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비하인드 스토리

아낌없이 주는 나무의 비하인드 스토리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쓴 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는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에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로 바라보는 해석과 종교적인 해석, 환경적인 해석 등 다양한 시각에서 바라보는 해석들이 존재합니다.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1964년에 발표한 동화책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는 작가의 이름을 전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었지만 작품의 이면에 숨어있는 사실들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아서 오늘은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했다.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이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출판해줄 곳을 찾고 있을 때 아동문학으로서는 너무 슬프고 성인문학으로서는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더러는 소년과 나무의 평생의 관계에 감동했다는 곳도 있었지만 그림책으로 출판하기는 어렵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결국 출판사를 찾아다닌지 4년이 지나서 하퍼(Haper)사의 아동문학 편집자이던 ‘우르술라 노드스트롬(Ursula Nordstrom)’이 가능성을 발견하면서야 비로소 출간할 수 있었습니다.

 

▶ 대박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1964년 초판본은 5,000~7,500부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출간과 동시에 폭발적인 반응을 얻어 지금까지 전세계에서 1천만 부 이상이 판매된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는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저서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책이 되었습니다.

 

▶ 셸 실버스타인이 좋아하는 작품은 아니었다.

1975년 Publisher’s Weekly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저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은 우리나라에서는 번역·출간되지 않은 ‘Uncle Shelby’s ABZ Book’과 ‘A Giraffe and a Half’ 두 가지를 꼽았다고 합니다.

 

▶ 여자친구에게 헌정한 책이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의 헌사(獻辭)는 짤막하게 “dedicated to Nicky”라고 되어있는데 니키라는 사람은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옛 여친이었다고 합니다.

 

▶ 끝으로…

셸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은 책의 결말을 해핀엔딩으로 맺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어린독자들이 책속의 행복이 왜 자기에게는 오지 않는지 하는 소외감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The Giving Tree)’의 결말도 행복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Photo by: Larry Moyer-출처: http://www.shelsilverstein.com

 

독일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독일 최고의 저격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많은 저격수들이 활약한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코 소련을 들 수 있는데 이번에는 가장 많은 소련군을 저격하여 2차 대전 뿐만 아니라 독일 역사상 최고의 저격수로 이름을 남긴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에 대해서 알아볼까 한다.

연합국의 일원이 아닌 추축국의 일원이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전사(戰史)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는데 오늘 소개하는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도 많이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진다면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아돌프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를 독일제국에 합병시킴으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의 일부가 되었는데 형식적이나마 오스트리아의 국민투표를 거치기는 하였으며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독일제국의 하나의 주인 오스트마르크가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를 지닌 오스트리아 티롤주에 있는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라는 산악 마을에서 1924년 12월 23일,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가 태어났다.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

농부이면서 사냥에 능했던 아버지 시몬 헤체나우어(Simon Hetzenauer)와 어머니 막달레나 헤체나우어(Magdalena Hetzenauer) 사이에서 태어난 3남 1녀의 셋째였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아버지로부터 사냥하는 법을 배웠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육군(Austro-Hungarian Army)으로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철십자훈장을 받았던 삼촌으로부터는 군대에 대한 얘기를 들으며 성장했다.

알프스의 산과 계곡에서 사냥을 통해 자연스럽게 위장술을 익혔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17세였던 1942년 9월에 육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나 알프스산양 샤무아(chamois)를 잡던 민첩함과 뛰어난 사격술은 그를 단순한 산악경보병인 게비르크스예거(Gebirgsjäger)에 머물게 하지 않았고, 1944년 3월부터 7월까지 저격훈련을 마친 다음 저격병으로 복무하게 만든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제3 산악경보병사단, 제144 산악경보병연대에 배속되어 공식적으로 저격수로 활약하게 되는데 주로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공격해오는 소련군을 저격하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2가지의 소총을 사용했는데 가장 즐겨 사용했던 것은 줄여서 Kar98k라고 하는 Mauser Karabiner 98k의 저격용 소총으로 6배율의 자이스 스코프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4배율의 스코프가 장착된 게베어43(Gewehr 43)은 주로 근거리에 위치한 목표물들을 저격하는데 사용하였다고 한다.

Kar98k

 

Gewehr43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의 주요목표물은 산악여단의 포병을 노리는 소련군의 기관총 사수와 저격수들이었으며 특히 기관총 사수와 소련군 지휘관을 저격하는 것을 주로 하였다고 한다.

1944년 7월 저격훈련을 마치고 8월부터 저격수로 활약했던 그는 1944년 8월부터 1945년 4월까지 9개월 동안에 345명의 소련군을 사살하여 1945년 4월 17일에는 일반 독일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기사십자 철십자장(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을 수여 받는다.

그러나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5년 5월에는 소련군의 점령과 함께 전쟁포로의 신분이 되어 수용소에 수감되는데 2차 대전 동안에만 약 3백만 명에 달하는 독일군들이 소련의 수용소에 수감되었고 거의 1/3에 가까운 수가 수용소에서 사망할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마테우스 헤체나우어(Matthäus Hetzenauer)는 5년의 시간을 끈질기게 이겨내고 1950년에 석방되어 그리운 고향, 브릭센 임 탈레(Brixen im Thale)로 귀향하게 된다.

고향에 돌아와 마리아란 여성과 결혼하고 목수로 생활했던 마테우스 헤체나우어는 전쟁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 전혀 이야기를 하지 않고 조용히 생활하다가 2004년 10월 3일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런던의 울타리는 2차 대전 당시의 들것이었다.

런던의 울타리는 2차 대전 당시의 들것이었다.

영국의 런던에는 상하좌우로 둥글게 생긴 철제울타리들이 설치되어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울타리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이 펜스는 2차 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철제울타리의 이름은 영어로 “ARP Stretcher Railing”이라고 하는데 ARP는 공습경보(Air-Raid Precautions)의 약자이고 “Stretcher”는 들것을 뜻하는 것으로 2차 대전 당시 공습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들것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대규모 공습으로 60만 개 이상이 제작된 이 들것을 스틸로 제작한 이유는 독가스 공격이 있을 경우에도 오염물을 제거하기가 쉽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시제품 점검

 

훈련 중인 모습

 

그리고 이것은 전쟁 중에 실제로 부상자의 이송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민간인들의 거주지역에서는 건물의 주변에 설치되어 있던 기존의 울타리들은 전시물자로 사용되면서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고 이에 런던 지방의회에서는 들것을 주택가의 울타리로 사용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8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들것을 울타리로 사용하면서 지금은 낡고 부식된 것들이 많아 일부 지자체들은 철거를 하고 있는데 The Stretcher Railing Society”라는 민간단체에서는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유물로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6·25전쟁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정식명칭이 USCG( United States Coast Guard)인 미국 해안경비대의 모습은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하게 된다.

6·25전쟁 69주년을 맞은 오늘, 한국전쟁에 참전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와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6·25전쟁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동족상잔의 아픈 역사이지만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 또한 그들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미국의 법률로 지정하고 있는 군대의 단위에는 육군, 해군, 공군, 해병대와 함께 해안경비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미국의 해안경비대가 전쟁에 참전할 때에는 대통령의 명령이나 의회의 결정으로 해군에 소속되어 활동하는 것이 보통이다.

1790년 미국의 초대 재무부장관이었던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의 제청으로 1790년 8월 4일 의회의 동의를 얻어 창설되었던 해안경비대는 일부 자료에 의하면 관세밀수감시청(US Revenue Cutter service)이라는 명칭으로 창설되었다고 나오는데 이 정보는 오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창설될 당시, 재무부 산하의 조직으로 민간인들로 구성되었던 해안경비대는 별도의 이름이 없이 커터(The cutters) 또는 커터 시스템(The system of cutters)으로 불리다가 1860년대까지는 징세해상부대(revenue marine)라는 이름으로 불렸으며 이후에는 세관감시부(Revenue Cutter Service)로 불렸고 1915년 1월 28일에 미국인명구조부(Life Saving Service)와 통합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이런 역사를 가진 미국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1798년 프랑스와 벌어졌던 ‘유사전쟁(Quasi War)’의 참전을 필두로 이라크전쟁에도 참전을 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에는 전쟁이전인 1947년부터 1952년까지 3만5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였는데 역사적으로는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가 해군의 소속이 아닌 독자부대로서 임무를 수행하였던 최초의 전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한국해군의 창설에도 참가하여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는데, 광복 직후 해군의 창설을 목적으로 미군정청의 인가를 받아 결성된 해사관계 군사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의 단장이었던 손원일(孫元一) 제독의 요청으로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조지 맥케이브(George McCabe) 대위가 이끄는 병력이 1946년 8월 23일 내한하여 자문과 지도를 하였다.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우리나라의 해군으로 정식발족을 앞두고 있던 그 해 5월에는 미국해안경비대의 사령관이었던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이 한국에 도착하여 미국해안경비대의 지휘관 겸 고문관의 역할을 맡게 된다.

손원일 제독과 윌리엄 아처치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그러나 대한민국이 정식 해군의 발족을 앞두게 되자 다른 나라의 해군을 훈련시키는 것은 해안경비대의 임무가 아니란 결정에 의해 미국해안경비대 소속의 병력은 모두 귀국하게 되고 그 자리를 예비역들이 대신하게 된다.

그리고 1949년 8월 19일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용사이자 미국해안경비대의 전 사령관이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최고고문관의 임무를 맡게 되고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은 대표의 자리를 유지하게 되었는데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가 대한민국 해군이 사용할 선박문제로 대만을 방문하고 있을 때 한반도를 피로 물들이는 6·25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자신의 아내와 두 자녀들이 서울에 머물고 있었지만 일본으로 공수해야 하는 물자의 선적을 마친 뒤에야 돌아올 수 있었던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작은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면서 한강철교가 폭파되는 것을 목격하였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무사히 부산에 도착한 클래런스 스파이트(Clarence M. Speight)는 윌리엄 아처치(William C. Achurch) 중령과 재회하게 되고 1950년 7월,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한국을 떠나게 된다.

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자 미국의 해안경비대(The Coast Guard)는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되는데 주로 펄스전파를 이용하는 항법장치인 로란(LORAN)기지국의 설치·운영과 무선중계기의 설치 및 병력의 해상구조가 주요임무였다.

부산에 있었던 로란(LORAN)기지국

 

미국해안경비대가 한국전쟁 동안 수행했던 수많은 해상 인명구조작전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1953년 1월 18일 있었던 미 해군의 해상초계기 P-2V넵튠의 격추사건을 들 수 있다.

중공군의 움직임을 정찰하기 위해 타이완 해협을 비행 중이던 P2V 초계기는 중공군의 공격으로 바다에 추락하고 승무원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게 되는데 미국해안경비대는 필리핀의 해군기지(US Naval Station Sangley Point)에 주둔하고 있던 베테랑 조종사,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가 조종하는 구조기와 미치 페리(Mitch Perry) 중위가 조종하는 지원기로 2대의 수상비행기(PBM-5G)를 급파하여 생존자의 구출에 나서게 된다.

P-2V넵튠

 

현장에 도착한 수상비행기(PBM-5G)가 추락한 비행기의 잔해물에 의지하고 있던 승무원들을 구조하기 위해 바다에 착륙하기에는 파도가 너무 높고 기상이 좋지 않아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저체온증으로 인한 사망의 위험이 높아지자 위험을 무릅쓰고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착륙을 감행하게 된다.

무사히 바다에 착륙한 비행기는 해군초계기에 탑승하고 있었던 총 13명의 승무원 중에서 생존자 11명을 태우고 이륙을 시도하게 되는데, 떨어져 있던 2명의 생존자는 해변으로 밀려가 중공군의 포로가 되고 만다.

PBM-5G

 

11명의 초계기 생존자와 본인을 포함하여 8명의 PBM-5G 탑승자 등 모두 19명을 태우고 이륙하려던 존 부키치(John Vukic) 중위는 5m가 넘는 파도와 초속 24m에 달하는 강풍으로 쉽게 이륙하지 못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이륙 보조 로케트(JATO bottle)’를 이용하여 가까스로 날아오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륙과 동시에 엔진 이상으로 PBM-5G는 다시 바다로 추락하게 되고 밤이 되어서야 해군의 구축함 USS Halsey Powell(DD 686)에 의해서 구조가 되지만 초계기 P-2V넵튠에 타고 있던 4명의 해군과 PBM-5G에 탑승하고 있던 5명의 해안경비대원은 목숨을 잃고 만다.

USS Halsey Powell(DD 686)

 

어제 문재인 대통령은 국군 및 유엔군 참전 유공자들을 청와대의 영빈관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아직 완전한 종전은 이뤄지지 않았다”고 했다.

북미 간의 비핵화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있고, 우리 사회는 정치·경제적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지금, 동족이 서로 총부리를 겨누었던 6·25의 아물지 않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된다.

정의롭지 않은 나라,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

정의롭지 않은 나라,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

매년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은 미국에선 콜럼버스 데이라는 기념일이다. 이날은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 도착한 것을 축하하는 날로 정확히는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라고 해야 한다.

미국 외에 10월 12일을 기념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태어난 이탈리아에서도 이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사용하는 표현들이 나라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벨리즈와 우루과이에서는 아메리카의 날(Día de las Américas), 바하마에서는 Discovery Day라고 부르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날이라는 Día del Respeto a la Diversidad Cultural로 부르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국경일이라는 의미로 Festa Nazionale di Cristoforo Colombo 또는 Giornata Nazionale di Cristoforo Colombo라고 부른다.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민족의 날(Día de la Raza)로 부르고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문화유산의 날(Día de la Hispanidad)이나 종교적인 축일을 뜻하는 피에스타 나씨오날(Fiesta Nacional)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 10월 12일이 종교적인 축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서기 40년 10월 12일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가 현재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성모마리아의 발현(필라의 성모)을 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제264대 교황이었던 바오로 2세는 필라의 성모를 히스패닉 민족의 어머니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보게 되는 필라 성모 대성당이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계기로 만들어진 성당이며 역사상으로는 성모마리아께 봉헌된 최초의 성당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도 미 전역에서 인정되는 기념일은 아니어서 하와이, 알래스카, 오레곤 및 사우스 다코다 주에서는 이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Discoverers’ Day로 부르는 하와이에서는 명칭의 변경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우스 다코다에서는 공휴일로 지정하였지만 콜럼버스 데이가 아닌 Native American Day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Native American Day는 아메리칸인디언 운동(AIM: American Indian Movement)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매년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이면 미국 각지에서 체포되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즉 인디언들의 수가 해마다 늘고 있으며 아예 콜럼버스 데이란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콜럼버스 데이 변경을 위한 동맹(TCAD: Transform Columbus Day Alliance)이 결성되어 있기도 하다.

AIM의 깃발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American Indian Day)로 부를 것을 주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1년에 결성된 아메리칸 인디언 협회(Society of American Indians)로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 단체의 대표를 맡았던 아서 파커(Arthur C. Parker)는 미국의 보이스카우트 연맹을 3년 동안이나 설득시키는 노력을 한 끝에 1915년 12월 14일에 24개 주정부로부터 받은 인증서를 백악관에 전달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16년 뉴욕주를 시작으로 1919년에는 일리노이주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American Indian Day)을 의원입법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아서 파커(Arthur C. Parker)

 

한편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을 검색하면 유럽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수두와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이 전염되어 원주민의 80%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을 볼 수가 있다.

통설에 의하면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는 대략 4천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는 인디언들의 숫자가 500만 명까지 감소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염병이 맞지만 이외에도 강철로 만든 칼과 소총을 앞세운 무력에 의해 숨진 숫자도 상당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대륙으로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지옥이었을 것이고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다는 링컨 대통령도 인디언에게는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댈 정도였으니 콜럼버스 데이는 결코 정의롭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정의를 앞세우는 미국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디언들의 오래되고 지속적인 저항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에 더하여 2015년 10월 11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인터넷판 기사는 콜럼버스 데이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1492년에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였으며 산타마리아, 니나, 핀타란 3척의 배로 항해를 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을 리도 없으며 배의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전에 북유럽의 탐험가인 레이프 에릭손(Leif Erikson)이 북미(캐나다)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이보다도 훨씬 이전에는 페니키아의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지적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미국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그가 사용한 배의 이름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날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결코 정의로운 나라가 아님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리 아저씨가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재선(再選)을 위해 날뛰는 모습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不正義한 나라임을 실감하게 된다.

더 길게 적으면 국내정치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 이만 주절거림을 끝낸다.

사진은 운디드 니(Wounded Knee Massacre) 대학살로 살해되어 매장된 인디언들의 모습

2차 대전의 주력기 스핏파이어의 모든 것

2차 대전의 주력기 스핏파이어의 모든 것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공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스핏파이어(Spitfire)는 연합국에서 가장 많이 생산된 기종으로 미국에서도 사용하였는데 지금부터 스핏파이어(Spitfire)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수상비행기를 만드는 회사가 제작하였다.

스핏파이어(Spitfire)의 정식 명칭은 수상비행기를 전문으로 제작하던 슈퍼마린에서 만들었기 때문에 슈퍼마린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로 불리고 있으며 디자이너는 “레지널드 미첼(R. J Mitchell)”이라는 항공기 설계자였습니다.

 

레지널드 미첼

 

▶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하다

스핏파이어(Spitfire)는 1936년 3월 5일 첫 비행을 마치고 1938년 8월에 영국공군의 덕스포드(Duxford)기지에 배치되었습니다.

 

▶ 최초의 격추

1939년 10월 16일 제603 비행중대의 스핏파이어(Spitfire)가 독일공군의 하인켈 He 111(Heinkel He 111) 폭격기를 격추하여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하인켈 He 111

 

▶ 스핏파이어에 가려진 호커 허리케인

호커 허리케인(Hawker Hurricane)은 영국 본토에서 치러진 항공전에서 영국공군의 승리 중에서 60%를 차지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나중에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Ⅰ에 의해서 그 빛이 가려지게 되었습니다.

호커 허리케인

 

▶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Ⅰ의 퇴역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스핏파이어(Spitfire)의 개량에 착수하였는데 전쟁과 함께 박차를 가하여 마크Ⅱ를 새롭게 선보입니다.

 

▶ 주력기로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

1941년 2월에 영국공군에 배치된 마크Ⅴ는 1943년말까지 140개의 비행중대에 6,000대가 보급되어 주력기로 등장하였습니다.

 

▶ 세계를 누빈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미공군을 포함한 10개국에서도 운용하였는데 북아프리카와 몰타를 비롯하여 호주 공군에서는 일본기에 대항하여 북부해안의 다윈에 3개의 비행중대에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를 운용하였습니다.

 

▶ 빠르고 조종하기 쉬운 스핏파이어(Spitfire)

빠르고 기동성이 뛰어났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최고속도 시속 594㎞를 낼 수 있었고 7분 30초 만에 고도 2만 피트(6,096미터)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최고고도 36,500피트(11,125미터)를 자랑하였습니다.

 

▶ 넓은 작전반경

드롭탱크를 장착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1,100마일(1,770㎞)의 작전반경을 지니게 되어 독일의 심장부로 깊숙이 침투하여 폭격기를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 독일 포케불프의 대항마

1941년 9월에 유럽의 하늘에 등장한 독일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FW-190)”은 영국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를 능가하여 그 후 1년 동안 가장 강력한 전투기로 활약하였지만 1943년 6월 새로운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Ⅸ의 등장으로 지배력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포케불프 Fw 190

 

▶ 스핏파이어(Spitfire)의 무기들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Ⅴ는 전쟁 초기에 7.7㎜ 기관총 8문을 장착하고 있었는데 독일 비행기의 두꺼운 장갑과 연료탱크를 파괴하기 위하여 브라우닝 .303 기관총 4문과 20㎜ 2문을 새롭게 장착하였으며 1톤 이상의 폭탄을 탑재할 수 있었습니다.

브라우닝 .303

 

▶ 너무도 빨랐던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

1944년 1월에 등장한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는 시속 724㎞의 속도를 낼 수 있었으며 이렇게 빠른 속도 때문에 독일이 영국을 공격하기 위해 발사한 V2 로켓을 300개 이상이나 격추시킬 수 있었습니다.

 

▶ 제트기를 격추시킨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

독일이 전쟁 후반에 선을 보인 세계최초의 제트 전투기인 “메서슈미트 Me 262(Messerschmitt Me 262)”를 1944년 10월 스핏파이어(Spitfire) 마크XIV가 격추시키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메서슈미트 Me 262

 

▶ 2차 대전 이후

스핏파이어(Spitfire)는 XIV의 개량형인 마크XVIII를 새롭게 선보이면서 1949년까지 생산되어 한국전쟁에도 투입되었고 항공모함용 함재기인 시파이어(Seafire)를 2,334기 제작하였고 1954년 4월 1일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의 투입을 마지막으로 퇴역하였습니다.

시파이어(Seafire)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애완동물이 도살당하다.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애완동물이 도살당하다.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의 ‘반려동물’은 예전에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기른다는 의미에서 ‘애완동물’이라 불렸는데 아직도 반려동물보다는 애완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유기되는 사례가 끊이질 않고 있다.

평상시에도 함부로 버려지는 동물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대우를 인간으로부터 받게 될까? 전쟁과 동물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쟁동안 군에서 활약한 동물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전쟁 동안 미 해병대에서 활약했던 암말인 레클리스 병장(Sergeant Reckless)을 들 수 있다. 원래는 플레임(Flame)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에서 탄약과 부상병을 수송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이 말은 용감하다 또는 무모할 정도로 임무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레클리스(Reckless)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1954년 4월 상병(corporal)에서 병장(sergeant)으로 진급하였고 1959년 8월 31일에는 하사(staff sergeant)로 진급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4마리의 새끼를 낳은 레클리스(Reckless)는 1968년 5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2013년 7월 26일에는 레클리스(Reckless)를 기리는 동상이 미 해병대박물관에 건립되었고, 2018년 5월 12일에는 켄터키의 말 공원(Kentucky Horse Park)에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은 동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부터 일주일 동안에만 영국에서는 75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야말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상이 벌어졌음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만들어진 ‘공습대비 애완동물 예방조치위원회(National Air Raid Precautions Animals Committee)’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들을 시골로 보내거나 보살피지 못한다면 죽여야 한다는 안내를 했다.

 

1939년,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영국은 가장 중요한 식량문제 때문에도 애완동물들을 죽여야 한다는 홍보를 했던 것인데 실제로 영국은 1940년 1월 8일부터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7월 4일까지 식량배급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애완동물들을 키우던 남자들은 징집으로 집을 비우고, 남자들이 떠난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여성들이 군수공장을 비롯한 노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1940년 9월 7일부터 267일간이나 지속되었던 독일군의 런던공습(blitz) 당시에도 수십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추가로 도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임을 피한 애완동물들일지라도 독일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부터 방공호로 들어갈 수 없어서 길거리를 떠돌게 되었는데 1940년 8월에 법으로 통과된 식량배급제도를 어기고 음식물을 동물에게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2년형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였으니 동물들의 도살은 엄청난 규모로 자행되었음은 충분히 짐작 가고도 남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동물들이 도살당한 사실은 클레어 캠벨(Clare Campbell)이라는 작가가 쓴 책, 본조의 전쟁(Bonzo’s War: Animals Under Fire 1939 -1945)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니콜라 화이트(Nicola White)란 여성이 템즈 강변에서 본조(Bonzo)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식표를 발견한 뒤, 이에 대한 조사를 함께 진행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영국에는 6백만~7백만 마리의 개와 고양이들을 가정에서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영국정부의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친절한 행동이 된다.”는 광고로 인해 동물들을 안락사 시키기 위해 동물병원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하며 동물병원에 있던 클로로포름은 삽시간에 모두 동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홀로코스트와도 같은 학살에 대하여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고 영국육군 수의부대(Royal Army Veterinary Corps)에서는 개는 전쟁에 필요하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왕립동물보호협회(RSPCA: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에서도 노력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이런 학살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니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1860년에 설립된 영국의 배터씨 동물 보호소(Battersea Dogs & Cats Home)인데 당시 불과 직원 4명밖에 없었던 보호소에서는 2차 대전을 통하여 모두 145,000마리의 개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전쟁동안 동물을 학살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수없이 많고 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서만 40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독일군의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 때문에 보급물자가 끊어진 파리에서는 1870년 9월 19일부터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사실도 있다.

※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함께 생활하던 반려동물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사람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지금, 만일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다면 버려지거나 죽는 동물들은 수도 없이 발생하지 않을까?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때를 대비한 행동요령이나 준비에 대하여 지침을 마련하고 알리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의 무덤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의 무덤

4번째 항해에서 병에 걸린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0일,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하여 매장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사망하고 나서 3년 뒤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가 1544년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던 그의 유언에 따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795년에는 쿠바의 아바나로 이전되었다가 1898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2005년 그라나다대학의 연구팀이 유골에서 채취한 DNA를 통해 콜럼버스의 시신임을 확인하였으며 2022년에는 마드리드 국립해군박물관에서 콜럼버스의 첫 번째 매장지는 바야돌리드에 있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수도원(San Francisco convent)이었다고 발표했다.

샌프란시스코 수도원은 현재 마요르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는 마요르광장의 아름다움은 실제로는 지독한 담배냄새와 지린내로 얼굴을 찌푸렸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 안에는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고 있던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의 4국왕이 콜럼버스의 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2005년 DNA를 조사했던 그라나다대학에 의하면 콜럼버스의 유골은 일부가 산토도밍고에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미니카공화국은 산토도밍고의 콜럼버스 등대에 있는 콜럼버스의 유골이 진짜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DNA조사에는 응하지 않고 있어서 무덤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타카마 사막에 내리는 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타카마 사막에 내리는 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칠레 북서부의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1500만 년 동안 건조한 상태가 계속되는 곳으로, 화성의 환경과 유사하여 화성의 생명탄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모델로 이용되어 왔던 곳입니다.

 

그런데 2015년 슈퍼엘니뇨 현상으로 3월에만 12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강우로 7년 동안 내릴 비의 양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피어난 꽃들이 장관을 이루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8월에도 많은 비가 내렸지요.

 

그러나 이렇게 척박한 땅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비가 내린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란 것을 알리는 연구결과가 금년 11월 학술지 “Scientific Reports”에 발표되었습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비가 내리기 전에 사막에서 채취한 토양에서는 모두 16종이 발견되었던 미생물들이 비가 내리면서 생긴 웅덩이의 토양에서는 대부분인 75~87%가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건조한 상태에 적응한 미생물들이 대량의 빗물이 유입되면서 생긴 삼투압 현상 때문에 전멸한 것으로, 화성에서 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만일 물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적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타카마 사막에 내린 비로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인 아름다운 꽃들에 가려진 미생물들의 멸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인 변화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가려진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가려진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이탈리아에서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현지시간으로 3월 15일 오후 6시 현재 24,747명, 누적 사망자는 1,809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관광산업의 비중이 높은 곳으로 전체 GDP의 13.2%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번 코로나 19의 여파로 관광산업의 매출이 우리 돈으로 6조 8천억~9조 5천억 정도의 감소가 예상된다고 하는데 하루빨리 치료제가 개발되어 팬데믹(Pandemic)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오늘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찾는 명소로 콜로세움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과 이어지는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의 숨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카피톨리노(Capitolino)라고도 불리는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오르면 나오는 광장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캄피돌리오(Campidoglio)란 이름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을 건립할 때 카풋(caput: 고대어로 사람의 머리를 뜻한다)이 발견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바로 카풋과 관련이 있으며 죽음의 계단이라고 불리고 있는 제모니안 계단(Gemonian stairs: 이태리어로는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이다.

 

기원전 7세기 경의 고대 로마에는 메르티네 감옥(Mamertine Prison: 이태리어로는 Carcere Mamertino)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형수들은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에서 처형된 다음 그 시체를 계단에 던져 떨어뜨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미켈란젤로의 예술성과 로마의 건축양식을 감상하고 있는 이면에는 이같은 어두운 역사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기원전 640년에서 616년경에 만들어진 메르티네 감옥(Mamertine Prison)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나의 세례명이기도 한 안드레아와 형제지간인 성 베드로가 순교 전에 수감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라는 계단은 1세기 무렵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처형장으로 사용되면서 죽음의 계단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때부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정적이 많았던 티베리우스는 그의 측근이었던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이아누스( Lucius Aelius Seianus)를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그를 교수형에 처했던 장소가 바로 죽음의 계단이라고 하는 제모니안 계단(Gemonian stairs: 이태리어로는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이다.

세이아누스의 죽음은 그의 급성장에 두려움을 느꼈던 티베리우스의 견제가 원인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티베리우스의 며느리와 불륜을 맺고 그의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Drusus Julius Caesar)를 암살했다는 것이었다.

드루수스의 죽음은 당시에는 병사로 알려졌으나 그가 죽고 8년이 지나서 세이아누스의 전처 아피카타(Apicata)에 의해서 드루수스의 아내인 리비아 율리아( Livia Julia)와 불륜관계였던 세이아누스가 그녀와 공모하여 드루수스를 독살하였다고 밝힘으로써 티베리우스는 일사천리로 세이아누스의 교수형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죽음의 계단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이아누스( Lucius Aelius Seianus)의 시신은 계단에 던져져 성난 군중들에 의해 토막이 나고 수많은 모욕을 당한 뒤 테베레강에 버려지고 말았다.

 

공포정치를 일삼던 티베리우스가 서기 37년에 사망하고 나서는 죽음의 계단에서 처형되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서기 68년 네로가 죽고 나서 4명의 황제가 차례로 즉위했던 혼란기를 말하는 ‘4황제의 해’에 세 번째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아울루스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가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뺏기고 처형당함으로써 역사적인 장소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죽음의 계단인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에서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한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시신은 로마시민들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은 프랑스 화가 조르쥬 로슈그로스(Georges Rochegrosse)의 1883년 작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죽음의 계단에서 시신을 유린하는 행위는 서기 81년에 로마의 제11대 황제에 재위한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는 현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