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글렌코 대학살

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글렌코 대학살

허무하게 끝을 맺은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시즌 8까지 방영되는 동안 수많은 화제를 만들었는데 아직도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장면들 가운데에는 시즌3에서 방영되었던 제9화 ‘피의 결혼식’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북부의 왕과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결혼식에서 학살당하는 장면은 왕좌의 게임의 작가인 조지 R.R. 마틴(George R. R Martin)이 밝힌 것과 같이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나오는 두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지 R.R. 마틴(George R. R Martin)에게 영감을 준 두 가지 사건은 첫 번째가 블랙 디너(Black Dinner)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글렌코 대학살(Massacre of Glencoe)이었다.

1440년에 일어난 블랙 디너(Black Dinner)는 블랙 더글라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던 스코틀랜드 클랜 더글라스(Clan Douglas) 가문의 힘이 강력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클랜 더글라스(Clan Douglas) 가문의 권력자들을 제임스 2세가 식사에 초대한 다음 죽인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임스 2세가 초대를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스코틀랜드의 지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크로이턴(William Croichton)이 초대를 한 것이었고, 초대 받아 만찬에 참석했던 16세의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Earl of Douglas)와 10세의 데이빗 더글라스는 재판을 받고 참수형에 처해지는데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형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10세의 동생 데이빗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블랙 디너(Black Dinner) 사건은 아직까지도 실제냐 허구냐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고 있는데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달리 형을 먼저 죽여 만찬의 요리로 내어온 검은 황소의 머리와 함께 윌리엄스의 머리를 테이블에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하고, 형인 윌리엄은 참수형에 처하게 되자 동생을 먼저 참수할 것을 요구하고 나중에 자신이 처형당함으로써 두 형제가 모두 사망하였다는 얘기도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설(說)들이 있지만 클랜 더글라스(Clan Douglas) 가문의 장자였던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Earl of Douglas)가 간계(奸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왕좌의 게임에 영감을 주었던 역사적인 사건은 1692년 2월 13일에 일어났던 하이랜더 지방의 글렌코(Glencoe)학살사건인데 이념논쟁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 작금의 우리 정치판의 모습이 투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하다.

 

1688년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는데 왕위에서 쫓겨난 제임스 2세가 스코틀랜드 계의 스튜어트 왕조였다는 사실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새롭게 즉위한 윌리엄 3세는 이런 불안요소를 없애기 위해 충서서약을 강요하였는데 충성서약을 하지 않으면 토지와 가옥의 몰수 및 파괴는 물론이고 가문의 우두머리는 처형을 당했기에 누구도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천재지변과 같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런 불가피한 이유로 충성서약을 제때 하지 못한 동족을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이 나서서 무자비하게 살상을 했던 사건이 바로 글렌코(Glencoe)학살이다.

1692년 1월 1일까지 모두 충성서약을 마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철의 스코틀랜드 날씨는 맥도날드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알라스데어 맥케인(Alasdair MacIain)에게 늦게서야 전달이 되었고 기한을 넘긴 1월 6일이 되어서야 충성서약을 마칠 수 있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서약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취해 있던 알라스데어 맥케인(Alasdair MacIain)과는 달리 하이랜드 지방에서 서로 앙숙이었던 캠벨 가문은 이를 빌미로 맥도날드 가문을 없앨 흉계를 꾸몄고, 스코틀랜드에 왕의 권위를 보이고자 했던 윌리엄 3세의 속셈과 맞아떨어져 (살상)명령서가 만들어지게 된다.

명령서는 1962년 2월 12일자로 전달되었지만 이런 흉계를 감춘 병력이 글렌코에 도착한 것은 11일 전인 1962년 2월 2일이었으며, 당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에서는 손님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어서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서 왔다는 병사들을 10일 동안이나 환대하는 잔치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2월 12일 학살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캠벨에게 전해진 명령서를 보면 당시 400여 명에 불과했던 주민 모두를 죽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전해지는 명령서의 사본에는 아래의 내용이 담겨있다.

“귀관에게 70세 미만의 반역자들을 모두 처단할 것을 명령함과 아울러 특히 늙은 여우(알라스데어 맥케인)와 그의 아들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의하고 모든 도로를 차단하도록 하라. 나는 새벽 5시에 도착할 예정이며 그에 맞추어 처형을 시작하고 신속히 마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만일 내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나 없이 작전을 실시하라.(後略)”

이렇게 실시된 학살로 인해 38명이 사망하게 되고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40명은 도망치다가 동사(凍死)하거나 방화로 인해 불에 타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숨진 사람 78명은 당시 글렌코의 인구 20%에 해당하는 숫자였으며, 학살을 꾸민 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알라스데어 맥케인(Alasdair MacIain)은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손자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글렌코(Glencoe)학살 이후, 손님들을 환대했던 사람들을 죽인 캠벨가문은 비겁하고 비열한 집단으로 취급받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런 풍습은 이어져 글렌코의 술집들 중에는 행상과 캠벨가문 사람은 사절한다는 푯말을 붙여놓은 곳도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정치가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죽음을 돌아보며

네덜란드의 정치가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죽음을 돌아보며

네덜란드 해군은 요한 드 비트(HNLMS Johan de Witt)라는 16,800톤의 도크형 상륙함(Dock landing ship)을 보유하고 있다.

이 상륙함의 이름은 네덜란드 역사상 위대한 외교가로 평가받는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인데 2020년을 보내면서 가뜩이나 코로나로 인해 불안한 사회분위기에 기름을 끼얹고 있는 한심한 국내 정치판을 보면서 오늘은 네덜란드의 정치인이자 수학자였던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1625년 9월 4일에 태어나 46세의 나이인 1672년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난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생애에 대하여는 포털의 정보를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공교롭게도 그의 죽음에는 “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글렌코 대학살”이란 포스팅에도 등장했던 윌리엄 3세가 관련되어 있다.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윌리엄 3세가 공개한 영국의 찰스 2세로부터 받았다는 편지였는데 그 편지에서 “영국이 네덜란드를 상대로 전쟁에 나섰던 것은 드 비트파의 침략 때문이었다.”다고 찰스 2세가 말하였다고 밝힘으로써 민심을 들끓게 만들었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는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윌리엄 3세가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를 사망케 한 주모자들을 기소하지 않았으며 일부에게는 상을 주기까지 한 것으로 보건대 윌리엄 3세가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 아닐까 싶다.

범죄혐의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기소조차 하지 않는 한국 검찰의 모습과 닮았다는 점과,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여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가 사망한 8월 20일의 2개월 전인 6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도록 하자.

1672년 6월 21일,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는 헤이그에서 반 데르 그라페(Van der Graeff) 형제와 그들의 친구로 구성된 4명의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도르드레흐트(Dordrecht)에 있던 그의 형 코르넬리스(Cornelis de Witt)의 집에도 4명의 괴한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뒤 7월 7일에는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라는 사람이 코르넬리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를 찾아오는데 이것도 냄새가 나지만 증거는 없으며 요한 드 비트와 그의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정타를 제공한다.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형인 코르넬리스가 통치하던 지방에서 이발사와 외과의사를 겸하던 사람이었는데 2년 전인 1675년에 강간미수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을 최소해달라고 코르넬리스를 찾아갔었으나 손님이 있어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여기서 말이 바뀌게 되는 것이 최근 우리 사회를 갈라놓고 있는 표창장과 관련한 재판과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코르넬리스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 나온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갑자기 코르넬리스가 윌리엄 3세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에게 참가할 것을 물어봤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코르넬리스와 빌럼 티힐라는 구속이 되는데 네덜란드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코르넬리스는 암살죄로, 티힐라는 위증죄로 기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티힐라는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교도소인 게방겐푸트(Gevangenpoort)에 수감되어 있던 코르넬리스는 동생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하고 8월 19일에는 잔인한 고문을 받기에 이른다.

한편 8월 20일 아침 9시 30분에 석방된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모여든 군중을 향해 자기가 풀려난 것은 무죄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고, 코넬리스가 풀려나지 못한 것은 유죄가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소리친다.

당시 네덜란드의 민심은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던 터라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형이 윌리엄 3세를 암살하려 했다는 거짓말은 성난 민심에 불을 지르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코넬리스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자 동생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즉시 항소를 제기하고 소송비용을 납부한 다음, 11시경에 법정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문을 열고 나서자 성난 군중들은 “반역자들이 나온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경비원들은 “감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총을 맞으라!”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당시 두 형제의 마음은 어땠을까?

징역 4년의 형을 선고하고 나서 피고에게 소감이 어떤지 물어봤다는 어느 판사와 경비원이 무엇이 다른가?

아무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 형제는 경비원들에게 또 다른 문은 없는지 물었지만 그 곳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출입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대답하는 경비원들로 인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한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형제의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 평의회는 현장에 있던 경비대에게 두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면서 15마일(24㎞) 떨어진 거리에 있던 윌리엄 3세에게는 병력을 추가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러나 윌리엄 3세는 이 요청을 거부하였고 현지에 있던 경비대의 지휘관이었던 클로드 드 틸리(Claude de Tilly) 백작은 병력을 마을에 진입하는 다리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아예 철수시켜버리고 마는데 그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경비대가 철수하자 성난 군중들은 감옥으로 쳐들어가서 드 비트 형제를 무참히도 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윌리엄 3세의 측근인 오데이크(Odijk)와 쥴리스타인(Zuilestein), 그리고 트롬프(Tromp) 3사람의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는 군중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고, 그의 형 코르넬리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는 머스킷 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다음 다시 총알세례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폭도로 변한 군중의 광기는 그칠 줄을 몰랐고 두 사람의 시체를 끌고 나와 헤이그의 랑게비벨르크(Lange Vijverberg)에 있던 공개처형장인 그로네 즈지에(Groene Zoodje)에 거꾸로 매달고 시체를 유린하기 시작하였으며 광기가 극에 달한 군중은 살갗을 벗기고 심장과 장기를 꺼내는가 하면 일부는 시신을 먹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그날의 참혹한 광경은 화가인 얀 드반(Jan de Baen)이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의 시신에 걸린 죄명은 동생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에게는 ‘Land Prince’, 형인 코르넬리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에게는 ‘Water Prince’라고 적혀있었다.

죄명에 적힌 프린스(Prince)는 두 형제의 실제 죄명은 암살음모가 아니라 오라녜 공(Prince of Orange)의 정적(政敵)이란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는 것이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다.

그렇게 유린된 두 형제의 시신은 친구들과 가문의 하인들에 의해 다음날 새벽 1시 무렵이 되어서야 수습될 수 있었고,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몸에 난 상처로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크네우테르디크(Kneuterdijk)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1672년 8월 22일, 신교회(Nieuwe Kerk)의 지하실에 안장되었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677년 2월 25일에는 유명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그 곁에 안장되었다.

 

거짓말로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그 공(?)을 인정받아 윌리엄 3세로부터 매년 400길더의 돈을 지급받고 직업도 얻었으나 그의 파렴치한 행동이 발각되어 몇 년 뒤에 해고되었으며 윌리엄 3세가 사망한 뒤에는 돈줄마저 끊어져 노년기에는 목발을 짚고 구걸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