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는 존재할까?(feat. P. T. 바넘)

인어는 존재할까?(feat. P. T. 바넘)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 1837년에 쓴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접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이처럼 친숙한 인어는 영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월트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P. T. 바넘이란 사람은 세상을 상대로 가짜 인어로 한탕 사기극을 크게 펼친 인물이다.

P. T. 바넘이란 인물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 영화 위대한 쇼맨이 바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했던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던 P. T. 바넘의 풀네임은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으로 영화에서는 휴 잭맨이 역을 맡았었다.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

 

영화 위대한 쇼맨의 포스터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따라다니는 P. T. 바넘이 친 사기극 중에서 오늘은 가짜 인어로 대중을 기만한 일과 그것이 인어를 가지고 세상을 농락했던 첫 번째는 아니었다는 숨은 얘기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17세기경까지도 인어의 존재는 유럽에서는 당연시되고 있던 것이어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도 세계의 박물관들에는 인어의 표본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시 중인 인어의 표본은 100% 가짜들이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P. T. 바넘이 만든 피지 인어라고 하는 것인데 영어로는 Feejee Mermaid, Fiji Mermaid, FeJee Mermaid로 표기한다.

1842년 바넘의 박물관에 전시될 때의 모습은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이 보이는 상태에서 오른손은 오른쪽 뺨에, 왼손은 왼쪽 턱 아래에 두고 있었으며 남태평양 피지 근처에서 잡은 것이라고 뻥을 치면서 피지 인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데 1865년 7월 13일에 있었던 박물관의 화재로 소실되어 현존하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P. T. 바넘보다 먼저 피지 인어를 이용하여 사기를 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라는 미국인 선장이었다.

언제 누가 피지 인어를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인원의 상체에 물고기의 몸을 꿰어 만드는 것은 일본과 동인도 어부들 사이에서는 종교적으로 행해지던 일이었으며 바넘의 피지 인어는 아마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1810년대 무렵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일본과 교역하는 유일한 서양인들이었고,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게 만든 페리 제독으로 인해 일본이 더 많은 교역을 하면서부터 서양에 더 많은 피지 인어가 나타났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아무튼 일본에서 가짜 인어를 구입한 네덜란드인이 선원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니 침몰한 네덜란드 상선의 승무원들을 구조하면서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 선장은 가짜 인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822년 1월 그것을 6천 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하게 된다.

1822년의 1달러를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22.15달러가 되고 당시의 6천 달러는 지금 가치로는 132,900달러가 되니 오늘자 매매기준율에 따르면 우리 돈으로 1억 6천이 조금 안 되는 금액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는 돈이 없었던 까닭에 배를 팔아 돈을 지불했고 여비가 떨어진 그는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가짜 인어를 전시했는데 이를 본 어느 영국선교사가 인어는 진짜라는 신문기사를 작성해줌으로써 사무엘 선장은 여비도 넉넉히 챙기고 인어를 전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가짜 인어를 가지고 1822년 9월, 사무엘 선장은 영국에 도착하여 커피숍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관람료는 1인당 1실링이었다.

1822년의 1실링은 지금의 6.39파운드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우리 돈으로는 대략 1만 원 정도가 되는데 이런 큰돈을 지불하고서도 관람하겠다는 사람들이 매일 수백 명씩 몰려들면서 사무엘 선장은 크게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지만 욕심이 화를 부르는 사건이 생기고 만다.

런던에 도착한 사무엘 선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어의 표본은 진짜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으나 권위 있는 박물학자들로부터 인증을 받으면 더 큰돈을 벌 것이라 생각해서 몇몇 학자들을 찾아다니지만 그들은 모두 사무엘 선장이 가지고 있던 인어를 가짜라고 판명하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 선장은 조금은 급이 떨어지는(?) 학자들로부터 진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전시에 이용하게 되는데 여기서 멈추었더라면 그나마 성공한 사기극이 될 수 있었겠지만 사무엘 선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저명한 박물학자이자 외과의사였던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도 진품으로 인증하였단 개뻥을 치기 시작한다.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

 

그리고 이런 사기극에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은 격노하여 사무엘의 인어는 가짜라는 기사를 각종 신문과 출판물에 기고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무엘의 가짜 인어를 보려는 사람들이 격감하면서 1823년 1월, 불과 5개월의 기간 만에 사무엘의 사기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아래의 그림은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사무엘 선장이 주간지 더 미러(The Mirror)에 게재했던 광고인데 이 광고가 게재된 것이 1823년 1월이고 광고의 시작과 함께 그의 사기극도 끝이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 선장이 가짜 인어의 구입대금으로 지불했던 6천 달러는 배가 그만의 것이 아닌 공동소유였던 때문으로 다른 소유주에 의해 소송을 당하면서 결국 돈을 상환하지 못한 사무엘 선장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배를 타야만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빚을 상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사무엘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인어 표본은 2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데 사무엘 선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가짜 인어 밖에 없었던 그의 아들이 그것을 1840년대 초 보스턴에 박물관을 가지고 있던 모세 킴벌(Moses Kimball)에게 팔면서 다시 한 번 가짜 인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1842년 모세 킴벌(Moses Kimball)은 박물관을 구입하였다는 친구인 P. T. 바넘을 만나기 위해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가면서 가짜 인어를 가지고 가서 인어를 이용한 전시회를 함께 개최해볼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위대한 쇼맨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던 P. T. 바넘은 가짜 인어를 이용한 사기극을 성공시키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가공의 인물인 그리핀 박사(Dr. Griffin)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P. T. 바넘은 이미 그 이전부터 사기극의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던 레비 리먼(Levi Lyman)을 그리핀 박사(Dr. Griffin)로 둔갑시켜 인어가 진짜라는 것을 대중이 믿도록 만드는 한편 박물학자들에게도 감정의 의뢰한다.

그리고 감정을 한 박물학자들은 인어가 가짜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이빨과 지느러미 등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어서 가짜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감정결과를 내놓게 되고 P. T. 바넘은 대중은 진짜라고 믿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매주 12.5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친구인 모세 킴벌(Moses Kimball)로부터 가짜 인어를 임대하게 된다.

가짜임은 분명한데 가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감정가들의 결론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인어가 가짜라는 것을 P. T. 바넘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인어의 진위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그것을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그리핀 박사(Dr. Griffin)라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P. T. 바넘은 사람들을 시켜 그리핀 박사(Dr. Griffin)가 포획한 이상한 물체가 있다는 것을 각 언론사에 제보하도록 하는데 얼마나 치밀했는가 하면 발신하는 장소를 각기 달리하여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리고 레비 리먼(Levi Lyman)이 둔갑한 가공의 그리핀 박사(Dr. Griffin)가 필라델피아의 호텔에 투숙한다는 정보를 흘리자 그가 묵었던 방에는 언론사의 편집자들이 줄을 서게 되는 진풍경이 일어났고 P. T. 바넘과 레비 리먼은 5일 동안만 일반에게 공개하기로 하고 뉴욕의 콘서트홀에서 전시를 하는데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P. T. 바넘의 뉴욕박물관과 모세 킴벌(Moses Kimball)의 보스턴박물관을 오가며 20년 가까이 전시되었는데 영국에서 가짜라는 판정을 받고 사무엘 선장이 다시 배를 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가짜 인어는 1859년 P. T. 바넘에 의해 런던에서 다시 전시되면서 큰 인기를 끄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1858년의 바넘박물관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미국으로 돌아온 P. T. 바넘은 피지 인어를 1859년 6월에 킴벌의 박물관에 반환하였고 그 이후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1865년의 화재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다.

왜 그런가 하면 1859년 6월에 킴벌의 박물관에 가짜 인어를 반환하고 다시 임대한 적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1865년에 일어난 바넘박물관의 화재와 피지 인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1880년대 초에 일어난 킴벌의 보스턴박물관 화재와 함께 소실되었을 가능성인데, 이것도 1897년, 킴벌의 상속자가 피지 인어를 하바드 대학교의 피바디박물관에 기증을 함으로써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피바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피지 인어가 P. T. 바넘 이전에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 선장이 보유하고 있던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가짜에서 출발한 인어 사기극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언제 또다시 대중을 기만하는 새로운 사기꾼들과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지 언어라는 단어는 가짜 인어를 뜻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이오지마(硫黄島)의 숨은 이야기들

이오지마(硫黄島)의 숨은 이야기들

일본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 떨어진 곳에 있는 화산섬 이오지마(硫黄島)의 공식명칭은 2007년에 공식적으로 이오지마(いおうじま)가 아닌 이오토(いおうとう)로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합동태풍경보센터(JTWC: Joint Typhoon Warning Center)에서도 이오지마를 이오토(Iwo To)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3월 11일에 제정된 결정에 따라 이오지마(硫黄島)의 영어표기는 섬이름에 Island를 붙여서 Ioto Island로 표기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포털에서 제공하는 정보들도 이런 결정에 따라 일본의 유황도(硫黄島)를 이오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평양전쟁 당시 치열했던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로 친숙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이오지마(いおうじま)로 부르기로 한다.

금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지 75주년이 되는 해다. 즉 이 말은 우리가 광복을 맞은 지 75주년이 되는 해가 2020년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를, 얼마 남지 않은 올림픽 때문에 감추기에만 급급하는 아베정권의 행태를 보면서 최후의 발악을 했던 이오지마의 전투(Battle of Iwo Jima)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의 결정에 따라 이오지마의 영어표현을 미국에서도 이오토(Iwo To)라고 하기로 하자, 미국의 해외참전전우회(Veterans of Foreign Wars)는 공식적으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의 논란은 있었지만 수리바치산(摺鉢山)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했던 1945년 2월 23일을 전쟁이 끝나고 해병대의 날로 제정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각 군 별로 별도의 기념일을 제정하지 않고 매년 5월 셋째 주 토요일을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으며 미국 해병대의 창설일인 11월 10일과는 다르다는 점을 덧붙인다.

아울러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2차 대전 동안 명예훈장을 받은 총 82명 가운데 28%인 27명이 명예훈장을 받았으며 그 중 해병대원은 모두 23명이라는 일부의 정보와는 달리 22명의 해병대원들이 명예훈장을 수상하였는데 현재 유일한 생존자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싸웠던 올해 96세의 허셀 윌리엄스(Hershel W. Williams)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섬인 유황도(硫黄島), 즉 이오지마(いおうじま)의 이름은 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유황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일본이 정한 이름이 아니라 서양의 탐험가들이 붙인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오지마는 1543년 스페인 동양함대의 전함 중 하나인 ‘산 후안 데 레트란(San Juan de Letran)’호의 선장이었던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Bernardo de la Torre)가 발견하였는데 섬에 유황이 많아서 유황을 뜻하는 당시의 스페인어 수프레(Sufre)라고 이름붙인 것에서 비롯되어 1779년에 제임스 쿡의 3차 탐험에 사용되었던 레졸루션호와 디스커버리호에 발견되어 공식적으로 유황도(Sulphur Island)로 표기가 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크게 이용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터라 어느 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아 이후로도 이 섬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어서 지구에 선을 하나 그은 다음 동과 서를 나누어 가지자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었는데 대항해시대에 탐험에 나서면서 둥근 지구 때문에 아시아에서 서로 만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아시아를 두고 또 다시 경계선을 긋는 조약을 맺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라고사 조약(Treaty of Zaragoza)이고 이로 인해 콜럼버스가 황금의 나라로 생각하고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일본을 가리키는 지팡구(ジパング)는 포르투갈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버려진 섬이었던 이오지마는 메이지시대에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1887년 당시 도쿄부의 지사였던 타카사키 고로쿠(高崎五六)의 지휘로 탐사를 마치고 1889년 어업과 유황의 채굴을 시험하기 위해 다나카 에이지로(田中栄次郎)를 비롯한 10여 명이 섬에 들어간 것이 최초의 입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의 역사에서 나름 큰 의미를 지니는 유황도(硫黄島)라는 섬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존재한다.

 

10세기 무렵 일본과 중국 송나라의 교역에 있어서 유황은 처음에는 송나라에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으나 송나라 시대에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하면서 화약의 주원료인 유황이 많이 필요하게 되자 유황을 생산할 수 있는 화산이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큰 문제점과 함께 특히 금나라의 압력을 받고 있던 남송(南宋)은 일본과의 해상무역으로 유황을 조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남송으로 수출하던 일본 유황의 주된 생산지가 바로 가고시마 현에 있는 또 다른 유황도(硫黄島)로, 이 섬은 가고시마 항에서 배로 4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와 구분하기 위해 사츠마이오지마(薩摩硫黄島)로 부르고 있다.

1964년에 유황을 채굴하던 사츠마이오지마(薩摩硫黄島)의 광산은 폐광이 되었지만 해안에 있는 노천탕인 히가시온센(東温泉)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죽기 전에 2번 방문하고픈 히토우(秘湯: 깊은 산속과 같이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한 온천)로 소문나 있다.

무지개가 되어 잠들다.

무지개가 되어 잠들다.

무지개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LGBT(성소수자)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1939년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삽입곡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희망, 사랑 등등 기타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이 내일은 눈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다. 사회는 온통 찌푸린 상태의 연속이고 국민들을 대변할 ○개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정쟁만을 벌이고 있다.

“겨울이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던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말처럼 과연 봄은 언제쯤이나 다가올까? 봄비 내린 뒤 맑은 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답답한 지금, 지난 2005년 3월 14일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오늘자 중앙일보의 “눈 녹자 나타나는 시신들…에베레스트 ‘온난화 곤혹’”이란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화 ‘히말라야’로 인해 2004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후 하산 길에 설맹(각막염증)으로 인해 하산이 어렵게 되자 동료들은 설득하여 하산시키고, 홀로 최후를 맞이했던 산악인 ‘고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던 엄홍길의 ‘휴먼원정대’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출처: 다음 영화

 

신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다는 에베레스트에는 고 박무택 대원처럼 등반 도중에 고인이 된 산악인들이 2015년을 기준으로 200명이 넘게 잠들어 있는데, 1996년 조난으로 사망한 연두색 부츠를 신고 있던 산악인의 주검을 2001년 5월 21일 프랑스 산악인이 촬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그린 부츠(Green Boots)’ 또는 ‘그린 부츠 동굴(Green Boots’ Cave)’이라고 불리는 산악인의 주검을 비롯하여, 고인이 된 산악인들이 입고 있던 옷과 신고 있던 신발 및 착용하고 있던 색색의 고글들이 무지개를 닮았다고 해서 이를 보도했던 영국의 BBC가 ‘무지개 능선(rainbow ridg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8,000미터 이상의 루트에 산악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을 ‘무지개 능선(rainbow ridge)’ 또는 ‘무지개 계곡(Rainbow Valley)’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히말라야 데이타베이스(The Himalayan Database)’의 통계에 의하면 히말라야에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의 산악인들은 고 박무택 대원을 비롯하여,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1977년)하고 1979년 빙벽에서 추락하여 숨진 고상돈 대장과 이일교 대원 등 모두 11명이라고 하며 이는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숫자라고 한다.

 

나는 BBC가 표현한 것과는 달리 끝까지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려고 나섰던 엄홍길을 비롯한 동료 산악인들이 무지개라는 생각을 해본다.

“걱정 마! 네 곁엔 언제나 내가 있어!”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국가나 정치인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수십 년 전 안보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만일 해외에서 북한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접근하면 미국대사관으로 가라.”던 강사의 말처럼 점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작금의 정치판을 보면서 우리 서민들의 무지개는 어디에 있는지, 무지개 너머엔 과연 희망이 있는지, 정치인을 믿을 수 있는지,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지, 이전과 다름없는 의구심만 깊어져 간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의 튤립이 있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의 튤립이 있다.

1990년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흰색의 튤립 품종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품종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화훼구근정보센터(Flowerbulb Information Centre)에서는 1993년에 세상을 떠난 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튤립에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붙인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의 헌신적인 유니세프의 활동과 배우로서의 경력을 높이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튤립의 이름으로 사용한 일들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빙 크로스비, 퀴리부인, 존 F. 케네디와 같은~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는 오드리 헵번과 튤립의 특별한 인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인 아버지 조셉 빅터 안소니 러스턴(Joseph Victor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 귀족가문 출신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사이에서 1929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중립을 유지했던 네덜란드가 안전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네덜란드의 아른헴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버지

 

그런데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모두 나치의 지지자들이었고 영국파시스트동맹(British Union of Fascists)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그녀가 “로마의 휴일(1953년)”을 비롯하여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파리의 연인(1957년) 등을 히트시킬 당시에 알려졌더라면 그녀는 배우로서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1926년 결혼을 하고 1935년에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파시스트 활동에 더욱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8년에 정식으로 이혼을 하게 되고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을 지지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괴벨스로부터 받은 사실이 탄로 나서 투옥되게 됩니다.

한편 안전할 것이라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예상과는 달리 네덜란드도 1940년에 독일의 침공을 받았는데 이 때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오드리 헵번은 에다 판 헤임스트라(Edda van Heemstra)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이혼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 집회에 참가한 경험을 파시스트 잡지인 “The Blackshirt”에 기고하기도 하는 등 친나치의 행보를 보였지만 그녀의 외숙부는 독일에 저항하였다는 죄로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른헴음악원과 기숙학교에서 배운 발레를 이용한 작은 공연으로 돈을 모은 오드리 헵번은 이 돈을 레지스탕스에 전달하기도 하고 많은 당시의 네덜란드 어린이들처럼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연락을 전달하는 활동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영화 “로마의 휴일”의 스크린 테스트를 앞두고 그녀의 매니저들은 그녀의 부모가 나치를 지지하는 활동을 한 사실을 숨기려고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중 한 장면

 

촬영장소의 실제 모습

그러나 그 후 오드리 헵번은 인종차별주의자인 그녀의 부모들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더욱 많은 찬사를 받게 됩니다.

자,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인 오드리와 튤립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던 네덜란드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독일의 점령을 방해하기 위해 철도파업을 단행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44년 겨울부터 독일군은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식량과 연료의 보급을 차단하는 이른바 “네덜란드 기근(Dutch famine)”을 일으켰는데 참혹한 기근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22,000여명의 네덜란드인이 사망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노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급이 차단된 혹독한 겨울을 “굶주림의 겨울(Winter of Hunger)”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 오드리 헵번도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풀을 끓여먹거나 튤립의 뿌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녀는 천식과 황달,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어 전쟁이 끝났을 때의 몸무게는 불과 40kg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네덜란드에서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튤립에 붙이는 것이 더욱 뜻 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Huis Doorn”에서 그녀의 이름이 붙은 튤립의 헌정식이 열렸고 궂은 날씨 속에서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이름이 붙은 첫 번째 튤립을 그녀의 숙모 재클린에게 바칩니다.

 

말년이 더욱 아름다웠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잘록한 허리는 어린 시절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아름다운 백색의 튤립은 그녀의 외모보다는 그녀의 정신과 더욱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2001년 손석희 앵커와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의 문화에 대한 대담을 하면서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절대 그런 일이 없으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던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10년에 조선일보는 안용근 교수가 펴낸 책 “한국인과 개고기”의 내용 중에서 “1870년대 프러시안-프랑스 전쟁 당시엔 사람들이 개를 모두 잡아먹어 파리 시내에 개가 한 마리도 없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여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고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사실관계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사원문: 책펴낸 개고기 박사 “프랑스도 개고기 국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인들이 1870년대에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개고기를 먹게 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점도 자세히 알리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870년대에 프랑스인들은 개고기를 왜 먹게 되었는지? 개고기 외에 식용으로 사용한 다른 동물은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70년은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시기인데 더 이상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내용의 소설배경이 된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습니다.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하지만 파리에서 조직된 공화제 국방정부는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군은 1870년 9월 19일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파리를 포위하고 모든 보급물자를 차단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일상적인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포위를 당하기 전에 국방정부는 파리에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떠날 것을 명령했으며 군대를 제외한 인구가 200만으로 추정하였고 1~2개월 정도로 예상했던 독일의 포위에도 식량은 충분할 것으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떠난 숫자만큼 다른 지방에서 피난민이 유입되어 인구감소의 효과는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20%의 인구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최대 2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측했던 포위공격이 점차 기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식량이 모자라지 않다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마침내 식품은 배급제로 바뀌게 되어 1870년 10월 중순부터는 성인 1인당 섭취량을 300그램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파리의 시민들은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빵은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일 먼저 말을 잡아먹게 되었는데 당시 시장에서는 1파운드에 10센트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인 로버트 시버트가 1892년에 발간한 “The Siege of Paris by an American Eye-Witness”)

그러나 말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1달 뒤인 11월 중순부터는 배급량이 1인당 100그램으로 줄어들었고 시장에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고기들이 판매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쥐와 고양이 그리고 개고기였던 것입니다.

미국인 시버트(Robert Sibbet)가 직접 경험한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개고기와 고양이고기는 파운드당 20~40센트인 것에 비해 살이 찐 쥐고기는 파운드당 50달러 정도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11월이 되면서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하는데 계속 영업을 하려는 곳에서는 마지막으로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결국, 동물원에 있던 코끼리를 비롯하여 캥거루와 공작새 등도 잡아먹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동물은 사자, 호랑이, 하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 유명식당의 메뉴를 보면 개고기로 만든 커틀릿과 코끼리, 캥거루, 쥐로 만든 요리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마저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파리시민들은 나무나 풀뿌리로 연명을 해야 했고 포위가 끝나기까지 굶주림이 아닌 음식을 잘못 먹은 것으로 인해 발병한 질병으로만 12,00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기 위해 먹었다고는 하더라도 프랑스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브리지토 할머니,

절대 개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프랑스 역사부터

먼저 공부를 하심이 좋아 보입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어제 모 여가수의 이름이 실검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세인들의 입에 암페타민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을 막론하고 병사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약물이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독일군에게 공급을 명령했던 히틀러 또한 약물에 중독되었었다.(정확히는 필로폰이라는 메스암페타민에 중독)

지난 번 “마약으로 물든 베트남전쟁”이란 포스팅에서 미군은 지구력 강화와 불안 및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암페타민을 비롯한 각종 진정제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고 미 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2억2천5백만 통의 각성제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각개병사들에게 약물을 보급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887년 유대인 출신의 루마니아 화학자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가 베를린 대학에서 최초로 암페타민의 합성에 성공한 이래 벤제드린(Benzedrine)이란 상표로 상품화 되면서 천식이나 우울증의 치료에 사용되던 암페타민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연합군에 의해서 병사들에게 보급이 되었다.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

 

벤제드린(Benzedrine)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던 것은 이보다 더 심각한 메스암페타민이었는데 이른바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은 1888년 천식치료제인 마황으로부터 에페드린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일본 도쿄대학의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가 발견한 이후 1919년에 그의 제자인 오가타 아키라(緒方章)가 결정화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결정화에 성공한 메스암페타민은 1938년부터는 독일의 제약회사 테믈러 베르케(Temmler Werke GmbH)에 의해 페르비틴(pervitin)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어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메스암페타민의 부작용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었고, 독일군에게 정식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였다.

페르비틴(pervitin)

암페타민이나 메스암페타민을 막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약물을 일반 병사들에게 보급했던 것은 독일군이 먼저였으나 연합군이 사용한 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연합군 중에서 암페타민을 먼저 사용했던 것은 독일군의 잠수함을 수색하던 영국공군의 정찰병들이었다. 장시간에 걸쳐 온 신경을 기울여 독일군의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던 병사들이 암페타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는 폭격기의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공식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이 공식적으로 암페타민을 보급한 것은 1942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치러지는 기간 동안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1일 20㎎의 암페타민 5일치를 병사들에게 보급하도록 지시한 것이 최초였고, 미군은 1943년 2월 육군군수처(SOS: Services of Supply)에서 하루에 5㎎의 벤제드린(Benzedrine)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발표를 하면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즉시로 50만 정을 주문하여 북아프리카의 부대에 보급하였던 것이 최초다.

엘 알라메인 전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롬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을 텐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는 독일의 에르빈 롬멜을 소재로 하여 1951년에 개봉한 영화 The Desert Fox(사막의 여우 롬멜)가 바로 이 전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에르빈 롬멜

 

연합군이 암페타민을 보급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군이 보급했던 것은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날이 갈수록 중독으로 인한 심각성이 커지자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 보급하기 시작했던 것을 1941년 봄부터는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금지했던 것은 아니었고 보급만 중단하였다.

1939년 가을 폴란드 침공에 나선 독일군은 운전병들에게 메스암페타민인 페르비틴(pervitin)을 보급하였는데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한 상태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페르비틴(pervitin)의 효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는 3,500만 개의 페르비틴(pervitin)을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다.

독소전쟁 당시 페르비틴(pervitin)을 복용했던 병사들을 관찰한 군의관의 증언에 따르면 “폭설과 영하 30℃의 추위 속에서 6시간의 행군으로 병사들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사기는 저하되었으며 급기야는 쓰러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사망했다. 그러한 병사들에게 페르비틴(pervitin)을 나누어주자 30분이 지나지 않아 기력을 회복하였고 집중력과 판단력이 회복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병사들에게서 중독증상과 약물복용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1941년 봄부터는 페르비틴(pervitin)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인 보급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일반보병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던 페르비틴(pervitin)은 탱크 운전병들에게는 탱크 초콜릿(Tank-Chocolates)이라는 뜻의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란 이름으로 보급되었다.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

 

버닝썬 사건으로 촉발된 연예계의 마약과 경찰의 유착의혹에 대하여 명운(命運)을 걸겠다고 했던 경찰이 이번에는 명예(名譽)를 걸고 모 연예기획사의 의혹을 수사하겠다고 한다.

목숨(명운)을 걸고도 밝히지 못한 것을 명예를 건다고 밝힐 수 있을까?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집단의 공허한 메아리와 함께 이 시기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을 보면서 그냥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 2차 대전을 통해 보급되었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았다. 멍~멍~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역사 속의 인물들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역사 속의 인물들

2011년 4월 17일 시작하여 2019년 5월 24일 시즌8을 끝으로 막을 내린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마지막 시즌에서 엄청난 혹평을 듣긴 했지만 가장 성공적인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 시즌4 에피소드 8에서 라니스터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타이윈 라니스터는 그의 아들 티리온 라니스터가 쏜 석궁을 맞고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처럼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인물들이 여럿 존재한다.

 

화장실이란 장소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만약 경비인력마저 없다면 암살자에게는 최적의 장소가 될 텐데 지금부터 화장실에서 암살을 당한 인물들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 에드먼드 2세(EdmundⅡ)

크누트 대왕이 이끄는 덴마크의 침략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고 해서 용맹왕 에드먼드(Edmund Ironside)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에드먼드 2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사했다거나 질병에 의해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과 함께 암살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암살당했다는 설은 12세기 노르만 왕조 시대의 역사가였던 헨리 오브 헌팅던(Henry of Huntingdon)이란 사람이 제기한 것인데 그에 의하면 에드먼드 2세는 화장실 아래에 숨어 있던 암살자가 밑에서 2번이나 찌른 칼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 바츨라프 3세(VáclavⅢ)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 헝가리와 보헤미아 및 폴란드의 왕을 역임했던 바츨라프 3세는 1306년 폴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가 체코의 올로모츠(Olomouc)성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 암살당했다고 한다.

암살자를 보낸 인물은 브와디스와프 공작이었는데 그는 바츨라프 3세를 죽이고 난 뒤 1320년 1월 20일 폴란드의 왕위에 올라 브와디스와프 1세(폴란드어: WładysławⅠ)가 되었다.

올로모츠(Olomouc)성

 

그 밖에 암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역사속의 인물들을 잠깐 살펴보면 당뇨병을 앓았던 영국의 조지 2세(GeorgeⅡ)는 1760년 이동 간이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중 대동맥이 파열되어 사망하였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Ⅱ: YekaterinaⅡ)도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침대로 옮겼으나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다.

남성편력이 심했다고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에 불과하다.

예카테리나 2세

 

끝으로 아직은 사실인지의 여부가 정확하지 않지만 영국의 에드워드 2세(EdwardⅡ)의 죽음도 화장실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다.(?)

에드워드 2세(EdwardⅡ)는 폐위당해 케닐워스 성에 감금되었다가 버클리 성으로 이감된 다음 폭행당해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동성애자였던 그의 항문으로 불에 달군 쇠꼬챙이와 포크를 밀어 넣어 죽인 것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EdwardⅡ)가 동성애자였던 것은 맞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는 에드워드 2세(EdwardⅡ)가 죽지 않고 생존했을 것이라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지금도 “에드워드 2세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EdwardⅡ?)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나치의 부활인가? 卍표시를 쓰는 핀란드 공군

나치의 부활인가? 卍표시를 쓰는 핀란드 공군

10월 10부터 1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릴 2018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자위대의 군함이 욱일기를 달고 입항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뜨거운데 우리가 욱일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유럽인들이 나치를 상징하는 卍자를 보는 시각과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핀란드공군에서는 나치의 상징인 卍자를 공군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핀란드는 나치의 부활을 위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사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핀란드공군이 사용하는 卍자는 나치와는 관련이 없으며 그보다 훨씬 전인 1918년에 이미 비행기에 그려 넣었던 것으로 그보다도 더 올라가면 철기시대에 이미 만자문(卍)의 한 형태인 “투르사스의 심장(The Heart of Tursas)”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표식이었습니다.

투르사스의 심장(The Heart of Tursas)

한편 만자문(卍)과 유사한 갈고리십자가(Fylfot Cross)의 표식은 특히 북유럽을 중심으로 중세에 많이 사용되던 것이었으며 이런 만자문(卍)은 핀란드의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가 그린 유명한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핀란드은행에 있는 1889년에 그가 그린 아래의 작품은 테두리가 수많은 만자문(卍)으로 장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는 핀란드 정부의 훈장을 디자인 하면서 갈고리십자가(Fylfot Cross)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핀란드 대통령의 깃발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핀란드 대통령의 깃발

 

이러한 만자문(卍)이 군용기에 처음으로 그려진 것은 핀란드내전이 한창이던 1918년 3월 6일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이 항공기를 기증하면서 행운의 상징으로 그려 넣었던 것이 최초였는데 그 이후부터 핀란드공군에서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만자문(卍)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은 그보다 이전인 1901년부터 자신의 개인비행기에 이미 만자문(卍)을 그려 넣고 있었습니다.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이 기증한 비행기

 

그 후 핀란드는 겨울전쟁의 적대국이었던 소련과는 정전을 하고 독일과의 동맹은 해제하면서 나치 독일을 영토에서 몰아내는 라플란드 전쟁을 치르게 되고 영국과 소련연합통제위원회(British-Soviet Allied Control Commission)가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되는데 이때 소련으로부터 만자문(卍)의 사용에 대한 비난을 받아 1945년 3월부터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은 모두 푸른색과 흰색의 원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1956년부터 1981년 사임하기까지 25년간 대통령을 지냈던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이 1957년에 다시 핀란드공군이 만자문(卍)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그 후 9년 뒤에는 공군사령부와 모든 제복과 배지에 만자문(卍)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습니다.

핀란드공군사령부 휘장

 

핀란드공군 아카데미 깃발

 

그러나 이와 달리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대통령은 핀란드 정부의 훈장인 “백합장미장”과 “그랜드 십자가장”에서는 만자문(卍)을 빼도록 지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오랜 역사를 가진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 사용에 대하여 나치의 상징인 만자문(卍)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만일 지금 만자문(卍)의 사용을 중지하게 된다면 실제로 공군이 사용하던 표식이 나치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계속 사용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자문(卍)의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는 또 하나는 2017년에 법원으로부터 폭력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던 핀란드의 신나치주의자들은 만자문(卍)을 사용하지 않고 화살표 문양의 고대문자를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 사용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의 사용을 반대하는 여론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도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욱일기를 단 일본군함의 입항을 반대하는 것처럼 유럽인들 또한 나치의 상징인 만자문(卍)의 사용에 대하여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핀란드공군과 정부가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좋은 결과를 맺기를 바랍니다.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3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3편)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프랑스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의 결성에는 USFSA의 협력이 있었지만, 프랑스 체조 연맹이나 프랑스 사격연맹 등, 원래 USFSA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경기 연맹도 순수한 경기 지향이라는 점에서 CNS에 찬동하는 자세를 표명하기 시작했고 CNS는 각각의 경기연맹이 자립하는 형태를 인정하면서 결집하는 조직으로 1913년에는 올림픽 대표에 관한 결정권을 획득하여 그 산하에 프랑스 올림픽위원회를 설치했다.

CNS는 설립 경위에서 통일된 규칙에 따라 프랑스와 세계의 스포츠를 통합하는 보편적인 모델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단일 경기를 총괄하는 각종 연맹을 통일된 규칙하에서 동등하게 관리한다는 ‘1경기 1연맹’이란 시스템이 CNS에 의해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도입되어 각종 경기 연맹의 설립이 증가함에 따라 프랑스의 보편주의적 가치관에 따른 CNS는 1차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반면 USFSA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던 축구에 관하여 USFSA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프랑스 연방간 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는 1913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으로부터 프랑스 챔피언십을 개최할 권한을 얻게 된다.

CFI에는 1차대전 전인 1910년부터 축구의 전문화를 둘러싸고 USFSA를 떠난 쥘 리메가 가입하고 있으며, FIFA에서도 영향력이 컸던 쥘 리메의 생각은 프랑스 축구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쥘 리메(Jules Rimet)

 

CFI는 1919년 4월 7일 쥘 리메를 회장으로 프랑스 축구연맹으로 모습을 바꾸고 명실공히 프랑스에서 축구를 총괄하는 경기연맹이 되었으며 축구 연맹의 설립을 시작으로, 경기마다 연맹의 설립이 잇따라 1920년에는 USFSA의 럭비커미션이 해산하고 프랑스 럭비 연맹을 설립했으며 이어서 필드하키, 육상경기, 동계스포츠, 테니스, 수영과 그 밖에도 롤러스케이트, 바스크 펠로타 (Basque pelota) 등이 잇따라 독립적인 경기연맹을 설립했다.

바스크 펠로타 (Basque pelota)

각종 경기연맹의 설립에 따라 USFSA는 급속히 힘을 잃어 1921년 조직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각종 경기연맹의 설립에 비례하여 CNS는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 CNS를 구성하는 연맹은 1919년에는 22개 단체였지만 1921년에는 31개 단체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연맹을 총괄하는 성격상 CNS의 회원들은 대부분 선수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국내에서의 스포츠계의 지도자는 쿠베르탱과 같은 귀족이나 USFSA를 주도한 엘리트층으로부터 1차대전 후에는 쥘 리메와 같은 스포츠 전문가들로 바뀌고 있었다.

스포츠를 둘러싼 이러한 변화는 1차대전 후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것으로 스포츠 미디어의 발전과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욕구가 커짐에 따라 이전까지 엘리트층의 독점적인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스포츠가 일반대중에게로 확대되었고 일부 종목에서 진행된 스포츠의 프로화를 프랑스 스포츠계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이런 와중에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가 1922년 3월 정부에 의해 정식 승인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는 CNS 아래 하나의 연맹이 하나의 경기를 통괄한다는 모델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승국이었음에도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으며 국토 또한 황폐화되어 국민들의 정신적 충격 또한 컸다.

특히 국내에서 반독일 정서의 여론이 강해지는 가운데 국력의 쇠퇴를 만회하고 싶었던 프랑스는 국제연맹 등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에 주도적 입장을 취해 국가의 위신회복을 회복하려 스포츠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즉,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위신을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미 1차대전 이전부터 프랑스 파리는 영국에서 유래한 스포츠를 세계에 펼친 ‘제2의 스포츠 중심지’로 여겨지며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스포츠의 국제화에 크게 공헌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인한 것으로써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출신의 유학생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스포츠의 묘미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국제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 경기연맹이 프랑스인의 영향력으로 1차대전 전부터 설립되었는데 1904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자동차연맹(FI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utomobile)이 프랑스인을 회장으로 설립되었으며 프랑스인이 회장직에 맡지 않았지만 1908년 국제수영연맹(FIN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Natation)과 1913년 국제펜싱연맹(FIE: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scrime) 등이 설립될 때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런 프랑스의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이들 연맹의 약어가 프랑스어 FI(Fédération Internationale)로 시작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통일된 규칙에 따른 국제조직의 형성은 CNS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보편주의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법률에 따라 종교와 문화, 인종과 민족에 관계없이 평등을 보장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계에 이 보편주의 모델의 도입을 추진했고 1차대전 이후 정치적 맥락에서 가속화되었다.

이미 본 것처럼 1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고 싶었던 프랑스로서는 국제대회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국제 스포츠 조직을 통한 영향력의 확대도 큰 의미를 두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국내에서 확립된 ‘하나의 연맹이 하나의 경기를 통괄한다’는 모델에 따라 각종 국제 경기연맹을 차례로 조직화해나감으로써 1927년에 14개의 국제경기연맹의 본부가 파리와 프랑스 국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쿠베르탱이 설립한 IOC는 민주적인 선거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엘리트층이 상호 추천하는 형태로 멤버를 선출하였는데 이러한 IOC의 비민주성뿐만 아니라 엄격했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서도 스포츠의 대중화 속에서 전문화를 용인하는 경기연맹을 통괄하고 있던 CNS의 모델이 보급되어 가는 것을 IOC로써는 간과할 수 없었다.

한편 경기 연맹의 주도와 함께 프랑스는 각 경기연맹마다 세계선수권을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국제 대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나갔는데 예를 들면 FIFA에서 회장을 맡고 있던 프랑스인 쥘 리메가 1930년에 월드컵을 창설한 것을 들 수 있다.

1차대전 이후 국제경기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프랑스였다.

1920년부터 1924년 사이에 프랑스 대표팀이 실시한 국가대항전은 총 84회에 달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은 축구, 럭비, 육상경기였다.

 

그러나 이 세 경기의 상대는 모두 1차대전의 연합국들로 특히 영국과의 대항전이 41회로 제일 많았으며 벨기에와 17차례의 국가대항전을 가졌고 그 외의 국가들도 이탈리아, 스위스 등 1차대전의 연합국 또는 중립국들이었다.

1차대전에서 적대관계였던 나라들과의 대항전은 1925년에 오스트리아와 가진 축구 대항전이 최초였으며 독일과의 경기는 육상경기의 대항전이 치러진 1926년으로 1926년은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정치가 국제 스포츠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에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24년 파리올림픽의 개최는 프랑스가 국제적으로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파리올림픽 유치의 성공에는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지만 1차대전 이후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스포츠계에서 더 이상 핵심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파리올림픽 개최를 향해 프랑스 스포츠계와 쿠베르탱 사이에 어떤 논의가 있었으며 쿠베르탱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4편에 계속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2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2편)

올림픽대회처럼 각국의 대표선수가 한 곳에서 자웅을 겨루는 대회뿐만 아니라 개별 종목에서 각 국가 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를 보더라도 1차대전 후의 정치 상황이 명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24년까지 프랑스 축구대표팀은 주로 1차대전 당시 연합국 또는 중립국 팀들과 경기를 가졌으며 아주 가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1차 대전의 적대국 대표팀들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지만, 독일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 반독일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10년 이상이 지난 1931년에야 처음으로 대항전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상황은 스포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으며 1차 대전 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스포츠계에 미치는 미국의 힘도 상징적이었다.

1917년부터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국토가 전장으로 되는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유럽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유럽의 국가들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1차 대전 후 국제사회에서 패권을 잡게 되었다.

1편에서 언급했던 연합군 경기대회는 미국 육군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과 YMCA가 협력하여 유럽에 남아 있는 연합군 병사를 위한 스포츠 대회로 개최한 것이었다.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미국인 병사들은 파리의 방쎈느 산림공원(Bois de Vincennes)에 경기장을 건설했고 나중에 이 경기장은 프랑스에 기증되었는데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이라 명명되어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도 사용되었다.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

 

연합군 경기대회에는 19개국에서 1,415명이 참가했지만, 그 중 282명이 미군, 253명이 프랑스군의 병사였던 것에서 보는 것처럼 경기의 참가는 해당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또, 미국 선수의 강인한 체격이나 선진적인 트레이닝 방법 등도 1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에게는 미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쳤다. 게다가 올림픽에 있어서도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미국의 패권은 계속되어 1차대전 이후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미국은 금메달을 획득한 수에 있어서 다른 나라를 계속 압도하였다.

 

이와 같이 1차대전 이후부터 정치성을 수반하며 발전해온 스포츠의 국제화는 프랑스의 주도에 의한 바가 컸으며 국제 스포츠계를 주도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외교정책과 일치하며 프랑스 국내 스포츠계의 변화와도 상호 연관되어 전개되어 갔다.

1차대전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스포츠 관련 조직은 프랑스 스포츠연맹 (USFSA)으로 1890년 11월에 설립된 USFSA는 모든 스포츠를 일괄적으로 조직한 연맹으로 주요 가입자는 파리를 중심으로 귀족계급과 신흥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 육상, 축구, 론 테니스(Lawn Tennis) 등 종목별 소위원회를 두었고 1901년 7월 1일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법이 통과된 이후로 많은 스포츠 클럽이 가입했는데 예를 들면 1890년에는 13개 단체와 2,000명의 회원수에 불과했던 것이 1차대전 직전에는 약 1,700개 단체와 회원수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한편 프랑스의 엘리트 계급은 영국의 상류계급과 스포츠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스포츠는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했는데 쿠베르탱도 “스포츠를 노동자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USFSA는 그러한 상류층 및 중산층 사람들의 모임이며 엄격하게 아마추어리즘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이런 USFSA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03년에는 기독교 카톨릭계 프랑스 파트로나쥬 체조스포츠연맹(FGSPF)이 설립되었는데 FGSPF는 USFSA의 헤게모니에 반대하여 조직된 프랑스 연맹간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의 핵심세력으로 1차대전 전에는 1,500단체, 15만 명의 등록자를 가진 주요 조직으로 성장했다.

FGSPF: Fédération gymnastique et sportive des patronages de France

이런 FGSPF에 대해 UFSFA는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스스로는 세속적·비종교적인 조직임을 주장했지만 갈수록 프랑스 스포츠계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격화되면서 쿠베르탱은 1906년에 USFSA의 명예회원으로부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USFSA나 각종 스포츠 종목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1907년 1월에 이듬해 열리는 런던 올림픽대회의 참가를 둘러싸고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전국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거부했다.

USFSA는 올림픽 참여에 대해 쿠베르탱과 전국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맹과의 논의를 거쳐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미 1차 대전 전부터 쿠베르탱과 프랑스의 스포츠계 사이에는 스포츠에 대한 생각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1907년 3월에는 FGSPF가 중심이 되어 USFSA에 반대하는 몇몇 그룹이 결집해 CFI를 결성하게 된다.

즉 올림픽에 대한 쿠베르탱의 영향력과 정치적 갈등을 깊게 하는 프랑스 스포츠계의 위기를 앞두고 각종 경기단체는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지향하는 조직을 결성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였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