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10일만 볼 수 있다는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

1년에 10일만 볼 수 있다는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

매년 4~5월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의 하나라고 하는 할레보스(Hallerbos)는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라벤더와 비슷한 색깔을 가진 꽃 블루 벨(Bluebells)로 물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간은 단지 10여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할레보스(Hallerbos)는 네덜란드어로 ‘할레 숲(Halle fores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언론이나 블로그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할레보스 숲(Hallerbos forest)’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할레보스(Hallerbos)는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 인근의 할레(Halle)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블루 벨은 주위의 나무나 꽃들이 싹을 피우기 전에 잠깐 만개하였다가 지기 때문에 주로 이른 봄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블루 벨의 아름다움으로 물드는 할레보스(Hallerbos)도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할레보스를 관리하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숲의 주인은 7세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하는데 최초의 주인은 686년 ‘세인트 발트루디스(Saint Waltrudis) 수도원’이었다가 이후 ‘아렌베르크 공작(Duke of Arenberg)’의 소유에서, 1851년에는 네덜란드령이 되었다가, 1831년에는 다시 아렌베르크 공작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9년, 아렌베르크 공작 가문의 모든 재산은 독일의 배상금에 대한 보증으로 벨기에 정부에 의해서 압수되어 벨기에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미 그 때는 숲의 대부분은 파괴되고만 상태였다.

 

파괴된 숲을 되살리기 위해 벨기에 정부에서는 그 후 20여 년 동안 조림사업을 실시하였는데 1968년 브뤼셀과 파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또 다시 24ha가 파괴되어 지금은 총면적이 542ha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할레보스(Hallerbos)에서 블루 벨(Bluebells)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공식사이트(Hallerbos)를 방문하면 할레보스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고 지도도 다운 받을 수가 있다.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을 보기 원한다면 네덜란드의 유튜버인 ‘Pieke’씨가 만든 아래의 영상을 보는 것이 홈페이지에 있는 영상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비핵화를 넘어 남과 북이 공존·공영하면서 통일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뜻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다시는 이 땅이 할레보스(Hallerbos)처럼 전쟁에 의해 2번이나 파괴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결렬된 하노이회담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노력을 관심 갖고 지켜보려고 한다.

설탕이 갈라놓은 형제 사이

설탕이 갈라놓은 형제 사이

미국의 시리얼 제조업체인 켈로그(Kellogg’s)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가 1922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바뀌게 되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보다 앞선 켈로그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은 마침 바로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태어난 날이다. 1860년 4월 7일 출생한 그는 1930년에 사업에서 번 돈으로 ‘W. K. 켈로그재단(W. K. Kellogg Foundation)’을 설립하였는데 1934년 그가 재단에 기부한 6천6백만 달러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

켈로그의 처음 회사명에 ‘배틀 크리크(Battle Creek)’란 단어가 들어있는 이유는 의사였던 형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관리하고 있던 미시간 주의 요양원 이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 형제가 태어난 곳이 미시건(Michigan)주의 배틀 크리크(Battle Creek)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내용이지만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뿐만 아니라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함께 근무를 하였다.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그러나 이 요양원이 1866년 9월 5일에 처음 문을 열 때에는 요양소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부건강회복연구소(Western Health Reform Institute)’란 이름으로 개원하였는데 1902년 화재로 다시 문을 열게 되면서 처음으로 요양소(Sanitarium)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1876년부터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소장으로 재임하게 되었고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경리직원으로 근무를 했던 것이다.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

 

켈로그 형제가 공동으로 설립한 최초의 회사는 1898년에 창업한 ‘배틀 크리크 요양소 건강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Health Food Company)’였고 이것이 1901년에는 ‘배틀 크리크 요양소 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Food Company)’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1899년에 혼자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던 회사(Sanitas Nut Food Company)와 합병하여 1908년 7월에 회사이름을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 다시 회사명을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형제간의 갈등임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욕심 때문이었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켈로그(Kellogg)’란 회사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을 설립한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며 동생이 별도로 1906년에 기업을 창업하게 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간의 갈등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동생이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형도 그의 개인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던 회사와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형과 동생은 사이좋게 회사를 공동운영다가 무슨 이유로 결별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맛의 개선을 위해선 설탕을 사용해야 한다.’는 동생의 의견과 채식주의자이면서 금욕주의자였던 형의 ‘설탕은 탐욕을 증가시킴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의견이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설탕의 사용을 두고 형제간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는 동생에게 요양소에 있는 환자들 외에는 시리얼을 공급하지 말라고 통보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동생이 별도의 회사를 차리게 되었지만 레시피는 동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동생의 회사는 1909년에 이름을 ‘켈로그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Kellogg Toasted Corn Flake Company)’로 바꾸면서 1908년부터 회사명에 ‘켈로그’를 쓰고 있던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와 또 다른 갈등을 겪게 된다.

이름도 비슷하고 포장과 내용물까지 유사한 두 회사의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하여 마침내 1920년, 동생이 형을 고소하여 승소하게 됨으로써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결과의 하나로써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는 1921년부터 회사이름에서 켈로그를 빼고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었고 동생의 회사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사명을 변경하고 ‘켈로그(Kellogg’s)’란 이름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던 켈로그 형제는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말년에 형제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지만 그의 비서가 보내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90세를 일기로 1943년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동생이 그 편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욕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바랐던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을 앞두고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새삼 떠오른다.

있을 때 잘하자~^^

영국해군의 잠수함은 왜 해적기를 게양했을까?

영국해군의 잠수함은 왜 해적기를 게양했을까?

이미지 출처: 플리커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과 대퇴골 아래, 용맹을 상징하는 칼을 그려 넣은 해적기 졸리 로저(Jolly Roger)를 군에서 사용한 것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프리드리히 2세) 시절 프로이센의 제10(마그데부르크)검기병연대의 폰 루쉬(Von Ruesch) 대령이 지휘하는 병사들이 착용했던 모자에는 독일어로 해골을 뜻하는 토텐코프(Totenkopf)를 그려 넣었고, 나치 독일군이 사용한 것으로는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의 휘장이 대표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군대에서는 해골문양의 휘장을 사용하였으며 에스토니아의 쿠페르야노프 보병대대는 1918년 이래로 해골을 휘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현대에 와서 가장 익숙한 것은 미해군의 VFA-103 비행중대의 별명인 졸리 로저스(Jolly Rogers)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백골부대로 불리는 대한민국 육군 제3보병사단일 것이다.

이처럼 해골문양을 군대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잠수함에서 졸리 로저(Jolly Roger)를 처음으로 사용한 기록은 영국해군이 가지고 있다.

1901년 영국해군이 최초의 잠수함인 HMS Holland 1을 운용하였을 때, 아서 윌슨(Arthur Wilson)제독은 잠수함을 가리켜 “은밀하고 불공평하며 영국식이 아닌 무기”라고 혹평하면서 “적국의 잠수함 승무원들은 해적들을 처형하던 것처럼 교수형에 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사진은 HMS Holland 3

신사의 나라 영국은 전쟁에서도 기사도를 발휘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영국해군의 잠수함 승조원들 또한 해적과 같은 취급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었기 때문에 겉으로 표현하지는 못했겠지만 영국해군의 잠수함 승조원들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중이던 1914년 9월 13일, 맥스 호튼(Max Horton) 함장이 지휘하던 영국해군의 잠수함 HMS E9는 독일의 순양함 SMS Hela를 격침시키고 이어서 10월 6일에는 구축함 SMS S-116을 침몰시켰는데 이것은 영국해군 잠수함 최초의 승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맥스 호튼(Max Horton) 함장의 가슴속에는 잠수함 승조원들을 해적에 비유한 아서 윌슨(Arthur Wilson) 제독에 대한 불만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작전을 마치고 귀환하면서 맥스 호튼(Max Horton) 함장은 부하들에게 졸리 로저 (Jolly Roger)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해적기를 게양한 채로 입항하였는데 이것이 전통이 되어 영국해군의 잠수함의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이 전통은 이어져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했던 HMS Utmost의 사진이 널리 알려졌는데 졸리 로저 (Jolly Roger)에 그려 넣은 기호는 저마다 고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면 막대 모양은 어뢰공격을 뜻하는 것으로 붉은색은 군함을, 흰색은 상선을, 검은색은 U보트를 격침시켰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HMS Utmost호의 승조원들이 들고 있는 해적기에 새겨진 단검은 작전명 ‘망토와 단검’을 통해서 8척을 침몰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오른쪽 제일 아래에 있는 구명튜브는 1척을 구조했음을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은 2차 대전 당시 연합국으로 참전한 나라들에도 전해져 폴란드의 잠수함들도 졸리 로저 (Jolly Roger)를 게양하였다.

한편 영국해군의 잠수함이 졸리 로저 (Jolly Roger)를 게양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1982년에 일어났던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이었는데 전쟁 당시 영국의 원자력잠수함 HMS 컨커러(HMS Conqueror)가 아르헨티나의 순양함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를 격침시킨 다음 해적기를 게양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영국의 이익을 앞세워 시작했던 전쟁으로 인해 아르헨티나인은 모두 649명이 전사하였고 영국해군의 잠수함 공격으로 인해 전사한 숫자는 민간인 2명을 포함한 323명으로 전체 전사자의 절반 가까이나 되었다.

그리고 헤네랄 벨그라노(ARA General Belgrano)에 타고 있던 승무원들 중 772명은 아르헨티나의 해군과 인근을 항해하던 칠레 해군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미군들이 믿는 징크스 Top 5

미군들이 믿는 징크스 Top 5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惡運)으로 여겨지는 것” 또는 “재수 없는 일이나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을 뜻하는 징크스(Jinx)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져 오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저와 자주 함께 출조를 하는 사람 중에는 유독 그 사람이 날짜를 잡기만 하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낚시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요즘은 아예 날짜를 정해서 통보만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징크스들에는 미군들이 믿고 있는 것들도 있는데 특히 MRE에 들어있는 참스(Charms)사탕을 먹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을 가장 많이 믿었고 녹색의 참스를 먹으면 비가 내린다고 믿었으며 적에게 불운을 안겨주라는 의미로 교전 중에 적을 향해 던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참스(Charms)는 사라져 버렸기에 제외하고 지금 현재 가장 많은 미군들이 믿는다는 징크스 다섯 가지를 모아보았습니다.

▶ 5위: 흰색 라이터를 넣고 다니면 안 된다.

이것은 27세에 사망한 대중음악가들을 말하는 “27 클럽(27 Club)”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 클럽의 멤버인 “짐 모리슨(James Morrison)”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ex)”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죽었을 때 그들의 주머니에 흰색의 Bic라이터가 들어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미군에서 이 징크스가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미해병대의 상륙돌격 장갑차(Amphibious Assault Vehicle)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탑승하고 있던 해병이 흰색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건으로부터 퍼지게 되었다고 하며 동승하고 있던 또 다른 해병대원은 행운의 상징인 말발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결코 흰색 라이터의 불행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 4위: 밤에 배 위에서 휘파람을 불면 안 된다.

우리도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거나 귀신이 나온다는 미신이 있는데 미군들도 밤에 휘파람을 불면 바다의 신 “넵튠”이 노하여 배를 침몰시킨다고 하는 미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 3위: C-레이션에 든 살구를 먹으면 안 된다.

C-레이션에 관한 미신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여러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는데 베트남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해병들이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캔에 든 살구를 먹을 때면 어김없이 집중포화을 받는 일이 잦았고 이 사실을 1968년에 미국의 군사전문 일간지인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 Stripes)”가 전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 2위: 스켈레톤 키가 있는 군복을 입으면 안 된다.

“스켈레톤 키(Skeleton Key)”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여러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말하는데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열쇠 무늬가 들어있는 군복을 입으면 죽는다고 하는 미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교전 중에 전사한 미군이 총상을 입은 부위가 공교롭게도 열쇠 모양의 위장 패턴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 1위: “Rain”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야전훈련이 많은 군인들은 당연히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하지만 누군가 “Rain”이라고 말을 하면 화창하던 날씨가 돌변하여 비를 퍼붓는다고 하는데 더 재미난 것은 이렇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내무반으로 돌아가야만 그치는 것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의학계의 발전

한국전쟁이 가져온 의학계의 발전

종전선언이 금년 중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아직도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지금,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미군이 운영하던 야전병원을 일컫는 MASH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여 미국 CBS에서 드라마로 방송되면서 한국 하면 미국인들에게 전쟁과 가난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만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미국인들이 가지는 반면 우리 동포들과 연합군들의 피로 얼룩진 전쟁은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동병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는 1단위가 60개의 병상을 기반으로 14명의 의사, 12명의 간호사, 1명의 준사관, 2명의 위생병과 97명의 지원병력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게 되면 병상의 수가 최대 200개로 늘어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MASH는 이동명령이 내려지면 6시간 후에는 모든 이동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훈련되었으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4시간 이내에 진료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야 했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 운영되어왔던 MASH는 2006년에 폐지되었는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의 부상병들은 이전의 다른 전쟁에 비해서 개선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었고 의료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많은 회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한국전쟁 당시 MASH부대원들의 활약상과 한국전쟁은 의학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를 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1955년까지 미군은 남자간호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참가한 간호사들은 모두 여성들이었습니다. 미 간호부대 소속의 간호사들 중에서 한국전쟁에는 약 1,500명 정도가 근무하였는데 그녀들이 근무한 장소는 격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아주 근접한 거리의 열악한 환경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들 간호사들은 미군이 한국에 도착한지 4일 후에 부산에 병원을 설치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12명의 간호사가 대전에 MASH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와 TV드라마의 모델이 된 8,055번째 병원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간호사들은 모두 9개의 훈공장과 120개의 동성훈장, 173개의 약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 외상치료의 변혁

한국전쟁은 혈액의 운반, 혈관수술의 개선, 신장투석의 개혁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혈액의 운반을 위해 유리병을 사용하였으나 그로 인해 수송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쉽게 파손되는 문제가 있었으나 한국전쟁에서는 혈액을 비닐에 담아 운반·보관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혈관수술에 있어서는 2차 대전 당시의 49.6%에 달하는 혈관이 손상되거나 절단되던 비율이 20.5%로 줄어들 정도로 일반화 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전쟁에서는 급성콩팥손상으로 인한 치료에 콜프-브리검 투석기(Kolff-Brigham dialyser)를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90%에 달하던 사망률을 53%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52년이 되어서야 투석기를 사용한 사례가 출간되었는데 이미 그 이전인 1951년에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투석기를 사용하여 생명을 구한 간호사들의 노력은 다시 한 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부상병의 수송에 헬기를 이용하다.

육군대변인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William Howard)의 말을 빌면 “한국전쟁은 부상병 수송원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950년 이전에도 환자의 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일상적으로 헬기를 부상병의 수송에 사용함으로써 헬기수송(medevacs) 인원이 2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군은 물론이고 민간병원에서도 환자의 수송에 헬기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CBS의 드라마에는 비록 한국의 실상이 지나칠 정도로 좋지 않게 표현된 부분도 있었지만 MASH 부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5월까지만 연인원 1만5천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하며 MASH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오토 아펠(Otto Apel)”은 “8,076번째 MASH에서 72시간 이후에는 모든 감각이 상실되었으며 거의 80시간을 논스톱으로 수술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MASH의 활약상이 영화와 TV드라마로 알려지게 된 것은 8,055번째로 설치되었던 대전의 MASH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리차드 혼버거(Hiester Richard Hornberger Jr)”씨가 필명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로 펴낸, 소설(MASH: A Novel About Three Army Doctors) 때문이었습니다.

허리케인 헌터를 제대로 알아보자

허리케인 헌터를 제대로 알아보자

미국에 불어 닥친 허리케인 플로렌스로 지금까지 확인된 사망자만 14명이 넘는다는 보도가 들려오고 있으며 며칠 전에는 이웃나라 일본을 태풍이 휩쓸고 지나갔고 지금은 필리핀과 중국이 태풍으로 인해 피해를 겪고 있습니다.

허리케인에 관한 보도가 나오면 허리케인 헌터라는 용어가 종종 사용되곤 하는데 인터넷에 나오는 것을 보면 “기상 관측용 항공기로 태풍의 눈을 관통해 비행하며 그 특성을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지금부터 “허리케인 헌터”가 무엇인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허리케인 헌터(Hurricane hunters)는 현재 미공군예비사령부(AFRC: Air Force Reserve Command) 소속의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와 미국상무부(United States Department of Commerce) 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소속의 “NOAA 허리케인 헌터”의 2개 조직이 운영되고 있으므로 허리케인 헌터라는 표현을 사용할 때에는 어디 소속인지를 밝히는 것이 필요합니다.

허리케인 헌터의 시초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3 Surprise Hurricane”이라 불리는 허리케인이 1943년 휴스턴과 텍사스 일대를 강타하자 브라이언 공군기지에서 교육을 받고 있던 영국 조종사들은 훈련기인 “노스아메리칸 T-6 텍산”을 대피시키는 것을 보고 비행기의 안전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게 됩니다.

노스아메리칸 T-6 텍산

 

이에 교육을 담당하던 조셉 덕워스(Joseph Duckworth) 중령은 안전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내기를 하고 항법사 “랄프 오헤어(Lalph O’Hair)”를 대동하고 허리케인 속을 비행하고 안전하게 돌아오게 됩니다.

조셉 덕워스(Joseph Duckworth)중령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기상청 소속의 “윌리엄 존즈 버딕(William Jones Burdick) 중위”를 태우고 두 번째로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을 마치고 안전하게 돌아온 것이 허리케인 헌터의 시작이며 1946년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가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를 기상정찰용으로 도입하면서부터 허리케인을 정찰하는 임무를 “허리케인 헌터(Hurricane Hunters)”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보잉 B-29 슈퍼포트리스

 

그렇기 때문에 통상 허리케인 헌터라고 하면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며 이와는 반대로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것은 미국해양대기청(NOAA: National Oceanic and Atmospheric Administration) 소속의 “NOAA 허리케인 헌터”입니다.

현재 “제53기상정찰비행대대”는 록히드사의 “WC-130J”기종 10대를 운용하고 있으며 “NOAA 허리케인 헌터”는 록히드사의 “WP-3D 오리온” 기종 2대와 “Gulfstream GIV” 1대를 운용하고 있습니다.

WC-130J

 

WP-3D 오리온

 

Gulfstream GIV

 

허리케인 헌터로서 태풍 속을 비행하는 조종사들이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과연 안전한가?”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하여 그들은 “비행 중의 기체는 바람이 아무리 강해도 부서지지는 않고 겨울철 미국 상공의 초속 150m를 넘는 제트기류에서도 비행을 할 수는 있으나 난기류의 일종으로 바람의 방향이나 세기가 갑자기 바뀌는 ‘윈드 시어(Wind Shear)’가 더 무섭다.”고 답합니다.

윈드 시어(Wind Shear)

 

또한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하는 느낌은 “자동세차기를 통과하는 동안 차량의 지붕에 고릴라가 몇 마리 뛰어올라 노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인공위성이 많은 지금도 이런 비행을 계속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질문에는 그들의 경험담을 들려줍니다.

1989년 허리케인 휴고가 왔을 때 기상위성이 관측한 바에 따라 “카테고리 3”으로 풍속이 초속 50~58미터 정도일 것으로 알고 고도를 1,500피트로 맞추었지만 실제 허리케인은 “카테고리 5”에 해당하는 초속70미터 이상의 강풍을 동반하고 있는 상태여서 기체의 중심을 잃고 비행기가 하강하는 도중에 엔진도 하나가 꺼져버려서 하마터면 큰 화를 입을 뻔했다고 합니다.

1974년 10월 12일 태풍의 눈을 비행하던 항공기(Swan 38호)와 승무원 6명이 무전이 끊기며 실종되어 전원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 마지막 피해라고는 하지만 미국의 민간 기상업체 웨더 언더그라운드(Weather Underground)에 따르면 허리케인 헌터가 활동한 이래로 지금까지 6기의 항공기와 53명의 인명손실을 기록하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는 사람이 직접 비행하는 대신에 무인항공기를 사용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으나 “낙하존데(Dropsonde)”를 투하하고 발신하는 데이터를 기록하는 등의 작업을 수행하지 못하는 점 때문에 아직은 대체할 수 없다고 합니다.

낙하존데(Dropsonde)

현재 “NOAA 허리케인 헌터”가 운용하는 비행기 중에서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하는 기종은 각각 “미스 피기(Miss Piggy)”와 “커밋(Kermit)”이라고 불리는 “록히드 WP-3D Orion”으로 한국해군에서 운용 중인 “대잠초계기 P-3C”와 같은 기종입니다.

P-3C 대잠초계기

“NOAA 허리케인 헌터”가 오래 된 “록히드 WP-3D Orion”을 아직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기체의 강도가 높고 내구성이 좋아 허리케인 속으로 비행하는데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고 보니 조종석의 계기판이 모두 아날로그식입니다^^

“록히드 WP-3D Orion”가 허리케인 속으로 들어가면 기상관측을 담당하는 승무원이 손에 든 “낙하존데(Dropsonde)”를 뒤의 구멍을 통해 투하하고 보내오는 데이터를 기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허리케인 헌터가 무엇인지 알아본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술집을 해방시킨 헤밍웨이와 독일의 스파이 코코샤넬

술집을 해방시킨 헤밍웨이와 독일의 스파이 코코샤넬

이미지 by vasse nicolas,antoine

 

프랑스 파리의 한복판에 있는 리츠호텔은 세계토픽에 종종 등장하는 유명한 호텔입니다.

호텔 소유주의 아들인 도디 알파예드는 1997년 교통사고로 숨진 다이애나 전 영국 왕세자비의 연인이었고 그녀의 마지막 만찬이 바로 이곳에서 있었으며 2018년 1월에는 호텔에 보관 중이던 60억 원 상당의 보석을 강탈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었는데 범인들 중의 3명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아무튼 파리의 리츠호텔은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었던 전력이 알려진 디자이너 코코샤넬을 비롯하여 문학가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내용의 기사를 자주 접하게 되곤 하는데 오늘은 프랑스 파리의 리츠호텔과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 시리즈에서 두 번째로 알아보았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편에서 헤밍웨이는 금주법이 시행될 시기에 주류밀수를 하던 ‘슬로피 조 바(Sloppy Joe’s Bar)’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고 낚시를 즐겼다는 것을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세계의 유명 낚시인②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술을 아주 좋아했던 헤밍웨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국의 잡지 콜리에(Collier)의 종군특파원으로 전쟁에 참가를 하게 되는데 이 와중에서도 술을 좋아했던 그의 모습이 드러나는 일화가 한 가지 있지만 이런 사실은 많이 알려져 있지를 않은데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오늘 이야기의 주제는 파리 리츠호텔에 있는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에 관한 것인데 흔히들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기 때문에 이 바의 이름이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일 것이라 생각을 하지만 헤밍웨이가 즐겨 찾아서 붙은 이름이 아니고 헤밍웨이가 이곳을 해방(?)시켰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에 의해 4년 동안 점령되었던 파리를 프랑스군이 해방시켜야 한다는 연합군 사령관 아이젠하워(Eisenhower)장군의 주장에 따라 미군이 먼저 입성할 것을 주장했던 패튼(Patton) 장군의 주장은 뒤로 밀리게 되고 프랑스의 제2기갑사단이 파리 입성의 주력부대로 선정되게 됩니다.

이 때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함께 프랑스에 와있던 헤밍웨이는 일련의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부대가 무기도 없고 조직적이지 못한 것을 발견하고 그가 미군의 대령인 것처럼 속이고 랑부예(Rambouillet)로 레지스탕스를 이동하여 주둔시키고 미군의 도움을 받아 기관총과 수류탄 등의 무기로 무장을 시킵니다.

 

중앙이 헤밍웨이, 가장 왼쪽이 OSS의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

 

당시 파리에만 2만여 명의 레지스탕스 대원들이 있었다고 알려지고 있지만 무장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독일군과의 직접적인 전투를 꺼려하고 대신에 독일군이 사용하는 차량의 바퀴에 구멍을 내거나 통신선을 자르는 등의 소극적인 활동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드디어 1944년 8월 25일 프랑스군과 일부 미군이 입성함으로써 파리는 해방을 맞게 되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가 있는 리츠호텔에 처음으로 입성한 사람이 바로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였던 것입니다.

 

그가 지휘하던 레지스탕스 대원들은 OSS의 데이비드 브루스(David Bruce)와 미육군 대령이었던 마샬(Marshall)과 함께 8월 24일 랑부예(Rambouillet)에서 파리로 진격하게 되는데 그 와중에 카페를 발견하면 헤밍웨이는 “술을 찾았는가?(Marshall, for God’s sake, have you got a drink?)”라고 마샬 대령에게 소리쳐 묻곤 하였다고 마샬(Marshall)은 회고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파리로 진격했던 레지스탕스 대원은 헤밍웨이가 “나는 파리에서 최초로 리츠를 해방시킨 사람이 될 것이다(to be the first American in Paris and liberate the Ritz)”라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전쟁의 와중이라 그들이 파리로 가는 도중에 발견한 것이라곤 한 병의 스카치와 몇 병의 샴페인에 불과하였습니다.

드디어 리츠호텔이 있는 캄봉거리(Rue Cambon)에 차량이 도착하자마자 차에서 뛰어내리면서 헤밍웨이는 “리츠를 해방시키러 왔다(Come to liberate the Ritz.)”고 말했다고 당시 호텔의 중역이었던 클로드 라울렛(Claude Roulet)은 회고하고 있으며 이전부터 헤밍웨이를 알고 있었던 당시의 매니저인 클로드 오젤로 (Claude Auzello)는 헤밍웨이에게 “총을 두고 들어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특히 클로드 오젤로 (Claude Auzello)는 독일의 스파이로 활동했던 코코샤넬로 인해서 큰 불행을 겪었는데 그녀의 아내 블랑쉬 오젤로(Blanche Auzello)는 호텔에서 취득한 정보를 연합군과 레지스탕스에게 전달하거나 추락한 연합군 조종사들의 탈출을 돕는 등 독일에 반대하는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코코샤넬의 밀고로 유태인이란 사실이 발각되어 게슈타포에 체포, 고문을 받고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악명이 높았던 “Fresnes Prison”수용소에 갇히게 되고 맙니다.

 

블랑쉬 오젤로가 구금될 당시에 공산주의자였던 그녀의 친구도 함께 붙잡혔는데 블랑쉬는 친구에 대한 정보와 그녀가 유대인인라는 것을 실토한 후 풀려나게 됩니다. 그러나 호텔을 떠나 은퇴하기를 희망했던 남편과는 달리 정신착란을 일으키며 호텔을 떠나기를 극구 반대했던 블랑쉬는 그녀의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가자 1969년 5월 29일 남편 클로드 오젤로(Claude Auzello)가 권총으로 그녀를 먼저 죽인 다음 자신도 자살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마감하게 됩니다.

블랑쉬 오젤로(Blanche Auzello)

 

어니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는 “파리에서 리츠호텔에 머물지 않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그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할 정도로 그가 즐겨 찾았던 리츠호텔에 있는 지금은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로 이름 붙여진 술집은 이전까지는 그냥 자그마한 바에 불과한 것이었다고 하는데 파리에 입성한 다음날인 8월 26일 헤밍웨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호텔의 바에서 그가 좋아하는 술을, 그와 평소 친분이 있던 미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어윈 쇼(Irwin Shaw)를 비롯한 언론사의 기자들과 어울려 마셨다고 합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리츠호텔의 작은 바는 1994년부터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로 불리게 되었으며 2012년 보수공사를 시작하면서 문을 닫았다가 2016년 6월 8일 다시 개장함과 동시에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는 그의 흉상과 그가 즐기던 낚시를 하는 사진들로 꾸며졌다고 합니다.

참고로 리츠호텔에는 총 4개의 바가 있으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헤밍웨이 바(Hemingway Bar)입니다.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낚시와 어업에 대한 역사자료를 수집하여 정리하는 도중에 1979년 8월 18일자 한국일보에 실린 ‘함지박 타고 바다낚시’란 제목의 기사를 발견했는데 내용을 발췌해보면 다음과 같다.

 

섬마을 어린이들에게는 바다를 누빌 배가 필요 없었다. 높이 50㎝에 직경 70㎝가량인 둥그런 물통이 배를 대신했다. 속칭 다라이라는 이 플랙스틱 함지박 안에 올라앉아 길이 2m가량의 대나무막대기를 노삼아 양쪽으로 저어 어디든지 오갔다. 그러면서 손낚시로 고기를 낚아 집안의 밥상에 올릴 찬거리를 마련했다.

집 앞 발아래의 바다가 이들의 여름철 놀이터이자 어장. U자형의 해안선 가운데에 자리 잡은 이 마을은 오른쪽에 조선, 왼쪽에 입석부락을 두르고 그 중심인 바다 복판에 8자형의 작은 옥섬이 건너다보인다. 세 부락에서 옥섬까지의 거리는 2백m 안팎이고 그 사이의 수심은 깊어야 30m. 이 일대를 마음대로 타고 다니며 놀다 상·하오의 밀물 때를 맞추어 도미와 도다리, 볼락어 등 고기를 하루 20~30마리씩 낚고 있는 것이다.

안전장비도 없이 수심 30m의 바다에서 위험한 낚시를 하는 것을 기사로 쓴 것에서 당시의 안전불감증을 엿볼 수도 있지만 오늘은 바구니를 타고 낚시를 하는 얘기에만 집중해보자.

바구니 보트, 또는 바구니 배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의 관광상품이 된 뚱차이(thúng chai)를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던 당시, 베트남 어부들이 배에 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만든 뚱차이는 흔히들 영어로는 basket boat라고 표기한다.

그런데 이런 바구니 형태의 배를 가리키는 말로는 코러클(coracle)이란 단어가 따로 존재한다.

웨일스어에서 유래하여 16세기 초에 사전에 등재되었다고 하는 coracle이란 말은 시저가 영국을 침략할 때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그림과 함께 기록된 것으로는 존 카셀(John Cassell)이 설립한 출판사에서 펴낸 책(Cassell’s Illustrated History of England)에 남아있는 아래의 그림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런 바구니 보트는 베트남 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사용되고 있으며 관광상품으로도 판매 중으로 부르는 이름은 파리살(parisal)이다.

 

그밖에도 기원전 450년경 헤르도투스가 바빌론을 방문한 뒤 기록한 이라크의 바구니 보트가 역사적으로는 시저 다음의 기록이라 생각되는데, 영어로는 쿠파로 부르며 다른 나라의 것들에 비해 아주 큰 것이 특징으로 노아의 방주가 쿠파의 일종이었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 참고: BBC의 Coracles: The surprising history of Britain’s strangest boat

 

신문기사로 전해지는 함지박낚시의 주인공들은 지금도 낚시를 즐기고 있겠지?

빵 클립(Bread clip)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 클립(Bread clip)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을 담은 봉투를 보면 플라스틱으로 밀봉되어 있는 경우가 있는데 흔히 빵 클립이라고 부르는 이 작은 플라스틱 제품은 누가 만들었을까?

빵 클립을 가장 많이 생산하는 회사로는 미국의 퀵록(Kwik Lok Corporation)과 네덜란드에 본사를 두고 있는 유럽의 슈테(Schutte bagclosures BV)가 대표적인데 두 회사 모두 제품명으로 백 클로저(Bag Closures)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빵클립으로 불리고 있는데 빵 포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제품의 포장에 사용되고 있는 빵 클립(Bread clip)이라 불리는 백 클로저(Bag Closures)의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1952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식품의 포장기계 사업을 하고 있던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은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도중 기내에서 땅콩을 먹기 위해 봉지를 뜯었다.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

 

그러나 땅콩 봉지를 다시 밀봉할 수 없게 되자 지갑을 뒤져 기한이 만료된 카드를 꺼내고 주머니칼(pen knife)로 카드에 구멍을 뚫은 다음 봉지를 다시 밀봉하였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플로이드 팩스턴(Floyd G. Paxton)은 워싱턴에 있는 사과농장으로부터 사과를 봉지에 담은 다음 쉽게 밀봉하는 방법이 없는지 의뢰를 받게 되는데, 그가 기억해낸 것이 바로 비행기에서 땅콩 봉지를 다시 밀봉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퀵록(Kwik Lok Corporation)의 일본지사에서는 사과농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하고, 영문판 위키피디어에서는 과일 포장업체인 퍼시픽 프루트(Pacific Fruit)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나오는데, 개인적으로는 퀵록에서 밝히는 자사의 역사에 더 신뢰가 간다.

아무튼 플로이드 팩스턴은 그의 기억을 되살린 아이디어를 상품화시켜 1950년대 초에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하던 식품의 자동포장에 대량으로 공급하면서 빵 클립(Bread clip)은 엄청난 판매량을 기록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시도에도 불구하고 특허를 취득하지는 못하였는데 그 결과 클립(Bread clip)을 세상에 선보인지 5년 뒤인 1957년에 네덜란드에서 요하네스 슈테(Joannes Schutte)란 사람이 암스테르담에 있는 그의 집 지하실에서 빵 클립(Bread clip)이라 불리는 백 클로저(Bag Closures)를 만들어 빵집에 자전거로 배달하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의 슈테(Schutte bagclosures BV)가 있도록 만든 모체였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열등감

미국에 대한 일본의 뿌리 깊은 열등감

우리는 얼마 전 언론을 통해 일본의 아베총리가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을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에 이어서 일본의 대기업 7개를 미국으로 보낼 것이라는 얘기를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해도 내가 보기엔 아베 정권이 미국을 대하는 태도는 그야말로 해바라기와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나는 종종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한다.

두 번에 걸친 일본의 항공모함 개조에 관한 글에서는 미군을 위한 것이라는 개인적인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분명 일본으로서는 최선의 정치적·외교적 선택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1853년 개항을 요구한 이후 1854년에 미국과 일본의 국교가 맺어지는데 1941년 진주만공습을 지휘한 일본 제국해군의 연합함대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했던 독백이 영화 ‘도라 도라 도라’에서도 나오는데 이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미국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한 장면

 

“진주만 공습이 잠자는 사자를 건드린 것은 아닐까?”라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의 독백은 자라면서부터 그의 잠재의식 속에 자라고 있었던 열등감의 발로였는지도 모르는 것이며 태평양전쟁의 패배 이후 미국에 대한 열등감에서 킹콩을 이기기 위해 영화 고질라를 만든 것처럼 지금의 아베정권에게도 이와 같은 미국에 대한 열등의식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 ‘가나가키 로분(仮名垣魯文)’이란 필명으로 더욱 잘 알려진 일본의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노자키 분조(野崎文蔵)’는 ‘오사나에키반코쿠바나시(童絵解万国噺)’라는 책을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린 삽화를 넣어 발간하였다.

 

책의 줄거리는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영국의 식민통치를 겪으며 독립과 건국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타국의 역사를 이처럼 과장되게 묘사한 것은 아무리 소설이라고는 해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본인만의 그 무엇이 자리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그들의 열등감이라고 본다.

일본 와세다 대학의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책(童絵解万国噺)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請求記号:文庫11_a0380_0002

※ 童絵解万国噺 上 三編

우선, 미국은 독수리로, 뱀은 영국을 상징하여 서로 싸우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미국의 제1대 부통령이자 제2대 대통령이 되는 ‘존 애덤스(John Adams)’가 칼을 들고 거대한 뱀과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한 번에 여러 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지만 능숙하게 물리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으며 그 주변에서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을 공격하는 사람들 중에 흑인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개항을 요구했던 동인도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의 배에 있던 흑인들의 모습을 본 영향도 있겠지만 영국인들이 자유를 약속하며 미국과의 전쟁에 흑인들을 대동한 역사적인 사실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투에서 후퇴한 존 애덤스는 다시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과 힘을 합하여 영국군을 물리치는 것으로 나오는데, 재미있는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마치 터미네이터라도 되는 것처럼 대포를 맨손으로 들고 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마지막은 호랑이의 목을 조지 워싱턴이 발로 밟고서 맨손으로 때려잡는 것으로 그려져 있는데, 허리에 칼을 차고 있음에도 맨주먹으로 싸우는 것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일본인의 눈에 비친 미국의 강대함과 미국에 대한 두려움이 바탕이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가 즐겨 읽는 삼국지(三國志)에도 현실적이지 않는 모습들이 묘사되고 있지만 그것은 중국인이 쓴 자국의 소설이고 ‘노자키 분조(野崎文蔵)’가 쓰고 ‘우타가와 요시토라(歌川芳虎)’가 그림을 그린 ‘오사나에키반코쿠바나시(童絵解万国噺)’라는 책은 일본인이 쓴 미국의 건국이야기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교착상태에 빠져있는 현안(懸案)들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은 아베총리의 발언과 오늘 소개한 책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