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비를 대체할 JLTV의 납품연기는 불가피할 듯

험비를 대체할 JLTV의 납품연기는 불가피할 듯

험비(HMMWV: High 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는 1985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여 66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수만 28만대 이상에 달하는 베스트셀러인데 이를 대체할 차세대 통합경전술차량(JLTV: Joint Light Tactical Vehicle)의 사업추진에 대한 미의회보고서가 어제 날짜인 9월 18일부로 발표되었습니다.

의회보고서에 의하면 2017년 8월과 9월에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의 미해병 공지전투센터((Marine Corps Air Ground Combat Center)에서 있었던 JLTV의 테스트 결과가 성능요구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하며 이에 따라 차량의 인수도 2040년이 되어야 완료될 수 있다고 합니다.

JLTV의 테스트는 실주행을 통한 검중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병행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대략적인 사항들만 알려졌던 자료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알려졌는데 이를 충족시키는 차량이 납품된다면 JLTV의 성능은 경이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듯 보입니다.

JLTV(Joint Light Tactical Vehicle) 자료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

· 영하 40℃에서 1시간 내에 18℃로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영상 50℃에서 40분 내에 32℃까지 낮출 수 있어야 한다.

· 엔진과 시스템 오류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 JLTV가 다른 JLTV를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 험비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다용도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 M-ATV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뢰 및 폭발물 방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 M-ATV(MRAP All Terrain Vehicle)는 범용지형지뢰방호차량으로 이전의 지뢰방호차량인 MAR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와 동일한 수준의 방호기능을 가지면서도 기동성은 향상되도록 설계된 차량.

· 1,000km의 오프로드를 고장 없이 주행하여야 한다.

· 타이어 2개가 터져도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3,6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도 작전이 가능해야 한다.

· 극한의 추위에서도 1분 이내에 시동이 걸려야 한다.

· 중간급유 없이 시속 56km로 560km를 달릴 수 있어야 하고 오프로드는 480km를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7초 이내에 시속 50km로 가속할 수 있어야 한다.

· 수심 1.5미터의 물을 건널 수 있어야 한다.

· 전진과 후진을 불문하고 60cm의 단차를 넘을 수 있어야 한다.

· 45cm의 단차를 시속 24km로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폭 7.6미터, 경사 20°의 호를 건널 수 있어야 한다.

· 스키 상급자도 어려운 경사 40°의 길을 가로로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엔진에 불이 붙을 경우 이를 감지하여 10초 이내에 자동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 차체의 도장에 손상이 있을 경우 자동 복구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미군당국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면

JLTV는 그야말로 꿈의 자동차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3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3편)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프랑스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의 결성에는 USFSA의 협력이 있었지만, 프랑스 체조 연맹이나 프랑스 사격연맹 등, 원래 USFSA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경기 연맹도 순수한 경기 지향이라는 점에서 CNS에 찬동하는 자세를 표명하기 시작했고 CNS는 각각의 경기연맹이 자립하는 형태를 인정하면서 결집하는 조직으로 1913년에는 올림픽 대표에 관한 결정권을 획득하여 그 산하에 프랑스 올림픽위원회를 설치했다.

CNS는 설립 경위에서 통일된 규칙에 따라 프랑스와 세계의 스포츠를 통합하는 보편적인 모델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단일 경기를 총괄하는 각종 연맹을 통일된 규칙하에서 동등하게 관리한다는 ‘1경기 1연맹’이란 시스템이 CNS에 의해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도입되어 각종 경기 연맹의 설립이 증가함에 따라 프랑스의 보편주의적 가치관에 따른 CNS는 1차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반면 USFSA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던 축구에 관하여 USFSA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프랑스 연방간 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는 1913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으로부터 프랑스 챔피언십을 개최할 권한을 얻게 된다.

CFI에는 1차대전 전인 1910년부터 축구의 전문화를 둘러싸고 USFSA를 떠난 쥘 리메가 가입하고 있으며, FIFA에서도 영향력이 컸던 쥘 리메의 생각은 프랑스 축구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쥘 리메(Jules Rimet)

 

CFI는 1919년 4월 7일 쥘 리메를 회장으로 프랑스 축구연맹으로 모습을 바꾸고 명실공히 프랑스에서 축구를 총괄하는 경기연맹이 되었으며 축구 연맹의 설립을 시작으로, 경기마다 연맹의 설립이 잇따라 1920년에는 USFSA의 럭비커미션이 해산하고 프랑스 럭비 연맹을 설립했으며 이어서 필드하키, 육상경기, 동계스포츠, 테니스, 수영과 그 밖에도 롤러스케이트, 바스크 펠로타 (Basque pelota) 등이 잇따라 독립적인 경기연맹을 설립했다.

바스크 펠로타 (Basque pelota)

각종 경기연맹의 설립에 따라 USFSA는 급속히 힘을 잃어 1921년 조직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각종 경기연맹의 설립에 비례하여 CNS는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 CNS를 구성하는 연맹은 1919년에는 22개 단체였지만 1921년에는 31개 단체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연맹을 총괄하는 성격상 CNS의 회원들은 대부분 선수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국내에서의 스포츠계의 지도자는 쿠베르탱과 같은 귀족이나 USFSA를 주도한 엘리트층으로부터 1차대전 후에는 쥘 리메와 같은 스포츠 전문가들로 바뀌고 있었다.

스포츠를 둘러싼 이러한 변화는 1차대전 후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것으로 스포츠 미디어의 발전과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욕구가 커짐에 따라 이전까지 엘리트층의 독점적인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스포츠가 일반대중에게로 확대되었고 일부 종목에서 진행된 스포츠의 프로화를 프랑스 스포츠계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이런 와중에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가 1922년 3월 정부에 의해 정식 승인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는 CNS 아래 하나의 연맹이 하나의 경기를 통괄한다는 모델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승국이었음에도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으며 국토 또한 황폐화되어 국민들의 정신적 충격 또한 컸다.

특히 국내에서 반독일 정서의 여론이 강해지는 가운데 국력의 쇠퇴를 만회하고 싶었던 프랑스는 국제연맹 등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에 주도적 입장을 취해 국가의 위신회복을 회복하려 스포츠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즉,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위신을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미 1차대전 이전부터 프랑스 파리는 영국에서 유래한 스포츠를 세계에 펼친 ‘제2의 스포츠 중심지’로 여겨지며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스포츠의 국제화에 크게 공헌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인한 것으로써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출신의 유학생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스포츠의 묘미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국제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 경기연맹이 프랑스인의 영향력으로 1차대전 전부터 설립되었는데 1904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자동차연맹(FI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utomobile)이 프랑스인을 회장으로 설립되었으며 프랑스인이 회장직에 맡지 않았지만 1908년 국제수영연맹(FIN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Natation)과 1913년 국제펜싱연맹(FIE: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scrime) 등이 설립될 때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런 프랑스의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이들 연맹의 약어가 프랑스어 FI(Fédération Internationale)로 시작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통일된 규칙에 따른 국제조직의 형성은 CNS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보편주의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법률에 따라 종교와 문화, 인종과 민족에 관계없이 평등을 보장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계에 이 보편주의 모델의 도입을 추진했고 1차대전 이후 정치적 맥락에서 가속화되었다.

이미 본 것처럼 1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고 싶었던 프랑스로서는 국제대회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국제 스포츠 조직을 통한 영향력의 확대도 큰 의미를 두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국내에서 확립된 ‘하나의 연맹이 하나의 경기를 통괄한다’는 모델에 따라 각종 국제 경기연맹을 차례로 조직화해나감으로써 1927년에 14개의 국제경기연맹의 본부가 파리와 프랑스 국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쿠베르탱이 설립한 IOC는 민주적인 선거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엘리트층이 상호 추천하는 형태로 멤버를 선출하였는데 이러한 IOC의 비민주성뿐만 아니라 엄격했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서도 스포츠의 대중화 속에서 전문화를 용인하는 경기연맹을 통괄하고 있던 CNS의 모델이 보급되어 가는 것을 IOC로써는 간과할 수 없었다.

한편 경기 연맹의 주도와 함께 프랑스는 각 경기연맹마다 세계선수권을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국제 대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나갔는데 예를 들면 FIFA에서 회장을 맡고 있던 프랑스인 쥘 리메가 1930년에 월드컵을 창설한 것을 들 수 있다.

1차대전 이후 국제경기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프랑스였다.

1920년부터 1924년 사이에 프랑스 대표팀이 실시한 국가대항전은 총 84회에 달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은 축구, 럭비, 육상경기였다.

 

그러나 이 세 경기의 상대는 모두 1차대전의 연합국들로 특히 영국과의 대항전이 41회로 제일 많았으며 벨기에와 17차례의 국가대항전을 가졌고 그 외의 국가들도 이탈리아, 스위스 등 1차대전의 연합국 또는 중립국들이었다.

1차대전에서 적대관계였던 나라들과의 대항전은 1925년에 오스트리아와 가진 축구 대항전이 최초였으며 독일과의 경기는 육상경기의 대항전이 치러진 1926년으로 1926년은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정치가 국제 스포츠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에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24년 파리올림픽의 개최는 프랑스가 국제적으로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파리올림픽 유치의 성공에는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지만 1차대전 이후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스포츠계에서 더 이상 핵심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파리올림픽 개최를 향해 프랑스 스포츠계와 쿠베르탱 사이에 어떤 논의가 있었으며 쿠베르탱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4편에 계속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2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2편)

올림픽대회처럼 각국의 대표선수가 한 곳에서 자웅을 겨루는 대회뿐만 아니라 개별 종목에서 각 국가 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를 보더라도 1차대전 후의 정치 상황이 명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24년까지 프랑스 축구대표팀은 주로 1차대전 당시 연합국 또는 중립국 팀들과 경기를 가졌으며 아주 가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1차 대전의 적대국 대표팀들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지만, 독일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 반독일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10년 이상이 지난 1931년에야 처음으로 대항전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상황은 스포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으며 1차 대전 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스포츠계에 미치는 미국의 힘도 상징적이었다.

1917년부터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국토가 전장으로 되는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유럽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유럽의 국가들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1차 대전 후 국제사회에서 패권을 잡게 되었다.

1편에서 언급했던 연합군 경기대회는 미국 육군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과 YMCA가 협력하여 유럽에 남아 있는 연합군 병사를 위한 스포츠 대회로 개최한 것이었다.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미국인 병사들은 파리의 방쎈느 산림공원(Bois de Vincennes)에 경기장을 건설했고 나중에 이 경기장은 프랑스에 기증되었는데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이라 명명되어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도 사용되었다.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

 

연합군 경기대회에는 19개국에서 1,415명이 참가했지만, 그 중 282명이 미군, 253명이 프랑스군의 병사였던 것에서 보는 것처럼 경기의 참가는 해당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또, 미국 선수의 강인한 체격이나 선진적인 트레이닝 방법 등도 1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에게는 미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쳤다. 게다가 올림픽에 있어서도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미국의 패권은 계속되어 1차대전 이후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미국은 금메달을 획득한 수에 있어서 다른 나라를 계속 압도하였다.

 

이와 같이 1차대전 이후부터 정치성을 수반하며 발전해온 스포츠의 국제화는 프랑스의 주도에 의한 바가 컸으며 국제 스포츠계를 주도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외교정책과 일치하며 프랑스 국내 스포츠계의 변화와도 상호 연관되어 전개되어 갔다.

1차대전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스포츠 관련 조직은 프랑스 스포츠연맹 (USFSA)으로 1890년 11월에 설립된 USFSA는 모든 스포츠를 일괄적으로 조직한 연맹으로 주요 가입자는 파리를 중심으로 귀족계급과 신흥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 육상, 축구, 론 테니스(Lawn Tennis) 등 종목별 소위원회를 두었고 1901년 7월 1일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법이 통과된 이후로 많은 스포츠 클럽이 가입했는데 예를 들면 1890년에는 13개 단체와 2,000명의 회원수에 불과했던 것이 1차대전 직전에는 약 1,700개 단체와 회원수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한편 프랑스의 엘리트 계급은 영국의 상류계급과 스포츠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스포츠는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했는데 쿠베르탱도 “스포츠를 노동자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USFSA는 그러한 상류층 및 중산층 사람들의 모임이며 엄격하게 아마추어리즘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이런 USFSA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03년에는 기독교 카톨릭계 프랑스 파트로나쥬 체조스포츠연맹(FGSPF)이 설립되었는데 FGSPF는 USFSA의 헤게모니에 반대하여 조직된 프랑스 연맹간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의 핵심세력으로 1차대전 전에는 1,500단체, 15만 명의 등록자를 가진 주요 조직으로 성장했다.

FGSPF: Fédération gymnastique et sportive des patronages de France

이런 FGSPF에 대해 UFSFA는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스스로는 세속적·비종교적인 조직임을 주장했지만 갈수록 프랑스 스포츠계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격화되면서 쿠베르탱은 1906년에 USFSA의 명예회원으로부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USFSA나 각종 스포츠 종목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1907년 1월에 이듬해 열리는 런던 올림픽대회의 참가를 둘러싸고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전국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거부했다.

USFSA는 올림픽 참여에 대해 쿠베르탱과 전국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맹과의 논의를 거쳐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미 1차 대전 전부터 쿠베르탱과 프랑스의 스포츠계 사이에는 스포츠에 대한 생각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1907년 3월에는 FGSPF가 중심이 되어 USFSA에 반대하는 몇몇 그룹이 결집해 CFI를 결성하게 된다.

즉 올림픽에 대한 쿠베르탱의 영향력과 정치적 갈등을 깊게 하는 프랑스 스포츠계의 위기를 앞두고 각종 경기단체는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지향하는 조직을 결성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였다.

다음 편에 계속.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1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1편)

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는데 스포츠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자국 대표선수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게 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위신을 되찾는 수단으로서 스포츠에 주목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외에도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1차 대전 후 프랑스의 스포츠계에 퍼진 “한 경기종목은 하나의 연맹이 통괄한다”는 모델은 프랑스의 주도에 의해 국제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부터 각국 정부는 스포츠에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게 되었으며 국제정세가 올림픽대회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와 정치의 연결도 1차대전 이후 시작되었다.

실제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개최된 1920년 올림픽대회에는 1차 대전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 독일제국을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과 같은 동맹국들은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이 올림픽 역사에서 선수단의 참가를 불허한 최초의 배척이었다. 이처럼 스포츠계가 정치적 색조를 띠기 시작하는 가운데, 거기서 조직화를 주도한 것이 프랑스였다.

올림픽과 내셔널리즘의 관계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논의되어왔으며 그 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의 비정치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을 경험한 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았다.

1차 대전 후 프랑스 사회는 대중문화가 발전을 이루는 시대였다.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방편으로써 국민들의 오락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전기가 일반 가정에 널리 퍼져나가는 것과 함께 라디오 방송이 크게 보급되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국화해가는 미국 영화의 상영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스포츠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1차 대전까지는 일부 사람에 한정되어 있던 스포츠였지만, 전후에는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관람하는 것도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한 실제로 경기장에서 관전하는 것 외에도 라디오나 스포츠 전문 잡지, 혹은 신문의 스포츠란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경기결과를 알게 되었는데 스포츠 미디어 중에서도 특히 유통량이 많았던 것은 일간지 로토(L’Auto)였다.

 

1903년에 투르 드 프랑스를 시작하고 있던 로토는 전쟁이 끝난 뒤 1923년에는 자동차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창설하는 등 스포츠 대회의 주최나 후원에도 적극적이었고 그런 결과로 신문의 매출도 증가했다.

1923년에는 하루에 27만 7000부, 투르 드 프랑스의 개최 기간에는 하루에 50만 부 가까이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10년 후에는 평균 36만 4000부까지 발행 부수를 늘려나갔다.

이와 같이 1차 대전 후의 프랑스에서의 스포츠는 정치화와 동시에 대중화도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 열렸던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가 바로 1924년에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제8회 올림픽대회였다.

 

프랑스가 1924년 파리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쿠베르탱 남작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1920년의 앤트워프 올림픽에는 국제정세를 이유로 독일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가 참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스포츠계는 쿠베르탱이 주창했던 올림픽 정신과 평화적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이런 역사를 지닌 올림픽이 2024년에 다시 파리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된 이후 지금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의 2024년 파리올림픽 참가를 반대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즉 순수한 스포츠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 올림픽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과 스포츠의 정치화 및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각국의 내셔널리즘이 명확하게 표출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은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에 걸쳐 사상 처음으로 세계 규모로 펼쳐진 전쟁이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던 국가 간의 총력전이 되었다.

이 총력전의 경험과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의한 배상이나 제국의 해체, 거기에 따른 영토 등의 지정학적 변화는 유럽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을 증폭시켜 국가끼리의 대항의식은 1차 대전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베르사유조약의 발효일인 1920년 1월 10일에 국제적인 평화유지기구로서 국제연맹이 설립되어 상호 의존성과 통합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포츠계에서도 1차 대전 후에 국제적인 연결이 강화되어 국제 대항 경기가 적극적으로 개최되고 있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1차 대전 전까지는 대부분 대영제국에 속한 국가들과의 럭비 경기였지만 1차 대전 후에는 유럽 인근 국가와 육상경기 및 축구경기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를 둘러싼 국제적인 연결은 각국 팀 간의 상호 교류를 확대해가는 한편, 국가 간의 대항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스포츠가 여론을 집중시켜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어당길 정도의 영향력은 없었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을 둘러싸고 1차 대전 이전과 이후에 가장 다른 점은 스포츠에 국가가 대외적인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대회가 증가함에 따라 1차 대전 후 유럽 각국에서 국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크게 확대되었다.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높여준다는 생각들이 공유되고 확대됨에 따라 스포츠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심과 대항의식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 1월 20일에는, 프랑스 교육성에 체육스포츠과가 설치되었으며 책임자로는 프랑스 스포츠연맹(USFSA: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 Sports Athlétiques)의 의장이었던 가스통 비달(Gaston Vidal)이 선정되었다.

가스통 비달(Gaston Vidal)

 

가스통 비달은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추락한 프랑스의 위신을 스포츠를 통해 다시 세계에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비달은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직전에 “스포츠는 국가의 사업이 되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1920년에는 프랑스 외무부가 해외사업부에 관광 및 스포츠부를 설치했는데 해외사업부는 말 그대로 국외를 향한 프랑스의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부서로 주된 업무는 IOC에 대한 프랑스 영향력 강화, 외국과의 경기 확대 및 국가대표를 영화로 홍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프랑스 정부는 스포츠를 국가의 이미지를 홍보하는데 유용한 선전도구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할 것으로 기대되어 정부가 관여하게 된 것에 따라 국제경기는 정치성을 수반하게 되었고 1차 대전 이후의 복잡한 국제 정치상황은 스포츠계에도 명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트워프 올림픽에도 1차 대전 당시의 동맹국들은 참가할 수 없었는데 그 외에도 베르사유조약의 조인과 같은 시기인 1919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연합군 경기대회(영어: Inter-Allied Games, 프랑스어: Les Jeux interalliés)도 그 명칭 그대로 참가 팀은 1차 대전의 연합국에 한정되었다.

2편에 계속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붕괴사고 Top 6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붕괴사고 Top 6

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이 개발에 참여한 라오스의 수력발전댐 붕괴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사망과 실종자의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최대규모의 전차경기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안토니우스 피누스”황제 재임 시에 붕괴되어 1만 3천여 명이 희생된 기록을 가지고 있고,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은 로마 교외의 피데나이(Fidenae)에 있던 목재로 건축된 원형극장이 붕괴되어 2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만 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이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1800년대에 일어난 사고로는 1807년 9월 20일(음력 8월 19일)에 발생한 일본의 영대교(永代橋) 붕괴사고를 꼽을 수 있는데 토미오카하치만구(富岡八幡宮)의 신사에 몰려든 참배객들로 인해 노후화된 교량이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1,400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후 교량은 1926년에 현재의 철교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1889년 5월 31일에는 미국의 펜실베니아주를 강타한 폭풍우로 사우스포크댐의 강물이 범람하면서 댐이 무너져 2,20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1900년대에 이후에는 인류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인명사고를 발생시킨 사고가 일어납니다.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붕괴사고에는 부끄럽지만 대한민국의 이름도 들어있는데 지금부터 가장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은 최악의 붕괴사고 Top6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6위: 1959년 프랑스 말파셋 댐(Malpasset Dam) 붕괴사고

195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54년 4월에 완공된 이 댐은 1959년 12월 며칠간 계속된 집중호우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42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는데 사고의 원인으로는 하류의 단층으로 인해 댐건설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 건설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어 부실한 지질조사가 불러온 인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5위: 1995년 한국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설계의 부실, 시공의 부실 등 모든 부실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이 사고는 6·25전쟁 이후 발생한 가장 큰 인재로 기록되고 있으며 사망 502명 부상 937명이라는 피해를 낳았습니다.

 

▶ 4위: 1928년 미국의 세인트 프랜시스 댐(St. Francis Dam) 붕괴사고

토지개발붐이 한창이던 1924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된 이 댐은 물을 채울 때부터 균열이 발견되었고 그 후에도 균열과 누수가 발견되었으며 1928년 3월 12일에 댐을 설계한 윌리엄 멀홀랜드가 정기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균열의 보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 몇 시간 뒤에 붕괴되어 432명이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3위: 2013년 방글라데시의 다카 근교 건물 붕괴사고

아직도 이 사고는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데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 근교에 있는 8층으로 된 상업용 건물인 “라나 플라자”가 붕괴되어 1,12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서 다국적 패션기업들에 의해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실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2위: 1963년 이탈리아의 바이온트 댐(Vajont Dam or Vaiont Dam) 붕괴사고

1960년에 준공된 이 댐은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부흥의 상징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댐이었는데 1963년의 이상기후로 인한 폭우 때문에 댐 주변의 지반이 침하되면서 10월 9일 밤 10시 39분에 댐 좌측의 산이 무너지는 산사태로 2억6천만㎡의 토사가 댐에 빠른 속도로(시속 109km)로 흘러들어 거대한 해일이 발생하였고 이 해일이 마을을 덮치면서 2,125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습니다.

 

▶ 1위: 1975년 중국의 반차오 댐(Banqiao Dam) 붕괴사고

1949년과 1950년에 연속해서 발생한 회하(淮河)의 홍수로 인한 하천공사의 일환으로 1952년에 완공된 이 댐은 1975년 태풍 “니나(Nina)”로 인해 붕괴되었는데, 당시 반차오 댐을 비롯하여 58개의 중소형 댐들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홍수가 민가를 덮치는 바람에 익사자를 포함하여 전염병과 기아로 인한 2차 사망자의 숫자를 모두 합해 17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는데 당시 피해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2005년에서야 중국정부가 일부 정보를 공개하면서 알려졌지만 공개한 정보도 축소되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2000년대 초반 업무상 방문한 북경지역의 고층건물 건설현장을 둘러보면서 정말 위험하다는 것이 육안으로 느껴질 정도의 부실한 현장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최소한 부실로 인하여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는 일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인항공기

1,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인항공기

군용 무인항공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터인데, 오늘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무인기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 미국의 케터링 버그(Kettering Bug)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자율비행을 할 수 있는 무인기의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의 하나가 바로 이 기종입니다.

개발자 찰스 케터링(Charles F. Kettering)의 이름을 딴 이 기종은 64km 밖에 있는 표적을 자동비행으로 명중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공식적인 명칭인 “케터링 공중어뢰(Kettering Aerial Torpedo)”에서 보듯이 순항미사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체에는 약 82kg의 폭발물을 탑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위의 사진을 보면 레일을 따라 움직이다가 이륙하도록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케터링 버그(Kettering Bug)는 목표물의 상공에 도달하면 날개가 떨어져나가고 기체는 목표물에 충돌해서 폭파시키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길이 4.6미터, 폭 3.8미터로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엔진의 출력은 40마력, 기체중량은 240kg으로 최대속력은 시속 193km, 항속거리는 100km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미 육군은 1916년부터 시제품을 생산하고 테스트를 시작하여 1918년 10월에는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1개월 후에 전쟁이 끝남으로써 실행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정밀조준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투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실효성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Great Lakes TG-1)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무인공격기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무인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했던 미국은 자동으로 비행하는 방식을 버리고 다른 비행기에 탑승한 조종사가 원격으로 무인기를 조종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선회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입니다.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걸쳐 미 해군에서 사용하던 뇌격기(Torpedo Bomber)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퇴역하여 훈련기로 사용되고 있던 커티스 T4M의 엔진을 강화시켜 만든 기종으로 원격조종장치를 탑재하고 있으며 아래의 사진과 같이 날개의 아래쪽에는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은 시험비행에는 성공하였지만 실용화되지는 못했습니다.

 

▶ 미 해군의 Naval Aircraft Factory TDN1

함상에서 이륙을 준비 중인 TDN1의 조종석에 사람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미 해군공창에서 제작을 한 이 무인기는 길이 11미터, 폭 15미터에 220마력의 엔진 2개를 탑재하고 있는데 2,000파운드의 폭탄과 어뢰를 장착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미 해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F4F와일드 캣”보다도 크게 제작되었습니다.

F4F와일드 캣

전장으로의 수송은 유인으로 하고 실전에서는 원격조종 수신기를 탑재하고 투입시키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당시에 개발된 레이더 고도계와 텔레비전을 이용함으로써 악천후나 야간에도 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나 가격이 너무 높고 정확한 폭격을 하기가 어려움에 따라 Interstate TDR기종이 대안으로 개발되게 됩니다.

 

▶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TDR(Interstate TDR)

미 해군의 요청에 따라 인터스테이트사에서 만든 이 기종의 사양은 TDN1 기종과 크기는 같지만 날개가 기체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게는 2.7톤으로 최대 2,000파운드의 폭탄 1발과 어뢰 1개를 탑재하고 최대시속 225km, 항속거리는 685km에 달하였습니다.

Interstate TDR은 남태평양 지역에 투입되어 9월 27일 첫 번째 작전에서 일본선박을 성공적으로 폭격하는 성과를 올리게 되지만 계속되는 기술적인 문제와 이미 솔로몬군도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으로서는 무인기 없이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189대만 생산되고 중단되게 됩니다.

 

▶ 미국의 노스롭 JB10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발한 무인기 “케터링 버그(Kettering Bug)”를 제2차 대전 중에 미 육군이 실용화한 것으로 인터스테이트 TDR이 프로펠러 방식인 것에 비해 노스롭 JB10은 제트엔진을 사용합니다.

2차 대전에서는 1차 대전 당시에 개발되었던 자율비행 방식의 무인기보다는 원격조종 방식의 무인기를 개발하려던 미국이었으나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다시 자율비행 방식의 무인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스롭이 제안한 무익기 형태의 JB1을 선택하고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만든 엔진 2개를 탑재하고 시험비행을 하였으나 엔진의 추력이 낮아 안정적인 비행을 하지는 못하고 맙니다.

그 이후 독일로부터 노획한 V1을 참고로 포드사가 만든 펄스제트(PULSE JET)엔진 PJ31을 탑재한 JB10을 만들게 되는데 길이는 3.7미터, 폭은 8.9미터로 1.7톤가량의 폭탄을 장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엔진과 조종장치의 문제로 인해 비행거리가 최장 40km에 불과해서 실전에 투입하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를 시도하는 도중에 2차대전이 종결됨으로써 그 성능을 입증하지는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 독일의 미스텔(Mistel)

전투기 포케울프 Fw190이 위에 있지만 모선의 기능을 하고 폭격기 융커스 Ju88이 아래에서 무인항공기의 역할을 하며 기수 부분에 1.7톤가량의 폭약을 탑재하는 형태로 제작되어 있는 복합기입니다.

포케울프 Fw190

융커스 Ju88

겨우살이를 뜻하는 독일어 미스텔(Mistel)은 영어로는 미슬토(Mistletoe)라고 하는데 주로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덩굴식물을 말하며 독일의 복합기 미스텔은 엄밀하게는 아래에 있는 융커스 Ju88을 일컫는 말입니다.

목표물의 근처에서 분리된 융커스 Ju88은 모선인 포케울프 Fw190에서 원격으로 조종하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무인기처럼 목표물을 스스로 인식하고 진로를 변경할 수 있는 정도는 되지 못했고 1942년부터 시작된 개발과정에서 목표물의 10km 전방에서 분리하여 40m 범위의 오차에서 폭파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4년 6월부터 투입되기 시작한 실전에서는 표적의 1.6km 전방에서 분리하도록 하였으며 종전(終戰)까지 200대 정도가 생산되었으나 복합기로 결합한 상태에서는 기동성이 크게 떨어지고 목표물에 접근하기도 전에 연합군 전투기에 격추되는 일이 많아서 전력에 큰 도움은 될 수가 없었습니다.

플라이-바이-와이어(FBW, fly-by-wire) 방식이 사용된 독일의 미스텔(Mistel)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것은 1944년 6월 24일 프랑스 북부 해안이었는데 총 5기가 출격하여 연합군 함대를 공격하였으나 그 중 1대만이 영국의 구축함에 크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고 하며 1945년 동베를린에 접근하는 소련군을 저지하기 위한 교량의 폭파에도 성공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다리를 완전히 폭파시킨 것은 아니고 단지 소련군의 진격을 1~2일 지연시키는 정도의 손상만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전세를 바꿀 정도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와 사보이아-마르케티 S.55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와 사보이아-마르케티 S.55

지브리 스튜디오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든 1992년작 붉은 돼지(紅の豚)의 포스터를 보면 제목 밑에 이탈리아어로 포르코 롯소(Porco Rosso)라고 적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탈리아어 포르코(Porco)는 돼지, 롯소(Rosso)는 붉은색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굳이 이탈리아어로 된 제목을 사용한 것은 애니메이션의 배경이 바로 이탈리아이기 때문이다.

주인공 마르코 파곳(Captain Marco Pagot)이 이태리 공군 출신이기도 하지만 그가 모는 비행정 ‘사보이아 S.21’이 이태리에서 개발한 비행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도 한데, 오늘은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紅の豚)에서 주인공이 조종하는 비행정의 모델이 된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사보이아 S.21(가상의 비행정)

 

애니메이션 붉은 돼지(紅の豚)에는 실제로 존재했던 3종류의 비행정이 등장하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이 사용하던 한자-브란덴부르크(Hansa-Brandenburg)CC와 이탈리아 해군이 1차대전에서 운용하였던 마키 M.5(Macchi M.5)와 1차대전이 끝나고 진화한 오늘의 주인공인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가 그것이다.

한자-브란덴부르크(Hansa-Brandenburg)CC

 

마키 M.5(Macchi M.5)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

 

이소타 프라스키니(Isotta Fraschini)의 500마력 엔진 2개를 얹은 사보이아-마르케티 S.55(Savoia-Marchetti S.55)는 1923년 8월에 첫 비행을 성공하였으며 1927년 2월에는 지금의 세네갈 수도인 다카르(Dakar)에서 이륙하여 남대서양을 건너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루와 뉴욕을 경유하여 4만8천㎞의 비행을 마치고 4개월 만에 이탈리아로 귀환하는 기록을 수립하였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나중에 공군장관의 자리에 올랐던 이탈로 발보(Italo Balbo)의 선전비행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가 이끄는 편대의 선전비행에 힘입어 브라질과 스페인, 루마니아의 각 군은 물론 소련의 아에로플로트 항공에도 판매를 할 수 있었다.

미국의 시카고에는 발보 거리(E Balbo Dr)라는 이름의 도로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로 발보(Italo Balbo) 때문에 붙여진 도로명이다.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무솔리니의 집권과정에서 무솔리니를 지지한 4명의 당 간부를 지칭하는 콰드룸비로(Quadrumviro)의 한 명으로 흔히 사대장(四大將)으로 부르는데 이탈로 발보(Italo Balbo)를 비롯하여 비켈레 비앙키(Michele Bianchi), 에밀리오 데 보노(Emilio De Bono), 체자레 마리아 데 베키(Cesare Maria De Vecchi)가 그들이다.

왼쪽이 이탈로 발보(Italo Balbo)

 

4명 중에서도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후계자이자 파시스트당의 핵심 인물이었는데 그런 그가 1933년 6월 1일 사보이아-마르케티 S.55를 개량한 24대의 비행정으로 구성된 편대를 이끌고 직접 대서양 횡단에 나섰던 것이다.

24대의 비행정은 대서양 횡단을 위해 개량된 것으로 엔진은 880마력의 이소타 프라스키니 앗쏘 750V(Isotta Fraschini Asso 750V)를 탑재하여 최대속도는 252㎞/h, 항속거리는 4,500㎞로 향상시켰으며 이름도 S.55X라고 붙였는데 이탈로 발보(Italo Balbo)가 조종하였던 비행정의 날개 하단에는 민간코드인 ‘I-BALB’를 그려 넣었다.

 

로마 근교의 항구도시 오르베텔로(Orbetello)에서 이륙한 편대는 북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를 지나 48시간 후에 캐나다에 도착하여 2,400㎞의 대서양 무착륙 비행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출발하여 시카고 상공에서 V자 편대비행으로 시카고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시카고 시내의 7번가는 발보 거리(E Balbo Dr)로 이름 붙여졌던 것이다.

 

이어서 뉴욕 브로드웨이 상공에서 비행을 마친 이탈로 발보(Italo Balbo)는 이후 서로가 적국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미국의 루즈벨크 대통령으로부터 수훈 비행 십자장(Distinguished Flying Cross)을 수여 받았다.

또한 이탈로 발보(Italo Balbo)와 그의 편대비행을 기념하기 위한 기념비가 1934년 제2회 시카고 박람회의 이탈리아 전시관 앞에 설치되었으며 그 뒤 번햄 공원(Burnham Park)으로 이전 설치되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당의 공군사령관이자 식민지 리비아의 총독으로 잔인한 인종차별주의자였던 그의 기념물과 그의 이름을 딴 도로명을 계속해서 사용하는 것은 미국인들의 반대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수많은 항의시위가 이어지고 반대여론이 비등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용되는 도로명과 우뚝 솟은 기념물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19세기 흑인 여성운동가의 아이콘이라는 아이다 벨 웰스(Ida Bell Wells)의 이름으로 바꾸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아이다 벨 웰스(Ida Bell Wells)는 20대 후반에 시카고로 이주하여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카고에서 활동한 인권운동가였는데 그녀의 이름으로 도로명을 개명하는 것은 남의 나라 일이긴 하지만 나도 찬성하는 바이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양귀비를 가슴에  이유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양귀비를 가슴에 이유는?

미국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매년 5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에 열리는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가슴에 양귀비가 장식된 유니폼을 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종전 기념일(Rememberance Day)인 매년 11월 11일에는 선수들이 가슴에 양귀비가 장식된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다.

이처럼 전쟁에 참전하여 숨져간 영령들을 기리는 뜻으로 양귀비를 가슴에 다는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래가 되었는데 종전기념일 또는 영령기념일로 불리는 이 날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을 회상하고 전쟁으로 숨져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조지 5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양귀비의 날(Poppy Day)이라고도 부른다.

스포츠 선수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 장식된 양귀비는 특히 ‘현충일 양귀비(Remembrance poppy)’로 불리는데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이 인공적인 양귀비 조화가 공식적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1921년부터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인공 양귀비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상징으로 사용하게 된 유래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1차 세계대전의 격전장이었던 서부전선에 쏟아지던 포격 속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었던 양귀비는 이프르 전투(the battle of Ypres)에 군의관으로 참가했던 캐나다의 육군중령 존 맥크래(John McCrae)에게 시적인 영감을 주었고, 그는 ‘개양귀비 들판에서(원제: In Flanders Fields)’란 시를 1915년 5월에 써서 그 해 12월 8일에 펀치 매거진(Punch magazine)이란 잡지를 통해 출판하게 된다.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In Flanders fields the poppies blow

Between the crosses, row on row,

That mark our place; and in the sky

The larks, still bravely singing, fly

Scarce heard amid the guns below.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랜더즈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We are the dead. Short days ago

We lived, felt dawn, saw sunset glow,

Loved, and were loved, and now we lie

In Flanders fields.

우리의 싸움과 우리의 적을 이어받으라.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이제 그대의 것이니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 저 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비록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 하여도.

Take up our quarrel with the foe:

To you from failing hands we throw

The torch; be yours to hold it high.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We shall not sleep,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

사진은 바그람 공군 기지(출처: 미 공군 중앙 사령부)

 

캐나다에서는 종전기념일 행사에서 묵념이 끝나면 이 시를 낭독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터의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는 개양귀비를 노래한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에 화답하여 1918년 11월 9일 미국 조지아 대학의 교수였던 모이나 마이클(Moina Belle Michael)이 ‘We Shall Keep the Faith’란 제목의 화답시를 발표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는 상징으로 개양귀비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개양귀비 인공조화가 세계적으로 전파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에 왔던 안나 게랭(Anna Guérin)이라고 할 수 있다.

개양귀비를 현충일을 기념하는 꽃으로 사용하자는 공식적인 제안은 모이나 마이클(Moina Belle Michael)이 하였으나 그녀보다 앞서서 개양귀비를 사회적인 활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개양귀비 여인(Poppy Lady of France)’ 또는 ‘프랑스에서 온 개양귀비 여인(Poppy Lady from France)’이라 불렸던 안나 게랭(Anna Guérin)이었다.

역사적으로는 ‘개양귀비의 날(Poppy Day)’이란 명칭의 공식행사는 1916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인공조화는 1916년 전쟁포로들을 위한 기금모금행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규모도 작았고 전 사회적인 공감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안나 게랭(Anna Guérin)이 그녀가 주최하는 각종 자선행사에서 개양귀비의 인공조화를 사용하면서부터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마침내 1920년 9월 27일에 ‘미국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에서 개양귀비를 공식 꽃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The American Legion

 

영국에서 개양귀비의 인공조화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1921년의 일로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하여 얼 헤이그 재단(Earl Haig Fund)이 개최했던 기금모금행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때 사용한 인공조화는 안나 게랭(Anna Guérin)이 생산한 것들을 수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영국재향군인회는 참전 상이용사들로 운영되는 공장에서 자체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붉은 개양귀비는 영연방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현충일을 기념하는 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보라색 양귀비는 전쟁으로 희생당한 동물들을 기리는 것으로 사용되고 흰색 양귀비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상징하며 현충일에 사용되기도 한다.

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대학 Top20

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대학 Top20

미국 교육부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재학생 1,000명 이상의 대학을 조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의 회사(FindTheBest.com)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학생 1,000명당 가장 범죄율이 높은 미국의 20개 대학은 다음과 같다고 하니 혹시라도 유학을 계획 중이시라면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 범죄의 유형에 대한 세부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강력범죄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하여도 알 수 없으니 단순참고용로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20위: 퍼모나칼리지(Pomona College)

위치 : Claremont,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18.6명

 

▶ 19위: 리빙스턴칼리지(Livingstone College)

위치 : Salisbury,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2건

1,000명당 사고율: 18.7명

 

▶ 18위: 프레즈비테리언칼리지(Presbyterian College)

위치: Clinton, Sou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7건

1,000명당 사고율: 18.8명

 

▶ 17위: 사우스대학교 스와니 캠퍼스(Sewanee-The University of the South)

위치: Sewanee, Tennessee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7건

1,000명당 사고율: 21.8명

 

▶ 16위: 히람칼리지(Hiram College)

위치: Hiram,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9건

1,000명당 사고율: 22.1명

 

▶ 15위: 클레어몬트 매케나 칼리지(Claremont McKenna College)

위치: Claremont,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1건

1,000명당 사고율: 23.3명

 

▶ 14위: 오레곤 건강과학대학교(Oregon Health & Science University)

위치: Portland, Oregon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67건

1,000명당 사고율: 23.6명

 

▶ 13위: 프랭클린칼리지(Franklin College)

위치: Franklin, India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5건

1,000명당 사고율: 24.7명

 

▶ 12위: 옥시덴탈칼리지(Occidental College)

위치: Los Angeles,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54건

1,000명당 사고율: 25.4명

 

▶ 11위: 윌밍턴칼리지(Wilmington College)

위치: Wilmington,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25.6명

 

▶ 10위: 리드칼리지(Reed College)

위치: Portland, Oregon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0건

1,000명당 사고율: 28.3명

 

▶ 9위: 세인트 오거스틴대학교(Saint Augustine’s University)

위치: Raleigh,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25.6명(이 부분은 자료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8위: 스와스모어칼리지(Swarthmore College)

위치: Swarthmore,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8건

1,000명당 사고율: 31.3명

 

▶ 7위: 쇼 대학교(Shaw University)

위치: Raleigh,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71건

1,000명당 사고율: 34.4명

 

▶ 6위: 펜실베니아 주립 체이니대학교(Cheyney University of Pennsylvania)

위치: Cheyney,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5건

1,000명당 사고율: 37.1명

 

▶ 5위: 갈루뎃대학교(Gallaudet University)

위치: Washington, D.C.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59건

1,000명당 사고율: 37.8명

 

▶ 4위: The Art Institute of Pittsburgh

위치: Pittsburgh,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61건

1,000명당 사고율: 39.5명

 

▶ 3위: 센트럴 주립대학교(Central State University)

위치: Wilberforce,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87건

1,000명당 사고율: 42.1명

 

▶ 2위: Inter American University of Puerto Rico-Barranquitas

위치: Barranquitas, Puerto Ric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119건

1,000명당 사고율: 57.4명

 

▶ 1위: 베네딕트칼리지(Benedict College)

위치: Columbia, Sou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152건

1,000명당 사고율: 60.5명

 

미국의 F35를 복제한 중국의 스텔스기 선양 J-31

미국의 F35를 복제한 중국의 스텔스기 선양 J-31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국이 현재 개발 중에 있는 스텔스기 “선양 J-31”은 “FC-31″이라고도 불리는데 모양과 제원이 미국의 F35와 아주 흡사하며 F-35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F-35

 

J-31

 

F-35

 

J-31

 

지금처럼 중국의 스텔스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자체의 기술개발이 아니라 미국의 기술을 도용한 것이 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1999년에 있었던 F-117A 나이트호크(Night Hawk) 격추사건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손에 넣은 것이 중국이 최초로 스텔스기술을 습득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F-117A 나이트호크(Night Hawk)

 

1991년 걸프전쟁에서 단 1기의 피해도 없이 작전을 수행하여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F-117은 1999년 코소보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쏜 지대공미사일 S-125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구 소련에서 개발한 지대공미사일 “S-125 네바”의 NATO 코드네임은 “SA-3 고어”입니다. 따라서 F117이 S-125에 의해서 격추된 것이라는 것과 SA-3에 의해서 격추된 것이란 말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S-125

 

F-117은 최초로 개발된 스텔스기로 주로 고주파 레이더에 대한 스텔스 기능을 발휘하도록 제작된 것이었는데 세르비아군이 직전에 도입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던 체코제의 최신 “타마라 레이더(정식 명칭은 Tamara passive sensor)”는 저주파 레이더를 쏘는 것이어서 불행하게도 F-117은 탐지가 되었고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F-117을 탐지하고 격추시킨 데에는 레이더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세르비아군 미사일포대 대대장이었던 졸탄 다니(Zoltán Dani)의 치밀한 임전태세와 휘하 장병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졸탄 다니(Zoltán Dani)가 미사일포대를 운용했던 방식과 훈련 등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아무튼 그는 200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토군의 통신을 감청하여 F117의 예정항로를 사전에 알 수 있었고, 폭탄창이 열리는 순간 레이더로 감지하고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시킬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편 격추된 F117기의 조종사였던 데일 젤코(Dale Zelko)는 기체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8시간 뒤에 미공군 탐색대에 구조되어 귀환하였는데 그 이후 전역하여 빵집을 운영하는 졸탄 다니(Zoltán Dani)는 사건이 있고 나서 10년 뒤에 데일 젤코(Dale Zelko)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검정색 상의가 데일 젤코(Dale Zelko)

 

얘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중국의 스텔스기 개발에 관한 주제로 돌아오면, 중국은 F-117의 격추소식을 접하고 즉시 현지로 달려가 농부들이 수거한 기체의 잔해를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이는데 이것이 중국이 최초로 개발한 스텔스기 J-20의 바탕이 된 것으로 세계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09년 월스트리트지에서 “F35의 기술자료가 중국의 해커에 의해서 도난되었다.”는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개된 J-31의 제원을 보면 F35의 제원과 아주 유사하며 생김새는 거의 흡사해 보입니다.

2012년 10월 31일 시험비행을 마친 J-31은 2012년 주하이 에어쇼에서 1/4로 축소한 모형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2014년에 주하이의 에어쇼(China International Aviation & Aerospace Exhibition)에서 비로소 첫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F-35의 기술자료를 빼내 만든 선양 J-31은 F-35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 중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사용하는 엔진인데 F-35가 1개의 엔진인데 비해 J-31은 2개의 엔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개의 엔진을 쓰는 F-35복제품”이라고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선양 J-31”이 사용하는 엔진은 러시아의 크리모프(JSC Klimov)에서 만든 2개의 RD-93인데 각각 84kN의 추력을 내며, F-35가 사용하는 “프랫 앤 휘트니 F135” 엔진은 177kN의 추력을 내는 것에서 보듯이 중국의 엔진제조기술은 아직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모자라다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F-35

 

J-31

 

또 하나는 사용하는 레이더와 적외선 탐지 및 추적장치를 비롯하여 데이터 링크와 같은 전자공학 분야의 소프트웨어가 F-35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F-22랩터의 허용오차가 1만분의 1이었던 것에 비해 F-35는 그보다 더 엄격한 공차를 적용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선양 J-31”이 그런 정도로 제작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F-35의 복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선양 J-31”과 F-35의 제원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 분
F35
J31
길이
15.4m
17.3 m
10.67m
11.0m
자체중량
13,200kg
12,500kg
최대이륙중량
31,800kg
28,000kg
항속거리
2,300km
2,400km
최고속도
마하 1.8
마하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