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Kindertransport)

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Kindertransport)

온통 코로나 19에 관한 뉴스로만 넘쳐나는 대구에서 지난 2일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1928년 5월 17일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난 15살 되던 해인 1944년에 끌려가 북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시다가 2005년에야 고국에 돌아와 대구에서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이제 생존해 계시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모두 18분, 아직도 사과 없는 일본과는 달리 이와 유사한 피해를 끼친 독일정부는 작년에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에게 일시불로 2,500유로를 보상하기로 결정을 한 일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정부가 나치로부터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한 금액이 지금까지 우리 돈으로 95조 정도가 되니 이번에 보상하는 금액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과는 달리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사과와 보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일의 모습을 일본도 조금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야기의 제목인 ‘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는 2000년 9월 7일 개봉되었던 미국의 다큐멘터리 “Into the Arms of Strangers: Stories of the Kindertransport”의 한국어 제목인데 원제에 있는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어린이 수송작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와 떨어져 일본군의 위안부로 생활해야 했던 피해자 할머니들처럼, 유대인 어린이들도 부모와 헤어져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던 점에 있어서는 유사해 보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로 동원된 것이었다면 유대인 어린이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해 구출되었던 것이라는 큰 차이가 있는데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인 11월 10일 새벽까지 나치대원들은 독일 전역에서 수만 개에 달하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50여 개의 시나고그(유대교 사원)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때 깨어진 수많은 유리창의 파편들이 크리스탈처럼 반짝였던 것에서 연유하여 이날의 만행을 ‘수정의 밤(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유럽의 유대인들 중에서 어린 자녀를 두었던 사람들은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의 유대인들이 나서서 영국정부에 유대인 어린이들의 입국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재증보증을 서겠다는 약속을 한다.

한편 영국정부는 이와 관련하여 의회에 제출할 법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후견인이 있는 17세 이하의 유대인 어린이들만 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독일도 이런 이민(탈출)을 허용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200여 명의 유대 어린이들이 1938년 12월 2일 영국의 하리치(Harwich)에 도착을 하게 되었으며, 1940년 5월 10일, 75만의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공격함으로써 국경이 폐쇄되었던 5월 15일의 하루 전인 5월 14일에 마지막 수송선이 74명의 어린이들을 태우고 네덜란드의 에이마위던(IJmuiden)을 떠남으로써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1만여 명의 어린이들을 구출하고 종료되었다.

독일이 이와 같은 유대인 어린이들의 이민 형식의 탈출을 용인해주었던 것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이후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정책이 자발적인 이민에서 강제추방으로 바뀌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 과정에서 발벗고 나서 노력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 여성인 게르트루이다 비스뮬러–마이어(Geertruida Wijsmuller-Meijer)는 당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의 추방을 담당하고 있던 홀로코스트의 전범이자 유대인 박해의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직접 만나 600명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다음 1938년 12월 10일, 비엔나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6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태우고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게르트루이다 비스뮬러–마이어(Geertruida Wijsmuller-Meijer)

 

이렇게 탈출한 600명의 어린이들 중 100명은 30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네덜란드의 훅반홀란트(Hoek van Holland)에 내렸고 나머지 500명은 영국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박해를 벗어났다고는 해도 어린이들이 타국에서 부모도 없이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는 운 좋게 위탁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어린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적국의 독일인으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 영국가정으로 위탁되지 못했던 어린이들은 수용소나 호스텔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18세가 되었을 때에 영국군에 입대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를 통해 영국으로 왔던 유대인 어린이들 중에서 1천 명 정도가 입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어린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가족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인 밥 커크(Bob Kirk)와 결혼했던 한나 쿤(Hannah Kuhn)이란 여성으로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독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역에는 가방을 들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어린이들의 조형물이 있는데 조형물의 제목은 “삶으로 가는 기차–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뜻하는 “쥬게 인 다스 레벤–쥬게 인 덴 토드(Züge in das Leben – Züge in den Tod)”이다.

 

이 조형물은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생존자인 독일의 조각가 프랑크 마이슬러(Frank Meisler)가 영국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역에 설치한 것으로 조형물의 색상과 표정에서 어둡게 표현된 어린이들의 운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끝이 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품을 떠나 타국의 위탁가정에서 생활했던 유대인 어린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계속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함은 물론이고 기존의 보상금과 중복하여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한다고 한다. 더 길게 적으면 희망 없는 국내 정치권의 얘기까지 거론할 것 같아서 여기서 멈춘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은 방귀 때문에 콩을 먹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은 방귀 때문에 콩을 먹지 않았다.

“콩은 하인즈”라는 뜻의 광고 카피, 빈즈 민즈 하인즈(Beanz Meanz Heinz)는 1967년에 만들어져 지난 2017년이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50주년을 맞은 하인즈 통조림의 슬로건은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라는 삶은 콩을 토마토 소스와 함께 끓여낸 영국인들의 국민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의 광고 슬로건이다.

50주년을 맞은 빈즈 민즈 하인즈(Beanz Meanz Heinz) 슬로건을 기념하여 하인즈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버밍엄(Birmingham) 사람들의 80%가 일주일에 한 번은 콩을 먹는다고 답함으로써 1위를 차지하였고, 맨체스터가 70%로 2위, 셰필드가 65%로 3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흰강낭콩(Navy bean)을 원료로 만드는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의 레시피는 원래 보스톤 베이커드 빈즈(Boston baked beans)의 레시피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들어갔었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돼지고기가 부족해지면서 현재와 같이 돼지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레시피로 변경되게 되었다.

세상에서 오직 3명 만이 제조법을 알고 있다는 하인즈의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 통조림은 영국에서는 1928년에 최초로 생산되었으며 영국 식품부(Ministry of Food)는 1940년대에 하인즈의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 통조림을 전시의 필수배급품으로 지정하였다.

이미지 출처: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흰강낭콩(Navy bean)은 건조하면 상온에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토마토 소스도 통조림으로 저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을 원료로 제작되는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는 전시(戰時)의 군대식(軍隊食)으로는 안성맞춤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918년 4월 21일에 창설된 영국 왕립공군(RAF: Royal Air Force)에서도 처음부터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주메뉴로 보급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항공기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전투기와 폭격기의 성능이 향상되어 더 높은 고도로 비행하게 되면서부터 조종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비행 전에 베이크드 빈즈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포스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방귀 때문이었다.

베이크드 빈즈의 주원료인 흰강낭콩(Navy bean)은 올리고당을 많이 함유하고 있고 식후에 장에 도달하면 발효되어 평소보다 많은 방귀를 배출(?^^)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상에서의 경우에 해당하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기압 때문에 지상보다 장내의 가스는 많이 팽창하게 되면서 더 많은 양의 방귀를 방출하게 되었고, 심할 경우 장내의 가스 팽창으로 인해 설사를 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는데 간이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던 핸들리 페이지 헬리팩스(Handley Page Halifax)와 같은 대형 폭격기라고 하더라도 적지의 상공에서는 맘 편히 일을 볼 수도 없었고, 추운 기온에서 엉덩이를 장시간 노출시키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병사들은 출격 전에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먹는 것을 스스로 삼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핸들리 페이지 헬리팩스(Handley Page Halifax)

이미지 출처: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그리고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영국 왕립공군(RAF: Royal Air Force) 지휘부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경에는 비행 전과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메뉴에서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제외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지상근무자와 출격을 앞두지 않은 조종사나 승무원들에게는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가 제공되었으며 항공기술의 발달로 여압실이 보급되면서부터는 비행 전과 기내식으로 다시 제공되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이런 이유 때문에 민간항공사 중에는 여압실이라곤 해도 지상보다 낮은 기압과 많은 승객들이 뿜는 대량(?)의 방귀를 염려하여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천사와 악마

아우슈비츠의 천사와 악마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대구지역에서 봉사할 의료진의 모집에 앞다투어 참가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에서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지키는 숭고함을 보면서 그들의 헌신에 감사함과 아울러, 9일로 예정되었던 임관식을 앞당겨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신임 간호장교 75명은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갖게 만든다.

군인의 신분으로 인술(仁術)을 베푸는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의사의 신분으로 인간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했던 자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와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로 불렸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가 있다.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2차 대전이 끝난 뒤 아우슈비츠에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학살에 관여한 자들은 1947년 크라쿠프에서 열린 재판에 모두 41명이 기소되어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1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자 아우슈비츠의 선인(Good Man of Auschwitz)으로 불리는 한스 뮌히(Hans Wilhelm Münch)라는 사람이다.

 

한스 뮌히(Hans Münch)

또한 나치독일에 협력하여 생체실험을 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들을 재판했던 뉘른베르크 의사재판(Doctors’ trial)에도 한스 뮌히(Hans Münch)는 회부되지 않았으나 기소되었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는 남미로 도주하여 신분을 세탁하고 평생을 숨어 살다가 1979년 2월 7일, 브라질의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무덤에서 채취한 그의 이빨에서 나온 DNA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1911년 5월 14일 독일제국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im Breisgau)에서 태어난 한스 뮌히(Hans Münch)는 김나지움을 마치고 튀빙겐 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39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아우슈비츠와 4㎞ 떨어진 곳에 있던 무장친위대 위생연구소(Hygiene-Institut der Waffen-SS)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군과 무장친위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세균연구를 하고 있던 한스 뮌히(Hans Wilhelm Münch)의 지휘관은 요하임 므루고프스키(Joachim Mrugowsky)란 자로 의사재판(Doctors’ trial)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6월 2일에 처형된 자다.

 

요하임 므루고프스키(Joachim Mrugowsky)

 

한스 뮌히(Hans Münch)가 근무하고 있던 무장친위대 위생연구소(Hygiene-Institut der Waffen-SS)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강제로 수용하는 유대인들을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부적합한 자들로 구분하여, 노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도록 선별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한스 뮌히(Hans Münch)는 유대인과 특히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가스실로 보내어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재판과정에 증인으로 참가한 유대인들에 의해 밝혀졌는데 나머지 전범들에 대하여 모두 유죄취지의 증언을 했던 사람들이 오로지 단 한 사람 한스 뮌히(Hans Münch)만은 죄가 없다고 증언하여 판사와 검사들을 놀라게 했으며 특히 공산주의검사들조차도 그 증언을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용자들을 선별하는 일은 참가를 거부하였지만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에는 빠질 수 없었던 한스 뮌히(Hans Münch)는 실험대상이 된 수용자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최소의 희생을 치를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의사재판

 

지금 대구·경북지역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의사 출신의 정치인이 대구로 내려가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환자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는 모양이다.

“여보시오! 그런 말을 하는 당신들은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와 아우슈비츠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와 무엇이 다르겠소이까?”

마릴린 먼로의 성공 뒤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마릴린 먼로의 성공 뒤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미국영화협회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6위에 기록된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녀가 배우로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미국의 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이번에는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제목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물음표를 붙인 것은 마릴린 먼로와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숨은 인연이 있는 것은 맞지만 로널드 레이건이 마릴린 먼로의 성공에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릴린 먼로는 1942년 16세의 나이로 항공사 정비원으로 일하던 짐 도허티(Jim Dougherty)와 결혼하였으나 1944년 짐 도허티(Jim Dougherty)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마릴린 먼로(당시의 이름은 Norma Jean Dougherty)는 로스앤젤레스의 밴나이즈(Van Nuys)에서 무인항공기 OQ-2를 생산하던 “Radioplane Factory”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미육군항공대의 “First Motion Picture Unit”에서 홍보영화를 제작하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 대위는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하여 군수공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오도록 사진병이던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을 마릴린 먼로가 근무하고 있던 공장으로 파견을 보내게 됩니다.

공장에 도착한 데이빗 일병은 3일간 공장의 이곳저곳을 돌며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런 표정을 짓는 마릴린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모델의 가능성을 발견한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은 아예 2주간의 휴가를 얻어 그녀에게 카메라 포즈를 취하는 법 등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은 공장에서 촬영한 마릴린의 사진을 군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아래의 표지사진은 합성된 것이며 실제로 데이빗이 찍었던 사진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이었습니다.

 

아무튼 데이빗 콘오버는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던 먼로에게 우선 모델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를 수락한 먼로에게 2주간의 휴가 동안 다양한 교육을 하였는데, 1945년 1월 그녀는 공장을 그만 둠과 동시에 데이빗이 소개한 모델 에이전시인 “Blue Book Modeling Agency”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에멀린 스니블리(Emmeline Snively)의 소개로 마릴린 먼로는 꿈꾸던 영화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먼로를 발굴했던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는 필리핀으로 파견되면서 먼로와의 연락이 끊어졌는데 1953년에서야 마릴린 먼로가 바로 자신이 사진을 찍고 가르쳤던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촬영장에서 다시 재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먼로는 배우로도 활동을 하던 로널드 레이건과도 만나게 되는데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아마도 레이건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사진을 찍도록 데이빗 일병을 보냈던 장본인이라구~ 밥 한 번 사야지 않겠어?”라고 말입니다^^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세계의 부자들 중엔 한국인도 있을까?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세계의 부자들 중엔 한국인도 있을까?

200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한 대학에 기부했다 140억 원에 달하는 증여세 폭탄을 맞았던 어느 개인기부자의 선행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한편, 대기업들의 총수가 범죄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고 나면 으레히 뒤따르는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눈속임과 그들이 설립한 재단들은 또 다른 갑질을 자행하는 수단이 되는 모습들을 우리는 최근 대한항공의 일우재단 이명희씨를 통해서 똑똑히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는 삼영그룹 창업자인 이종환씨가 8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여 국내최대의 기부액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부자들이 기부에 인색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 거부(巨富)들의 기부는 새삼스런 것이 아닌데 우리가 잘 아는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는 설립한 재단을 통해 350억 달러 이상의 누적금액을 기부하고 있고 워렌 버핏은 지금까지 기부액수가 23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는데 이것을 한화로 계산해보면 각각 39조 원과 26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하며 지금까지 그들이 기부한 금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빌게이츠가 500억 달러, 워렌 버핏이 467억 달러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2010년 6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전 세계의 부자들에게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자!”는 취지로 기부공약(Giving Pledge)을 제안하면서 설립한 비영리재단인 “The Giving Pledge”에는 오늘 날짜(2018. 11. 17)로 22개 나라에서 186명의 거부들이 가입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타이완의 거부들이 참가했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에서는 단 한 명의 참가자도 없다.(이 글을 작성한 것은 2018년으로 그 이후인 2021년에 한국인 부부 2쌍이 이름을 올렸는데 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참가자 명단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은 남의 나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국의 부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참가자도 없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국내 재벌들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생색내기용 꼼수 기부행태를 보는 것 같아 과히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2018년 이 글을 작성한 이후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형미선 부부와 배달의민족을 개발한 (주)우아한형제들의 창업자인 김봉진 설보미 부부가 2021년에 기부서약을 하였으므로 보충한다.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전 의장

(주)우아한형제들의 창업자인 김봉진 설보미 부부

역사적으로 부자들의 기부문화와 전통이 강한 미국은 지난 2017년에 가장 많은 4,020억 달러(약 455조 640억 원)의 모금액을 기록하였는데 이 금액은 우리나라의 한 해 예산에 육박하는 액수이며 그 중에서 개인이 기부한 액수는 모두 2,866억 달러(324조 4천억 원)라고 한다.

※ 출처: Charity Navigator

이런 미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는 지난 해 5,996억 원의 모금실적을 올렸으며 오는 20일 전국적으로 사랑의 온도탑 제막과 동시에 연말 모금캠페인에 나서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온도탑의 수은주가 쭉쭉 올라가기를 바라면서 지난 10년간(2008년~2017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한 개인기부자들을 연도별로 알아보자.

▶ 2008년 레오나 헬름슬리(5,660억)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난 Leona Helmsley는 5억 달러에 달하는 그녀의 재산을 기부하였고, 그녀가 기르던 개에게 별도로 1,200만 달러의 재산을 증여하였는데 이 금액은 재판에 의해 200만 달러로 감액되었다.

▶ 2009년 드러켄밀러 부부(8,773억)

2009년 Stanley Druckenmiller와 그의 아내 Fiona Druckenmiller는 의학연구와 교육 및 빈곤퇴치를 주된 사업목적으로 그들이 설립한 재단(Druckenmiller Foundation)에 7억 7,5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0년 익명의 기부자(2,264억)

2010년에는 자신을 텍사스 주에 있는 베일러대학교 출신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기부자가 이 대학에 익명으로 2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1년 윌리엄 디트리히 2세(3,000억)

2011년 10월 6일 사망한 윌리엄 S. 디트리히 2세(William S. DietrichⅡ)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에 2억6,5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2년 워렌 버핏(4조 1,540억)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Warren Buffett은 2012년에 어린이들을 위한 3개의 자선단체에 각각 10억 달러 이상(정확히는 1,027,773,653달러)을 기부하기로 하여 모두 36억 7천만 달러에 달하는 기부액을 기록하였다.

▶ 2013년 마크 저커버그(1조 1,200억)

2013년 페이스북의 CEO인 Mark Zuckerberg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자선단체(Silicon Valley Community Foundation)에 9억 9,200만 달러의 주식을 기부하였다.

▶ 2014년 랄프 윌슨(1조 1,300억)

2014년 3월 25일에 사망한 미식축구구단 버펄로 빌스의 구단주였던 Ralph C. Wilson Jr.는 그가 설립한 재단에 유산 10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5년 존 산티코스(7,358억)

2014년 12월에 사망한 John Santikos는 샌안토니오 지역재단에 6억 5천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6년 나이트 부부(5,660억)

나이키의 공동창업자인 Philip Knight와 그의 아내 Penelope Knight는 2015년 오레곤 대학교에 5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7년 마크 저커버그 부부(2조 1천억)

Mark Zuckerberg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찬(Priscilla Chan)은 그들이 설립한 재단에 18억 5,650만 달러를 기부하여 2017년에 가장 많은 액수를 기부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저커버그가 세운 재단은 비영리재단이 아닌 정확하게는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Chan Zuckerberg Initiative)”라는 LLC인데 이것은 유한책임회사와 개인기업의 특징이 결합된 형태로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비판과 함께 비영리단체가 할 수 없는 정치적 로비에 사용될 수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서 기부의 본질이 변색되는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앞으로도 기부공약(Giving Pledge)을 하는 한국의 부자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람과 아울러 한국의 재벌들 중에서도 사회의 지탄이 아닌,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인의 신분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것 또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공군의 원수에까지 올랐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를 꼽을 수 있는데 1933년 헤르만 괴링에 의해 국가항공부의 서기관에 임명될 때에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던 터라 괴링의 명령으로 그의 개인기록을 변조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중앙이 에르하르트 밀히

 

서열상으로는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가 유대인으로는 가장 높은 직책에서 나치에 협력을 한 사람이지만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치 독일에 협력한 사람으로는 히틀러의 운전사였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꼽을 수가 있다.

1897년 1월 19일, 프랑스 이민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19년 12월 1일에 나치당(NSDAP)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1920년 1월에 교부하기 시작했던 501번으로 시작하는 당원번호가 히틀러는 그의 저서에서 507번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555번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594번을 교부받았다.

 

에밀 모리스(Emil Maurice)

 

이것을 계기로 히틀러와 에밀 모리스는 친분을 맺게 되고 1920년에 창설된 돌격대의 전신인 경호·경비대의 최고지도자(Oberster SA-Führer: Supreme SA Leader)에 오르게 되는데 SA는 약자로서 돌격대(Sturmabteilung)를 뜻한다.

그리고 이어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21년 7월부터는 히틀러의 개인운전사가 되는데 1923년 3월에는 친위대의 전신이 된 히틀러의 개인경호부대의 대원이 되어 1923년 11월 9일의 뮌헨 폭동 실패 이후 정치범으로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교도소(Landsberg Prison)에 수감되게 된다.

 

수감 당시의 사진: 맨 왼쪽이 히틀러, 그 옆이 모리스

히틀러는 수감기간 동안 그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부관이었던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히틀러의 구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최선봉에서 투쟁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둘 사이의 막역함을 너(Du)라는 호칭을 서로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 이름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인물의 하나인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눈 1925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조직되었던 경호대인 슈츠코만도(Schutzkommando)의 대원으로서 히틀러의 전용기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 때 에밀 모리스는 히틀러의 조카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과 사귀게 되고 1927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히틀러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게 되지만 히틀러는 에밀의 예상과는 반대되는 반응을 보인다.

 

겔리 라우발(Geli Raubal)

 

모리스의 예상과는 달리 히틀러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대신에 헤어질 것을 요구했고, 1927년 연말에는 에밀 모리스를 운전기사에서 해고 하고 당에서도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느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을 해고하고 탈당까지 시킨 히틀러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나치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보상금으로 500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를 받게 되고, 이를 밑천으로 뮌헨에서 보석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던 것은 아니고 친위대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었는데 1925년 11월 9일에 친위대로서 흔히들 SS라고 부르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이 조직되었을 때 1번 대원이 히틀러였고, 2번 대원이 바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였던 이유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1932년 친위대가 확장·재조직 될 때 모리스는 친위대의 고위간부에 임명되게 된다. 그러나 조직의 창시자라는 상징성에 대한 예우였을 뿐 주요한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고 1933년에는 뮌헨 시의원이 되어 같은 해 10월에 열렸던 뮌헨폭동 기념식에서 히틀러와 재회하여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1929년부터 친위대를 이끌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최고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친위대의 대원번호가 168번이었는데 1933년부터는 모든 친위대의 대원들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어야만 한다는 요건을 만들어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혈통을 증명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1935년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결혼을 하기 위해 혈통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하인리히 히믈러는 모리스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이자 배우 겸 감독으로 유명한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리 모리스(Chéri Mauric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에밀 모리스의 증조부인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임을 인지한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이 사실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당과 친위대에서 추방할 것을 제안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1937년부터 뮌헨의 상공회의소장을 역임하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독일의 공군에서 근무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군의 주도로 나치당이나 친위대의 대원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이 속했던 조직을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는 탈나치화(Denazification)의 일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48년 4년형의 선고와 함께 보유자산의 30%를 몰수당하게 된다.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막역한 친분을 쌓고 그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그의 최초의 직업이었던 시계기술자의 경력을 살려 시계점을 운영하다 1972년에 사망하였다.

비록 15년으로 감형이 되기는 했으나 종신형을 언도받았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오늘의 주인공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보면서 요즘 우리사회의 뜨거운 화제인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을 생각하게 되지만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에 관한 생각은 적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헤밍웨이의 유작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의 유작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제(7월 2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날이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책으로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낚시를 좋아했다는 점이 내겐 또 다른 관심점이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죽기 전에 쓴 이 책의 제목은 원제(A Moveable Feast)를 직역한 이동축제일(移動祝祭日)이란 제목보다는 주순애씨가 번역한 제목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훨씬 와 닿는다.

2015년 11월 13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헤밍웨이의 유작(遺作)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체류했던 파리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쓴 이 책의 제목 ‘A Moveable Feast’는 헤밍웨이가 붙인 것이 아니다.

‘A Moveable Feast’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비즈니스(원제: Shameless exploitation in pursuit of the common good)’로 소개되었던 책을 영화배우 폴 뉴먼과 함께 쓴 작가 A.E. 허츠너(Hotchner)란 사람이 붙인 것인데 헤밍웨이가 죽고 나서 그의 네 번째 부인 메리 헤밍웨이가 출판에 앞서 책의 제목을 정하기 위해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A.E. 허츠너(Hotchner)였다.

 

헤밍웨이는 유작(遺作)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의 에필로그에서 ‘어떤 친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A.E. 허츠너(Hotchner)였으며 그가 제안한 제목이 바로 ‘A Moveable Feast’였던 것이다.

헤밍웨이가 그의 책에서 거론할 정도로 A.E. 허츠너(Hotchner)와 가까운 사이였던가 하는 것은 A.E. 허츠너(Hotchner)가 1966년에 출간한 책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헤밍웨이와 허츠너

 

헤밍웨이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낸 작가 A.E. 허츠너(Hotchner)는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과 수기로 기록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를 썼는데 이 책은 1948년부터 1961년까지 헤밍웨이의 일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8년 잡지 코스모폴리탄에 ‘문학의 미래’란 제목의 글을 부탁하기 위해 쿠바의 아바나에 있던 헤밍웨이를 방문한 것이 A.E. 허츠너(Hotchner)가 헤밍웨이와 교류하게 되는 시발점이었으며 이후 A.E. 허츠너(Hotchner)는 헤밍웨이의 손에 이끌려 낚시도 배우게 되고 헤밍웨이 부부의 유럽여행에도 동반하는 등 잦은 교류를 가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서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주순애씨의 번역본에서 인용)”이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도 테러로 인한 아픔을 겪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글이 적힌 마지막 장 ‘파리에 끝은 없다(There Is Never Any End to Paris)’란 제목과 내용이 공감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헤밍웨이의 유작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원본 그대로의 것은 아니고 네 번째 아내였던 메리 헤밍웨이(Mary Welsh Hemingway)가 두 번째 아내였던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와 관련한 내용들은 삭제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메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은 얼마나 될까?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은 얼마나 될까?

아직 국내에서는 많지 않지만 서서 소변을 보는 남성이 외국에서는 점점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는데 글을 쓰는 본인도 앉아서 일을 보지는 않고 있다.

지난 2015년 독일에서는 세입자가 서서 본 소변이 튀어 바닥의 대리석을 변색시켰다고 보증금 반환을 거부하는 집주인에게 소송이 제기되어 재판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결과는 남성이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은 역사적 관습이기 때문에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독일에서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은 여성을 배려하지 않는 비위생적인 행위라고 해서 슈테핑클러(stehpinkler)라 부르며 사회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하고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을 지츠핑클러(sitzpinkler)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2018년의 조사에서 응답에 참가한 20세~69세의 남성 300명 중에서 29.3%가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응답하였다고 하는데 최근 영국의 주택설비업체인 QS Supplies란 곳에서 자외선을 사용하여 서서 소변을 볼 때 소변이 얼마나 튀는지를 시뮬레이션 한 결과를 유튜브에 게재하였다.

 

유튜브의 영상은 예상 밖의 결과를 보여주었는데 남성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 행위가 얼마나 비위생적인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으며,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다.

QS Supplies에서 영국인 남성과 미국인 남성1,0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69%가 서서 소변을 본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QS Supplies에서는 양변기에 서서 소변을 보는 남성들의 위치와 패턴 및 소변의 궤도를 6주 동안 자외선을 받으면 빛을 내는 액체를 사용하여 실험하였다고 한다.

QS Supplies에서는 사전조사에서 조사대상자의 25%가 양변기의 1m 이내에 칫솔을 보관하고 있다는 응답을 얻었는데 실험의 결과는 서서 소변을 볼 때 최대 1m 밖에까지도 소변이 튀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영국인 응답자 34%와 미국인 응답자 26%가 서서 소변을 보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에서 보듯이 정확한 데이터는 없어도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보다는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양변기의 뒤쪽을 겨냥하고 소변을 보는 것이 더 많은 소변이 튀게 만드는 결과를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응답자의 절반가량도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소변이 적게 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양변기 내에 고여 있는 물의 앞쪽을 겨냥해야 된다고 한다.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이 정도로 비위생적인 줄은 몰랐던 내게 고민거리를 안겨다준 QS Supplies의 자세한 기사는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Revealing the Hidden Created by Peeling While Standing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10개국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10개국

CNN은 금년 3월 9일자 보도에서 2009년 “미법무성 사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Justice)”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미국의 민간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총기의 숫자는 약 3억 1천만 정에 달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10년 전의 조사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최근의 자료인 2007년 스위스의 “Small Arms Survey”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총기를 소유한 민간인들은 모두 6억 5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하여 인구 100명당 총기보유 숫자가 가장 많은 미국은 2위인 예멘보다도 62%나 많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적은 100명당 0.1정을 보유하는 튀니지보다는 무려 890배나 많은 보유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총기사망사고도 사고사나 자살 및 살인을 모두 합하여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총기에 의해 사망한 미국인은 모두 1만3,286명이나 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망자는 모두 14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단일 사건으로 4명 이상을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는 총기 난사사건이 2013년 이후 일어나지 않은 미국의 도시는 텍사스의 오스틴이 유일하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에서는 총기소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CNN에 의하면 인구 100명당 총기보유 숫자가 가장 많은 10개국과 가장 적은 10개국은 아래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인구 100명당 보유하는 총기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나라라고는 할 수 없는데 “GUNS & AMMO”라는 곳에서 2014년에 발표한 “10 Best Countries for Gun Owners”를 인용하여 어떤 나라들이 총기소지가 비교적 쉬운지를 알아보자.

 

▶ 10위 온두라스

온두라스는 2009년 쿠데타로 문민정부가 무너지고 나서 범죄가 급증하고 총기소유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졌는데 기본적으로 온두라스는 총기소유를 금지하지 않으며 단지 공공장소에서의 휴대만 금지하고 있는데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가게에서 최대 5정까지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법총기류의 숫자도 85만 정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9위 핀란드

핀란드는 사냥문화가 남아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총기소유에 대한 인식은 관대한 편이지만 특정 총기류에 대해서는 규제가 엄격한 편이어서 반자동권총의 소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금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총기를 구입할 때도 면허가 있어야 하고 개별 총기에 대한 별도의 면허도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총기는 집에 보관해야 하며 호신용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8위 세르비아

세르비아의 총기보유율이 높은 이유는 규제가 느슨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1990년 유고슬라비아 붕괴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와 치룬 4번의 전쟁도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많은 이유이다.

그러나 세르비아정부는 총기규제를 강력하게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단지 권총의 소지에만 아주 까다로운 규제를 받도록 하고 있을 뿐이어서 기타의 총기류에 대한 허가를 취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탄환의 규제는 아주 엄격하여 매년 60발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 7위 스웨덴

유럽은 사냥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어 총기소유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스웨덴에서는 반자동식을 소지할 수도 있다. 총기소유를 허가하지 않는 건수는 매년 1,000건 정도이나 항소하면 대부분 허가되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호신용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고 18세 이상이면 총기소유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총기를 소유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신청할 때 밝혀야 하며 스포츠선수용은 면허취득 전에 6개월의 클럽활동이 필수요건이 되며 사냥용으로 보유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만일 음주운전의 전과가 있다면 총기를 보유할 수 없고 스웨덴에서는 사냥용 6정을 포함하여 최대 10정까지 총기를 보유할 수 있다.

 

▶ 6위 캐나다

캐나다가 총기소유가 쉬운 나라라고 하면 갸우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사냥문화가 남아있고 총기를 돌려가며 사용하는 원주민문화도 아직 유지되고 있어서 총기사용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곤 하였다.

그러나 현재 캐나다에서는 2013년 이후 총기범죄가 30%나 증가하고 범죄조직에 연루된 총기살인이 75%나 급증하는 등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낳게 되자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총리가 총기소유를 규제하는 법률의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 5위 노르웨이

2011년 테러리스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가 69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8명을 차량폭탄으로 사망케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총기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을 이기지는 못했다.

노르웨이는 경찰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을 정도로 안전한 나라이지만 사냥을 즐기는 문화가 있어서 주로 겨울철 사냥시즌에만 총기를 사용하며 허가를 받으면 AR-15도 보유할 수 있다.

 

▶ 4위 파나마

총기소유 허가를 얻게 되면 사용하는 탄환의 숫자에 대한 규제도 받지 않으며 휴대에 관한 규제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총기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혈액과 소변검사를 통해 마약류 복용에 관한 검사를 거쳐야 하고 기간도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중남미 국가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파나마는 총기를 규제하고 있는 영국보다 적은 3% 정도만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

 

▶ 3위 스위스

군인을 포함하여 100명당 총기 보유가 46정으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는 스위스는 2010년까지는 국방을 위해 성인남성은 1정 이상의 총기를 가정에 보유해야 했다.

그래서 인구의 30%가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7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하여 18세 이상은 허가 없이도 단발 및 볼트액션식의 소총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허가 없이 구입할 수 있다고 해도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서 범죄에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 2위 체코

총기규제를 강화하려는 EU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러와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체코의회는 총기소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던 헌법을 수정하여 이를 2017년에 통과시켰다.

이로 인하여 반자동소총의 소지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사냥용뿐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도 소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2개의 권총도 허가만 취득하면 휴대할 수 있게 되었다.

 

▶ 1위 미국

미국의 총기소지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있어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만 언급하자면 서두에서 예를 들었던 것과 같이 2015년을 기준으로 총으로 사망한 미국인은 모두 1만3,286명이나 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망자는 모두 14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12년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 중에서 총기를 사용한 것이 60%에 달하는데 이것은 영국의 10%, 호주의 18.2%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매일 36명이 총으로 인해 사망하는 미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6% 밖에 되지 않는 흑인남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달하고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지나친 대응을 우리는 자주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유아에 의한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2015년에만 총기로 사망한 어린이가 756명에 달하는 미국은 결코 자유롭지도, 정의롭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나라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German Chocolate Cake은 독일 케이크가 아니다.

German Chocolate Cake은 독일 케이크가 아니다.

일본 오키나와를 관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맛집 중에는 두 개의 스펀지 케이크(sponge cake) 사이에 생크림을 넣고 맨 위에 코코넛 필링(Coconut Filling)을 바른 저먼 초컬릿 케이크로 유명한 제과점이 있다.(정확히는 제과점이 아니라 식료품가게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그런데 케이크의 이름에서 보듯이 German Chocolate Cake를 다음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많지는 않지만 독일 또는 독일식 케이크라는 말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케이크는 독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만들어진 곳도 독일이 아닌 미국으로 케이크의 이름을 굳이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 그대로 저먼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German Chocolate Cake의 저먼은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서 일을 하던 지미(Jimmy)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인이 미군들이 즐겨 먹던 케이크를 소개하면서 오키나와의 명물이 되었으며 지금은 지미(Jimmy′s)라는 이름의 식료품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다.

 

오키나와의 미군들이 즐겨 먹는다는 저먼 초컬릿 케이크는 미국에서 6월 11일을 기념일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독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1852년 사무엘 저먼(Samuel German)이란 영국계 미국인이 당시 근무하던 American Baker’s Chocolate Company에서 개발했던 Baker′s German′s Sweet Chocolate에서 유래한 것이 오늘날의 저먼 초컬릿 케이크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기념일로 지정할 정도로 즐겨 먹게 된 동기는 텍사스주의 댈러스에 살던 조지 클레이(George Clay)란 주부가 1957년 6월 3일 달라스 모닝 뉴스에 관련 레시피를 기고한 것을 당시 Baker′s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제너럴 푸드(General Foods)가 보고 그 레시피를 미국 각지의 신문에 소개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뒤 German′s Sweet Chocolate에서 소유격 S를 빼버리는 실수를 범한 표현이 사용되면서 우리가 독일 또는 독일식 케이크라고 혼돈할 수 있는 지금의 German Chocolate Cake이란 표현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저먼씨의 레시피를 이용하여 만든 케이크는 독일 케이크가 아니며 현재 베이커즈 초컬릿(Baker’s Chocolate) 브랜드를 소유한 크래프트 하인즈(The Kraft Heinz Company)에서는 사무엘 저먼(Samuel German)의 업적을 기려 새로운 초컬릿의 이름을 Baker’s German’s Sweet Chocolate으로 명명하였으며 이 제품은 아마존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