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는 존재할까?(feat. P. T. 바넘)

인어는 존재할까?(feat. P. T. 바넘)

덴마크의 동화작가 한스 안데르센(Hans Christian Andersen)이 1837년에 쓴 인어공주(The Little Mermaid)는 어린 시절 동화책으로 접해보지 않은 사람을 찾기가 어렵지 않을까 생각된다.

동화 인어공주의 삽화

 

이처럼 친숙한 인어는 영화 속에서도 자주 등장하고 월트디즈니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기도 했는데 오늘의 주인공인 P. T. 바넘이란 사람은 세상을 상대로 가짜 인어로 한탕 사기극을 크게 펼친 인물이다.

P. T. 바넘이란 인물이 다소 생소할 수도 있겠는데 영화 위대한 쇼맨이 바로 이 사람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했던 미국의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던 P. T. 바넘의 풀네임은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으로 영화에서는 휴 잭맨이 역을 맡았었다.

피니어스 테일러 바넘(Phineas Taylor Barnum)

 

영화 위대한 쇼맨의 포스터

희대의 사기꾼이라는 수식어도 함께 따라다니는 P. T. 바넘이 친 사기극 중에서 오늘은 가짜 인어로 대중을 기만한 일과 그것이 인어를 가지고 세상을 농락했던 첫 번째는 아니었다는 숨은 얘기들을 알아보도록 하자.

17세기경까지도 인어의 존재는 유럽에서는 당연시되고 있던 것이어서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탄생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현재까지도 세계의 박물관들에는 인어의 표본들이 전시되고 있다.

그러나 전시 중인 인어의 표본은 100% 가짜들이며 그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 소개하는 P. T. 바넘이 만든 피지 인어라고 하는 것인데 영어로는 Feejee Mermaid, Fiji Mermaid, FeJee Mermaid로 표기한다.

1842년 바넘의 박물관에 전시될 때의 모습은 입을 크게 벌려 이빨이 보이는 상태에서 오른손은 오른쪽 뺨에, 왼손은 왼쪽 턱 아래에 두고 있었으며 남태평양 피지 근처에서 잡은 것이라고 뻥을 치면서 피지 인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인데 1865년 7월 13일에 있었던 박물관의 화재로 소실되어 현존하지는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도 명확하지는 않다.

 

그런데 P. T. 바넘보다 먼저 피지 인어를 이용하여 사기를 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라는 미국인 선장이었다.

언제 누가 피지 인어를 만들었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인원의 상체에 물고기의 몸을 꿰어 만드는 것은 일본과 동인도 어부들 사이에서는 종교적으로 행해지던 일이었으며 바넘의 피지 인어는 아마도 일본에서 만든 것이 아닐까 추정하고 있다.

그 이유는 1810년대 무렵에는 네덜란드인들이 일본과 교역하는 유일한 서양인들이었고, 1852년 3월에 동인도함대 사령관에 취임하여 일본을 개국하게 만든 페리 제독으로 인해 일본이 더 많은 교역을 하면서부터 서양에 더 많은 피지 인어가 나타났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

아무튼 일본에서 가짜 인어를 구입한 네덜란드인이 선원인지의 여부는 알 수 없으니 침몰한 네덜란드 상선의 승무원들을 구조하면서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 선장은 가짜 인어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1822년 1월 그것을 6천 달러를 지불하고 구입하게 된다.

1822년의 1달러를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22.15달러가 되고 당시의 6천 달러는 지금 가치로는 132,900달러가 되니 오늘자 매매기준율에 따르면 우리 돈으로 1억 6천이 조금 안 되는 금액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는 돈이 없었던 까닭에 배를 팔아 돈을 지불했고 여비가 떨어진 그는 남아공의 케이프타운에서 가짜 인어를 전시했는데 이를 본 어느 영국선교사가 인어는 진짜라는 신문기사를 작성해줌으로써 사무엘 선장은 여비도 넉넉히 챙기고 인어를 전시하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영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이렇게 해서 가짜 인어를 가지고 1822년 9월, 사무엘 선장은 영국에 도착하여 커피숍에서 전시회를 개최하였는데 당시 관람료는 1인당 1실링이었다.

1822년의 1실링은 지금의 6.39파운드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우리 돈으로는 대략 1만 원 정도가 되는데 이런 큰돈을 지불하고서도 관람하겠다는 사람들이 매일 수백 명씩 몰려들면서 사무엘 선장은 크게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지만 욕심이 화를 부르는 사건이 생기고 만다.

런던에 도착한 사무엘 선장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인어의 표본은 진짜라고 확신을 하고 있었으나 권위 있는 박물학자들로부터 인증을 받으면 더 큰돈을 벌 것이라 생각해서 몇몇 학자들을 찾아다니지만 그들은 모두 사무엘 선장이 가지고 있던 인어를 가짜라고 판명하게 된다.

그래서 사무엘 선장은 조금은 급이 떨어지는(?) 학자들로부터 진품이라는 평가를 받아 전시에 이용하게 되는데 여기서 멈추었더라면 그나마 성공한 사기극이 될 수 있었겠지만 사무엘 선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의 저명한 박물학자이자 외과의사였던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도 진품으로 인증하였단 개뻥을 치기 시작한다.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

 

그리고 이런 사기극에 자신의 이름이 도용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버라드 홈(Sir Everard Home)은 격노하여 사무엘의 인어는 가짜라는 기사를 각종 신문과 출판물에 기고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사무엘의 가짜 인어를 보려는 사람들이 격감하면서 1823년 1월, 불과 5개월의 기간 만에 사무엘의 사기극은 막을 내리게 된다.

아래의 그림은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사무엘 선장이 주간지 더 미러(The Mirror)에 게재했던 광고인데 이 광고가 게재된 것이 1823년 1월이고 광고의 시작과 함께 그의 사기극도 끝이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무엘 선장이 가짜 인어의 구입대금으로 지불했던 6천 달러는 배가 그만의 것이 아닌 공동소유였던 때문으로 다른 소유주에 의해 소송을 당하면서 결국 돈을 상환하지 못한 사무엘 선장은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이나 배를 타야만 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빚을 상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사무엘의 죽음과 함께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진 인어 표본은 20년 동안이나 세상에서 모습을 감추게 되었는데 사무엘 선장으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라곤 가짜 인어 밖에 없었던 그의 아들이 그것을 1840년대 초 보스턴에 박물관을 가지고 있던 모세 킴벌(Moses Kimball)에게 팔면서 다시 한 번 가짜 인어는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계기를 맞는다.

1842년 모세 킴벌(Moses Kimball)은 박물관을 구입하였다는 친구인 P. T. 바넘을 만나기 위해 보스턴에서 뉴욕으로 가면서 가짜 인어를 가지고 가서 인어를 이용한 전시회를 함께 개최해볼 것을 권유하게 된다.

그리고 위대한 쇼맨이자 희대의 사기꾼이었던 P. T. 바넘은 가짜 인어를 이용한 사기극을 성공시키기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가공의 인물인 그리핀 박사(Dr. Griffin)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P. T. 바넘은 이미 그 이전부터 사기극의 손발을 맞춰온 사이였던 레비 리먼(Levi Lyman)을 그리핀 박사(Dr. Griffin)로 둔갑시켜 인어가 진짜라는 것을 대중이 믿도록 만드는 한편 박물학자들에게도 감정의 의뢰한다.

그리고 감정을 한 박물학자들은 인어가 가짜인 것은 분명한 것 같은데 이빨과 지느러미 등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입증할 수 없어서 가짜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애매모호한 감정결과를 내놓게 되고 P. T. 바넘은 대중은 진짜라고 믿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매주 12.5달러를 지불하기로 하고 친구인 모세 킴벌(Moses Kimball)로부터 가짜 인어를 임대하게 된다.

가짜임은 분명한데 가짜를 입증할 수 없다는 감정가들의 결론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인어가 가짜라는 것을 P. T. 바넘은 알고 있었으나 그에게는 인어의 진위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면 대중들이 그것을 진짜로 믿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고 그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 그리핀 박사(Dr. Griffin)라는 가공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P. T. 바넘은 사람들을 시켜 그리핀 박사(Dr. Griffin)가 포획한 이상한 물체가 있다는 것을 각 언론사에 제보하도록 하는데 얼마나 치밀했는가 하면 발신하는 장소를 각기 달리하여 편지를 보낼 정도였다.

그리고 레비 리먼(Levi Lyman)이 둔갑한 가공의 그리핀 박사(Dr. Griffin)가 필라델피아의 호텔에 투숙한다는 정보를 흘리자 그가 묵었던 방에는 언론사의 편집자들이 줄을 서게 되는 진풍경이 일어났고 P. T. 바넘과 레비 리먼은 5일 동안만 일반에게 공개하기로 하고 뉴욕의 콘서트홀에서 전시를 하는데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P. T. 바넘의 뉴욕박물관과 모세 킴벌(Moses Kimball)의 보스턴박물관을 오가며 20년 가까이 전시되었는데 영국에서 가짜라는 판정을 받고 사무엘 선장이 다시 배를 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던 가짜 인어는 1859년 P. T. 바넘에 의해 런던에서 다시 전시되면서 큰 인기를 끄는 웃지 못할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1858년의 바넘박물관의 모습과 현재의 모습

 

미국으로 돌아온 P. T. 바넘은 피지 인어를 1859년 6월에 킴벌의 박물관에 반환하였고 그 이후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1865년의 화재로 소실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다.

왜 그런가 하면 1859년 6월에 킴벌의 박물관에 가짜 인어를 반환하고 다시 임대한 적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1865년에 일어난 바넘박물관의 화재와 피지 인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1880년대 초에 일어난 킴벌의 보스턴박물관 화재와 함께 소실되었을 가능성인데, 이것도 1897년, 킴벌의 상속자가 피지 인어를 하바드 대학교의 피바디박물관에 기증을 함으로써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피바디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피지 인어가 P. T. 바넘 이전에 사무엘 이즈(Samuel Barrett Eades) 선장이 보유하고 있던 것인가는 알 수가 없다.

 

이런 이유로 가짜에서 출발한 인어 사기극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언제 또다시 대중을 기만하는 새로운 사기꾼들과 모습을 드러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피지 언어라는 단어는 가짜 인어를 뜻하는 것임에는 분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전사한 미국병사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전사한 미국병사

1945년 일본의 무조건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8일 미 육군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가 하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망한 안소니 마키오네는 2차 세계대전 최후의 사망자가 되었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본군 조종사 고마치 사다무(小町定)는 종전 후에도 살아남았는데 그가 일으킨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2차 세계대전은 자칫하면 끝나지 않고 계속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고마치 사다무(小町定)

 

전쟁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보다는 천황제의 유지가 최대 관건이었던 일본의 수뇌부에서는 항복을 두고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궁성사건(宮城事件)”이라고 불리는 쿠데다 미수사건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밤부터 8월 15일 새벽 사이에 육군성의 일부세력과 근위사단 참모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건은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일본천왕이 항복하는 내용을 육성으로 녹음한 것의 탈취를 기도하는데, 이 사건은 1965년에 혼도 카즈토시(半藤 一利)에 의하여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운명의 8월 15일: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運命の八月十五日)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1967년과 2015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2015년작 ”일본 패망 하루 전“이란 제목의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2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미육군 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는 이런 일련의 항복에 반대하는 움직임 중의 하나인 아츠항공대사건(厚木航空隊事件)으로 말미암아 전사하게 됩니다.

아츠항공대사건(厚木航空隊事件)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항복에 반대하는 당시의 아츠비행장에 주둔하던 제302항공사령부의 사령관이었던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가 항복에 반대하고 공식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하면서 항전을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휘하의 조종사들에게는 일본 상공에 출현하는 연합군 비행기를 격추할 것을 지시한 사건을 말합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고난 하루 뒤, 맥아더장군은 도쿄 상공으로 4대의 폭격기를 비행시켜 일본의 항복이 진정성이 있는가를 시험하게 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폭격기에 위해가 가해진다면 일본의 항복은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즉각 공중폭격을 감행할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까지 과연 휴전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사진정찰 임무를 맡고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에 탑승한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하사는 별다른 사고 없이 도쿄 동쪽에 위치한 비행장(카토리와 코노이코)을 촬영하고 그날의 임무를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인 1945년 8월 17일의 비행에서는 규슈해안을 따라 비행하던 도중 이를 발견한 일본 전투기 “가와사키 Ki-61”과 “나카지마 Ki-44”의 공격을 받아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는 경미한 손상을 입고 이를 격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미국은 2대 격추, 1대 손상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일본에서는 당일에 피해를 입은 비행기는 없다고 발표)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

 

가와사키 Ki-61

 

나카지마 Ki-44

 

그리고 운명의 1945년 8월 18일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하사는 일본 전투기의 공격으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고 함께 동승했던 미육군 병장 “조셉 라크라이트(Joseph Lacherite)”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맥아더 장군은 일본은 아직 싸우려 한다고 판단하고 즉각 폭격을 개시할 생각이었으나 운이 좋게도 일본의 평화대표단이 맥아더를 다음날인 1945년 8월 19일에 만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에 맥아더는 만일 다음날 일본의 대표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항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판단에 따라 하루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일본대표단은 8월 19일 맥아더 장군을 찾아옴으로써 자칫 계속될 수도 있었던 연합군의 폭격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아츠항공대(厚木航空隊)의 사령관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는 휘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격을 감행할 것을 멈추지 않았고 이에 부하장병들이 그를 8월 21일 아침에 마취시킨 다음 강제로 해군병원의 독방에 수감시키는 일이 발생하는데.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는 그 후 1945년 10월 16일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요코하마감옥에 수감이 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11월, 20년으로 감형을 받고 12월 5일에 가석방이 되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사면을 받았습니다.

미 육군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의 사망으로 계속될 뻔했던 태평양전쟁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the Missouri) 선상에서 맥아더(MacArthur) 장군과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외상 사이에 일본의 항복문서가 정식으로 조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던 것입니다.

이오지마(硫黄島)의 숨은 이야기들

이오지마(硫黄島)의 숨은 이야기들

일본 도쿄에서 남쪽으로 1,200㎞ 떨어진 곳에 있는 화산섬 이오지마(硫黄島)의 공식명칭은 2007년에 공식적으로 이오지마(いおうじま)가 아닌 이오토(いおうとう)로 결정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합동태풍경보센터(JTWC: Joint Typhoon Warning Center)에서도 이오지마를 이오토(Iwo To)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2014년 3월 11일에 제정된 결정에 따라 이오지마(硫黄島)의 영어표기는 섬이름에 Island를 붙여서 Ioto Island로 표기하고 있으며 대한민국의 포털에서 제공하는 정보들도 이런 결정에 따라 일본의 유황도(硫黄島)를 이오섬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태평양전쟁 당시 치열했던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로 친숙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냥 이오지마(いおうじま)로 부르기로 한다.

금년은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패한 지 75주년이 되는 해다. 즉 이 말은 우리가 광복을 맞은 지 75주년이 되는 해가 2020년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를, 얼마 남지 않은 올림픽 때문에 감추기에만 급급하는 아베정권의 행태를 보면서 최후의 발악을 했던 이오지마의 전투(Battle of Iwo Jima)가 떠오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일본의 결정에 따라 이오지마의 영어표현을 미국에서도 이오토(Iwo To)라고 하기로 하자, 미국의 해외참전전우회(Veterans of Foreign Wars)는 공식적으로 반대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사진의 논란은 있었지만 수리바치산(摺鉢山) 정상에 성조기를 게양했던 1945년 2월 23일을 전쟁이 끝나고 해병대의 날로 제정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각 군 별로 별도의 기념일을 제정하지 않고 매년 5월 셋째 주 토요일을 국군의 날(Armed Forces Day)로 정하여 기념하고 있으며 미국 해병대의 창설일인 11월 10일과는 다르다는 점을 덧붙인다.

아울러 이오지마 전투에서는 2차 대전 동안 명예훈장을 받은 총 82명 가운데 28%인 27명이 명예훈장을 받았으며 그 중 해병대원은 모두 23명이라는 일부의 정보와는 달리 22명의 해병대원들이 명예훈장을 수상하였는데 현재 유일한 생존자는 화염방사기를 들고 싸웠던 올해 96세의 허셀 윌리엄스(Hershel W. Williams)이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섬인 유황도(硫黄島), 즉 이오지마(いおうじま)의 이름은 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유황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일본이 정한 이름이 아니라 서양의 탐험가들이 붙인 것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오지마는 1543년 스페인 동양함대의 전함 중 하나인 ‘산 후안 데 레트란(San Juan de Letran)’호의 선장이었던 베르나르도 데 라 토레(Bernardo de la Torre)가 발견하였는데 섬에 유황이 많아서 유황을 뜻하는 당시의 스페인어 수프레(Sufre)라고 이름붙인 것에서 비롯되어 1779년에 제임스 쿡의 3차 탐험에 사용되었던 레졸루션호와 디스커버리호에 발견되어 공식적으로 유황도(Sulphur Island)로 표기가 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크게 이용가치를 느끼지 못했던 터라 어느 나라도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아 이후로도 이 섬은 어느 나라에도 속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런데 1494년 6월 7일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지구는 평평하다고 믿고 있어서 지구에 선을 하나 그은 다음 동과 서를 나누어 가지자는 토르데시야스 조약(Treaty of Tordesillas)을 맺었는데 대항해시대에 탐험에 나서면서 둥근 지구 때문에 아시아에서 서로 만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아시아를 두고 또 다시 경계선을 긋는 조약을 맺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사라고사 조약(Treaty of Zaragoza)이고 이로 인해 콜럼버스가 황금의 나라로 생각하고 그토록 찾으려고 했던 일본을 가리키는 지팡구(ジパング)는 포르투갈에 속하게 되었다.

이렇게 버려진 섬이었던 이오지마는 메이지시대에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1887년 당시 도쿄부의 지사였던 타카사키 고로쿠(高崎五六)의 지휘로 탐사를 마치고 1889년 어업과 유황의 채굴을 시험하기 위해 다나카 에이지로(田中栄次郎)를 비롯한 10여 명이 섬에 들어간 것이 최초의 입도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의 역사에서 나름 큰 의미를 지니는 유황도(硫黄島)라는 섬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 외에도 존재한다.

 

10세기 무렵 일본과 중국 송나라의 교역에 있어서 유황은 처음에는 송나라에서 일본으로 수출되고 있었으나 송나라 시대에 화약을 만드는 기술이 크게 발달하면서 화약의 주원료인 유황이 많이 필요하게 되자 유황을 생산할 수 있는 화산이 중국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큰 문제점과 함께 특히 금나라의 압력을 받고 있던 남송(南宋)은 일본과의 해상무역으로 유황을 조달하게 된다.

그리고 이 때 남송으로 수출하던 일본 유황의 주된 생산지가 바로 가고시마 현에 있는 또 다른 유황도(硫黄島)로, 이 섬은 가고시마 항에서 배로 4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태평양전쟁의 격전지였던 이오지마와 구분하기 위해 사츠마이오지마(薩摩硫黄島)로 부르고 있다.

1964년에 유황을 채굴하던 사츠마이오지마(薩摩硫黄島)의 광산은 폐광이 되었지만 해안에 있는 노천탕인 히가시온센(東温泉)은 일본인들 사이에서 죽기 전에 2번 방문하고픈 히토우(秘湯: 깊은 산속과 같이 접근이 어려운 곳에 위치한 온천)로 소문나 있다.

무지개가 되어 잠들다.

무지개가 되어 잠들다.

무지개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LGBT(성소수자)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1939년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삽입곡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희망, 사랑 등등 기타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이 내일은 눈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다. 사회는 온통 찌푸린 상태의 연속이고 국민들을 대변할 ○개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정쟁만을 벌이고 있다.

“겨울이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던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말처럼 과연 봄은 언제쯤이나 다가올까? 봄비 내린 뒤 맑은 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답답한 지금, 지난 2005년 3월 14일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오늘자 중앙일보의 “눈 녹자 나타나는 시신들…에베레스트 ‘온난화 곤혹’”이란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화 ‘히말라야’로 인해 2004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후 하산 길에 설맹(각막염증)으로 인해 하산이 어렵게 되자 동료들은 설득하여 하산시키고, 홀로 최후를 맞이했던 산악인 ‘고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던 엄홍길의 ‘휴먼원정대’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출처: 다음 영화

 

신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다는 에베레스트에는 고 박무택 대원처럼 등반 도중에 고인이 된 산악인들이 2015년을 기준으로 200명이 넘게 잠들어 있는데, 1996년 조난으로 사망한 연두색 부츠를 신고 있던 산악인의 주검을 2001년 5월 21일 프랑스 산악인이 촬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그린 부츠(Green Boots)’ 또는 ‘그린 부츠 동굴(Green Boots’ Cave)’이라고 불리는 산악인의 주검을 비롯하여, 고인이 된 산악인들이 입고 있던 옷과 신고 있던 신발 및 착용하고 있던 색색의 고글들이 무지개를 닮았다고 해서 이를 보도했던 영국의 BBC가 ‘무지개 능선(rainbow ridg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8,000미터 이상의 루트에 산악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을 ‘무지개 능선(rainbow ridge)’ 또는 ‘무지개 계곡(Rainbow Valley)’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히말라야 데이타베이스(The Himalayan Database)’의 통계에 의하면 히말라야에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의 산악인들은 고 박무택 대원을 비롯하여,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1977년)하고 1979년 빙벽에서 추락하여 숨진 고상돈 대장과 이일교 대원 등 모두 11명이라고 하며 이는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숫자라고 한다.

 

나는 BBC가 표현한 것과는 달리 끝까지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려고 나섰던 엄홍길을 비롯한 동료 산악인들이 무지개라는 생각을 해본다.

“걱정 마! 네 곁엔 언제나 내가 있어!”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국가나 정치인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수십 년 전 안보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만일 해외에서 북한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접근하면 미국대사관으로 가라.”던 강사의 말처럼 점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작금의 정치판을 보면서 우리 서민들의 무지개는 어디에 있는지, 무지개 너머엔 과연 희망이 있는지, 정치인을 믿을 수 있는지,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지, 이전과 다름없는 의구심만 깊어져 간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의 튤립이 있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의 튤립이 있다.

1990년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흰색의 튤립 품종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품종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화훼구근정보센터(Flowerbulb Information Centre)에서는 1993년에 세상을 떠난 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튤립에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붙인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의 헌신적인 유니세프의 활동과 배우로서의 경력을 높이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튤립의 이름으로 사용한 일들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빙 크로스비, 퀴리부인, 존 F. 케네디와 같은~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는 오드리 헵번과 튤립의 특별한 인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인 아버지 조셉 빅터 안소니 러스턴(Joseph Victor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 귀족가문 출신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사이에서 1929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중립을 유지했던 네덜란드가 안전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네덜란드의 아른헴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버지

 

그런데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모두 나치의 지지자들이었고 영국파시스트동맹(British Union of Fascists)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그녀가 “로마의 휴일(1953년)”을 비롯하여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파리의 연인(1957년) 등을 히트시킬 당시에 알려졌더라면 그녀는 배우로서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1926년 결혼을 하고 1935년에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파시스트 활동에 더욱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8년에 정식으로 이혼을 하게 되고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을 지지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괴벨스로부터 받은 사실이 탄로 나서 투옥되게 됩니다.

한편 안전할 것이라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예상과는 달리 네덜란드도 1940년에 독일의 침공을 받았는데 이 때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오드리 헵번은 에다 판 헤임스트라(Edda van Heemstra)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이혼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 집회에 참가한 경험을 파시스트 잡지인 “The Blackshirt”에 기고하기도 하는 등 친나치의 행보를 보였지만 그녀의 외숙부는 독일에 저항하였다는 죄로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른헴음악원과 기숙학교에서 배운 발레를 이용한 작은 공연으로 돈을 모은 오드리 헵번은 이 돈을 레지스탕스에 전달하기도 하고 많은 당시의 네덜란드 어린이들처럼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연락을 전달하는 활동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영화 “로마의 휴일”의 스크린 테스트를 앞두고 그녀의 매니저들은 그녀의 부모가 나치를 지지하는 활동을 한 사실을 숨기려고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중 한 장면

 

촬영장소의 실제 모습

그러나 그 후 오드리 헵번은 인종차별주의자인 그녀의 부모들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더욱 많은 찬사를 받게 됩니다.

자,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인 오드리와 튤립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던 네덜란드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독일의 점령을 방해하기 위해 철도파업을 단행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44년 겨울부터 독일군은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식량과 연료의 보급을 차단하는 이른바 “네덜란드 기근(Dutch famine)”을 일으켰는데 참혹한 기근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22,000여명의 네덜란드인이 사망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노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급이 차단된 혹독한 겨울을 “굶주림의 겨울(Winter of Hunger)”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 오드리 헵번도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풀을 끓여먹거나 튤립의 뿌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녀는 천식과 황달,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어 전쟁이 끝났을 때의 몸무게는 불과 40kg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네덜란드에서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튤립에 붙이는 것이 더욱 뜻 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Huis Doorn”에서 그녀의 이름이 붙은 튤립의 헌정식이 열렸고 궂은 날씨 속에서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이름이 붙은 첫 번째 튤립을 그녀의 숙모 재클린에게 바칩니다.

 

말년이 더욱 아름다웠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잘록한 허리는 어린 시절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아름다운 백색의 튤립은 그녀의 외모보다는 그녀의 정신과 더욱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 도입하는 이지스 어쇼어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 도입하는 이지스 어쇼어

지난 10월 31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것은 미국의 의사에 따른 것인가?”라는 의원의 질의에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다.”고 답변했는데 ‘이지스 어쇼어’는 이지스함에서 운용하는 레이더와 미사일발사대 등을 지상에 배치하여 적의 탄도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미국의 MD방어체계는 모두 4단계로써 적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1단계로 해상의 이지스함에서 요격미사일을 발사하고 2단계로 지상에 배치된 요격미사일 GBI(Ground-based Interceptor)를 발사하여 적의 탄도미사일이 상승과 비행을 하는 단계에서 요격하고 이에 실패하면 적의 미사일이 낙하하는 종말단계에서 3단계로 사드, 4단계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는데 일본은 지상에 배치하는 2단계 방어시스템을 이지스 어쇼어로 대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지스 탄도유도탄방어체계에 사용되는 요격미사일인 ‘SM-3’의 도입을 결정한 것이 뒤늦게야 공개되었는데 지금부터 일본과 우리 정부의 결정이 옳은 것인가를 한 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고는 있지만 아직 종전선언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기에 우리의 주적은 현재로서는 북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입하는 SM-3와 일본의 “이지스 어쇼어”가 과연 방어체계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일본정부의 결정은 정말로 자국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속도의 문제

전쟁에서 적이 총을 쏘는 순간 내가 총을 발사하여 적의 총알을 맞추어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총알의 속도가 일반적으로 초속 900미터 전후이니 대략 마하 3 정도인 반면 북한 미사일의 최대속도는 초속 5,000미터, 즉 마하 15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의 전투기나 폭격기를 요격하는 일반적인 지대공미사일의 경우에는 적기의 속도가 빨라야 마하 2 정도이기 때문에 마하 15 정도의 속도를 내는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려면 더욱 높은 정밀도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 적의 탄도미사일에 탑재된 핵탄두를 직격하지 못한다면 폭발로 인해 생기는 파편으로는 핵탄두를 요격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점입니다.

 

▶ 높이의 문제

이지스함에서 발사하는 요격미사일은 “SM-3 블록 1A”인데 이것을 지상에서 운용하는 ‘이지스 어쇼어’에서는 보다 크고 고성능인 “SM-3 블록 2A”로 교체하여 사거리를 연장하고 운용레이더를 기존의 “AN/SPY-1(탐지거리 320km)”보다 30배 이상의 표적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는 훨씬 장거리의 탐지거리를 가진 “AN/SPY-6”로 대체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SM-3 블록 1A”의 최대고도는 500km이고 이보다 우수하다는 “SM-3 블록 2A”도 최대고도는 1,000km에 불과하기 때문에 북한의 중거리 지대지 탄도미사일인 ‘화성 12호’의 최대고도 2,000km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지스 어쇼어’가 추구하는 고고도지상방어라는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입니다.

 

▶ 가격의 문제

통상 이지스함에는 90여 발의 미사일이 탑재되는데 이것이 모두 “SM-3 블록 1A”라고 가정하면 1발에 우리 돈으로 200억 원 정도 하니 미사일 가격만으로 이지스함을 20여 척 가까이 건조할 수 있는 금액이 되고 이것을 “SM-3 블록 2A”로 모두 교체한다면 1발에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니 예산이 부족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고작해야 몇 발 정도만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전자기펄스(EMP: Electromagnetic Pulse)에 취약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전자기펄스(EMP)의 공격은 30km이상의 고도에서 폭발하여 모든 전자기기를 교란할 것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으로 덮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파를 송수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레이더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 미국에 대한 열등감

신냉전시대의 도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군사적 긴장도 높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냉전이 지속되는 것을 가장 바라는 것은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이들의 후원을 받는 상하 양원의 의원들이며 이들은 또한 일본 외무성의 친미파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지적이 제가 아닌 일본의 여론이며 아베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처럼 아베총리가 미국을 경배한다고까지 비난하는 것이 일본의 언론들입니다.

 

▶ 마지막으로…

일본이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배치하려는 지역을 보면 더더욱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일본은 북한이 괌을 목표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지나게 되는 야마구치현의 상공과 하와이를 겨냥하여 미사일을 발사하면 지나게 되는 아키타현에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설치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해상자위대에 밀리는 육상자위대의 입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국의 안보에서 자국민의 안전보다 미국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 정부의 사드배치와 썩은내 진동하는 방산비리 혐의자들의 절반이 무죄로 풀려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비록 남의 나라 일이기는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2001년 손석희 앵커와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의 문화에 대한 대담을 하면서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절대 그런 일이 없으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던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10년에 조선일보는 안용근 교수가 펴낸 책 “한국인과 개고기”의 내용 중에서 “1870년대 프러시안-프랑스 전쟁 당시엔 사람들이 개를 모두 잡아먹어 파리 시내에 개가 한 마리도 없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여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고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사실관계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사원문: 책펴낸 개고기 박사 “프랑스도 개고기 국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인들이 1870년대에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개고기를 먹게 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점도 자세히 알리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870년대에 프랑스인들은 개고기를 왜 먹게 되었는지? 개고기 외에 식용으로 사용한 다른 동물은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70년은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시기인데 더 이상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내용의 소설배경이 된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습니다.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하지만 파리에서 조직된 공화제 국방정부는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군은 1870년 9월 19일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파리를 포위하고 모든 보급물자를 차단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일상적인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포위를 당하기 전에 국방정부는 파리에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떠날 것을 명령했으며 군대를 제외한 인구가 200만으로 추정하였고 1~2개월 정도로 예상했던 독일의 포위에도 식량은 충분할 것으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떠난 숫자만큼 다른 지방에서 피난민이 유입되어 인구감소의 효과는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20%의 인구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최대 2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측했던 포위공격이 점차 기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식량이 모자라지 않다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마침내 식품은 배급제로 바뀌게 되어 1870년 10월 중순부터는 성인 1인당 섭취량을 300그램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파리의 시민들은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빵은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일 먼저 말을 잡아먹게 되었는데 당시 시장에서는 1파운드에 10센트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인 로버트 시버트가 1892년에 발간한 “The Siege of Paris by an American Eye-Witness”)

그러나 말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1달 뒤인 11월 중순부터는 배급량이 1인당 100그램으로 줄어들었고 시장에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고기들이 판매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쥐와 고양이 그리고 개고기였던 것입니다.

미국인 시버트(Robert Sibbet)가 직접 경험한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개고기와 고양이고기는 파운드당 20~40센트인 것에 비해 살이 찐 쥐고기는 파운드당 50달러 정도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11월이 되면서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하는데 계속 영업을 하려는 곳에서는 마지막으로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결국, 동물원에 있던 코끼리를 비롯하여 캥거루와 공작새 등도 잡아먹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동물은 사자, 호랑이, 하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 유명식당의 메뉴를 보면 개고기로 만든 커틀릿과 코끼리, 캥거루, 쥐로 만든 요리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마저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파리시민들은 나무나 풀뿌리로 연명을 해야 했고 포위가 끝나기까지 굶주림이 아닌 음식을 잘못 먹은 것으로 인해 발병한 질병으로만 12,00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기 위해 먹었다고는 하더라도 프랑스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브리지토 할머니,

절대 개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프랑스 역사부터

먼저 공부를 하심이 좋아 보입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어제 모 여가수의 이름이 실검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세인들의 입에 암페타민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을 막론하고 병사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약물이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독일군에게 공급을 명령했던 히틀러 또한 약물에 중독되었었다.(정확히는 필로폰이라는 메스암페타민에 중독)

지난 번 “마약으로 물든 베트남전쟁”이란 포스팅에서 미군은 지구력 강화와 불안 및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암페타민을 비롯한 각종 진정제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고 미 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2억2천5백만 통의 각성제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각개병사들에게 약물을 보급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887년 유대인 출신의 루마니아 화학자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가 베를린 대학에서 최초로 암페타민의 합성에 성공한 이래 벤제드린(Benzedrine)이란 상표로 상품화 되면서 천식이나 우울증의 치료에 사용되던 암페타민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연합군에 의해서 병사들에게 보급이 되었다.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

 

벤제드린(Benzedrine)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던 것은 이보다 더 심각한 메스암페타민이었는데 이른바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은 1888년 천식치료제인 마황으로부터 에페드린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일본 도쿄대학의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가 발견한 이후 1919년에 그의 제자인 오가타 아키라(緒方章)가 결정화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결정화에 성공한 메스암페타민은 1938년부터는 독일의 제약회사 테믈러 베르케(Temmler Werke GmbH)에 의해 페르비틴(pervitin)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어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메스암페타민의 부작용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었고, 독일군에게 정식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였다.

페르비틴(pervitin)

암페타민이나 메스암페타민을 막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약물을 일반 병사들에게 보급했던 것은 독일군이 먼저였으나 연합군이 사용한 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연합군 중에서 암페타민을 먼저 사용했던 것은 독일군의 잠수함을 수색하던 영국공군의 정찰병들이었다. 장시간에 걸쳐 온 신경을 기울여 독일군의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던 병사들이 암페타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는 폭격기의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공식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이 공식적으로 암페타민을 보급한 것은 1942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치러지는 기간 동안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1일 20㎎의 암페타민 5일치를 병사들에게 보급하도록 지시한 것이 최초였고, 미군은 1943년 2월 육군군수처(SOS: Services of Supply)에서 하루에 5㎎의 벤제드린(Benzedrine)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발표를 하면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즉시로 50만 정을 주문하여 북아프리카의 부대에 보급하였던 것이 최초다.

엘 알라메인 전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롬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을 텐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는 독일의 에르빈 롬멜을 소재로 하여 1951년에 개봉한 영화 The Desert Fox(사막의 여우 롬멜)가 바로 이 전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에르빈 롬멜

 

연합군이 암페타민을 보급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군이 보급했던 것은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날이 갈수록 중독으로 인한 심각성이 커지자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 보급하기 시작했던 것을 1941년 봄부터는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금지했던 것은 아니었고 보급만 중단하였다.

1939년 가을 폴란드 침공에 나선 독일군은 운전병들에게 메스암페타민인 페르비틴(pervitin)을 보급하였는데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한 상태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페르비틴(pervitin)의 효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는 3,500만 개의 페르비틴(pervitin)을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다.

독소전쟁 당시 페르비틴(pervitin)을 복용했던 병사들을 관찰한 군의관의 증언에 따르면 “폭설과 영하 30℃의 추위 속에서 6시간의 행군으로 병사들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사기는 저하되었으며 급기야는 쓰러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사망했다. 그러한 병사들에게 페르비틴(pervitin)을 나누어주자 30분이 지나지 않아 기력을 회복하였고 집중력과 판단력이 회복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병사들에게서 중독증상과 약물복용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1941년 봄부터는 페르비틴(pervitin)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인 보급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일반보병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던 페르비틴(pervitin)은 탱크 운전병들에게는 탱크 초콜릿(Tank-Chocolates)이라는 뜻의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란 이름으로 보급되었다.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

 

버닝썬 사건으로 촉발된 연예계의 마약과 경찰의 유착의혹에 대하여 명운(命運)을 걸겠다고 했던 경찰이 이번에는 명예(名譽)를 걸고 모 연예기획사의 의혹을 수사하겠다고 한다.

목숨(명운)을 걸고도 밝히지 못한 것을 명예를 건다고 밝힐 수 있을까?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집단의 공허한 메아리와 함께 이 시기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을 보면서 그냥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 2차 대전을 통해 보급되었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았다. 멍~멍~

전투기의 위장색

전투기의 위장색

최근 각국이 앞다투어 개발에 나서고 있는 스텔스기는 단순히 레이더뿐만 아니라 적외선과 가시광선 및 소음 등 전투기의 흔적을 지움으로서 관측을 어렵게 하도록 만든 기종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원시적인 스텔스기능은 적의 눈을 속이는 위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비행기를 62대나 격추시켰던 독일의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가 몰던 “복엽기(Fokker D.VII)”에 사선으로 흰색의 선을 그려 넣어 비행방향을 착각하도록 만들며 “쏘지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Du doch nicht!!”를 적어 넣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군용기의 위장색은 최근에 와서는 하늘이나 구름과 비슷하도록 다양한 명암의 회색을 혼합하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1970년대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구입했던 F-4 팬텀은 도입 당시에는 국방색으로 도장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경까지는 전투기의 위장색에 대한 효과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기종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위장을 위해 도장하는 페인트의 무게가 적게는 수십 kg에서 많게는 100kg에 달하기 때문에 성능과 연비를 약화시킨다는 이유에서 예전에는 굳이 위장색을 도장하지 않고 표면의 두랄루민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위장색은 회색 계열이며 디지털 위장(Digital Camoflage)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래의 사진은 러시아의 MiG-29기입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주변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전투기의 위장색을 파란색으로 도장하기도 하는데 저공비행을 하면 거의 식별이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위장색을 이용한 위장 이외에도 러시아의 수호이 Su-27의 경우에는 가짜 캐노피를 그려 넣어 기체의 상하를 오인하도록 하는 위장술을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투기의 위장색과는 달리 비행고도가 낮은 정찰기나 수송기의 경우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지역에 맞도록 위장하게 되는데 우리 공군의 경우에는 산악지형에 맞는 패턴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사막의 모래와 비슷한 색깔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다음으로 준비했던 미국본토에 대한 공격은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생물학전의 첫 번째 시도로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한 바탄전투(Battle of Bataan)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생물학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2년 4월 9일 미군과 필리핀군이 투항하게 되면서 바탄전투는 끝이 나고 생포된 포로들이 카파스에서 오도널수용소까지의 행진 도중 7천~1만여 명이 숨진 이른바 “죽음의 바탄행진”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미군과 필리핀군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이 생물학전을 시도하려던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바탄전투를 포함하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시도하려 했던 생물학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일본군이 계획한 작전명 “밤벚꽃(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악명 높은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가 수립했는데 주요 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민간인 밀집지역에 대한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그 시험단계로서 바탄전투에서의 생물학전 전개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바탄지역의 10군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 90kg(1억 5천만 마리)을 살포할 준비를 하게 되지만 그 전에 미군과 필리핀군이 항복을 함으로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후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은 미국의 본토에 대한 생물학전을 계획하는데 애초의 계획과는 조금 변경된 샌디에고의 해군기지에 전염병을 퍼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1945년 3월 26일 작전의 일환으로 5대의 “I-400” 잠수함과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을 탑재한 폭탄을 터뜨릴 계획을 확정하게 됩니다.

“I-400”

 

“아이치 M6A 세이란”

 

그러나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공식적으로 1945년 9월 22일에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이 계획했던 작전의 내용은 미국의 근해로 접근한 5대의 “I-400” 잠수함에서는 벼룩이 든 풍선폭탄을 발사하고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는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면서 폭탄을 투하한다는 것이었으며 수만 명의 인원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사용하려던 방법은 영국의 “HMS M2”잠수함과 같이 “I-400”과 “아이치 M6A 세이란”을 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과는 별개로 일본은 “트루크 제도(Truk Islands)”라고 부르던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치명적인 세균과 생물학 전문가 20명을 파견하기 위해 잠수함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잠수함 “USS Swordfish”에 의해 발각되어 수중에서 침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생물학무기를 전쟁에 사용한다는 것은 무차별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는 특성으로 민간인의 엄청난 피해를 낳게 되지만 일본군들은 이런 잔인한 작전을 시도할 계획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자위대가 욱일기를 게양하고 제주도의 관함식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만일 일본이 계획했던 세균전이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실행되었더라면 미국은 일본의 욱일기를 지금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이 문제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