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고령 여성 저격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

세계 최고령 여성 저격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여성 저격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309명의 적군을 사살한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파블리첸코에는 미치지 못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의 저격수들 가운데에는 세계 최고령의 여성저격수였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란 사람이 있습니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세계최고의 저격수라고 하면 단연코 하얀 사신(White Death)으로 불리며 소련과 핀란드 간에 치러진 겨울전쟁에서 활약한 시모 해위해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시모 해위해가 겨울전쟁에 참가할 때의 나이가 34세였고, 루드밀라 파블리첸코가 저격수로 참전한 1941년은 그녀의 나이 24세였을 때였으니 두 사람 모두 신체적으로 왕성한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48세의 늦은 나이에 입대하여, 본격적으로 저격수로 활약한 것은 그녀의 나이 51세였을 때이니 한참 늦은 나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제부터 세계에서 최고령 스나이퍼로 기록된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93년 7월 27일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난 니나 페트로바는 조선소 직원, 도서관 사서, 타이피스트 등 많은 직업을 거쳤는데 운동신경이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1927년 딸과 함께 레닌 그라드로 이사한 그녀는 승마, 스키, 수영, 농구, 스피드 스케이팅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의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사격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그라드 군대의 여자 아이스하키 팀 주장을 맡고 있던 그녀는 저격병 양성소에 입교하여 교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고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징집연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48세의 나이로 자원하여 제4사단의 의료대대에서 복무를 하였습니다.

 

그 후 1941년 제28 보병연대의 저격수로 배치되어 저격수들을 양성하는 교관으로 활동하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4년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23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공로로 소련의 훈장(Order of Glory) 3등급과 함께 국방훈장 등 모두 3개의 훈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그런데 1, 2, 3등급으로 나뉘는 소련의 훈장(Order of Glory)을 모두 받은 사람은 22명에 불과한데 그 중 4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였습니다.

좌로부터 1, 2, 3등

 

3등급의 소련훈장을 받은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4년 8월 발트해 연안의 전투에서 1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2등급의 훈장을 받았고 1945년 2월 참가한 벨로루시 전선에서 모두 3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100명의 누적 전과를 달성하게 되어 1등급의 소련훈장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5월 1일 밤 트럭(ZIS-5)을 타고 이동하던 중에 독일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고 다리에서 추락하면서 사망하여 생전에 훈장을 수여받지 못하고 1945년 6월 29일 사후에 영광의 훈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ZIS-5트럭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512명의 저격수를 양성한 교관이었으며 122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전과를 올린 뛰어난 저격수였습니다. 평범한 농부였던 핀란드의 시모 해위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제국의 해군장교였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운동신경은 뛰어났지만 평범한 여성,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5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뛰어난 저격수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5단계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5단계

지금으로부터 10 수 년 전 비트코인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에 나는 제도권으로의 유입은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는데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에 대한 투자와 주식투자의 환상을 좇는 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의미에서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단계를 5가지로 나누어 몇 자 적어본다.

 

첫 번째. Nothing(무지)의 단계

멋모르고 관리종목에 한 방 질러봤다가 대박을 맛보기도 하고, 몰빵으로 하루아침에 깡통이 되기도 합니다. 쥐뿔도 아는 게 없으니 시장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냥 감으로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대박 한 번 맞으면 본인이 세상의 최고인양 기고만장하여 날뛰게 되지요~

“흐미~ 이제 여기 있는 돈은 다 내 것이여….^^

이 좋은 돈벌이를 왜 내가 예전에 모르고 그 동안 코 묻은 돈 벌려고 헛고생만 잔뜩 했던가!!!” 호화 요트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강남에 초고층 빌딩 수십 채 사놓고 몇 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장님으로 변신한 자신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참으로 행복만땅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원대한 꿈이 파도에 부딪히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며칠 안 걸립니다.

미수에 신용까지 몰빵하여 오버했는데 운 좋게도 나스닥이 협조를 하여 담 날 아침장 대박을 수차례 맛보거나 혹은 거래도 안 되는 휴지조각 다 된 관리종목을 마지못해 들고 있다가 한 방에 몇 배 챙기기도 했던 터라… 20~30%짜리 수익은 눈에도 안 들어옵니다. 결국은…?

몇 번 얻어터지면 그래도 “아니야, 내가 좀 실수해서 그런 거야…이제 곧 잘 될 거야~~~~”라고 자신을 애써 위로해 보지만……

 

두 번째. Fear(두려움)의 단계

몇 번 계좌를 깡통으로 만들고 나면 이제야 서서히 시장의 잔혹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응! 내가 실력이 좀 모자라군. 공부 좀 해야겠어!” 서점에 가서 ”주“자나 ”증“자 들어가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긁어와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립니다.

“그래~~~ 바로 이거였군. 이젠 됐어. 난 타고난 감각에다 이젠 이론까지 겸비했으니 천하무적이다.”

 

카드대출 몽땅 받아 다시 한 번 질러봅니다만 웬걸… 또 꽝입니다. “어? 이상하다. 왜 책에 있는 거 하고 시장하고 맞지가 않지? 내가 공부를 좀 덜 했나 보군…” 하면서 다시 챠트 분석과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니 단전호흡도 배우고…

“이젠 완벽해!!!”

친구나 친지들한테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꼬드겨 몇 천만 원 융통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질러보지만……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이 단계에 머무르며 몇 십만 원만 생겨도 다시 도전을 해보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자신은 기본적으로 신용불량 상태에 돌입하고, 아내는 물론 친척 몇 명 신불자 만들고 본인은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증권사나 동호회, 카페 등의 게시판을 주 무대로 기법 운운하기도 하고, 남의 글에는 무조건 딴지를 걸어보기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행위를 안정화시키려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세 번째. Trust(자신감)의 단계

모든 것을 다 잃고 산 속에 들어가 이론과 챠트 분석에 더해 심리학, 병서까지 독파하며 그야말로 마음에 독을 품고 시장의 생리를 깨우쳐가는 단계입니다.

자신만의 매매기법을 만들어 시장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둔하며 무공을 쌓은 후 몇 번의 모의투자를 해보니 그런대로 수익이 제법 나옵니다. “음…이젠 하산해도 되겠군.”

 

어떻게든 실탄을 마련하여 전쟁터로 진군합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시장은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총 쏘는 훈련은 엄청나게 하였음에도 사람을 실제로 죽여보질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준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도 방아쇠를 당겨야 할 시점에 망설이다가 적을 놓쳐버리기 일쑤거나 지뢰가 어디에 매설되어 있는지 잘 알면서도 적의 교란작전에 흔들거리다 잘못 밟아 터지기 일쑤지요. 그나마, 비상탈출 방법을 익혔기에 다행히 목숨은 부지합니다.

지나고 나면 자신의 작전상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터득했지만, 문제는 적을 몰살시키고 고지를 탈환해야 하는데…… 맨날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결국 몇 번은 적을 물리치고 식량 등을 노획해 오기도 하지만, 보잘것 없으며 때로는 자신의 전략상 자만심 때문에 무모하게 적진을 공격하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기도 합니다. 증권 사이트의 ARS 전문가라 하는 이들은 적어도 이 단계까지는 거쳐본 사람들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총을 메고 적들을 죽이기는 역부족이니… 제갈량 행세를 하며 차라리 전략과 전술을 짜서 팔아먹는 것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이들은 아는 것입니다. 마치,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하는 거와 똑같습니다.

 

네 번째. Confidence(확신)의 단계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젠 마음을 비울 줄도 알고 무모한 공격이 자멸의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차피 자신의 능력으로는 대장 넘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 천천히 한 놈씩 죽이며 적진을 파고드는 것이 결국은 더 많은 식량을 약탈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총을 쏘지 않으며 100만원 가지고도 자금관리를 하며 투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략다운 전략으로 위험관리를 할 줄 알며 지혜롭게 날마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시장을 공략할 줄 아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바로 시간과의 싸움을 즐길 줄 아는 소위 말하는 5%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째. Over confidence(교만)의 단계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여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한다”는 말처럼 전쟁에 너무 오랫동안 승리만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는 “자만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응 이젠 나도 전쟁에는 신물이 났으니, 그 동안 닦아온 현란한 전술로 적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와이키키 해변에 휴가나 다녀와야겠다.”

시장은 움직이는 생물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 방아쇠를 당기는 횟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서서히 두려움의 단계로 회귀하게 됩니다.

 

주식시장에서 끝까지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Trust와 Confidence의 단계를 오가는 사람들인데 지금 여러분은 과연 어느 단계에 서 계신가요?

엉클 톰스 캐빈이 출판된 3월 20일, 지금 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 출판된 3월 20일, 지금 우리는…

1852년 3월 20일은 미국의 노예해방론자이자 사실주의 작가였던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출판된 날로 1951년 ‘내셔널 에러(National Era)’란 잡지에 10개월간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1852년에 책으로 출판되어 남북전쟁의 계기가 된 소설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1862년 링컨 대통령과 스토우 부인이 만났을 때 신장 193㎝의 거구였던 링컨 대통령이 자그마한 체구의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에게 “자그마한 당신이 이 큰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You are the little woman who wrote the book that started this great war.)”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 톰 아저씨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원래의 주인이었던 셸비 부부의 아들 조지가 다시 사들이기 위해 찾아오기 직전에 다른 노예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마는데 오늘 문득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생각나는 이유는 버닝썬으로 촉발된 연예인들의 일그러지고 추악한 모습과, 고 장자연씨의 죽음 및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조사에 대한 활동기간 연장 등 현재 우리사회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돈으로 인간을 사고팔던 노예제도와, 부와 권력이면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이들의 비뚤어지고 비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작가정신이란 출판사에서 마도경씨의 번역으로 출판한 책의 본문을 보면 승리는 개뿔, 찌질이란 이름이 어울릴만한 연예인과 건설업자 윤중천의 행각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상등품 깜둥이들만 데려온다고 말합니다.”라고 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예상인의 말과 승리가 카톡으로 나눈 대화내용이 무엇이 다를까?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출판되고 나서 일부 흑인들 사이에서 톰 아저씨를 두고 “백인들에게 아첨하는 인물”이라거나 “백인에게 순종하는 비굴한 흑인”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던 것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거나 “성폭행 피해를 당한 별장에 머물렀다”는 등의 이유로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서 협박까지 받았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을 무시하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게 무혐의 처분을 한 검찰의 모습과 하등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톰 아저씨를 집으로 데리고 온 조지 셸비가 “누구도 집과 친구에게서 떨어져 외로운 농장에서 톰 아저씨처럼 죽어선 안 됩니다.“라고 했던 말처럼 우리사회의 어느 누구도 부와 권력의 크기에 의해 차별 받고 무시당하고 학대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에 두 눈 부릅뜨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다. 진실이 승리할 때까지~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

F-35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발생한 추락사고로 인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스텔스 기능을 가진 “F-35 LightningⅡ”의 무장탑재량은 스텔스 기능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인 “비스트 모드”가 거의 4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F-35는 제공권을 장악하기 이전에는 스텔스 모드로 작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무기를 탑재할 수가 없지만 비스트 모드에서는 4배 이상의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무기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투기는 대부분 날개의 아래쪽에 폭탄을 탑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미사일이나 폭탄을 외부에 탑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하드포인트(Hardpoint)”라고 부르거나 “무장스테이션(Weapon Station)” 또는 줄여서 “스테이션(St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투기의 외부에 무기를 탑재하게 되면 당연히 공기의 저항이 증가하게 되고 따라서 연료소비량도 증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투기에는 “이 정도 이상을 탑재하면 공기의 저항이 이 만큼 발생한다.”고 하는 일명 “드랙 인덱스(Drag index)”를 사전에 계산하여 매뉴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기체의 외부에 무장을 할 때에는 공기의 저항으로 속도가 떨어지고 연비가 나빠지기 때문에 무장을 많이 한 전투기가 원활하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중급유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장스테이션(Weapon Station)

 

그러면 이러한 제약을 가지고 있는 전투기의 무장은 얼마까지 할 수 있는지를 F-15와 F-35를 예로 들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F-15E의 무게에 관한 것을 정리해보면 파운드를 kg으로 환산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는 날 수가 있지만 기본중량에 조종사의 무게를 합친 운용중량은 16,798kg입니다.

다음 F-15E의 표준이륙중량은 30,872kg이고 여기에 추가연료탱크(드롭 탱크) 2개를 연결하면 표준이륙중량은 34,731kg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F-15E의 최대이륙중량인 36,774kg에서 2개의 드롭탱크를 추가한 중량을 뺀 2,043kg이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무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F-15E의 전투기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대이륙중량(36,774kg)에서 운용중량(16,798kg)을 뺀 무게(19.976kg)의 범위 안에서 작전거리와 기타 제반조건을 고려하여 “컨포멀 탱크(Conformal fuel tank)”에도 연료를 채우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4.379kg의 중량을 이용할 것인지 등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 전투기의 컨포멀 연료탱크

 

또한 전투기에 요구되는 사항은 단순히 항속거리와 속도만이 아니라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한다든지 애프터 버너를 ○분간 사용하여 이륙 후 고도 ○○피트의 저공으로 ○○km를 비행한 다음 다시 애프터 버너를 ○분간 사용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10,000피트에서 ○○km를 비행하여 귀환한다는 세부적인 작전내용에 따라서 소모되는 연료의 양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전투기에 얼마나 많은 양의 무기를 탑재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드포인트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의 무게는 설계단계에서 이미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에 100kg가 한계인 하드포인트에 200kg의 폭탄을 장착할 수는 없으니 이런 점도 고려하여야 합니다.

F-35의 무장스테이션은 모두 11개이고 1~3은 왼쪽 날개, 4와 5는 좌현 폭탄창(Bomb bay), 스테이션 6은 동체 아래 중앙, 7과 8은 동체 우현 폭탄창, 마지막으로 스테이션 9~11까지는 오른쪽 날개의 위치에 있으며 장착할 수 있는 각각의 무게가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장스테이션에서도 특히 기체중앙의 양옆에 있는 폭탄창에 탑재하는 무기는 무게뿐만이 아니라 길이의 제약도 받게 됩니다.

아래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F-35에 탑재된 “AIM-120 암람” 공대공미사일인데 이것을 유럽판 암람이라고 하는 “MBDA 미티어”로 교체할 경우에는 날개가 커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미사일의 설계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폭탄창의 우측은 “AGM-154 JSOW” 활공유도폭탄입니다.

 

MBDA 미티어

 

군에서는 최대한으로 무장을 하고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륙하여 비행하다가 중간에서 공중급유를 받아 연료를 보충하는 무장탑재량을 우선시하는 방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기온의 영향을 받기 쉬운 제트엔진의 특성에 따라 온도의 상승에 따른 추력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최대이륙중량의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현대전에서의 공중전은 공중급유기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항공모함에서 이륙할 수 있는 무인공중급유기 “MQ-25A”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주비행사들은 왜 권총을 휴대했을까? 에이리언과 싸우려고?

우주비행사들은 왜 권총을 휴대했을까? 에이리언과 싸우려고?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에 갈 때 권총을 휴대했다.

에어리언을 만났을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을까? 무중력의 우주공간에서 무슨 이유로 권총이 필요했을까?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이 권총을 휴대했던 이유는 우주에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구로 귀환할 때 야생동물이나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유리 가가린을 필두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이 휴대했던 권총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이었는데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이 탄 캡슐이 바다로 낙하하는 반면에 러시아는 내륙에 착륙하도록 되어 있었고 구조팀에 의해 구조되기까지는 며칠씩이나 걸릴 수도 있었기에 광활한 내륙의 오지에서 야생동물과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기의 휴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1965년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을 대신할 보다 강력한 총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

1965년 3월 18일에 발사되었던 보스호트 2호(Восход-2)에 탑승했던 파벨 벨리아예프(Pavel Ivanovich Belyayev)와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Arkhipovich Leonov)는 지구로 귀환하는 도중 궤도를 벗어나는 바람에 지구를 한 바퀴 더 돌면서 궤도를 수정했고 이로 인해 착륙위치가 변경되면서 원래의 착륙지점에서 386㎞나 떨어진 우랄산맥의 타이가 오지에 이틀 동안이나 갇히게 되었다.

 

이 때 두 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권총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이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굶주린 곰들이 다가올 때 9㎜의 이 반자동 권총은 위협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구조대에 의해 구조가 되고 나서 “비상착륙을 했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총기가 필요하다.”는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Arkhipovich Leonov)의 주장에 의해서 총신이 3개인 TP-82가 개발되었고 198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2006년까지 사용되다가 2007년에 서바이벌 키트에서 제외가 되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GPS의 정확도가 높아졌고 이 때문에 우주비행사들을 구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10년 이상이나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으나 2019년 9월 유인우주선의 발사장소가 극동으로 이전하면서 다시 총기를 휴대하도록 할 것임을 발표하였는데 현재 러시아 당국에서는 TP-82를 대신할 총기의 시험이 한창이라고 한다.

F-22의 허리케인 피해는 지휘관의 잘못 때문일까?

F-22의 허리케인 피해는 지휘관의 잘못 때문일까?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마이클로 인해 플로리다 서부 파나마시티에 있는 틴들(Tyndall) 공군기지에 있던 F-22 전투기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을 두고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는 허리케인이 오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보고를 요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디플로매트”의 보도에 의하면 17대의 F-22가 파손되었고 한화로 2조2천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하는데 미하원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예보된 허리케인으로부터 F-22를 왜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틴들 공군기지의 사령관은 안이한 대처를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F-22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비행기, 특히 스텔스 전투기와 전폭기는 100% 출동대기상태로 유지될 수는 없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번에 미공군의 연습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건으로 걸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임무준비율(mission-capable rates)을 80%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공군의 자료에 의하면 미공군 항공기의 평균 임무준비율은 2016년도에 72.1%였다가 2017년에는 71.3%로 감소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이번에 피해를 입은 F-22는 가장 낮은 임무준비율을 가진 기종으로서 2014년에는 72.7%이던 임무준비율이 2015년에는 67.4%, 2016년에는 60.18%를 보이다가 2017년에는 절반도 안 되는 49.01%의 준비율을 나타내어 2대 중 1대는 즉시 이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즉, 틴들기지에 있던 55대의 F-22 중에서 27~28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비행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보되었던 허리케인 마이클의 등급은 2등급이었다가 4등급으로 예보가 변경되었는데 틴들기지의 격납고는 4등급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하게 F-22를 비롯한 항공기를 이동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틴들기지로부터 오하이오 주에 있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로 F-22를 이동시켰으나 나머지 즉시 이륙이 어려운 상태의 F-22는 정비인력과 부품수급의 문제로 다른 이동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지휘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이동방법은 차량을 이용하여 기지에서 이동시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이동하는데 사용되는 고속도로의 여건이 장애로 작용하여 이동시키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물론 F-22의 날개를 분리하여 트레일러에 적재하고 운반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인력과 시간상의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차량을 이용한 전투기의 운반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도로의 폭보다 전투기의 폭이 F-22의 경우에는 3배가 넘기 때문에 4차선 도로를 완전히 점유하여 일반 시민들의 대피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에 있다.

아래의 사진은 F-15C를 트레일러에 싣고 운반하는 모습인데 실제 도로를 완전히 점유함으로써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틴들기지에 있던 F-22 17대가 피해를 입은 것은 지휘관의 빠른 판단력과 대처에 의해 그나마 피해를 줄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시 준비태세가 임무준비율을 훨씬 상회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거나 급하게라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 받아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때구나 싶어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충분히 따져본 다음에 비난을 해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이안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화 하여 전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안 플레밍은 생전에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그가 즐겨 읽었던 조류 관련 서적 “서인도제도의 새들(Birds of the West Indies)”의 저자인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James Bon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었습니다.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

 

그러다가 2015년에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란 프로에서 “제임스 본드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방송이 나가고서부터 007의 실제 모델은 영국해군 정보부의 비밀요원이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의 아들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이 제임스 본드의 실존인물이었음을 밝혔다는 내용까지 첨부했었는데 최근에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007의 실제 모델은 스완지(Swansea) 출신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라는 사람으로, 그는 2차 대전 당시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그가 바로 이안 플레밍이 만든 007이란 스파이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주장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의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올해 2018년 10월 초, 언론을 통해서 처음 알려진 새로운 주장을 읽어본 소감으로는 MBC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보다는 더 실제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새롭게 007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평범한 금속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전쟁이 일어나자 SOE요원에 발탁되어 6년 동안의 2차 대전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이안 플레밍이 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이안 플레밍의 지휘를 받으며 근무를 했습니다.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이런 일련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3일 전인 1944년 6월 3일에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서명한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 때문이었습니다.

1911년과 1989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은 1911년에 “법적인 권한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제정하였고, 1989년에 “합법적인 권한이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범죄행위에 해당하며 특히 공무원은 지정한 6개 항목에 해당하는 정보를 무단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법에 따라 그동안 비밀로 분류되어 왔던 내용이 해제가 되면서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그의 조부인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비밀요원으로 활약한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비밀문서를 찾으면서까지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조부가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리 질문을 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근무를 했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던 할아버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찾은 자료에 의하면 1942년 이안 플레밍이 특수한 임무를 위하여 6명의 엘리트 SOE 요원으로 조직한 팀의 일원이 바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였다는 사실은 그가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MBC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가 그의 아들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음을 말했다는 것처럼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역시 그의 손녀인 제니(Jenny)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모델이었음을 밝혔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5년을 더 요원으로 복무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1995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끝까지 비밀을 엄수한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주장보다는 그가 훨씬 더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안 플레밍이 밝혔던 조류학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007 제임스 본드의 이름은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을 지키면서 실제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를 보호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할아버지 얘기가 나와서 몇 자만 덧붙이면, 프로레슬러이자 지금은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가 된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의 할아버지 피터 메이비아(Peter Maivia)도 “007 두 번 산다”에 출연하였다고 합니다.

영화 U-571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의 잠수함 U-505

영화 U-571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의 잠수함 U-505

매튜 맥커너히가 주인공인 타일러 대위 역을 맡아 독일 유보트로 위장한 채 U-571에 접근하여 총격전 끝에 암호해독기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를 눈치챈 독일구축함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고, 가까스로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잠수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U-571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부분이 많습니다.

실제와는 달리 허구인 것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아래의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U-571이란 잠수함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U-505라는 IXC형 잠수함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최초로 암호해독기인 에니그마를 탈취한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IXB형의 U-110으로 미국이 아닌 영국해군에 의해 1941년 5월 9일, 격렬한 전투 끝에 포획되어 견인되던 도중 침몰하였으며, 영화의 전체적인 모델이 된 U-505에서는 독일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잠수함에 들어가서 들고나오기만 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U-505를 포획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사람은 독일군 고트프리트 피셔(Gottfried Fischer) 뿐이었으며, 부상자 3명을 포함한 잠수함 승조원 58명은 전원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세 가지 사실을 차례대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영화 U-571의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최초로 에니그마를 탈취하는데 성공한 것은 1941년 5월 9일, 영국해군의 작전명 프림로즈(Operation Primrose)였습니다.

 

영국해군의 구축함 불독(HMS Bulldog)의 폭뢰 공격을 받은 독일 U-110의 함장 렘프는 잠수함을 버리고 모두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에 따르면 수중에서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았으며 전투과정에서 함장이었던 렘프(Lemp)를 포함하여 모두 15명이 전사하였고, 32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화 U-571에서 묘사하고 있는 탈취과정에서의 전투장면인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1944년 6월 4일, 미 해군 특공대가 U-505에서 암호해독기와 암호문서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영화 U-571의 전체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U-보트의 IXC형인 U-505는 인도양에서 연합군을 타격할 목적으로 히틀러가 일본에 2척을 양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려호제500(呂号第五百)과 려호제501(呂号第五百 잠수함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려호제501은 1944년 2월 15일에 일본 해군에게 양도되었는데, 1달 보름 뒤인 1944년 3월 30일, 미 해군 구축함 프란시스 로빈슨에 의해 격침되었고, 승무원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다시 U-505 얘기로 돌아가면, 1943년 10월 24일, 포르투갈령 아소로스제도에서 영국의 구축함에 발각되어, 폭뢰의 공격을 받자 장시간에 걸쳐 공격을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함장인 페터 체헤(Peter Zschech) 대위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불명예스럽게도 전투 중에 잠수함 함장이 자살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어서 제3대 함장으로 하랄트 랑어(Harald Lange)가 부임하였고, 1944년 6월 4일, 스페인령 리오 데 오로(Río de Oro) 근해, 241km에서 소나에 의해 탐지되어,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 과달카날(USS Guadalcanal)과 5척의 구축함으로 편성된 태스크포스 그룹 22.3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U-505의 함장이었던 하랄트 랑어(Harald Lange)는 모든 승무원에게 퇴함명령을 내리고, 자침(自沈)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미 해군 소위 알버트 데이비드(Albert David)가 인솔하는 8명이 U-505의 내부로 들어가서 자폭장치를 해제하고, 엔진을 정지시켰으며, 함내에서 암호문서 등을 노획하였던 것입니다.

 

영화 U-571에서는 독일군과의 총격전을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독일군은 퇴함(退艦)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해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U-505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코닝 타워에서 발견된 유일한 독일군 전사자인 고트프리트 피셔(Gottfried Fischer)는 승선과정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전투에서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한편, 자폭장치를 해제한 U-505는 미 해군에 의해 견인되어 버뮤다의 포트 로열베이에 입항하였고, U-505의 승무원들은 러스턴 수용소(Camp Ruston)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암호문서를 빼앗긴 것을 독일군이 알아차리고, 암호의 설정을 변경할 것을 우려하여, U-505의 노획과 승무원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포로가 된 U-505의 승무원들을 다른 전쟁포로들과 철저하게 격리시켰으며, 적십자사의 면회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독일 해군은 U-505를 침몰된 것이라 인정하고 승무원의 가족들에게는 작전 도중에 전사하였다는 통보를 하게 되었던 것이었죠.

이런 과정을 거쳐 노획되었던 U-505는 버뮤다 기지에서 USS 니모라는 위장명으로 정박하고 있다가, 포츠머스 해군기지로 옮겨져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연습사격의 목표물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U-505를 포획하는 작전을 지휘했던 갤러리 제독(Admiral Gallery)이 U-505를 포격과 어뢰의 목표물로 사용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시카고의 과학산업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는 일을 추진하였고, 이에 호응하는 시카고 주민들이 이전에 드는 비용 25만 달러를 모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9월, 미국 정부가 U-505를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도 일반에게 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전시에는 일기예보도 함부로 방송해선 안 된다.

전시에는 일기예보도 함부로 방송해선 안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습격이 있고난 다음날인 12월 8일에서야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12월 19일에는 전시정보를 통제하는 기관인 검열국(Office of Censorship)을 만들어 미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통신을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열국 직원들의 배지(badge)

 

12페이지 분량의 실무규범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선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은 당연히 최우선으로 적시되었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적의 스파이가 방송을 통해 암호화된 메시지를 전송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해진 조치인데 이뿐만 아니라 방송에서의 음악요청도 받지 못하도록 규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대서양에서 독일 U-보트의 목격담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신문과 방송에서는 특히 기상이 좋을 때에는 일기예보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가 되었는데 이는 독일과 일본의 잠수함들이 일기예보에 근거하여 바다를 거쳐 오대호를 통해 미국의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일기예보가 통제되는 바람에 1942년 3월에 발생했던 가장 큰 등급(F4~F5)의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153명이 사망하고 1,284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 18개의 허리케인으로부터 미국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1942년 8월 시카고에서 있었던 풋볼경기 도중에 안개가 아주 심하게 끼어 중계방송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방송에서 안개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어서 생방송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서 중계방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실무강령을 따라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기상국(The Weather Bureau Forecast)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기상국 사무실의 모습

 

그 후 1943년에 기존의 엄격했던 규범이 다소 완화되었고 1945년 5월 8일 유럽전승기념일(V-E Day: Victory in Europe Day) 이후에는 최종적으로 12페이지의 규범이 4페이지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된 우리 기상청의 오보는 낚시인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악명이 높아 흔히들 “구라청”이라는 표현으로 부르곤 했는데 우리나라 기상청은 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앞으로는 기상청예보의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라 믿지만 말입니다.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군용기 Top 5

역사상 가장 많이 생산된 군용기 Top 5

전투기와 폭격기를 포함한 군용항공기의 생산이 비약적으로 증가한 시기는 제2차 대전 기간이었고 불과 6년 정도 되는 기간에 전 세계적으로 80만 대에 이르는 군용기가 생산되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가장 많이 생산된 군용기의 Top 5는 모두 당시에 생산된 기종들이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부터 어떤 기종들이 얼마나 많이 생산되었는지 5위부터 1위까지를 알아보도록 하자.

 

■ 5위: 미국의 콘솔리데이티드 B-24 리버레이터

1939년 12월 29일에 첫 비행을 하고 1940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에 돌입한 B-24폭격기는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모두 18,482대가 생산되었으며 당연히 미국에서는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이다.

뿐만 아니라 미 해군에서는 B-24 리버레이터의 꼬리날개를 수직으로 바꾸고 포탑을 수정해서 만든 PB4Y-2 프라이버티어(Privateer)를 793대 생산했으니 이것까지 포함한다면 콘솔리데이티드사의 B-24는 모두 19,275대를 생산하여 역대 5위를 기록하고 있다.

 

PB4Y-2 프라이버티어

 

■ 4위: 독일의 포케불프(Focke-Wulf) Fw190

 

BMW의 14기통 2열 엔진을 장착한 프로토타입의 Fw190 V1이 1939년 6월 1일에 첫 비행을 마친 이후 양산에 들어가 2차 대전이 끝날 때까지 모두 20,051대가 생산되었다.

포케불프 Fw190은 공랭식 엔진을 탑재하고 있으나 D형 기종은 수냉식 엔진으로 교체하였기에 모습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끝나고 프랑스에서는 큰 비용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고성능의 전투기를 갖추기 위해 Fw190를 SNCAC NC.900이란 이름을 붙여 64대를 생산하여 1947년까지 운용하기도 하였다.

 

■ 3위: 영국의 슈퍼마린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마치고 1938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계속해서 생산되어 1948년까지 10년 동안에 모두 2만351기가 생산되었는데 항공모함에서 운용하는 씨파이어(Seafire)도 2,334가 생산되어 이를 모두 합하면 22,685대를 기록하여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슈퍼마린 씨파이어(Supermarine Seafire)

 

■ 2위: 독일의 메서슈미트 Bf 109

 

1935년 5월 28일에 첫 비행을 하였고 1936년부터 양산에 들어가 1945년까지 모두 33,984대가 제작되었으며 종전 후 체코슬로바키아와 스페인에서 독자적으로 개량했던 Avia S-199와 HA-1109/HA-1112 등을 합한다면 34,852대나 된다.

Avia S-199

 

한편 메서슈미트 Bf 109를 설계했던 메서슈미트가 몸담고 있던 바이에른 항공기제조회사(BFW: Bayerische Flugzeugwerke)에서 나와 1938년 독립하면서부터 Me109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바람에 Bf 109와 Me 109라는 이름이 함께 존재하고 있다.

■ 1위: 소련의 일류신 Il-2(Ilyushin Il-2)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군용기 중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며 지금까지도 그 기록을 가지고 있는 구소련의 일류신 Il-2는 1939년 12월 20일에 첫 비행을 마치고 1941년부터 1945년까지 4년 동안에 모두 36,183대가 생산되었으며 엔진에서부터 콕피트까지의 기체가 장갑을 겸하고 있어서 하늘을 나는 전차라는 뜻의 Flying Tank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 논쟁거리

전투기와 폭격기뿐 아니라 다목적기까지 포함한다면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은 단연코 구소련의 폴리카르포프 Po-2(Po-2) 기종이다.

 

복엽기로 성능은 낮았지만 연습기, 정찰기, 연락기로서 다목적으로 활용되었고 때로는 경공격기로도 운용되었던 폴리카르포프 Po-2를 세계에서 제일 많이 생산된 군용기 1위로 선정하지 못하는 이유는 2차 대전이 끝나고 다른 나라에서 라이센스 생산된 것들 중에는 민간기도 포함되어 있으나 그 정확한 수량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