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의 날에 생각하는 지그프리드 라인

국군의 날에 생각하는 지그프리드 라인

용을 죽인 피로 목욕을 하고 나서 무협지에 나올 법한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게 된 지그피리드는 목욕하는 도중에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등에 붙는 바람에 그곳만 용의 피를 적시지 못해 취약한 부분이 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는 신화 “니벨룽의 노래”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런 지그프리드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건설했던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아픈 상흔으로 후대에 교훈을 주는 유물로 남아있는데 오늘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연합군에게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우회하여 독일군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은 얼마나 실패한 작전이었는지 다리 하나를 넘기 위해 크나큰 희생을 치루는 바람에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도 했습니다.

원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이 프랑스에 건설했던 “힌덴부르크 라인”의 일부였던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총 연장 630km에 18,000여 개에 달하는 벙커와 수많은 용치(龍齒, Dragon’s Teeth)로 이루어져 있는데 히틀러가 1939년 5월 20일 현장에서 작업 중인 병사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지휘서신에 “Westwal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Westwall”이라고도 알려졌으나 연합군들은 이 선을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이라고 불렀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이 라인은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에도 참가하였던 프리츠 토트(Fritz Todt)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히틀러는 이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을 건설하는 작업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알게 되면 독일의 영토확장에 대한 야심을 알아차리게 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며 2년 동안 비밀스럽게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위장망과 갈대를 덮고서 참호를 건설하는 등 작업을 하였으며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절 발표를 하지 않았으나 거대한 모습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게 되자 비로소 1938년에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세상에 밝히게 됩니다.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프랑스의 마지노선(Maginot Line)보다도 더 길이가 길었으며 벨기에의 국경 부분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런 단점을 없애기 위해 마지노선보다도 더 길게 방어선을 연장하여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국경선이라는 의미로 라인(Line)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 실체는 깊은 호를 가진 이중으로 된 요새화된 형태였으며 공격에 취약한 지점에 있는 참호의 주변으로는 더 깊게 라인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이런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아무도 독일을 침공할 계획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작업을 감행하였다면서 돈낭비, 시간낭비라고 폄하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배치되었던 장비와 무기들을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다시 방어가 필요하게 됨에 따라 오랜 기간의 방치로 허물어지고 녹슨 시설을 보수하고 다시 무기를 배치하기 위해 애초 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할 계획이었으나 1/3 정도인 36만 명의 연인원을 동원하여 보수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건설현장을 순시 중인 히틀러

 

연합군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뚫기 위해 치른 희생은 아주 큰 것이었는데 시간상으로는 거의 6개월이 소요되었고 연인원 25만에 달하는 연합군 병사들의 사상을 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무너지게 되고 전쟁은 끝을 맺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회색빛 잔해들은 냉혹한 당시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은 오늘 우리의 강토를 가로지르고 있는 휴전선도 빨리 사라지게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교사였던 그녀는 왜 칼을 들었을까?

교사였던 그녀는 왜 칼을 들었을까?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살고 있던 필리핀의 레이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4년 10월 20일 시작된 “레이테 전투”는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필리핀제도 전역을 탈환하게 되었는데 “레이테 전투의 숨겨진 이야기(The Hidden Battle of Leyte)”라는 책을 보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일본군에 의해 어린 소녀들마저 강간당하는 등 극심한 피해와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레이테의 주도인 타클로반(Tacloban)에서 교사로 생활하고 있던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는 일본군에 저항하여 손에 칼을 들고 반군의 무리를 이끌게 됩니다.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녀가 이끄는 반군은 레이테에서 연합게릴라전선을 조직하여 레이테의 해안지역으로 일본군들을 몰아넣음으로써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승리할 수 있는 큰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녀는 가스파이프를 절단하여 만든 산탄총과 볼로(Bolo)라고 하는 칼을 들고 싸웠으며 110명의 병력으로 2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고 이에 일본군은 그녀의 목에 1만 페소의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는 칼을 들고 싸우면서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의 목을 베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1944년 11월 3일 “The Lewiston Daily Sun”을 통해서 알려졌는데 1944년 11월 7일 사진작가 “Stanley Troutman”이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작가 “Stanley Troutman”이 찍은 아래의 사진은 미군이 레이테를 탈환한 후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가 미군 일병 “Andrew Lupiba”에게 어떻게 그녀가 일본군의 목을 베었는지 설명하는 모습이며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1996년이나 1997년경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이외의 군용 오토바이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이외의 군용 오토바이들

지난 번 포스팅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에서는 주로 미국과 독일 그리고 영국의 군용오토바이들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들 나라 이외의 나라들이 사용한 군용오토바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할리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미국에서 유럽으로 어떻게 운반했는지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스트리아의 PUCH 800

전쟁에 사용된 PUCH 800은 모두 민간용을 군에 징발하여 새로 페인트칠을 한 것이고 군에서 직접 주문을 한 모델은 사이드카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벨기에의 FN M12

벨기에의 “FN Company”는 1차 대전 이래로 벨기에군에 오토바이를 공급해오고 있었으며 1936년 M86모델을 최초로 군에 공급하였으나 이후 군에서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토바이를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M12 모델이었습니다.

M86

 

M12는 더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후진을 할 수 있었으며 사이드카에는 앞뒤로 모두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M12

 

▶ 체코슬로바키아의 CZ 175

체코슬로바키아군을 위해 개발된 오토바이로 거친 지형에 맞도록 제작되었으며 전륜에만 서스펜션이 있습니다.

 

▶ 프랑스의 Gnome-Rhone 750 Armée

1938년에 프랑스 육군을 위해 개발된 이 오토바이는 민간에 보급되었던 디자인을 강하고 무겁게 바꾼 것으로 사이드카를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인 750cc였으며 나중에 개량된 804cc의 AX2 모델이 보급되었습니다.

 

▶ 일본의 Type 97

보통 “Rikuo(陸王)Type 97″이라고 부르는 이 오토바이는 미국의 할리데이비슨을 모방한 것으로 때때로 기관총을 장착한 가벼운 사이드카를 달기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군용오토바이의 양대산맥은 역시 독일의 BMW와 미국의 할리데이비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번 글에서 독일 BMW의 R71과 R75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영국의 더글라스사가 전쟁 후 이것을 바탕으로 “Douglas Mark V”를 만들었으며 미국정부는 Harley-Davidson과 Indian 모두 R75와 같은 오토바이를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할리데이비슨이 BMW의 품질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앞바퀴의 프런트포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BMW는 내부에서 충격을 흡수하는 접이식 포크를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것에 반해 할리데이비슨을 보면 무언가 조잡해보임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좌: BMW 우: 할리데이비슨

 

그래도 미군과 연합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오토바이가 바로 할리데이비슨의 WLA(Harley-Davidson WLA) 모델이었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수송할 특수한 선박이 없었기 때문에 1대씩 분해하여 포장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해병과 새끼고양이의 숨겨진 이야기

해병과 새끼고양이의 숨겨진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미해병 1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종군기자였던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이 한 장의 사진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동료가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이 1,770여 개의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에 전파되어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일약 유명인사로 떠오르면서 “Kitten Marine, Korea”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수백 통이나 받았다고 하는데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이 새끼고양이에게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났다(Born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는 의미에서 “Miss Hap”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구한 새끼고양이의 어미는 레이션을 훔쳐 먹으려다 다른 병사가 쏜 총에 맞아서 죽었고, 남겨진 두 마리의 새끼 중 다른 한 마리는 미군병사에게 깔려 숨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한 새끼고양이가 나중에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를 위기에서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에 종군특파원으로 참전한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1947년 버밍엄뉴스(Birmingham News)에서 경찰을 취재하는 것으로 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한국전쟁 동안에는 해외에 파견된 미군들을 위한 신문인 “Stars and Stripes”의 소속으로 전장을 누볐으며 아래의 사진들이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한국전쟁에서 찍어 기고한 사진들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한국전쟁에서 부상당한 해군병사를 치료하는 위생병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진대회에 응모한 것이 1등에 뽑혀 시상식 참가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가 찍은 사진이 “군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는 출판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기소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법원서류를 해병대 지휘관이 찢어버리고 기소를 면하게 해주었는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는 새끼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사진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믿는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의 이런 생각이 맞는지는 검증할 방법이 없으나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해병대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이기 때문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기소를 면하고 무사히 돌아온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Stars and Stripes”의 도쿄지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새끼고양이와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판문점에서 한국의 정전협정에 관하여 취재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새끼고양이 “Miss Hap”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새끼고양이는 사무실의 마스코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프랭크 프레이터

 

그 후 새끼고양이 “Miss Hap”은 프랭크가 없는 동안 보살펴주었던 프랭크의 동료 콘래드 피셔(Conrad Fisher)가 입양하였고 그가 귀국하면서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한편 새끼고양이를 구한 프랭크는 종전과 함께 귀국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금년 2018년 1월 10일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산타페 국립묘지(Santa Fe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고, 프랭크는 그의 유언에서 자신의 묘지에 꽃을 바치는 대신에 그 돈을 동물애호협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그가 한국전쟁에서 새끼고양이를 구한 행동은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는?

미국이 참전한 전쟁 중에서 단일전투나 작전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것은 아마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미국의 역사에서는 4번째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26,277명의 전사자를 낸 “모이제-아르곤느 대공세”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통틀어서 전사자의 숫자를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는 현격하게 적은 수의 전사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전한 미군이 가장 많이 사망한 2차 대전은 모두 291,557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는데 1차 대전의 전사자는 모두 53,402명으로 순위로는 세 번째에 해당하고 두 번째로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쟁은 남북전쟁으로 모두 214,938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많은 미국인 병사들이 숨진 남북전쟁 동안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3,155명인데 이보다도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은 전투가 2차 대전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2차 대전 이후에 참전한 전쟁으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꼽을 수 있기에 분명 이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투는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의 초입에 있는 11월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지금, 포털의 검색어와 뉴스에는 블랙 프라이데이와 관련한 세일에 관한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위가 시작되는 11월 하순에 미국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10개의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를 비롯하여 4개의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전투가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에서 치러진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미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을 5개만 추려보면 이 중 4개가 한국전쟁에서 일어났는데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사자의 집계가 한국과 미국이 계산한 것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데 여기서는 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부산 교두보 전투(1950년 8월 4일~9월 18일)

북한군의 파상공세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아직도 정확한 참전 병력의 숫자나 희생자에 대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미군은 모두 4,599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2. 중공군 2차 대공세(1950년 11월 25일~12월 24일)

1950년 11월 28일 맥아더 장군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고 했을 정도로 전세가 역전되었던 전투인데 그 결과 중공군은 북한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게 되며 이로 인해 미군은 4,538명이 전사하였습니다.

 

3. 베트남전쟁 구정 대공세(1968년 1월 30일~9월 23일)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연합하여 베트남공화국과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 대하여 벌인 공세로 3,178명의 미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금방이라도 끝날 것만 같았던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는데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과 충돌하여 전투를 벌이며 철수한 작전이 바로 장진호 전투입니다.

 

그리고 전세가 불리해진 연합군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철수를 지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1·4후퇴의 시작이었는데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의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는 선적하고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12월 4일 부산항에 입항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이면에는 미군 제10군단장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의학박사 현봉학 선생의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며 미국 측의 기록으로는 모두 2,84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5. 제2차 청천강 전투(1950년 11월 25일~12월 2일)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였던 온정리 전투에서 승리한 중공군은 청천강 방어선의 종심 깊숙이 침투를 감행하며 계속 남하를 기도하였고 중공군이 두 번째로 청천강에서 유엔군과 벌인 제2차 청천강 전투의 결과, 미 8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38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1,489명의 미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주비행사도 귀환할 때는 세관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우주비행사도 귀환할 때는 세관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외국을 여행할 때면 누구나 작성하는 세관신고서는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그 기준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를 탐험하고 돌아오는 우주비행사들도 세관신고서를 작성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곳은 달에 착륙하여 지구로 귀환한 경험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미국의 NASA 뿐일 텐데, NASA에서는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실제로 1969년 7월 24일, 아폴로 11호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닐 암스트롱과 마이클 콜린스 및 버즈 올드린 등 3명의 우주비행사들은 공동으로 서명한 세관신고서를 호놀룰루 공항에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제출한 세관신고서를 보면 출발지가 발사지인 케이프 케네디(현 케이프커내버럴)로 되어 있고 중간기착지는 달이며 도착지가 호놀룰루로 기재되어 있고, 신고물품으로는 달에서 가지고 온 암석과 먼지 및 샘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관신고서에 작성된 날짜인 1969년 7월 24일은 아폴로 11호가 하와이 남서쪽으로 1,480㎞ 떨어진 곳에서 항공모함 USS호넷에 의해 구조된 날이고, 실제 하와이로 귀환한 날짜는 1969년 7월 26일이니 세관신고서에 기재된 날짜는 공문서 허위작성의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편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우리가 제출하는 검역신고서를 제출하는 대신에 항공모함 USS호넷의 갑판에서부터 특수하게 제작된 옷을 입고 휴스턴에 있는 검역센터로 이동하여 3주간 격리된 상태에서 세균이나 질병의 검사를 받았다고 하며 그 후 2번째 달 탐사선인 아폴로 12호와, 3번째 탐사선 아폴로 14호의 승무원들도 격리되어 검역을 받았다고 하는데 4번째 탐사선인 아폴로 15호부터는 달은 무균지역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검역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으로 우주비행사들의 세관신고서 작성의무에 대한 질문에 NASA의 대변인(Nicole Cloutier-Lemasters)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우주비행사들도 임무에 관계없이 항공편을 이용하는 관습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2010년 9월 2일 영국 데번 주의 토키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사망한 지 하루가 지난 89세 노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에일린 넌(Eileen Nearn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던 경찰이 유품에서 발견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으로 인해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드네임 “더 로즈”로 활약하였던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유명한 2개의 장미라고 하면 바로 에일린 넌(Eileen Nearne)과 도쿄 로즈 중의 한 명이었던 일본여성 “아이바 토구리”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시가 있어서 스파이들에게 붙는 코드명에 로즈란 단어가 사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히 에일린 넌(Eileen Nearne)은 게슈타포의 모진 고문에도 죽음을 불사하면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수용인원 12만 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는 6만 명이 숨진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는데 오늘은 그녀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2001년에 개봉한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샤롯 그레이”의 실제 모델이었으며 독일비밀경찰이 현상금 5백만 프랑을 걸면서까지 잡고 싶어 했던 인물인 “낸시 웨이크(Nancy Wake)”와 같은 SOE 소속의 스파이였습니다.

 

영화 “샤롯 그레이”의 한 장면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는 일명 처칠의 비밀부대라고도 불리며 2차 대전 당시 1940년 7월 22일에 조직되어 1946년 1월 15일까지 운영되었고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세계 17개 지역에 지부를 운영하였던 특수작전부대였는데 그녀는 낙하산을 이용하여 프랑스에 침투하였고 체포될 때까지 105차례나 주요정보를 영국으로 송신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21년 영국인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에일린은 1923년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덕분에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언니 재클린(Jacqueline)과 오빠 프란시스(Francis)와 함께 SOE요원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남매는 서로 SOE요원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니 재클린(Jacqueline)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막내 에일린과 그녀의 언니 재클린을 영국으로 피신시키는데 자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코틀랜드를 거쳐 영국에 도착한 다음 이전의 포스팅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이야기들”에서 귀족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한 부대를 이은 “응급의용간호부대(FANY: First Aid Nursing Yeomanry)”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와 언니의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곧 SOE에 가입하게 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서로는 SOE에 가입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에 침투하게 되어 언니 재클린은 자금과 무기 및 탄약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되고 에일린은 무전을 담당하게 됩니다.

1944년 3월 2일, 에일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지부장이었던 프랑스인 “쟝 사비(Jean Savy)” 휘하에서 근무하던 두 명의 요원은 어린 나이의 에일린에게는 너무 위험하니 돌아갈 것을 바랐지만 여의치 않아 그녀를 데리고 와서 런던과의 무전교신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4월이 되고 지부장 “쟝 사비(Jean Savy)”는 독일이 새로운 V1로켓을 개발하여 영국으로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남겨진 에일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게슈타포에 의해 동료들이 하나둘 체포되는 와중에도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영국에 정보를 전달합니다.

1944년 7월 21일, 밖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자신이 발각되었음을 깨달은 에일린은 비밀문서를 불태우고 무전기를 숨기는데, 서류는 모두 없앴지만 무전기가 발각되어 게슈타포(Gestapo)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랗게 끌려간 에일린은 자신은 프랑스인이며 단순한 사업상의 내용을 주고받은 것이라 항변하지만 게슈타포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비롯한 심한 고문을 가하게 됩니다.

 

영화 피메일 에이전트의 한 장면

 

모진 고문에도 자신이 스파이였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게슈타포는 할 수 없이 전쟁포로가 아닌 일반인 수용자의 신분으로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 보내는데 당시 전쟁포로들의 옷에는 아래와 같이 X자를 써넣어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수용소에 수감된 에일린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강제노동에 동원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고문은 계속되었지만 끝까지 그녀는 비밀을 지켰고 1944년 12월에는 라이프치히 근처의 “마르클레베르크(Markleberg)”로 이감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루 12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에일린은 다른 두 명의 프랑스인과 함께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게 되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마는데 자신들은 프랑스 출신의 자원봉사자임을 설득하여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당에 은신할 수 있게 됩니다.

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은 그녀들을 종탑에 숨겨주었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에일린은 1945년 4월 15일, 미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발견되어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비밀리에 투입되었던 여성 SOE요원은 모두 39명이었다고 하는데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영국으로 귀환한 에일린에게 프랑스정부는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을 수여하고 영국정부는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

 

그러나 에일린은 심한 고문으로 인한 심리적인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런던에서 그녀의 동생과 함께 생활하다가 1982년, 동생이 죽자 토키(Torquay)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에일린이 살던 토키의 아파트

그녀는 1층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정부의 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역사학자 “마이클 풋(Michael Richard Daniell Foot)”이 1966년에 발간한 책(SOE in France)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그녀의 생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다가 2010년 9월 2일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쓸쓸할 수도 있었던 그녀의 장례식은 영국 재향군인회(The Royal British Legion)의 주선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치러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주변의 이웃에게는 그저 고양이를 사랑하는 할머니로만 여겨졌던 에일린 넌(Eileen Nearne)을 생각하면 게슈타포의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는지 그저 경이롭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장례식의 모습

 

부디, 이제는 전쟁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장의 사진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의 양쪽에서 감동을 주고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에 국내의 모 정치인의 사진은 연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기만 합니다.

 

전 세계인이 즐기는 평창동계올림픽이 정치인들로 인해 변질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종목 중에서도 피겨스케이팅 종목은 먼 나라의 일로만 여겨지던 것이 김연아란 한 사람으로 인해 저변이 확대되고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국민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연아 선수를 생각하면 언제나 ‘아사다 마오’선수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7년 10월 24일 다케다 츠네카즈 일본 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만나 은퇴한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의 ‘평창 동계 올림픽 갈라 쇼’를 제안하기도 했었지요.

이렇게 ‘김연아’ 하면 떠오르는 ‘아사다 마오’는 안타깝게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세력에 의해 혐한(嫌韓)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서는 한국 때리기가 극심했는데 일본의 인터넷 우익작가(ネトウヨ) 햐쿠다 나오키는 “평창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자” “그런 시시한 올림픽은 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좋고 한국은 심판을 매수할 것이다”라는 등의 망언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은퇴한 아사다 마오는 여전히 일본의 국민적인 스타로서 현재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일본의 아베총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아사다 마오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과연 아베총리는 순수한 동기에서 아사다 마오를 팔로우하였을까 하는 점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아베의 핵심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우익층에는 아사다 마오의 팬들이 많고 그들이 아사다 마오를 혐한의 아이콘으로 악용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후지TV의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익들 사이에서는 ‘아사다 마오 전도 패널 사건’으로 불리고 있는데 후지TV의 이 프로를 보고 혐한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건의 내막을 조금 살펴보면 2008년 3월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아사다 마오를 출연시켜 놓고 아사다 마오가 넘어져 실수하는 장면을 부각시킨 것을 두고 당시 한류와 관련한 방송 프로그램이 제일 많았던 후지TV가 아사다의 우승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적인 방송을 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면서 항의가 쇄도하였고 급기야는 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방속 직후에 후지TV에서 해명한 보도자료를 “아사다 마오의 승리에도(불구하고) 김연아 선수와의 실력차이(가 난다)”는 편향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것과 “실수가 없었으면 김연아 선수가 이겼을 것” “실력은 김연아가 최고”라는 후속기사가 더 큰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며 방송에서 이런 발언을 한 해설자는 더 이상 출연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급기야는 김연아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를 두고는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을 3번이나 성공시킨 것에 비해 그다지 난이도 높은 기술을 구사하지 않은 김연아가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애매한 기준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양산하게 된 것의 이면에는 이런 우익세력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내세웠던 “기술은 아사다, 표현력은 김연아”라는 언론의 논조에 대해서 “김연아는 기술점수 중 GOE(가산점)가 너무 높다” “점프의 질을 보면 높이와 비거리, 속도 등에서 김연아는 다른 선수에 비해 월등히 강하기 때문에 높은 GOE를 받는 것”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도하는 언론과 인사들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한 기사는 국적(國賊)이라는 등의 극언으로 공격을 받았고 이런 현상은 근래에 들어 일본의 아베총리를 비판하는 인사와 언론에 대하여 ‘반일’ ‘귀화한 조선인’ ‘국적’ ‘편향보도’라고 공격하고 있는 현상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은퇴한 아사다 마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후지TV에 대한 데모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세력을 확대한 우익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아베총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아사다를 팔로우 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아사다 마오를 좋아하는 팬들은 분명 한국에도 있을 것이고, 동시대의 라이벌이기는 했어도 김연아와 아사다가 서로에게 더욱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준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을 것이기에 빙판 위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펼치던 두 사람에 대한 추억은 아름답게 남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더 이상 정치인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들은 없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국내 정치인들에게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

탄도미사일(ballistic missile)이란 순항미사일과는 달리 추진체의 연료를 모두 사용하면 중력을 이용하여 활공하다가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인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여기서는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전술 탄도미사일(TBM: Tactical ballistic missile)

전술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300㎞ 미만으로 최전선에서 발사하기 때문에 주로 전술상의 목표가 되는 적의 지휘소, 집결지와 같은 곳을 목표로 운용되는데 국경이 맞닿은 나라들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스라엘이 개발한 “프레데터 호크(Predator Hawk)”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개발한 “프레데터 호크”는 140㎏의 탄두를 가진 미사일을 발사하여 300㎞의 표적을 10미터의 오차범위에서 명중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Short-range ballistic missile)

사거리 1,000㎞ 이하의 미사일로 대표적인 것이 중국이 가지고 있는 동풍15(東風15) 일명 DF-15라고 하는 것으로 최신형인 DF-15C는 사거리 700㎞로, 속도는 마하 6 이상이며 명중률은 5미터 내외로 알려져 있고 벙커버스터를 탑재하여 지하의 목표물을 파괴할 수도 있는데 중국은 한국을 목표로 DF-15 미사일 1개 여단을 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Intermediate-Range Ballistic Missile)

사거리 1,000~2,500㎞인 준중거리탄도유도탄(MRBM)보다는 사정거리가 길고, 사거리 5,500㎞ 이상인 ICBM보다는 사거리가 짧은 것으로 보통 3,000㎞ 미만의 사거리를 가지는 탄도미사일을 말합니다. 주로 핵무기를 보유한 중소국가가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의 로동 1호, 대포동 미사일, 무수단 미사일이 있습니다.

 

▶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3,500㎞에서 6,000㎞ 정도로 1990년대 이전에 미국, 중국, 러시아가 대량 배치하였으나 현재는 개발하지 않고 있는 유형의 것으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개발에 나선 나라가 북한으로 특히 화성 12호의 최초 비거리가 2,200㎞였던 것을 최대사거리를 5,500㎞로 높이는 시험을 계속하는 바람에 이것을 두고 “IRBM이다, ICBM이다”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방어체계가 이지스함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밖에 없는 일본이 이에 대비하여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난번 포스팅에서 얘기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인 것입니다.

 

▶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5,500㎞ 이상인 것으로 규정한 이유는 미국과 러시아를 잇는 최단거리가 바로 5,500㎞이기 때문인데 개발 자체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만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간로켓을 개발하는 기술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액체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적의 미사일 발사에 대항하려면 연료주입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ICBM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개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ICBM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ICBM을 탐지하기 위해 해상기반의 전용레이더인 “X밴드 레이더(Sea-based X-band Radar)”를 운용하고 있는데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한창 고조되던 당시에 태평양으로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미사일 발사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가 유일하며 미사일이 발사된 후의 궤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미사일 발사에서부터 궤도를 추적하고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국의 지원 없이 단순히 요격미사일만 배치하는 것으로는 완벽한 방어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영화 007 골드핑거의 숨은 이야기

영화 007 골드핑거의 숨은 이야기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이 11월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007의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 중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가장 잘 어울렸다고 생각하는 숀 코네리는 번외편인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까지 포함한다면 로저 무어와 함께 가장 많은 7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었다.

제1대 007이라는 것을 떠나서 로저 무어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숀 코네리가 주연을 맡았던 1964년 작 007 골드 핑거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007 시리즈의 3번째 작품인 숀 코네리 주연의 ‘골드핑거’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마도 22편인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도 오마쥬했던 아래의 장면일 것이다.

 

골드핑거

 

퀀텀 오브 솔러스

 

골드핑거에는 실제 첩보원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든 씬이 있는데 숀 코네리가 흰색의 턱시도 위에 잠수복을 착용하고 침투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으로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 특수작전수행대(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s)와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했던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의 경험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런 내용은 영국의 케이스 제프리(Keith Jeffery)란 역사학자가 쓴 ‘MI6’란 책을 통해서 공개가 되었다.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 9월에 해군장교후보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저항조직인 오드딘스트(Ordedienst)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나치와 싸우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지휘부의 판단에 따라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영국정보국과 접촉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영국으로 잠입하여 2명의 대원과 함께 망명해 있던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과 연락하고 여왕의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영국 비밀정보부로부터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라는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이 작전은 네덜란드 공군조종사였던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 수립한 것으로 네덜란드의 저항세력을 해외로 도피시키거나 잠입시키는 것이 주된 임무인 작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란 사람도 영화와 관련이 있는데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이란 글에서 언급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에서 실제로 포로생활을 했던 그는 세 번의 시도 끝에 1944년 3월 24일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에서 제임스 코번이 맡았던 루이스 세드윅(Louis Sedgwick)이란 배역의 모델이 바로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었다고 한다.

 

앞줄 왼쪽이 제임스 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 작전은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처음으로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이때 작전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와 에릭 하젤호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를 비롯한 4명의 대원들이었다.

1941년 11월 23일 밤, 이들 4명은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휴양도시 스헤브닝겐(Scheveningen)에 잠입하여 저항군으로 활동하던 2명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맡고 조그만 배를 타고 해안으로 접근한 다음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잠수복 안에 흰색이 아닌 검정색 턱시도를 착용하고 에릭 하젤호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는 그 위에 브랜디를 부었다.

 

왼쪽: 태즐라, 오른쪽: 로엘프제마

 

그런 다음 해안에 닿은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잠수복을 벗고 술 취한 연기를 하며 나치장교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저항군을 탈출시키기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무전기마저 고장이 나고 탈출작전을 독일군들이 눈치채는 바람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공로를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최고 군사훈장(Military William Order)도 받고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의 보좌관으로도 채용된다.

 

귀국하는 빌헬미나 여왕을 영접하는 태즐라(우측)와 로엘프제마(맞은편)

 

국내 언론을 보면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 작전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100% 틀린 사실로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에게는 마지막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계속 실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하는 반역자가 나오는 바람에 저항군들이 희생되었던 영화와도 같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내용은 영화 ‘007 골든핑거’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은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각본을 썼던 폴 덴(Paul Dehn)이 알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만일 폴 덴(Paul Dehn)이 이런 사실을 알고서 썼다면 영국 정보당국의 비밀 관리체계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고, 그렇지 않고 모르고 썼다면 상상력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쓴 것이었다면 결국 역사학자인 케이스 제프리(Keith Jeffery)가 쓴 ‘MI6’란 책은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한 거짓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