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이안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화 하여 전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안 플레밍은 생전에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그가 즐겨 읽었던 조류 관련 서적 “서인도제도의 새들(Birds of the West Indies)”의 저자인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James Bon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었습니다.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

 

그러다가 2015년에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란 프로에서 “제임스 본드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방송이 나가고서부터 007의 실제 모델은 영국해군 정보부의 비밀요원이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의 아들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이 제임스 본드의 실존인물이었음을 밝혔다는 내용까지 첨부했었는데 최근에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007의 실제 모델은 스완지(Swansea) 출신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라는 사람으로, 그는 2차 대전 당시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그가 바로 이안 플레밍이 만든 007이란 스파이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주장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의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올해 2018년 10월 초, 언론을 통해서 처음 알려진 새로운 주장을 읽어본 소감으로는 MBC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보다는 더 실제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새롭게 007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평범한 금속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전쟁이 일어나자 SOE요원에 발탁되어 6년 동안의 2차 대전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이안 플레밍이 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이안 플레밍의 지휘를 받으며 근무를 했습니다.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이런 일련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3일 전인 1944년 6월 3일에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서명한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 때문이었습니다.

1911년과 1989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은 1911년에 “법적인 권한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제정하였고, 1989년에 “합법적인 권한이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범죄행위에 해당하며 특히 공무원은 지정한 6개 항목에 해당하는 정보를 무단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법에 따라 그동안 비밀로 분류되어 왔던 내용이 해제가 되면서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그의 조부인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비밀요원으로 활약한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비밀문서를 찾으면서까지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조부가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리 질문을 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근무를 했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던 할아버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찾은 자료에 의하면 1942년 이안 플레밍이 특수한 임무를 위하여 6명의 엘리트 SOE 요원으로 조직한 팀의 일원이 바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였다는 사실은 그가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MBC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가 그의 아들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음을 말했다는 것처럼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역시 그의 손녀인 제니(Jenny)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모델이었음을 밝혔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5년을 더 요원으로 복무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1995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끝까지 비밀을 엄수한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주장보다는 그가 훨씬 더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안 플레밍이 밝혔던 조류학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007 제임스 본드의 이름은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을 지키면서 실제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를 보호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할아버지 얘기가 나와서 몇 자만 덧붙이면, 프로레슬러이자 지금은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가 된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의 할아버지 피터 메이비아(Peter Maivia)도 “007 두 번 산다”에 출연하였다고 합니다.

전시에는 일기예보도 함부로 방송해선 안 된다.

전시에는 일기예보도 함부로 방송해선 안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습격이 있고난 다음날인 12월 8일에서야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12월 19일에는 전시정보를 통제하는 기관인 검열국(Office of Censorship)을 만들어 미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통신을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열국 직원들의 배지(badge)

 

12페이지 분량의 실무규범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선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은 당연히 최우선으로 적시되었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적의 스파이가 방송을 통해 암호화된 메시지를 전송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해진 조치인데 이뿐만 아니라 방송에서의 음악요청도 받지 못하도록 규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대서양에서 독일 U-보트의 목격담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신문과 방송에서는 특히 기상이 좋을 때에는 일기예보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가 되었는데 이는 독일과 일본의 잠수함들이 일기예보에 근거하여 바다를 거쳐 오대호를 통해 미국의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일기예보가 통제되는 바람에 1942년 3월에 발생했던 가장 큰 등급(F4~F5)의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153명이 사망하고 1,284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 18개의 허리케인으로부터 미국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1942년 8월 시카고에서 있었던 풋볼경기 도중에 안개가 아주 심하게 끼어 중계방송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방송에서 안개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어서 생방송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서 중계방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실무강령을 따라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기상국(The Weather Bureau Forecast)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기상국 사무실의 모습

 

그 후 1943년에 기존의 엄격했던 규범이 다소 완화되었고 1945년 5월 8일 유럽전승기념일(V-E Day: Victory in Europe Day) 이후에는 최종적으로 12페이지의 규범이 4페이지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된 우리 기상청의 오보는 낚시인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악명이 높아 흔히들 “구라청”이라는 표현으로 부르곤 했는데 우리나라 기상청은 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앞으로는 기상청예보의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라 믿지만 말입니다.

유튜브(YouTube)의 시작은 온라인데이트였다.

유튜브(YouTube)의 시작은 온라인데이트였다.

당신(You)이라는 단어와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일컫는 별칭인 튜브(tube)의 합성어인 유튜브(YouTube)는 2005년 2월 페이팰의 직원이던 스티브 첸(Steve Chen), 채드 헐리(Chad Hurley), 자웨드 카림(Jawed Karim)이란 3명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창업하였고 2006년 10월, 구글이 16억5천만 달러에 인수한 후부터 세계최대의 비디오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유튜브 최초의 동영상은 공동창립자인 자웨드 카림이 jawed라는 닉네임으로 업로드한 “Me at the zoo”라는 제목의 18초 정도 분량의 영상이란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세간에 유튜버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이제는 너도나도 유튜버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튜브에 대한 반응은 뜨겁기만 하고, 내가 좋아하는 낚시를 주제로 한 유튜브의 영상들도 많지만 유튜브의 시작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단순히 동영상을 공유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문판 위키피디어를 보면 “헐리와 첸은 유튜브(YouTube)의 아이디어는 원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의 비디오 버전이며 Hot 또는 Not 웹 사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Hurley and Chen said that the original idea for YouTube was a video version of an online dating service, and had been influenced by the website Hot or Not)”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2016년 스티브 첸(Steve Chen)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기도 하다.

유튜브(YouTube)의 도메인이 등록된 날짜인 2005년 2월 14일은 잘 알고 있듯이 친구나 연인 사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인 발렌타이데이로서 이 날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즉 연인이 없어서 발렌타이데이와는 무관한 3명의 청년이 온라인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을 수 있도록 동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는 사이트를 개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유튜브(YouTube)가 시작될 당시의 태그라인은 “Tune in, Hook up”이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비디오를 보고 맘에 들면 연락하라는 의미지만 사이트를 개설한 이후 생각과는 달리 여성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업로드 하는 일이 없자 급기야는 동영상을 올리는 여성에게는 20달러를 지불한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고, 이마저도 생각처럼 되지 않자 사업계획을 변경하여 모든 유형의 비디오를 업로드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05년 4월 23일 오후 8시 27분 12초에 자웨드 카림이 jawed라는 닉네임으로 “Me at the zoo”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최초로 업로드 하였던 것이다.

영화 007의 감독은 진짜 비밀요원이었다.

영화 007의 감독은 진짜 비밀요원이었다.

시리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007 시리즈의 3편 “골드 핑거”와 7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8편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9편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를 연출했던 감독 “가이 해밀턴(Guy Hamilton)”이 2차 대전 당시 실제 비밀요원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22년 9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영국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던 가이 해밀턴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제15 고속포정 함대(The 15th Motor Gun Boat Flotilla)에서 중위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하는 임무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는 적지에 추락한 조종사들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것이었는데 1944년 6월 16일 가이 해밀턴은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브르타뉴반도(Brittany coast)에 고립된 조종사를 탈출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MGB718을 몰고 목적지를 향합니다.

 

MGB502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조종사들이 격추 당한 후 무사히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탈출로로 쉘번탈출로(Shelburne Escape Line)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43년 말에 MI-9의 요원 두 사람이 개척한 것으로 적지에 고립된 연합군 병력을 파리의 안전지대로 대피시킨 다음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는 도주로였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독일의 비밀경찰에 탄로되지 않았던 탈출로가 바로 브르타뉴반도(Brittany coast)에서 해군의 고속포정(MGB: Motor Gun Boat)을 이용해 영국으로 탈출시키는 경로였습니다.

 

아무튼 임무를 맡았던 가이 해밀턴과 부하 2명은 접선하기로 한 지점(코드명: 보나파르트)에서 조종사를 대동하고 배를 숨겨둔 곳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접선에 실패하였고 게다가 조류에 밀려 배는 사라지고 그들 또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곳으로 많은 독일군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자칫 하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도 현지에서 활동하던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던 “앤 로퍼스(Anne Ropers)”에 의해 구조됩니다.

서해안에서 낚시를 하거나 해루질을 하시는 분들은 간만조에 따라 갯벌이 드러나는 것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아실 텐데 탈출에 이용하는 시기가 바로 우리로 치면 대조기 정도에 해당하는 기간이었고 독일군의 눈을 피해 탈출을 시도하기에는 한 달 정도를 더 기다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앤 로퍼스(Anne Ropers)”와 그녀의 가족들은 20여일 동안 가이 해밀턴과 그의 부하 2명을 독일군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과 옥수수밭에 숨겨주었고 7월 11일 밤에 가이 해밀턴을 포함하여 총 18명의 연합군 병사들은 MGB503을 이용하여 무사히 탈출하게 됩니다.

 

앤 로퍼스와 가이 해밀턴(맨 우측)

 

앤 로퍼스(Anne Ropers)는 1943년 12월부터 가이 해밀턴이 탈출에 성공한 뒤 10여일 후에 이 탈출로가 발각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된 1944년 8월까지 130명에 달하는 인원을 탈출시켰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에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가이 해밀턴은 수훈십자상(DSC: 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았습니다.

트랜스젠더의 군 입대를 허용하는 나라들

트랜스젠더의 군 입대를 허용하는 나라들

미국이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금지하게 됨으로써 현재, 전 세계적으로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는 나라는 모두 19개국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쿠바와 태국은 제한적으로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국은 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2005년부터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지만 행정병으로서의 복무만 허용하고 있으므로 이런 태국과 쿠바를 제외하면 현재 세계에서 트랜스젠더의 군 입대를 전면 허용하고 있는 나라는 17개국인데 지금부터 어떤 나라들이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는지 알파벳순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스트레일리아

호주는 1992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오스트리아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유럽에서는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는 나라들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는데 오스트리아는 2004년부터 허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벨기에

벨기에는 2003년부터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볼리비아

볼리비아는 남미 최초로 2010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캐나다

캐나다도 호주와 마찬가지로 1992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체코

체코는 1999년부터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덴마크

덴마크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1978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에스토니아

2000년에는 영국, 프랑스, 독일, 핀란드와 함께 에스토니아에서도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핀란드

2000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프랑스

프랑스도 2000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독일

프랑스도 2000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이스라엘

여성들도 2년간의 군 복무를 마쳐야 하는 이스라엘에서는 1993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뉴질랜드

뉴질랜드는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에 대하여 명문화 된 규정은 없지만 1993년부터 인권법(Human Rights Act)으로 성적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고 있어서 트랜스젠더의 입대가 허용되고 있는데 특히 2012년에는 군에 복무하는 성적소수자들을 지원하기 위한 특별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 노르웨이

노르웨이는 NATO 국가 중에서 최초로 여성들에 대한 징병제를 실시하는 국가이기도 하면서 1973년에 세계최초로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한 국가이기도 합니다.

 

▶ 스페인

스페인은 2005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스웨덴

스웨덴은 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1976년부터 트랜스젠더의 입대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 영국

2000년부터 트랜스젠더의 군 복무를 허용하기 시작한 영국군은 2017년에 열린 ‘London Pride Week’에 무지개 깃발을 들고 참가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진은 2016년 시가행진을 하고 있는 영국군 성소수자들의 모습

 

클럽 버닝썬과 조안 트럼파우어를 생각해본다.

클럽 버닝썬과 조안 트럼파우어를 생각해본다.

클럽 버닝썬의 폭력사건으로 촉발된 사회적 파장은 날이 갈수록 더 크게 확산되고 있다. 문제가 되고 있는 연예인들의 행동은 반드시 법의 준엄한 심판이 따라야 할 것이지만 대중의 불신이 커지고 있는 경찰의 수사를 우리는 현재로선 지켜볼 수밖에는 없다.

권익위에서 검찰로 넘어간 정준영과 관련한 정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모르는 경찰 입장에서는 현재 경찰 고위층의 연루설까지고 제기되고 있다 보니 대검으로 넘어간 정보의 내용과 실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을 테니 피의자들의 휴대폰보다 포렌식을 한 업체를 우선적으로 압수수색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이유가 맞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은폐를 위한 행동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심히 우려스러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검경수사권조정에 관한 문제는 오늘의 주제와는 조금 거리가 있으니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한 일부 연예인들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만 한 번 생각해보려고 한다.

굳이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의 조항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존엄한 가치를 보장받고 존중받아야 한다.

즉 이것은 사회 속에서 인종에 따라, 혹은 여성이라는 등의 이유만으로 그 가치를 훼손당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에 앞서 승리와 정준영은 인간의 존엄성을 부정하는 심각한 범죄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인식하여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얘기를 할 때면 흔히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를 예로 들곤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안 트럼파우어 멀홀랜드(Joan Trumpauer Mulholland)’라는 미국의 인권운동가를 알아보면서 이번의 사태와 한 번 비교를 해보볼까 한다.

올해로 77세인 그녀는 1875년부터 1965년까지 미국 남부연맹의 모든 공공기관에서 ‘짐크로 법(Jim Crow laws)’에 의해 합법적으로 실시하던 인종을 분리하는 정책에 반대하는 운동의 일환으로 운송수단의 이용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프리덤 라이더(Freedom Riders)’에 참가하였다가 19살의 나이로 체포된 후 보석금의 납부를 거부하고 수감생활을 하게 되면서 촬영한 사진이 많이 알려져 있다.

사진출처: ShareAmerica

 

그러나 그보다는 1963년 5월 28일 ‘프레드 블랙웰(Fred Blackwell)’이란 사람이 찍은 사진에 나오는 그녀의 모습이 작금에 벌어지고 있는 연예인들의 일그러진 추악한 행동의 심각성을 일깨워주는 데 더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시시피 주 잭슨의 백인전용 가게(five-and-dime store)에서 그녀는 백인들로부터 설탕, 케첩 그리고 겨자 등의 투척세례를 당하는데,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 승리와 정준영을 비롯하여 그들의 단톡방에 있던 연예인들 모두가 ‘조안 트럼파우어 멀홀랜드(Joan Trumpauer Mulholland)’ 일행에게 폭력을 가했던 백인들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에 앉아 있는 조안을 비롯한 세 사람은 모두 미시시피 시민운동의 중심지가 된 역사적인 ‘투갈루 대학(Tougaloo College)’의 소속으로 가장 왼쪽에 앉은 남자는 사회학을 가르치던 ‘존 솔터(John Salter)’ 교수이며, 중앙이 ‘조안 트럼파우어 멀홀랜드(Joan Trumpauer Mulholland)’이고 오른쪽에 앉은 여성은 후에 반핵운동가로도 활동을 하였던 ‘앤 무디(Anne Moody)’로서 조안과 앤은 당시 학생이었다.

만일 승리와 정준영의 사건이 표면화 되지 않았다고 가정하고 이 사진을 그들에게 보여준다면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도 그들이 느끼게 될 ‘잘못된 행동’이라는 판단은 지금 그들의 행태를 보는 대중들이 느끼는 감정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까? 모른다면 지금이라도 부디 깨닫게 되기를 바란다.

마천루에 사는 사람은 빨리 죽는다?

마천루에 사는 사람은 빨리 죽는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두바이에 있는 높이 828미터의 버즈 칼리파 (Burj Khalifa)인데 지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높이 1,007미터의 지다 타워(Jeddah Tower)가 건설 중이어서 조만간 1위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경쟁적으로 건설하는 마천루는 우리가 모르는 심각한 문제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점을 한 번 알아보자. 우선 고층건물 하면 우리는 도시의 중심부가 주변보다 온도가 높아지는 “열섬현상”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뿐만 아니라 “풍동터널”을 만들어 오염물질이 도시 주변에 축적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단일 건물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기도 하는데 오늘은 그 중에서 두 가지 사례를 한번 알아보자.

 

1. 대만의 타이베이 101은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다.

2005년 대만의 국립사범대학교의 지질학교수인 “Cheng Horng Lin”은 타이베이 파이낸셜 센터(Taipei Financial Centre), 즉 타이베이 101이 건설되기 전에는 규모 2 이하의 지진 외에는 일어나지 않았으나 건물이 들어서고 나서 규모 3.8과 3.2의 지진이 발생한 것은 내진설계를 한 건물의 무게가 70만 톤에 달해 이것이 지각에 심각한 압력을 가함으로써 지진을 유발하는 것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있는데 캘리포니아대학의 존 비데일(John Vidale)은 타이베이 101의 무게가 지하응력을 변화시킬 정도는 되는 것이 맞지만 지진을 발생할 정도는 아니라는 반론을 펼치기도 했다.

 

2. 고층건물은 화재를 일으킬 수 있다.

타이베이 101이 지진을 일으킬 수도 있는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해보이지만 이번에 얘기하는 화재를 유발하는 건물은 검증할 필요가 없다.

영국과 런던에서는 고층건물로 인해 차량의 백미러가 녹아내리거나 사람들이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무슨 이유로 어떤 건물이 화재를 유발했는지 살펴보자.

 

■ 런던의 워키토키(Walkie-Talkie) 빌딩

런던 중심부에 지어진 “20 펜처치 스트리트”는 그 생김새 때문에 흔히들 워키토키(Walkie-Talkie)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건물의 한쪽 면은 오목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이런 구조가 돋보기 역할을 하여 2013년에는 건물 아래에 주차되었던 자동차의 백미러가 녹아버리는 사고가 일어났다.

 

이후 건물 아래에서 머리카락이 타버린 사람들도 나오기도 했고 더러는 계란프라이를 만들기도 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하자 2014년에 건물에서 반사되는 빛이 분산되도록 구조를 변경하였는데 사람들은 마천루를 뜻하는 “Skyscraper”에 빗대어 “Fryscraper”라고 비꼬아 불렀다.

 

■ 라스베이거스의 비다라(Vdara Hotel) 호텔

미국의 이 호텔도 영국의 워키토키(Walkie-Talkie) 빌딩과 마찬가지로 햇빛이 반사되는 오목한 형태를 가졌는데 그 이유는 바로 건물을 디자인한 사람이 “라파엘 비뇰리”로 같았기 때문이다.

비다라(Vdara Hotel) 호텔의 경우에는 반사되는 빛이 수영장을 향하고 있어서 투숙객들이 심각한 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이 호텔의 수영장을 향해 반사되는 빛을 “죽음의 광선(death ray)”으로 불렀고, 결국 호텔 측에서는 반사되는 빛을 차단하기 위해 수영장 위에 차양막을 설치하고서야 마침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우스갯소리: 마천루에 사는 사람은 빨리 죽는다.

마천루가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있으나 그곳에서 거주하는 사람의 수명이 줄어든다는 것은 사실 큰 의미가 없다. 과학적인 의미 이외에는.

국제원자시(TAI: Temps Atomique International) 프로젝트의 연구에 의하면 지상 30미터 높이에서는 해수면보다 시간이 1피코 초(1조분의 1초) 빠르다. 따라서 지상 30미터의 높이에서 70년을 산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1000분의 1초 빨리 사망하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전혀 느낄 수 없는 정도의 시간에 불과하겠지만~

일본 유조선의 피격과 선박의 기국주의

일본 유조선의 피격과 선박의 기국주의

6월 13일 오만 해상에서 발생한 유조선 2척에 대한 피격사건의 배후로 미국은 이란을 지목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상황이다.

그러다 보니 미국과 이란은 각기 상대방을 배후로 지목하고 있으나 현재로서는 피격의 배후로는 4가지를 가정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는 이란의 혁명수비대 휘하의 해외작전을 담당하는 쿠드스군(Quds Force)이 헤즈볼라와 같은 무장조직을 사주하여 벌인 일일 수도 있다고 보고 있으나 여러 무장조직들의 세력에 미치지 않는 오만해상이란 점 때문에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두 번째로는 미국과 이란 사이의 긴장을 높이기 위한 반이란 테러조직의 소행일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는데 2018년에 이란의 군사퍼레이드를 무장공격했던 아흐브즈민족저항(Ahvaz National Resistance)은 활동지역이 다르기 때문에 배제되고 있고 그보다는 수니파의 반체제 무장단체인 ‘정의의 군대(Jaish al-Adl)’ 또는 ISIS(이슬람국가)일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건발생 후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혀온 두 조직의 행동으로 볼 때 이것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이란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및 이스라엘 등의 제3국이 배후일 것이라 의심하는 시각도 존재하고 있으며, 가능성이 제일 낮기는 하지만 해적들도 용의선상에 오르고는 있으나 아직은 배후로 지목할만한 어떠한 증거도 나오지 않은 상태란 것이 현시점의 팩트이다.

그런데 미국은 이란 혁명수비군이 유조선에서 불발된 기뢰를 회수하는 모습이라며 아래의 영상을 공개하면서 이 영상을 공개할 때까지 이란이 침묵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증거를 인멸하려는 의도를 보여주는 반증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피격당한 일본의 유조선 코쿠카 커레이저스(Kokuka Courageous)호는 일부언론에서는 일본국적의 선박이라고 보도하고 있는데 어제인 6월 14일 일본의 이와야 다케시 방위상은 자위대를 파병할 계획이 없다는 발표를 했다.

자국의 선박이 피격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병력을 파병하지 않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언론의 보도가 틀렸음에 있다.

일본국적의 선박으로 알려진 코쿠카 커레이저스(Kokuka Courageous)호는 미쓰비시가스화학의 자회사로 물류를 담당하고 있는 국화산업(国華産業)이 파나마로부터 용선하여 독일기업의 싱가폴 지사에 위탁하여 운영하고 있는 선박으로서 공해상의 선박이나 항공기는 국적을 가진 국가의 배타적 관할권에 속한다는 국제법상의 원칙인 기국주의(旗國主義)에 따라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자위대를 파병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피격당한 코쿠카 커레이저스(Kokuka Courageous)호에는 일본인 선원이 없었다는 이유 때문에도 자위대를 파병하지 않은 것인데 일본이 자위권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1. 일본에 대한 직접적인 공격이 있거나 동맹국이 공격을 받는 경우 및 일본국민의 생명과 자유에 대한 명백한 위험이 있을 때 2. 자위권 발동 이외에는 다른 수단이 없을 때라는 요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그러나 두 가지 요건 중 어디에도 코쿠카 커레이저스(Kokuka Courageous)호의 피격은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자위대를 파병하지 않는다는 발표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많던 블록버스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그 많던 블록버스터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영화 캡틴 마블(Captain Marvel)에서 주인공 캡틴 마블(Captain Marvel)과 닉퓨리가 처음으로 만나는 장소는 1990년대 당시 대형 비디오대여 체인점이었던 ‘Blockbuster’를 배경으로 한다.

당시에는 우리나라에도 아파트의 상가나 동네에 반드시 하나씩은 있었던 비디오대여점은 기술의 발달과 함께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이제는 그 모습을 보기가 어려운데 이런 사정은 영화의 배경인 미국도 마찬가지다.

영화에 나오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는 사업이 가장 활황이던 2004년에는 미국에만 4,500개의 매장이 있었고 전 세계에서 9,094개의 체인점을 운영하였지만 VOD(Video On Demand)와의 경쟁에서 휘청이다가 마침내 넷플릭스의 출현과 함께 사망선고를 받기에 이르렀다.

 

영화 캡틴 마블(Captain Marvel)에 나오는 블록버스터 매장의 씬은 지금은 70세와 60세를 각각 넘긴 ‘아놀드 슈왈제네거’ 선상님과 ‘제이미 리 커티스’ 여사께서 젊음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에 찍었던 영화, ‘트루 라이즈(True Lies)’의 비디오가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2019년을 맞으면서 그 많던 블록버스터의 매장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주와 미국에 각각 한 개씩이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호주에 있던 매장마저 2019년 3월에 문을 닫음으로써 미국 오리건 주에 있는 매장만이 유일하게 존재하게 되었다.

벤드의 매장: 출처 CNN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

독일이 통일되기 전인 1983년 봄, 세계는 서독의 주간지 슈테른(Der Stern)의 발표로 들썩이게 되는데 1932년부터 히틀러가 사망 직전까지 썼다는 일기를 입수하였다는 것이 세계를 들썩이게 만든 이유였다.

930만 마르크(당시 환율로 미화 610만 달러)를 들여 ‘히틀러의 일기(Hitler Diaries)’를 입수한 슈테른지의 기자 게르트 하이데만(Gerd Heidemann)은 전 세계의 보도진 앞에서 모두 62권으로 이루어진 히틀러의 일기를 공개하기 전 영국의 유명한 사학자이자 나치독일의 전문가인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에 의뢰하여 진위여부에 대한 검증을 마쳤다.

그리고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기자회견이 열리기 이틀 전인 1983년 4월 23일, 히틀러의 일기는 진품임에 틀림없다는 글을 쓰게 된다.

 

1947년에 발간한 책 ‘히틀러의 마지막 날(The Last Days of Hitler)’로 명성을 얻고 있던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는 정작 기자회견 당일에는 자신의 검증이 미흡하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되고, 급기야 1983년 5월 6일에는 히틀러의 일기가 가짜라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독일 연방기관의 조사로 히틀러의 일기가 가짜라는 판명을 받게 되면서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의 명성은 추락하기 시작하였고 일기를 판매했다고 알려진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는 체포되기에 이른다.

휴 트레버-로퍼(Hugh Trevor-Roper)

 

또한 930만 마르크를 일시불로 지불하지 않고 순차적으로 나누어 대금을 지불하면서 일기를 사들였던 슈테른지의 게르트 하이데만(Gerd Heidemann)기자는 대금의 전달과정에서 일부를 횡령한 혐의로 재판에 회부되고 2002년에는 그가 동독의 비밀경찰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됨으로써 또 다른 충격을 안겨다주었다.

1985년 사기죄로 4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 받았던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는 수감 중 후두암 판정을 받고 3년 만에 출소한 뒤, 역설적이게도 유명세를 타게 되었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개설하여 공식적으로 위조품을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위조하여 용돈을 벌었던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는 1957년에 드레스덴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그림을 배우게 되었고 1958년부터는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미술품 복원전문가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았다.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

 

그런 그가 만들었던 가짜 히틀러의 일기가 보관되어 있는 곳이 바로 오늘 소개하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Vienna)에 있는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이다.

위조품 박물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는 1951년에 설립된 프랑스의 박물관을 들 수 있는데 이곳에서는 예술품을 포함하여 생활용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것들을 전시하고 있으나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은 개인박물관이면서 독일어권에서는 유일한 위조품박물관으로 위조된 예술품만을 전시하고 있다.

2005년에 다이안 그로브(Diane Grobe)란 여성이 만든 이 박물관에는 예술품 위조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의 작품(?)들도 전시되고 있다.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콘라드 쿠야우(Konrad Kujau)보다도 더 뛰어난 위조전문가였던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은 게슈타포를 창설한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실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으로 향하고 있을 무렵, 연합군은 오스트리아의 암염갱(岩鹽坑)에서 나치독일이 약탈하여 숨겨놓은 예술품들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중에는 전문가들도 처음 보는 바로크시대의 화가인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그림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하네스의 작품들이 어떻게 나치의 손으로 들어가게 된 것인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이 판매한 것임이 밝혀졌고 이로 인해 독일에 협력한 죄로 그는 재판에 회부되게 된다.

반역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도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은 그것이 모두 자신이 위조한 가짜라는 사실을 실토하였으나 어느 누구도 그것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직접 그려보아야 믿을 수 있다는 수사당국에 의해 3개월 동안 가택에 구금당한 상태로 직접 그림을 그려 증명해야 했고, 법원의 의뢰로 국제적인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가짜라는 판명을 받음으로써 반역죄가 아닌 위조와 사기죄로 1년형을 선고 받을 수 있게 되었다.

1932년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의 작품들을 위조하기 시작한 ‘한 판 메이헤런(Han van Meegeren)’은 1936년에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60억 원에 가까운 돈을 받고 ‘엠마우스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이란 위조품을 ‘보이만스 반 뵈닝겐 미술관’에 판매하였고 1938년에 1400년대~1800년대의 네덜란드 화가들의 명작 450점과 함께 일반에 전시되었다.

엠마우스의 만찬(The Supper at Emmaus)

 

참고로 화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는 알지 못해도 그가 그린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라는 아래의 작품은 본 적이 아마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이 자랑하는 또 다른 작품(?)으로는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화가로 소개되고 있는 ‘토마스 패트릭 키팅(Thomas Patrick Keating)’의 것들도 있다.

100명 이상의 화가들의 작품 2천 여 점을 위조했다고 알려져 있는 토마스 키팅은 미술품시장의 비리를 교란할 목적으로 전문가들을 속이기 위해 위조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였으나 그 진위여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자신이 그린 위조품에는 시한폭탄(time bombs)이라 이름붙인 힌트를 숨겨두었던 ‘토마스 패트릭 키팅(Thomas Patrick Keating)’의 작품들을 비롯하여 많은 위조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의 설립목적은 저작권에 대한 이해와 진품과 가품을 구별하는 지식을 널리 알리는 것에 있다고 한다.

현재는 80여 점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다는 오스트리아의 위조예술품 박물관(Museum of Art Fakes)은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꼭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