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 션사인의 모리 타카시는 실존인물일까?

미스터 션사인의 모리 타카시는 실존인물일까?

배우 김남희씨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일본군 대좌 “모리 다카시”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옆에 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하더군요~

배우 김남희씨는 오는 9월 29일 오랫동안 사귀었던 연인과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니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 18회에서 “모리 다카시”는 이런 말을 매국노 이완익에게 합니다. “나는 임진년에 내 선조들이 조선에게 당했던 수치를 반복할 생각이 없어!”라구요~

그러면 “모리 다카시”의 조상 중에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극중에서 일본의 힘깨나 쓰는 가문이라는 모리가문은 실제 어떤 가문이고 모리다카시는 실존인물인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김은숙 작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면 “왜 이름이 모리 다카시인거야? 실존인물이야? 그 이름을 사용한 이유가 있어?”라고 물어보면 가장 빠르고 좋겠지만 알지를 못하니 애써 추론을 해볼 수밖에요^^

그러면, 지금부터 재미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모리 다카시”의 가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극중 “모리 다카시”는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란 것입니다.

아무튼 드라마에서 모리 다카시가 말한 “나는 임진년에 내 선조들이 조선에게 당했던 수치~”라고 하는 대사에 근거하면 그의 조상들 중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한국어로 모리라고 발음하는 인물 중에서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일본어 모리(森)란 성을 쓰는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란 사람과 모우리라고 발음하는 모우리(毛利)란 성을 사용하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극중에서 열연을 보여주는 김남희씨를 보면 결코 모우리라고 읽는 일본어를 모리라고 발음하지는 않았을 테니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사람의 성은 분명히 모리(森)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방면에서 남하하여 잔악한 살상을 저지른 왜군 중에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란 자가 있는데 아마도 극중 모리 다카시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이 자가 다카시의 조상일 가능성이 농후해보입니다.(사실이 아님은 아시죠?^^)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일본군 4군이 원주로 침공해오자 당시 원주목사로 있던 김제갑(金悌甲)은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어 부인과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게 됩니다.

이 여세를 몰아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일본군은 계속해서 남하를 하게 되고 이 때 봉화에서 의병군들과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의병들은 개전초기에는 600여 명의 병력으로 1,600여 명이나 되는 왜군을 무찌르지만 결국에는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두고 극중의 모리 다카시는 “선조가 당했던 치욕”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잔인성이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오마이뉴스의 자료를 인용하면(원문보기) “많은 군사를 잃은 일본군은 분풀이를 하느라 류종개, 윤흠신, 윤흠도, 김인상, 권경 등 전사한 아군 장수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하늘에 매달았다. 아직 죽지 않은 아군은 불로 몸을 지졌다.(<삼강행실사적>)’ 왜적이 물러간 뒤 김인상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서 자신이 지어주었던 옷으로 겨우 분별해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창을 잘 썼다고 하며 특히 열십자창의 명수였다고 하는데 아래의 그림은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우사야마전투(宇佐山の戦)에서 부상당한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하라를 엎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결국 이 전투에서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도 오다 노부하라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자이지만 자기 가족은 중했던 모양인지 애처가로 알려진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정실부인과의 사이에 6남3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모리 란마루(森蘭丸)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모리 나리토시(森成利)인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보필하는 시동(侍童)이며 근습(近習)이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남색의 대상이었는데 그의 동생 모리 나가우지(森長氏)의 나이 15세 때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1582년 6월 21일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모리 다카시가 말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로 유추되는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1570년 10월 9일 사망하여 지금은 기우현의 아츠지성(安土城)에 저택지가 남아있습니다.

아무튼 tvN의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 “모리 다카시”는 임진왜란 당시 잔인함을 보여준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전혀 사실이 아닌

재미로 알아본 내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편견 때문에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브론테 자매

편견 때문에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브론테 자매

사진은 Philip Halling이 찍은 브론테 자매의 동상

중학생 시절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원제는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는 7번을 내리 읽었을 만큼 내게는 감명적인 소설이었다.

그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을 꼽으라면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제인 에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샬롯 브론테는 우리에게 브론테 자매로 알려진 세 사람 중의 한 명이고 흔히들 맏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녀의 위로 두 명의 언니들이 있었으나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사망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와 함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쓴 에밀리 브론테와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를 쓴 막내 앤 브론테의 세 사람을 우리는 흔히 ‘브론테 자매’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들 자매는 소설을 출간하기 전에 공동으로 시집(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출판할 때 필명을 사용하였는데 이 필명들이 모두 남자의 이름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이 2013년에 발표한 범죄소설 Cuckoo’s Calling은 ‘Robert Galbraith’라는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고 출판사 편집자였던 David Shelley는 “여자가 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나중에 밝힌 바가 있었다. 이후 조앤 롤링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변호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판매가 부진하던 이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일이 있었다.

조앤 롤링이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와는 달리 오늘의 주인공들인 브론테 자매는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남자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즉 샬롯 브론테는 ‘Currer Bell’을 에밀리 브론테는 ‘Ellis Bell’을 막내인 앤 브론테는 ‘Acton Bell’이란 남자이름을 각각 필명으로 사용하였고 유명한 소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또한 본명이 아닌 그녀들의 필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문학비평가들로부터 관대한 평을 받게 되면서 이들 자매는 필명이 아닌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폭풍의 언덕’의 4판의 서문에서 언니인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는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Averse to personal publicity, we veiled our own names under those of Currer, Ellis, and Acton Bell; the ambiguous choice being dictated by a sort of conscientious scruple at assuming Christian names positively masculine, while we did not like to declare ourselves women, because — without at that time suspecting that our mode of writing and thinking was not what is called ‘feminine’-we had a vague impression that authoresses are liable to be looked on with prejudice 하략”

 

샬롯 브론테가 밝힌 이유를 요약하면 확실하게 남자의 이름이라고 알 수 있는 크리스천 네임이 아닌 애매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남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양심적인 망설임과 여성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여성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혼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백 년도 훨씬 이전인 빅토리아 시대에 살았던 그녀들과는 달리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은 어떨까?

‘남녀 임금격차지수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글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발표한 세계의 성별 격차지수(The Global Gender Gap Index)에서도 대한민국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남녀의 임금격차는 2017년까지 15년간이나 연속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브론테 자매가 필명을 버리고 자신들의 본명을 사용한 것과 같이 우리사회에 아직도 뿌리 깊게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의 벽은 언제쯤 허물어질 수 있을까?

일본 유후인의 한자표기는 由布院과 湯布院 어느 쪽이 맞을까?

일본 유후인의 한자표기는 由布院과 湯布院 어느 쪽이 맞을까?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에 이어서 오늘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유후인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알아보자.

유후인을 표기하는 한자는 湯布院과 由布院 두 가지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인터체인지에는 湯布院이라 표기하고 역이름은 由布院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유후인(由布院)을 다녀온 것일까? 유후인(湯布院)을 다녀온 것일까? 지금부터 그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자.

1955년 2월 1일, 유후인쵸(由布院町)와 유노히라무라(湯平村)를 합쳐 유후인쵸(湯布院町)가 되었고, 2005년 10월에는 오이타군의 하사마마치(挾間町)와 쇼나이마치(庄内町) 및 유후인쵸(由布院町)를 합쳐서 유후시(由布市)가 되었으므로 행정구역상으로 유후인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4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유후인영와제와 유후인음악제를 비롯해 우시쿠이젯큐타이카이(牛喰い絶叫大会)라는 오이타현에서 나는 소고기(豊後牛: 분고규)를 먹고 누가 소리를 크게 지르는가를 겨루는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3대 원칙인 녹색, 공간, 평온을 고수하면서 유후인을 지켜나가고 있다.

일본은 온천법에 근거하여 환경대신이 지정하는 온천을 국민보양온천지(国民保養温泉地)라고 하는데 유후인온천은 1959년 5월 5일 유노히라온천(湯平温泉)과 함께 유후인온천(由布院温泉)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10월 4일에는 유후시내의 츠가하라온천(塚原温泉), 쇼나이온천(庄内温泉), 하사마온천(挾間温泉)까지를 합하여 유후인온천향(湯布院温泉郷: 유후인온센쿄우)로 확대지정되었다.

이에서 보듯 유후인이란 이름의 한자표기는 일본정부에서조차도 由布院과 湯布院을 병용하고 있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유노히라쵸(湯平町)를 포함하면 유후인(湯布院)이고 포함하지 않으면 유후인(由布院)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조차도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적어지면서 지금은 가타카나로 유후인(ゆふいん)이라 표기하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유후인쵸(湯布院町)로 이름이 바뀌기 이전의 유후인쵸(由布院町)의 유후인이란 지명은 예로부터 닥나무와 꾸지나무로 만든 목면(木綿)이 많이 나던 곳이라 해서 유후(木綿: ゆふ)라 불리었으며 일본의 만엽집에는 지금의 유후다케(由布岳)를 유후노야마(木綿の山)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후에 율령제 시대에 정창원(正倉院)과 같은 큰 창고(院)가 생기면서 원(院)자가 붙어서 유후인(由布院)이란 지명으로 되었다.

1952년 유후인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뜻을 모으면서부터 청년단장 이와오 히데카즈(岩男額一)를 중심으로 골프장 건설을 저지하였고 독일 바덴바일러(Badenweiler)를 50일 동안 방문하여 배운 것을 접목하여 지금의 온천마을로 만들었던 역사는 오이타현청에 근무하면서 이를 지켜보았던 키타니 후미히로(木谷文弘)가 쓴 책 ‘유후인의 작은 기적(由布院の小さな奇跡)’에 잘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 구엘공원 세탁부 회랑 명칭의 유래

스페인 구엘공원 세탁부 회랑 명칭의 유래

스페인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코스인 구엘공원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안토니 가우디가 만든 구엘공원에는 세탁부 회랑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세탁부들이 비가 오는 날엔 비를 맞지 않고 오갈 수 있도록 하거나 햇볕을 피해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 설명하는 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틀린 정보라는 것을 알아두자.

먼저 구엘공원의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지도를 보면 세탁부의 회랑이라 부르는 곳을 워시우먼즈 포르티코(Washerwoman’s portico)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세탁하는 여인들이 지나다니는 현관 정도가 되겠는데 아마도 이에서 비롯하여 세탁부들이 지나다기기 위한 회랑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짐작이 된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표기된 구엘공원의 안내판은 워시우먼즈 포르티코(Washerwoman’s portico)를 카탈루냐어로 비아둑테 델라 부가데라(Viaducte de la Bugadera) 또는 포르티코 델라 부가데라(Pórtico de la Bugadera)로 표시하고 있는데 부가데라는 카탈루냐어로 세탁하는 일을 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탁부의 회랑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회랑의 입구에 있는 기둥 중의 하나가 머리에 짐을 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세탁물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출입구를 세탁부의 현관이라 부르고 그 회랑을 세탁부의 회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세탁부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세탁부의 회랑으로 부르게 된 것이란 말은 틀린 정보란 것이다.

그러나 사실 구엘 공원의 진실은 가우디가 직접 밝히지 않는 것들은 어느것 하나도 분명한 것이 없다. 따라서 세탁부의 회랑으로 부르게 된 여인의 기둥도 이집트의 제사용 공물을 지고 가는 오퍼링 베어러(Offering bearers)를 모방한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으나 공원당국의 공식입장은 세탁물을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일본 유후인(湯布院)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맛보는 음식을 들라면 단연코 대회에서 금상(金賞)을 받았다는 금상고로케(金賞コロッケ)일 것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런 조그마한 곳에서 만드는 고로케가 일본에서 1등을 했다니 얼마나 맛이 좋길래 그런 걸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유후인에 있는 금상고로케를 파는 가게 중에서 금린호(金鱗湖:긴린코) 가까이 있는 가게를 소개하는 글이나 광고들이 본점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면 지금부터 유후인의 금상고로케를 판매하는 곳에서 만든 고로케가 금상을 받은 것인지 그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금상고로케의 진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대표팀의 선수로도 뛰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일화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나카타 히데토시는 현역을 은퇴한 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오픈하는 나카타 닷넷 카페(nakata.net cafe)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아프리카 월드컵이 열렸던 2010년에는 하라주쿠역 근처에서 카페를 오픈하였고 그 카페에서 판매한 음식들 중에는 나카타 히데토시가 유후인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금상고로케도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나카타 히데토시가 금상고로케 판매를 위한 승낙을 받았던 곳은 유후인에 있는 가게였을까?

유후인의 금상고로케가 고로케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면 나카타는 그곳의 대표에게 허락을 구했겠지만 의외로 나카타가 찾아가 판매허락을 구한 곳은 야마구치현 (山口県)에 있는 쇼짱고로케(昭ちゃんコロッケ)라는 곳이었다.

나카타 히데토시가 판매를 위해 허락을 얻으려 했던 고로케 가게는 유후인에 있는 가게가 아니라 야마구치현에 있는 가게였던 사실에서 유후인의 금상고로케 가게가 직접 금상을 받은 가게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1947년 야마구치시에서 식육점을 운영하고 있던 다나카 마사미(田中正美)는 본인이 좋아하던 고로케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10여년의 노력 끝에 1957년부터 고로케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판매하는 고로케의 이름을 쇼짱고로케(昭ちゃんコロッケ)라고 지었던 것은 다나카 마사미의 동생이 노래를 잘불러 쇼짱이라 불리웠기도 했고 다나카 마사미도 당시 쇼짱의 모험이란 만화를 좋아해서 쇼짱고로케라 명명하고 아예 상표등록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야마구치현에서는 맛집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바로 고로케대회에 참가하여 금상을 받았던 것이었다.

1987년 열린 ‘제13회 전국식육산업전’ 행사의 일환으로 ‘전국 수제 고로케 콘테스트’가 NHK의 주관으로 개최되었는데 바로 이 대회에서 쇼짱고로케가 금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NHK의 ‘일본열도 지금 6시’란 프로를 필두로 각 방송사와 언론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2004년에는 제조공정을 자동화하고 공장을 증설하게 된다.

유후인에서 금상고로케를 먹어본 사람들은 갓 구워낸 고로케의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좋다는 말들을 하지만 사실 금상고로케는 즉석에서 반죽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급속냉동한 것을 튀겨서 만든다.

쇼짱고로케의 현 대표인 다나카 미토(사진 오른쪽)씨는 2009년 자신을 찾아와 고로케를 판매하게 해달라고 말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유후인의 명물로 이름 높은 금상고로케의 원조는 야마구치현에 있는 쇼짱고로케주식회사이며 유후인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마구치는 물론 히로시마, 시마네, 오카아먀 등지의 매장은 물론 온라인 구매를 통해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얘기의 결론이다.

전쟁영웅도 차별받아야 했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전쟁영웅도 차별받아야 했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이 같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쟁영웅마저도 차별 받는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 얘길 해볼까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군사조직은 지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방위군(SANDF: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이전인 1957년부터 1994년까지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방위군(South African Defence Force)’으로 불렀고, 지금과 같은 공화국체제가 수립되기 이전에 연방을 형성하고 있었던 시기인 1912년부터 1957년 사이에는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군대는 바로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이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부대도 바로 UDF였다. 그러나 인종차별정책으로 1940년 이전까지는 흑인들의 입대는 금지되어 있었고 1940년 이후에도 입대는 허용되었으나 비전투원의 신분만 허용되었기에 군사훈련은 무조건 백인들만 받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에는 12만에 달하는 흑인들이 자원입대를 희망하였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법으로 총기의 지급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전투지원업무만을 맡았던 흑인들에게 지급된 무기라곤 창이 전부였다.

 

그리고 입대한 흑인들은 모두 별도로 조직된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 소속이었고 이 부대는 모두 4개의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시지역 출신 흑인들로 편성된 제4대대(Witwatersrand Battalion) 소속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 요하네스버그에서 멀지 않은 스프링스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잡 마세코(Job Maseko)’는 자원입대한 후 1942년에 일병의 계급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었다.

잡 마세코(Job Maseko)-출처: Roelof Uys 페이스북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 소속의 병사는 1,200명 정도에 달했는데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곳이 바로 독일의 롬멜에 의해서 철저하게 발리는 리비아의 항구도시 ‘토브루크(Tobruk)’였다.

물론 ‘토브루크(Tobruk)’에는 흑인병사들만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의 제2 보병사단을 비롯하여 제11 인도보병사단 및 기갑연대, 근위여단 등의 많은 영연방부대들이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휘관은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소장이었다.

1942년 6월 20일 5시 20분부터 시작된 롬멜이 지휘하던 독일군의 전차부대를 앞세운 공격은 공중에서 ‘융커스 Ju 87과 88’ 폭격기의 지원을 받으며 파죽지세로 몰려왔고 마침내 방어를 하기 위해서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소장은 흑인병사들에게도 총기를 지급하게 되었다.

 

융커스 Ju 88

 

총을 지급받기 전까지는 독일군의 파상공세로 인한 부상병들을 돌보고 운반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었던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 소속의 흑인병사들에게 총을 지급하였다고 해서 전세는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롬멜의 공격이 시작된 다음날인 1942년 6월 21일에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소장은 항복을 하게 된다.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장군

 

항복했을 당시 포로가 되었던 숫자는 모두 3만2천 정도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잡 마세코(Job Maseko)’가 소속되었던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의 흑인병사들 1,2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잡 마세코(Job Maseko)’를 포함해 포로가 된 흑인들은 포로수용소에서도 인종차별을 겪게 되는데 백인들은 유럽인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보내는 대신 흑인들은 이탈리아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것이다.

슈뢰더 소령이 지휘하던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의 경비병들은 포로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고 백인포로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나 흑인병사들은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먹을 것이라고는 하루에 두 번 나눠주는 쿠키가 고작이었다.

이런 와중에 하루는 롬멜이 ‘잡 마세코(Job Maseko)’가 있던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포로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없었는지를 조사하였는데 ‘잡 마세코(Job Maseko)’의 차례가 왔을 때 그는 수용소의 실상을 그대로 폭로했고 그 결과는 롬멜이 돌아간 후 끔찍한 고문과 폭행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왔다.

 

이로 인해 ‘잡 마세코(Job Maseko)’는 어떻게 하든지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동료 2명과 함께 선박에서 화물을 내리는 작업도중에 독일군들의 눈을 피해 그동안 익혀둔 폭발물제조기술로 총알에서 분리한 탄약과 우유캔 및 전선을 이용하여 폭발물을 만든 다음 배에 실려 있던 휘발유통에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작업을 마치고 배에서 내린 후 몇 분 뒤에 마침내 굉음과 함께 폭발하면서 독일군의 배는 침몰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누가 배를 침몰시켰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잡 마세코(Job Maseko)’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뒤 버려진 라디오를 수리하여 소지하고 있었던 ‘잡 마세코(Job Maseko)’는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고 마침내 사막을 가로지르는 탈출을 감행하여 연합군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공을 인정받아 빅토리아 훈장에 추천되지만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보다 낮은 ‘군사훈장(Military Medal)’을 수여 받게 된다.

군에 입대해서도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별도의 조직에서 총도 없이 근무를 해야만 했고, 포로수용소에서도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중노동과 폭력에 시달렸는데 백인이라면 당연히 받았을 빅토리아 훈장마저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란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잡 마세코(Job Maseko)’는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영국에서 이에 대한 재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훈장(Military Medal)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연합군에 합류하였던 ‘잡 마세코(Job Maseko)’는 오래지 않아 귀국하였지만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1952년에 열차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례비조차 없어서 겨우겨우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유해는 스프링스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콰테마(KwaThema)’란 마을에서는 ‘잡 마세코(Job Maseko)’의 이름을 따서 1899년에 설립된 초등학교의 이름을 ‘Job Maseko Primary School’로 바꾸었다고 한다.

국가적인 영웅조차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했던, 이제는 사라져야할 인종차별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지구상의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음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스쿨버스 측면엔 왜 3개의 검정색 선이 있는 걸까?

미국의 스쿨버스 측면엔 왜 3개의 검정색 선이 있는 걸까?

북미 지역에는 모두 4가지 종류의 스쿨버스가 있는데, 모두가 노란색을 하고 있으며, 가장 소형인 타입 A를 제외하고는 측면에 3개의 검정색 선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뉴저지주에서 스쿨버스를 운전하면서 클로보스(ClawBoss)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지난 3월 5일 “스쿨버스 측면에 있는 검은색 선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란 제목의 영상을 올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오늘은 이 영상을 보면서 무슨 이유로 이런 검정색 선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스쿨버스의 측면에 있는 선은 모두 검정색은 아니고, 주(洲)에 따라서 노란색인 경우도 있는데, 노란색이든, 검은색이든 간에 안전을 위하여 스쿨버스의 차체에 3개의 가로로 된 선을 장착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의무사항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선들은 단순히 페인트로 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얇은 차체를 보호하고 충돌 시에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금속으로 된 보강재를 설치하고 그 겉면을 검정색으로 칠한다고 하는데 비용은 1개에 3천 달러 정도라고 한다. 제일 아래의 선은 스쿨버스의 바닥 높이에 맞도록 설치하고, 중간의 선은 좌석 시트 부분의 높이에 맞게 설치해야 하며, 제일 위의 선은 좌석 등받이 윗부분이나 창문의 아래에 맞도록 설치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고가 일어나 스쿨버스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에도 구조대가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하고서, 버스의 측면을 절단할 수 있다고 한다.

※ 아래의 이미지는 모두 유튜브에서 캡처한 것임

 

예를 들어, 제일 아래의 선만 손상되었다면 차내에 있는 학생들은 치명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례(前例)는 어디에서 전래(傳來)되었나?

전례(前例)는 어디에서 전래(傳來)되었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번의 탄핵 정국에서 나오는 기사의 하나를 살펴보면 22년 전 검찰의 소환이 예정된 날 오전 9시, 전두환이 연희동 자택 앞에서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합천으로 내려가자 검찰은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다음날 압송하여 새벽에 안양교도소에 수감한 것을 두고 만약 박근혜가 소환에 불응한다면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할 것이다라는 기사를 작성하면서 검찰로서는 전례에 비추어…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듯이 대한민국의 수많은 곳에는 “전례(前例)가 없어서”라거나 “전례(前例)에 비추어”라는 등등의 표현으로 공무원 또는 위정자들의 태만, 무능을 포장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하나를 살펴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용역이나 물품의 계약에서 당연하게 요구되는 서류 중의 하나가 기존의 거래실적 자료인데, 청년창업을 유도하고 벤처기업을 육성하며 중소기업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정책을 내걸고 있으면서도 이런 전례(前例)에 충실하려는 복지부동이 그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 무능한 공무원들과 정치꾼들의 일면이다.

이제 그 대상을 민간으로 돌려보면, 대기업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조건들이 많이 있지만, 한 재벌기업의 경우에는 담당 이사의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기술개발에만 매진하여온 신생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경우에 거대 재벌기업의 이사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추천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분야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전례(前例)라는 굴레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성실하게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발표 이면에는 언제나 전례(前例)에 비추어 어떻게 처리한다는 것이 일종의 가이드라인처럼 따라다닌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말은 하면서도 언제까지 그 틀을 깨지 못하는 구태를 계속할 것인지, 잘못된 관행을 전례(前例)로 만든 것이 누구인지 논하자면, 아마도 대한민국의 법체계가 만들어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만큼 우리 사회는 구시대적인 생각과 행동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심하겠지만……

박근혜의 수사에 있어서 전례(前例)를 깨더라도 법과 원칙에 따른 처리가 진행되기를 희망하고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정치꾼들과 썩어빠진 고위공직자들이 단단하게만 유지하려고 노력해온 그 알을 깨고 나오기를 촉구한다.

사족: 언제나 무슨 사건이 생기면 그들은 입버릇처럼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그토록 뼈를 자주 깎으면서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교사였던 그녀는 왜 칼을 들었을까?

교사였던 그녀는 왜 칼을 들었을까?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살고 있던 필리핀의 레이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4년 10월 20일 시작된 “레이테 전투”는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필리핀제도 전역을 탈환하게 되었는데 “레이테 전투의 숨겨진 이야기(The Hidden Battle of Leyte)”라는 책을 보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일본군에 의해 어린 소녀들마저 강간당하는 등 극심한 피해와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레이테의 주도인 타클로반(Tacloban)에서 교사로 생활하고 있던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는 일본군에 저항하여 손에 칼을 들고 반군의 무리를 이끌게 됩니다.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녀가 이끄는 반군은 레이테에서 연합게릴라전선을 조직하여 레이테의 해안지역으로 일본군들을 몰아넣음으로써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승리할 수 있는 큰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녀는 가스파이프를 절단하여 만든 산탄총과 볼로(Bolo)라고 하는 칼을 들고 싸웠으며 110명의 병력으로 2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고 이에 일본군은 그녀의 목에 1만 페소의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는 칼을 들고 싸우면서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의 목을 베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1944년 11월 3일 “The Lewiston Daily Sun”을 통해서 알려졌는데 1944년 11월 7일 사진작가 “Stanley Troutman”이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작가 “Stanley Troutman”이 찍은 아래의 사진은 미군이 레이테를 탈환한 후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가 미군 일병 “Andrew Lupiba”에게 어떻게 그녀가 일본군의 목을 베었는지 설명하는 모습이며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1996년이나 1997년경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해병과 새끼고양이의 숨겨진 이야기

해병과 새끼고양이의 숨겨진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미해병 1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종군기자였던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이 한 장의 사진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동료가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이 1,770여 개의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에 전파되어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일약 유명인사로 떠오르면서 “Kitten Marine, Korea”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수백 통이나 받았다고 하는데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이 새끼고양이에게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났다(Born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는 의미에서 “Miss Hap”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구한 새끼고양이의 어미는 레이션을 훔쳐 먹으려다 다른 병사가 쏜 총에 맞아서 죽었고, 남겨진 두 마리의 새끼 중 다른 한 마리는 미군병사에게 깔려 숨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한 새끼고양이가 나중에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를 위기에서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에 종군특파원으로 참전한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1947년 버밍엄뉴스(Birmingham News)에서 경찰을 취재하는 것으로 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한국전쟁 동안에는 해외에 파견된 미군들을 위한 신문인 “Stars and Stripes”의 소속으로 전장을 누볐으며 아래의 사진들이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한국전쟁에서 찍어 기고한 사진들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한국전쟁에서 부상당한 해군병사를 치료하는 위생병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진대회에 응모한 것이 1등에 뽑혀 시상식 참가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가 찍은 사진이 “군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는 출판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기소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법원서류를 해병대 지휘관이 찢어버리고 기소를 면하게 해주었는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는 새끼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사진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믿는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의 이런 생각이 맞는지는 검증할 방법이 없으나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해병대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이기 때문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기소를 면하고 무사히 돌아온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Stars and Stripes”의 도쿄지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새끼고양이와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판문점에서 한국의 정전협정에 관하여 취재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새끼고양이 “Miss Hap”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새끼고양이는 사무실의 마스코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프랭크 프레이터

 

그 후 새끼고양이 “Miss Hap”은 프랭크가 없는 동안 보살펴주었던 프랭크의 동료 콘래드 피셔(Conrad Fisher)가 입양하였고 그가 귀국하면서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한편 새끼고양이를 구한 프랭크는 종전과 함께 귀국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금년 2018년 1월 10일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산타페 국립묘지(Santa Fe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고, 프랭크는 그의 유언에서 자신의 묘지에 꽃을 바치는 대신에 그 돈을 동물애호협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그가 한국전쟁에서 새끼고양이를 구한 행동은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