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블록버스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블록버스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영화 캡틴 마블(Captain Marvel)에서 주인공 캡틴 마블(Captain Marvel)과 닉퓨리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는 1990년대 당시 대형 비디오대여 체인점이었던 ‘Blockbuster’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도 아파트의 상가나 동네에 반드시 하나씩은 있었던 비디오대여점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운데 이런 사정은 영화의 배경인 미국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나오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는 사업이 가장 활황이던 2004년에는 미국에만 4,500개의 매장이 있었고 전 세계에서 9,094개의 체인점을 운영하였지만 VOD(Video On Demand)와의 경쟁에서 휘청이다가 마침내 넷플릭스의 출현과 함께 사망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영화 캡틴 마블(Captain Marvel)에 나오는 블록버스터 매장의 씬은 지금은 70세와 60세를 각각 넘긴 ‘아놀드 슈왈제네거’ 선상님과 ‘제이미 리 커티스’ 여사께서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에 찍었던 영화, ‘트루 라이즈(True Lies)’의 비디오가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2019년을 맞으면서 그 많던 블록버스터의 매장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주와 미국에 각각 한 개씩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호주에 있던 매장마저 2019년 3월에 문을 닫음으로써 미국 오리건 주에 있는 매장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벤드의 매장: 출처 CNN

미군이 야전에서 볼일을 보는 5가지 방법

미군이 야전에서 볼일을 보는 5가지 방법

군생활을 하면서 야전에서의 훈련 도중에 볼일을 봐야 하는 경우 부대의 단위가 작은 경우에는 마땅한 준비를 하지 않고 그냥 자연친화적(?)인 방법으로 각자가 알아서 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군들은 아래의 사진과 같은 방법으로 일을 보기도 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런 생리적인 현상을 처리하는 일에도 미군들은 법으로 정한 규정에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이 합동훈련을 하면서 지켜본 바로는 그다지 잘 실천하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말입니다^^

야전이라고 하더라도 미군은 남자 25명당 1개의 화장실 또는 1개의 소변기와 여군 17명당 1개의 화장실을 설치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나 규모가 작은 단위부대의 경우에는 이런 시설을 할 수가 없어서 기준을 따로 마련해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방법이나 주에서 정하는 법률로 화학적인 처리방법의 화장실 이외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간이화장실을 반드시 화학적인 처리를 하는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설물은 매일 청소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위생처리시스템으로 처리할 수 있도록 배출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시설을 설치할 수 없을 경우에 각개병사들은 어떻게 볼일을 보도록 규정하고 있을까요? 아래에 열거하는 방법들에 대하여는 각각의 크기에 대한 기준과 땅을 파는 경우에는 얼마의 깊이로 파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세부적으로 기준을 정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대표적인 것 5가지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태워서 처리한다. Burnout latrine

영화 플래툰에도 배설물을 태우는 작업 장면이 나오는데 드럼통을 반으로 잘라 반드시 양쪽에 손잡이를 만들어야 하고 매일 기름을 사용하여 소각해야 하는데 만일 냄새가 남아 있다면 다시 소각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남자들만을 위한 Piss pipes

이것은 규정이 조금 느슨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파이프의 직경을 2.5cm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실제로는 그보다 크게 설치하지만 규정은 비현실적이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튼 파이프의 길이는 1미터 이상으로 하고 각 구덩이의 모서리에 설치를 해야 하며 중앙에 설치를 해도 됩니다. 그리고 매설되는 깊이는 최소 20cm 이상으로 하고 지상으로 나와 있는 부분은 바깥쪽으로 기울여서 설치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야생의 본능 그대로 Cat holes

야생의 고양이가 배변을 할 때 땅을 파는 것처럼 일을 보는 방식인데 길이, 폭, 깊이 모두 12인치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신속하게 덮고 은폐하여 처리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 자기 것은 자기가 챙긴다. WAG Bags

이 방법은 봉투를 벌려서 고정할 수 있는 물건이 없을 경우에는 땅을 파서 사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사진과 같이 난감한 자세로 처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 나는 고양이가 아니다. Straddle trenches

이 방법도 땅을 파는 것은 Cat holes와 같지만 그 크기가 훨씬 큰 것으로 깊이 75cm, 길이 120cm, 폭은 30cm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땅을 팔 수 없는 암석지대와 같은 곳에서는 흙을 쌓아서 만드는 Mound Latrine를 사용하도록 정하고 있습니다.

▶ 문이 있는 화장실을 달라. Porta-Johns

가장 이상적인 야전화장실의 형태입니다. Porta는 문을 뜻하고 Johns가 화장실을 뜻하는데 16세기 후반에 수세식화장실을 처음으로 고안한 사람이 존 해링턴이어서 영어에서 “John”은 화장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존 해링턴이 수세식화장실을 고안했을 때 붙인 이름은 화장실을 뜻하는 속어인 “Jakes”를 붙여 “에이잭스(Ajax)”였는데 그의 발명동기를 설명한 책 “화장실의 탈바꿈(The Metamorphosis of Ajax)”이 래스터 백작을 Ajax에 비유하였다고 소송을 당하면서 “에이잭스(Ajax)”란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상으로 미군이 사용하는 대표적인 야전화장실 몇 가지를 알아보았는데 우리 한국군도 이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머지않아 겨울이 오고 또다시 병사들은 혹한기훈련에 나설 텐데, 생리문제라도 편히 해결할 수 있도록 군에서는 조금 신경을 써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

독일이 통일되기 전인 1983년 봄, 세계는 서독의 주간지 슈테른(Der Stern)의 발표로 들썩이게 되는데 1932년부터 히틀러가 사망 직전까지 썼다는 일기를 입수하였다는 것이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이유였다.

930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미화 610만 달러)를 들여 ‘히틀러의 일기(Hitler Diaries)’를 입수한 슈테른지의 기자 게르트 하이데만(Gerd Heidemann)은 전 세계의 보도진 앞에서 모두 62권으로 이루어진 히틀러의 일기를 공개하기 전 영국의 유명한 사학자이자 나치독일의 전문가인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에 의뢰하여 진위여부에 대한 검증을 마쳤다.

그리고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기자회견이 열리기 이틀 전인 1983년 4월 23일, 히틀러의 일기는 진품임에 틀림없다는 글을 쓰게 된다.

 

1947년에 발간한 책 ‘히틀러의 마지막 날(The Last Days of Hitler)’로 명성을 얻고 있던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정작 기자회견 당일에는 자신의 검증이 미흡하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급기야 1983년 5월 6일에는 히틀러의 일기가 가짜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독일 연방기관의 조사로 히틀러의 일기가 가짜라는 판명을 받게 되면서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일기를 판매했다고 알려진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는 체포되기에 이른다.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

 

또한 930만 마르크를 일시불로 지불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나누어 대금을 지불하면서 일기를 사들였던 슈테른지의 게르트 하이데만(Gerd Heidemann)기자는 대금의 전달과정에서 일부를 횡령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2002년에는 그가 동독의 비밀경찰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됨으로써 또 다른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1985년 사기죄로 4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던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는 수감 중 후두암 판정을 받고 3년 만에 출소한 뒤, 역설적이게도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개설하여 공식적으로 위조품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위조하여 용돈을 벌었던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는 1957년에 드레스덴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1958년부터는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미술품 복원전문가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

 

그런 그가 만들었던 가짜 히틀러의 일기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에 있는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이다.

위조품 박물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는 1951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박물관을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예술품을 포함하여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을 전시하고 있으나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은 개인박물관이면서 독일어권에서는 유일한 위조품박물관으로 위조된 예술품만을 전시하고 있다.

2005년에 다이안 그로브(Diane Grobe)란 여성이 만든 이 박물관에는 예술품 위조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의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보다도 더 뛰어난 위조전문가였던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은 게슈타포를 창설한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실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암염갱(岩鹽坑)에서 나치독일이 약탈하여 숨겨놓은 예술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전문가들도 처음 보는 바로크시대의 화가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하네스의 작품들이 어떻게 나치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이 판매한 것임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 독일에 협력한 죄로 그는 재판에 회부되게 된다.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은 그것이 모두 자신이 위조한 가짜라는 사실을 실토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직접 그려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수사당국에 의해 3개월 동안 가택에 구금당한 상태로 직접 그림을 그려 증명해야 했고, 법원의 의뢰로 국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가짜라는 판명을 받음으로써 반역죄가 아닌 위조와 사기죄로 1년형을 선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32년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작품들을 위조하기 시작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은 1936년에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6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받고 ‘엠마우스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이란 위조품을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에 판매하였고 1938년에 1400년대~1800년대의 네덜란드 화가들의 명작 450점과 함께 일반에 전시되었다.

엠마우스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

 

참고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는 알지 못해도 그가 그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아래의 작품은 본 적이 아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이 자랑하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화가로 소개되고 있는 ‘토마스 패트릭 키팅(Thomas Patrick Keating)’의 것들도 있다.

100명 이상의 화가들의 작품 2천 여 점을 위조했다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키팅은 미술품시장의 비리를 교란할 목적으로 전문가들을 속이기 위해 위조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진위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자신이 그린 위조품에는 시한폭탄(time bombs)이라 이름붙인 힌트를 숨겨두었던 ‘토마스 패트릭 키팅(Thomas Patrick Keating)’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많은 위조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의 설립목적은 저작권에 대한 이해와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는 지식을 널리 알리는 것에 있다고 한다.

현재는 8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은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바퀴 대신 무한궤도를 장착했던 폭격기

바퀴 대신 무한궤도를 장착했던 폭격기

여러 개의 강판(鋼板)조각을 벨트처럼 연결하여 바퀴로 사용하는 캐터필러(caterpillar)는 무한궤도라고도 하는데 군용장비 중에서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전차와 장갑차 등이 있다.

그런데 군용기들 중에는 바퀴 대신 무한궤도를 장착한 것들이 있었고 지금도 알래스카의 설원에서 이착륙에 사용하기 위한 캐터필러(caterpillar)가 개발 중에 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무한궤도를 장착했던 군용기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자.

군용기의 착륙장치(landing gear)를 캐터필러(caterpillar)로 대체하려는 시도는 1930년대부터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부터였다.

2차 대전에서 미국은 4발 엔진의 대형 폭격기를 많이 운용하였는데 증가하는 기체의 중량 때문에 보다 길고 잘 정비된 활주로가 필요했으며 적의 폭격으로 손상된 활주로에서도 이착륙하기 위해서는 비포장을 달릴 수 있는 착륙장치의 필요성이 높아졌다.

이리하여 크리스티 서스펜션을 발명한 존 월터 크리스티(J. Walter Christie)는 1939년 11월 미국 공군의 아버지로 불리는 헨리 아놀드(Henry H. Arnold)에 의해 더글러스 A-20 해벅(Douglas A-20B Havoc)에 무한궤도를 장착할 수 있는 설계를 의뢰받는다.

 

이 연구에는 미국의 굳이어(Goodyear Tire)나 파이어스톤(Firestone Tire)과 같은 타이어업체들을 비롯하여 영국의 다우티(Dowty Group)도 참가하여 1942년 2월에 설계를 마치고 6월에 시제품을 선보였지만 기존의 바퀴식에 비해 무게가 2배 가까이나 증가하여 활주로의 길이가 15% 이상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이후 비포장도로 뿐만 아니라 설원과 얼음 위에서도 이착륙할 수 있는 연구가 계속되었으나 A-20 해벅을 이용한 무한궤도 착륙장치의 시험은 1947년 8월에 끝나고 만다.

 

한편 이와는 별도로 파이어스톤(Firestone Tire)은 1943년 6월, 커티스 P-40 워호크(Curtiss P-40 Warhawk)를 모래사장에서도 이착륙할 수 있도록 하는 착륙장치의 개발계약을 맺고 1944년 2월에 테스트를 진행했으나 추운 날씨 때문에 벨트 사이에 얼음이 끼는 등의 문제로 추가시험을 하기로 하고 보관하던 중 손상되어 종료되고 만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A-20 해벅을 이용한 개발을 계속했던 것과는 별도로 페어차일드와 보잉에도 캐터필러 방식의 착륙장치 개발을 의뢰하였는데 1945년 페어차일드의 항공부문을 담당하던 부서는 페어차일드 C-82 패킷(Fairchild C-82 Packet)을 사용하여 무거운 수송기에도 사용할 수 있는 캐터필러 방식의 착륙장치에 대한 연구에 착수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4월부터 착륙장치를 교체한 C-82 패킷(C-82 Packet) 10대가 납품되었지만 시험과정에서 고장이 속출하고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 정식 채용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중단되고 만다.

 

끝으로 보잉의 경우에는 애초에 B-50에 장착하기 위한 예비단계로 B-29에 캐터필러 방식의 착륙장치를 장착한 시험을 할 수 있도록 신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굳이어에 날개 부분을, 파이어스톤에 기수부분의 장치를 하청주고 개발에 나서게 된다.

그러나 굳이어는 높은 하중을 견딜 수 있는 벨트 제작에 실패하여 시속 70마일 이상에서는 쓸 수도 없었고, 파이어스톤에 맡겼던 것도 시험비행에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게다가 C-82와는 달리 B-50에 장착했던 캐터필러는 안으로 접어넣을 수 없는 고정된 방식이어서 기체하부에 있는 기관총의 사격을 방해하는 치명적인 단점도 가지고 있어서 1950년 1월 계약만료와 함께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끝나게 된다.

 

그러나 캐터필러에 꽂혀서였는지는 몰라도 미공군은 대형 폭격기인 콘베어 B-36 피스메이커(Convair B-36 Peacemaker)의 착륙장치도 대체하기 위한 시험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1950년 3월 26일, 처음으로 시험비행에 나서지만 이것이 마지막 비행이 되고 캐터필러 방식의 착륙장치는 개발자체가 중단되고 말았다.

시험비행 중인 XB-36

 

개발이 중단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형폭격기의 항속거리가 증가하면서 전선(戰線)에서 이착륙하지 않아도 된 점과 내구성과 정비 및 비용의 측면에서 바퀴가 훨씬 경제적이었던 것이 캐터필러 방식의 착륙장치 개발이 중단된 원인이 아닐까 생각한다.

미국의 학교에서 금지하는 의외의 것들

미국의 학교에서 금지하는 의외의 것들

1. 빨간색 잉크

시험답안지나 과제물의 실수를 표시하는 색깔로 오랫동안 빨간색 잉크를 사용해왔는데 2008년 영국의 켄트 주니어스쿨의 교감 리차드 사몬즈(Richard Sammonds)가 학생들의 의욕을 상실시키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므로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비롯되어 블랙 프라이데이가 유래된 것처럼 학생들에게 부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교육을 한다는 의미로 많은 학교들에서 빨간색의 잉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 어그 부츠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실 내로의 휴대폰 반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2012년 어그부츠 안에 휴대폰을 숨겨 들어오는 학생들이 있다고 해서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포츠타운 중학교(Pottstown Middle School)에서는 어그부츠를 신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당연히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대가 들끓었고 이런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반대여론이 비등하였지만 학교 측은 이를 감행하였는데 현재도 시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을 못하였습니다.

 

3. 백팩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백팩은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리노이와 아이오와 주의 일부 학교에서는 교실의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복도에서의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백팩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백팩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다리를 다쳐 목발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때에 한하고 그런 경우라도 안이 보이는 시스루 형태의 백팩을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4. 피구

플로리다 주를 비롯하여 뉴욕 주, 메인 주, 메사추세츠 주, 뉴햄프셔 주, 텍사스 주 등에서는 피구가 폭력적이며 왕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체력이 약한 학생의 경우에는 공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자신감을 상실할 수 있으며 다른 학생을 해치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되는 규칙은 옳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합니다.

 

5. 술래잡기

캘리포니아 주의 골드 리지 초등학교(Gold Ridge Elementary School)의 교장 데이비드 프랭클 (David Frankel)은 학부모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술래잡기가 너무 강한 신체접촉을 유발하기 때문에 금지한다고 알린 다음 이를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6. 사전

음란서적을 교내에 반입하거나 보는 것은 금지하고 있지만 사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학교에서는 구강성교에 관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사전(Webster’s 10th Collegiate Edition)의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이 사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후드티를 학교 내에서는 입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곳들도 있고 버몬트 주에 있는 학교(Orchard School)에서는 많은 시간을 밖에서 뛰어놀고 가족들과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유치원생부터 5학년까지는 숙제를 내주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팜데일 전투: 뚫려버린 미국의 방공망

팜데일 전투: 뚫려버린 미국의 방공망

1956년 8월 16일 한 대의 항공기가 로스앤젤레스의 시가지를 향해 날아가고 있었고 2대의 F-89 전투기가 이를 격추시키기 위해 뒤를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요격은 실패로 끝났고, 연료가 부족했던 항공기는 로스앤젤레스로부터 60㎞ 떨어진 사막에 추락하여 이틀 동안 120만 평(400ha)의 면적을 불태우는 화재를 일으키게 된 사건을 일컬어 미국에서는 팜데일 전투(Battle of Palmdale)라고 부르고 있다.

1956년은 한국전쟁이 끝나고 냉전이 극에 달하고 있던 시기로 미국은 소련의 전략폭격기가 북극해를 넘어 공격해오는 것에 대비하여 1954년부터 알래스카를 비롯한 각지에 F-89 스콜피온(F-89 Scorpion)을 배치해두고 있었는데 로스앤젤레스를 향해 날아가던 비행기의 격추를 명받은 것도 바로 2기의 F-89D였다.

핵폭탄을 탑재한 전략폭격기를 공중에서 막지 못한다면 그 피해는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기에 미공군은 1945년 8월, P-61 블랙위도우(P-61 Black Widow)를 대체하기 위한 예비사양을 발표하였으며 벨(Bell Aircraft)을 비롯하여 콘솔리데이트 에어크래프트(Consolidated Aircraft), 커티스 라이트(Curtiss-Wright), 더글러스 에어크래프트(Douglas Aircraft Company), 굳이어(Goodyear), 노스럽(Northrop) 등이 참가신청을 하였다.

P-61 블랙위도우(P-61 Black Widow)

 

그리고 최종후보였던 커티스 라이트(Curtiss-Wright)의 XA-43과 노스럽(Northrop)의 N-24 중에서 최종적으로 노스럽의 N-24가 결정되면서 이름도 XP-89라고 지정되었으며 1948년 8월 16일 에드워드 공군기지에서 첫 비행을 마친 다음에는 F-89라는 제식부호를 받고 시험기를 뜻하는 X를 앞에 붙여 XF-89로 부르게 된다.

한편 XP-87(XF-87 Blackhawk)을 제안하여 경쟁에서 탈락했던 커티스 라이트는 항공부문을 노스아메리칸(North American Aviation)에 매각하고 항공사업을 접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된다.

XF-87 블랙호크

 

이렇게 채택되었던 F-89의 초기형인 F-89A, F-89B, F-89C는 모두 20㎜ 기관포 6문을 탑재하고 있었으나 대형 전략폭격기를 요격하기에는 부족했다.

F-89A

 

F-89B

 

F-89C

 

그래서 F-89D는 공대공 로켓으로 주무장하게 되는데 이전까지의 A, B, C형의 날개 끝에 있던 연료탱크를 더 크게 만들어 로켓 포드를 겸할 수 있도록 하여 하나의 로켓 포드에 마이티 마우스(Mighty Mouse)로 불리는 Mk 4 FFAR( Folding-Fin Aerial Rocket)를 52발씩 탑재하여 모두 104발의 공대공 로켓으로 무장하도록 제작되었다.

F-89D

 

그리고 1956년부터 적외선유도 미사일인 AIM-4 팔콘과 AIM-9 사이드와인더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F-89D도 팔콘 미사일을 운용할 수 있는 유형이 제작되었으며 F-89H에 이르러서는 Mk 4 FFAR( Folding-Fin Aerial Rocket)를 각 날개에 52발씩 탑재하던 것을 21발로 줄이면서 3발의 팔콘 미사일을 탑재하도록 개량된다.

F-89H

 

아무튼 F-89 스콜피온(F-89 Scorpion) 중에서 가장 많은 682대가 제작되었던 F-89D가 배치되어 있던 옥스나드(Oxnard) 공군기지는 1956년 8월 16일 전투기의 긴급발진 요청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그리고 1956년 8월 16일 11시 34분 포인트무구 해군비행장(Point Mugu Naval Air Station)을 이륙한 F6F 헬캣(F6F Hellcat) 무인조종기는 육안으로 관찰이 용이하도록 기체를 빨간색으로 칠하고 미사일 시험을 위해 비행구역으로 향한다.

F6F 헬캣(F6F Hellcat) 무인조종기

 

그러나 어떤 결함이었는지는 모르지만 F6F 헬캣은 항로를 이탈하고 로스앤젤레스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고는 계속 고도를 높였고 만일 이것이 도심에 추락하게 된다면 큰 희생이 있을 것이란 판단에 따라, 이를 격추시키기 위해 전투기가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포인트 무구에서는 급하게 공군에 전투기의 출격을 요청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해군의 요청을 받은 옥스나드(Oxnard) 공군기지에서는 2대의 F-89D를 출격시켰는데 그것은 2대에 탑재되어 있던 208발의 로켓이면 충분히 F6F 헬캣(F6F Hellcat) 드론을 격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러나 모두 4차례에 걸쳐 208발의 로켓을 전부 발사하였음에도 격추에 실패하였고, 게다가 이륙 후 애프터 버너를 사용했기 때문에 연료가 부족해진 F-89D는 기지로 귀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F-89D가 탑재하고 있던 마이티 마우스(Mighty Mouse) 로켓은 파괴력은 뛰어났지만 정확도는 크게 떨어짐으로써 임무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연료가 떨어진 F6F 헬캣(F6F Hellcat)도 팜데일(Palmdale) 근교의 사막에 추락하여 다행히 인명피해는 없었으나 이틀 동안 500명의 소방관이 동원되어 화재를 진압해야만 했다.

마이티 마우스(Mighty Mouse)로 불리는 Mk 4 FFAR( Folding-Fin Aerial Rocket) 로켓은 발사된 직후에만 작동하도록 되어 있는 탄두를 탑재하고 있었고, 목표물을 놓치고 속도가 떨어지면 해제되도록 만들어져 있었으나 대부분 작동불량으로, 발사된 208발 중에서 15발만이 폭발하지 않은 채 발견되었고, 나머지 193발은 모두 폭발하여 큰 화재를 일으켰던 것이다.

F-89D에서 발사되는 Mk 4 FFAR

 

지금 운용되는 군용 드론은 모두 페일 세이퍼(Fail-safe)가 장착되어 있어서 위와 같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만일 그날 로스앤젤레스를 향했던 비행기가 미사일 시험을 위한 드론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미 공군 최초의 여성 주임원사는 한국계 여군!

미 공군 최초의 여성 주임원사는 한국계 여군!

요즘 언론기사를 보면 좌우 어느 한쪽 진영의 논리에 매몰되거나 사실관계의 확인조차도 하지 않고 기레기들이 작성한 쓰레기들이 넘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레기들의 눈과 귀에는 이런 자랑스러운 내용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을 것이기에 미국 공군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주임원사(CMSgt: Chief master sergeant)의 자리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을 소개한다.

자랑스러운 그녀의 이름은 조안 배스(JoAnne S. Bass)로 지난 8월 14일 미국 공군의 제19대 주임원사에 취임하였는데 아시아계 최초라는 타이틀까지 함께 얻게 되었다..

하와이 밀리라니(Mililani) 출신인 조안 배스(JoAnne S. Bass) 주임원사의 어머니는 한국인인데 요즘 같은 글로벌사회에서 한국계 미군이 진급한 것이 뭐가 자랑스러운 일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취임한 자리의 중요성 때문에도 호들갑을 떨고 싶다.

조안 배스(JoAnne S. Bass)가 취임한 자리는 32만 명에 달하는 미 공군 중에서 오직 1명만이 오를 수 있으며 부사관과 병사들을 대표하여 참모총장에게 조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쉽게 말해서 부사관과 병사들의 대표로 미국 공군참모총장과 마주 앉는 카운트파트(counterpart)가 된다는 것으로 이렇게 자랑스런 기사는 단신(短信)으로라도 실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기레기들아~

사진 출처: 미공군

 

 

 

프로펠러로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

프로펠러로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

1945년 5월 10일, 소설 속에서나 있음직한 방법으로 적기를 격추시킨 일이 일어났는데 주인공은 바로 미해군 조종사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으로 그는 조종하던 F4U 콜쎄어(F4U Corsair)기의 프로펠러로 일본의 비행기를 격추시켰습니다.

만화에나 나올 법한 전과를 올린 로버트 클링맨은 한국에서도 근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1934년 해병대에 입대하여 4년을 복무한 후에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있었던 날 다시 재입대하여 항공정비사 교육을 거친 다음 조종사가 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전투기 조종사가 되어 배치 받은 곳은 1945년 4월 1일 시작되어 81일간이나 이어진 태평양 최대의 전투였던 일본의 오키나와 전투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큰 해전이었던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던 일본의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오키나와 전투에서 대대적으로 등장했는데 7번에 걸쳐 1,500기에 달하는 숫자의 특공기가 작전을 수행하였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원된 함정(총 77척의 연합군 항공모함과 9척의 전함이 동원되었다)을 비롯하여 4월에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하여 점령한 카데나 비행장(Kadena Airfields)과 욘탄 비행장(Yontan Airfield) 등이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어 미군은 함재기를 동원한 정찰활동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

※욘탄 비행장(Yontan Airfields)은 요미탄 비행장이라고도 부르며 1996년 7월에 폐쇄하고 2006년 12월에 일본정부에 반환되었으며 현재도 운용되고 있는 카데나 비행장(Kadena Airfields)은 한국전쟁을 맞아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은 극동지역의 중요한 미군기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레이테 만 전투(Battle of Leyte Gulf)

 

미군의 통계에 의하면 오키나와 전투에 동원된 일본 가미카제 특공기의 70~80%는 사전에 격추시킬 수 있었다고는 하나 20~30%에 달하는 숫자만으로도 연합군 측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는데 1945년 5월 4일에만 12척의 전함이 공격을 받아 침몰하고 899명에 달하는 사망·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도 이런 가미카제 특공기를 정찰하고 격추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몰던 미해병대 전투비행대(VMF-312)의 함재기 F4U 콜쎄어(Corsair) 기종은 일본의 “Kawasaki Ki-45 토류” 기종에 비해서 고도가 낮고 항속거리가 짧아서 격추시킨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F4U 콜쎄어(Corsair)

 

특히 일본은 미국의 B-29의 폭격으로 본토가 공습 당하자 B-29의 고고도에 이르지 못하는 “Kawasaki Ki-45 토류”를 경량화 시키기 위해 기관포와 방탄철판 및 무전기를 제거하고 공중에서 B-29의 기체와 부딪히게 하는 가미카제와 같은 방법으로 격추시키기 위한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라는 공대공특공대를 별도로 조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는 강력한 B-29의 방어화기와 9,000m에 도달하기까지 40분이나 걸리고 고고도에서는 수평을 유지하기조차 힘든 성능차이 때문에 일본이 노리던 효과는 보지 못하였습니다.

Kawasaki Ki-45 토류

 

특히 방탄철판을 떼어낸 “Kawasaki Ki-45 토류”에 비해서 기체의 강도가 월등했던 B-29는 기체충돌 공격을 받고도 무사귀환하는 일도 있었으며 이후에는 P-51(P-51 Mustang)기가 호위를 하게 되면서부터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는 사라지게 되었는데 미국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야간이라 고도를 낮추어 공습했던 5월 24일과 25일 이틀에 걸친 동경공습 경우에는 출격한 B-29기 17대와 26대가 진천제공대(震天制空隊)에 의해서 격추되었다고 합니다.

아무튼 1945년 5월 10일에도 “켄 리우서(Ken Reusser)”를 편대장(레드1: 켄 리우서, 레드2: 로버트 클링맨, 레드3: 짐 콕스, 레드4: 프랭크 래스튼)으로 하여 다른 3명의 조종사와 함께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F4U 콜쎄어(Corsair)를 몰고 정찰임무를 하러 나갔습니다.

일반적인 전투순찰비행의 경우에는 고도를 3,000피트로 유지하지만 코드명 “디나(Dinah)” 별칭 “Nick”으로 불리던 일본의 “Kawasaki Ki-45 토류”를 정찰하기 위해서 고도를 13,000피트로 유지하던 도중에 고도 2,5000피트에서 접근하는 Ki-45를 발견한 편대장의 무전에 따라 속도를 높여 접근하면서 고도를 3만 8천 피트까지 높이는 바람에 짐 콕스와 프랭크 래스튼이 조종하던 레드3, 4는 아래에 처지게 되었고 편대장 케네스 리우서와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 둘만이 Ki-45에 근접하게 됩니다.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

 

편대장 켄 리우서는 고도를 높이기 위해서 비행기에 장착되어 있던 캘리버 50(M2 Heavy Barrel: MG50으로도 부른다)을 발사하여 비행기의 무게를 줄일 것을 명령하고 고도 3만 8천 피트에 이르러서야 2차 대전 당시 프로펠러 비행기들이 적기의 꼬리를 물고 늘어져 기관총을 난사하는 것을 일컫던 도그파이트(dogfight)를 벌이기 위해 “Kawasaki Ki-45 토류”의 50피트 뒤에서 꼬리를 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높은 고도에서의 기동은 간결하고 정확해야만 하고 사소한 문제로도 비행기를 통제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가능한 근접하여 사격을 해야 했지만 정격고도보다 3천 피트나 높은 고도를 유지하는 바람에 불과 몇 번의 사격 이후에 총이 얼어 공격을 하지 못하게 되는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 때 편대장 켄 리우서는 Ki-45의 우측에서 기동을 방해하고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위에서부터 Ki-45의 꼬리를 자신이 조종하던 F4U 콜쎄어(Corsair)의 프로펠러로 부딪혀 손상시키기로 하는데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무모하다시피 한 이 행동을 감행하게 됩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첫 번째 시도에서 Ki-45의 방향타에 경미한 손상을 입히는 과정에서 Ki-45의 후방 기총공격에 의해 오른쪽 날개가 명중되지만 비행에는 문제가 없어서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두 번째로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두 번째 시도에서 Ki-45 후방 기관총이 떨어져나가게 되고 기총수는 비행기에서 튕겨져 나가는 성과를 거두게 됩니다만 추락시킬 수는 없었기에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다시 한 번 공격을 감행하게 됩니다.

세 번째 공격에서 드디어 Ki-45의 꼬리가 떨어져나가면서 추락하는 전과를 올리게 되지만 그가 조종하던 F4U 콜쎄어(Corsair) 또한 프로펠러가 떨어져나감으로써 통제를 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고도 1,000피트에 이르러 가까스로 비행기를 조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미 고도 1만 피트에서 연료는 이미 소진되었지만 편대장 켄 리우서의 유도에 의해 무사히 기지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위의 그림은 미국화가 “Alex Durr”가 그린 것이며 플로리다 주립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한 알렉스는 9년 동안 해병대에서 전투기를 조종한 경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공로로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은 미해군이 수여하는 십자훈장을 받았으며 한국전쟁에도 항공관제사로 참전하였고 1966년에 예편하였습니다. 한편 편대장이었던 켄 리우서(Kenneth L. Reusser)는 한국전쟁에는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하고 베트남전쟁에는 16 해병항공대(Marine Aircraft Group 16)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2차 대전을 포함하여 3개의 전쟁에서 생존한 유일한 조종사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지만 베트남전쟁에서의 구조작전 도중에 타고 있던 UH-1 휴이(UH-1 Huey)가 총격을 받아 화염에 휩싸이면서 입은 화상으로 말미암아 피부의 35%를 이식하는 수술을 받은 끝에 27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68년에 대령으로 예편을 하였으며 2009년 6월 20일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Alex Durr가 그린 그림의 복사본에 서명하는 켄 리우서

 

그런데 죽음을 각오하고 감행하는 무모한 것 같은 이런 공격은 로버트 클링맨(Robert Klingman)이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 아니며 그 역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구상은 1899년에 쥘 베른(Jules Verne)의 “정복자 루버(Robur the Conqueror)”라는 공상과학 소설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의 용감한 조종사들이 수행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어로 “Aerial ramming”이라고 하는 램어택은 1911년 9월 8일에 세계최초로 일어났는데 이 기록을 작성한 사람은 세계최초의 루프비행 기록을 가지고 있기도 한 러시아의 피요트르 네스트로프(Pyotr Nesterov)입니다.

 

그는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로젠탈 남작이 조종하던 알바트로스 B.II기를 공격하여 추락시켰는데 당시 피요트르가 조종하던 비행기는 정찰임무를 위해 비무장이었기 때문에 격추시키기 위해 램어택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의 조종사와 정찰병은 추락하여 사망하였으며 피요트르 또한 다비행기에서 떨어질 때의 부상으로 다음날 사망함으로써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기로 러시아 공군에서는 총알이 없을 때 이 방법을 사용하도록 장려하게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이 벌인 독소전쟁(1941∼45)에서만 약 600차례나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독일군 돌격대에서 따온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독일군 돌격대에서 따온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단어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가 나오면서부터 돌격대라는 뜻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나치 친위대인 SS(Schutzstaffel)를 일컫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용어는 스타워즈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독일군의 돌격대(Stoßtruppen)에서 따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This faceless corps of soldiers was inspired by the similar storm troops from the past.)

원문: From World war to Star wras: stormtroopers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운용한 돌격부대의 이름인 스톰트루퍼(영어: stormtrooper, 독일어: Stoßtruppen)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링크하는 나무위키의 자료를 참조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나무위키의 일부 잘못된 정보와 빠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 나무위키: 돌격대

 

일반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폭풍(storm)이란 용어는 힘(power)과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독일보다 이탈리아가 먼저 사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왕립육군(Royal Italian Army)’ 휘하의 특수부대였던 ‘아르디티(Arditi)’가 ‘스톰(storm)’ 부대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독일군이 운용하였던 돌격대의 초기 모습을 보면 이탈리아의 ‘아르디티(Arditi)’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탄복과 ‘파리나(Farina) 헬멧’을 착용한 ‘아르디티(Arditi)’의 개념은 독일군의 돌격대(Stoßtruppen)와는 조금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독일군의 돌격대가 사용한 명칭의 변천을 보아도 이탈리아에서 따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르디티

 

독일군 돌격대

 

독일 최초의 돌격대는 1915년 3월 2일, 지휘관이었던 ‘칼조우(Calsow)’ 소령의 이름을 따서 창설된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였지만 전술을 가다듬고 체계화 한 것은 1915년 8월에 돌격대의 지휘관으로 새롭게 부임한 ‘윌리 로어(Willy Rohr)’였다.

그래서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 이후 ‘윌리 로어(Willy Rohr)’가 재정비한 부대를 ‘로어 돌격대대(Rohr Assault Battalion)’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윌리 로어(Willy Rohr)

‘윌리 로어(Willy Rohr)’가 돌격대를 재정비 하면서 이룬 가장 큰 변화는 각개병사의 군장을 경량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용하는 화기는 물론이었고 이전까지 신던 무릎까지 올라오던 군화(jack boot)를 ‘오스트리아 산악화(Austrian mountain boots)’로 전면 교체하고 초기에 사용하던 피켈하우베(Pickelhaube) 철모 대신에 ‘슈탈헬름(Stahlhelm)’이라고 하는 헬멧(coal scuttle helmet)을 가장 먼저 사용하도록 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면 독일군은 언제부터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스톰트루퍼(stormtrooper)=독일 돌격대’라고 혼돈할 수 있다.

또한 돌격대를 뜻하는 독일어인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은 나치의 준군사조직이라고들 알고 있거나 혹은 이것을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고들 알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정확한 말도 아니다.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Brownshirts’ 또는 ‘SA’가 있는데 ‘브라운 셔츠(Brownshirts)’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Blackshirts)’이 입었던 검정색의 제복 대신에 갈색의 제복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붙은 것이며 ‘SA’는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을 줄여서 쓰는 명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1919년에 창당된 나치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의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돌격대(Sturmabteilung)’는 ‘스톰트루퍼(stormtrooper)’와는 다르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일의 돌격대를 말하는 ‘스톰트루퍼(stormtrooper)’의 명칭은 어디서부터 비롯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15년 3월 2일에 처음으로 창설된 독일군 돌격부대인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의 이름에는 분명히 ‘돌격대(Sturmabteilung)’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최초로 만들어진 ‘돌격대(Sturmabteilung)’는 본부와 2개의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후 그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이름을 ‘돌격대대(Sturmbataillon)’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고 이 부대에 속한 병사들을 ‘충격보병(슈토스트루페: Stoßtruppe)’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충격보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독일어 ‘슈토스트루페(Stoßtruppe)’를 영어로 번역한 ‘shock troops’ 또는 ‘thrust troops’를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면서 충격보병이라 부르게 된 것이며 독일에서는 또 다른 이름인 ‘스툼만(Sturmmann)’으로도 불렸는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storm man’이 되는데 흔히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타워즈에 의해 널리 알려진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숨어 있다.

킹콩(King Kong)은 누가 죽였을까?

킹콩(King Kong)은 누가 죽였을까?

몬스터 영화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1933년에 만들어진 영화 킹콩(King Kong)의 마지막 씬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에서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의해 킹콩이 떨어져 숨을 거두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킹콩을 죽인 비행사가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지금부터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네스트 B. 쇼드색(Ernest B. Schoedsack)”과 “메리언 C. 쿠퍼(Merian C. Cooper)”가 공동으로 감독을 맡았던 이 영화에서 킹콩을 죽이기 위해 포스터와는 달리 4대의 전투기가 출격을 하는데 이 중의 1대를 감독이었던 메리언 쿠퍼가 직접 조종을 하였고 그가 쏜 총에 의해 킹콩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감독이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비행기를 직접 조종한 것은 아마도 메리언 쿠퍼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메리언 쿠퍼는 1916년 군에 입대하여 판초 비야의 토벌작전에 참가를 한 후 애틀랜타의 항공학교에 진학하여 파일럿이 된 다음.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참전하였는데 특히 1차 대전 이후에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고 있던 폴란드 제7 비행중대에서 지원근무를 하였습니다.

폴란드 제7 비행중대는 1918년에 창설한 폴란드 공군의 모태가 된 부대인데 폴란드 조종사는 몇 명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21명의 미군들이었으며 이 중의 한 명인 메리언 쿠퍼의 역할이 아주 컸기 때문에 폴란드 공군의 100주년 기념을 맞아 전투기에 쿠퍼의 초상화를 그려 넣어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메리언 쿠퍼가 폴란드에서 근무할 당시에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에 벌어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였고 1920년 7월에 소련군에 의해 격추되어 메리언 쿠퍼는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메리언 쿠퍼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라트비아를 거쳐 폴란드로 귀환하였고 이런 그의 용맹성을 치하하여 당시 폴란드군의 원수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는 직접 훈장(The War Order of Virtuti Militari)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메리언쿠퍼: 라트비아 국경에서

 

이처럼 비행경험이 풍부했던 메리언 쿠퍼는 킹콩의 공동 연출자인 어네스트 쇼드색을 태우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장면에 직접 출연하여 그가 만든 주인공 킹콩을 죽이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킹콩 앞의 두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