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영웅도 차별받아야 했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전쟁영웅도 차별받아야 했던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는 1994년 5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당선과 함께 폐지되었지만 아직도 남아프리카공화국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백인우월주의에 근거한 이 같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쟁영웅마저도 차별 받는 일이 있었는데 오늘은 이 얘길 해볼까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군사조직은 지금은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방위군(SANDF: South African National Defence Force)’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이전인 1957년부터 1994년까지에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방위군(South African Defence Force)’으로 불렀고, 지금과 같은 공화국체제가 수립되기 이전에 연방을 형성하고 있었던 시기인 1912년부터 1957년 사이에는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이라고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군대는 바로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이었으며 한국전쟁에 참전한 부대도 바로 UDF였다. 그러나 인종차별정책으로 1940년 이전까지는 흑인들의 입대는 금지되어 있었고 1940년 이후에도 입대는 허용되었으나 비전투원의 신분만 허용되었기에 군사훈련은 무조건 백인들만 받을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에는 12만에 달하는 흑인들이 자원입대를 희망하였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는 이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법으로 총기의 지급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전투지원업무만을 맡았던 흑인들에게 지급된 무기라곤 창이 전부였다.

 

그리고 입대한 흑인들은 모두 별도로 조직된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 소속이었고 이 부대는 모두 4개의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오늘의 이야기의 주인공은 도시지역 출신 흑인들로 편성된 제4대대(Witwatersrand Battalion) 소속이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 요하네스버그에서 멀지 않은 스프링스에서 배달원으로 일하고 있던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잡 마세코(Job Maseko)’는 자원입대한 후 1942년에 일병의 계급으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되었다.

잡 마세코(Job Maseko)-출처: Roelof Uys 페이스북

 

당시 북아프리카 전선에 투입된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 소속의 병사는 1,200명 정도에 달했는데 그들이 주둔하고 있던 곳이 바로 독일의 롬멜에 의해서 철저하게 발리는 리비아의 항구도시 ‘토브루크(Tobruk)’였다.

물론 ‘토브루크(Tobruk)’에는 흑인병사들만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남아프리카연방 방위군(UDF: Union Defence Force)’의 제2 보병사단을 비롯하여 제11 인도보병사단 및 기갑연대, 근위여단 등의 많은 영연방부대들이 함께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휘관은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소장이었다.

1942년 6월 20일 5시 20분부터 시작된 롬멜이 지휘하던 독일군의 전차부대를 앞세운 공격은 공중에서 ‘융커스 Ju 87과 88’ 폭격기의 지원을 받으며 파죽지세로 몰려왔고 마침내 방어를 하기 위해서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소장은 흑인병사들에게도 총기를 지급하게 되었다.

 

융커스 Ju 88

 

총을 지급받기 전까지는 독일군의 파상공세로 인한 부상병들을 돌보고 운반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었던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 소속의 흑인병사들에게 총을 지급하였다고 해서 전세는 바뀔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롬멜의 공격이 시작된 다음날인 1942년 6월 21일에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소장은 항복을 하게 된다.

‘헨드릭 클로퍼(Hendrik Klopper)’ 장군

 

항복했을 당시 포로가 되었던 숫자는 모두 3만2천 정도에 달했으며 그 중에는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잡 마세코(Job Maseko)’가 소속되었던 ‘원주민 부대(NMC: Native Military Corps)’의 흑인병사들 1,200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잡 마세코(Job Maseko)’를 포함해 포로가 된 흑인들은 포로수용소에서도 인종차별을 겪게 되는데 백인들은 유럽인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보내는 대신 흑인들은 이탈리아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것이다.

슈뢰더 소령이 지휘하던 이탈리아 포로수용소의 경비병들은 포로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 일쑤였고 백인포로들은 노동을 하지 않았으나 흑인병사들은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는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고 먹을 것이라고는 하루에 두 번 나눠주는 쿠키가 고작이었다.

이런 와중에 하루는 롬멜이 ‘잡 마세코(Job Maseko)’가 있던 포로수용소를 방문하여 포로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없었는지를 조사하였는데 ‘잡 마세코(Job Maseko)’의 차례가 왔을 때 그는 수용소의 실상을 그대로 폭로했고 그 결과는 롬멜이 돌아간 후 끔찍한 고문과 폭행이 되어 그에게 되돌아왔다.

 

이로 인해 ‘잡 마세코(Job Maseko)’는 어떻게 하든지 복수를 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고 동료 2명과 함께 선박에서 화물을 내리는 작업도중에 독일군들의 눈을 피해 그동안 익혀둔 폭발물제조기술로 총알에서 분리한 탄약과 우유캔 및 전선을 이용하여 폭발물을 만든 다음 배에 실려 있던 휘발유통에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작업을 마치고 배에서 내린 후 몇 분 뒤에 마침내 굉음과 함께 폭발하면서 독일군의 배는 침몰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은 누가 배를 침몰시켰는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잡 마세코(Job Maseko)’는 무사할 수 있었다.

그 뒤 버려진 라디오를 수리하여 소지하고 있었던 ‘잡 마세코(Job Maseko)’는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몽고메리(Bernard Law Montgomery)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이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알게 되었고 마침내 사막을 가로지르는 탈출을 감행하여 연합군에게 돌아가게 되었고 공을 인정받아 빅토리아 훈장에 추천되지만 오로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보다 낮은 ‘군사훈장(Military Medal)’을 수여 받게 된다.

군에 입대해서도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별도의 조직에서 총도 없이 근무를 해야만 했고, 포로수용소에서도 흑인이란 이유만으로 중노동과 폭력에 시달렸는데 백인이라면 당연히 받았을 빅토리아 훈장마저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란 인종차별정책 때문에 ‘잡 마세코(Job Maseko)’는 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영국에서 이에 대한 재심사가 진행 중이라고 하는 점은 그나마 다행스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군사훈장(Military Medal)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연합군에 합류하였던 ‘잡 마세코(Job Maseko)’는 오래지 않아 귀국하였지만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1952년에 열차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장례비조차 없어서 겨우겨우 장례를 치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유해는 스프링스에 있는 묘지에 안장되었고 그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콰테마(KwaThema)’란 마을에서는 ‘잡 마세코(Job Maseko)’의 이름을 따서 1899년에 설립된 초등학교의 이름을 ‘Job Maseko Primary School’로 바꾸었다고 한다.

국가적인 영웅조차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했던, 이제는 사라져야할 인종차별이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지구상의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음은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스쿨버스 측면엔 왜 3개의 검정색 선이 있는 걸까?

미국의 스쿨버스 측면엔 왜 3개의 검정색 선이 있는 걸까?

북미 지역에는 모두 4가지 종류의 스쿨버스가 있는데, 모두가 노란색을 하고 있으며, 가장 소형인 타입 A를 제외하고는 측면에 3개의 검정색 선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뉴저지주에서 스쿨버스를 운전하면서 클로보스(ClawBoss)란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이 지난 3월 5일 “스쿨버스 측면에 있는 검은색 선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란 제목의 영상을 올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였는데, 오늘은 이 영상을 보면서 무슨 이유로 이런 검정색 선이 있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스쿨버스의 측면에 있는 선은 모두 검정색은 아니고, 주(洲)에 따라서 노란색인 경우도 있는데, 노란색이든, 검은색이든 간에 안전을 위하여 스쿨버스의 차체에 3개의 가로로 된 선을 장착해야 하는 것은 학생들의 안전을 위한 의무사항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선들은 단순히 페인트로 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얇은 차체를 보호하고 충돌 시에 충격을 흡수할 수 있도록, 금속으로 된 보강재를 설치하고 그 겉면을 검정색으로 칠한다고 하는데 비용은 1개에 3천 달러 정도라고 한다. 제일 아래의 선은 스쿨버스의 바닥 높이에 맞도록 설치하고, 중간의 선은 좌석 시트 부분의 높이에 맞게 설치해야 하며, 제일 위의 선은 좌석 등받이 윗부분이나 창문의 아래에 맞도록 설치해야 한다고 하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사고가 일어나 스쿨버스의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에도 구조대가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하고서, 버스의 측면을 절단할 수 있다고 한다.

※ 아래의 이미지는 모두 유튜브에서 캡처한 것임

 

예를 들어, 제일 아래의 선만 손상되었다면 차내에 있는 학생들은 치명적인 피해는 입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례(前例)는 어디에서 전래(傳來)되었나?

전례(前例)는 어디에서 전래(傳來)되었나?

헤르만 헷세의 ‘데미안’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이번의 탄핵 정국에서 나오는 기사의 하나를 살펴보면 22년 전 검찰의 소환이 예정된 날 오전 9시, 전두환이 연희동 자택 앞에서 소환에 불응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합천으로 내려가자 검찰은 구속영장을 발부 받아 다음날 압송하여 새벽에 안양교도소에 수감한 것을 두고 만약 박근혜가 소환에 불응한다면 구속영장을 청구하여…. 할 것이다라는 기사를 작성하면서 검찰로서는 전례에 비추어… 라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렇듯이 대한민국의 수많은 곳에는 “전례(前例)가 없어서”라거나 “전례(前例)에 비추어”라는 등등의 표현으로 공무원 또는 위정자들의 태만, 무능을 포장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또 하나를 살펴보면 국가나 지방자치단체를 대상으로 하는 용역이나 물품의 계약에서 당연하게 요구되는 서류 중의 하나가 기존의 거래실적 자료인데, 청년창업을 유도하고 벤처기업을 육성하며 중소기업의 기회를 확대한다는 정책을 내걸고 있으면서도 이런 전례(前例)에 충실하려는 복지부동이 그들의 접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 무능한 공무원들과 정치꾼들의 일면이다.

이제 그 대상을 민간으로 돌려보면, 대기업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는 요구되는 조건들이 많이 있지만, 한 재벌기업의 경우에는 담당 이사의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다. 기술개발에만 매진하여온 신생기업이나 중소기업의 경우에 거대 재벌기업의 이사를 어떻게 만나고 어떻게 추천을 받을 수 있는지? 그 방법이 무엇인지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는 아직도 수많은 분야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전례(前例)라는 굴레가 대한민국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다.

법과 원칙에 따라 성실하게 수사하겠다는 검찰의 발표 이면에는 언제나 전례(前例)에 비추어 어떻게 처리한다는 것이 일종의 가이드라인처럼 따라다닌다.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겠다는 말은 하면서도 언제까지 그 틀을 깨지 못하는 구태를 계속할 것인지, 잘못된 관행을 전례(前例)로 만든 것이 누구인지 논하자면, 아마도 대한민국의 법체계가 만들어진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그만큼 우리 사회는 구시대적인 생각과 행동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심하겠지만……

박근혜의 수사에 있어서 전례(前例)를 깨더라도 법과 원칙에 따른 처리가 진행되기를 희망하고 사회의 지도층이라는 정치꾼들과 썩어빠진 고위공직자들이 단단하게만 유지하려고 노력해온 그 알을 깨고 나오기를 촉구한다.

사족: 언제나 무슨 사건이 생기면 그들은 입버릇처럼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표현을 하곤 하는데 그토록 뼈를 자주 깎으면서도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군의 날에 생각하는 지그프리드 라인

국군의 날에 생각하는 지그프리드 라인

용을 죽인 피로 목욕을 하고 나서 무협지에 나올 법한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게 된 지그피리드는 목욕하는 도중에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등에 붙는 바람에 그곳만 용의 피를 적시지 못해 취약한 부분이 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는 신화 “니벨룽의 노래”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런 지그프리드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건설했던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아픈 상흔으로 후대에 교훈을 주는 유물로 남아있는데 오늘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연합군에게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우회하여 독일군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은 얼마나 실패한 작전이었는지 다리 하나를 넘기 위해 크나큰 희생을 치루는 바람에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도 했습니다.

원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이 프랑스에 건설했던 “힌덴부르크 라인”의 일부였던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총 연장 630km에 18,000여 개에 달하는 벙커와 수많은 용치(龍齒, Dragon’s Teeth)로 이루어져 있는데 히틀러가 1939년 5월 20일 현장에서 작업 중인 병사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지휘서신에 “Westwal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Westwall”이라고도 알려졌으나 연합군들은 이 선을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이라고 불렀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이 라인은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에도 참가하였던 프리츠 토트(Fritz Todt)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히틀러는 이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을 건설하는 작업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알게 되면 독일의 영토확장에 대한 야심을 알아차리게 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며 2년 동안 비밀스럽게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위장망과 갈대를 덮고서 참호를 건설하는 등 작업을 하였으며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절 발표를 하지 않았으나 거대한 모습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게 되자 비로소 1938년에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세상에 밝히게 됩니다.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프랑스의 마지노선(Maginot Line)보다도 더 길이가 길었으며 벨기에의 국경 부분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런 단점을 없애기 위해 마지노선보다도 더 길게 방어선을 연장하여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국경선이라는 의미로 라인(Line)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 실체는 깊은 호를 가진 이중으로 된 요새화된 형태였으며 공격에 취약한 지점에 있는 참호의 주변으로는 더 깊게 라인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이런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아무도 독일을 침공할 계획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작업을 감행하였다면서 돈낭비, 시간낭비라고 폄하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배치되었던 장비와 무기들을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다시 방어가 필요하게 됨에 따라 오랜 기간의 방치로 허물어지고 녹슨 시설을 보수하고 다시 무기를 배치하기 위해 애초 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할 계획이었으나 1/3 정도인 36만 명의 연인원을 동원하여 보수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건설현장을 순시 중인 히틀러

 

연합군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뚫기 위해 치른 희생은 아주 큰 것이었는데 시간상으로는 거의 6개월이 소요되었고 연인원 25만에 달하는 연합군 병사들의 사상을 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무너지게 되고 전쟁은 끝을 맺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회색빛 잔해들은 냉혹한 당시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은 오늘 우리의 강토를 가로지르고 있는 휴전선도 빨리 사라지게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교사였던 그녀는 왜 칼을 들었을까?

교사였던 그녀는 왜 칼을 들었을까?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은 말로 표현하기조차 힘든 만행을 서슴지 않고 저질렀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 살고 있던 필리핀의 레이테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1944년 10월 20일 시작된 “레이테 전투”는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여 승리함으로써 필리핀제도 전역을 탈환하게 되었는데 “레이테 전투의 숨겨진 이야기(The Hidden Battle of Leyte)”라는 책을 보면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동안 일본군에 의해 어린 소녀들마저 강간당하는 등 극심한 피해와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레이테의 주도인 타클로반(Tacloban)에서 교사로 생활하고 있던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는 일본군에 저항하여 손에 칼을 들고 반군의 무리를 이끌게 됩니다.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들이 알려진 것은 없지만 그녀가 이끄는 반군은 레이테에서 연합게릴라전선을 조직하여 레이테의 해안지역으로 일본군들을 몰아넣음으로써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승리할 수 있는 큰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녀는 가스파이프를 절단하여 만든 산탄총과 볼로(Bolo)라고 하는 칼을 들고 싸웠으며 110명의 병력으로 20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고 이에 일본군은 그녀의 목에 1만 페소의 현상금을 걸기도 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연약해 보이는 그녀는 칼을 들고 싸우면서 오른쪽 팔에 총상을 입기도 하였으나 일본군의 목을 베는 일을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1944년 11월 3일 “The Lewiston Daily Sun”을 통해서 알려졌는데 1944년 11월 7일 사진작가 “Stanley Troutman”이 찍은 한 장의 사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사진작가 “Stanley Troutman”이 찍은 아래의 사진은 미군이 레이테를 탈환한 후 “니에베스 페르난데스(Nieves Fernandez)”가 미군 일병 “Andrew Lupiba”에게 어떻게 그녀가 일본군의 목을 베었는지 설명하는 모습이며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1996년이나 1997년경에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이외의 군용 오토바이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이외의 군용 오토바이들

지난 번 포스팅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에서는 주로 미국과 독일 그리고 영국의 군용오토바이들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들 나라 이외의 나라들이 사용한 군용오토바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할리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미국에서 유럽으로 어떻게 운반했는지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스트리아의 PUCH 800

전쟁에 사용된 PUCH 800은 모두 민간용을 군에 징발하여 새로 페인트칠을 한 것이고 군에서 직접 주문을 한 모델은 사이드카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벨기에의 FN M12

벨기에의 “FN Company”는 1차 대전 이래로 벨기에군에 오토바이를 공급해오고 있었으며 1936년 M86모델을 최초로 군에 공급하였으나 이후 군에서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토바이를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M12 모델이었습니다.

M86

 

M12는 더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후진을 할 수 있었으며 사이드카에는 앞뒤로 모두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M12

 

▶ 체코슬로바키아의 CZ 175

체코슬로바키아군을 위해 개발된 오토바이로 거친 지형에 맞도록 제작되었으며 전륜에만 서스펜션이 있습니다.

 

▶ 프랑스의 Gnome-Rhone 750 Armée

1938년에 프랑스 육군을 위해 개발된 이 오토바이는 민간에 보급되었던 디자인을 강하고 무겁게 바꾼 것으로 사이드카를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인 750cc였으며 나중에 개량된 804cc의 AX2 모델이 보급되었습니다.

 

▶ 일본의 Type 97

보통 “Rikuo(陸王)Type 97″이라고 부르는 이 오토바이는 미국의 할리데이비슨을 모방한 것으로 때때로 기관총을 장착한 가벼운 사이드카를 달기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군용오토바이의 양대산맥은 역시 독일의 BMW와 미국의 할리데이비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번 글에서 독일 BMW의 R71과 R75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영국의 더글라스사가 전쟁 후 이것을 바탕으로 “Douglas Mark V”를 만들었으며 미국정부는 Harley-Davidson과 Indian 모두 R75와 같은 오토바이를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할리데이비슨이 BMW의 품질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앞바퀴의 프런트포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BMW는 내부에서 충격을 흡수하는 접이식 포크를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것에 반해 할리데이비슨을 보면 무언가 조잡해보임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좌: BMW 우: 할리데이비슨

 

그래도 미군과 연합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오토바이가 바로 할리데이비슨의 WLA(Harley-Davidson WLA) 모델이었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수송할 특수한 선박이 없었기 때문에 1대씩 분해하여 포장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해병과 새끼고양이의 숨겨진 이야기

해병과 새끼고양이의 숨겨진 이야기

한국전쟁 당시 미해병 1사단 소속으로 참전한 종군기자였던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어미 잃은 새끼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이 한 장의 사진은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줍니다.

동료가 찍은 이 한 장의 사진이 1,770여 개의 언론을 통해 미국 전역에 전파되어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일약 유명인사로 떠오르면서 “Kitten Marine, Korea”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수백 통이나 받았다고 하는데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이 새끼고양이에게 “잘못된 시간, 잘못된 장소에서 태어났다(Born at the wrong place at the wrong time)”는 의미에서 “Miss Hap”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구한 새끼고양이의 어미는 레이션을 훔쳐 먹으려다 다른 병사가 쏜 총에 맞아서 죽었고, 남겨진 두 마리의 새끼 중 다른 한 마리는 미군병사에게 깔려 숨지고 말았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한 새끼고양이가 나중에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를 위기에서 구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한국전쟁에 종군특파원으로 참전한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1947년 버밍엄뉴스(Birmingham News)에서 경찰을 취재하는 것으로 기자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한국전쟁 동안에는 해외에 파견된 미군들을 위한 신문인 “Stars and Stripes”의 소속으로 전장을 누볐으며 아래의 사진들이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가 한국전쟁에서 찍어 기고한 사진들입니다.

 

전쟁의 와중에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한국전쟁에서 부상당한 해군병사를 치료하는 위생병의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진대회에 응모한 것이 1등에 뽑혀 시상식 참가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그가 찍은 사진이 “군의 검열을 거치지 않고는 출판할 수 없다.”는 규정을 어겼다는 이유로 기소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법원서류를 해병대 지휘관이 찢어버리고 기소를 면하게 해주었는데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로 그는 새끼고양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사진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믿는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습니다.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의 이런 생각이 맞는지는 검증할 방법이 없으나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인해 해병대에 대한 이미지가 많이 개선되었던 것만은 분명해보이기 때문에 일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무튼 기소를 면하고 무사히 돌아온 프랭크 프레이터(Frank Praytor)는 “Stars and Stripes”의 도쿄지부에 근무하게 되면서 새끼고양이와 만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판문점에서 한국의 정전협정에 관하여 취재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되면서 새끼고양이 “Miss Hap”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고 새끼고양이는 사무실의 마스코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프랭크 프레이터

 

그 후 새끼고양이 “Miss Hap”은 프랭크가 없는 동안 보살펴주었던 프랭크의 동료 콘래드 피셔(Conrad Fisher)가 입양하였고 그가 귀국하면서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한편 새끼고양이를 구한 프랭크는 종전과 함께 귀국하여 여러 가지 일을 하다가 금년 2018년 1월 10일 사망하였는데 그의 유해는 산타페 국립묘지(Santa Fe National Cemetery)에 안장되었고, 프랭크는 그의 유언에서 자신의 묘지에 꽃을 바치는 대신에 그 돈을 동물애호협회나 자선단체에 기부하도록 하였다고 하니 그가 한국전쟁에서 새끼고양이를 구한 행동은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는?

미국이 참전한 전쟁 중에서 단일전투나 작전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것은 아마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미국의 역사에서는 4번째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26,277명의 전사자를 낸 “모이제-아르곤느 대공세”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통틀어서 전사자의 숫자를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는 현격하게 적은 수의 전사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전한 미군이 가장 많이 사망한 2차 대전은 모두 291,557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는데 1차 대전의 전사자는 모두 53,402명으로 순위로는 세 번째에 해당하고 두 번째로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쟁은 남북전쟁으로 모두 214,938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많은 미국인 병사들이 숨진 남북전쟁 동안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3,155명인데 이보다도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은 전투가 2차 대전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2차 대전 이후에 참전한 전쟁으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꼽을 수 있기에 분명 이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투는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의 초입에 있는 11월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지금, 포털의 검색어와 뉴스에는 블랙 프라이데이와 관련한 세일에 관한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위가 시작되는 11월 하순에 미국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10개의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를 비롯하여 4개의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전투가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에서 치러진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미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을 5개만 추려보면 이 중 4개가 한국전쟁에서 일어났는데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사자의 집계가 한국과 미국이 계산한 것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데 여기서는 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부산 교두보 전투(1950년 8월 4일~9월 18일)

북한군의 파상공세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아직도 정확한 참전 병력의 숫자나 희생자에 대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미군은 모두 4,599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2. 중공군 2차 대공세(1950년 11월 25일~12월 24일)

1950년 11월 28일 맥아더 장군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고 했을 정도로 전세가 역전되었던 전투인데 그 결과 중공군은 북한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게 되며 이로 인해 미군은 4,538명이 전사하였습니다.

 

3. 베트남전쟁 구정 대공세(1968년 1월 30일~9월 23일)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연합하여 베트남공화국과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 대하여 벌인 공세로 3,178명의 미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금방이라도 끝날 것만 같았던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는데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과 충돌하여 전투를 벌이며 철수한 작전이 바로 장진호 전투입니다.

 

그리고 전세가 불리해진 연합군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철수를 지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1·4후퇴의 시작이었는데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의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는 선적하고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12월 4일 부산항에 입항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이면에는 미군 제10군단장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의학박사 현봉학 선생의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며 미국 측의 기록으로는 모두 2,84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5. 제2차 청천강 전투(1950년 11월 25일~12월 2일)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였던 온정리 전투에서 승리한 중공군은 청천강 방어선의 종심 깊숙이 침투를 감행하며 계속 남하를 기도하였고 중공군이 두 번째로 청천강에서 유엔군과 벌인 제2차 청천강 전투의 결과, 미 8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38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1,489명의 미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주비행사도 귀환할 때는 세관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우주비행사도 귀환할 때는 세관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외국을 여행할 때면 누구나 작성하는 세관신고서는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그 기준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를 탐험하고 돌아오는 우주비행사들도 세관신고서를 작성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곳은 달에 착륙하여 지구로 귀환한 경험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미국의 NASA 뿐일 텐데, NASA에서는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실제로 1969년 7월 24일, 아폴로 11호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닐 암스트롱과 마이클 콜린스 및 버즈 올드린 등 3명의 우주비행사들은 공동으로 서명한 세관신고서를 호놀룰루 공항에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제출한 세관신고서를 보면 출발지가 발사지인 케이프 케네디(현 케이프커내버럴)로 되어 있고 중간기착지는 달이며 도착지가 호놀룰루로 기재되어 있고, 신고물품으로는 달에서 가지고 온 암석과 먼지 및 샘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관신고서에 작성된 날짜인 1969년 7월 24일은 아폴로 11호가 하와이 남서쪽으로 1,480㎞ 떨어진 곳에서 항공모함 USS호넷에 의해 구조된 날이고, 실제 하와이로 귀환한 날짜는 1969년 7월 26일이니 세관신고서에 기재된 날짜는 공문서 허위작성의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편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우리가 제출하는 검역신고서를 제출하는 대신에 항공모함 USS호넷의 갑판에서부터 특수하게 제작된 옷을 입고 휴스턴에 있는 검역센터로 이동하여 3주간 격리된 상태에서 세균이나 질병의 검사를 받았다고 하며 그 후 2번째 달 탐사선인 아폴로 12호와, 3번째 탐사선 아폴로 14호의 승무원들도 격리되어 검역을 받았다고 하는데 4번째 탐사선인 아폴로 15호부터는 달은 무균지역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검역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으로 우주비행사들의 세관신고서 작성의무에 대한 질문에 NASA의 대변인(Nicole Cloutier-Lemasters)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우주비행사들도 임무에 관계없이 항공편을 이용하는 관습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2010년 9월 2일 영국 데번 주의 토키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사망한 지 하루가 지난 89세 노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에일린 넌(Eileen Nearn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던 경찰이 유품에서 발견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으로 인해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드네임 “더 로즈”로 활약하였던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유명한 2개의 장미라고 하면 바로 에일린 넌(Eileen Nearne)과 도쿄 로즈 중의 한 명이었던 일본여성 “아이바 토구리”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시가 있어서 스파이들에게 붙는 코드명에 로즈란 단어가 사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히 에일린 넌(Eileen Nearne)은 게슈타포의 모진 고문에도 죽음을 불사하면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수용인원 12만 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는 6만 명이 숨진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는데 오늘은 그녀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2001년에 개봉한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샤롯 그레이”의 실제 모델이었으며 독일비밀경찰이 현상금 5백만 프랑을 걸면서까지 잡고 싶어 했던 인물인 “낸시 웨이크(Nancy Wake)”와 같은 SOE 소속의 스파이였습니다.

 

영화 “샤롯 그레이”의 한 장면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는 일명 처칠의 비밀부대라고도 불리며 2차 대전 당시 1940년 7월 22일에 조직되어 1946년 1월 15일까지 운영되었고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세계 17개 지역에 지부를 운영하였던 특수작전부대였는데 그녀는 낙하산을 이용하여 프랑스에 침투하였고 체포될 때까지 105차례나 주요정보를 영국으로 송신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21년 영국인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에일린은 1923년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덕분에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언니 재클린(Jacqueline)과 오빠 프란시스(Francis)와 함께 SOE요원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남매는 서로 SOE요원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니 재클린(Jacqueline)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막내 에일린과 그녀의 언니 재클린을 영국으로 피신시키는데 자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코틀랜드를 거쳐 영국에 도착한 다음 이전의 포스팅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이야기들”에서 귀족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한 부대를 이은 “응급의용간호부대(FANY: First Aid Nursing Yeomanry)”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와 언니의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곧 SOE에 가입하게 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서로는 SOE에 가입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에 침투하게 되어 언니 재클린은 자금과 무기 및 탄약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되고 에일린은 무전을 담당하게 됩니다.

1944년 3월 2일, 에일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지부장이었던 프랑스인 “쟝 사비(Jean Savy)” 휘하에서 근무하던 두 명의 요원은 어린 나이의 에일린에게는 너무 위험하니 돌아갈 것을 바랐지만 여의치 않아 그녀를 데리고 와서 런던과의 무전교신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4월이 되고 지부장 “쟝 사비(Jean Savy)”는 독일이 새로운 V1로켓을 개발하여 영국으로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남겨진 에일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게슈타포에 의해 동료들이 하나둘 체포되는 와중에도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영국에 정보를 전달합니다.

1944년 7월 21일, 밖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자신이 발각되었음을 깨달은 에일린은 비밀문서를 불태우고 무전기를 숨기는데, 서류는 모두 없앴지만 무전기가 발각되어 게슈타포(Gestapo)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랗게 끌려간 에일린은 자신은 프랑스인이며 단순한 사업상의 내용을 주고받은 것이라 항변하지만 게슈타포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비롯한 심한 고문을 가하게 됩니다.

 

영화 피메일 에이전트의 한 장면

 

모진 고문에도 자신이 스파이였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게슈타포는 할 수 없이 전쟁포로가 아닌 일반인 수용자의 신분으로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 보내는데 당시 전쟁포로들의 옷에는 아래와 같이 X자를 써넣어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수용소에 수감된 에일린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강제노동에 동원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고문은 계속되었지만 끝까지 그녀는 비밀을 지켰고 1944년 12월에는 라이프치히 근처의 “마르클레베르크(Markleberg)”로 이감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루 12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에일린은 다른 두 명의 프랑스인과 함께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게 되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마는데 자신들은 프랑스 출신의 자원봉사자임을 설득하여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당에 은신할 수 있게 됩니다.

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은 그녀들을 종탑에 숨겨주었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에일린은 1945년 4월 15일, 미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발견되어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비밀리에 투입되었던 여성 SOE요원은 모두 39명이었다고 하는데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영국으로 귀환한 에일린에게 프랑스정부는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을 수여하고 영국정부는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

 

그러나 에일린은 심한 고문으로 인한 심리적인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런던에서 그녀의 동생과 함께 생활하다가 1982년, 동생이 죽자 토키(Torquay)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에일린이 살던 토키의 아파트

그녀는 1층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정부의 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역사학자 “마이클 풋(Michael Richard Daniell Foot)”이 1966년에 발간한 책(SOE in France)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그녀의 생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다가 2010년 9월 2일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쓸쓸할 수도 있었던 그녀의 장례식은 영국 재향군인회(The Royal British Legion)의 주선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치러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주변의 이웃에게는 그저 고양이를 사랑하는 할머니로만 여겨졌던 에일린 넌(Eileen Nearne)을 생각하면 게슈타포의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는지 그저 경이롭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장례식의 모습

 

부디, 이제는 전쟁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