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

일본 유후인(湯布院)을 방문하는 한국인 관광객들이 빼놓지 않고 맛보는 음식을 들라면 단연코 대회에서 금상(金賞)을 받았다는 금상고로케(金賞コロッケ)일 것이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이런 조그마한 곳에서 만드는 고로케가 일본에서 1등을 했다니 얼마나 맛이 좋길래 그런 걸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

게다가 유후인에 있는 금상고로케를 파는 가게 중에서 금린호(金鱗湖:긴린코) 가까이 있는 가게를 소개하는 글이나 광고들이 본점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어서 더 그렇게 생각하기가 쉽다.

그러면 지금부터 유후인의 금상고로케를 판매하는 곳에서 만든 고로케가 금상을 받은 것인지 그 진실을 알아보기로 하자.

금상고로케의 진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대표팀의 선수로도 뛰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일화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나카타 히데토시는 현역을 은퇴한 뒤 월드컵이 열리는 기간 동안 한시적으로 오픈하는 나카타 닷넷 카페(nakata.net cafe)를 운영하고 있는데 남아프리카 월드컵이 열렸던 2010년에는 하라주쿠역 근처에서 카페를 오픈하였고 그 카페에서 판매한 음식들 중에는 나카타 히데토시가 유후인에서 처음으로 맛보았던 금상고로케도 들어있었다.

 

그렇다면 나카타 히데토시가 금상고로케 판매를 위한 승낙을 받았던 곳은 유후인에 있는 가게였을까?

유후인의 금상고로케가 고로케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면 나카타는 그곳의 대표에게 허락을 구했겠지만 의외로 나카타가 찾아가 판매허락을 구한 곳은 야마구치현 (山口県)에 있는 쇼짱고로케(昭ちゃんコロッケ)라는 곳이었다.

나카타 히데토시가 판매를 위해 허락을 얻으려 했던 고로케 가게는 유후인에 있는 가게가 아니라 야마구치현에 있는 가게였던 사실에서 유후인의 금상고로케 가게가 직접 금상을 받은 가게가 아님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1947년 야마구치시에서 식육점을 운영하고 있던 다나카 마사미(田中正美)는 본인이 좋아하던 고로케를 직접 만들어 보기로 결심하고 10여년의 노력 끝에 1957년부터 고로케를 판매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판매하는 고로케의 이름을 쇼짱고로케(昭ちゃんコロッケ)라고 지었던 것은 다나카 마사미의 동생이 노래를 잘불러 쇼짱이라 불리웠기도 했고 다나카 마사미도 당시 쇼짱의 모험이란 만화를 좋아해서 쇼짱고로케라 명명하고 아예 상표등록을 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야마구치현에서는 맛집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던 모양인데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바로 고로케대회에 참가하여 금상을 받았던 것이었다.

1987년 열린 ‘제13회 전국식육산업전’ 행사의 일환으로 ‘전국 수제 고로케 콘테스트’가 NHK의 주관으로 개최되었는데 바로 이 대회에서 쇼짱고로케가 금상을 수상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NHK의 ‘일본열도 지금 6시’란 프로를 필두로 각 방송사와 언론에 소개되면서 전국적으로 판매망을 확장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2004년에는 제조공정을 자동화하고 공장을 증설하게 된다.

유후인에서 금상고로케를 먹어본 사람들은 갓 구워낸 고로케의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운 맛이 좋다는 말들을 하지만 사실 금상고로케는 즉석에서 반죽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장에서 급속냉동한 것을 튀겨서 만든다.

쇼짱고로케의 현 대표인 다나카 미토(사진 오른쪽)씨는 2009년 자신을 찾아와 고로케를 판매하게 해달라고 말했던 나카타 히데토시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실현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가 있다.

유후인의 명물로 이름 높은 금상고로케의 원조는 야마구치현에 있는 쇼짱고로케주식회사이며 유후인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야마구치는 물론 히로시마, 시마네, 오카아먀 등지의 매장은 물론 온라인 구매를 통해서 맛볼 수 있다는 것이 오늘 얘기의 결론이다.

일본 유후인의 한자표기는 由布院과 湯布院 어느 쪽이 맞을까?

일본 유후인의 한자표기는 由布院과 湯布院 어느 쪽이 맞을까?

‘유후인 금상고로케의 진실’에 이어서 오늘은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유후인에 대해서 몰랐던 것들을 알아보자.

유후인을 표기하는 한자는 湯布院과 由布院 두 가지가 함께 사용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인터체인지에는 湯布院이라 표기하고 역이름은 由布院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럼, 우리는 유후인(由布院)을 다녀온 것일까? 유후인(湯布院)을 다녀온 것일까? 지금부터 그 차이를 알아보도록 하자.

1955년 2월 1일, 유후인쵸(由布院町)와 유노히라무라(湯平村)를 합쳐 유후인쵸(湯布院町)가 되었고, 2005년 10월에는 오이타군의 하사마마치(挾間町)와 쇼나이마치(庄内町) 및 유후인쵸(由布院町)를 합쳐서 유후시(由布市)가 되었으므로 행정구역상으로 유후인은 소멸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4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고 유후인영와제와 유후인음악제를 비롯해 우시쿠이젯큐타이카이(牛喰い絶叫大会)라는 오이타현에서 나는 소고기(豊後牛: 분고규)를 먹고 누가 소리를 크게 지르는가를 겨루는 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주민들은 마을을 지키는 3대 원칙인 녹색, 공간, 평온을 고수하면서 유후인을 지켜나가고 있다.

일본은 온천법에 근거하여 환경대신이 지정하는 온천을 국민보양온천지(国民保養温泉地)라고 하는데 유후인온천은 1959년 5월 5일 유노히라온천(湯平温泉)과 함께 유후인온천(由布院温泉)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10월 4일에는 유후시내의 츠가하라온천(塚原温泉), 쇼나이온천(庄内温泉), 하사마온천(挾間温泉)까지를 합하여 유후인온천향(湯布院温泉郷: 유후인온센쿄우)로 확대지정되었다.

이에서 보듯 유후인이란 이름의 한자표기는 일본정부에서조차도 由布院과 湯布院을 병용하고 있었으나 엄밀하게 말하면 유노히라쵸(湯平町)를 포함하면 유후인(湯布院)이고 포함하지 않으면 유후인(由布院)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주민들조차도 이것을 구분하는 것이 적어지면서 지금은 가타카나로 유후인(ゆふいん)이라 표기하는 곳이 점차 늘어나고 있다.

유후인쵸(湯布院町)로 이름이 바뀌기 이전의 유후인쵸(由布院町)의 유후인이란 지명은 예로부터 닥나무와 꾸지나무로 만든 목면(木綿)이 많이 나던 곳이라 해서 유후(木綿: ゆふ)라 불리었으며 일본의 만엽집에는 지금의 유후다케(由布岳)를 유후노야마(木綿の山)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후에 율령제 시대에 정창원(正倉院)과 같은 큰 창고(院)가 생기면서 원(院)자가 붙어서 유후인(由布院)이란 지명으로 되었다.

1952년 유후인에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해 주민들이 뜻을 모으면서부터 청년단장 이와오 히데카즈(岩男額一)를 중심으로 골프장 건설을 저지하였고 독일 바덴바일러(Badenweiler)를 50일 동안 방문하여 배운 것을 접목하여 지금의 온천마을로 만들었던 역사는 오이타현청에 근무하면서 이를 지켜보았던 키타니 후미히로(木谷文弘)가 쓴 책 ‘유후인의 작은 기적(由布院の小さな奇跡)’에 잘 기록되어 있다.

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글렌코 대학살

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글렌코 대학살

허무하게 끝을 맺은 ‘왕좌의 게임’ 시리즈는 시즌 8까지 방영되는 동안 수많은 화제를 만들었는데 아직도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아 있는 장면들 가운데에는 시즌3에서 방영되었던 제9화 ‘피의 결혼식’도 포함되어 있을 것 같다.

북부의 왕과 그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결혼식에서 학살당하는 장면은 왕좌의 게임의 작가인 조지 R.R. 마틴(George R. R Martin)이 밝힌 것과 같이 스코틀랜드의 역사에 나오는 두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지 R.R. 마틴(George R. R Martin)에게 영감을 준 두 가지 사건은 첫 번째가 블랙 디너(Black Dinner)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글렌코 대학살(Massacre of Glencoe)이었다.

1440년에 일어난 블랙 디너(Black Dinner)는 블랙 더글라스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던 스코틀랜드 클랜 더글라스(Clan Douglas) 가문의 힘이 강력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클랜 더글라스(Clan Douglas) 가문의 권력자들을 제임스 2세가 식사에 초대한 다음 죽인 사건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제임스 2세가 초대를 한 것이 아니라 당시 스코틀랜드의 지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크로이턴(William Croichton)이 초대를 한 것이었고, 초대 받아 만찬에 참석했던 16세의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Earl of Douglas)와 10세의 데이빗 더글라스는 재판을 받고 참수형에 처해지는데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형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10세의 동생 데이빗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블랙 디너(Black Dinner) 사건은 아직까지도 실제냐 허구냐에 대한 논쟁이 존재하고 있는데 위에서 설명한 것과는 달리 형을 먼저 죽여 만찬의 요리로 내어온 검은 황소의 머리와 함께 윌리엄스의 머리를 테이블에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도 존재하고, 형인 윌리엄은 참수형에 처하게 되자 동생을 먼저 참수할 것을 요구하고 나중에 자신이 처형당함으로써 두 형제가 모두 사망하였다는 얘기도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설(說)들이 있지만 클랜 더글라스(Clan Douglas) 가문의 장자였던 윌리엄 더글라스(William Earl of Douglas)가 간계(奸計)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분명하다.

두 번째로 왕좌의 게임에 영감을 주었던 역사적인 사건은 1692년 2월 13일에 일어났던 하이랜더 지방의 글렌코(Glencoe)학살사건인데 이념논쟁으로 날을 보내고 있는 작금의 우리 정치판의 모습이 투영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사건이기도 하다.

 

1688년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이 일어났는데 왕위에서 쫓겨난 제임스 2세가 스코틀랜드 계의 스튜어트 왕조였다는 사실 때문에 스코틀랜드에서는 불만이 팽배해 있었고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따라서 새롭게 즉위한 윌리엄 3세는 이런 불안요소를 없애기 위해 충서서약을 강요하였는데 충성서약을 하지 않으면 토지와 가옥의 몰수 및 파괴는 물론이고 가문의 우두머리는 처형을 당했기에 누구도 이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기 마련이고 천재지변과 같은 사람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존재하기 마련인데, 이런 불가피한 이유로 충성서약을 제때 하지 못한 동족을 같은 스코틀랜드 사람이 나서서 무자비하게 살상을 했던 사건이 바로 글렌코(Glencoe)학살이다.

1692년 1월 1일까지 모두 충성서약을 마치라는 명령이 내려졌지만 꽁꽁 얼어붙은 추운 겨울철의 스코틀랜드 날씨는 맥도날드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알라스데어 맥케인(Alasdair MacIain)에게 늦게서야 전달이 되었고 기한을 넘긴 1월 6일이 되어서야 충성서약을 마칠 수 있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서약을 마쳤다는 안도감에 취해 있던 알라스데어 맥케인(Alasdair MacIain)과는 달리 하이랜드 지방에서 서로 앙숙이었던 캠벨 가문은 이를 빌미로 맥도날드 가문을 없앨 흉계를 꾸몄고, 스코틀랜드에 왕의 권위를 보이고자 했던 윌리엄 3세의 속셈과 맞아떨어져 (살상)명령서가 만들어지게 된다.

명령서는 1962년 2월 12일자로 전달되었지만 이런 흉계를 감춘 병력이 글렌코에 도착한 것은 11일 전인 1962년 2월 2일이었으며, 당시 스코틀랜드 하이랜드 지방에서는 손님들을 융숭하게 대접하는 풍습이 있어서 세금을 추징하기 위해서 왔다는 병사들을 10일 동안이나 환대하는 잔치를 벌이게 된다.

그러나 2월 12일 학살의 우두머리인 로버트 캠벨에게 전해진 명령서를 보면 당시 400여 명에 불과했던 주민 모두를 죽이라는 내용이 담겨져 있는데 전해지는 명령서의 사본에는 아래의 내용이 담겨있다.

“귀관에게 70세 미만의 반역자들을 모두 처단할 것을 명령함과 아울러 특히 늙은 여우(알라스데어 맥케인)와 그의 아들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주의하고 모든 도로를 차단하도록 하라. 나는 새벽 5시에 도착할 예정이며 그에 맞추어 처형을 시작하고 신속히 마칠 수 있도록 할 것이며 만일 내가 정해진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나 없이 작전을 실시하라.(後略)”

이렇게 실시된 학살로 인해 38명이 사망하게 되고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40명은 도망치다가 동사(凍死)하거나 방화로 인해 불에 타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이렇게 숨진 사람 78명은 당시 글렌코의 인구 20%에 해당하는 숫자였으며, 학살을 꾸민 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알라스데어 맥케인(Alasdair MacIain)은 침대에서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아내와 아들, 그리고 손자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글렌코(Glencoe)학살 이후, 손님들을 환대했던 사람들을 죽인 캠벨가문은 비겁하고 비열한 집단으로 취급받게 되었고 현재까지도 이런 풍습은 이어져 글렌코의 술집들 중에는 행상과 캠벨가문 사람은 사절한다는 푯말을 붙여놓은 곳도 있다고 한다.

네덜란드의 정치가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죽음을 돌아보며

네덜란드의 정치가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죽음을 돌아보며

네덜란드 해군은 요한 드 비트(HNLMS Johan de Witt)라는 16,800톤의 도크형 상륙함(Dock landing ship)을 보유하고 있다.

이 상륙함의 이름은 네덜란드 역사상 위대한 외교가로 평가받는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이름을 따서 명명한 것인데 2020년을 보내면서 가뜩이나 코로나로 인해 불안한 사회분위기에 기름을 끼얹고 있는 한심한 국내 정치판을 보면서 오늘은 네덜란드의 정치인이자 수학자였던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얘기를 해볼까 한다.

1625년 9월 4일에 태어나 46세의 나이인 1672년 8월 20일에 세상을 떠난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생애에 대하여는 포털의 정보를 참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그의 죽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공교롭게도 그의 죽음에는 “왕좌의 게임 배경이 된 글렌코 대학살”이란 포스팅에도 등장했던 윌리엄 3세가 관련되어 있다.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던 것은 윌리엄 3세가 공개한 영국의 찰스 2세로부터 받았다는 편지였는데 그 편지에서 “영국이 네덜란드를 상대로 전쟁에 나섰던 것은 드 비트파의 침략 때문이었다.”다고 찰스 2세가 말하였다고 밝힘으로써 민심을 들끓게 만들었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는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윌리엄 3세가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죽음에 관여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를 사망케 한 주모자들을 기소하지 않았으며 일부에게는 상을 주기까지 한 것으로 보건대 윌리엄 3세가 배후에 있었다고 보는 것은 합리적이 아닐까 싶다.

범죄혐의가 뚜렷함에도 불구하고 기소조차 하지 않는 한국 검찰의 모습과 닮았다는 점과,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해 거짓으로 대중을 선동하는 한국 정치인들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여 씁쓸하기만 하다.

그러면 지금부터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가 사망한 8월 20일의 2개월 전인 6월 21일로 거슬러 올라가서 살펴보도록 하자.

1672년 6월 21일,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는 헤이그에서 반 데르 그라페(Van der Graeff) 형제와 그들의 친구로 구성된 4명의 괴한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공교롭게도 같은 날 도르드레흐트(Dordrecht)에 있던 그의 형 코르넬리스(Cornelis de Witt)의 집에도 4명의 괴한이 침입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 뒤 7월 7일에는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라는 사람이 코르넬리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를 찾아오는데 이것도 냄새가 나지만 증거는 없으며 요한 드 비트와 그의 형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결정타를 제공한다.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형인 코르넬리스가 통치하던 지방에서 이발사와 외과의사를 겸하던 사람이었는데 2년 전인 1675년에 강간미수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것을 최소해달라고 코르넬리스를 찾아갔었으나 손님이 있어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여기서 말이 바뀌게 되는 것이 최근 우리 사회를 갈라놓고 있는 표창장과 관련한 재판과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코르넬리스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 나온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갑자기 코르넬리스가 윌리엄 3세의 암살을 계획하고 있는데 그에게 참가할 것을 물어봤다는 말을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코르넬리스와 빌럼 티힐라는 구속이 되는데 네덜란드의 사료(史料)에 의하면 코르넬리스는 암살죄로, 티힐라는 위증죄로 기소가 되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티힐라는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된다.

그러나 교도소인 게방겐푸트(Gevangenpoort)에 수감되어 있던 코르넬리스는 동생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풀려나지 못하고 8월 19일에는 잔인한 고문을 받기에 이른다.

한편 8월 20일 아침 9시 30분에 석방된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모여든 군중을 향해 자기가 풀려난 것은 무죄임이 입증되었기 때문이고, 코넬리스가 풀려나지 못한 것은 유죄가 입증되었기 때문이었다고 소리친다.

당시 네덜란드의 민심은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피폐해져 있었던 터라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는데 그런 그의 형이 윌리엄 3세를 암살하려 했다는 거짓말은 성난 민심에 불을 지르는 형국이 되었던 것이다.

코넬리스가 1심에서 유죄를 선고받자 동생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즉시 항소를 제기하고 소송비용을 납부한 다음, 11시경에 법정을 나서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문을 열고 나서자 성난 군중들은 “반역자들이 나온다.”고 고함을 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경비원들은 “감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총을 맞으라!”라는 말을 했다고 하니 당시 두 형제의 마음은 어땠을까?

징역 4년의 형을 선고하고 나서 피고에게 소감이 어떤지 물어봤다는 어느 판사와 경비원이 무엇이 다른가?

아무튼 생명의 위협을 느낀 두 형제는 경비원들에게 또 다른 문은 없는지 물었지만 그 곳을 벗어날 수 있는 다른 출입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없다고 대답하는 경비원들로 인해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한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 형제의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 평의회는 현장에 있던 경비대에게 두 형제를 보호하기 위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지시하면서 15마일(24㎞) 떨어진 거리에 있던 윌리엄 3세에게는 병력을 추가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한다.

그러나 윌리엄 3세는 이 요청을 거부하였고 현지에 있던 경비대의 지휘관이었던 클로드 드 틸리(Claude de Tilly) 백작은 병력을 마을에 진입하는 다리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어기고 아예 철수시켜버리고 마는데 그때가 오후 4시 무렵이었다.

경비대가 철수하자 성난 군중들은 감옥으로 쳐들어가서 드 비트 형제를 무참히도 살해하게 되는데 이것은 윌리엄 3세의 측근인 오데이크(Odijk)와 쥴리스타인(Zuilestein), 그리고 트롬프(Tromp) 3사람의 치밀하게 짜여진 각본에 의한 것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는 군중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하였고, 그의 형 코르넬리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는 머스킷 총의 개머리판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다음 다시 총알세례를 받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폭도로 변한 군중의 광기는 그칠 줄을 몰랐고 두 사람의 시체를 끌고 나와 헤이그의 랑게비벨르크(Lange Vijverberg)에 있던 공개처형장인 그로네 즈지에(Groene Zoodje)에 거꾸로 매달고 시체를 유린하기 시작하였으며 광기가 극에 달한 군중은 살갗을 벗기고 심장과 장기를 꺼내는가 하면 일부는 시신을 먹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

그날의 참혹한 광경은 화가인 얀 드반(Jan de Baen)이 그림으로 기록한 것이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들의 시신에 걸린 죄명은 동생인 요한 드 비트(Johan de Witt)에게는 ‘Land Prince’, 형인 코르넬리스 드 비트(Cornelis de Witt)에게는 ‘Water Prince’라고 적혀있었다.

죄명에 적힌 프린스(Prince)는 두 형제의 실제 죄명은 암살음모가 아니라 오라녜 공(Prince of Orange)의 정적(政敵)이란 이유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는 것이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다.

그렇게 유린된 두 형제의 시신은 친구들과 가문의 하인들에 의해 다음날 새벽 1시 무렵이 되어서야 수습될 수 있었고, 너무 심하게 훼손되어 몸에 난 상처로 누구인지 구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크네우테르디크(Kneuterdijk)의 집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1672년 8월 22일, 신교회(Nieuwe Kerk)의 지하실에 안장되었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677년 2월 25일에는 유명한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Baruch Spinoza)가 그 곁에 안장되었다.

 

거짓말로 두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빌럼 티힐라(Willem Tichelaar)는 그 공(?)을 인정받아 윌리엄 3세로부터 매년 400길더의 돈을 지급받고 직업도 얻었으나 그의 파렴치한 행동이 발각되어 몇 년 뒤에 해고되었으며 윌리엄 3세가 사망한 뒤에는 돈줄마저 끊어져 노년기에는 목발을 짚고 구걸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