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기의 위장색

전투기의 위장색

최근 각국이 앞다투어 개발에 나서고 있는 스텔스기는 단순히 레이더뿐만 아니라 적외선과 가시광선 및 소음 등 전투기의 흔적을 지움으로서 관측을 어렵게 하도록 만든 기종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원시적인 스텔스기능은 적의 눈을 속이는 위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비행기를 62대나 격추시켰던 독일의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가 몰던 “복엽기(Fokker D.VII)”에 사선으로 흰색의 선을 그려 넣어 비행방향을 착각하도록 만들며 “쏘지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Du doch nicht!!”를 적어 넣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군용기의 위장색은 최근에 와서는 하늘이나 구름과 비슷하도록 다양한 명암의 회색을 혼합하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1970년대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구입했던 F-4 팬텀은 도입 당시에는 국방색으로 도장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경까지는 전투기의 위장색에 대한 효과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기종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위장을 위해 도장하는 페인트의 무게가 적게는 수십 kg에서 많게는 100kg에 달하기 때문에 성능과 연비를 약화시킨다는 이유에서 예전에는 굳이 위장색을 도장하지 않고 표면의 두랄루민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위장색은 회색 계열이며 디지털 위장(Digital Camoflage)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래의 사진은 러시아의 MiG-29기입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주변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전투기의 위장색을 파란색으로 도장하기도 하는데 저공비행을 하면 거의 식별이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위장색을 이용한 위장 이외에도 러시아의 수호이 Su-27의 경우에는 가짜 캐노피를 그려 넣어 기체의 상하를 오인하도록 하는 위장술을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투기의 위장색과는 달리 비행고도가 낮은 정찰기나 수송기의 경우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지역에 맞도록 위장하게 되는데 우리 공군의 경우에는 산악지형에 맞는 패턴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사막의 모래와 비슷한 색깔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다음으로 준비했던 미국본토에 대한 공격은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생물학전의 첫 번째 시도로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한 바탄전투(Battle of Bataan)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생물학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2년 4월 9일 미군과 필리핀군이 투항하게 되면서 바탄전투는 끝이 나고 생포된 포로들이 카파스에서 오도널수용소까지의 행진 도중 7천~1만여 명이 숨진 이른바 “죽음의 바탄행진”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미군과 필리핀군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이 생물학전을 시도하려던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바탄전투를 포함하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시도하려 했던 생물학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일본군이 계획한 작전명 “밤벚꽃(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악명 높은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가 수립했는데 주요 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민간인 밀집지역에 대한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그 시험단계로서 바탄전투에서의 생물학전 전개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바탄지역의 10군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 90kg(1억 5천만 마리)을 살포할 준비를 하게 되지만 그 전에 미군과 필리핀군이 항복을 함으로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후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은 미국의 본토에 대한 생물학전을 계획하는데 애초의 계획과는 조금 변경된 샌디에고의 해군기지에 전염병을 퍼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1945년 3월 26일 작전의 일환으로 5대의 “I-400” 잠수함과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을 탑재한 폭탄을 터뜨릴 계획을 확정하게 됩니다.

“I-400”

 

“아이치 M6A 세이란”

 

그러나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공식적으로 1945년 9월 22일에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이 계획했던 작전의 내용은 미국의 근해로 접근한 5대의 “I-400” 잠수함에서는 벼룩이 든 풍선폭탄을 발사하고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는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면서 폭탄을 투하한다는 것이었으며 수만 명의 인원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사용하려던 방법은 영국의 “HMS M2”잠수함과 같이 “I-400”과 “아이치 M6A 세이란”을 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과는 별개로 일본은 “트루크 제도(Truk Islands)”라고 부르던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치명적인 세균과 생물학 전문가 20명을 파견하기 위해 잠수함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잠수함 “USS Swordfish”에 의해 발각되어 수중에서 침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생물학무기를 전쟁에 사용한다는 것은 무차별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는 특성으로 민간인의 엄청난 피해를 낳게 되지만 일본군들은 이런 잔인한 작전을 시도할 계획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자위대가 욱일기를 게양하고 제주도의 관함식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만일 일본이 계획했던 세균전이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실행되었더라면 미국은 일본의 욱일기를 지금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이 문제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궁금해집니다.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불안감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 국방부의 1971년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51%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28%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복용했으며 31%는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를 복용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포와 극심한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일정량을 병사들에게 공급하기도 한다.

오래전 음주로 인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미 해군은 1862년 9월 1일부터 병사들에게 럼주의 배급을 중단하고, 영국해군은 1970년 7월 30일에 럼주의 배급을 중지하기도 하였는데 그날을 “Black Tot Day”라고 부르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되고 나서 연합군은 보급물자의 부족을 겪게 되는데 그 품목들 중에는 맥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운이 좋은 일부 병사들은 지역에서 술을 구해 마시기도 하였으나 수요에 비해서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에 영국의 양조회사(Heneger와 Constable) 두 곳에서는 무료로 맥주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영국공군에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노르망디까지 맥주를 수송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마침내 영국공군(RAF: Royal Air Force-영국 왕립공군)에서는 2차 대전의 주력기였던 스핏파이어를 수송에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스핏파이어는 45갤런(약 170리터)의 드롭탱크(drop tank) 2개를 연결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맥주를 담아 노르망디로 공수하기로 하고, 탱크 내부를 세척한 다음 2개의 드롭탱크(drop tank)에 모두 90갤런(약 340리터)의 맥주를 싣고 비행을 하게 된다.

 

이처럼 비행기로 맥주를 실어 나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날으는 펍(flying pubs)’이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을 했다고 해도 연료탱크에 담은 맥주에서 금속 맛이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모디피케이션 XXX(Modification XXX)’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스핏파이어의 양 날개 밑에 맥주통을 달고 운반하는 방식으로 병사들은 이를 두고 ‘맥주폭탄(beer bombs)’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운반하는 방법도 착륙도중에 불안정 하여 깨지는 사례가 빈번하였고 착륙하면서 맥주통을 깨뜨린 조종사는 병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죽일 놈’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맥주폭탄(beer bombs)’은 기존의 드롭탱크에 싣고 가던 것에 비해서는 맛은 유지가 되었으나 운반하는 양이 크게 부족하여 영국공군은 다시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스핏파이어보다 더 많은 양의 맥주를 실을 수 있는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수송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이용한 맥주수송은 계속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독일군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과 착각한 미군의 ‘P-47 선더볼트(P-47 Thunderbolts)’로부터 하루에 두 번이나 공격을 받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

한편 이런 영국공군의 모습을 본 미군에서는 맥주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공군이 노르망디로 수송하던 맥주는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끝을 맺고 마는데 그것은 영국 양조회사들(Heneger와 Constable)이 무료로 제공한 맥주가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영국 간접세무국(HM Customs and Excise)’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을 내린 영국과는 달리 미국정부에서는 1944년 11월부터는 아예 미국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5%를 전선에 공급하기로 정하고 미군들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Ace in a day는 하루에 5대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레드 바론(붉은 남작)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도 80기의 격추기록을 가지고는 있지만 Ace in a day를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레드 바론이 활약하던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2차 대전에 비해서 투입된 비행기의 숫자도 적었을뿐더러 조준기나 광학장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기록을 수립하기는 어려웠겠지만 Ace in a day를 수립한 최초의 기록은 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나왔으며 게다가 이것을 두 번이나 달성한 “Double Ace in a day”도 수립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는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의 “Julius Arigi”로서 그는 1916년 8월 22일 이탈리아군의 비행기 5대를 격추하였습니다.

Julius Arigi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는 “Julius Arigi”를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Ace in a day가 되는 기록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의 육군에서 조종사로 활약하였던 “Alfred Atkey”는 1918년 5월 7일 Ace in a day의 기록을 세웠고 이틀 뒤에 다시 5대를 격추시켜 두 번의 Ace in a day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장비의 발달과 함께 많은 수의 조종사들이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하루에 두 번의 기록을 달성하는 “Double Ace in a day”를 비롯하여 세 번을 달성하는 “Triple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들도 있습니다.

물론 2인승 전투기의 경우에는 조종사뿐만 아니라 사수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조종사들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이 기록을 수립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의 히로미치 시노하라가 1939년 6월 27일에 소련의 비행기 11대를 격추하여 Double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히로미치 시노하라

 

그러면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에서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한 조종사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Triple Ace in a day

▶ 에밀 랑(Emil Lang)

독일의 에밀 랑은 2차 대전 당시 모두 173기를 격추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1943년 11월 3일 소련의 전투기 18대를 격추시켰습니다.

 

▶ 한스요하임 마르세이(Hans-Joachim Marseille)

2차 대전에서 모두 158기를 격추시킨 그는 1942년 9월 1일 모두 17대의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 어거스트 램버트(August Lambert)

단 3주 만에 모두 70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가진 그는 1944년 하루에 17기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1945년 4월 17일 미국의 P-51 머스탱의 공격으로 전사하였습니다.

 

▶ 휴버트 스트라슬(Hubert Strassl, Hubert Straßl)

2차 대전 동안 모두 67기를 격추한 그는 1943년 7월 5일 17대의 소련항공기를 격추시켜 Triple Ace in a day의 기록을 기록하였으나 3일 뒤인 1943년 7월 8일에 전사하였습니다.

 

■ Double Ace in a day

국적
이름
일시
격추 대수
일본
히로미치 시노하라
1939년 6월 27일
11대
독일
헤르만 그라프
1942년 9월 23일
10대
오스트리아
Walter Nowotny
1943년 9월 01일
10대
독일
Erich Rudorffer
1943년 10월 11일
13대
독일
에리히 하르트만
1944년 8월 24일
10대

 

에리히 하르트만은 총 352대를 격추시켜 세계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 Ace in a day

2차 대전 당시 하루에 5대 이상 10대 미만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는 모두 28명이 있으며 그 중에서 독일의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Heinz-Wolfgang Schnaufer)”와 미국의 “데이빗 맥캠벨(David McCampbell)” 및 핀란드의 “한스 빈드(Hans Wind)”는 두 번의 Ace in a day 기록을 수립하였고 세계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척 예거(Chuck Yeager)가 1944년 10월 12일에 5대를 격추하여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척 예거(Chuck Yeager)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이미지 by Paul M Walsh FLICKR

2019년에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는 전체적인 평점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진주만의 공습으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의 전개는 일본의 항공모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생각된다.

항공모함이 적극적인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영국이 경순양함을 개조하여 만들었던 HMS Furious(47)로, 1918년 7월 19일 탑재하고 있던 7기의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이 출격하여 지금은 벨기에의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제국의 도시였던 퇴네르(Tondern)에 주둔하고 있던 제플린 비행선을 공격한 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HMS Furious(47)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

제플린 비행선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상전투의 기본은 함포사격이었고 미국은 영토확장 의지가 크지 않았으며 영국도 유럽에서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각각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여 태평양지역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항공모함의 건조에 공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진주만공습으로 시작되는 태평양전쟁의 초기에는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처럼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92년 개최되었던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력함의 톤수가 미국과 영국의 60%로 제한되긴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제한이 엄격하지 않았던 분야가 바로 항공모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만들었던 최초의 항공모함은 기준배수량 7,470t의 호쇼(鳳翔)로서 이견은 있지만 항공모함으로 설계되어 완성된 세계최초의 항공모함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호쇼는 태평양전쟁이 개전되었을 때에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려서 진주만공습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공격에 참가한 6척의 항공모함을 위한 대잠초계 임무를 수행하다가 오가사와라 제도 부근에서 회항하게 된다. 그리고 진주만공습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호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항공모함은 짧게는 공습 후 정확히 6개월이 지난 후, 길게는 2년 6개월 뒤에 미국의 공격을 받아 모두 침몰되는 운명을 맞았는데 당시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취역 순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함명
기준배수량
취역일
침몰일
아카기(赤城)
36,500톤
1927년 3월 25일
1942년 6월 6일
카가(加賀)
26,900톤
1929년 11월 30일
1942년 6월 5일
소류(蒼龍)
15,900톤
1937년 12월 29일
1942년 6월 5일
히류(飛龍)
17,300톤
1939년 7월 5일
1942년 6월 6일
쇼카쿠(翔鶴)
25,675톤
1941년 8월 8일
1944년 6월 19일
즈이카쿠(瑞鶴)
25,675톤
1941년 9월 25일
1944년 10월 25일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이들 6척의 항공모함 중에서 즈이카쿠(瑞鶴)는 침몰하기 직전에 참가했던 마리아나해전 이전까지는 단 1발의 피탄도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운이 좋았는데 이름에 상서롭고 운이 좋다는 뜻의 한자(瑞)가 들어있어서였던지는 몰라도 건조과정에서도 중상이나 사망과 같은 재해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고 건조되었다고 한다.

즈이카쿠(瑞鶴)의 취역예정일은 원래 1941년 12월이었으나 미국과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일정을 3개월이나 앞당기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사고 없이 건조되어 진주만공습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운이 좋은 배였기 때문이었을까? 즈이카쿠(瑞鶴)는 진주만공습에서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차로 출격했던 6기의 0식 함상전투기와 25기의 99식 함상폭격기가 모두 무사귀환하였고, 2차 출격에 가담했던 27기의 97식 함상공격기들도 모두 귀환할 수 있었다.

0식 함상전투기

 

97식 함상공격기

 

99식 함상폭격기

 

뿐만 아니라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이 참가하여 1944년 6월 19일부터 6월 20일까지 미해군과 격전을 벌였던 마리아나해전에서 쇼카쿠형 항공모함의 1번함이었던 쇼카쿠(翔鶴)는 침몰되었지만 2번함이었던 즈이카쿠(瑞鶴)는 1발의 명중탄과 5발의 지근탄에도 살아남아 그해 9월 23일에는 진주만공습 3주년을 기념하여 1944년 12월 7일에 개봉한 선전영화 ‘뇌격대출동(雷撃隊出動)’의 촬영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수뇌부의 이런 선전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사실상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마리아나해전을 기점으로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결국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즈이카쿠(瑞鶴)는 레이테해전에서 일본의 참패와 함께 북위 19도 57분, 동경 126도 34분 지점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만 모두 22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했던 일본이 다시금 군비의 확충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얘네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험비를 대체할 JLTV의 납품연기는 불가피할 듯

험비를 대체할 JLTV의 납품연기는 불가피할 듯

험비(HMMWV: High 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는 1985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여 66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수만 28만대 이상에 달하는 베스트셀러인데 이를 대체할 차세대 통합경전술차량(JLTV: Joint Light Tactical Vehicle)의 사업추진에 대한 미의회보고서가 어제 날짜인 9월 18일부로 발표되었습니다.

의회보고서에 의하면 2017년 8월과 9월에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의 미해병 공지전투센터((Marine Corps Air Ground Combat Center)에서 있었던 JLTV의 테스트 결과가 성능요구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하며 이에 따라 차량의 인수도 2040년이 되어야 완료될 수 있다고 합니다.

JLTV의 테스트는 실주행을 통한 검중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병행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대략적인 사항들만 알려졌던 자료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알려졌는데 이를 충족시키는 차량이 납품된다면 JLTV의 성능은 경이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듯 보입니다.

JLTV(Joint Light Tactical Vehicle) 자료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

· 영하 40℃에서 1시간 내에 18℃로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영상 50℃에서 40분 내에 32℃까지 낮출 수 있어야 한다.

· 엔진과 시스템 오류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 JLTV가 다른 JLTV를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 험비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다용도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 M-ATV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뢰 및 폭발물 방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 M-ATV(MRAP All Terrain Vehicle)는 범용지형지뢰방호차량으로 이전의 지뢰방호차량인 MAR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와 동일한 수준의 방호기능을 가지면서도 기동성은 향상되도록 설계된 차량.

· 1,000km의 오프로드를 고장 없이 주행하여야 한다.

· 타이어 2개가 터져도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3,6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도 작전이 가능해야 한다.

· 극한의 추위에서도 1분 이내에 시동이 걸려야 한다.

· 중간급유 없이 시속 56km로 560km를 달릴 수 있어야 하고 오프로드는 480km를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7초 이내에 시속 50km로 가속할 수 있어야 한다.

· 수심 1.5미터의 물을 건널 수 있어야 한다.

· 전진과 후진을 불문하고 60cm의 단차를 넘을 수 있어야 한다.

· 45cm의 단차를 시속 24km로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폭 7.6미터, 경사 20°의 호를 건널 수 있어야 한다.

· 스키 상급자도 어려운 경사 40°의 길을 가로로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엔진에 불이 붙을 경우 이를 감지하여 10초 이내에 자동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 차체의 도장에 손상이 있을 경우 자동 복구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미군당국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면

JLTV는 그야말로 꿈의 자동차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1,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인항공기

1,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무인항공기

군용 무인항공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인 제1차 세계대전에서 부터인데, 오늘은 제1, 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무인기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 미국의 케터링 버그(Kettering Bug)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미 자이로스코프를 이용한 자율비행을 할 수 있는 무인기의 개발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그 결과의 하나가 바로 이 기종입니다.

개발자 찰스 케터링(Charles F. Kettering)의 이름을 딴 이 기종은 64km 밖에 있는 표적을 자동비행으로 명중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졌는데 공식적인 명칭인 “케터링 공중어뢰(Kettering Aerial Torpedo)”에서 보듯이 순항미사일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체에는 약 82kg의 폭발물을 탑재할 수 있다고 하는데 위의 사진을 보면 레일을 따라 움직이다가 이륙하도록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케터링 버그(Kettering Bug)는 목표물의 상공에 도달하면 날개가 떨어져나가고 기체는 목표물에 충돌해서 폭파시키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길이 4.6미터, 폭 3.8미터로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엔진의 출력은 40마력, 기체중량은 240kg으로 최대속력은 시속 193km, 항속거리는 100km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미 육군은 1916년부터 시제품을 생산하고 테스트를 시작하여 1918년 10월에는 실전에 투입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지만 1개월 후에 전쟁이 끝남으로써 실행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기술로는 정밀조준이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에 투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실효성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Great Lakes TG-1)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과 함께 미국은 무인공격기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데 이미 1차 세계대전에서 무인기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했던 미국은 자동으로 비행하는 방식을 버리고 다른 비행기에 탑승한 조종사가 원격으로 무인기를 조종하도록 하는 방향으로 선회를 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입니다.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은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에 걸쳐 미 해군에서 사용하던 뇌격기(Torpedo Bomber)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퇴역하여 훈련기로 사용되고 있던 커티스 T4M의 엔진을 강화시켜 만든 기종으로 원격조종장치를 탑재하고 있으며 아래의 사진과 같이 날개의 아래쪽에는 카메라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레이트 레이커스 TG1은 시험비행에는 성공하였지만 실용화되지는 못했습니다.

 

▶ 미 해군의 Naval Aircraft Factory TDN1

함상에서 이륙을 준비 중인 TDN1의 조종석에 사람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미 해군공창에서 제작을 한 이 무인기는 길이 11미터, 폭 15미터에 220마력의 엔진 2개를 탑재하고 있는데 2,000파운드의 폭탄과 어뢰를 장착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미 해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F4F와일드 캣”보다도 크게 제작되었습니다.

F4F와일드 캣

전장으로의 수송은 유인으로 하고 실전에서는 원격조종 수신기를 탑재하고 투입시키는 방식으로 운영되었으며 당시에 개발된 레이더 고도계와 텔레비전을 이용함으로써 악천후나 야간에도 비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으나 가격이 너무 높고 정확한 폭격을 하기가 어려움에 따라 Interstate TDR기종이 대안으로 개발되게 됩니다.

 

▶ 미국의 인터스테이트 TDR(Interstate TDR)

미 해군의 요청에 따라 인터스테이트사에서 만든 이 기종의 사양은 TDN1 기종과 크기는 같지만 날개가 기체의 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으며 무게는 2.7톤으로 최대 2,000파운드의 폭탄 1발과 어뢰 1개를 탑재하고 최대시속 225km, 항속거리는 685km에 달하였습니다.

Interstate TDR은 남태평양 지역에 투입되어 9월 27일 첫 번째 작전에서 일본선박을 성공적으로 폭격하는 성과를 올리게 되지만 계속되는 기술적인 문제와 이미 솔로몬군도에서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던 미군으로서는 무인기 없이 재래식 무기만으로도 충분히 일본군을 제압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189대만 생산되고 중단되게 됩니다.

 

▶ 미국의 노스롭 JB10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개발한 무인기 “케터링 버그(Kettering Bug)”를 제2차 대전 중에 미 육군이 실용화한 것으로 인터스테이트 TDR이 프로펠러 방식인 것에 비해 노스롭 JB10은 제트엔진을 사용합니다.

2차 대전에서는 1차 대전 당시에 개발되었던 자율비행 방식의 무인기보다는 원격조종 방식의 무인기를 개발하려던 미국이었으나 발전하는 기술로 인해 다시 자율비행 방식의 무인항공기를 개발하기 위해 노스롭이 제안한 무익기 형태의 JB1을 선택하고 제너럴 일렉트릭에서 만든 엔진 2개를 탑재하고 시험비행을 하였으나 엔진의 추력이 낮아 안정적인 비행을 하지는 못하고 맙니다.

그 이후 독일로부터 노획한 V1을 참고로 포드사가 만든 펄스제트(PULSE JET)엔진 PJ31을 탑재한 JB10을 만들게 되는데 길이는 3.7미터, 폭은 8.9미터로 1.7톤가량의 폭탄을 장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엔진과 조종장치의 문제로 인해 비행거리가 최장 40km에 불과해서 실전에 투입하지는 못하고 계속해서 업그레이드를 시도하는 도중에 2차대전이 종결됨으로써 그 성능을 입증하지는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 독일의 미스텔(Mistel)

전투기 포케울프 Fw190이 위에 있지만 모선의 기능을 하고 폭격기 융커스 Ju88이 아래에서 무인항공기의 역할을 하며 기수 부분에 1.7톤가량의 폭약을 탑재하는 형태로 제작되어 있는 복합기입니다.

포케울프 Fw190

융커스 Ju88

겨우살이를 뜻하는 독일어 미스텔(Mistel)은 영어로는 미슬토(Mistletoe)라고 하는데 주로 크리스마스트리의 장식으로 사용하는 덩굴식물을 말하며 독일의 복합기 미스텔은 엄밀하게는 아래에 있는 융커스 Ju88을 일컫는 말입니다.

목표물의 근처에서 분리된 융커스 Ju88은 모선인 포케울프 Fw190에서 원격으로 조종하도록 제작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무인기처럼 목표물을 스스로 인식하고 진로를 변경할 수 있는 정도는 되지 못했고 1942년부터 시작된 개발과정에서 목표물의 10km 전방에서 분리하여 40m 범위의 오차에서 폭파시킬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1944년 6월부터 투입되기 시작한 실전에서는 표적의 1.6km 전방에서 분리하도록 하였으며 종전(終戰)까지 200대 정도가 생산되었으나 복합기로 결합한 상태에서는 기동성이 크게 떨어지고 목표물에 접근하기도 전에 연합군 전투기에 격추되는 일이 많아서 전력에 큰 도움은 될 수가 없었습니다.

플라이-바이-와이어(FBW, fly-by-wire) 방식이 사용된 독일의 미스텔(Mistel)이 최초로 실전에 투입된 것은 1944년 6월 24일 프랑스 북부 해안이었는데 총 5기가 출격하여 연합군 함대를 공격하였으나 그 중 1대만이 영국의 구축함에 크게 타격을 줄 수 있었다고 하며 1945년 동베를린에 접근하는 소련군을 저지하기 위한 교량의 폭파에도 성공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다리를 완전히 폭파시킨 것은 아니고 단지 소련군의 진격을 1~2일 지연시키는 정도의 손상만 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 전세를 바꿀 정도의 역할을 하지는 못하고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미국의 F35를 복제한 중국의 스텔스기 선양 J-31

미국의 F35를 복제한 중국의 스텔스기 선양 J-31

군비증강에 열을 올리고 있는 중국이 현재 개발 중에 있는 스텔스기 “선양 J-31”은 “FC-31″이라고도 불리는데 모양과 제원이 미국의 F35와 아주 흡사하며 F-35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F-35

 

J-31

 

F-35

 

J-31

 

지금처럼 중국의 스텔스 기술이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자체의 기술개발이 아니라 미국의 기술을 도용한 것이 그 바탕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1999년에 있었던 F-117A 나이트호크(Night Hawk) 격추사건에서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를 손에 넣은 것이 중국이 최초로 스텔스기술을 습득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F-117A 나이트호크(Night Hawk)

 

1991년 걸프전쟁에서 단 1기의 피해도 없이 작전을 수행하여 적군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던 F-117은 1999년 코소보전쟁에서 세르비아군이 쏜 지대공미사일 S-125에 의해 격추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구 소련에서 개발한 지대공미사일 “S-125 네바”의 NATO 코드네임은 “SA-3 고어”입니다. 따라서 F117이 S-125에 의해서 격추된 것이라는 것과 SA-3에 의해서 격추된 것이란 말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S-125

 

F-117은 최초로 개발된 스텔스기로 주로 고주파 레이더에 대한 스텔스 기능을 발휘하도록 제작된 것이었는데 세르비아군이 직전에 도입하여 운용하기 시작했던 체코제의 최신 “타마라 레이더(정식 명칭은 Tamara passive sensor)”는 저주파 레이더를 쏘는 것이어서 불행하게도 F-117은 탐지가 되었고 미사일에 의해 격추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F-117을 탐지하고 격추시킨 데에는 레이더가 큰 몫을 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당시의 세르비아군 미사일포대 대대장이었던 졸탄 다니(Zoltán Dani)의 치밀한 임전태세와 휘하 장병들에 대한 철저한 교육과 훈련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졸탄 다니(Zoltán Dani)가 미사일포대를 운용했던 방식과 훈련 등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 아무튼 그는 2007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토군의 통신을 감청하여 F117의 예정항로를 사전에 알 수 있었고, 폭탄창이 열리는 순간 레이더로 감지하고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시킬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한편 격추된 F117기의 조종사였던 데일 젤코(Dale Zelko)는 기체에서 무사히 탈출하여 8시간 뒤에 미공군 탐색대에 구조되어 귀환하였는데 그 이후 전역하여 빵집을 운영하는 졸탄 다니(Zoltán Dani)는 사건이 있고 나서 10년 뒤에 데일 젤코(Dale Zelko)를 만나게 되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가정을 방문하기도 하는 등 친분을 쌓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검정색 상의가 데일 젤코(Dale Zelko)

 

얘기가 길어졌는데 다시 중국의 스텔스기 개발에 관한 주제로 돌아오면, 중국은 F-117의 격추소식을 접하고 즉시 현지로 달려가 농부들이 수거한 기체의 잔해를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이는데 이것이 중국이 최초로 개발한 스텔스기 J-20의 바탕이 된 것으로 세계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2009년 월스트리트지에서 “F35의 기술자료가 중국의 해커에 의해서 도난되었다.”는 정부 고위관리의 말을 인용하여 보도를 한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공개된 J-31의 제원을 보면 F35의 제원과 아주 유사하며 생김새는 거의 흡사해 보입니다.

2012년 10월 31일 시험비행을 마친 J-31은 2012년 주하이 에어쇼에서 1/4로 축소한 모형이 일반에 공개되었고 2014년에 주하이의 에어쇼(China International Aviation & Aerospace Exhibition)에서 비로소 첫선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F-35의 기술자료를 빼내 만든 선양 J-31은 F-35보다는 성능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그 중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 바로 사용하는 엔진인데 F-35가 1개의 엔진인데 비해 J-31은 2개의 엔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개의 엔진을 쓰는 F-35복제품”이라고 불리고 있기도 합니다.

“선양 J-31”이 사용하는 엔진은 러시아의 크리모프(JSC Klimov)에서 만든 2개의 RD-93인데 각각 84kN의 추력을 내며, F-35가 사용하는 “프랫 앤 휘트니 F135” 엔진은 177kN의 추력을 내는 것에서 보듯이 중국의 엔진제조기술은 아직 미국을 따라잡기에는 모자라다는 것이 분명해보입니다.

F-35

 

J-31

 

또 하나는 사용하는 레이더와 적외선 탐지 및 추적장치를 비롯하여 데이터 링크와 같은 전자공학 분야의 소프트웨어가 F-35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F-22랩터의 허용오차가 1만분의 1이었던 것에 비해 F-35는 그보다 더 엄격한 공차를 적용하여 만들었다고 하는데 과연 “선양 J-31”이 그런 정도로 제작되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F-35의 복제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선양 J-31”과 F-35의 제원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구 분
F35
J31
길이
15.4m
17.3 m
10.67m
11.0m
자체중량
13,200kg
12,500kg
최대이륙중량
31,800kg
28,000kg
항속거리
2,300km
2,400km
최고속도
마하 1.8
마하 1.6

미군들이 믿는 징크스 Top 5

미군들이 믿는 징크스 Top 5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악운(惡運)으로 여겨지는 것” 또는 “재수 없는 일이나 불길한 징조의 사람이나 물건”을 뜻하는 징크스(Jinx)는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져 오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집니다.

낚시를 좋아하는 저와 자주 함께 출조를 하는 사람 중에는 유독 그 사람이 날짜를 잡기만 하면 비가 오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어 낚시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요즘은 아예 날짜를 정해서 통보만 해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징크스들에는 미군들이 믿고 있는 것들도 있는데 특히 MRE에 들어있는 참스(Charms)사탕을 먹으면 불행한 일이 생긴다고 하는 것을 가장 많이 믿었고 녹색의 참스를 먹으면 비가 내린다고 믿었으며 적에게 불운을 안겨주라는 의미로 교전 중에 적을 향해 던지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순간 참스(Charms)는 사라져 버렸기에 제외하고 지금 현재 가장 많은 미군들이 믿는다는 징크스 다섯 가지를 모아보았습니다.

▶ 5위: 흰색 라이터를 넣고 다니면 안 된다.

이것은 27세에 사망한 대중음악가들을 말하는 “27 클럽(27 Club)”으로부터 비롯된 것인데 이 클럽의 멤버인 “짐 모리슨(James Morrison)”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ex)”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 “커트 코베인(Kurt Cobain)”이 죽었을 때 그들의 주머니에 흰색의 Bic라이터가 들어있었다는 사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특히 미군에서 이 징크스가 널리 퍼지게 된 이유는 미해병대의 상륙돌격 장갑차(Amphibious Assault Vehicle)가 브레이크 고장으로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사고가 발생했을 때 탑승하고 있던 해병이 흰색 라이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건으로부터 퍼지게 되었다고 하며 동승하고 있던 또 다른 해병대원은 행운의 상징인 말발굽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지만 결코 흰색 라이터의 불행을 이길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 4위: 밤에 배 위에서 휘파람을 불면 안 된다.

우리도 밤에 휘파람을 불면 뱀이 나온다거나 귀신이 나온다는 미신이 있는데 미군들도 밤에 휘파람을 불면 바다의 신 “넵튠”이 노하여 배를 침몰시킨다고 하는 미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 3위: C-레이션에 든 살구를 먹으면 안 된다.

C-레이션에 관한 미신은 2차 세계대전 때부터 여러 가지가 전해져오고 있는데 베트남전쟁을 치르는 동안 미해병들이 식사를 마치고 디저트로 캔에 든 살구를 먹을 때면 어김없이 집중포화을 받는 일이 잦았고 이 사실을 1968년에 미국의 군사전문 일간지인 “스타스앤드스트라이프스(Stars & Stripes)”가 전하면서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 2위: 스켈레톤 키가 있는 군복을 입으면 안 된다.

“스켈레톤 키(Skeleton Key)”라고 하는 것은 원래는 여러 자물쇠를 열 수 있는 마스터키를 말하는데 이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여 열쇠 무늬가 들어있는 군복을 입으면 죽는다고 하는 미신을 믿는다고 합니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교전 중에 전사한 미군이 총상을 입은 부위가 공교롭게도 열쇠 모양의 위장 패턴이 있는 곳이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 1위: “Rain”이라고 말하면 안 된다.

야전훈련이 많은 군인들은 당연히 비가 오는 것을 싫어하지만 누군가 “Rain”이라고 말을 하면 화창하던 날씨가 돌변하여 비를 퍼붓는다고 하는데 더 재미난 것은 이렇게 내리기 시작한 비는 내무반으로 돌아가야만 그치는 것으로 믿는다고 합니다.

한국전쟁이 가져온 의학계의 발전

한국전쟁이 가져온 의학계의 발전

종전선언이 금년 중으로 이루어질 것인지 아직도 안개 속을 걷고 있는 지금,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 있습니다.

미군이 운영하던 야전병원을 일컫는 MASH는 1972년부터 1983년까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하여 미국 CBS에서 드라마로 방송되면서 한국 하면 미국인들에게 전쟁과 가난을 떠올리게 만드는 일등공신의 역할을 하였습니다만 그런 부정적인 이미지를 미국인들이 가지는 반면 우리 동포들과 연합군들의 피로 얼룩진 전쟁은 의학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역사적인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동병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는 1단위가 60개의 병상을 기반으로 14명의 의사, 12명의 간호사, 1명의 준사관, 2명의 위생병과 97명의 지원병력으로 구성됩니다. 그러나 부상자가 너무 많이 발생하게 되면 병상의 수가 최대 200개로 늘어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MASH는 이동명령이 내려지면 6시간 후에는 모든 이동준비를 마칠 수 있도록 훈련되었으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4시간 이내에 진료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쳐야 했습니다.

2차 대전 때부터 운영되어왔던 MASH는 2006년에 폐지되었는데 유엔군 사령관이었던 “매튜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 장군의 말에 의하면 “한국전쟁의 부상병들은 이전의 다른 전쟁에 비해서 개선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었고 의료시설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에 훨씬 많은 회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한국전쟁 당시 MASH부대원들의 활약상과 한국전쟁은 의학의 발전에 어떻게 기여를 하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1955년까지 미군은 남자간호사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국전쟁에 참가한 간호사들은 모두 여성들이었습니다. 미 간호부대 소속의 간호사들 중에서 한국전쟁에는 약 1,500명 정도가 근무하였는데 그녀들이 근무한 장소는 격전이 벌어지는 최전선은 아니었지만 아주 근접한 거리의 열악한 환경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이들 간호사들은 미군이 한국에 도착한지 4일 후에 부산에 병원을 설치하였으며 이틀 뒤에는 12명의 간호사가 대전에 MASH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영화와 TV드라마의 모델이 된 8,055번째 병원이었던 것입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간호사들은 모두 9개의 훈공장과 120개의 동성훈장, 173개의 약장을 받았다고 합니다.

 

▶ 외상치료의 변혁

한국전쟁은 혈액의 운반, 혈관수술의 개선, 신장투석의 개혁에 혁명을 가져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혈액의 운반을 위해 유리병을 사용하였으나 그로 인해 수송공간을 많이 차지하고 쉽게 파손되는 문제가 있었으나 한국전쟁에서는 혈액을 비닐에 담아 운반·보관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 혈관수술에 있어서는 2차 대전 당시의 49.6%에 달하는 혈관이 손상되거나 절단되던 비율이 20.5%로 줄어들 정도로 일반화 되어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한국전쟁에서는 급성콩팥손상으로 인한 치료에 콜프-브리검 투석기(Kolff-Brigham dialyser)를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까지 90%에 달하던 사망률을 53%로 줄일 수 있었다고 하는데 1952년이 되어서야 투석기를 사용한 사례가 출간되었는데 이미 그 이전인 1951년에 처음으로 전쟁터에서 투석기를 사용하여 생명을 구한 간호사들의 노력은 다시 한 번 칭찬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부상병의 수송에 헬기를 이용하다.

육군대변인을 지낸 윌리엄 하워드(William Howard)의 말을 빌면 “한국전쟁은 부상병 수송원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1950년 이전에도 환자의 수송에 헬리콥터를 사용하기는 하였지만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는데 한국전쟁에서는 일상적으로 헬기를 부상병의 수송에 사용함으로써 헬기수송(medevacs) 인원이 2만 명 이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군은 물론이고 민간병원에서도 환자의 수송에 헬기를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CBS의 드라마에는 비록 한국의 실상이 지나칠 정도로 좋지 않게 표현된 부분도 있었지만 MASH 부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에는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950년 6월부터 1951년 5월까지만 연인원 1만5천 명의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하며 MASH에서 의사로 활동했던 “오토 아펠(Otto Apel)”은 “8,076번째 MASH에서 72시간 이후에는 모든 감각이 상실되었으며 거의 80시간을 논스톱으로 수술을 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런 MASH의 활약상이 영화와 TV드라마로 알려지게 된 것은 8,055번째로 설치되었던 대전의 MASH에서 의사로 근무했던 “리차드 혼버거(Hiester Richard Hornberger Jr)”씨가 필명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로 펴낸, 소설(MASH: A Novel About Three Army Doctors) 때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