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의 또 다른 한국인들?

노르망디의 또 다른 한국인들?

이미지출처: 다음 영화

 

2005년 SBS 스페셜 ‘노르망디의 코리안’을 통해 세상에 알려지고 2011년에는 영화(마이웨이)로도 제작된 ‘양경종’의 인생역정을 두고 실존규명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그가 허구의 인물일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하고 있다.

일본군에서 소련군이 되었다가 마지막엔 독일군의 신분으로 노르망디에서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는 한국인 ‘양경종’.

실존여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독일군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들은 그 외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하게 만드는 역사적인 발자취를 한 번 따라가 보도록 하자.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연합군의 포로가 된 독일군들을 분류하는 과정에서 연합군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유는 나치와는 종교적, 또는 이데올로기적으로 반대편에 있음이 마땅한 사람들이 나치를 위하여 싸웠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실존인물이 맞다고 가정하면 양경종과 같은 한국인들이 다수 독일군에 소속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서양의 연합군들에게는 아주 생소한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연합군들을 놀라게 만든 원인을 찾아보면 우리는 노르망디에서 포로가 된 한국인이 양경종 외에도 더 존재할 수 있다는 합리적인 추론을 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편에 서서 전쟁에 참가한 나라들 중에는 전쟁이 끝나면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뜻으로 가담한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같은 나라들을 위시하여, 영국의 오랜 식민지에서 벗어나겠다는 의지로 영국군의 신분으로 독일군의 포로가 된 뒤에 별도의 군단(Indian Legion)이나 독일육군에 소속되어 전쟁에 참가한 인도인들도 있었다.

250만 명 이상이 2차대전에 참전한 것으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 중 인도군단(Indian Legion)에 소속된 인원들이 모두 독일군의 포로였던 것은 아니고 인도의 독립을 위하여 자유의지로 가담한 숫자도 상당수에 달하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 편성된 독일군의 동부군단(Ostlegionen)에는 ‘제1 코사크 기병부대(1st Cossack Cavalry Division)’와 조지아인들로 구성된 ‘조지아 군단(The Georgian Legions)’과 양경종을 포함한 다수의 한국인들이 소속되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투르키스탄 군단(Turkestan Legion)’이 포함되어 있었다.

‘투르키스탄 군단(Turkestan Legion)’이란 명칭은 구성원들이 대부분 튀르크 족 출신이었기 때문이었다.

튀르크어파를 모어로 하여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시베리아에서 발칸 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퍼져 거주하는 민족인 튀르크 족이 분포하고 있는 지역을 보면 1937년 소련의 스탈린이 실시한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형성된 중앙아시아의 한인사회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강제로 이주되어 중앙아시아에서 고난을 겪으며 정착하려고 노력하던 한인들은 전쟁과 함께 강제징집을 면치 못하고 독일과의 전쟁에 투입되어야만 했던 사실은 조금만 검색을 하면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미확인 보도에 의하면 노르망디에서 포로가 되었던 양경종과 마찬가지로 독일군 복장을 한 동양인은 3명이 더 있었고 그들은 모두 ‘투르케스탄(Turkestan)’ 출신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언어의 문제로 인해 정확한 신분을 알 수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면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투르키스탄 군단(Turkestan Legion)’의 사진은 더 많은 숫자의 한국인들이 소속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서양인들의 눈으로는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들의 차이를 느끼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한국인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민족적인 동질감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말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은 분명한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은 아래의 사진 속에 있는 동양인들이 과연 어느 나라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투르키스탄 군단(Turkestan Legion)’은 1942년 5월, 처음으로 편성될 때에는 1개 대대 규모였으나 1943년에는 16개 대대 규모로 확대되어 병력만 16,000명에 달했다고 하며 독일 국방군 제162 보병사단에 소속되어 있었고 독일군과 견장만 다를 뿐 군복은 같았으며 오른쪽 팔에는 부대마크를 달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영국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소련으로 귀환한 포로들은 독일에 협력하였다는 이유로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어 비참한 생활을 해야 했기에 양경종이 미국행을 원했다는 검증되지 않은 이야기도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노르망디의 한국인’으로 알려진 양경종!

그러나 그 실체를 규명하지는 못하였고 일부 사실은 허구라고 알려지고 있다. 나라가 힘이 없어 타국을 떠돌 수밖에 없던 시절,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쟁에 참가하고, 포로가 되었던 한국인들은 그 외에도 많이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하나의 흥밋거리로만 여겨지고 쉽게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나라 없이 떠돌며,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전하여 죽어가거나 포로가 될 수밖에 없었던 재외동포들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글을 마친다.

어부들의 지혜와 애환이 담겨 있는 더플코트(Duffel coat)

어부들의 지혜와 애환이 담겨 있는 더플코트(Duffel coat)

벨기에 앤트워프의 지방도시 더플(Duffel)에서 생산되는 직물로 만들어진 것에서 유래하여 이름 붙은 더플코트(Duffel coat)는 겨울철 패션 아이템으로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러나 원래 더플(Duffel)에서 생산되던 천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더플코트(Duffel coat)의 소재와는 다른데 군에서 사용하는 더플 백(Duffel bag)의 소재가 그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고 보면 된다.

물론 더플 백(Duffel bag)이란 이름 또한 더플(Duffel)에서 생산되던 천으로 만들어진 것에서 유래하였다.

더플코트는 1820년대 폴란드에서 만들어진 후드 일체형의 프록코트(frock coat)에 토글(toggle fastening)이라는 작은 통나무 모양의 나무 재질로 만든 단추를 사용한 디자인으로 널리 유럽에 퍼졌는데 1887년에 영국의 의류업체인 존 패트리지(John Partridge)가 지금의 디자인과 유사한 더플코트를 생산한 것이 처음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당시에 만들어진 것은 지금과 같이 길이가 길지는 않았다고 한다.

토글(toggle fastening)

그 후 1890년대에 영국왕립해군에서는 해군에게 보급되는 피복의 소재는 모두 영국에서 생산된 것이어야만 한다는 규정을 만들고 양모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의류 제조업체에 위탁하여 지금의 더플코트(Duffel coat)와 닮은 디자인으로 제작하였는데 그 때 붙여진 이름이 컨보이 코트(convoy coat)였다.

따라서 더플 백(Duffel bag)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과 같이 거칠고 무거운 소재로는 만들어진 적이 없었으며 더플코트(Duffel coat)가 인기를 끌게 된 데에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 장군의 역할이 아주 컸다고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더플코트(Duffel coat)를 입고 전선을 누비는 몽고메리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의 애칭을 따서 몬티 코트(Monty Coat)로 불리기도 했는데 심지어는 적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는 아예 더플코트(Duffel coat)를 몽고메리(Montgomery)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우측이 몽고메리

캐나다군을 방문한 몽고메리(왼쪽에서 3번째)와 더플코트를 입고 있는 캐나다의 해리 크레라(Harry Crerar) 장군(왼쪽에서 2번째)

영국왕립해군에서 더플코트(Duffel coat)를 만든 목적은 추운 겨울 갑판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을 위한 방한복의 성격이 강했는데 원래 앤트워프의 더플(Duffel)에서 생산되던 천으로 만들어진 코트는 북해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어부들이 옷을 만들 때 사용하였다.

그리고 추운 겨울 배위에서 장갑을 낀 손으로도 쉽게 단추를 채우고 풀도록 하기 위해서 모양은 고리에 쉽게 끼울 수 있도록 만들고 그 크기도 큰 토글(toggle fastening)을 만들었던 것이다.

더플코트(Duffel coat)를 입고 있는 영국해군(2차 대전)

 

그러나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토글(toggle fastening)에는 어부들의 생명을 지키려는 지혜가 숨어있음을 알게 된다.

배위에서 일을 하다 잘못 하여 북해의 추운 바다에 빠지게 되면 살기 위해서는 재빨리 두꺼운 코트를 벗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실용성과 안전성이 뛰어난 형태의 단추가 필요했고 그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토글(toggle fastening)인 것이었다.

이처럼 우리가 입는 더플코트(Duffel coat)에는 북해의 추운바다에서 살아남기 위한 어부들의 지혜와 그들의 애환이 담겨 있다.

인종차별에 맞섰던 마릴린 먼로

인종차별에 맞섰던 마릴린 먼로

1962년 8월 5일 36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한 미국의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는 섹스심벌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릴린 먼로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당시는 짐크로법(Jim Crow laws)이라고 하는 흑인분리정책이 실시되고 있던 시기였는데 공공장소와 대중교통에서의 인종 분리는 물론이고 화장실, 식당 등과 같은 장소에서 흑인을 격리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짐크로법(Jim Crow laws)은 “분리되어 있으나 평등하다(separate but equal)”는 궤변과 같은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 마디로 말해서 인종차별주의적인 법률이었습니다.

 

이 법률이 시행되던 시기에 59년 동안 가수로 활동하면서 13번이나 그래미상을 수상하고 레이건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자유의 메달과 국립예술훈장을 각각 수여받았던 “재즈의 여왕”이란 별명을 가지고 있는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도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

 

뛰어난 가창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는 변변한 무대에 설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으며 1935년 1월 할렘 오페라 하우스 (Harlem Opera House)에서 있었던 “티니 브로드쇼(Tiny Bradshaw)”밴드와의 공연으로 호평을 얻고 나서 1942년 솔로로 활동을 시작한 엘라가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계기는 1941년에 문을 연 모캄보(Mocambo) 나이트클럽에 출연을 하고 나서부터일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

 

모캄보(Mocambo) 나이트클럽은 1943 년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가 솔로 데뷔무대를 가진 곳으로 유명하며 수많은 당시의 유명연예인들이 드나들던 그야말로 핫플레이스였습니다. 하지만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는 짐크로법(Jim Crow laws) 때문에 모캄보(Mocambo) 나이트클럽에 출연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모캄보(Mocambo)

 

그러나 흑인이라고 해서 모두 출연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고 어사 키트(Eartha Kitt)와 같은 경우에는 모캄보의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것은 아마도 클럽의 소유주였던 찰리 모리슨(Charlie Morrison)이 엘라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기 때문이란 것이 더욱 설득력이 있지 않나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의 팬이었던 마릴린 먼로는 이런 사정을 알고 나서 클럽의 주인인 찰리 모리슨에게 전화를 걸어 “엘라가 라이브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준다면 나(마릴린 먼로)는 매일 앞자리 중앙의 테이블을 예약하여 그녀의 공연을 보겠다.”고 말을 했고 찰리 모리슨이 그녀의 부탁을 받아들인 후 마릴린 먼로는 그녀의 약속을 지켰다고 합니다.

이후에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는 “나는 먼로에게 큰 빚을 졌으며 모캄보에 선 이후 더 이상은 작은 무대를 전전하지 않아도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엘라만 일방적으로 마릴린 먼로에게 도움을 받기만 했던 것은 아니라 먼로도 엘라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영화 속의 노래하는 모습과 1962년 존 F 케네디의 생일파티에서 노래를 부른 마릴린 먼로의 모습과 함께 그녀가 당시에 입었던 드레스가 480만 달러에 경매에서 팔려다는 사실만 크게 남아 있는데 먼로가 가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의 노래를 연구한 것도 하나의 요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마릴린 먼로의 보컬 트레이너는 엘라의 레코드를 100번이나 들으라고 먼로에게 주문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엘라 제인 피츠제럴드(Ella Jane Fitzgerald)의 음악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누구인가?”라고 질문을 한다면 아마도 대부분은 “칙 웹(Chick Webb)”이나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 “노먼 그란츠(Norman Granz)” 또는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를 얘기하겠지만 사실은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영향이 가장 크지 않았을까? 하고 조심스레 생각을 해봅니다.

엘라와 마릴린 먼로

우주식품(space food)의 변천사

우주식품(space food)의 변천사

오늘은 아폴로 11호가 달 착륙에 성공한지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아폴로 11호에 승선하였던 3명의 우주비행사는 선장인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을 비롯하여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었는데 이들 세 사람 중에서 달 표면에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은 사람은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버즈 올드린(Buzz Aldrin) 두 사람이었고 이 두 사람은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한 경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한정된 우주공간에서 생활하는 비행사들에게 균형 잡힌 영양분을 제공할 수 있어야 하는 우주식(space food)은 그동안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한 번 알아보자.

인류 역사상 우주식을 처음으로 먹은 사람은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를 타고 인류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던 소련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Yurii Alekseevich Gagarin)이었다.

그리고 1961년 8월 6일 보스토크 2호의 우주비행사였던 게르만 티토프(Gherman Stepanovich Titov)는 우주에서 최초로 음식물을 토한 사람으로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소련의 우주식품

 

미국의 우주비행사 중에서 최초로 우주식(space food)을 먹었던 사람은 상원의원을 지냈던 존 글렌(John Herschel Glenn, Jr)인데 그는 1962년 2월 20일, 미국인으로는 세 번째 우주비행사이면서 미국인 최초로 지구궤도를 도는데 성공한 기록을 남겼으며 한국전쟁에서도 큰 공을 세운 바가 있는데 존 글렌이 먹었던 우주식은 튜브에 든 쇠고기와 채소였다.

 

1960년대 미국인 우주비행사들에게는 분말음료인 Tang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하는데 1964년에는 제미니 계획(Project Gemini)의 일환으로 설탕으로 만든 쿠키를 우주식으로 만들었다. 개인적으로는 이와 비슷한 것을 먹어본 경험이 있는데 너무 달아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 다음 1965년에 와서 NASA는 음식을 건조시킨 다음 비닐포장하는 방식으로 우주식품을 제공하게 되고 오늘의 주인공인 아폴로 11호의 우주비행사들은 기독교인이었던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의 표현에 의하면 달에 착륙한 1969년 7월 20일이 일요일이었던 관계로 성찬(Holy Communion)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들이 먹었던 우주식은 쇠고기와 채소, 돼지고기와 감자 스캘럽, 캐나다 산 베이컨과 사과 소스 등 비록 비닐포장된 상태의 건조식품이긴 했어도 다양했다고 한다.

 

그 뒤 1971년 7월 26일에 발사한 아폴로 15의 우주비행사들에는 살구 바도 제공되었으며 1972년에는 와인을 마시는 것도 허용되었다고 한다.

 

우주식 중에서 가장 획기적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1973년부터 공급되기 시작했던 것으로 현재 스미소니언박물관의 인기상품이기도 한 동결건조 아이스크림이 아닐까 싶은데 우주비행사들에게 아이스크림이 공급될 수 있었던 것은 1973년 5월 14일 발사된 미국 최초의 우주정거장인 스카이랩(Skylab)에 냉장고와 냉동고가 갖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

 

스카이랩 2호 승무원들의 식사하는 모습

 

이어서 1983년에는 볶음밥이 추가되었고 2005년에는 일본에서 개발한 일종의 즉석라면이라고 할 수 있는 ‘Space Ram’이 일본인 우주비행사 노구치 소이치에 의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며 2006년에 발사된 우주왕복선 디스커버리호에 탑승했던 우주비행사들은 유명한 요리사인 에머릴 라가세(Emeril Lagasse)가 개발한 5가지의 조리법에 따라 자신들의 입맛에 맞도록 직접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2019년 6월 8일 NASA는 1박에 35,000달러를 지불하면 민간인이 우주정거장에 머물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을 발표하였는데 물론 우주선을 타고 왕복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잠재적인 소비자들을 위해 NASA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민간에 연구자금을 지원하여 다양한 우주식을 연구·개발해오고 있었다.

2017년에는 스페이스X가 운용하는 무인우주선 드래곤이 블루벨 아스크림 30개와 스니커즈 아이스크림 바를 배달하는데 성공하였으며 2019년 현재는 LED조명을 이용하여 직접 채소를 재배하는 정원(space garden)의 연구가 한창이라고 한다.

 

한편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2008년 4월 8일부터 4월 19일까지 11일간 국제우주정거장에 체류하였던 이소연은 볶음김치를 비롯하여 수정과, 고추장 등 다양한 한국음식을 가지고 갔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던 루마니아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던 루마니아

힘을 앞세워 불법으로 타국을 침탈하여 획득한 보물을 원래의 소유국에 돌려주자는 협약은 이미 국제적으로 제정되어 있으나 강제력이 없음으로 인해서 당사국 간의 협상에 의하여 기증 또는 장기임대 등의 형태로 반환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2014년 6월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에서 반출된 문화재의 숫자가 156,203점에 달하고 이 중에서 기증, 협상, 구입의 방법으로 돌려받은 것이 1만 점도 되지 않으며 아직도 일본의 도쿄박물관에는 7만 점에 가까운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이 소장되어 있고,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는 4만 점 이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재들이 해외로 유출된 것은 강대국들의 약탈이 가장 큰 이유이며 전쟁을 통한 전리품으로 앗아간 것들이 다음을 차지하고 있는데, 우리가 문화재를 비롯한 보물을 약탈당하였다면 루마니아는 안전을 위하여 보관을 부탁한 자국의 보물을 돌려받지 못하는 그야말로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 되어버린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1916년 8월 27일에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루마니아는 연합국의 진영에 참가하게 되는데 러시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이길 것이라는 간보기(?)를 잘못 하는 바람에 독일과 오스트리아 양군의 합공을 받아 그해 12월 6일에 수도인 부쿠레슈티가 함락되고 1918년 5월 8일 항복을 선언하기까지 40만 명이 넘는 사망자와 국토가 유린당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수도 부쿠레슈티가 함락되자 루마니아 정부는 루마니아의 두 번째 도시인 이아시로 행정부를 옮기기로 결정함과 동시에 독일의 점령으로부터 자국의 보물을 보호하기 위해 해외로 안전하게 빼돌려 위탁보관하는 방안을 수립하게 됩니다.

가장 안전한 것은 미국이나 영국에 맡기는 것이었지만 이것은 독일군을 비롯한 동맹군이 중부유럽과 북유럽의 바다를 장악하고 있기에 수송에 어려움이 따라 실행할 수 없었고, 은행가들이 중립국에 보관하는 것이 좋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으나 당시의 루마니아 총리는 “영국이나 다른 나라에 보물을 맡기는 것은 러시아로서는 좋게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는 협박에 가까운 러시아의 눈치를 보면서 하는 수없이 전쟁기간 동안 러시아가 루마니아의 보물들을 보관하는 합의를 하게 됩니다.

이런 루마니아의 모습은 최근에 개봉되었던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그려졌던 IMF 당시의 정치인과 관료들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제게 다가오면서 갑자기 닥친 한파를 피해 따뜻한 베트남 교민들의 목소리를 듣겠다고 떠난 훌륭한 국개들을 다시 한 번 생각나게 만듭니다.

 

1916년 12월 15일 새벽, 총 25대의 객차로 구성된 열차의 4칸에는 보물을 경호하는 인력이 배치되었고 나머지 21개의 객차에는 모두 120톤에 달하는 금괴와 금화가 실려 있었는데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우리 돈으로 7조원 정도에 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120톤의 금괴를 러시아에 보내고 나서 독일의 점령이 점점 더 확실해지자 루마니아는 두 번째로 예술작품과 골동품을 비롯한 보물들을 러시아로 이동시키는데 이것의 가치는 첫 번째 보낸 금괴의 가치를 훨씬 상회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남과 동시에 금괴와 보물들을 돌려받을 줄로만 예상했던 루마니아는 뜻하지 않는 난관에 봉착하게 됩니다. 루마니아와 합의를 했던 차르의 통치는 1917년의 러시아혁명으로 무너지고 사회주의국가로 바뀌는 과정에서, 러시아연방의 몰다비아민주공화국이었던 베사라비아에 루마니아군이 진주하여 러시아로부터 분리되면서 루마니아왕국에 통합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새로운 러시아의 소비에트정부는 루마니아와의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모든 보물들을 압수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후 문화재와 보물을 돌려받기 위한 루마니아의 노력은 계속되었지만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1922년과 1935년, 1956년에 극히 일부만을 반환받을 수 있었는데 특히 1935년 소련기록보관소의 목록과 반출할 당시의 목록을 비교하여 모스크바에 보관하던 것을 다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봉인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다루면서 사라져버린 것들도 상당수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루마니아는 러시아와의 관계를 정상화 하고, 협력체제를 복원시키기 위해 2003년 7월에 러시아와 기본정치관계 조약을 체결하게 되는데 일부 인터넷의 정보에서는 보물반환문제를 양보하였다고 나오지만 정확하게는 조약의 내용에 포함시키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조약의 내용에는 포함시키지 못했지만 당시 루마니아의 대통령이었던 이온 일리에스쿠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과 보물반환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기로 합의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진전은 없고 러시아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어서 현재로서는 루마니아의 보물반환은 어렵다기 보다는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전에 우리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께서 하시던 말이 생각납니다. “미국을 믿지 말고, 소련에 속지마라. 일본이 일어나고 중국(되놈)이 되나온다.”라는~ 그러나 미국을 믿지 않고 소련에 속지 않는 것보다도 우선해서 살펴보고 맹신해서는 안 되는 것들이 무엇인지는 여기서 언급하지 않아도 다들 아시리라 본다면 지나친 것일까요?

냇 터너의 고백(The Confessions of Nat Turner)

냇 터너의 고백(The Confessions of Nat Turner)

1831년 8월 21일은 미국 버지니아 주 사우스햄턴에서 ‘나다니엘 냇 터너(Nathaniel Nat Turner)’가 이끄는 60여 명의 흑인노예들이 백인들의 탄압에 항거하여 반란을 일으킨 날이다.

이틀에 걸친 그들의 반란은 수많은 희생자를 낸 채 수포로 돌아갔고, 두 달 여를 도망 다니던 냇 터너는 10월 31일 체포되어 11월 11일에 교수형에 처해지고 말았다.

그러나 말이 교수형이지 백인들에 의해 참수당하고 갈기갈기 찢어진 그의 시체는 매장되지도 못하고 버려졌는데 백인들에 의해 쓰여진 그에 관한 기록은 잘못된 정보들도 많고, 또 그것이 사실관계의 확인도 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모 장관후보자 딸의 논문저자 등재와 장학금 수령에 관한 뉴스를 접하면서 그 옛날 “왕과 제후, 장수와 정승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는가?”라는 뜻의 ‘왕후장상영유종호(王侯將相이寧有種乎아)’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람의 신분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면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지만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이 땅의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 씁쓸함을 금할 길이 없다.

백인들에 항거하여 봉기했던 ‘나다니엘 냇 터너(Nathaniel Nat Turner)’에 관한 기록은 ‘냇 터너의 고백(The Confessions of Nat Turner)’이란 제목의 책을 통해서 전해지고 있는데 이 제목이 붙은 책은 두 권이 존재한다.

그 중 첫 번째로 나온 책은 냇 터너의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 ‘토마스 루핀 그레이(Thomas Ruffin Grey)’가 도망 다니던 기간 동안의 냇 터너의 행적과, 수감되어 있던 시기에 그와 나눈 대화를 기반으로 작성되었는데 역사적인 중요성은 크지만 그 정확성에 있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두 번째로 ‘냇 터너의 고백(The Confessions of Nat Turner)’이란 제목이 붙은 책은 소설가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이 토마스 루핀 그레이의 책을 바탕으로 쓴 1인칭 소설이다.

1967년 이 책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이 허구를 가미하여 묘사한 냇 터너의 모습이 지금에 와서 모두 진실인양 전해지고 있다는 점은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으며 소설에서 묘사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실들도 오류가 많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 가운데 가장 큰 오류는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들 만에 의해 일어난 반란이라고 한 것을 꼽을 수 있는데 미국 역사상 최초의 노예반란은 흑인노예와 백인 하인들로 이루어진 집단에 의해 1663년 9월 1일에 일어났던 글로스터 음모(Gloucester County Conspiracy)가 있으나 이것은 흑인들에 의해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후로 흑인들에 의해서 일어난 반란은 많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몇 가지만 살펴보면 1739년 9월 9일에 일어났던 ‘스토노 반란(Stono Rebellion)’과 1712년 뉴욕에서 일어났던 반란(New York Slave Revolt) 등이 있다.

태어나면 주인의 성을 따라야 했던 당시의 노예제도에 의해서 냇 터너 또한 그의 주인이었던 ‘벤자민 터너(Benjamin Turner)’의 성을 따서 터너가 될 수밖에 없었다.

총명하였던 냇 터너는 어려서 읽고 쓰는 것을 배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됨에 따라 종교에 심취했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자신을 예언자라고 칭하며 흑인노예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던 냇 터너를 따랐던 사람들 중에는 백인 추종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아무튼 1831년 2월 12일에 버지니아 주에서 일어난 일식현상을 “백인들에게 봉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판단한 냇 터너는 독립기념일인 7월 4일을 기해 반란을 일으키기로 계획하였으나 몸이 아파 연기하게 되었고 그러던 중 8월 7일에 또 다시 일식이 일어나자 확신을 하게 된 냇 터너는 8월 21일을 기해 6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봉기를 하였으나 60여 명의 백인들과 120여 명의 흑인들이 사망하는 참혹한 결과를 내면서 실패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이 반란으로 인해 체포되었던 흑인노예들 중에서 18명이 처형되었는데 냇 터너는 반란을 일으키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인다면서 참수한 다음 껍질을 벗겨 내버리는 바람에 2016년이 되어서야 그의 두개골에서 채취한 DNA를 판정하여 후손에게 인도되었고 마침내 가족묘지에 안장되어 안식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벤자민 핍스(Benjamin Phipps)에 의해 체포되는 냇 터너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이 소설을 통해 표현하고 있는 냇 터너의 모습에서 가장 심각한 것은 아내가 있었던 그를 독신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였다고 묘사하고 있다는 것과 백인여성에 대한 억압된 욕구를 지닌 인물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백인작가가 흑인의 내면을 글로 표현한다는 것은 어쩌면 태생적인 한계를 지닌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백인 주인에게 충실하게 복종했던 동료들의 배신으로 반란이 실패했다거나 너트가 가진 백인여성을 향한 성적 욕망과 같은 것들은 백인우월주의가 짙게 깔린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 자신의 내면세계를 나타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또한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이 참고했던 원작이라고 할 수도 있는 ‘토마스 루핀 그레이(Thomas Ruffin Grey)’의 책도 노예들의 반란을 잠재우고 불안한 민심을 가라앉히려는 의도에서 냇 터너를 광신도적인 인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은 ‘토마스 루핀 그레이(Thomas Ruffin Grey)’가 쓴 책도 노예제도에 대한 문제의식이 확산되는 것을 막고자 했던 백인들의 생각이 깊게 투영되었던 것으로서 두 사람이 쓴 책 모두가 냇 터너의 모습을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윌리엄 스타이런(William Styron)’이 표현한 냇 터너의 종교와 동성애에 관한 것은 사실보다는 작가의 상상력으로 꾸며낸 허구라고 단언할 수 있는데 냇 터너가 그의 부모와 할머니로부터 받았던 종교적 지식과 이해를 무시한 채, 성경을 읽음으로써 구약에 나오는 예언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게 된 결과로 반란을 계획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귀결 짓고 있는 부분에서는 황당하기조차 하다.

다음으로 냇 터너를 동성애자로 묘사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로 그가 죽인 오직 한 사람이 바로 백인여성인 마거릿 화이트헤드(Margaret Whitehead)였다는 것을 들고 있으나 형장으로 향하면서 그녀와의 통정을 상상하는 너트를 표현하고 있음에는 괴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천진만만한 백인소녀 마거릿 화이트헤드(Margaret Whitehead)를 냇 너트는 무엇 때문에 죽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지 못하면서 단지 너트가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라는 암시를 하고 있다.

냇 너트가 마거릿을 죽인 이유를 여러 가지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동료들을 이끄는 지휘자로서의 결연한 모습, 어린 소녀에게 받았던 동정이 어쩌면 그에게는 수치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남부 백인사회에 전하는 상징적인 수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해본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 스타이런이 너트와 마거릿의 성적인 결합을 그리고 있는 것은 백인과 흑인의 화합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이러한 표현은 지금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가진 자들이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세치 혓바닥으로 가리려는 행동과 오버랩 된다.

정의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자고 목청껏 소리치는 양반님네들이 말하는 정의는 그들만의 정의일 뿐이며, 법 앞에 평등한 것은 우리 같은 민초들일 뿐이고, 그들은 법 위에 군림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 아닌가?

8월 21일, 탄압에 시달리면서 자신의 어머니가 능욕당하는 모습을 보고 성장해야만 했던 ‘나다니엘 냇 터너(Nathaniel Nat Turner)’를 종교적 광신자, 동성애자로 그리고 있는 소설을 생각하니 작금의 사회에 위안부 할머니들을 부정하는 ○아치들이 떠올라 절로 분노가 치민다.

데드라인(deadline)의 유래가 된 섬터 수용소(Camp Sumter)

데드라인(deadline)의 유래가 된 섬터 수용소(Camp Sumter)

일반적으로 언론사의 기사 마감시한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데드라인(deadline)의 유래를 설명한 글들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 그어져 있던 선(line)이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는 선(line)이 아니라 목책(wooden fence)이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데드라인(deadline)이란 말이 생겨난 포로수용소는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앤더슨빌국립사적지(Andersonville National Historic Site) 내에 있는 섬터 기지(Camp Sumter)가 그 기원이라고 하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남부군이 운영하던 포로수용소는 섬터 기지(Camp Sumter) 외에도 로톤 기지(Camp Lawton), 더글라스 기지(Camp Douglas), 플로렌스 기지(Camp Florence) 등 여러 곳이 있었고 모든 포로수용소에는 데드라인(deadline)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데드라인(deadline)이란 말이 섬터 기지(Camp Sumter)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것은 모든 포로수용소 중에서 섬터 수용소(Camp Sumter)의 규모가 가장 컸었기 때문이다.

1864년 2월에 세워져 1865년 4월까지 운영되었던 섬터 수용소(Camp Sumter)는 처음에는 2만 평의 규모였으나 증가하는 인원으로 인해 1864년 6월에 3만5천 평(490m×237m)의 규모로 확대되어 최대 32,000명을 수용하고 있었고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수용되었던 연인원 45,000명 중에서 1만 2913명이 사망하였다.

흔히 전쟁영화에 나오는 포로수용소와는 달리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는 넓은 부지에 울타리를 설치한 다음 그 안에 텐트를 치고 포로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는데 섬터 수용소(Camp Sumter)는 평지가 아니라 경사진 땅위에 만들어졌고 외곽에는 높이 4.6m의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4.6m 정도의 울타리는 넘을 수가 있고 혼자서 넘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 명이 힘을 합친다면 쉽게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였기 때문에 탈출을 시도하는 포로들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초병들이 27m(90피트)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용소의 외곽에 세워진 울타리에서 6m(20피트) 떨어진 안쪽에 낮은 목책을 설치하여 이것을 넘으면 탈출을 시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살한다는 의미로 데드라인(deadlin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포로들의 살해와 잔혹행위에 대한 혐의로 수용소장이던 헨리 위르츠(Henry Wirz)와 또 다른 한 명의 장교 제임스 던컨(James Duncan)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헨리 위르츠(Henry Wirz)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제임스 던컨(James Duncan)은 1년 뒤 수감되었던 풀라스키 요새(Fort Pulaski)를 탈출하였다.

헨리 위르츠(Henry Wirz)

 

교수형에 처해지는 헨리 위르츠(Henry Wirz)

 

스위스계 미국인인 헨리 위르츠(Henry Wirz)의 교수형 판결은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한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13,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포로들은 그대로 섬터 수용소(Camp Sumter)의 땅에 매장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앤더슨빌 국립묘지(Andersonville National Cemetery)인 것이다.

 

포로들에게 데드라인(deadline)이 얼마나 공포의 존재였는가 하는 것은 바닥이 진흙이었던 섬터 수용소(Camp Sumter)에서 세수를 하던 로버츠(Roberts)란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부대 소속의 어린 병사가 미끄러져 얼굴이 데드라인(deadline) 밖으로 나가자 그대로 사살하였다는 것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인종차별이 불러온 미군의 폭동(Battle of Bamber Bridge)

인종차별이 불러온 미군의 폭동(Battle of Bamber Bridge)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 내에서도 인종차별이 심했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로 흑인조종사들로만 구성된 ‘터스키기 에어맨(Tuskegee Airmen)’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화 진주만에서 쿠바 구딩 주니어가 맡았던 ‘도리스 밀러(Doris Miller)’는 실존인물로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전함 웨스트버지니아 호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대신하여 총을 잡고 일본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는 전공을 세워 해군 십자훈장(Navy Cross)을 받은 인물인데 도리스 밀러와 같이 흑인병사들은 전투병보다는 취사병이나 운전병 등 병참지원 업무에 배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렇게 억눌려 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은 뜻밖에도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서 무력을 동반한 사건으로 터져 나오고야 말았는데 이 사건이 오늘의 주제인 ‘뱀버 브릿지 전투(Battle of Bamber Bridge)’라고 불리는 폭동사건이다.

이 사건을 미국은 전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부르고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폭동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

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많은 흑인병사들도 영국땅을 밟게 되었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당시 시행되고 있던 짐 크로법(Jim Crow Law)에 의해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차별을 받다가 그런 법이 없는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게 되자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흑인병사들은 술집, 영화관, 댄스홀 등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았고 운송수단도 사용에 제한이 없이 영국의 백인남녀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던 미군 고위층의 우려는 커지고 있었다.

미군 고위층의 시각은 영국에서 평등을 경험한 흑인병사들이 귀국하게 되면 급진화 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영국의 군과 민간에 흑인들을 분리하는 정책을 실시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흑인을 분리해줄 것을 요청한 술집을 나가보면 실제로는 흑인병사들을 환영한다는 간판을 내건 곳이 있을 정도로 미군 당국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국인들은 행동을 했고 백인보다 예의바르고 정중하다는 칭찬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흑인병사들을 환영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영국의 이러한 사회분위기와는 달리 미군 헌병대에서는 흑인병사들을 영국의 백인들과 분리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고 결국 이것은 1943년 6월 24일의 불상사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1943년 6월 24일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 미군의 폭동사건인 ‘뱀버 브릿지 전투(Battle of Bamber Bridge)’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폭동이라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1943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진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항거한 폭동은 급기야 주 방위군의 투입으로 이어져 모두 34명의 흑인이 경찰과 방위군에 의해 사망하게 되는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흑인병사들이 미국을 위해 싸우지 말 것을 위무하는 전단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본토에서의 폭동으로 같은 흑인들이 사망한 사실은 전쟁에 참전한 흑인병사들에게도 알려졌고 이 때문에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당국은 더욱 더 백인과 흑인병사들을 분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43년 6월 24일 밤, 1511 병참부대 소속의 흑인병사들 몇 명이 영국군인과 시민들과 어울려 뱀버 브릿지에 있는 술집(Ye Old Hob Inn)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던 미군 헌병이 복장불량을 이유로 한 명의 흑인병사를 체포하려고 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났던 Ye Old Hob Inn

 

그러자 동석하고 있던 영국인들이 항의하고 나서면서 고성과 주먹다짐이 일어났고 숫자에서 밀린 헌병은 물러났지만 병력을 보충하고 무장을 강화하여 다시 술집으로 오게 되는데 그 와중에 총기가 발사되어 흑인병사가 목에 부상을 당하게 되자 병원으로 호송할 것을 흑인병사들이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병장교는 이를 거부하고 부상병을 영내로 이동시키게 된다.

부상당한 흑인병사가 기지로 돌아오자 헌병이 흑인병사를 죽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포감이 휩쓸었고 마침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흑인병사들 중 일부는 무장을 하고 헌병들과 교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윌리엄 크로스랜드(William Crossland)란 흑인 일병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모두 32명의 흑인병사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적게는 3개월에서부터 많게는 15년이라는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영국군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형량이 감소되어 1년이 지난 뒤에는 모두 자대로 복귀하여 다시 복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에 미국은 군대 내에서 인종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고 1964년에는 민권법이 제정되어 공식적으로는 인종차별이 사라진 것으로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사회는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음은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흑인병사들이 헌병의 인종차별에 대항하여 벌였던 ‘뱀버 브릿지 전투(Battle of Bamber Bridge)’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의 언론 어느 곳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뒷이야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뒷이야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과연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할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데, 우리사회의 이면에는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자녀사랑이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그 사람들의 자녀들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자신의 부모에 대하여 어떻게들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1994년도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7개 부문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가 바로 그것이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이 영화에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유태인수용소의 소장이었던 아몬 괴트(Amon Leopold Göth)에 대한 것이다.

이 수용소의 이름은 폴란드어로 크라코프 푸아쇼프(Kraków-Płaszów)로 아몬 괴트는 이 강제수용소의 세 번째 소장이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이전에는 수감된 유태인들을 죽이는 일이 없었으나 그가 부임하고부터는 “적어도 한 사람의 수용자를 쏘지 않고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에서 배우 랄프 파인스가 맡았던 아몬 괴트는 그가 살던 빌라의 발코니에서 유태인 수용자들을 총으로 사살하는데 아래의 사진이 실제 발코니의 모습이며 수용소의 지형과 배치 등으로 인해 실제로는 발코니에서 수용자들을 사살할 수는 없었고, 단지 공포심을 주고자 함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1946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아몬 괴트(Amon Leopold Göth)가 2015년에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란 여성이 쓴 책, “할아버지는 총으로 나를 쏘았을 것이다.(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 때문이었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아몬 괴트의 손녀라고 소개하는 글들이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외손녀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일생을 보노라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2008년 어느 여름 날,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도서관에서 “내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나요?(Ich muß doch meinen Vater lieben, oder?)”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책의 표지에는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쉰들러 리스트 수용소장의 딸, 모니카 괴트의 인생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보고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크게 놀랐던 이유는 표지에 있는 사진 속의 여성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라는 점과, 아몬 괴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몬 괴트는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란 여성과 동거를 하면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빌라에서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1945년 1월, 폴란드의 카도비체로부터 진격해오는 붉은군대로부터 도망쳐 1월 9일 비엔나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비엔나에는 안나 괴트(Anna Göth)란 이름을 가진 아몬 괴트의 두 번째 부인이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안나 괴트를 만났다고 하는데 이후 두 사람의 불륜사실을 알게 된 안나 괴트(Anna Göth)는 아몬 괴트와 이혼을 하게 된다.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영화배우이자 미용사로 오스카 쉰들러가 주최한 만찬에서 아몬 괴트를 처음 만나 관계를 맺었고 그녀가 폴란드를 탈출할 때에는 이미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의 어머니가 되는 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를 잉태하고 있었으며 1945년 11월에 바이에른 주의 바트 톨즈에서 그녀를 출산했다.

그 후 아몬 괴트가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46년 9월 13일 몬텔루피치 형무소(Montelupich Prison)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다음 유골은 화장되어 폴란드의 비스와강(The Vistula)에 뿌려지자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1948년, 아몬 괴트가 죽지 않았다면 이혼 후 그녀와 결혼을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아몬 괴트의 아버지가 두 사람의 약혼사실을 증언해줌으로써 이름을 루스 괴트(Ruth Irene Göth)로 바꿀 수 있었고 평생 그녀의 침실에 아몬 괴트의 그림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몬 괴트와 루스 괴트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간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는 행복한 유아생활을 보낼 수는 없었고,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누군가가 칼로 어린 모니카 헤르트비히를 공격하여 심한 상처를 입게 되는데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아몬 괴트에 대한 복수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퍼지기도 했다.

아몬 괴트의 딸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는 성장하면서도 그의 아비지에 대한 진실을 알지는 못하였고 11살이 되어서야 할머니로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와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성장한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는 1970년대 초반에 첫 번째 결혼을 하였는데 무슨 놈의 남편이란 시키가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모자라 매춘까지 강요하는 바람에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란 이름은 그녀의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것이었으며 이전까지는 모니카 괴트(Monika Göth)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모니카 괴트(Monika Göth)가 24살 때 만났던 나이지리아 출신의 남편이 바로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의 아버지였는데 이혼하게 되면서 딸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제니퍼 티게의 나이 7살 때, 그녀를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루스 괴트(Ruth Irene Göth)는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고 연구하는 기관인 이스라엘의 야드바셈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43년 2월부터 1944년 9월까지 아몬 괴트의 통치하에서 푸아쇼프(Płaszów) 수용소에서 숨진 유대인만 8천여 명에 이른다는 조사를 부인하고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큰 영향을 끼쳤던 다큐멘터리 작가인 남아공의 존 블레어(Jon Blair)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인 아몬 괴트는 다른 SS대원들과 같았으며 물론 몇 사람의 유대인을 죽이기는 했겠지만 살인자는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몬 괴트의 진면목을 밝히기 꺼려했던 루스 괴트(Ruth Irene Göth)의 손에서 자란 딸, 모니카 괴트(Monika Göth)와 손녀인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아몬 괴트에 대해서 알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운명은 제니퍼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책을 읽게 만듦으로써 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책을 읽고 충격을 받은 다음날 2006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 인헤리턴스(Inheritance)가 TV를 통해 방송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가 아버지였던 아몬 괴트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나치에 의해 어린아이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죄책감을 다루었던 이 영화를 남편과 함께 시청한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폭력과 학대를 일삼던 남편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모니카 헤르트비히는 일주일에 6일을 일하면서 딸을 제대로 보살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제니퍼 티게를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 맡겼고 여기서 3년을 보낸 제니퍼 티게는 이후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성장하였는데 이복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오기까지 21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랬던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책을 발견하고, 또 그 속에서 나치독일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살인자인 아몬 괴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받았을 충격은 얼마나 컸을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운명은 이미 그녀를 아몬 괴트와 만나게 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책을 발견하기 이전에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친구와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운명은 알람을 놓친 그녀가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만들면서 제니퍼 티게는 아예 텔아비브에 체류하면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고 중동과 아프리카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취득함은 물론 히브리어도 배우게 된다.

그랬던 그녀의 조상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 괴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온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들이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클지 등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갔겠지만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으면서 외할아버지인 아몬 괴트의 행적을 쫓아가는 길에 나서게 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도 텔아비브에서 보았다는 제니퍼 티게는 당시로서는 가학적인 수용소장이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총으로 나를 쏘았을 것이다.(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란 책을 출간한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사살)명령을 내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절묘하게 오버랩 되는 영화 기생충과 소위 지도층 자녀들의 특혜를 생각하면 아빠찬스니 엄마찬스니 하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이 우울해서 싫다.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위쳐(The witcher)는 무슨 뜻일까?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위쳐(The witcher)는 무슨 뜻일까?

 

폴란드 작가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가 쓴 판타지 소설 시리즈인 위쳐는 비디오 게임에 이어 넷플릭스에서 만든 드라마가 시즌 2의 공개를 앞두고 있다.

2011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당시 폴란드의 총리였던 도날드 투스크(Donald Tusk)가 ‘더 위쳐 2: 왕들의 암살자 컬렉터즈 에디션(The Witcher 2: Assassins of Kings-Collector’s Edition)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쳐(witcher)란 단어는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단지 마녀라는 뜻을 가진 위치(witch)로 유추해보는 것에서 그치는데 오늘은 위쳐(witcher)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위쳐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작가인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가 붙인 폴란드어 제목 ‘비에츠민(Wiedźmin)’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

 

원제인 비에츠민(Wiedźmin)은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라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로 어원은 마녀를 뜻하는 비에츠마(Wiedźma)이다.

그러나 남성명사인 비에츠마(Wiedźma)를 사용하지 않고 Wiedźma+in=Wiedźmin이란 신조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수가 있다.

기독교 이전의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서는 약초와 자연에 대한 지식이 많은 여성이란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던 비에츠마(Wiedźma)였지만 기독교의 확장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이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주인공이 아닌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새롭게 비에츠민(Wiedźmin)이란 단어를 만들어 붙였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결론은 위쳐(witcher)는 원제(原題)가 마녀를 뜻하는 폴란드어 비에츠마(Wiedźma)에서 a를 빼고 in을 붙여 만든 비에츠민(Wiedźmin)이 신조어(新造語)인 것처럼 마녀를 뜻하는 영어 위치(witch)에 접미사 er을 붙인 신조어(新造語)란 것으로 넷플릭스의 미드 위쳐의 뜻은 마법사 검객 정도로 번역하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