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1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1편)

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는데 스포츠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자국 대표선수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게 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위신을 되찾는 수단으로서 스포츠에 주목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외에도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1차 대전 후 프랑스의 스포츠계에 퍼진 “한 경기종목은 하나의 연맹이 통괄한다”는 모델은 프랑스의 주도에 의해 국제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부터 각국 정부는 스포츠에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게 되었으며 국제정세가 올림픽대회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와 정치의 연결도 1차대전 이후 시작되었다.

실제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개최된 1920년 올림픽대회에는 1차 대전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 독일제국을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과 같은 동맹국들은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이 올림픽 역사에서 선수단의 참가를 불허한 최초의 배척이었다. 이처럼 스포츠계가 정치적 색조를 띠기 시작하는 가운데, 거기서 조직화를 주도한 것이 프랑스였다.

올림픽과 내셔널리즘의 관계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논의되어왔으며 그 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의 비정치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을 경험한 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았다.

1차 대전 후 프랑스 사회는 대중문화가 발전을 이루는 시대였다.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방편으로써 국민들의 오락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전기가 일반 가정에 널리 퍼져나가는 것과 함께 라디오 방송이 크게 보급되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국화해가는 미국 영화의 상영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스포츠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1차 대전까지는 일부 사람에 한정되어 있던 스포츠였지만, 전후에는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관람하는 것도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한 실제로 경기장에서 관전하는 것 외에도 라디오나 스포츠 전문 잡지, 혹은 신문의 스포츠란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경기결과를 알게 되었는데 스포츠 미디어 중에서도 특히 유통량이 많았던 것은 일간지 로토(L’Auto)였다.

 

1903년에 투르 드 프랑스를 시작하고 있던 로토는 전쟁이 끝난 뒤 1923년에는 자동차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창설하는 등 스포츠 대회의 주최나 후원에도 적극적이었고 그런 결과로 신문의 매출도 증가했다.

1923년에는 하루에 27만 7000부, 투르 드 프랑스의 개최 기간에는 하루에 50만 부 가까이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10년 후에는 평균 36만 4000부까지 발행 부수를 늘려나갔다.

이와 같이 1차 대전 후의 프랑스에서의 스포츠는 정치화와 동시에 대중화도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 열렸던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가 바로 1924년에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제8회 올림픽대회였다.

 

프랑스가 1924년 파리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쿠베르탱 남작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1920년의 앤트워프 올림픽에는 국제정세를 이유로 독일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가 참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스포츠계는 쿠베르탱이 주창했던 올림픽 정신과 평화적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이런 역사를 지닌 올림픽이 2024년에 다시 파리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된 이후 지금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의 2024년 파리올림픽 참가를 반대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즉 순수한 스포츠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 올림픽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과 스포츠의 정치화 및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각국의 내셔널리즘이 명확하게 표출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은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에 걸쳐 사상 처음으로 세계 규모로 펼쳐진 전쟁이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던 국가 간의 총력전이 되었다.

이 총력전의 경험과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의한 배상이나 제국의 해체, 거기에 따른 영토 등의 지정학적 변화는 유럽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을 증폭시켜 국가끼리의 대항의식은 1차 대전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베르사유조약의 발효일인 1920년 1월 10일에 국제적인 평화유지기구로서 국제연맹이 설립되어 상호 의존성과 통합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포츠계에서도 1차 대전 후에 국제적인 연결이 강화되어 국제 대항 경기가 적극적으로 개최되고 있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1차 대전 전까지는 대부분 대영제국에 속한 국가들과의 럭비 경기였지만 1차 대전 후에는 유럽 인근 국가와 육상경기 및 축구경기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를 둘러싼 국제적인 연결은 각국 팀 간의 상호 교류를 확대해가는 한편, 국가 간의 대항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스포츠가 여론을 집중시켜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어당길 정도의 영향력은 없었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을 둘러싸고 1차 대전 이전과 이후에 가장 다른 점은 스포츠에 국가가 대외적인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대회가 증가함에 따라 1차 대전 후 유럽 각국에서 국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크게 확대되었다.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높여준다는 생각들이 공유되고 확대됨에 따라 스포츠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심과 대항의식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 1월 20일에는, 프랑스 교육성에 체육스포츠과가 설치되었으며 책임자로는 프랑스 스포츠연맹(USFSA: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 Sports Athlétiques)의 의장이었던 가스통 비달(Gaston Vidal)이 선정되었다.

가스통 비달(Gaston Vidal)

 

가스통 비달은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추락한 프랑스의 위신을 스포츠를 통해 다시 세계에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비달은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직전에 “스포츠는 국가의 사업이 되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1920년에는 프랑스 외무부가 해외사업부에 관광 및 스포츠부를 설치했는데 해외사업부는 말 그대로 국외를 향한 프랑스의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부서로 주된 업무는 IOC에 대한 프랑스 영향력 강화, 외국과의 경기 확대 및 국가대표를 영화로 홍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프랑스 정부는 스포츠를 국가의 이미지를 홍보하는데 유용한 선전도구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할 것으로 기대되어 정부가 관여하게 된 것에 따라 국제경기는 정치성을 수반하게 되었고 1차 대전 이후의 복잡한 국제 정치상황은 스포츠계에도 명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트워프 올림픽에도 1차 대전 당시의 동맹국들은 참가할 수 없었는데 그 외에도 베르사유조약의 조인과 같은 시기인 1919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연합군 경기대회(영어: Inter-Allied Games, 프랑스어: Les Jeux interalliés)도 그 명칭 그대로 참가 팀은 1차 대전의 연합국에 한정되었다.

2편에 계속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붕괴사고 Top 6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붕괴사고 Top 6

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이 개발에 참여한 라오스의 수력발전댐 붕괴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사망과 실종자의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최대규모의 전차경기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안토니우스 피누스”황제 재임 시에 붕괴되어 1만 3천여 명이 희생된 기록을 가지고 있고,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은 로마 교외의 피데나이(Fidenae)에 있던 목재로 건축된 원형극장이 붕괴되어 2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만 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이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1800년대에 일어난 사고로는 1807년 9월 20일(음력 8월 19일)에 발생한 일본의 영대교(永代橋) 붕괴사고를 꼽을 수 있는데 토미오카하치만구(富岡八幡宮)의 신사에 몰려든 참배객들로 인해 노후화된 교량이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1,400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후 교량은 1926년에 현재의 철교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1889년 5월 31일에는 미국의 펜실베니아주를 강타한 폭풍우로 사우스포크댐의 강물이 범람하면서 댐이 무너져 2,20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1900년대에 이후에는 인류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인명사고를 발생시킨 사고가 일어납니다.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붕괴사고에는 부끄럽지만 대한민국의 이름도 들어있는데 지금부터 가장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은 최악의 붕괴사고 Top6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6위: 1959년 프랑스 말파셋 댐(Malpasset Dam) 붕괴사고

195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54년 4월에 완공된 이 댐은 1959년 12월 며칠간 계속된 집중호우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42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는데 사고의 원인으로는 하류의 단층으로 인해 댐건설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 건설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어 부실한 지질조사가 불러온 인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5위: 1995년 한국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설계의 부실, 시공의 부실 등 모든 부실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이 사고는 6·25전쟁 이후 발생한 가장 큰 인재로 기록되고 있으며 사망 502명 부상 937명이라는 피해를 낳았습니다.

 

▶ 4위: 1928년 미국의 세인트 프랜시스 댐(St. Francis Dam) 붕괴사고

토지개발붐이 한창이던 1924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된 이 댐은 물을 채울 때부터 균열이 발견되었고 그 후에도 균열과 누수가 발견되었으며 1928년 3월 12일에 댐을 설계한 윌리엄 멀홀랜드가 정기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균열의 보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 몇 시간 뒤에 붕괴되어 432명이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3위: 2013년 방글라데시의 다카 근교 건물 붕괴사고

아직도 이 사고는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데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 근교에 있는 8층으로 된 상업용 건물인 “라나 플라자”가 붕괴되어 1,12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서 다국적 패션기업들에 의해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실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2위: 1963년 이탈리아의 바이온트 댐(Vajont Dam or Vaiont Dam) 붕괴사고

1960년에 준공된 이 댐은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부흥의 상징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댐이었는데 1963년의 이상기후로 인한 폭우 때문에 댐 주변의 지반이 침하되면서 10월 9일 밤 10시 39분에 댐 좌측의 산이 무너지는 산사태로 2억6천만㎡의 토사가 댐에 빠른 속도로(시속 109km)로 흘러들어 거대한 해일이 발생하였고 이 해일이 마을을 덮치면서 2,125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습니다.

 

▶ 1위: 1975년 중국의 반차오 댐(Banqiao Dam) 붕괴사고

1949년과 1950년에 연속해서 발생한 회하(淮河)의 홍수로 인한 하천공사의 일환으로 1952년에 완공된 이 댐은 1975년 태풍 “니나(Nina)”로 인해 붕괴되었는데, 당시 반차오 댐을 비롯하여 58개의 중소형 댐들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홍수가 민가를 덮치는 바람에 익사자를 포함하여 전염병과 기아로 인한 2차 사망자의 숫자를 모두 합해 17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는데 당시 피해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2005년에서야 중국정부가 일부 정보를 공개하면서 알려졌지만 공개한 정보도 축소되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2000년대 초반 업무상 방문한 북경지역의 고층건물 건설현장을 둘러보면서 정말 위험하다는 것이 육안으로 느껴질 정도의 부실한 현장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최소한 부실로 인하여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는 일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와 사보이아-마르케티 S.55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와 사보이아-마르케티 S.55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1992년작 붉은 돼지(紅の豚)의 포스터를 보면 제목 밑에 이탈리아어로 포르코 롯소(Porco Rosso)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어 포르코(Porco)는 돼지, 롯소(Rosso)는 붉은색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굳이 이탈리아어로 된 제목을 사용한 것은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바로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르코 파곳(Captain Marco Pagot)이 이태리 공군 출신이기도 하지만 그가 모는 비행정 ‘사보이아 S.21’이 이태리에서 개발한 비행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한데, 오늘은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紅の豚)에서 주인공이 조종하는 비행정의 모델이 된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사보이아 S.21(가상의 비행정)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紅の豚)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3종류의 비행정이 등장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이 사용하던 한자-브란덴부르크(Hansa-Brandenburg)CC와 이탈리아 해군이 1차대전에서 운용하였던 마키 M.5(Macchi M.5)와 1차대전이 끝나고 진화한 오늘의 주인공인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가 그것이다.

한자-브란덴부르크(Hansa-Brandenburg)CC

 

마키 M.5(Macchi M.5)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

 

이소타 프라스키니(Isotta Fraschini)의 500마력 엔진 2개를 얹은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는 1923년 8월에 첫 비행을 성공하였으며 1927년 2월에는 지금의 세네갈 수도인 다카르(Dakar)에서 이륙하여 남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와 뉴욕을 경유하여 4만8천㎞의 비행을 마치고 4개월 만에 이탈리아로 귀환하는 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나중에 공군장관의 자리에 올랐던 이탈로 발보(Italo Balbo)의 선전비행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끄는 편대의 선전비행에 힘입어 브라질과 스페인, 루마니아의 각 군은 물론 소련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에도 판매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시카고에는 발보 거리(E Balbo Dr)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로 발보(Italo Balbo) 때문에 붙여진 도로명이다.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무솔리니의 집권과정에서 무솔리니를 지지한 4명의 당 간부를 지칭하는 콰드룸비로(Quadrumviro)의 한 명으로 흔히 사대장(四大將)으로 부르는데 이탈로 발보(Italo Balbo)를 비롯하여 비켈레 비앙키(Michele Bianchi), 에밀리오 데 보노(Emilio De Bono), 체자레 마리아 데 베키(Cesare Maria De Vecchi)가 그들이다.

왼쪽이 이탈로 발보(Italo Balbo)

 

4명 중에서도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후계자이자 파시스트당의 핵심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가 1933년 6월 1일 사보이아-마르케티 S.55를 개량한 24대의 비행정으로 구성된 편대를 이끌고 직접 대서양 횡단에 나섰던 것이다.

24대의 비행정은 대서양 횡단을 위해 개량된 것으로 엔진은 880마력의 이소타 프라스키니 앗쏘 750V(Isotta Fraschini Asso 750V)를 탑재하여 최대속도는 252㎞/h, 항속거리는 4,500㎞로 향상시켰으며 이름도 S.55X라고 붙였는데 이탈로 발보(Italo Balbo)가 조종하였던 비행정의 날개 하단에는 민간코드인 ‘I-BALB’를 그려 넣었다.

 

로마 근교의 항구도시 오르베텔로(Orbetello)에서 이륙한 편대는 북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지나 48시간 후에 캐나다에 도착하여 2,400㎞의 대서양 무착륙 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출발하여 시카고 상공에서 V자 편대비행으로 시카고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시카고 시내의 7번가는 발보 거리(E Balbo Dr)로 이름 붙여졌던 것이다.

 

이어서 뉴욕 브로드웨이 상공에서 비행을 마친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이후 서로가 적국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미국의 루즈벨크 대통령으로부터 수훈 비행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수여 받았다.

또한 이탈로 발보(Italo Balbo)와 그의 편대비행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1934년 제2회 시카고 박람회의 이탈리아 전시관 앞에 설치되었으며 그 뒤 번햄 공원(Burnham Park)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당의 공군사령관이자 식민지 리비아의 총독으로 잔인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의 기념물과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항의시위가 이어지고 반대여론이 비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용되는 도로명과 우뚝 솟은 기념물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19세기 흑인 여성운동가의 아이콘이라는 아이다 벨 웰스(Ida Bell Wells)의 이름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아이다 벨 웰스(Ida Bell Wells)는 20대 후반에 시카고로 이주하여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카고에서 활동한 인권운동가였는데 그녀의 이름으로 도로명을 개명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긴 하지만 나도 찬성하는 바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양귀비를 가슴에  이유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양귀비를 가슴에 이유는?

미국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매년 5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에 열리는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가슴에 양귀비가 장식된 유니폼을 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종전 기념일(Rememberance Day)인 매년 11월 11일에는 선수들이 가슴에 양귀비가 장식된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다.

이처럼 전쟁에 참전하여 숨져간 영령들을 기리는 뜻으로 양귀비를 가슴에 다는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래가 되었는데 종전기념일 또는 영령기념일로 불리는 이 날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을 회상하고 전쟁으로 숨져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조지 5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양귀비의 날(Poppy Day)이라고도 부른다.

스포츠 선수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 장식된 양귀비는 특히 ‘현충일 양귀비(Remembrance poppy)’로 불리는데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이 인공적인 양귀비 조화가 공식적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1921년부터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인공 양귀비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상징으로 사용하게 된 유래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1차 세계대전의 격전장이었던 서부전선에 쏟아지던 포격 속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었던 양귀비는 이프르 전투(the battle of Ypres)에 군의관으로 참가했던 캐나다의 육군중령 존 맥크래(John McCrae)에게 시적인 영감을 주었고, 그는 ‘개양귀비 들판에서(원제: In Flanders Fields)’란 시를 1915년 5월에 써서 그 해 12월 8일에 펀치 매거진(Punch magazine)이란 잡지를 통해 출판하게 된다.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In Flanders fields the poppies blow

Between the crosses, row on row,

That mark our place; and in the sky

The larks, still bravely singing, fly

Scarce heard amid the guns below.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랜더즈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We are the dead. Short days ago

We lived, felt dawn, saw sunset glow,

Loved, and were loved, and now we lie

In Flanders fields.

우리의 싸움과 우리의 적을 이어받으라.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이제 그대의 것이니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 저 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비록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 하여도.

Take up our quarrel with the foe:

To you from failing hands we throw

The torch; be yours to hold it high.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We shall not sleep,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

사진은 바그람 공군 기지(출처: 미 공군 중앙 사령부)

 

캐나다에서는 종전기념일 행사에서 묵념이 끝나면 이 시를 낭독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터의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는 개양귀비를 노래한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에 화답하여 1918년 11월 9일 미국 조지아 대학의 교수였던 모이나 마이클(Moina Belle Michael)이 ‘We Shall Keep the Faith’란 제목의 화답시를 발표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는 상징으로 개양귀비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개양귀비 인공조화가 세계적으로 전파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에 왔던 안나 게랭(Anna Guérin)이라고 할 수 있다.

개양귀비를 현충일을 기념하는 꽃으로 사용하자는 공식적인 제안은 모이나 마이클(Moina Belle Michael)이 하였으나 그녀보다 앞서서 개양귀비를 사회적인 활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개양귀비 여인(Poppy Lady of France)’ 또는 ‘프랑스에서 온 개양귀비 여인(Poppy Lady from France)’이라 불렸던 안나 게랭(Anna Guérin)이었다.

역사적으로는 ‘개양귀비의 날(Poppy Day)’이란 명칭의 공식행사는 1916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인공조화는 1916년 전쟁포로들을 위한 기금모금행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규모도 작았고 전 사회적인 공감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안나 게랭(Anna Guérin)이 그녀가 주최하는 각종 자선행사에서 개양귀비의 인공조화를 사용하면서부터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마침내 1920년 9월 27일에 ‘미국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에서 개양귀비를 공식 꽃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The American Legion

 

영국에서 개양귀비의 인공조화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1921년의 일로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하여 얼 헤이그 재단(Earl Haig Fund)이 개최했던 기금모금행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때 사용한 인공조화는 안나 게랭(Anna Guérin)이 생산한 것들을 수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영국재향군인회는 참전 상이용사들로 운영되는 공장에서 자체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붉은 개양귀비는 영연방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현충일을 기념하는 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보라색 양귀비는 전쟁으로 희생당한 동물들을 기리는 것으로 사용되고 흰색 양귀비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상징하며 현충일에 사용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대학 Top20

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대학 Top20

미국 교육부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재학생 1,000명 이상의 대학을 조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의 회사(FindTheBest.com)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학생 1,000명당 가장 범죄율이 높은 미국의 20개 대학은 다음과 같다고 하니 혹시라도 유학을 계획 중이시라면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 범죄의 유형에 대한 세부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강력범죄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하여도 알 수 없으니 단순참고용로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20위: 퍼모나칼리지(Pomona College)

위치 : Claremont,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18.6명

 

▶ 19위: 리빙스턴칼리지(Livingstone College)

위치 : Salisbury,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2건

1,000명당 사고율: 18.7명

 

▶ 18위: 프레즈비테리언칼리지(Presbyterian College)

위치: Clinton, Sou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7건

1,000명당 사고율: 18.8명

 

▶ 17위: 사우스대학교 스와니 캠퍼스(Sewanee-The University of the South)

위치: Sewanee, Tennessee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7건

1,000명당 사고율: 21.8명

 

▶ 16위: 히람칼리지(Hiram College)

위치: Hiram,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9건

1,000명당 사고율: 22.1명

 

▶ 15위: 클레어몬트 매케나 칼리지(Claremont McKenna College)

위치: Claremont,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1건

1,000명당 사고율: 23.3명

 

▶ 14위: 오레곤 건강과학대학교(Oregon Health & Science University)

위치: Portland, Oregon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67건

1,000명당 사고율: 23.6명

 

▶ 13위: 프랭클린칼리지(Franklin College)

위치: Franklin, India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5건

1,000명당 사고율: 24.7명

 

▶ 12위: 옥시덴탈칼리지(Occidental College)

위치: Los Angeles,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54건

1,000명당 사고율: 25.4명

 

▶ 11위: 윌밍턴칼리지(Wilmington College)

위치: Wilmington,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25.6명

 

▶ 10위: 리드칼리지(Reed College)

위치: Portland, Oregon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0건

1,000명당 사고율: 28.3명

 

▶ 9위: 세인트 오거스틴대학교(Saint Augustine’s University)

위치: Raleigh,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25.6명(이 부분은 자료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8위: 스와스모어칼리지(Swarthmore College)

위치: Swarthmore,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8건

1,000명당 사고율: 31.3명

 

▶ 7위: 쇼 대학교(Shaw University)

위치: Raleigh,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71건

1,000명당 사고율: 34.4명

 

▶ 6위: 펜실베니아 주립 체이니대학교(Cheyney University of Pennsylvania)

위치: Cheyney,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5건

1,000명당 사고율: 37.1명

 

▶ 5위: 갈루뎃대학교(Gallaudet University)

위치: Washington, D.C.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59건

1,000명당 사고율: 37.8명

 

▶ 4위: The Art Institute of Pittsburgh

위치: Pittsburgh,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61건

1,000명당 사고율: 39.5명

 

▶ 3위: 센트럴 주립대학교(Central State University)

위치: Wilberforce,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87건

1,000명당 사고율: 42.1명

 

▶ 2위: Inter American University of Puerto Rico-Barranquitas

위치: Barranquitas, Puerto Ric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119건

1,000명당 사고율: 57.4명

 

▶ 1위: 베네딕트칼리지(Benedict College)

위치: Columbia, Sou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152건

1,000명당 사고율: 60.5명

 

마가린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

마가린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

1960년 국내 최초로 롯데푸드의 전신인 일동산업에서 마가린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일동산업은 1967년에 삼강산업으로 사명을 바꾸었고 1977년 롯데그룹에 인수되었다.

이처럼 국내에서 생산된 지는 6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가린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869년의 일로 지금부터 150년 전의 일이다.

※ 2012년 박문각에서 출판한 ‘발명상식사전’에서는 1867년에 마가린이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은 모두 1869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출처: 롯데푸드

 

1869년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으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두 나라의 대립은 최고조에 달해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인구의 증가로 인한 수요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군용 버터의 수요가 늘어남으로 인해 나폴레옹 3세는 버터를 대신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표를 하였는데 이때 응모하여 채택된 것이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라는 화학자가 개발한 제품이었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파리 근교의 뱅센(Vincennes)에 있던 나폴레옹 3세의 개인농장에서 1867년까지 가축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박문각에서 펴낸 ‘발명상식사전’이란 책은 마가린이 개발된 해를 1867년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 3세의 버터 대체품에 대한 공모가 있기 전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먹이가 부족하면 소의 체중과 우유의 생산량은 감소하지만 지방의 양은 크게 줄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지방으로부터 분리하는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성공하게 되고 이것을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1870년 나폴레옹 3세로부터 포상을 받은 무리에는 파리 근교의 푸아시(Poissy)에 세계최초의 마가린 공장을 세우고 생산에 들어갔으나 곧이어 일어난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제대로 운영을 하지 못하고 네덜란드에 넘기게 된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을 마가린(Margarine)이라고 상표화한 다음 1869년 7월 15일 특허를 신청하여 1869년 10월 2일 프랑스에서 특허를 취득한 것을 필두로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에서도 특허를 취득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기사나 정보를 보면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가 네덜란드의 유르겐스(Jurgens)에 특허를 판매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틀린 것으로 이 부분을 조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에서 특허를 출원하고 취득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네덜란드에는 특허에 관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는 1817년에 제정한 특허에 관한 법률을 1869년에 폐지했고 1910년에 새로운 특허법이 통과될 때까지는 특허를 신청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느 누구에게도 특허를 줄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특허가 아닌 생산방법에 관한 노하우를 넘겨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며 또 한 가지 오류는 유르겐스(Jurgens)에만 넘겼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1871년 6만 프랑을 지불하고 마가린 제조법을 손에 넣었던 안톤 유르겐스(Antoon Jurgens)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사이먼 반 덴 버그(Simon van den Bergh)란 사람도 제조법을 손에 넣어 공장을 짓고 마가린의 생산에 뛰어들었다.

원래 소기름으로 만들던 마가린은 높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물성기름을 사용하여 제조하게 되었으나 1906년에 닥친 원자재의 위기로 힘들어졌고 결국 안툰 유르겐스(Antoon Jurgens)와 사이먼 반 덴 버그(Simon van den Bergh)는 1927년 11월, 두 개의 마가린 제조업체와 합병하여 마르하리너 위니(Margarine Unie)로 변신하게 된다.

마르하리너 위니(Margarine Unie)는 영어로 마가린 유니(Margarine Unie)로 발음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사인 유니레버(Unilever)의 전신이 되는 기업인데, 1929년 영국의 레버 브러더스(Lever Brothers)와 합병하면서 영어로 유니언(Union)을 뜻하는 네덜런드어 위니(Unie)에서 Uni를 따고 레버 브러더스(Lever Brothers)의 레버(Lever)를 붙여 탄생한 기업이 바로 유니레버(Unilever)인 것이다.

프랑스에서 개발되고 네덜란드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던 마가린은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갔는데 1875년부터 마가린을 생산하기 시작했던 독일은 날로 소비가 증가하여 1차 대전 전까지 유럽 소비량의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마가린의 숨은 이야기 중에는 고래와 2차 대전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식물성기름으로 제조하기 전까지 마가린의 제조에는 고래기름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 안툰 유르겐스(Antoon Jurgens)의 뒤를 이어 마가린제조업을 하고 있던 손자 안톤 유르겐스(Anton Jurgens)는 포경사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고래의 왕자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2차 대전과 고래기름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포스팅을 하겠지만 마가린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군수용품의 제조에 필요했던 고래 기름을 확보하기 위해 나치는 탐험대를 조직하여 남극으로 원정을 보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나치독일이 U보트 비밀기지를 남극에 숨겨두었다는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치의 남극조사선 슈바벤란트(Schwabenland)

 

한편 1871년 미국의 헨리 브래들리(Henry W. Bradley)가 식물성기름과 동물성 지방을 조합하여 마가린을 제조하는 방법의 특허를 취득하고, 1901년에는 독일의 빌헬름 노르만(Wilhelm Normann)에 지방에 수소를 추가하여 상온에서 고형화시키는 실험에 성공하고 특허를 받은 이후로 동물성 마가린은 1945년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가 처음으로 제조에 성공하고 붙인 이름이었던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을 영어로 검색하면 생뚱맞게도 마크 트웨인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The Purloining of Prince Oleomargarine)이란 제목의 이 책은 마크 트웨인이 남긴 단 한 편의 동화로, 2011년 아모스 맥기씨가 감기에 걸린 날(A Sick Day for Amos McGee)이란 책으로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칼데콧 상(The Caldecott Medal)을 수상한 에린 스테드(Erin Stead)가 삽화를 그리고 그녀의 남편 필립 스테드(Philip Stead)가 미완성이었던 것을 2017년에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마가린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2차 대전 당시 미 여군들이 빨간 립스틱을 발랐던 이유는?

2차 대전 당시 미 여군들이 빨간 립스틱을 발랐던 이유는?

빨간 립스틱은 1912년, 여성의 참정권을 적극 지지하던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이 행진을 하는 여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부터 저항의 상징이자 여성들의 힘의 상징으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

 

그런데 엘리자베스 아덴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모 언론사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동안에 미국 여성들이 사회 진출을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여성들의 니즈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군 유니폼 레드컬러와 매치되는 몬테수마 레드 립스틱을 만들어 애국적인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 출처: 파이낸셜뉴스

 

그러나 기자가 작성한 바와 같이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이 여성들의 변화하는 니즈를 파악하고 여군 유니폼 레드컬러와 매치되는 몬테수마 레드 립스틱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얘기를 먼저 알아야만 하는데 이 점을 기자는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는 것처럼 미국이 2차 대전에 참가한 것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참전하기 이전부터 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미군에서는 1941년에 의무화가 되었다.

이런 정책에 따라 탄생한 것으로는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의 빅토리 레드(Victory Red)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헬레나 루빈스타인(Helena Rubenstein)의 레지멘탈 레드(Regimental Red)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이 여군 유니폼의 레드컬러와 매치 되는 몬테수마 레드 립스틱을 만들었다는 것도 100% 정확한 것이 아니라 절반만 맞는 정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녀가 몬테수마 레드(Montezuma Red)를 만들게 되었던 계기는 미국 정부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미국 정부는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에게 립스틱과 네일 컬러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줄 것을 의뢰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여군 유니폼의 빨간색 파이핑과 매치가 되는 몬테수마 레드(Montezuma Red)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사에서 적고 있는 것처럼 엘리자베스 아덴이 여성들의 변화하는 기호를 파악하여 제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여군들에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도록 강제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2차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내용은 여성 저널리스트 레이첼 펠더(Rachel Felder)가 쓴 “빨간 립스틱: 뷰티 아이콘에 바치는 서정시(Red Lipstick : An Ode to a Beauty Icon)”란 책에 잘 나와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빨간 립스틱은 하수구에서 구출된 동물의 지방으로 만든 것”이라며 혹평을 하였다고 하며 미국의 화장품 전문 작가인 매들린 마쉬(Madeleine Marsh)의 말에 의하면 히틀러의 시골 휴양지를 방문하는 여성들은 과도한 화장을 해서는 안 되고 특히 빨간색 화장품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는데 빨간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바르고 방문한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빨간 립스틱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합국에서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것을 애국심의 표현이자 파시즘에 반대하는 상징으로 적극 권장하거나 사용을 의무화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매들린 마쉬(Madeleine Marsh)의 말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어서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한계가 있지만 전쟁기간 동안 물자가 귀했던 영국에서는 빨간 립스틱 대신 비트 쥬스로 입술을 물들였다고 하니 일견 일리도 있어 보이긴 한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잘못된 판단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잘못된 판단

4월 27일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고, 다가오는 6월 13일에는 지방선거가 치러지게 되는데, 북한과 선거를 동시에 생각하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남북 민간교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1998년 6월 소떼를 몰고 방북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사에서 재벌들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기여도는 논외로 하고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만 놓고 본다면 그들의 공을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이런 재벌 창업주들 가운데 자서전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예를 들자면 단연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에 관한 일화는 많지만, 여기서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정치권에 몸을 담게 된 동기는 박상하씨의 저서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이란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정주영 회장은 “전두환의 5공화국 동안 기업에 어렵지 않을 때가 별로 없었지만, 창업자였던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 푼 못 건지고 창원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 경제를 꾸준하게 발전시키려면 기업인의 능력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니까 언젠가는 정치를 해야겠다. 정치를 해서 정치가 열심히 기업을 이끌어 자기 기업을 성장시키는 모든 사람들한테 지장을 주거나 방해가 되는 일은 안 해야 되겠다. 그래야만 이 나라 경제가 경쟁력을 갖추고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새롭고 창의적이며 능력 있는 정치가들이 나와서 이 나라 경제를 수렁에서 건지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영원히 재기의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해서 정계에 나왔습니다.”라고 정계진출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계진출의 진정한 이유인지 검증할 수는 없지만, 이리하여 정주영 회장은 당시 일반대중의 많은 인기를 받던 김동길 교수를 영입하여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급기야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까지 출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금권선거가 당시에는 노골적으로 자행되던 시절이어서 정주영 회장의 금권선거도 노골적이었으며 현대그룹의 임직원을 비롯하여 협력업체들을 동원하려는 시도 또한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주주로 있던 “한국경제신문”을 동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1964년 10월 일간스포츠신문이란 이름으로 창간한 현재의 한국경제신문은 1965년 10월에는 “현대경제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였는데 미디어오늘의 기사에 나와 있는 한국경제신문의 지배구조를 보면 현재의 대주주가 20.55%의 지분을 보유한 “현재자동차”인 것에서 보듯이 현대그룹의 자회사였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당시의 지분구조는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됨)

이미지 출처: 미디어오늘

이런 한국경제신문을 통하여 자신의 득표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정주영 회장의 캠프에서는 “1년 무료구독권”을 발행하여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60세를 전후하신 분들께서는 당시에 현대그룹에서 배포하던 무료구독권을 받으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대선캠프에서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 무료구독권이 사용되고 말았으니 정주영 회장으로서는 잘못된 판단을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글을 적을 때 원래 사용하려던 제목은 “죽 쒀서 개 준 정주영 회장의 판단”이었으나 작고하신 분에 대한 내용의 글을 작성하면서, 조금은 지나치다는 판단이 들어 제목을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고친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정마다 신문을 구독하지 않은 세대가 없을 정도로 신문의 구독률이 높았지만, 한국경제신문의 경우에는 전국적인 배달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조선일보에 위탁하여 각 가정으로 신문을 배달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의 경제신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구독률을 자랑하던 매일경제신문은 동아일보의 배달망을 이용하고 있었고, 경쟁지였던 “한국경제신문”은 조선일보의 배달망을 이용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정주영 회장 캠프에서 배포한 “1년 치 무료구독권”이 일선 신문보급소에서는 무료구독권을 받고 한국경제신문을 배달하는 대신에 구독권 소지자가 원하는 신문을 배달해주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조선일보사에 경제적인 이득을 안겨다줌은 물론 정주영 회장에 대한 비판적인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도록 만드는 형국이 되어 선거에 도움은커녕 악영향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현대그룹의 임직원들을 비롯하여 통일민주당의 당원 수가 1,200만에 달했던 것에 비해 실질적으로 거둔 득표수는 380만 표에 그친 것으로도 알 수가 있듯이 돈을 뿌리고도 혜택은 엉뚱한 곳에서 받는 패착을 범하고 만 것이었지요.

한국경제신문을 보라고 무료로 나누어준 구독권으로 조선일보를 구독함으로써 정주영 회장의 선거에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성균관대 백선기 교수가 작성한 “2007 대통령 선거보도 주요 이슈 점검”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백선기 교수의 글을 보면 조선일보의 논조는 정주영 회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 중 일부를 보면 “조선일보 역시 제1정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긍정적인 기호들을 활용하여 우호적인 이미지를 양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제2정당인 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후보에게는 아주 부정적인 기호들을 중심으로 활용하여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제3정당인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에게는 이들 두 후보자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적으며 정통의 정치인이 아닌 경제인의 대통령직에 대한 도전에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조선일보는 “정주영 후보에게는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긴 하나, 정책이나 비전 제시에 대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두 후보자들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어 ‘초조해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선일보는 김영삼 후보에게는 ‘아주 우호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면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으나 제3정당인 정주영 후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서울신문에 비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랑치고 가재 잡으려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만 금권선거의 한 자락을 보면서 오는 6.13 지방선거에 반드시 참가하여 주권을 행사함은 물론 불법·탈법이 자행되지는 않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셜록 홈즈의 탄생은 시대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을까?

셜록 홈즈의 탄생은 시대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을까?

영국의 안과의사이자 소설가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쓴 추리소설의 주인공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는 정작 작가인 코난 도일에게는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코난 도일은 “좀 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글을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으며 특히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역사소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셜록 홈즈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계속해서 추리소설을 쓰기가 싫었던 코난 도일이 출판사에 거절의 뜻으로 “1천 파운드를 주면 셜록 홈즈를 계속 쓸께!”라고 말하자 즉시 “OK!”라고 수락해버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가 발표된 1887년은 이스트 런던 지역인 화이트채플에서 최소 다섯 명이 넘는 매춘부를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잇따라 살해한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이었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가 현장에 남긴 유일한 단서는 “유태인은 아무 책임이 없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는 휘갈겨 쓴 메모였는데 나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배경이자 대중의 인기를 받게 만드는 요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낙후된 수사기법과 신분제도에 따른 수사의 한계로 인해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실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한 물증도 없이 유대인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귀족이나 왕족이 범인일 경우에는 아예 사건을 은폐하는 일도 만연하고 있었고, 당시의 경찰들이 주안점을 둔 것은 실제 범인의 체포가 아니라 강력범죄로 인한 민심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도 시민들이 셜록 홈즈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811년 12월, 영국 런던의 간선도로에서 일어났던 ‘랫클리프 대로 살인사건 (Ratcliffe Highway murders)’인데 이 사건 또한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와 함께 미해결사건으로 남아 있지만 12월 23일 27세의 선원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수감되게 된다.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저지른 것이라고 단정지었던 사건은 1811년 12월 7일 랫클리프 간선도로 옆의 옷가게에서 주인부부와 생후 3개월 된 아기 및 점원을 살해한 사건과 12월 19일 옷가게 근처의 술집에서 주인부부와 하녀 등 3명을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는 12월 27일 구치소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데 경찰은 그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런던거리를 순회하면서 공포에 떨던 시민들의 불안감을 없애려 하였고 군중들 앞에서 죽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심장에 말뚝을 박아 구덩이에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현재까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진범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며 당시 랫클리프 간선도로가 지나던 런던의 ‘이스트 엔드(East End)’는 수 천 명의 선원과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었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수많은 이민자들과 유대인, 중국인 등의 외국인들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랫클리프 대로 살인사건 (Ratcliffe Highway murders)’의 범인으로 처음에는 포르투갈인이 지목되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었고 단지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하는 대중들의 편견 때문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지목된 것이 아일랜드인이었다고 한다.

한편 범인으로 지목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조서에는 “키가 작고 다리를 저는 영국인”이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는 다리를 절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잘못된 수사란 증거가 많으나 이쯤에서 멈추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 낙후된 수사기법으로 범인을 잡지 않고, 만들어내고 있던 영국경찰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검찰이 무혐의 처리한 전 법무부차관 김학의 사건과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프랜시스 사빌 켄트(Francis Saville Kent)’ 유괴살인사건이다.

1860년 6월 29일 밤부터 30일 아침 사이에 당시 4세의 어린 나이였던 ‘프랜시스 사빌 켄트(Francis Saville Kent)’가 집(Road Hill House)에서 사라진 후 옥외화장실에서 목인 잘린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은 상류층의 가정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위쳐(Whicher)’ 형사는 범인으로 피해자의 누나인 16세의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를 지목하지만 노동자계급인 ‘위쳐(Whicher)’형사가 상류층의 소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류층은 언론을 이용하여 “아직 16세에 불과한 소녀, 그것도 피해자의 누나가 범인이란 것은 심한 날조”란 여론을 형성하였고 마침내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는 자기가 범인임을 고백하였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사건은 종결되고 마는데 노동자계급이면서도 상류층의 범죄를 수사하여 진범을 밝힌 ‘위쳐(Whicher)’는 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지만 반면에 영국경찰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887년 11월에 오늘의 주제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가 발표되지만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다음 해인 1888년에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189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인 ‘네 개의 서명(The Sign of Four)’은 크게 히트를 치면서 ‘셜록 홈즈’라는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뛰어난 지략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셜록 홈즈’가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조제프 푸셰(Joseph Fouche)’에 의해 현대적으로 변한 프랑스 경찰을 동경하여 1829년에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라는 런던 전역을 관할하는 경찰조직을 만들었지만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실망한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는 ‘런던 경시청(Metropolitan Police Service, MPS)’을 가리키는 애칭 또는 별칭인 환유어로 현재는 공식적으로 ‘뉴 스코틀랜드 야드(New Scotland Yard)’로 부른다.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로 불리게 된 동기는 초대의 청사가 있던 런던 화이트 홀 플레이스 4번지의 뒷문이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Great Scotland Yard)’ 대로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는 셜록 홈즈 시리즈뿐만 아니라 ‘80일간의 세계일주’ 등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곤 하는데 언제나 셜록의 뒷북을 치는 수사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언론의 뒷북을 치고 있는 버닝썬과 관련한 대한민국 경찰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음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관심거리인 ‘버닝썬 사건’과 ‘김학의 사건’을 보면서 나는 우리의 경찰과 검찰이 자꾸만 무능했던 영국의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와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또한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가 범인일리 없다던 영국언론의 모습은 국내 모 언론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이번 기회에 견찰과 떡검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일본 간장회사 로고에 숨어있는 상(上)자의 의미

일본 간장회사 로고에 숨어있는 상(上)자의 의미

일본불매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식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음식 중에서 왜간장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간장은, 만드는 방법을 공유하는 정보들과 판매업체들의 홍보가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식 간장이 아니라 일본에서 생산된 간장을 직수입하여 소비하는 양은 일식(日食)문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시작된 이후로도 그 추세는 크게 꺾이지 않고 있는데 지난 5년간 일본에서 수입한 간장의 수입통계는 아래와 같다.(대부분 무역적자)

 

일본의 간장회사 로고를 보면 제일 위쪽에 상(上)자가 들어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해당 간장을 만드는 곳이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얼마나 우수한지를 나타낸다.

즉 로고의 제일 위쪽에 상(上)자가 있다면 그 제품을 만드는 곳은 적어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우수한 간장을 만드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에도막부 말기인 1864년 물가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판매가격의 30~40%를 할인하도록 지시하였으나 그 중에서 품질이 높은 7개의 간장은 가격을 낮추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면서 최상의 간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당시 가격인하를 하지 않아도 되었던 7개의 간장회사는 아래와 같으며 로고에 상(上)이란 한자를 붙인 것은 위로부터 보증을 받은 간장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왼쪽 위로부터 히게타(ヒゲタ), 야마사(ヤマサ), 야마쥬우(ヤマジュウ), 디가미사(ヂガミサ) 오른쪽 위로부터 죠우쥬우(ジョウジュウ), 키코만(キッコーマン), 키하쿠(キハク)

 

7개의 간장 브랜드는 지금은 대기업에 흡수되어 사라진 곳들도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하기 위해서 기존의 로고 대신에 새롭게 만든 것을 사용하는 키코만과 같은 곳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