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산 방어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식량이었다.

일본산 방어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식량이었다.

오래전 “우리는 일본산 방어회를 얼마나 먹었을까?”란 포스팅을 통해 해마다 증가하는 일본으로부터의 방어 수입에 대하여 알아본 바가 있었는데 일본불매운동이 한창이던 2019에도 일본산 방어의 수입은 증가세를 보였으며 작년, 2020년에도 전년 대비 물량은 8.5%, 금액은 9.4%가 증가한 2,247톤의 방어를 248억 원어치나 수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인터넷을 달구었던 한 장의 사진에 대하여 “등이 구부러진 일본산 방어는 안전할까?”란 제목으로 안정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오늘은 우리의 간고등어와 유사한 일본의 염장방어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설날이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들 말하는데 우리의 이런 풍습과 유사한 일본의 풍습으로 토시토리(年取り)란 것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12월 31일, 섣달 그믐날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먹는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가 있는데 이 때 소바 대신에 먹는 물고기를 토시토리자카나(年取り魚)라고 부른다.

토시토리자카나(年取り魚)는 동일본에서는 연어, 서일본에서는 방어가 대표적으로 특히 토야마(富山)의 히미시(氷見市)에서 정치망으로 잡는 방어를 최고로 치는데 예부터 이것을 엣츄부리(越中ブリ)라 불렀으며 최고급 방어의 대명사로 불린다.

옛날 방어의 토야마(富山) 산지가격이 한 마리에 현미 한 말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부리가도(ブリ街道)를 지나 마쓰모토(松本)에 도착하면 4배로 뛰어 현미 4말을 줘야 방어 1마리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 부리가도(ブリ街道)

토야마만(富山湾)에서 잡은 방어(부리: ブリ)를 타카야마(高山)와 노무기고개(野麦峠)를 넘어 마쓰모토(松本)까지 운반하는데 사용된 길을 말한다.

 

이처럼 비싼 토야마만(富山湾)에서 잡은 방어를 염장한 다음 임진왜란 당시 조선(朝鮮)을 침략한 왜군의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진상하였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30여 년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수 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왜구의 침략에 사용된 전투식량이었던 방어가 지금은 수 많은 양식업자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면 너무 심한 비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해마다 증가하는 일본산 방어의 수입은 우리 스스로가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

사진은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의 실제 모습 

 

한국에서는 대탈주란 제목으로 1963년 개봉되었던 영화 “The Great Escape”는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연합군 병사들의 탈출기를 묘사한 것인데 이 영화는 1950년에 발간된 폴 브록힐(Paul Brickhill)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The Great Escape”는 1943년 연합군 포로들이 베를린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현재의 폴란드 Żagań 마을)에 있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모두 76명의 포로들이 탈출하여 3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10명은 다시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돌아오게 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 당하고 마는데 실제로도 50명의 포로들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

 

제게는 특히 주인공인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의 오토바이 씬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도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은 프로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할 만큼의 오토바이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이유는 해병대원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한 장면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속의 스트브 맥퀸 오토바이 탈출 영상

이 영화를 아주 많이 보기는 했지만 볼 때마다 허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웹서핑 도중에 발견한 영국의 신문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익스프레스지의 2017년 9월 1일자 기사를 보면 2차 대전 당시 영화와 흡사한 방법으로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한 독일군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 원문: Uncovered: The tunnel the Nazis used in WW2 to escape PoW camp in South Wales

 

실제로 독일군 포로들의 대탈주극이 감행된 것은 1945년 3월 10일 밤, 사우스 웨일즈(South Wales)의 브리젠드(Bridgend)에 있었던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였다고 합니다.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

 

1938년에 지어진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는 원래는 인근 군수공장에 근무하는 여성들을 위한 기숙사의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군의 캠프로 사용되다가 급증하는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전쟁포로수용소로 바뀌었다고 하며 당시에는 총 30개의 막사(Hut)에 2,000여 명의 독일군 포로들을 수용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9번 막사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9번 막사(Hut 9)

 

이곳에서 탈출을 감행한 독일군 포로들은 영화에서와 같이 칼 등을 이용하여 막사로부터 30피트나 떨어진 철조망 너머로 깊이 4미터에 달하는 땅굴을 팠다고 하며 사용한 땅굴의 갱목(받침대)은 벤치를 훔쳐서 만들거나 침대의 다리를 잘라 사용하였고 환기장치는 통조림을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 “The Great Escape”에서와 같이 땅굴을 파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음을 숨기기 위해 모두가 노래를 불렀다고 하며 탈출하는 과정에서 1명이 부주의로 떨어뜨린 흰색의 가방이 경계병에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70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포로들이 탈출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탈출이 있고부터 4시간이 지나서야 포로들의 탈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뒤늦게야 포로들의 탈출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검문과 수색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모든 포로들을 다시 잡게 되었는데 가장 늦게 잡은 포로가 탈출 후 1주일 만에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잡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는 수많은 포로들이 사살되지만 탈출한 독일군 포로들은 사살되지 않았다고 하며 그 이후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피고들을 수용하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0년에 철거되었고 환경보호론자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1년에 2회만 공개되는 9번 막사(Hut)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정부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터널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2차 대전의 기록에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치욕스런 일이라 생각하여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대탈주 속의 오토바이 이야기

영화 대탈주 속의 오토바이 이야기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비하인드 스토리”란 제목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호주공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슈퍼마린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를 몰다가 튀니지에서 격추되어 수감되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Ⅲ)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폴 브릭힐(paul brickhill)”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여러 장면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장면은 아마도 주인공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국경 부근에서 철조망을 오토바이로 넘으려던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속에서 스티브 맥퀸이 타던 오토바이를 많은 사람들이 “BMW R75”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1961년에 생산된 “TR6 트로피(TR6 Trophy)”를 “BMW R75”로 보이도록 개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TR6 트로피(TR6 Trophy)”를 제조했던 회사(Triumph Engineering Co Ltd)는 1885년에 설립되어 1983년 8월 23일 도산하였고, 지금은 “존 블로어(John Stuart Bloor)”라는 사업가가 법정관리 중이던 회사를 인수하여 이름을 “Triumph Motorcycles Ltd”로 바꾸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1961년에 제작된 TR6 트로피

 

트라이엄프사가 만든 오토바이 중에는 지난 번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에서도 소개했던 2차 대전 당시에 총 3만 대를 생산한 “Triumph Model H”도 있습니다.

 

Triumph Model H

 

아무튼 영화 제작회사는 적당한 독일의 BMW R75를 구하지 못해 “TR6 트로피(TR6 Trophy)”를 구입하여 당시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커스터마이징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케니 하워드(Kenneth Robert Howard)”에게 BMW R75와 유사하게 만들어줄 것을 주문하여 영화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케니 하워드(Kenneth Robert Howard)”가 죽고 나서 그의 딸들이 “케니 하워드(Kenneth Robert Howard)”가 사용하던 그의 별명이자 상표였던 “Von Dutch”를 판매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다국적 브랜드인 “Von Dutch”입니다.

한편 영화촬영이 모두 끝나고 제작자들은 사용된 오토바이 “TR6 트로피(TR6 Trophy)”를 영국의 한 농부에게 판매하였고, 이를 구입한 농부는 소떼를 모는데 사용하다가 그냥 헛간에 방치해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농부가 방치한 오토바이를 수집가인 “딕 셰퍼드(Dick Shepard)”란 사람이 다시 구매를 하여 정비를 하고 보관하면서 각종 전시회에서 공개하였는데 원형의 95%는 원래의 부품과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 5%만을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딕 셰퍼드(Dick Shepard)”은 영국의 맨섬(Isle of Man)에서 해마다 열리는 저비축제의 2018년 행사(FESTIVAL OF JURBY 2018)에도 이것을 전시하였는데 오토바이를 완벽히 복원하는데 2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좌측이 딕 셰퍼드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비하인드 스토리

1963년 개봉된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는 다시 보아도 언제나 멋진 영화란 생각이 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내용의 영화인데 오늘은 그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하여 얘기해볼까 합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영화의 원작이 된 동명의 책을 쓴 작자 “폴 브릭힐(paul brickhill)”은 호주공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를 몰다가 튀니지에서 격추되어 수감되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Ⅲ)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책을 집필했습니다.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Supermarine Spitfire)

 

영화에서는 모두 76명의 포로들이 탈출하여 3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10명은 다시 붙잡혀 수용소로 돌아오게 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 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50명의 포로들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Ⅲ)

 

그러나 폴 브릭힐은 탈출을 준비하는 작업에는 참가를 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폐소공포증으로 인해서 실제로 탈출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출연배우들 중에는 포로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다.

탈출에 필요한 서류를 위조하는 “콜린 블리스” 역을 맡았던 “도널드 플레젠스(Donald Pleasence)”는 공군조종사로 참전하여 포로가 된 다음 수용소에서 독일군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도널드 플레젠스(Donald Pleasence)

 

한편 수용소장인 독일군 대령 루거 역을 맡았던 “하네스 메세머(Hannes Messemer)”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프릭 역의 “틸 키베(Til Kiwe)”와 헤르쿤 역의 “한스 라이저(Hans Reiser)”는 각각 미군의 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틸 키베(Til Kiwe)

 

한스 라이저(Hans Reiser)

 

오토바이로 철조망을 넘는 장면은 대역이었다.

여러 장면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기억되는 장면은 아마도 주인공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국경 부근에서 철조망을 오토바이로 넘으려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은 프로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할 만큼의 오토바이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의심을 해보지는 않았는데 사실은 스턴트맨인 “버드 에킨스(Bud Ekins)”가 대역을 한 것이라고 하며 안전을 위하여 철조망은 모두 고무줄로 만들어졌었다고 합니다.

 

스티브 맥퀸과 버드 에킨스(Bud Ekins)

 

스티브 맥퀸은 과속딱지를 끊겼다.

영화를 촬영하던 독일에서 지역경찰의 단속에 걸려 주인공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을 포함한 다수의 출연진과 스탭들이 스티커를 발부받았는데 경찰서장은 “오늘 우리가 여러 사람을 단속했지만 가장 빠른 속도로 상을 받은 사람은 스티브 맥퀸이었다.”고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찰스 브론슨의 농담은 진담이 되었다.

영화에서 땅굴을 파는 대니 벨린스키 역을 맡았던 “찰스 브론슨(Charles Bronson)”은 우리에게는 미드 NCIS로 더 낯이 익은 배우 “데이비드 매컬럼(David McCallum)”과 그의 아내 “질 아일랜드(Jill Ireland)”를 영화 촬영장에서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찰스 브론슨은 데이비드에게 “네 아내를 훔칠 거야!”라는 농담을 던졌는데 그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려 데이비드와 헤어진 “질 아일랜드(Jill Ireland)”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찰스 브론슨(Charles Bronson)

 

찰스 브론슨과 질 아일랜드(Jill Ireland)

 

데이비드 매컬럼(David McCallum)

 

또한 영화에서 헨들리 역을 맡았던 제임스 가너(James Garner)는 육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는데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도 해병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었답니다.

 

제임스 가너 (James Garner)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

오토바이가 전투에 처음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우리에게는 판초(Pancho)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프란시스코 비야(Fransico Villa)”가 이끄는 멕시코 농민군을 토벌할 때 미군들이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과 “인디언(Indian)”사에서 만든 오토바이를 탄 것입니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기계화가 군에서도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말을 대체할 수단으로 본격적으로 오토바이가 등장을 하게 되었는데 헌병들이 사용하는 오토바이가 아닌, 실제 전쟁에서 사용된 오토바이는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대표적인 모델을 보면서 알아보겠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을 하지 않는 오토바이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1차 대전에서 미군이 사용한 오토바이만 8만대 정도인데 가장 많았던 것이 당시 세계최고의 오토바이 회사였던 인디언 모터사이클(Indian Motorcycle®)사의 것으로 5만대였고 그 다음이 “할리 데이비슨(Harley-Davidson)”으로 2만대, 기타 여러 회사의 제품을 합한 것이 1만대 정도였습니다.

 

보병부대에 지급된 오토바이는 기관총을 신속하게 배치하기에 그만이었고, 부상병도 사이드카로 빠른 이송이 가능하였으며 탄약과 의약품을 최전선으로 수송하기에도 편리하여 근 100년이 지난 현재, 미군에서는 오토바이의 사용을 재검토하고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연대순으로 전쟁에서 실제로 사용되었던 오토바이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제1차 세계대전

▶ 미국: 할리 데이비슨 17F/J

“프란시스코 비야(Fransico Villa)”의 토벌작전에서 사용한 이후 2만대를 주문하여 유럽의 전선에 배치하였습니다.

 

▶ 미국: Indian Power plus Big Twin

당시 세계최고의 오토바이 업체였던 인디언사는 전쟁발발과 함께 생산물량 전부를 군에 납품하였습니다.

▶ 영국: Triumph Model H

초기에 영국은 통신병의 이동수단으로 배치를 하였으나 나중에는 미군과 마찬가지로 전투용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총 3만대를 사용하였습니다. 공랭식으로 499cc였던 이 오토바이는 병사들 사이에서 믿을만하다고 해서 “The Trusty”라는 별명으로 불리었습니다.

 

■ 제2차 세계대전

2차 대전은 군용 오토바이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지만 1차 대전에 비해서는 직접 전투에 사용되는 비율은 작았습니다. 그리고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Zundapp와 BMW가 생산한 오토바이가 더욱 우수하다는 것을 미군이 알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 미국: Harley-Davidson WLA

2차 대전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서도 사용된 오토바이로 총 7만대가 전쟁에 사용되었으며 영화 “캡틴아메리카 퍼스트어벤져”에서 주인공이 타던 오토바이가 바로 이것입니다.

 

▶ 영국: Norton WD16H

전쟁이 끝날 무렵까지 영국군을 위하여 총 10만대를 생산하였습니다.

 

▶ 영국: BSA M20

주로 지휘관들이 신속하게 명령을 하달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오토바이입니다.

 

▶ 영국: Royal Enfield WD/RE

낙하산으로 작전지역에 수송할 수 있도록 작고 가벼운 것이 특징으로 125cc입니다.

 

▶ 독일: BMW R71/R75

독일 BMW의 R71과 R75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영국의 더글라스사가 전쟁 후 이것을 바탕으로 “Douglas Mark V”를 만들었으며 미국정부는 Harley-Davidson과 Indian 모두 R75와 같은 오토바이를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는 사실로 증명됩니다.

BMW R71

 

BMW R75

 

▶ 독일: SdKfz 2(일명 케텐크라트 The Kettenkrad)

궤도를 뜻하는 “Ketten”과 오토바이를 뜻하는 “Kraftrad”의 약칭 “krad”를 조합하여 Kettenkrad라고도 부르는데 주로 활주로에서 비행기를 견인하거나 병력을 수송하고 통신케이블을 설치하는데 사용되었으며 총 8,500대가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 독일: Zündapp(쥔다프) KS 600

Zündapp KS600은 “BMW R12”와 동시에 출시되었지만 훨씬 기술적으로 뛰어난 오토바이였으며 “BMW R12” 750cc 엔진은 18마력이었던데 비해 “Zündapp KS600”의 600cc 엔진은 28마력에서 나중에 34마력까지 개선되었으며 아래의 사진과 은 BW38(Beiwagen 1938)이라는 사이드카 프레임을 많이 장착하기도 하였습니다.

 

■ 2차 대전 후~현재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서 수많은 오토바이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이후로는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통신수단과 군장비의 발달 때문이었으며 베트남전쟁에서는 아주 제한적으로 사용되었고 이후 포클랜드전쟁과 사막의 폭풍작전에서도 사용되었습니다.

▶ 미국: Harley-Davidson MT500/350

포클랜드전쟁과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사용되었는데 주로 정찰임무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 일본: Kawasaki KLR650

사막의 폭풍작전에서 미군과 나토군이 사용한 것으로 민수용인 “KLR650”을 변형한 모델을 미군들이 사용하고 있는데 육군에서는 M1030, 공군에서는 M1030B1, 해병에서는 M103M1 모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 미국 : Zero XXM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있는 “Zero Motorcycles”에서 생산하는 것으로 전기모터로 작동되어 은밀하게 작전을 수행해야 하는 특수부대를 위해 특별히 제작되어 납품된다고 합니다.

​푸조자동차는 무엇 때문에 공장을 폭파했을까?

​푸조자동차는 무엇 때문에 공장을 폭파했을까?

프랑스의 자동차회사 푸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으며 마침내는 공장을 직접 폭파하여 항거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언론사의 기사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물론 푸조자동차가 나치독일에 항거하는 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장을 직접 폭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나치에 대한 항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명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었음을 모르는 내용의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푸조(PEUGEOT)가 공장을 폭파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조자동차의 생산공장은 1925년부터 1929년에 걸쳐 소쇼(Sochaux)지방에 집중되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에는 6만 명이 넘는 인원이 근무하는 대단위 공장이었습니다. 이처럼 규모가 큰 생산시설이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영국의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에서는 자체발전설비를 갖추고 있는 푸조자동차의 소쇼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한편 독일군의 지배하에 놓인 푸조자동차는 일부 언론에서 사실관계의 확인조차 없이 작성한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생산을 거부하지는 못하였으며, 10대를 생산하면 6대의 차량에서 불량이 나오도록 하는 소극적인 사보타지(sabotage)를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3년 봄에는 독일의 V1 미사일을 생산하는 프로젝트에 숙련공들이 차출되어 V1 미사일에 사용될 부품을 제작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의 SOE에서는 더욱 푸조의 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43년 7월 15일 밤에 공군참모장 Charles Portal와 “왕립공군 폭격사령부”의 사령관 Arthur Harris의 지휘로 “헬리팩스 폭격기(Handley Page Halifax)”가 출격하여 푸조의 소쇼공장을 폭격하였고, 귀환한 조종사들은 푸조의 공장이 평탄하게 변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정확하게 확인된 바로는 푸조의 소쇼공장을 폭격한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던 4개의 마을을 폭격하는 바람에 민간이 125명이 사망, 25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가옥 100여 채가 파괴되고 400여 채가 넘는 가옥이 피해를 입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빗나간(?) 일부의 폭탄만이 푸조자동차의 소쇼공장에 떨어졌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폭격에 실패하자 영국의 SOE는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푸조의 생산라인에 대한 폭격을 시도하기 전인 1943년 4월에 프랑스로 공중침투하여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협력하고 있던 SOE 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푸조공장에 대한 폭격이 실패하고 대신에 민간인 희생자들을 내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게 되어 SOE본부에 폭격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출하고 직접 다른 시도를 하게 됩니다.

언론 등에서 나오는 것처럼 “장 피에르 푸조 3세”가 나치에 협력하지 않으려고 단독으로 공장폭파를 결정했던 것이 아니고 동생 “로돌프 푸조(Rodolphe PEUGEOT)”를 만나 설득한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의 노력에 의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 3세”의 동생이자 공장의 기술책임자를 맡고 있던 “로돌프 푸조(Rodolphe PEUGEOT)”에게 전화를 건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자신은 영국의 요원이며 현재 푸조공장에 대한 폭격을 계획하고 있는데 공장을 폭격하면 민간인의 희생도 뒤따르게 되니 직접 폭발물을 설치하여 폭파하는 것이 민간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 3세

 

처음에는 해리 리(Harry Ree)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푸조 측에서는 영국에 무선조회를 하여 그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자신들의 손으로 폭파한 공장의 파괴된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지역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에 따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림에 따라 공장의 직원으로 변장한 Harry Ree는 낙하산으로 증원된 SOE요원들과 합류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장비와 폭약을 공장에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최초의 시도는 축구를 하는 독일군 경비병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1월 5일 두 번째 시도에서 폭발물을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폭파는 성공적이어서 공장의 육중한 철문이 20미터 이상 날아오를 정도였으며 더 이상 푸조자동차의 소쇼(Sochaux)공장은 생산라인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Harry Ree와 SOE요원들은 며칠 동안 더 폭파를 계속하여 독일군들에 의해 사용될 수도 있는 작은 부품들까지도 폭파시켰습니다.

SOE주도의 성공적인 폭파작전은 폭격기를 통한 공중폭격을 막아 민간인들의 희생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푸조자동차의 경영진들의 결정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한편 폭파에 성공한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게슈타포의 포위망을 피해 총상을 입은 몸으로 스위스로 피신하여 영국으로 귀환하였으며 1947년 SOE요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다큐영화 “School for Danger”의 주역을 맡기도 하였고 1962년에는 요크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활동하다가 19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School for Danger

F-35의 추락과 전투기의 무사고 비행시간

F-35의 추락과 전투기의 무사고 비행시간

현지시각으로 2018년 9월28일 오전 11시45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에 있는 미국 해병대 비행장 부근에서 F-35B가 추락했다는 사실은 이미 언론의 보도를 통해 다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1기의 가격만 해도 후덜덜한 기종이지만 조종사가 무사히 탈출하였다고 하니 다행입니다. 그러면 이런 F-35의 안전성에는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그래서 이번에 추락한 F-35와 다른 기종들의 무사고 비행시간에 대하여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교하는 시점은 록히드 마틴이 2017년 7월 28일에 발표한 자료를 기준하여 우리 공군의 주력기인 F-15를 비롯하여 F-16과 F-22랩터를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2017년 7월 28일, F-35의 개발사인 록히드 마틴은 “F-35라이트닝Ⅱ”의 총 비행시간이 10만 시간을 돌파했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우선 F-35의 시리즈에 대해서 살펴보면 통상적으로 활주로를 이용하여 이·착륙하는 이른바 CTOL(Conventional TakeOff and Landing) 방식의 F-35A와 단거리 이륙 및 수직착륙 방식인 STOVL(Short TakeOff and Vertical Landing) 기종의 F-35B, 그리고 항공모함에서 운용할 수 있도록 양 날개와 수직과 수평의 꼬리날개를 대형화 하고 착륙장치의 구조를 강화한 F-35C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F-35B

 

특히 이번에 추락한 F-35B 기종은 단거리이착륙(STOL: Short TakeOff and Landing)/수직이착륙(VTOL: Short TakeOff and Vertical Landing) 방식의 기종인 “AV-8B 해리어Ⅱ”를 대체하기 위해 채택된 기종입니다.

F-35B가 수직이륙 방식이 아닌 이유는 탑재하는 무기와 연료량을 “AV-8B 해리어Ⅱ”보다 많게 하여 작전반경을 넓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F-35B가 10만 시간이 넘도록 무사고비행을 했다는 사실은 실용화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전투기로서는 대단히 이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국의 “AV-8B 해리어Ⅱ”와 STOVL(Short TakeOff and Vertical Landing) 방식의 기종으로 구 소련에서 개발한 “야코블레프 Yak-38”가 많은 추락사고를 낸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AV-8B 해리어Ⅱ

 

야코블레프 Yak-38

 

먼저 한국 공군에서도 운용하고 있는 1972년에 첫 비행을 한 F-15의 경우에는 실용화를 눈앞에 둔 1975년 총 비행시간 7,502시간 만에 추락을 한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2016년까지 총 비행시간 1,069만 9,461시간 동안 333대가 추락한 F-16에 비해서도 월등한 기록을 F-35는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물며 10만 비행시간을 넘기고도 1년이 더 지나서 추락사고가 발생한 것이란 점입니다.

 

F-15

 

그 이후 F-15는 1977년에 조종사가 처음으로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였고 1978년에 10만 시간 비행을 달성하지만 그때까지 10대가 사고를 당하고 3명의 조종사들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2016년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F-15의 10만 시간당 추락은 1.93대이고 최근 10년간은 1.396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적 비행시간 648만 5,730시간 동안에만 125기의 F-15기가 손실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한편 F-16의 경우에는 무사고를 기록한 해가 2014년 한 해밖에 없을 정도로 많은 사고를 기록하고 있으며 2016년까지의 최근 10년간만 보더라도 1.55대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F-16

 

이상에서 F-15와 F-16을 살펴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전투기의 사고는 개발 중인 단계이거나 혹은 실용화 단계 초기에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후 기체결함의 보수나 운용경험의 축적으로 감소하다가 기체가 노후화 되면서 다시 조금씩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F-22의 경우에도 처음 비행을 하고부터 10만 시간 동안 3대가 추락하여 이번에 추락한 F-35의 경우에는 기타의 전투기에 비해서는 비교적 안정성이 입증된 기종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F-22

 

끝으로 이번 F-35의 추락을 보면서 지난 4월 5일 경북 칠곡군에서 우리 공군 F-15K 전투기가 추락하여 탑승하고 있던 조종사 2명이 사망한 사고가 생각이 납니다. 건군 70주년을 맞은 오늘, 국방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장병들의 안전한 군생활을 기원하면서 다시 한 번 그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 안타까운 F-15K 전투기 조종사들의 사망사고

안타까운 F-15K 전투기 조종사들의 사망사고

안타까운 F-15K 전투기 조종사들의 사망사고

경북 칠곡군에서 우리 공군 F-15K 전투기가 추락하여 탑승하고 있던 조종사 2명이 숨졌다는 군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군의 발표 중에서 육군 출신인 제가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부분은 “고도가 낮아서 비상탈출을 하지 못한 것 같다”는 것입니다. 고도가 낮았다고는 하더라도 인간이라면 본능적으로 탈출을 하려는 시도를 했을 것인데 말입니다.

전투기 추락사고가 발생하면 어김없이 이어지는 조종사들의 사망소식을 접하게 되면 한 가족의 가장이거나, 사랑하는 아들인 그들이 왜 사망하게 된 것인가?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조종사들이 비상탈출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매뉴얼에 따르고 어떤 장치들을 사용하는가를 조금 살펴보았습니다.

검색을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전투기나 폭격기와 같은 군용기에는 공중에서 폭발하거나 추락할 경우 조종사들의 안전한 탈출을 위하여 사출좌석이란 것이 설치되어 있다고 합니다.(우리가 영화나 TV를 통해서 가끔 보기도 하는 장면)

참고: 사출좌석(나무위키)

 

그런데 이런 장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투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하면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왜? 반복되는 것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다면 그 장치는 효용이 없는 것인지? 영화에서 보는 장면은 실제와는 얼마나 다른지? 하는 궁금증에서 비롯되어 검색을 통해서 전투기 조종사들이 탈출하는 방법과 사출좌석이란 것에 대하여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아래의 내용들은 “Everything You Need to Know About Ejecting From a Fighter Jet”이라는 내용의 글을 대부분 참고하여 작성한 것이며, 비행기에 대한 지식이 없기 때문에 번역함에 있어서 다소의 오류가 있을 수도 있음을 먼저 말씀드리고 보다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영문제목을 클릭하시거나 아래의 주소로 접속하시면 볼 수가 있습니다.

원문(영어) 바로가기

먼저 이번에 추락한 F-15K의 조종석 모습은 구할 수 없어서 F-15K의 바탕이 되었다고 하는 F-15E의 조종석 사진을 찾아보았더니 아래와 같은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생긴 조종석에 앉아 있다가 영화가 아닌 실제상황에서 사출좌석을 통한 비상탈출을 한 것으로 미 공군 곡예비행팀의 썬더버드 F-16기가 추락사고를 내는 순간 촬영된 사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사진 속에서는 강력한 폭발과 함께 캐노피가 튕겨져 나가고, 이어서 조종사가 앉은 좌석이 튕겨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때 보이는 화염은 화약에 의한 것이라고 하며, 현재는 화약 대신에 로켓모터를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순간적인 폭발력으로 사출좌석을 튕겨나가게 하는 방법으로 로켓모터를 사용하면 조종사의 부담을 경감시키기는 한다고 하지만 그래도 10~15G에 달하는 엄청난 가속도를 파일럿은 고스라니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따라서 탈출 매뉴얼에 정해진 자세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거나 하면 팔과 다리를 비롯하여 생명에 심각한 피해를 줄 수 있는 목이나 척추에 큰 손상을 입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이번에 추락사고를 당한 전투기의 비행속도가 얼마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하 1 이상의 속도로 탈출한 경우, 조종사는 헬멧이 벗겨지고 얼굴 전체에 혈관이 손상되는 부상과 입술이 부어오르는 손상을 받고 동승한 부조종사는 불행하게도 목숨을 잃었다고 하는 사실을 아래의 동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비상탈출을 감행할 때에는 조종석 옆에 비치된 탈출 레버를 당기면 조종석 위의 캐노피가 떨어져 나가고 2열 시트의 경우에는 뒷좌석이 먼저 발사된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앞좌석이 먼저 발사되면 분출되는 화염에 의해 뒷좌석에 탄 사람이 위험해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사히 사출좌석이 발사되면 고도가 1만 4,000피트(약 4,300m) 이하에서는 낙하산이 자동으로 펴지지만 그보다 높은 고도에서는 낙하산이 펴지게 되면 낮은 압력과 부족한 산소 때문에 조종사가 사망할 위험이 크기 때문에 자동으로 낙하산이 펴지지는 않는다고 하는군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제트기의 보급이 이루어지면서 그 이전의 프로펠러 비행기를 조종하던 파일럿들이 자력으로 탈출하던 것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사출좌석이 개발되었다고 하는데 1976~1989년의 미해군 통계에 따르면 시속 926km 이상으로 비행하던 도중 사출좌석을 이용한 탈출을 시도한 10명의 조종사 중에서 6명이 사망하고, 2명이 중상, 2명이 경상을 입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영화에서 보던 것과 같이 비상탈출이 그렇게 안전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비행속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사출좌석을 통한 탈출을 감행하는 조종사가 무사할 확률은 높아지지만 음속 이상의 속도로 비행을 하던 도중 비상탈출을 하게 되면 풍압에 의해 전신골절 등의 심각한 부상을 당할 위험이 커지게 된다고 합니다.

 사망한

조종사들의 나이는

불과 27세와 29세였다고 하니

더욱 안타깝기만 합니다.

못다 핀 꽃,

좋은 곳에서

맘껏 피우기를 바라며

고인들의 명복을 빕니다.

일본 항공자위대 F-35A의 추락은 버티고(vertigo)가 원인이었다.

일본 항공자위대 F-35A의 추락은 버티고(vertigo)가 원인이었다.

지난 4월 9일 추락한 일본 항공자위대 소속의 F-35A 전투기의 추락은 조종사의 버티고(vertigo)가 원인이었다는 일본 방위성의 발표가 있었다.

항공기의 조종사가 일시적으로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상태를 말하는 버티고(vertigo)는 영어로는 비행착각(spatial disorientation)이라고도 표현하지만 흔히들 버티고(vertigo)라고 하며 일본어로는 공간식실조(空間識失調)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국내언론에서는 일본의 보도를 인용하여 모두 공간식실조(空間識失調)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이번에 사고를 당한 조종사는 버티고(vertigo)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버티고(vertigo)라는 비행착각에 빠지게 되면 바다 위를 비행하고 있음에도 조종사의 발밑에 있는 것이 바다인지 하늘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각이나 본능이 아닌 계기판을 보고 비행을 해야 하며 이는 전투기뿐만 아니라 많은 조종사들이 경험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일본방위성에서는 무슨 근거로 추락한 F-35A의 비행데이터가 아직 회수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종사의 비행착각, 즉 버티고(vertigo)가 추락의 원인이라고 발표를 한 것일까?

우선 추락한 F-35A에는 컴퓨터가 기체의 이상유무를 진단하여 조종사에게 알려주는 자기진단장치가 탑재되어 있는데 그런 정황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체의 결함은 배제하였다고 한다.

한편 일본 방위성에서는 오늘(6월 10일) 항공자위대가 발표한 ‘F-35A 추락사고의 원인과 재발방지대책’이란 보도문에 나와 있는 그림을 인용하여 “버티고(vertigo)가 현재로서는 가장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원인”이라고 하면서 이것이 사고의 원인이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고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일부언론에서 이를 단정적인 원인이라고 보도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그러면 항공자위대가 발표한 그림을 보면서 사고원인에 대해서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그림의 원본은(이곳)에서 볼 수 있으나 이해를 돕기 위해 한글로 번역한 것을 보면서 살펴본다.

사고기의 조종사는 추락 1분 전에 훈련중지(Knock it off)라고 교신하였는데, 만일 기체의 이상이 감지되었다면 고장이란 보고를 했을 텐데 그렇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기체결함의 가능성은 낮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교신을 마침과 동시에 G-LOC으로 인한 실신상태에 빠진 것으로 가정해볼 수는 있으나 훈련중지(Knock it off)라는 교신이 있고 난 뒤였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현 상황에서 합리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원인으로 버티고(vertigo)라고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인데 비행데이터를 발견해지 못했음에도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근거는 F-35A가 가지고 있는 다기능 데이터링크(MADL)16과 스텔스기종이지만 훈련 시에는 레이더반사판을 설치하고 있어서 기체가 대체로 어떤 상태였는지 판단할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400여 기가 배치된 F-35기종은 지난 2018년 9월 28일 미국 해병대 소속의 F-35B가 추락한 것이 최초였고 이번 일본 항공자위대의 F-35A 추락이 두 번째이며, 일본에서는 2018년 카데나기지의 미 공군기 F-15C의 추락과 2011년 일본 항공자위대의 F-15J의 추락사고 원인이 조종사의 비행착각(spatial disorientation), 즉 버티고(vertigo)에 의한 것이었던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 F-35의 추락과 전투기의 무사고 비행시간

 

F-15J

 

F-15C

 

소련의 청진상륙작전(feat. 간악한 쪽바리)

소련의 청진상륙작전(feat. 간악한 쪽바리)

2018년 5월 14일 유튜브의 스브스뉴스 채널은 북한 조선중앙TV의 뉴스를 인용하여 일본 뼈 때리는 북한 어휘력(feat. 간악한 쪽바리)’란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우리나라에 대한 아베정권의 처사를 보고 있으면 일본이라는 표현보다는 쪽○리라는 말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오는데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연신 추파를 던지는 아베의 모습을 북한은 과연 어떻게 보고 있을지를 단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청진상륙작전 중에 있었던 일화를 한 번 알아보까 한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있고 난 이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었던 청진상륙작전은 러시아어(Сэйсинская операция)의 발음을 따서 영어로는 세이신 작전(Seishin Operation)이라 부르며, 1945년 8월 17일 11시 30분경 소련 제1 극동전선군 산하의 제25군이 상륙함으로써 끝을 맺었는데 오늘은 이 과정에서 전사한 소련 간호병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얍삽하기로는 자웅을 가리기가 힘든 소련과 일본은,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8월 9일부터 일소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일본을 침공하면서 소련-일본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인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는 8월 13일부터 시작된 청진상륙작전 도중에 전사하였으나 사후에 소련-일본전쟁에서 영웅칭호를 받은 유일한 여군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1924년 9월 14일에 태어났으니 청진상륙작전에서 전사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정확히 20세였다.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 Мария Никитична Цуканова)가 입대한 것은 17세인 1942년 5월이었고 그해 6월 13일, 그녀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51소총사단에서 교환수로 근무하였으나 1944년 의료과정을 수료하고부터 소련 태평양함대 제355 해병대대 3중대에서 간호병으로 근무하게 된다.

 

제일 왼쪽이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

 

그리고 1945년 8월 14일, 청진상륙작전이 시작된 다음 날 전투에 투입되어 이틀 동안 52명의 낙하산병을 치료하였고 8월 15일 저녁이 되어서는 점령한 지역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중 어깨에 부상을 입었는데 치열한 일본군의 탈환전에 그녀는 퇴각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박격포의 공격으로 다리에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진지에 남은 그녀는 직접 기관총을 잡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그녀를 본 일본군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벙찌고 말았다.

무려 9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저승으로 보내버린 사람이 연약한 여군이었고 게다가 간호병이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 쪽바리들은 그녀로부터 정보를 캐기 위해 갖은 고문을 다한 뒤, 잔혹하게 죽이고 말았다.

제국주의 쪽바리 넘들은 그녀의 손목을 자른 다음, 목을 자르고 눈을 파냈다고 하는데 다음 날 다시 고지를 재탈환한 소련군에 의해 그녀의 참혹한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 해 9월 14일, 그녀는 전사한 지 한 달 뒤에 소비에트의 영웅칭호를 수여 받았다.

북한은 2010년,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를 비롯하여 청진상륙작전에서 전사한 소련군 병사 25명을 기리기 위해 청진에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의 흉상은 별도로 건립하였다 한다.

 

여군을, 그것도 간호병을 그렇게 무참하게 도륙한 일본군의 만행은 글을 쓰는 나도 치가 떨릴 지경인데 북한으로서야 상상 이상일 것임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근본적인 사과도 받지 않고 돈 몇 푼에 위안부할머니들을 짓밟아버렸던 사람들이 새삼 생각이 난다. 아베도 그들도 국민보다는 정치적 욕심이 그 바탕이었을 터. 다가오는 총선이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북한에서는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것이 확실한 모양으로 1988년에는 소련과 합작으로 지친 태양(Утомленное солнц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현재 이 영화는 러시아의 사이트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사진은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Internet Movie Database)에서도 볼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