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Oyster) 껍질에 찢겨 숨진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

굴(Oyster) 껍질에 찢겨 숨진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

굴이 제철을 맞았다.

얼마 전 포스팅했던 “헤밍웨이의 유작(遺作) 파리는 날마다 축제(원제: A Moveable Feast)”에도 굴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문을 잠깐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약한 금속 맛과 함께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굴을 먹으면서 금속 맛이 차가운 백포도주에 씻겨 나가고, 혀끝에 남는 바다 향기와 물기를 많이 머금은 굴의 질감이 주는 여운을 즐기는 동안, 그리고 굴 껍데기에 담긴 신선한 즙을 마시고 나서 상쾌한 백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동안, 나는 공허감을 털어 버리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As I ate the oysters with their strong taste of the sea and their faint metallic taste that the cold white wine washed away, leaving only the sea taste and the succulent texture, and as I drank their cold liquid from each shell and washed it down with the crisp taste of the wine, I lost the empty feeling and began to be happy and to make plans.”

헤밍웨이가 굴에서 느꼈다는 금속 맛은 철의 맛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의 우유라고 하는 굴은 구리와 아연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혀끝을 살짝 찌르는 쓴맛과 신맛은 구리 맛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은 제철을 맞은 굴(Oyster) 껍질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죽어야 했던(?) 그리스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히파티아(Hypatia)가 활동했던 시기는 동로마 시대였고, 역사상 가장 먼저 굴 양식을 했던 것도 로마제국이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굴 양식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굴의 양식이 시작된 것은 동양보다는 서양이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만큼이나 역사를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중국도 2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들도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굴의 양식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북송시대의 시인인 매요신(梅堯臣)이 쓴 오언절구인 식호(食蠔)이다.

식호(食蠔)란 제목은 글자 그대로 굴을 먹는다는 것인데 이 시는 매요신(梅堯臣)이 근무지를 옮기기 전에 휴가를 받아 친구와 여행 중에 들른 광동성 주강 하구의 어촌에서 난생처음으로 생굴을 먹고 그 맛에 놀란 것을 적고 있으며 그 중에는 굴 양식에 대한 정경을 묘사한 내용도 있다.

※ 성유(聖兪)는 매요신(梅堯臣)의 자다.

이번에는 서양의 역사를 둘러보자. 2017년 영국의 일간 텔레그래프는 기원전 55년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을 침공한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그런데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을 침략한 이유는 템즈강 유역에서 나는 굴을 원해서였다.

로마제국이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침략은 하더라도 약탈은 하지 못하게 명령함으로써 침략을 당한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인 것도 있는데 약탈은 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바람에 침략에 동원된 군인들은 식량을 알아서 조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이 진군하는 곳이 육상이면 밀을,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는 굴을 양식하면서 진군을 해나갔다.

그러나 굴 양식에 어떤 특별한 비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갯벌에 굴을 뿌려 번식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아주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굴 양식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그리스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혹시 2011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아고라를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바로 히파티아(Hypatia)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러나 히파티아(Hypatia)의 죽음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보니 저마다의 상상력이 동원된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폭도들이 히파티아를 붙잡아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칼로 피부를 도려내려 하는데 그때 포스터의 왼쪽에 있는 다보스가 나서서 더러운 이교도의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자 폭도들은 돌을 던져 그녀를 죽이기로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돌을 구하러 폭도들이 나간 사이 다보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히파티아를 질식시켜 숨지게 하고는 폭도들에게는 그녀가 기절했다고 하면서 돌아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히파티아의 시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폭도들의 모습이 나오고 이어서 그녀의 시신은 거리를 끌려다니다 불살라졌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영화에서 그려지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모습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쓴 책, 로마 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가 끼친 영향이 너무도 크기에 국내 포털에도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로 찢겨나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은 불속으로 던져졌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것은 4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라고도 부르는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가 쓴 책 ‘히파티아 살인(The Murder of Hypatia)’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영문판에서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타일을 이용하여 살해했다(Where they completely stripped her, and then murdered her with tiles.)”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사용된 타일(tiles)이 굴껍데기를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상상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인 신부 로버트 바론(Robert Barron)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무슨 근거로 히파티아가 굴껍질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가 그리스어로 쓴 책에서 히파티아는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어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는 굴껍데기를 뜻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그리스어에 해당하고 이전에는 굴껍데기란 의미로 국한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다.

1889년에 발간된 리들 앤 스콧의 희영사전에는 가장 첫 번째로 오스트라콘(ostrakon)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스어 오스트라콘(ostrakon)은 복수형이 오스트라카(ostraka)이며 깨진 도자기나 꽃병의 조각을 의미하며 투표를 할 때 투표용지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체제에 위협적인 인물을 추방할 때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 제도를 오스트라시즘(Ostracism: 도편추방)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다른 어떤 동물의 껍질일 수도 있고, 깨어진 테라코타의 조각일 수도 있는 것을 굴껍데기로 단정지은 것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상상력이었고, 또 일반은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 그리스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는 굴 껍데기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히파티아의 살인에 동원된 파라발라니(Parabalani)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면서 글을 마친다.

파라발라니(Parabalani)를 짧게 소개하면 사회의 하층계급에서 선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주교(主敎)의 경호임무를 수행하면서 때로는 상대방과의 폭력충돌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히파티아(Hypatia)의 살해에 동원되었던 것이었다.

금발은 머리가 나쁘단 편견은 언제 생겨났을까?

금발은 머리가 나쁘단 편견은 언제 생겨났을까?

“우리는 마릴린 먼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은 편견에 가득 차 있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금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인 ‘마릴린 먼로’에게는 항상 백치미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오늘은 금발인 여성들은 머리가 나쁘다거나 멍청하다는 편견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그 유래를 한번 더듬어 볼까 한다.

예로부터 영어권에서는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근거한 ‘금발머리 농담(Blonde joke)’ 또는 ‘멍청한 금발 농담(Dumb blonde jokes)’이란 것이 있는데 금발을 뜻하는 단어를 남성(blond)이 아닌 여성(blonde)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또 다른 성적 불평등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이런 농담(Blonde joke)의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① 금발머리, 빨간머리, 갈색머리를 가진 3명이 사막에 고립되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마술램프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빨간머리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비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고, 다음은 갈색머리가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과 함께 사라졌다. 마지막 금발머리가 빈 소원은? “아~ 내 친구들이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② “금발머리가 911에 전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11번 버튼을 못 찾아서.

③ 퍼즐을 반년 만에 드디어 완성한 금발은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 이유는 상자 겉면에 적힌 말 때문이었는데 거기에는 “2 to 4 years”라고 적혀 있었다.

왜 이렇게 금발의 여성을 비하하는 편견이 생겨난 것일까? 금발여성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은 특히 ‘금발에 대한 고정관념(Blonde stereotype)’이라는 별도의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런 편견과는 달리 금발이 옛날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날 때부터 금발인 사람은 많지 않음에 대한 반증임과 동시에 금발이 매력적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금발의 가발이 고가에 거래되었고 여성들은 코코넛 오일에 식초 등을 섞어 만든 염료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두고 시인이었던 프로페르티우스(Sextus Propertius)는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머리를 염색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경의 대상이자 매력적으로 생각되었던 금발머리의 여성들은 언제부터 멍청하다거나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들은 원조는 18세기 프랑스의 ‘로잘리에 듀테(Rosalie Duthé)’라는 여성이다. 수녀가 되려던 그녀는 따분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수녀원을 나온 다음, 나중에는 미모를 무기로 영국과 프랑스 사교계에서 귀족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중에는 나중에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여성들에게 정숙함과 고귀함이 요구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 ‘로잘리에 듀테(Rosalie Duthé)’는 말을 하기 전에 잠시 침묵을 하는 버릇을 들였는데 이를 두고 아름답긴 하지만 어딘가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것이 그녀가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을 갖게 만든 최초의 여성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조안나 피트만(Joanna Pitman)’이란 사람에 의해서 대중들에게 그렇게 각인되어버리고 만다.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역사학자인 ‘조안나 피트만(Joanna Pitman)’은 금발머리에 대하여 기술한 그녀의 저서 ‘On Blondes’에서 “로잘리에 듀테는 공식적으로 최초의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Rosalie Duthé acquired the dubious honour of becoming the first officially recorded dumb blonde)”고 표현함으로써 서구사회에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2016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제이 자고르스키(Jay Zagorsky)’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미국 베이비 붐 세대 1만9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금발머리의 여성이 오히려 IQ가 조금 더 높게 나왔으나 금발이 더 똑똑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금발이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경의 대상이자 매력의 상징이었던 금발머리의 여성이 멍청하다는 편견을 얻게 된 이유로는 영화의 힘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공(?)이 컸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금발머리의 여성은 아름답지만 멍청하다는 편견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먼로의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Gentlemen Prefer Blondes)’이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가 맡은 로렐라이라는 역은 프랑스대륙에 유럽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식은 부족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베프(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라는 말을 할 정도로 돈만을 보고 결혼을 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그러나 정작 영화는 내로남불 식의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먼로에게는 ‘섹시 심볼’, ‘백치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지만 정작 먼로는 금발머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모습이 그대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과 관련하여 영국의 ‘아네트 쿤(Annette Kuhn)’은 그의 저서 ‘The Women’s Companion to International Film’에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발여성에 대한 편견을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 차가운 금발(Ice-cold blonde)

차가운 외모를 가졌지만 내면에는 불타는 감정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경우인데 대표적으로는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Grace Patricia Kelly)’를 꼽고 있다.

 

■ 섹시한 금발(Blonde bombshell)

폭발적인 섹시함으로 남성들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된 경우로 당연히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도 포함되어 있다.

■ 멍청한 금발(Dumb blonde)

섹시하지만 철부지처럼 조금은 모자란듯하게 그려지는 것으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그로 인해 곤란함을 겪게 되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며 대표적인 배우로는 1920~1930년대에 활약한 ‘매리언 데이비스(Marion Davies)’를 들고 있다.

한편 1999년 영국 ‘코번트리 대학교(Coventry University)’의 연구는 금발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금색, 은색, 갈색, 빨간색의 4가지 가발을 같은 모델에게 쓰게 하고 60명을 대상으로 그 느낌을 조사한 결과, 금발과 은발은 다른 색깔에 비해 지능이 낮아 보인다는 대답이 많았고 금발은 특히 매력적이란 평가가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우리사회를 뒤집어놓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경찰과 검찰에 대한 불신이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지, 입법·사법·행정 할 것 없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마릴린 먼로’에게 백치미란 수식어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처럼…

워털루 전투가 만들어낸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

워털루 전투가 만들어낸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

이미지 by sportiqe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엘바 섬(Elva Island)으로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섬을 탈출하여 다시 권력을 장악하자 유럽 각국은 이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이 지휘하는 영국군 9만5천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줄여서 흔히 폰 블뤼허로 부른다)가 이끄는 12만의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의 12만5천 병력과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Waterloo) 교외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이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815년 6월 16일, 벨기에의 작은 마을인 꺄뜨흐 브하에서 전초전 격의 전투가 일어나 미셀 네(Michel Ney)가 이끄는 프랑스군 4,140명과 웰링턴의 병력 4,8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데 이 전투를 꺄뜨흐 브하 전투(Battle of Quatre Bras)라고 하며 연합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승패를 가를 수 없는 결과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톰슨(1875년작) 꺄뜨흐 브하 전투

 

당시 꺄뜨흐 브하 전투(Battle of Quatre Bras)를 지휘하던 웰링턴의 비서는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이란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에밀리(Emily Harriet Wellesley-Pole)는 웰링턴의 조카였다. 1814년 8월에 결혼을 하고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불과 수주일 전에 예쁜 딸을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은 프랑스의 저격병에 의해 총상을 입고 팔을 절단하게 된다.

Emily Harriet Wellesley-Pole

 

오른팔이 절단 된 채 가까운 농가로 피신한 피츠로이 서머셋은 “오른손에 있는 결혼반지를 찾아야 하니 절단된 팔을 가져다 달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815년 6월 19일에 웰링턴이 직접 편지를 써 피츠로이 서머셋의 형에게 그의 부상소식을 전한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피츠로이 서머셋의 의지력은 남달랐던 모양으로 아직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법도 하지만 그는 2주일이 되기도 전에 왼손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아래의 사진이 그가 보낸 편지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이는 옷을 입고 벗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칼을 휘두른다던지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은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에 의뢰하여 일상생활에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소매가 몸통과 연결된 각도를 크게 만드는 디자인의 옷을 제작하게 된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이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소매를 채택한 옷은 그 편리함 때문에 이후에 사냥이나 스포츠용 의류에 채택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는데 왜 피츠로이 서머셋의 의뢰로 개발된 옷이 피츠로이 소매나 서머셋 소매가 아니고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로 불리게 되었던 것일까?

1952년에 피츠로이 서머셋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웨일즈 남동쪽 몬 마우스셔(Monmouthshire)에 있는 래글런(Raglan)의 남작지위를 받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 그의 이름 뒤에 ‘라글란의 첫 번째 남작(1st Baron Raglan)’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에서 개발한 소매 디자인이 정확히 언제부터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으로부터 유래된 것임은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래글런(Raglan)이란 수식어가 붙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1864년에 정식으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전쟁의 아픔에서 유래한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으로는 금년에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류현진 선수가 몸담고 있는 메이저리그 야구경기를 예로 들 수 있는데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쿠어스필드에서 내일 열리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류현진의 승리를 기대해본다.

1조6천억 원의 현금 수송작전

1조6천억 원의 현금 수송작전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뒤 1945년 10월 2일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6년 반 동안 일본은 미군의 지배를 받는 소위 미군정체제하에 놓이게 됩니다. 그러나 오키나와는 1972년 5월 15일 반환될 때까지 27년간을 미군의 통치를 받았는데 이 시기를 오키나와 방언으로 “아메리카유우(アメリカ世)”라고 합니다.

오키나와에서 미군은 류큐열도미국군정부(USMGR: 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of the Ryukyu Islands)와 그 후신인 류큐열도미국민정부(USCAR: United States Civil Administration of the Ryukyu Islands)를 수립하여 오키나와를 일본으로부터 떼놓기 위한 시도를 하였지만 실질적인 지배는 일본인이 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1950년 9월에 있었던 투표로 선출된 주지사와 의원들이 일본복귀를 선언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꼭지가 돌아버린 미군이 1950년 12월 15일 USCAR을 통해서 행정권을 장악해버리게 되면서 오키나와를 비롯한 류큐제도의 기축통화는 일본 엔화에서 달러화로 바뀌게 되었는데 이처럼 일본본토와는 달리 달러화를 사용해오던 오키나와가 일본에 반환되게 되자 사용하는 돈도 달러에서 엔화로 바뀌어야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조사에 의하면 오키나와 주민들이 보유한 자산은 6,000만 달러로 계산되었고 여기다 법인의 자산과 신고를 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일본은행에서는 1억 달러 정도로 추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예비비를 포함하여 일본은행은 당시의 금액으로 총 542억 엔을 지폐 517억 엔(무게 22톤)과 동전 25억 엔(무게 293톤)으로 준비하여 달러와 엔화를 교환하기로 계획하였습니다.

당시의 환율(1: 360)을 현재가치로 환산한 일본 총무성 통계국의 자료에 의하면 542억 엔의 금액은 현재는 한화로 1조 5,400억 정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최초의 계획은 비행기로 운반한다는 것이었으나 총 무게가 315톤에 달하고 3톤짜리 컨테이너의 개수만 161개에 달해 무리라는 판단에 따라 해상운송으로 바꾸게 되는데 이 역시도 민간화물선으로 운반하게 되면 오키나와 반환이나 미군기지 철수 등의 문제로 사회가 불안정한 상태여서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자위대의 도움을 받아 수송하기로 결정을 하게 됩니다.

당시 일본의 해상자위대는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3척의 LST(탱크상륙함: Landing Ship Tank)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오오스미급 LST4001과 2번함 시모키타 4002, 3번함 시레토코 4003이 그것이었습니다.

4001 오오스미

 

4003 시레토코

 

기준배수량 1,650톤 만재배수량 4,080톤으로 최대속력 11노트를 낼 수 있는 이 수송함들은 LST4001가 40mm기관포 1문, LST4002와 4003은 40mm연장기관포 1문씩으로 무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40mm연장기관포

 

1971년 6월 17일에 오키나와의 반환협정이 체결되고 공식적으로 반환된 1972년 5월 15일 전인 4월 26일 새벽 2시에 500여 명에 이르는 경찰병력의 삼엄한 경계 속에 일본은행을 떠난 돈을 담은 컨테이너는 오이부두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송함에 무사히 전달됩니다.

드디어 4월 27일 호위함 3척과 P2V대잠초계기의 경비 속에 부두를 출발한 배는 5월 2일 미군이 관리하는 나하군항으로 입항하여 헌병과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일본은행 나하지점의 지하금고에 무사히 돈을 수송하는 임무를 마치게 됩니다.

 

P2V대잠초계기

 

그러나 수송함들은 즉시 귀환하지 못하고 며칠을 나하에서 대기해야 했는데 이번에는 엔화와 교환한 달러를 싣고 와야 하는 임무가 남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왕복으로 현금을 수송하는 비용만 현재의 금액으로 한화 44억원 정도가 들었다고 하며 보험료로 18억원을 지불하였다고 하는 이 세기의 현금수송작전은 안전하게 마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현금수송 중인 당시의 트럭

영화 같았던 카바나투안 포로수용소 구출작전

영화 같았던 카바나투안 포로수용소 구출작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10대 잔악행위” 중에서 1944년 12월 14일에 팔라완 섬을 수비하던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미군포로들의 대학살이 있고나서부터 미군이 일본군의 감옥과 포로수용소를 공격하는 해방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고 하는 것을 알아본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2차 대전 당시 포로수용소를 공격하여 포로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영화에서나 봄직한 방법으로 수행한 것이 있으며 이 작전은 실제로 2005년에 “그레이트 레이드(THE GREAT RAID)”란 제목으로 영화가 개봉되기도 하였는데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카바나투안 공습(The Raid at Cabanatuan) 또는 대공습(The Great Raid)이라고도 불리는 필리핀의 카바나투안(Cabanatuan)에 있었던 포로수용소를 공격하여 포로들을 구출하는 작전은 맥아더 장군이 팔라완에서 일본군에 의해 미군들이 살해당한 사실을 보고 받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팔라완 포로수용소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생존자 중의 한 명인 유진 닐슨(Eugene Nielsen)이 1945년 1월 7일 미육군정보국(US Army Intelligence)에 이 사실을 전달했고 1944년 10월 필리핀 해방을 위하여 레이테섬(Leyte)에 도착해 있던 맥아더 장군이 이 보고를 받으면서 즉시 카바나투안에 있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포로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수립하도록 지시함으로써 마침내 1945년 1월 30일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카바나투안(Cabanatuan) 수용소의 포로들

 

맥아더 장군의 지시를 받은 로버트 프린스(Robert W. Prince) 대령은 헨리 무치(Henry Mucci) 중령이 지휘하는 제6 레인저 대대의 C중대와 F중대를 차출하여 작전에 대한 브리핑을 마친 다음, 지원자를 모집하였는데 단 한 명도 빠짐없이 모두가 지원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 결과 인원을 선별하여 C중대원 90명과 F중대의 병력 30명을 주력으로 80명의 필리핀 게릴라들의 도움을 받아 작전을 감행하기로 하고 2개 팀으로 구성된 14명의 선발대를 먼저 파견하여 정찰임무를 하도록 하였습니다.

14명의 선발대는 알라모 스카우트(Alamo Scouts)라고 하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 태평양 지역에서 활약한 미 제6군 특수정찰부대(US 6th Army Special Reconnaissance Unit)원들로서 이 부대는 1943년 11월 28일 뉴기니(Fergusson Island, New Guinea)에서 창설되어 남서태평양지역에 대한 침투와 정찰임무를 수행하였으며 1988년에 미군 특수부대(US Special Forces)로 정식 인정을 받았습니다.

 

헨리 무치 중령과 알라모 대원들

그런데 여기까지만 보면 여타의 작전들과 큰 차이가 없지만 이 구출작전이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였던 것은 구출자의 인원수도 한 요인이지만 일본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감행된 비행기의 저공비행이 큰 이유였습니다.

작전이 감행되는 시간은 해가 지고 나서부터 1시간 정도인데 달이 뜨게 되면 움직임이 일본군에게 노출되어 실패할 우려가 있었고 일본군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짜낸 묘안이 바로 비행기를 동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작전에 동원된 비행기는 2차 대전 당시 미국이 개발한 야간전투기인 P-61 블랙위도우(Black Widow)로써 레이더를 장착한 미국 최초의 전투기이여 당시 미육군항공대가 보유한 전투기 중에서는 가장 큰 기종이었습니다.

 

P-61 블랙위도우(Black Widow)

 

일부 블로그를 보면 2명의 조종사가 출격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정보이며 작전에 동원된 전투기는 1대로써 조종사는 케네스 슈라이버(Kenneth Schreiber) 대위였고 레이더병으로 보니 럭스(Bonnie Rucks) 중위가 탑승하였는데 보니 럭스를 조종사로 오인하여 2대가 출격하였다고 하는 것이며 곡예비행이 아니라 엔진을 끄고 비행을 함으로써 일본군들의 시선을 모으게 되었던 것입니다.

조종사 케네스 슈라이버(Kenneth Schreiber) 대위는 포로수용소에서 약 450미터 떨어진 지점에서부터 2개의 엔진 중 1개를 끄고 고도를 낮추어 비행함으로써 추락할 것 같은 모습을 연출하였고 여러 차례의 비행 끝에 고도 61미터 지점에서 수용소로부터 9미터 떨어진 곳에 추락하여 비행기를 화염에 휩싸이게 함으로써 일본군들과 포로들의 시선을 끌 수 있었으며 이 기회를 이용하여 주력부대와 필리핀 게릴라들이 통신선을 자르고 가까이 접근하여 공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성공적인 작전의 결과로써 미군 464, 영국군 22, 네덜란드군 3명 등 489명의 군인과, 미국인 28, 노르웨이인 2, 그 외 영국인, 캐나다인, 필리핀인 각 1명씩 모두 33명의 민간인을 구출함으로써 총 522명을 구조하였으며, 2명의 레인저 부대원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필리핀 게릴라 20명이 부상을 당하는 것으로 작전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카바나투안 수용소는 1945년 사망한 미군포로들의 사체를 발굴하여 이장한 뒤 필리핀 정부에 의해 1990년대에 공원으로 조성되어 현재는 당시에 사망한 미국인 수감자 2,656명을 기리는 기념벽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마약으로 물든 베트남전쟁

마약으로 물든 베트남전쟁

버닝썬 사건으로 비롯된 마약범죄에 대한 단속의 손길에 의해 53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입건되었고, 오늘자 뉴스에 의하면 SK그룹 창업주의 손자인 최영근씨와 고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손자인 정모씨(28)도 대마를 구입한 혐의로 입건되었다고 한다.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는 마약을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사용한 것은 역사적으로 오래 되었는데 미 국방부의 1971년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51%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28%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복용했으며 31%는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를 복용했다고 한다.

또한 미하원의 보고서는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2억2천5백만 통의 각성제를 베트남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이 사용하였다고 하는데 긴 전쟁에서 지구력을 강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암페타민이 사용되기도 했고 불안과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 각종 진정제들이 무분별하게 사용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병사들의 마약과 기분전환제의 사용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비공식적으로는 허용되고 있었기에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마리화나는 군대 내에 만연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이런 방임적인 미국정부의 태도를 질타하는 기사를 종군기자였던 존 스타인백 4세가 언론에 기고함으로써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의 75%가 마약을 복용하였다는 사실이 대중에 알려져 미국정부에서 규제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왼쪽이 존 스타인백 4세

 

여론에 떠밀린 미국정부에서는 마리화나를 소지한 병사 약 1천 명을 체포하고 마리화나 재배지를 파괴하였지만 이것은 오히려 마리화나 대신에 헤로인을 복용하는 병사들을 증가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Vietnam War Soldiers Smoking Marijuana

 

미국 내에서의 반전여론이 드높던 시절, 군인들의 마약복용 사실이 알려짐으로써 사회여론은 더욱 악화되었으며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던 ‘토마스 J. 도드(Thomas J. Dodd)’는 미군들의 잔악행위와 특히 ‘미라이 학살’은 불법약물의 사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참고로 ‘미라이 학살(My Lai Massacre)’은 1968년 3월 16일, 미군들이 베트남 미라이에 거주하던 민간인을 최대 504명이나 학살한 사건으로 희생자들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들이었으며 성폭력과 고문을 당하기도 했고 희생자 중 일부는 신체가 절단된 채 발견된 사건이다. 그러나 가담한 26명의 미군들 중에서 오직 한 사람 ‘윌리엄 켈리’중위만이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이라고 한다.

한편 이처럼 마약류와 기분전환제의 복용이 만연했던 베트남전쟁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는 대중의 시선이 곱지 않자 미국정부에서는 1971년부터 ‘골든 플로우 작전’이란 것을 실시하게 된다.

‘골든 플로우 작전(Operation Golden Flow)’은 당시 백악관 마약국장이던 ‘제롬 자페(Jerome Jaffe)’의 지휘로 1971년 9월부터 베트남전쟁에서 귀국하는 병사들의 약물검사를 실시하여 소변에서 마약성분이 검출되면 비행기에 오르지 못하게 하고 베트남에서 해독과정을 거친 후라야만 귀국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이런 ‘골든 플로우 작전(Operation Golden Flow)’은 3달 전인 1971년 6월에 발표되었고 실시된 것은 1971년 9월부터였기에 이 작전의 결과 귀국하지 못한 병사들의 비율은 4.5%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

출처: CNN(Vietnam, heroin and the lesson of disrupting any addiction)

물론 이러한 결과에 의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많은 군인들이 마약에 중독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과장되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병사들의 마약류 복용을 감소시키는 데에는 일조한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들의 불안감과 스트레스를 완화시킬 목적으로 사용되었던 약물들은 미군지휘부의 조사에 의해 전혀 전투력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대신에 충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효과적임이 판명되었다.

버닝썬과 같은 곳에서 사용된 마약류를 무슨 이유에서 복용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결코 정신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밝혀진 사실이고, 게다가 그들이 사용한 마약의 용도가 불순한 범죄와 연관되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번 기회를 사회에 만연한 마약범죄의 뿌리를 뽑는 계기로 삼아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쟁과 콘돔(Condoms)

전쟁과 콘돔(Condoms)

피임이나 성병의 예방이 목적인 콘돔(condoms)이 평창동계올림픽 기간 동안 11만개나 배포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데 이는 선수 1인당 하루 평균 2개씩 쓸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한다. 조직위원회에서 이처럼 많은 양의 콘돔을 무슨 이유 때문에 배포했는지는 순진한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크게 피해를 보는 것이 어린이와 여성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일이지만 여기서는 여성들이 당하는 성폭행 등의 세부적인 내용을 적는 것은 피할까 한다.

베트남전쟁에서는 미군들의 임질 감염률이 낮아졌지만 한국전쟁에서는 훨씬 높았다는 보고서가 있는데 나무위키의 자료에 의하면 “1951년 5월에 작성된 대비지 2237호 ‘유엔군 위무방식의 건’이란 문건에는 유엔 장병을 위한 댄스홀과 위안소의 설치와 운영에 대해서 정부의 직접 지시가 실려 있다. 최종 결재자는 이승만이고 이승만 자신이 지시사항이나 수정사항을 일일이 적어놓기도 했다. 그리고 중간결재자이자 자필 서명 남긴 사람은 바로 장면이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역사적으로 전쟁 중에 성병에 감염된 사례로는 십자군원정대에서 임질이 발생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매독은 샤를 8세가 이탈리아전쟁에서 승리하여 나폴리에 입성하고 나폴리의 왕으로 즉위하는 동안에 프랑스 병사들이 감염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성병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나라를 들라면 단연코 미국을 꼽을 수가 있다. 미국은 이미 남북전쟁을 통해 북군에서만 183,000건에 달하는 매독과 임질 감염사례가 있었으나 1차 대전 초기에는 콘돔을 제공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유럽전장에서 영국과 함께 콘돔을 병사들에게 공급하지 않은(전쟁초기에만 해당) 유일한 국가라는 기록을 남겼다.

미국은 참전군인들에게 콘돔을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애국심과 도덕심에 호소하여 금욕으로 성병을 막으려는 정책을 펼쳤는데 결과적으로 이는 성병에 걸린 병사가 가장 많은 군대라는 오명과 함께 귀국한 참전군인들로 인해 미국전역에 성병이 만연하는 사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성병예방 포스터(1차 대전)

 

성병예방 포스터(2차 대전)

 

한편 1900년대 초반부터 콘돔을 생산하던 독일은 유럽국가들 뿐만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에까지 수출을 하고 있었지만 1차 대전에 참전한 병력 중 최소한 2백만이 넘는 숫자가 성병에 걸리는 일이 발생하자 1927년에는 ‘성병퇴치법(Gesetz zur Bekämpfung der Geschlechtskrankheiten)’을 제정하기에 이른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들에게는 1910년부터 보급되고 있었던 ‘프로 키트(Dough Boy Prophylactic Kit)’가 지급되고 있었는데 이것은 관계 후에 성기를 소독하는 사후약방문격인 방법이어서 병사들의 성병감염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는 없었다.

미군은 1차 대전에 참전한 이후 25%에 달하는 숫자가 성병에 감염되었다는(그들 중 일부는 기존에 성병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을 알게 되자 그때서야 뒤늦게 콘돔을 지급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병사들에게 콘돔을 지급하면서도 계속해서 ‘프로 키트’도 지급한 이유는 뒤에서 적기로 한다.

 

프로 키트(Dough Boy Prophylactic Kit)

 

또한 영국도 1주일 동안에 5%에 달하는 병력이 성병에 감염되는 사태가 벌어지고 나서야 1917년부터 병사들에게 콘돔을 지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수요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자 미국에서도 콘돔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업이 탄생하는데 대표적인 사람이 ‘줄리어스 슈미트(Julius Schmid)’였다.

‘줄리어스 슈미트(Julius Schmid)’는 뉴욕에 있는 소시지 포장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작업을 하면서 남는 동물의 창자를 이용하여 콘돔을 만드는 사업을 시작하였고 이렇게 만들어진 콘돔은 암시장을 통하여 은밀하게 거래되었다.

‘줄리어스 슈미트(Julius Schmid)’는 그 후 고무로 만든 ‘세이크(Sheik)’와 ‘람세스(Ramses)’ 등의 상표를 단 콘돔을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하였는데 1916년부터 ‘영스 고무회사(Youngs Rubber Corporation)’가 만들고 있었던 ‘트로이(Trojan)’란 상표의 콘돔과 함께 미국과 연합군에게 공급하게 되었다.

 

‘트로이(Trojan)’란 상표의 콘돔은 현재 미국에서 점유율 70%를 기록하는 제품인데 창업자인 ‘메를 리랜드 영스(Merle Leland Youngs)’가 1916년에 설립한 회사 ‘페이 앤드 영스(Fay and Youngs)’의 이름을 1919년에 ‘영스 고무회사(Youngs Rubber Corporation)’로 바꾸었고 ‘트로이(Trojan)’브랜드를 ‘카트-월리스(Carter-Wallace)’에 판매하였다가 2001년에는 ‘처치 앤 드와이트(Church and Dwight)’에 7억3천9백만 달러에 재매각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끝으로 아직까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진심어린 사죄를 하지 않고 있는 가증스런 일본은 만주사변이 일어난 직후부터 군대에 콘돔을 보급하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는 성병으로 인한 전투력의 손실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일본군이 보급한 콘돔은 ‘돌격일번(突擊一番)’으로 불리었으며 이와 함께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바르는 연고인 ‘성비고(星秘膏)’도 함께 지급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병사들의 성병감염으로 엄청난 전투력의 손실을 경험했던 미국은 2차 대전에서는 병사 1인당 한 달에 6개씩의 콘돔을 지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성병에 걸리는 병사들의 숫자는 크게 줄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성병에 효과적인 페니실린을 이용한 치료법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군 당국에서는 콘돔의 보급만으로는 성병을 예방하기에는 한계가 있음을 깨닫고 성병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게 되었고 콘돔과 함께 ‘프로 키트’도 계속해서 지급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진심어린 사죄를 요구한다!

피클 통(Pickle Barrel)을 명중하라.(노든 폭격조준기)

피클 통(Pickle Barrel)을 명중하라.(노든 폭격조준기)

네덜란드 출신의 미국인 칼 노든(Carl Norden)이 개발한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는 미 해군을 위해 개발에 나섰지만 채용은 미국 육군에 의해서 이뤄졌다.

 

칼 노든(Carl Norden)

 

이 과정에서 미국 해군과 육군 간의 이기주의로 인해 미 육군은 1943년에 와서야 직접 관리하면서 본격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다.

생산초기에는 기밀누설을 방지하기 위하여 해군을 통해 조달했지만 수요가 많아지면서 육군은 노든社와 직거래를 통해 생산·관리를 하려고 시도했으나 해군의 반대로 인해 무산되었다가 해군의 승인하에 설계 및 제작 등 모든 공정을 관리하는 빅터라는 회사가 설립된 1943년에 와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금액으로 아이오와급 전함의 건조비용이 1억 달러 정도였고, 원자폭탄을 개발한 맨해튼 프로젝트(Manhattan Project) 개발비가 약 19억 달러였는데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의 개발비가 이에 버금가는 15억 달러가 들었다니 미국에서 얼마나 크게 심혈을 기울였었는지를 알 수 있다.

1930년대의 15억 달러는 현재가치로 234억 달러 정도가 되는데 매매기준율을 적용한 환율로 계산해도 우리 돈으로 26조 2,852억 5,799만 3,480.50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개발비가 들어간 프로젝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막대한 자금이 투입된 끝에 개발된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의 개발자 칼 노든(Carl Norden)은 고도 6,000m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지상의 피클 통(Pickle Barrel)에 넣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으나 피클 통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 것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1940년에 조건을 갖추고 실시된 테스트에서는 고도 9,100m에서 투하한 폭탄의 원형공산오차가 4.6m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수립하기도 했으나 실제로 운용된 폭격대의 실적에서는 고도 4,600m에서 원형공산오차는 120m 수준을 보여 축구장 정도의 범위로 산포되었다.

1945년 8월 6일 고도 9,632m의 B-29에서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를 이용하여 투하한 원폭이 히로시마 상공 570m 지점에서 폭발하였는데 목표지점에서 약 240~250m를 벗어났다고 한다.(사진의 ×표 지점)

 

여담이지만 나는 미국의 원폭투하 목표지점이 아주 절묘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애초의 목표지점은 아래의 사진에서 보듯이 T자 모양의 다리였으나 실제로는 이보다 240~2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던 시마병원(島病院)의 상공에서 폭발하였다.(위 사진의 X표 지점)

그런데 이 다리의 이름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 살아간다는 뜻을 지닌 상생교(相生橋)라고 하니 참 절묘한 목표지점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일본에서는 이런 의미로 상생교(相生橋)라고 이름지었던 것이 아니고 두 다리가 만난다는 뜻에서 상생교(相生橋)라고 불렀는데 일본어로는 아이오이바시(あいおいばし)라고 읽는다.

 

제1, 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공중폭격의 방법은 급강하폭격과 수평폭격이 있는데 이 중에서 전략 폭격 등 광범위한 지역에 대량의 폭탄을 투하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전략폭격기에 의한 수평폭격이 사용되었다.

수평폭격은 특정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폭탄을 투하하는 대규모 폭격인 융단폭격(carpet bombing)으로 운용되었으며 적의 대공포와 전투기에 의한 요격을 피하기 위해서는 높은 고도에서의 폭격이 필수적이었다.

 

높은 고도에서의 폭격은 아군 폭격기는 비교적 안전하지만 급강하폭격에 비해 명중률은 떨어지고 목표지점 근처에 아군이 주둔하고 있을 경우에는 오폭(誤爆)으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높아지며 폭탄의 투사위치, 투사각도, 고도, 풍향에 따라 폭탄을 투하하는 타이밍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를 사용함으로써 이런 문제들을 완벽하지는 않아도 크게 개선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막대한 개발비가 들어간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는 최고의 군사비밀로 분류되어 적지에 불시착한 미군 폭격기의 승무원들은 목숨을 버리고서라도 이것을 파괴할 의무가 있었으며 이를 위하여 기내에는 AN-M14 TH3 소이수류탄을 비치해두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 미공군은 우수한 전과를 거둔 폭격기 승무원들에게 트로피를 수여하였는데 노든 폭격조준기(Norden bombsight)의 개발자인 칼 노든(Carl Norden)이 고도 6,000m에서 폭탄을 투하하여 지상의 피클 통(Pickle Barrel)에 넣을 수 있다고 선전한 것에서 착안하여 만든 것이 바로 아래의 피클 배럴 트로피(Pickle Barrel Trophy)이다.

사발주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사발주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지나친 음주문화를 지적하는 언론의 보도에 종종 등장하는 사발주! 한국에서만 사발주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외국, 특히 외국의 군인들이 그들의 표현으로 “그록 볼(Grog Bowl)”이라고 하는 사발주를 마시는 모습을 가끔 보게 됩니다.

그들은 언제부터 사발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요? 그리고 왜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요? 이제부터 그 유래와 이유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사발주의 기원은 1740년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그것을 만든 사람은 영국의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이라는 해군제독이었습니다.

옛날부터 배의 선원들은 마실 물을 보존할 특별한 방법이 없어서 물과 맥주를 그냥 통에 담아 보관을 하고 항해를 하였는데 그러나 보니 물은 변질되고 맥주는 신맛이 강해져 마시기 어렵게 되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즉, 선원들에게 제공되는 맥주의 양은 하루에 1갤론이었는데 반해 선원들은 맥주가 변질되기 전에 더 많은 양의 맥주를 마시려 하였고 그렇게 정해진 양보다 많은 맥주를 마시게 됨으로써 사건과 사고가 빈번하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1650년 이후부터 맥주 대신에 럼주가 선원들에게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맥주보다 도수가 강한 럼주를 기존의 양과 같이 하루에 1갤론을 보급함으로써 계속해서 사건과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럼에 따라 버논 제독은 1740년 8월 21일, 럼주에 물을 1대 3의 비율로 섞어 희석하여 보급하도록 명령하고 하루에 오전과 오후 두 번으로 나누어 선원들에게 배급하도록 하는 규정을 만듭니다.

그런데 왜 사발주를 Grog Bowl이라고 부른 것일까요?

그것은 이 규정을 만든 에드워드 버논(Edward Vernon) 제독이 평소에 견모교직물(Grogram)로 만든 옷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물을 탄 럼주를 Grog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말은 권투에서 비틀거리는 상태를 말하는 그로기(Groggy)의 어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을 섞었다고는 해도 음주로 인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는 바람에 해군에서는 럼주의 공급을 없애고 대신에 급료를 인상시키는 제안도 대두되지만 실천되지는 못하고 단지 공급하는 양을 줄이는 쪽으로 수정하게 됩니다. 그 후 미 해군은 1862년 9월 1일부터 럼주의 배급을 중단하게 되고 영국해군은 1970년 7월 30일에 럼주의 배급을 중지하게 되는데 그날을 “Black Tot Day”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986년 미 해군의 초청장

사발주 Grog Bowl을 마시는 것은 그냥 잡다한 것을 섞는 것이 아니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알콜이 들어있지 않은 것 1개와 알콜이 들어있는 1개를 반드시 따로 준비해야 하고, 복장은 단정해야 하며, 담배를 피워도 된다는 불이 켜지기 전에는 흡연해서는 안 되며 나비넥타이가 틀어져서는 안 된다는 등의 정해진 규칙을 어긴 경우에는 사발주를 마셔야 하고, 다 마셔서 잔이 비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위에서 뒤집어야 한다는 등의 규칙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발주 Grog Bowl을 만들 때 술과 함께 혼합하는 재료에는 피를 뜻하는 타바스코와 바다를 뜻하는 물, 땀을 의미하는 소금과 사막전쟁을 뜻하는 모래 등인데 그밖에도 지나친 재료들이 사용되어 점차 그 의미가 변질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무엇이건 간에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한 법이니까요~

트렌치 코트(trench coat)의 역사

트렌치 코트(trench coat)의 역사

참호라는 뜻의 트렌치(trench)가 이름에 붙어있는 코트는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제1차 세계대전 중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으며 제1차 세계대전 기간 중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영국 육군성의 승인을 받고 레인코트로 트렌치 코트를 개발하였다는 연유로 일명 버버리(burberry) 코트라고도 한다는 내용의 어느 대학교수가 쓴 글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패션은 몰라도 전쟁의 역사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밀덕이라 자부하는 사람으로서 이런 내용은 완벽하게 틀린 것이라고 지적할 수가 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트렌치 코트(trench coat)란 이름이 붙은 것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이었지만 버버리(burberry)에서 만든 것만 해도 1차 대전보다 60여 년이나 앞섰으며 기원을 올라가보면 1차 대전보다 100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버버리 트렌치 코트(Burberry trench coat)의 소재로 사용되는 개버딘(gabardine)이 개발된 것은 1879년이고 방수처리된 개버딘 소재의 코트는 보어전쟁에서도 이미 영국군 장교들이 착용하고 있었고 보급은 그 이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트렌치 코트(trench coat)가 개발되었던 것이라는 정보는 명백하게 틀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8년 개버딘으로 만든 버버리 낚시복 광고

그러나 타이로켄(tielocken)이라는 벨트가 달린 디자인은 1912년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특허를 받은 것이어서 그 이전에 영국군에 보급되었던 코트와는 디자인이 달랐다는 차이점은 있다.

현대의 트렌치 코트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824년에 찰스 매킨토시(Charles Macintosh)가 만들었던 레인코트이며 이것이 레인코트의 스타일로 정형화되었는데 이것은 고무를 코팅하여 방수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맥(mack)으로 불리었다.

 

매킨토시 레인코트

맥(mack)이란 레인코트를 개발한 사람은 스코틀랜드의 찰스 매킨토시(Charles Macintosh)와 영국의 토마스 핸콕(Thomas Hancock)이었는데 두 사람이 따로 경영하던 회사는 1830년에 합병하여 방수의류를 계속 생산하다가 1925년에 던롭(Dunlop Rubber)사에 인수되었다.

한편 매킨토시(Macintosh)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트래디셔널 웨더웨어(Traditional Weatherwear)라는 회사는 2003년 12월에 이름을 매킨토시(Macintosh)로 바꾸었고 2007년에 일본의 회사(Yagi Tsusho Limited)에 판매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무로 코팅되어 만들어진 코트는 방수성은 뛰어났지만 땀과 냄새라는 문제를 발생시켰고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통기성이 뛰어난 코트를 만들어내었던 곳 중의 하나가 바로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경영하던 버버리 (Burberry)였다.

그러나 이도 최초의 것은 아니었는데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을 만든 존 에머리(John Emary)가 1853년에 처음 선을 보였고 버버리는 그보다 3년 뒤인 1856년에 선을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1879년에 개버딘(gabardine)을 개발하면서부터 버버리가 주도권을 갖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1912년에 토머스 버버리(Thomas Burberry)가 타이로켄(tielocken)이라는 디자인의 특허를 취득함으로써 우리가 알고 있는 트렌치 코트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버버리가 만든 코트는 트렌치 코트로 이름 붙기 전인 1911년 로알 아문센(Roald Amundsen), 1914년 어니스트 섀클턴(Sir Ernest Henry Shackleton)이 남극탐험에서 착용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리게 되었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장교들이 참호에서 착용하던 모직코트가 무겁고 방수기능이 없어 불편하던 문제를 해결하게 되면서부터 트렌치 코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이다.

무겁고 방수성이 떨어지는 모직코트보다 기능면에서는 뛰어났는지는 몰라도 트렌치 코트(trench coat)는 전쟁 초기에 장교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저주스런 옷이었다. 독일군들은 그들의 중요한 목표인 영국군 장교들만이 트렌치 코트(trench coat)를 입는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집중적으로 저격을 실시하여 수많은 장교들이 사망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버버리의 이미지가 워낙 강하다 보니 트렌치 코트=버버리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물론 버버리가 전쟁동안 군복의 공식공급업체였던 것은 맞으나 그 외에도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을 비롯하여 많은 회사들도 함께 트렌치 코트를 군납하였으며 현재까지도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곳들도 있다.

 

이런 역사를 지닌 트렌치 코트가 제1차 세계대전 기간에 개발된 것이라는 일부 인터넷의 정보와 유명인들의 칼럼 또는 기사는 전쟁기간에 트렌치 코트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이라고 정정해야 함이 옳고, 그 이전부터 군에서 사용하고 있었다고 수정해야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