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장의 사진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의 양쪽에서 감동을 주고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에 국내의 모 정치인의 사진은 연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기만 합니다.

 

전 세계인이 즐기는 평창동계올림픽이 정치인들로 인해 변질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종목 중에서도 피겨스케이팅 종목은 먼 나라의 일로만 여겨지던 것이 김연아란 한 사람으로 인해 저변이 확대되고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국민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연아 선수를 생각하면 언제나 ‘아사다 마오’선수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7년 10월 24일 다케다 츠네카즈 일본 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만나 은퇴한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의 ‘평창 동계 올림픽 갈라 쇼’를 제안하기도 했었지요.

이렇게 ‘김연아’ 하면 떠오르는 ‘아사다 마오’는 안타깝게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세력에 의해 혐한(嫌韓)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서는 한국 때리기가 극심했는데 일본의 인터넷 우익작가(ネトウヨ) 햐쿠다 나오키는 “평창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자” “그런 시시한 올림픽은 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좋고 한국은 심판을 매수할 것이다”라는 등의 망언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은퇴한 아사다 마오는 여전히 일본의 국민적인 스타로서 현재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일본의 아베총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아사다 마오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과연 아베총리는 순수한 동기에서 아사다 마오를 팔로우하였을까 하는 점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아베의 핵심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우익층에는 아사다 마오의 팬들이 많고 그들이 아사다 마오를 혐한의 아이콘으로 악용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후지TV의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익들 사이에서는 ‘아사다 마오 전도 패널 사건’으로 불리고 있는데 후지TV의 이 프로를 보고 혐한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건의 내막을 조금 살펴보면 2008년 3월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아사다 마오를 출연시켜 놓고 아사다 마오가 넘어져 실수하는 장면을 부각시킨 것을 두고 당시 한류와 관련한 방송 프로그램이 제일 많았던 후지TV가 아사다의 우승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적인 방송을 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면서 항의가 쇄도하였고 급기야는 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방속 직후에 후지TV에서 해명한 보도자료를 “아사다 마오의 승리에도(불구하고) 김연아 선수와의 실력차이(가 난다)”는 편향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것과 “실수가 없었으면 김연아 선수가 이겼을 것” “실력은 김연아가 최고”라는 후속기사가 더 큰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며 방송에서 이런 발언을 한 해설자는 더 이상 출연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급기야는 김연아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를 두고는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을 3번이나 성공시킨 것에 비해 그다지 난이도 높은 기술을 구사하지 않은 김연아가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애매한 기준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양산하게 된 것의 이면에는 이런 우익세력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내세웠던 “기술은 아사다, 표현력은 김연아”라는 언론의 논조에 대해서 “김연아는 기술점수 중 GOE(가산점)가 너무 높다” “점프의 질을 보면 높이와 비거리, 속도 등에서 김연아는 다른 선수에 비해 월등히 강하기 때문에 높은 GOE를 받는 것”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도하는 언론과 인사들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한 기사는 국적(國賊)이라는 등의 극언으로 공격을 받았고 이런 현상은 근래에 들어 일본의 아베총리를 비판하는 인사와 언론에 대하여 ‘반일’ ‘귀화한 조선인’ ‘국적’ ‘편향보도’라고 공격하고 있는 현상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은퇴한 아사다 마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후지TV에 대한 데모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세력을 확대한 우익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아베총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아사다를 팔로우 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아사다 마오를 좋아하는 팬들은 분명 한국에도 있을 것이고, 동시대의 라이벌이기는 했어도 김연아와 아사다가 서로에게 더욱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준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을 것이기에 빙판 위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펼치던 두 사람에 대한 추억은 아름답게 남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더 이상 정치인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들은 없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국내 정치인들에게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

탄도미사일(ballistic missile)이란 순항미사일과는 달리 추진체의 연료를 모두 사용하면 중력을 이용하여 활공하다가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인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여기서는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전술 탄도미사일(TBM: Tactical ballistic missile)

전술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300㎞ 미만으로 최전선에서 발사하기 때문에 주로 전술상의 목표가 되는 적의 지휘소, 집결지와 같은 곳을 목표로 운용되는데 국경이 맞닿은 나라들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스라엘이 개발한 “프레데터 호크(Predator Hawk)”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개발한 “프레데터 호크”는 140㎏의 탄두를 가진 미사일을 발사하여 300㎞의 표적을 10미터의 오차범위에서 명중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Short-range ballistic missile)

사거리 1,000㎞ 이하의 미사일로 대표적인 것이 중국이 가지고 있는 동풍15(東風15) 일명 DF-15라고 하는 것으로 최신형인 DF-15C는 사거리 700㎞로, 속도는 마하 6 이상이며 명중률은 5미터 내외로 알려져 있고 벙커버스터를 탑재하여 지하의 목표물을 파괴할 수도 있는데 중국은 한국을 목표로 DF-15 미사일 1개 여단을 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Intermediate-Range Ballistic Missile)

사거리 1,000~2,500㎞인 준중거리탄도유도탄(MRBM)보다는 사정거리가 길고, 사거리 5,500㎞ 이상인 ICBM보다는 사거리가 짧은 것으로 보통 3,000㎞ 미만의 사거리를 가지는 탄도미사일을 말합니다. 주로 핵무기를 보유한 중소국가가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의 로동 1호, 대포동 미사일, 무수단 미사일이 있습니다.

 

▶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3,500㎞에서 6,000㎞ 정도로 1990년대 이전에 미국, 중국, 러시아가 대량 배치하였으나 현재는 개발하지 않고 있는 유형의 것으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개발에 나선 나라가 북한으로 특히 화성 12호의 최초 비거리가 2,200㎞였던 것을 최대사거리를 5,500㎞로 높이는 시험을 계속하는 바람에 이것을 두고 “IRBM이다, ICBM이다”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방어체계가 이지스함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밖에 없는 일본이 이에 대비하여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난번 포스팅에서 얘기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인 것입니다.

 

▶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5,500㎞ 이상인 것으로 규정한 이유는 미국과 러시아를 잇는 최단거리가 바로 5,500㎞이기 때문인데 개발 자체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만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간로켓을 개발하는 기술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액체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적의 미사일 발사에 대항하려면 연료주입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ICBM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개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ICBM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ICBM을 탐지하기 위해 해상기반의 전용레이더인 “X밴드 레이더(Sea-based X-band Radar)”를 운용하고 있는데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한창 고조되던 당시에 태평양으로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미사일 발사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가 유일하며 미사일이 발사된 후의 궤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미사일 발사에서부터 궤도를 추적하고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국의 지원 없이 단순히 요격미사일만 배치하는 것으로는 완벽한 방어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영화 007 골드핑거의 숨은 이야기

영화 007 골드핑거의 숨은 이야기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이 11월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007의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 중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가장 잘 어울렸다고 생각하는 숀 코네리는 번외편인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까지 포함한다면 로저 무어와 함께 가장 많은 7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었다.

제1대 007이라는 것을 떠나서 로저 무어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숀 코네리가 주연을 맡았던 1964년 작 007 골드 핑거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007 시리즈의 3번째 작품인 숀 코네리 주연의 ‘골드핑거’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마도 22편인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도 오마쥬했던 아래의 장면일 것이다.

 

골드핑거

 

퀀텀 오브 솔러스

 

골드핑거에는 실제 첩보원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든 씬이 있는데 숀 코네리가 흰색의 턱시도 위에 잠수복을 착용하고 침투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으로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 특수작전수행대(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s)와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했던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의 경험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런 내용은 영국의 케이스 제프리(Keith Jeffery)란 역사학자가 쓴 ‘MI6’란 책을 통해서 공개가 되었다.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 9월에 해군장교후보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저항조직인 오드딘스트(Ordedienst)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나치와 싸우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지휘부의 판단에 따라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영국정보국과 접촉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영국으로 잠입하여 2명의 대원과 함께 망명해 있던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과 연락하고 여왕의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영국 비밀정보부로부터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라는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이 작전은 네덜란드 공군조종사였던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 수립한 것으로 네덜란드의 저항세력을 해외로 도피시키거나 잠입시키는 것이 주된 임무인 작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란 사람도 영화와 관련이 있는데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이란 글에서 언급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에서 실제로 포로생활을 했던 그는 세 번의 시도 끝에 1944년 3월 24일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에서 제임스 코번이 맡았던 루이스 세드윅(Louis Sedgwick)이란 배역의 모델이 바로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었다고 한다.

 

앞줄 왼쪽이 제임스 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 작전은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처음으로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이때 작전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와 에릭 하젤호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를 비롯한 4명의 대원들이었다.

1941년 11월 23일 밤, 이들 4명은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휴양도시 스헤브닝겐(Scheveningen)에 잠입하여 저항군으로 활동하던 2명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맡고 조그만 배를 타고 해안으로 접근한 다음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잠수복 안에 흰색이 아닌 검정색 턱시도를 착용하고 에릭 하젤호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는 그 위에 브랜디를 부었다.

 

왼쪽: 태즐라, 오른쪽: 로엘프제마

 

그런 다음 해안에 닿은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잠수복을 벗고 술 취한 연기를 하며 나치장교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저항군을 탈출시키기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무전기마저 고장이 나고 탈출작전을 독일군들이 눈치채는 바람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공로를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최고 군사훈장(Military William Order)도 받고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의 보좌관으로도 채용된다.

 

귀국하는 빌헬미나 여왕을 영접하는 태즐라(우측)와 로엘프제마(맞은편)

 

국내 언론을 보면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 작전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100% 틀린 사실로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에게는 마지막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계속 실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하는 반역자가 나오는 바람에 저항군들이 희생되었던 영화와도 같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내용은 영화 ‘007 골든핑거’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은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각본을 썼던 폴 덴(Paul Dehn)이 알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만일 폴 덴(Paul Dehn)이 이런 사실을 알고서 썼다면 영국 정보당국의 비밀 관리체계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고, 그렇지 않고 모르고 썼다면 상상력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쓴 것이었다면 결국 역사학자인 케이스 제프리(Keith Jeffery)가 쓴 ‘MI6’란 책은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한 거짓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세계 최고령 여성 저격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

세계 최고령 여성 저격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여성 저격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309명의 적군을 사살한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파블리첸코에는 미치지 못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의 저격수들 가운데에는 세계 최고령의 여성저격수였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란 사람이 있습니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세계최고의 저격수라고 하면 단연코 하얀 사신(White Death)으로 불리며 소련과 핀란드 간에 치러진 겨울전쟁에서 활약한 시모 해위해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시모 해위해가 겨울전쟁에 참가할 때의 나이가 34세였고, 루드밀라 파블리첸코가 저격수로 참전한 1941년은 그녀의 나이 24세였을 때였으니 두 사람 모두 신체적으로 왕성한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48세의 늦은 나이에 입대하여, 본격적으로 저격수로 활약한 것은 그녀의 나이 51세였을 때이니 한참 늦은 나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제부터 세계에서 최고령 스나이퍼로 기록된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93년 7월 27일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난 니나 페트로바는 조선소 직원, 도서관 사서, 타이피스트 등 많은 직업을 거쳤는데 운동신경이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1927년 딸과 함께 레닌 그라드로 이사한 그녀는 승마, 스키, 수영, 농구, 스피드 스케이팅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의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사격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그라드 군대의 여자 아이스하키 팀 주장을 맡고 있던 그녀는 저격병 양성소에 입교하여 교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고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징집연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48세의 나이로 자원하여 제4사단의 의료대대에서 복무를 하였습니다.

 

그 후 1941년 제28 보병연대의 저격수로 배치되어 저격수들을 양성하는 교관으로 활동하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4년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23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공로로 소련의 훈장(Order of Glory) 3등급과 함께 국방훈장 등 모두 3개의 훈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그런데 1, 2, 3등급으로 나뉘는 소련의 훈장(Order of Glory)을 모두 받은 사람은 22명에 불과한데 그 중 4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였습니다.

좌로부터 1, 2, 3등

 

3등급의 소련훈장을 받은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4년 8월 발트해 연안의 전투에서 1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2등급의 훈장을 받았고 1945년 2월 참가한 벨로루시 전선에서 모두 3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100명의 누적 전과를 달성하게 되어 1등급의 소련훈장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5월 1일 밤 트럭(ZIS-5)을 타고 이동하던 중에 독일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고 다리에서 추락하면서 사망하여 생전에 훈장을 수여받지 못하고 1945년 6월 29일 사후에 영광의 훈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ZIS-5트럭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512명의 저격수를 양성한 교관이었으며 122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전과를 올린 뛰어난 저격수였습니다. 평범한 농부였던 핀란드의 시모 해위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제국의 해군장교였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운동신경은 뛰어났지만 평범한 여성,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5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뛰어난 저격수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5단계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5단계

지금으로부터 10 수 년 전 비트코인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에 나는 제도권으로의 유입은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는데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에 대한 투자와 주식투자의 환상을 좇는 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의미에서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단계를 5가지로 나누어 몇 자 적어본다.

 

첫 번째. Nothing(무지)의 단계

멋모르고 관리종목에 한 방 질러봤다가 대박을 맛보기도 하고, 몰빵으로 하루아침에 깡통이 되기도 합니다. 쥐뿔도 아는 게 없으니 시장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냥 감으로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대박 한 번 맞으면 본인이 세상의 최고인양 기고만장하여 날뛰게 되지요~

“흐미~ 이제 여기 있는 돈은 다 내 것이여….^^

이 좋은 돈벌이를 왜 내가 예전에 모르고 그 동안 코 묻은 돈 벌려고 헛고생만 잔뜩 했던가!!!” 호화 요트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강남에 초고층 빌딩 수십 채 사놓고 몇 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장님으로 변신한 자신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참으로 행복만땅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원대한 꿈이 파도에 부딪히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며칠 안 걸립니다.

미수에 신용까지 몰빵하여 오버했는데 운 좋게도 나스닥이 협조를 하여 담 날 아침장 대박을 수차례 맛보거나 혹은 거래도 안 되는 휴지조각 다 된 관리종목을 마지못해 들고 있다가 한 방에 몇 배 챙기기도 했던 터라… 20~30%짜리 수익은 눈에도 안 들어옵니다. 결국은…?

몇 번 얻어터지면 그래도 “아니야, 내가 좀 실수해서 그런 거야…이제 곧 잘 될 거야~~~~”라고 자신을 애써 위로해 보지만……

 

두 번째. Fear(두려움)의 단계

몇 번 계좌를 깡통으로 만들고 나면 이제야 서서히 시장의 잔혹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응! 내가 실력이 좀 모자라군. 공부 좀 해야겠어!” 서점에 가서 ”주“자나 ”증“자 들어가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긁어와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립니다.

“그래~~~ 바로 이거였군. 이젠 됐어. 난 타고난 감각에다 이젠 이론까지 겸비했으니 천하무적이다.”

 

카드대출 몽땅 받아 다시 한 번 질러봅니다만 웬걸… 또 꽝입니다. “어? 이상하다. 왜 책에 있는 거 하고 시장하고 맞지가 않지? 내가 공부를 좀 덜 했나 보군…” 하면서 다시 챠트 분석과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니 단전호흡도 배우고…

“이젠 완벽해!!!”

친구나 친지들한테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꼬드겨 몇 천만 원 융통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질러보지만……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이 단계에 머무르며 몇 십만 원만 생겨도 다시 도전을 해보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자신은 기본적으로 신용불량 상태에 돌입하고, 아내는 물론 친척 몇 명 신불자 만들고 본인은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증권사나 동호회, 카페 등의 게시판을 주 무대로 기법 운운하기도 하고, 남의 글에는 무조건 딴지를 걸어보기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행위를 안정화시키려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세 번째. Trust(자신감)의 단계

모든 것을 다 잃고 산 속에 들어가 이론과 챠트 분석에 더해 심리학, 병서까지 독파하며 그야말로 마음에 독을 품고 시장의 생리를 깨우쳐가는 단계입니다.

자신만의 매매기법을 만들어 시장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둔하며 무공을 쌓은 후 몇 번의 모의투자를 해보니 그런대로 수익이 제법 나옵니다. “음…이젠 하산해도 되겠군.”

 

어떻게든 실탄을 마련하여 전쟁터로 진군합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시장은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총 쏘는 훈련은 엄청나게 하였음에도 사람을 실제로 죽여보질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준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도 방아쇠를 당겨야 할 시점에 망설이다가 적을 놓쳐버리기 일쑤거나 지뢰가 어디에 매설되어 있는지 잘 알면서도 적의 교란작전에 흔들거리다 잘못 밟아 터지기 일쑤지요. 그나마, 비상탈출 방법을 익혔기에 다행히 목숨은 부지합니다.

지나고 나면 자신의 작전상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터득했지만, 문제는 적을 몰살시키고 고지를 탈환해야 하는데…… 맨날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결국 몇 번은 적을 물리치고 식량 등을 노획해 오기도 하지만, 보잘것 없으며 때로는 자신의 전략상 자만심 때문에 무모하게 적진을 공격하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기도 합니다. 증권 사이트의 ARS 전문가라 하는 이들은 적어도 이 단계까지는 거쳐본 사람들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총을 메고 적들을 죽이기는 역부족이니… 제갈량 행세를 하며 차라리 전략과 전술을 짜서 팔아먹는 것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이들은 아는 것입니다. 마치,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하는 거와 똑같습니다.

 

네 번째. Confidence(확신)의 단계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젠 마음을 비울 줄도 알고 무모한 공격이 자멸의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차피 자신의 능력으로는 대장 넘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 천천히 한 놈씩 죽이며 적진을 파고드는 것이 결국은 더 많은 식량을 약탈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총을 쏘지 않으며 100만원 가지고도 자금관리를 하며 투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략다운 전략으로 위험관리를 할 줄 알며 지혜롭게 날마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시장을 공략할 줄 아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바로 시간과의 싸움을 즐길 줄 아는 소위 말하는 5%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째. Over confidence(교만)의 단계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여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한다”는 말처럼 전쟁에 너무 오랫동안 승리만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는 “자만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응 이젠 나도 전쟁에는 신물이 났으니, 그 동안 닦아온 현란한 전술로 적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와이키키 해변에 휴가나 다녀와야겠다.”

시장은 움직이는 생물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 방아쇠를 당기는 횟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서서히 두려움의 단계로 회귀하게 됩니다.

 

주식시장에서 끝까지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Trust와 Confidence의 단계를 오가는 사람들인데 지금 여러분은 과연 어느 단계에 서 계신가요?

엉클 톰스 캐빈이 출판된 3월 20일, 지금 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 출판된 3월 20일, 지금 우리는…

1852년 3월 20일은 미국의 노예해방론자이자 사실주의 작가였던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출판된 날로 1951년 ‘내셔널 에러(National Era)’란 잡지에 10개월간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1852년에 책으로 출판되어 남북전쟁의 계기가 된 소설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1862년 링컨 대통령과 스토우 부인이 만났을 때 신장 193㎝의 거구였던 링컨 대통령이 자그마한 체구의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에게 “자그마한 당신이 이 큰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You are the little woman who wrote the book that started this great war.)”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 톰 아저씨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원래의 주인이었던 셸비 부부의 아들 조지가 다시 사들이기 위해 찾아오기 직전에 다른 노예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마는데 오늘 문득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생각나는 이유는 버닝썬으로 촉발된 연예인들의 일그러지고 추악한 모습과, 고 장자연씨의 죽음 및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조사에 대한 활동기간 연장 등 현재 우리사회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돈으로 인간을 사고팔던 노예제도와, 부와 권력이면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이들의 비뚤어지고 비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작가정신이란 출판사에서 마도경씨의 번역으로 출판한 책의 본문을 보면 승리는 개뿔, 찌질이란 이름이 어울릴만한 연예인과 건설업자 윤중천의 행각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상등품 깜둥이들만 데려온다고 말합니다.”라고 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예상인의 말과 승리가 카톡으로 나눈 대화내용이 무엇이 다를까?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출판되고 나서 일부 흑인들 사이에서 톰 아저씨를 두고 “백인들에게 아첨하는 인물”이라거나 “백인에게 순종하는 비굴한 흑인”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던 것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거나 “성폭행 피해를 당한 별장에 머물렀다”는 등의 이유로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서 협박까지 받았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을 무시하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게 무혐의 처분을 한 검찰의 모습과 하등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톰 아저씨를 집으로 데리고 온 조지 셸비가 “누구도 집과 친구에게서 떨어져 외로운 농장에서 톰 아저씨처럼 죽어선 안 됩니다.“라고 했던 말처럼 우리사회의 어느 누구도 부와 권력의 크기에 의해 차별 받고 무시당하고 학대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에 두 눈 부릅뜨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다. 진실이 승리할 때까지~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

F-35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발생한 추락사고로 인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스텔스 기능을 가진 “F-35 LightningⅡ”의 무장탑재량은 스텔스 기능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인 “비스트 모드”가 거의 4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F-35는 제공권을 장악하기 이전에는 스텔스 모드로 작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무기를 탑재할 수가 없지만 비스트 모드에서는 4배 이상의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무기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투기는 대부분 날개의 아래쪽에 폭탄을 탑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미사일이나 폭탄을 외부에 탑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하드포인트(Hardpoint)”라고 부르거나 “무장스테이션(Weapon Station)” 또는 줄여서 “스테이션(St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투기의 외부에 무기를 탑재하게 되면 당연히 공기의 저항이 증가하게 되고 따라서 연료소비량도 증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투기에는 “이 정도 이상을 탑재하면 공기의 저항이 이 만큼 발생한다.”고 하는 일명 “드랙 인덱스(Drag index)”를 사전에 계산하여 매뉴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기체의 외부에 무장을 할 때에는 공기의 저항으로 속도가 떨어지고 연비가 나빠지기 때문에 무장을 많이 한 전투기가 원활하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중급유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장스테이션(Weapon Station)

 

그러면 이러한 제약을 가지고 있는 전투기의 무장은 얼마까지 할 수 있는지를 F-15와 F-35를 예로 들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F-15E의 무게에 관한 것을 정리해보면 파운드를 kg으로 환산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는 날 수가 있지만 기본중량에 조종사의 무게를 합친 운용중량은 16,798kg입니다.

다음 F-15E의 표준이륙중량은 30,872kg이고 여기에 추가연료탱크(드롭 탱크) 2개를 연결하면 표준이륙중량은 34,731kg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F-15E의 최대이륙중량인 36,774kg에서 2개의 드롭탱크를 추가한 중량을 뺀 2,043kg이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무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F-15E의 전투기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대이륙중량(36,774kg)에서 운용중량(16,798kg)을 뺀 무게(19.976kg)의 범위 안에서 작전거리와 기타 제반조건을 고려하여 “컨포멀 탱크(Conformal fuel tank)”에도 연료를 채우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4.379kg의 중량을 이용할 것인지 등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 전투기의 컨포멀 연료탱크

 

또한 전투기에 요구되는 사항은 단순히 항속거리와 속도만이 아니라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한다든지 애프터 버너를 ○분간 사용하여 이륙 후 고도 ○○피트의 저공으로 ○○km를 비행한 다음 다시 애프터 버너를 ○분간 사용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10,000피트에서 ○○km를 비행하여 귀환한다는 세부적인 작전내용에 따라서 소모되는 연료의 양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전투기에 얼마나 많은 양의 무기를 탑재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드포인트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의 무게는 설계단계에서 이미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에 100kg가 한계인 하드포인트에 200kg의 폭탄을 장착할 수는 없으니 이런 점도 고려하여야 합니다.

F-35의 무장스테이션은 모두 11개이고 1~3은 왼쪽 날개, 4와 5는 좌현 폭탄창(Bomb bay), 스테이션 6은 동체 아래 중앙, 7과 8은 동체 우현 폭탄창, 마지막으로 스테이션 9~11까지는 오른쪽 날개의 위치에 있으며 장착할 수 있는 각각의 무게가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장스테이션에서도 특히 기체중앙의 양옆에 있는 폭탄창에 탑재하는 무기는 무게뿐만이 아니라 길이의 제약도 받게 됩니다.

아래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F-35에 탑재된 “AIM-120 암람” 공대공미사일인데 이것을 유럽판 암람이라고 하는 “MBDA 미티어”로 교체할 경우에는 날개가 커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미사일의 설계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폭탄창의 우측은 “AGM-154 JSOW” 활공유도폭탄입니다.

 

MBDA 미티어

 

군에서는 최대한으로 무장을 하고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륙하여 비행하다가 중간에서 공중급유를 받아 연료를 보충하는 무장탑재량을 우선시하는 방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기온의 영향을 받기 쉬운 제트엔진의 특성에 따라 온도의 상승에 따른 추력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최대이륙중량의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현대전에서의 공중전은 공중급유기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항공모함에서 이륙할 수 있는 무인공중급유기 “MQ-25A”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비행사들은 왜 권총을 휴대했을까? 에이리언과 싸우려고?

우주비행사들은 왜 권총을 휴대했을까? 에이리언과 싸우려고?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에 갈 때 권총을 휴대했다.

에어리언을 만났을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을까? 무중력의 우주공간에서 무슨 이유로 권총이 필요했을까?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이 권총을 휴대했던 이유는 우주에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구로 귀환할 때 야생동물이나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유리 가가린을 필두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이 휴대했던 권총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이었는데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이 탄 캡슐이 바다로 낙하하는 반면에 러시아는 내륙에 착륙하도록 되어 있었고 구조팀에 의해 구조되기까지는 며칠씩이나 걸릴 수도 있었기에 광활한 내륙의 오지에서 야생동물과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기의 휴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1965년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을 대신할 보다 강력한 총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

1965년 3월 18일에 발사되었던 보스호트 2호(Восход-2)에 탑승했던 파벨 벨리아예프(Pavel Ivanovich Belyayev)와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Arkhipovich Leonov)는 지구로 귀환하는 도중 궤도를 벗어나는 바람에 지구를 한 바퀴 더 돌면서 궤도를 수정했고 이로 인해 착륙위치가 변경되면서 원래의 착륙지점에서 386㎞나 떨어진 우랄산맥의 타이가 오지에 이틀 동안이나 갇히게 되었다.

 

이 때 두 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권총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이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굶주린 곰들이 다가올 때 9㎜의 이 반자동 권총은 위협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구조대에 의해 구조가 되고 나서 “비상착륙을 했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총기가 필요하다.”는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Arkhipovich Leonov)의 주장에 의해서 총신이 3개인 TP-82가 개발되었고 198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2006년까지 사용되다가 2007년에 서바이벌 키트에서 제외가 되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GPS의 정확도가 높아졌고 이 때문에 우주비행사들을 구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10년 이상이나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으나 2019년 9월 유인우주선의 발사장소가 극동으로 이전하면서 다시 총기를 휴대하도록 할 것임을 발표하였는데 현재 러시아 당국에서는 TP-82를 대신할 총기의 시험이 한창이라고 한다.

F-22의 허리케인 피해는 지휘관의 잘못 때문일까?

F-22의 허리케인 피해는 지휘관의 잘못 때문일까?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마이클로 인해 플로리다 서부 파나마시티에 있는 틴들(Tyndall) 공군기지에 있던 F-22 전투기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을 두고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는 허리케인이 오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보고를 요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디플로매트”의 보도에 의하면 17대의 F-22가 파손되었고 한화로 2조2천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하는데 미하원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예보된 허리케인으로부터 F-22를 왜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틴들 공군기지의 사령관은 안이한 대처를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F-22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비행기, 특히 스텔스 전투기와 전폭기는 100% 출동대기상태로 유지될 수는 없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번에 미공군의 연습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건으로 걸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임무준비율(mission-capable rates)을 80%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공군의 자료에 의하면 미공군 항공기의 평균 임무준비율은 2016년도에 72.1%였다가 2017년에는 71.3%로 감소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이번에 피해를 입은 F-22는 가장 낮은 임무준비율을 가진 기종으로서 2014년에는 72.7%이던 임무준비율이 2015년에는 67.4%, 2016년에는 60.18%를 보이다가 2017년에는 절반도 안 되는 49.01%의 준비율을 나타내어 2대 중 1대는 즉시 이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즉, 틴들기지에 있던 55대의 F-22 중에서 27~28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비행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보되었던 허리케인 마이클의 등급은 2등급이었다가 4등급으로 예보가 변경되었는데 틴들기지의 격납고는 4등급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하게 F-22를 비롯한 항공기를 이동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틴들기지로부터 오하이오 주에 있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로 F-22를 이동시켰으나 나머지 즉시 이륙이 어려운 상태의 F-22는 정비인력과 부품수급의 문제로 다른 이동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지휘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이동방법은 차량을 이용하여 기지에서 이동시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이동하는데 사용되는 고속도로의 여건이 장애로 작용하여 이동시키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물론 F-22의 날개를 분리하여 트레일러에 적재하고 운반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인력과 시간상의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차량을 이용한 전투기의 운반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도로의 폭보다 전투기의 폭이 F-22의 경우에는 3배가 넘기 때문에 4차선 도로를 완전히 점유하여 일반 시민들의 대피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에 있다.

아래의 사진은 F-15C를 트레일러에 싣고 운반하는 모습인데 실제 도로를 완전히 점유함으로써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틴들기지에 있던 F-22 17대가 피해를 입은 것은 지휘관의 빠른 판단력과 대처에 의해 그나마 피해를 줄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시 준비태세가 임무준비율을 훨씬 상회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거나 급하게라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 받아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때구나 싶어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충분히 따져본 다음에 비난을 해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이안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화 하여 전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안 플레밍은 생전에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그가 즐겨 읽었던 조류 관련 서적 “서인도제도의 새들(Birds of the West Indies)”의 저자인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James Bon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었습니다.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

 

그러다가 2015년에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란 프로에서 “제임스 본드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방송이 나가고서부터 007의 실제 모델은 영국해군 정보부의 비밀요원이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의 아들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이 제임스 본드의 실존인물이었음을 밝혔다는 내용까지 첨부했었는데 최근에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007의 실제 모델은 스완지(Swansea) 출신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라는 사람으로, 그는 2차 대전 당시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그가 바로 이안 플레밍이 만든 007이란 스파이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주장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의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올해 2018년 10월 초, 언론을 통해서 처음 알려진 새로운 주장을 읽어본 소감으로는 MBC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보다는 더 실제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새롭게 007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평범한 금속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전쟁이 일어나자 SOE요원에 발탁되어 6년 동안의 2차 대전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이안 플레밍이 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이안 플레밍의 지휘를 받으며 근무를 했습니다.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이런 일련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3일 전인 1944년 6월 3일에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서명한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 때문이었습니다.

1911년과 1989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은 1911년에 “법적인 권한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제정하였고, 1989년에 “합법적인 권한이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범죄행위에 해당하며 특히 공무원은 지정한 6개 항목에 해당하는 정보를 무단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법에 따라 그동안 비밀로 분류되어 왔던 내용이 해제가 되면서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그의 조부인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비밀요원으로 활약한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비밀문서를 찾으면서까지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조부가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리 질문을 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근무를 했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던 할아버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찾은 자료에 의하면 1942년 이안 플레밍이 특수한 임무를 위하여 6명의 엘리트 SOE 요원으로 조직한 팀의 일원이 바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였다는 사실은 그가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MBC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가 그의 아들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음을 말했다는 것처럼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역시 그의 손녀인 제니(Jenny)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모델이었음을 밝혔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5년을 더 요원으로 복무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1995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끝까지 비밀을 엄수한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주장보다는 그가 훨씬 더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안 플레밍이 밝혔던 조류학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007 제임스 본드의 이름은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을 지키면서 실제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를 보호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할아버지 얘기가 나와서 몇 자만 덧붙이면, 프로레슬러이자 지금은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가 된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의 할아버지 피터 메이비아(Peter Maivia)도 “007 두 번 산다”에 출연하였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