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낙원이란 이름의 항공모함

지상낙원이란 이름의 항공모함

남북대화의 창구를 차단한 북한이 오래전 체제선전을 위해 대남삐라를 살포할 때 내세웠던 문구의 하나로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을 꼬집어 낙원(樂園)이 아니라 떨어질 락(落)을 써서 락원(落園)이라고 하거나 지옥과도 같은 곳이라는 뜻으로 나락(奈落)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윈난성 티베트족자치주의 중뎬(中甸)이란 지역을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상향이라고 하면서 아예 지명을 샹그리라(香格里拉)로 바꾸기도 했다.

이처럼 공산주의사회에서 낙원을 강조하는 모양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2월, 미국에서는 12번째 에섹스급 항공모함이 지상낙원이라 명명되어 취역하였는데 그 항공모함의 이름은 USS 샹그리라(USS Shangri-La)이다.

농담이 진담이 된다는 뜻의 영어표현 “Many a true word is spoken in jest.”가 딱 들어맞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항공모함 USS 샹그리라(USS Shangri-La)호의 이름은 일본의 진주만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실행되었던 둘리틀 공습에서 비롯되었다.

1942년 4월 18일 태평양상의 미국 항공모함 호넷호에서 출격한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를 비롯하여 요코하마, 나고야, 고베 등을 폭격하자 폭격기들이 어디서 출격하였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미 본토로부터 출격해 일본까지 날아간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기자들은 어디서 출격했는지를 궁금해 했고 둘리틀공습과 관련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자회견 석상에서도 이런 질문이 나왔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폭격기의 발진은 샹그리라였다고 대답하였는데 농담으로 한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써, 출격한 장소는 샹그리라라는 실제하는 장소였다고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둘리틀공습으로부터 약 2년 뒤인 1944년 2월 24일, 항공모함 USS 샹그리라(USS Shangri-La)의 진수식이 거행되었는데 항공모함의 이름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 둘리틀공습 당시, 중령으로서 도쿄공습의 책임을 맡았던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의 부인 조세핀 둘리틀(Josephine Doolittle)이 초대되어 샴페인을 깨뜨렸다고 한다.

 

지상낙원이라던 북한은 빗장을 다시 잠갔고 세상은 코로나로 아직도 신음 중이며 인종차별이 불러온 미국과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이 불러온 사태는 혼란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

농담이 진담된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 겨레가 한마음으로 염원하는 통일은 언제쯤이나 이뤄지고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려나?

국군의 날에 생각하는 지그프리드 라인

국군의 날에 생각하는 지그프리드 라인

용을 죽인 피로 목욕을 하고 나서 무협지에 나올 법한 금강불괴의 몸을 가지게 된 지그피리드는 목욕하는 도중에 날아온 나뭇잎 한 장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등에 붙는 바람에 그곳만 용의 피를 적시지 못해 취약한 부분이 되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는 신화 “니벨룽의 노래”에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이런 지그프리드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히틀러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건설했던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도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아픈 상흔으로 후대에 교훈을 주는 유물로 남아있는데 오늘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아 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연합군에게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우회하여 독일군을 공격하는 작전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은 얼마나 실패한 작전이었는지 다리 하나를 넘기 위해 크나큰 희생을 치루는 바람에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란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지기까지도 했습니다.

원래는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군이 프랑스에 건설했던 “힌덴부르크 라인”의 일부였던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총 연장 630km에 18,000여 개에 달하는 벙커와 수많은 용치(龍齒, Dragon’s Teeth)로 이루어져 있는데 히틀러가 1939년 5월 20일 현장에서 작업 중인 병사들과 근로자들에게 보내는 지휘서신에 “Westwall”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Westwall”이라고도 알려졌으나 연합군들은 이 선을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이라고 불렀습니다.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건설된 이 라인은 독일의 아우토반 건설에도 참가하였던 프리츠 토트(Fritz Todt)의 지휘로 추진되었는데 히틀러는 이 작업을 비밀리에 진행하기를 원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것을 건설하는 작업을 유럽의 다른 나라들이 알게 되면 독일의 영토확장에 대한 야심을 알아차리게 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며 2년 동안 비밀스럽게 작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위장망과 갈대를 덮고서 참호를 건설하는 등 작업을 하였으며 수많은 인원이 동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절 발표를 하지 않았으나 거대한 모습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게 되자 비로소 1938년에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세상에 밝히게 됩니다.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프랑스의 마지노선(Maginot Line)보다도 더 길이가 길었으며 벨기에의 국경 부분이 취약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던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런 단점을 없애기 위해 마지노선보다도 더 길게 방어선을 연장하여 구축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기만전술을 사용하여 국경선이라는 의미로 라인(Line)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사실 그 실체는 깊은 호를 가진 이중으로 된 요새화된 형태였으며 공격에 취약한 지점에 있는 참호의 주변으로는 더 깊게 라인을 설치했던 것입니다.

 

이런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의 실체가 세상에 알려지자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아무도 독일을 침공할 계획을 하지 않고 있는데 이런 작업을 감행하였다면서 돈낭비, 시간낭비라고 폄하하였습니다.

그리고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게 되면서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사용하지 않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배치되었던 장비와 무기들을 철수하게 됩니다.

그러나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다시 방어가 필요하게 됨에 따라 오랜 기간의 방치로 허물어지고 녹슨 시설을 보수하고 다시 무기를 배치하기 위해 애초 백만 명의 인력을 동원할 계획이었으나 1/3 정도인 36만 명의 연인원을 동원하여 보수작업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건설현장을 순시 중인 히틀러

 

연합군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을 뚫기 위해 치른 희생은 아주 큰 것이었는데 시간상으로는 거의 6개월이 소요되었고 연인원 25만에 달하는 연합군 병사들의 사상을 내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지그프리드 라인(Siegfried Line)”은 무너지게 되고 전쟁은 끝을 맺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는 회색빛 잔해들은 냉혹한 당시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제70주년 국군의 날을 맞은 오늘 우리의 강토를 가로지르고 있는 휴전선도 빨리 사라지게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이외의 군용 오토바이들

2차 대전 당시 미국과 영국, 독일 이외의 군용 오토바이들

지난 번 포스팅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에서는 주로 미국과 독일 그리고 영국의 군용오토바이들을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이들 나라 이외의 나라들이 사용한 군용오토바이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할리데이비슨의 오토바이를 미국에서 유럽으로 어떻게 운반했는지도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오스트리아의 PUCH 800

전쟁에 사용된 PUCH 800은 모두 민간용을 군에 징발하여 새로 페인트칠을 한 것이고 군에서 직접 주문을 한 모델은 사이드카를 갖추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 벨기에의 FN M12

벨기에의 “FN Company”는 1차 대전 이래로 벨기에군에 오토바이를 공급해오고 있었으며 1936년 M86모델을 최초로 군에 공급하였으나 이후 군에서 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오토바이를 개발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M12 모델이었습니다.

M86

 

M12는 더 강력한 엔진을 탑재하고 후진을 할 수 있었으며 사이드카에는 앞뒤로 모두 기관총을 장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M12

 

▶ 체코슬로바키아의 CZ 175

체코슬로바키아군을 위해 개발된 오토바이로 거친 지형에 맞도록 제작되었으며 전륜에만 서스펜션이 있습니다.

 

▶ 프랑스의 Gnome-Rhone 750 Armée

1938년에 프랑스 육군을 위해 개발된 이 오토바이는 민간에 보급되었던 디자인을 강하고 무겁게 바꾼 것으로 사이드카를 장착하는 것이 일반적인 750cc였으며 나중에 개량된 804cc의 AX2 모델이 보급되었습니다.

 

▶ 일본의 Type 97

보통 “Rikuo(陸王)Type 97″이라고 부르는 이 오토바이는 미국의 할리데이비슨을 모방한 것으로 때때로 기관총을 장착한 가벼운 사이드카를 달기도 하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사용되었던 군용오토바이의 양대산맥은 역시 독일의 BMW와 미국의 할리데이비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지난번 글에서 독일 BMW의 R71과 R75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영국의 더글라스사가 전쟁 후 이것을 바탕으로 “Douglas Mark V”를 만들었으며 미국정부는 Harley-Davidson과 Indian 모두 R75와 같은 오토바이를 만들도록 지시를 했다는 사실을 말씀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할리데이비슨이 BMW의 품질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바로 앞바퀴의 프런트포크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BMW는 내부에서 충격을 흡수하는 접이식 포크를 이미 사용하고 있던 것에 반해 할리데이비슨을 보면 무언가 조잡해보임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좌: BMW 우: 할리데이비슨

 

그래도 미군과 연합군이 가장 많이 사용한 오토바이가 바로 할리데이비슨의 WLA(Harley-Davidson WLA) 모델이었는데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수송할 특수한 선박이 없었기 때문에 1대씩 분해하여 포장해서 보냈다고 합니다.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는?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는?

미국이 참전한 전쟁 중에서 단일전투나 작전으로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것은 아마도 “노르망디 상륙작전”일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미국의 역사에서는 4번째로 기록되어 있으며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투는 1차 세계대전 당시 26,277명의 전사자를 낸 “모이제-아르곤느 대공세”입니다.

그런데 전쟁을 통틀어서 전사자의 숫자를 살펴보면 제1차 세계대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 비해서는 현격하게 적은 수의 전사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전한 미군이 가장 많이 사망한 2차 대전은 모두 291,557명의 전사자가 발생하였는데 1차 대전의 전사자는 모두 53,402명으로 순위로는 세 번째에 해당하고 두 번째로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쟁은 남북전쟁으로 모두 214,938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로 많은 미국인 병사들이 숨진 남북전쟁 동안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했던 “게티스버그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의 숫자는 3,155명인데 이보다도 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은 전투가 2차 대전 이후에 일어났습니다.

미국이 2차 대전 이후에 참전한 전쟁으로는 한국전쟁과 베트남전쟁을 꼽을 수 있기에 분명 이 가운데 있을 것이라는 짐작은 할 수 있는데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군이 가장 많은 전사자를 기록한 전투는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겨울의 초입에 있는 11월도 이제 막바지를 향해 달리고 있는 지금, 포털의 검색어와 뉴스에는 블랙 프라이데이와 관련한 세일에 관한 정보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추위가 시작되는 11월 하순에 미국역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10개의 전투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한국전쟁의 “장진호 전투”를 비롯하여 4개의 한국전쟁에서 있었던 전투가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로 기록되고 있음을 기억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한국전쟁을 비롯하여 베트남전쟁에서 치러진 전투 중에서 가장 많은 미군 전사자가 발생한 것을 5개만 추려보면 이 중 4개가 한국전쟁에서 일어났는데 지금부터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사자의 집계가 한국과 미국이 계산한 것이 서로 차이를 보이는데 여기서는 미국의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해보겠습니다.

 

1. 부산 교두보 전투(1950년 8월 4일~9월 18일)

북한군의 파상공세로 후퇴를 거듭하다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전투로 아직도 정확한 참전 병력의 숫자나 희생자에 대한 집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을 정도로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미군은 모두 4,599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2차 대전 이후 가장 많은 미군이 전사한 전투로 남아 있습니다.

 

2. 중공군 2차 대공세(1950년 11월 25일~12월 24일)

1950년 11월 28일 맥아더 장군은 “완전히 새로운 전쟁에 직면하였다”고 했을 정도로 전세가 역전되었던 전투인데 그 결과 중공군은 북한영토의 대부분을 탈환하게 되며 이로 인해 미군은 4,538명이 전사하였습니다.

 

3. 베트남전쟁 구정 대공세(1968년 1월 30일~9월 23일)

베트남전쟁 당시 북베트남 인민군과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이 연합하여 베트남공화국과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들에 대하여 벌인 공세로 3,178명의 미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4. 장진호 전투(1950년 11월 27일~12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금방이라도 끝날 것만 같았던 전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역전되었는데 미 해병 1사단이 중공군 7개 사단과 충돌하여 전투를 벌이며 철수한 작전이 바로 장진호 전투입니다.

 

그리고 전세가 불리해진 연합군사령부는 1950년 12월 8일 흥남철수를 지시하게 되었고 이것은 1·4후퇴의 시작이었는데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SS Meredith Victor)”의 선장이었던 레너드 라루는 선적하고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12월 4일 부산항에 입항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이 그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던 이면에는 미군 제10군단장의 민사고문으로 있던 의학박사 현봉학 선생의 노력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며 미국 측의 기록으로는 모두 2,840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5. 제2차 청천강 전투(1950년 11월 25일~12월 2일)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 국군이 중공군과 처음으로 치른 전투였던 온정리 전투에서 승리한 중공군은 청천강 방어선의 종심 깊숙이 침투를 감행하며 계속 남하를 기도하였고 중공군이 두 번째로 청천강에서 유엔군과 벌인 제2차 청천강 전투의 결과, 미 8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38선 이남으로 철수하게 되었는데 1,489명의 미군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꺾을 수 없었던 장미 ‘에일린 넌’

2010년 9월 2일 영국 데번 주의 토키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사망한 지 하루가 지난 89세 노인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녀는 에일린 넌(Eileen Nearne)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죽음을 조사하던 경찰이 유품에서 발견한 프랑스 정부로부터 받은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으로 인해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코드네임 “더 로즈”로 활약하였던 SOE요원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유명한 2개의 장미라고 하면 바로 에일린 넌(Eileen Nearne)과 도쿄 로즈 중의 한 명이었던 일본여성 “아이바 토구리”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가시가 있어서 스파이들에게 붙는 코드명에 로즈란 단어가 사용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히 에일린 넌(Eileen Nearne)은 게슈타포의 모진 고문에도 죽음을 불사하면서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고 수용인원 12만 명 가운데 절반이나 되는 6만 명이 숨진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았던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는데 오늘은 그녀의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2001년에 개봉한 “케이트 블란쳇” 주연의 영화 “샤롯 그레이”의 실제 모델이었으며 독일비밀경찰이 현상금 5백만 프랑을 걸면서까지 잡고 싶어 했던 인물인 “낸시 웨이크(Nancy Wake)”와 같은 SOE 소속의 스파이였습니다.

 

영화 “샤롯 그레이”의 한 장면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는 일명 처칠의 비밀부대라고도 불리며 2차 대전 당시 1940년 7월 22일에 조직되어 1946년 1월 15일까지 운영되었고 독일, 프랑스, 폴란드 등 세계 17개 지역에 지부를 운영하였던 특수작전부대였는데 그녀는 낙하산을 이용하여 프랑스에 침투하였고 체포될 때까지 105차례나 주요정보를 영국으로 송신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1921년 영국인 아버지와 스페인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2남 2녀의 막내로 태어난 에일린은 1923년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는 덕분에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전쟁이 발발하자 그녀의 언니 재클린(Jacqueline)과 오빠 프란시스(Francis)와 함께 SOE요원으로 활동하게 되지만 남매는 서로 SOE요원이란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니 재클린(Jacqueline)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하자 그녀의 가족들은 막내 에일린과 그녀의 언니 재클린을 영국으로 피신시키는데 자매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스코틀랜드를 거쳐 영국에 도착한 다음 이전의 포스팅 “제1차 세계대전의 숨은 이야기들”에서 귀족여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전쟁에 참가한 부대를 이은 “응급의용간호부대(FANY: First Aid Nursing Yeomanry)”에 가입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와 언니의 뛰어난 프랑스어 실력 때문에 곧 SOE에 가입하게 되지만 앞에서도 언급한 것과 같이 서로는 SOE에 가입한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프랑스에 침투하게 되어 언니 재클린은 자금과 무기 및 탄약을 운반하는 임무를 맡게 되고 에일린은 무전을 담당하게 됩니다.

1944년 3월 2일, 에일린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 지부장이었던 프랑스인 “쟝 사비(Jean Savy)” 휘하에서 근무하던 두 명의 요원은 어린 나이의 에일린에게는 너무 위험하니 돌아갈 것을 바랐지만 여의치 않아 그녀를 데리고 와서 런던과의 무전교신을 담당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 후 4월이 되고 지부장 “쟝 사비(Jean Savy)”는 독일이 새로운 V1로켓을 개발하여 영국으로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이를 직접 전달하기 위해 영국으로 떠났고, 남겨진 에일린은 점점 포위망을 좁혀오는 게슈타포에 의해 동료들이 하나둘 체포되는 와중에도 거처를 옮겨 다니면서 영국에 정보를 전달합니다.

1944년 7월 21일, 밖에서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자신이 발각되었음을 깨달은 에일린은 비밀문서를 불태우고 무전기를 숨기는데, 서류는 모두 없앴지만 무전기가 발각되어 게슈타포(Gestapo)에 체포되고 맙니다. 이랗게 끌려간 에일린은 자신은 프랑스인이며 단순한 사업상의 내용을 주고받은 것이라 항변하지만 게슈타포는 그녀의 옷을 벗기고 물고문을 비롯한 심한 고문을 가하게 됩니다.

 

영화 피메일 에이전트의 한 장면

 

모진 고문에도 자신이 스파이였음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자 게슈타포는 할 수 없이 전쟁포로가 아닌 일반인 수용자의 신분으로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 보내는데 당시 전쟁포로들의 옷에는 아래와 같이 X자를 써넣어 구분하고 있었습니다.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

 

수용소에 수감된 에일린은 머리를 삭발당하고 강제노동에 동원되는데 그곳에서도 역시 고문은 계속되었지만 끝까지 그녀는 비밀을 지켰고 1944년 12월에는 라이프치히 근처의 “마르클레베르크(Markleberg)”로 이감되게 됩니다.

그곳에서 하루 12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탈출할 기회만 엿보던 에일린은 다른 두 명의 프랑스인과 함께 드디어 탈출에 성공하게 되지만 얼마가지 못하고 독일군에게 발각되고 마는데 자신들은 프랑스 출신의 자원봉사자임을 설득하여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당에 은신할 수 있게 됩니다.

성당의 신부와 수녀들은 그녀들을 종탑에 숨겨주었고 며칠 동안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던 에일린은 1945년 4월 15일, 미군이 그 지역을 점령하면서 발견되어 무사히 영국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영국에서 프랑스로 비밀리에 투입되었던 여성 SOE요원은 모두 39명이었다고 하는데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렇게 영국으로 귀환한 에일린에게 프랑스정부는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을 수여하고 영국정부는 대영제국훈장을 수여하였습니다.

 

무공십자훈장(the Croix de Guerre)

 

그러나 에일린은 심한 고문으로 인한 심리적인 고통을 극복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2차 대전이 끝나고 런던에서 그녀의 동생과 함께 생활하다가 1982년, 동생이 죽자 토키(Torquay)로 이주하여 은둔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에일린이 살던 토키의 아파트

그녀는 1층에 거주했다고 합니다.

 

이런 그녀의 활약상은 정부의 비밀문서를 열람할 수 있었던 역사학자 “마이클 풋(Michael Richard Daniell Foot)”이 1966년에 발간한 책(SOE in France)에 의해서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나 그녀의 생존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다가 2010년 9월 2일 그녀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던 것입니다.

쓸쓸할 수도 있었던 그녀의 장례식은 영국 재향군인회(The Royal British Legion)의 주선으로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치러질 수 있었다고 하는데 주변의 이웃에게는 그저 고양이를 사랑하는 할머니로만 여겨졌던 에일린 넌(Eileen Nearne)을 생각하면 게슈타포의 가혹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어떻게 끝까지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는지 그저 경이롭고 존경스럽기만 합니다.

 

장례식의 모습

 

부디, 이제는 전쟁 없는 세상에서 편히 쉬시기를 빕니다.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

탄도미사일(ballistic missile)이란 순항미사일과는 달리 추진체의 연료를 모두 사용하면 중력을 이용하여 활공하다가 목표물을 파괴하는 것인데 그 종류도 다양합니다. 여기서는 사정거리에 따른 탄도미사일의 종류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 전술 탄도미사일(TBM: Tactical ballistic missile)

전술 탄도미사일은 사거리 300㎞ 미만으로 최전선에서 발사하기 때문에 주로 전술상의 목표가 되는 적의 지휘소, 집결지와 같은 곳을 목표로 운용되는데 국경이 맞닿은 나라들에서 주로 사용하고 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이스라엘이 개발한 “프레데터 호크(Predator Hawk)”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개발한 “프레데터 호크”는 140㎏의 탄두를 가진 미사일을 발사하여 300㎞의 표적을 10미터의 오차범위에서 명중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단거리 탄도미사일(SRBM: Short-range ballistic missile)

사거리 1,000㎞ 이하의 미사일로 대표적인 것이 중국이 가지고 있는 동풍15(東風15) 일명 DF-15라고 하는 것으로 최신형인 DF-15C는 사거리 700㎞로, 속도는 마하 6 이상이며 명중률은 5미터 내외로 알려져 있고 벙커버스터를 탑재하여 지하의 목표물을 파괴할 수도 있는데 중국은 한국을 목표로 DF-15 미사일 1개 여단을 운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 Intermediate-Range Ballistic Missile)

사거리 1,000~2,500㎞인 준중거리탄도유도탄(MRBM)보다는 사정거리가 길고, 사거리 5,500㎞ 이상인 ICBM보다는 사거리가 짧은 것으로 보통 3,000㎞ 미만의 사거리를 가지는 탄도미사일을 말합니다. 주로 핵무기를 보유한 중소국가가 사용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북한의 로동 1호, 대포동 미사일, 무수단 미사일이 있습니다.

 

▶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3,500㎞에서 6,000㎞ 정도로 1990년대 이전에 미국, 중국, 러시아가 대량 배치하였으나 현재는 개발하지 않고 있는 유형의 것으로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개발에 나선 나라가 북한으로 특히 화성 12호의 최초 비거리가 2,200㎞였던 것을 최대사거리를 5,500㎞로 높이는 시험을 계속하는 바람에 이것을 두고 “IRBM이다, ICBM이다”라는 논쟁이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의 중거리탄도미사일을 요격하기 위한 방어체계가 이지스함과 패트리어트 미사일 밖에 없는 일본이 이에 대비하여 도입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지난번 포스팅에서 얘기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인 것입니다.

 

▶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Intercontinental Ballistic Missile)

대륙간 탄도미사일의 사거리를 5,500㎞ 이상인 것으로 규정한 이유는 미국과 러시아를 잇는 최단거리가 바로 5,500㎞이기 때문인데 개발 자체가 무척 어렵기 때문에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만이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민간로켓을 개발하는 기술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액체연료를 사용하기 때문에 적의 미사일 발사에 대항하려면 연료주입에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ICBM은 고체연료를 사용하는데 이것을 개발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많은 나라들이 ICBM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ICBM을 탐지하기 위해 해상기반의 전용레이더인 “X밴드 레이더(Sea-based X-band Radar)”를 운용하고 있는데 북한의 미사일 위협이 한창 고조되던 당시에 태평양으로 전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지구상에서 미사일 발사를 실시간으로 탐지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가 유일하며 미사일이 발사된 후의 궤도를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미사일 발사에서부터 궤도를 추적하고 요격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미국의 지원 없이 단순히 요격미사일만 배치하는 것으로는 완벽한 방어체계를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인데 바로 이 점이 우리나라에 사드를 배치하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던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세계 최고령 여성 저격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

세계 최고령 여성 저격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

제2차 세계대전에서 활약한 소련의 여성 저격수들 중에서 가장 많은 309명의 적군을 사살한 루드밀라 파블리첸코는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녀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파블리첸코에는 미치지 못하는 전과를 올렸지만 소련의 붉은 군대의 저격수들 가운데에는 세계 최고령의 여성저격수였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란 사람이 있습니다.

루드밀라 파블리첸코

 

세계최고의 저격수라고 하면 단연코 하얀 사신(White Death)으로 불리며 소련과 핀란드 간에 치러진 겨울전쟁에서 활약한 시모 해위해를 꼽을 수 있을 것인데 시모 해위해가 겨울전쟁에 참가할 때의 나이가 34세였고, 루드밀라 파블리첸코가 저격수로 참전한 1941년은 그녀의 나이 24세였을 때였으니 두 사람 모두 신체적으로 왕성한 시기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48세의 늦은 나이에 입대하여, 본격적으로 저격수로 활약한 것은 그녀의 나이 51세였을 때이니 한참 늦은 나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제부터 세계에서 최고령 스나이퍼로 기록된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93년 7월 27일 로모노소프에서 태어난 니나 페트로바는 조선소 직원, 도서관 사서, 타이피스트 등 많은 직업을 거쳤는데 운동신경이 아주 뛰어났다고 합니다. 1927년 딸과 함께 레닌 그라드로 이사한 그녀는 승마, 스키, 수영, 농구, 스피드 스케이팅 등 다양한 스포츠 분야의 강사로 활동하였고 1934년에는 사격대회에서 수상하는 등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1934년부터 1935년까지 레닌그라드 군대의 여자 아이스하키 팀 주장을 맡고 있던 그녀는 저격병 양성소에 입교하여 교관이 될 수 있는 자격을 취득하였고 1939년 겨울전쟁이 발발하자 징집연령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48세의 나이로 자원하여 제4사단의 의료대대에서 복무를 하였습니다.

 

그 후 1941년 제28 보병연대의 저격수로 배치되어 저격수들을 양성하는 교관으로 활동하던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4년 레닌그라드 전투에서 23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공로로 소련의 훈장(Order of Glory) 3등급과 함께 국방훈장 등 모두 3개의 훈장을 수여받게 됩니다. 그런데 1, 2, 3등급으로 나뉘는 소련의 훈장(Order of Glory)을 모두 받은 사람은 22명에 불과한데 그 중 4명의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였습니다.

좌로부터 1, 2, 3등

 

3등급의 소련훈장을 받은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4년 8월 발트해 연안의 전투에서 1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2등급의 훈장을 받았고 1945년 2월 참가한 벨로루시 전선에서 모두 32명의 독일군을 저격하여 100명의 누적 전과를 달성하게 되어 1등급의 소련훈장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945년 5월 1일 밤 트럭(ZIS-5)을 타고 이동하던 중에 독일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고 다리에서 추락하면서 사망하여 생전에 훈장을 수여받지 못하고 1945년 6월 29일 사후에 영광의 훈장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ZIS-5트럭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512명의 저격수를 양성한 교관이었으며 122명의 독일군을 저격한 전과를 올린 뛰어난 저격수였습니다. 평범한 농부였던 핀란드의 시모 해위해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제국의 해군장교였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동생들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운동신경은 뛰어났지만 평범한 여성, 니나 페트로바(Nina Petrova)는 1945년 52세의 나이로 사망하기까지 뛰어난 저격수로 활동을 하였습니다.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

전투기에는 무기를 얼마나 탑재할 수 있을까?

F-35가 처음으로 실전에 투입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발생한 추락사고로 인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스텔스 기능을 가진 “F-35 LightningⅡ”의 무장탑재량은 스텔스 기능을 할 때와 하지 않을 때인 “비스트 모드”가 거의 4배 가까이 차이가 납니다.

F-35는 제공권을 장악하기 이전에는 스텔스 모드로 작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무기를 탑재할 수가 없지만 비스트 모드에서는 4배 이상의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전투기에 탑재할 수 있는 무기의 양은 얼마나 되는지를 한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전투기는 대부분 날개의 아래쪽에 폭탄을 탑재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렇게 미사일이나 폭탄을 외부에 탑재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을 “하드포인트(Hardpoint)”라고 부르거나 “무장스테이션(Weapon Station)” 또는 줄여서 “스테이션(St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전투기의 외부에 무기를 탑재하게 되면 당연히 공기의 저항이 증가하게 되고 따라서 연료소비량도 증가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투기에는 “이 정도 이상을 탑재하면 공기의 저항이 이 만큼 발생한다.”고 하는 일명 “드랙 인덱스(Drag index)”를 사전에 계산하여 매뉴얼로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기체의 외부에 무장을 할 때에는 공기의 저항으로 속도가 떨어지고 연비가 나빠지기 때문에 무장을 많이 한 전투기가 원활하게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공중급유가 필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무장스테이션(Weapon Station)

 

그러면 이러한 제약을 가지고 있는 전투기의 무장은 얼마까지 할 수 있는지를 F-15와 F-35를 예로 들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F-15E의 무게에 관한 것을 정리해보면 파운드를 kg으로 환산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는 날 수가 있지만 기본중량에 조종사의 무게를 합친 운용중량은 16,798kg입니다.

다음 F-15E의 표준이륙중량은 30,872kg이고 여기에 추가연료탱크(드롭 탱크) 2개를 연결하면 표준이륙중량은 34,731kg으로 증가하게 됩니다. 그리고 F-15E의 최대이륙중량인 36,774kg에서 2개의 드롭탱크를 추가한 중량을 뺀 2,043kg이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무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F-15E의 전투기로서의 기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최대이륙중량(36,774kg)에서 운용중량(16,798kg)을 뺀 무게(19.976kg)의 범위 안에서 작전거리와 기타 제반조건을 고려하여 “컨포멀 탱크(Conformal fuel tank)”에도 연료를 채우지 않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4.379kg의 중량을 이용할 것인지 등에 대한 치밀한 계산이 필요한 것입니다.

※ 전투기의 컨포멀 연료탱크

 

또한 전투기에 요구되는 사항은 단순히 항속거리와 속도만이 아니라 적의 레이더를 피하기 위해 저공비행을 한다든지 애프터 버너를 ○분간 사용하여 이륙 후 고도 ○○피트의 저공으로 ○○km를 비행한 다음 다시 애프터 버너를 ○분간 사용하여 작전을 수행하고 10,000피트에서 ○○km를 비행하여 귀환한다는 세부적인 작전내용에 따라서 소모되는 연료의 양도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전투기에 얼마나 많은 양의 무기를 탑재하는가 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드포인트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의 무게는 설계단계에서 이미 결정되어버리기 때문에 100kg가 한계인 하드포인트에 200kg의 폭탄을 장착할 수는 없으니 이런 점도 고려하여야 합니다.

F-35의 무장스테이션은 모두 11개이고 1~3은 왼쪽 날개, 4와 5는 좌현 폭탄창(Bomb bay), 스테이션 6은 동체 아래 중앙, 7과 8은 동체 우현 폭탄창, 마지막으로 스테이션 9~11까지는 오른쪽 날개의 위치에 있으며 장착할 수 있는 각각의 무게가 좌우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무장스테이션에서도 특히 기체중앙의 양옆에 있는 폭탄창에 탑재하는 무기는 무게뿐만이 아니라 길이의 제약도 받게 됩니다.

아래의 사진에 보이는 것은 F-35에 탑재된 “AIM-120 암람” 공대공미사일인데 이것을 유럽판 암람이라고 하는 “MBDA 미티어”로 교체할 경우에는 날개가 커서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미사일의 설계를 변경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 폭탄창의 우측은 “AGM-154 JSOW” 활공유도폭탄입니다.

 

MBDA 미티어

 

군에서는 최대한으로 무장을 하고 연료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륙하여 비행하다가 중간에서 공중급유를 받아 연료를 보충하는 무장탑재량을 우선시하는 방법을 사용할 뿐만 아니라 기온의 영향을 받기 쉬운 제트엔진의 특성에 따라 온도의 상승에 따른 추력의 감소는 필연적으로 최대이륙중량의 감소를 가져오기 때문에 현대전에서의 공중전은 공중급유기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으므로 미국은 항공모함에서 이륙할 수 있는 무인공중급유기 “MQ-25A”의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입니다.

F-22의 허리케인 피해는 지휘관의 잘못 때문일까?

F-22의 허리케인 피해는 지휘관의 잘못 때문일까?

미국 남동부를 강타한 허리케인 마이클로 인해 플로리다 서부 파나마시티에 있는 틴들(Tyndall) 공군기지에 있던 F-22 전투기가 심각한 피해를 입은 것을 두고 미 하원 군사위원회에서는 허리케인이 오기 전에 안전한 곳으로 옮기지 않은 이유가 궁금하다고 보고를 요구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디플로매트”의 보도에 의하면 17대의 F-22가 파손되었고 한화로 2조2천억 원에 달하는 경제적 손실을 입었다고 하는데 미하원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예보된 허리케인으로부터 F-22를 왜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다.

 

과연 틴들 공군기지의 사령관은 안이한 대처를 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F-22가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한 번 살펴보기로 하자.

비행기, 특히 스텔스 전투기와 전폭기는 100% 출동대기상태로 유지될 수는 없다는 점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번에 미공군의 연습기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조건으로 걸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임무준비율(mission-capable rates)을 80%로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미공군의 자료에 의하면 미공군 항공기의 평균 임무준비율은 2016년도에 72.1%였다가 2017년에는 71.3%로 감소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이번에 피해를 입은 F-22는 가장 낮은 임무준비율을 가진 기종으로서 2014년에는 72.7%이던 임무준비율이 2015년에는 67.4%, 2016년에는 60.18%를 보이다가 2017년에는 절반도 안 되는 49.01%의 준비율을 나타내어 2대 중 1대는 즉시 이륙을 할 수 없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다.

즉, 틴들기지에 있던 55대의 F-22 중에서 27~28대는 다른 곳으로 이동비행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예보되었던 허리케인 마이클의 등급은 2등급이었다가 4등급으로 예보가 변경되었는데 틴들기지의 격납고는 4등급에 견딜 수 없기 때문에 급박하게 F-22를 비롯한 항공기를 이동시키는 작업에 착수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틴들기지로부터 오하이오 주에 있는 라이트-패터슨 공군기지로 F-22를 이동시켰으나 나머지 즉시 이륙이 어려운 상태의 F-22는 정비인력과 부품수급의 문제로 다른 이동수단을 강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때 지휘관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생각할 수 있는 이동방법은 차량을 이용하여 기지에서 이동시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만 아니라 이동하는데 사용되는 고속도로의 여건이 장애로 작용하여 이동시키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물론 F-22의 날개를 분리하여 트레일러에 적재하고 운반하는 방법을 생각해볼 수도 있으나 그 또한 인력과 시간상의 제약이 있었을 것이다. 차량을 이용한 전투기의 운반에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도로의 폭보다 전투기의 폭이 F-22의 경우에는 3배가 넘기 때문에 4차선 도로를 완전히 점유하여 일반 시민들의 대피를 방해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에 있다.

아래의 사진은 F-15C를 트레일러에 싣고 운반하는 모습인데 실제 도로를 완전히 점유함으로써 교통체증을 유발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틴들기지에 있던 F-22 17대가 피해를 입은 것은 지휘관의 빠른 판단력과 대처에 의해 그나마 피해를 줄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평시 준비태세가 임무준비율을 훨씬 상회하는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거나 급하게라도 적절한 조치를 취했다는 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니라 칭찬 받아야 할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때구나 싶어 떠들어대기 좋아하는 정치인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충분히 따져본 다음에 비난을 해도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영화 U-571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의 잠수함 U-505

영화 U-571의 모델이 되었던 독일의 잠수함 U-505

매튜 맥커너히가 주인공인 타일러 대위 역을 맡아 독일 유보트로 위장한 채 U-571에 접근하여 총격전 끝에 암호해독기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지만, 이를 눈치챈 독일구축함의 공격으로 위기를 맞고, 가까스로 탈출하는 과정을 그린 잠수함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 중에서 수작으로 꼽히는 U-571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영화적 상상력이 가미된 부분이 많습니다.

실제와는 달리 허구인 것들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아래의 세 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U-571이란 잠수함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것은 U-505라는 IXC형 잠수함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최초로 암호해독기인 에니그마를 탈취한 것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것처럼, IXB형의 U-110으로 미국이 아닌 영국해군에 의해 1941년 5월 9일, 격렬한 전투 끝에 포획되어 견인되던 도중 침몰하였으며, 영화의 전체적인 모델이 된 U-505에서는 독일군의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잠수함에 들어가서 들고나오기만 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영화에서와는 달리 U-505를 포획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사람은 독일군 고트프리트 피셔(Gottfried Fischer) 뿐이었으며, 부상자 3명을 포함한 잠수함 승조원 58명은 전원 포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세 가지 사실을 차례대로 알아보기로 하겠습니다.

영화 U-571의 마지막에 소개하고 있는 것과 같이, 최초로 에니그마를 탈취하는데 성공한 것은 1941년 5월 9일, 영국해군의 작전명 프림로즈(Operation Primrose)였습니다.

 

영국해군의 구축함 불독(HMS Bulldog)의 폭뢰 공격을 받은 독일 U-110의 함장 렘프는 잠수함을 버리고 모두 탈출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바다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살아남은 독일군 포로에 따르면 수중에서 영국군의 총격으로 사망하였다고 하는데, 확인되지 않았으며 전투과정에서 함장이었던 렘프(Lemp)를 포함하여 모두 15명이 전사하였고, 32명이 포로가 되었는데, 이것이 영화 U-571에서 묘사하고 있는 탈취과정에서의 전투장면인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1944년 6월 4일, 미 해군 특공대가 U-505에서 암호해독기와 암호문서를 탈취하는데 성공하였다고 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이 영화 U-571의 전체적인 배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U-보트의 IXC형인 U-505는 인도양에서 연합군을 타격할 목적으로 히틀러가 일본에 2척을 양도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려호제500(呂号第五百)과 려호제501(呂号第五百 잠수함이었습니다.

이 중에서 려호제501은 1944년 2월 15일에 일본 해군에게 양도되었는데, 1달 보름 뒤인 1944년 3월 30일, 미 해군 구축함 프란시스 로빈슨에 의해 격침되었고, 승무원은 모두 전사하였습니다.

 

다시 U-505 얘기로 돌아가면, 1943년 10월 24일, 포르투갈령 아소로스제도에서 영국의 구축함에 발각되어, 폭뢰의 공격을 받자 장시간에 걸쳐 공격을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함장인 페터 체헤(Peter Zschech) 대위는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말았는데, 이것은 불명예스럽게도 전투 중에 잠수함 함장이 자살한 최초의 기록으로 남아있습니다.

이어서 제3대 함장으로 하랄트 랑어(Harald Lange)가 부임하였고, 1944년 6월 4일, 스페인령 리오 데 오로(Río de Oro) 근해, 241km에서 소나에 의해 탐지되어, 미 해군 호위항공모함 과달카날(USS Guadalcanal)과 5척의 구축함으로 편성된 태스크포스 그룹 22.3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U-505의 함장이었던 하랄트 랑어(Harald Lange)는 모든 승무원에게 퇴함명령을 내리고, 자침(自沈)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미 해군 소위 알버트 데이비드(Albert David)가 인솔하는 8명이 U-505의 내부로 들어가서 자폭장치를 해제하고, 엔진을 정지시켰으며, 함내에서 암호문서 등을 노획하였던 것입니다.

 

영화 U-571에서는 독일군과의 총격전을 묘사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모든 독일군은 퇴함(退艦)한 상태였기 때문에 미 해군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U-505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으며, 코닝 타워에서 발견된 유일한 독일군 전사자인 고트프리트 피셔(Gottfried Fischer)는 승선과정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전투에서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한편, 자폭장치를 해제한 U-505는 미 해군에 의해 견인되어 버뮤다의 포트 로열베이에 입항하였고, U-505의 승무원들은 러스턴 수용소(Camp Ruston)에 수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암호문서를 빼앗긴 것을 독일군이 알아차리고, 암호의 설정을 변경할 것을 우려하여, U-505의 노획과 승무원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쳤습니다.

그래서 포로가 된 U-505의 승무원들을 다른 전쟁포로들과 철저하게 격리시켰으며, 적십자사의 면회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독일 해군은 U-505를 침몰된 것이라 인정하고 승무원의 가족들에게는 작전 도중에 전사하였다는 통보를 하게 되었던 것이었죠.

이런 과정을 거쳐 노획되었던 U-505는 버뮤다 기지에서 USS 니모라는 위장명으로 정박하고 있다가, 포츠머스 해군기지로 옮겨져 방치되다시피 하고 있었고 급기야는 연습사격의 목표물로 사용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U-505를 포획하는 작전을 지휘했던 갤러리 제독(Admiral Gallery)이 U-505를 포격과 어뢰의 목표물로 사용하려는 계획에 반대하여, 시카고의 과학산업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는 일을 추진하였고, 이에 호응하는 시카고 주민들이 이전에 드는 비용 25만 달러를 모금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54년 9월, 미국 정부가 U-505를 시카고 과학산업박물관에 기증하여 지금도 일반에게 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