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이 가져온 의학계의 발전

한국전쟁이 가져온 의학계의 발전

종전선언이 금년 중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아직도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지금,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미군이 운영하던 야전병원을 일컫는 MASH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여 미국 CBS에서 드라마로 방송되면서 한국 하면 미국인들에게 전쟁과 가난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만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미국인들이 가지는 반면 우리 동포들과 연합군들의 피로 얼룩진 전쟁은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동병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는 1단위가 60개의 병상을 기반으로 14명의 의사, 12명의 간호사, 1명의 준사관, 2명의 위생병과 97명의 지원병력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게 되면 병상의 수가 최대 200개로 늘어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MASH는 이동명령이 내려지면 6시간 후에는 모든 이동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훈련되었으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4시간 이내에 진료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야 했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 운영되어왔던 MASH는 2006년에 폐지되었는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의 부상병들은 이전의 다른 전쟁에 비해서 개선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었고 의료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많은 회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한국전쟁 당시 MASH부대원들의 활약상과 한국전쟁은 의학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를 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1955년까지 미군은 남자간호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참가한 간호사들은 모두 여성들이었습니다. 미 간호부대 소속의 간호사들 중에서 한국전쟁에는 약 1,500명 정도가 근무하였는데 그녀들이 근무한 장소는 격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아주 근접한 거리의 열악한 환경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들 간호사들은 미군이 한국에 도착한지 4일 후에 부산에 병원을 설치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12명의 간호사가 대전에 MASH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와 TV드라마의 모델이 된 8,055번째 병원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간호사들은 모두 9개의 훈공장과 120개의 동성훈장, 173개의 약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 외상치료의 변혁

한국전쟁은 혈액의 운반, 혈관수술의 개선, 신장투석의 개혁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혈액의 운반을 위해 유리병을 사용하였으나 그로 인해 수송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쉽게 파손되는 문제가 있었으나 한국전쟁에서는 혈액을 비닐에 담아 운반·보관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혈관수술에 있어서는 2차 대전 당시의 49.6%에 달하는 혈관이 손상되거나 절단되던 비율이 20.5%로 줄어들 정도로 일반화 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전쟁에서는 급성콩팥손상으로 인한 치료에 콜프-브리검 투석기(Kolff-Brigham dialyser)를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90%에 달하던 사망률을 53%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52년이 되어서야 투석기를 사용한 사례가 출간되었는데 이미 그 이전인 1951년에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투석기를 사용하여 생명을 구한 간호사들의 노력은 다시 한 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부상병의 수송에 헬기를 이용하다.

육군대변인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William Howard)의 말을 빌면 “한국전쟁은 부상병 수송원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950년 이전에도 환자의 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일상적으로 헬기를 부상병의 수송에 사용함으로써 헬기수송(medevacs) 인원이 2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군은 물론이고 민간병원에서도 환자의 수송에 헬기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CBS의 드라마에는 비록 한국의 실상이 지나칠 정도로 좋지 않게 표현된 부분도 있었지만 MASH 부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5월까지만 연인원 1만5천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하며 MASH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오토 아펠(Otto Apel)”은 “8,076번째 MASH에서 72시간 이후에는 모든 감각이 상실되었으며 거의 80시간을 논스톱으로 수술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MASH의 활약상이 영화와 TV드라마로 알려지게 된 것은 8,055번째로 설치되었던 대전의 MASH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리차드 혼버거(Hiester Richard Hornberger Jr)”씨가 필명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로 펴낸, 소설(MASH: A Novel About Three Army Doctors) 때문이었습니다.

허리케인 헌터를 제대로 알아보자

허리케인 헌터를 제대로 알아보자

미국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 플로렌스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14명이 넘는다는 보도가 들려오고 있으며 며칠 전에는 이웃나라 일본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고 지금은 필리핀과 중국이 태풍으로 인해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허리케인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허리케인 헌터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곤 하는데 인터넷에 나오는 것을 보면 “기상 관측용 항공기로 태풍의 눈을 관통해 비행하며 그 특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지금부터 “허리케인 헌터”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리케인 헌터(Hurricane hunters)는 현재 미공군예비사령부(AFRC: Air Force Reserve Command) 소속의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와 미국상무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Commerce) 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소속의 “NOAA 허리케인 헌터”의 2개 조직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허리케인 헌터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어디 소속인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허리케인 헌터의 시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3 Surprise Hurricane”이라 불리는 허리케인이 1943년 휴스턴과 텍사스 일대를 강타하자 브라이언 공군기지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영국 조종사들은 훈련기인 “노스아메리칸 T-6 텍산”을 대피시키는 것을 보고 비행기의 안전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노스아메리칸 T-6 텍산

 

이에 교육을 담당하던 조셉 덕워스(Joseph Duckworth) 중령은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내기를 하고 항법사 “랄프 오헤어(Lalph O’Hair)”를 대동하고 허리케인 속을 비행하고 안전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조셉 덕워스(Joseph Duckworth)중령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기상청 소속의 “윌리엄 존즈 버딕(William Jones Burdick) 중위”를 태우고 두 번째로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을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온 것이 허리케인 헌터의 시작이며 1946년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가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를 기상정찰용으로 도입하면서부터 허리케인을 정찰하는 임무를 “허리케인 헌터(Hurricane Hunters)”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그렇기 때문에 통상 허리케인 헌터라고 하면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것은 미국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소속의 “NOAA 허리케인 헌터”입니다.

현재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는 록히드사의 “WC-130J”기종 10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NOAA 허리케인 헌터”는 록히드사의 “WP-3D 오리온” 기종 2대와 “Gulfstream GIV” 1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WC-130J

 

WP-3D 오리온

 

Gulfstream GIV

 

허리케인 헌터로서 태풍 속을 비행하는 조종사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과연 안전한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비행 중의 기체는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부서지지는 않고 겨울철 미국 상공의 초속 150m를 넘는 제트기류에서도 비행을 할 수는 있으나 난기류의 일종으로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가 갑자기 바뀌는 ‘윈드 시어(Wind Shear)’가 더 무섭다.”고 답합니다.

윈드 시어(Wind Shear)

 

또한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하는 느낌은 “자동세차기를 통과하는 동안 차량의 지붕에 고릴라가 몇 마리 뛰어올라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인공위성이 많은 지금도 이런 비행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들의 경험담을 들려줍니다.

1989년 허리케인 휴고가 왔을 때 기상위성이 관측한 바에 따라 “카테고리 3”으로 풍속이 초속 50~58미터 정도일 것으로 알고 고도를 1,500피트로 맞추었지만 실제 허리케인은 “카테고리 5”에 해당하는 초속70미터 이상의 강풍을 동반하고 있는 상태여서 기체의 중심을 잃고 비행기가 하강하는 도중에 엔진도 하나가 꺼져버려서 하마터면 큰 화를 입을 뻔했다고 합니다.

1974년 10월 12일 태풍의 눈을 비행하던 항공기(Swan 38호)와 승무원 6명이 무전이 끊기며 실종되어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 마지막 피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민간 기상업체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에 따르면 허리케인 헌터가 활동한 이래로 지금까지 6기의 항공기와 53명의 인명손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사람이 직접 비행하는 대신에 무인항공기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낙하존데(Dropsonde)”를 투하하고 발신하는 데이터를 기록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는 점 때문에 아직은 대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낙하존데(Dropsonde)

현재 “NOAA 허리케인 헌터”가 운용하는 비행기 중에서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하는 기종은 각각 “미스 피기(Miss Piggy)”와 “커밋(Kermit)”이라고 불리는 “록히드 WP-3D Orion”으로 한국해군에서 운용 중인 “대잠초계기 P-3C”와 같은 기종입니다.

P-3C 대잠초계기

“NOAA 허리케인 헌터”가 오래 된 “록히드 WP-3D Orion”을 아직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기체의 강도가 높고 내구성이 좋아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조종석의 계기판이 모두 아날로그식입니다^^

“록히드 WP-3D Orion”가 허리케인 속으로 들어가면 기상관측을 담당하는 승무원이 손에 든 “낙하존데(Dropsonde)”를 뒤의 구멍을 통해 투하하고 보내오는 데이터를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허리케인 헌터가 무엇인지 알아본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술집을 해방시킨 헤밍웨이와 독일의 스파이 코코샤넬

술집을 해방시킨 헤밍웨이와 독일의 스파이 코코샤넬

이미지 by vasse nicolas,antoine

 

프랑스 파리의 한복판에 있는 리츠호텔은 세계토픽에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호텔입니다.

호텔 소유주의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는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연인이었고 그녀의 마지막 만찬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으며 2018년 1월에는 호텔에 보관 중이던 60억 원 상당의 보석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범인들 중의 3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아무튼 파리의 리츠호텔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던 전력이 알려진 디자이너 코코샤넬을 비롯하여 문학가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곤 하는데 오늘은 프랑스 파리의 리츠호텔과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알아보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편에서 헤밍웨이는 금주법이 시행될 시기에 주류밀수를 하던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낚시를 즐겼다는 것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술을 아주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의 잡지 콜리에(Collier)의 종군특파원으로 전쟁에 참가를 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도 술을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화가 한 가지 있지만 이런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를 않은데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파리 리츠호텔에 있는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에 관한 것인데 흔히들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기 때문에 이 바의 이름이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일 것이라 생각을 하지만 헤밍웨이가 즐겨 찾아서 붙은 이름이 아니고 헤밍웨이가 이곳을 해방(?)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 의해 4년 동안 점령되었던 파리를 프랑스군이 해방시켜야 한다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Eisenhower)장군의 주장에 따라 미군이 먼저 입성할 것을 주장했던 패튼(Patton) 장군의 주장은 뒤로 밀리게 되고 프랑스의 제2기갑사단이 파리 입성의 주력부대로 선정되게 됩니다.

이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프랑스에 와있던 헤밍웨이는 일련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부대가 무기도 없고 조직적이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가 미군의 대령인 것처럼 속이고 랑부예(Rambouillet)로 레지스탕스를 이동하여 주둔시키고 미군의 도움을 받아 기관총과 수류탄 등의 무기로 무장을 시킵니다.

 

중앙이 헤밍웨이, 가장 왼쪽이 OSS의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

 

당시 파리에만 2만여 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무장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독일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꺼려하고 대신에 독일군이 사용하는 차량의 바퀴에 구멍을 내거나 통신선을 자르는 등의 소극적인 활동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드디어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군과 일부 미군이 입성함으로써 파리는 해방을 맞게 되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가 있는 리츠호텔에 처음으로 입성한 사람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였던 것입니다.

 

그가 지휘하던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OSS의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와 미육군 대령이었던 마샬(Marshall)과 함께 8월 24일 랑부예(Rambouillet)에서 파리로 진격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카페를 발견하면 헤밍웨이는 “술을 찾았는가?(Marshall, for God’s sake, have you got a drink?)”라고 마샬 대령에게 소리쳐 묻곤 하였다고 마샬(Marshall)은 회고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파리로 진격했던 레지스탕스 대원은 헤밍웨이가 “나는 파리에서 최초로 리츠를 해방시킨 사람이 될 것이다(to be the first American in Paris and liberate the Ritz)”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이라 그들이 파리로 가는 도중에 발견한 것이라곤 한 병의 스카치와 몇 병의 샴페인에 불과하였습니다.

드디어 리츠호텔이 있는 캄봉거리(Rue Cambon)에 차량이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뛰어내리면서 헤밍웨이는 “리츠를 해방시키러 왔다(Come to liberate the Ritz.)”고 말했다고 당시 호텔의 중역이었던 클로드 라울렛(Claude Roulet)은 회고하고 있으며 이전부터 헤밍웨이를 알고 있었던 당시의 매니저인 클로드 오젤로 (Claude Auzello)는 헤밍웨이에게 “총을 두고 들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특히 클로드 오젤로 (Claude Auzello)는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코코샤넬로 인해서 큰 불행을 겪었는데 그녀의 아내 블랑쉬 오젤로(Blanche Auzello)는 호텔에서 취득한 정보를 연합군과 레지스탕스에게 전달하거나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들의 탈출을 돕는 등 독일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코코샤넬의 밀고로 유태인이란 사실이 발각되어 게슈타포에 체포, 고문을 받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악명이 높았던 “Fresnes Prison”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블랑쉬 오젤로가 구금될 당시에 공산주의자였던 그녀의 친구도 함께 붙잡혔는데 블랑쉬는 친구에 대한 정보와 그녀가 유대인인라는 것을 실토한 후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호텔을 떠나 은퇴하기를 희망했던 남편과는 달리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호텔을 떠나기를 극구 반대했던 블랑쉬는 그녀의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가자 1969년 5월 29일 남편 클로드 오젤로(Claude Auzello)가 권총으로 그녀를 먼저 죽인 다음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블랑쉬 오젤로(Blanche Auzello)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는 “파리에서 리츠호텔에 머물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즐겨 찾았던 리츠호텔에 있는 지금은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로 이름 붙여진 술집은 이전까지는 그냥 자그마한 바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파리에 입성한 다음날인 8월 26일 헤밍웨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텔의 바에서 그가 좋아하는 술을, 그와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어윈 쇼(Irwin Shaw)를 비롯한 언론사의 기자들과 어울려 마셨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리츠호텔의 작은 바는 1994년부터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로 불리게 되었으며 2012년 보수공사를 시작하면서 문을 닫았다가 2016년 6월 8일 다시 개장함과 동시에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는 그의 흉상과 그가 즐기던 낚시를 하는 사진들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리츠호텔에는 총 4개의 바가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입니다.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낚시와 어업에 대한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도중에 1979년 8월 18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함지박 타고 바다낚시’란 제목의 기사를 발견했는데 내용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섬마을 어린이들에게는 바다를 누빌 배가 필요 없었다. 높이 50㎝에 직경 70㎝가량인 둥그런 물통이 배를 대신했다. 속칭 다라이라는 이 플랙스틱 함지박 안에 올라앉아 길이 2m가량의 대나무막대기를 노삼아 양쪽으로 저어 어디든지 오갔다. 그러면서 손낚시로 고기를 낚아 집안의 밥상에 올릴 찬거리를 마련했다.

집 앞 발아래의 바다가 이들의 여름철 놀이터이자 어장. U자형의 해안선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오른쪽에 조선, 왼쪽에 입석부락을 두르고 그 중심인 바다 복판에 8자형의 작은 옥섬이 건너다보인다. 세 부락에서 옥섬까지의 거리는 2백m 안팎이고 그 사이의 수심은 깊어야 30m. 이 일대를 마음대로 타고 다니며 놀다 상·하오의 밀물 때를 맞추어 도미와 도다리, 볼락어 등 고기를 하루 20~30마리씩 낚고 있는 것이다.

안전장비도 없이 수심 30m의 바다에서 위험한 낚시를 하는 것을 기사로 쓴 것에서 당시의 안전불감증을 엿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바구니를 타고 낚시를 하는 얘기에만 집중해보자.

바구니 보트, 또는 바구니 배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의 관광상품이 된 뚱차이(thúng chai)를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 베트남 어부들이 배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만든 뚱차이는 흔히들 영어로는 basket boat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이런 바구니 형태의 배를 가리키는 말로는 코러클(coracle)이란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웨일스어에서 유래하여 16세기 초에 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하는 coracle이란 말은 시저가 영국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림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는 존 카셀(John Cassell)이 설립한 출판사에서 펴낸 책(Cassell’s Illustrated History of England)에 남아있는 아래의 그림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런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상품으로도 판매 중으로 부르는 이름은 파리살(parisal)이다.

 

그밖에도 기원전 450년경 헤르도투스가 바빌론을 방문한 뒤 기록한 이라크의 바구니 보트가 역사적으로는 시저 다음의 기록이라 생각되는데, 영어로는 쿠파로 부르며 다른 나라의 것들에 비해 아주 큰 것이 특징으로 노아의 방주가 쿠파의 일종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 참고: BBC의 Coracles: The surprising history of Britain’s strangest boat

 

신문기사로 전해지는 함지박낚시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낚시를 즐기고 있겠지?

빵 클립(Bread clip)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 클립(Bread clip)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을 담은 봉투를 보면 플라스틱으로 밀봉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흔히 빵 클립이라고 부르는 이 작은 플라스틱 제품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 클립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회사로는 미국의 퀵록(Kwik Lok Corporation)과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럽의 슈테(Schutte bagclosures BV)가 대표적인데 두 회사 모두 제품명으로 백 클로저(Bag Closures)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빵클립으로 불리고 있는데 빵 포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품의 포장에 사용되고 있는 빵 클립(Bread clip)이라 불리는 백 클로저(Bag Closures)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195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식품의 포장기계 사업을 하고 있던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기내에서 땅콩을 먹기 위해 봉지를 뜯었다.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

 

그러나 땅콩 봉지를 다시 밀봉할 수 없게 되자 지갑을 뒤져 기한이 만료된 카드를 꺼내고 주머니칼(pen knife)로 카드에 구멍을 뚫은 다음 봉지를 다시 밀봉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은 워싱턴에 있는 사과농장으로부터 사과를 봉지에 담은 다음 쉽게 밀봉하는 방법이 없는지 의뢰를 받게 되는데, 그가 기억해낸 것이 바로 비행기에서 땅콩 봉지를 다시 밀봉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퀵록(Kwik Lok Corporation)의 일본지사에서는 사과농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하고, 영문판 위키피디어에서는 과일 포장업체인 퍼시픽 프루트(Pacific Fruit)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퀵록에서 밝히는 자사의 역사에 더 신뢰가 간다.

아무튼 플로이드 팩스턴은 그의 기억을 되살린 아이디어를 상품화시켜 1950년대 초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던 식품의 자동포장에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빵 클립(Bread clip)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특허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는데 그 결과 클립(Bread clip)을 세상에 선보인지 5년 뒤인 1957년에 네덜란드에서 요하네스 슈테(Joannes Schutte)란 사람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의 집 지하실에서 빵 클립(Bread clip)이라 불리는 백 클로저(Bag Closures)를 만들어 빵집에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슈테(Schutte bagclosures BV)가 있도록 만든 모체였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열등감

미국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열등감

우리는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일본의 아베총리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에 이어서 일본의 대기업 7개를 미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해도 내가 보기엔 아베 정권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해바라기와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나는 종종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두 번에 걸친 일본의 항공모함 개조에 관한 글에서는 미군을 위한 것이라는 개인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분명 일본으로서는 최선의 정치적·외교적 선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1853년 개항을 요구한 이후 1854년에 미국과 일본의 국교가 맺어지는데 1941년 진주만공습을 지휘한 일본 제국해군의 연합함대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했던 독백이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

 

“진주만 공습이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독백은 자라면서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자라고 있었던 열등감의 발로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태평양전쟁의 패배 이후 미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킹콩을 이기기 위해 영화 고질라를 만든 것처럼 지금의 아베정권에게도 이와 같은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이란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노자키 분조(野崎文蔵)’는 ‘오사나에키반코쿠바나시(童絵解万国噺)’라는 책을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린 삽화를 넣어 발간하였다.

 

책의 줄거리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국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독립과 건국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타국의 역사를 이처럼 과장되게 묘사한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만의 그 무엇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들의 열등감이라고 본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童絵解万国噺)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請求記号:文庫11_a0380_0002

※ 童絵解万国噺 上 三編

우선, 미국은 독수리로, 뱀은 영국을 상징하여 서로 싸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제1대 부통령이자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John Adams)’가 칼을 들고 거대한 뱀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한 번에 여러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능숙하게 물리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 주변에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공격하는 사람들 중에 흑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개항을 요구했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의 배에 있던 흑인들의 모습을 본 영향도 있겠지만 영국인들이 자유를 약속하며 미국과의 전쟁에 흑인들을 대동한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서 후퇴한 존 애덤스는 다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힘을 합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마치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대포를 맨손으로 들고 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은 호랑이의 목을 조지 워싱턴이 발로 밟고서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음에도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일본인의 눈에 비친 미국의 강대함과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바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즐겨 읽는 삼국지(三國志)에도 현실적이지 않는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중국인이 쓴 자국의 소설이고 ‘노자키 분조(野崎文蔵)’가 쓰고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림을 그린 ‘오사나에키반코쿠바나시(童絵解万国噺)’라는 책은 일본인이 쓴 미국의 건국이야기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현안(懸案)들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아베총리의 발언과 오늘 소개한 책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청와대 미남석불(美男石佛)의 수난은 언제쯤 끝날까?

청와대 미남석불(美男石佛)의 수난은 언제쯤 끝날까?

청와대를 개방한 지 하루만인 5월 11일 청와대 관저 뒤편에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일명 미남석불로 불리는 불상 앞에 놓인 불전함이 파손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유는 종교적인 것이라고 알려졌다.

경주문화재제자리찾기운동본부는 이 불상을 경주로 반환하기 위한 운동을 펼치고 있는데 오늘은 미남석불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불상의 영욕(榮辱)을 추적해본다.

인용하는 신문의 기사 중 한자표기만 있는 것은 한글을 병기하였고, 일제 강점기 일본식 한자표기를 따른 기사는 그대로 인용하였으며 스크롤의 압박이 심하다는 안내와 함께 얘기를 시작해본다. 1967년 4월 30일 조선일보 3면에는 “이번에 石佛(석불)이 말썽 낳고…”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평소에는 관심조차 없던 것들이 선거(選挙) 때만 되면 정치적(政治的)으로 곧잘 이용(利用)되곤 해왔는데, 이번에는 청와대(靑瓦臺) 약수(薬水)터에 있는 석불(石仏) 하나가 말썽의 씨가 됐다.

이 석불(石仏)은 무학대사(無學大師)가 서울을 이왕조(李王朝)의 수도(首都)로 자리를 정할 때 세운 보잘것없는 것인데 이승만(李承晩)씨나 윤보선(尹潽善)씨가 대통령(大統領)으로 재임(在任)했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고, 지난 19일 청와대(靑瓦臺)를 개방한 이래 몰려온 45만 명의 상춘객(賞春客)들에게 애완(愛玩)되었던 것.

그런데 선거(選挙) 때라서 그런지 박정희대통령(朴正熙大統領)과 이 석불(石仏)을 관련시켜, 박대통령(朴大統領)은 불교(仏敎)와 가깝다느니, 따라서 기독교(基督敎)를 싫어한다느니 하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고 청와대비서실(靑瓦臺祕書室)은 잔뜩 긴장.

한 비서관(祕書官)은 『어린이 상춘객(賞春客)에게 매년 한 자루씩 주어오던 연필 한 자루와 공책 한 권도 금년에는 선거(選挙) 때라고 해서 안주고 있는데, 석불(石仏)을 정치적(政治的)으로 관련시키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푸념.

바로 이 기사에 나오는 석불이 오늘의 주제인 미남석불인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도 이전부터 해오던 봄철 꽃놀이 시기의 청와대 개방을 중지하지 않고 실시했으며 이에 관한 자료는 1963년 4월 27일에 제작된 대한뉴스 제414호로 알 수 있는데 여기에도 오늘 포스팅의 주제인 미남석불이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간첩 31명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이른바 1·21사태가 일어난 이후론 청와대를 일반에 개방하는 행사는 더이상 개최되지 않게 되었고 1974년 1월 15일자로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긴 했으나 시민들은 미남석불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1994년 10월 28일자 조선일보에는 잇따른 사건사고가 김영삼대통령이 미남석불을 치워버리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난무해지자 이를 해명하기 위해 관저 뒷산에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청와대 출입기자들에게 공개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장로인 김영삼 대통령의 종교문제가 가라앉지 않자 청와대는 조계종 스님 8명을 초청하여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에 관한 기사는 1996년 9월 7일자 한겨레의 23면 기사로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종교적인 이유로 언론을 통해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미남석불은 2018년 4월 20일 보물 제1977호로 승격되었고 새로운 정부의 출범과 함께 일반에 공개되었던 것이다. 경주에 있던 미남석불은 어떻게 해서 청와대로 옮겨졌던 것일까?

이에 대한 단서는 경향신문을 정년퇴임하고 현재는 이기환의 역사흔적을 기고하고 있는 이기환 경향신문 문화부 선임기자가 쓴 기사를 보면 1934년 3월 29일 매일신보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그래서 기사를 찾아보았다.

釋迦如來像(석가여래상)의 미남석불(美男石佛) 櫛風浴雨(즐풍욕우) 참아가며 총독관저(總督官邸) 大樹下(대수하)에, 오래전 자취를 감추었던 경주의 보물, 博物舘(박물관)에서 垂涎萬丈(수연만장)이란 대소제목으로 시작하는 기사는 이에 총독부박물관에서는 『어떻게 되어서 그 미남석불이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아마 제1회 재등(齋藤) 총독시대에 어떤 우연한 일로 관저로 올라온 듯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박물관 홀에 진열되어 있는 약사여래(藥師如來)와 경주의 같은 골짜기에 안치되어 있던 것인데 지금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애석하여 견딜 수가 없습니다』하고 적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다는 그들의 말은 거짓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인 경성일보(京城日報)의 1934년 3월 28일자에서는 매일신보보다 하루 앞서 미남석불에 대한 기사를 게재하고 있는데, 그 내용 중에는 “석불의 행방을 온 힘을 다해 찾던 27일에야 총독관저에 안치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는 것이 있다.

 

바로 이것이 거짓말이란 것으로 1934년 3월에 석불이 발견되기까지의 행적을 추적해보자.

조선총독부의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는 1912년 11월 7일부터 9일까지 2박3일의 일정으로 경주를 방문하였다.

그 목적은 경주에 산재한 조선의 보물을 수탈하기 위함이었는데 봉덕사종 앞에서 찍은 당시의 사진은 1912년 11월 14일자 매일신보에 실려있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경주분관장을 맡기도 했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당시 경주공립보통학교 교장으로 있었고 그보다 앞서 초대 경주분관장을 맡고 있던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경주를 방문한 데라우치를 안내했는데 이자는 박물관장이라기보다는 도굴꾼이란 명칭이 더 어울릴 정도의 인물이었다.

모로가 히데오에 대해서는 조금 뒤 자세히 알아본다.

아무튼 오사카 로쿠손(大坂六村)이란 필명으로 특히 신라의 문화와 경주의 유물과 고적에 관한 집필을 많이 했던 오사카 긴타로(大坂金太郞)는 1934년 3월 31일자 경성일보와의 인터뷰에서 1912년 데라우치가 경주를 방문했을 때는 이미 미남석불은 경주금융조합의 이사였던 고다이라 료조(小平亮三)의 집에 옮겨져 있는 상태였고, 이것을 본 데라우치가 감탄을 거듭하자 고다이라가 총독관저로 보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2017년 12월 3일자 한겨레신문은 단독으로 정인성 영남대 문화인류학과 교수가 발견한 미남석불과 관련한 사진을 공개했는데 이에 따르면 1913년 2월 남산의 총독관저로 옮겨온 석불 앞에서 절을 하고 있는 데라우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데라우치 이후 조선총독들은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부터는 경주를 방문하면 시바타여관에 머물곤 했는데 여관 앞에는 구리하라(栗原)라는 골동품가게가 있었고, 골동품을 구하러 온 사람들이 돈이 많을 것 같으면 시바타여관의 주인인 시바타 단쿠로(柴田団九郎)를 연결해주었고, 시바타 단쿠로는 그들을 다시 경주박물관장이던 모로가 히데오에게 연결시켜주는 커넥션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이 신라의 문화재를 밀반출하는 일이 얼마나 잦았고, 얼마나 크게 이루어졌으면, 1933년 4월 28일에는 모로가 히데오가 경찰에 구속되기에 이르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모든 신문들이 앞다투어 대서특필하였고 동아일보는 3꼭지로 나누어 기사를 싣고 있는데 그 제목을 한 번 보도록 하자.

1. 신라(新羅)때 진품(珍品)을 도매(盜賣) 玉虫帳(옥충장)도 부지거처(不知去處) 【경주박물관장장물압수사건(慶州博物舘長贓物押收事件)】 속칭(俗稱) 경주왕(慶州王)의 말로(末路).

2. 발각(發覺)의 단서(端緖)는 고적도굴사건(古蹟盜掘事件)

3. 경주(慶州)를 좌우(左右)튼 유일(唯一)의 권력가(權力家)

 

재판에 넘겨진 모로가 히데오는 보석으로 석방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과 함께 벌금도 1심보다 크게 감액된 2백원이란 솜방망이 처벌을 받게 된다.

재판과정에서 조선의 3대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가 골동품 밀매업자에 불과한 모로가 히데오를 위로하는 손편지를 직접 보냈다는 것이 공개되었는데 이러한 것이 재판에 영향을 미쳤으리란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사이토 마코토는 1920년 11월에 경주를 처음 방문하였는데 앞에서 얘기한 시바타여관에 묵으면서 모로가 히데오를 알게 되었고 이후로 모로가 히데오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촉탁이 되어 경주의 고적에 대한 보존업무를 담당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1926년에는 경주박물관장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초대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는 이임하기에 앞서 조선의 유물을 대장에 기록하고 마음대로 이동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칙을 제정하였는데, 정작 그의 관저에 보관하고 있던 미남석불은 대장에 수록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는 이것을 일본으로 가지고 가려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로는 미남석불이 유물을 관리하는 장부의 기록에서 누락되었다는 것을 모로가 히데오가 경찰의 수사를 받는 사건이 터지고 나서야 조사에 나서면서 총독관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미남석불을 관저로 반입한 뒤 승려를 불러 예불을 올릴 정도로 총독의 관심을 받았던 유물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이처럼 수난의 역사를 지닌 미남석불은 청와대의 개방과 함께 석불 앞에 놓인 불전함이 파손되는 수모(?)를 겪었다.

일제강점기, 본향을 떠나야만 했던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을 이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어떨까?

일본인이 디자인한 의상을 “한복을 재해석한 것을 입고 청와대에서 화보를 촬영한 것”이라 답하는 문화재청장과 같은 사람들이 제대로 관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기에 하는 말이다.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떠 있을까?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떠 있을까?

가끔 가까운 시화방조제에서 밤낚시를 할 때면 밤하늘을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곤 하는데 하루 24시간 언제나 전 세계의 하늘을 날고 있는 비행기는 얼마나 될까? 하고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다.

오늘은 자주는 아니어도 멀리서 오는 손님을 마중하기 위해서 가끔은 공항으로 나갈 일이 있을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이트(앱도 있음)를 소개할까 한다.

실시간으로 비행기를 추적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flightradar24에서는 2019년 7월 24일 전 세계에서 22만5천 회의 비행이 이루어져 공식집계 이후로 가장 많은 비행기록을 세운 날이라고 발표하였다.

Yesterday, we tracked over 225,000 flights in a single day for the first time. Follow more than 20,000 flights right now at https://t.co/A4mWRJu9Vipic.twitter.com/Pxh21WiAy3

— Flightradar24 (@flightradar24) July 25, 2019

과연 하늘에는 얼마나 많은 비행기들이 날고 있는지 실시간으로 알아보면 글을 작성하는 지금 현재 아래의 사진과 같이 수많은 비행기들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주변을 비행하고 있는 항공기들은 지금 현재 아래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살펴보면 아시아나항공의 OZ721편은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홍콩을 향해 운항 중임을 볼 수도 있다.

또한 민간항공사가 가장 많은 미국의 하늘은 역시나 셀 수 없이 많은 비행기들이 운항 중인 모습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단지 이처럼 많은 비행기가 하늘을 날고 있다는 것만 확인하는 것에서 그친다면 이것을 유용한 앱이라고까지는 얘기할 수 없는데 해외여행이나 공항에 픽업 나갈 때에는 비행기의 실시간 운항정보와 도착시간 등을 정확히 알아볼 수가 있다는 점이 이 사이트(앱)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한항공 KE018편으로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는 친척이 있어서 마중을 나가야 한다면 도착시간은 스케쥴(17:20)보다 빠른 16:53분에 도착하는 것으로 대한항공의 홈페이지에서 확인되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도록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flightradar24를 통하면 더욱 상세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검색창에 KE018을 입력하면 현재 북태평양 상공을 비행 중임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항공의 정보와는 달리 17:09분에 도착할 것이라고 보여주고 있다.

또한 KE018의 기종은 에어버스 A380기종이며 고도 38,000피트에서 시속 875㎞의 속도로 비행하고 있다는 사실도 실시간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이것은 ADS-B라고 하는 자동위치전송장치와 다변측정 항공감시 시스템인 MLAT(Multilateration)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으로 군용항공기는 제외한 헬기를 비롯한 자가용 비행기 등 모든 민간항공기를 추적하여 그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국민들의 일본관광 자제 움직임이 증가하고 있는 요즘, 오늘도 인천공항을 출발한 대한항공의 KE723편은 일본 오사카를 향해서 날아가고 있다.

비상탈출하는 조종사를 공격하는 것은 범죄행위

비상탈출하는 조종사를 공격하는 것은 범죄행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네덜란드 수복작전인 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를 보면 미군 제101공수사단의 부대원들이 낙하산으로 강하하는 도중에 독일군의 사격으로 무수히 전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전시와 평시를 불문하고 군용기에서 비상탈출하는 조종사를 공격하는 것은 제네바협약에 의해 범죄행위로 규정되고 있습니다.

1977년 6월 8일 제네바협약에 추가된 제1의정서의 내용에는

1. 조난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하강 중인 자는 공격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2. 조난 항공기에서 낙하산으로 하강 중인 자는 적대국의 영토 내에 착륙하여 명백한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한 항복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3. 공수부대는 이 조항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명은 귀중한 것이지만 전시라는 특수한 상황 아래에서도 항공기에서 벗어난 조종사는 전투원이 아닌 비전투원이기 때문에 보호하여야 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는데 이런 규정은 미군의 “지상전교범2-10”에서도 비행기에서 탈출한 조종사는 비전투원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의 규정과 교범이 마련되기 전인 2차 대전 당시에 이와 관련한 “찰리 브라운과 프란츠 스티글러 사건(Charlie Brown and Franz Stigler incident)”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는데 적으로 만났던 미국과 독일의 조종사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전쟁이 끝난 후 40년 만에 극적인 상봉을 하게 되고 2008년 두 사람이 죽을 때까지 우정을 나눈다는 이야기인데 오늘을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1943년 12월 20일 찰스 브라운(harles “Charlie” Brown)은 B-17폭격기를 조종하여 독일의 브레멘 인근에 있는 포케불프(Focke-Wulf) 제조공장을 폭격하러 출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독일조종사 프란츠 스티글러(Franz Stigler)는 메서슈미트(Messerschmitt)Bf-109를 몰고 이를 격추시키러 출동하게 됩니다.

드디어 프란츠 스티글러(Franz Stigler)는 찰스 브라운(harles “Charlie” Brown)이 조종하는 B-17폭격기를 발견하게 되고 이것을 격추하게 되면 그날 이미 2대의 B-17을 격추시킨 전과를 올리고 있던 프란츠 스티글러(Franz Stigler)는 독일의 “기사십자 철십자장(Knight’s Cross)”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프란츠 스티글러(Franz Stigler)는 B-17을 공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브라운의 B-17이 이미 대공포의 공격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고 있었고, 탑승하고 있는 승무원들도 상태가 좋지 않음을 발견하고 그는 북아프리카에서 근무하는 동안 당시 사령관으로부터 들었던 훈시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사령관 구스타브 뢰델(Gustav Rödel)은 “자네는 처음도 전투기 조종사고 마지막도 전투기 조종사다. 그런 자네가 낙하산을 타고 내려가는 사람을 쏘는 것을 보게 되거나 그런 사실이 있음을 듣게 된다면 내가 자네를 쏠 것이다.”라고 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스티글러는 공격을 하는 대신에 브라운에게 착륙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브라운이 거절함에 따라 스티글러는 브라운의 비행기가 무사히 중립지역인 스웨덴으로 갈 수 있도록 독일 영공에서 B-17을 호위해줍니다.

 

그러나 서로 의사전달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브라운은 중립지대인 스웨덴이 아닌 기지가 있는 영국의 시싱비행장(Royal Air Force station Seething)으로 비행기를 몰았고 북해의 해안에서 스티글러는 브라운에게 경례를 하고 돌아갑니다.

스티글러의 배려와 도움으로 무사히 기지로 귀환한 브라운은 전쟁이 끝나고 캐나다에 이주하여 살고 있던 스티글러를 1990년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 감사를 전하고 둘은 우정을 나누다가 2008년 심장마비로 3월 22일 스티글러가 먼저 세상을 떠나고 그 후 11월 24일에 브라운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오른쪽이 브라운, 왼쪽이 스티글러, 가운데는 화가 보이트

러시아 MiG-35 개발의 뒷이야기

러시아 MiG-35 개발의 뒷이야기

러시아가 보유하고 있는 전투기는 미그(MiG)기와 수호이(Su)기로 나눌 수 있는데 우스갯소리로는 설계국이 다르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도 하지만 러시아의 전투기가 미그기와 수호이기로 양분되게 된 이면에는 미국의 공격을 방어하고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습니다.

현대에 이르러 러시아의 전투기는 러시아 본토로 공격해오는 제공전투기가 아닌 공격기를 방어하기 위한 방공전투기인 미그(MiG)기와 적의 제공전투기와 기타의 항공기와 함대를 공격하기 위한 제공전투기인 수호이(Su)기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러시아의 전투기가 구분되어 생산되는 계기가 된 것은 미국이 개발한 “SR-71 블랙버드”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의 록히드사가 개발한 전략정찰기인 “SR-71 블랙버드”는 마하 3.3의 속도로 러시아를 정찰하고 그 정찰정보를 바탕으로 최초의 초음속 폭격기인 “B-58 허슬러”와의 양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SR-71 블랙버드

이처럼 미국이 새롭게 만든 공격시스템을 러시아의 기존 전투기로는 방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는 서둘러 MiG-25를 개발하게 됩니다. MiG-25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전투기로서 최고속도는 마하 3.2를 낼 수 있었는데 미국의 초음속폭격기 “B-58 허슬러”를 요격하기 위함이 제일 우선순위가 아니라 “SR-71 블랙버드”를 레이더로 탐지한 다음 MiG-25가 추격하여 대공미사일로 파괴하는 것이 제일 우선순위였습니다.

MiG-25

이렇게 러시아가 “B-58 허슬러”의 요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SR-71 블랙버드”를 격추시킬 수도 있는 MiG-25를 개발하게 되자 미국은 새로운 전략을 수립해야만 했는데 이렇게 나온 전략이 바로 공중급유를 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B-58 허슬러

미국은 폭격기의 항속거리는 길지만 이를 호위하는 전투기는 짧기 때문에 공중급유기를 이용하여 러시아의 영공 밖에서 급유를 한 다음 저공으로 러시아의 본토에 접근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는데 이는 높은 고도에서 아래를 레이더로 관측할 경우 적을 발견하는 능력, 즉 룩 다운(look down) 능력이 떨어지는 MiG-25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룩 다운(look down)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한 것은 1976년 MiG-25를 몰고 일본에 착륙하였다가 미국으로 망명했던 이른바 “빅토르 벨렌코 망명 사건”으로 인해 일본이 조기경보기 “E-767” 4대를 도입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1976년 9월 6일 러시아로부터 날아오는 항공기를 지상레이더로 탐지한 일본은 당시 최신예 전투기였던 F4를 발진시키지만, 이후 지상레이더와 F4에 탑재된 레이더에서 미확인 항공기는 사라지고 일본의 항공자위대가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나중에 MiG-25로 밝혀진 미확인 항공기는 홋카이도의 하고다테 상공을 선회한 다음 공항에 착륙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이를 계기로 일본은 조기경보기 4기를 도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E-767 조기경보

한편 MiG-25의 또 다른 단점으로 드러난 것은 고고도 전용의 엔진설계로 인해 저공비행에서의 연비가 아주 나쁘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러시아는 이런 저공비행의 능력과 연비를 대폭적으로 향상시킨 MiG-31을 개발하게 되는데, 러시아가 이처럼 방공을 목적으로 하는 전투기와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한 전투기로 구분하여 개발하게 된 배경은 EU의 여러 나라와 국경을 많이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 배경과 미국의 최신폭격기와 전투기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함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방공권과 제공권의 개념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결과 현재의 작전개념으로는 수호이(Su)기 1대와 여러 대의 미그(MiG)기로 구성된 네트워크를 강화한 전투군을 형성한 다음, 여러 대의 미그(MiG)기로부터 얻은 정보를 통합하여 수호이(Su)기가 최적의 공격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전술이 수립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전술에 따라 전방에 배치되는 미그(MiG)기도 전투력의 향상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개발된 것이 바로 MiG-35였던 것이며 MiG-35는 스텔스 전용으로 만들어지지는 않았지만 엔진의 배기가스를 혼입하지 않고 적외선 배기도 최소화하는 등 4세대 전투기에 비해서는 높은 스텔스 기능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는 이미 MiG-35을 대체할 MiG-41의 개발에 나서고 있고 Su-35의 후계기인 Su-37의 보급에 나서고 있으며 5세대 스텔스 전투기인 Su-57을 개발하여 개량에 나서고 있고, 중국은 비록 짝퉁이라고 비난은 받지만 J-20과 J-31의 보급과 개발에 경주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F-35를 도입함으로써 영공을 수호하고 제공권을 확보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은 현재 6세대 전투기의 개발에 힘을 쏟고 있고 6세대 전투기는 수출하지 않을 것을 천명하고 있습니다.

이와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각국의 항공전투능력이 6세대 전투기로 옮아가게 되면 한국을 비롯하여 미국의 호구로 그 역할을 크게 하고 있는 일본은 어떤 모습일까요? 시리아에서의 철군을 발표한 미국을 보면서 자국의 안보를 타국에 의존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다시 한 번 돌아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