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2001년 손석희 앵커와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의 문화에 대한 대담을 하면서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절대 그런 일이 없으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던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10년에 조선일보는 안용근 교수가 펴낸 책 “한국인과 개고기”의 내용 중에서 “1870년대 프러시안-프랑스 전쟁 당시엔 사람들이 개를 모두 잡아먹어 파리 시내에 개가 한 마리도 없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여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고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사실관계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사원문: 책펴낸 개고기 박사 “프랑스도 개고기 국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인들이 1870년대에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개고기를 먹게 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점도 자세히 알리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870년대에 프랑스인들은 개고기를 왜 먹게 되었는지? 개고기 외에 식용으로 사용한 다른 동물은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70년은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시기인데 더 이상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내용의 소설배경이 된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습니다.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하지만 파리에서 조직된 공화제 국방정부는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군은 1870년 9월 19일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파리를 포위하고 모든 보급물자를 차단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일상적인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포위를 당하기 전에 국방정부는 파리에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떠날 것을 명령했으며 군대를 제외한 인구가 200만으로 추정하였고 1~2개월 정도로 예상했던 독일의 포위에도 식량은 충분할 것으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떠난 숫자만큼 다른 지방에서 피난민이 유입되어 인구감소의 효과는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20%의 인구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최대 2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측했던 포위공격이 점차 기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식량이 모자라지 않다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마침내 식품은 배급제로 바뀌게 되어 1870년 10월 중순부터는 성인 1인당 섭취량을 300그램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파리의 시민들은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빵은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일 먼저 말을 잡아먹게 되었는데 당시 시장에서는 1파운드에 10센트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인 로버트 시버트가 1892년에 발간한 “The Siege of Paris by an American Eye-Witness”)

그러나 말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1달 뒤인 11월 중순부터는 배급량이 1인당 100그램으로 줄어들었고 시장에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고기들이 판매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쥐와 고양이 그리고 개고기였던 것입니다.

미국인 시버트(Robert Sibbet)가 직접 경험한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개고기와 고양이고기는 파운드당 20~40센트인 것에 비해 살이 찐 쥐고기는 파운드당 50달러 정도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11월이 되면서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하는데 계속 영업을 하려는 곳에서는 마지막으로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결국, 동물원에 있던 코끼리를 비롯하여 캥거루와 공작새 등도 잡아먹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동물은 사자, 호랑이, 하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 유명식당의 메뉴를 보면 개고기로 만든 커틀릿과 코끼리, 캥거루, 쥐로 만든 요리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마저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파리시민들은 나무나 풀뿌리로 연명을 해야 했고 포위가 끝나기까지 굶주림이 아닌 음식을 잘못 먹은 것으로 인해 발병한 질병으로만 12,00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기 위해 먹었다고는 하더라도 프랑스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브리지토 할머니,

절대 개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프랑스 역사부터

먼저 공부를 하심이 좋아 보입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어제 모 여가수의 이름이 실검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세인들의 입에 암페타민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을 막론하고 병사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약물이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독일군에게 공급을 명령했던 히틀러 또한 약물에 중독되었었다.(정확히는 필로폰이라는 메스암페타민에 중독)

지난 번 “마약으로 물든 베트남전쟁”이란 포스팅에서 미군은 지구력 강화와 불안 및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암페타민을 비롯한 각종 진정제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고 미 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2억2천5백만 통의 각성제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각개병사들에게 약물을 보급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887년 유대인 출신의 루마니아 화학자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가 베를린 대학에서 최초로 암페타민의 합성에 성공한 이래 벤제드린(Benzedrine)이란 상표로 상품화 되면서 천식이나 우울증의 치료에 사용되던 암페타민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연합군에 의해서 병사들에게 보급이 되었다.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

 

벤제드린(Benzedrine)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던 것은 이보다 더 심각한 메스암페타민이었는데 이른바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은 1888년 천식치료제인 마황으로부터 에페드린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일본 도쿄대학의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가 발견한 이후 1919년에 그의 제자인 오가타 아키라(緒方章)가 결정화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결정화에 성공한 메스암페타민은 1938년부터는 독일의 제약회사 테믈러 베르케(Temmler Werke GmbH)에 의해 페르비틴(pervitin)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어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메스암페타민의 부작용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었고, 독일군에게 정식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였다.

페르비틴(pervitin)

암페타민이나 메스암페타민을 막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약물을 일반 병사들에게 보급했던 것은 독일군이 먼저였으나 연합군이 사용한 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연합군 중에서 암페타민을 먼저 사용했던 것은 독일군의 잠수함을 수색하던 영국공군의 정찰병들이었다. 장시간에 걸쳐 온 신경을 기울여 독일군의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던 병사들이 암페타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는 폭격기의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공식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이 공식적으로 암페타민을 보급한 것은 1942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치러지는 기간 동안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1일 20㎎의 암페타민 5일치를 병사들에게 보급하도록 지시한 것이 최초였고, 미군은 1943년 2월 육군군수처(SOS: Services of Supply)에서 하루에 5㎎의 벤제드린(Benzedrine)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발표를 하면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즉시로 50만 정을 주문하여 북아프리카의 부대에 보급하였던 것이 최초다.

엘 알라메인 전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롬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을 텐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는 독일의 에르빈 롬멜을 소재로 하여 1951년에 개봉한 영화 The Desert Fox(사막의 여우 롬멜)가 바로 이 전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에르빈 롬멜

 

연합군이 암페타민을 보급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군이 보급했던 것은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날이 갈수록 중독으로 인한 심각성이 커지자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 보급하기 시작했던 것을 1941년 봄부터는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금지했던 것은 아니었고 보급만 중단하였다.

1939년 가을 폴란드 침공에 나선 독일군은 운전병들에게 메스암페타민인 페르비틴(pervitin)을 보급하였는데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한 상태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페르비틴(pervitin)의 효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는 3,500만 개의 페르비틴(pervitin)을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다.

독소전쟁 당시 페르비틴(pervitin)을 복용했던 병사들을 관찰한 군의관의 증언에 따르면 “폭설과 영하 30℃의 추위 속에서 6시간의 행군으로 병사들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사기는 저하되었으며 급기야는 쓰러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사망했다. 그러한 병사들에게 페르비틴(pervitin)을 나누어주자 30분이 지나지 않아 기력을 회복하였고 집중력과 판단력이 회복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병사들에게서 중독증상과 약물복용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1941년 봄부터는 페르비틴(pervitin)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인 보급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일반보병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던 페르비틴(pervitin)은 탱크 운전병들에게는 탱크 초콜릿(Tank-Chocolates)이라는 뜻의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란 이름으로 보급되었다.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

 

버닝썬 사건으로 촉발된 연예계의 마약과 경찰의 유착의혹에 대하여 명운(命運)을 걸겠다고 했던 경찰이 이번에는 명예(名譽)를 걸고 모 연예기획사의 의혹을 수사하겠다고 한다.

목숨(명운)을 걸고도 밝히지 못한 것을 명예를 건다고 밝힐 수 있을까?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집단의 공허한 메아리와 함께 이 시기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을 보면서 그냥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 2차 대전을 통해 보급되었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았다. 멍~멍~

전투기의 위장색

전투기의 위장색

최근 각국이 앞다투어 개발에 나서고 있는 스텔스기는 단순히 레이더뿐만 아니라 적외선과 가시광선 및 소음 등 전투기의 흔적을 지움으로서 관측을 어렵게 하도록 만든 기종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원시적인 스텔스기능은 적의 눈을 속이는 위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비행기를 62대나 격추시켰던 독일의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가 몰던 “복엽기(Fokker D.VII)”에 사선으로 흰색의 선을 그려 넣어 비행방향을 착각하도록 만들며 “쏘지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Du doch nicht!!”를 적어 넣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군용기의 위장색은 최근에 와서는 하늘이나 구름과 비슷하도록 다양한 명암의 회색을 혼합하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1970년대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구입했던 F-4 팬텀은 도입 당시에는 국방색으로 도장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경까지는 전투기의 위장색에 대한 효과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기종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위장을 위해 도장하는 페인트의 무게가 적게는 수십 kg에서 많게는 100kg에 달하기 때문에 성능과 연비를 약화시킨다는 이유에서 예전에는 굳이 위장색을 도장하지 않고 표면의 두랄루민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위장색은 회색 계열이며 디지털 위장(Digital Camoflage)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래의 사진은 러시아의 MiG-29기입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주변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전투기의 위장색을 파란색으로 도장하기도 하는데 저공비행을 하면 거의 식별이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위장색을 이용한 위장 이외에도 러시아의 수호이 Su-27의 경우에는 가짜 캐노피를 그려 넣어 기체의 상하를 오인하도록 하는 위장술을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투기의 위장색과는 달리 비행고도가 낮은 정찰기나 수송기의 경우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지역에 맞도록 위장하게 되는데 우리 공군의 경우에는 산악지형에 맞는 패턴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사막의 모래와 비슷한 색깔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다음으로 준비했던 미국본토에 대한 공격은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생물학전의 첫 번째 시도로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한 바탄전투(Battle of Bataan)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생물학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2년 4월 9일 미군과 필리핀군이 투항하게 되면서 바탄전투는 끝이 나고 생포된 포로들이 카파스에서 오도널수용소까지의 행진 도중 7천~1만여 명이 숨진 이른바 “죽음의 바탄행진”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미군과 필리핀군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이 생물학전을 시도하려던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바탄전투를 포함하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시도하려 했던 생물학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일본군이 계획한 작전명 “밤벚꽃(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악명 높은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가 수립했는데 주요 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민간인 밀집지역에 대한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그 시험단계로서 바탄전투에서의 생물학전 전개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바탄지역의 10군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 90kg(1억 5천만 마리)을 살포할 준비를 하게 되지만 그 전에 미군과 필리핀군이 항복을 함으로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후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은 미국의 본토에 대한 생물학전을 계획하는데 애초의 계획과는 조금 변경된 샌디에고의 해군기지에 전염병을 퍼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1945년 3월 26일 작전의 일환으로 5대의 “I-400” 잠수함과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을 탑재한 폭탄을 터뜨릴 계획을 확정하게 됩니다.

“I-400”

 

“아이치 M6A 세이란”

 

그러나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공식적으로 1945년 9월 22일에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이 계획했던 작전의 내용은 미국의 근해로 접근한 5대의 “I-400” 잠수함에서는 벼룩이 든 풍선폭탄을 발사하고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는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면서 폭탄을 투하한다는 것이었으며 수만 명의 인원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사용하려던 방법은 영국의 “HMS M2”잠수함과 같이 “I-400”과 “아이치 M6A 세이란”을 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과는 별개로 일본은 “트루크 제도(Truk Islands)”라고 부르던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치명적인 세균과 생물학 전문가 20명을 파견하기 위해 잠수함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잠수함 “USS Swordfish”에 의해 발각되어 수중에서 침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생물학무기를 전쟁에 사용한다는 것은 무차별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는 특성으로 민간인의 엄청난 피해를 낳게 되지만 일본군들은 이런 잔인한 작전을 시도할 계획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자위대가 욱일기를 게양하고 제주도의 관함식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만일 일본이 계획했던 세균전이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실행되었더라면 미국은 일본의 욱일기를 지금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이 문제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궁금해집니다.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불안감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 국방부의 1971년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51%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28%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복용했으며 31%는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를 복용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포와 극심한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일정량을 병사들에게 공급하기도 한다.

오래전 음주로 인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미 해군은 1862년 9월 1일부터 병사들에게 럼주의 배급을 중단하고, 영국해군은 1970년 7월 30일에 럼주의 배급을 중지하기도 하였는데 그날을 “Black Tot Day”라고 부르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되고 나서 연합군은 보급물자의 부족을 겪게 되는데 그 품목들 중에는 맥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운이 좋은 일부 병사들은 지역에서 술을 구해 마시기도 하였으나 수요에 비해서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에 영국의 양조회사(Heneger와 Constable) 두 곳에서는 무료로 맥주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영국공군에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노르망디까지 맥주를 수송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마침내 영국공군(RAF: Royal Air Force-영국 왕립공군)에서는 2차 대전의 주력기였던 스핏파이어를 수송에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스핏파이어는 45갤런(약 170리터)의 드롭탱크(drop tank) 2개를 연결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맥주를 담아 노르망디로 공수하기로 하고, 탱크 내부를 세척한 다음 2개의 드롭탱크(drop tank)에 모두 90갤런(약 340리터)의 맥주를 싣고 비행을 하게 된다.

 

이처럼 비행기로 맥주를 실어 나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날으는 펍(flying pubs)’이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을 했다고 해도 연료탱크에 담은 맥주에서 금속 맛이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모디피케이션 XXX(Modification XXX)’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스핏파이어의 양 날개 밑에 맥주통을 달고 운반하는 방식으로 병사들은 이를 두고 ‘맥주폭탄(beer bombs)’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운반하는 방법도 착륙도중에 불안정 하여 깨지는 사례가 빈번하였고 착륙하면서 맥주통을 깨뜨린 조종사는 병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죽일 놈’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맥주폭탄(beer bombs)’은 기존의 드롭탱크에 싣고 가던 것에 비해서는 맛은 유지가 되었으나 운반하는 양이 크게 부족하여 영국공군은 다시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스핏파이어보다 더 많은 양의 맥주를 실을 수 있는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수송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이용한 맥주수송은 계속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독일군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과 착각한 미군의 ‘P-47 선더볼트(P-47 Thunderbolts)’로부터 하루에 두 번이나 공격을 받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

한편 이런 영국공군의 모습을 본 미군에서는 맥주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공군이 노르망디로 수송하던 맥주는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끝을 맺고 마는데 그것은 영국 양조회사들(Heneger와 Constable)이 무료로 제공한 맥주가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영국 간접세무국(HM Customs and Excise)’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을 내린 영국과는 달리 미국정부에서는 1944년 11월부터는 아예 미국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5%를 전선에 공급하기로 정하고 미군들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Ace in a day는 하루에 5대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레드 바론(붉은 남작)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도 80기의 격추기록을 가지고는 있지만 Ace in a day를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레드 바론이 활약하던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2차 대전에 비해서 투입된 비행기의 숫자도 적었을뿐더러 조준기나 광학장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기록을 수립하기는 어려웠겠지만 Ace in a day를 수립한 최초의 기록은 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나왔으며 게다가 이것을 두 번이나 달성한 “Double Ace in a day”도 수립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는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의 “Julius Arigi”로서 그는 1916년 8월 22일 이탈리아군의 비행기 5대를 격추하였습니다.

Julius Arigi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는 “Julius Arigi”를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Ace in a day가 되는 기록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의 육군에서 조종사로 활약하였던 “Alfred Atkey”는 1918년 5월 7일 Ace in a day의 기록을 세웠고 이틀 뒤에 다시 5대를 격추시켜 두 번의 Ace in a day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장비의 발달과 함께 많은 수의 조종사들이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하루에 두 번의 기록을 달성하는 “Double Ace in a day”를 비롯하여 세 번을 달성하는 “Triple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들도 있습니다.

물론 2인승 전투기의 경우에는 조종사뿐만 아니라 사수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조종사들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이 기록을 수립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의 히로미치 시노하라가 1939년 6월 27일에 소련의 비행기 11대를 격추하여 Double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히로미치 시노하라

 

그러면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에서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한 조종사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Triple Ace in a day

▶ 에밀 랑(Emil Lang)

독일의 에밀 랑은 2차 대전 당시 모두 173기를 격추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1943년 11월 3일 소련의 전투기 18대를 격추시켰습니다.

 

▶ 한스요하임 마르세이(Hans-Joachim Marseille)

2차 대전에서 모두 158기를 격추시킨 그는 1942년 9월 1일 모두 17대의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 어거스트 램버트(August Lambert)

단 3주 만에 모두 70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가진 그는 1944년 하루에 17기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1945년 4월 17일 미국의 P-51 머스탱의 공격으로 전사하였습니다.

 

▶ 휴버트 스트라슬(Hubert Strassl, Hubert Straßl)

2차 대전 동안 모두 67기를 격추한 그는 1943년 7월 5일 17대의 소련항공기를 격추시켜 Triple Ace in a day의 기록을 기록하였으나 3일 뒤인 1943년 7월 8일에 전사하였습니다.

 

■ Double Ace in a day

국적
이름
일시
격추 대수
일본
히로미치 시노하라
1939년 6월 27일
11대
독일
헤르만 그라프
1942년 9월 23일
10대
오스트리아
Walter Nowotny
1943년 9월 01일
10대
독일
Erich Rudorffer
1943년 10월 11일
13대
독일
에리히 하르트만
1944년 8월 24일
10대

 

에리히 하르트만은 총 352대를 격추시켜 세계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 Ace in a day

2차 대전 당시 하루에 5대 이상 10대 미만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는 모두 28명이 있으며 그 중에서 독일의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Heinz-Wolfgang Schnaufer)”와 미국의 “데이빗 맥캠벨(David McCampbell)” 및 핀란드의 “한스 빈드(Hans Wind)”는 두 번의 Ace in a day 기록을 수립하였고 세계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척 예거(Chuck Yeager)가 1944년 10월 12일에 5대를 격추하여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척 예거(Chuck Yeager)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이미지 by Paul M Walsh FLICKR

2019년에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는 전체적인 평점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진주만의 공습으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의 전개는 일본의 항공모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생각된다.

항공모함이 적극적인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영국이 경순양함을 개조하여 만들었던 HMS Furious(47)로, 1918년 7월 19일 탑재하고 있던 7기의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이 출격하여 지금은 벨기에의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제국의 도시였던 퇴네르(Tondern)에 주둔하고 있던 제플린 비행선을 공격한 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HMS Furious(47)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

제플린 비행선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상전투의 기본은 함포사격이었고 미국은 영토확장 의지가 크지 않았으며 영국도 유럽에서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각각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여 태평양지역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항공모함의 건조에 공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진주만공습으로 시작되는 태평양전쟁의 초기에는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처럼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92년 개최되었던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력함의 톤수가 미국과 영국의 60%로 제한되긴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제한이 엄격하지 않았던 분야가 바로 항공모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만들었던 최초의 항공모함은 기준배수량 7,470t의 호쇼(鳳翔)로서 이견은 있지만 항공모함으로 설계되어 완성된 세계최초의 항공모함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호쇼는 태평양전쟁이 개전되었을 때에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려서 진주만공습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공격에 참가한 6척의 항공모함을 위한 대잠초계 임무를 수행하다가 오가사와라 제도 부근에서 회항하게 된다. 그리고 진주만공습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호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항공모함은 짧게는 공습 후 정확히 6개월이 지난 후, 길게는 2년 6개월 뒤에 미국의 공격을 받아 모두 침몰되는 운명을 맞았는데 당시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취역 순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함명
기준배수량
취역일
침몰일
아카기(赤城)
36,500톤
1927년 3월 25일
1942년 6월 6일
카가(加賀)
26,900톤
1929년 11월 30일
1942년 6월 5일
소류(蒼龍)
15,900톤
1937년 12월 29일
1942년 6월 5일
히류(飛龍)
17,300톤
1939년 7월 5일
1942년 6월 6일
쇼카쿠(翔鶴)
25,675톤
1941년 8월 8일
1944년 6월 19일
즈이카쿠(瑞鶴)
25,675톤
1941년 9월 25일
1944년 10월 25일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이들 6척의 항공모함 중에서 즈이카쿠(瑞鶴)는 침몰하기 직전에 참가했던 마리아나해전 이전까지는 단 1발의 피탄도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운이 좋았는데 이름에 상서롭고 운이 좋다는 뜻의 한자(瑞)가 들어있어서였던지는 몰라도 건조과정에서도 중상이나 사망과 같은 재해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고 건조되었다고 한다.

즈이카쿠(瑞鶴)의 취역예정일은 원래 1941년 12월이었으나 미국과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일정을 3개월이나 앞당기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사고 없이 건조되어 진주만공습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운이 좋은 배였기 때문이었을까? 즈이카쿠(瑞鶴)는 진주만공습에서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차로 출격했던 6기의 0식 함상전투기와 25기의 99식 함상폭격기가 모두 무사귀환하였고, 2차 출격에 가담했던 27기의 97식 함상공격기들도 모두 귀환할 수 있었다.

0식 함상전투기

 

97식 함상공격기

 

99식 함상폭격기

 

뿐만 아니라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이 참가하여 1944년 6월 19일부터 6월 20일까지 미해군과 격전을 벌였던 마리아나해전에서 쇼카쿠형 항공모함의 1번함이었던 쇼카쿠(翔鶴)는 침몰되었지만 2번함이었던 즈이카쿠(瑞鶴)는 1발의 명중탄과 5발의 지근탄에도 살아남아 그해 9월 23일에는 진주만공습 3주년을 기념하여 1944년 12월 7일에 개봉한 선전영화 ‘뇌격대출동(雷撃隊出動)’의 촬영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수뇌부의 이런 선전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사실상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마리아나해전을 기점으로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결국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즈이카쿠(瑞鶴)는 레이테해전에서 일본의 참패와 함께 북위 19도 57분, 동경 126도 34분 지점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만 모두 22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했던 일본이 다시금 군비의 확충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얘네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역사 속의 인물들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역사 속의 인물들

2011년 4월 17일 시작하여 2019년 5월 24일 시즌8을 끝으로 막을 내린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마지막 시즌에서 엄청난 혹평을 듣긴 했지만 가장 성공적인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 시즌4 에피소드 8에서 라니스터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타이윈 라니스터는 그의 아들 티리온 라니스터가 쏜 석궁을 맞고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처럼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인물들이 여럿 존재한다.

 

화장실이란 장소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만약 경비인력마저 없다면 암살자에게는 최적의 장소가 될 텐데 지금부터 화장실에서 암살을 당한 인물들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 에드먼드 2세(EdmundⅡ)

크누트 대왕이 이끄는 덴마크의 침략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고 해서 용맹왕 에드먼드(Edmund Ironside)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에드먼드 2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사했다거나 질병에 의해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과 함께 암살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암살당했다는 설은 12세기 노르만 왕조 시대의 역사가였던 헨리 오브 헌팅던(Henry of Huntingdon)이란 사람이 제기한 것인데 그에 의하면 에드먼드 2세는 화장실 아래에 숨어 있던 암살자가 밑에서 2번이나 찌른 칼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 바츨라프 3세(VáclavⅢ)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 헝가리와 보헤미아 및 폴란드의 왕을 역임했던 바츨라프 3세는 1306년 폴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가 체코의 올로모츠(Olomouc)성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 암살당했다고 한다.

암살자를 보낸 인물은 브와디스와프 공작이었는데 그는 바츨라프 3세를 죽이고 난 뒤 1320년 1월 20일 폴란드의 왕위에 올라 브와디스와프 1세(폴란드어: WładysławⅠ)가 되었다.

올로모츠(Olomouc)성

 

그 밖에 암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역사속의 인물들을 잠깐 살펴보면 당뇨병을 앓았던 영국의 조지 2세(GeorgeⅡ)는 1760년 이동 간이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중 대동맥이 파열되어 사망하였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Ⅱ: YekaterinaⅡ)도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침대로 옮겼으나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다.

남성편력이 심했다고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에 불과하다.

예카테리나 2세

 

끝으로 아직은 사실인지의 여부가 정확하지 않지만 영국의 에드워드 2세(EdwardⅡ)의 죽음도 화장실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다.(?)

에드워드 2세(EdwardⅡ)는 폐위당해 케닐워스 성에 감금되었다가 버클리 성으로 이감된 다음 폭행당해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동성애자였던 그의 항문으로 불에 달군 쇠꼬챙이와 포크를 밀어 넣어 죽인 것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EdwardⅡ)가 동성애자였던 것은 맞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는 에드워드 2세(EdwardⅡ)가 죽지 않고 생존했을 것이라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지금도 “에드워드 2세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EdwardⅡ?)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편견 때문에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브론테 자매

편견 때문에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브론테 자매

사진은 Philip Halling이 찍은 브론테 자매의 동상

중학생 시절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원제는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는 7번을 내리 읽었을 만큼 내게는 감명적인 소설이었다.

그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을 꼽으라면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제인 에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샬롯 브론테는 우리에게 브론테 자매로 알려진 세 사람 중의 한 명이고 흔히들 맏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녀의 위로 두 명의 언니들이 있었으나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사망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와 함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쓴 에밀리 브론테와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를 쓴 막내 앤 브론테의 세 사람을 우리는 흔히 ‘브론테 자매’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들 자매는 소설을 출간하기 전에 공동으로 시집(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출판할 때 필명을 사용하였는데 이 필명들이 모두 남자의 이름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이 2013년에 발표한 범죄소설 Cuckoo’s Calling은 ‘Robert Galbraith’라는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고 출판사 편집자였던 David Shelley는 “여자가 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나중에 밝힌 바가 있었다. 이후 조앤 롤링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변호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판매가 부진하던 이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일이 있었다.

조앤 롤링이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와는 달리 오늘의 주인공들인 브론테 자매는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남자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즉 샬롯 브론테는 ‘Currer Bell’을 에밀리 브론테는 ‘Ellis Bell’을 막내인 앤 브론테는 ‘Acton Bell’이란 남자이름을 각각 필명으로 사용하였고 유명한 소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또한 본명이 아닌 그녀들의 필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문학비평가들로부터 관대한 평을 받게 되면서 이들 자매는 필명이 아닌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폭풍의 언덕’의 4판의 서문에서 언니인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는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Averse to personal publicity, we veiled our own names under those of Currer, Ellis, and Acton Bell; the ambiguous choice being dictated by a sort of conscientious scruple at assuming Christian names positively masculine, while we did not like to declare ourselves women, because — without at that time suspecting that our mode of writing and thinking was not what is called ‘feminine’-we had a vague impression that authoresses are liable to be looked on with prejudice 하략”

 

샬롯 브론테가 밝힌 이유를 요약하면 확실하게 남자의 이름이라고 알 수 있는 크리스천 네임이 아닌 애매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남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양심적인 망설임과 여성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여성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혼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백 년도 훨씬 이전인 빅토리아 시대에 살았던 그녀들과는 달리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은 어떨까?

‘남녀 임금격차지수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글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발표한 세계의 성별 격차지수(The Global Gender Gap Index)에서도 대한민국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남녀의 임금격차는 2017년까지 15년간이나 연속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브론테 자매가 필명을 버리고 자신들의 본명을 사용한 것과 같이 우리사회에 아직도 뿌리 깊게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의 벽은 언제쯤 허물어질 수 있을까?

나치의 부활인가? 卍표시를 쓰는 핀란드 공군

나치의 부활인가? 卍표시를 쓰는 핀란드 공군

10월 10부터 1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릴 2018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자위대의 군함이 욱일기를 달고 입항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뜨거운데 우리가 욱일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유럽인들이 나치를 상징하는 卍자를 보는 시각과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핀란드공군에서는 나치의 상징인 卍자를 공군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핀란드는 나치의 부활을 위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사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핀란드공군이 사용하는 卍자는 나치와는 관련이 없으며 그보다 훨씬 전인 1918년에 이미 비행기에 그려 넣었던 것으로 그보다도 더 올라가면 철기시대에 이미 만자문(卍)의 한 형태인 “투르사스의 심장(The Heart of Tursas)”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표식이었습니다.

투르사스의 심장(The Heart of Tursas)

한편 만자문(卍)과 유사한 갈고리십자가(Fylfot Cross)의 표식은 특히 북유럽을 중심으로 중세에 많이 사용되던 것이었으며 이런 만자문(卍)은 핀란드의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가 그린 유명한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핀란드은행에 있는 1889년에 그가 그린 아래의 작품은 테두리가 수많은 만자문(卍)으로 장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는 핀란드 정부의 훈장을 디자인 하면서 갈고리십자가(Fylfot Cross)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핀란드 대통령의 깃발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핀란드 대통령의 깃발

 

이러한 만자문(卍)이 군용기에 처음으로 그려진 것은 핀란드내전이 한창이던 1918년 3월 6일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이 항공기를 기증하면서 행운의 상징으로 그려 넣었던 것이 최초였는데 그 이후부터 핀란드공군에서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만자문(卍)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은 그보다 이전인 1901년부터 자신의 개인비행기에 이미 만자문(卍)을 그려 넣고 있었습니다.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이 기증한 비행기

 

그 후 핀란드는 겨울전쟁의 적대국이었던 소련과는 정전을 하고 독일과의 동맹은 해제하면서 나치 독일을 영토에서 몰아내는 라플란드 전쟁을 치르게 되고 영국과 소련연합통제위원회(British-Soviet Allied Control Commission)가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되는데 이때 소련으로부터 만자문(卍)의 사용에 대한 비난을 받아 1945년 3월부터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은 모두 푸른색과 흰색의 원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1956년부터 1981년 사임하기까지 25년간 대통령을 지냈던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이 1957년에 다시 핀란드공군이 만자문(卍)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그 후 9년 뒤에는 공군사령부와 모든 제복과 배지에 만자문(卍)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습니다.

핀란드공군사령부 휘장

 

핀란드공군 아카데미 깃발

 

그러나 이와 달리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대통령은 핀란드 정부의 훈장인 “백합장미장”과 “그랜드 십자가장”에서는 만자문(卍)을 빼도록 지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오랜 역사를 가진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 사용에 대하여 나치의 상징인 만자문(卍)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만일 지금 만자문(卍)의 사용을 중지하게 된다면 실제로 공군이 사용하던 표식이 나치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계속 사용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자문(卍)의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는 또 하나는 2017년에 법원으로부터 폭력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던 핀란드의 신나치주의자들은 만자문(卍)을 사용하지 않고 화살표 문양의 고대문자를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 사용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의 사용을 반대하는 여론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도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욱일기를 단 일본군함의 입항을 반대하는 것처럼 유럽인들 또한 나치의 상징인 만자문(卍)의 사용에 대하여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핀란드공군과 정부가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좋은 결과를 맺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