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을 모델로 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을 모델로 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낚시를 즐겼던 유명인사를 꼽으라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인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친숙한 헤밍웨이는 낚시를 즐겨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헤밍웨이가 낚시를 좋아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동기는 쿠바에서 보낸 시절 동안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헤밍웨이 청새치 낚시대회(Ernest Hemingway Marlin Fishing Tournament)”에 쿠바의 지도자 피엘 카스트로와 80년대 그에 관한 책을 소지만 하고 있어도 잡혀가야 했던 체 게바라가 참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 청새치 낚시대회는 195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제10회 대회에 헤밍웨이의 초대를 받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참여하였던 것이며, 이 대회 이전에는 낚시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카스트로가 우승을 하면서, 헤밍웨이가 카스트로에게 우승컵을 수여하는 사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70주년을 맞은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대회가 치러지지 못했으며 올해도 마찬가지로 대회는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윗동네 사는 애들은 김치도 지네들 것이요, 한복도 지네들 것이라고 우기는데, 아랫동네 애들은 헤밍웨이가 쓴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의 연구에 의해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Gregorio Fuentes)라고 밝혀져 있고, 노인과 바다가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수상한 고마움으로 헤밍웨이가 푸엔테스에게 2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었다는 사실로도 증명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일본인이 노인과 바다의 모델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논문의 제목은 헤밍웨이와 동아시아: 일본과 중국이 헤밍웨이의 저술에 미친 영향으로, 2016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하였으며, 논문의 저자인 히데오 야나기사와는 현재는 메이조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논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논문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와는 큰 관련이 없지만 본문에서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이자와 미노루란 일본인이 헤밍웨이를 찾아간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걔네들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이 모델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면 억지스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1897년 5월 10일 커피농장에서 일하기 위한 인력이 멕시코로 건너간 이후 남미로의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었는데, 1907년에 코아우일라주의 에스페란자 탄광에서 일하기 위한 일련의 이민행렬이 일본을 떠났으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많은 인원이 근무지를 이탈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근무하던 곳은 멕시코가 아닌 미국인들이 경영하던 탄광이어서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지만,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노동환경은 사람이 버티기엔 어려워서 고국을 떠난 일본 이민자들도 살기 위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무지를 벗어난 일본인 이민자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당시의 멕시코는 판초비야에 의한 멕시코혁명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던 관계로, 일본인들은 때론 정부군으로, 때론 혁명군에 가담하여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갈망하던 그들은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쿠바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행렬 중에 소설 속 주인공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키타자키 마사지로란 인물도 1915년 5월 5일, 이민행렬에 섞여 쿠바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바에 도착은 했지만 먹고 살길은 막막하던 차에, 쿠바의 근해에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지만, 그걸 잡는 사람은 없는 것을 보고, 이걸 잡아서 내다 팔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일행과 함께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돈 많은 사람의 투자를 받아 점차 그 규모가 확대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쿠바인들에게 어업의 노하우를 전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 먹고살 만한 시기가 되자 2차 대전이 일어났고,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국민이란 이유로 키타자키 또한 수용소에 끌려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쿠바인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키타자키는 풀려날 수 없었고,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고 난 이후에야 어업지도자의 신분으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그의 나이가 60을 넘긴 이후였지요.

키타자키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업을 진행하기가 벅찼던 관계로 일본에서 두 동생을 불러들였고, 열심히 노력하여 쿠바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키타자키란 한 인간의 노력과 관련해서는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쿠바 정부에서 제작할 정도였다고 하니 의심할 바는 아니란 생각입니다.

그런데, 키타자키가 쿠바에서 어업발전에 힘을 쏟고 있던 시기에 헤밍웨이 또한 쿠바에 있었고,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사라고사란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에 일본인이 있는 것은, 헤밍웨이가 일본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증거라고 논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일본인은 사라고사에서 웨이터로 근무하던 히타노란 이름의 일본인으로 헤밍웨이와는 친분이 없다고 뒤에서 슬쩍 언급하고 있습니다.

 

쿠바의 어업발전에 크게 기여를 한 키타자키가 전수한 어업기술은 일본의 잇뽄츠리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히데오 야나기사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했던 일본인들도 그토록 오랜 세월을 쿠바에서 지내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겠으나 태평양전쟁과 연이은 미국과 쿠바의 관계악화로 인해 정착 아닌 정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이 벌써 12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를 남미에서 활동하던 이자와 미노루란 이름의 일본인 학자가 찾아갔는데, 그때 헤밍웨이가 자신은 일본인에게서 낚시를 배웠고, 자기에게 낚시를 가르켜준 사람이 바로 키타자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근거가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하며, 현지이름으로 마누엘로 불리던 키타자키를 만나기 전에, 이미 헤밍웨이는 현재가치로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에스콰이어로부터 원고료로 받아 그 유명한 필라(Pilar)라는 보트를 구입하였는데, 그런 헤밍웨이가 키타자키로부터 낚시를 배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즐기는 고가의 패션들

멜라니아 트럼프가 즐기는 고가의 패션들

요즘 디올이란 브랜드가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세계 여러 나라의 퍼스트 레이디들 중에서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와 미국의 멜라니아 트럼프가 떠오른다.

케냐의 사파리를 찾으면서 썼던 “피스 헬멧(Pith helmet)”이라는 모자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멜라니아 트럼프의 패션은 미셀 오바마와 곧잘 비교되곤 했는데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당대회에서 입었던 미셀 오바마의 675달러 드레스와 멜라니아 트럼프의 2,190달러짜리 드레스는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며 비교되고 있다.

뭐 트럼프야 돈이 많은 사람이니 영부인인 멜라니아 트럼프가 자신들의 돈으로 비싼 옷을 사입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지만 부의 양극화가 심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리 편하게만 생각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면 지금까지 멜라니아 트럼프가 착용했던 패션 중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들은 얼마나 하는지 한 번 알아볼까?

▶ 보테가 베네타 (Bontega Veneta) 격자무늬 코트-3,950달러

이 옷은 할로윈 축제 때 백악관에서 입은 것이다.

▶ 발망(Balmain) 셔츠-690달러

▶ 구찌(Gucci) 블라우스-1,100달러

▶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재킷-2,195달러

그녀가 신고 있는 크리스찬 부루탱(Christian Louboutin) 힐은 775달러라고 하는데 쓰고 있는 에르베 피에르(Hervé Pierre) 모자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군요~

▶ 록산다(Roksanda) 드레스-2,865달러

▶ 델포조(Delpozo) 드레스-2,950달러

▶ 구찌(Gucci) 코트-3,701달러

▶ 이졸데(Isoude) 코트-3,995달러

▶ 제이 멘델(J. Mendel) 가운-6,990달러

▶ 모니크 륄리에(Monique Lhuillier) 가운-7,995달러

▶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재킷과 스커트-9,590달러

▶ 발리(Bally) 바지 외-14,170달러

백악관에 입주할 때 입었던 발리(Bally) 바지는 575달러, 신었던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힐은 595달러, 들었던 에르메스 버킨백(Hermes Birkin bag)은 13,000달러.

▶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jacket) 재킷-51,500달러

▶ 가격표가 없는 에르베 피에르(Hervé Pierre) 맞춤 가운

일본 항공자위대의 거짓말은 전통인가?

일본 항공자위대의 거짓말은 전통인가?

1983년 9월 1일에는 미국을 출발하여 김포로 오던 대한항공 007편이 소련 영공에서 수호이 15의 공격을 받아 추락하면서 269명의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1987년 11월 29일에는 아직도 정부의 공식발표를 그대로 믿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는 북한공작원 김현희에 의해 이라크를 출발하여 서울로 향하던 대항항공 858편이 인도양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탑승객 115명 전원이 숨지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한편 1983년 2월 25일에는 고 이웅평 대령이 미그기를 몰고 귀순하면서 실제로 대한민국 전역에 공습경보가 발령되기도 했었는데 전투기가 아닌 소련의 전폭기가 1987년 12월 9일 일본의 상공에 침범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니 그야말로 일본은 난리가 나고 말았습니다.

투폴레프 Tu-16

 

1980년대는 동서냉전이 지속되던 시기로서 일본의 기록에 의하면 1984년에만 항공자위대의 전투기가 긴급발진(스크램블 발진)을 944회나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1987년 12월 9일 오전 10시 30분 경 항공자위대는 소련의 비행기 4대가 일본의 방공식별구역을 넘어 오키나와로 접근하는 것을 레이더로 탐지하여 총 6기의 F-4EJ를 출동시켜 경고와 함께 돌아갈 것을 지시했는데 3대는 기수를 돌려 돌아갔지만 1대는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해서 오키나와로 향해 비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키나와가 어떤 곳입니까? 미군기지와 함께 항공자위대의 나하기지가 있는 곳 아닙니까? 게다가 경고를 무시하고 비행하는 소련의 비행기는 전투기도 아닌 “투폴레프 Tu-16” 전략폭격기였으니 일본으로서는 혼비백산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결국 20㎜ 발칸포의 경고사격으로 소련의 “투폴레프 Tu-16”는 기수를 돌려 일본의 영공을 빠져나갔지만 이렇게 끝날 줄 알았던 사건은 오전 11시 41분 “투폴레프 Tu-16”이 다시 일본 영공을 침범하여 재차 이어진 경고사격을 받고 영공을 벗어나 북한의 평양에 착륙하면서야 막을 내렸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국과 일본의 항의로 소련은 “일본 영공을 침범했던 것은 기기고장에 의한 것이었다.”는 변명과 함께 “투폴레프 Tu-16”의 기장을 일계급 강등시키고 승무원 2명에게는 탑승정지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무마하려 하였습니다.

한편 일본의 항공자위대에서는 자기들의 냉정하고 현명한 판단으로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자랑질을 열심히 해대기 시작했으며 당시 F-4EJ를 스크램블 발진시킨 곳은 항공자위대 소속의 제302비행대로서 그동안 부대마크로 흰꼬리수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도입될 F-35A기종부터는 마크를 변경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공군에서도 이것을 탐지하고 F-15를 이미 출동시키고 있었고 항공자위대의 전투기는 당시 일본주둔 미군사령관을 겸직하던 미 제5공군사령관의 명령을 따라야 했는데도 항공자위대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인 양 경고사격만으로 소련의 전략폭격기를 몰아낸 것은 3차 대전을 막아낸 것이라고 자랑질 해대는 것은 솔직히 보기가 조금 거시기 합니다.

하지만 동서냉전이 한창이던 1980년대에 비해 2016년의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 전투기의 긴급발진 횟수가 1,000회를 돌파하였다는 사실은 극동지역에서의 긴장감이 극도로 고조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반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치가 개발한 연료통 제리캔(Jerrycan)

나치가 개발한 연료통 제리캔(Jerrycan)

프레스 가공된 2장의 강판을 용접해서 만든 연료통을 일컫는 제리캔(Jerrycan)은 독일군을 뜻하는 속어인 제리(Jerry)가 사용하는 통(Can)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오늘은 이 제리캔(Jerrycan)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2차 대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제리캔이 없었더라면 독일의 블리츠크리크(Blitzkrieg: 전격전)를 뚫고 프랑스에 도달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2차 대전 초기에 영국군이 사용하던 연료통은 얇아서 기름이 누출되는 일이 잦았을 뿐만 아니라 부을 때는 깔때기와 같은 도구들이 있어야만 했는데 이런 이유로 비하하여 조잡하다 또는 엉성하다는 의미의 플림지(Flimsy)로 불렸다.

 

이 연료통이 얼마나 부실했는가 하면 영국의 임페리얼 갤런(imperial gallon=4.546 l)으로 7만 갤런을 운반하는 도중 연료의 누출로 3만 갤런만 수송할 수 있었던 것을 두고 한 병참장교가 이것조차도 좋은 결과라고 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간단한 사실이지만 연료의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면 군대의 이동은 멈추게 된다. 나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 기존의 디자인을 개량한 연료통의 개발에 나섰는데 이렇게 개발된 연료통을 베르마흐트 아인하이츠카니스터(Wehrmacht-Einheitskanister)라고 불렀다.

영어로 군용 연료통(Armed Forces Unit Canister)이란 뜻을 지닌 베르마흐트 아인하이츠카니스터(Wehrmacht-Einheitskanister)가 흔히 제리캔(Jerrycan)이라고 부르는 연료통의 정식 이름인 것이다.

제리캔은 나치의 입찰을 따낸 쉬벨름에 있던 회사(Schwelmer Eisenwerk Müller & Co. AG)의 수석 엔지니어였던 빈첸츠 그룬포겔(Vinzenz Grünvogel)이 이끌던 기술진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제리캔(Jerrycan)의 손잡이를 보면 3개가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나치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나치는 “1명이 빈 통은 4개, 연료가 가득 찬 통은 2개를 들 수 있어야 하며, 두 사람이 함께 들 수도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는데 이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3개의 손잡이를 만든 것이었다.

 

물론 기존에 독일군들이 사용하던 삼각형 모양의 연료통에 비해 휴대 및 차량의 적재가 용이했을 뿐만 아니라 펌프를 사용하지 않고도 급유할 수 있는 등의 편의성도 뛰어났던 베르마흐트 아인하이츠카니스터(Wehrmacht-Einheitskanister) 즉, 제리캔은 극비리에 생산되어 1차로 5,000개가 테스트를 위해 일선부대로 보내졌고 만족스런 결과에 따라 양산에 들어가게 되었다.

 

왼쪽 삼각형 모양이 독일군이 사용하던 기존의 연료통

 

양산은 개발한 회사가 아닌 ABP(Ambi-Budd Presswerk Berlin)가 맡았었는데 나중에는 흰색 페인트로 십자가를 그려 넣은 것은 물통으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프랑스군은 ‘VIN’으로 표시한 와인 전용의 통을 사용하기도 했다.

 

플림지(Flimsy)로 비아냥을 받던 연료통을 사용하던 영국군은 1940년 노르웨이 전역(Norwegian campaign)에서 제리캔을 입수한 이래 그것을 그대로 사용하다가 나중에서야 카피하여 생산한 것을 사용했는데 미국의 경우에는 이보다는 드라마틱한 사연을 지니고 있다.

제리캔을 복제한 영국의 연료통

 

1939년 독일에서 근무를 마치고 귀국을 앞두고 있던 미국인 엔지니어 폴 플라이스(Paul Pleiss)는 독일인 동료를 설득하여 육로를 이용하여 인도까지 여행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동하는 도중에 필요한 식수를 담을 통이 없자 독일인 엔지니어는 템펠호프 공항(Tempelhof Airport)에 제리캔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곤 수완을 발휘하여 3개를 구한 다음, 식수를 담고 길을 떠나게 된다.

두 사람이 11개 나라를 통과하여 인도까지 절반쯤 갔을 때 괴링이 보낸 비행기 편으로 독일인 동료는 귀국을 해야만 했는데 그는 떠나면서 폴 플라이스(Paul Pleiss)에게 제리캔의 제조에 필요한 정확한 사양을 전해주었다.

그리고 혼자 남은 폴 플라이스(Paul Pleiss)는 여행을 계속하여 캘커타에 도착하였고, 차는 캘커타의 창고에 보관시키고 고향인 필라델피아로 귀향하였다.

1939년의 여름은 나치가 폴란드 침공을 앞둔 시점으로 전운(戰雲)이 유럽을 휘감던 시기였기에 귀국한 폴 플라이스(Paul Pleiss)는 독일군의 제리캔에 대하여 군에 정보를 제공하였으나 샘플이 없이는 판단할 수 없다는 관료주의에 막히고 만다.

이에 폴 플라이스는 캘커타의 창고에 보관 중이던 차에서 제리캔만 떼내어 미국으로 가지고 올 계획을 세웠지만 운송하는 과정에서 분실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차를 통째 가지고 오기로 결정하여 1940년 여름, 뉴욕에 도착시킨다.

그리고 3개의 제리캔 중 1개를 군 관계자들에게 보냈지만 그들은 개량된 미국의 연료통으로도 전쟁을 수행하는데 지장이 없다고 함에 따라 진전을 보지 못했고, 또 다른 샘플 1개는 영국군에 보냈지만 영국군은 만드는 것보다도 쉽게, 많은 수량의 독일군이 사용하던 제리캔을 노획하여 쓸 수 있었기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시간이 흐르고 1942년이 되어서 중동의 정유공장에서 품질관리를 맡고 있던 리차드 다니엘(Richard Daniel)이란 사람이 “연료통의 결함으로 인해 운송 도중에 40% 가까운 연료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게 되자 그때서야 미국과 영국은 제리캔의 생산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1945년 유럽의 작전전역(ETO: European Theater of Operations)에서만 1천9백만 개가 사용되었던 제리캔은 전쟁의 승리를 위해 한때는 200개의 공장에서 만들어지기도 했었는데 1953년에 작성된 미국병참대(Quartermaster Corps)의 공식보고서에는 제리캔을 블리츠캔(blitz-can)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국군이 노획한 것을 받았다고 되어있을 뿐 폴 플라이스(Paul Pleiss)에 관한 기록은 단 한 줄도 없다는 이유로 일부에서는 폴 플라이스(Paul Pleiss)의 이야기가 허구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입으로 씹어서 만드는 일본술,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

입으로 씹어서 만드는 일본술,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하여 370만의 관객을 동원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에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소재가 되는 일본 전통의 술이 나오는데 이 술의 이름이 바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다.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가 일본의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오오스미노쿠니후도키(大隅国風土記)인데, 문헌에 따르면 쌀이나 곡물 등을 입에 넣어 씹고 뱉는 동작을 반복한 다음 하룻밤 이상을 발효시켜 만든다고 한다.

이렇게 만드는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는 미인주(美人酒)라고도 하는데 허영만 화백의 식객을 보면 “’미인주라고 들어봤어? 어여쁜 색시들이 쌀을 조근조근 씹어 당화시켜 만든 술인데 그 단맛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설탕 단맛이 수학공식이라면 미인주 단맛은 시의 운율처럼 변화무쌍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도 쌀을 씹어서 술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여성들이 술을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인주(美人酒)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는 주로 여성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병을 앓지 않고 자란 젊은 여성의 입안에는 건강한 세균이 있다고 믿었으며 처녀라면 더 좋다는 믿음 때문에 여성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제사에 사용되는 공물로서의 의미가 강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는 무녀들이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무녀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미츠하와 타키를 이어주는 소재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인다.

또한 미츠하의 성(姓)인 미야미즈(宮水)는 고베의 나다 지역에서 나는 미네랄이 풍부한 지하수를 일컫는 미야미즈(宮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위생적인 제조법이지만 의외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의 맛은 좋은 편이라고 하며 혹자들은 요구르트와 같은 맛이 나면서 냄새는 꽤 심한 편이라고 한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에서는 여주인공 미츠하가 3년 전에 봉헌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를 타키가 마시면서 다시 몸이 바뀌기를 기대하는데 3년이나 숙성시킨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의 맛이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다.

  

 

일본자위대의 차량번호는 무엇을 의미할까?

일본자위대의 차량번호는 무엇을 의미할까?

제주관함식에 일본 해상자위대의 함정이 욱일기를 달고 입항하는 문제로 자위대에 대한 관심도 덩달아 증가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일본의 자위대가 사용하는 군용차량의 번호판은 무엇을 나타내는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국군의 경우에는 좌측의 번호는 부대명을 뜻하고 오른쪽의 번호는 지휘관의 서열이나 기타 차량순번을 나타내는데 일본의 자위대가 사용하는 작전용 차량의 앞 번호 두 자리는 아래와 같이 육상자위대가 사용하는 차량의 종류와 해상자위대의 차량(39~43)과 항공자위대의 차량(44~49)을 나타냅니다.

자위대 차량 앞 번호 두 자리
01-03
소형트럭
04
유도무기 차량
05-08
중형트럭
11
오토바이
20-37 및 38
대형트럭
39-43
해상자위대 차량
44-49
항공자위대 차량
50-59
견인차량
60-69 및 88
피견인차량
70-77, 83-85 및 87
군수장비
78-79
통신전자장비
80
군수지원장비
81
화학장비
82
위생장비
86
항공장비
90-98
궤도차량
99
방위장비청 차량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왼쪽의 4자리 숫자를 보고 몇 사단 또는 몇 연대, 몇 대대인지를 알 수 있는데 이런 우리와는 달리 일본자위대는 앞의 두 자리를 보고 차량의 종류나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 소속인지를 판단하고 뒤의 4자리 숫자는 일련번호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 차이점입니다. 그러나 ○○-0001로 시작하는 차량은 방위대신이 타는 차량을 나타냅니다.

일본자위대의 해당차량 소속부대가 어디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번호판의 오른쪽에 인쇄되어 있는 글자나 숫자를 보고 판단하는데 위에서 설명한 앞 번호 두 자리 별로 차량을 살펴보면서 해당차량이 어느 부대의 소속인지를 판단하는 방법을 같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01~03: 소형트럭

01-0553: 제1 방공포단 본부중대

02-7025: 제2사단 제25연대 제3중대 대전차소대

03-5908: 제11여단장

▶ 04: 유도무기 차량

04-2015: 제7사단 제7고사포연대 제6중대

▶ 05~08: 중형트럭

05-0785: 제5사단사령부

06-2177: 제11여단 제10연대 제1중대

07-5652: 제11여단 제11포병대 본부중대

08-1233: 북부방면시설대 제12시설군 본부중대

▶ 11: 오토바이

11-1809: 정찰사양 오토바이

▶ 20~37 및 38: 대형트럭

25-1301: 제11포병연대 제1대대 제1중대

30-1202: 제2사단 제2후방지원연대

35-6871: 제1방공포단 제4고사포대

37-1502: 제2사단 제3연대 본부중대

▶ 39~43: 해상자위대가 사용하는 차량

40-1705: 해상자위대 오미나토지방대 오미나토경비대

▶ 44~49: 항공자위대가 사용하는 차량

44-6038: 항공자위대 북부시설대

49-0067: 북부방면항공대 제3고사포병군 제9고사대

▶ 50~59: 견인차량

50-0020: 북부방면수송대 제313수송중대

50-2087: 제11여단 제11후방지원대 수송대

▶ 60~69 및 88: 피견인차량

61-0784: 제1방공포단 제1고사포병군 제301고사중대

68-6573 : 북부방면시설대 13시설군 본부중대

▶ 70~77, 83~85 및 87: 군수장비

71-3642: 제2사단 제2시설대대 본부중대

76-4078: 북부방면시설대 제13시설군 제360시설중대

▶ 78~79: 통신전자장비

79-9114: 제11포병대 본부중대

▶ 80: 군수지원장비

80-8114: 제2후방지원연대 보급대

▶ 81: 화학장비

81-9018: 제7화학방호대

▶ 82: 위생장비

▶ 86: 항공장비

▶ 90~98: 궤도차량

90-0051: 제7사단 제11연대

95-3942: 제2전차연대 제6중대

▶ 99: 방위장비청 차량

99-0037: 방위장비청의 차량은 개발 중인 것들이 많습니다.

일식(日食)의 종류와 특징

일식(日食)의 종류와 특징

예전에 비해 일식집의 수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일식(日食)이란 말이 때로는 메뉴를 지칭하여 부르기도 하는 등 그 정의(定意)가 모호한 것 같아서 오늘은 일식(日食)의 종류와 각각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식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고 일본에서는 와쇼쿠(和食)라고 표현하는데 화식(和食: 와쇼쿠)과 일본요리(日本料理)의 개념이 섞여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화식(和食)과 일본요리의 정의가 모호한 것은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화식(和食)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각각이다 보니 일본 농림수산성에서는 화식(和食)의 특징을 아래의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① 다양하고 신선한 재료와 그 특색을 존중

②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표현

③ 건강한 식생활을 지원하는 영양의 균형

④ 설날 등 명절과의 밀접한 관계

 

화식(和食)의 4가지 특징을 이처럼 미사여구로 늘어놓다 보니 정의 자체가 모호해지고 말았는데 첫 번째 특징에 대하여 농림수산성은 “일본의 국토는 남북으로 길고, 바다와 산과 마을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자연이 펼쳐져 있어서 각 지역에 기인한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기술과 조리도구가 발달하였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수입재료로 만든 요리는 화식(和食)이 아니란 것인지, 양식(洋食)과 혼합된 퓨전요리는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에 맞딱뜨리게 된다.

이같이 농림수산성의 정의가 모호하다 보니 일본의 전문가들도 그 정의에 대하여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화식(和食)을 포함한 일상적인 요리를 통틀어 일본식(日本食)이라고 부르고, 화식(和食)과 일본요리(日本料理)란 표현은 전통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 화식(和食)과 일본요리(日本料理)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서양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던 시기, 서양의 요리도 함께 소개되면서부터라고 하는데 처음으로 일반화된 것은 1898년에 간행된 이시이 타이치로(石井泰次郎)의 일본요리법대전(日本料理法大全)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화식(和食)이란 표현은 양식(洋食)에 대응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화식(和食)과 일본요리(日本料理)란 표현을 세분하면 화식(和食)이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요리(日本料理)는 좁은 의미로 격식을 차리는 것으로서 일본의 라멘이나 소바는 화식(和食)이라곤 할 수 있어도 일본요리(日本料理)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한편 아래에서 소개할 가이세키요리(會席料理)를 먹으러 갈 때는 화식점(和食店)보다는 일본요리점(日本料理店)엘 간다는 표현을 쓰며 스시(寿司)는 일본요리(日本料理)보다는 화식(和食)이라고 하는 것이 쉽게 감이 오는 것처럼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화식(和食)이라고 한다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료에 의한 분류가 아닌 형식에 의한 일식(日食)의 종류는 구분이 가능한데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형식에 의한 일식(日食), 즉 화식(和食)은 아래와 같이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혼젠요리(本膳料理)

②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

③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

④ 쇼진요리(精進料理)

 

■ 혼젠요리(本膳料理)

무가(武家)에서 손님을 대접하던 것에서 비롯되어 일본요리의 기초가 된 것으로 본상(本膳: 혼젠)은 손님의 격에 따라 다섯 상까지 차려지고 각각의 상은 한꺼번에 차리며 참석인원은 연회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혼젠요리(本膳料理)의 기본 상차림은 한 가지의 국과 세 가지의 반찬으로 된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지만 정확하게는 밥과 국에 ①채소절임인 고우노모노(香の物), ②조림인 니모노(煮物), ③가열하지 않은 요리인 나마스(なます)와 ④구이인 야키모노(焼物)로 구성된다.

즉 밥과 국(一汁)에 4가지의 반찬으로 구성이 되는데 밥과 채소절임인 고우노모노(香の物)는 세지 않고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사(四)라는 글자가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음독이 같기 때문에 밥과 고우노모노(香の物)를 제외하고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혼젠요리(本膳料理)에서 반찬의 가지 수는 반드시 홀수가 되어야 하며 일즙삼채(一汁三菜)에서 이즙오채(二汁三菜)를 비롯하여 삼즙십오채(三汁十五菜)까지 있으며 날로 먹는 요리인 나마스(なます)는 수육(獣肉)을 사용한 것은 회(膾)로, 어육(魚肉)을 사용한 것은 회(鱠) 또는 어회(魚膾)로 표기한다.

일본요리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혼젠요리(本膳料理)는 현대에 와서는 최고급 요릿집이나 관혼상제 등에서만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기술한 외에도 다양한 특징들이 있으나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알아보도록 하고 이쯤에서 줄인다.

 

■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는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와 발음이 같아서 구분하기 위해 챠카이세키요리(茶懷石料理)라고도 부른다.

다도(茶道)에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는 선사(禪寺)에서 유래하였으며 차를 마시기 전에 나오는 가벼운 식사를 말하는데 다실의 인원은 대략 5명 정도이며 밥과 국(吸い物: すいもの 스이모노)의 순서로 제공되며 테두리가 있는 네모난 쟁반인 오시키(折敷)라는 상에 음식을 차린다.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의 3대 원칙은 ①제철 식재료를 이용해야 하고 ②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야 하며 ③환대하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으로, 세 번째 원칙은 따뜻한 음식은 식지 않게 내어야 하고, 차가운 음식은 가장 차가울 때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일본에서 다조(茶祖)로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가 다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의 카이세키(懷石)는 수행 중인 선승(禪僧)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품속에 넣었던 따뜻하게 데운 돌을 의미하며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를 도시락으로 만든 것을 텐신(点心)이라 부른다.

 

■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

요정이나 연회 등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호화로운 요리로 전채(前菜)를 시작으로 술과 함께 식사를 즐긴 다음 마지막으로 밥과 된장국(미소시루: みそ汁)이 나온다.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도 제철의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지키지만 그 외엔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처럼 엄격하지는 않다.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에서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는 한 가지의 국과 세 가지의 반찬이란 점은 같지만 세 가지의 반찬은 다르다.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에서 제공되는 세 가지 반찬은 ①회(刺身: 사시미) ②구이 ③조림으로 제공되며 여기에 더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인 츠키다시(つきだし)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오토오시(お通し 또는 오토오시모노: お通し物)라고 하는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간단한 음식과 튀김 및 스노모노(すのもの: 酢の物)라는 초무침이 술안주로서 술과 함께 제공되고 제일 마지막으로 밥과 된장국을 제공한다.

현재 호텔이나 일본요릿집 등에서 나오는 일본요리의 주를 이루는 것이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 쇼진요리(精進料理)

다른 요리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라면 쇼진요리(精進料理)는 수도승들이 불교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먹던 음식으로 주홍색 칠을 한 식기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쇼진요리(精進料理) 또한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가 원칙이지만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에 의해 고기나 생선의 사용은 금지하고, 종파에 따라서는 오훈(五葷)이라고 하는 마늘, 달래, 무릇, 김장파, 실파와 같은 자극성이 있는 다섯 가지 채소류의 사용을 금하는 경우도 있다.

고다이라 나오의 눈물

고다이라 나오의 눈물

평창 동계올림픽 빙상 여자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이상화 선수를 격려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고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에 대한 기사들이 연일 쏟아져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도 이런 화제에만 집중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저는 기자회견장에서 흘린 고다이라 나오의 눈물을 보면서, 참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만을 두고 본다면 금메달을 딴 감격에 흘리는 눈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를 기억하며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트랙을 돌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나 금메달을 딴 감격에 그간의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인터뷰를 보고는 아마도 트랙을 돌 때에도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다이라가 그리워하는 친구는 일본의 빙상선수 스미요시 미야코(住吉都)이며 올해 2018년 1월 20일 나가노 시내에 있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하며 유족의 뜻에 따라 사인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언론 등에서는 자살일 것이라고 추측들을 하고 있습니다.

 

미야코 선수는 고다이라와 신슈대학 동기생으로 대학시절 4년 동안 함께 마사히로 코치의 지도를 받았으며 2014년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여서는 500미터에서 14위, 100미터에서 22위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일본 선발전에서 탈락하고 얼마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기면서 NHK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자살일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보도했지만 미야코 선수를 지도했던 마사히로 코치는 “컨디션 난조와 성적부진으로 고민은 하고 있었지만 다른 문제들도 여러 가지 있는 것으로 안다. 단지 성적부진을 이유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은 알리고 싶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었다고 합니다.

대학 4년간을 함께 땀 흘리고 곁에서 서로 응원하며 의지했던 동료가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고다이라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미야코의 사망 직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고다이라는 “솔직히 그녀의 일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언제나 머릿속에는 그녀의 기억이 맴돈다”고 아픈 마음을 전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평창에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미야코의 가족들로부터 전해들은 “나오가 금메달을 딴다면 내(미야코)가 딴 것과 같아”라는 미야코의 말과 “미야코의 몫까지 열심히 해달라”는 미야코 가족의 진심어린 당부도 한 가지 요인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금메달을 딴 것을 미야코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고다이라 선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요~

 

이상화 선수에게 보여준 배려와, 먼저 떠난 동료를 기억하며 흘리는 나오 선수의 눈물을 보면서 “참 따뜻한 성품을 가졌구나!”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됩니다.

국적을 떠나, 늦은 나이에 각고의 노력으로 멋진 결과를 이루어내었던 고다이라 나오 선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왜 병원 소속이었을까?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왜 병원 소속이었을까?

평창 동계올림픽 빙상 여자 5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경기 후 이상화 선수를 격려하는 따듯한 마음씨로 인해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찬사를 받았었다.

 

이런 고다이라 나오 선수의 후원기업이 왜 유수의 일본 대기업이 아닌 나가노현의 한 종합병원이었을까?

고다이라 선수는 중학교 2학년 때 전일본 주니어 스피린트 부문에서 고교생들을 제치고 우승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고교시절에도 500미터와 1000미터의 2관왕을 차지할 만큼 우수한 실력을 자랑했다.

이런 고다이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주변에서는 실업팀으로 진출할 것을 권유했지만 대학에 진학하기로 하고 신슈대학(信州大学: Shinshu University)의 교육학부에 입학을 한다.

고다이라가 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첫째가 교사가 되기 위함이었고 다음이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남자 빙상 500미터 금메달리스트인 시미즈 히로야스(清水宏保)를 지도한 유우키 마사히로(結城 匡啓)(아래 사진 좌측)의 지도를 받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대학시절에도 500, 1000, 1500미터에서 우승을 하는 등 실력을 발휘하던 고다이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사히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 올림픽의 금메달을 목표로 연습에만 전념하기 위해 후원해줄 기업을 찾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유우키 마사히로 감독이 아이자와 병원 이사장을 찾아가 후원을 부탁했고 스포츠 장애 예방센터를 운영하고 있던 병원 측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를 응원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고다이라는 병원의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자와 병원은 1952년에 개원하여 460석 규모의 병상을 가진 병원으로 나가노현에서는 최대규모의 민간병원이다.

 

이 병원에 고다이라 선수가 채용될 수 있었던 것에는 고다이라의 대학 졸업논문이 병원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장애 예방센터와도 맞았기 때문이지만 당시 병원의 이사장은 지금처럼 대단한 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병원의 홍보효과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고액의 지원은 하지 못하지만 대졸 사무직원에 준하는 급여와 주거비용 및 원정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일부 언론에 의하면 아이자와 병원이 홍보효과를 노리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GLOBAL HEALTH CONSULTING에 따르면 유우키 마사히로(結城 匡啓) 코치가 병원을 찾아가 후원기업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을 토로했고 이에 병원의 이사장이 가진 “스포츠 장애 예방센터라는 알맞은 부서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를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과 일치하여 채용을 결정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아이자와 스포츠 장애 치료예방센터 홈페이지)

그리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병원의 이사장은 선수시절 부상치료 때문에 병원과 인연이 있던 마사히로 코치가 고다이라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2009년 3월에 병원을 찾아 지원을 문의했고 당시에는 홍보효과라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병원의 이사장은 “많은 금액을 후원하지는 못하지만 마사히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경기에 계속해서 참가하는 정도의 금액이라면 어떻게든 지원하겠다”고 회고했다는 기사를 실었었다.

이렇게 고다이라를 지속적으로 지원한 아이자와병원의 이사장은 3대를 이어온 의사집안이며 “이익이 생기면 세상을 위해 사용하라”는 선친의 유훈을 받드는 것이라고 하며, 곁눈질 하지 않고 노력하는 고다이라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스케이트에 인생을 걸고 이토록 한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후원할 것이라고 산케이스포츠는 전하기도 했었다.

아이자와 다카오 이사장(관련 기사 바로가기)

고다이라 선수가 아이자와병원으로부터 받는 급여와 기타의 비용을 합하여 병원으로부터 지원 받는 금액은 연간 원화로 2억~3억 원 선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는 고다이라를 후원하는 기업이 미즈노와 ANA를 비롯하여 롯데 등 많이 생겼지만 이전까지는 병원의 후원과 일본정부에서 후원하는 선수 지원금(A~C 등급)으로 월 20만엔 정도의 금액이 전부였다.

 

2014년 소치 올림픽 500미터에서 5위에 머문 고다이라는 아이자와 병원에 적을 둔 채 네덜란드의 프로 팀 ‘Team Continu’에서 활동을 하면서 애초의 1년의 계획이 연장되어 2년간을 네덜란드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때에도 아이자와 병원에서는 고다이라를 장기출장으로 처리하고 지원을 계속했다고 한다.

 

선수를 위하여 후원해줄 기업을 직접 찾아가 노력한 유우키 마사히로(結城 匡啓) 코치와 이렇게 순수한 동기로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은 병원의 후원과 고다이라 선수의 노력이 뭉쳐서 평창올림픽의 금메달을 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험비(Humvee)와 험머(Hummer)는 무엇이 다를까?

험비(Humvee)와 험머(Hummer)는 무엇이 다를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지프 다음으로 미군을 대표하는 차량인 험비(Humvee)와 민간용 차량인 험머(Hummer)는 어떻게 다른지를 한 번 알아보자.

우선 험비(Humvee)는 고기동 다목적 차량(High-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차량의 이름은 아니고 실제로 미군이 고기동 다목적 차량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프로젝트의 명칭이 그대로 차량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

개발계획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공모에서 크라이슬러, 콘티넨털 모터스, AM 제너럴의 3개 업체가 선정되어 1982년 5월까지 각각 11대씩의 시제품을 육군에 납품하였고 이어서 1년간의 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AM 제너럴의 차량이 채택되었는데 콘티넨털 모터스는 2019년에 콘티넨털 에어로스페이스 테크놀로지(Continental Aerospace Technologies)로 이름이 바뀌었다.

AM제너럴은 자사가 납품한 차량이 채택될 것에 대비하여 미리 차량의 이름을 정해두었었는데 그것이 바로 험머(Hummer)였으며 이미 상표등록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미육군 프로젝트명의 약어인 험비(HMMWV)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어버리면서 발음하기 쉽도록 험비(Humvee)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가 되면서 민간형의 출시를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 6월에 험비(Humvee)의 시트를 개량하고 에어컨을 탑재하는 등 개조하여 민간용으로 한정판매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면을 살펴보면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의 힘이 컸음을 알 수 있다.

1990년 6월 유치원에 간 사나이(Kindergarten Cop)란 제목의 영화를 촬영하면서 험비차량이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는 차량에 매료되어 끈질기게 AM제너럴에 전화를 걸어 민간에게도 판매하면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설득을 했고 마침내 한정판매를 하기로 결정하자 최초의 험머 H1 2대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직접 구입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정판매이기는 했어도 호평을 얻자 AM제너럴은 같은 해 10월부터 일반에게 판매를 시작하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판매는 저조하였고 마침내 1999년 12월에는 험머(HUMMER)라는 브랜드를 제너럴 모터스에 넘기게 되고 만다.

따라서 험머(HUMMER)란 이름은 GM이 사용하고, 험비(Humvee)라는 이름은 AM 제너럴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GM은 험머(Hummer)의 명칭을 험머 H1이라고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GM이 사용하던 험머(Hummer)란 브랜드의 차량은 AM제너럴과의 계약에 따라 AM제너럴의 공장에서 생산된 것들이었는데, 2002년에 발매된 험머 H2도 AM 제너럴의 공장이 있는 인디애나 주의 미셔와카(Mishawaka)에서 생산되기는 하였지만 쉐보레 타호(Chevrolet Tahoe)를 기반으로 만들 수가 있었고 H1, H2에 이어서 2006년에는 H3를 출시했던 GM은 2009년에 파산함으로써 험머(Hummer)란 브랜드의 정리와 더불어 H2와 H3의 판매도 종료되고 말았다.

 

비록 민수용인 (Hummer)는 사라졌지만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험비(Humvee)는 지금도 AM제너럴의 미셔와카(Mishawaka)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