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펠러로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

프로펠러로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

1945년 5월 10일, 소설 속에서나 있음직한 방법으로 적기를 격추시킨 일이 일어났는데 주인공은 바로 미해군 조종사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으로 그는 조종하던 F4U 콜쎄어(F4U Corsair)기의 프로펠러로 일본의 비행기를 격추시켰습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전과를 올린 로버트 클링맨은 한국에서도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1934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4년을 복무한 후에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날 다시 재입대하여 항공정비사 교육을 거친 다음 조종사가 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배치 받은 곳은 1945년 4월 1일 시작되어 81일간이나 이어진 태평양 최대의 전투였던 일본의 오키나와 전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해전이었던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일본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대대적으로 등장했는데 7번에 걸쳐 1,500기에 달하는 숫자의 특공기가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원된 함정(총 77척의 연합군 항공모함과 9척의 전함이 동원되었다)을 비롯하여 4월에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하여 점령한 카데나 비행장(Kadena Airfields)과 욘탄 비행장(Yontan Airfield) 등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어 미군은 함재기를 동원한 정찰활동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욘탄 비행장(Yontan Airfields)은 요미탄 비행장이라고도 부르며 1996년 7월에 폐쇄하고 2006년 12월에 일본정부에 반환되었으며 현재도 운용되고 있는 카데나 비행장(Kadena Airfields)은 한국전쟁을 맞아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은 극동지역의 중요한 미군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

 

미군의 통계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일본 가미카제 특공기의 70~80%는 사전에 격추시킬 수 있었다고는 하나 20~30%에 달하는 숫자만으로도 연합군 측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는데 1945년 5월 4일에만 12척의 전함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899명에 달하는 사망·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도 이런 가미카제 특공기를 정찰하고 격추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몰던 미해병대 전투비행대(VMF-312)의 함재기 F4U 콜쎄어(Corsair) 기종은 일본의 “Kawasaki Ki-45 토류” 기종에 비해서 고도가 낮고 항속거리가 짧아서 격추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F4U 콜쎄어(Corsair)

 

특히 일본은 미국의 B-29의 폭격으로 본토가 공습 당하자 B-29의 고고도에 이르지 못하는 “Kawasaki Ki-45 토류”를 경량화 시키기 위해 기관포와 방탄철판 및 무전기를 제거하고 공중에서 B-29의 기체와 부딪히게 하는 가미카제와 같은 방법으로 격추시키기 위한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라는 공대공특공대를 별도로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는 강력한 B-29의 방어화기와 9,000m에 도달하기까지 40분이나 걸리고 고고도에서는 수평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성능차이 때문에 일본이 노리던 효과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Kawasaki Ki-45 토류

 

특히 방탄철판을 떼어낸 “Kawasaki Ki-45 토류”에 비해서 기체의 강도가 월등했던 B-29는 기체충돌 공격을 받고도 무사귀환하는 일도 있었으며 이후에는 P-51(P-51 Mustang)기가 호위를 하게 되면서부터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는 사라지게 되었는데 미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야간이라 고도를 낮추어 공습했던 5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친 동경공습 경우에는 출격한 B-29기 17대와 26대가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945년 5월 10일에도 “켄 리우서(Ken Reusser)”를 편대장(레드1: 켄 리우서, 레드2: 로버트 클링맨, 레드3: 짐 콕스, 레드4: 프랭크 래스튼)으로 하여 다른 3명의 조종사와 함께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F4U 콜쎄어(Corsair)를 몰고 정찰임무를 하러 나갔습니다.

일반적인 전투순찰비행의 경우에는 고도를 3,000피트로 유지하지만 코드명 “디나(Dinah)” 별칭 “Nick”으로 불리던 일본의 “Kawasaki Ki-45 토류”를 정찰하기 위해서 고도를 13,000피트로 유지하던 도중에 고도 2,5000피트에서 접근하는 Ki-45를 발견한 편대장의 무전에 따라 속도를 높여 접근하면서 고도를 3만 8천 피트까지 높이는 바람에 짐 콕스와 프랭크 래스튼이 조종하던 레드3, 4는 아래에 처지게 되었고 편대장 케네스 리우서와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 둘만이 Ki-45에 근접하게 됩니다.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

 

편대장 켄 리우서는 고도를 높이기 위해서 비행기에 장착되어 있던 캘리버 50(M2 Heavy Barrel: MG50으로도 부른다)을 발사하여 비행기의 무게를 줄일 것을 명령하고 고도 3만 8천 피트에 이르러서야 2차 대전 당시 프로펠러 비행기들이 적기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일컫던 도그파이트(dogfight)를 벌이기 위해 “Kawasaki Ki-45 토류”의 50피트 뒤에서 꼬리를 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높은 고도에서의 기동은 간결하고 정확해야만 하고 사소한 문제로도 비행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근접하여 사격을 해야 했지만 정격고도보다 3천 피트나 높은 고도를 유지하는 바람에 불과 몇 번의 사격 이후에 총이 얼어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때 편대장 켄 리우서는 Ki-45의 우측에서 기동을 방해하고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위에서부터 Ki-45의 꼬리를 자신이 조종하던 F4U 콜쎄어(Corsair)의 프로펠러로 부딪혀 손상시키기로 하는데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다시피 한 이 행동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첫 번째 시도에서 Ki-45의 방향타에 경미한 손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Ki-45의 후방 기총공격에 의해 오른쪽 날개가 명중되지만 비행에는 문제가 없어서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두 번째로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 Ki-45 후방 기관총이 떨어져나가게 되고 기총수는 비행기에서 튕겨져 나가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만 추락시킬 수는 없었기에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다시 한 번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세 번째 공격에서 드디어 Ki-45의 꼬리가 떨어져나가면서 추락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지만 그가 조종하던 F4U 콜쎄어(Corsair) 또한 프로펠러가 떨어져나감으로써 통제를 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도 1,000피트에 이르러 가까스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미 고도 1만 피트에서 연료는 이미 소진되었지만 편대장 켄 리우서의 유도에 의해 무사히 기지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미국화가 “Alex Durr”가 그린 것이며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알렉스는 9년 동안 해병대에서 전투기를 조종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로로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미해군이 수여하는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한국전쟁에도 항공관제사로 참전하였고 1966년에 예편하였습니다. 한편 편대장이었던 켄 리우서(Kenneth L. Reusser)는 한국전쟁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고 베트남전쟁에는 16 해병항공대(Marine Aircraft Group 16)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2차 대전을 포함하여 3개의 전쟁에서 생존한 유일한 조종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지만 베트남전쟁에서의 구조작전 도중에 타고 있던 UH-1 휴이(UH-1 Huey)가 총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면서 입은 화상으로 말미암아 피부의 35%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 끝에 27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68년에 대령으로 예편을 하였으며 2009년 6월 20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Alex Durr가 그린 그림의 복사본에 서명하는 켄 리우서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고 감행하는 무모한 것 같은 이런 공격은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아니며 그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구상은 1899년에 쥘 베른(Jules Verne)의 “정복자 루버(Robur the Conqueror)”라는 공상과학 소설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용감한 조종사들이 수행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Aerial ramming”이라고 하는 램어택은 1911년 9월 8일에 세계최초로 일어났는데 이 기록을 작성한 사람은 세계최초의 루프비행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한 러시아의 피요트르 네스트로프(Pyotr Nesterov)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로젠탈 남작이 조종하던 알바트로스 B.II기를 공격하여 추락시켰는데 당시 피요트르가 조종하던 비행기는 정찰임무를 위해 비무장이었기 때문에 격추시키기 위해 램어택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조종사와 정찰병은 추락하여 사망하였으며 피요트르 또한 다비행기에서 떨어질 때의 부상으로 다음날 사망함으로써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러시아 공군에서는 총알이 없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하도록 장려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이 벌인 독소전쟁(1941∼45)에서만 약 600차례나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독일군 돌격대에서 따온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독일군 돌격대에서 따온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단어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가 나오면서부터 돌격대라는 뜻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나치 친위대인 SS(Schutzstaffel)를 일컫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용어는 스타워즈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독일군의 돌격대(Stoßtruppen)에서 따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This faceless corps of soldiers was inspired by the similar storm troops from the past.)

원문: From World war to Star wras: stormtroopers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운용한 돌격부대의 이름인 스톰트루퍼(영어: stormtrooper, 독일어: Stoßtruppen)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링크하는 나무위키의 자료를 참조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나무위키의 일부 잘못된 정보와 빠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 나무위키: 돌격대

 

일반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폭풍(storm)이란 용어는 힘(power)과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독일보다 이탈리아가 먼저 사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왕립육군(Royal Italian Army)’ 휘하의 특수부대였던 ‘아르디티(Arditi)’가 ‘스톰(storm)’ 부대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독일군이 운용하였던 돌격대의 초기 모습을 보면 이탈리아의 ‘아르디티(Arditi)’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탄복과 ‘파리나(Farina) 헬멧’을 착용한 ‘아르디티(Arditi)’의 개념은 독일군의 돌격대(Stoßtruppen)와는 조금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독일군의 돌격대가 사용한 명칭의 변천을 보아도 이탈리아에서 따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르디티

 

독일군 돌격대

 

독일 최초의 돌격대는 1915년 3월 2일, 지휘관이었던 ‘칼조우(Calsow)’ 소령의 이름을 따서 창설된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였지만 전술을 가다듬고 체계화 한 것은 1915년 8월에 돌격대의 지휘관으로 새롭게 부임한 ‘윌리 로어(Willy Rohr)’였다.

그래서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 이후 ‘윌리 로어(Willy Rohr)’가 재정비한 부대를 ‘로어 돌격대대(Rohr Assault Battalion)’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윌리 로어(Willy Rohr)

‘윌리 로어(Willy Rohr)’가 돌격대를 재정비 하면서 이룬 가장 큰 변화는 각개병사의 군장을 경량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용하는 화기는 물론이었고 이전까지 신던 무릎까지 올라오던 군화(jack boot)를 ‘오스트리아 산악화(Austrian mountain boots)’로 전면 교체하고 초기에 사용하던 피켈하우베(Pickelhaube) 철모 대신에 ‘슈탈헬름(Stahlhelm)’이라고 하는 헬멧(coal scuttle helmet)을 가장 먼저 사용하도록 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면 독일군은 언제부터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스톰트루퍼(stormtrooper)=독일 돌격대’라고 혼돈할 수 있다.

또한 돌격대를 뜻하는 독일어인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은 나치의 준군사조직이라고들 알고 있거나 혹은 이것을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고들 알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정확한 말도 아니다.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Brownshirts’ 또는 ‘SA’가 있는데 ‘브라운 셔츠(Brownshirts)’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Blackshirts)’이 입었던 검정색의 제복 대신에 갈색의 제복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붙은 것이며 ‘SA’는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을 줄여서 쓰는 명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1919년에 창당된 나치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의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돌격대(Sturmabteilung)’는 ‘스톰트루퍼(stormtrooper)’와는 다르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일의 돌격대를 말하는 ‘스톰트루퍼(stormtrooper)’의 명칭은 어디서부터 비롯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15년 3월 2일에 처음으로 창설된 독일군 돌격부대인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의 이름에는 분명히 ‘돌격대(Sturmabteilung)’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최초로 만들어진 ‘돌격대(Sturmabteilung)’는 본부와 2개의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후 그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이름을 ‘돌격대대(Sturmbataillon)’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고 이 부대에 속한 병사들을 ‘충격보병(슈토스트루페: Stoßtruppe)’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충격보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독일어 ‘슈토스트루페(Stoßtruppe)’를 영어로 번역한 ‘shock troops’ 또는 ‘thrust troops’를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면서 충격보병이라 부르게 된 것이며 독일에서는 또 다른 이름인 ‘스툼만(Sturmmann)’으로도 불렸는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storm man’이 되는데 흔히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타워즈에 의해 널리 알려진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숨어 있다.

킹콩(King Kong)은 누가 죽였을까?

킹콩(King Kong)은 누가 죽였을까?

몬스터 영화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1933년에 만들어진 영화 킹콩(King Kong)의 마지막 씬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에서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의해 킹콩이 떨어져 숨을 거두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킹콩을 죽인 비행사가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지금부터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네스트 B. 쇼드색(Ernest B. Schoedsack)”과 “메리언 C. 쿠퍼(Merian C. Cooper)”가 공동으로 감독을 맡았던 이 영화에서 킹콩을 죽이기 위해 포스터와는 달리 4대의 전투기가 출격을 하는데 이 중의 1대를 감독이었던 메리언 쿠퍼가 직접 조종을 하였고 그가 쏜 총에 의해 킹콩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감독이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비행기를 직접 조종한 것은 아마도 메리언 쿠퍼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메리언 쿠퍼는 1916년 군에 입대하여 판초 비야의 토벌작전에 참가를 한 후 애틀랜타의 항공학교에 진학하여 파일럿이 된 다음.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참전하였는데 특히 1차 대전 이후에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고 있던 폴란드 제7 비행중대에서 지원근무를 하였습니다.

폴란드 제7 비행중대는 1918년에 창설한 폴란드 공군의 모태가 된 부대인데 폴란드 조종사는 몇 명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21명의 미군들이었으며 이 중의 한 명인 메리언 쿠퍼의 역할이 아주 컸기 때문에 폴란드 공군의 100주년 기념을 맞아 전투기에 쿠퍼의 초상화를 그려 넣어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메리언 쿠퍼가 폴란드에서 근무할 당시에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에 벌어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였고 1920년 7월에 소련군에 의해 격추되어 메리언 쿠퍼는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메리언 쿠퍼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라트비아를 거쳐 폴란드로 귀환하였고 이런 그의 용맹성을 치하하여 당시 폴란드군의 원수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는 직접 훈장(The War Order of Virtuti Militari)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메리언쿠퍼: 라트비아 국경에서

 

이처럼 비행경험이 풍부했던 메리언 쿠퍼는 킹콩의 공동 연출자인 어네스트 쇼드색을 태우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장면에 직접 출연하여 그가 만든 주인공 킹콩을 죽이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킹콩 앞의 두 감독

베트남전쟁에서는 개똥도 무기로 사용했다.

베트남전쟁에서는 개똥도 무기로 사용했다.

오는 2월말에 열릴 것으로 예상되는 2차 북미정상회담의 장소 중 한 곳으로 거론되고 있는 베트남은 오랜 기간 미국과 전쟁을 치렀고 우리나라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파병한 국가로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트남공산주의자(Vietnamese Communists)라는 의미를 갖는 Viet Nam Cong San을 줄여서 부르는 베트콩(Viet Cong)은 미군에 비해 현저히 부족한 무장으로 인해 게릴라전을 전개했고 그 중의 하나로 ‘펀지 스틱(punji stick)’이라고 하는 죽창을 이용한 부비트랩을 많이 설치하였습니다.

그런데 베트콩은 ‘펀지 스틱(punji stick)’에 똥을 발라놓아 죽창에 찔리는 부상 외에도 세균감염으로 인한 피해를 유발하도록 했는데 실제 이로 인해 미군이 입은 피해가 상당했다고 합니다.

Source: Tyler/Booby trap at the Cu Chi Tunnels

 

똥을 무기로 사용한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2016년에 일어난 벨기에 브뤼셀 폭탄테러를 꼽을 수 있는데 2017년에 체포되어 재판에 넘겨진 용의자 모하메드 아브리니(Mohamed Abrini)가 사용한 폭탄에도 동물의 고환(animal testes)과 똥(fecal matter)이 들어있었다고 합니다.

미군도 베트남전쟁에서 “T-1151 Dog Doo”라고 하는 외형이 개똥과 비슷한 형태의 송신기를 사용했는데 베트콩이 병력과 군수품을 이동하던 경로인 호치민 트레일(호치민 루트)에 비행기로 투하하여 진동을 감지하면 VHF RF 신호를 300~400m의 범위에 숨겨놓은 수신기에 보내도록 하여 움직임을 파악하였다고 합니다.

Source: National Museum of the US Air Force

 

이런 “T-1151 Dog Doo”는 형태가 원숭이 똥과도 닮았다고 해서 ‘Monkey Turds’라고도 불리었으며 동물의 배설물로 인식한 베트콩들이 크게 경계를 하지 않아 효과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유후인의 금린호(金鱗湖:긴린코)에서 낚시를 할 수 있을까?

유후인의 금린호(金鱗湖:긴린코)에서 낚시를 할 수 있을까?

긴린호수 또는 일본어로 긴린코라고 부르는 유후인의 작은 호수는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낚시를 한다면 그야말로 너나하는 수준일 것 같은 긴린코는 원래는 다케모토의 연못 또는 다케시타의 연못으로 불리었으나 1884년 모리 쿠우소(毛利空桑)라는 유학자가 호수를 헤엄치는 물고기의 비늘이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으로 보고 금린호(金鱗湖)라고 부르면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라 언제나 붐비는 곳이기도 해서 한국의 관광가이드들조차도 이곳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사실은 이곳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낚시가 가능한 것은 아니고 극히 일부 구간에서는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며 주로 잡히는 어종은 잉어, 붕어, 그리고 틸라피아라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의 낚시인들은 밤이건 낮이건 관광객들이 있으면 낚시를 삼간다고 한다. 그래서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이라야만 낚시인들이 낚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낚싯대 없이 모노라인에 지그헤드만 달아서 맨손으로 한 번 노려볼까도 생각했으나 만일 물고기라도 잡게 된다면 전 세계에 못생긴 내 모습이 알려질 것 같아서 포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경치에 취할 때 나는 물속의 물고기에 취하니 천상 낚시인인 것은 틀림없는가 보다.

여담이지만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호숫가의 카페 라루슈(CAFE LA RUCHE)는 베이커리 카페로 커피 맛은 개인적으로는 별로라는 생각이며, 일본인들의 평점은 별 다섯 개에 3개 반 정도이다.

또 하나 한국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른다는 금상 받은 고로케를 판매하는 곳은 한번쯤 맛볼만한 것 같고 벌꿀 아이스크림은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최초로 달을 밟은 우주비행사들은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최초로 달을 밟은 우주비행사들은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사진은 버즈 올드린(Buzz Aldrin)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아폴로 11호를 타고 1969년 7월 20일 인류최초로 달에 첫 발을 내디뎠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이 했던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말입니다.

아폴로 11호에 승선하였던 3명의 우주비행사는 선장인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을 비롯하여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었으며 달 착륙 후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은 사람은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었습니다.

좌로부터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

 

착륙 후 6시간 20분이 지나 암스트롱이 착륙선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 24분 뒤에 올드린도 달을 밟았으며 2시간 13분 12초 동안 달 표면을 탐사하였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올드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입고 있던 우주복에 소변을 보고 말았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인류최초로 달을 밟았던 암스트롱과 올드린 두 사람은 모두 한국전쟁에 조종사로서 참전을 하였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이 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닐 암스트롱 (Neil Armstrong)은 미 해군의 장학제도인 “홀로웨이 플랜 (Holloway Plan)”을 통해서 퍼듀대학의 항공공학과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해군에 복무해야 했으므로 1949년 해군비행학교에 진학하여 1950년 해군비행사로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1942년 취역하여 2차 세계대전에서도 활약한 항공모함 USS 에식스(USS Essex)에 승선해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던 암스트롱의 첫 비행은 사진정찰을 위한 비행기의 호위임무를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 참가 5일 후인 1951년 9월 3일 원산의 주요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던 도중 그가 몰던 F9F 팬서(F9F Panther)가 적의 대공포화를 받게 되었고 6미터 높이의 기둥과 부딪혀 오른쪽 날개가 1미터 가량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끝에 낙하산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1세였습니다.

USS 에식스(USS Essex)와 F9F 팬서(F9F Panther)

 

그러나 그 후로도 암스트롱은 총 121시간의 비행시간과 78회의 출격을 하게 되었고 1952년 8월 23일 최종임무의 수행을 끝으로 제대하여 900회에 이르는 시험비행사로서 활약한 후 1962년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16번기가 암스트롱이 조종하는 비행기

 

한편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은 웨스트 포인트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여 1951년 3등으로 졸업을 하고 전투기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가 몰았던 비행기는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주력이었던 F-86 세이버(sabre)였습니다.

1950년 11월 소련의 미그기가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중전에 등장하여 유엔군이 보유한 모든 기종에 비해 우수한 성능을 보이게 되자 이에 대응하여 1950년 12월에 F-86 세이버(sabre)3개 비행대대를 극동으로 급파하게 됩니다.

F-86 세이버(sabre)

 

소련의 미그 15는 최고고도, 가속도, 그리고 상승률에서 F-86보다 뛰어남을 보였지만 F-86은 회전과 강하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전쟁이 지속되면서 미그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경험이 부족한 북한과 중공의 조종사들이 증가하게 된 반면에 2차 대전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던 미국의 조종사들이 조종하는 F-86이 월등한 기량의 차이를 보인 것이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버즈 올드린(Buzz Aldrin)도 F-86 세이버(sabre)를 몰고 한국전쟁에서 2대의 미그기를 격추시키는 등 66회의 전투비행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특히 1953년 6월 8일자 미국의 라이프지에 그가 격추시킨 미그기에서 탈출하는 소련 조종사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게재하여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은 2015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영화 트랜스포머 2에 출연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특히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2004년 개관한 “한국전쟁 국립박물관(Korean War National Museum)”이 개관할 수 있도록 기부한 것으로도 한국과의 인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박물관은 비영리 민간단체로 운영되면서 모든 비용과 전시물을 한국전 참전용사들로부터 후원의 형식으로 조달하였고 방만한 운영이 겹쳐 2017년 7월 29일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사진을 보면 전시물이 다양하지 못하고 전시하는 환경도 열악하여 일반인들의 관심을 받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먼 외국의 소도시에서 한국전쟁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맙기만 합니다.

 

미국 해병대가 계획했던 스케이트보드 부대

미국 해병대가 계획했던 스케이트보드 부대

1990년대 미해병전투연구소(Marine Corps Warfighting Laboratory)에서는 시가전에 대비할 목적으로 ‘Operation Urban Warrior’라고 하는 프로그램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93년, 우리에게는 영화 ‘블랙호크 다운’으로 잘 알려진 소말리아 민병대와 치른 ‘모가디슈 전투’가 일어났고 이에 해병당국에서는 ‘Operation Urban Warrior’ 프로그램을 앞당겨 실시하였습니다.

영화 ‘블랙호크 다운’의 한 장면: 출처-다음 영화

이런 프로그램의 결과로 개발했던 것으로는 T자 문양의 패턴이 들어간 전투복(BDU: Battle Dress Uniform)도 있었으나 채택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이 글의 제목과 같이 스케이트보드를 사용하는 부대를 만들어 운용한다는 전술적인 테스트를 실시하였다는 것입니다.

스케이트보드를 시가전에서 사용하려고 했던 목적 중에서 건물 내에 설치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트립와이어(tripwire)를 탐지한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또 다른 목적인 적의 저격수를 탐지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진 않지만, 뭐 그렇다고 합니다.

이런 사실은 테스트를 위하여 개발한 T자 문양의 전투복을 착용하고 시중에서 판매하는 스케이트 보드를 구입하여 도색을 한 다음 들고 있는 챠드 코드웰(Chad Codwell) 일병의 사진이 1999년 3월에 공개되어 세상에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스케이트보드를 시가전에 사용하려던 계획은 중단되었고 이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사용하던 무릎과 팔꿈치보호대(knee and elbow pads)가 시가전에서 크게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나 개선하게 되는 동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공동경비구역(JSA)과는 다른 세계의 공동주권지역들

공동경비구역(JSA)과는 다른 세계의 공동주권지역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을 비무장화하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북측에서 636발의 지뢰를 철거하였다는 소식을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세계에는 우리나라의 JSA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다수국가가 공동으로 주권을 가지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법상으로 “공동주권(Condominium)”이라고 하는 것으로 2개 또는 그 이상의 국가가 동등한 주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한 지역을 말하는데 지금부터 어떤 곳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모젤 강과 그 지류: 독일과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와 독일의 국경은 모젤 강과 그 지류인 사우어 강 및 오우르 강이 흐르고 있는데 룩셈부르크의 솅겐(Schengen)을 남단으로, 북쪽으로 118㎞까지의 강과 그 안에 있는 15개의 모래톱은 양국의 공동주권지역으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우어 강의 인도교에 있는 표지판

 

이 지역은 1815년 비엔나회의에서 공동주권지역으로 결정되었는데 1884년 독일법원에서는 양국에 걸쳐 놓여진 다리는 중간지점에서부터 동쪽은 독일이, 서쪽은 룩셈부르크의 주권이 미친다고 판결함에 따라 100년 가까이 그 판례에 따랐으나 1984년 룩셈부르크와의 국경조약에 다리도 공동주권으로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였습니다.

 

▶ 보덴 호수(Bodensee):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보덴 호수는 콘스탄츠호수라고도 부르는 중부유럽에서 3번째로 큰 호수로 “유럽의 블랙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예로부터 교역권과 어업권을 두고 세 나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 호수에 있는 섬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동주권지역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나라가 해석하는 국경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스위스는 호수의 중간에 국경이 있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위스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은 중간지점에서 회항을 하는데 이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호수전체가 공동주권지역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독일은 공식적인 해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페전트섬(Pheasant Island): 스페인과 프랑스

 

꿩섬이라고 하는 이 섬은 바스크 지방을 흘러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비다소아(Bidasoa) 강에 있는 섬으로 일반인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섬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사이의 혼인이 있을 때 신부를 상대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행사가 열리던 곳이었는데 1615년 루이 13세가 아내 스페인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를 처음 만난 곳도 이 곳이었고, 펠리페 4세가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이사벨과 처음으로 만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의의를 평가하여 양국은 1659년부터 이 섬을 공동주권지역으로 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주권은 양국이 6개월씩 번갈아가며 가지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 브르치코 행정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

보스니아내전 이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인이 통치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연방과 세르비아인이 통치하는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나뉘게 되는데 브르치코 행정구는 정치·경제적 요충지로서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1999년에 미국외교관 로버트 오웬의 중재로 공동주권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주권지역이지만 각기 저마다의 독립된 경찰과 교육 및 보건제도를 가지고 있고 시장은 크로아티아인이고 대리인은 보스니아인, 시의회 의장은 세르비아인이 맡고 있는 등 표면적으로는 화해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폰세카만: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및 온두라스

 

중미 온두라스 서부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폰세카만(Gulf of Fonseca)은 서로는 엘살바도르, 동으로는 니카라과에 접해 있는 3국의 공동주권지역이지만 그 이전에는 영투분쟁이 끈이지 않던 곳이었고 특히 미국이 파나마운하가 건설되기 이전에 운하의 건설을 검토할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니카라과는 엘살바도르 및 온두라스와 상의 없이 미국과 브라이언-차모로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의 해군기지 건설을 허가하게 되는데 이에 반발한 두 나라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승소하였으나 이후에도 분쟁이 계속되어 1992년 국제사법재판소에는 3국의 공동주권지역으로 결정하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스웨덴 최초의 후퇴익 전투기, 사브 29 투난

스웨덴 최초의 후퇴익 전투기, 사브 29 투난

스웨덴의 전투기 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사브 JAS 39 그리펜일 것이다. JAS는 스웨덴어로 전투기(Jakt), 공격(Attack), 정찰(Spaning)의 첫 글자를 따서 명명한 것이고 뒤에 있는 그리펜은 별명으로 붙인 것이다.

사브가 생산한 대표적인 전투기로는 39 그리펜을 비롯하여 35 드라켄 및 37 비겐 등이 대표적인데 이 전투기들의 별명은 모두 강한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스웨덴어로 드라켄(Draken)은 용을 뜻하는 드래곤(Dragon)이고, 비겐(Viggen)은 벼락을 뜻하는 썬더볼트(Thunderbolt), 그리펜(Gripen)은 영어로는 그리핀(Griffin)이라고 하는 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가진 상상의 동물을 뜻한다.

사브 JAS 39 그리펜

 

사브 J 35 드라켄

 

사브 JA 37 비겐

 

그런데 이와는 달리 조금은 엉뚱하고 이상한 별명이 붙은 스웨덴의 전투기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으로 스웨덴어 튜난(Tunnan)은 영어로는 통을 뜻하는 배럴(Barrel)을 의미한다.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사브 21R(Saab 21R)에 이은 스웨덴의 2번째 제트 전투기였지만 그보다는 서유럽 최초의 후퇴익(swept wing)기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큰 기종이다.

날개의 끝이 꼬리방향으로 뒤를 향하고 있는 최초의 전투기는 독일의 메서슈미트Me 262(Messerschmitt Me 262)였는데 세계최초의 실용 제트전투기였던 메서슈미트Me 262는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4년이 아니라 그 이전에 투입되었더라면 전쟁의 양상을 바꾸었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인데 이 전투기가 채택한 것이 바로 기존의 전투기와는 다른 후퇴익(swept wing)이었다.

아돌프 부제만(Adolf Busemann)

 

지금은 거의 모든 항공기들이 채택하고 있는 후퇴익(swept wing)을 처음으로 소개한 사람은 독일인 아돌프 부제만(Adolf Busemann)으로 1935년 로마에서 열렸던 볼타 컨퍼런스에서 후퇴익(swept wing)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이후, 극비로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물로 탄생한 것이 프로토 타입의 메서슈미트 Me P.1101(Messerschmitt Me P.1101)과 2차 대전 중에 1,400대 이상이 생산되었던 메서슈미트Me 262(Messerschmitt Me 262)였다.

메서슈미트 Me P.1101

 

메서슈미트Me 262

 

한편 2차 대전 중에 미국은 러스티 작전(Operation LUSTY)이란 것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독일의 항공기와 그에 관한 제작기술 및 연구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전쟁이 끝난 후에는 축적된 독일의 기술을 빼내기 위해 더욱 열심이었고 그렇게 해서 습득한 기술의 하나가 바로 후퇴익(swept wing)에 관한 것이었다.

후퇴익(swept wing)에 관한 정보와 기술은 영국을 비롯한 동맹국들과도 공유가 되었고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후퇴익기의 대표적인 것들로는 미국의 F-86 세이버, 영국의 호커 헌터(Hawker Hunter) 및 소련의 MiG-15와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인 스웨덴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 등이 있다.

F-86 세이버, 호커 헌터(Hawker Hunter) 등이 날씬한 기체를 하고 있었던 반면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상대적으로 굵고 짧은 기체를 하고 있어서 통이란 별명이 어울리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1948년 9월 1일에 첫 비행을 마친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우리가 생각하는 전투기의 이미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모양을 하고 있었으나 비행성능은 아주 뛰어나서 1954년에는 500㎞ 구간에서 세계기록인 977.3㎞/h를, 1955년에는 1,000㎞ 구간에서 900.6㎞/h의 기록을 작성하였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과 같은 강대국들이 임무에 맡게 최적화된 전투기들을 따로 운용하는 것과는 달리 스웨덴에서는 사브 29의 기수에 20㎜ 기관포를 탑재한 공대공전투기인 J29와 기관포 대신에 정찰용 카메라를 탑재한 S29 및 공대지공격기인 A29의 세 가지 유형으로 운용하였다.

사브 J29

 

한편 1955년까지 중립정책을 취하고 있던 스웨덴은 중립정책을 포기한 이후에도 외국과의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유엔의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1961년 9월 28일에 5대의 J29B로 구성된 특별전투비행대인 제22 비행대를 편성하여 콩고에 파견한 것이 최초이자 유일한 스웨덴 공군의 해외파병 기록으로 남아있다.

스웨덴을 출발한 제22 비행대는 10월 4일에 지금은 킨샤사로 이름이 바뀐 콩고의 수도인 레오폴드빌(Léopoldville)에 도착하여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어서 1962년 4월에는 4기의 J29B와 2기의 S29C가 추가로 파병되어 유엔군 전투기의 주력을 담당하였다.

대표적인 작전참가로는 1962년 12월에 카탕가 분리독립세력의 지상기지에 대한 공격임무에 투입되어 6일 동안 150시간의 작전을 수행하면서 작전에 참가한 9대의 J29B 중에서 8대가 대공포에 손상을 입으면서도 로켓공격 등으로 큰 전과를 올렸으며, 일기가 고르지 않아 항공정찰이 어렵다던 콩고에서의 항공정찰에 투입된 2대의 S29C도 지상목표물의 정찰에 뛰어난 활약을 함으로써 지상공격의 효과를 극대화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당시 콩고에 파견된 유엔군의 전투기는 스웨덴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 외에도 에티오피아 공군에서 파견한 F-86 세이버가 있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단기간의 운용으로 종료되었던 반면에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착륙사고로 1기가 파손된 것을 제하고는 1963년까지 전투에 의한 손실은 전혀 없이 임무를 수행하였고 모두 11기가 파견되었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은 단지 4기만이 스웨덴으로 귀환하였고, 나머지는 기지에서 모두 파괴하는 것으로 유엔평화유지군으로서의 임무를 마쳤다.

뛰어난 능력을 과시했던 사브 29 투난(Saab 29 Tunnan)의 해외수출이 오스트리아에 30대의 J29A와 S29C를 수출했던 것이 유일했던 이유는 동서냉전의 시대에 스웨덴의 전투기를 도입하는 것은 자국의 이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각국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지 결코 미국의 F-86F와 소련의 MiG-15보다 성능이 부족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링컨 대통령은 행복했을까?

링컨 대통령은 행복했을까?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선거가 끝났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있으며 그의 자녀들 또한 선거결과의 승복을 두고 의견충돌을 빚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았다.

서부에서 바이든에게 참패하고, 자녀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트럼프를 보면서 나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을 떠올리게 된다.

링컨과 트럼프는 모두 공화당 소속이란 것과 탄핵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내가 링컨을 소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였다.

물론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재선에 성공했던 것도 다른 점이다.

그러나 1865년 3월 4일, 제17대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취임연설을 했던 링컨은 1865년 4월 14일의 피격으로 다음 날인 4월 15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이 뒤를 이어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은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최초로 탄핵재판을 받은 기록을 남겼으나 무죄가 선고되어 파면을 면할 수는 있었는데 트럼프 또한 미국대통령으로 세 번째로 탄핵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노예제도를 없앤 인물로만 알고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가족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면 결코 행복했던 삶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링컨 대통령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만 보더라도 그들의 가정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는 그의 저서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된 것은 그의 결혼에 비교하면 비극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부부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남편의 암살을 곁에서 목격했던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은 장남을 제외한 3명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고 장남에 의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던 아픔을 겪었는데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1년 뒤인 1882년 7월 15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음 날 사망하였다.

링컨 대통령 부부는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만이 유일하게 성인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었고 정치활동을 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유일하게 링컨 가족묘지(Lincoln Tomb)에 안장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로버트 토드 링컨

 

둘째 아들인 에드워드(Edward Baker Lincoln)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인(死因)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

 

아마도 링컨과 그의 아내에게 가장 큰 슬픔을 안겨다 준 것은 셋째 아들인 윌리엄 월레스 링컨(William Wallace Lincoln)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862년 2월 20일이면 몹시 추운 겨울이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난방이 잘되지 않았을 그때는 윌리엄 월레스 링컨(William Wallace Lincoln)이 내쉬는 마지막 숨이 하얀 연기처럼 퍼졌을 것이다.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백악관에서 지켜보았을 링컨 부부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윌리엄 링컨이 죽고 난 뒤 3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물론 링컨 대통령의 슬픔도 커서 암살당하기 전까지 셋째인 윌리엄이 잠들어 있는 오크힐 묘지(Oak Hill Cemetery)를 꾸준히 찾았다고 하며 결국에는 아들과 함께 기차로 운구되어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있는 오크리지 묘지(Oak Ridge Cemetery)의 가족묘지(Lincoln Tomb)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월레스 링컨

 

막내아들인 넷째, 토마스 태드 링컨(Thomas Tad Lincoln III)은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나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했다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백악관을 나와 그의 나이 18세 되던 1871년 7월 15일,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장례식은 당시 시카고에 있던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그 뒤 스프링필드의 가족묘지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토마스 태드 링컨

 

다시 링컨 대통령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돌라오면, 링컨 대통령은 22세에 고향인 켄터키주의 호젠빌을 떠나 일리노이에 정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스프링필드에서는 변호사로 활동을 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가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자 스프링필드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링컨기념관협회(National Lincoln Monument Association)를 조직하고 기금모금에 나서 링컨의 가족묘지(Lincoln Tomb)를 완성하였다.

1874년, 조각가 라킨 골드스미스 미드(Larkin Goldsmith Mead)가 디자인한 기념비의 완성과 함께 링컨 대통령은 카타콤(catacomb)의 중앙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관에 안장되었다.

 

불행했던 링컨 대통령의 삶은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아 완전한 안식을 얻지도 못했는데 MBC 프로그램인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던 것처럼 사후에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MBC 서프라이즈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1877년의 일이라고 나오지만 정확한 것은 그보다 1년 전인 1876년의 일이다.

빅 짐 케널리(Big Jim Kennally)가 이끌던 시카고 아일랜드의 범죄조직은 위조화폐를 만들고 있었는데 기술자의 한 명인 벤자민 보이드(Benjamin Boyd)가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일리노이 주립교도소에 수감되자 그들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빅 짐 케널리(Big Jim Kennally)

그래서 케널리는 벤자민을 석방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조직원인 테렌스 뮬렌(Terence Mullen)과 잭 휴즈(Jack Hughes)를 시켜 링컨의 시신의 훔친 다음 몸값으로 현금 20만 달러와 벤자민의 사면을 요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876년 당시 링컨 대통령의 시신은 스프링필드의 오크리지 묘지(Oak Ridge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오크리지 묘지는 마을에서 3㎞나 떨어진 곳에 있는 관리인도 없는 시골묘지에 불과했다.

게다가 석관은 도난방지장치는커녕 시멘트도 아닌 소석고(plaster of Paris)로 봉인되어 있었고 석관이 안치된 방은 자물쇠 하나뿐이었기에 범죄자들은 쉽게 침입할 수는 있었으나 관을 들어올리지 못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밀검찰국 위장요원, 루이스 스웨글스(Lewis Swegles)의 권총이 실수로 발사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고 이틀 후 테렌스 뮬렌(Terence Mullen)과 잭 휴즈(Jack Hughes)는 체포되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링컨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묘지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던 존 캐럴 파워(John Carroll Power)는 멘붕에 빠지고 만다.

전문 도굴꾼도 아닌 아마추어들이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면 당시에 성행하던 전문적인 시체도둑(body snatchers)들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한 그는 링컨 대통령의 시신이 매장된 위치를 옮기고 비밀에 부친다.

그리고 링컨의 장남인 로버트가 시멘트로 봉인하기까지 35년 동안이나 링컨 대통령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석도 없이 쓸쓸히 묻혀있어야만 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링컨의 인생을 과연 누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