 三編

우선, 미국은 독수리로, 뱀은 영국을 상징하여 서로 싸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제1대 부통령이자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John Adams)’가 칼을 들고 거대한 뱀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한 번에 여러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능숙하게 물리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 주변에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공격하는 사람들 중에 흑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개항을 요구했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의 배에 있던 흑인들의 모습을 본 영향도 있겠지만 영국인들이 자유를 약속하며 미국과의 전쟁에 흑인들을 대동한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서 후퇴한 존 애덤스는 다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힘을 합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마치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대포를 맨손으로 들고 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은 호랑이의 목을 조지 워싱턴이 발로 밟고서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음에도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일본인의 눈에 비친 미국의 강대함과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바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즐겨 읽는 삼국지(三國志)에도 현실적이지 않는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중국인이 쓴 자국의 소설이고 ‘노자키 분조(野崎文蔵)’가 쓰고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림을 그린 ‘오사나에키반코쿠바나시(童絵解万国噺)’라는 책은 일본인이 쓴 미국의 건국이야기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현안(懸案)들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아베총리의 발언과 오늘 소개한 책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청와대 미남석불(美男石佛)의 수난은 언제쯤 끝날까?

청와대 미남석불(美男石佛)의 수난은 언제쯤 끝날까?

청와대를 개방한 지 하루만인 5월 11일 청와대 관저 뒤편에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일명 미남석불로 불리는 불상 앞에 놓인 불전함이 파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라고 알려졌다.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는 이 불상을 경주로 반환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오늘은 미남석불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불상의 영욕(榮辱)을 추적해본다.

인용하는 신문의 기사 중 한자표기만 있는 것은 한글을 병기하였고, 일제 강점기 일본식 한자표기를 따른 기사는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는 안내와 함께 얘기를 시작해본다. 1967년 4월 30일 조선일보 3면에는 “이번에 石佛(석불)이 말썽 낳고…”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던 것들이 선거(選挙) 때만 되면 정치적(政治的)으로 곧잘 이용(利用)되곤 해왔는데, 이번에는 청와대(靑瓦臺) 약수(薬水)터에 있는 석불(石仏) 하나가 말썽의 씨가 됐다.

이 석불(石仏)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서울을 이왕조(李王朝)의 수도(首都)로 자리를 정할 때 세운 보잘것없는 것인데 이승만(李承晩)씨나 윤보선(尹潽善)씨가 대통령(大統領)으로 재임(在任)했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지난 19일 청와대(靑瓦臺)를 개방한 이래 몰려온 45만 명의 상춘객(賞春客)들에게 애완(愛玩)되었던 것.

그런데 선거(選挙) 때라서 그런지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과 이 석불(石仏)을 관련시켜, 박대통령(朴大統領)은 불교(仏敎)와 가깝다느니, 따라서 기독교(基督敎)를 싫어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청와대비서실(靑瓦臺祕書室)은 잔뜩 긴장.

한 비서관(祕書官)은 『어린이 상춘객(賞春客)에게 매년 한 자루씩 주어오던 연필 한 자루와 공책 한 권도 금년에는 선거(選挙) 때라고 해서 안주고 있는데, 석불(石仏)을 정치적(政治的)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푸념.

바로 이 기사에 나오는 석불이 오늘의 주제인 미남석불인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도 이전부터 해오던 봄철 꽃놀이 시기의 청와대 개방을 중지하지 않고 실시했으며 이에 관한 자료는 1963년 4월 27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414호로 알 수 있는데 여기에도 오늘 포스팅의 주제인 미남석불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일어난 이후론 청와대를 일반에 개방하는 행사는 더이상 개최되지 않게 되었고 1974년 1월 15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긴 했으나 시민들은 미남석불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4년 10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잇따른 사건사고가 김영삼대통령이 미남석불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난무해지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관저 뒷산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공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의 종교문제가 가라앉지 않자 청와대는 조계종 스님 8명을 초청하여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에 관한 기사는 1996년 9월 7일자 한겨레의 23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적인 이유로 언론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미남석불은 2018년 4월 20일 보물 제1977호로 승격되었고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경주에 있던 미남석불은 어떻게 해서 청와대로 옮겨졌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단서는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이기환의 역사흔적을 기고하고 있는 이기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가 쓴 기사를 보면 1934년 3월 29일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그래서 기사를 찾아보았다.

釋迦如來像(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美男石佛) 櫛風浴雨(즐풍욕우)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大樹下(대수하)에,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博物舘(박물관)에서 垂涎萬丈(수연만장)이란 대소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이에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하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의 1934년 3월 28일자에서는 매일신보보다 하루 앞서 미남석불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석불의 행방을 온 힘을 다해 찾던 27일에야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이 거짓말이란 것으로 1934년 3월에 석불이 발견되기까지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조선총독부의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1912년 11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경주를 방문하였다.

그 목적은 경주에 산재한 조선의 보물을 수탈하기 위함이었는데 봉덕사종 앞에서 찍은 당시의 사진은 1912년 11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실려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경주분관장을 맡기도 했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당시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보다 앞서 초대 경주분관장을 맡고 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를 안내했는데 이자는 박물관장이라기보다는 도굴꾼이란 명칭이 더 어울릴 정도의 인물이었다.

모로가 히데오에 대해서는 조금 뒤 자세히 알아본다.

아무튼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란 필명으로 특히 신라의 문화와 경주의 유물과 고적에 관한 집필을 많이 했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1934년 3월 31일자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12년 데라우치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미남석불은 경주금융조합의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집에 옮겨져 있는 상태였고, 이것을 본 데라우치가 감탄을 거듭하자 고다이라가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7년 12월 3일자 한겨레신문은 단독으로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발견한 미남석불과 관련한 사진을 공개했는데 이에 따르면 1913년 2월 남산의 총독관저로 옮겨온 석불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데라우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데라우치 이후 조선총독들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부터는 경주를 방문하면 시바타여관에 머물곤 했는데 여관 앞에는 구리하라(栗原)라는 골동품가게가 있었고, 골동품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돈이 많을 것 같으면 시바타여관의 주인인 시바타 단쿠로(柴田団九郎)를 연결해주었고, 시바타 단쿠로는 그들을 다시 경주박물관장이던 모로가 히데오에게 연결시켜주는 커넥션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신라의 문화재를 밀반출하는 일이 얼마나 잦았고, 얼마나 크게 이루어졌으면, 1933년 4월 28일에는 모로가 히데오가 경찰에 구속되기에 이르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하였고 동아일보는 3꼭지로 나누어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제목을 한 번 보도록 하자.

1. 신라(新羅)때 진품(珍品)을 도매(盜賣) 玉虫帳(옥충장)도 부지거처(不知去處) 【경주박물관장장물압수사건(慶州博物舘長贓物押收事件)】 속칭(俗稱) 경주왕(慶州王)의 말로(末路).

2. 발각(發覺)의 단서(端緖)는 고적도굴사건(古蹟盜掘事件)

3. 경주(慶州)를 좌우(左右)튼 유일(唯一)의 권력가(權力家)

 

재판에 넘겨진 모로가 히데오는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과 함께 벌금도 1심보다 크게 감액된 2백원이란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된다.

재판과정에서 조선의 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골동품 밀매업자에 불과한 모로가 히데오를 위로하는 손편지를 직접 보냈다는 것이 공개되었는데 이러한 것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1920년 11월에 경주를 처음 방문하였는데 앞에서 얘기한 시바타여관에 묵으면서 모로가 히데오를 알게 되었고 이후로 모로가 히데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촉탁이 되어 경주의 고적에 대한 보존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경주박물관장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임하기에 앞서 조선의 유물을 대장에 기록하고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을 제정하였는데, 정작 그의 관저에 보관하고 있던 미남석불은 대장에 수록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이것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는 미남석불이 유물을 관리하는 장부의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을 모로가 히데오가 경찰의 수사를 받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조사에 나서면서 총독관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남석불을 관저로 반입한 뒤 승려를 불러 예불을 올릴 정도로 총독의 관심을 받았던 유물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처럼 수난의 역사를 지닌 미남석불은 청와대의 개방과 함께 석불 앞에 놓인 불전함이 파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본향을 떠나야만 했던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이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어떨까?

일본인이 디자인한 의상을 “한복을 재해석한 것을 입고 청와대에서 화보를 촬영한 것”이라 답하는 문화재청장과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떠 있을까?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떠 있을까?

가끔 가까운 시화방조제에서 밤낚시를 할 때면 밤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곤 하는데 하루 24시간 언제나 전 세계의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는 얼마나 될까? 하고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오늘은 자주는 아니어도 멀리서 오는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서 가끔은 공항으로 나갈 일이 있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이트(앱도 있음)를 소개할까 한다.

실시간으로 비행기를 추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flightradar24에서는 2019년 7월 24일 전 세계에서 22만5천 회의 비행이 이루어져 공식집계 이후로 가장 많은 비행기록을 세운 날이라고 발표하였다.

Yesterday, we tracked over 225,000 flights in a single day for the first time. Follow more than 20,000 flights right now at https://t.co/A4mWRJu9Vipic.twitter.com/Pxh21WiAy3

— Flightradar24 (@flightradar24) July 25, 2019

과연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날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아보면 글을 작성하는 지금 현재 아래의 사진과 같이 수많은 비행기들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변을 비행하고 있는 항공기들은 지금 현재 아래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면 아시아나항공의 OZ721편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을 향해 운항 중임을 볼 수도 있다.

또한 민간항공사가 가장 많은 미국의 하늘은 역시나 셀 수 없이 많은 비행기들이 운항 중인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이처럼 많은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이것을 유용한 앱이라고까지는 얘기할 수 없는데 해외여행이나 공항에 픽업 나갈 때에는 비행기의 실시간 운항정보와 도착시간 등을 정확히 알아볼 수가 있다는 점이 이 사이트(앱)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항공 KE018편으로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친척이 있어서 마중을 나가야 한다면 도착시간은 스케쥴(17:20)보다 빠른 16:53분에 도착하는 것으로 대한항공의 홈페이지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flightradar24를 통하면 더욱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검색창에 KE018을 입력하면 현재 북태평양 상공을 비행 중임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항공의 정보와는 달리 17:09분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또한 KE018의 기종은 에어버스 A380기종이며 고도 38,000피트에서 시속 875㎞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이것은 ADS-B라고 하는 자동위치전송장치와 다변측정 항공감시 시스템인 MLAT(Multilateration)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군용항공기는 제외한 헬기를 비롯한 자가용 비행기 등 모든 민간항공기를 추적하여 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국민들의 일본관광 자제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는 요즘, 오늘도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의 KE723편은 일본 오사카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