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의 주력기 스핏파이어의 모든 것

2차 대전의 주력기 스핏파이어의 모든 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Spitfire)는 연합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으로 미국에서도 사용하였는데 지금부터 스핏파이어(Spitfire)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수상비행기를 만드는 회사가 제작하였다.

스핏파이어(Spitfire)의 정식 명칭은 수상비행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던 슈퍼마린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로 불리고 있으며 디자이너는 “레지널드 미첼(R. J Mitchell)”이라는 항공기 설계자였습니다.

 

레지널드 미첼

 

▶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하다

스핏파이어(Spitfire)는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마치고 1938년 8월에 영국공군의 덕스포드(Duxford)기지에 배치되었습니다.

 

▶ 최초의 격추

1939년 10월 16일 제603 비행중대의 스핏파이어(Spitfire)가 독일공군의 하인켈 He 111(Heinkel He 111) 폭격기를 격추하여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인켈 He 111

 

▶ 스핏파이어에 가려진 호커 허리케인

호커 허리케인(Hawker Hurricane)은 영국 본토에서 치러진 항공전에서 영국공군의 승리 중에서 60%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나중에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Ⅰ에 의해서 그 빛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호커 허리케인

 

▶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Ⅰ의 퇴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스핏파이어(Spitfire)의 개량에 착수하였는데 전쟁과 함께 박차를 가하여 마크Ⅱ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 주력기로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

1941년 2월에 영국공군에 배치된 마크Ⅴ는 1943년말까지 140개의 비행중대에 6,000대가 보급되어 주력기로 등장하였습니다.

 

▶ 세계를 누빈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미공군을 포함한 10개국에서도 운용하였는데 북아프리카와 몰타를 비롯하여 호주 공군에서는 일본기에 대항하여 북부해안의 다윈에 3개의 비행중대에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를 운용하였습니다.

 

▶ 빠르고 조종하기 쉬운 스핏파이어(Spitfire)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최고속도 시속 594㎞를 낼 수 있었고 7분 30초 만에 고도 2만 피트(6,096미터)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최고고도 36,500피트(11,125미터)를 자랑하였습니다.

 

▶ 넓은 작전반경

드롭탱크를 장착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1,100마일(1,770㎞)의 작전반경을 지니게 되어 독일의 심장부로 깊숙이 침투하여 폭격기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 독일 포케불프의 대항마

1941년 9월에 유럽의 하늘에 등장한 독일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FW-190)”은 영국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를 능가하여 그 후 1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전투기로 활약하였지만 1943년 6월 새로운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Ⅸ의 등장으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포케불프 Fw 190

 

▶ 스핏파이어(Spitfire)의 무기들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전쟁 초기에 7.7㎜ 기관총 8문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독일 비행기의 두꺼운 장갑과 연료탱크를 파괴하기 위하여 브라우닝 .303 기관총 4문과 20㎜ 2문을 새롭게 장착하였으며 1톤 이상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우닝 .303

 

▶ 너무도 빨랐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

1944년 1월에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는 시속 724㎞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이렇게 빠른 속도 때문에 독일이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발사한 V2 로켓을 300개 이상이나 격추시킬 수 있었습니다.

 

▶ 제트기를 격추시킨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

독일이 전쟁 후반에 선을 보인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Messerschmitt Me 262)”를 1944년 10월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가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메서슈미트 Me 262

 

▶ 2차 대전 이후

스핏파이어(Spitfire)는 XIV의 개량형인 마크XVIII를 새롭게 선보이면서 1949년까지 생산되어 한국전쟁에도 투입되었고 항공모함용 함재기인 시파이어(Seafire)를 2,334기 제작하였고 1954년 4월 1일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의 투입을 마지막으로 퇴역하였습니다.

시파이어(Seafire)

도쿄올림픽과 한국전쟁, 그리고 M4 셔먼

도쿄올림픽과 한국전쟁, 그리고 M4 셔먼

코로나19(COVID-19)의 영향으로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는 제32회 하계올림픽의 취소가능성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WHO는 도쿄 올림픽 개최여부의 결정권은 IOC와 당사국인 일본에게 있다는 점을 명확히 밝혔지만 일본정부에서 올림픽을 취소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나는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올림픽이 개최되지 못했던 것은 3차례로 이유는 모두 전쟁 때문이었는데 베를린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던 1916년의 제6회 대회가 1차 대전으로 열리지 않았으며 제2차 대전으로 인해서는 1940년의 제12회 도쿄올림픽과, 1944년의 제13회 런던올림픽이 열리지 못했다.

반면에 한국전쟁이 한창이었던 1952년에 열린 제15회 헬싱키 올림픽은 예정대로 개최가 되었고 북한이 불참했던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비록 역대 최소규모의 인원이기는 했지만 참가하였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일본은 1952년 헬싱키올림픽에서 금메달 1개를 포함하여 모두 9개의 메달을 획득하는 기록을 세웠으며 12년 뒤인 1964년에는 아시에서는 처음으로 열린 하계올림픽이었던 제18회 도쿄올림픽을 개최하게 되는데, 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 요인들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는 잊을 수 없는 큰 상처로 남아있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인 6·25전쟁이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1945년부터 1949년까지 소비자물가지수는 100배로 증가했고 인플레이션 율은 연평균 59%를 기록하고 있었다.

이랬던 일본경제가 1950년을 전후하여 소비자물가 상승률과 실질경제성장률 15%씩을 달성하면서 1956년~1972년의 일본의 인플레이션 율을 평균 4.5%로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6·25전쟁이란 사실은 조선특수(朝鮮特需)란 용어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한국전쟁 동안 주한미군과 주일미군에서 발주한 물품과 용역을 합한 금액이 46억 달러에서 5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데 이 금액이 얼마 정도나 되는지를 알아보면 충분히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라 생각된다.

계산의 편의를 위해 총액을 50억 달러라고 가정하고 통계자료의 취득이 쉬운 미국과 영국의 인플레이션율을 바탕으로 1950년의 50억 달러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하면 미국의 경우에는 535억 달러(63조 2천억 원), 영국의 경우에는 2,182억 달러(258조 원)에 이른다.

따라서 일본이 한국전쟁으로 얻은 경제적 이득은 500조 원에 이를 것이라는 말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으며 500조 원이라는 금액은 2020년 우리나라의 전체예산과 맞먹는 정도임을 생각하면 일본경제에 미친 영향이 실로 지대하였음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이처럼 6·25전쟁으로 조선특수(朝鮮特需)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M4 셔먼 전차의 아카바네 스페셜이란 모델을 들 수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북한의 전력을 과소평가했던 미국은 주일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공식명칭이 Light Tank, M24였던 일명 M24 채피(M24 Chaffee)라는 경전차를 전장에 투입하게 되는데 북한이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T-34-85를 상대할 수 없게 되자 후속으로 투입했던 것이 M4 셔먼이었다.

M24 채피

 

M4 셔먼

 

M4 셔먼에 아카바네 스페셜(Akabane special)이란 일본어가 붙게 되었던 이유는 M4 셔먼 전차의 개량이 이루어진 곳이 도쿄도에 있는 아카바네(赤羽)란 곳에 위치하고 있던 도쿄병기보급창(東京兵器補給廠)이었기 때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에 주둔했던 미군은 아카바네 주변에 있던 다수의 군사시설들을 일부는 캠프로 사용하고, 일부는 미군이 보유하고 있던 장비를 정비하기 위한 시설로 사용하였는데 이것을 영어로는 TOD(Tokyo Ordnance Depot)라고 부른다.

한국전쟁 동안 최전선에서 후송되는 전차를 비롯한 각종 장비들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기능을 담당하고 있던 TOD(Tokyo Ordnance Depot)에서 새롭게 투입할 M4 셔먼의 개량도 담당하게 되었던 것에서 비롯하여 6·25전쟁에서 미군이 사용할 M4 셔먼 전차의 이름 뒤에 아카바네 스페셜이라는 수식어가 붙도록 결정되었던 것이다.

M4 셔먼의 개량은 미국의 BMY(Bowen-McLaughlin York)에서 담당하고 있었는데 75㎜포를 탑재하고 소형 포탑에 76㎜포를 탑재하여 관통력을 높이려고 했던 모델로 끝에 ‘E4’를 붙였던 ‘M4A1E4’와 ‘M4A3E4’가 바로 그것으로 1940년대 말부터 개량계획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일본에서 아카바네 스페셜을 생산하는 것은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개량한 M4 셔먼 아카바네 스페셜은 한국전쟁에 투입되지 못하고 중단되고 말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나는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미국이 본토의 병력들을 파병하기로 결정하면서 사용하는 전차도 M4 셔먼보다 강한 M26 퍼싱과 M46 패튼을 투입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아카바네 스페셜은 생산되지 않고 종결되었던 것이다.

 

M26 퍼싱

 

M46 패튼

 

이처럼 패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계기를 마련해준 대한민국에 대해서 일본은, 식민지배와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던 조선인에 대한 반인도적인 불법행위에 대하여 피해자들에게 배상을 하도록 결정한 대한민국 대법원의 판결을 무시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정치와 경제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뻔뻔스럽게도 수출규제를 단행하였다.

이런 일본의 아베정권을 생각하면 결코 성공적인 개최를 장담할 수 없게 된 도쿄올림픽을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안타깝지 않음은 결코 숨기지를 못하겠다.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이야기들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이야기들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고 하던가요? 이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밝게 웃고 있는 두 사람도 불과 몇 시간 뒤에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못했겠지요?

 

결혼 14주년을 맞은 1914년 6월 28일, 사진 속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는 사라예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암살범의 총격으로 사망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1914년 7월 28일 개전하여 9백만 이상의 군인과 7백만 이상의 민간인 희생

자를 내고 1918년 11월 11일 종전한 1차 대전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크리스마스 정전”에 관한 내용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지만 이것을 포함하여 몇 가지만 추려보도록 하겠습니다.

▶ 크리스마스 정전

1914년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에 영국군과 독일군이 일시적으로 정전을 맺고 서로 음식도 나누고 담배도 나눠 피며 축구경기를 갖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15년 부활절을 맞아 독일군은 다시 정전을 맺으려 제의하였으나 영국군의 반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미국의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의 1914년 12월 31일자 기사로 세상에 알려졌으며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2014년 12월 12일 영국 내셔널 메모리얼 아버리텀(Christmas Truce) 수목원에 기념탑을 설치하였습니다.

 

▶ 영국은 입대지원자를 거절해야만 했다.

전쟁을 위해 필요한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영국은 대대적인 모병에 나섰지만 심각한 영양실조로 인해 40% 이상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현재 영국남성의 평균시장이 약 180cm 정도인데 당시의 평균신장은 160cm 정도였다고 하는군요.

▶ 영국은 미성년자를 병력으로 채용하였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1·2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정식 군인들 중에서는 소련의 “세르게이 알레시코프(Sergey Aleshkov)”가 6살로 가장 어린 나이로 기록되어 있는데 1차 대전 당시 영국의 공식적인 모병연령은 18세 이상이었지만 굶주림에 고통 받던 많은 미성년자들이 나이를 속이고 입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영국군에 입대한 미성년자는 대략 25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고 하며 가장 나이가 어린 사람은 불과 12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캐나다도 2만 명에 달하는 미성년자들을 파병하였습니다.

세르게이 알레시코프(Sergey Aleshkov)

▶ 독일군은 캐나다군을 두려워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캐나다군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고 있는데 “세계최고의 저격수들을 보유한 PPCLI”란 포스팅에서 알아본 것처럼 세계에서 가장 먼거리의 저격에 성공한 Top5 중에서 1위를 비롯하여 3위와 4위 등 3명의 저격수를 보유하고 있는 곳이 바로 캐나다이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서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파병하여 도와주었던 나라입니다.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은 참호를 공격하기 위해 특수한 병종인 “충격보병(Sturmtruppen)”이란 것을 만들었는데 캐나다 군인들을 독일군은 “스트룸트루펜(Sturmtruppen: 영어로 Storm Troopers)”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하였다고 합니다.

독일군이 캐나다군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비미 리지 전투(Battle of Vimy Ridge)”와 “파스샹달 전투(Battle of Passchendaele)”에서 보여준 용맹함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1차 대전기간 동안 연합군 병사들 중에서 가장 높은 수당을 캐나다군이 받은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 성병발생률이 가장 높았던 캐나다군

용맹한 것은 좋은데 성병의 감염율이 높았던 것은 그리 좋아보이진 않습니다. 아무튼 캐다군의 성병감염률은 영국군보다 6배나 높았다고 하며 성병에 감염이 되면 그에 대한 처벌로 급여의 지급을 중지하고 12개월 동안 휴가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 귀족 여성들의 자원입대

국내재벌들의 연이은 갑질이 끊일 줄을 모르는데 영국의 귀족여성들은 자발적으로 “응급의용간호부대(First Aid Nursing Yeomanry)”를 조직하고 전쟁에 자원하였다고 합니다. 경제적으로 부유한 이들은 의용조직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으로 금전과 물품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고 전쟁터로 몰고 온 자동차는 군에 헌납하여 앰뷸런스로 사용하도록 했다고 합니다.

 

▶ 고위급 독일군 포로들의 행동은 자유로웠다

독일군 고급간부들은 문서에 서명만 하면 포로수용소를 나와 인근 마을에서 식용품을 구입할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 일부의 연합군 포로들은 호텔에 수용되었다.

전쟁이 계속됨에 따라 독일군이 수용할 수 있는 한계를 초과하게 되었는데 이에 따라 부상의 정도가 심한 포로들은 중립국인 스위스나 네덜란드로 보내거나 돈이 많으면 호텔에 머무를 수가 있었고 가족들의 방문도 허용되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스헤베닝언(Scheveningen)”에 있던 포로수용소에는 너무 많은 미군포로와 캐나다군 포로들이 수용되는 바람에 각각 야구단을 만들어 경기를 갖기도 했다고 합니다.

 

캐나다군 포로들

주일 미해병대의 공중급유 추락사고는 A클래스에 해당

주일 미해병대의 공중급유 추락사고는 A클래스에 해당

지난 6일 미 해병대 제3 해병원정군 소속의 FA-18D 호넷 전투기와 KC-130J 공중급유기가 공중급유 훈련 도중에 충돌하여 추락한 사고가 발생하여 전투기에 탑승했던 2명과 급유기에 탑승했던 5명의 승무원을 합하여 모두 7명의 승무원이 추락하여 이 중 2명은 구조되었고 당일 1명은 사망하고 5명은 실종된 상태였는데 실종자 5명에 대하여 제3해병원정군 사령관 에릭 스미스 중장은 모두 사망하였다고 어제일자로 공식 선언하면서 사고등급을 A클래스라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해병대는 2년 전인 2016년 12월 13일에도 MV-22B와 KC-130이 공중급유 도중에 접촉하는 사고가 발생하여 MV-22B가 불시착하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MV-22B

 

또한 금년 9월 4일에는 항공모함 “USS 에이브러햄 링컨”의 함재기인 F-35C 라이트닝Ⅱ와 F/A-18F 슈퍼 호넷이 공중급유 훈련을 하던 도중, F-35C의 공기흡입구로 급유기인 F/A-18F 슈퍼 호넷의 깔때기를 뒤집어 놓은 것처럼 생긴 “드로그(drogue)”의 파편이 빨려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하여 엔진의 손상을 입었는데 다행히 두 대 모두 무사히 착륙은 하였지만 당시의 사고등급은 F-35C 라이트닝Ⅱ가 A클래스, F/A-18F 슈퍼 호넷은 C클래스라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드로그(drogue)

 

미군이 규정하고 있는 항공기사고의 등급은 A부터 D까지 4개의 등급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각각의 등급은 인명의 피해와 경제적인 손실을 합하여 아래와 같이 정해져 있습니다.

  • A클래스:비행기 전체가 손상되거나200만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드는 손상이 발생 또는 승무원이 사망하거나 전신에 걸쳐 영구적인 장애가 남는 경우
  • B클래스: 50만 달러 이상200만 달러 이하의 경제적 손실과 승무원이 신체 일부의 영구적인 부상을 당하거나3명 이상이 입원하는 경우
  • C클래스: 5만 달러 이상50만 달러 이하의 손상과1일 이상의 입원이 필요한 부상을 입은 경우
  • D클래스: 2만 달러 이상5만 달러 이하의 손상과A, B, C클래스로 분류되지 않는 부상을 입은 경우

상기와 같은 규정에 의거하여 이번의 사고는 A클래스로 규정되었는데 이처럼 위험한 공중급유를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이전의 포스팅 “전투기의 연비는 얼마나 될까?”와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에서 알아본 것과 같이 공중급유는 항속거리를 연장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투기의 무장을 최대로 탑재하게 되면 최대이륙중량을 초과하여 이륙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연료를 만재하지 않고 우선 이륙한 다음 공중에서 급유하여 무장탑재량을 최대로 끌어올리기 위함 때문입니다.

즉, 군에서는 최대한으로 무장을 하고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륙하여 비행하다가 중간에서 공중급유를 받아 연료를 보충하는 무장탑재량을 우선시하는 방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기온의 영향을 받기 쉬운 제트엔진의 특성에 따라 온도의 상승에 따른 추력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최대이륙중량의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현대전에서의 공중전은 공중급유기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항공모함에서 이륙할 수 있는 무인공중급유기 “MQ-25A”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야간작전의 위험과 불의의 사고가 발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군은 전 세계 공중급유기의 80% 정도인 600여 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이번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분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주전쟁과 위성공격무기

우주전쟁과 위성공격무기

미국은 2020년까지 우주방위군과 이를 관할하는 사령부를 창설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우주공간에서 벌어질 전쟁은 위성의 기능을 마비시키기 위한 사이버공격과 레이저공격 및 직접적으로 위성을 파괴하는 공격이 가장 먼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습니다.

현대전에서 군의 중추신경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위성에 대한 공격 중에서 탄도미사일을 탐지하는 위성을 공격하는 것은 핵공격의 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정찰위성과 GPS위성을 공격하는 것은 전면전의 준비로 받아들여지고 있을 만큼 위성에 대한 공격은 엄중한 사안입니다.

 

레이저나 미사일 등으로 인공위성을 공격하는 무기체계를 말하는 위성공격무기 (ASAT: Anti-satellite)는 위성을 직접적으로 타격하여 파괴하는 무기와 레이저를 이용하여 일시적으로 정지시키거나 완전히 기능을 마비시키는 무기의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인공위성을 직접 타격하여 파괴하는 무기는 이미 실용화가 되어있으며 레이저무기도 이미 개발에 성공하였고 위성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실적도 있는데 군에서 사용하는 위성으로는 지상과 해상을 정찰하는 정찰위성, 미사일의 발사를 탐지하고 추적하는 SBIRS(우주적외선시스템), 백악관과 핵잠수함과의 연락이나 항공모함 간의 통신을 담당하는 통신위성, 적국의 통신을 차단하는 위성 및 미사일을 정확하게 유도하기 위한 GPS위성 등이 대표적입니다.

미국은 1960년대에 전자기펄스를 이용하여 위성의 통신을 방해하는 실험에 성공하였고, 1985년 9월 13일에는 인공위성 요격미사일 “ASM-135 ASAT”을 발사하여 P78-1 인공위성을 파괴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시 요격미사일 “ASM-135 ASAT”을 탑재한 F-15를 65°의 각도로 상승시키면서 고도 38,000피트에서 로켓엔진이 점화하여 위성을 추적하고 파괴하도록 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미국은 모두 15기의 “ASM-135 ASAT”을 생산하여 시험에 5기를 사용하고 10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또한 2008년 2월 21일에는 이지스함에서 발사한 SM-3로 기능을 상실한 정찰위성 USA-193을 파괴하기도 하였는데 고도 20,000㎞ 이상이나 최고 36,000㎞ 이상을 비행하는 위성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ICBM이라도 그 높이에는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로켓의 연료를 액체연료로 교체해야 하는데 당시 SM-3의 연료를 하이드라진으로 교체하여 발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한편 우주개발에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러시아도 레이저를 이용한 위성공격무기의 개발에 나서고 있으며 1970년대와 80년대에 미국의 정찰위성의 기능을 일시적으로 마비시킨 실적이 있고 이밖에도 중국과 인도, 이스라엘 등이 적극적으로 위성공격무기의 개발에 나서고 있습니다.

특히 중국의 경우에는 2017년에 통제불능의 상태에 빠진 실험용 우주정거장 ‘톈궁(天宮) 1호’가 추락하면서 전 세계를 긴장에 빠지게 하였는데 이보다 10년이나 이전인 2007년 1월 11일에 SC-19미사일을 발사하여 고장 난 기상위성 “FY-1C”를 파괴하면서 수천 개의 우주쓰레기를 발생시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기도 한 전력이 있습니다.

이처럼 중국과 러시아도 위성공격무기의 개발과 실험에 성공하게 되자 미국은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위성이 파괴될 경우에 대체할 유인, 무인항공기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정찰위성이 발달한 지금, SR-71블랙버드를 퇴역시킨 뒤에도 SR-72의 개발에 나서고 있는 것은 위성을 백업하기 위함이라는 이유도 있는 것입니다.

한편 GPS위성은 잎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높은 고도에서 비행하고 있는 관계로 이것을 파괴하기 위해서는 액체연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연료를 주입하는 도중에 발견될 가능성이 높고 6개의 궤도면에서 항상 4개 이상의 위성으로부터 전파를 수신하는 GPS위성을 해제하기 위해서는 1개의 궤도면을 담당하는 4~6개의 위성을 파괴해야 하고, 설령 파괴한다고 해도 다른 궤도면의 위성을 파괴하지 못한다면 GPS를 해제할 수 있는 시간은 95분에 불과하기 때문에 각국은 GPS네트워크를 파괴하기 위한 기술의 개발에 적극적으로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2019년의 해가 밝았습니다. 그러나 인류를 멸망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는 저 너머 보이지 않는 우주에서의 치열한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란이 보유한 전투기의 기종을 보면 이란의 역사가 보인다.

이란이 보유한 전투기의 기종을 보면 이란의 역사가 보인다.

미국과 이란의 7일간의 위기는 봉합되는 국면을 보이고 있는데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했던 것은 이란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이었다.

글로벌 파이어 파워(Global Firepower)가 발표한 2019년의 군사력 순위를 보면 이란은 세계 14위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란 공군이 보유한 전투기와 공격기의 기종을 살펴보면 이란의 역사를 알 수가 있다.

미국과 이란의 적대관계는 그 뿌리가 깊은데 이란공군이 보유한 전투기의 기종을 살펴보면서 미국과 이란, 두 나라의 관계를 알아보도록 하자.

현재 이란공군이 보유한 전투기(공격기 포함)는 모두 307대인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보유한 기종은 미국, 소련, 중국, 프랑스가 생산한 것과 이란이 독자적으로 생산한 것을 포함하여 모두 5개국의 전투기들이 운용되고 있다.

이란과 미국의 적대관계는 1979년에 발생한 이란혁명 이후 반미정책을 내세우면서부터 시작되었는데 이전까지는 친미정책을 고수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국왕이었던 레자 샤 팔라비는 중립을 선언했지만 실제로는 추축국이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에 친화적이었으며 특히 친나치적인 정책을 취했던 바람에 영국과 소련이 군수물자 수송로를 확보하기 위한 빌미를 제공했고, 그 결과 영국과 소련의 침공을 받아 레자 샤 팔라비가 물러나고 장남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팔라비 2세로 국왕에 즉위하게 된다.

팔라비 2세(모하마드 레자 팔라비)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는 친미, 친영정책을 내세웠으나 국내 민족주의 세력들의 반발이 강했는데 특히 영국계 석유회사인 앵글로 이라니안 석유회사(AIOC: Anglo-Iranian Oil Company)가 독점하고 있던 것에 대한 저항운동이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1951년 총리에 취임한 민족주의 지도자인 모하마드 모사데그(Mohammad Mossadegh)는 석유사업의 국유화를 단행하고 국왕의 권한을 제한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이란은 팔라비 2세를 지지하는 세력과 모사데그 총리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게 된다.

그러나 영국이 석유회사를 순순히 내줄 리는 만무했고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를 하게 되는데 영국의 바람과는 달리 국제사법재판소는 이란의 석유사업 국유화를 심리할 권한이 없다는 이유로 영국의 제소를 기각하게 되는데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영국은 MI6와 미국 CIA를 동원하여 모사데그 총리를 밀어내고 다시 팔라비 2세가 모든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모하마드 모사데그

 

친미정책을 추진했던 팔라비 2세는 1955년에 영국, 터키, 파키스탄, 이라크와 함께 반공산주의 군사동맹인 중동조약기구(METO: Middle East Treaty Organization)에 참가하면서 미국은 이란을 중동지역에서의 반공의 보루로 인식하는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는데 이란이 자국의 방위에 필요한 군사무기들을 미국에서 수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METO는 1958년 7월 14일 이라크에서 일어났던 7월 혁명의 영향으로 1959년 3월 24일, 이라크가 탈퇴하면서 본부를 터키의 앙카라로 이전하고 이름도 중앙조약기구(CENTO: Central Treaty Organization)로 바뀌었다.

풍부한 석유자원을 바탕으로 근대화와 군비확장에 나섰던 팔라비 2세는 급격한 근대화가 불러온 빈부격차와 인플레이션으로 이란 국민들의 불만을 높이고 말았는데 그 결과 종교지도자인 호메이니가 이끄는 이란혁명에 의해 이집트로 망명하게 된다.

루홀라 호메이니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호메이니는 중동조약기구(METO)를 탈퇴하는 등의 반미정책을 추진하였는데, 팔라비 2세가 신병치료를 이유로 미국에 입국하자 그의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이를 무시한 미국 카터정권의 오판은 결국 1979년 11월 이란의 학생시위대가 이란주재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52명의 외교관과 그 가족들을 인질로 삼는 사건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후 지미 카터 미국대통령은 인진들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을 감행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이것은 그의 재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으며 1980년부터는 이란과 단교하여 지금까지도 계속되다가 금번 이란 혁명수비대 쿠드스군 사령관인 가셈 솔레이마니를 미국이 암살하면서 긴장이 극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이란은 친미정책을 실시했던 팔라비 2세가 정권을 잡고 있던 시기에 미국으로부터 전투기들을 구입하였는데 그때 도입한 기종이 ‘F-5 E/F 타이거Ⅱ’와 ‘F-4 팬텀’ 및 ‘F-14 톰캣’이었다.

F-5E

 

F-5F

 

F-14

 

그러나 미국대사관 인질사건으로 미국과 단교하게 되면서 부품조달이 불가능하게 되자 소련으로부터의 무기도입을 추진하게 되지만 미국의 힘을 입고 이란을 침공했던 이른바 이란-이라크 전쟁에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던 소련이 이라크의 편에 서자 이마저도 어렵게 되었다.

그리고 이 틈을 타서 중국은 스커드 미사일을 비롯한 무기들을 이란에 팔았는데 전쟁이 종결되고 나서야 이란은 소련으로부터 MiG-29를, 중국으로부터는 MiG-21을 복제한 청두 J-7을 도입할 수 있었다.

MiG-29

 

J-7

 

그러나 구소련과 중국도 이란을 제외한 중동의 여러 국가들과의 관계를 무시할 수 없어서 이란이 요구하는 수량을 모두 공급하지는 못했던 관계로 이란은 혁명 이전에 도입했던 미국 전투기들의 업그레드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미국으로부터의 부품공급이 끊기면서 이란은 불법적인 경로로 전투기 부품들을 도입해야만 했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988년, 일본기업이 이란의 F-4팬텀에 탑재할 AIM-9 사이드와인더의 비행안정에 필요한 장치를 수출하여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미국, 중국, 소련제의 전투기들을 보유했던 이란은 1991년 걸프전 당시 이라크에서 망명한 프랑스제 미라주 F1과 소련제 SU-17 등을 보유하게 됨으로써 모두 4개국에서 생산한 전투기들을 보유하게 되었다.

미라주 F1

 

SU-17

 

그러나 미국으로부터 도입한 전투기들이 노후화됨에 따라 이란은 자체적으로 부품공장과 수리시설을 건설하고 미사일의 운용능력도 개선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미국의 F-4나 F-14에 비해서 구조가 복잡하지 않은 기종인 F-5E/F를 기반으로 번개라는 뜻을 가진 코사르(HESA Kowsar)와 사에케(HESA Saeqeh) 전투기를 개발하여 전력화하기에 이르렀다.

사에케(HESA Saeqeh)는 F-5E가 1개의 수직날개꼬리를 갖고 있던 것을 개량하여 F/A-18 호넷과 같이 밖으로 기울어진 2개의 수직꼬리날개를 갖추었으며, 공격력과 스텔스 기능이 향상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사에케(HESA Saeqeh)

 

코사르(HESA Kowsar)는 보기에는 F-5F와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이란은 레이더를 비롯한 전자장비들을 업데이트하여 F-16과 동급의 능력을 갖추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코사르(HESA Kowsar)

 

그러나 사에케(HESA Saeqeh)와 코사르(HESA Kowsar)에 대한 정보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일부에서는 이란이 과연 이란이 이 전투기들을 전력화할 수 있는지 의문을 나타내고 있는데, 40년 이상이나 운용하면서 노후화 된 F-4, F-5, F-14를 아직도 유지해나가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볼 때 이란의 기술력으로 자체적으로 생산한 사에케(HESA Saeqeh)와 코사르(HESA Kowsar)를 전력화하였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까 생각된다.

탱크를 몰고 남편의 복수에 나섰던 여인

탱크를 몰고 남편의 복수에 나섰던 여인

제2차 세계대전에서 첩보원으로 혹은 저격수로, 조종사로 전쟁에서 활약한 여성들이 많이 있는데 오늘은 탱크를 몰고 전사한 남편의 복수에 나섰던 한 여인의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05년 8월 16일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에 있는 가난한 소작농의 집안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그 아이는 “마리아 옥타브르스카야(Mariya Oktyabrskaya)”라는 이름의 여자아이였습니다. 지주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데도 갈 수 조차 없는 노예와도 같은 생활이었기에 마리아는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를 따르게 되고 당원이 되어 통조림공장과 전화교환수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25년 “일리아 옥타브르스카야(Ilya Oktyabrskaya)”라는 육군장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되고 군인 아내들의 단체인 “Military Wives Council”에 가입하여 간호교육과 무기와 운전 등의 교육을 받게 됩니다.

달콤한 결혼생활이었겠지만 둘 사이에 자녀는 태어나지 않았고 그러던 중 1941년 6월 22일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해오는데 3개월 정도면 소련을 정복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병력 380만, 탱크 3,350대, 항공기 2,770대, 야포 7,200문을 앞세우고 돌격해오고 이에 맞서 스탈린은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인 우크라이나를 방어하기 위해 탱크와 병력을 출동시킵니다.

그러나 며칠 전의 포스팅 “전차는 왜 포탑이 한 개만 있을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떨어지는 기동력과 얇은 장갑의 두께 그리고 고장이 속출하면서 소련군의 T-34, T-35전차는 독일군의 기민한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참패하면서 개전초기부터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탄약을 비롯한 보급품과 이를 운반할 수단이 부족하여 소련군은 독일군에게 밀리게 됩니다.

T-34

전쟁이 발발하자 안전을 위해 시베리아의 톰스크(Tomsk)로 이주했던 마리아는 통신이 좋지 않았던 당시의 사정 때문에 남편 일리아가 1941년 8월에 키예프의 전투에서 벌써 사망했다는 사실을 거의 2년이 지나서야 알게 됩니다.

신혼의 단꿈이 가시기도 전에 꿈에 그리던 남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펜을 들어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보냅니다.

“내 남편은 조국을 지키다가 전사했습니다. 나는 남편의 죽음과 파시즘 신봉자들로부터 고통 받는 인민들을 위해 파시스트의 개들에게 복수를 하기 원합니다. 이에 저는 그간 모은 돈 5만 루블을 기탁하오니 이 돈으로 탱크를 사서 이름을 ‘Fighting Girlfriend’로 해주시고 저를 그 탱크의 운전병으로 임명하여 내가 최전선선에 싸울 수 있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편지를 받은 스탈린 휘하 국방위원회에서는 대국민 선전에 더없이 좋은 기회라고 여겨 그녀의 제안을 수락하게 되는데 러시아어로 “Боевая подруга”라고 하는 ‘Fighting Girlfriend’란 글자가 그녀가 탑승한 전차의 포탑에 선명하게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족한 병력문제로 전차운전병에 대한 교육을 속성으로 마치던 관행과는 달리 그녀를 전장에 보내지 않고 계속해서 선전수단으로 이용하려던 정부의 속셈 때문에 그녀는 운전교육만 5개월 이상을 받은 끝에 비로소 1943년 9월이 되어서야 제26 전차여단에 배속되어 운전병과 정비사로 복무할 수 있게 됩니다.

자대에 배치 받은 그녀를 향한 남자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고 그들의 비아냥거림에 힘든 나날을 보내던 중, 스탈린의 무모한 명령에 따라 독일군에게 개박살이 나는 스몰렌스크의 전투에 그녀도 참가하게 됩니다.

 

그녀가 몰던 소련 T-34전차는 독일군의 저지선을 밀어내는 큰 역할을 하지만 손상을 입고 화염에 휩싸이게 되는데 다른 병사들과 달리 마리아는 침착하게 불을 끄고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하여 다시 전투에 임해 독일군 30여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그녀의 행동 때문에 그녀는 상사로 진급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달여 뒤 비테브스크(Vitebsk)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전투에 참가한 그녀는 군사퍼레이드 용으로는 번지르르한 외양으로 안성맞춤 이었는지는 몰라도 전력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하고 고장이 잦았던 T-34전차의 궤도가 끊어진 채 진흙탕에 빠져 움직이지 못하게 되자 다시 그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차 밖으로 나갔고 이때 독일군이 쏜 포탄의 파편을 머리에 맞고 의식을 잃게 됩니다.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후송되었던 마리아는 끝내 회복되지 못하고 2개월 동안의 혼수상태 끝에 1944년 3월 15일 사랑하는 남편이 있는 하늘나라로 떠나게 되고 그녀의 용맹성은 칭찬받아야 할 일임은 맞지만 이것을 선전수단으로 이용하려던 소련정부는 많은 여성들의 참전을 독려하기 위해 마리아의 사후에 영웅칭호와 함께 골드메달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메달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은 아니며 그녀를 기리기 위해 톰스크에는 그녀의 흉상이 건립되었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만든 게임까지도 등장하였습니다.

전차는 왜 포탑이 한 개만 있을까?

전차는 왜 포탑이 한 개만 있을까?

전차가 개발된 지도 벌써 100년이 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차가 개발된 배경에는 철조망을 설치한 다음 깊게 참호를 파고 기관총으로 방어하는 적을 뚫는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적의 총알을 막아 아군을 보호하면서 동시에 적을 공격하며 참호를 건널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영국이 개발한 최초의 실용 전차 “마크Ⅰ” 이후에 각국은 전차의 중요성을 느껴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마크Ⅰ

 

특히 많은 포나 기관총이 있으면 더욱 강력할 것이라는 생각에 따라 주포탑과 여러 개의 부포탑을 가진 다포탑전차와 함께 한 개의 포탑에 2개의 주포를 장착한 다주포전차 등의 연구로 이어지는데 최초로 영국에서 1925년에 다포탑전차인 “A1E1 인디펜던트”를 개발하게 되고 이것은 나중에 다른 나라들의 전차개발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특히 소련의 T-35는 디자인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모델의 하나입니다.

A1E1 인디펜던트

 

“A1E1 인디펜던트”전차는 47mm의 주포와 4개의 비커스 기관총을 갖추고 있어서 앞에 비커스를 붙여서 “비커스 A1E1 인디펜던트(Vickers A1E1 Independent)”라는 정식명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튼 이런 영국의 영향으로 독일, 프랑스, 소련, 심지어는 일본까지도 다포탑전차의 개발에 나서지만 실제로 제작하려면 복잡하고 제작기간도 오래 걸려 대량생산이 불가하고 당시의 엔진 제작기술로는 크고 무거워지는 무게 때문에 기동력이 저하되는 등의 문제점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중량을 줄이면 전차의 장갑이 얇아져 방어에 취약하게 되고 큰 포는 탑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모든 포탑에는 각각의 인원이 필요하여 좁은 실내에서 작전능력이 현저히 감소하는 단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렇지만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시제품을 개발해보면 실제 작전에서는 각각의 사수들이 공격하는 목표에 맞추어 전차를 움직이기도 어렵고 적들이 사방에 산재하고 있을 경우에는 전차의 움직이는 방향과 공격목표를 정하기가 힘들다는 단점과 함께 구조가 복잡하여 고장이 자주 발생하고 정비도 힘들다는 문제점들이 노출되어 영국은 다포탑전차의 개발을 “비커스 A1E1 인디펜던트(Vickers A1E1 Independent)”를 끝으로 중단하게 됩니다.

한편 소련은 1933년에 처음으로 다포탑전차인 “T-28” 503대를 생산하고 그 해 8월 11일에 제식화 하였는데 그보다 대형인 “T-35″도 같은 날 동시에 제식화 하였고 총 생산은 63량을 하였습니다.

T-35

 

T-35는 길이 9.7미터, 높이 3.4미터, 무게 45톤에 이르며 76.2mm의 포탑 1개와 45mm 포탑 2개 및 7.62mm 기관총 2정을 탑재한 그야말로 당시의 전차로서는 위풍당당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소련군의 퍼레이드에는 빠지지 않고 동원되는 그야말로 스타급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웅장한 외관과는 달리 중량에 비해서 장갑의 두께는 얇고 기동력은 떨어지며 고장이 잦아 1940년이 되면서부터 소련에서도 실효성에 의문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T-35의 후속으로 개발한 SMK전차와 T-100을 보고는 개발자들에게 스탈린이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하지요!

“귀관들은 전차 내부에 백화점을 만들려고 하는가?”

SMK

 

T-100

 

한편 일본에서는 1935년에 “95식 중전차”를 제식화 하였으나 중형전차의 대량생산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4대만을 생산하고 중단하게 됩니다.

일본의 95식 중전차

 

독일은 “노이바우파르조이크(Neubaufahrzeug)”라는 이름의 다포탑전차를 개발하였으나 무겁고 기동력이 떨어지는 단점으로 단 5량만 생산하고 중단하였는데 5대 중에서 실전에 투입된 3대 가운데에서 그마저도 2대는 고장으로 움직이지 못하고 1대만이 참가하였으나 영국군의 “보이스 대전차총(Boys Anti-tank rifles)”에 의해 장갑이 관통당하고 전사자가 발생하는 참패를 겪고 후퇴하게 됩니다.

보이스 대전차총

 

그 뒤 “노이바우파르조이크(Neubaufahrzeug)”는 독일의 제1 기갑부대에 소속되어 있다가 1941년 6월 소련의 “BT-7″과의 교전에서 무참히 파괴되고 맙니다. 그러나 독일이 개발한 다포탑전차는 1934년의 2대, 1935년과 1936년에 걸쳐 3대 등 모두 5대만 생산한 프로토타입이었으며 독일군은 “노이바우파르조이크(Neubaufahrzeug)”의 참패를 소련군의 T-35를 무찌름으로써 되갚아주게 됩니다.

노이바우파르조이크(Neubaufahrzeug)

 

독소전쟁에서 떨어지는 기동력과 얇은 장갑의 두께 그리고 고장이 속출하면서 소련군의 T-35는 독일군의 기민한 전차에 속수무책으로 참패하면서 개전초기부터 서서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결국 소련의 T-35전차는 군사퍼레이드 용으로는 번지르르한 외양으로 안성맞춤 이었는지는 몰라도 전력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다포탑전차의 발상은 좋았지만 실제 운용하기에는 너무 많은 단점들이 노출되는 바람에 현대에 와서는 다포탑전차를 개발하지 않고 있는 것이랍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전사한 미국병사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전사한 미국병사

1945년 일본의 무조건항복 선언에도 불구하고 1945년 8월 18일 미 육군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가 하늘에서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사망한 안소니 마키오네는 2차 세계대전 최후의 사망자가 되었고,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한 일본군 조종사 고마치 사다무(小町定)는 종전 후에도 살아남았는데 그가 일으킨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2차 세계대전은 자칫하면 끝나지 않고 계속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을 수도 있었습니다.

고마치 사다무(小町定)

 

전쟁으로 인한 국민의 고통보다는 천황제의 유지가 최대 관건이었던 일본의 수뇌부에서는 항복을 두고 반대하는 세력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가운데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궁성사건(宮城事件)”이라고 불리는 쿠데다 미수사건이 있습니다.

1945년 8월 14일 밤부터 8월 15일 새벽 사이에 육군성의 일부세력과 근위사단 참모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사건은 근위사단장을 살해하고 일본천왕이 항복하는 내용을 육성으로 녹음한 것의 탈취를 기도하는데, 이 사건은 1965년에 혼도 카즈토시(半藤 一利)에 의하여 “일본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운명의 8월 15일: 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 運命の八月十五日)이란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으며 1967년과 2015년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는데 우리에게는 2015년작 ”일본 패망 하루 전“이란 제목의 영화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2차 세계대전에서 마지막으로 사망한 미육군 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는 이런 일련의 항복에 반대하는 움직임 중의 하나인 아츠항공대사건(厚木航空隊事件)으로 말미암아 전사하게 됩니다.

아츠항공대사건(厚木航空隊事件)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항복에 반대하는 당시의 아츠비행장에 주둔하던 제302항공사령부의 사령관이었던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가 항복에 반대하고 공식적으로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결사항전할 것을 선언하면서 항전을 호소하는 전단을 살포하고 휘하의 조종사들에게는 일본 상공에 출현하는 연합군 비행기를 격추할 것을 지시한 사건을 말합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의 무조건항복이 있고난 하루 뒤, 맥아더장군은 도쿄 상공으로 4대의 폭격기를 비행시켜 일본의 항복이 진정성이 있는가를 시험하게 되는데 만일 조금이라도 폭격기에 위해가 가해진다면 일본의 항복은 거짓이라고 판단하고 즉각 공중폭격을 감행할 계획을 수립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16일 일본이 항복문서에 서명하기까지 과연 휴전을 제대로 이행하는지를 감시하기 위해 사진정찰 임무를 맡고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에 탑승한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하사는 별다른 사고 없이 도쿄 동쪽에 위치한 비행장(카토리와 코노이코)을 촬영하고 그날의 임무를 마치게 됩니다.

그러나 다음날인 1945년 8월 17일의 비행에서는 규슈해안을 따라 비행하던 도중 이를 발견한 일본 전투기 “가와사키 Ki-61”과 “나카지마 Ki-44”의 공격을 받아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는 경미한 손상을 입고 이를 격퇴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미국은 2대 격추, 1대 손상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일본에서는 당일에 피해를 입은 비행기는 없다고 발표)

B-32S(컨솔리데이티드 B-32 도미네이터)

 

가와사키 Ki-61

 

나카지마 Ki-44

 

그리고 운명의 1945년 8월 18일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하사는 일본 전투기의 공격으로 가슴에 총탄을 맞고 사망하고 함께 동승했던 미육군 병장 “조셉 라크라이트(Joseph Lacherite)”는 심각한 부상을 입게 됩니다.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

 

이런 사실을 보고 받은 맥아더 장군은 일본은 아직 싸우려 한다고 판단하고 즉각 폭격을 개시할 생각이었으나 운이 좋게도 일본의 평화대표단이 맥아더를 다음날인 1945년 8월 19일에 만나기로 예정이 되어 있었기에 맥아더는 만일 다음날 일본의 대표단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 말로 항복할 뜻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판단에 따라 하루를 기다리기로 합니다.

그리고 일본대표단은 8월 19일 맥아더 장군을 찾아옴으로써 자칫 계속될 수도 있었던 연합군의 폭격을 가까스로 모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아츠항공대(厚木航空隊)의 사령관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는 휘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계속 공격을 감행할 것을 멈추지 않았고 이에 부하장병들이 그를 8월 21일 아침에 마취시킨 다음 강제로 해군병원의 독방에 수감시키는 일이 발생하는데. 고조노 야스나(小園安名)는 그 후 1945년 10월 16일에 열린 군법회의에서 무기형을 선고받고 요코하마감옥에 수감이 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1946년 11월, 20년으로 감형을 받고 12월 5일에 가석방이 되었으며 1952년 4월 28일에 사면을 받았습니다.

미 육군하사 안소니 마키오네(Anthony J. Marchione)의 사망으로 계속될 뻔했던 태평양전쟁은 1945년 9월 2일 도쿄만(東京灣)의 미주리호(the Missouri) 선상에서 맥아더(MacArthur) 장군과 시게미쓰 마모루(重光葵) 일본외상 사이에 일본의 항복문서가 정식으로 조인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던 것입니다.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 도입하는 이지스 어쇼어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 도입하는 이지스 어쇼어

지난 10월 31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것은 미국의 의사에 따른 것인가?”라는 의원의 질의에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다.”고 답변했는데 ‘이지스 어쇼어’는 이지스함에서 운용하는 레이더와 미사일발사대 등을 지상에 배치하여 적의 탄도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미국의 MD방어체계는 모두 4단계로써 적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1단계로 해상의 이지스함에서 요격미사일을 발사하고 2단계로 지상에 배치된 요격미사일 GBI(Ground-based Interceptor)를 발사하여 적의 탄도미사일이 상승과 비행을 하는 단계에서 요격하고 이에 실패하면 적의 미사일이 낙하하는 종말단계에서 3단계로 사드, 4단계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는데 일본은 지상에 배치하는 2단계 방어시스템을 이지스 어쇼어로 대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지스 탄도유도탄방어체계에 사용되는 요격미사일인 ‘SM-3’의 도입을 결정한 것이 뒤늦게야 공개되었는데 지금부터 일본과 우리 정부의 결정이 옳은 것인가를 한 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고는 있지만 아직 종전선언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기에 우리의 주적은 현재로서는 북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입하는 SM-3와 일본의 “이지스 어쇼어”가 과연 방어체계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일본정부의 결정은 정말로 자국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속도의 문제

전쟁에서 적이 총을 쏘는 순간 내가 총을 발사하여 적의 총알을 맞추어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총알의 속도가 일반적으로 초속 900미터 전후이니 대략 마하 3 정도인 반면 북한 미사일의 최대속도는 초속 5,000미터, 즉 마하 15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의 전투기나 폭격기를 요격하는 일반적인 지대공미사일의 경우에는 적기의 속도가 빨라야 마하 2 정도이기 때문에 마하 15 정도의 속도를 내는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려면 더욱 높은 정밀도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 적의 탄도미사일에 탑재된 핵탄두를 직격하지 못한다면 폭발로 인해 생기는 파편으로는 핵탄두를 요격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점입니다.

 

▶ 높이의 문제

이지스함에서 발사하는 요격미사일은 “SM-3 블록 1A”인데 이것을 지상에서 운용하는 ‘이지스 어쇼어’에서는 보다 크고 고성능인 “SM-3 블록 2A”로 교체하여 사거리를 연장하고 운용레이더를 기존의 “AN/SPY-1(탐지거리 320km)”보다 30배 이상의 표적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는 훨씬 장거리의 탐지거리를 가진 “AN/SPY-6”로 대체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SM-3 블록 1A”의 최대고도는 500km이고 이보다 우수하다는 “SM-3 블록 2A”도 최대고도는 1,000km에 불과하기 때문에 북한의 중거리 지대지 탄도미사일인 ‘화성 12호’의 최대고도 2,000km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지스 어쇼어’가 추구하는 고고도지상방어라는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입니다.

 

▶ 가격의 문제

통상 이지스함에는 90여 발의 미사일이 탑재되는데 이것이 모두 “SM-3 블록 1A”라고 가정하면 1발에 우리 돈으로 200억 원 정도 하니 미사일 가격만으로 이지스함을 20여 척 가까이 건조할 수 있는 금액이 되고 이것을 “SM-3 블록 2A”로 모두 교체한다면 1발에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니 예산이 부족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고작해야 몇 발 정도만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전자기펄스(EMP: Electromagnetic Pulse)에 취약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전자기펄스(EMP)의 공격은 30km이상의 고도에서 폭발하여 모든 전자기기를 교란할 것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으로 덮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파를 송수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레이더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 미국에 대한 열등감

신냉전시대의 도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군사적 긴장도 높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냉전이 지속되는 것을 가장 바라는 것은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이들의 후원을 받는 상하 양원의 의원들이며 이들은 또한 일본 외무성의 친미파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지적이 제가 아닌 일본의 여론이며 아베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처럼 아베총리가 미국을 경배한다고까지 비난하는 것이 일본의 언론들입니다.

 

▶ 마지막으로…

일본이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배치하려는 지역을 보면 더더욱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일본은 북한이 괌을 목표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지나게 되는 야마구치현의 상공과 하와이를 겨냥하여 미사일을 발사하면 지나게 되는 아키타현에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설치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해상자위대에 밀리는 육상자위대의 입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국의 안보에서 자국민의 안전보다 미국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 정부의 사드배치와 썩은내 진동하는 방산비리 혐의자들의 절반이 무죄로 풀려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비록 남의 나라 일이기는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