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이 독일과 연합했던 것은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장개석이 독일과 연합했던 것은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맺어졌던 두 번의 협력관계를 우리는 제1, 2차 국공합작이라고 부른다. 이 중 제1차 국공합작은 당시로는 규모가 작았던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등한 관계로 협력을 맺지는 못하고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됨으로 인해 장개석은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923년 8월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하여 군사학교와 붉은 군대를 시찰하고, 특히 붉은 군대의 창립자인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으로 인해 장개석은 ‘붉은 장군(Red General)’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닉네임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1924년 6월 16일에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개교하게 되는데 장개석은 이 학교의 초대교장을 맡아 소련의 붉은 군대의 군사조직을 본뜬 학교체제를 만들었으며, 소련에서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강의를 하거나 군사교육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개교식 모습

 

이렇게 탄생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는 한국인 입학생들도 많았는데 영화 ‘암살’로 조명을 받았던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도 이 학교의 4기생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장개석과 소련고문단과의 사이에 자주 마찰이 생기게 되면서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던 장개석은 소련의 지원이 실제로는 중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는 속셈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당간부와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체포·연금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 4월 11일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라는 비밀명령을 하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4·12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명령이었고, 이것을 두고 진압한 쪽에서는 숙청이나 정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반대쪽에서는 참안(慘案: 대학살)이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을 1933년에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20일 동안에 1만 명이 처형되었던 까닭으로 서양에서는 ‘4·12 사건’보다는 ‘상하이 대학살(Shanghai Massacre)’로 불리고 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소련고문단은 추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되지만 장개석은 또 다른 동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장개석이 선택한 것이 바로 독일인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식민지를 모두 잃었던 유럽의 강대국 독일이 가지고 있던 전쟁의 경험을 활용하고자 하는 장개석의 속셈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식민지를 모두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감축해야 했으므로 실직한 군인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독일의 속셈이 서로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기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장개석은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에게 군대와 민간전문가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이에 응하여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맥스 바우어(Max Bauer)’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독일자문단(German Advisory Group)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맥스 바우어(Max Bauer)’는 천연두에 감염되어 중국에 온지 1년만인 1929년 5월 6일 사망하게 되고 후임으로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이 부임하게 되는데 천연두로 숨진 ‘맥스 바우어(Max Bauer)’는 중국 공산당원에 의해 인위적으로 감염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후임으로 부임한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은 히틀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마지막엔 히틀러에 의해서 숙청되는 운명을 맞지만 당시에는 나치를 지원하는 우익 군사테러조직이었던 자유군단(Freikorps)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1930년에 국민당의 초청으로 ‘히틀러 청소년단(독일어: Hitlerjugend, 영어: Hitler Youth)’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독일과의 협력은 더욱 강화되게 된다.

이와 같은 협력강화의 일환으로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에 총리에 오르기 몇 달 전에 ‘한스 폰 젝트(요하네스 프리드리히 “한스” 폰 젝트: Johannes Friedrich “Hans” von Seeckt)’ 장군이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을 대신하여 고문단장으로 중국에 부임하게 되는데 ‘한스 폰 젝트’는 기습전을 중국에 도입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 동안 9,600km의 거리를 걸어서 옌안으로 탈출하는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던 공격작전을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독일 내에서는 중국과 일본 중에서 어디를 택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나뉘게 된다.

장개석을 파시스트로 판단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중국과의 무기무역이 독일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친중국 정책을 주장하였고,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은 일본이 이념적으로 더 가까울 뿐 아니라 소련과의 적대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장개석은 정치적인 인질의 신분으로 소련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의 서얼, ‘장웨이궈(蔣緯國)’를 독일에 보내어 사관학교를 마치고 1938년 3월에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합방하는 침공에까지 참여하게 만든다.

장웨이궈(蔣緯國)

 

하지만 독일과의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고자 했던 장개석의 생각은 일본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1938년 1월 16일, 일본은 앞으로 중국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제1차 고노에 후미마로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국민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1940년 9월 27일에는 주저하는 독일에게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의 체결을 제안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기 전인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독일군의 지원이 일부나마 계속되고 있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으로 인해 공산당과 손을 잡은 중국에 독일의 대한 지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루어진 3국 동맹으로 인해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점령지에 대한 배분을 둘러싸고 무력충돌을 벌이게 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중국 공산혁명’이라고 하는 ‘제2차 국공 내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언론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여 대만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나치독일과 손을 잡았던 장개석의 정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일본과 마찬가지로 잔악한 행동을 무수히 저질렀으며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던 추축국의 일원인 독일과 동맹을 맺은 국민당정부를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외침은 중국인민들의 공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럼 장개석은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본토에서 쫓겨나기 이전인 1947년 2월 27일에 타이베이에서 정부의 전매품이자 독점품목이었던 담배를 허가를 받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하였다는 이유로 여성을 공무원들과 경찰이 폭행하는 이른바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 발생하고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2월 28일에 대만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만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에 더욱 반발한 민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시위대를 향한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상자를 내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격화되자 천이는 앞으로는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취하면서 뒤로는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천이의 요청을 받은 장개석은 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2개 사단과 1개 헌병대를 파견하여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행동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는 그야말로 대학살이라고 할 수 있는 ‘2·28 사건’ 또는 ‘2·28대학살’의 원흉이 되고 만다.

이런 ‘2·28 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로 여겨졌으나 40주년을 맞은 1987년에 ‘2·28 사건’을 연구하는 모임이 결성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1997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기에 이르게 된다.

 

대만 정부에서 공식사죄한 ‘2·28 사건’에 대하여 부정하는 망동을 일삼는 정치인이 없는 대만에 비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는 자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진정한 민주주의국가임을 깨닫게 되고, 망언을 일삼은 자들의 징계를 피하려는 정치권의 꼼수를 보면서는 정말 진정으로 머리가 좋고 국민들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의 흰 성(城)과 검은 성(城)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본의 흰 성(城)과 검은 성(城)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의 히메지성(姫路城)은 흰 성(城)의 대표적인 것으로 백로성(白鷺城: 하쿠로 성)이라고도 부른다.

히메지성(姫路城)

 

이와는 달리 일명 카라스성(烏城: 까마귀 성)으로도 불리는 마쓰모토성(松本城)은 검은 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쓰모토성(松本城)

 

일본에서 성(城)의 색깔이 이처럼 다르게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지금부터 그 유래를 알아보자.

일본에서 성을 쌓는 축성의 기술과 문화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를 기준으로 전후(前後)로 나뉘는데 1600년 10월 21일 일어난 이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의 권력을 두고 일어난 것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하고 막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축성(築城)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전투가 발생하기 이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축성된 성들은 색깔이 검고, 전투 이후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지어진 것들은 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지어진 성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마쓰모토성(松本城) 외에도 구마모토성(熊本城), 오카야마성(岡山城) 히로시마성(広島城) 등이 있는데 성벽의 색상이 모두 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구마모토성(熊本城)

 

오카야마성(岡山城)

 

히로시마성(広島城)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지어진 성들은 외벽에 감물과 옻칠을 하였기 때문에 외벽의 색상이 검게 보이는 것인데, 이렇게 검은 색으로 외벽을 칠하게 된 까닭은 언제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면서 공격하기에 검은색이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금(金)을 좋아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호에 따라 흰색 보다는 검정색의 바탕에서 금이 더 돋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화재에 강한 회반죽을 외벽에 바르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희게 보이는 성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던 유명한 히메지성(姫路城) 외에도 고치성(高知城), 히코네성(彦根城), 나고야성(名古屋城) 등이 있다.

고치성(高知城)

 

히코네성(彦根城)

 

나고야성(名古屋城)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외벽을 흰 색으로 칠한 이유는 발전한 축성기술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와 차별화를 시키고 싶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욕망도 크게 한몫을 하여 검정색과 대비되는 흰색을 사용했던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로는 시각적으로 흰색의 성이 검은색의 성보다는 크게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였다.

흰색이 검정색보다 크게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둑알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개가 검정색이 흰색보다 0.3㎜ 이상 크게 만들어진다.

물론 바둑알 하나는 육안으로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대국(對局)이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시각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비슷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흰 돌은 21.8㎜, 검은 돌은 22.11㎜로 만들고 일본에서는 흰 돌은 21.87㎜, 검은 돌은 22.2㎜를 표준 사이즈로 정해두고 있는 것이다.

모기장 밖(蚊帳の外)의 일본과 아베총리

모기장 밖(蚊帳の外)의 일본과 아베총리

여름은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언론을 통해 듣게 되는 말 중에 ‘모기장 밖’이라는 것이 있다.

모기장은 사람이 안에 들어가야 모기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모기장 밖에 있으면 모기밥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 ‘모기장 밖’이란 표현은 무언가 피해를 본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이 표현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언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기장 밖’이란 표현은 일본어 카야노소토(蚊帳の外)를 직역한 것인데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더운 여름에 잠을 잘 때에도 창문을 열어놓아야 했고 그 때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 모기장을 사용했다.

따라서 모기장 밖에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거나 왕따(이지메) 당하는 상황, 혹은 무시당하거나 불리한 상황에 놓인 것, 또는 중요한 속사정을 모르는 경우를 나타내는 말로 일본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 표현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깜짝회담을 가진 사실을 보도하면서 도쿄신문이 북미회담의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참여도 하지 못한 아베를 두고 모기장 밖(蚊帳の外)에 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우리 언론들도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아베정권이 행한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이 모기장 밖(蚊帳の外)이란 표현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지난 시간 아베정권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한 이유로 대북교역에 관한 의문점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바가 있었다.

또한 아베가 수출규제를 일본의 참의원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에 맞추어 단행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일본의 수출규제는 양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통해서 짚어보기도 하였다.

그 글에서도 언급했던 일본의 경제와 연금 및 소비세 등등의 문제는 아베정권이 모기장 안에 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으며 단지 한 가지 일본의 외교안보 문제만이 모기장 밖(蚊帳の外)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오사카에서 열렸던 G20에 참가하기 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공격당하면 일본은 우리를 전혀 도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오직 소니 TV로 공격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현재의 미일안보조약의 불평등을 지적했었다.

트럼프의 이러한 불평은 현재의 미일안보조약 제5조에서 일본의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미군을 포함)에 대하여 미국이 공동으로 대처하도록 한다고 되어있는 것에 비해서 일본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제6조에서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기지를 제공하는 의무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다.

아베로서는 트럼프의 협박(?) 때문에라도 일본헌법 제9조의 “교전권, 정규군 보유의 금지” 조항과, 자국 내의 방어만을 수행한다는 “전수방위”의 원칙을 개정하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2018년 3월 김정은과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1차 회담을 필두로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미회담 및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과의 역사적인 평양회담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와는 달리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한 현안에서 그야말로 모기장 밖(蚊帳の外)의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G20의 개최국이면서도 아베가 문재인 대통령의 면담을 거절한 것에서 우리는 아베총리 스스로가 모기장 밖(蚊帳の外)으로 나와야 한다는 복안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G20을 통해 나타난 아베총리의 외교력 한계를 비난하는 일본 내의 여론이 비등하고, 트럼프로부터는 안보조약의 불평등에 대한 협박성 불만을 받기에 이르자 아베로서는 모기장 밖(蚊帳の外)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함으로써 다시 안으로 초대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의원 선거에서 2/3를 넘는 의석을 확보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는 한국때리기란 것을 아베는 통계부정으로 떨어진 지지율을 ‘초계기 저공비행’이란 방법을 동원하여 보수층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면서 이미 배운 바가 있었다.

트럼프가 불만을 제기하는 미일안보조약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는 논외로 하면) 일본헌법 제9조를 개정하면 해결될 문제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번 참의원선거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아베의 당면과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수단으로 꺼내든 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란 카드인데, 이 문제는 앞으로 있을 북한의 비핵화해결과 관련한 과정에서 일본의 의견을 반영, 내지는 입지를 세워줄 수 있는 여지를 미국과 외교적으로 협의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외교부가 일본을 WTO에 제소하기보다도 먼저 노력해야 할 부분임이 분명하다.

현재 일고 있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일본 불매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더욱 번지는 것이 좋고, 우리사회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일본의 요구에 맞게 정부를 때리는 식의 보도는 지금 단계에서는 보류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처럼 모기장 밖(蚊帳の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칭얼거리는 아베를 달래서 모기장 안으로 들여보내면 이번 수출규제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로 아베가 내세우고 있는 위안부 합의와 징용 피해자의 배상 판결 문제는 이번 사태에 숨어있는 문제의 본질은 절대 아님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누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을 모델로 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을 모델로 했다고 주장하는 일본

낚시를 즐겼던 유명인사를 꼽으라면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빼놓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인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로 친숙한 헤밍웨이는 낚시를 즐겨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헤밍웨이가 낚시를 좋아했다는 것이 널리 알려지게 된 동기는 쿠바에서 보낸 시절 동안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헤밍웨이 청새치 낚시대회(Ernest Hemingway Marlin Fishing Tournament)”에 쿠바의 지도자 피엘 카스트로와 80년대 그에 관한 책을 소지만 하고 있어도 잡혀가야 했던 체 게바라가 참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헤밍웨이 청새치 낚시대회는 1950년부터 시작되었는데 제10회 대회에 헤밍웨이의 초대를 받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참여하였던 것이며, 이 대회 이전에는 낚시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카스트로가 우승을 하면서, 헤밍웨이가 카스트로에게 우승컵을 수여하는 사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70주년을 맞은 작년에는 코로나로 인해 대회가 치러지지 못했으며 올해도 마찬가지로 대회는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윗동네 사는 애들은 김치도 지네들 것이요, 한복도 지네들 것이라고 우기는데, 아랫동네 애들은 헤밍웨이가 쓴 소설,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을 모델로 한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의 연구에 의해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그레고리오 푸엔테스(Gregorio Fuentes)라고 밝혀져 있고, 노인과 바다가 퓰리처상과 노벨상을 수상한 고마움으로 헤밍웨이가 푸엔테스에게 2만 달러라는 거금을 주었다는 사실로도 증명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대학교수라는 사람이 일본인이 노인과 바다의 모델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오늘은 이에 관한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논문의 제목은 헤밍웨이와 동아시아: 일본과 중국이 헤밍웨이의 저술에 미친 영향으로, 2016년에 박사학위 논문으로 발표하였으며, 논문의 저자인 히데오 야나기사와는 현재는 메이조 대학의 철학과 부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논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논문은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와는 큰 관련이 없지만 본문에서 헤밍웨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이후, 이자와 미노루란 일본인이 헤밍웨이를 찾아간 일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객관적인 증명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걔네들이 언제나 그런 것처럼.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은 일본인이 모델이었다고 주장하는 근거를 살펴보면 억지스런 모습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은 1897년 5월 10일 커피농장에서 일하기 위한 인력이 멕시코로 건너간 이후 남미로의 본격적인 이민이 시작되었는데, 1907년에 코아우일라주의 에스페란자 탄광에서 일하기 위한 일련의 이민행렬이 일본을 떠났으나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인해 많은 인원이 근무지를 이탈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일본인 이민자들이 근무하던 곳은 멕시코가 아닌 미국인들이 경영하던 탄광이어서 그나마 나은 형편이었지만, 영화 마스크 오브 조로에 나오는 것과 같은 노동환경은 사람이 버티기엔 어려워서 고국을 떠난 일본 이민자들도 살기 위한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근무지를 벗어난 일본인 이민자들은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행이라고나 할까요?

당시의 멕시코는 판초비야에 의한 멕시코혁명으로 어수선한 시기였던 관계로, 일본인들은 때론 정부군으로, 때론 혁명군에 가담하여 생명을 부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정적인 생활을 갈망하던 그들은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으로 가기 위해 쿠바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 행렬 중에 소설 속 주인공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키타자키 마사지로란 인물도 1915년 5월 5일, 이민행렬에 섞여 쿠바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쿠바에 도착은 했지만 먹고 살길은 막막하던 차에, 쿠바의 근해에는 물고기가 엄청나게 많지만, 그걸 잡는 사람은 없는 것을 보고, 이걸 잡아서 내다 팔면 굶어 죽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으로 일행과 함께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 물고기를 잡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돈 많은 사람의 투자를 받아 점차 그 규모가 확대되었고, 이런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쿠바인들에게 어업의 노하우를 전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금 먹고살 만한 시기가 되자 2차 대전이 일어났고, 추축국이었던 일본의 국민이란 이유로 키타자키 또한 수용소에 끌려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많은 쿠바인들의 탄원에도 불구하고 키타자키는 풀려날 수 없었고, 카스트로가 정권을 잡고 난 이후에야 어업지도자의 신분으로 다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이미 그때는 그의 나이가 60을 넘긴 이후였지요.

키타자키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사업을 진행하기가 벅찼던 관계로 일본에서 두 동생을 불러들였고, 열심히 노력하여 쿠바 정부로부터도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키타자키란 한 인간의 노력과 관련해서는 그를 조명한 다큐멘터리를 쿠바 정부에서 제작할 정도였다고 하니 의심할 바는 아니란 생각입니다.

그런데, 키타자키가 쿠바에서 어업발전에 힘을 쏟고 있던 시기에 헤밍웨이 또한 쿠바에 있었고, 헤밍웨이가 자주 가던 사라고사란 레스토랑에서 찍은 사진에 일본인이 있는 것은, 헤밍웨이가 일본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증거라고 논문은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진 속의 일본인은 사라고사에서 웨이터로 근무하던 히타노란 이름의 일본인으로 헤밍웨이와는 친분이 없다고 뒤에서 슬쩍 언급하고 있습니다.

 

쿠바의 어업발전에 크게 기여를 한 키타자키가 전수한 어업기술은 일본의 잇뽄츠리라고 하는 것인데 이것을 바탕으로 헤밍웨이가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히데오 야나기사와는 주장하고 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멕시코를 떠나 쿠바로 향했던 일본인들도 그토록 오랜 세월을 쿠바에서 지내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겠으나 태평양전쟁과 연이은 미국과 쿠바의 관계악화로 인해 정착 아닌 정착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시간이 벌써 120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195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를 남미에서 활동하던 이자와 미노루란 이름의 일본인 학자가 찾아갔는데, 그때 헤밍웨이가 자신은 일본인에게서 낚시를 배웠고, 자기에게 낚시를 가르켜준 사람이 바로 키타자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전혀 근거가 없는 공허한 주장에 불과하며, 현지이름으로 마누엘로 불리던 키타자키를 만나기 전에, 이미 헤밍웨이는 현재가치로 5억 원에 달하는 돈을 에스콰이어로부터 원고료로 받아 그 유명한 필라(Pilar)라는 보트를 구입하였는데, 그런 헤밍웨이가 키타자키로부터 낚시를 배웠다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가 생각됩니다.

멜라니아 트럼프가 즐기는 고가의 패션들

멜라니아 트럼프가 즐기는 고가의 패션들

요즘 디올이란 브랜드가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을 보니 세계 여러 나라의 퍼스트 레이디들 중에서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와 미국의 멜라니아 트럼프가 떠오른다.

케냐의 사파리를 찾으면서 썼던 “피스 헬멧(Pith helmet)”이라는 모자 때문에 논란이 되었던 멜라니아 트럼프의 패션은 미셀 오바마와 곧잘 비교되곤 했는데 민주당과 공화당의 전당대회에서 입었던 미셀 오바마의 675달러 드레스와 멜라니아 트럼프의 2,190달러짜리 드레스는 지금도 인터넷에 떠돌며 비교되고 있다.

뭐 트럼프야 돈이 많은 사람이니 영부인인 멜라니아 트럼프가 자신들의 돈으로 비싼 옷을 사입는 것을 비난할 수만은 없지만 부의 양극화가 심한 미국인들 사이에서도 그리 편하게만 생각되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면 지금까지 멜라니아 트럼프가 착용했던 패션 중에서 가장 고가의 제품들은 얼마나 하는지 한 번 알아볼까?

▶ 보테가 베네타 (Bontega Veneta) 격자무늬 코트-3,950달러

이 옷은 할로윈 축제 때 백악관에서 입은 것이다.

▶ 발망(Balmain) 셔츠-690달러

▶ 구찌(Gucci) 블라우스-1,100달러

▶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재킷-2,195달러

그녀가 신고 있는 크리스찬 부루탱(Christian Louboutin) 힐은 775달러라고 하는데 쓰고 있는 에르베 피에르(Hervé Pierre) 모자는 얼마인지 알 수가 없군요~

▶ 록산다(Roksanda) 드레스-2,865달러

▶ 델포조(Delpozo) 드레스-2,950달러

▶ 구찌(Gucci) 코트-3,701달러

▶ 이졸데(Isoude) 코트-3,995달러

▶ 제이 멘델(J. Mendel) 가운-6,990달러

▶ 모니크 륄리에(Monique Lhuillier) 가운-7,995달러

▶ 마이클 코어스(Michael Kors) 재킷과 스커트-9,590달러

▶ 발리(Bally) 바지 외-14,170달러

백악관에 입주할 때 입었던 발리(Bally) 바지는 575달러, 신었던 마놀로 블라닉(Manolo Blahnik) 힐은 595달러, 들었던 에르메스 버킨백(Hermes Birkin bag)은 13,000달러.

▶ 돌체 앤 가바나(Dolce & Gabbana jacket) 재킷-51,500달러

▶ 가격표가 없는 에르베 피에르(Hervé Pierre) 맞춤 가운

입으로 씹어서 만드는 일본술,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

입으로 씹어서 만드는 일본술,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하여 370만의 관객을 동원한 일본의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에는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소재가 되는 일본 전통의 술이 나오는데 이 술의 이름이 바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다.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가 일본의 문헌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오오스미노쿠니후도키(大隅国風土記)인데, 문헌에 따르면 쌀이나 곡물 등을 입에 넣어 씹고 뱉는 동작을 반복한 다음 하룻밤 이상을 발효시켜 만든다고 한다.

이렇게 만드는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는 미인주(美人酒)라고도 하는데 허영만 화백의 식객을 보면 “’미인주라고 들어봤어? 어여쁜 색시들이 쌀을 조근조근 씹어 당화시켜 만든 술인데 그 단맛이 이만저만이 아니야. 설탕 단맛이 수학공식이라면 미인주 단맛은 시의 운율처럼 변화무쌍하고 아름답다고 할 수 있지.”라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 ‘너의 이름은’에서도 쌀을 씹어서 술을 만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여기서도 여성들이 술을 만드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인주(美人酒)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아름다운 여성들이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지만 예로부터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는 주로 여성들이 만들었다고 한다.

병을 앓지 않고 자란 젊은 여성의 입안에는 건강한 세균이 있다고 믿었으며 처녀라면 더 좋다는 믿음 때문에 여성들이 만들었다고 하는데 제사에 사용되는 공물로서의 의미가 강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는 무녀들이 만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기에 무녀의 집안에서 태어난 여주인공 미츠하와 타키를 이어주는 소재로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해 보인다.

또한 미츠하의 성(姓)인 미야미즈(宮水)는 고베의 나다 지역에서 나는 미네랄이 풍부한 지하수를 일컫는 미야미즈(宮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물론 현대의 관점에서는 비위생적인 제조법이지만 의외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의 맛은 좋은 편이라고 하며 혹자들은 요구르트와 같은 맛이 나면서 냄새는 꽤 심한 편이라고 한다.

애니메이션 “너의 이름은(君の名は)”에서는 여주인공 미츠하가 3년 전에 봉헌한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를 타키가 마시면서 다시 몸이 바뀌기를 기대하는데 3년이나 숙성시킨 쿠치카미자케(口噛み酒)의 맛이 어떨지 궁금하기는 하다.

  

 

일식(日食)의 종류와 특징

일식(日食)의 종류와 특징

예전에 비해 일식집의 수는 많이 줄어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일식(日食)이란 말이 때로는 메뉴를 지칭하여 부르기도 하는 등 그 정의(定意)가 모호한 것 같아서 오늘은 일식(日食)의 종류와 각각의 특징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2013년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일식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표현이고 일본에서는 와쇼쿠(和食)라고 표현하는데 화식(和食: 와쇼쿠)과 일본요리(日本料理)의 개념이 섞여서 사용되기도 하지만 화식(和食)과 일본요리의 정의가 모호한 것은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화식(和食)에 대한 정의가 모호하고 각각이다 보니 일본 농림수산성에서는 화식(和食)의 특징을 아래의 4가지로 규정하고 있다.

① 다양하고 신선한 재료와 그 특색을 존중

②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변화를 표현

③ 건강한 식생활을 지원하는 영양의 균형

④ 설날 등 명절과의 밀접한 관계

 

화식(和食)의 4가지 특징을 이처럼 미사여구로 늘어놓다 보니 정의 자체가 모호해지고 말았는데 첫 번째 특징에 대하여 농림수산성은 “일본의 국토는 남북으로 길고, 바다와 산과 마을마다 다양하고 풍부한 자연이 펼쳐져 있어서 각 지역에 기인한 다양한 재료가 이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재료의 맛을 살리는 요리기술과 조리도구가 발달하였습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수입재료로 만든 요리는 화식(和食)이 아니란 것인지, 양식(洋食)과 혼합된 퓨전요리는 무엇으로 규정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에 맞딱뜨리게 된다.

이같이 농림수산성의 정의가 모호하다 보니 일본의 전문가들도 그 정의에 대하여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런 이유로 화식(和食)을 포함한 일상적인 요리를 통틀어 일본식(日本食)이라고 부르고, 화식(和食)과 일본요리(日本料理)란 표현은 전통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본에서 화식(和食)과 일본요리(日本料理)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은 서양문화가 일본으로 유입되던 시기, 서양의 요리도 함께 소개되면서부터라고 하는데 처음으로 일반화된 것은 1898년에 간행된 이시이 타이치로(石井泰次郎)의 일본요리법대전(日本料理法大全)이었던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화식(和食)이란 표현은 양식(洋食)에 대응하는 것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다시 화식(和食)과 일본요리(日本料理)란 표현을 세분하면 화식(和食)이 보다 광의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일본요리(日本料理)는 좁은 의미로 격식을 차리는 것으로서 일본의 라멘이나 소바는 화식(和食)이라곤 할 수 있어도 일본요리(日本料理)라고는 할 수 없다고 한다.

 

한편 아래에서 소개할 가이세키요리(會席料理)를 먹으러 갈 때는 화식점(和食店)보다는 일본요리점(日本料理店)엘 간다는 표현을 쓰며 스시(寿司)는 일본요리(日本料理)보다는 화식(和食)이라고 하는 것이 쉽게 감이 오는 것처럼 어디부터 어디까지를 화식(和食)이라고 한다는 정의를 내리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료에 의한 분류가 아닌 형식에 의한 일식(日食)의 종류는 구분이 가능한데 이제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형식에 의한 일식(日食), 즉 화식(和食)은 아래와 같이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① 혼젠요리(本膳料理)

②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

③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

④ 쇼진요리(精進料理)

 

■ 혼젠요리(本膳料理)

무가(武家)에서 손님을 대접하던 것에서 비롯되어 일본요리의 기초가 된 것으로 본상(本膳: 혼젠)은 손님의 격에 따라 다섯 상까지 차려지고 각각의 상은 한꺼번에 차리며 참석인원은 연회의 규모에 따라 달라진다.

혼젠요리(本膳料理)의 기본 상차림은 한 가지의 국과 세 가지의 반찬으로 된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지만 정확하게는 밥과 국에 ①채소절임인 고우노모노(香の物), ②조림인 니모노(煮物), ③가열하지 않은 요리인 나마스(なます)와 ④구이인 야키모노(焼物)로 구성된다.

즉 밥과 국(一汁)에 4가지의 반찬으로 구성이 되는데 밥과 채소절임인 고우노모노(香の物)는 세지 않고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라고 부른다. 그 이유는 사(四)라는 글자가 죽음을 뜻하는 사(死)와 음독이 같기 때문에 밥과 고우노모노(香の物)를 제외하고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혼젠요리(本膳料理)에서 반찬의 가지 수는 반드시 홀수가 되어야 하며 일즙삼채(一汁三菜)에서 이즙오채(二汁三菜)를 비롯하여 삼즙십오채(三汁十五菜)까지 있으며 날로 먹는 요리인 나마스(なます)는 수육(獣肉)을 사용한 것은 회(膾)로, 어육(魚肉)을 사용한 것은 회(鱠) 또는 어회(魚膾)로 표기한다.

일본요리의 원류라고도 할 수 있는 혼젠요리(本膳料理)는 현대에 와서는 최고급 요릿집이나 관혼상제 등에서만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으며 기술한 외에도 다양한 특징들이 있으나 그것에 관해서는 다음 기회에 알아보도록 하고 이쯤에서 줄인다.

 

■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는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와 발음이 같아서 구분하기 위해 챠카이세키요리(茶懷石料理)라고도 부른다.

다도(茶道)에서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는 선사(禪寺)에서 유래하였으며 차를 마시기 전에 나오는 가벼운 식사를 말하는데 다실의 인원은 대략 5명 정도이며 밥과 국(吸い物: すいもの 스이모노)의 순서로 제공되며 테두리가 있는 네모난 쟁반인 오시키(折敷)라는 상에 음식을 차린다.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의 3대 원칙은 ①제철 식재료를 이용해야 하고 ②재료 본연의 맛을 살려야 하며 ③환대하는 마음을 담아야 한다는 것으로, 세 번째 원칙은 따뜻한 음식은 식지 않게 내어야 하고, 차가운 음식은 가장 차가울 때 내놓아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둔다.

일본에서 다조(茶祖)로 불리는 센노리큐(千利休)가 다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의 카이세키(懷石)는 수행 중인 선승(禪僧)들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품속에 넣었던 따뜻하게 데운 돌을 의미하며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를 도시락으로 만든 것을 텐신(点心)이라 부른다.

 

■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

요정이나 연회 등의 술자리에서 나오는 호화로운 요리로 전채(前菜)를 시작으로 술과 함께 식사를 즐긴 다음 마지막으로 밥과 된장국(미소시루: みそ汁)이 나온다.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도 제철의 식재료를 사용하는 것은 엄격하게 지키지만 그 외엔 카이세키요리(懷石料理)처럼 엄격하지는 않다.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에서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는 한 가지의 국과 세 가지의 반찬이란 점은 같지만 세 가지의 반찬은 다르다.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에서 제공되는 세 가지 반찬은 ①회(刺身: 사시미) ②구이 ③조림으로 제공되며 여기에 더해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표현인 츠키다시(つきだし)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오토오시(お通し 또는 오토오시모노: お通し物)라고 하는 주문한 요리가 나오기 전에 나오는 간단한 음식과 튀김 및 스노모노(すのもの: 酢の物)라는 초무침이 술안주로서 술과 함께 제공되고 제일 마지막으로 밥과 된장국을 제공한다.

현재 호텔이나 일본요릿집 등에서 나오는 일본요리의 주를 이루는 것이 카이세키요리(會席料理)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 쇼진요리(精進料理)

다른 요리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라면 쇼진요리(精進料理)는 수도승들이 불교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먹던 음식으로 주홍색 칠을 한 식기를 사용하는 특징이 있다.

 

쇼진요리(精進料理) 또한 이치쥬산사이(一汁三菜: 일즙삼채)가 원칙이지만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계율에 의해 고기나 생선의 사용은 금지하고, 종파에 따라서는 오훈(五葷)이라고 하는 마늘, 달래, 무릇, 김장파, 실파와 같은 자극성이 있는 다섯 가지 채소류의 사용을 금하는 경우도 있다.

고다이라 나오의 눈물

고다이라 나오의 눈물

평창 동계올림픽 빙상 여자 500미터에서 금메달을 딴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이상화 선수를 격려하는 모습으로 화제가 되었고 두 사람의 인연과 우정에 대한 기사들이 연일 쏟아져 나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경기 후 가진 인터뷰에서도 이런 화제에만 집중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데 저는 기자회견장에서 흘린 고다이라 나오의 눈물을 보면서, 참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장의 사진만을 두고 본다면 금메달을 딴 감격에 흘리는 눈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먼저 세상을 떠난 동료를 기억하며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경기가 끝나고 트랙을 돌 때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면서 역시나 금메달을 딴 감격에 그간의 시간들이 지나가면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는데 인터뷰를 보고는 아마도 트랙을 돌 때에도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다이라가 그리워하는 친구는 일본의 빙상선수 스미요시 미야코(住吉都)이며 올해 2018년 1월 20일 나가노 시내에 있는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고 하며 유족의 뜻에 따라 사인을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언론 등에서는 자살일 것이라고 추측들을 하고 있습니다.

 

미야코 선수는 고다이라와 신슈대학 동기생으로 대학시절 4년 동안 함께 마사히로 코치의 지도를 받았으며 2014년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여서는 500미터에서 14위, 100미터에서 22위의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둔 일본 선발전에서 탈락하고 얼마지 않아 이런 일이 생기면서 NHK를 비롯한 언론에서는 자살일 것이라는 추측성 기사를 보도했지만 미야코 선수를 지도했던 마사히로 코치는 “컨디션 난조와 성적부진으로 고민은 하고 있었지만 다른 문제들도 여러 가지 있는 것으로 안다. 단지 성적부진을 이유로 이런 일이 생긴 것이 아니란 것은 알리고 싶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혔었다고 합니다.

대학 4년간을 함께 땀 흘리고 곁에서 서로 응원하며 의지했던 동료가 갑자기 사망한 사건은 고다이라에게도 충격이 아닐 수 없었겠지요…

미야코의 사망 직후 가진 언론 인터뷰에서 고다이라는 “솔직히 그녀의 일은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언제나 머릿속에는 그녀의 기억이 맴돈다”고 아픈 마음을 전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평창에서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던 것은 미야코의 가족들로부터 전해들은 “나오가 금메달을 딴다면 내(미야코)가 딴 것과 같아”라는 미야코의 말과 “미야코의 몫까지 열심히 해달라”는 미야코 가족의 진심어린 당부도 한 가지 요인이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금메달을 딴 것을 미야코에게 보여주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는 말과 함께 고다이라 선수는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지요~

 

이상화 선수에게 보여준 배려와, 먼저 떠난 동료를 기억하며 흘리는 나오 선수의 눈물을 보면서 “참 따뜻한 성품을 가졌구나!”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됩니다.

국적을 떠나, 늦은 나이에 각고의 노력으로 멋진 결과를 이루어내었던 고다이라 나오 선수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왜 병원 소속이었을까?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왜 병원 소속이었을까?

평창 동계올림픽 빙상 여자 500미터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고다이라 나오 선수는 경기 후 이상화 선수를 격려하는 따듯한 마음씨로 인해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찬사를 받았었다.

 

이런 고다이라 나오 선수의 후원기업이 왜 유수의 일본 대기업이 아닌 나가노현의 한 종합병원이었을까?

고다이라 선수는 중학교 2학년 때 전일본 주니어 스피린트 부문에서 고교생들을 제치고 우승을 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으며 고교시절에도 500미터와 1000미터의 2관왕을 차지할 만큼 우수한 실력을 자랑했다.

이런 고다이라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주변에서는 실업팀으로 진출할 것을 권유했지만 대학에 진학하기로 하고 신슈대학(信州大学: Shinshu University)의 교육학부에 입학을 한다.

고다이라가 대학에 진학한 이유는 첫째가 교사가 되기 위함이었고 다음이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 남자 빙상 500미터 금메달리스트인 시미즈 히로야스(清水宏保)를 지도한 유우키 마사히로(結城 匡啓)(아래 사진 좌측)의 지도를 받고자 함이었다고 한다.

 

대학시절에도 500, 1000, 1500미터에서 우승을 하는 등 실력을 발휘하던 고다이라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마사히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면서 올림픽의 금메달을 목표로 연습에만 전념하기 위해 후원해줄 기업을 찾았지만 여의치가 않았다고 한다.

이때 유우키 마사히로 감독이 아이자와 병원 이사장을 찾아가 후원을 부탁했고 스포츠 장애 예방센터를 운영하고 있던 병원 측에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를 응원하고 싶다는 순수한 동기로 고다이라는 병원의 직원으로 채용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자와 병원은 1952년에 개원하여 460석 규모의 병상을 가진 병원으로 나가노현에서는 최대규모의 민간병원이다.

 

이 병원에 고다이라 선수가 채용될 수 있었던 것에는 고다이라의 대학 졸업논문이 병원에서 운영하는 스포츠 장애 예방센터와도 맞았기 때문이지만 당시 병원의 이사장은 지금처럼 대단한 선수가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따라서 병원의 홍보효과에 대해서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올림픽에 출전하는 것만으로 대단한 일이라고 판단하여 고액의 지원은 하지 못하지만 대졸 사무직원에 준하는 급여와 주거비용 및 원정에 필요한 경비를 지원하기로 했던 것이라고 한다.

일부 언론에 의하면 아이자와 병원이 홍보효과를 노리고 지원을 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GLOBAL HEALTH CONSULTING에 따르면 유우키 마사히로(結城 匡啓) 코치가 병원을 찾아가 후원기업을 찾기가 힘들다는 것을 토로했고 이에 병원의 이사장이 가진 “스포츠 장애 예방센터라는 알맞은 부서도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를 응원하고 싶다”는 생각과 일치하여 채용을 결정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아이자와 스포츠 장애 치료예방센터 홈페이지)

그리고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바에 의하면 병원의 이사장은 선수시절 부상치료 때문에 병원과 인연이 있던 마사히로 코치가 고다이라가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인 2009년 3월에 병원을 찾아 지원을 문의했고 당시에는 홍보효과라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단지 병원의 이사장은 “많은 금액을 후원하지는 못하지만 마사히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경기에 계속해서 참가하는 정도의 금액이라면 어떻게든 지원하겠다”고 회고했다는 기사를 실었었다.

이렇게 고다이라를 지속적으로 지원한 아이자와병원의 이사장은 3대를 이어온 의사집안이며 “이익이 생기면 세상을 위해 사용하라”는 선친의 유훈을 받드는 것이라고 하며, 곁눈질 하지 않고 노력하는 고다이라에게 감동을 받았으며 “스케이트에 인생을 걸고 이토록 한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없다”고 하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후원할 것이라고 산케이스포츠는 전하기도 했었다.

아이자와 다카오 이사장(관련 기사 바로가기)

고다이라 선수가 아이자와병원으로부터 받는 급여와 기타의 비용을 합하여 병원으로부터 지원 받는 금액은 연간 원화로 2억~3억 원 선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후에는 고다이라를 후원하는 기업이 미즈노와 ANA를 비롯하여 롯데 등 많이 생겼지만 이전까지는 병원의 후원과 일본정부에서 후원하는 선수 지원금(A~C 등급)으로 월 20만엔 정도의 금액이 전부였다.

 

2014년 소치 올림픽 500미터에서 5위에 머문 고다이라는 아이자와 병원에 적을 둔 채 네덜란드의 프로 팀 ‘Team Continu’에서 활동을 하면서 애초의 1년의 계획이 연장되어 2년간을 네덜란드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 때에도 아이자와 병원에서는 고다이라를 장기출장으로 처리하고 지원을 계속했다고 한다.

 

선수를 위하여 후원해줄 기업을 직접 찾아가 노력한 유우키 마사히로(結城 匡啓) 코치와 이렇게 순수한 동기로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은 병원의 후원과 고다이라 선수의 노력이 뭉쳐서 평창올림픽의 금메달을 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험비(Humvee)와 험머(Hummer)는 무엇이 다를까?

험비(Humvee)와 험머(Hummer)는 무엇이 다를까?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된 지프 다음으로 미군을 대표하는 차량인 험비(Humvee)와 민간용 차량인 험머(Hummer)는 어떻게 다른지를 한 번 알아보자.

우선 험비(Humvee)는 고기동 다목적 차량(High-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e)의 머리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라 알려져 있지만 차량의 이름은 아니고 실제로 미군이 고기동 다목적 차량을 개발하기 위해 만들었던 프로젝트의 명칭이 그대로 차량의 이름으로 사용된 것이다.

개발계획은 197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는데 첫 번째 공모에서 크라이슬러, 콘티넨털 모터스, AM 제너럴의 3개 업체가 선정되어 1982년 5월까지 각각 11대씩의 시제품을 육군에 납품하였고 이어서 1년간의 시험을 거쳐 최종적으로 AM 제너럴의 차량이 채택되었는데 콘티넨털 모터스는 2019년에 콘티넨털 에어로스페이스 테크놀로지(Continental Aerospace Technologies)로 이름이 바뀌었다.

AM제너럴은 자사가 납품한 차량이 채택될 것에 대비하여 미리 차량의 이름을 정해두었었는데 그것이 바로 험머(Hummer)였으며 이미 상표등록까지 마친 상태였지만 미육군 프로젝트명의 약어인 험비(HMMWV)라는 호칭이 일반화되어버리면서 발음하기 쉽도록 험비(Humvee)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1990년대가 되면서 민간형의 출시를 요구하는 소비자들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1992년 6월에 험비(Humvee)의 시트를 개량하고 에어컨을 탑재하는 등 개조하여 민간용으로 한정판매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면을 살펴보면 영화배우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의 힘이 컸음을 알 수 있다.

1990년 6월 유치원에 간 사나이(Kindergarten Cop)란 제목의 영화를 촬영하면서 험비차량이 이동하는 광경을 목격했던 아널드 슈워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는 차량에 매료되어 끈질기게 AM제너럴에 전화를 걸어 민간에게도 판매하면 큰 인기를 끌 것이라고 설득을 했고 마침내 한정판매를 하기로 결정하자 최초의 험머 H1 2대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직접 구입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한정판매이기는 했어도 호평을 얻자 AM제너럴은 같은 해 10월부터 일반에게 판매를 시작하였지만 예상과는 달리 판매는 저조하였고 마침내 1999년 12월에는 험머(HUMMER)라는 브랜드를 제너럴 모터스에 넘기게 되고 만다.

따라서 험머(HUMMER)란 이름은 GM이 사용하고, 험비(Humvee)라는 이름은 AM 제너럴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GM은 험머(Hummer)의 명칭을 험머 H1이라고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GM이 사용하던 험머(Hummer)란 브랜드의 차량은 AM제너럴과의 계약에 따라 AM제너럴의 공장에서 생산된 것들이었는데, 2002년에 발매된 험머 H2도 AM 제너럴의 공장이 있는 인디애나 주의 미셔와카(Mishawaka)에서 생산되기는 하였지만 쉐보레 타호(Chevrolet Tahoe)를 기반으로 만들 수가 있었고 H1, H2에 이어서 2006년에는 H3를 출시했던 GM은 2009년에 파산함으로써 험머(Hummer)란 브랜드의 정리와 더불어 H2와 H3의 판매도 종료되고 말았다.

 

비록 민수용인 (Hummer)는 사라졌지만 원조라고 할 수 있는 험비(Humvee)는 지금도 AM제너럴의 미셔와카(Mishawaka)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