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린 먼로의 성공 뒤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마릴린 먼로의 성공 뒤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미국영화협회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6위에 기록된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녀가 배우로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미국의 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이번에는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제목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물음표를 붙인 것은 마릴린 먼로와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숨은 인연이 있는 것은 맞지만 로널드 레이건이 마릴린 먼로의 성공에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릴린 먼로는 1942년 16세의 나이로 항공사 정비원으로 일하던 짐 도허티(Jim Dougherty)와 결혼하였으나 1944년 짐 도허티(Jim Dougherty)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마릴린 먼로(당시의 이름은 Norma Jean Dougherty)는 로스앤젤레스의 밴나이즈(Van Nuys)에서 무인항공기 OQ-2를 생산하던 “Radioplane Factory”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미육군항공대의 “First Motion Picture Unit”에서 홍보영화를 제작하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 대위는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하여 군수공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오도록 사진병이던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을 마릴린 먼로가 근무하고 있던 공장으로 파견을 보내게 됩니다.

공장에 도착한 데이빗 일병은 3일간 공장의 이곳저곳을 돌며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런 표정을 짓는 마릴린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모델의 가능성을 발견한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은 아예 2주간의 휴가를 얻어 그녀에게 카메라 포즈를 취하는 법 등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은 공장에서 촬영한 마릴린의 사진을 군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아래의 표지사진은 합성된 것이며 실제로 데이빗이 찍었던 사진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이었습니다.

 

아무튼 데이빗 콘오버는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던 먼로에게 우선 모델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를 수락한 먼로에게 2주간의 휴가 동안 다양한 교육을 하였는데, 1945년 1월 그녀는 공장을 그만 둠과 동시에 데이빗이 소개한 모델 에이전시인 “Blue Book Modeling Agency”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에멀린 스니블리(Emmeline Snively)의 소개로 마릴린 먼로는 꿈꾸던 영화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먼로를 발굴했던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는 필리핀으로 파견되면서 먼로와의 연락이 끊어졌는데 1953년에서야 마릴린 먼로가 바로 자신이 사진을 찍고 가르쳤던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촬영장에서 다시 재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먼로는 배우로도 활동을 하던 로널드 레이건과도 만나게 되는데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아마도 레이건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사진을 찍도록 데이빗 일병을 보냈던 장본인이라구~ 밥 한 번 사야지 않겠어?”라고 말입니다^^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세계의 부자들 중엔 한국인도 있을까?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세계의 부자들 중엔 한국인도 있을까?

200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한 대학에 기부했다 140억 원에 달하는 증여세 폭탄을 맞았던 어느 개인기부자의 선행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한편, 대기업들의 총수가 범죄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고 나면 으레히 뒤따르는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눈속임과 그들이 설립한 재단들은 또 다른 갑질을 자행하는 수단이 되는 모습들을 우리는 최근 대한항공의 일우재단 이명희씨를 통해서 똑똑히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는 삼영그룹 창업자인 이종환씨가 8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여 국내최대의 기부액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부자들이 기부에 인색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 거부(巨富)들의 기부는 새삼스런 것이 아닌데 우리가 잘 아는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는 설립한 재단을 통해 350억 달러 이상의 누적금액을 기부하고 있고 워렌 버핏은 지금까지 기부액수가 23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는데 이것을 한화로 계산해보면 각각 39조 원과 26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하며 지금까지 그들이 기부한 금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빌게이츠가 500억 달러, 워렌 버핏이 467억 달러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2010년 6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전 세계의 부자들에게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자!”는 취지로 기부공약(Giving Pledge)을 제안하면서 설립한 비영리재단인 “The Giving Pledge”에는 오늘 날짜(2018. 11. 17)로 22개 나라에서 186명의 거부들이 가입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타이완의 거부들이 참가했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에서는 단 한 명의 참가자도 없다.(이 글을 작성한 것은 2018년으로 그 이후인 2021년에 한국인 부부 2쌍이 이름을 올렸는데 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참가자 명단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은 남의 나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국의 부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참가자도 없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국내 재벌들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생색내기용 꼼수 기부행태를 보는 것 같아 과히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2018년 이 글을 작성한 이후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형미선 부부와 배달의민족을 개발한 (주)우아한형제들의 창업자인 김봉진 설보미 부부가 2021년에 기부서약을 하였으므로 보충한다.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전 의장

(주)우아한형제들의 창업자인 김봉진 설보미 부부

역사적으로 부자들의 기부문화와 전통이 강한 미국은 지난 2017년에 가장 많은 4,020억 달러(약 455조 640억 원)의 모금액을 기록하였는데 이 금액은 우리나라의 한 해 예산에 육박하는 액수이며 그 중에서 개인이 기부한 액수는 모두 2,866억 달러(324조 4천억 원)라고 한다.

※ 출처: Charity Navigator

이런 미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는 지난 해 5,996억 원의 모금실적을 올렸으며 오는 20일 전국적으로 사랑의 온도탑 제막과 동시에 연말 모금캠페인에 나서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온도탑의 수은주가 쭉쭉 올라가기를 바라면서 지난 10년간(2008년~2017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한 개인기부자들을 연도별로 알아보자.

▶ 2008년 레오나 헬름슬리(5,660억)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난 Leona Helmsley는 5억 달러에 달하는 그녀의 재산을 기부하였고, 그녀가 기르던 개에게 별도로 1,200만 달러의 재산을 증여하였는데 이 금액은 재판에 의해 200만 달러로 감액되었다.

▶ 2009년 드러켄밀러 부부(8,773억)

2009년 Stanley Druckenmiller와 그의 아내 Fiona Druckenmiller는 의학연구와 교육 및 빈곤퇴치를 주된 사업목적으로 그들이 설립한 재단(Druckenmiller Foundation)에 7억 7,5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0년 익명의 기부자(2,264억)

2010년에는 자신을 텍사스 주에 있는 베일러대학교 출신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기부자가 이 대학에 익명으로 2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1년 윌리엄 디트리히 2세(3,000억)

2011년 10월 6일 사망한 윌리엄 S. 디트리히 2세(William S. DietrichⅡ)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에 2억6,5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2년 워렌 버핏(4조 1,540억)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Warren Buffett은 2012년에 어린이들을 위한 3개의 자선단체에 각각 10억 달러 이상(정확히는 1,027,773,653달러)을 기부하기로 하여 모두 36억 7천만 달러에 달하는 기부액을 기록하였다.

▶ 2013년 마크 저커버그(1조 1,200억)

2013년 페이스북의 CEO인 Mark Zuckerberg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자선단체(Silicon Valley Community Foundation)에 9억 9,200만 달러의 주식을 기부하였다.

▶ 2014년 랄프 윌슨(1조 1,300억)

2014년 3월 25일에 사망한 미식축구구단 버펄로 빌스의 구단주였던 Ralph C. Wilson Jr.는 그가 설립한 재단에 유산 10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5년 존 산티코스(7,358억)

2014년 12월에 사망한 John Santikos는 샌안토니오 지역재단에 6억 5천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6년 나이트 부부(5,660억)

나이키의 공동창업자인 Philip Knight와 그의 아내 Penelope Knight는 2015년 오레곤 대학교에 5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7년 마크 저커버그 부부(2조 1천억)

Mark Zuckerberg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찬(Priscilla Chan)은 그들이 설립한 재단에 18억 5,650만 달러를 기부하여 2017년에 가장 많은 액수를 기부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저커버그가 세운 재단은 비영리재단이 아닌 정확하게는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Chan Zuckerberg Initiative)”라는 LLC인데 이것은 유한책임회사와 개인기업의 특징이 결합된 형태로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비판과 함께 비영리단체가 할 수 없는 정치적 로비에 사용될 수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서 기부의 본질이 변색되는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앞으로도 기부공약(Giving Pledge)을 하는 한국의 부자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람과 아울러 한국의 재벌들 중에서도 사회의 지탄이 아닌,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인의 신분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것 또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공군의 원수에까지 올랐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를 꼽을 수 있는데 1933년 헤르만 괴링에 의해 국가항공부의 서기관에 임명될 때에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던 터라 괴링의 명령으로 그의 개인기록을 변조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중앙이 에르하르트 밀히

 

서열상으로는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가 유대인으로는 가장 높은 직책에서 나치에 협력을 한 사람이지만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치 독일에 협력한 사람으로는 히틀러의 운전사였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꼽을 수가 있다.

1897년 1월 19일, 프랑스 이민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19년 12월 1일에 나치당(NSDAP)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1920년 1월에 교부하기 시작했던 501번으로 시작하는 당원번호가 히틀러는 그의 저서에서 507번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555번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594번을 교부받았다.

 

에밀 모리스(Emil Maurice)

 

이것을 계기로 히틀러와 에밀 모리스는 친분을 맺게 되고 1920년에 창설된 돌격대의 전신인 경호·경비대의 최고지도자(Oberster SA-Führer: Supreme SA Leader)에 오르게 되는데 SA는 약자로서 돌격대(Sturmabteilung)를 뜻한다.

그리고 이어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21년 7월부터는 히틀러의 개인운전사가 되는데 1923년 3월에는 친위대의 전신이 된 히틀러의 개인경호부대의 대원이 되어 1923년 11월 9일의 뮌헨 폭동 실패 이후 정치범으로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교도소(Landsberg Prison)에 수감되게 된다.

 

수감 당시의 사진: 맨 왼쪽이 히틀러, 그 옆이 모리스

히틀러는 수감기간 동안 그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부관이었던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히틀러의 구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최선봉에서 투쟁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둘 사이의 막역함을 너(Du)라는 호칭을 서로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 이름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인물의 하나인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눈 1925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조직되었던 경호대인 슈츠코만도(Schutzkommando)의 대원으로서 히틀러의 전용기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 때 에밀 모리스는 히틀러의 조카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과 사귀게 되고 1927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히틀러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게 되지만 히틀러는 에밀의 예상과는 반대되는 반응을 보인다.

 

겔리 라우발(Geli Raubal)

 

모리스의 예상과는 달리 히틀러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대신에 헤어질 것을 요구했고, 1927년 연말에는 에밀 모리스를 운전기사에서 해고 하고 당에서도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느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을 해고하고 탈당까지 시킨 히틀러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나치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보상금으로 500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를 받게 되고, 이를 밑천으로 뮌헨에서 보석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던 것은 아니고 친위대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었는데 1925년 11월 9일에 친위대로서 흔히들 SS라고 부르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이 조직되었을 때 1번 대원이 히틀러였고, 2번 대원이 바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였던 이유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1932년 친위대가 확장·재조직 될 때 모리스는 친위대의 고위간부에 임명되게 된다. 그러나 조직의 창시자라는 상징성에 대한 예우였을 뿐 주요한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고 1933년에는 뮌헨 시의원이 되어 같은 해 10월에 열렸던 뮌헨폭동 기념식에서 히틀러와 재회하여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1929년부터 친위대를 이끌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최고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친위대의 대원번호가 168번이었는데 1933년부터는 모든 친위대의 대원들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어야만 한다는 요건을 만들어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혈통을 증명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1935년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결혼을 하기 위해 혈통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하인리히 히믈러는 모리스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이자 배우 겸 감독으로 유명한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리 모리스(Chéri Mauric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에밀 모리스의 증조부인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임을 인지한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이 사실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당과 친위대에서 추방할 것을 제안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1937년부터 뮌헨의 상공회의소장을 역임하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독일의 공군에서 근무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군의 주도로 나치당이나 친위대의 대원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이 속했던 조직을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는 탈나치화(Denazification)의 일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48년 4년형의 선고와 함께 보유자산의 30%를 몰수당하게 된다.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막역한 친분을 쌓고 그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그의 최초의 직업이었던 시계기술자의 경력을 살려 시계점을 운영하다 1972년에 사망하였다.

비록 15년으로 감형이 되기는 했으나 종신형을 언도받았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오늘의 주인공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보면서 요즘 우리사회의 뜨거운 화제인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을 생각하게 되지만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에 관한 생각은 적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헤밍웨이의 유작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의 유작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제(7월 2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날이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책으로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낚시를 좋아했다는 점이 내겐 또 다른 관심점이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죽기 전에 쓴 이 책의 제목은 원제(A Moveable Feast)를 직역한 이동축제일(移動祝祭日)이란 제목보다는 주순애씨가 번역한 제목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훨씬 와 닿는다.

2015년 11월 13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헤밍웨이의 유작(遺作)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체류했던 파리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쓴 이 책의 제목 ‘A Moveable Feast’는 헤밍웨이가 붙인 것이 아니다.

‘A Moveable Feast’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비즈니스(원제: Shameless exploitation in pursuit of the common good)’로 소개되었던 책을 영화배우 폴 뉴먼과 함께 쓴 작가 A.E. 허츠너(Hotchner)란 사람이 붙인 것인데 헤밍웨이가 죽고 나서 그의 네 번째 부인 메리 헤밍웨이가 출판에 앞서 책의 제목을 정하기 위해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A.E. 허츠너(Hotchner)였다.

 

헤밍웨이는 유작(遺作)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의 에필로그에서 ‘어떤 친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A.E. 허츠너(Hotchner)였으며 그가 제안한 제목이 바로 ‘A Moveable Feast’였던 것이다.

헤밍웨이가 그의 책에서 거론할 정도로 A.E. 허츠너(Hotchner)와 가까운 사이였던가 하는 것은 A.E. 허츠너(Hotchner)가 1966년에 출간한 책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헤밍웨이와 허츠너

 

헤밍웨이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낸 작가 A.E. 허츠너(Hotchner)는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과 수기로 기록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를 썼는데 이 책은 1948년부터 1961년까지 헤밍웨이의 일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8년 잡지 코스모폴리탄에 ‘문학의 미래’란 제목의 글을 부탁하기 위해 쿠바의 아바나에 있던 헤밍웨이를 방문한 것이 A.E. 허츠너(Hotchner)가 헤밍웨이와 교류하게 되는 시발점이었으며 이후 A.E. 허츠너(Hotchner)는 헤밍웨이의 손에 이끌려 낚시도 배우게 되고 헤밍웨이 부부의 유럽여행에도 동반하는 등 잦은 교류를 가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서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주순애씨의 번역본에서 인용)”이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도 테러로 인한 아픔을 겪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글이 적힌 마지막 장 ‘파리에 끝은 없다(There Is Never Any End to Paris)’란 제목과 내용이 공감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헤밍웨이의 유작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원본 그대로의 것은 아니고 네 번째 아내였던 메리 헤밍웨이(Mary Welsh Hemingway)가 두 번째 아내였던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와 관련한 내용들은 삭제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메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은 얼마나 될까?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은 얼마나 될까?

아직 국내에서는 많지 않지만 서서 소변을 보는 남성이 외국에서는 점점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는데 글을 쓰는 본인도 앉아서 일을 보지는 않고 있다.

지난 2015년 독일에서는 세입자가 서서 본 소변이 튀어 바닥의 대리석을 변색시켰다고 보증금 반환을 거부하는 집주인에게 소송이 제기되어 재판을 받았던 일이 있었다.

결과는 남성이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은 역사적 관습이기 때문에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반환하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독일에서는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은 여성을 배려하지 않는 비위생적인 행위라고 해서 슈테핑클러(stehpinkler)라 부르며 사회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하고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을 지츠핑클러(sitzpinkler)라고 부른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2018년의 조사에서 응답에 참가한 20세~69세의 남성 300명 중에서 29.3%가 앉아서 소변을 본다고 응답하였다고 하는데 최근 영국의 주택설비업체인 QS Supplies란 곳에서 자외선을 사용하여 서서 소변을 볼 때 소변이 얼마나 튀는지를 시뮬레이션 한 결과를 유튜브에 게재하였다.

 

유튜브의 영상은 예상 밖의 결과를 보여주었는데 남성들이 서서 소변을 보는 행위가 얼마나 비위생적인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으며, 앉아서 소변을 보는 것에 대하여 진지한 고민을 하도록 만들었다.

QS Supplies에서 영국인 남성과 미국인 남성1,01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69%가 서서 소변을 본다고 응답하였다고 한다.

 

이에 QS Supplies에서는 양변기에 서서 소변을 보는 남성들의 위치와 패턴 및 소변의 궤도를 6주 동안 자외선을 받으면 빛을 내는 액체를 사용하여 실험하였다고 한다.

QS Supplies에서는 사전조사에서 조사대상자의 25%가 양변기의 1m 이내에 칫솔을 보관하고 있다는 응답을 얻었는데 실험의 결과는 서서 소변을 볼 때 최대 1m 밖에까지도 소변이 튀는 것으로 나왔다고 한다.

 

영국인 응답자 34%와 미국인 응답자 26%가 서서 소변을 보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것에서 보듯이 정확한 데이터는 없어도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보다는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의외라고 생각했던 것은 양변기의 뒤쪽을 겨냥하고 소변을 보는 것이 더 많은 소변이 튀게 만드는 결과를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나뿐만 아니라 응답자의 절반가량도 이렇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생각과는 달리 소변이 적게 튀도록 하기 위해서는 양변기 내에 고여 있는 물의 앞쪽을 겨냥해야 된다고 한다.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이 정도로 비위생적인 줄은 몰랐던 내게 고민거리를 안겨다준 QS Supplies의 자세한 기사는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할 수 있다.

※ Revealing the Hidden Created by Peeling While Standing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10개국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10개국

CNN은 금년 3월 9일자 보도에서 2009년 “미법무성 사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Justice)”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미국의 민간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총기의 숫자는 약 3억 1천만 정에 달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10년 전의 조사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최근의 자료인 2007년 스위스의 “Small Arms Survey”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총기를 소유한 민간인들은 모두 6억 5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하여 인구 100명당 총기보유 숫자가 가장 많은 미국은 2위인 예멘보다도 62%나 많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적은 100명당 0.1정을 보유하는 튀니지보다는 무려 890배나 많은 보유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총기사망사고도 사고사나 자살 및 살인을 모두 합하여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총기에 의해 사망한 미국인은 모두 1만3,286명이나 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망자는 모두 14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단일 사건으로 4명 이상을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는 총기 난사사건이 2013년 이후 일어나지 않은 미국의 도시는 텍사스의 오스틴이 유일하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에서는 총기소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CNN에 의하면 인구 100명당 총기보유 숫자가 가장 많은 10개국과 가장 적은 10개국은 아래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인구 100명당 보유하는 총기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나라라고는 할 수 없는데 “GUNS & AMMO”라는 곳에서 2014년에 발표한 “10 Best Countries for Gun Owners”를 인용하여 어떤 나라들이 총기소지가 비교적 쉬운지를 알아보자.

 

▶ 10위 온두라스

온두라스는 2009년 쿠데타로 문민정부가 무너지고 나서 범죄가 급증하고 총기소유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졌는데 기본적으로 온두라스는 총기소유를 금지하지 않으며 단지 공공장소에서의 휴대만 금지하고 있는데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가게에서 최대 5정까지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법총기류의 숫자도 85만 정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9위 핀란드

핀란드는 사냥문화가 남아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총기소유에 대한 인식은 관대한 편이지만 특정 총기류에 대해서는 규제가 엄격한 편이어서 반자동권총의 소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금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총기를 구입할 때도 면허가 있어야 하고 개별 총기에 대한 별도의 면허도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총기는 집에 보관해야 하며 호신용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8위 세르비아

세르비아의 총기보유율이 높은 이유는 규제가 느슨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1990년 유고슬라비아 붕괴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와 치룬 4번의 전쟁도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많은 이유이다.

그러나 세르비아정부는 총기규제를 강력하게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단지 권총의 소지에만 아주 까다로운 규제를 받도록 하고 있을 뿐이어서 기타의 총기류에 대한 허가를 취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탄환의 규제는 아주 엄격하여 매년 60발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 7위 스웨덴

유럽은 사냥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어 총기소유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스웨덴에서는 반자동식을 소지할 수도 있다. 총기소유를 허가하지 않는 건수는 매년 1,000건 정도이나 항소하면 대부분 허가되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호신용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고 18세 이상이면 총기소유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총기를 소유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신청할 때 밝혀야 하며 스포츠선수용은 면허취득 전에 6개월의 클럽활동이 필수요건이 되며 사냥용으로 보유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만일 음주운전의 전과가 있다면 총기를 보유할 수 없고 스웨덴에서는 사냥용 6정을 포함하여 최대 10정까지 총기를 보유할 수 있다.

 

▶ 6위 캐나다

캐나다가 총기소유가 쉬운 나라라고 하면 갸우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사냥문화가 남아있고 총기를 돌려가며 사용하는 원주민문화도 아직 유지되고 있어서 총기사용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곤 하였다.

그러나 현재 캐나다에서는 2013년 이후 총기범죄가 30%나 증가하고 범죄조직에 연루된 총기살인이 75%나 급증하는 등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낳게 되자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총리가 총기소유를 규제하는 법률의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 5위 노르웨이

2011년 테러리스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가 69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8명을 차량폭탄으로 사망케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총기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을 이기지는 못했다.

노르웨이는 경찰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을 정도로 안전한 나라이지만 사냥을 즐기는 문화가 있어서 주로 겨울철 사냥시즌에만 총기를 사용하며 허가를 받으면 AR-15도 보유할 수 있다.

 

▶ 4위 파나마

총기소유 허가를 얻게 되면 사용하는 탄환의 숫자에 대한 규제도 받지 않으며 휴대에 관한 규제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총기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혈액과 소변검사를 통해 마약류 복용에 관한 검사를 거쳐야 하고 기간도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중남미 국가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파나마는 총기를 규제하고 있는 영국보다 적은 3% 정도만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

 

▶ 3위 스위스

군인을 포함하여 100명당 총기 보유가 46정으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는 스위스는 2010년까지는 국방을 위해 성인남성은 1정 이상의 총기를 가정에 보유해야 했다.

그래서 인구의 30%가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7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하여 18세 이상은 허가 없이도 단발 및 볼트액션식의 소총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허가 없이 구입할 수 있다고 해도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서 범죄에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 2위 체코

총기규제를 강화하려는 EU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러와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체코의회는 총기소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던 헌법을 수정하여 이를 2017년에 통과시켰다.

이로 인하여 반자동소총의 소지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사냥용뿐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도 소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2개의 권총도 허가만 취득하면 휴대할 수 있게 되었다.

 

▶ 1위 미국

미국의 총기소지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있어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만 언급하자면 서두에서 예를 들었던 것과 같이 2015년을 기준으로 총으로 사망한 미국인은 모두 1만3,286명이나 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망자는 모두 14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12년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 중에서 총기를 사용한 것이 60%에 달하는데 이것은 영국의 10%, 호주의 18.2%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매일 36명이 총으로 인해 사망하는 미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6% 밖에 되지 않는 흑인남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달하고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지나친 대응을 우리는 자주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유아에 의한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2015년에만 총기로 사망한 어린이가 756명에 달하는 미국은 결코 자유롭지도, 정의롭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나라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German Chocolate Cake은 독일 케이크가 아니다.

German Chocolate Cake은 독일 케이크가 아니다.

일본 오키나와를 관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맛집 중에는 두 개의 스펀지 케이크(sponge cake) 사이에 생크림을 넣고 맨 위에 코코넛 필링(Coconut Filling)을 바른 저먼 초컬릿 케이크로 유명한 제과점이 있다.(정확히는 제과점이 아니라 식료품가게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그런데 케이크의 이름에서 보듯이 German Chocolate Cake를 다음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많지는 않지만 독일 또는 독일식 케이크라는 말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케이크는 독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만들어진 곳도 독일이 아닌 미국으로 케이크의 이름을 굳이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 그대로 저먼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German Chocolate Cake의 저먼은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서 일을 하던 지미(Jimmy)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인이 미군들이 즐겨 먹던 케이크를 소개하면서 오키나와의 명물이 되었으며 지금은 지미(Jimmy′s)라는 이름의 식료품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다.

 

오키나와의 미군들이 즐겨 먹는다는 저먼 초컬릿 케이크는 미국에서 6월 11일을 기념일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독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1852년 사무엘 저먼(Samuel German)이란 영국계 미국인이 당시 근무하던 American Baker’s Chocolate Company에서 개발했던 Baker′s German′s Sweet Chocolate에서 유래한 것이 오늘날의 저먼 초컬릿 케이크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기념일로 지정할 정도로 즐겨 먹게 된 동기는 텍사스주의 댈러스에 살던 조지 클레이(George Clay)란 주부가 1957년 6월 3일 달라스 모닝 뉴스에 관련 레시피를 기고한 것을 당시 Baker′s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제너럴 푸드(General Foods)가 보고 그 레시피를 미국 각지의 신문에 소개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뒤 German′s Sweet Chocolate에서 소유격 S를 빼버리는 실수를 범한 표현이 사용되면서 우리가 독일 또는 독일식 케이크라고 혼돈할 수 있는 지금의 German Chocolate Cake이란 표현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저먼씨의 레시피를 이용하여 만든 케이크는 독일 케이크가 아니며 현재 베이커즈 초컬릿(Baker’s Chocolate) 브랜드를 소유한 크래프트 하인즈(The Kraft Heinz Company)에서는 사무엘 저먼(Samuel German)의 업적을 기려 새로운 초컬릿의 이름을 Baker’s German’s Sweet Chocolate으로 명명하였으며 이 제품은 아마존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세계최고의 주방용 칼,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세계최고의 주방용 칼,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낚시를 오래 하다 보면 잡은 물고기를 직접 손질하게 되고 실력이 늘면서는 회를 뜨기도 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칼로는 데바라고 하는 뼈를 자르는데 주로 사용하는 칼과 일명 사시미칼이라고 부르는 회칼이 있다.

일본의 회칼은 관동과 관서지방의 것이 서로 이름과 모양이 다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칼끝이 뾰족한 관서지방의 칼로 야나기바(柳刃)라고 부르며, 관동지방의 것은 칼끝이 네모난 것이 특징으로 타코히키(蛸引き)라고 부른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저렴한 칼을 사용하고 있지만 세계에는 한 자루에 1백만 원이 넘는 주방용 칼도 있어서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요리사들이 세계최고의 칼이라고 뽑는 미국의 밥 크레이머(Bob Kramer)가 만드는 크레이머 칼(KramerKnives)은 누구나 쉽게 구매할 수가 없고 사전등록을 통한 경매로만 구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밥 크레이머(Bob Kramer)와 독일의 유명한 나이프 제조업체인 쯔윌링(Zwilling JA Henckels)이 손을 잡고 만든 것이 바로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시리즈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에 수십만 원을 훌쩍 넘을 정도의 가격이어서 사볼 엄두는 전혀 나지 않는다^^

 

밥 크레이머(Bob Kramer)

 

요리사 출신의 밥 크레이머(Bob Kramer)와 손잡고 칼을 만드는 독일의 쯔윌링(Zwilling JA Henckels)은 졸링겐(Solingen)에 본사를 두고 있는 1731년에 설립된 기업으로서 회사의 이름은 창업자인 피터 헹켈스(Peter Henckels)와 그가 1731년 6월 13일에 등록한 로고인 쌍둥이를 뜻하는 쯔윌링(Zwilling)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시리즈가 만들어지는 곳은 미국도 아니고 독일도 아닌 일본의 기후현 세키시에 있는 쯔윌링(Zwilling)의 일본공장이라고 한다.

기후현 세키시는 가마쿠라 시대에 원조인 모토시게(元重)가 큐슈에서 건너와 칼을 만들면서부터 칼을 만들기에 이상적인 풍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수많은 도공(刀工)들이 모여들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그 숫자가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쯔윌링(Zwilling)의 일본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시리즈에도 밥 크레이머(Bob Kramer)가 만드는 칼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쉐브론 다마스커스 패턴이라고 하는 물결무늬가 있다.

이것은 101겹으로 층을 쌓으며 만든 스테인리스의 적층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며 칼의 손잡이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에서 개발한 마이카르타(Micarta)를 사용하여 만든다고 하는데 이 칼의 손잡이에 새겨진 일본문양과 칼에 각인되어 있는 Made in Japan이란 문구를 보니 샘이 나는 것은 숨기지를 못하겠다.

정정당당(正正堂堂)의 어원

정정당당(正正堂堂)의 어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열리는 제18회 아시안게임이 오는 8월 18일에 개막되고 그보다 먼저 광복절인 오늘 바레인과의 축구 예선전이 열리게 됩니다.

스포츠경기에 언제나 따라붙는 단어 중에는 “정정당당(正正堂堂)”이란 것이 있는데 이 말이 작금의 한국사회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방송매체의 탐사보도를 통해 대기업에 의해서 자행되는 중소기업의 기술탈취에 관한 얘기를 접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저는 우리나라의 대기업들도 펩시콜라의 일화를 보고 무엇인가 배우기를 바라곤 합니다.

2006년 코카콜라의 직원이었던 조야 윌리엄스(Joya Williams)가 펩시콜라에 금전을 제공하면 코카콜라의 제조법을 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의 경영진에게 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FBI에 신고를 함으로써 회사의 기밀을 팔아넘기려던 조야 윌리엄스(Joya Williams)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10년의 징역형을 받게 된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Dirk이란 이름으로 펩시콜라에 보낸 편지

 

코카콜라의 제조법이 보관된 금고 앞의 CEO 무타르 켄트(Muhtar Kent)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이런 제안을 받게 된다면 그들도 펩시콜라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의 생각도 여러분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공정(公正)과 정의(正義)를 발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지만 제18회 아시안게임의 개막을 앞두고 정정당당(正正堂堂)이란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봅니다.

태도나 수단이 공정하고 떳떳하다는 뜻을 가진 정정당당(正正堂堂)이란 단어는 손자병법 제7편 군쟁편에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손자병법의 제7편 군쟁편에는 “無邀正正之旗(무요정정지기), 勿擊堂堂之陣(물격당당지진), 此治變者也(차지변자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깃발이 잘 정렬된 군대를 맞아서는 싸우지 말 것이며(無邀正正之旗), 기세가 당당하게 전열을 갖춘 군대를 공격하지 말 것이니(勿擊堂堂之陣), 이렇게 함으로써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此治變者也).”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유래되어 정정당당(正正堂堂)은 정정지기당당지진(正正之氣堂堂之陣)의 준말이라고도 사전에서는 설명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정정당당(正正堂堂)은 다시 말하면 전쟁에 이기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른 뜻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의미를 살펴보면 “깃발이 잘 정렬되고 기세당당하게 전열을 갖춘 군대”는 바로 정의를 기치로 내걸고 싸우는 군대로써 “우리에게 정의가 있다.”라는 명분 아래 싸우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정의로운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여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기에 정정당당(正正堂堂)은 비겁하거나 부끄러운 온갖 수법을 동원하여 이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며 이 말을 한국의 재벌들과 파렴치한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다시 한 번 새겨들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펩시콜라는 어떻게 세계 6위의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나?

펩시콜라는 어떻게 세계 6위의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나?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끝나면서 퇴임하게 될 트럼프가 맞게 될 각종 민·형사 소송과 관련하여 워터게이트사건(Watergate Case)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임한 대통령이란 기록을 남긴 제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이 언론에 소환되고 있다.

오늘은 정치적인 이슈보다는 닉슨 대통령 덕분에 펩시콜라가 한때는 세계 제6위의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얘기를 해볼까 한다.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치열했던 시기였는데 양국은 긴장완화를 위해 문화를 교류하기로 하고 1958년에 미소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59년 6월에는 뉴욕에서 소련의 박람회가 개최되었으며 다음 달인 7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미국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에서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닉슨과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소련의 흐루쇼프가 벌인 논쟁은 세간의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두 사람의 논쟁은 녹화되어 미국과 소련에서 방송되었는데 박람회장에 지어진 모델하우스의 부엌에서 논쟁을 한 것에서 유래하여 부엌 논쟁(Kitchen Debate)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당시 흐루쇼프는 “닉슨의 손자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 것”이라고 주장했고, 닉슨은 이를 맞받아 “흐루쇼프의 손자는 자유체제에서 살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흐루쇼프(니키타 흐루쇼프: Nikita Khrushchev)의 아들인 세르게이 흐루쇼프가 소련의 붕괴로 199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996년에는 귀화를 했기 때문에 닉슨의 주장이 옳았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두 사람의 논쟁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 뒤에는 또 하나의 화젯거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오늘 얘기의 주제인 펩시콜라다.

모스크바에 지어졌던 미국의 박람회장에는 디즈니를 비롯하여 IBM 등 굴지의 기업들과 함께 펩시콜라도 부스를 설치하고 있었고 이때 펩시의 전시장을 총괄하던 인물인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닉슨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다.

 

좌측: 로버트 켄달 우측: 닉슨 대통령

그리고 닉슨과 흐루쇼프가 만나기로 되어있던 전날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닉슨을 만나 당일 흐루쇼프를 펩시콜라의 전시부스로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한다.

당시 펩시콜라 내부에서는 해외시장확대에 회의적이었으나 켄달은 펩시콜라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임을 확신하고 친구인 닉슨에게 흐루쇼프를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하였고 미국과 소련의 물로 만든 2종류의 펩시콜라를 준비해두었다.

당일 모스크바는 7월로 더운 날씨였으며 펩시의 부스를 찾은 흐루쇼프가 미국의 물과 소련의 물로 만든 2종류의 펩시콜라를 마시고 “소련 물로 만든 것이 더 맛있다.”고 발언하는 모습은 보도진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고 공산주의자인 흐루쇼프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콜라를 마시는 장면은 전 세계에 퍼져 펩시콜라의 광고효과는 그야말로 대박을 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71년이 되면서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펩시콜라의 CEO에 취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절친이자 그가 후원하던 닉슨은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고는 하지 못해도 닉슨과 켄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은 틀림없었는데 닉슨은 냉전 완화정책으로 소련과의 교역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고 켄달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발판으로 코카콜라를 압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닉슨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펩시는 당시 소련 최고지도자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의 협상 끝에 소련에서 콜라를 독점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

그런데 소련의 루블화는 외화로 환전할 수 없었으며 소련을 제외한 외국에서는 사용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은 미국의 달러로도 지불할 수 없다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짜낸 방법이 펩시콜라를 소련정부가 생산하고 있던 보드카인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와 물물교환 방식으로 거래하기로 하였으며 펩시는 당연히 미국 내에서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를 독점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1974년 노보로시스크에 최초로 음료를 병에 담는 공장인 Bottling Plant가 세워졌고 이곳에서는 미국에서 보낸 펩시콜라의 원액에 소련의 물과 탄산가스를 더하여 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제조되고 판매된 최초의 자본주의 소비재가 되었다.

 

하지만 펩시와 소련이 맺었던 계약이 완료되는 시점인 1989년은 소련의 정세가 극적으로 변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일환으로 소비재를 수입하여 소련경제와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한편 펩시는 소련에서의 사업을 확대하여 26개의 공장을 증설하고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는데 그 한 가지 방법에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피자헛을 소련에 진출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 루블화의 가치는 국제시장에서 현저하게 낮은 가치를 형성하고 있었고 물물교환하던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는 판매되는 펩시콜라의 양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에서는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 불매운동이 전개되어 매출은 급격히 하락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콜라사랑 열기는 식을 줄을 몰라서 펩시와의 거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펩시가 서방세계에 판매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를 소련으로서는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경제불안이 계속되던 소련으로서는 서방국가에서 판매될만한 소비재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단 한 가지 예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냉전시대의 막대한 군사비로 인해 군에서 과도하게 보유하고 있던 군사장비였다.

그리고 1990년, 마침내 소련은 17척의 디젤잠수함을 비롯하여 순양함, 구축함, 프리깃함 및 민간유조선을 펩시에 인도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당시 펩시가 소련과 체결한 계약의 내용은 소련에 피자헛 매장을 개설할 수 있는 허가와 함께 2000년까지 3억 달러의 펩시콜라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졸지에 펩시는 세계 6위의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조선을 제외한 배들은 사용하기에는 심각한 상태여서 펩시는 유조선은 임대하다가 나중에는 노르웨이에 팔고 잠수함과 20척의 군함은 모두 고철로 스웨덴의 조선소에 판매하게 된다.

 

다시 맺은 계약에 의해 모스크바에 2개의 피자헛 매장을 개설하였고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서 정치광고를 찍으면서 펩시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고 펩시와 구소련 간에 맺었던 계약은 너무 불공정하다는 소련의 판단에 따라 펩시의 독점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인플레와 민영화의 과정에 잽싸게 올라탄 코카콜라는 단돈 1센트에 공장을 인수하고 특별히 제작한 코카콜라를 러시아의 우주정거장에 보내는 등 활발한 마케팅에 나섰고 마침내 1996년에는 러시아에서 펩시를 추월하게 되었다.

 

언젠가 펩시의 이사회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안보담당보좌관이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를 만난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들보다 먼저 소련을 무장해제시켰어.(I’m dismantling the Soviet Union faster than you 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