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비행사도 귀환할 때는 세관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우주비행사도 귀환할 때는 세관신고서를 제출해야 한다.

외국을 여행할 때면 누구나 작성하는 세관신고서는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그 기준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주를 탐험하고 돌아오는 우주비행사들도 세관신고서를 작성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는 곳은 달에 착륙하여 지구로 귀환한 경험을 유일하게 가지고 있는 미국의 NASA 뿐일 텐데, NASA에서는 세관신고서를 작성하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실제로 1969년 7월 24일, 아폴로 11호가 지구로 귀환했을 때 닐 암스트롱과 마이클 콜린스 및 버즈 올드린 등 3명의 우주비행사들은 공동으로 서명한 세관신고서를 호놀룰루 공항에 제출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제출한 세관신고서를 보면 출발지가 발사지인 케이프 케네디(현 케이프커내버럴)로 되어 있고 중간기착지는 달이며 도착지가 호놀룰루로 기재되어 있고, 신고물품으로는 달에서 가지고 온 암석과 먼지 및 샘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세관신고서에 작성된 날짜인 1969년 7월 24일은 아폴로 11호가 하와이 남서쪽으로 1,480㎞ 떨어진 곳에서 항공모함 USS호넷에 의해 구조된 날이고, 실제 하와이로 귀환한 날짜는 1969년 7월 26일이니 세관신고서에 기재된 날짜는 공문서 허위작성의 죄를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한편 아폴로 11호의 승무원들은 우리가 제출하는 검역신고서를 제출하는 대신에 항공모함 USS호넷의 갑판에서부터 특수하게 제작된 옷을 입고 휴스턴에 있는 검역센터로 이동하여 3주간 격리된 상태에서 세균이나 질병의 검사를 받았다고 하며 그 후 2번째 달 탐사선인 아폴로 12호와, 3번째 탐사선 아폴로 14호의 승무원들도 격리되어 검역을 받았다고 하는데 4번째 탐사선인 아폴로 15호부터는 달은 무균지역이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검역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끝으로 우주비행사들의 세관신고서 작성의무에 대한 질문에 NASA의 대변인(Nicole Cloutier-Lemasters)이 공식적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우주비행사들도 임무에 관계없이 항공편을 이용하는 관습에 당연히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두 장의 사진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의 양쪽에서 감동을 주고 찬사를 받고 있는 반면에 국내의 모 정치인의 사진은 연일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기만 합니다.

 

전 세계인이 즐기는 평창동계올림픽이 정치인들로 인해 변질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글을 적게 되었습니다.

동계올림픽 종목 중에서도 피겨스케이팅 종목은 먼 나라의 일로만 여겨지던 것이 김연아란 한 사람으로 인해 저변이 확대되고 많은 관심을 받기 시작한 것은 국민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김연아 선수를 생각하면 언제나 ‘아사다 마오’선수가 떠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이낙연 국무총리가 2017년 10월 24일 다케다 츠네카즈 일본 올림픽위원회 위원장과 만나 은퇴한 김연아 선수와 일본의 아사다 마오의 ‘평창 동계 올림픽 갈라 쇼’를 제안하기도 했었지요.

이렇게 ‘김연아’ 하면 떠오르는 ‘아사다 마오’는 안타깝게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치세력에 의해 혐한(嫌韓)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일본에서는 한국 때리기가 극심했는데 일본의 인터넷 우익작가(ネトウヨ) 햐쿠다 나오키는 “평창올림픽 참가를 보이콧하자” “그런 시시한 올림픽은 참가를 하지 않는 것이 좋고 한국은 심판을 매수할 것이다”라는 등의 망언을 일삼기도 했습니다.

은퇴한 아사다 마오는 여전히 일본의 국민적인 스타로서 현재도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데 일본의 아베총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아사다 마오를 팔로우하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과연 아베총리는 순수한 동기에서 아사다 마오를 팔로우하였을까 하는 점에 있어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대부분입니다.

아베의 핵심지지층을 형성하고 있는 우익층에는 아사다 마오의 팬들이 많고 그들이 아사다 마오를 혐한의 아이콘으로 악용하는 것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후지TV의 프로그램을 비판하는 사건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은 우익들 사이에서는 ‘아사다 마오 전도 패널 사건’으로 불리고 있는데 후지TV의 이 프로를 보고 혐한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했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사건의 내막을 조금 살펴보면 2008년 3월 세계 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아사다 마오를 출연시켜 놓고 아사다 마오가 넘어져 실수하는 장면을 부각시킨 것을 두고 당시 한류와 관련한 방송 프로그램이 제일 많았던 후지TV가 아사다의 우승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악의적인 방송을 했다는 여론이 일기 시작하면서 항의가 쇄도하였고 급기야는 연이은 대규모 시위로 번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방속 직후에 후지TV에서 해명한 보도자료를 “아사다 마오의 승리에도(불구하고) 김연아 선수와의 실력차이(가 난다)”는 편향적인 시각으로 해석한 것과 “실수가 없었으면 김연아 선수가 이겼을 것” “실력은 김연아가 최고”라는 후속기사가 더 큰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며 방송에서 이런 발언을 한 해설자는 더 이상 출연을 할 수가 없게 되었고 급기야는 김연아로부터 괴롭힘을 받았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까지 유포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랑스럽게도 밴쿠버 동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김연아 선수를 두고는 “아사다 마오는 트리플 악셀을 3번이나 성공시킨 것에 비해 그다지 난이도 높은 기술을 구사하지 않은 김연아가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애매한 기준으로 금메달을 땄다”는 기사를 양산하게 된 것의 이면에는 이런 우익세력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을 무시할 수만은 없습니다.

 

물론 일본에서 내세웠던 “기술은 아사다, 표현력은 김연아”라는 언론의 논조에 대해서 “김연아는 기술점수 중 GOE(가산점)가 너무 높다” “점프의 질을 보면 높이와 비거리, 속도 등에서 김연아는 다른 선수에 비해 월등히 강하기 때문에 높은 GOE를 받는 것”이라는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도하는 언론과 인사들도 일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객관적이고 냉정하게 분석한 기사는 국적(國賊)이라는 등의 극언으로 공격을 받았고 이런 현상은 근래에 들어 일본의 아베총리를 비판하는 인사와 언론에 대하여 ‘반일’ ‘귀화한 조선인’ ‘국적’ ‘편향보도’라고 공격하고 있는 현상과 똑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은퇴한 아사다 마오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은 후지TV에 대한 데모에서 그치지 않고 이제는 세력을 확대한 우익들을 정치적 기반으로 이용하려는 의도에서 아베총리가 인스타그램에서 아사다를 팔로우 하기 시작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일 것입니다.

아사다 마오를 좋아하는 팬들은 분명 한국에도 있을 것이고, 동시대의 라이벌이기는 했어도 김연아와 아사다가 서로에게 더욱 노력할 수 있는 동기를 마련해준 것은 틀림없는 일이었을 것이기에 빙판 위에서 아름다운 연기를 펼치던 두 사람에 대한 추억은 아름답게 남았으면 하는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

 

더 이상 정치인들에 의해서 왜곡되고 악용되는 일들은 없기를 바라면서

마지막으로 국내 정치인들에게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올림픽 기간만이라도 찌그러져 있어라!”

영화 007 골드핑거의 숨은 이야기

영화 007 골드핑거의 숨은 이야기

코로나 19의 영향으로 007 노 타임 투 다이의 개봉이 11월로 연기되었다고 한다. 007의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던 배우들 중에서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가장 잘 어울렸다고 생각하는 숀 코네리는 번외편인 1983년작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까지 포함한다면 로저 무어와 함께 가장 많은 7편에서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었다.

제1대 007이라는 것을 떠나서 로저 무어보다야 훨씬 낫다고 생각하지만 오늘은 숀 코네리가 주연을 맡았던 1964년 작 007 골드 핑거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007 시리즈의 3번째 작품인 숀 코네리 주연의 ‘골드핑거’의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마도 22편인 퀀텀 오브 솔러스에서도 오마쥬했던 아래의 장면일 것이다.

 

골드핑거

 

퀀텀 오브 솔러스

 

골드핑거에는 실제 첩보원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만든 씬이 있는데 숀 코네리가 흰색의 턱시도 위에 잠수복을 착용하고 침투하는 장면이 바로 그것으로 2차 대전 당시 네덜란드 출신으로 영국 특수작전수행대(SOE: Special Operations Executives)와 합동으로 작전을 수행했던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의 경험담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이런 내용은 영국의 케이스 제프리(Keith Jeffery)란 역사학자가 쓴 ‘MI6’란 책을 통해서 공개가 되었다.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인 1938년 9월에 해군장교후보생으로 훈련을 받고 있었는데 1940년 5월 10일, 독일이 네덜란드를 침공하자 저항조직인 오드딘스트(Ordedienst)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나치와 싸우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지휘부의 판단에 따라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영국정보국과 접촉하기 위한 임무를 띠고 영국으로 잠입하여 2명의 대원과 함께 망명해 있던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과 연락하고 여왕의 아파트에 기거하면서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영국 비밀정보부로부터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라는 작전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게 되는데 이 작전은 네덜란드 공군조종사였던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 수립한 것으로 네덜란드의 저항세력을 해외로 도피시키거나 잠입시키는 것이 주된 임무인 작전이었다.

공교롭게도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란 사람도 영화와 관련이 있는데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이란 글에서 언급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에서 실제로 포로생활을 했던 그는 세 번의 시도 끝에 1944년 3월 24일 탈출에 성공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에서 제임스 코번이 맡았던 루이스 세드윅(Louis Sedgwick)이란 배역의 모델이 바로 브람 반데르 스톡(Bram van der Stok)이었다고 한다.

 

앞줄 왼쪽이 제임스 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면,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 작전은 타당성을 검토하기 위해 처음으로 실행에 옮겨지게 되는데 이때 작전을 수행한 인물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인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와 에릭 하젤호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를 비롯한 4명의 대원들이었다.

1941년 11월 23일 밤, 이들 4명은 나치가 점령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휴양도시 스헤브닝겐(Scheveningen)에 잠입하여 저항군으로 활동하던 2명을 탈출시키는 임무를 맡고 조그만 배를 타고 해안으로 접근한 다음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잠수복 안에 흰색이 아닌 검정색 턱시도를 착용하고 에릭 하젤호프 로엘프제마(Erik Hazelhoff Roelfzema)는 그 위에 브랜디를 부었다.

 

왼쪽: 태즐라, 오른쪽: 로엘프제마

 

그런 다음 해안에 닿은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잠수복을 벗고 술 취한 연기를 하며 나치장교들이 모여서 술을 마시는 호텔로 들어갔다.

그러나 저항군을 탈출시키기가 불가능했을 뿐만 아니라 무전기마저 고장이 나고 탈출작전을 독일군들이 눈치채는 바람에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작전은 실패로 끝났지만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는 공로를 인정받아 네덜란드의 최고 군사훈장(Military William Order)도 받고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의 보좌관으로도 채용된다.

 

귀국하는 빌헬미나 여왕을 영접하는 태즐라(우측)와 로엘프제마(맞은편)

 

국내 언론을 보면 콘택트 홀랜드(Contact Holland) 작전은 이것을 마지막으로 실행되지 않은 것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것은 100% 틀린 사실로 피터 태즐라(Peter Tazelaar)에게는 마지막이었을지는 모르지만 계속 실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치에 협력하는 반역자가 나오는 바람에 저항군들이 희생되었던 영화와도 같은 일들이 있었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내용은 영화 ‘007 골든핑거’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은 비밀이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을 각본을 썼던 폴 덴(Paul Dehn)이 알 수 있었던 것일까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만일 폴 덴(Paul Dehn)이 이런 사실을 알고서 썼다면 영국 정보당국의 비밀 관리체계가 허술하였다는 반증이고, 그렇지 않고 모르고 썼다면 상상력이 뛰어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상상력만으로 쓴 것이었다면 결국 역사학자인 케이스 제프리(Keith Jeffery)가 쓴 ‘MI6’란 책은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한 거짓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5단계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5단계

지금으로부터 10 수 년 전 비트코인의 장래에 대한 전망을 묻는 질문에 나는 제도권으로의 유입은 불가능할 것이라 예측했는데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그러나 비트코인을 비롯한 가상화폐에 대한 투자와 주식투자의 환상을 좇는 분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의미에서 주식시장에 뛰어들어 겪게 되는 단계를 5가지로 나누어 몇 자 적어본다.

 

첫 번째. Nothing(무지)의 단계

멋모르고 관리종목에 한 방 질러봤다가 대박을 맛보기도 하고, 몰빵으로 하루아침에 깡통이 되기도 합니다. 쥐뿔도 아는 게 없으니 시장에 대한 두려움도 없습니다. 그냥 감으로 들어갔다가 얼떨결에 대박 한 번 맞으면 본인이 세상의 최고인양 기고만장하여 날뛰게 되지요~

“흐미~ 이제 여기 있는 돈은 다 내 것이여….^^

이 좋은 돈벌이를 왜 내가 예전에 모르고 그 동안 코 묻은 돈 벌려고 헛고생만 잔뜩 했던가!!!” 호화 요트 타고 세계일주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기도 하고…… 강남에 초고층 빌딩 수십 채 사놓고 몇 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회장님으로 변신한 자신을 그려보기도 합니다. 참으로 행복만땅인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 원대한 꿈이 파도에 부딪히는 모래알처럼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며칠 안 걸립니다.

미수에 신용까지 몰빵하여 오버했는데 운 좋게도 나스닥이 협조를 하여 담 날 아침장 대박을 수차례 맛보거나 혹은 거래도 안 되는 휴지조각 다 된 관리종목을 마지못해 들고 있다가 한 방에 몇 배 챙기기도 했던 터라… 20~30%짜리 수익은 눈에도 안 들어옵니다. 결국은…?

몇 번 얻어터지면 그래도 “아니야, 내가 좀 실수해서 그런 거야…이제 곧 잘 될 거야~~~~”라고 자신을 애써 위로해 보지만……

 

두 번째. Fear(두려움)의 단계

몇 번 계좌를 깡통으로 만들고 나면 이제야 서서히 시장의 잔혹성에 대해 깨닫기 시작합니다. “응! 내가 실력이 좀 모자라군. 공부 좀 해야겠어!” 서점에 가서 ”주“자나 ”증“자 들어가 있는 책이란 책은 모조리 긁어와 밤낮으로 공부에 매달립니다.

“그래~~~ 바로 이거였군. 이젠 됐어. 난 타고난 감각에다 이젠 이론까지 겸비했으니 천하무적이다.”

 

카드대출 몽땅 받아 다시 한 번 질러봅니다만 웬걸… 또 꽝입니다. “어? 이상하다. 왜 책에 있는 거 하고 시장하고 맞지가 않지? 내가 공부를 좀 덜 했나 보군…” 하면서 다시 챠트 분석과 이론으로 무장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들 하니 단전호흡도 배우고…

“이젠 완벽해!!!”

친구나 친지들한테 사업자금이 필요하다고 꼬드겨 몇 천만 원 융통하여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질러보지만……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은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이 단계에 머무르며 몇 십만 원만 생겨도 다시 도전을 해보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자신은 기본적으로 신용불량 상태에 돌입하고, 아내는 물론 친척 몇 명 신불자 만들고 본인은 서서히 폐인이 되어가기 시작합니다.

증권사나 동호회, 카페 등의 게시판을 주 무대로 기법 운운하기도 하고, 남의 글에는 무조건 딴지를 걸어보기도 하기 시작합니다. 이 모두가 자신의 행위를 안정화시키려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인 것이지요~~~

 

세 번째. Trust(자신감)의 단계

모든 것을 다 잃고 산 속에 들어가 이론과 챠트 분석에 더해 심리학, 병서까지 독파하며 그야말로 마음에 독을 품고 시장의 생리를 깨우쳐가는 단계입니다.

자신만의 매매기법을 만들어 시장의 승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은둔하며 무공을 쌓은 후 몇 번의 모의투자를 해보니 그런대로 수익이 제법 나옵니다. “음…이젠 하산해도 되겠군.”

 

어떻게든 실탄을 마련하여 전쟁터로 진군합니다. 그런데, 생각만큼 시장은 녹록하지가 않습니다. 총 쏘는 훈련은 엄청나게 하였음에도 사람을 실제로 죽여보질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조준은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도 방아쇠를 당겨야 할 시점에 망설이다가 적을 놓쳐버리기 일쑤거나 지뢰가 어디에 매설되어 있는지 잘 알면서도 적의 교란작전에 흔들거리다 잘못 밟아 터지기 일쑤지요. 그나마, 비상탈출 방법을 익혔기에 다행히 목숨은 부지합니다.

지나고 나면 자신의 작전상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짚어내는 능력도 있습니다. 이제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터득했지만, 문제는 적을 몰살시키고 고지를 탈환해야 하는데…… 맨날 그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질 못합니다.

결국 몇 번은 적을 물리치고 식량 등을 노획해 오기도 하지만, 보잘것 없으며 때로는 자신의 전략상 자만심 때문에 무모하게 적진을 공격하다가 한 방에 나가떨어지기도 합니다. 증권 사이트의 ARS 전문가라 하는 이들은 적어도 이 단계까지는 거쳐본 사람들이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총을 메고 적들을 죽이기는 역부족이니… 제갈량 행세를 하며 차라리 전략과 전술을 짜서 팔아먹는 것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다는 것을 이들은 아는 것입니다. 마치,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하는 거와 똑같습니다.

 

네 번째. Confidence(확신)의 단계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젠 마음을 비울 줄도 알고 무모한 공격이 자멸의 길이라는 것을 압니다. 어차피 자신의 능력으로는 대장 넘들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주 천천히 한 놈씩 죽이며 적진을 파고드는 것이 결국은 더 많은 식량을 약탈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총을 쏘지 않으며 100만원 가지고도 자금관리를 하며 투자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전략다운 전략으로 위험관리를 할 줄 알며 지혜롭게 날마다 전쟁에서 이기는 방법으로 시장을 공략할 줄 아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들이 바로 시간과의 싸움을 즐길 줄 아는 소위 말하는 5%의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섯 번째. Over confidence(교만)의 단계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참으로 묘하여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한다”는 말처럼 전쟁에 너무 오랫동안 승리만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는 “자만심”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응 이젠 나도 전쟁에는 신물이 났으니, 그 동안 닦아온 현란한 전술로 적들을 한 번에 쓸어버리고, 와이키키 해변에 휴가나 다녀와야겠다.”

시장은 움직이는 생물입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의 전략이 먹혀들지 않고 자꾸 엉뚱한 곳에 방아쇠를 당기는 횟수가 늘어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다시 서서히 두려움의 단계로 회귀하게 됩니다.

 

주식시장에서 끝까지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은 Trust와 Confidence의 단계를 오가는 사람들인데 지금 여러분은 과연 어느 단계에 서 계신가요?

엉클 톰스 캐빈이 출판된 3월 20일, 지금 우리는…

엉클 톰스 캐빈이 출판된 3월 20일, 지금 우리는…

1852년 3월 20일은 미국의 노예해방론자이자 사실주의 작가였던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출판된 날로 1951년 ‘내셔널 에러(National Era)’란 잡지에 10개월간 연재되었던 이 소설은 1852년에 책으로 출판되어 남북전쟁의 계기가 된 소설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1862년 링컨 대통령과 스토우 부인이 만났을 때 신장 193㎝의 거구였던 링컨 대통령이 자그마한 체구의 ‘해리엇 비처 스토우(Harriet Beecher Stowe)’에게 “자그마한 당신이 이 큰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다.(You are the little woman who wrote the book that started this great war.)”고 말했을 정도로 당시 미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다.

소설 속의 주인공 톰 아저씨는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원래의 주인이었던 셸비 부부의 아들 조지가 다시 사들이기 위해 찾아오기 직전에 다른 노예의 탈출을 도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마는데 오늘 문득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생각나는 이유는 버닝썬으로 촉발된 연예인들의 일그러지고 추악한 모습과, 고 장자연씨의 죽음 및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조사에 대한 활동기간 연장 등 현재 우리사회에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돈으로 인간을 사고팔던 노예제도와, 부와 권력이면 사람을 마음대로 다루어도(?) 된다는 이들의 비뚤어지고 비인간적인 모습이 너무 흡사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그러나 작가정신이란 출판사에서 마도경씨의 번역으로 출판한 책의 본문을 보면 승리는 개뿔, 찌질이란 이름이 어울릴만한 연예인과 건설업자 윤중천의 행각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상등품 깜둥이들만 데려온다고 말합니다.”라고 하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예상인의 말과 승리가 카톡으로 나눈 대화내용이 무엇이 다를까?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이 출판되고 나서 일부 흑인들 사이에서 톰 아저씨를 두고 “백인들에게 아첨하는 인물”이라거나 “백인에게 순종하는 비굴한 흑인”이라고 하는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던 것도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거나 “성폭행 피해를 당한 별장에 머물렀다”는 등의 이유로 심리적으로 극도로 불안한 상태에서 협박까지 받았다는 피해자들의 진술을 무시하고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에게 무혐의 처분을 한 검찰의 모습과 하등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설 ‘엉클 톰스 캐빈(Uncle Tom’s Cabin)‘의 마지막 부분에서 죽은 톰 아저씨를 집으로 데리고 온 조지 셸비가 “누구도 집과 친구에게서 떨어져 외로운 농장에서 톰 아저씨처럼 죽어선 안 됩니다.“라고 했던 말처럼 우리사회의 어느 누구도 부와 권력의 크기에 의해 차별 받고 무시당하고 학대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정의로운 사회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기에 두 눈 부릅뜨고 경찰과 검찰의 수사를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다. 진실이 승리할 때까지~

우주비행사들은 왜 권총을 휴대했을까? 에이리언과 싸우려고?

우주비행사들은 왜 권총을 휴대했을까? 에이리언과 싸우려고?

세계 최초의 우주비행사인 유리 가가린을 시작으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우주에 갈 때 권총을 휴대했다.

에어리언을 만났을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을까? 무중력의 우주공간에서 무슨 이유로 권총이 필요했을까?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이 권총을 휴대했던 이유는 우주에서 사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구로 귀환할 때 야생동물이나 범죄로부터 보호하기 위함 때문이었다.

유리 가가린을 필두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이 휴대했던 권총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이었는데 미국의 우주비행사들이 탄 캡슐이 바다로 낙하하는 반면에 러시아는 내륙에 착륙하도록 되어 있었고 구조팀에 의해 구조되기까지는 며칠씩이나 걸릴 수도 있었기에 광활한 내륙의 오지에서 야생동물과 범죄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총기의 휴대가 필수적이었다.

그러나 1965년에 일어난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을 대신할 보다 강력한 총기를 필요로 하게 된다.

1965년 3월 18일에 발사되었던 보스호트 2호(Восход-2)에 탑승했던 파벨 벨리아예프(Pavel Ivanovich Belyayev)와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Arkhipovich Leonov)는 지구로 귀환하는 도중 궤도를 벗어나는 바람에 지구를 한 바퀴 더 돌면서 궤도를 수정했고 이로 인해 착륙위치가 변경되면서 원래의 착륙지점에서 386㎞나 떨어진 우랄산맥의 타이가 오지에 이틀 동안이나 갇히게 되었다.

 

이 때 두 명의 우주비행사들이 소지하고 있었던 권총은 마카로프 피스톨(PM: Pistolet Makarova)이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굶주린 곰들이 다가올 때 9㎜의 이 반자동 권총은 위협을 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구조대에 의해 구조가 되고 나서 “비상착륙을 했을 때 생존하기 위해서는 더욱 강력한 총기가 필요하다.”는 알렉세이 레오노프(Alexey Arkhipovich Leonov)의 주장에 의해서 총신이 3개인 TP-82가 개발되었고 1982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여 2006년까지 사용되다가 2007년에 서바이벌 키트에서 제외가 되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GPS의 정확도가 높아졌고 이 때문에 우주비행사들을 구조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으므로 러시아의 우주비행사들은 10년 이상이나 총기를 휴대하지 않았으나 2019년 9월 유인우주선의 발사장소가 극동으로 이전하면서 다시 총기를 휴대하도록 할 것임을 발표하였는데 현재 러시아 당국에서는 TP-82를 대신할 총기의 시험이 한창이라고 한다.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새롭게 등장한 007의 실제 주인공

이안 플레밍의 소설을 영화화 하여 전 세계적으로 크게 인기를 끌고 있는 “007 시리즈”의 주인공 “제임스 본드”의 실제 모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이안 플레밍은 생전에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은 그가 즐겨 읽었던 조류 관련 서적 “서인도제도의 새들(Birds of the West Indies)”의 저자인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James Bond)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고 밝힌 바가 있었습니다.

조류학자 제임스 본드

 

그러다가 2015년에 MBC의 “신비한 TV 서프라이즈”란 프로에서 “제임스 본드의 고백”이란 제목으로 방송이 나가고서부터 007의 실제 모델은 영국해군 정보부의 비밀요원이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의 아들이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자신이 제임스 본드의 실존인물이었음을 밝혔다는 내용까지 첨부했었는데 최근에 이런 주장을 반박하는 새로운 주장이 나타났습니다.

새로운 주장에 따르면 007의 실제 모델은 스완지(Swansea) 출신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라는 사람으로, 그는 2차 대전 당시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 요원으로 활약했으며, 그가 바로 이안 플레밍이 만든 007이란 스파이의 실제 모델이었다는 주장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의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에 의해서 제기되었습니다.

올해 2018년 10월 초, 언론을 통해서 처음 알려진 새로운 주장을 읽어본 소감으로는 MBC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보다는 더 실제 주인공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새롭게 007의 실제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에 대하여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평범한 금속노동자로 생활하고 있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전쟁이 일어나자 SOE요원에 발탁되어 6년 동안의 2차 대전에서 활약하였으며, 특히 이안 플레밍이 소설을 쓰기 이전부터 이안 플레밍의 지휘를 받으며 근무를 했습니다.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이런 일련의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3일 전인 1944년 6월 3일에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서명한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 때문이었습니다.

1911년과 1989년에 만들어진 영국의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은 1911년에 “법적인 권한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위법”이라고 제정하였고, 1989년에 “합법적인 권한이 없이 정보를 공개하는 것은 범죄행위에 해당하며 특히 공무원은 지정한 6개 항목에 해당하는 정보를 무단 공개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이 추가되었습니다.

이런 법에 따라 그동안 비밀로 분류되어 왔던 내용이 해제가 되면서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그의 조부인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가 비밀요원으로 활약한 것을 밝힐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비밀문서를 찾으면서까지 알고 싶어 했던 이유는 조부가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자식과 손자들이 아무리 질문을 해도 어디에서 어떻게 근무를 했는지 끝내 밝히지 않았던 할아버지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손자인 스티븐 필립스(Stephen Phillips)가 찾은 자료에 의하면 1942년 이안 플레밍이 특수한 임무를 위하여 6명의 엘리트 SOE 요원으로 조직한 팀의 일원이 바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였다는 사실은 그가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다는 주장에 신빙성을 더해주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뿐만 아니라 MBC의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소개되었던 “패트릭 댈즐 조브(Patrick Dalzel-Job)”가 그의 아들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음을 말했다는 것처럼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 역시 그의 손녀인 제니(Jenny)에게 자신이 007의 실제 모델이었음을 밝혔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이후에도 5년을 더 요원으로 복무한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는 1995년 8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끝까지 비밀을 엄수한 그의 모습에서 이전의 주장보다는 그가 훨씬 더 007의 실제 주인공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이안 플레밍이 밝혔던 조류학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007 제임스 본드의 이름은 “공식비밀보호법(Official Secrets Acts 1911-1989)”을 지키면서 실제 주인공이었던 “제임스 찰스 본드(James Charles Bond)”를 보호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끝으로 할아버지 얘기가 나와서 몇 자만 덧붙이면, 프로레슬러이자 지금은 유명한 헐리우드 스타가 된 드웨인 존슨(Dwayne Johnson)의 할아버지 피터 메이비아(Peter Maivia)도 “007 두 번 산다”에 출연하였다고 합니다.

전시에는 일기예보도 함부로 방송해선 안 된다.

전시에는 일기예보도 함부로 방송해선 안 된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습격이 있고난 다음날인 12월 8일에서야 미국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12월 19일에는 전시정보를 통제하는 기관인 검열국(Office of Censorship)을 만들어 미국으로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통신을 규제하기 시작했습니다.

 

검열국 직원들의 배지(badge)

 

12페이지 분량의 실무규범에는 루즈벨트 대통령의 동선이 공개되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은 당연히 최우선으로 적시되었고 일반인들을 상대로 거리에서 인터뷰를 하는 것도 금지되었습니다.

이것은 적의 스파이가 방송을 통해 암호화된 메시지를 전송할 수도 있다는 판단에 따라 취해진 조치인데 이뿐만 아니라 방송에서의 음악요청도 받지 못하도록 규제가 되었습니다.

한편 대서양에서 독일 U-보트의 목격담이 지속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신문과 방송에서는 특히 기상이 좋을 때에는 일기예보를 하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가 되었는데 이는 독일과 일본의 잠수함들이 일기예보에 근거하여 바다를 거쳐 오대호를 통해 미국의 내륙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데 가장 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엄격하게 일기예보가 통제되는 바람에 1942년 3월에 발생했던 가장 큰 등급(F4~F5)의 허리케인이 발생하여 153명이 사망하고 1,284명이 부상을 당하는 피해를 사전에 예방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고 모두 18개의 허리케인으로부터 미국민들은 큰 피해를 입었던 것입니다.

이와는 반대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 1942년 8월 시카고에서 있었던 풋볼경기 도중에 안개가 아주 심하게 끼어 중계방송을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방송에서 안개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어서 생방송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경기가 끝나고 나서 중계방송을 담당했던 사람들은 실무강령을 따라주어 고맙다는 인사를 기상국(The Weather Bureau Forecast)로부터 받았다고 합니다.

기상국 사무실의 모습

 

그 후 1943년에 기존의 엄격했던 규범이 다소 완화되었고 1945년 5월 8일 유럽전승기념일(V-E Day: Victory in Europe Day) 이후에는 최종적으로 12페이지의 규범이 4페이지로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지적된 우리 기상청의 오보는 낚시인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악명이 높아 흔히들 “구라청”이라는 표현으로 부르곤 했는데 우리나라 기상청은 혹시 전시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물론 앞으로는 기상청예보의 정확도가 높아질 것이라 믿지만 말입니다.

유튜브(YouTube)의 시작은 온라인데이트였다.

유튜브(YouTube)의 시작은 온라인데이트였다.

당신(You)이라는 단어와 미국에서 텔레비전을 일컫는 별칭인 튜브(tube)의 합성어인 유튜브(YouTube)는 2005년 2월 페이팰의 직원이던 스티브 첸(Steve Chen), 채드 헐리(Chad Hurley), 자웨드 카림(Jawed Karim)이란 3명의 청년들이 공동으로 창업하였고 2006년 10월, 구글이 16억5천만 달러에 인수한 후부터 세계최대의 비디오 플랫폼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유튜브 최초의 동영상은 공동창립자인 자웨드 카림이 jawed라는 닉네임으로 업로드한 “Me at the zoo”라는 제목의 18초 정도 분량의 영상이란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세간에 유튜버로 활동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이제는 너도나도 유튜버가 되고자 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튜브에 대한 반응은 뜨겁기만 하고, 내가 좋아하는 낚시를 주제로 한 유튜브의 영상들도 많지만 유튜브의 시작은 누구나 알고 있듯이 단순히 동영상을 공유하는 것에 목적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문판 위키피디어를 보면 “헐리와 첸은 유튜브(YouTube)의 아이디어는 원래 온라인 데이트 서비스의 비디오 버전이며 Hot 또는 Not 웹 사이트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히고 있다.(Hurley and Chen said that the original idea for YouTube was a video version of an online dating service, and had been influenced by the website Hot or Not)”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2016년 스티브 첸(Steve Chen)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사실이기도 하다.

유튜브(YouTube)의 도메인이 등록된 날짜인 2005년 2월 14일은 잘 알고 있듯이 친구나 연인 사이에 초콜릿을 선물하는 날인 발렌타이데이로서 이 날 아무 것도 할 것이 없는, 즉 연인이 없어서 발렌타이데이와는 무관한 3명의 청년이 온라인으로 데이트 상대를 찾을 수 있도록 동영상을 업로드 할 수 있는 사이트를 개설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유튜브(YouTube)가 시작될 당시의 태그라인은 “Tune in, Hook up”이었는데 이것을 번역하면 비디오를 보고 맘에 들면 연락하라는 의미지만 사이트를 개설한 이후 생각과는 달리 여성들이 자신을 소개하는 비디오를 업로드 하는 일이 없자 급기야는 동영상을 올리는 여성에게는 20달러를 지불한다는 광고를 내기도 했고, 이마저도 생각처럼 되지 않자 사업계획을 변경하여 모든 유형의 비디오를 업로드 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2005년 4월 23일 오후 8시 27분 12초에 자웨드 카림이 jawed라는 닉네임으로 “Me at the zoo”라는 제목의 비디오를 최초로 업로드 하였던 것이다.

영화 007의 감독은 진짜 비밀요원이었다.

영화 007의 감독은 진짜 비밀요원이었다.

시리즈로 제작되어 인기를 끌고 있는 영화 007 시리즈의 3편 “골드 핑거”와 7편 “다이아몬드는 영원히”, 8편 “죽느냐 사느냐” 그리고 9편 “황금총을 가진 사나이”를 연출했던 감독 “가이 해밀턴(Guy Hamilton)”이 2차 대전 당시 실제 비밀요원으로 활동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1922년 9월 16일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나 영국의 기숙학교에서 교육을 받으며 자랐던 가이 해밀턴은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해군에 입대하여 제15 고속포정 함대(The 15th Motor Gun Boat Flotilla)에서 중위로 근무를 하였습니다.

이들이 하는 임무 가운데 중요한 것의 하나는 적지에 추락한 조종사들을 무사히 탈출시키는 것이었는데 1944년 6월 16일 가이 해밀턴은 프랑스 북서부에 위치한 브르타뉴반도(Brittany coast)에 고립된 조종사를 탈출시키라는 지령을 받고 MGB718을 몰고 목적지를 향합니다.

 

MGB502

 

2차 대전 당시 연합군 조종사들이 격추 당한 후 무사히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던 탈출로로 쉘번탈출로(Shelburne Escape Line)라고 하는 것이 있었는데 이것은 1943년 말에 MI-9의 요원 두 사람이 개척한 것으로 적지에 고립된 연합군 병력을 파리의 안전지대로 대피시킨 다음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는 도주로였는데 그 중에서 마지막까지 독일의 비밀경찰에 탄로되지 않았던 탈출로가 바로 브르타뉴반도(Brittany coast)에서 해군의 고속포정(MGB: Motor Gun Boat)을 이용해 영국으로 탈출시키는 경로였습니다.

 

아무튼 임무를 맡았던 가이 해밀턴과 부하 2명은 접선하기로 한 지점(코드명: 보나파르트)에서 조종사를 대동하고 배를 숨겨둔 곳으로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접선에 실패하였고 게다가 조류에 밀려 배는 사라지고 그들 또한 고립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그 지역은 독일군에 의해 점령된 곳으로 많은 독일군 병력들이 주둔하고 있어서 자칫 하면 위험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도 현지에서 활동하던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던 “앤 로퍼스(Anne Ropers)”에 의해 구조됩니다.

서해안에서 낚시를 하거나 해루질을 하시는 분들은 간만조에 따라 갯벌이 드러나는 것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아실 텐데 탈출에 이용하는 시기가 바로 우리로 치면 대조기 정도에 해당하는 기간이었고 독일군의 눈을 피해 탈출을 시도하기에는 한 달 정도를 더 기다려야만 했던 것입니다.

“앤 로퍼스(Anne Ropers)”와 그녀의 가족들은 20여일 동안 가이 해밀턴과 그의 부하 2명을 독일군의 눈을 피해 그녀의 집과 옥수수밭에 숨겨주었고 7월 11일 밤에 가이 해밀턴을 포함하여 총 18명의 연합군 병사들은 MGB503을 이용하여 무사히 탈출하게 됩니다.

 

앤 로퍼스와 가이 해밀턴(맨 우측)

 

앤 로퍼스(Anne Ropers)는 1943년 12월부터 가이 해밀턴이 탈출에 성공한 뒤 10여일 후에 이 탈출로가 발각되어 더 이상 사용하지 못하게 된 1944년 8월까지 130명에 달하는 인원을 탈출시켰으며 그 공로를 인정받아 2015년에 프랑스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가이 해밀턴은 수훈십자상(DSC: Distinguished Service Cross)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