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이프르 전투와 역사의 아이러니

제2차 이프르 전투와 역사의 아이러니

사진은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모습

벨기에의 서플랑드르 주의 예페르(Ieper)는 흔히 프랑스어인 이프르(Ypres)로 불리는데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이곳에서는 5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두 번째 전투에서 독일군이 독가스를 사용하여 역사상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 벌어진 곳이라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이 염소가스를 사용하여 연합군을 공격한 것이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미 1914년 8월에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공격할 때 최루가스를 사용한 것이 기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2차 이프르 전투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몇 개의 전투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연합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대부분 프랑스군과 알제리군 및 모로코군이 피해를 당한 ‘그라펜스타펠 능선 전투(Battle of Gravenstafel Ridge)’와 캐나다군이 큰 피해를 입었던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를 들 수 있다.

영국의 공식자료에 의하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처음으로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이 있었던 4월 22일에만 약 1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에서 캐나다군은 총 5,975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이 중에서 약 1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수많은 연합군들이 독가스로 사상을 당하자 1915년 9월 25일 영국군은 벨기에의 루스(Loos)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Loos)에서 독일군에게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가스로 인한 사상자의 숫자는 연합군과 독일군을 합하여 모두 8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의 염소가스 사용을 독일군이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던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는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제국의 군사행동에 찬성한다는 ‘93인의 성명서(Manifesto of the Ninety-Three: Manifest der 93)’에 이름을 올렸고, 참호전투에서 연합군을 참호 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루가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적극적인 제안을 독일군에게 하였다.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의 제안은 즉시 현장실험을 거치게 되는데 이 실험을 관찰한 끝에 최루가스 대신에 염소가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프리츠 하버(Fritz Haber)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에 앞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프리츠 하버(Fritz Haber)’ 역시도 독일의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들이 독일의 군사행동을 찬성한다고 하는 ‘93인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염소가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독가스를 개발 또는 합성했던 일로 인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독일계 유대인이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군에 공한한 바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1934년 나치에 의해서 독일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93인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로 전시내각에서 화학부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는지는 몰라도 역시 같은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는 남편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

 

독일군의 철저한 지지자로 독가스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남편에 대해 과학이념의 왜곡이자 야만적이라고 반대하며 비난까지 했던 그녀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주도로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염소가스가 사용되고 이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이 벨기에로부터 돌아온 직후인 1915년 5월 2일, 남편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물론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의 자살의 동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녀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행동이 원인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가 자살을 한 다음날에도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러시아에 대한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의 아내가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한 것에 이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당한 그와는 달리 나치에 의해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야만 했던 그의 친척들은 그가 개발한 치클론 B(Zyklon B)라는 독가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불행을 겪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한편 5,975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에 참전한 캐나다군(1st Canadian Infantry Division)은 이전의 식민지부대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유럽열강을 이긴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런 사실과 숨져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인트 줄리안 기념관(Saint Julien Memorial)’에는 11미터(36피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그 꼭대기에는 캐나다군 병사의 흉상이 장식되어 있다.

항복을 뜻하는 백기(白旗)의 유래와 역사

항복을 뜻하는 백기(白旗)의 유래와 역사

이미지 출처: USS Pavlic

전장(戰場)에서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白旗)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백기가 항복의 의미로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218년부터 201년까지 벌어졌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카르타고를 침공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흰색 양모와 올리브 가지를 내건 적함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배에 타고 있던 카르타고 병사 10여명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하였다는 것이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AD 56년~AD117년)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69년 로마 내전 당시 일어났던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Second Battle of Bedriacum)에서도 항복한 장병들이 백기를 내걸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로마 제국 시절부터 백기가 항복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중세에 와서 서유럽의 나라들에서는 백기가 교전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어 포로의 모자에 흰색의 종이나 천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가스파르 코레이아(aspar Correia)의 기록에 따르면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의 캘리컷(현재의 지명은 코지코드: Kozhikode)에 도착했을 때 영주였던 자모린(Zamorin)이 사람을 보내어 평화회담 개최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사신이 흰색 천을 두른 지팡이를 들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인도인들이 이런 백기를 들게 된 데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이 동기가 되었지만 그것은 오늘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자.

한편 1625년에는 ‘자연법의 아버지’ 또는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법학자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On the Law of War and Peace)’에서 백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백기를 드는 것은 회담의 개최를 요구하는 암묵적인 표시로써 말로 표시된 것과 동등한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하는 백기는 무조건항복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전투의사가 없는 일방이 상대방과 회담을 하기 위해 백기를 들었다는 것은 회담이 결렬되면 다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니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패배한 측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전쟁의 역사를 지닌 서유럽에서는 백기는 항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해군은 전통적인 백합문양인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 외에도 백기를 깃발로 사용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는데 아래의 그림은 1779년 12월 18일에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 간의 마르티니크 전투(Battle of Martinique)를 묘사한 것으로 백기를 달고 있는 프랑스의 전함은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프랑스 해군의 상징으로 백기를 달고 있다.

 

그리고 아래의 그림은 미국 2달러 지폐의 도안으로 유명한 화가인 존 트럼불(John Trumbull)이 그린 것으로 미국독립전쟁을 사실상 끝냈던 요크타운 전투에서 벤저민 링컨(Benjamin Lincoln) 장군이 이끄는 미군과 미국을 지원하였던 프랑스군에 패한 영국군의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장군이 이끌던 영국군이 항복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항복하는 장면이라고 하니 대부분은 왼쪽에서 백기를 들고 있는 군대가 영국군이라 생각하겠지만 왼쪽에 있는 군대는 프랑스군으로 백기는 그들의 상징이고, 중앙에서 말을 타고 있는 벤저민 링컨(Benjamin Lincoln) 장군의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것이 항복한 영국군들이다.

이런 역사를 지닌 백기는 1899년 네덜랄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국제적인 규칙으로 명문화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헤이그 제2협약)’이다.

이 협약(Convention with Respect to the Laws and Customs of War on Land (HagueII)의 32조는 ‘An individual is considered a parlementaire who is authorized by one of the belligerents to enter into communication with the other, and who carries a white flag. He has a right to inviolability, as well as the trumpeter, bugler, or drummer, the flag-bearer, and the interpreter who may accompany him.’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나라의 법전에서는 ‘교전자 일방의 허가를 받아 타방과 교섭하기 위하여 백기를 들고 오는 자는 군사로 인정된다. 군사와 그를 따르는 나팔수, 고수, 기수 및 통역은 불가침권을 가진다.’고 번역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 협약의 제3장을 군사(軍使)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문판에서는 휴전 깃발(On Flags of Truce)에 관한 것이라 되어있는데 이것은 백기를 거는 것은 엄밀하게는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을 악용하여 백기를 들고 적을 방심시킨 다음 기습하는 등의 전법을 사용할 경우에는 전시국제법 위반으로 처벌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휘관의 의사에 따라 백기를 걸더라도 일부 부하병력이 이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때에는 교전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해군의 경우에는 적함이 백기를 게양하더라도 포격을 중지하거나 포구를 아래로 내려 전투의지가 없음을 명확히 하기 전까지는 공격을 계속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백기를 드는 쪽은 전체의 일치된 의견으로 항복의사를 통일할 필요가 있지만, 상대방이 항복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육군도 마찬가지다.

이상으로 전쟁에서 항복의 의사표시로 사용되는 백기(白旗)의 역사와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사족으로 몇 마디만 덧붙이고 글을 마칠까 한다.

일본 외무성은 지난 19일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2020년 외교청서를 각의에 보고함으로써 그들의 망동은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백기를 들었던 일본은 그들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특기를 지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시 보여주마. 그날의 기억들을~

 

※ 연합뉴스의 사진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으며 일본의 입장에서 쓴 문서이므로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라고 번역하였다.

“한일 간에는 다케시마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한국은 경비대를 상주시키는 등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다케시마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

감자 때문에 실패한 나치독일의 V2 미사일

감자 때문에 실패한 나치독일의 V2 미사일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나치독일의 탄도미사일 연구 프로그램으로 탄생한 아그레가트(Aggregat)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흔히 V2 미사일이라 부르는 A4 미사일이다.

V2 미사일의 V는 독일어 베르겔퉁스바펀(Vergeltungs waffen)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보복(vergeltungs)무기(waffen)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집합체라는 뜻의 아그레가트(Aggregat)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붙였던 A4 미사일이 보복무기 2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개발되던 당시 나치독일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이 미사일의 개발과 함께 역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명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의 탄도미사일 개발의 주역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5개의 독일육군 무기실험장의 하나인 페네뮨데(Peenemünde) 실험장에서 미사일을 개발하였는데 “이곳은 너와 네 동료들에게 가장 완벽한 장소”라고 그의 어머니가 권했던 장소라고 한다.

그러나 페네뮨데(Peenemünde) 실험장은 관련 정보를 입수한 폴란드 저항군의 제보에 따라 1943년 8월 17일과 8월 18일 이틀 동안 600여기의 연합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연합군의 폭격은 가능한 많은 연구원들을 죽이기 위해 연구시설이 아닌 주거용 건물을 표적으로 삼았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노동자 500여명을 포함하여 모두 700여명이 사망하자 V2의 개발은 노르트하우젠(Nordhausen) 인근의 지하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네뮨데(Peenemünde) 박물관에 전시된 V2 모형

 

1944년 9월 7일 독일육군의 포병 제444중대는 파리를 향해, 9월 8일에는 런던을 향해 V2 로켓을 발사했는데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발사기지에서 쏘아 올린 V2 로켓은 런던까지의 320㎞ 거리를 5분간 비행하여 9월 8일 오후 6시 43분 치즈윅(Chiswick)에 떨어져 13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V2 미사일의 명중률은 극도로 저조하여 런던 시내에만 떨어지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V2 미사일은 심리적으로 런던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연합군이 V2 미사일을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발사 전에 파괴해야만 했지만 V2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동식 발사를 할 수 있었으므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합군으로서도 발사 전에 포착하여 파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위협적이었던 V2 미사일은 연합군의 공격이 아닌 우리가 먹는 감자 때문에 나치독일이 더 이상 운용할 수 없는 웃픈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직경 1.65m, 길이 14m의 V2 로켓의 기체 절반은 연료탱크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용하는 연료의 75%은 에탄올이었으며 이것은 감자를 증류하여 생산하고 있었다.

 

바이오매스 에너지의 연구가 활발한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1리터의 에탄올을 만들기 위해서는 12㎏~15㎏의 감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5,200리터의 용량을 가진 V2 미사일의 연료탱크는 75%인 3,640리터의 에탄올을 채워야 했고 이것을 생산하려면 현대의 기술로도 40톤 이상에 이르는 양의 감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독일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채소인 감자는 1인당 소비량 2위의 토마토가 10㎏인 것에 비해 그보다 6.5배가 많은 1인당 65㎏을 해마다 소비하기 때문에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미사일 연료를 생산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지금보다 기술이 떨어졌을 당시에는 40톤보다 훨씬 많은 감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1944년 이후에는 동부전선으로부터 소련군이 진군해오면서 동유럽에서의 감자 수확량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V2 미사일은 쏘고 싶어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굴(Oyster) 껍질에 찢겨 숨진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

굴(Oyster) 껍질에 찢겨 숨진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

굴이 제철을 맞았다.

얼마 전 포스팅했던 “헤밍웨이의 유작(遺作) 파리는 날마다 축제(원제: A Moveable Feast)”에도 굴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문을 잠깐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약한 금속 맛과 함께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굴을 먹으면서 금속 맛이 차가운 백포도주에 씻겨 나가고, 혀끝에 남는 바다 향기와 물기를 많이 머금은 굴의 질감이 주는 여운을 즐기는 동안, 그리고 굴 껍데기에 담긴 신선한 즙을 마시고 나서 상쾌한 백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동안, 나는 공허감을 털어 버리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As I ate the oysters with their strong taste of the sea and their faint metallic taste that the cold white wine washed away, leaving only the sea taste and the succulent texture, and as I drank their cold liquid from each shell and washed it down with the crisp taste of the wine, I lost the empty feeling and began to be happy and to make plans.”

헤밍웨이가 굴에서 느꼈다는 금속 맛은 철의 맛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의 우유라고 하는 굴은 구리와 아연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혀끝을 살짝 찌르는 쓴맛과 신맛은 구리 맛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은 제철을 맞은 굴(Oyster) 껍질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죽어야 했던(?) 그리스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히파티아(Hypatia)가 활동했던 시기는 동로마 시대였고, 역사상 가장 먼저 굴 양식을 했던 것도 로마제국이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굴 양식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굴의 양식이 시작된 것은 동양보다는 서양이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만큼이나 역사를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중국도 2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들도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굴의 양식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북송시대의 시인인 매요신(梅堯臣)이 쓴 오언절구인 식호(食蠔)이다.

식호(食蠔)란 제목은 글자 그대로 굴을 먹는다는 것인데 이 시는 매요신(梅堯臣)이 근무지를 옮기기 전에 휴가를 받아 친구와 여행 중에 들른 광동성 주강 하구의 어촌에서 난생처음으로 생굴을 먹고 그 맛에 놀란 것을 적고 있으며 그 중에는 굴 양식에 대한 정경을 묘사한 내용도 있다.

※ 성유(聖兪)는 매요신(梅堯臣)의 자다.

이번에는 서양의 역사를 둘러보자. 2017년 영국의 일간 텔레그래프는 기원전 55년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을 침공한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그런데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을 침략한 이유는 템즈강 유역에서 나는 굴을 원해서였다.

로마제국이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침략은 하더라도 약탈은 하지 못하게 명령함으로써 침략을 당한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인 것도 있는데 약탈은 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바람에 침략에 동원된 군인들은 식량을 알아서 조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이 진군하는 곳이 육상이면 밀을,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는 굴을 양식하면서 진군을 해나갔다.

그러나 굴 양식에 어떤 특별한 비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갯벌에 굴을 뿌려 번식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아주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굴 양식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그리스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혹시 2011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아고라를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바로 히파티아(Hypatia)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러나 히파티아(Hypatia)의 죽음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보니 저마다의 상상력이 동원된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폭도들이 히파티아를 붙잡아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칼로 피부를 도려내려 하는데 그때 포스터의 왼쪽에 있는 다보스가 나서서 더러운 이교도의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자 폭도들은 돌을 던져 그녀를 죽이기로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돌을 구하러 폭도들이 나간 사이 다보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히파티아를 질식시켜 숨지게 하고는 폭도들에게는 그녀가 기절했다고 하면서 돌아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히파티아의 시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폭도들의 모습이 나오고 이어서 그녀의 시신은 거리를 끌려다니다 불살라졌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영화에서 그려지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모습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쓴 책, 로마 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가 끼친 영향이 너무도 크기에 국내 포털에도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로 찢겨나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은 불속으로 던져졌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것은 4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라고도 부르는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가 쓴 책 ‘히파티아 살인(The Murder of Hypatia)’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영문판에서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타일을 이용하여 살해했다(Where they completely stripped her, and then murdered her with tiles.)”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사용된 타일(tiles)이 굴껍데기를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상상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인 신부 로버트 바론(Robert Barron)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무슨 근거로 히파티아가 굴껍질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가 그리스어로 쓴 책에서 히파티아는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어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는 굴껍데기를 뜻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그리스어에 해당하고 이전에는 굴껍데기란 의미로 국한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다.

1889년에 발간된 리들 앤 스콧의 희영사전에는 가장 첫 번째로 오스트라콘(ostrakon)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스어 오스트라콘(ostrakon)은 복수형이 오스트라카(ostraka)이며 깨진 도자기나 꽃병의 조각을 의미하며 투표를 할 때 투표용지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체제에 위협적인 인물을 추방할 때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 제도를 오스트라시즘(Ostracism: 도편추방)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다른 어떤 동물의 껍질일 수도 있고, 깨어진 테라코타의 조각일 수도 있는 것을 굴껍데기로 단정지은 것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상상력이었고, 또 일반은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 그리스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는 굴 껍데기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히파티아의 살인에 동원된 파라발라니(Parabalani)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면서 글을 마친다.

파라발라니(Parabalani)를 짧게 소개하면 사회의 하층계급에서 선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주교(主敎)의 경호임무를 수행하면서 때로는 상대방과의 폭력충돌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히파티아(Hypatia)의 살해에 동원되었던 것이었다.

금발은 머리가 나쁘단 편견은 언제 생겨났을까?

금발은 머리가 나쁘단 편견은 언제 생겨났을까?

“우리는 마릴린 먼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은 편견에 가득 차 있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금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인 ‘마릴린 먼로’에게는 항상 백치미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오늘은 금발인 여성들은 머리가 나쁘다거나 멍청하다는 편견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그 유래를 한번 더듬어 볼까 한다.

예로부터 영어권에서는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근거한 ‘금발머리 농담(Blonde joke)’ 또는 ‘멍청한 금발 농담(Dumb blonde jokes)’이란 것이 있는데 금발을 뜻하는 단어를 남성(blond)이 아닌 여성(blonde)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또 다른 성적 불평등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이런 농담(Blonde joke)의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① 금발머리, 빨간머리, 갈색머리를 가진 3명이 사막에 고립되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마술램프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빨간머리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비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고, 다음은 갈색머리가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과 함께 사라졌다. 마지막 금발머리가 빈 소원은? “아~ 내 친구들이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② “금발머리가 911에 전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11번 버튼을 못 찾아서.

③ 퍼즐을 반년 만에 드디어 완성한 금발은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 이유는 상자 겉면에 적힌 말 때문이었는데 거기에는 “2 to 4 years”라고 적혀 있었다.

왜 이렇게 금발의 여성을 비하하는 편견이 생겨난 것일까? 금발여성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은 특히 ‘금발에 대한 고정관념(Blonde stereotype)’이라는 별도의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런 편견과는 달리 금발이 옛날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날 때부터 금발인 사람은 많지 않음에 대한 반증임과 동시에 금발이 매력적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금발의 가발이 고가에 거래되었고 여성들은 코코넛 오일에 식초 등을 섞어 만든 염료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두고 시인이었던 프로페르티우스(Sextus Propertius)는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머리를 염색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경의 대상이자 매력적으로 생각되었던 금발머리의 여성들은 언제부터 멍청하다거나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들은 원조는 18세기 프랑스의 ‘로잘리에 듀테(Rosalie Duthé)’라는 여성이다. 수녀가 되려던 그녀는 따분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수녀원을 나온 다음, 나중에는 미모를 무기로 영국과 프랑스 사교계에서 귀족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중에는 나중에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여성들에게 정숙함과 고귀함이 요구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 ‘로잘리에 듀테(Rosalie Duthé)’는 말을 하기 전에 잠시 침묵을 하는 버릇을 들였는데 이를 두고 아름답긴 하지만 어딘가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것이 그녀가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을 갖게 만든 최초의 여성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조안나 피트만(Joanna Pitman)’이란 사람에 의해서 대중들에게 그렇게 각인되어버리고 만다.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역사학자인 ‘조안나 피트만(Joanna Pitman)’은 금발머리에 대하여 기술한 그녀의 저서 ‘On Blondes’에서 “로잘리에 듀테는 공식적으로 최초의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Rosalie Duthé acquired the dubious honour of becoming the first officially recorded dumb blonde)”고 표현함으로써 서구사회에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2016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제이 자고르스키(Jay Zagorsky)’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미국 베이비 붐 세대 1만9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금발머리의 여성이 오히려 IQ가 조금 더 높게 나왔으나 금발이 더 똑똑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금발이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경의 대상이자 매력의 상징이었던 금발머리의 여성이 멍청하다는 편견을 얻게 된 이유로는 영화의 힘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공(?)이 컸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금발머리의 여성은 아름답지만 멍청하다는 편견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먼로의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Gentlemen Prefer Blondes)’이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가 맡은 로렐라이라는 역은 프랑스대륙에 유럽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식은 부족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베프(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라는 말을 할 정도로 돈만을 보고 결혼을 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그러나 정작 영화는 내로남불 식의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먼로에게는 ‘섹시 심볼’, ‘백치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지만 정작 먼로는 금발머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모습이 그대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과 관련하여 영국의 ‘아네트 쿤(Annette Kuhn)’은 그의 저서 ‘The Women’s Companion to International Film’에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발여성에 대한 편견을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 차가운 금발(Ice-cold blonde)

차가운 외모를 가졌지만 내면에는 불타는 감정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경우인데 대표적으로는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Grace Patricia Kelly)’를 꼽고 있다.

 

■ 섹시한 금발(Blonde bombshell)

폭발적인 섹시함으로 남성들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된 경우로 당연히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도 포함되어 있다.

■ 멍청한 금발(Dumb blonde)

섹시하지만 철부지처럼 조금은 모자란듯하게 그려지는 것으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그로 인해 곤란함을 겪게 되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며 대표적인 배우로는 1920~1930년대에 활약한 ‘매리언 데이비스(Marion Davies)’를 들고 있다.

한편 1999년 영국 ‘코번트리 대학교(Coventry University)’의 연구는 금발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금색, 은색, 갈색, 빨간색의 4가지 가발을 같은 모델에게 쓰게 하고 60명을 대상으로 그 느낌을 조사한 결과, 금발과 은발은 다른 색깔에 비해 지능이 낮아 보인다는 대답이 많았고 금발은 특히 매력적이란 평가가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우리사회를 뒤집어놓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경찰과 검찰에 대한 불신이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지, 입법·사법·행정 할 것 없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마릴린 먼로’에게 백치미란 수식어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처럼…

워털루 전투가 만들어낸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

워털루 전투가 만들어낸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

이미지 by sportiqe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엘바 섬(Elva Island)으로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섬을 탈출하여 다시 권력을 장악하자 유럽 각국은 이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이 지휘하는 영국군 9만5천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줄여서 흔히 폰 블뤼허로 부른다)가 이끄는 12만의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의 12만5천 병력과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Waterloo) 교외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이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815년 6월 16일, 벨기에의 작은 마을인 꺄뜨흐 브하에서 전초전 격의 전투가 일어나 미셀 네(Michel Ney)가 이끄는 프랑스군 4,140명과 웰링턴의 병력 4,8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데 이 전투를 꺄뜨흐 브하 전투(Battle of Quatre Bras)라고 하며 연합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승패를 가를 수 없는 결과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톰슨(1875년작) 꺄뜨흐 브하 전투

 

당시 꺄뜨흐 브하 전투(Battle of Quatre Bras)를 지휘하던 웰링턴의 비서는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이란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에밀리(Emily Harriet Wellesley-Pole)는 웰링턴의 조카였다. 1814년 8월에 결혼을 하고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불과 수주일 전에 예쁜 딸을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은 프랑스의 저격병에 의해 총상을 입고 팔을 절단하게 된다.

Emily Harriet Wellesley-Pole

 

오른팔이 절단 된 채 가까운 농가로 피신한 피츠로이 서머셋은 “오른손에 있는 결혼반지를 찾아야 하니 절단된 팔을 가져다 달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815년 6월 19일에 웰링턴이 직접 편지를 써 피츠로이 서머셋의 형에게 그의 부상소식을 전한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피츠로이 서머셋의 의지력은 남달랐던 모양으로 아직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법도 하지만 그는 2주일이 되기도 전에 왼손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아래의 사진이 그가 보낸 편지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이는 옷을 입고 벗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칼을 휘두른다던지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은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에 의뢰하여 일상생활에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소매가 몸통과 연결된 각도를 크게 만드는 디자인의 옷을 제작하게 된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이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소매를 채택한 옷은 그 편리함 때문에 이후에 사냥이나 스포츠용 의류에 채택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는데 왜 피츠로이 서머셋의 의뢰로 개발된 옷이 피츠로이 소매나 서머셋 소매가 아니고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로 불리게 되었던 것일까?

1952년에 피츠로이 서머셋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웨일즈 남동쪽 몬 마우스셔(Monmouthshire)에 있는 래글런(Raglan)의 남작지위를 받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 그의 이름 뒤에 ‘라글란의 첫 번째 남작(1st Baron Raglan)’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에서 개발한 소매 디자인이 정확히 언제부터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으로부터 유래된 것임은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래글런(Raglan)이란 수식어가 붙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1864년에 정식으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전쟁의 아픔에서 유래한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으로는 금년에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류현진 선수가 몸담고 있는 메이저리그 야구경기를 예로 들 수 있는데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쿠어스필드에서 내일 열리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류현진의 승리를 기대해본다.

1조6천억 원의 현금 수송작전

1조6천억 원의 현금 수송작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뒤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6년 반 동안 일본은 미군의 지배를 받는 소위 미군정체제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반환될 때까지 27년간을 미군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시기를 오키나와 방언으로 “아메리카유우(アメリカ世)”라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은 류큐열도미국군정부(USMGR: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of the Ryukyu Islands)와 그 후신인 류큐열도미국민정부(USCAR: United State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를 수립하여 오키나와를 일본으로부터 떼놓기 위한 시도를 하였지만 실질적인 지배는 일본인이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1950년 9월에 있었던 투표로 선출된 주지사와 의원들이 일본복귀를 선언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꼭지가 돌아버린 미군이 1950년 12월 15일 USCAR을 통해서 행정권을 장악해버리게 되면서 오키나와를 비롯한 류큐제도의 기축통화는 일본 엔화에서 달러화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처럼 일본본토와는 달리 달러화를 사용해오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게 되자 사용하는 돈도 달러에서 엔화로 바뀌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오키나와 주민들이 보유한 자산은 6,000만 달러로 계산되었고 여기다 법인의 자산과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일본은행에서는 1억 달러 정도로 추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예비비를 포함하여 일본은행은 당시의 금액으로 총 542억 엔을 지폐 517억 엔(무게 22톤)과 동전 25억 엔(무게 293톤)으로 준비하여 달러와 엔화를 교환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당시의 환율(1: 360)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일본 총무성 통계국의 자료에 의하면 542억 엔의 금액은 현재는 한화로 1조 5,400억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최초의 계획은 비행기로 운반한다는 것이었으나 총 무게가 315톤에 달하고 3톤짜리 컨테이너의 개수만 161개에 달해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 해상운송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 역시도 민간화물선으로 운반하게 되면 오키나와 반환이나 미군기지 철수 등의 문제로 사회가 불안정한 상태여서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자위대의 도움을 받아 수송하기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3척의 LST(탱크상륙함: Landing Ship Tank)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오스미급 LST4001과 2번함 시모키타 4002, 3번함 시레토코 4003이 그것이었습니다.

4001 오오스미

 

4003 시레토코

 

기준배수량 1,650톤 만재배수량 4,080톤으로 최대속력 11노트를 낼 수 있는 이 수송함들은 LST4001가 40mm기관포 1문, LST4002와 4003은 40mm연장기관포 1문씩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40mm연장기관포

 

1971년 6월 17일에 오키나와의 반환협정이 체결되고 공식적으로 반환된 1972년 5월 15일 전인 4월 26일 새벽 2시에 500여 명에 이르는 경찰병력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은행을 떠난 돈을 담은 컨테이너는 오이부두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송함에 무사히 전달됩니다.

드디어 4월 27일 호위함 3척과 P2V대잠초계기의 경비 속에 부두를 출발한 배는 5월 2일 미군이 관리하는 나하군항으로 입항하여 헌병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은행 나하지점의 지하금고에 무사히 돈을 수송하는 임무를 마치게 됩니다.

 

P2V대잠초계기

 

그러나 수송함들은 즉시 귀환하지 못하고 며칠을 나하에서 대기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엔화와 교환한 달러를 싣고 와야 하는 임무가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왕복으로 현금을 수송하는 비용만 현재의 금액으로 한화 44억원 정도가 들었다고 하며 보험료로 18억원을 지불하였다고 하는 이 세기의 현금수송작전은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금수송 중인 당시의 트럭

사발주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사발주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지나친 음주문화를 지적하는 언론의 보도에 종종 등장하는 사발주! 한국에서만 사발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외국, 특히 외국의 군인들이 그들의 표현으로 “그록 볼(Grog Bowl)”이라고 하는 사발주를 마시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언제부터 사발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제부터 그 유래와 이유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발주의 기원은 1740년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을 만든 사람은 영국의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이라는 해군제독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배의 선원들은 마실 물을 보존할 특별한 방법이 없어서 물과 맥주를 그냥 통에 담아 보관을 하고 항해를 하였는데 그러나 보니 물은 변질되고 맥주는 신맛이 강해져 마시기 어렵게 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선원들에게 제공되는 맥주의 양은 하루에 1갤론이었는데 반해 선원들은 맥주가 변질되기 전에 더 많은 양의 맥주를 마시려 하였고 그렇게 정해진 양보다 많은 맥주를 마시게 됨으로써 사건과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1650년 이후부터 맥주 대신에 럼주가 선원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맥주보다 도수가 강한 럼주를 기존의 양과 같이 하루에 1갤론을 보급함으로써 계속해서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럼에 따라 버논 제독은 1740년 8월 21일, 럼주에 물을 1대 3의 비율로 섞어 희석하여 보급하도록 명령하고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번으로 나누어 선원들에게 배급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듭니다.

그런데 왜 사발주를 Grog Bowl이라고 부른 것일까요?

그것은 이 규정을 만든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제독이 평소에 견모교직물(Grogram)로 만든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물을 탄 럼주를 Grog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말은 권투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말하는 그로기(Groggy)의 어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을 섞었다고는 해도 음주로 인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는 바람에 해군에서는 럼주의 공급을 없애고 대신에 급료를 인상시키는 제안도 대두되지만 실천되지는 못하고 단지 공급하는 양을 줄이는 쪽으로 수정하게 됩니다. 그 후 미 해군은 1862년 9월 1일부터 럼주의 배급을 중단하게 되고 영국해군은 1970년 7월 30일에 럼주의 배급을 중지하게 되는데 그날을 “Black Tot Day”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86년 미 해군의 초청장

사발주 Grog Bowl을 마시는 것은 그냥 잡다한 것을 섞는 것이 아니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알콜이 들어있지 않은 것 1개와 알콜이 들어있는 1개를 반드시 따로 준비해야 하고, 복장은 단정해야 하며,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불이 켜지기 전에는 흡연해서는 안 되며 나비넥타이가 틀어져서는 안 된다는 등의 정해진 규칙을 어긴 경우에는 사발주를 마셔야 하고, 다 마셔서 잔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위에서 뒤집어야 한다는 등의 규칙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발주 Grog Bowl을 만들 때 술과 함께 혼합하는 재료에는 피를 뜻하는 타바스코와 바다를 뜻하는 물, 땀을 의미하는 소금과 사막전쟁을 뜻하는 모래 등인데 그밖에도 지나친 재료들이 사용되어 점차 그 의미가 변질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무엇이건 간에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까요~

트렌치 코트(trench coat)의 역사

트렌치 코트(trench coat)의 역사

참호라는 뜻의 트렌치(trench)가 이름에 붙어있는 코트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영국 육군성의 승인을 받고 레인코트로 트렌치 코트를 개발하였다는 연유로 일명 버버리(burberry) 코트라고도 한다는 내용의 어느 대학교수가 쓴 글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패션은 몰라도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밀덕이라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내용은 완벽하게 틀린 것이라고 지적할 수가 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렌치 코트(trench coat)란 이름이 붙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지만 버버리(burberry)에서 만든 것만 해도 1차 대전보다 60여 년이나 앞섰으며 기원을 올라가보면 1차 대전보다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버버리 트렌치 코트(Burberry trench coat)의 소재로 사용되는 개버딘(gabardine)이 개발된 것은 1879년이고 방수처리된 개버딘 소재의 코트는 보어전쟁에서도 이미 영국군 장교들이 착용하고 있었고 보급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트렌치 코트(trench coat)가 개발되었던 것이라는 정보는 명백하게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개버딘으로 만든 버버리 낚시복 광고

그러나 타이로켄(tielocken)이라는 벨트가 달린 디자인은 1912년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특허를 받은 것이어서 그 이전에 영국군에 보급되었던 코트와는 디자인이 달랐다는 차이점은 있다.

현대의 트렌치 코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824년에 찰스 매킨토시(Charles Macintosh)가 만들었던 레인코트이며 이것이 레인코트의 스타일로 정형화되었는데 이것은 고무를 코팅하여 방수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맥(mack)으로 불리었다.

 

매킨토시 레인코트

맥(mack)이란 레인코트를 개발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찰스 매킨토시(Charles Macintosh)와 영국의 토마스 핸콕(Thomas Hancock)이었는데 두 사람이 따로 경영하던 회사는 1830년에 합병하여 방수의류를 계속 생산하다가 1925년에 던롭(Dunlop Rubber)사에 인수되었다.

한편 매킨토시(Macintosh)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트래디셔널 웨더웨어(Traditional Weatherwear)라는 회사는 2003년 12월에 이름을 매킨토시(Macintosh)로 바꾸었고 2007년에 일본의 회사(Yagi Tsusho Limited)에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무로 코팅되어 만들어진 코트는 방수성은 뛰어났지만 땀과 냄새라는 문제를 발생시켰고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통기성이 뛰어난 코트를 만들어내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경영하던 버버리 (Burberry)였다.

그러나 이도 최초의 것은 아니었는데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을 만든 존 에머리(John Emary)가 1853년에 처음 선을 보였고 버버리는 그보다 3년 뒤인 1856년에 선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1879년에 개버딘(gabardine)을 개발하면서부터 버버리가 주도권을 갖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12년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타이로켄(tielocken)이라는 디자인의 특허를 취득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트렌치 코트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버버리가 만든 코트는 트렌치 코트로 이름 붙기 전인 1911년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914년 어니스트 섀클턴(Sir Ernest Henry Shackleton)이 남극탐험에서 착용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장교들이 참호에서 착용하던 모직코트가 무겁고 방수기능이 없어 불편하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서부터 트렌치 코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무겁고 방수성이 떨어지는 모직코트보다 기능면에서는 뛰어났는지는 몰라도 트렌치 코트(trench coat)는 전쟁 초기에 장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저주스런 옷이었다. 독일군들은 그들의 중요한 목표인 영국군 장교들만이 트렌치 코트(trench coat)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집중적으로 저격을 실시하여 수많은 장교들이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버버리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트렌치 코트=버버리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물론 버버리가 전쟁동안 군복의 공식공급업체였던 것은 맞으나 그 외에도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을 비롯하여 많은 회사들도 함께 트렌치 코트를 군납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곳들도 있다.

 

이런 역사를 지닌 트렌치 코트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개발된 것이라는 일부 인터넷의 정보와 유명인들의 칼럼 또는 기사는 전쟁기간에 트렌치 코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라고 정정해야 함이 옳고, 그 이전부터 군에서 사용하고 있었다고 수정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헬렌 켈러와 마크 트웨인

헬렌 켈러와 마크 트웨인

“기적이 일어나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제일 먼저 앤 설리번(Anne Sullivan) 선생님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다”고 말했다는 헬렌 켈러에게 설리번 선생님을 소개해준 사람은 전화기의 발명자(최초는 아님)이자 미국 AT&T 사의 설립자인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었습니다.

헬렌 켈러와 그레이엄 벨

 

헬렌 켈러와 그레이엄 벨의 관계에 대해서는 주디스 세인트 조지(Judith St. George)가 쓴 책 “Dear Dr. Bell…Your Friend, Helen Keller”이 “헬렌 켈러와 벨 박사의 위대한 만남 안녕하세요, 벨 박사님”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되어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소설가 마크 트웨인과 헬렌 켈러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아서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름인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본명이 사무엘 랭혼 클레먼스(Samuel Langhorne Clemens)인 사람의 필명입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란 필명은 그가 가장 마지막으로 사용한 필명인데 이 필명을 사용하게 된 데에는 젊은 시절의 경험이 바탕이 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젊은 시절 배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수부로 있다가 27세(28세라고도 함) 때 도선사가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강의 수심을 측정하기 위해 무거운 추가 달린 줄을 떨어뜨려 수심을 재었는데 그 때 수부가 수심을 재고 “Mark 10(수심 10)”, “Mark 20(수심 20)”이라고 소리를 질러 알리곤 했는데 이것이 너무 인상적이어서 필명으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생전에 헬렌 켈러는 마크 트웨인에 대하여 “벨 박사와 설리반 선생님 외에는 이렇게 나를 사랑하고 격려해 주신 분은 없다.”고 말을 했으며 마크 트웨인은 헬렌 켈러에 대하여 “19세기는 두 명의 위인을 낳았다. 하나는 나폴레옹 1세이고, 다른 하나는 헬렌 켈러다. 나폴레옹은 무력으로 세계를 정복하려는 시도가 실패하였지만, 헬렌 켈러는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삼중고를 짊어졌으면서도 마음의 풍요로움과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거둔 것이다”라고 평가를 했습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94년 헬렌 켈러가 14살 때 마크 트웨인의 친구인 하퍼스 매거진(Harper’s Magazine)의 편집장 로렌스 휴턴(Lawrence Hutton)의 집에서 있었던 파티에서의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안경 쓴 사람이 로렌스 휴턴

 

그 후 관계를 지속해오다가 헬렌 켈러가 지금은 하버드 대학(당시의 하버드는 남자학교였다)에 흡수된 당시의 래드클리프 칼리지(Radcliffe College)에 합격하게 되자 마크 트웨인은 부유한 자기의 친구인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의 헨리 로저스(Henry H. Rogers)에게 헬렌의 지원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내 헬렌 켈러가 무사히 대학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게 됩니다.

책과 강연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했던 마크 트웨인은 페이지 컴퍼지터(Paige Compositor)라는 기계에 자신과 아내가 가진 거의 대부분의 자산(당시 30만 달러)을 투자하여 날림으로써 상당한 곤궁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헬렌 켈러를 직접 지원할 수 없었던 것이었으며 이러한 사실에 관하여는 “부자가 되지 않는 방법(How Not to Get Rich)”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헬렌 켈러는 상당히 보수적이었던 래드클리프 칼리지(Radcliffe College)의 입학시험에 합격을 하고도 이사회의 승인을 얻지 못해 허가를 받지 못하고 기다려야만 했는데, 그러는 와중에 코넬 대학과 시카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장애를 가진 사람이 입학한 전례가 없다.”는 편견의 벽을 깨기 위해서 헬렌 켈러는 물러서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과 헬렌 켈러는 그야말로 아버지와 딸과 같은 나이차가 있었는데 마크 트웨인의 막내딸은 헬렌 켈러와 같은 1880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런 막내딸 때문에 마크 트웨인은 더욱 헬렌 켈러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쏟았던 것은 아닌지 하고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마크 트웨인은 아내 올리비아 클레멘스(Olivia Clemens)와의 사이에 모두 4명의 자녀를 두었었습니다.

 

올리비아 클레멘스

 

그러나 첫째인 아들은 19개월 만에 디프테리아로 사망했으며 그 후로 3명의 딸을 얻었는데 그 중의 막내가 바로 헬렌 켈러(1880년 6월 27일생)보다 한 달 후에 태어난 장 클레멘스(Jane Lampton “Jean” Clemens: 1880년 7월 26일생)였습니다.

막내 장 클레멘스는 15세 무렵부터 뇌전증(흔히 간질이라고 함)을 앓기 시작했는데 막내딸의 뇌전증과 헬렌 켈러의 장애가 마크 트웨인에게는 같은 무게와 느낌으로 다가갔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마크 트웨인의 아내 올리비아는 어떻게 해서라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막내 딸과 함께 생활하려는 노력을 하였으나 1904년 그녀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면서 마크 트웨인과 두 명의 언니들에게 맡겨진 막내 장 클레멘스는 결국 1906년에 뇌전증을 치료하는 시설로 보내지게 되는데 여기에는 마크 트웨인의 비서였던 이사벨 라이온(Isabel Lyon)의 간계가 숨어 있었지만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넘기겠습니다.

1909년이 되어서야 마크 트웨인은 비서인 이사벨 라이온(Isabel Lyon)의 횡령과 거짓을 알게 되어 그녀를 해고하고 그해 4월에 막내딸을 집으로 오도록 합니다.

그러나 그리운 집으로 돌아온 막내딸은 크리스마스이브에 욕조에서 사망한 채로 발견되게 되는데 뇌전증으로 인한 발작을 일으키는 와중에 익사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마크 트웨인과 막내딸 장 클레멘스

 

헬렌 켈러의 나이 12살 때 쓴 단편소설 “프로스트 킹(Frost King)”이 “마가렛 캔비(Margaret Canby)“”의 소설 “프로스트 페어리즈(Frost Fairies)”를 표절한 것이라는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되었고 결국 무죄판결을 얻었다는 사실을 헬렌 켈러가 쓴 자서전을 통해서 10년 후에야 알게 된 마크 트웨인은 “인간의 말들은 대부분이 표절이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 그녀를 응원하는데 그 때가 1902년이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둘째 딸 수지 클레멘스(Susy Clemens)가 1896년 수막염으로 사망하면서부터 우울증을 앓기 시작하였는데 막내딸이 사망하고 난지 불과 4개월 뒤인 1910년 4월 21일에 아내와 마찬가지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뇌전증을 앓던 막내를 두었으며 사랑하는 둘째 딸을 1896년에 떠나보내야만 했던 마크 트웨인에게는 듣지도, 보지도, 말하지도 못하던 헬렌 켈러가 딸처럼 생각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딸과 같은 헬렌 켈러였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학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친구에게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