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국기에는 언제부터 단풍잎을 그려 넣었을까?

캐나다 국기에는 언제부터 단풍잎을 그려 넣었을까?

태평양이 보이는 밴쿠버에서 대서양을 바라보고 있는 퀘벡의 몽졸리에 이르기까지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깨끗하다. 아름답다.”는 것이 제가 가지는 캐나다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캐나다의 국기에는 상징과도 같은 단풍잎이 그려져 있는데 오늘은 언제부터 캐나다의 국기에 단풍잎 그림을 사용했는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534년 프랑스인 자크 카르티에(Jacques Cartier)에 의해 발견되어 당시 원주민들이 부르던 호칭(카나타: 마을이란 뜻)을 따라 캐나다로 부른 것이 국명의 유래인 캐나다는 카르티에가 이 땅이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음을 선언하기 위해 만든 아래와 같은 모양인 당시의 프랑스기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프랑스인들이 누벨 프랑스(뉴 프랑스)라고 부르며 건너와 무역업에 종사하게 되었고 그들이 조직한 길드사무소에서는 당시 프랑스의 해군기를 게양하였었는데 1663년 루이 14세가 누벨 프랑스를 국왕의 직할 식민지로 규정하면서 루이 14세의 깃발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영국인들도 캐나다에 발을 들이게 되면서 프랑스 상인들과 치열한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고 급기야는 영토분쟁으로 번지게 되었는데 ‘앤여왕전쟁’ ‘조지왕전쟁’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프랑스의 식민지 거점이었던 퀘벡이 함락되고 캐나다는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캐나다는 표면상으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지만 아직도 인구는 프랑스계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1841년에 영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어퍼 캐나다(Upper Canada)와 프랑스계가 많은 로어 캐나다(Lower Canada)를 통합하기 위해 ‘연합 캐나다의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영국의 식민지였기에 유니온 잭을 국기로 사용했었습니다.

그러다가 1864년 ‘퀘벡결의’를 채택하여 “캐나다를 구성하는 주는 캐나다연방의 식민지이며, 캐나다연방은 영국의 식민지”라고 규정을 하면서 이 세 가지 구조가 반영된 깃발을 1867년부터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위의 깃발을 보면 왼쪽 위에 유니온 잭이 자리하고 있고 그 오른편 아래에 있는 것이 당시의 캐나다연방을 구성하고 있던 4개의 주를 나타내고 있는데 좌측 상단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온타리오, 퀘벡, 노바스코샤, 뉴 브런즈윅 주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히 온타리오 주를 나타내는 문양을 보면 단풍잎이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때부터 캐나다를 상징하는 것으로 단풍잎이 많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게 된 데에는 1848년도에 여러 언론에서 캐나다의 상징으로 단풍잎을 규정하는 기사들이 있었고, 1860년에 창설한 제100연대의 마크에 단풍잎을 그리는 등 많은 계기가 있었지만 가장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알렉산더 뮤어(Alexander Muir)가 1867년에 만든 “단풍잎이여 영원하라.(The Maple Leaf forever)”라는 노래이며 이 노래는 당시 캐나다의 국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1907년에 만들어진 국기에는 더 많은 주를 표기하게 되었으나 너무 복잡함에 따라서 단순화 시키고 하단에 녹색의 단풍잎을 그려 넣은 깃발이 1921년에 제정되게 됩니다.

1907년 제정

 

1921년 제정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캐나다는 영국연방의 다른 나라들과의 차별화를 위해서 아래와 같은 깃발을 사용했는데 프랑스계의 반발 때문에 백합문양의 “플뢰르 드 리스(fleur de lis)”를 함께 그려 넣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부터 미국과의 군사적·경제적 관계가 급속도로 강화됨에 따라 캐나다도 1947년에 영국으로부터 총리의 임면권과 국회의 소집 및 해산권을 이양 받게 되는데 이 때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캐나다의 독립일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1945년에 당시의 총리였던 윌리엄 라이언 매켄지 킹(William Lyon Mackenzie King)이 아래와 같이 황금 단풍잎이 그려진 디자인을 국기로 하자는 제안을 하였으나 프랑스계의 반발로 무산이 되고 맙니다.

 

그 후 다시 제정된 국기는 1921년에 만들어진 것과 크게 차이가 없고 단풍잎의 색깔만 녹색에서 빨간색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1958년에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80% 이상이 새로운 국기의 제정을 바라고 그 중의 60%는 단풍잎을 사용하기를 원한다는 결과에 따라 1960년에 당시 야당인 자유당의 지도자였던 레스터 피어슨(Lester Pearson)이 “하루빨리 새로운 국기를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1963년에 캐나다의 제14대 총리로 취임하고 나서 새로운 국기를 고안했는데 왼쪽의 파란색은 태평양을 상징하고 오른쪽의 파란색은 대서양을 상징하며 가운데의 단풍잎은 캐나다인과 영토를 나타내는 것이었는데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도 전에 언론에 유출됨으로써 많은 반발을 낳고 말았습니다.(언론 유출 이후 1964년 6월 15일에 국회심의에 회부함)

 

특히 야당에서 “반드시 유니온 잭을 넣어야 한다.”고 반발하면서 역사학자 조지 스탠리가 제안하고 캐나다 왕립군사대학이 디자인한 아래와 같은 것을 국기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서게 됩니다.

 

그럼에 따라 1964년 9월 10일 위원회를 만들어 심의·결정하기로 의결하고 여야 15인으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35회의 심의를 거듭한 끝에 유니온 잭과 백합문양을 빼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어 1964년 12월 15일 국회에서 투표를 하여 찬성 163대 반대 78표로 통과함으로써 아래의 디자인이 정식국기로 제정되게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날, 플라스틱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날, 플라스틱의 생산도 시작되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이날은 전 세계적인 환경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플라스틱이 본격적으로 생산에 들어갔던 날이기도 하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제2차 대전과 같은 전쟁은 인류 역사에 다시는 있어선 안 될 비극이지만 전쟁이 시작된 날, 전쟁을 끝내는데 공헌한 플라스틱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만들어진 플라스틱이 이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포스팅은 과학잡지 뉴 사이언티스트(New Scientist)의 기사를 참고로 작성한 것이란 점을 미리 말씀드리고 얘기를 시작할까 한다.

플라스틱은 1898년 독일의 화학자 한스 폰 페치만(Hans von Pechmann)이 발견한 것이지만 1933년 영국의 ICI(Imperial Chemical Industries: 임페리얼화학산업)란 회사의 직원이었던 레지날드 깁슨(Reginald Gibson)과 에릭 포셋(Eric Fawcett)에 의해서 다시 한 번 발견되게 된다.

그리고 2년 뒤인 1935년에 ICI의 다른 직원인 마이클 페린(Michael Willcox Perrin)에 의해서 생산방법의 특허를 취득하게 되었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던 날, 위닝톤(Winnington)에 있던 ICI의 공장은 플라스틱의 생산에 들어갔다.

 

1933년 3월 24일, 레지날드 깁슨(Reginald Gibson)과 에릭 포셋(Eric Fawcett)은 가스 액화 혼합물을 이용한 고압실험을 하던 도중, 기구의 압력이 떨어지면서 누수가 발생한 것을 발견하고 장비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흰색의 왁스 상태의 고체 물질을 발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폴리에틸렌이었다.

그러나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중단되면서 두 사람은 각기 다른 분야로 흩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폴리에틸렌(Polythene)도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에릭 포셋(Eric Fawcett)은 계속해서 연구를 진행하였고 1935년에는 캠브리지에서 열린 학술회의에서 발표를 하기도 했으나 주목을 받지 못했고, 회사에서 지원을 철회하는 바람에 포셋도 마침내 다른 연구에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역사는 플라스틱을 세상에 선보이는 쪽을 택했는지는 모르지만 포셋의 뒤를 이어 마이클 페린(Michael Perrin)이란 젊은 연구원이 고압연구를 계속해서 진행하게 되었고 그는 레지날드 깁슨(Reginald Gibson)과 에릭 포셋(Eric Fawcett)이 진행했던 연구를 기초부터 다시 검토하면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1935년 12월 19일, 성공적으로 몇 그램(g)의 폴리에틸렌을 생산하게 된다.

 

마이클 페린(Michael Willcox Perrin)

 

마이클 페린(Michael Perrin)은 그가 생산한 샘플을 회사에 보고하여 평가를 받았는데 결과는 당시 케이블의 피복용으로 사용되던 구타페르카(Gutta Percha)와 유사하지만 훨씬 우수하다는 평가를 얻는다.

그리고 100톤을 주문받은 ICI는 새로운 공장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끼고 이를 만들게 되는데 공장이 완공되어 가동에 들어간 날이 바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1939년 9월 1일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산되기 시작한 플라스틱은 레이더의 동축케이블의 절연체로 사용되면서 영국군은 레이더를 탑재한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었고 독일의 야간공습을 봉쇄함은 물론 잠수함의 위치를 파악하게 됨으로써 연합군이 승리하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된다.

 

인류에게 평화를 가져다주는데 큰 공을 세운 플라스틱이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기 때문일까? 이젠 인류의 미래를 위협하는 중대한 문제로 대두되고 말았다.

일본 고베의 스타벅스 이진칸점

일본 고베의 스타벅스 이진칸점

일본 고베를 여행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쯤은 방문한다는 스타벅스 이진칸점은 고풍스런 건물에서 마시는 커피라는 점 외에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으나 관광객들에게는 그저 조금 색다르고 오래된 건물이라는 점 외에는 크게 부각되지 않는 것 같아서 오늘은 일본 고베의 스타벅스 이진칸점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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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커피 고베 키타노 이진칸점(神戸北野異人館店)에 관한 블로그의 포스팅들을 보면 누구도 입구에 있는 키타노모노타리칸(北野物語館)이란 작은 건조물을 주목하지 않지만 스타벅스 이진칸점이 유명해진 것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이라 할 수 있다.

먼저 이진칸(異人館)을 표기하는 한자에서 보듯이 이진칸이란, 막부 말기와 메이지 시대의 일본에서 서양인들이 거주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된 건물로 종래의 일본 가옥과는 다르게 지어져 이방인들이 산다는 뜻에서 이진칸(異人館)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진칸은 고베 외의 다른 지역에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특히 고베의 이진칸이 유명한 것은 바로 NHK에서 아침 드라마로 방영했었던 덕이 컸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스타벅스 이진칸점의 입구 우측에 있는 안내판에 설명되어 있다.

스타벅스 커피 고베 키타노 이진칸점으로 사용되는 건물은 1907년에 지어진 것으로 최초의 소유자는 미국인이었으나 나중에 독일 출신의 제빵사인 하인리히 프로인트리브(Heinrich Freundlieb)가 소유하게 되었는데 그를 모델로 하여 만든 드라마가 바로 NHK의 연속TV소설 카자미도리(風見鶏)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 내에서 이진칸 붐이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드라마의 주인공 역은 일본인 아라이하루미(新井晴み)가 맡았으며 드라마에서는 남편 역의 이름을 프로인트리브(Freundlieb)가 아니라 브룩마이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으며 도쿠시마의 포로수용소를 탈출한 것으로 묘사되었다.

하인리히 프로인트리브(Heinrich Freundlieb)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서 빵을 만드는 업무에 복무하던 도중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종전 후 귀국하지 않고 일본에 머물며 일본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아들이 1955년에 베이커리 회사를 만들면서 일본어로 프로인드리브(フロインドリーブ)라고 등록하면서 일본에서는 독일어 발음인 프로인트리브(Freundlieb)보다는 프로인드리브라고 많이들 알고 있다.

이런 역사를 지닌 프로인드리브의 본점은 일본의 등록유형문화재로 등재되었고 가족들이 살았던 건물 역시 등록유형문화재로써 현재는 스타벅스의 매장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바로 이것이 스타벅스 커피 고베 키타노 이진칸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볼 수 있는 스타벅스 커피 고베 키타노 이진칸점 건물은 1907년 준공 당시의 모습이 아니라 19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던 건물을 고베시가 기증받은 다음 해체하여 보관하다가 2001년에 지금의 자리에 재건한 것이다.

그리고 2003년 1월 31일자로 효고현의 등록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09년 3월 27일부터 스타벅스가 입점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의 유형문화재는 지정문화재와 등록문화재로 나뉘는데 1996년 10월 1일 보존 및 활용에 대한 조치가 필요한 문화재(건축물)를 문부과학대신이 문화재 등록 원부에 등록하도록 하는 것을 법률로 제정하였는데 이에 의거해 지정된 것이 등록유형문화재로써 보수가 필요한 경우 국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지정유형문화재와는 달리 국가의 지원을 받지는 못하지만 외관을 고치지 않고 실내를 개조하는 것은 자신의 부담으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인터넷에는 많은 정보와 화려한 사진들이 넘쳐나는 스타벅스 커피 고베 키타노 이진칸점(神戸北野異人館店)이지만 그 이면의 얘기들을 소개한 곳을 보기 어려워 몇 자 적어보았다.

커피 맛은? 스벅에선 언제나 샷을 추가하는 내겐 그냥 평범한 스벅맛일 뿐이더라는~

 

일본의 된장절임요리 사이쿄즈케(西京漬け)와 사이쿄야키(西京焼き)

일본의 된장절임요리 사이쿄즈케(西京漬け)와 사이쿄야키(西京焼き)

일식(日食)문화가 낯설지 않은 지금, 서경절임 또는 서경구이라는 말을 간간이 듣거나 보게 되는데 서경절임은 일본어 사이쿄즈케(西京漬け: さいきょうづけ)를, 서경구이는 사이쿄야키(西京焼き: さいきょうやき)를 가리키는 말로 보인다.

사이쿄야키(西京焼き)는 사이쿄즈케(西京漬け)를 구운 요리여서 같은 의미라고 생각해도 큰 무리는 아니지만, 오늘은 이 두 가지의 차이와 유래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서경절임, 즉 사이쿄즈케는 사이쿄미소(西京味噌)라는 된장을 사용하여 절이는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요리용 된장을 궁중에 진상했던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서경된장, 즉 사이쿄미소는 교토를 비롯한 간사이 지방에서 만드는 흰된장을 말하는 것으로 보통의 된장에 비해서 염분이 적고 단맛이 특징으로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수도를 에도(江戸: 지금의 도쿄)로 천도하면서부터 교토(京都)를 사이쿄(西京)라고 부르게 된 것에서 유래하여 사이쿄즈케(西京漬け)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사이쿄미소라고 하면 특정 브랜드를 나타내는 용어로 사용되며 특히 관서지방에서는 흰된장이나 된장절임(味噌漬け)으로 부른다.

일본 된장의 종류는 크게 쌀된장, 콩된장, 보리된장으로 나눌 수 있는데 쌀된장은 쌀로 만들고 보리된장은 보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원료는 콩이지만 발효시키는 누룩의 원료가 무엇인지에 따라 구분된다.(사용하는 누룩의 양에 따라서 된장의 맛을 3가지로 구분하기도 한다.)

코메코우지(米麹)라는 쌀누룩으로 만드는 쌀된장은 일본에서 생산되는 된장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보리된장 및 콩된장이 각각 4.5% 정도씩을 차지하며 나머지 10% 정도는 혼합된장이 차지하고 있다.

코로나 이전부터 일본불매운동의 영향으로 일본여행객의 숫자는 크게 감소했지만 언젠가 관계가 회복되어 일본을 방문하게 된다면 보리된장은 큐슈나 쥬고쿠지방(中国地方)에서, 콩된장은 도카이지방(東海地方)에서 쉽게 맛볼 수 있으며 콩된장은 핫쵸미소(八丁味噌)가 특히 유명하다.

이렇게 만들어지는 쌀된장을 사용하여 요리의 재료를 절이게 된 것은 헤이안 시대부터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로 물고기를 바다에서 먼 지역으로 이동하기 위한 저장방법으로 사용하게 되었으나 지금은 돼지고기는 물론 닭고기, 양고기 등 육류(肉類)에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만든 서경된장, 즉 사이쿄미소에 술이나 맛술을 더하여 요리재료를 재운 다음 굽는 것을 서경구이, 일본어로는 사이쿄야키라고 부른다.

사이쿄야키는 보관용기에 담아 하루에서 길게는 사흘 정도를 서경된장에 재운 다음 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즉석에서 맛술이나 술을 더한 서경된장을 발라서 굽기도 한다.

 

특별히 주의할 점은 없으나 며칠 재운 다음 요리하는 경우에는 재료의 표면에 묻은 된장을 닦아내지 않고 구우면 겉이 쉽게 타버리기 때문에 반드시 제거하고 구워야 한다는 점만 주의하면 된다.

   

 

또 한 가지만 덧붙이면 서경절임한 생선을 구울 때는 절이기 전에 소금을 뿌려 생선의 수분을 빼낸 후에 된장에 절이는 것이 좋다는 점만 신경 쓰면, 제법 비싼 요리인 일본의 사이쿄야키를 손쉽게 집에서도 맛볼 수 있다.

검은 유대인을 구출하라-모사드의 모세 작전

검은 유대인을 구출하라-모사드의 모세 작전

이스라엘의 비밀정보기관 모사드의 정식명칭은 ‘정보 및 특수임무연구소(ha Mossad le Modiin ule Tafkidim Meyuhadim)’인데 1977년 당시 이스라엘의 총리였던 메나헴 베긴은 모사드에게 “에티오피아에 있는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데리고 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명령에 의해 모사드가 수행한 작전이 바로 ‘모세 작전(Operation Moses)’이며 작전의 내용은 내전 중에 있는 에티오피아로부터 유대인들을 구출한다는 것이었다.

흔히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이라고 하는 ‘에티오피아계 유대인(Ethiopian Jews)’을 이스라엘로 데려오는 작전은 에티오파아가 내전 중에 진행되었던 1984년의 ‘모세 작전(Operation Moses)’을 비롯하여 1985년의 ‘조슈아 작전(Operation Joshua)’ 및 내전이 끝난 후 정국이 불안정할 때 단행된 1991년의 ‘솔로몬 작전(Operation Solomon)’ 등이 있고 이보다 이전인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는 모로코 유대인들을 구출하는 ‘야친 작전(Operation Yachin)’을 통해 97,000명의 검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구출시킨 사례가 있었다.

모세작전은 2018년 4월 19일 영국의 BBC를 통해 “스파이가 운영한 휴양지(The holiday village run by spies)”라는 제목의 기사로 소개되면서 자세하게 알려졌다.

그러나 검은 유대인들을 구출함에 있어서는 모든 노력을 기울였던 이스라엘 정부는 자국에 있는 아프리카 출신의 난민들에게는 추방을 명령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임으로써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데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모세작전에 대해서만 알아보고자 한다.

1984년 11월 비밀 각료회의의 결정에 의해 모세작전을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모사드는 아랍국가인 수단의 지원을 얻어 다른 아랍의 적대국가들이 모르게 비밀리에 검은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구출하기 위해 수단관광공사가 1972년에 건설하였으나 전기나 수도 등의 인프라가 부족하여 방치되고 있던 홍해 연안의 ‘아로우스(Arous)’에 있는 15동의 방갈로로 구성된 리조트를 32만 달러에 3년간 임대하기로 한다.

모사드 요원들은 리조트의 관리자 또는 직원으로 위장하여 작전을 수행하면서 실제로 15명의 현지인을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하였는데 채용된 현지인들은 그들의 고용주가 이스라엘의 비밀요원이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게 위장한 리조트를 운영한 모사드는 실제로 리조트를 홍보하는 인쇄물을 제작하여 배포하기도 하였는데 경영을 너무 잘 해서였을까? 모사드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도 작전을 수행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미지 출처: 영국 인디펜던트

 

난민촌의 검은 유대인들을 일단 리조트로 데리고 온 모사드는 지금은 사라진 벨기에의 항공사 ‘Trans European Airways’를 통하여 벨기에의 브뤼셀을 거쳐 이스라엘로 한 번에 약 200명의 난민을 30회 이상 탈출시키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도합 7천~8천명의 난민을 구출하는 성과를 올린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부가 모세작전에 대한 언론의 보도를 통제하고는 있었지만 이스라엘의 비영리단체인 ‘The Jewish Agency’에 의해서 작전내용이 누출되면서 1985년 1월 5일 당시 총리였던 ‘시몬 페레스(Shimon Peres)’는 보도를 자제할 것을 호소하게 되었고 이렇게 세상에 알려진 작전은 다른 아랍국가들로부터 압력을 받은 수단정부가 협력을 중단하고 모사드는 수단을 떠나라는 명령을 함으로써 끝을 맺게 된다.

극적이었던 모세작전은 실제로 2005년에 이스라엘과 프랑스가 합작으로 ‘리브 앤 비컴(Live and Become)’이란 제목의 영화로 제작하여 베를린영화제를 비롯하여 토론토국제영화제 등에서 많은 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는데 최근에는 넷플릭스가 모세작전을 소재로 하여 ‘크리스 에반스’ 주인공의 영화 ‘Red Sea Diving Resort’를 제작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의 온천에는 악어가 산다.

일본의 온천에는 악어가 산다.

2020년에 핀란드식 사우나가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자 온천문화가 뿌리 깊은 일본에서도 일본의 온천문화를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주제인 악어가 살고 있는 온천이다.

일본은 자국의 온천문화를 알림에 있어 피곤한 심신을 회복시키고 적군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평화로운 성역이었으며, 전시(戰時)에는 어린이들을 피난시키는 장소였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유네스코의 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기 위해서는 온천에 서식하는 악어를 없애야 한다는 것이 과제의 하나로 대두되었다.

일본의 제43대 겐메이천황(元明天皇)의 명으로 713년에 편찬된 풍토기(風土記)에도 나오는 것처럼 일본에는 천 년 이상 전부터 남녀노소가 함께 혼욕하는 문화가 있었으나 폐쇄된 공간에서 남녀가 함께 있음으로 인해 풍기가 문란해지자 1791년 간세이 개혁(寛政の改革)에서 남녀의 혼욕을 금지하는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남탕과 여탕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개항임무를 띠고 밀러드 필모어 대통령의 친서를 에도막부에 전달했던 매슈 페리(Matthew Calbraith Perry)가 쓴 ‘일본원정기’에도 혼욕하는 일본인들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는 것에서 보듯이 일본의 혼욕문화는 계속해서 이어져 왔다.

이와 더불어 수영복을 입고 온천을 즐기는 서양인들의 눈에는 전라의 상태로 혼욕을 즐기는 일본의 문화가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자 일본은 우선 외국인들의 출입이 잦은 도쿄, 오사카, 요코하마에서는 혼욕을 금지함과 아울러 어린아이들도 7세 이상은 혼욕을 금지하는 법률을 1890년에 제정하였다.

그러나 현재도 료칸과 숙박시설이 운영하는 온천 56곳에는 혼탕을 운영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일본의 혼욕문화는 이어지고 있으며 이를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해 혼욕에 대한 올바른 문화를 정착시키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혼욕이 가능한 일본의 온천 숙박시설

 

자, 이제 오늘 얘기의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일본의 혼욕온천에는 입욕하는 여성들을 훔쳐보는 쓰레기들이 있는데 물속에서 눈만 내놓고 여성의 신체를 쳐다보는 모습이 마치 악어와 같다고 해서 이들을 일컬어 악어(와니: ワニ)라고 비하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혼욕 시에는 알몸으로 탕에 들어가는 것이 전통이라 주장하는 일본인들도 있으나 알몸으로 혼욕하는 것보다는 탕에 들어갈 때 특별한 옷을 입고 온천욕을 즐기는 것이 훨씬 더 전통적인 일본의 혼욕이라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야마나카 온천의 역사를 그린 그림책인 야마나카온센엔기에마키(山中温泉縁起絵巻)에는 남성은 유훈도시(湯ふんどし), 여성은 유모지(湯文字)를 입고 혼욕을 즐기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간혹 일본의 혼욕을 소개하는 블로그를 보면 아래의 이미지를 함께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토요하라 쿠니치카(豊原国周)가 그린 것으로 혼욕하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 아니다.

단지 여기서 눈여겨볼 것은 검정색 옷을 입은 남성이 여성의 때를 밀고 있는 것인데, 이런 남성을 일컬어 산스케(三助)라 불렀으며 여성은 유나(湯女)라고 불렀으나 블로그에서 다루기엔 조금 부적절한 듯하여 예서 멈추기로 한다.

아무튼 일본의 혼욕문화는 남녀가 최소한으로 몸을 가리고 온천을 즐기는 것이 더 일반적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문화를 부활시키고 정착시키기 위하여 나온 상품이 바로 온천할 때 입도록 만든 옷이다.

특히 여성들이 자유롭게 온천을 즐길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예전의 유모지(湯文字)를 개량하여 만든 유아미(湯あみ)가 요즘은 많이 보급되고 있으며 남성들을 위한 반바지 형태의 것도 유아미라 부르며 다른 말로는 유키(湯着)라고도 부른다.

아래의 사진은 여성의류 전문 브랜드인 와코루와 오카야마현 마니와시가 공동개발한 유아미키(湯あみ着)를 입고 온천을 즐기는 여성들의 모습이며 장소는 오카야마현을 대표하는 온천관광지인 유바라온천(湯原温泉)에 있는 스나유(砂湯)다.

의병의 날과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의병의 날과 베토벤 교향곡 제9번

지난 6월 1일은 2010년에 제정한 의병의 날이 9번째를 맞는 날이었다. 우리는 의병을 생각하면 일본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데, 일본에게 있어서도 6월 1일은 역사적으로 의의가 있는 날이다.

외적에 항거하여 목숨을 바쳐 싸운 의병들을 기리는 날인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일본에서는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이 일본에서 초연(初演)된 날이란 의의가 있다.

일본의 조선침탈이 기승을 부리던 1914년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해이기도 한데, 당시 영국과 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 중국의 칭다오를 조차지로 삼고 있던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병력과 무장에 있어 압도적인 열세에 있었던 독일은 3개월이 되기도 전에 일본에 항복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4,715명의 독일군이 포로로 잡히게 된다.

당시 국제적으로는 전쟁에서 항복한 군인은 죽이지 않는다는 항군불살(降軍不殺)에 관한 제네바협약과, 포로가 되어 치욕을 겪기보다는 차라리 자결을 하는 것이 낫다는 일본의 풍조가 있었는데 이런 이유로 갑자기 수천 명에 달하는 포로가 생기게 되자 일본은 당황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기화 되는 1차 대전으로 인해 포로들을 수용함에 있어서 문제를 겪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일본은 독일군 포로들을 일본으로 이송하여 1914년 10월부터 일본 각지에 개설한 12개의 포로수용소에 나누어 수용을 하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로 가장 마지막에 설치된 것이 바로 오늘 얘기의 소재인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라는 곳이다.

1917년부터 1920년까지 2년 10개월 동안 1천여 명의 포로들을 수용했던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의 소장은 당시 44세였던 도요히사 마츠에(松江豊寿)란 사람이었다.

일본으로서는 도요히사 마츠에(松江豊寿)에 대한 미화를 할 수밖에 없겠지만 객관적으로 보더라도 그가 포로들을 대우한 행동은 일본이 조선에서 행한 극악한 행동에 비해서는 인도주의적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당시 수용되었던 독일군들은 대부분 지원병들로써 그들의 이전 직업은 아주 다양했고 수용소 내에서의 행동도 비교적 자유스런 편이어서 독일군 포로들은 채소를 재배함은 물론이고 빵을 만들어 일본인들에게 팔기도 하고 마을사람들과의 교류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수용소의 분위기 탓이었는지 당시 독일 해군의 군악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28세의 음악을 전공한 헤르만 한센(Hermann Hansen)은 악단을 조직하고 1918년 6월 1일에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에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공연하게 되는데 이것이 일본최초의 베토벤 제9번 교향곡의 연주회였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인 사실에 근거하여 일본은 발트의 낙원(バルトの樂園)이란 영화를 제작하여 2006년에 개봉하였는데 일본으로서는 그들을 미화하는 이 영화가 대내외적으로 홍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을는지 모르겠지만 이를 소개하는 국내의 포털에 있는 글을 보면 개인적으로는 조금 불편한 것이 사실이다.

영화 발트의 낙원(バルトの樂園)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높이기 위해 일본인들이 초대되어 공연을 관람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실제로는 일본인들에게는 공개되지 않았다고 한다.

한편 1920년 1월 10일 베르사유 조약의 발효와 함께 모든 독일군 포로들이 석방되어, 그 해 4월 1일자로 반도포로수용소(板東俘虜収容所)는 폐쇄되었고 현재는 독일마을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높지 않아 교향곡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으나 모든 사람들이 앞으로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들을 때면, 나라가 힘이 없을 때 오직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목숨을 바쳐 싸웠던 의병들을 한 번쯤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일본에서는 초밥에 사용하는 밥을 사리(舎利)라고 부른다.

일본에서는 초밥에 사용하는 밥을 사리(舎利)라고 부른다.

초밥의 나라, 일본에서 몇 년 전부터 인터넷을 통해 퍼지고 있는 것 중에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초밥을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는 것이 있다.

마트에서 구입한 초밥에서 회를 분리하여 차가운 물에 씻어두고, 밥이 있는 부분은 전자레인지에 20초 정도를 데운 다음 다시 회를 덮어 먹으면 맛이 좋아진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슈퍼에서 사온 초밥에 들어있는 밥을, 밥통에서 막 꺼낸 것처럼 만들어준다는 것으로 밥의 온도가 차가우면 딱딱하게 느껴지고, 너무 뜨거워도 입안에서 쉽게 풀어져 버리는 것을 보완하기 위함이 이유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마트에서 초밥을 만들 때 사용하는 생선은 냉동이거나 아니면 상태가 중간 정도 되는 것들이어서 해동되면서 나오는 냄새를 찬물에 씻음으로써 악취를 줄여주는 효과가 있기 때문에 맛이 더 좋아진다고들 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회와 밥을 분리해야 하는데 일본에서는 초밥에 사용하는 밥을 샤리(シャリ)라고 부르기 때문에 샤리(シャリ)를 분리한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샤리(シャリ)의 한자표기는 사리(舎利)라고 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참된 불도 수행의 결과로 생긴다는 구슬 모양의 유골인 사리(舎利)를 초밥에 사용하는 밥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밥을 뜻하는 은어인 일본어 샤리(シャリ)는 에도시대부터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기원은 작은 수정(水晶)과 같은 부처님의 사리(舍利)가 밥알과 같다고 해서 어떤 승려(僧侶)가 부르면서부터라고 한다.

백제로부터 불교를 받아들인 일본은 사찰과 불상 외에도 사리탑을 만들었지만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실 수는 없었기 때문에 불교경전을 넣어두거나 수정(水晶)을 대신 넣었었다고 하는데 그 수가 밥알처럼 많은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 샤리(シャリ)라고 하는 것은 식초를 섞은 밥인 스메시(すめし: 酢飯)와 그냥 일반적인 밥(ご飯)을 모두 가리키는데 특히 쌀로만 지은 밥은 긴샤리(銀シャリ: ぎんしゃり)라고 부른다.

은사리(銀舍利)로 부를 수 있는 일본어 긴샤리(銀シャリ: ぎんしゃり)는 전쟁 중에 식량난으로 쌀을 구하기 어려워, 보리나 잡곡을 섞어서 밥을 지는 것은 쌀만으로 지은 밥과는 윤기가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는 것에서 유래되어 생긴 이름으로 일본이 우리나라의 G7 참여를 반대한다고 떠들어대는 모습을 보면서 긴샤리(銀シャリ: ぎんしゃり) 구경을 하지 못하던 패망하기 이전의 모습에서 일본은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똑똑히 보게 된다.

교토 도게츠교(도월교: 渡月橋)의 숨은 이야기들

교토 도게츠교(도월교: 渡月橋)의 숨은 이야기들

일본의 90대 가메야마 천황(亀山天皇)이 만월이 다리를 건너는 것 같다고 말한 것에서 유래하여 도월교(渡月橋)라 불리게 되었다는 일본 교토의 가쓰라강 좌안과 나카노시마 공원 사이에 있는 도게츠교(渡月橋)는 서기 836년 도창(道昌)이란 스님의 공사지휘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도창 스님의 속세에서의 성은 진(秦)씨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유즈키노키미(弓月君)를 시조로 하는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으나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국내 모 교수의 칼럼에는 신라인 출신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백제계란 설이 우세하고 그밖에 신라계라거나 소수의견으로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설들도 존재하므로 신라계라고 단언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한반도 출신의 후손인 도창 스님이 다리를 지었을 당시에는 이름을 호린지교(法輪寺橋)라고 불렀는데 다리의 남쪽에 위치한 호린지(법륜사: 法輪寺)를 참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쥬산마이리(十三詣り)라고 하여 음력 3월 13일에 13세가 되는 아이들이 사찰을 찾아 참배하고 지혜와 복을 구하는 행사를 치르는데 이때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도월교를 건널 때 뒤를 돌아보면 애써 받은 지혜와 복을 모두 잃어버린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기도 하다.

 

한편 가쓰라강(가쓰라가와: 桂川)을 따라 걷다 보면 자전거 행렬을 자주 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총연장 45km에 이르는 교토부도801호(京都府道801号) 자전거도로의 기점이 아라시야마 가미카와라초(嵐山上河原町)이기 때문이다.

루돌프 사슴코의 숨겨진 이야기들

루돌프 사슴코의 숨겨진 이야기들

크리스마스가 되면 들려오는 수많은 캐럴들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곡 중의 하나는 바로 빨간코를 가진 순록 루돌프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 “루돌프 사슴코”란 캐럴은 1939년, 미국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의 직원이었던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쓴 글이 바탕이 되었는데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국내에서는 “루돌프 사슴코”란 제목으로 소개가 되었지만 루돌프는 사슴이 아니라 순록이란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여기서 한 번 더 원제목을 소개하면 “빨간코를 가진 순록, 루돌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Rudolph the Red-Nosed Reindeer”입니다.

1905년 7월 27일, 뉴욕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로버트 메이(Robert May)의 자매들 중 한 사람인 에벌린 메이(Evelyn May)는 괴짜경제학(Freakonomics)의 공동저자인 미국의 경제학자 스티븐 레빗(Steven Levitt)의 할머니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난에 빠지게 되면서 로버트 메이(Robert May)는 뉴욕에서 시카고로 이주하여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의 사내 광고카피라이터로 저임금을 받으며 일을 하게 됩니다.

로버트 메이(Robert May)

그의 아내인 에블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아 언제 결혼을 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두 사람 사이에 1934년, 혹은 1935년에 딸 바바라가 태어났고 이어서 1937년에 아내인 에블린은 암에 걸렸단 판정을 받게 되는데 아내를 위한 치료비로 박봉을 모두 사용했던 당시의 생활상은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1939년 초에 고객들에게 나누어줄 색칠공부를 할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드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던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에서는 동물을 주제로 한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만들 것을 지시했고 로버트 메이(Robert May)는 그 책에 들어갈 시를 짓는 임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딸, 바바라가 시카고의 링컨 파크 동물원에서 사슴을 좋아하던 모습을 기억한 로버트 메이(Robert May)는 덴버 길런(Denver Gillen)이란 화가에게 빨간코를 가진 순록을 그려줄 것을 요청했고 그렇게 해서 빨간코를 가진 사슴 아닌 순록인 루돌프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한창 작업에 몰두하고 있던 중, 1937년 7월에 그의 아내는 결국 암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이를 안타깝게 여긴 회사에서는 그에게 이 일을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나 아내를 떠나보낸 아픔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는 더욱 작업에 열중했고 마침내 1939년 8월에 작업을 마치고 그의 딸 바바라와 할머니에게 루돌프의 이야기를 들려주게 됩니다.

루돌프를 주인공으로 하는 책은 1939년에 모두 240만 부가 배부될 정도로 고객들의 인기가 높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종이의 사용이 제한되면서 재발간 되지 못하다가 1946년에서야 360만부가 다시 발간되어 배부되었습니다.

아내를 잃은 직원의 슬픔을 이해하고 작업을 중단해도 된다고까지 말했던 몽고메리워드의 경영진이 1946년에(1947년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로버트 메이(Robert May)에게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가져단 준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바이기는 하나 다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첫 번째 아내인 에벌린과 사별한 로버트 메이(Robert May)는 1941년에 직장동료였던 버지니아 뉴턴(Virginia Newton)과 재혼하게 되는데 루돌프의 성공으로 수입이 늘었던 그는 시카고 교외의 에번스턴에 있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할 수 있었고 1946년에 시를 음반으로 제작하자는 제의를 받게 되는데 몽고메리워드 백화점이 모든 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거절하는 일이 생깁니다.(이러한 내용은 1963년에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직접 밝힌 사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몽고메리워드의 최고경영자였던 스웰 에이버리 (Sewell Avery)는 루돌프 사슴코에 대한 모든 권리를 로버트 메이(Robert May)에게 양도하는 그야말로 크리스마스의 기적과도 같은 선물을 안겨다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모든 권리를 보유하게 되었던 루돌프 사슴코의 이야기는 1949년에 누나의 남편, 그러니까 매부였던 조니 마크스(John Marks)에 의해서 노래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국내에 번안된 노래에는 원곡의 앞부분이 빠져있다는 것은 많은 분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조니 마크스(John Marks)

로버트 메이(Robert May)가 밝힌 것과 같이 “빨간코를 가진 순록, 루돌프(Rudolph the Red-Nosed Reindeer)”는 어린 시정 왕따를 당한 개인적인 겸험을 바탕으로, 1823년에 발표되었던 “산타클로스가 오셨다(A Visit from St. Nicholas)”는 고전시의 운율과 비슷하게 만들었는데 고전시의 본문 중에는 산타의 썰매를 끄는 8마리의 순록 이름이 등장하고 루돌프 사슴코란 노래의 원곡에도 앞부분에 아래와 같이 8마리의 순록의 이름이 나오지만 국내의 번안곡에서는 생략되어 있습니다.

대셔(Dasher)와 댄서(Dancer), 프랜서(Prancer), 빅센(Vixen), 코멧(Comet), 큐피드(Cupid)와 도너(Donner) 그리고 블리첸(Blitzen)을 알지? 하지만 기억하니? 가장 유명한 순록이 무엇인지(You know Dasher and Dancer and Prancer and Vixen Comet and Cupid and Donner and Blitzen. But do you recall The most famous reindeer of all?) 하는 가사로 “루돌프 사슴코”란 노래는 시작합니다.

그런데 1949년 이 노래가 해리 브래넌(Harry Brannon)에 의해 라디오에서 처음으로 불려진 이후, 조니 마크스(John Marks)는 음반을 제작하기 위해 당대의 유명가수였던 빙 크로스비(Bing Crosby)와 디나 쇼어(Dinah Shore)를 찾아갔지만 모두 거절당하고 진 오트리(Gene Autry)에 의해서 음반이 취입되게 되었는데 진 오트리(Gene Autry) 역시도 순순히 제작에 응했던 것은 아니었고 거절을 하였으나 그의 아내의 설득으로 음반의 B면에 수록하여 발표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A면도 아닌 B면에 실렸던 이 노래가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고 말았으니 아내의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먹을 것이 생긴다는 말을 실감케 하는 것 같습니다^^ 1949년에 발매된 음반은 모두 1,500만 장이나 판매가 되었고 차트의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으니 말입니다.

이처럼 전 세계인들로부터 사랑받는 루돌프 사슴코란 캐럴의 바탕이 된 이야기를 만들었던 로버트 메이(Robert May)는 1976년 8월 10일에 사망하였고 그가 생전에 세웠던 루돌프의 동상은 그의 모교인 다트머스 대학교(Dartmouth College)에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