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대학 Top20

미국에서 가장 범죄율이 높은 대학 Top20

미국 교육부가 2011년부터 2013년까지 재학생 1,000명 이상의 대학을 조사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미국의 회사(FindTheBest.com)가 분석한 바에 따르면 학생 1,000명당 가장 범죄율이 높은 미국의 20개 대학은 다음과 같다고 하니 혹시라도 유학을 계획 중이시라면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 범죄의 유형에 대한 세부정보를 제공하지 않아 강력범죄가 얼마나 되는지 등에 대하여도 알 수 없으니 단순참고용로만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 20위: 퍼모나칼리지(Pomona College)

위치 : Claremont,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18.6명

 

▶ 19위: 리빙스턴칼리지(Livingstone College)

위치 : Salisbury,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2건

1,000명당 사고율: 18.7명

 

▶ 18위: 프레즈비테리언칼리지(Presbyterian College)

위치: Clinton, Sou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7건

1,000명당 사고율: 18.8명

 

▶ 17위: 사우스대학교 스와니 캠퍼스(Sewanee-The University of the South)

위치: Sewanee, Tennessee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7건

1,000명당 사고율: 21.8명

 

▶ 16위: 히람칼리지(Hiram College)

위치: Hiram,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9건

1,000명당 사고율: 22.1명

 

▶ 15위: 클레어몬트 매케나 칼리지(Claremont McKenna College)

위치: Claremont,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1건

1,000명당 사고율: 23.3명

 

▶ 14위: 오레곤 건강과학대학교(Oregon Health & Science University)

위치: Portland, Oregon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67건

1,000명당 사고율: 23.6명

 

▶ 13위: 프랭클린칼리지(Franklin College)

위치: Franklin, India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25건

1,000명당 사고율: 24.7명

 

▶ 12위: 옥시덴탈칼리지(Occidental College)

위치: Los Angeles, Califor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54건

1,000명당 사고율: 25.4명

 

▶ 11위: 윌밍턴칼리지(Wilmington College)

위치: Wilmington,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25.6명

 

▶ 10위: 리드칼리지(Reed College)

위치: Portland, Oregon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0건

1,000명당 사고율: 28.3명

 

▶ 9위: 세인트 오거스틴대학교(Saint Augustine’s University)

위치: Raleigh,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30건

1,000명당 사고율: 25.6명(이 부분은 자료의 오류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 8위: 스와스모어칼리지(Swarthmore College)

위치: Swarthmore,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8건

1,000명당 사고율: 31.3명

 

▶ 7위: 쇼 대학교(Shaw University)

위치: Raleigh, Nor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71건

1,000명당 사고율: 34.4명

 

▶ 6위: 펜실베니아 주립 체이니대학교(Cheyney University of Pennsylvania)

위치: Cheyney,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45건

1,000명당 사고율: 37.1명

 

▶ 5위: 갈루뎃대학교(Gallaudet University)

위치: Washington, D.C.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59건

1,000명당 사고율: 37.8명

 

▶ 4위: The Art Institute of Pittsburgh

위치: Pittsburgh, Pennsylvani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61건

1,000명당 사고율: 39.5명

 

▶ 3위: 센트럴 주립대학교(Central State University)

위치: Wilberforce, Ohi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87건

1,000명당 사고율: 42.1명

 

▶ 2위: Inter American University of Puerto Rico-Barranquitas

위치: Barranquitas, Puerto Rico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119건

1,000명당 사고율: 57.4명

 

▶ 1위: 베네딕트칼리지(Benedict College)

위치: Columbia, South Carolina

연평균 사고 건수(2011년~2013년): 152건

1,000명당 사고율: 60.5명

 

미국의 F35를 복제한 중국의 스텔스기 선양 J-31

미국의 F35를 복제한 중국의 스텔스기 선양 J-31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국이 현재 개발 중에 있는 스텔스기 “선양 J-31”은 “FC-31″이라고도 불리는데 모양과 제원이 미국의 F35와 아주 흡사하며 F-35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F-35

 

J-31

 

F-35

 

J-31

 

지금처럼 중국의 스텔스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자체의 기술개발이 아니라 미국의 기술을 도용한 것이 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1999년에 있었던 F-117A 나이트호크(Night Hawk) 격추사건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손에 넣은 것이 중국이 최초로 스텔스기술을 습득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F-117A 나이트호크(Night Hawk)

 

1991년 걸프전쟁에서 단 1기의 피해도 없이 작전을 수행하여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F-117은 1999년 코소보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쏜 지대공미사일 S-125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구 소련에서 개발한 지대공미사일 “S-125 네바”의 NATO 코드네임은 “SA-3 고어”입니다. 따라서 F117이 S-125에 의해서 격추된 것이라는 것과 SA-3에 의해서 격추된 것이란 말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S-125

 

F-117은 최초로 개발된 스텔스기로 주로 고주파 레이더에 대한 스텔스 기능을 발휘하도록 제작된 것이었는데 세르비아군이 직전에 도입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던 체코제의 최신 “타마라 레이더(정식 명칭은 Tamara passive sensor)”는 저주파 레이더를 쏘는 것이어서 불행하게도 F-117은 탐지가 되었고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F-117을 탐지하고 격추시킨 데에는 레이더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세르비아군 미사일포대 대대장이었던 졸탄 다니(Zoltán Dani)의 치밀한 임전태세와 휘하 장병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졸탄 다니(Zoltán Dani)가 미사일포대를 운용했던 방식과 훈련 등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아무튼 그는 200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토군의 통신을 감청하여 F117의 예정항로를 사전에 알 수 있었고, 폭탄창이 열리는 순간 레이더로 감지하고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시킬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편 격추된 F117기의 조종사였던 데일 젤코(Dale Zelko)는 기체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8시간 뒤에 미공군 탐색대에 구조되어 귀환하였는데 그 이후 전역하여 빵집을 운영하는 졸탄 다니(Zoltán Dani)는 사건이 있고 나서 10년 뒤에 데일 젤코(Dale Zelko)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검정색 상의가 데일 젤코(Dale Zelko)

 

얘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중국의 스텔스기 개발에 관한 주제로 돌아오면, 중국은 F-117의 격추소식을 접하고 즉시 현지로 달려가 농부들이 수거한 기체의 잔해를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이는데 이것이 중국이 최초로 개발한 스텔스기 J-20의 바탕이 된 것으로 세계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09년 월스트리트지에서 “F35의 기술자료가 중국의 해커에 의해서 도난되었다.”는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개된 J-31의 제원을 보면 F35의 제원과 아주 유사하며 생김새는 거의 흡사해 보입니다.

2012년 10월 31일 시험비행을 마친 J-31은 2012년 주하이 에어쇼에서 1/4로 축소한 모형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2014년에 주하이의 에어쇼(China International Aviation & Aerospace Exhibition)에서 비로소 첫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F-35의 기술자료를 빼내 만든 선양 J-31은 F-35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 중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사용하는 엔진인데 F-35가 1개의 엔진인데 비해 J-31은 2개의 엔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개의 엔진을 쓰는 F-35복제품”이라고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선양 J-31”이 사용하는 엔진은 러시아의 크리모프(JSC Klimov)에서 만든 2개의 RD-93인데 각각 84kN의 추력을 내며, F-35가 사용하는 “프랫 앤 휘트니 F135” 엔진은 177kN의 추력을 내는 것에서 보듯이 중국의 엔진제조기술은 아직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모자라다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F-35

 

J-31

 

또 하나는 사용하는 레이더와 적외선 탐지 및 추적장치를 비롯하여 데이터 링크와 같은 전자공학 분야의 소프트웨어가 F-35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F-22랩터의 허용오차가 1만분의 1이었던 것에 비해 F-35는 그보다 더 엄격한 공차를 적용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선양 J-31”이 그런 정도로 제작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F-35의 복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선양 J-31”과 F-35의 제원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 분
F35
J31
길이
15.4m
17.3 m
10.67m
11.0m
자체중량
13,200kg
12,500kg
최대이륙중량
31,800kg
28,000kg
항속거리
2,300km
2,400km
최고속도
마하 1.8
마하 1.6

마가린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

마가린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들

1960년 국내 최초로 롯데푸드의 전신인 일동산업에서 마가린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일동산업은 1967년에 삼강산업으로 사명을 바꾸었고 1977년 롯데그룹에 인수되었다.

이처럼 국내에서 생산된 지는 60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마가린이 최초로 만들어진 것은 1869년의 일로 지금부터 150년 전의 일이다.

※ 2012년 박문각에서 출판한 ‘발명상식사전’에서는 1867년에 마가린이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프랑스를 비롯한 외국은 모두 1869년에 최초로 만들어진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진출처: 롯데푸드

 

1869년은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으로 비스마르크와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두 나라의 대립은 최고조에 달해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인구의 증가로 인한 수요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군용 버터의 수요가 늘어남으로 인해 나폴레옹 3세는 버터를 대신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사람에게는 포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표를 하였는데 이때 응모하여 채택된 것이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라는 화학자가 개발한 제품이었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파리 근교의 뱅센(Vincennes)에 있던 나폴레옹 3세의 개인농장에서 1867년까지 가축연구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이 때문에 박문각에서 펴낸 ‘발명상식사전’이란 책은 마가린이 개발된 해를 1867년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폴레옹 3세의 버터 대체품에 대한 공모가 있기 전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먹이가 부족하면 소의 체중과 우유의 생산량은 감소하지만 지방의 양은 크게 줄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지방으로부터 분리하는 연구를 거듭하여 결국 성공하게 되고 이것을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1870년 나폴레옹 3세로부터 포상을 받은 무리에는 파리 근교의 푸아시(Poissy)에 세계최초의 마가린 공장을 세우고 생산에 들어갔으나 곧이어 일어난 보불전쟁(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제대로 운영을 하지 못하고 네덜란드에 넘기게 된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을 마가린(Margarine)이라고 상표화한 다음 1869년 7월 15일 특허를 신청하여 1869년 10월 2일 프랑스에서 특허를 취득한 것을 필두로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미국에서도 특허를 취득하게 된다.

그런데 많은 기사나 정보를 보면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가 네덜란드의 유르겐스(Jurgens)에 특허를 판매하였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것은 틀린 것으로 이 부분을 조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프랑스를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에서 특허를 출원하고 취득했으나 네덜란드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은 당시 네덜란드에는 특허에 관한 법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는 1817년에 제정한 특허에 관한 법률을 1869년에 폐지했고 1910년에 새로운 특허법이 통과될 때까지는 특허를 신청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느 누구에게도 특허를 줄 수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는 특허가 아닌 생산방법에 관한 노하우를 넘겨주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한 것이며 또 한 가지 오류는 유르겐스(Jurgens)에만 넘겼다고 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1871년 6만 프랑을 지불하고 마가린 제조법을 손에 넣었던 안톤 유르겐스(Antoon Jurgens) 외에도 비슷한 시기에 사이먼 반 덴 버그(Simon van den Bergh)란 사람도 제조법을 손에 넣어 공장을 짓고 마가린의 생산에 뛰어들었다.

원래 소기름으로 만들던 마가린은 높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식물성기름을 사용하여 제조하게 되었으나 1906년에 닥친 원자재의 위기로 힘들어졌고 결국 안툰 유르겐스(Antoon Jurgens)와 사이먼 반 덴 버그(Simon van den Bergh)는 1927년 11월, 두 개의 마가린 제조업체와 합병하여 마르하리너 위니(Margarine Unie)로 변신하게 된다.

마르하리너 위니(Margarine Unie)는 영어로 마가린 유니(Margarine Unie)로 발음하며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회사인 유니레버(Unilever)의 전신이 되는 기업인데, 1929년 영국의 레버 브러더스(Lever Brothers)와 합병하면서 영어로 유니언(Union)을 뜻하는 네덜런드어 위니(Unie)에서 Uni를 따고 레버 브러더스(Lever Brothers)의 레버(Lever)를 붙여 탄생한 기업이 바로 유니레버(Unilever)인 것이다.

프랑스에서 개발되고 네덜란드에서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던 마가린은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퍼져나갔는데 1875년부터 마가린을 생산하기 시작했던 독일은 날로 소비가 증가하여 1차 대전 전까지 유럽 소비량의 1/3을 차지할 정도였다.

마가린의 숨은 이야기 중에는 고래와 2차 대전을 빼놓을 수가 없는데 식물성기름으로 제조하기 전까지 마가린의 제조에는 고래기름이 많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할아버지 안툰 유르겐스(Antoon Jurgens)의 뒤를 이어 마가린제조업을 하고 있던 손자 안톤 유르겐스(Anton Jurgens)는 포경사업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던 것 때문에 고래의 왕자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고 2차 대전과 고래기름에 대한 이야기는 별도의 포스팅을 하겠지만 마가린을 만드는데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많은 군수용품의 제조에 필요했던 고래 기름을 확보하기 위해 나치는 탐험대를 조직하여 남극으로 원정을 보냈는데 이것이 와전되어 나치독일이 U보트 비밀기지를 남극에 숨겨두었다는 가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치의 남극조사선 슈바벤란트(Schwabenland)

 

한편 1871년 미국의 헨리 브래들리(Henry W. Bradley)가 식물성기름과 동물성 지방을 조합하여 마가린을 제조하는 방법의 특허를 취득하고, 1901년에는 독일의 빌헬름 노르만(Wilhelm Normann)에 지방에 수소를 추가하여 상온에서 고형화시키는 실험에 성공하고 특허를 받은 이후로 동물성 마가린은 1945년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이폴리트 메주 무리에(Hippolyte Mège-Mouriès)가 처음으로 제조에 성공하고 붙인 이름이었던 올레오마가린(Oleomargarine)을 영어로 검색하면 생뚱맞게도 마크 트웨인에 관한 얘기들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올레오마가린 왕자 도난 사건(The Purloining of Prince Oleomargarine)이란 제목의 이 책은 마크 트웨인이 남긴 단 한 편의 동화로, 2011년 아모스 맥기씨가 감기에 걸린 날(A Sick Day for Amos McGee)이란 책으로 그림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칼데콧 상(The Caldecott Medal)을 수상한 에린 스테드(Erin Stead)가 삽화를 그리고 그녀의 남편 필립 스테드(Philip Stead)가 미완성이었던 것을 2017년에 책으로 펴낸 것이다.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마가린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2차 대전 당시 미 여군들이 빨간 립스틱을 발랐던 이유는?

2차 대전 당시 미 여군들이 빨간 립스틱을 발랐던 이유는?

빨간 립스틱은 1912년, 여성의 참정권을 적극 지지하던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이 행진을 하는 여성들에게 나누어주면서부터 저항의 상징이자 여성들의 힘의 상징으로 알려지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

 

그런데 엘리자베스 아덴을 소개하고 있는 국내 모 언론사의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볼 수 있다.

“세계 2차 대전 동안에 미국 여성들이 사회 진출을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아덴은 여성들의 니즈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군 유니폼 레드컬러와 매치되는 몬테수마 레드 립스틱을 만들어 애국적인 광고 캠페인을 진행했다.”

※ 출처: 파이낸셜뉴스

 

그러나 기자가 작성한 바와 같이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이 여성들의 변화하는 니즈를 파악하고 여군 유니폼 레드컬러와 매치되는 몬테수마 레드 립스틱을 만든 것은 아니었다.

이 부분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얘기를 먼저 알아야만 하는데 이 점을 기자는 소홀히 했던 것으로 보인다.

아는 것처럼 미국이 2차 대전에 참가한 것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당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데 참전하기 이전부터 군에 입대한 여성들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미군에서는 1941년에 의무화가 되었다.

이런 정책에 따라 탄생한 것으로는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의 빅토리 레드(Victory Red)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헬레나 루빈스타인(Helena Rubenstein)의 레지멘탈 레드(Regimental Red) 등 다양한 제품들이 출시되었다.

 

또한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이 여군 유니폼의 레드컬러와 매치 되는 몬테수마 레드 립스틱을 만들었다는 것도 100% 정확한 것이 아니라 절반만 맞는 정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다.

그녀가 몬테수마 레드(Montezuma Red)를 만들게 되었던 계기는 미국 정부의 요청 때문이었는데 미국 정부는 엘리자베스 아덴(Elizabeth Arden)에게 립스틱과 네일 컬러에 대한 규정을 만들어줄 것을 의뢰했고, 그 결과 탄생한 것이 여군 유니폼의 빨간색 파이핑과 매치가 되는 몬테수마 레드(Montezuma Red)였던 것이다.

 

따라서 기사에서 적고 있는 것처럼 엘리자베스 아덴이 여성들의 변화하는 기호를 파악하여 제품을 만들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 정부는 왜 여군들에게 빨간 립스틱을 바르도록 강제했던 것일까?

거기에는 2차 대전을 일으킨 아돌프 히틀러가 자리를 하고 있는데 이와 관련한 내용은 여성 저널리스트 레이첼 펠더(Rachel Felder)가 쓴 “빨간 립스틱: 뷰티 아이콘에 바치는 서정시(Red Lipstick : An Ode to a Beauty Icon)”란 책에 잘 나와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빨간 립스틱은 하수구에서 구출된 동물의 지방으로 만든 것”이라며 혹평을 하였다고 하며 미국의 화장품 전문 작가인 매들린 마쉬(Madeleine Marsh)의 말에 의하면 히틀러의 시골 휴양지를 방문하는 여성들은 과도한 화장을 해서는 안 되고 특히 빨간색 화장품을 사용해서는 안 되었는데 빨간 립스틱과 매니큐어를 바르고 방문한 여성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빨간 립스틱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된 연합국에서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것을 애국심의 표현이자 파시즘에 반대하는 상징으로 적극 권장하거나 사용을 의무화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매들린 마쉬(Madeleine Marsh)의 말은 검증되지 않은 것이어서 사실로 받아들이기엔 한계가 있지만 전쟁기간 동안 물자가 귀했던 영국에서는 빨간 립스틱 대신 비트 쥬스로 입술을 물들였다고 하니 일견 일리도 있어 보이긴 한다.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잘못된 판단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잘못된 판단

4월 27일은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이 판문점에서 열리게 되고, 다가오는 6월 13일에는 지방선거가 치러지게 되는데, 북한과 선거를 동시에 생각하니 떠오르는 인물이 있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남북 민간교류의 전기를 마련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대그룹의 창업자인 고 정주영 회장이 1998년 6월 소떼를 몰고 방북한 일화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제사에서 재벌들의 경제민주화에 대한 기여도는 논외로 하고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만 놓고 본다면 그들의 공을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이런 재벌 창업주들 가운데 자서전을 발간하여 베스트셀러가 된 예를 들자면 단연코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의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와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의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주영 회장에 관한 일화는 많지만, 여기서는 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정주영 회장이 정치권에 몸을 담게 된 동기는 박상하씨의 저서 “이기는 정주영 지지 않는 이병철”이란 책에 나와 있는 내용을 보면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책에서 정주영 회장은 “전두환의 5공화국 동안 기업에 어렵지 않을 때가 별로 없었지만, 창업자였던 아우 인영이가 옥고까지 치르면서 1전 한 푼 못 건지고 창원중공업 공장을 강탈당했던 기막힌 사건은 지워지지가 않는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 경제를 꾸준하게 발전시키려면 기업인의 능력만 가지고는 역부족이니까 언젠가는 정치를 해야겠다. 정치를 해서 정치가 열심히 기업을 이끌어 자기 기업을 성장시키는 모든 사람들한테 지장을 주거나 방해가 되는 일은 안 해야 되겠다. 그래야만 이 나라 경제가 경쟁력을 갖추고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중략) 그래서 나는 새롭고 창의적이며 능력 있는 정치가들이 나와서 이 나라 경제를 수렁에서 건지고 새로운 기풍을 진작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영원히 재기의 기회를 놓친다고 생각해서 정계에 나왔습니다.”라고 정계진출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정계진출의 진정한 이유인지 검증할 수는 없지만, 이리하여 정주영 회장은 당시 일반대중의 많은 인기를 받던 김동길 교수를 영입하여 통일국민당을 창당하고 급기야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까지 출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직도 근절되지 않은 금권선거가 당시에는 노골적으로 자행되던 시절이어서 정주영 회장의 금권선거도 노골적이었으며 현대그룹의 임직원을 비롯하여 협력업체들을 동원하려는 시도 또한 노골적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가 대주주로 있던 “한국경제신문”을 동원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

1964년 10월 일간스포츠신문이란 이름으로 창간한 현재의 한국경제신문은 1965년 10월에는 “현대경제일보”로 제호를 변경하였는데 미디어오늘의 기사에 나와 있는 한국경제신문의 지배구조를 보면 현재의 대주주가 20.55%의 지분을 보유한 “현재자동차”인 것에서 보듯이 현대그룹의 자회사였음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당시의 지분구조는 더 많았을 것으로 생각됨)

이미지 출처: 미디어오늘

이런 한국경제신문을 통하여 자신의 득표율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정주영 회장의 캠프에서는 “1년 무료구독권”을 발행하여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마도 60세를 전후하신 분들께서는 당시에 현대그룹에서 배포하던 무료구독권을 받으신 분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정주영 회장의 대선캠프에서 의도한 바와는 전혀 다르게 이 무료구독권이 사용되고 말았으니 정주영 회장으로서는 잘못된 판단을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실 이 글을 적을 때 원래 사용하려던 제목은 “죽 쒀서 개 준 정주영 회장의 판단”이었으나 작고하신 분에 대한 내용의 글을 작성하면서, 조금은 지나치다는 판단이 들어 제목을 “현대 정주영 회장의 잘못된 판단”으로 고친 것입니다.

당시에는 가정마다 신문을 구독하지 않은 세대가 없을 정도로 신문의 구독률이 높았지만, 한국경제신문의 경우에는 전국적인 배달체계를 갖추지 못해서 조선일보에 위탁하여 각 가정으로 신문을 배달하는 형태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의 경제신문들 가운데 가장 많은 구독률을 자랑하던 매일경제신문은 동아일보의 배달망을 이용하고 있었고, 경쟁지였던 “한국경제신문”은 조선일보의 배달망을 이용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정주영 회장 캠프에서 배포한 “1년 치 무료구독권”이 일선 신문보급소에서는 무료구독권을 받고 한국경제신문을 배달하는 대신에 구독권 소지자가 원하는 신문을 배달해주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조선일보사에 경제적인 이득을 안겨다줌은 물론 정주영 회장에 대한 비판적인 조선일보의 기사를 읽도록 만드는 형국이 되어 선거에 도움은커녕 악영향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고 만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현대그룹의 임직원들을 비롯하여 통일민주당의 당원 수가 1,200만에 달했던 것에 비해 실질적으로 거둔 득표수는 380만 표에 그친 것으로도 알 수가 있듯이 돈을 뿌리고도 혜택은 엉뚱한 곳에서 받는 패착을 범하고 만 것이었지요.

한국경제신문을 보라고 무료로 나누어준 구독권으로 조선일보를 구독함으로써 정주영 회장의 선거에 어떠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성균관대 백선기 교수가 작성한 “2007 대통령 선거보도 주요 이슈 점검”에 나오는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히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백선기 교수의 글을 보면 조선일보의 논조는 정주영 회장에 대하여 부정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 중 일부를 보면 “조선일보 역시 제1정당인 민자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긍정적인 기호들을 활용하여 우호적인 이미지를 양산하고 있다. 이에 반해 제2정당인 민주당 후보인 김대중 후보에게는 아주 부정적인 기호들을 중심으로 활용하여 적대적이거나 비우호적인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제3정당인 국민당의 정주영 후보에게는 이들 두 후보자들에 대한 관심보다는 적으며 정통의 정치인이 아닌 경제인의 대통령직에 대한 도전에 다소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울러 조선일보는 “정주영 후보에게는 ‘경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긴 하나, 정책이나 비전 제시에 대해 ‘통일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으며, 다른 두 후보자들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어 ‘초조해 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적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조선일보는 김영삼 후보에게는 ‘아주 우호적’인 이미지를 생성하면서 ‘강력하게 지원’하고 있으나 제3정당인 정주영 후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서울신문에 비해서는 ‘부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도랑치고 가재 잡으려던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만 금권선거의 한 자락을 보면서 오는 6.13 지방선거에 반드시 참가하여 주권을 행사함은 물론 불법·탈법이 자행되지는 않는지 두 눈 부릅뜨고 지켜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셜록 홈즈의 탄생은 시대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을까?

셜록 홈즈의 탄생은 시대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을까?

영국의 안과의사이자 소설가인 ‘아서 코난 도일(Arthur Conan Doyle)’이 쓴 추리소설의 주인공 ‘셜록 홈즈(Sherlock Holmes)’는 정작 작가인 코난 도일에게는 큰 만족감을 가져다주지는 못했다.

코난 도일은 “좀 더 고귀한 인간의 정신을 표현하는 글을 싶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으며 특히 그가 쓰고 싶었던 것은 역사소설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셜록 홈즈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던지 계속해서 추리소설을 쓰기가 싫었던 코난 도일이 출판사에 거절의 뜻으로 “1천 파운드를 주면 셜록 홈즈를 계속 쓸께!”라고 말하자 즉시 “OK!”라고 수락해버리는 일이 있었다고 한다.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가 발표된 1887년은 이스트 런던 지역인 화이트채플에서 최소 다섯 명이 넘는 매춘부를 극도로 잔인한 방식으로 잇따라 살해한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이 발생하기 1년 전이었다.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가 현장에 남긴 유일한 단서는 “유태인은 아무 책임이 없다.(The Jewes are The men That Will not be Blamed For nothing)”는 휘갈겨 쓴 메모였는데 나는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가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배경이자 대중의 인기를 받게 만드는 요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낙후된 수사기법과 신분제도에 따른 수사의 한계로 인해 강력범죄가 발생하면 실제 범인이 누구인지 정확한 물증도 없이 유대인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귀족이나 왕족이 범인일 경우에는 아예 사건을 은폐하는 일도 만연하고 있었고, 당시의 경찰들이 주안점을 둔 것은 실제 범인의 체포가 아니라 강력범죄로 인한 민심의 불안을 잠재우는 것이 더 큰 목적이었던 것도 시민들이 셜록 홈즈에 열광하도록 만드는 요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1811년 12월, 영국 런던의 간선도로에서 일어났던 ‘랫클리프 대로 살인사건 (Ratcliffe Highway murders)’인데 이 사건 또한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와 함께 미해결사건으로 남아 있지만 12월 23일 27세의 선원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체포·수감되게 된다.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저지른 것이라고 단정지었던 사건은 1811년 12월 7일 랫클리프 간선도로 옆의 옷가게에서 주인부부와 생후 3개월 된 아기 및 점원을 살해한 사건과 12월 19일 옷가게 근처의 술집에서 주인부부와 하녀 등 3명을 살해한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용의자로 지목되었던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는 12월 27일 구치소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는데 경찰은 그의 시신을 마차에 싣고 런던거리를 순회하면서 공포에 떨던 시민들의 불안감을 없애려 하였고 군중들 앞에서 죽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심장에 말뚝을 박아 구덩이에 던지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현재까지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가 진범이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으며 당시 랫클리프 간선도로가 지나던 런던의 ‘이스트 엔드(East End)’는 수 천 명의 선원과 노동자들로 붐비는 곳이었고 아무런 근거도 없이 수많은 이민자들과 유대인, 중국인 등의 외국인들이 범죄를 저지른다고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랫클리프 대로 살인사건 (Ratcliffe Highway murders)’의 범인으로 처음에는 포르투갈인이 지목되었다. 물론 이것은 전혀 근거가 없는 일이었고 단지 “포르투갈 사람이 아니면 누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가?”하는 대중들의 편견 때문이었으며 그 다음으로 지목된 것이 아일랜드인이었다고 한다.

한편 범인으로 지목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의 조서에는 “키가 작고 다리를 저는 영국인”이라고 적혀 있으나 실제로 ‘존 윌리엄스(John Williams)’는 다리를 절지도 않았으며 더군다나 그는 스코틀랜드인이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잘못된 수사란 증거가 많으나 이쯤에서 멈추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처럼 낙후된 수사기법으로 범인을 잡지 않고, 만들어내고 있던 영국경찰은 현재 대한민국 국민들의 불신을 받고 있는 검찰이 무혐의 처리한 전 법무부차관 김학의 사건과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사건이 바로 ‘프랜시스 사빌 켄트(Francis Saville Kent)’ 유괴살인사건이다.

1860년 6월 29일 밤부터 30일 아침 사이에 당시 4세의 어린 나이였던 ‘프랜시스 사빌 켄트(Francis Saville Kent)’가 집(Road Hill House)에서 사라진 후 옥외화장실에서 목인 잘린 시체로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 사건은 상류층의 가정에서 발생한 것이어서 사회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위쳐(Whicher)’ 형사는 범인으로 피해자의 누나인 16세의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를 지목하지만 노동자계급인 ‘위쳐(Whicher)’형사가 상류층의 소녀를 범인으로 지목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당시의 상류층은 언론을 이용하여 “아직 16세에 불과한 소녀, 그것도 피해자의 누나가 범인이란 것은 심한 날조”란 여론을 형성하였고 마침내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는 무혐의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는 자기가 범인임을 고백하였지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사건은 종결되고 마는데 노동자계급이면서도 상류층의 범죄를 수사하여 진범을 밝힌 ‘위쳐(Whicher)’는 대중들로부터 갈채를 받지만 반면에 영국경찰에 대한 불신은 더욱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드디어 1887년 11월에 오늘의 주제인 셜록 홈즈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인 ‘주홍색 연구(A Study in Scarlet)’가 발표되지만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다음 해인 1888년에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1890년에 발표한 두 번째 작품인 ‘네 개의 서명(The Sign of Four)’은 크게 히트를 치면서 ‘셜록 홈즈’라는 영웅이 탄생하게 된다.

 

뛰어난 지략과 추리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셜록 홈즈’가 대중의 인기를 끌 수 있었던 것은 ‘조제프 푸셰(Joseph Fouche)’에 의해 현대적으로 변한 프랑스 경찰을 동경하여 1829년에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라는 런던 전역을 관할하는 경찰조직을 만들었지만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실망한 것도 큰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는 ‘런던 경시청(Metropolitan Police Service, MPS)’을 가리키는 애칭 또는 별칭인 환유어로 현재는 공식적으로 ‘뉴 스코틀랜드 야드(New Scotland Yard)’로 부른다.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로 불리게 된 동기는 초대의 청사가 있던 런던 화이트 홀 플레이스 4번지의 뒷문이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Great Scotland Yard)’ 대로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역사를 지닌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는 셜록 홈즈 시리즈뿐만 아니라 ‘80일간의 세계일주’ 등 여러 작품에서 묘사되곤 하는데 언제나 셜록의 뒷북을 치는 수사를 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것을 보면서 나는 언제나 언론의 뒷북을 치고 있는 버닝썬과 관련한 대한민국 경찰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음을 느끼게 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관심거리인 ‘버닝썬 사건’과 ‘김학의 사건’을 보면서 나는 우리의 경찰과 검찰이 자꾸만 무능했던 영국의 ‘스코틀랜드 야드(Scotland Yard)’와도 너무 닮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또한 ‘콘스탄스 에밀리 켄트(Constance Emily Kent)’가 범인일리 없다던 영국언론의 모습은 국내 모 언론사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제발 이번 기회에 견찰과 떡검이란 오명을 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일본 간장회사 로고에 숨어있는 상(上)자의 의미

일본 간장회사 로고에 숨어있는 상(上)자의 의미

일본불매가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식문화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일본의 음식 중에서 왜간장이라고 불리는 일본식 간장은, 만드는 방법을 공유하는 정보들과 판매업체들의 홍보가 만연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식 간장이 아니라 일본에서 생산된 간장을 직수입하여 소비하는 양은 일식(日食)문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며 일본제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시작된 이후로도 그 추세는 크게 꺾이지 않고 있는데 지난 5년간 일본에서 수입한 간장의 수입통계는 아래와 같다.(대부분 무역적자)

 

일본의 간장회사 로고를 보면 제일 위쪽에 상(上)자가 들어있는 것들이 있는데 이것은 해당 간장을 만드는 곳이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얼마나 우수한지를 나타낸다.

즉 로고의 제일 위쪽에 상(上)자가 있다면 그 제품을 만드는 곳은 적어도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일본정부로부터 인정받은 우수한 간장을 만드는 곳이라고 보면 된다.

일본에서는 에도막부 말기인 1864년 물가의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상인들에게 판매가격의 30~40%를 할인하도록 지시하였으나 그 중에서 품질이 높은 7개의 간장은 가격을 낮추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하면서 최상의 간장이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당시 가격인하를 하지 않아도 되었던 7개의 간장회사는 아래와 같으며 로고에 상(上)이란 한자를 붙인 것은 위로부터 보증을 받은 간장이란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었다.

왼쪽 위로부터 히게타(ヒゲタ), 야마사(ヤマサ), 야마쥬우(ヤマジュウ), 디가미사(ヂガミサ) 오른쪽 위로부터 죠우쥬우(ジョウジュウ), 키코만(キッコーマン), 키하쿠(キハク)

 

7개의 간장 브랜드는 지금은 대기업에 흡수되어 사라진 곳들도 있으며 세계 여러 나라로 수출하기 위해서 기존의 로고 대신에 새롭게 만든 것을 사용하는 키코만과 같은 곳도 있다.

​음식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

​음식을 둘러싼 이스라엘과 아랍의 분쟁

아랍 제국과 이스라엘의 대립은 오랜 역사만큼이나 복잡한 국제사회의 이해관계가 얽혀있어서 지금도 긴장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우리에게도 제법 알려진 병아리콩으로 만든 후무스(Hummus)란 음식을 두고서도 분쟁이 있다.(정확히는 분쟁이라기보다는 다툼이라고 하는 것이 맞겠다.)

후무스(Hummus)의 기원을 두고 다투는 것을 보면 발바닥 신자이긴 하지만 성당을 다니는 내가 볼 때도 이스라엘의 주장은 조금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어쨌거나 아랍과 이스라엘이 각기 후무스(Hummus)의 원조라고 주장하는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 이스라엘의 주장

후무스(Hummus)는 미국에서도 인기가 높은 요리인데 미국시장에서 후무스 판매의 60%를 차지하는 회사로 사브라 디핑(Sabra Dipping Company, LLC)이란 곳이 있다.

연간 우리 돈으로 1조가 넘는 매출을 올리는 이 회사는 2005년에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식품제조업체인 스트라우스 그룹(Strauss Group Ltd.)으로 인수가 되었는데 사브라사는 이스라엘인들이 아랍인들보다 2배 많은 후무스를 소비한다고 주장한다.

아랍의 할랄푸드(Halal food)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겐 식사와 관련된 율법인 카샤룻(kashrut)에 따라 먹기에 적합하다는 것으로 결정된 코셔(Kosher) 또는 코셔푸드(Kosher food)라는 것이 있는데 후무스가 바로 코셔푸드일 뿐 아니라 유대인들의 문화적 공통성과 결속을 상징하는 음식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런 후무스가 유대인들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구약성서의 롯기 제2장 14절에 있는 ‘끼니때가 되자 보아즈는 롯에게, “이리 와서 음식을 들고 빵조각을 식초에 찍어 먹어라.” 하고 권하였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 기독교의 성경에는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라고 되어있다.

이 중에서 빵을 식초에 찍어 먹어라고 권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지만 그것은 성경에 있는 hometz란 단어가 히브리어로 식초를 뜻하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실제론 hometz가 후무스(Hummus)를 말한다고 이스라엘은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말부터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 활발해지면서 중동을 비롯하여 유럽 및 세계 각지의 후무스 레시피들이 이스라엘에 모여들면서 이스라엘의 후무스 문화가 풍부해진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져 보인다.

※ 2015년 이스라엘의 영화감독 오렌 로젠펠드(Oren Rosenfeld)가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후무스 더 무비(Hummus the Movie)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이 즐기는 후무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 아랍권의 주장

이스라엘의 주장에 비해 아랍의 주장은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아랍이 후무스의 기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14세기 이집트의 칸즈 알 화이드(Kanz al-fawaid)라는 사람이 쓴 요리책에 후무스와 비슷한 레시피가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번역가인 나왈 나슬랄라(Nawal Nasrallah)가 “Treasure Trove of Benefits and Variety at the Table”란 제목으로 번역한 책이 판매되고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아마존으로 가시면 될 것 같다.

 

■ 후무스 전쟁(Hummus Wars)

위에서 이스라엘과 아랍이 주장하는 후무스의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판단은 어떤지 궁금한데 이번에는 후무스를 둘러싼 조금은 재미있는 다툼을 알아보도록 하자.

후무스를 두고 벌이는 다툼을 후무스 전쟁(Hummus Wars)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아랍과 이스라엘의 다툼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사들이 벌인 경쟁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다.

후무스 전쟁(Hummus Wars)의 발단은 서두에서 소개했던 사브라 디핑(Sabra Dipping Company, LLC)이 펩시와 손잡고 판촉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후무스를 만들었다고 홍보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이런 홍보를 보고 있던 또 다른 이스라엘의 식품업체인 오셈(Osem Investments Ltd.)이 그보다 더 큰 400㎏에 달하는 후무스를 만들어 기네스에 등재되자 이스라엘의 언론들이 이를 두고 후무스 전쟁(Hummus Wars)이란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전쟁으로 불리고 있다.

400㎏ 크기의 후무스

 

이스라엘이 후무스의 원조라고 주장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후무스를 만들고 또 그것이 언론에 보도되어 세계로 널리 알려지게 되자 아랍권에서는 이것을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중에서 레바논의 관광부장관을 지낸 사업가 파디 아부드(Fadi Abboud)는 “이스라엘은 영토뿐만 아니라 역사와 전통을 비롯한 아랍의 모든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인물인데 이 사람이 주축이 되어 ‘우리의 요리에서 손을 떼라(Hands off Our Dishes)’로 명명한 캠페인을 추진하였다.

2009년 10월에 완성된 이 캠페인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2톤짜리 후무스를 만들어 이스라엘이 세운 기록을 깬다는 것이었고 그 캠페인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두고만 보고 있었을까? 당연히 그냥 보고 있지만 않았고 2010년에는 4톤짜리 후무스를 만들어 또다시 레바논이 세운 기록을 갈아치워 버린다.

 

그러자 이번에는 레바논이 300명의 요리사를 동원하여 2011년 5월 18일에 10톤 크기의 후무스를 만들어 새로운 기록을 수립하였다.

1년에 10일만 볼 수 있다는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

1년에 10일만 볼 수 있다는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

매년 4~5월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의 하나라고 하는 할레보스(Hallerbos)는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라벤더와 비슷한 색깔을 가진 꽃 블루 벨(Bluebells)로 물든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기간은 단지 10여일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할레보스(Hallerbos)는 네덜란드어로 ‘할레 숲(Halle forest)’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언론이나 블로그 등에서 사용하고 있는 ‘할레보스 숲(Hallerbos forest)’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할레보스(Hallerbos)는 벨기에의 수도인 브뤼셀 인근의 할레(Halle)시에 위치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블루 벨은 주위의 나무나 꽃들이 싹을 피우기 전에 잠깐 만개하였다가 지기 때문에 주로 이른 봄에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블루 벨의 아름다움으로 물드는 할레보스(Hallerbos)도 인간에 의해 파괴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할레보스를 관리하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숲의 주인은 7세기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바뀌었다고 하는데 최초의 주인은 686년 ‘세인트 발트루디스(Saint Waltrudis) 수도원’이었다가 이후 ‘아렌베르크 공작(Duke of Arenberg)’의 소유에서, 1851년에는 네덜란드령이 되었다가, 1831년에는 다시 아렌베르크 공작의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9년, 아렌베르크 공작 가문의 모든 재산은 독일의 배상금에 대한 보증으로 벨기에 정부에 의해서 압수되어 벨기에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이미 그 때는 숲의 대부분은 파괴되고만 상태였다.

 

파괴된 숲을 되살리기 위해 벨기에 정부에서는 그 후 20여 년 동안 조림사업을 실시하였는데 1968년 브뤼셀과 파리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건설공사로 인해 또 다시 24ha가 파괴되어 지금은 총면적이 542ha 정도만 남았다고 한다.

할레보스(Hallerbos)에서 블루 벨(Bluebells)의 아름다움과 함께 자연의 정취를 만끽하고 싶다면 공식사이트(Hallerbos)를 방문하면 할레보스의 사계절을 감상할 수 있고 지도도 다운 받을 수가 있다.

 

직접 가볼 수는 없지만 할레보스(Hallerbos)의 아름다움을 보기 원한다면 네덜란드의 유튜버인 ‘Pieke’씨가 만든 아래의 영상을 보는 것이 홈페이지에 있는 영상을 보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제2차 북미정상회담에서 좋은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고 해서 비핵화를 넘어 남과 북이 공존·공영하면서 통일을 달성하려는 우리의 뜻이 좌절된 것은 아니다. 다시는 이 땅이 할레보스(Hallerbos)처럼 전쟁에 의해 2번이나 파괴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기에 결렬된 하노이회담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의 노력을 관심 갖고 지켜보려고 한다.

설탕이 갈라놓은 형제 사이

설탕이 갈라놓은 형제 사이

미국의 시리얼 제조업체인 켈로그(Kellogg’s)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가 1922년에 우리가 알고 있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바뀌게 되었다고들 알고 있는데 그보다 앞선 켈로그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고 그 이면에는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숨어있다는 사실을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그리고 오늘은 마침 바로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태어난 날이다. 1860년 4월 7일 출생한 그는 1930년에 사업에서 번 돈으로 ‘W. K. 켈로그재단(W. K. Kellogg Foundation)’을 설립하였는데 1934년 그가 재단에 기부한 6천6백만 달러는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평가된다.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

켈로그의 처음 회사명에 ‘배틀 크리크(Battle Creek)’란 단어가 들어있는 이유는 의사였던 형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관리하고 있던 미시간 주의 요양원 이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들 형제가 태어난 곳이 미시건(Michigan)주의 배틀 크리크(Battle Creek)였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내용이지만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뿐만 아니라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함께 근무를 하였다.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

 

그러나 이 요양원이 1866년 9월 5일에 처음 문을 열 때에는 요양소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서부건강회복연구소(Western Health Reform Institute)’란 이름으로 개원하였는데 1902년 화재로 다시 문을 열게 되면서 처음으로 요양소(Sanitarium)란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에서 1876년부터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소장으로 재임하게 되었고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도 경리직원으로 근무를 했던 것이다.

배틀 크리크 요양소(Battle Creek Sanitarium)

 

켈로그 형제가 공동으로 설립한 최초의 회사는 1898년에 창업한 ‘배틀 크리크 요양소 건강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Health Food Company)’였고 이것이 1901년에는 ‘배틀 크리크 요양소 식품회사(Battle Creek Sanitarium Food Company)’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1899년에 혼자 설립하여 경영하고 있던 회사(Sanitas Nut Food Company)와 합병하여 1908년 7월에 회사이름을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1921년에 다시 회사명을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는 가장 큰 이유가 형제간의 갈등임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그들의 신념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욕심 때문이었는지는 판단할 길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켈로그(Kellogg)’란 회사는 동생인 ‘윌 키스 켈로그(Will Keith Kellogg)’가 1906년 2월 19일에 설립한 ‘배틀 크리크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Battle Creek Toasted Corn Flake Company)’을 설립한 것보다 훨씬 이전부터 사업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며 동생이 별도로 1906년에 기업을 창업하게 되는 것은 잘 알고 있는 것과 같이 형제간의 갈등이 그 이유이다. 그리고 동생이 갈라져 나갔기 때문에 형도 그의 개인회사를 공동으로 설립했던 회사와 합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형과 동생은 사이좋게 회사를 공동운영다가 무슨 이유로 결별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맛의 개선을 위해선 설탕을 사용해야 한다.’는 동생의 의견과 채식주의자이면서 금욕주의자였던 형의 ‘설탕은 탐욕을 증가시킴으로 사용해선 안 된다.’ 의견이 서로 대립했기 때문이었다.

설탕의 사용을 두고 형제간에 갈등이 심화되면서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는 동생에게 요양소에 있는 환자들 외에는 시리얼을 공급하지 말라고 통보하게 되었고, 이것이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하여 동생이 별도의 회사를 차리게 되었지만 레시피는 동생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한편 동생의 회사는 1909년에 이름을 ‘켈로그 토스티드 콘플레이크 컴퍼니(Kellogg Toasted Corn Flake Company)’로 바꾸면서 1908년부터 회사명에 ‘켈로그’를 쓰고 있던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와 또 다른 갈등을 겪게 된다.

이름도 비슷하고 포장과 내용물까지 유사한 두 회사의 제품은 소비자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하여 마침내 1920년, 동생이 형을 고소하여 승소하게 됨으로써 독점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었는데 그런 결과의 하나로써 형의 ‘켈로그 식품회사(Kellogg Food Company)’는 1921년부터 회사이름에서 켈로그를 빼고 ‘배틀 크리크 식품회사(Battle Creek Food Company)’로 바꾸게 되었고 동생의 회사는 지금의 이름인 ‘켈로그 컴퍼니(Kellogg Company)’로 사명을 변경하고 ‘켈로그(Kellogg’s)’란 이름으로 사업을 펼치고 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나 사업적으로 많은 갈등을 겪었던 켈로그 형제는 형인 ‘존 하비 켈로그(John Harvey Kellogg)’가 말년에 형제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하지만 그의 비서가 보내지 않는 것이 옳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90세를 일기로 1943년 12월 14일에 세상을 떠난 이후에야 동생이 그 편지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켈로그 형제의 갈등이 자신들의 신념에 따른 것이었는지 아니면 욕심에 의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죽기 전에 무너진 관계를 회복하기 바랐던 것을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죽음을 앞두고는 고향을 그리워하게 된다는 뜻의 고사성어 수구초심(首丘初心)이 새삼 떠오른다.

있을 때 잘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