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라인(deadline)의 유래가 된 섬터 수용소(Camp Sumter)

데드라인(deadline)의 유래가 된 섬터 수용소(Camp Sumter)

일반적으로 언론사의 기사 마감시한을 뜻하는 표현으로 사용되는 데드라인(deadline)의 유래를 설명한 글들을 보면 남북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에 그어져 있던 선(line)이라고 되어 있는데 정확하게는 선(line)이 아니라 목책(wooden fence)이라고 해야 맞다.

그리고 데드라인(deadline)이란 말이 생겨난 포로수용소는 미국 조지아주에 있는 앤더슨빌국립사적지(Andersonville National Historic Site) 내에 있는 섬터 기지(Camp Sumter)가 그 기원이라고 하는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남부군이 운영하던 포로수용소는 섬터 기지(Camp Sumter) 외에도 로톤 기지(Camp Lawton), 더글라스 기지(Camp Douglas), 플로렌스 기지(Camp Florence) 등 여러 곳이 있었고 모든 포로수용소에는 데드라인(deadline)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데드라인(deadline)이란 말이 섬터 기지(Camp Sumter)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는 것은 모든 포로수용소 중에서 섬터 수용소(Camp Sumter)의 규모가 가장 컸었기 때문이다.

1864년 2월에 세워져 1865년 4월까지 운영되었던 섬터 수용소(Camp Sumter)는 처음에는 2만 평의 규모였으나 증가하는 인원으로 인해 1864년 6월에 3만5천 평(490m×237m)의 규모로 확대되어 최대 32,000명을 수용하고 있었고 부족한 식량으로 인한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수용되었던 연인원 45,000명 중에서 1만 2913명이 사망하였다.

흔히 전쟁영화에 나오는 포로수용소와는 달리 남북전쟁 당시의 포로수용소는 넓은 부지에 울타리를 설치한 다음 그 안에 텐트를 치고 포로들을 수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는데 섬터 수용소(Camp Sumter)는 평지가 아니라 경사진 땅위에 만들어졌고 외곽에는 높이 4.6m의 울타리가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건장한 체격의 사람이라면 혼자서도 4.6m 정도의 울타리는 넘을 수가 있고 혼자서 넘지 못한다고 해도 여러 명이 힘을 합친다면 쉽게 넘을 수 있는 정도의 높이였기 때문에 탈출을 시도하는 포로들은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고 보초병들이 27m(90피트)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수용소의 외곽에 세워진 울타리에서 6m(20피트) 떨어진 안쪽에 낮은 목책을 설치하여 이것을 넘으면 탈출을 시도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사살한다는 의미로 데드라인(deadline)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뒤 포로들의 살해와 잔혹행위에 대한 혐의로 수용소장이던 헨리 위르츠(Henry Wirz)와 또 다른 한 명의 장교 제임스 던컨(James Duncan)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헨리 위르츠(Henry Wirz)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15년형을 선고받았던 제임스 던컨(James Duncan)은 1년 뒤 수감되었던 풀라스키 요새(Fort Pulaski)를 탈출하였다.

헨리 위르츠(Henry Wirz)

 

교수형에 처해지는 헨리 위르츠(Henry Wirz)

 

스위스계 미국인인 헨리 위르츠(Henry Wirz)의 교수형 판결은 정치적인 의도가 다분한 것이 사실이지만 어쨌든 13,000명에 달하는 인원이 사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면할 수가 없다.

그리고 굶주림과 질병으로 사망한 포로들은 그대로 섬터 수용소(Camp Sumter)의 땅에 매장되었는데 그곳이 바로 현재의 앤더슨빌 국립묘지(Andersonville National Cemetery)인 것이다.

 

포로들에게 데드라인(deadline)이 얼마나 공포의 존재였는가 하는 것은 바닥이 진흙이었던 섬터 수용소(Camp Sumter)에서 세수를 하던 로버츠(Roberts)란 셔먼(William Tecumseh Sherman) 부대 소속의 어린 병사가 미끄러져 얼굴이 데드라인(deadline) 밖으로 나가자 그대로 사살하였다는 것에서 잘 알 수가 있다.

인종차별이 불러온 미군의 폭동(Battle of Bamber Bridge)

인종차별이 불러온 미군의 폭동(Battle of Bamber Bridge)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미군 내에서도 인종차별이 심했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로 흑인조종사들로만 구성된 ‘터스키기 에어맨(Tuskegee Airmen)’은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영화 진주만에서 쿠바 구딩 주니어가 맡았던 ‘도리스 밀러(Doris Miller)’는 실존인물로서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했을 때 전함 웨스트버지니아 호의 취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었으며 기관총 사수가 전사하자 대신하여 총을 잡고 일본군 전투기 두 대를 격추하는 전공을 세워 해군 십자훈장(Navy Cross)을 받은 인물인데 도리스 밀러와 같이 흑인병사들은 전투병보다는 취사병이나 운전병 등 병참지원 업무에 배치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이렇게 억눌려 있던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은 뜻밖에도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에서 무력을 동반한 사건으로 터져 나오고야 말았는데 이 사건이 오늘의 주제인 ‘뱀버 브릿지 전투(Battle of Bamber Bridge)’라고 불리는 폭동사건이다.

이 사건을 미국은 전투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부르고 있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폭동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

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면서 많은 흑인병사들도 영국땅을 밟게 되었는데 그들은 미국에서 당시 시행되고 있던 짐 크로법(Jim Crow Law)에 의해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차별을 받다가 그런 법이 없는 영국에서 인종차별을 받지 않게 되자 그야말로 신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흑인병사들은 술집, 영화관, 댄스홀 등 어디를 가더라도 환영을 받았고 운송수단도 사용에 제한이 없이 영국의 백인남녀들과 함께 이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던 미군 고위층의 우려는 커지고 있었다.

미군 고위층의 시각은 영국에서 평등을 경험한 흑인병사들이 귀국하게 되면 급진화 되어 사회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고, 이에 따라 영국의 군과 민간에 흑인들을 분리하는 정책을 실시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흑인을 분리해줄 것을 요청한 술집을 나가보면 실제로는 흑인병사들을 환영한다는 간판을 내건 곳이 있을 정도로 미군 당국의 생각과는 다르게 영국인들은 행동을 했고 백인보다 예의바르고 정중하다는 칭찬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흑인병사들을 환영하고 평등하게 대하는 영국의 이러한 사회분위기와는 달리 미군 헌병대에서는 흑인병사들을 영국의 백인들과 분리하려는 시도를 계속하였고 결국 이것은 1943년 6월 24일의 불상사를 가져오게 된다.

그런데 사건이 일어난 1943년 6월 24일을 우리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에서 미군의 폭동사건인 ‘뱀버 브릿지 전투(Battle of Bamber Bridge)’가 일어나기 며칠 전에 미국에서는 디트로이트 폭동이라는 유혈사태가 일어났다.

1943년 6월 20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진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항거한 폭동은 급기야 주 방위군의 투입으로 이어져 모두 34명의 흑인이 경찰과 방위군에 의해 사망하게 되는데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이 사건을 이용하여 흑인병사들이 미국을 위해 싸우지 말 것을 위무하는 전단을 배포하기도 하였다.

본토에서의 폭동으로 같은 흑인들이 사망한 사실은 전쟁에 참전한 흑인병사들에게도 알려졌고 이 때문에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당국은 더욱 더 백인과 흑인병사들을 분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사건이 일어난 1943년 6월 24일 밤, 1511 병참부대 소속의 흑인병사들 몇 명이 영국군인과 시민들과 어울려 뱀버 브릿지에 있는 술집(Ye Old Hob Inn)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이곳을 지나던 미군 헌병이 복장불량을 이유로 한 명의 흑인병사를 체포하려고 하는 일이 일어났다.

사건이 일어났던 Ye Old Hob Inn

 

그러자 동석하고 있던 영국인들이 항의하고 나서면서 고성과 주먹다짐이 일어났고 숫자에서 밀린 헌병은 물러났지만 병력을 보충하고 무장을 강화하여 다시 술집으로 오게 되는데 그 와중에 총기가 발사되어 흑인병사가 목에 부상을 당하게 되자 병원으로 호송할 것을 흑인병사들이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병장교는 이를 거부하고 부상병을 영내로 이동시키게 된다.

부상당한 흑인병사가 기지로 돌아오자 헌병이 흑인병사를 죽이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포감이 휩쓸었고 마침내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흑인병사들 중 일부는 무장을 하고 헌병들과 교전을 벌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윌리엄 크로스랜드(William Crossland)란 흑인 일병이 사망하고 7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모두 32명의 흑인병사들이 유죄판결을 받고 적게는 3개월에서부터 많게는 15년이라는 징역형을 언도 받았다. 그러나 영국군과 시민들의 노력으로 대부분 형량이 감소되어 1년이 지난 뒤에는 모두 자대로 복귀하여 다시 복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1948년에 미국은 군대 내에서 인종차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률을 제정하게 되었고 1964년에는 민권법이 제정되어 공식적으로는 인종차별이 사라진 것으로 되었지만 여전히 미국사회는 인종차별이 벌어지고 있음은 세상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2차 대전에 참전한 흑인병사들이 헌병의 인종차별에 대항하여 벌였던 ‘뱀버 브릿지 전투(Battle of Bamber Bridge)’로 불리는 이 사건은 당시 미국의 언론 어느 곳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뒷이야기

영화 쉰들러 리스트의 뒷이야기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과연 제92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할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전 국민의 관심이 뜨거운데, 우리사회의 이면에는 소위 지도층이라고 하는 사람들의 비뚤어진 자녀사랑이 또 다른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연 그 사람들의 자녀들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자신의 부모에 대하여 어떻게들 생각하고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면 떠오르는 영화가 있는데 1994년도 제66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비롯하여 7개 부문에서 오스카상을 수상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가 바로 그것이다.

다들 잘 알고 있는 이 영화에서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유태인수용소의 소장이었던 아몬 괴트(Amon Leopold Göth)에 대한 것이다.

이 수용소의 이름은 폴란드어로 크라코프 푸아쇼프(Kraków-Płaszów)로 아몬 괴트는 이 강제수용소의 세 번째 소장이었는데, 그가 부임하기 이전에는 수감된 유태인들을 죽이는 일이 없었으나 그가 부임하고부터는 “적어도 한 사람의 수용자를 쏘지 않고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존자들의 증언이 있을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에서 배우 랄프 파인스가 맡았던 아몬 괴트는 그가 살던 빌라의 발코니에서 유태인 수용자들을 총으로 사살하는데 아래의 사진이 실제 발코니의 모습이며 수용소의 지형과 배치 등으로 인해 실제로는 발코니에서 수용자들을 사살할 수는 없었고, 단지 공포심을 주고자 함이 목적이었다고 한다.

1946년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한 아몬 괴트(Amon Leopold Göth)가 2015년에 다시 한 번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란 여성이 쓴 책, “할아버지는 총으로 나를 쏘았을 것이다.(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 때문이었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아몬 괴트의 손녀라고 소개하는 글들이 보이지만 정확하게는 외손녀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일생을 보노라면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2008년 어느 여름 날, 독일 함부르크에 있는 도서관에서 “내 아버지를 사랑해야 하나요?(Ich muß doch meinen Vater lieben, oder?)”라는 제목의 책을 읽게 되었는데 책의 표지에는 한 여성의 사진과 함께 “쉰들러 리스트 수용소장의 딸, 모니카 괴트의 인생이야기”라고 적혀 있었다.

 

이것을 보고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크게 놀랐던 이유는 표지에 있는 사진 속의 여성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라는 점과, 아몬 괴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몬 괴트는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란 여성과 동거를 하면서 쉰들러 리스트에 나오는 빌라에서 함께 생활을 하였는데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1945년 1월, 폴란드의 카도비체로부터 진격해오는 붉은군대로부터 도망쳐 1월 9일 비엔나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비엔나에는 안나 괴트(Anna Göth)란 이름을 가진 아몬 괴트의 두 번째 부인이 두 명의 자녀와 함께 살고 있었고,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안나 괴트를 만났다고 하는데 이후 두 사람의 불륜사실을 알게 된 안나 괴트(Anna Göth)는 아몬 괴트와 이혼을 하게 된다.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영화배우이자 미용사로 오스카 쉰들러가 주최한 만찬에서 아몬 괴트를 처음 만나 관계를 맺었고 그녀가 폴란드를 탈출할 때에는 이미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의 어머니가 되는 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를 잉태하고 있었으며 1945년 11월에 바이에른 주의 바트 톨즈에서 그녀를 출산했다.

그 후 아몬 괴트가 두 번째 부인과 이혼하고 1945년 5월에 미군에 의해 체포되어 1946년 9월 13일 몬텔루피치 형무소(Montelupich Prison)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다음 유골은 화장되어 폴란드의 비스와강(The Vistula)에 뿌려지자 루스 칼더(Ruth Irene Kalder)는 1948년, 아몬 괴트가 죽지 않았다면 이혼 후 그녀와 결혼을 하였을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아몬 괴트의 아버지가 두 사람의 약혼사실을 증언해줌으로써 이름을 루스 괴트(Ruth Irene Göth)로 바꿀 수 있었고 평생 그녀의 침실에 아몬 괴트의 그림을 걸어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몬 괴트와 루스 괴트의 사랑이 얼마나 깊었던지 간에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는 행복한 유아생활을 보낼 수는 없었고,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누군가가 칼로 어린 모니카 헤르트비히를 공격하여 심한 상처를 입게 되는데 끝내 범인은 잡히지 않았고 아몬 괴트에 대한 복수와 관련이 있다는 설이 퍼지기도 했다.

아몬 괴트의 딸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는 성장하면서도 그의 아비지에 대한 진실을 알지는 못하였고 11살이 되어서야 할머니로부터 그녀의 아버지가 유대인들을 학살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머니와 갈등의 골이 깊어지게 된다.

성장한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는 1970년대 초반에 첫 번째 결혼을 하였는데 무슨 놈의 남편이란 시키가 아내를 학대하는 것도 모자라 매춘까지 강요하는 바람에 결국 이혼에 이르게 되었지만 불행하게도 이 과정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태어나게 되었다.

그리고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란 이름은 그녀의 두 번째 결혼으로 얻은 것이었으며 이전까지는 모니카 괴트(Monika Göth)가 그녀의 이름이었다.

모니카 괴트(Monika Göth)가 24살 때 만났던 나이지리아 출신의 남편이 바로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의 아버지였는데 이혼하게 되면서 딸을 부양할 수 없게 되자 제니퍼 티게의 나이 7살 때, 그녀를 고아원에 맡기게 된다.

루스 괴트(Ruth Irene Göth)는 나치독일에 의해 학살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고 연구하는 기관인 이스라엘의 야드바셈에서 조사한 바에 의하면 1943년 2월부터 1944년 9월까지 아몬 괴트의 통치하에서 푸아쇼프(Płaszów) 수용소에서 숨진 유대인만 8천여 명에 이른다는 조사를 부인하고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 큰 영향을 끼쳤던 다큐멘터리 작가인 남아공의 존 블레어(Jon Blair)와의 인터뷰에서 “남편인 아몬 괴트는 다른 SS대원들과 같았으며 물론 몇 사람의 유대인을 죽이기는 했겠지만 살인자는 아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처럼 아몬 괴트의 진면목을 밝히기 꺼려했던 루스 괴트(Ruth Irene Göth)의 손에서 자란 딸, 모니카 괴트(Monika Göth)와 손녀인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아몬 괴트에 대해서 알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으나 운명은 제니퍼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책을 읽게 만듦으로써 진실을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었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가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책을 읽고 충격을 받은 다음날 2006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영화 인헤리턴스(Inheritance)가 TV를 통해 방송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녀의 어머니인 모니카 헤르트비히(Monika Hertwig)가 아버지였던 아몬 괴트의 행적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나치에 의해 어린아이들이 당한 고통에 대한 죄책감을 다루었던 이 영화를 남편과 함께 시청한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심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고 한다.

 

폭력과 학대를 일삼던 남편으로 인해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모니카 헤르트비히는 일주일에 6일을 일하면서 딸을 제대로 보살핀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따라 제니퍼 티게를 가톨릭에서 운영하던 고아원에 맡겼고 여기서 3년을 보낸 제니퍼 티게는 이후 다른 가정으로 입양되어 성장하였는데 이복동생으로부터 연락이 오기까지 21년 동안이나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고 한다.

이랬던 그녀가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책을 발견하고, 또 그 속에서 나치독일 중에서도 가장 악명이 높은 살인자인 아몬 괴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받았을 충격은 얼마나 컸을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운명은 이미 그녀를 아몬 괴트와 만나게 하려고 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책을 발견하기 이전에 파리의 소르본느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친구와 함께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일이 있었는데 운명은 알람을 놓친 그녀가 독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게 만들면서 제니퍼 티게는 아예 텔아비브에 체류하면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고 중동과 아프리카에 관한 연구로 학위를 취득함은 물론 히브리어도 배우게 된다.

그랬던 그녀의 조상이 유대인들을 학살한 나치 괴물이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지금까지 친구로 지내온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자손들이 받을 충격이 얼마나 클지 등 수많은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스쳐지나갔겠지만 제니퍼 티게(Jennifer Teege)는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먹으면서 외할아버지인 아몬 괴트의 행적을 쫓아가는 길에 나서게 된다.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도 텔아비브에서 보았다는 제니퍼 티게는 당시로서는 가학적인 수용소장이 그녀의 외할아버지인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총으로 나를 쏘았을 것이다.(My Grandfather would have shot me.)”란 책을 출간한 이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사살)명령을 내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사람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었습니다.”

절묘하게 오버랩 되는 영화 기생충과 소위 지도층 자녀들의 특혜를 생각하면 아빠찬스니 엄마찬스니 하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자식들은 그들의 부모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정말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생각의 끝이 우울해서 싫다.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위쳐(The witcher)는 무슨 뜻일까?

넷플릭스의 인기 드라마 위쳐(The witcher)는 무슨 뜻일까?

 

폴란드 작가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가 쓴 판타지 소설 시리즈인 위쳐는 비디오 게임에 이어 넷플릭스에서 만든 드라마가 시즌 2의 공개를 앞두고 있다.

2011년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당시 폴란드의 총리였던 도날드 투스크(Donald Tusk)가 ‘더 위쳐 2: 왕들의 암살자 컬렉터즈 에디션(The Witcher 2: Assassins of Kings-Collector’s Edition)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런데 위쳐(witcher)란 단어는 사전에도 나오지 않고 단지 마녀라는 뜻을 가진 위치(witch)로 유추해보는 것에서 그치는데 오늘은 위쳐(witcher)의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위쳐의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작가인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가 붙인 폴란드어 제목 ‘비에츠민(Wiedźmin)’에서부터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제이 사프콥스키(Andrzej Sapkowski)

 

원제인 비에츠민(Wiedźmin)은 존재하는 단어가 아니라 작가가 새롭게 만들어낸 신조어(新造語)로 어원은 마녀를 뜻하는 비에츠마(Wiedźma)이다.

그러나 남성명사인 비에츠마(Wiedźma)를 사용하지 않고 Wiedźma+in=Wiedźmin이란 신조어를 제목으로 사용한 것은 작가의 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볼 수가 있다.

기독교 이전의 슬라브 민족들 사이에서는 약초와 자연에 대한 지식이 많은 여성이란 좋은 뜻으로 사용되었던 비에츠마(Wiedźma)였지만 기독교의 확장과 함께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작가는 이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닌 주인공이 아닌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새롭게 비에츠민(Wiedźmin)이란 단어를 만들어 붙였던 것은 아닐까?

아무튼 결론은 위쳐(witcher)는 원제(原題)가 마녀를 뜻하는 폴란드어 비에츠마(Wiedźma)에서 a를 빼고 in을 붙여 만든 비에츠민(Wiedźmin)이 신조어(新造語)인 것처럼 마녀를 뜻하는 영어 위치(witch)에 접미사 er을 붙인 신조어(新造語)란 것으로 넷플릭스의 미드 위쳐의 뜻은 마법사 검객 정도로 번역하면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제2차 이프르 전투와 역사의 아이러니

제2차 이프르 전투와 역사의 아이러니

사진은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모습

벨기에의 서플랑드르 주의 예페르(Ieper)는 흔히 프랑스어인 이프르(Ypres)로 불리는데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이곳에서는 5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두 번째 전투에서 독일군이 독가스를 사용하여 역사상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 벌어진 곳이라는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이 염소가스를 사용하여 연합군을 공격한 것이 최초의 독가스 공격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조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계최초의 염소가스 공격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이미 1914년 8월에 프랑스군이 독일군을 공격할 때 최루가스를 사용한 것이 기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2차 이프르 전투도 세부적으로 들여다보면 몇 개의 전투로 구분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연합군의 피해가 가장 컸던 것은 대부분 프랑스군과 알제리군 및 모로코군이 피해를 당한 ‘그라펜스타펠 능선 전투(Battle of Gravenstafel Ridge)’와 캐나다군이 큰 피해를 입었던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를 들 수 있다.

영국의 공식자료에 의하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처음으로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이 있었던 4월 22일에만 약 18,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에서 캐나다군은 총 5,975명의 사상자를 낳았으며 이 중에서 약 1천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와 같이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수많은 연합군들이 독가스로 사상을 당하자 1915년 9월 25일 영국군은 벨기에의 루스(Loos)에서 벌어진 전투(Battle of Loos)에서 독일군에게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가스로 인한 사상자의 숫자는 연합군과 독일군을 합하여 모두 8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자를 낸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의 염소가스 사용을 독일군이 처음부터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1920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하였던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는 전쟁이 일어나자 독일제국의 군사행동에 찬성한다는 ‘93인의 성명서(Manifesto of the Ninety-Three: Manifest der 93)’에 이름을 올렸고, 참호전투에서 연합군을 참호 밖으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최루가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적극적인 제안을 독일군에게 하였다.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의 제안은 즉시 현장실험을 거치게 되는데 이 실험을 관찰한 끝에 최루가스 대신에 염소가스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바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는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 중 하나이다.

 

프리츠 하버(Fritz Haber)

 

‘발터 헤르만 네른스트(Walther Hermann Nernst)’에 앞서 1918년에 노벨화학상을 수상했던 ‘프리츠 하버(Fritz Haber)’ 역시도 독일의 과학자, 예술가, 철학자들이 독일의 군사행동을 찬성한다고 하는 ‘93인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염소가스를 비롯한 여러 가지 독가스를 개발 또는 합성했던 일로 인해 ‘화학무기의 아버지’라고도 불리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독일계 유대인이었고 이런 이유 때문에 독일군에 공한한 바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1934년 나치에 의해서 독일에서 추방을 당하게 된다.

‘93인의 성명서’에 이름을 올린 다른 어떤 사람보다도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인물로 전시내각에서 화학부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러나 독일군에게는 자랑스러운 존재였는지는 몰라도 역시 같은 화학자였던 그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는 남편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고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

 

독일군의 철저한 지지자로 독가스 개발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남편에 대해 과학이념의 왜곡이자 야만적이라고 반대하며 비난까지 했던 그녀는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주도로 제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염소가스가 사용되고 이로 인해 수많은 목숨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이 벨기에로부터 돌아온 직후인 1915년 5월 2일, 남편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권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물론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의 자살의 동기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으나 그녀의 행적으로 미루어볼 때 ‘프리츠 하버(Fritz Haber)’의 행동이 원인을 제공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아내 ‘클라라 임머바르(Clara Immerwahr)’가 자살을 한 다음날에도 ‘프리츠 하버(Fritz Haber)’는 러시아에 대한 독가스 공격을 감행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의 아내가 자신의 권총으로 자살한 것에 이어서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에서 추방당한 그와는 달리 나치에 의해 집단수용소에 수감되어야만 했던 그의 친척들은 그가 개발한 치클론 B(Zyklon B)라는 독가스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는 불행을 겪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된다.

한편 5,975명의 사상자를 내었던 ‘세인트 줄리안 전투(Battle of St. Julien)’에 참전한 캐나다군(1st Canadian Infantry Division)은 이전의 식민지부대가 유럽에서 처음으로 유럽열강을 이긴 전투로 기록되고 있는데 이런 사실과 숨져간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인트 줄리안 기념관(Saint Julien Memorial)’에는 11미터(36피트)의 기념비가 건립되었고 그 꼭대기에는 캐나다군 병사의 흉상이 장식되어 있다.

항복을 뜻하는 백기(白旗)의 유래와 역사

항복을 뜻하는 백기(白旗)의 유래와 역사

이미지 출처: USS Pavlic

전장(戰場)에서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白旗)의 유래와 역사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하자.

백기가 항복의 의미로 최초로 사용되었다는 역사적 기록은 기원전 218년부터 201년까지 벌어졌던 제2차 포에니 전쟁 중, 카르타고를 침공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흰색 양모와 올리브 가지를 내건 적함을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배에 타고 있던 카르타고 병사 10여명을 죽이지 않고 포로로 하였다는 것이 로마의 역사학자 타키투스(AD 56년~AD117년)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타키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69년 로마 내전 당시 일어났던 제2차 베드리아쿰 전투(Second Battle of Bedriacum)에서도 항복한 장병들이 백기를 내걸었다고도 한다.

따라서 로마 제국 시절부터 백기가 항복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중세에 와서 서유럽의 나라들에서는 백기가 교전의사가 없음을 나타내는 의미로 널리 사용되어 포로의 모자에 흰색의 종이나 천을 붙이기도 하였다.

그 후 포르투갈의 역사학자 가스파르 코레이아(aspar Correia)의 기록에 따르면 바스쿠 다 가마(Vasco da Gama)가 인도의 캘리컷(현재의 지명은 코지코드: Kozhikode)에 도착했을 때 영주였던 자모린(Zamorin)이 사람을 보내어 평화회담 개최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사신이 흰색 천을 두른 지팡이를 들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인도인들이 이런 백기를 들게 된 데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잔인하고 폭력적인 면이 동기가 되었지만 그것은 오늘의 주제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이쯤에서 멈추도록 하자.

한편 1625년에는 ‘자연법의 아버지’ 또는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는 네덜란드의 법학자 휴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가 그의 저서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On the Law of War and Peace)’에서 백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백기를 드는 것은 회담의 개최를 요구하는 암묵적인 표시로써 말로 표시된 것과 동등한 의무를 지닌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말하는 백기는 무조건항복이라는 의미와는 거리가 있는 것으로 전투의사가 없는 일방이 상대방과 회담을 하기 위해 백기를 들었다는 것은 회담이 결렬되면 다시 전투에 돌입할 수도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항복이 아니라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패배한 측의 명예를 지키려고 했던 것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랜 전쟁의 역사를 지닌 서유럽에서는 백기는 항복을 의미하는 것으로 널리 인식되어 있었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프랑스 해군은 전통적인 백합문양인 플뢰르 드 리스(fleur-de-lis) 외에도 백기를 깃발로 사용했다.

이것은 그야말로 혼란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었는데 아래의 그림은 1779년 12월 18일에 있었던 영국과 프랑스 간의 마르티니크 전투(Battle of Martinique)를 묘사한 것으로 백기를 달고 있는 프랑스의 전함은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프랑스 해군의 상징으로 백기를 달고 있다.

 

그리고 아래의 그림은 미국 2달러 지폐의 도안으로 유명한 화가인 존 트럼불(John Trumbull)이 그린 것으로 미국독립전쟁을 사실상 끝냈던 요크타운 전투에서 벤저민 링컨(Benjamin Lincoln) 장군이 이끄는 미군과 미국을 지원하였던 프랑스군에 패한 영국군의 찰스 콘월리스(Charles Cornwallis) 장군이 이끌던 영국군이 항복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항복하는 장면이라고 하니 대부분은 왼쪽에서 백기를 들고 있는 군대가 영국군이라 생각하겠지만 왼쪽에 있는 군대는 프랑스군으로 백기는 그들의 상징이고, 중앙에서 말을 타고 있는 벤저민 링컨(Benjamin Lincoln) 장군의 뒤를 따라 걸어오고 있는 것이 항복한 영국군들이다.

이런 역사를 지닌 백기는 1899년 네덜랄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국제적인 규칙으로 명문화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육전의 법 및 관습에 관한 협약(헤이그 제2협약)’이다.

이 협약(Convention with Respect to the Laws and Customs of War on Land (HagueII)의 32조는 ‘An individual is considered a parlementaire who is authorized by one of the belligerents to enter into communication with the other, and who carries a white flag. He has a right to inviolability, as well as the trumpeter, bugler, or drummer, the flag-bearer, and the interpreter who may accompany him.’이라 규정하고 있다.

이를 우리나라의 법전에서는 ‘교전자 일방의 허가를 받아 타방과 교섭하기 위하여 백기를 들고 오는 자는 군사로 인정된다. 군사와 그를 따르는 나팔수, 고수, 기수 및 통역은 불가침권을 가진다.’고 번역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이 협약의 제3장을 군사(軍使)로 표현하고 있으며 영문판에서는 휴전 깃발(On Flags of Truce)에 관한 것이라 되어있는데 이것은 백기를 거는 것은 엄밀하게는 항복의 의미가 아니라 협상을 요구한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규정을 악용하여 백기를 들고 적을 방심시킨 다음 기습하는 등의 전법을 사용할 경우에는 전시국제법 위반으로 처벌대상이 된다.

그러나 지휘관의 의사에 따라 백기를 걸더라도 일부 부하병력이 이에 따르지 않고 저항하는 때에는 교전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해군의 경우에는 적함이 백기를 게양하더라도 포격을 중지하거나 포구를 아래로 내려 전투의지가 없음을 명확히 하기 전까지는 공격을 계속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백기를 드는 쪽은 전체의 일치된 의견으로 항복의사를 통일할 필요가 있지만, 상대방이 항복을 설득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육군도 마찬가지다.

이상으로 전쟁에서 항복의 의사표시로 사용되는 백기(白旗)의 역사와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사족으로 몇 마디만 덧붙이고 글을 마칠까 한다.

일본 외무성은 지난 19일 독도영유권을 주장하는 2020년 외교청서를 각의에 보고함으로써 그들의 망동은 변함이 없음을 보여주었는데 태평양전쟁의 패전으로 백기를 들었던 일본은 그들의 역사를 잊어버리는 특기를 지닌 모양이다.

그렇다면 다시 보여주마. 그날의 기억들을~

 

※ 연합뉴스의 사진을 번역하면 아래와 같으며 일본의 입장에서 쓴 문서이므로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라고 번역하였다.

“한일 간에는 다케시마 영유권을 둘러싼 문제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봐도, 국제법상으로도 명백한 일본 고유의 영토이다. 한국은 경비대를 상주시키는 등 국제법상 아무런 근거도 없이 다케시마를 불법 점거하고 있다.”

감자 때문에 실패한 나치독일의 V2 미사일

감자 때문에 실패한 나치독일의 V2 미사일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나치독일의 탄도미사일 연구 프로그램으로 탄생한 아그레가트(Aggregat) 시리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우리가 흔히 V2 미사일이라 부르는 A4 미사일이다.

V2 미사일의 V는 독일어 베르겔퉁스바펀(Vergeltungs waffen)의 앞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보복(vergeltungs)무기(waffen)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집합체라는 뜻의 아그레가트(Aggregat)의 머리글자를 따서 이름 붙였던 A4 미사일이 보복무기 2라고 불리게 된 것은, 개발되던 당시 나치독일에게 불리했던 전세가 이 미사일의 개발과 함께 역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치의 선전장관이었던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가 명명했기 때문이었다.

 

나치독일의 탄도미사일 개발의 주역이었던 베르너 폰 브라운은 5개의 독일육군 무기실험장의 하나인 페네뮨데(Peenemünde) 실험장에서 미사일을 개발하였는데 “이곳은 너와 네 동료들에게 가장 완벽한 장소”라고 그의 어머니가 권했던 장소라고 한다.

그러나 페네뮨데(Peenemünde) 실험장은 관련 정보를 입수한 폴란드 저항군의 제보에 따라 1943년 8월 17일과 8월 18일 이틀 동안 600여기의 연합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고 만다.

연합군의 폭격은 가능한 많은 연구원들을 죽이기 위해 연구시설이 아닌 주거용 건물을 표적으로 삼았고 연합군의 공격으로 노동자 500여명을 포함하여 모두 700여명이 사망하자 V2의 개발은 노르트하우젠(Nordhausen) 인근의 지하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페네뮨데(Peenemünde) 박물관에 전시된 V2 모형

 

1944년 9월 7일 독일육군의 포병 제444중대는 파리를 향해, 9월 8일에는 런던을 향해 V2 로켓을 발사했는데 네덜란드 헤이그 인근의 발사기지에서 쏘아 올린 V2 로켓은 런던까지의 320㎞ 거리를 5분간 비행하여 9월 8일 오후 6시 43분 치즈윅(Chiswick)에 떨어져 13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킨다.

그러나 V2 미사일의 명중률은 극도로 저조하여 런던 시내에만 떨어지기만 해도 대박이라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V2 미사일은 심리적으로 런던시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연합군이 V2 미사일을 공격으로부터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서는 발사 전에 파괴해야만 했지만 V2는 연구를 거듭한 끝에 이동식 발사를 할 수 있었으므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연합군으로서도 발사 전에 포착하여 파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위협적이었던 V2 미사일은 연합군의 공격이 아닌 우리가 먹는 감자 때문에 나치독일이 더 이상 운용할 수 없는 웃픈 상황에 놓이게 된다.

직경 1.65m, 길이 14m의 V2 로켓의 기체 절반은 연료탱크가 차지하고 있었는데 사용하는 연료의 75%은 에탄올이었으며 이것은 감자를 증류하여 생산하고 있었다.

 

바이오매스 에너지의 연구가 활발한 최근의 자료에 의하면 1리터의 에탄올을 만들기 위해서는 12㎏~15㎏의 감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따라서 5,200리터의 용량을 가진 V2 미사일의 연료탱크는 75%인 3,640리터의 에탄올을 채워야 했고 이것을 생산하려면 현대의 기술로도 40톤 이상에 이르는 양의 감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독일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채소인 감자는 1인당 소비량 2위의 토마토가 10㎏인 것에 비해 그보다 6.5배가 많은 1인당 65㎏을 해마다 소비하기 때문에 먹을 것도 없는데 어떻게 미사일 연료를 생산할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지금보다 기술이 떨어졌을 당시에는 40톤보다 훨씬 많은 감자가 필요했을 것이고 1944년 이후에는 동부전선으로부터 소련군이 진군해오면서 동유럽에서의 감자 수확량이 감소하였기 때문에 V2 미사일은 쏘고 싶어도 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었다.

굴(Oyster) 껍질에 찢겨 숨진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

굴(Oyster) 껍질에 찢겨 숨진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

굴이 제철을 맞았다.

얼마 전 포스팅했던 “헤밍웨이의 유작(遺作) 파리는 날마다 축제(원제: A Moveable Feast)”에도 굴과 관련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문을 잠깐 인용하면 아래와 같다.

약한 금속 맛과 함께 바다 냄새가 물씬 풍기는 생굴을 먹으면서 금속 맛이 차가운 백포도주에 씻겨 나가고, 혀끝에 남는 바다 향기와 물기를 많이 머금은 굴의 질감이 주는 여운을 즐기는 동안, 그리고 굴 껍데기에 담긴 신선한 즙을 마시고 나서 상쾌한 백포도주로 입을 헹구는 동안, 나는 공허감을 털어 버리고 다시 기분이 좋아져서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As I ate the oysters with their strong taste of the sea and their faint metallic taste that the cold white wine washed away, leaving only the sea taste and the succulent texture, and as I drank their cold liquid from each shell and washed it down with the crisp taste of the wine, I lost the empty feeling and began to be happy and to make plans.”

헤밍웨이가 굴에서 느꼈다는 금속 맛은 철의 맛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바다의 우유라고 하는 굴은 구리와 아연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서 혀끝을 살짝 찌르는 쓴맛과 신맛은 구리 맛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오늘은 제철을 맞은 굴(Oyster) 껍질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하며 죽어야 했던(?) 그리스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에 관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히파티아(Hypatia)가 활동했던 시기는 동로마 시대였고, 역사상 가장 먼저 굴 양식을 했던 것도 로마제국이기 때문에 그녀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굴 양식에 대한 역사를 간략하게 살펴보고 넘어가도록 하자.

굴의 양식이 시작된 것은 동양보다는 서양이 앞선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본만큼이나 역사를 왜곡하기를 좋아하는 중국도 2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들도 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문헌은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에서 굴의 양식에 관한 내용이 처음으로 나오는 것은 북송시대의 시인인 매요신(梅堯臣)이 쓴 오언절구인 식호(食蠔)이다.

식호(食蠔)란 제목은 글자 그대로 굴을 먹는다는 것인데 이 시는 매요신(梅堯臣)이 근무지를 옮기기 전에 휴가를 받아 친구와 여행 중에 들른 광동성 주강 하구의 어촌에서 난생처음으로 생굴을 먹고 그 맛에 놀란 것을 적고 있으며 그 중에는 굴 양식에 대한 정경을 묘사한 내용도 있다.

※ 성유(聖兪)는 매요신(梅堯臣)의 자다.

이번에는 서양의 역사를 둘러보자. 2017년 영국의 일간 텔레그래프는 기원전 55년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을 침공한 고고학적 증거를 발견함으로써 사실로 확인되었다는 보도를 하였다. 그런데 줄리어스 시저가 영국을 침략한 이유는 템즈강 유역에서 나는 굴을 원해서였다.

로마제국이 세력을 넓힐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침략은 하더라도 약탈은 하지 못하게 명령함으로써 침략을 당한 나라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기 때문인 것도 있는데 약탈은 하지 않고 세금을 징수하는 방식을 사용하는 바람에 침략에 동원된 군인들은 식량을 알아서 조달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이 진군하는 곳이 육상이면 밀을,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는 굴을 양식하면서 진군을 해나갔다.

그러나 굴 양식에 어떤 특별한 비책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갯벌에 굴을 뿌려 번식시키는 것이 전부였다. 아주 단순한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의 굴 양식이다.

그러면 이제 오늘의 주인공인 그리스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Hypatia)의 얘기를 해보기로 하자.

혹시 2011년에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던 영화 아고라를 보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가 바로 히파티아(Hypatia)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그러나 히파티아(Hypatia)의 죽음에 관해서는 정확하게 남아있는 기록이 없다 보니 저마다의 상상력이 동원된 허구가 가미되어 있다.

영화에서는 폭도들이 히파티아를 붙잡아 그녀의 옷을 벗긴 다음, 칼로 피부를 도려내려 하는데 그때 포스터의 왼쪽에 있는 다보스가 나서서 더러운 이교도의 피를 묻혀서는 안 된다고 설득하자 폭도들은 돌을 던져 그녀를 죽이기로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돌을 구하러 폭도들이 나간 사이 다보스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히파티아를 질식시켜 숨지게 하고는 폭도들에게는 그녀가 기절했다고 하면서 돌아서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히파티아의 시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폭도들의 모습이 나오고 이어서 그녀의 시신은 거리를 끌려다니다 불살라졌다는 자막과 함께 영화는 끝난다.

이미지 출처: 다음 영화

 

영화에서 그려지는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모습은 대부분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이 쓴 책, 로마 제국 쇠망사(The History of the Decline and Fall of the Roman Empire)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 제국 쇠망사가 끼친 영향이 너무도 크기에 국내 포털에도 “옷이 벗겨진 히파티아의 피부는 굴 껍데기로 찢겨나갔고, 피투성이가 된 그녀의 몸은 불속으로 던져졌다.”고 적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

 

히파티아의 죽음에 대한 것은 4세기 후반 콘스탄티노플의 소크라테스라고도 부르는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가 쓴 책 ‘히파티아 살인(The Murder of Hypatia)’에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영문판에서는 “그녀의 옷을 모두 벗기고 타일을 이용하여 살해했다(Where they completely stripped her, and then murdered her with tiles.)”는 부분이 있다.

여기서 사용된 타일(tiles)이 굴껍데기를 말하는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상상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으며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는데 에드워드 기번의 기록이 모두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인 신부 로버트 바론(Robert Barron)을 들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은 무슨 근거로 히파티아가 굴껍질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통을 당했다고 주장한 것이었을까?

그것은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Socrates Scholasticus)가 그리스어로 쓴 책에서 히파티아는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하는 것에 근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스어 오스트라코이스(ostrakois)는 굴껍데기를 뜻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 그리스어에 해당하고 이전에는 굴껍데기란 의미로 국한되어 사용된 것은 아니다.

1889년에 발간된 리들 앤 스콧의 희영사전에는 가장 첫 번째로 오스트라콘(ostrakon)을 의미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스어 오스트라콘(ostrakon)은 복수형이 오스트라카(ostraka)이며 깨진 도자기나 꽃병의 조각을 의미하며 투표를 할 때 투표용지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체제에 위협적인 인물을 추방할 때 사용되었다고 해서 이 제도를 오스트라시즘(Ostracism: 도편추방)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다른 어떤 동물의 껍질일 수도 있고, 깨어진 테라코타의 조각일 수도 있는 것을 굴껍데기로 단정지은 것은 에드워드 기번(Edward Gibbon)의 상상력이었고, 또 일반은 그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결과 그리스의 여성철학자 히파티아(Hypatia)는 굴 껍데기에 의해 피부가 벗겨지는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다고 알고 있는 것이다.

다음에는 히파티아의 살인에 동원된 파라발라니(Parabalani)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면서 글을 마친다.

파라발라니(Parabalani)를 짧게 소개하면 사회의 하층계급에서 선발된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으로 주교(主敎)의 경호임무를 수행하면서 때로는 상대방과의 폭력충돌에 동원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이 히파티아(Hypatia)의 살해에 동원되었던 것이었다.

금발은 머리가 나쁘단 편견은 언제 생겨났을까?

금발은 머리가 나쁘단 편견은 언제 생겨났을까?

“우리는 마릴린 먼로에 대해 많은 것을 안다고 자신하지만 사실은 편견에 가득 차 있다.”는 어느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금발 하면 떠오르는 사람인 ‘마릴린 먼로’에게는 항상 백치미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데 오늘은 금발인 여성들은 머리가 나쁘다거나 멍청하다는 편견은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그 유래를 한번 더듬어 볼까 한다.

예로부터 영어권에서는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근거한 ‘금발머리 농담(Blonde joke)’ 또는 ‘멍청한 금발 농담(Dumb blonde jokes)’이란 것이 있는데 금발을 뜻하는 단어를 남성(blond)이 아닌 여성(blonde)로 표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은 또 다른 성적 불평등의 한 가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며 이런 농담(Blonde joke)의 몇 가지를 예로 들면 아래와 같다.

① 금발머리, 빨간머리, 갈색머리를 가진 3명이 사막에 고립되었는데 다행히 그들은 마술램프를 발견하게 되었고 마침내 램프의 요정이 나타나서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먼저 빨간머리가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을 비는 것과 동시에 사라졌고, 다음은 갈색머리가 가족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원과 함께 사라졌다. 마지막 금발머리가 빈 소원은? “아~ 내 친구들이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다.”였다.

② “금발머리가 911에 전화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11번 버튼을 못 찾아서.

③ 퍼즐을 반년 만에 드디어 완성한 금발은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그 이유는 상자 겉면에 적힌 말 때문이었는데 거기에는 “2 to 4 years”라고 적혀 있었다.

왜 이렇게 금발의 여성을 비하하는 편견이 생겨난 것일까? 금발여성에 대한 이런 고정관념은 특히 ‘금발에 대한 고정관념(Blonde stereotype)’이라는 별도의 표현이 있을 정도이다. 그렇지만 이런 편견과는 달리 금발이 옛날부터 동경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은 날 때부터 금발인 사람은 많지 않음에 대한 반증임과 동시에 금발이 매력적으로 여겨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시대에는 금발의 가발이 고가에 거래되었고 여성들은 코코넛 오일에 식초 등을 섞어 만든 염료로 머리를 금발로 염색했다고 하는데 이것을 두고 시인이었던 프로페르티우스(Sextus Propertius)는 “아름다움은 타고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머리를 염색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 동경의 대상이자 매력적으로 생각되었던 금발머리의 여성들은 언제부터 멍청하다거나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말을 공식적으로 처음 들은 원조는 18세기 프랑스의 ‘로잘리에 듀테(Rosalie Duthé)’라는 여성이다. 수녀가 되려던 그녀는 따분한 생활에 싫증을 느껴 수녀원을 나온 다음, 나중에는 미모를 무기로 영국과 프랑스 사교계에서 귀족들과 관계를 가지게 되는데 그 중에는 나중에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여성들에게 정숙함과 고귀함이 요구되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서 ‘로잘리에 듀테(Rosalie Duthé)’는 말을 하기 전에 잠시 침묵을 하는 버릇을 들였는데 이를 두고 아름답긴 하지만 어딘가 약간 부족해 보인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이것이 그녀가 ‘금발은 머리가 나쁘다’는 편견을 갖게 만든 최초의 여성인 이유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조안나 피트만(Joanna Pitman)’이란 사람에 의해서 대중들에게 그렇게 각인되어버리고 만다.

저널리스트이자 문화역사학자인 ‘조안나 피트만(Joanna Pitman)’은 금발머리에 대하여 기술한 그녀의 저서 ‘On Blondes’에서 “로잘리에 듀테는 공식적으로 최초의 머리 나쁜 금발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Rosalie Duthé acquired the dubious honour of becoming the first officially recorded dumb blonde)”고 표현함으로써 서구사회에서는 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2016년에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의 ‘제이 자고르스키(Jay Zagorsky)’ 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미국 베이비 붐 세대 1만9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금발머리의 여성이 오히려 IQ가 조금 더 높게 나왔으나 금발이 더 똑똑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금발이 머리가 나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경의 대상이자 매력의 상징이었던 금발머리의 여성이 멍청하다는 편견을 얻게 된 이유로는 영화의 힘이 가장 컸다고 할 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공(?)이 컸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금발머리의 여성은 아름답지만 멍청하다는 편견을 대중에게 각인시킨 먼로의 대표적인 영화는 바로 ‘신사는 금발을 좋아해(Gentlemen Prefer Blondes)’이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가 맡은 로렐라이라는 역은 프랑스대륙에 유럽이라는 나라가 있다고 생각할 정도로 지식은 부족하지만 “다이아몬드는 여자의 베프(Diamonds are a girl’s best friend)”라는 말을 할 정도로 돈만을 보고 결혼을 하려는 인물로 묘사된다.(그러나 정작 영화는 내로남불 식의 인간들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먼로에게는 ‘섹시 심볼’, ‘백치미’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지만 정작 먼로는 금발머리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대중들은 인정하지 않거나 모르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려진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의 모습이 그대로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과 관련하여 영국의 ‘아네트 쿤(Annette Kuhn)’은 그의 저서 ‘The Women’s Companion to International Film’에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금발여성에 대한 편견을 3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 차가운 금발(Ice-cold blonde)

차가운 외모를 가졌지만 내면에는 불타는 감정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 경우인데 대표적으로는 모나코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Grace Patricia Kelly)’를 꼽고 있다.

 

■ 섹시한 금발(Blonde bombshell)

폭발적인 섹시함으로 남성들에게 소유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묘사된 경우로 당연히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도 포함되어 있다.

■ 멍청한 금발(Dumb blonde)

섹시하지만 철부지처럼 조금은 모자란듯하게 그려지는 것으로 주인공과 주변인물들이 그로 인해 곤란함을 겪게 되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며 대표적인 배우로는 1920~1930년대에 활약한 ‘매리언 데이비스(Marion Davies)’를 들고 있다.

한편 1999년 영국 ‘코번트리 대학교(Coventry University)’의 연구는 금발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이 자리 잡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금색, 은색, 갈색, 빨간색의 4가지 가발을 같은 모델에게 쓰게 하고 60명을 대상으로 그 느낌을 조사한 결과, 금발과 은발은 다른 색깔에 비해 지능이 낮아 보인다는 대답이 많았고 금발은 특히 매력적이란 평가가 압도적이었다고 한다.

최근 들어 우리사회를 뒤집어놓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경찰과 검찰에 대한 불신이 고정관념으로 고착화되는 것은 아닌지, 입법·사법·행정 할 것 없이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는 일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염려를 지울 수가 없다. ‘마릴린 먼로’에게 백치미란 수식어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처럼…

워털루 전투가 만들어낸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

워털루 전투가 만들어낸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

이미지 by sportiqe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패배하고 엘바 섬(Elva Island)으로 유배되었던 나폴레옹이 1815년 2월, 섬을 탈출하여 다시 권력을 장악하자 유럽 각국은 이를 타도하기 위해 연합군을 결성하게 된다.

그리고 웰링턴(Arthur Wellesley Wellington)이 지휘하는 영국군 9만5천과 게프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Gebhard Leberecht von Blücher: 줄여서 흔히 폰 블뤼허로 부른다)가 이끄는 12만의 프로이센군은 나폴레옹의 12만5천 병력과 벨기에 남동쪽 워털루(Waterloo) 교외에서 전투를 벌이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워털루 전투(Battle of Waterloo)이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이틀 전인 1815년 6월 16일, 벨기에의 작은 마을인 꺄뜨흐 브하에서 전초전 격의 전투가 일어나 미셀 네(Michel Ney)가 이끄는 프랑스군 4,140명과 웰링턴의 병력 4,800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하는데 이 전투를 꺄뜨흐 브하 전투(Battle of Quatre Bras)라고 하며 연합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고 프랑스군은 전술적 승리를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즉 승패를 가를 수 없는 결과였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톰슨(1875년작) 꺄뜨흐 브하 전투

 

당시 꺄뜨흐 브하 전투(Battle of Quatre Bras)를 지휘하던 웰링턴의 비서는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이란 사람이었는데 그의 아내인 에밀리(Emily Harriet Wellesley-Pole)는 웰링턴의 조카였다. 1814년 8월에 결혼을 하고 워털루 전투가 일어나기 불과 수주일 전에 예쁜 딸을 얻었지만 불행하게도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은 프랑스의 저격병에 의해 총상을 입고 팔을 절단하게 된다.

Emily Harriet Wellesley-Pole

 

오른팔이 절단 된 채 가까운 농가로 피신한 피츠로이 서머셋은 “오른손에 있는 결혼반지를 찾아야 하니 절단된 팔을 가져다 달라.” 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 다음날인 1815년 6월 19일에 웰링턴이 직접 편지를 써 피츠로이 서머셋의 형에게 그의 부상소식을 전한다.

오른팔을 잃어버린 피츠로이 서머셋의 의지력은 남달랐던 모양으로 아직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을 법도 하지만 그는 2주일이 되기도 전에 왼손으로 편지를 써서 그의 어머니에게 소식을 전하였는데 아래의 사진이 그가 보낸 편지다.

 

그러나 한쪽 팔이 없이는 옷을 입고 벗기도 불편할 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칼을 휘두른다던지 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어서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은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에 의뢰하여 일상생활에서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소매가 몸통과 연결된 각도를 크게 만드는 디자인의 옷을 제작하게 된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이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을 위해 특별히 디자인한 소매를 채택한 옷은 그 편리함 때문에 이후에 사냥이나 스포츠용 의류에 채택되면서 인기를 얻게 되는데 왜 피츠로이 서머셋의 의뢰로 개발된 옷이 피츠로이 소매나 서머셋 소매가 아니고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로 불리게 되었던 것일까?

1952년에 피츠로이 서머셋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영국 웨일즈 남동쪽 몬 마우스셔(Monmouthshire)에 있는 래글런(Raglan)의 남작지위를 받게 되는데 그 이후부터 그의 이름 뒤에 ‘라글란의 첫 번째 남작(1st Baron Raglan)’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게 되었다.

아쿠아스큐텀(Aquascutum)에서 개발한 소매 디자인이 정확히 언제부터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로 불리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피츠로이 서머셋(FitzRoy Somerset)으로부터 유래된 것임은 분명하고, 그렇기 때문에 래글런(Raglan)이란 수식어가 붙게 된 것으로 보이는데 1864년에 정식으로 사전에 등재되었다.

전쟁의 아픔에서 유래한 래글런 소매(Raglan sleeve)를 쉽게 볼 수 있는 곳으로는 금년에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류현진 선수가 몸담고 있는 메이저리그 야구경기를 예로 들 수 있는데 투수들의 무덤이라고 하는 쿠어스필드에서 내일 열리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경기에 선발로 나서는 류현진의 승리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