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학교에서 금지하는 의외의 것들

미국의 학교에서 금지하는 의외의 것들

1. 빨간색 잉크

시험답안지나 과제물의 실수를 표시하는 색깔로 오랫동안 빨간색 잉크를 사용해왔는데 2008년 영국의 켄트 주니어스쿨의 교감 리차드 사몬즈(Richard Sammonds)가 학생들의 의욕을 상실시키고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기므로 사용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부터 비롯되어 블랙 프라이데이가 유래된 것처럼 학생들에게 부기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교육을 한다는 의미로 많은 학교들에서 빨간색의 잉크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2. 어그 부츠

대부분의 학교에서 교실 내로의 휴대폰 반입을 금지하고 있는데 2012년 어그부츠 안에 휴대폰을 숨겨 들어오는 학생들이 있다고 해서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포츠타운 중학교(Pottstown Middle School)에서는 어그부츠를 신는 것을 금지하였습니다.

당연히 학생들과 학부모들의 반대가 들끓었고 이런 내용을 페이스북에 올리자 반대여론이 비등하였지만 학교 측은 이를 감행하였는데 현재도 시행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을 못하였습니다.

 

3. 백팩

학생들이 많이 사용하는 백팩은 필수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일리노이와 아이오와 주의 일부 학교에서는 교실의 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복도에서의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백팩의 사용을 금지하였다고 합니다.

백팩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는 다리를 다쳐 목발을 해야 한다든지 하는 때에 한하고 그런 경우라도 안이 보이는 시스루 형태의 백팩을 사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4. 피구

플로리다 주를 비롯하여 뉴욕 주, 메인 주, 메사추세츠 주, 뉴햄프셔 주, 텍사스 주 등에서는 피구가 폭력적이며 왕따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다고 합니다. 체력이 약한 학생의 경우에는 공에 맞아 부상을 입거나 자신감을 상실할 수 있으며 다른 학생을 해치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되는 규칙은 옳지 않다는 것이 주된 이유라고 합니다.

 

5. 술래잡기

캘리포니아 주의 골드 리지 초등학교(Gold Ridge Elementary School)의 교장 데이비드 프랭클 (David Frankel)은 학부모들에게 서신을 보내어 술래잡기가 너무 강한 신체접촉을 유발하기 때문에 금지한다고 알린 다음 이를 시행하였다고 합니다.

 

6. 사전

음란서적을 교내에 반입하거나 보는 것은 금지하고 있지만 사전의 사용을 금지하는 것은 의외의 일입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학교에서는 구강성교에 관한 내용이 있다는 이유로 사전(Webster’s 10th Collegiate Edition)의 사용을 금지하였는데 이 사전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서를 제출하여야 한다고 합니다.

 

이외에도 후드티를 학교 내에서는 입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곳들도 있고 버몬트 주에 있는 학교(Orchard School)에서는 많은 시간을 밖에서 뛰어놀고 가족들과 보내야 한다는 이유로 유치원생부터 5학년까지는 숙제를 내주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 공군 최초의 여성 주임원사는 한국계 여군!

미 공군 최초의 여성 주임원사는 한국계 여군!

요즘 언론기사를 보면 좌우 어느 한쪽 진영의 논리에 매몰되거나 사실관계의 확인조차도 하지 않고 기레기들이 작성한 쓰레기들이 넘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기레기들의 눈과 귀에는 이런 자랑스러운 내용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을 것이기에 미국 공군 역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주임원사(CMSgt: Chief master sergeant)의 자리에 오른 한국계 미국인을 소개한다.

자랑스러운 그녀의 이름은 조안 배스(JoAnne S. Bass)로 지난 8월 14일 미국 공군의 제19대 주임원사에 취임하였는데 아시아계 최초라는 타이틀까지 함께 얻게 되었다..

하와이 밀리라니(Mililani) 출신인 조안 배스(JoAnne S. Bass) 주임원사의 어머니는 한국인인데 요즘 같은 글로벌사회에서 한국계 미군이 진급한 것이 뭐가 자랑스러운 일인가 하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취임한 자리의 중요성 때문에도 호들갑을 떨고 싶다.

조안 배스(JoAnne S. Bass)가 취임한 자리는 32만 명에 달하는 미 공군 중에서 오직 1명만이 오를 수 있으며 부사관과 병사들을 대표하여 참모총장에게 조언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쉽게 말해서 부사관과 병사들의 대표로 미국 공군참모총장과 마주 앉는 카운트파트(counterpart)가 된다는 것으로 이렇게 자랑스런 기사는 단신(短信)으로라도 실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닐까? 기레기들아~

사진 출처: 미공군

 

 

 

독일군 돌격대에서 따온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독일군 돌격대에서 따온 스타워즈의 스톰트루퍼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단어는 조지 루카스 감독의 영화 스타워즈가 나오면서부터 돌격대라는 뜻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 이전까지는 나치 친위대인 SS(Schutzstaffel)를 일컫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용어는 스타워즈의 공식 홈페이지에서도 독일군의 돌격대(Stoßtruppen)에서 따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This faceless corps of soldiers was inspired by the similar storm troops from the past.)

원문: From World war to Star wras: stormtroopers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군이 운용한 돌격부대의 이름인 스톰트루퍼(영어: stormtrooper, 독일어: Stoßtruppen)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에 링크하는 나무위키의 자료를 참조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는 나무위키의 일부 잘못된 정보와 빠져 있는 것들에 대해서 살펴본다.

※ 나무위키: 돌격대

 

일반적으로 특수훈련을 받은 병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폭풍(storm)이란 용어는 힘(power)과 종말이 임박하였다는 뜻을 담고 있는데 역사적으로는 독일보다 이탈리아가 먼저 사용하였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왕립육군(Royal Italian Army)’ 휘하의 특수부대였던 ‘아르디티(Arditi)’가 ‘스톰(storm)’ 부대의 원조라고 할 수 있는데 독일군이 운용하였던 돌격대의 초기 모습을 보면 이탈리아의 ‘아르디티(Arditi)’를 많이 참고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탄복과 ‘파리나(Farina) 헬멧’을 착용한 ‘아르디티(Arditi)’의 개념은 독일군의 돌격대(Stoßtruppen)와는 조금 차이가 나기도 하지만 독일군의 돌격대가 사용한 명칭의 변천을 보아도 이탈리아에서 따온 것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탈리아의 아르디티

 

독일군 돌격대

 

독일 최초의 돌격대는 1915년 3월 2일, 지휘관이었던 ‘칼조우(Calsow)’ 소령의 이름을 따서 창설된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였지만 전술을 가다듬고 체계화 한 것은 1915년 8월에 돌격대의 지휘관으로 새롭게 부임한 ‘윌리 로어(Willy Rohr)’였다.

그래서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 이후 ‘윌리 로어(Willy Rohr)’가 재정비한 부대를 ‘로어 돌격대대(Rohr Assault Battalion)’라고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윌리 로어(Willy Rohr)

‘윌리 로어(Willy Rohr)’가 돌격대를 재정비 하면서 이룬 가장 큰 변화는 각개병사의 군장을 경량화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용하는 화기는 물론이었고 이전까지 신던 무릎까지 올라오던 군화(jack boot)를 ‘오스트리아 산악화(Austrian mountain boots)’로 전면 교체하고 초기에 사용하던 피켈하우베(Pickelhaube) 철모 대신에 ‘슈탈헬름(Stahlhelm)’이라고 하는 헬멧(coal scuttle helmet)을 가장 먼저 사용하도록 한 점을 꼽을 수 있다.

 

그러면 독일군은 언제부터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을까? 이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없으면 ‘스톰트루퍼(stormtrooper)=독일 돌격대’라고 혼돈할 수 있다.

또한 돌격대를 뜻하는 독일어인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은 나치의 준군사조직이라고들 알고 있거나 혹은 이것을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고들 알고 있는데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나 정확한 말도 아니다.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의 또 다른 이름으로는 ‘Brownshirts’ 또는 ‘SA’가 있는데 ‘브라운 셔츠(Brownshirts)’라는 이름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이끄는 파시스트당의 ‘검은셔츠단(Blackshirts)’이 입었던 검정색의 제복 대신에 갈색의 제복을 착용하였기 때문에 붙은 것이며 ‘SA’는 ‘슈투맙타일룽(Sturmabteilung)’을 줄여서 쓰는 명칭이다.

 

그렇기 때문에 1919년에 창당된 나치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의 준군사조직으로 만들어진 ‘돌격대(Sturmabteilung)’는 ‘스톰트루퍼(stormtrooper)’와는 다르다고 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지금부터 독일의 돌격대를 말하는 ‘스톰트루퍼(stormtrooper)’의 명칭은 어디서부터 비롯하였는지를 알아보자.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15년 3월 2일에 처음으로 창설된 독일군 돌격부대인 ‘칼조우 돌격대(Sturmabteilung Calsow)’의 이름에는 분명히 ‘돌격대(Sturmabteilung)’란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이렇게 최초로 만들어진 ‘돌격대(Sturmabteilung)’는 본부와 2개의 중대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이후 그 규모가 점차 커짐에 따라 이름을 ‘돌격대대(Sturmbataillon)’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고 이 부대에 속한 병사들을 ‘충격보병(슈토스트루페: Stoßtruppe)’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충격보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독일어 ‘슈토스트루페(Stoßtruppe)’를 영어로 번역한 ‘shock troops’ 또는 ‘thrust troops’를 한국어로 다시 번역하면서 충격보병이라 부르게 된 것이며 독일에서는 또 다른 이름인 ‘스툼만(Sturmmann)’으로도 불렸는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storm man’이 되는데 흔히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스타워즈에 의해 널리 알려진 ‘스톰트루퍼(stormtrooper)’라는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숨어 있다.

킹콩(King Kong)은 누가 죽였을까?

킹콩(King Kong)은 누가 죽였을까?

몬스터 영화의 최고봉이라고 하는 1933년에 만들어진 영화 킹콩(King Kong)의 마지막 씬은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위에서 전투기의 기총소사에 의해 킹콩이 떨어져 숨을 거두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킹콩을 죽인 비행사가 감독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지금부터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어네스트 B. 쇼드색(Ernest B. Schoedsack)”과 “메리언 C. 쿠퍼(Merian C. Cooper)”가 공동으로 감독을 맡았던 이 영화에서 킹콩을 죽이기 위해 포스터와는 달리 4대의 전투기가 출격을 하는데 이 중의 1대를 감독이었던 메리언 쿠퍼가 직접 조종을 하였고 그가 쏜 총에 의해 킹콩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감독이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경우는 종종 있지만 비행기를 직접 조종한 것은 아마도 메리언 쿠퍼가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메리언 쿠퍼는 1916년 군에 입대하여 판초 비야의 토벌작전에 참가를 한 후 애틀랜타의 항공학교에 진학하여 파일럿이 된 다음.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모두 참전하였는데 특히 1차 대전 이후에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고 있던 폴란드 제7 비행중대에서 지원근무를 하였습니다.

폴란드 제7 비행중대는 1918년에 창설한 폴란드 공군의 모태가 된 부대인데 폴란드 조종사는 몇 명에 불과하였고 대부분의 조종사들은 21명의 미군들이었으며 이 중의 한 명인 메리언 쿠퍼의 역할이 아주 컸기 때문에 폴란드 공군의 100주년 기념을 맞아 전투기에 쿠퍼의 초상화를 그려 넣어 그에게 존경과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메리언 쿠퍼가 폴란드에서 근무할 당시에 1919년 2월부터 1921년 3월까지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 간에 벌어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이 발발하였고 1920년 7월에 소련군에 의해 격추되어 메리언 쿠퍼는 소련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되게 됩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메리언 쿠퍼는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라트비아를 거쳐 폴란드로 귀환하였고 이런 그의 용맹성을 치하하여 당시 폴란드군의 원수였던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Klemens Piłsudski)”는 직접 훈장(The War Order of Virtuti Militari)을 수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메리언쿠퍼: 라트비아 국경에서

 

이처럼 비행경험이 풍부했던 메리언 쿠퍼는 킹콩의 공동 연출자인 어네스트 쇼드색을 태우고 비행기를 조종하는 장면에 직접 출연하여 그가 만든 주인공 킹콩을 죽이는 역할을 맡았던 것입니다.

킹콩 앞의 두 감독

유후인의 금린호(金鱗湖:긴린코)에서 낚시를 할 수 있을까?

유후인의 금린호(金鱗湖:긴린코)에서 낚시를 할 수 있을까?

긴린호수 또는 일본어로 긴린코라고 부르는 유후인의 작은 호수는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곳이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어 낚시를 한다면 그야말로 너나하는 수준일 것 같은 긴린코는 원래는 다케모토의 연못 또는 다케시타의 연못으로 불리었으나 1884년 모리 쿠우소(毛利空桑)라는 유학자가 호수를 헤엄치는 물고기의 비늘이 석양을 받아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으로 보고 금린호(金鱗湖)라고 부르면서부터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라 언제나 붐비는 곳이기도 해서 한국의 관광가이드들조차도 이곳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고들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건 잘못 알고 있는 것이고, 사실은 이곳에서 낚시를 하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곳에서 낚시가 가능한 것은 아니고 극히 일부 구간에서는 낚시가 금지되어 있으며 주로 잡히는 어종은 잉어, 붕어, 그리고 틸라피아라고 한다.

그렇지만 일본의 낚시인들은 밤이건 낮이건 관광객들이 있으면 낚시를 삼간다고 한다. 그래서 늦은 밤이나 새벽 시간이라야만 낚시인들이 낚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번 방문에서는 낚싯대 없이 모노라인에 지그헤드만 달아서 맨손으로 한 번 노려볼까도 생각했으나 만일 물고기라도 잡게 된다면 전 세계에 못생긴 내 모습이 알려질 것 같아서 포기를 했다.

다른 사람들이 경치에 취할 때 나는 물속의 물고기에 취하니 천상 낚시인인 것은 틀림없는가 보다.

여담이지만 제일 많은 사람들이 찾는 호숫가의 카페 라루슈(CAFE LA RUCHE)는 베이커리 카페로 커피 맛은 개인적으로는 별로라는 생각이며, 일본인들의 평점은 별 다섯 개에 3개 반 정도이다.

또 하나 한국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른다는 금상 받은 고로케를 판매하는 곳은 한번쯤 맛볼만한 것 같고 벌꿀 아이스크림은 꽤 괜찮은 편이라는 생각이 든다.

참고: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최초로 달을 밟은 우주비행사들은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최초로 달을 밟은 우주비행사들은 한국전 참전용사였다.

사진은 버즈 올드린(Buzz Aldrin)

 

”한 인간에게는 작은 한 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다.”(That‘s one small step for man, one giant leap for mankind)

이것은 아폴로 11호를 타고 1969년 7월 20일 인류최초로 달에 첫 발을 내디뎠던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 1930~2012)이 했던 전 세계인에게 감동을 주었던 말입니다.

아폴로 11호에 승선하였던 3명의 우주비행사는 선장인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을 비롯하여 사령선 조종사 마이클 콜린스(Michael Collins), 착륙선 조종사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었으며 달 착륙 후 역사적인 발자국을 찍은 사람은 닐 암스트롱(Neil Armstrong)과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이었습니다.

좌로부터 닐 암스트롱, 마이클 콜린스, 버즈 올드린

 

착륙 후 6시간 20분이 지나 암스트롱이 착륙선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후 24분 뒤에 올드린도 달을 밟았으며 2시간 13분 12초 동안 달 표면을 탐사하였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올드린은 그의 자서전에서 입고 있던 우주복에 소변을 보고 말았다고 밝혔습니다.

또한 인류최초로 달을 밟았던 암스트롱과 올드린 두 사람은 모두 한국전쟁에 조종사로서 참전을 하였다는 공통점도 가지고 있는데 오늘은 이 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닐 암스트롱 (Neil Armstrong)은 미 해군의 장학제도인 “홀로웨이 플랜 (Holloway Plan)”을 통해서 퍼듀대학의 항공공학과를 졸업하였기 때문에 해군에 복무해야 했으므로 1949년 해군비행학교에 진학하여 1950년 해군비행사로서 6·25전쟁에 참전하게 됩니다.

1942년 취역하여 2차 세계대전에서도 활약한 항공모함 USS 에식스(USS Essex)에 승선해서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던 암스트롱의 첫 비행은 사진정찰을 위한 비행기의 호위임무를 위한 것이었으며 전쟁 참가 5일 후인 1951년 9월 3일 원산의 주요시설을 정찰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하던 도중 그가 몰던 F9F 팬서(F9F Panther)가 적의 대공포화를 받게 되었고 6미터 높이의 기둥과 부딪혀 오른쪽 날개가 1미터 가량 떨어지는 사고를 겪은 끝에 낙하산 탈출을 하게 되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21세였습니다.

USS 에식스(USS Essex)와 F9F 팬서(F9F Panther)

 

그러나 그 후로도 암스트롱은 총 121시간의 비행시간과 78회의 출격을 하게 되었고 1952년 8월 23일 최종임무의 수행을 끝으로 제대하여 900회에 이르는 시험비행사로서 활약한 후 1962년에 미국항공우주국(NASA)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116번기가 암스트롱이 조종하는 비행기

 

한편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은 웨스트 포인트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여 1951년 3등으로 졸업을 하고 전투기 조종사로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되는데 그가 몰았던 비행기는 한국전쟁에서 미공군의 주력이었던 F-86 세이버(sabre)였습니다.

1950년 11월 소련의 미그기가 한국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중전에 등장하여 유엔군이 보유한 모든 기종에 비해 우수한 성능을 보이게 되자 이에 대응하여 1950년 12월에 F-86 세이버(sabre)3개 비행대대를 극동으로 급파하게 됩니다.

F-86 세이버(sabre)

 

소련의 미그 15는 최고고도, 가속도, 그리고 상승률에서 F-86보다 뛰어남을 보였지만 F-86은 회전과 강하에서 우수한 성능을 보였으며 무엇보다도 전쟁이 지속되면서 미그기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경험이 부족한 북한과 중공의 조종사들이 증가하게 된 반면에 2차 대전을 통해 많은 경험을 쌓았던 미국의 조종사들이 조종하는 F-86이 월등한 기량의 차이를 보인 것이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버즈 올드린(Buzz Aldrin)도 F-86 세이버(sabre)를 몰고 한국전쟁에서 2대의 미그기를 격추시키는 등 66회의 전투비행 임무를 수행하였으며 특히 1953년 6월 8일자 미국의 라이프지에 그가 격추시킨 미그기에서 탈출하는 소련 조종사의 모습을 촬영한 사진을 게재하여 유명세를 타게 됩니다.

 

버즈 올드린(Buzz Aldrin)은 2015년 한국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영화 트랜스포머 2에 출연하기도 하였는데 그는 특히 일리노이 주의 스프링필드(Springfield)에서 2004년 개관한 “한국전쟁 국립박물관(Korean War National Museum)”이 개관할 수 있도록 기부한 것으로도 한국과의 인연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박물관은 비영리 민간단체로 운영되면서 모든 비용과 전시물을 한국전 참전용사들로부터 후원의 형식으로 조달하였고 방만한 운영이 겹쳐 2017년 7월 29일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사진을 보면 전시물이 다양하지 못하고 전시하는 환경도 열악하여 일반인들의 관심을 받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는 있지만 먼 외국의 소도시에서 한국전쟁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이 있었다는 사실은 고맙기만 합니다.

 

공동경비구역(JSA)과는 다른 세계의 공동주권지역들

공동경비구역(JSA)과는 다른 세계의 공동주권지역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을 비무장화하여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북측에서 636발의 지뢰를 철거하였다는 소식을 얼마 전 뉴스를 통해 들었습니다.

세계에는 우리나라의 JSA와는 성격이 다르지만 다수국가가 공동으로 주권을 가지는 지역이 있습니다. 이것은 국제법상으로 “공동주권(Condominium)”이라고 하는 것으로 2개 또는 그 이상의 국가가 동등한 주권을 행사하기로 합의한 지역을 말하는데 지금부터 어떤 곳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모젤 강과 그 지류: 독일과 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와 독일의 국경은 모젤 강과 그 지류인 사우어 강 및 오우르 강이 흐르고 있는데 룩셈부르크의 솅겐(Schengen)을 남단으로, 북쪽으로 118㎞까지의 강과 그 안에 있는 15개의 모래톱은 양국의 공동주권지역으로 되어 있어서 누구나 제한 없이 드나들 수 있습니다.

사진은 사우어 강의 인도교에 있는 표지판

 

이 지역은 1815년 비엔나회의에서 공동주권지역으로 결정되었는데 1884년 독일법원에서는 양국에 걸쳐 놓여진 다리는 중간지점에서부터 동쪽은 독일이, 서쪽은 룩셈부르크의 주권이 미친다고 판결함에 따라 100년 가까이 그 판례에 따랐으나 1984년 룩셈부르크와의 국경조약에 다리도 공동주권으로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였습니다.

 

▶ 보덴 호수(Bodensee):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보덴 호수는 콘스탄츠호수라고도 부르는 중부유럽에서 3번째로 큰 호수로 “유럽의 블랙홀”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예로부터 교역권과 어업권을 두고 세 나라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는데 불필요한 분쟁을 피하기 위해 호수에 있는 섬을 제외한 모든 것을 공동주권지역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세 나라가 해석하는 국경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어서 스위스는 호수의 중간에 국경이 있는 것으로 해석함으로써 스위스에서 출발하는 유람선은 중간지점에서 회항을 하는데 이와는 달리 오스트리아는 호수전체가 공동주권지역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며, 독일은 공식적인 해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 페전트섬(Pheasant Island): 스페인과 프랑스

 

꿩섬이라고 하는 이 섬은 바스크 지방을 흘러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에서 대서양으로 흘러드는 비다소아(Bidasoa) 강에 있는 섬으로 일반인의 출입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섬은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 왕실 사이의 혼인이 있을 때 신부를 상대에게 처음으로 소개하는 행사가 열리던 곳이었는데 1615년 루이 13세가 아내 스페인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를 처음 만난 곳도 이 곳이었고, 펠리페 4세가 프랑스 앙리 4세의 딸인 이사벨과 처음으로 만난 곳도 이곳이었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의의를 평가하여 양국은 1659년부터 이 섬을 공동주권지역으로 정하고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주권은 양국이 6개월씩 번갈아가며 가지는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 브르치코 행정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연방과 스릅스카 공화국

보스니아내전 이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인이 통치하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연방과 세르비아인이 통치하는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나뉘게 되는데 브르치코 행정구는 정치·경제적 요충지로서 소유권에 대한 분쟁이 끊이지 않았으나 1999년에 미국외교관 로버트 오웬의 중재로 공동주권지역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러나 공동주권지역이지만 각기 저마다의 독립된 경찰과 교육 및 보건제도를 가지고 있고 시장은 크로아티아인이고 대리인은 보스니아인, 시의회 의장은 세르비아인이 맡고 있는 등 표면적으로는 화해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으로는 내전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 폰세카만: 엘살바도르, 니카라과 및 온두라스

 

중미 온두라스 서부의 태평양 연안에 있는 폰세카만(Gulf of Fonseca)은 서로는 엘살바도르, 동으로는 니카라과에 접해 있는 3국의 공동주권지역이지만 그 이전에는 영투분쟁이 끈이지 않던 곳이었고 특히 미국이 파나마운하가 건설되기 이전에 운하의 건설을 검토할 정도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습니다.

그러던 중 1917년에 니카라과는 엘살바도르 및 온두라스와 상의 없이 미국과 브라이언-차모로조약을 체결하고 미국의 해군기지 건설을 허가하게 되는데 이에 반발한 두 나라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여 승소하였으나 이후에도 분쟁이 계속되어 1992년 국제사법재판소에는 3국의 공동주권지역으로 결정하는 판결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링컨 대통령은 행복했을까?

링컨 대통령은 행복했을까?

미국의 제46대 대통령선거가 끝났으나 트럼프 대통령은 대선 결과에 불복하고 있으며 그의 자녀들 또한 선거결과의 승복을 두고 의견충돌을 빚고 있다는 언론의 보도를 보았다.

서부에서 바이든에게 참패하고, 자녀들이 언론의 주목을 받는 트럼프를 보면서 나는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을 떠올리게 된다.

링컨과 트럼프는 모두 공화당 소속이란 것과 탄핵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비슷한 점도 있지만 내가 링컨을 소환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자녀의 모습을 떠올리면서였다.

물론 트럼프는 재선에 실패했지만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은 재선에 성공했던 것도 다른 점이다.

그러나 1865년 3월 4일, 제17대 대통령으로서 두 번째 취임연설을 했던 링컨은 1865년 4월 14일의 피격으로 다음 날인 4월 15일에 사망하는 바람에 부통령이었던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이 뒤를 이어 미국의 제17대 대통령직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앤드루 존슨(Andrew Johnson)은 미국의 대통령 중에서 최초로 탄핵재판을 받은 기록을 남겼으나 무죄가 선고되어 파면을 면할 수는 있었는데 트럼프 또한 미국대통령으로 세 번째로 탄핵재판을 받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노예제도를 없앤 인물로만 알고 있는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가족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면 결코 행복했던 삶을 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선 링컨 대통령의 아내,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만 보더라도 그들의 가정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작가 데일 카네기는 그의 저서 ‘인간관계론(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암살된 것은 그의 결혼에 비교하면 비극이라고 하기엔 부족하다”고 적고 있을 정도로 그들의 부부사이는 원만하지 못했다.

남편의 암살을 곁에서 목격했던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은 장남을 제외한 3명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만 했고 장남에 의해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만 했던 아픔을 겪었는데 막내아들이 세상을 떠난 지 정확히 11년 뒤인 1882년 7월 15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음 날 사망하였다.

링컨 대통령 부부는 모두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인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만이 유일하게 성인이 되었으며 아버지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었고 정치활동을 하다가 사망하였는데 유일하게 링컨 가족묘지(Lincoln Tomb)에 안장되지 않은 인물이기도 하다.

로버트 토드 링컨

 

둘째 아들인 에드워드(Edward Baker Lincoln)는 링컨이 대통령이 되기 전에 3살의 나이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알려져 있으나 어린 나이에 사망함으로써 많은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사인(死因)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에드워드 베이커 링컨

 

아마도 링컨과 그의 아내에게 가장 큰 슬픔을 안겨다 준 것은 셋째 아들인 윌리엄 월레스 링컨(William Wallace Lincoln)의 죽음이었는지도 모른다.

1862년 2월 20일이면 몹시 추운 겨울이었을 것이고 지금처럼 난방이 잘되지 않았을 그때는 윌리엄 월레스 링컨(William Wallace Lincoln)이 내쉬는 마지막 숨이 하얀 연기처럼 퍼졌을 것이다.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나는 아들의 모습을 백악관에서 지켜보았을 링컨 부부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는 윌리엄 링컨이 죽고 난 뒤 3주 동안이나 침대에 누워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었던 메리 토드 링컨(Mary Todd Lincoln)의 모습에서 잘 알 수 있다.

물론 링컨 대통령의 슬픔도 커서 암살당하기 전까지 셋째인 윌리엄이 잠들어 있는 오크힐 묘지(Oak Hill Cemetery)를 꾸준히 찾았다고 하며 결국에는 아들과 함께 기차로 운구되어 일리노이 스프링필드에 있는 오크리지 묘지(Oak Ridge Cemetery)의 가족묘지(Lincoln Tomb)에 안장되었다.

윌리엄 월레스 링컨

 

막내아들인 넷째, 토마스 태드 링컨(Thomas Tad Lincoln III)은 1853년 4월 4일에 태어나 아버지의 대통령 당선과 함께 백악관에 입성했다 아버지의 사망과 함께 백악관을 나와 그의 나이 18세 되던 1871년 7월 15일, 원인 모를 병으로 사망하였으며 장례식은 당시 시카고에 있던 장남 로버트 토드 링컨(Robert Todd Lincoln)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그 뒤 스프링필드의 가족묘지로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토마스 태드 링컨

 

다시 링컨 대통령의 삶에 대한 이야기로 돌라오면, 링컨 대통령은 22세에 고향인 켄터키주의 호젠빌을 떠나 일리노이에 정착하여 정치활동을 시작하였고 스프링필드에서는 변호사로 활동을 하였다. 그런 연유로 그가 암살당해 세상을 떠나자 스프링필드의 시민들이 주축이 되어 링컨기념관협회(National Lincoln Monument Association)를 조직하고 기금모금에 나서 링컨의 가족묘지(Lincoln Tomb)를 완성하였다.

1874년, 조각가 라킨 골드스미스 미드(Larkin Goldsmith Mead)가 디자인한 기념비의 완성과 함께 링컨 대통령은 카타콤(catacomb)의 중앙에 있는 대리석으로 만든 관에 안장되었다.

 

불행했던 링컨 대통령의 삶은 죽은 뒤에도 끝나지 않아 완전한 안식을 얻지도 못했는데 MBC 프로그램인 서프라이즈에 소개되기도 했던 것처럼 사후에 그의 시신을 탈취하려는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MBC 서프라이즈를 소개하는 기사를 보면 1877년의 일이라고 나오지만 정확한 것은 그보다 1년 전인 1876년의 일이다.

빅 짐 케널리(Big Jim Kennally)가 이끌던 시카고 아일랜드의 범죄조직은 위조화폐를 만들고 있었는데 기술자의 한 명인 벤자민 보이드(Benjamin Boyd)가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일리노이 주립교도소에 수감되자 그들의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게 되었다.

빅 짐 케널리(Big Jim Kennally)

그래서 케널리는 벤자민을 석방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조직원인 테렌스 뮬렌(Terence Mullen)과 잭 휴즈(Jack Hughes)를 시켜 링컨의 시신의 훔친 다음 몸값으로 현금 20만 달러와 벤자민의 사면을 요구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1876년 당시 링컨 대통령의 시신은 스프링필드의 오크리지 묘지(Oak Ridge Cemetery)에 안장되어 있었는데 오크리지 묘지는 마을에서 3㎞나 떨어진 곳에 있는 관리인도 없는 시골묘지에 불과했다.

게다가 석관은 도난방지장치는커녕 시멘트도 아닌 소석고(plaster of Paris)로 봉인되어 있었고 석관이 안치된 방은 자물쇠 하나뿐이었기에 범죄자들은 쉽게 침입할 수는 있었으나 관을 들어올리지 못했는데 이 과정에서 비밀검찰국 위장요원, 루이스 스웨글스(Lewis Swegles)의 권총이 실수로 발사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되고 이틀 후 테렌스 뮬렌(Terence Mullen)과 잭 휴즈(Jack Hughes)는 체포되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링컨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묘지의 관리를 책임지고 있었던 존 캐럴 파워(John Carroll Power)는 멘붕에 빠지고 만다.

전문 도굴꾼도 아닌 아마추어들이 그렇게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면 당시에 성행하던 전문적인 시체도둑(body snatchers)들이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지를 생각한 그는 링컨 대통령의 시신이 매장된 위치를 옮기고 비밀에 부친다.

그리고 링컨의 장남인 로버트가 시멘트로 봉인하기까지 35년 동안이나 링컨 대통령은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비석도 없이 쓸쓸히 묻혀있어야만 했다.

한 인간으로서의 링컨의 인생을 과연 누가 행복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진주만공습과 지키지 않은 미국의 약속

진주만공습과 지키지 않은 미국의 약속

주한미군의 방위비분담금 4차 회의가 종료되고 다시 한국에서 5차 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소식을 들으면서 과연 미국에게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피로 맺은 혈맹국일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주한미군의 주둔 목적이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한 것인지, 동아시아에서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써의 임무가 우선인지는 모를 일이나 그 목적이 순수하게 한반도의 평화를 지키고자 함에 있다고 하더라도 트럼프가 요구하는 방위비의 증액은 도가 지나친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행태는 비단 트럼프만의 것이 아니란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쉽게 발견할 수 있는데 70년 이상이나 목숨을 바쳐 싸운 참전군인들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는 미국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통해서 과연 미국에게 동맹이란 어떤 의미인지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하고 이어서 다음 날에는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을 공격하였는데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D. 루즈벨트는 필리핀을 목숨을 걸고 지키겠다고 약속했지만 1942년 5월, 필리핀 주둔 미군이 일본군에 패퇴함으로써 그 약속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당시 필리핀은 미연방이었기 때문에 합법적으로 필리핀 국민들은 미국의 국민이었으므로 일본군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미군에 입대했던 필리핀인들도 당연히 미국재향군인의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은 바탄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만 패배하고 호주로 퇴각하게 되는데 이때 포로가 되었던 미군과 필리핀군 전쟁포로 7만여 명이 오도널 수용소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7,000~10,000명에 달하는 사람이 구타와 굶주림을 당하고 낙오된 자들은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죽음의 바탄 행진(Bataan Death March)이다.

이후 1944년 10월 20일 시작된 “레이테 전투”에서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미군이 일본군에게 승리함으로써 필리핀제도 전역은 수복되었고 1946년 7월 4일, 필리핀은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필리핀군 참전용사들에게 재향군인의 혜택을 제공하겠다던 루즈벨트 대통령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미의회에서도 3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었던 비용에 대한 우려로 필리핀의 재향군인과 유가족에게 보상금을 지급하지 않는 것을 골자로 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도 미국의 우선순위는 아시아가 아닌 유럽이었고 미국은 마지못해 생색을 내는 수준인 2억 달러만을 필리핀 정부에 던져주고는(?) 알아서 처리하라는 행태를 연출하였다.

루즈벨트의 뒤를 이어서 미국의 제3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해리 트루먼은 들끓는 여론에 못 이겨 법안(HR 5158)에 서명하면서도 1946년 2월 20일 발표한 성명서를 통해 “미국 국민으로서 미국의 국기 아래,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싸운 그들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불굴의 용기로 싸웠습니다. 나는 필리핀 참전용사들의 복지를 돌보는 것은 미국의 도덕적인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참으로 거시기하고 뻔뻔한 말을 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이런 약속은 계속해서 지켜지지 않았고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고 나서 경기부흥을 위해 마련한 법인 미국경제 부흥 및 재투자법(2009 American Recovery and Reinvestment Act)에 오바마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법안에 포함된 바에 따라 필리핀군 참전용사에 대하여 시민권자에게는 15,000달러, 비시민권자에게는 9,000달러를 일시불로 지급하는 것이 결정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신청자 중 18,000여 명 정도만 수령할 수 있었고 24,000여 명은 지급이 거절되고 말았는데 현재 2차 대전에 미군으로 참전했던 필리핀군 생존자는 1만 명 정도라고 하는데 미국은 이들의 생전에는 돌볼 생각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법적으로 미국인이었던 필리핀군 참전용사들에 대한 약속도 지키지 않고 있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한반도의 평화만을 목적으로 미군이 대한민국에 주둔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자국의 국민이었던 사람들도 돌보지 않는데 과연 우리나라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서 미군이 주둔하고 있을까? 그래서 나는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트럼프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갖고 가라!”

허스키 작전과 한 통의 거짓 전화

허스키 작전과 한 통의 거짓 전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단행되었던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은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y)’이라고도 불린다. 공중과 해상공격으로 이루어진 38일 동안의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y)’을 통해 연합군은 시칠리아를 장악하게 되는데 이 작전에 동원된 미 제3보병사단에는 지금은 사라진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소속의 종군기자 ‘마이클 치니고(Michael Chinigo)’가 있었다.

알바니아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1943년 7월 10일, 미 제3보병사단에 소속되어 시칠리아의 ‘리카타(Licata)’ 항구를 점령하는 작전에 참가하고 있던 중 점령한 이탈리아군의 참호 속에서 전화벨이 울리는 소리를 듣게 된다.

리카타(Licata)의 현재 모습

 

망설이다 수화기를 든 ‘마이클 치니고’에게 전화기 너머에서 자신을 장군이라고 밝힌 사람은 “현재 상황이 어떤가?”, “연합군은 상륙하였는가?” 하는 질문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던 ‘마이클 치니고(Michael Chinigo)’는 “아직 특이사항 없으며 연합군은 상륙하지 않았다.”는 거짓 보고를 한다.

그런 그의 거짓보고에 이탈리아군이 안심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전화로 인해 미 제3보병사단을 비롯하여 ‘허스키 작전(Operation Husky)’에 참가했던 일부 병력이 강풍 등의 어려운 기상조건으로 예정지에 착륙하지 못하거나 6시간이나 늦어서야 상륙함으로써 작전이 지연된 시간만큼을 벌 수 있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마이클 치니고(Michael Chinigo)’가 아니었다면 시칠리아가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이탈리아군은 지원군을 보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연합군은 더 많은 피해를 입으며 섬을 장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이클 치니고(Michael Chinigo)’는 작전 도중에 부상을 입은 병력을 돕고 포로들의 심문에 통역을 한 공이 인정되어 1943년 11월 15일 미 육군으로부터 ‘은성훈장(Silver Star)’을 수여받는다.

‘마이클 치니고’의 일화는 영화에서 자주 묘사되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검찰과 경찰이 실제로도 보여주고 있어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버닝썬에서 들어온 신고에 ‘코드제로’를 발령했음에도 출입구에서 종업원의 말만 듣고 발길을 돌렸던 경찰이나, 김학의, 장자연 사건의 수사에서 보여준 사회정의를 수호하는 임무를 다하지 않은 검찰의 모습은 ‘마이클 치니고’가 이탈리아 장군에게 했던 거짓보고처럼 국민들에게 거짓을 보고했음에 다름이 없다.

정의를 수호하는 최후의 보루이어야 할 검찰과 경찰이 권력에 빌붙고 금력에 기대어 직무를 유기함으로써 사회정의는 무너지고 국민들의 불신은 극에 달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마이클 치니고(Michael Chinigo)’는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라도 했지만, 당신들 견찰과 떡검들은 어떤 기여를 하였는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묻지 않을 수가 없다.

게다가 문제가 생길 때면 경찰과 검찰은 언제나 “환골탈태하겠다.”거나 “뼈를 깎는 노력을 하겠다.”는 표현을 하곤 한다. 그동안 깎은 뼈만 해도 서있을 수조차 없을 지경일 텐데 더 이상 깎을 뼈가 남았는지? 이래저래 우리나라 경찰과 검찰은 신기하고 이상한 조직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