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만들어지는 액시스 샐리(Axis Sally)의 파란만장했던 삶

영화로 만들어지는 액시스 샐리(Axis Sally)의 파란만장했던 삶

전쟁 동안 영어로 적국의 선전방송을 하던 여성들을 샐리(Sally)라고 부른 예는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를 비롯하여 많이 있는데 이탈리아를 위한 선전방송을 했던 이탈리아계 미국여성인 리타 주카(Rita Zucca)도 액시스 샐리(Axis Sally)로 불렸다.

또한 한국전쟁 동안 북한을 위하여 영어로 방송을 했던 신원미상의 여성은 평양 샐리(Pyongyang Sally)로 불렸으며 샐리는 아니지만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위한 영어로 진행되었던 방송의 진행자로는 ‘서울의 수(Seoul City Sue)’가 가장 유명하다.

서울의 수(Seoul City Sue)로 불렸던 여성은 안나 월리스 수(Anna Wallis Suh)란 이름의 미국여성으로 그녀는 1938년 상해의 미국인학교에서 한국인 서규철을 만나 결혼을 했는데 미군정 하에서 서울에 있던 외교관의 자녀들을 지도하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남편의 좌익활동이 문제가 되어 해고되고 만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터진 6·25전쟁으로 순식간에 서울이 함락되자 그녀 부부는 북한정권에 충성을 맹세하였고 안나 월리스 수(Anna Wallis Suh)는 ‘라디오 서울(Radio Seoul)’이란 프로를 진행하였으며 이후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월북하여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에서 근무하다 1969년 대한민국의 간첩으로 활동하였단 죄명으로 총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울의 수(Seoul City Sue)로 불렸던 안나 월리스 수(Anna Wallis Suh)의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더 자세히 하기로 하고 오늘은 영화로 만들어지는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를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액시스 샐리(Axis Sally)란 제목으로 만들어지는 영화에서는 메도우 윌리엄스(Meadow Williams)가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 역을 맡았다고 전해지고 있는데 액시스 샐리(Axis Sally)는 이전부터 다양한 방송과 영화에 소개가 되어왔으며 가장 최근의 영화로는 ‘안나 성당의 기적’에서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Alexandra Maria Lara)가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의 역을 맡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1900년 11월 29일 메인주의 포틀랜드에서 태어난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의 원래 이름은 아버지인 빈센트 시스크(Vincent Michael Sisk)의 성을 딴 밀드레드 시스크(Mildred Elizabeth Sisk)였으나 그녀의 어머니가 1907년에 이혼을 하고 1911년에 치과의사였던 로버트 길라스(Robert Bruce Gillars)와 재혼을 하게 되면서 이름도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로 바뀌게 된다.

그 후 그녀의 나이 16세 되던 해에는 가족과 함께 오하이오주로 이사하여 1918년에는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Ohio Wesleyan University)에 입학하고 연극을 전공하였지만 마치지 못하고 중퇴를 한다.

그 후 여기저기 일자리를 전전하다 1929년 파리에서 6개월 살다가 귀국한 뒤 1934년에는 음악을 배우기 위해 독일로 떠나 베를린 외국어학교에서 영어교사를 지내던 중 1940년 5월 6일 당시 독일의 국영방송이었던 독일방송협회(Reichs-RundfunkGesellschaft)에 고용되어 미국에 반역하는 선전방송의 아나운서를 맡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단지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발탁되었던 것은 아니었으며 자칫하면 강제수용소에 끌려갈 뻔한 일을 겪기도 했다.

1934년 독일로 떠났을 때, 그녀는 혼자가 아니라 그녀의 어머니와 동행하였고 1936년에 있었던 제11회 베를린 올림픽도 함께 관람을 하며 지내다가 1939년, 그녀의 어머니만 미국으로 돌아가고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계속 독일에 남기로 한다.

그리고 그녀는 운 좋게도 당시 독일의 유명한 배우였던 브리짓트 호니(Brigitte Horney)의 비서로 일하면서 영화사 우파(UFA: Universum-Film AG)에서 제작한 영화의 번역을 담당하는 한편 독일영화에 대한 리뷰를 뉴욕타임즈에 기고하기도 했다.

당시 브리짓트 호니(Brigitte Horney)란 여배우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는 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에서 아치 히콕스 역을 맡았던 마이클 패스벤더가 신분을 감추고 SS의 장교와 게임을 하는 장면을 꼽을 수가 있다.

아무튼 외국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킬 때 보다는 보수도 높고 안정적이었던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독일방송협회(Reichs-RundfunkGesellschaft)의 라디오 프로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하여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아나운서가 된다.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미국에 반역죄를 범하는 독일의 선전방송 아나운서를 그만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약혼자 폴 칼슨(Paul Karlson) 때문이었다.

전운이 짙어지고 있던 당시 미국정부는 독일의 점령지에 있는 모든 미국인들은 그곳을 떠날 것을 권유하지만 미국으로 돌아가면 그녀와 결혼하지 않겠다는 약혼자 폴 칼슨(Paul Karlson) 때문에 베를린에 머물기로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 그녀에게는 큰 위기가 찾아오는데…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미국의 진주만을 기습공격하게 되자 그녀는 이것을 동료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비난했는데 이런 행동은 그녀를 방송에서 하차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보내질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었으며 결국 그녀는 독일에 대한 충성서약을 한 뒤에야 다시 방송에 복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귀국을 반대했던 약혼자는 동부전선에 배치되고 얼마 되지 않아 전사하고 마는데, 둘의 사랑이 깊지 않았던 때문인지, 아니면 불안함이 그녀를 내몰았던 때문인지는 몰라도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방송국의 책임자였던 막스 오토 코이슈비츠(Max Otto Koischwitz)와 관계를 가지게 된다.

유부남이었던 막스 오토 코이슈비츠(Max Otto Koischwitz)는 1942년 그가 맡고 있던 프로그램인 ‘Home Sweet Home’에 그녀를 캐스팅하게 되는데 이전까지 비정치적인 내용을 주로 방송했던 그녀는 ‘Home Sweet Home’에서는 연합군들의 향수병을 자극하여 전의를 떨어뜨리는 정치적인 방송을 진행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방송을 계기로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연합군 병사들 사이에서 베를린 비치(Berlin Bitch), 베를린 베이브(Berlin Babe), 올가(Olga) 및 샐리(Sally) 등의 별명으로 불리게 되는데 가장 널리 불리워진 별명이 바로 액시스 샐리(Axis Sally)였다.

그것은 아마도 방송 도중에 그녀를 표현해달라는 질문에 “아일랜드 타입의 진짜 샐리”라고 대답했던 것이 큰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와 막스 오토 코이슈비츠(Max Otto Koischwitz)의 가장 큰 합작품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1달 정도 앞둔 시점에 방송되었던 라디오 드라마 ‘비젼 오브 인베이젼(Vision of Invasion)’으로 이 방송은 그녀가 체포되어 유죄판결을 받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드라마에서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오하이오에 살면서 아들을 전선으로 보낸 어머니 역을 맡아 배에 탄 아들이 불에 타서 죽는 꿈을 꾸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D-데이의 D는 파멸, 재앙, 죽음, 패배, 덩케르크, 디에프를 의미한다.(The D of D-Day stands for doom, disaster, death, defeat, Dunkerque or Dieppe)”고 말한다.

베를린 공방전의 와중에도 방송을 계속했던 그녀는 1945년 독일이 항복하기 이틀 전인 1945년 5월 6일까지 방송을 했고 그녀는 독일점령지에 있던 실향민의 무리에 섞여 숨어지내는데 이런 그녀를 미국이 그냥 둘리는 만무해서 미국정부는 검사와 방첩대원을 파견하여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를 체포하도록 한다.

그러나 그녀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오랜 탐문 끝에 바바라(Barbara)란 가명을 쓰면서 숨어지내던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를 1946년 3월 15일에 체포하여 프랑크푸르트에 있던 미군기지(캠프 킹: Camp King)에 억류하였다가 1947년 1월 22일 미 법무부의 공식요청에 따라 미국으로 송환하여 1948년 8월 21일, 미국의 감옥에 수감하게 된다.

유죄판결을 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61년 6월 10일에 가석방으로 석방되었던 밀드레드 길라스(Mildred Gillars)는 고향인 오하이오로 돌아가서 살다가 1988년 6월 25일 사망하였는데 못다 한 그녀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한 번 하도록 할 생각이다.

아이러니 한 것은 성 요셉 공동묘지(St. Joseph Cemetery)에 묻혀 있는 그녀의 무덤은 2차 대전 참전용사들로 둘러싸여 있다고 하는 것인데 약혼자의 말을 뿌리치지 못해 독일에 남기로 결정하고, 곧이은 약혼자의 전사, 방송국 상급자와의 불륜, 소련군에 의한 강간, 도피, 체포와 재판, 그리고 투옥, 석방 후 암의 발병으로 사망하게 된 그녀의 이야기는 분명 영화의 소재로는 좋은 것일지 몰라도 한 인간으로서의 삶은 결코 행복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 같으며 그녀의 이야기는 책으로도 발간되어 아마존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양귀비를 가슴에  이유는?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양귀비를 가슴에 이유는?

미국의 현충일에 해당하는 매년 5월의 마지막 주 월요일에 열리는 메이저리그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가슴에 양귀비가 장식된 유니폼을 입고 나온다. 뿐만 아니라 영국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종전 기념일(Rememberance Day)인 매년 11월 11일에는 선수들이 가슴에 양귀비가 장식된 유니폼을 입고 출전한다.

이처럼 전쟁에 참전하여 숨져간 영령들을 기리는 뜻으로 양귀비를 가슴에 다는 전통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부터 유래가 되었는데 종전기념일 또는 영령기념일로 불리는 이 날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을 회상하고 전쟁으로 숨져간 사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19년 11월 7일 영국의 조지 5세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비공식적으로는 양귀비의 날(Poppy Day)이라고도 부른다.

스포츠 선수들이 입고 있는 유니폼에 장식된 양귀비는 특히 ‘현충일 양귀비(Remembrance poppy)’로 불리는데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들을 기념하기 위한 이 인공적인 양귀비 조화가 공식적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사용되었던 것은 1921년부터였다.

그러면 지금부터 인공 양귀비를 호국영령들을 추모하는 상징으로 사용하게 된 유래를 한 번 알아보도록 하자.

1차 세계대전의 격전장이었던 서부전선에 쏟아지던 포격 속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었던 양귀비는 이프르 전투(the battle of Ypres)에 군의관으로 참가했던 캐나다의 육군중령 존 맥크래(John McCrae)에게 시적인 영감을 주었고, 그는 ‘개양귀비 들판에서(원제: In Flanders Fields)’란 시를 1915년 5월에 써서 그 해 12월 8일에 펀치 매거진(Punch magazine)이란 잡지를 통해 출판하게 된다.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피었네,

줄줄이 서있는 십자가들 사이에.

그 십자가는 우리가 누운 곳 알려주기 위함.

그리고 하늘에는 종달새 힘차게 노래하며 날아오르건만

저 밑에 요란한 총소리 있어 그 노래 잘 들리지는 않네.

In Flanders fields the poppies blow

Between the crosses, row on row,

That mark our place; and in the sky

The larks, still bravely singing, fly

Scarce heard amid the guns below.

 

우리는 이제 운명을 달리한 자들.

며칠 전만 해도 살아서 새벽을 느꼈고 석양을 바라보았네.

사랑하기도 하고 받기도 하였건만

지금 우리는 플랜더즈 들판에 이렇게 누워 있다네.

We are the dead. Short days ago

We lived, felt dawn, saw sunset glow,

Loved, and were loved, and now we lie

In Flanders fields.

 

우리의 싸움과 우리의 적을 이어받으라.

힘이 빠져가는 내 손으로 그대 향해 던지는 이 횃불

이제 그대의 것이니 붙잡고 높이 들게나.

우리와의 신의를 그대 저 버린다면

우리는 영영 잠들지 못하리,

비록 플랜더즈 들판에 양귀비꽃 자란다 하여도.

Take up our quarrel with the foe:

To you from failing hands we throw

The torch; be yours to hold it high.

If ye break faith with us who die

We shall not sleep, though poppies grow

In Flanders fields.

사진은 바그람 공군 기지(출처: 미 공군 중앙 사령부)

 

캐나다에서는 종전기념일 행사에서 묵념이 끝나면 이 시를 낭독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쟁터의 척박한 땅에서 꽃을 피우는 개양귀비를 노래한 ‘개양귀비 들판에서(In Flanders Fields)’에 화답하여 1918년 11월 9일 미국 조지아 대학의 교수였던 모이나 마이클(Moina Belle Michael)이 ‘We Shall Keep the Faith’란 제목의 화답시를 발표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사망한 군인들을 기리는 상징으로 개양귀비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제시하게 된다.

 

그러나 개양귀비 인공조화가 세계적으로 전파되는데 크게 공헌을 한 사람은 프랑스 출신으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프랑스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미국에 왔던 안나 게랭(Anna Guérin)이라고 할 수 있다.

개양귀비를 현충일을 기념하는 꽃으로 사용하자는 공식적인 제안은 모이나 마이클(Moina Belle Michael)이 하였으나 그녀보다 앞서서 개양귀비를 사회적인 활동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개양귀비 여인(Poppy Lady of France)’ 또는 ‘프랑스에서 온 개양귀비 여인(Poppy Lady from France)’이라 불렸던 안나 게랭(Anna Guérin)이었다.

역사적으로는 ‘개양귀비의 날(Poppy Day)’이란 명칭의 공식행사는 1916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인공조화는 1916년 전쟁포로들을 위한 기금모금행사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아직은 그 규모도 작았고 전 사회적인 공감을 형성하지는 못하고 있었는데 안나 게랭(Anna Guérin)이 그녀가 주최하는 각종 자선행사에서 개양귀비의 인공조화를 사용하면서부터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키게 되었고, 마침내 1920년 9월 27일에 ‘미국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에서 개양귀비를 공식 꽃으로 지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미지 출처: The American Legion

 

영국에서 개양귀비의 인공조화를 처음으로 사용한 것도 1921년의 일로 전쟁으로 사망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기 위하여 얼 헤이그 재단(Earl Haig Fund)이 개최했던 기금모금행사에서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그 때 사용한 인공조화는 안나 게랭(Anna Guérin)이 생산한 것들을 수입한 것이었다. 그러나 1922년부터 영국재향군인회는 참전 상이용사들로 운영되는 공장에서 자체 생산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그 전통은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이처럼 붉은 개양귀비는 영연방의 여러 나라와 미국에서 현충일을 기념하는 꽃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보라색 양귀비는 전쟁으로 희생당한 동물들을 기리는 것으로 사용되고 흰색 양귀비는 전쟁이 없는 평화를 상징하며 현충일에 사용되기도 한다.

홋카이도에는 가리비 껍질로 만든 하얀 길이 있다.

홋카이도에는 가리비 껍질로 만든 하얀 길이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끈한 국물과 함께 먹는 조개찜을 비롯하여 꼬막에 굴요리까지 맛있는 안주들이 술을 부르는 날이 잦아지곤 한다.

그러나 맛있게 먹는 대신 남는 조개껍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준다.

한 해 동안 버려지는 굴껍데기의 양만 대략 30만 톤을 상회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근래 와서는 재활용되는 비율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여전히 처리방법에 있어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굴껍데기를 비롯한 패각류의 껍질은 난연성이라 소각처리가 쉽지 않고 분해가 어려운 탄산칼슘으로 인해 자연상태에서 생분해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껍질에 부착된 염분으로 인해 그대로 매립할 수도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료나 사료로 재활용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껍질에 묻어 있는 염분을 제거해야만 하기 때문에 길게는 야적한 상태로 1년간 방치한 채로 비를 맞게 하여 염분을 제거하고 그다음에 지상에 설치한 아래의 사진과 같은 수조에 넣어서 한번 더 염분을 제거하는 공정을 거친 뒤에 비료나 사료의 원료가 되는 분말을 제조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로 특히 가리비의 생산으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는 버려지는 가리비 껍질을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대신에 도로에 깔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부상한 곳이 있다.

 

홋카이도 북부의 왓카나이(稚内)에 있는 소야구릉(宗谷丘陵)은 왓카나이 풋패스의 소야구릉코스가 있는데 그 중 숏코스의 후반부 3㎞에 2011년부터 가리비껍질을 분쇄해서 깐 것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일본어로는 시로이 미치(白い道)라 부르며 우리말로는 ‘하얀 길’ 또는 ‘백조개의 길’로 불린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본산 가리비를 먹고 있을까?”란 포스팅을 통해서 2019년까지 증가일로에 있던 일본산 가리비의 수입실태를 알아본 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2022년에는 11,745톤을 수입하였고 그 금액은 오늘자 매매기준율로 환산하면 650여 억 원에 이르러 금액과 중량으로 모두 2019년도 대비 2배 이상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많은 양을 수입한 일본산 가리비를 비롯하여 우리가 음식점에서 먹는 패각류의 껍질은 절차와 규정에 따라 일반쓰레기로 잘 처리가 되고 있을까?

앞으론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사해보아야겠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들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들

맥주를 마시기 위해서 치킨을 먹는 것일까? 아니면 치킨을 먹기 위해서 맥주를 마시는 것일까? 아무튼 치맥은 우리 평범한 소시민들의 일상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세계 각국에는 맥주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정당들이 있다.

물론 지금은 해체되어 사라진 것들도 있지만 세계 각국에서 만들어진 맥주를 애호하는 사람들이 만든 정당들을 한 번 살펴보자.

 

1. 폴란드의 맥주애호가당(Polish Beer-Lovers’ Party)

1990년에 야누스 레윈스키라는 사람이 폴란드의 보드카 소비량을 줄이고 대신 맥주를 마시자는 취지로 정당을 설립한다고 홍보하면서 5천여 명의 사람들이 엽서로 입당신청을 하여 만들어지게 되었다.

정당을 설립한다는 계획은 농담이었는데 모임이 거듭되면서 높은 생활수준은 표현과 집회의 자유에서 비롯된다는 의견에 따라 폴란드 국민의 삶의 질을 높이자는 정책집단으로 변화하여 1991년 기존 정치인들에게 실망하고 있던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아 하원에서 16석을 획득하여 중견정당으로 우뚝 서게 된다.

그러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는지 1992년에 이 정당은 “Large Beer”와 “Small Beer”당으로 분열되면서 “Large Beer”당은 이름을 “폴란드 경제계획당(Polish Economic Program)”으로 바꾸었고 “Small Beer”당은 기존의 정당 명칭을 유지하면서 활동을 계속하였으나 1997년 의석을 모두 잃으면서 두 당은 각각 폴란드 민주연합과 자유민주당에 흡수되고 말았다.

 

2. 러시아의 맥주애호가당(Beer Lovers Party)

1994년에 설립된 이 정당은 “보드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나라를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하면서 정치를 맥주파티처럼 즐겁게 만들어 민중들의 신뢰를 되찾는 것을 목표로 하였는데 창당 1년에만 5만 명의 당원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95년의 의회선거는 무려 43개에 이르는 정당이 난립한 가운데 맥주애호가당은 낮은 득표율로 1998년에는 정당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고 지금은 일부만이 계속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3. 벨라루스 맥주애호가당(Beer Lovers Party of Belarus)

1993년 12월 30일에 공식 등록한 이 정당은 “더 자유로운 벨라루스를 목표”로 하고 활동을 벌였으나 당수였던 안드레이 로마쉬노프(Andrey Romashevsky)가 벨라루시 국기를 태운 혐의로 체포되어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체코로 망명을 하면서 붕괴되었고 1998년 법원의 명령으로 해산되었다.

 

4. 우크라이나 맥주애호가정당(Ukrainian Beer Lovers Party)

1992년에 민주주의와 자유경제, 환경보호 및 개인의 자유를 표방하며 설립한 이 정당은 당원이 모두 합쳐 1,500명을 넘지 못하여 1995년의 선거에는 출마자를 내지도 못하였는데 1997년의 선거에서도 자유주의 정당의 활동을 방해하는 정부에 의해 선거포스터조차도 만들지 못하게 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5. 체코의 맥주친구당(Friends of Beer Party)

맥주친구당은 1990년 1월 체코의 맥주생산 중심지인 플젠에서 설립되었는데 주된 당원은 플젠의 대학생들이었으며 설립과 동시에 1만5천에 달하는 당원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1990년의 선거에서 득표율 0.1%라는 초라한 성적을 거두는데 그쳤고 1993년 사회민주주의연합과 연계하여 출마한 선거에서도 1.3%의 득표율을 얻는데 그치고 말았다.

1997년에는 여러 정당과 연합하면서 이름을 “맥주친구학회”로 변경하였으나 선거에서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게 되어 정치활동의 중지를 선언하기 이르렀고 이제는 올바른 맥주를 만드는 방법이나 맥주축제 개최 등의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6. 미국의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의 정당(American Beer Drinker’s Party)

1997년 오하이오 주에서 설립한 이 정당은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이 모여서 풀뿌리 정치변혁을 목표로 창당되었는데 2012년 이후로는 홈페이지의 업데이트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점으로 보아 유명무실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우리나라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치맥을 즐기는 사람들이 모여 정당을 만든다면 어떻게 될까? 기존정치인들에게 환멸을 느끼는 국민들에게 시원한 맥주와 같이 청량감을 줄 수 있을까?

미스터 션사인의 모리 타카시는 실존인물일까?

미스터 션사인의 모리 타카시는 실존인물일까?

배우 김남희씨가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일본군 대좌 “모리 다카시”역을 맡아 뛰어난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데,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옆에 있으면 한 대 때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기를 잘하더군요~

배우 김남희씨는 오는 9월 29일 오랫동안 사귀었던 연인과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니 항상 행복하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런데 “미스터 션샤인” 18회에서 “모리 다카시”는 이런 말을 매국노 이완익에게 합니다. “나는 임진년에 내 선조들이 조선에게 당했던 수치를 반복할 생각이 없어!”라구요~

그러면 “모리 다카시”의 조상 중에는 임진왜란에 참가한 사람이 있다는 것인데, 극중에서 일본의 힘깨나 쓰는 가문이라는 모리가문은 실제 어떤 가문이고 모리다카시는 실존인물인지 궁금증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김은숙 작가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면 “왜 이름이 모리 다카시인거야? 실존인물이야? 그 이름을 사용한 이유가 있어?”라고 물어보면 가장 빠르고 좋겠지만 알지를 못하니 애써 추론을 해볼 수밖에요^^

그러면, 지금부터 재미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모리 다카시”의 가문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극중 “모리 다카시”는 완전한 허구의 인물이란 것입니다.

아무튼 드라마에서 모리 다카시가 말한 “나는 임진년에 내 선조들이 조선에게 당했던 수치~”라고 하는 대사에 근거하면 그의 조상들 중에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람이 있다는 말이 되는데 한국어로 모리라고 발음하는 인물 중에서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사람 중에는 일본어 모리(森)란 성을 쓰는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란 사람과 모우리라고 발음하는 모우리(毛利)란 성을 사용하는 모우리 테루모토(毛利輝元)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극중에서 열연을 보여주는 김남희씨를 보면 결코 모우리라고 읽는 일본어를 모리라고 발음하지는 않았을 테니 임진왜란에 참가했던 사람의 성은 분명히 모리(森)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강원도 방면에서 남하하여 잔악한 살상을 저지른 왜군 중에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란 자가 있는데 아마도 극중 모리 다카시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히 이 자가 다카시의 조상일 가능성이 농후해보입니다.(사실이 아님은 아시죠?^^)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일본군 4군이 원주로 침공해오자 당시 원주목사로 있던 김제갑(金悌甲)은 영원산성(鴒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하다가 성이 함락되어 부인과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게 됩니다.

이 여세를 몰아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이끄는 일본군은 계속해서 남하를 하게 되고 이 때 봉화에서 의병군들과 일전을 벌이게 되는데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의병들은 개전초기에는 600여 명의 병력으로 1,600여 명이나 되는 왜군을 무찌르지만 결국에는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두고 극중의 모리 다카시는 “선조가 당했던 치욕”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잔인성이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오마이뉴스의 자료를 인용하면(원문보기) “많은 군사를 잃은 일본군은 분풀이를 하느라 류종개, 윤흠신, 윤흠도, 김인상, 권경 등 전사한 아군 장수들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머리를 하늘에 매달았다. 아직 죽지 않은 아군은 불로 몸을 지졌다.(<삼강행실사적>)’ 왜적이 물러간 뒤 김인상의 부인은 남편의 시신을 도저히 알아볼 수 없어서 자신이 지어주었던 옷으로 겨우 분별해 장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창을 잘 썼다고 하며 특히 열십자창의 명수였다고 하는데 아래의 그림은 모리 요시나리(森吉成)가 우사야마전투(宇佐山の戦)에서 부상당한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 오다 노부하라를 엎고 싸우는 모습을 그린 것인데 결국 이 전투에서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도 오다 노부하라와 함께 죽음을 맞게 됩니다.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인 자이지만 자기 가족은 중했던 모양인지 애처가로 알려진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정실부인과의 사이에 6남3녀의 자식을 두었다고 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모리 란마루(森蘭丸)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모리 나리토시(森成利)인데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오다 노부나가를 보필하는 시동(侍童)이며 근습(近習)이었으며 오다 노부나가의 남색의 대상이었는데 그의 동생 모리 나가우지(森長氏)의 나이 15세 때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일으킨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으로 1582년 6월 21일 오다 노부나가와 함께 사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드라마에서 모리 다카시가 말했던 임진왜란 당시의 선조로 유추되는 모리 요시나리(森吉成)는 1570년 10월 9일 사망하여 지금은 기우현의 아츠지성(安土城)에 저택지가 남아있습니다.

아무튼 tvN의 인기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가공의 인물 “모리 다카시”는 임진왜란 당시 잔인함을 보여준 모리 요시나리(森吉成)의 후손이 아닐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은 전혀 사실이 아닌

재미로 알아본 내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편견 때문에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브론테 자매

편견 때문에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던 브론테 자매

사진은 Philip Halling이 찍은 브론테 자매의 동상

중학생 시절 다니엘 디포(Daniel Defoe)의 소설 ‘로빈슨 크루소’(원제는 요크의 선원 로빈슨 크루소의 생애와 이상하고 놀라운 모험(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 of York))는 7번을 내리 읽었을 만큼 내게는 감명적인 소설이었다.

그 다음으로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을 꼽으라면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의 제인 에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샬롯 브론테는 우리에게 브론테 자매로 알려진 세 사람 중의 한 명이고 흔히들 맏이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녀의 위로 두 명의 언니들이 있었으나 영양실조와 결핵으로 사망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와 함께 소설 ‘폭풍의 언덕(Wuthering Heights)’을 쓴 에밀리 브론테와 ‘아그네스 그레이(Agnes Grey)’를 쓴 막내 앤 브론테의 세 사람을 우리는 흔히 ‘브론테 자매’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들 자매는 소설을 출간하기 전에 공동으로 시집(Poems by Currer, Ellis, and Acton Bell)을 출판할 때 필명을 사용하였는데 이 필명들이 모두 남자의 이름이란 것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 같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이 2013년에 발표한 범죄소설 Cuckoo’s Calling은 ‘Robert Galbraith’라는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했고 출판사 편집자였던 David Shelley는 “여자가 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고 나중에 밝힌 바가 있었다. 이후 조앤 롤링이 쓴 것이라는 사실이 그녀의 변호사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판매가 부진하던 이 책은 단숨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는 일이 있었다.

조앤 롤링이 남자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는 페르소나를 벗어버리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이와는 달리 오늘의 주인공들인 브론테 자매는 여성에 대한 편견 때문에 남자의 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즉 샬롯 브론테는 ‘Currer Bell’을 에밀리 브론테는 ‘Ellis Bell’을 막내인 앤 브론테는 ‘Acton Bell’이란 남자이름을 각각 필명으로 사용하였고 유명한 소설 ‘제인 에어’와 ‘폭풍의 언덕’ 또한 본명이 아닌 그녀들의 필명으로 출판되었다.

이후 문학비평가들로부터 관대한 평을 받게 되면서 이들 자매는 필명이 아닌 본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폭풍의 언덕’의 4판의 서문에서 언니인 샬롯 브론테(Charlotte Bronte)는 남자이름을 필명으로 사용한 이유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다.

“Averse to personal publicity, we veiled our own names under those of Currer, Ellis, and Acton Bell; the ambiguous choice being dictated by a sort of conscientious scruple at assuming Christian names positively masculine, while we did not like to declare ourselves women, because — without at that time suspecting that our mode of writing and thinking was not what is called ‘feminine’-we had a vague impression that authoresses are liable to be looked on with prejudice 하략”

 

샬롯 브론테가 밝힌 이유를 요약하면 확실하게 남자의 이름이라고 알 수 있는 크리스천 네임이 아닌 애매한 이름을 사용한 이유는 남자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양심적인 망설임과 여성이 글을 쓰는 것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던 빅토리아 시대의 분위기 때문에 여성임을 밝히고 싶지 않았던 생각이 혼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백 년도 훨씬 이전인 빅토리아 시대에 살았던 그녀들과는 달리 현대를 살고 있는 한국의 여성들은 어떨까?

‘남녀 임금격차지수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는 대한민국’이란 글에서도 언급했던 바와 같이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이 발표한 세계의 성별 격차지수(The Global Gender Gap Index)에서도 대한민국은 최하위권에 머물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발생하는 남녀의 임금격차는 2017년까지 15년간이나 연속으로 부동의 1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브론테 자매가 필명을 버리고 자신들의 본명을 사용한 것과 같이 우리사회에 아직도 뿌리 깊게 존재하는 여성에 대한 편견의 벽은 언제쯤 허물어질 수 있을까?

일본 유후인의 한자표기는 由布院과 湯布院 어느 쪽이 맞을까?

일본 유후인의 한자표기는 由布院과 湯布院 어느 쪽이 맞을까?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에 이어서 오늘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유후인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알아보자.

유후인을 표기하는 한자는 湯布院과 由布院 두 가지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인터체인지에는 湯布院이라 표기하고 역이름은 由布院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유후인(由布院)을 다녀온 것일까? 유후인(湯布院)을 다녀온 것일까? 지금부터 그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자.

1955년 2월 1일, 유후인쵸(由布院町)와 유노히라무라(湯平村)를 합쳐 유후인쵸(湯布院町)가 되었고, 2005년 10월에는 오이타군의 하사마마치(挾間町)와 쇼나이마치(庄内町) 및 유후인쵸(由布院町)를 합쳐서 유후시(由布市)가 되었으므로 행정구역상으로 유후인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4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유후인영와제와 유후인음악제를 비롯해 우시쿠이젯큐타이카이(牛喰い絶叫大会)라는 오이타현에서 나는 소고기(豊後牛: 분고규)를 먹고 누가 소리를 크게 지르는가를 겨루는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3대 원칙인 녹색, 공간, 평온을 고수하면서 유후인을 지켜나가고 있다.

일본은 온천법에 근거하여 환경대신이 지정하는 온천을 국민보양온천지(国民保養温泉地)라고 하는데 유후인온천은 1959년 5월 5일 유노히라온천(湯平温泉)과 함께 유후인온천(由布院温泉)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10월 4일에는 유후시내의 츠가하라온천(塚原温泉), 쇼나이온천(庄内温泉), 하사마온천(挾間温泉)까지를 합하여 유후인온천향(湯布院温泉郷: 유후인온센쿄우)로 확대지정되었다.

이에서 보듯 유후인이란 이름의 한자표기는 일본정부에서조차도 由布院과 湯布院을 병용하고 있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유노히라쵸(湯平町)를 포함하면 유후인(湯布院)이고 포함하지 않으면 유후인(由布院)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조차도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적어지면서 지금은 가타카나로 유후인(ゆふいん)이라 표기하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유후인쵸(湯布院町)로 이름이 바뀌기 이전의 유후인쵸(由布院町)의 유후인이란 지명은 예로부터 닥나무와 꾸지나무로 만든 목면(木綿)이 많이 나던 곳이라 해서 유후(木綿: ゆふ)라 불리었으며 일본의 만엽집에는 지금의 유후다케(由布岳)를 유후노야마(木綿の山)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후에 율령제 시대에 정창원(正倉院)과 같은 큰 창고(院)가 생기면서 원(院)자가 붙어서 유후인(由布院)이란 지명으로 되었다.

1952년 유후인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뜻을 모으면서부터 청년단장 이와오 히데카즈(岩男額一)를 중심으로 골프장 건설을 저지하였고 독일 바덴바일러(Badenweiler)를 50일 동안 방문하여 배운 것을 접목하여 지금의 온천마을로 만들었던 역사는 오이타현청에 근무하면서 이를 지켜보았던 키타니 후미히로(木谷文弘)가 쓴 책 ‘유후인의 작은 기적(由布院の小さな奇跡)’에 잘 기록되어 있다.

스페인 구엘공원 세탁부 회랑 명칭의 유래

스페인 구엘공원 세탁부 회랑 명칭의 유래

스페인을 찾는 한국관광객들의 필수 방문코스인 구엘공원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으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있어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볼까 한다.

안토니 가우디가 만든 구엘공원에는 세탁부 회랑이라 부르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세탁부들이 비가 오는 날엔 비를 맞지 않고 오갈 수 있도록 하거나 햇볕을 피해서 이동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라 설명하는 글들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인지는 모르지만 틀린 정보라는 것을 알아두자.

먼저 구엘공원의 공식 홈페이지에 있는 지도를 보면 세탁부의 회랑이라 부르는 곳을 워시우먼즈 포르티코(Washerwoman’s portico)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한글로 번역하면 세탁하는 여인들이 지나다니는 현관 정도가 되겠는데 아마도 이에서 비롯하여 세탁부들이 지나다기기 위한 회랑이란 말이 생겨난 것은 아닐까 짐작이 된다.

그런데 스페인어로 표기된 구엘공원의 안내판은 워시우먼즈 포르티코(Washerwoman’s portico)를 카탈루냐어로 비아둑테 델라 부가데라(Viaducte de la Bugadera) 또는 포르티코 델라 부가데라(Pórtico de la Bugadera)로 표시하고 있는데 부가데라는 카탈루냐어로 세탁하는 일을 하는 여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세탁부의 회랑이라 부르게 된 유래는 회랑의 입구에 있는 기둥 중의 하나가 머리에 짐을 지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것이 세탁물을 머리에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을 닮았다고 해서 출입구를 세탁부의 현관이라 부르고 그 회랑을 세탁부의 회랑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즉 세탁부들이 다닐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세탁부의 회랑으로 부르게 된 것이란 말은 틀린 정보란 것이다.

그러나 사실 구엘 공원의 진실은 가우디가 직접 밝히지 않는 것들은 어느것 하나도 분명한 것이 없다. 따라서 세탁부의 회랑으로 부르게 된 여인의 기둥도 이집트의 제사용 공물을 지고 가는 오퍼링 베어러(Offering bearers)를 모방한 것이라는 일각의 주장도 있으나 공원당국의 공식입장은 세탁물을 이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다.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일본 유후인(湯布院)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맛보는 음식을 들라면 단연코 대회에서 금상(金賞)을 받았다는 금상고로케(金賞コロッケ)일 것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런 조그마한 곳에서 만드는 고로케가 일본에서 1등을 했다니 얼마나 맛이 좋길래 그런 걸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유후인에 있는 금상고로케를 파는 가게 중에서 금린호(金鱗湖:긴린코) 가까이 있는 가게를 소개하는 글이나 광고들이 본점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면 지금부터 유후인의 금상고로케를 판매하는 곳에서 만든 고로케가 금상을 받은 것인지 그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금상고로케의 진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대표팀의 선수로도 뛰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일화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나카타 히데토시는 현역을 은퇴한 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오픈하는 나카타 닷넷 카페(nakata.net cafe)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아프리카 월드컵이 열렸던 2010년에는 하라주쿠역 근처에서 카페를 오픈하였고 그 카페에서 판매한 음식들 중에는 나카타 히데토시가 유후인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금상고로케도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나카타 히데토시가 금상고로케 판매를 위한 승낙을 받았던 곳은 유후인에 있는 가게였을까?

유후인의 금상고로케가 고로케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면 나카타는 그곳의 대표에게 허락을 구했겠지만 의외로 나카타가 찾아가 판매허락을 구한 곳은 야마구치현 (山口県)에 있는 쇼짱고로케(昭ちゃんコロッケ)라는 곳이었다.

나카타 히데토시가 판매를 위해 허락을 얻으려 했던 고로케 가게는 유후인에 있는 가게가 아니라 야마구치현에 있는 가게였던 사실에서 유후인의 금상고로케 가게가 직접 금상을 받은 가게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1947년 야마구치시에서 식육점을 운영하고 있던 다나카 마사미(田中正美)는 본인이 좋아하던 고로케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10여년의 노력 끝에 1957년부터 고로케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판매하는 고로케의 이름을 쇼짱고로케(昭ちゃんコロッケ)라고 지었던 것은 다나카 마사미의 동생이 노래를 잘불러 쇼짱이라 불리웠기도 했고 다나카 마사미도 당시 쇼짱의 모험이란 만화를 좋아해서 쇼짱고로케라 명명하고 아예 상표등록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야마구치현에서는 맛집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바로 고로케대회에 참가하여 금상을 받았던 것이었다.

1987년 열린 ‘제13회 전국식육산업전’ 행사의 일환으로 ‘전국 수제 고로케 콘테스트’가 NHK의 주관으로 개최되었는데 바로 이 대회에서 쇼짱고로케가 금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NHK의 ‘일본열도 지금 6시’란 프로를 필두로 각 방송사와 언론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2004년에는 제조공정을 자동화하고 공장을 증설하게 된다.

유후인에서 금상고로케를 먹어본 사람들은 갓 구워낸 고로케의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좋다는 말들을 하지만 사실 금상고로케는 즉석에서 반죽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급속냉동한 것을 튀겨서 만든다.

쇼짱고로케의 현 대표인 다나카 미토(사진 오른쪽)씨는 2009년 자신을 찾아와 고로케를 판매하게 해달라고 말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유후인의 명물로 이름 높은 금상고로케의 원조는 야마구치현에 있는 쇼짱고로케주식회사이며 유후인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마구치는 물론 히로시마, 시마네, 오카아먀 등지의 매장은 물론 온라인 구매를 통해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얘기의 결론이다.

지상낙원이란 이름의 항공모함

지상낙원이란 이름의 항공모함

남북대화의 창구를 차단한 북한이 오래전 체제선전을 위해 대남삐라를 살포할 때 내세웠던 문구의 하나로 북한은 지상낙원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북한의 실상을 꼬집어 낙원(樂園)이 아니라 떨어질 락(落)을 써서 락원(落園)이라고 하거나 지옥과도 같은 곳이라는 뜻으로 나락(奈落)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중국은 윈난성 티베트족자치주의 중뎬(中甸)이란 지역을 제임스 힐튼이 쓴 잃어버린 지평선이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이상향이라고 하면서 아예 지명을 샹그리라(香格里拉)로 바꾸기도 했다.

이처럼 공산주의사회에서 낙원을 강조하는 모양을 쉽게 볼 수 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4년 2월, 미국에서는 12번째 에섹스급 항공모함이 지상낙원이라 명명되어 취역하였는데 그 항공모함의 이름은 USS 샹그리라(USS Shangri-La)이다.

농담이 진담이 된다는 뜻의 영어표현 “Many a true word is spoken in jest.”가 딱 들어맞는 사례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항공모함 USS 샹그리라(USS Shangri-La)호의 이름은 일본의 진주만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실행되었던 둘리틀 공습에서 비롯되었다.

1942년 4월 18일 태평양상의 미국 항공모함 호넷호에서 출격한 B-25 폭격기 16대가 도쿄를 비롯하여 요코하마, 나고야, 고베 등을 폭격하자 폭격기들이 어디서 출격하였는지가 관심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미 본토로부터 출격해 일본까지 날아간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에 많은 기자들은 어디서 출격했는지를 궁금해 했고 둘리틀공습과 관련한 루즈벨트 대통령의 기자회견 석상에서도 이런 질문이 나왔다.

이때 루즈벨트 대통령은 폭격기의 발진은 샹그리라였다고 대답하였는데 농담으로 한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써, 출격한 장소는 샹그리라라는 실제하는 장소였다고 보도한 신문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둘리틀공습으로부터 약 2년 뒤인 1944년 2월 24일, 항공모함 USS 샹그리라(USS Shangri-La)의 진수식이 거행되었는데 항공모함의 이름을 결정하는 계기가 된 둘리틀공습 당시, 중령으로서 도쿄공습의 책임을 맡았던 제임스 둘리틀(James Harold Doolittle)의 부인 조세핀 둘리틀(Josephine Doolittle)이 초대되어 샴페인을 깨뜨렸다고 한다.

 

지상낙원이라던 북한은 빗장을 다시 잠갔고 세상은 코로나로 아직도 신음 중이며 인종차별이 불러온 미국과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이 불러온 사태는 혼란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

농담이 진담된다는 말도 있는데 우리 겨레가 한마음으로 염원하는 통일은 언제쯤이나 이뤄지고 세계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상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