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서 발견한 페라리 디노 246GTS

땅속에서 발견한 페라리 디노 246GTS

현재의 금액으로 11만 달러 정도가 한다는 페라리 디노 246GTS가 땅속에 파묻힌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누가? 왜? 이런 짓을 했을까요?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인 1978년 2월, 로스앤젤레스의 웨스트 아테네에 살고 있던 아이들이 흙을 파면서 놀고 있다가 땅속에서 무언가를 발견하고 바로 보안관에게 신고를 했고 현장을 조사한 경찰은 굴착기를 동원하여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땅을 판 후 그들이 발견한 것은 1974년에 제작된 “페라리 디노 246GTS”였는데 당시의 금액으로 22,500달러인 이 차의 현재가치는 11만 달러 정도에 달한다고 하며 발견되기 4년 전에 도난신고가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차는 1974년 10월, 캘리포니아에 거주하는 로센도 크루즈(Rosendo Cruz)라는 사람이 구입하였고 2달 만에 도난신고가 되었다고 로스앤젤레스 타임즈는 보도하고 있습니다.

흙속에 파묻힌 채로 발견된 “페라리 디노 246GTS”는 오토위크(AutoWeek)의 직원이었고 현재는 박물관의 큐레이터로 활동하고 있는 “그렉 샤프(Greg Sharp)”의 조사에 의해서 1986년에 세부정보가 공개되었는데 이 차는 로센도 크루즈(Rosendo Cruz)가 부자들과 유명인들을 단골로 두고 있던 “Hollywood Sports Cars”에서 아내의 생일선물로 구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그의 아내가 차를 도난당한 1974년 12월 7일은 그들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고 하는데, 그들은 결혼기념일 당일 “브라운 더비(Brown Derby)”라는 식당에서 저녁을 즐기기 위해 차를 몰고 갔으나 주차장에 주차하지 않고 노상에 주차를 했고, 저녁을 마치고 나오자 자동차는 사라지고 없었다고 합니다. 조금 냄새가 나지 않습니까?

 

그 후 경찰수사는 도난사건으로 종결되었고 부부는 보험회사로부터 전액을 보상 받았는데 4년 후 땅속에서 이 차가 발견되면서 세계에 1,274대 밖에 없는 희소성으로 인해 차량의 소유권이 있는 보험회사에 구매문의가 쇄도했다고 합니다.

이에 보험사는 차량을 경매에 붙였지만 “패서디나(Pasadena)”의 창고에 보관하던 도중에 부품을 도난당하는 바람에 입찰과 재입찰을 반복하여 현재 가치로 18,000~32,000 달러 사이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12년 이런 내용을 웹사이트 Jalopnik에 소개한 마이크 스페넬리(Mike Spinelli)에게 “브래드 하워드(Brad Howard)”란 사람이 전화를 걸어 자신이 낙찰 받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음을 알려왔습니다.

하워드란 사람이 이 차를 구입한 이유는 1974년부터 1978년까지 로스앤젤레스는 극심한 가뭄이 있었기 때문에 땅속에 파묻혀 있었다고 해도 큰 피해를 입지는 않았을 것으로 판단하고 조금만 손을 보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그의 판단은 틀리지 않아 페라리 공식 딜러를 통해 수리할 때의 1/3의 비용으로 엔진을 수리하고 녹색으로 도색을 한 다음 “DUG UP”이라는 번호판까지 달았다는군요~

 

한편 당시 사건을 수사했던 로스앤젤레스 카운티의 보안관 캐롤(Carroll)은 범인을 체포할 수는 없었지만 제보자의 증언에 의하면 페라리 디노 246GTS의 도난은 크루즈 부부가 공모한 보험사기였으며 어린이들이 흙장난을 하다가 차를 발견한 것이 아니고 제보에 의해 차량을 발견하게 된 것이었다고 합니다.

제보자의 신분보호를 위해 어린이들이 발견하여 신고한 것이라고 발표했던 것이며 차량을 훔친 절도범들은 끈질긴 수사에도 불구하고 체포하지 못했고 따라서 크루즈 부부의 보험사기도 입증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합니다.

포르쉐가 만든 전차(戰車)는 독일판 군납비리?

포르쉐가 만든 전차(戰車)는 독일판 군납비리?

폭스바겐 비틀의 제작자이자 포르쉐(Porsche) 자동차의 창업자로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인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전차(戰車)를 개발한 혐의로 전범으로 몰려 종전 후에 감옥에 가야 했던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그가 개발했던 전차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아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포르쉐가 1942년 7월에 공개한 ‘포르쉐 티거(VK 4501P)’는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하이브리드 타입의 전차로서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습니다. 즉 가솔린 엔진으로 만든 전력으로 모터를 구동하여 달리는 방식이었지만 현재의 하이브리드 차량이 연비가 높다는 장점을 가진 것에 비해 포르쉐가 만든 전차는 연비의 개선과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검은 중절모를 쓴 사람이 페르디난트 포르쉐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전차의 동력원은 피스톤으로 움직이는 엔진인데 일정한 속도로 회전하는 것은 괜찮지만 회전수를 변경하거나 중지한 후 다시 재시작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또한 자동차처럼 전차도 정지상태에서 고속주행까지 다양한 속도로 달려야 하는데 이때 엔진의 회전수를 변경하지 않으면서 궤도의 회전수를 바꾸기 위해 변속기와 클러치는 필수요소였습니다.

그리고 자동차보다 더욱 무거운 전차는 엔진도 훨씬 크고 변속기 또한 크고 단단하여 변속기를 조작할 때 레버를 망치로 치는 모습을 전쟁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으며 아예 변속기조작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병력을 배치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전차의 고장원인이 대부분 변속기와 관련한 문제였기에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개발했던 것이 포르쉐의 하이브리드 전차인 티거였던 것입니다.

70여 년 전에 이런 하이브리드 방식의 변속기 자체가 없는 전차를 디자인한 포르쉐는 우선 좌우에는 2개의 지멘스-슈케르트(Siemens-Schuckert) D1495a 교류모터를 장착하고, 전력을 공급하는 장치로 지멘스-슈케르트(Siemens-Schuckert)aGV 발전기 1대와 포르쉐 101/1V 10기통 엔진을 2개 장착하였는데 이것은 전차의 절반이 엔진룸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외형은 헨셀사의 “티거I(VK4501H)와 비슷하지만 전륜의 배치가 다르고 길이도 더 긴 포르쉐의 티거(VK4501P)는 우선 엔진(포르쉐 101/1V)의 발전능력이 부족하고 D1495a 교류모터는 원래 어뢰용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토크가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제기되었으며 지금의 하이브리드 차량과는 달리 에너지효율의 저하로 연비가 나쁘고 서스펜션의 취약으로 험로에서 주행할 경우 움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이런 이유로 독일육군에서는 포르쉐가 개발한 전차를 심사에서 불합격시켰는데도 불구하고 “포르쉐 티거(VK4501P)”는 우리나라의 수많은 군납비리에서 보던 것처럼 납품이 됩니다.

 

이처럼 불합격된 전차가 독일군에게 납품될 수 있었던 이유는 포르쉐와 친분이 두터웠던 히틀러의 덕분이었는데 전차가 개발되기 이전에 이미 90대의 생산허가를 받은 상태였고 100대를 납품하도록 결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포르쉐는 검사에서 문제가 제기된 엔진을 “마이바흐 HL120V” 12기통 엔진으로 교체하고 1943년 5월까지 허가를 가지고 있던 90대의 전차를 생산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페르디난트“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의 쿠르스크 전차전 이후에 남은 페르디난트를 개조하여 기관총을 탑재하고 이름을 엘레판트(Elefant)로 바꾸게 되는데 전차승무원들은 기어를 변경할 필요가 없어 조종하기가 수월하고 고장 많은 변속기가 없어서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쿠르스크 전차전

 

전시에는 모든 물자가 부족하기 때문에 더더욱 군의 심사에 불합격한 제품을 생산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지만 정치적인 수완(?)으로 보급할 수 있었던 포르쉐의 VK4501(P)전차는 2차 대전 당시의 독일판 방산비리로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방산비리는 장비를 사용하는 장병들로부터 불만이 높거나 아예 작동이 되지 않는 것인 반면 포르쉐가 만든 전차는 장병들의 호평을 받았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라고 하겠습니다.

히틀러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

히틀러에 저항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제4기갑사단 사령관과 제3기갑군단 사령관을 지냈으며 최종계급이 기갑병대장(General der Panzertruppe)이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치인의 지휘는 받을 수 없다고 히틀러의 면전에서 공개적으로 저항했던 진정한 군인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다.

1892년 5월 16일 동프로이센의 피슈하우젠(Fischhausen)에서 태어난 자우켄의 정식 이름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에두아르트 카지미르 디트리히 폰 자우켄(Friedrich Wilhelm Eduard Kasimir Dietrich von Saucken)’인데 여기서는 줄여서 폰 자우켄으로 부르기로 한다.

어린 그에게서 예술가적 기질을 발견했던 그의 어머니와 학교장의 추천으로 어려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군인이 되기를 원했던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10년 10월 1일, 폰 자우켄은 육군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1사단에 배속되어 동부전선에서 많은 무공을 세우며 1914년 10월에는 2급 철십자장을, 1916년에는 1급 철십자장을 받는 등 큰 활약을 하였고 1차 대전이 끝난 뒤에는 자유군단 소속으로 근무하다가 1921년에는 국가방위군에 입대하여 1927년 특수임무를 띠고 소련에 파견되어 러시아어를 익히게 된다.

1934년 소령으로 진급하고 1939년 6월 1일에 대령이 된 그는 제2차 대전이 일어나자 제4기갑사단의 자동차여단을 지휘하여 프랑스 공방전과 바르바로사 작전 등에 참가하였고 모스크바 공방전에서는 사단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1일 소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나 진급 다음 날 볼호프 부근에서 중상을 입고 제4기갑사단장 직을 전임자에게 다시 넘기게 되지만 이때 곡엽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받았으며 1943년 4월 1일에는 중장으로 진급하고 그해 6월에 제4기갑사단장으로 복귀하게 된다.

이어서 1944년 1월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27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곡엽검 기사십자 철십자장을 수상한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며 1944년 5월에는 제3기갑군단의 사령관으로 부임하게 된다.

그 후 제2군 사령관에 취임한 폰 자우켄은 러시아가 승리의 날이라고 부르는 1945년 5월 9일, 탈출을 위해 준비된 비행기의 탑승을 거절하고 붉은군대의 포로가 되는 것을 선택한다.

1955년 석방되기까지 독방에 감금되어 강제노동은 물론이고 수많은 고문을 받으며 비인도적인 포로생활을 한 결과 여생을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했던 폰 자우켄은 1980년 9월 27일 당시는 서독이었던 뮌헨 인근의 풀락(Pullach)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이상이 간략하게 살펴본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의 약사인데 지금부터는 히틀러에게 반항을 했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1945년 2월에 히틀러를 뺀 모든 독일군들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한술 더 떠서 아예 대놓고 “전쟁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발언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그는 제3기갑군단의 사령관직에서 물러나 대기발령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한 달 뒤인 3월 10일에 제2군 사령관으로 복귀하게 되는데 제2군은 나중에 동프로이센군으로 이름이 바뀐다. 아무튼 3월 10일에 복귀한 폰 자우켄은 3월 12일, 히틀러의 호출을 받게 되는데 당시는 1944년 7월 20일에 일어난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의 영향으로 히틀러를 접견하는 절차와 방식이 무척 까다롭게 되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히틀러를 접견할 때 무기를 휴대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었는데 폰 자우켄에게 있어서 기병대칼(사브르)은 그가 국가와 군을 위해 헌신한 세월을 상징하는 것이었기에 히틀러를 만나면서도 그는 칼을 차고 갔던 것이다.

이 사실만으로도 처형당할 수 있었으나 폰 자우켄은 한술 더 떠서 나치식 경례가 아닌 일반적인 군사경례를 함으로써 당시 벙커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말았다.

모두가 긴장한 가운데 폰 자우켄을 부른 히틀러는 무슨 수를 써더라도 제2군을 지휘하여 동프로이센을 방어해야 한다고 명령하면서 단치히-서프로이센 제국대관구(Reichsgau Danzig-West Prussia) 지도자(가우라이터: Gauleiter)의 지휘를 받으라고 명령한다.

그런데 이것이 자우켄의 분노를 유발하게 되어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폭발하게 되는데 이미 히틀러를 만나면서 첫째, 칼을 차고 갔고 둘째, 단안경(monocle)을 쓰고 있었고 셋째, 나치식 경례를 하지 않았다는 3가지 불경죄를 저지르고 있었기에 아마도 폰 자우켄이 무사하진 못할 것이라는 것이 벙커에 있던 사람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지휘를 받으란 히틀러의 명령에 폰 자우켄은 테이블을 내리치면서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명령을 받을 생각이 없다.”고 소리치면서 히틀러를 몰아붙였다.

이쯤 되면 그야말로 볼장 다 본 셈이었는데 폰 자우켄은 히틀러를 부를 때 사용하는 호칭인 ‘나의 총통(마인 퓨러: Mein Fuhrer)’ 대신에 ‘히틀러씨(헤르 히틀러: Herr Hitler)라고 부르기까지 하는 행위를 하고 말았다.

그야말로 넘어서는 안 되는 선을 넘어버린 셈이었으나 나치의 중우정치를 극도로 싫어했던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으로서는 군인에게 정치인의 명령을 받으라는 지시는 무엇보다 심한 수치였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누구나 폰 자우켄의 안위를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히틀러는 꼬리를 만 것인지는 몰라도 “대관구지휘자(Gauleiter)의 명령을 받지 말고 당신이 직접 지휘하시오!”라고 말했고 히틀러와 악수도 하지 않고서 돌아서 나오며 폰 자우켄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2군의 지휘를 맡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전세를 되돌리기에는 늦어서 휘하장병들과 주변에서는 그에게 탈출을 권유했다고 하는데 그때마다 폰 자우켄은 부상병들을 대신 보냈다고 한다.

디트리히 폰 자우켄(Dietrich von Saucken)은 영웅도 아니고 1944년 7월 20일의 히틀러 암살을 주도했던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와 마찬가지로 존경의 대상도 아니지만 군인의 신념에 충실하고 권위에 저항했던 것만큼은 높이 평가할만 하다는 생각이다.

끝으로 사족을 덧붙이면 영화 작전명 발키리에서 톰 크루저가 맡았던 배역이 바로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다.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Claus von Stauffenberg)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비하인드 스토리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비하인드 스토리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쓴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는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바라보는 해석과 종교적인 해석, 환경적인 해석 등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1964년에 발표한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는 작가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작품의 이면에 숨어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출판해줄 곳을 찾고 있을 때 아동문학으로서는 너무 슬프고 성인문학으로서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더러는 소년과 나무의 평생의 관계에 감동했다는 곳도 있었지만 그림책으로 출판하기는 어렵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결국 출판사를 찾아다닌지 4년이 지나서 하퍼(Haper)사의 아동문학 편집자이던 ‘우르술라 노드스트롬(Ursula Nordstrom)’이 가능성을 발견하면서야 비로소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 대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964년 초판본은 5,000~7,500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1천만 부 이상이 판매된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는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저서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책이 되었습니다.

 

▶ 셸 실버스타인이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1975년 Publisher’s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은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출간되지 않은 ‘Uncle Shelby’s ABZ Book’과 ‘A Giraffe and a Half’ 두 가지를 꼽았다고 합니다.

 

▶ 여자친구에게 헌정한 책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의 헌사(獻辭)는 짤막하게 “dedicated to Nicky”라고 되어있는데 니키라는 사람은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옛 여친이었다고 합니다.

 

▶ 끝으로…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은 책의 결말을 해핀엔딩으로 맺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어린독자들이 책속의 행복이 왜 자기에게는 오지 않는지 하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의 결말도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Photo by: Larry Moyer-출처: http://www.shelsilverstein.com

 

독일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독일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저격수들이 활약한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코 소련을 들 수 있는데 이번에는 가장 많은 소련군을 저격하여 2차 대전 뿐만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로 이름을 남긴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연합국의 일원이 아닌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사(戰史)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도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진다면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아돌프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독일제국에 합병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었는데 형식적이나마 오스트리아의 국민투표를 거치기는 하였으며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제국의 하나의 주인 오스트마르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 티롤주에 있는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라는 산악 마을에서 1924년 12월 23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가 태어났다.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

농부이면서 사냥에 능했던 아버지 시몬 헤체나우어(Simon Hetzenauer)와 어머니 막달레나 헤체나우어(Magdalena Hetzenauer) 사이에서 태어난 3남 1녀의 셋째였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아버지로부터 사냥하는 법을 배웠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Austro-Hungarian Army)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철십자훈장을 받았던 삼촌으로부터는 군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알프스의 산과 계곡에서 사냥을 통해 자연스럽게 위장술을 익혔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17세였던 1942년 9월에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나 알프스산양 샤무아(chamois)를 잡던 민첩함과 뛰어난 사격술은 그를 단순한 산악경보병인 게비르크스예거(Gebirgsjäger)에 머물게 하지 않았고,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저격훈련을 마친 다음 저격병으로 복무하게 만든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제3 산악경보병사단, 제144 산악경보병연대에 배속되어 공식적으로 저격수로 활약하게 되는데 주로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공격해오는 소련군을 저격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2가지의 소총을 사용했는데 가장 즐겨 사용했던 것은 줄여서 Kar98k라고 하는 Mauser Karabiner 98k의 저격용 소총으로 6배율의 자이스 스코프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4배율의 스코프가 장착된 게베어43(Gewehr 43)은 주로 근거리에 위치한 목표물들을 저격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Kar98k

 

Gewehr43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의 주요목표물은 산악여단의 포병을 노리는 소련군의 기관총 사수와 저격수들이었으며 특히 기관총 사수와 소련군 지휘관을 저격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1944년 7월 저격훈련을 마치고 8월부터 저격수로 활약했던 그는 1944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9개월 동안에 345명의 소련군을 사살하여 1945년 4월 17일에는 일반 독일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기사십자 철십자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을 수여 받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5년 5월에는 소련군의 점령과 함께 전쟁포로의 신분이 되어 수용소에 수감되는데 2차 대전 동안에만 약 3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들이 소련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거의 1/3에 가까운 수가 수용소에서 사망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5년의 시간을 끈질기게 이겨내고 1950년에 석방되어 그리운 고향,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로 귀향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와 마리아란 여성과 결혼하고 목수로 생활했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전쟁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다가 2004년 10월 3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런던의 울타리는 2차 대전 당시의 들것이었다.

런던의 울타리는 2차 대전 당시의 들것이었다.

영국의 런던에는 상하좌우로 둥글게 생긴 철제울타리들이 설치되어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울타리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이 펜스는 2차 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철제울타리의 이름은 영어로 “ARP Stretcher Railing”이라고 하는데 ARP는 공습경보(Air-Raid Precautions)의 약자이고 “Stretcher”는 들것을 뜻하는 것으로 2차 대전 당시 공습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들것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대규모 공습으로 60만 개 이상이 제작된 이 들것을 스틸로 제작한 이유는 독가스 공격이 있을 경우에도 오염물을 제거하기가 쉽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시제품 점검

 

훈련 중인 모습

 

그리고 이것은 전쟁 중에 실제로 부상자의 이송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민간인들의 거주지역에서는 건물의 주변에 설치되어 있던 기존의 울타리들은 전시물자로 사용되면서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고 이에 런던 지방의회에서는 들것을 주택가의 울타리로 사용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8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들것을 울타리로 사용하면서 지금은 낡고 부식된 것들이 많아 일부 지자체들은 철거를 하고 있는데 The Stretcher Railing Society”라는 민간단체에서는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유물로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정식명칭이 USCG( United States Coast Guard)인 미국 해안경비대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6·25전쟁 69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6·25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이지만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또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미국의 법률로 지정하고 있는 군대의 단위에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와 함께 해안경비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해안경비대가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대통령의 명령이나 의회의 결정으로 해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1790년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제청으로 1790년 8월 4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창설되었던 해안경비대는 일부 자료에 의하면 관세밀수감시청(US Revenue Cutter service)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정보는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설될 당시, 재무부 산하의 조직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던 해안경비대는 별도의 이름이 없이 커터(The cutters) 또는 커터 시스템(The system of cutters)으로 불리다가 1860년대까지는 징세해상부대(revenue marine)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에는 세관감시부(Revenue Cutter Service)로 불렸고 1915년 1월 28일에 미국인명구조부(Life Saving Service)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1798년 프랑스와 벌어졌던 ‘유사전쟁(Quasi War)’의 참전을 필두로 이라크전쟁에도 참전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이전인 1947년부터 1952년까지 3만5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가 해군의 소속이 아닌 독자부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던 최초의 전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참가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광복 직후 해군의 창설을 목적으로 미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결성된 해사관계 군사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의 단장이었던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요청으로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조지 맥케이브(George McCabe) 대위가 이끄는 병력이 1946년 8월 23일 내한하여 자문과 지도를 하였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나라의 해군으로 정식발족을 앞두고 있던 그 해 5월에는 미국해안경비대의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이 한국에 도착하여 미국해안경비대의 지휘관 겸 고문관의 역할을 맡게 된다.

손원일 제독과 윌리엄 아처치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그러나 대한민국이 정식 해군의 발족을 앞두게 되자 다른 나라의 해군을 훈련시키는 것은 해안경비대의 임무가 아니란 결정에 의해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병력은 모두 귀국하게 되고 그 자리를 예비역들이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8월 19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이자 미국해안경비대의 전 사령관이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최고고문관의 임무를 맡게 되고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은 대표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대한민국 해군이 사용할 선박문제로 대만을 방문하고 있을 때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와 두 자녀들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공수해야 하는 물자의 선적을 마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과 재회하게 되고 1950년 7월,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주로 펄스전파를 이용하는 항법장치인 로란(LORAN)기지국의 설치·운영과 무선중계기의 설치 및 병력의 해상구조가 주요임무였다.

부산에 있었던 로란(LORAN)기지국

 

미국해안경비대가 한국전쟁 동안 수행했던 수많은 해상 인명구조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1953년 1월 18일 있었던 미 해군의 해상초계기 P-2V넵튠의 격추사건을 들 수 있다.

중공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을 비행 중이던 P2V 초계기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바다에 추락하고 승무원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는데 미국해안경비대는 필리핀의 해군기지(US Naval Station Sangley Point)에 주둔하고 있던 베테랑 조종사,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가 조종하는 구조기와 미치 페리(Mitch Perry) 중위가 조종하는 지원기로 2대의 수상비행기(PBM-5G)를 급파하여 생존자의 구출에 나서게 된다.

P-2V넵튠

 

현장에 도착한 수상비행기(PBM-5G)가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물에 의지하고 있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착륙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고 기상이 좋지 않아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의 위험이 높아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착륙을 감행하게 된다.

무사히 바다에 착륙한 비행기는 해군초계기에 탑승하고 있었던 총 13명의 승무원 중에서 생존자 11명을 태우고 이륙을 시도하게 되는데, 떨어져 있던 2명의 생존자는 해변으로 밀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PBM-5G

 

11명의 초계기 생존자와 본인을 포함하여 8명의 PBM-5G 탑승자 등 모두 19명을 태우고 이륙하려던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5m가 넘는 파도와 초속 24m에 달하는 강풍으로 쉽게 이륙하지 못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륙 보조 로케트(JATO bottle)’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륙과 동시에 엔진 이상으로 PBM-5G는 다시 바다로 추락하게 되고 밤이 되어서야 해군의 구축함 USS Halsey Powell(DD 686)에 의해서 구조가 되지만 초계기 P-2V넵튠에 타고 있던 4명의 해군과 PBM-5G에 탑승하고 있던 5명의 해안경비대원은 목숨을 잃고 만다.

USS Halsey Powell(DD 686)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 및 유엔군 참전 유공자들을 청와대의 영빈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아직 완전한 종전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북미 간의 비핵화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고,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6·25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정의롭지 않은 나라,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

정의롭지 않은 나라,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

매년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은 미국에선 콜럼버스 데이라는 기념일이다. 이날은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 도착한 것을 축하하는 날로 정확히는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라고 해야 한다.

미국 외에 10월 12일을 기념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태어난 이탈리아에서도 이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사용하는 표현들이 나라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벨리즈와 우루과이에서는 아메리카의 날(Día de las Américas), 바하마에서는 Discovery Day라고 부르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날이라는 Día del Respeto a la Diversidad Cultural로 부르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국경일이라는 의미로 Festa Nazionale di Cristoforo Colombo 또는 Giornata Nazionale di Cristoforo Colombo라고 부른다.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민족의 날(Día de la Raza)로 부르고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문화유산의 날(Día de la Hispanidad)이나 종교적인 축일을 뜻하는 피에스타 나씨오날(Fiesta Nacional)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 10월 12일이 종교적인 축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서기 40년 10월 12일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가 현재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성모마리아의 발현(필라의 성모)을 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제264대 교황이었던 바오로 2세는 필라의 성모를 히스패닉 민족의 어머니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보게 되는 필라 성모 대성당이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계기로 만들어진 성당이며 역사상으로는 성모마리아께 봉헌된 최초의 성당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도 미 전역에서 인정되는 기념일은 아니어서 하와이, 알래스카, 오레곤 및 사우스 다코다 주에서는 이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Discoverers’ Day로 부르는 하와이에서는 명칭의 변경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우스 다코다에서는 공휴일로 지정하였지만 콜럼버스 데이가 아닌 Native American Day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Native American Day는 아메리칸인디언 운동(AIM: American Indian Movement)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매년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이면 미국 각지에서 체포되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즉 인디언들의 수가 해마다 늘고 있으며 아예 콜럼버스 데이란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콜럼버스 데이 변경을 위한 동맹(TCAD: Transform Columbus Day Alliance)이 결성되어 있기도 하다.

AIM의 깃발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American Indian Day)로 부를 것을 주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1년에 결성된 아메리칸 인디언 협회(Society of American Indians)로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 단체의 대표를 맡았던 아서 파커(Arthur C. Parker)는 미국의 보이스카우트 연맹을 3년 동안이나 설득시키는 노력을 한 끝에 1915년 12월 14일에 24개 주정부로부터 받은 인증서를 백악관에 전달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16년 뉴욕주를 시작으로 1919년에는 일리노이주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American Indian Day)을 의원입법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아서 파커(Arthur C. Parker)

 

한편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을 검색하면 유럽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수두와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이 전염되어 원주민의 80%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을 볼 수가 있다.

통설에 의하면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는 대략 4천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는 인디언들의 숫자가 500만 명까지 감소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염병이 맞지만 이외에도 강철로 만든 칼과 소총을 앞세운 무력에 의해 숨진 숫자도 상당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대륙으로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지옥이었을 것이고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다는 링컨 대통령도 인디언에게는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댈 정도였으니 콜럼버스 데이는 결코 정의롭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정의를 앞세우는 미국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디언들의 오래되고 지속적인 저항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에 더하여 2015년 10월 11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인터넷판 기사는 콜럼버스 데이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1492년에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였으며 산타마리아, 니나, 핀타란 3척의 배로 항해를 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을 리도 없으며 배의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전에 북유럽의 탐험가인 레이프 에릭손(Leif Erikson)이 북미(캐나다)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이보다도 훨씬 이전에는 페니키아의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지적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미국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그가 사용한 배의 이름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날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결코 정의로운 나라가 아님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리 아저씨가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재선(再選)을 위해 날뛰는 모습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不正義한 나라임을 실감하게 된다.

더 길게 적으면 국내정치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 이만 주절거림을 끝낸다.

사진은 운디드 니(Wounded Knee Massacre) 대학살로 살해되어 매장된 인디언들의 모습

2차 대전의 주력기 스핏파이어의 모든 것

2차 대전의 주력기 스핏파이어의 모든 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Spitfire)는 연합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으로 미국에서도 사용하였는데 지금부터 스핏파이어(Spitfire)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수상비행기를 만드는 회사가 제작하였다.

스핏파이어(Spitfire)의 정식 명칭은 수상비행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던 슈퍼마린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로 불리고 있으며 디자이너는 “레지널드 미첼(R. J Mitchell)”이라는 항공기 설계자였습니다.

 

레지널드 미첼

 

▶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하다

스핏파이어(Spitfire)는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마치고 1938년 8월에 영국공군의 덕스포드(Duxford)기지에 배치되었습니다.

 

▶ 최초의 격추

1939년 10월 16일 제603 비행중대의 스핏파이어(Spitfire)가 독일공군의 하인켈 He 111(Heinkel He 111) 폭격기를 격추하여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인켈 He 111

 

▶ 스핏파이어에 가려진 호커 허리케인

호커 허리케인(Hawker Hurricane)은 영국 본토에서 치러진 항공전에서 영국공군의 승리 중에서 60%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나중에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Ⅰ에 의해서 그 빛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호커 허리케인

 

▶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Ⅰ의 퇴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스핏파이어(Spitfire)의 개량에 착수하였는데 전쟁과 함께 박차를 가하여 마크Ⅱ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 주력기로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

1941년 2월에 영국공군에 배치된 마크Ⅴ는 1943년말까지 140개의 비행중대에 6,000대가 보급되어 주력기로 등장하였습니다.

 

▶ 세계를 누빈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미공군을 포함한 10개국에서도 운용하였는데 북아프리카와 몰타를 비롯하여 호주 공군에서는 일본기에 대항하여 북부해안의 다윈에 3개의 비행중대에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를 운용하였습니다.

 

▶ 빠르고 조종하기 쉬운 스핏파이어(Spitfire)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최고속도 시속 594㎞를 낼 수 있었고 7분 30초 만에 고도 2만 피트(6,096미터)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최고고도 36,500피트(11,125미터)를 자랑하였습니다.

 

▶ 넓은 작전반경

드롭탱크를 장착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1,100마일(1,770㎞)의 작전반경을 지니게 되어 독일의 심장부로 깊숙이 침투하여 폭격기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 독일 포케불프의 대항마

1941년 9월에 유럽의 하늘에 등장한 독일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FW-190)”은 영국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를 능가하여 그 후 1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전투기로 활약하였지만 1943년 6월 새로운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Ⅸ의 등장으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포케불프 Fw 190

 

▶ 스핏파이어(Spitfire)의 무기들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전쟁 초기에 7.7㎜ 기관총 8문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독일 비행기의 두꺼운 장갑과 연료탱크를 파괴하기 위하여 브라우닝 .303 기관총 4문과 20㎜ 2문을 새롭게 장착하였으며 1톤 이상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우닝 .303

 

▶ 너무도 빨랐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

1944년 1월에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는 시속 724㎞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이렇게 빠른 속도 때문에 독일이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발사한 V2 로켓을 300개 이상이나 격추시킬 수 있었습니다.

 

▶ 제트기를 격추시킨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

독일이 전쟁 후반에 선을 보인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Messerschmitt Me 262)”를 1944년 10월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가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메서슈미트 Me 262

 

▶ 2차 대전 이후

스핏파이어(Spitfire)는 XIV의 개량형인 마크XVIII를 새롭게 선보이면서 1949년까지 생산되어 한국전쟁에도 투입되었고 항공모함용 함재기인 시파이어(Seafire)를 2,334기 제작하였고 1954년 4월 1일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의 투입을 마지막으로 퇴역하였습니다.

시파이어(Seafire)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애완동물이 도살당하다.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애완동물이 도살당하다.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의 ‘반려동물’은 예전에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기른다는 의미에서 ‘애완동물’이라 불렸는데 아직도 반려동물보다는 애완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유기되는 사례가 끊이질 않고 있다.

평상시에도 함부로 버려지는 동물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대우를 인간으로부터 받게 될까? 전쟁과 동물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쟁동안 군에서 활약한 동물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전쟁 동안 미 해병대에서 활약했던 암말인 레클리스 병장(Sergeant Reckless)을 들 수 있다. 원래는 플레임(Flame)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에서 탄약과 부상병을 수송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이 말은 용감하다 또는 무모할 정도로 임무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레클리스(Reckless)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1954년 4월 상병(corporal)에서 병장(sergeant)으로 진급하였고 1959년 8월 31일에는 하사(staff sergeant)로 진급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4마리의 새끼를 낳은 레클리스(Reckless)는 1968년 5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2013년 7월 26일에는 레클리스(Reckless)를 기리는 동상이 미 해병대박물관에 건립되었고, 2018년 5월 12일에는 켄터키의 말 공원(Kentucky Horse Park)에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은 동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부터 일주일 동안에만 영국에서는 75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야말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상이 벌어졌음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만들어진 ‘공습대비 애완동물 예방조치위원회(National Air Raid Precautions Animals Committee)’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들을 시골로 보내거나 보살피지 못한다면 죽여야 한다는 안내를 했다.

 

1939년,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영국은 가장 중요한 식량문제 때문에도 애완동물들을 죽여야 한다는 홍보를 했던 것인데 실제로 영국은 1940년 1월 8일부터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7월 4일까지 식량배급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애완동물들을 키우던 남자들은 징집으로 집을 비우고, 남자들이 떠난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여성들이 군수공장을 비롯한 노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1940년 9월 7일부터 267일간이나 지속되었던 독일군의 런던공습(blitz) 당시에도 수십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추가로 도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임을 피한 애완동물들일지라도 독일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부터 방공호로 들어갈 수 없어서 길거리를 떠돌게 되었는데 1940년 8월에 법으로 통과된 식량배급제도를 어기고 음식물을 동물에게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2년형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였으니 동물들의 도살은 엄청난 규모로 자행되었음은 충분히 짐작 가고도 남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동물들이 도살당한 사실은 클레어 캠벨(Clare Campbell)이라는 작가가 쓴 책, 본조의 전쟁(Bonzo’s War: Animals Under Fire 1939 -1945)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니콜라 화이트(Nicola White)란 여성이 템즈 강변에서 본조(Bonzo)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식표를 발견한 뒤, 이에 대한 조사를 함께 진행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영국에는 6백만~7백만 마리의 개와 고양이들을 가정에서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영국정부의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친절한 행동이 된다.”는 광고로 인해 동물들을 안락사 시키기 위해 동물병원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하며 동물병원에 있던 클로로포름은 삽시간에 모두 동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홀로코스트와도 같은 학살에 대하여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고 영국육군 수의부대(Royal Army Veterinary Corps)에서는 개는 전쟁에 필요하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왕립동물보호협회(RSPCA: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에서도 노력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이런 학살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니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1860년에 설립된 영국의 배터씨 동물 보호소(Battersea Dogs & Cats Home)인데 당시 불과 직원 4명밖에 없었던 보호소에서는 2차 대전을 통하여 모두 145,000마리의 개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전쟁동안 동물을 학살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수없이 많고 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서만 40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독일군의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 때문에 보급물자가 끊어진 파리에서는 1870년 9월 19일부터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사실도 있다.

※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함께 생활하던 반려동물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사람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지금, 만일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다면 버려지거나 죽는 동물들은 수도 없이 발생하지 않을까?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때를 대비한 행동요령이나 준비에 대하여 지침을 마련하고 알리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