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전차(戰車) 개발사

일본의 전차(戰車) 개발사

지난 10월 2일부터 2주간의 일정으로 일본에서는 미국 이외의 군대가 일본에 최초로 상륙하여 합동훈련을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일본자위대의 발전과 조선침략의 이면에 숨어 있는 잊을래야 결코 잊을 수 없는 나라! 그 나라는 1902년에 일본과 군사동맹을 체결한 영국이고 영국의 군대가 일본의 육상자위대와 합동훈련을 하였던 것입니다.

 

명분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을 견제한다는 것이었지만 일본은 이외에도 같은 날짜인 10월 2일에는 필리핀에서 있었던 두 번째 Kamandag훈련에 2차 대전 이후 최초로 자위대의 수륙기동단(Amphibious Rapid Deployment Brigade) 병력과 장비를 파견하였는데 그 당시 내세웠던 명분 중의 하나는 미군의 함정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연습을 함과 동시에 수륙양용작전 수행방법을 배운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일본이 내세우는 이런 명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일본자위대가 영국군과 합동훈련을 가진 것은 많은 일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렇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드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본이 전차를 개발할 수 있도록 만든 일등공신이 바로 영국이라는 것 때문입니다.

정확히 100년 전인 1918년 10월 17일, 영국이 개발한 “마크Ⅳ”전차가 일본 고베항에 도착하게 됨으로써 일본의 전차개발 100년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크Ⅳ 전차

 

영국이 개발한 이 전차는 제1차 세계대전에 등장한 이후 각국의 전차개발에 지대한 영향을 준 “마크Ⅰ”의 개량형인데 일본은 1917년에 영국에 “마크Ⅴ”를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하지만 최신형을 줄 수는 없다는 영국의 의사에 따라 하는 수 없이 “마크Ⅳ”를 도입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결정된 “마크Ⅳ”는 영국인 장교 1명과 사병 4명의 지원병력과 함께 1918년 10월 17일 고베항에 도착하여 환적된 다음 10월 24일에 요코하마에 도착하고 거기서부터 동경까지는 영국군이 운전하여 아오야마 연병장으로 이동하여 시연을 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은 1915년을 기준으로 전체 차량의 대수가 897대에 불과할 정도로 차량의 제작기술은 낙후된 수준이었고, 1907년에 최초로 설립된 자동차공장도 서양의 것들을 모방하여 군용차를 생산하는 “오사카포병공창”이 유일하였는데 이런 “오사카포병공창”에 일본군은 전차의 개발을 맡기게 됩니다.

원래 일본은 영국과 프랑스로부터 완제품을 도입할 계획이었으나 최신형 전차를 구입할 수 없거나 영국의 경우에는 자국군에 보급할 정도의 여력 밖에 없어서 부득이 계획을 변경하여 자체생산을 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사카포병공창”은 1925년 6월 설계에 착수하여 1년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인 1927년 2월에 시제품을 생산하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으며 3개월 후인 1927년 6월 하순에는 후지산에서 가진 주행시험과 주행사격에서 육군이 요구하는 성능을 만족시켰습니다.

이렇게 국산전차의 개발에 나섰던 일본이지만 태평양전쟁에서는 함정과 항공기의 생산에 중점을 기울이는 바람에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고 그러는 사이 서양의 전차는 급속하게 발전하여 일본의 전차는 구식이 되었으며 일본의 패전으로 전차의 개발은 중단되게 됩니다.

그러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였고 이를 계기로 일본의 재군비에 대한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미국에 의해 개발은 저지되고 대신에 2차 대전에서 사용하던 “M4 셔먼”과 “M24 채피”가 보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전차는 일본인의 체형에는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국에 최신예 전차의 도입을 요구한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우선순위는 유럽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국산전차의 개발에 다시 나서게 됩니다.

결국 1952년에 점령상태가 종결되면서 주둔하는 미군의 경비임무가 일본에 귀속됨에 따라 미국의 원조를 받아 전차의 개발에 나서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전차가 바로 61식 전차였던 것입니다.

61식 전차

 

그러나 세계적인 수준에는 한참 모자라는 것이었기에 일본은 개발에 박차를 가하여 74식 전차를 만들면서 세계수준을 따라잡았다고 자평했고 90식 전차는 세계수준을 일부 앞섰으며 10식 전차는 세계최고라는 자뻑에 가까운 평을 했습니다.

74식 전차

 

90식 전차

 

10식 전차

 

“일본육상자위대가 전차개발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라는 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의 언론 중에는 “만일 자위대가 적의 전차보다 우수한 전차의 개발에 나서지 않는다면 일본을 침략하는 적에게 전멸당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을 비롯하여 “중국의 지상군이 일본의 본토에 상륙할 것에 대비한 작전의 수립이 필요하고 이 작전에는 반드시 전차가 필요하기 때문에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주관함식에 욱일기를 게양하고 입항하려던 것이 우리의 반대여론에 밀려 참가를 포기하게 되었던 최근의 일을 포함해서, 조선침략에 가장 큰 힘을 주었던 영일동맹의 당사국들이 합동으로 훈련을 하고, 일본헌법 제9조의 “교전권, 정규군 보유의 금지” 조항과, 자국 내의 방어만을 수행한다는 “전수방위”의 원칙에 따라 일본의 자위대가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지리적 범위는 일본의 영토 내로 국한되어 있는 것을 헌법까지 개정하여 군사활동의 영역을 해외로까지 확대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일본을 보면 마음이 편치 만은 않습니다.

미국, 중국, 러시아의 항공모함 및 잠수함 비교

미국, 중국, 러시아의 항공모함 및 잠수함 비교

해군력을 비교할 때는 항공모함타격단을 구성하는 함정의 제원과 성능을 함께 고려하여야 할뿐만 아니라 항공기의 이륙이 전자식투석기를 사용하는지, 탑재할 수 있는 항공기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등등 고려할 요소가 많지만 여기서는 단순하게 항공모함과 잠수함의 숫자와 기본적인 제원만을 비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항공모함

▶ 미국

구 분
만재배수량
길이
비행갑판 폭
출격횟수
보유(건조 중)
니미츠급
95,413~102,000톤
330~333m
76.8m
120회/일
10척
제럴드R포드급
101,600톤
333m
78m
160회/일
1척(1척)
합 계
11척(1척)

중국의 항공모함에 탑재하는 항공기의 숫자는 미국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 니미츠 급에는 70대 제럴드R포드급에는 75대를 탑재할 수 있는 것에 비해 중국은 최대 30기의 항공기를 탑재할 수 있습니다.

▶ 중국

구 분
만재배수량
길이
전폭(全幅)
함재기
보유
랴오닝(001형)
67,500톤
305m
78m
20
1척
001A형
60,000톤
315m
72m
20~30
1척
합 계
2척

중국의 랴오닝(001형)

▶ 러시아

러시아는 “쿠즈네초프 항공모함” 1척만 보유하고 있습니다.

■ 잠수함

▶ 미국

미국이 최초로 실용화한 공격형 원자력잠수함의 함종 분류기호가 SSN이고 이것은 동력만 원자로를 사용하는 것이며 SSN에 핵무기를 장비한 것을 SSBN, 순항미사일 발사를 주목적으로 개조한 것을 SSGN이라고 합니다. 향후 미국은 로스앤젤레스 급 잠수함을 퇴역시키고 버지니아 급을 30척까지 늘일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구 분
배수량
길이
잠항심도 (최대)
보유
SSBN
오하이오 급
18,750톤
170.67m.
300m(500m)
14척
SSGN
개량형 오하이오 급
18,750톤
170.67m
300m(500m)
4척
SSN
버지니아 급
7,800톤
114.8m
488m
14척
SSN
시울프 급
9,150톤
107.6m
610m
3척
SSN
로스앤젤레스 급
6,927~7,177톤
109.73m
450m(750m)
35척
합 계
70척

▶ 중국

○ 신형 잠수함

형 식
배수량
길 이
보 유
비고
094형(晋級)
12,000톤
137m
4척(추정)
탄도미사일 탑재 원자력잠수함
093형(商級)
7,000톤
107m
2척(추정)
공격형원자력 잠수함
킬로 급
약 4,000톤
70~74m
12척
공격형 통상동력 잠수함
039형(宋級)
2,300톤
75m
14척
공격형 통상동력 잠수함
041형, 039A형(元級)
2,400톤
72m
12척
공격형 통상동력 잠수함
합 계
44척

○ 구형 잠수함

형 식
취역연도
배수량
길이
보유
비고
092형(夏級)
1983년
7,000톤
120m
1척
탄도미사일 탑재 원자력잠수함
091형(漢級)
1974년
5,500톤
98m
3척
공격형원자력 잠수함
035형(明級)
1971년
2,100톤
76m
21척
공격형 통상동력 잠수함
합 계
25척

▶ 러시아

구 분
배수량
길이
잠항심도
보유(건조 중)
SSBN
보레이 급
24,000톤
170m
380m~450m
4척(4척)
델타 급
12,100톤
167m
9척
타이푼 급
48,000톤
175m
500m
1척
SSGN
야센 급
13,800톤
130m
1척(5척)
오스카 급
19,400톤
150m
520m~600m
7척
SSN
아쿨라급
12,700톤
110m
600m
11척
시에라 급
10,400톤
110m
600m
3척
빅터 급
7,900톤
107m
400m~600m
4척
SSK
라다 급
2,700톤
72m
300m
1척(2척)
킬로 급
3,000톤~3,950톤
70m~74m
240m~300m
20척(4척)
합 계
61척(15척)

SSK는 잠수함을 탐색/공격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는 잠수함으로 “잠수함 킬러”라고 불립니다.(SS는 잠수함을 뜻하고 K는 Hunter-killer를 의미합니다)

F-15, F-35등 전투기 뒤의 숫자는 무엇을 나타낼까?

F-15, F-35등 전투기 뒤의 숫자는 무엇을 나타낼까?

미국에서 운용하는 군용기의 이름을 정하는 명명방법은 육·해·공군이 각기 저마다의 방법을 사용하고 있던 것을 1961년 국방부장관에 부임한 로버트 맥나마라가 통일시켰는데 이것을 “트라이-서비스(Tri-Service)” 또는 MDS(Mission-Design-Series)라고 부릅니다.

즉 M(임무: Mission), D(디자인: Design), S(시리즈: Series)의 순서로 이름을 정하는 것인데 전투기를 F(Fighter)라 하고 A(Attacker)는 공격기, B는 폭격기(Bomber), C는 수송기(Cargo)를 나타낸다는 것은 다들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전투기를 나타내는 F의 뒤에 붙는 번호가 참으로 다양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또한 MDS규칙에 따라 시리즈 순서대로 이름이 붙지만 중간에 없는 번호도 있고 갑자기 번호가 크게 높아지는 경우도 있어서 F-22 다음으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F-35 사이에는 모델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F-4, F-15, F-22, F-35 등 전투기의 뒤에 붙는 숫자의 의미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1962년에 통일된 “트라이-서비스(Tri-Service)”의 명명규칙에 따라 기존에 존재하던 전투기들의 이름을 새롭게 정하면서 F-1부터 F-11까지의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이 모은 방위성금으로 도입했던 “F-4D” 의 경우에는 전투기 중에서 4번째로 만들어진 것으로 뒤의 D는 네 번째 버전이라는 뜻입니다.

“F-4C”는 미공군이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F-110A 스펙터”를 새로운 명명규칙에 따라 개칭한 이름인데 그 이유는 해군의 팬텀Ⅱ와 같은 기체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F-4C로 이름이 바뀌게 된 것이며 이처럼 기존의 항공기를 새로운 명칭으로 변경한 것들에는 아래와 같은 11가지의 기종들이 있습니다.

F-1 Fury: 기존 이름 FJ

F-2 BANSHEE: 기존 이름 F-2H

F-3 Demon: 기존 이름 F3H

F-4 PhantomⅡ: 기존 이름 F4H

F-5 Freedom Fighter: 최초로 명명

F-6 Skyray: 기존 이름 F4D

F-7 SEA DART: 기존 이름 XF2Y

F-8 Crusader: 기존 이름 F8U

F-9 Panther/Cougar: 기존 이름 F9F

F-10 Skyknight: 기존 이름 F3D

F-11 Tiger: 기존 이름 F11F

이상과 같이 기존의 명칭을 바꾸고 난 후 새롭게 신규모델 중에서 MDS규칙에 따라 처음으로 명명된 모델이 “YF-12 블랙버드”였는데 제일 앞에 붙은 “Y”는 프로토타입이란 것을 의미합니다.

그 뒤를 이어서 “F-14 톰캣”, “F-15 이글”, “F-16 파이팅 팰콘” “YF-17 코브라”와 맥도널 더글러스에서 만든 “F/A-18 호넷” 및 보잉사에서 만든 “F/A-18E/F 슈퍼 호넷”, “F-20 타이거샤크”, 유일한 이스라엘제인 “F-21 크피르”에 이어서 “F-22 랩터”와 “YF-23 블랙윈도우Ⅱ”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중에서 YF-12, YF-17, F-20 및 YF-23은 실용화되지 못하였으며 F-13과 F-19는 결번, F-5와 F-21은 훈련기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YF-17 코브라

YF-23 블랙윈도우Ⅱ

특히 F-19는 극비리에 개발 중이었던 스텔스기로 추측되고 있는데 실제로 명명된 이름은 “F-117 나이트호크”가 되면서 기존의 명명규칙에 큰 혼선을 빚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F-117 나이트호크

이어서 나온 가장 신예기종인 “F-35 라이트닝Ⅱ”도 본래의 규칙대로라면 F-24가 되어야 하지만 원형기종인 X-35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F-35로 정하면서 F-24부터 F-34까지는 결번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F-35 라이트닝Ⅱ

마지막으로 F와 A를 같이 사용하고 있는 F/A-18 기종은 원래 YF-17을 원형으로 하여 함상전투기인 F-18과 함상공격기인 A-18을 따로 개발할 예정이었으나 1개의 기종으로 통합하면서 F/A-18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던 것입니다.

무궁화 삼천리는 몇 km일까?

무궁화 삼천리는 몇 km일까?

이틀 전에는 낚싯대의 길이를 나타내는 칸(間)이란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1칸=1.8미터로 정해진 것은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란 점을 알아보았습니다.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고유의 척관법이 있었는데 고종 6년인 1902년 10월에 척관(척근)의 단위를 미터법에 맞추어 새롭게 정하면서 1자(尺)를 20㎝로 하고, 1보(步)는 6자인 1.2m, 1칸(間)은 10자인 2m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일본의 척관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1자(尺)는 30.3㎝, 1칸(間)은 6자인 1.81m미터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광복이 되고 6·25전쟁과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4년 1월부터는 미터법을 국가 표준 단위로 사용하는 것을 공식화 했는데, 22대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박충훈이 중앙계량국을 통해 규정한 도량형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부정하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왜 중앙계량국이 규정한 도량형이 애국가를 부정하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준공식장에서 처음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을 하기 전까지는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따라 불렀고, 작사자는 아직까지 미확인으로 남아는 있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과 윤치호 선생 두 분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세간의 정설입니다.

이런 애국가 가사의 후렴부에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구절이 있는데 1964년 쿠데타 정권에서 규정한 도량형에 따르면 대한민국 삼천리금수강산은 12,000㎞에 달해 거의 서울에서 미국 뉴욕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가 됩니다.

지금 다음이나 네이버의 단위환산을 보면 1리(里)는 0.39㎞라고 나오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펴낸 도량형은 이것의 10배인 3.9㎞라고 규정을 하였습니다. 당시 일반에서 사용하던 통념과도 맞지 않는 이런 기준을 그들은 왜 제정했던 것일까요?

제2공화국에서 제정한 기준, 1리(里)=3.9㎞는 일본의 척근법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친일(親日)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무지의 소치였던 것일까요?

조선시대의 척근법으로는 황종척, 주척, 영조척, 조례기척, 포백척 등이 있었는데 어제 “낚싯대 1칸은 왜 1.8미터일까?”란 글에서 언급했던 황종척은 세종대왕 재위 기간에 박연이 만든 것이지만 주로 사용되었던 곳은 악기의 제조와 음률의 교정, 그리고 시신을 검시할 때였으며 거리를 표시할 때에는 주로 주척(周尺)을 사용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도량형”이란 책을 보면 조선시대의 각종 척근법의 1척(尺)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황종척은 34.7㎝, 영조척은 31.2㎝, 조례기척은 28.6㎝, 포백척은 46.7㎝이며 일반적으로 거리를 표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주척은 20.7㎝로 되어 있고 이런 주척의 사용은 대한제국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서 널리 사용하던 주척에 기반 하여 고종 6년, 1902년 10월에 도량형 규칙을 미터법에 맞게 재 정의하면서도 1리(里)를 420미터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척에 기반한 대한제국의 도량형에 의하면 “무궁화삼천리”는 1,260㎞에 달하는데 정확하게 2천7백 또는 2천8백리라고 하면 음률에 맞지 않으니 “무궁화삼천리”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일본식 척근법의 단위를 사용하면서부터 1리(里)의 거리는 3.9㎞가 되었으나, 일본에서도 조선의 10리(里)가 일본의 1리(里)에 해당한다고 했던 것을 굳이 일본의 단위를 그대로 사용했던 제2공화국의 규정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고종이 도량형 규칙을 새롭게 만든 1902년의 규정에 의하면 삼천리금수강산은 1,260㎞가 되는데 순종 3년인 1909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제정된 일본식의 척근법을 그대로 따른 1리(里)를 적용하여 “무궁화삼천리”를 12,000㎞(대략)로 만든 박정희 정권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을까요?

 

대한제국 순종 3년이던 1909년 9월 21일에 개정된 도량형법은 1926년 2월 27일 “조선도량형령”이 공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일본식 미터법이 사용되게 되었지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이후에도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주척(周尺)에 기반한 1리(里)=400미터를 부정하고 일본의 것을 그대로 따른 1리(里)=3.9㎞란 기준을 만든 쿠데타 세력들의 태도는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친일(親日)성향에 따른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우리나라 헌정 사상 초유로 대법관 2명의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있었습니다. 기각될 것이란 예상은 했으나 국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결정으로 또 한 번 사법부의 불신을 초래하게 만들고 말았으며,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한 재판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 및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앤장이 서로 공모(?)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씁쓸하다 못해 분노가 치밉니다.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의 행정부요 대한민국의 사법부였는지?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조선(朝鮮)의 제도와 관습을 부정하려고 했던 5·16세력과 무엇이 다른지? 매서워진 한파와 함께 읽은 아침뉴스를 보고 주절거려보았습니다.

춥지만 힘들 내시고, 경기가 어렵고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더라도 주변을 살피고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KTX의 궤간(軌間)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KTX의 궤간(軌間)

tvN의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역)이 미국인 로건을 암살할 때 창문을 열어준 기생 소아(오아연 역)가 정체가 탄로나게 되어 탈출을 할 때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쳐 일본인들의 이목이 제물포로 쏠리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극중에 나오는 것이 한국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입니다.

 

경인선은 미국인 모스(Morse)가 1896년 3월 29일 획득한 서울~인천 간의 철도부설권을 일본이 넘겨받아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간의 부분개통을 하고 영업을 시작하였는데 개정되기 전까지 철도의 날이었던 9월 18일은 바로 이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금년 2018년 5월 8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제20회 국무회의에서 철도국 창설일(1894년 6월 28일)로 변경하는 안이 의결되어 철도의 날이 6월 28일로 새롭게 지정되게 되었습니다.

경인선이 처음으로 부설될 때의 궤도 간격은 표준궤에서 러시아의 간섭에 따라 러시아에서 쓰는 광궤로, 다시 일본의 압력을 받아 좁은 협궤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원래의 표준궤로 정착되게 되는데 광궤를 협궤로 바꾸는 것도 일본이었고, 협궤로 바꾼 것을 다시 표준궤로 바꾼 것도 일본이었는데 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화물수송에 불편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침략을 위한 그들의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았던 대만과 남부 사할린에 부설한 철도의 궤간은 모두 협궤인 것에 비해 유독 한국에 부설한 철도만 표준궤인 것을 생각하면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노라면 현재의 정세가 주변국들의 이권다툼의 장이 되었던 구한말의 시대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의 파렴치한 행동 또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씁쓸하기만 합니다.

다들 아는 것처럼 일본의 철도는 협궤입니다. 일본의 궤간이 협궤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들이 있으나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건설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서구열강들이 식민지에 건설한 철도의 대부분은 협궤를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인 이유로 대부분의 식민지에 부설하던 협궤가 아닌 표준궤를 일본이 한국의 철도에 부설한 것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고 만주의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야욕의 산물인 것이며 이런 이면에는 영국이라는 나라와 맺은 영일동맹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철도를 얘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라는 사람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최초의 철도인 도쿄의 신바시와 요코하마 사이의 구간을 개통(1872년 10월 14일)시키는 사업에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와 함께 책임을 맡았으며 비록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기는 하였지만 양국의 이득을 위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대신과의 논의 차 1909년 방문했던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인선의 궤간(軌間)은 표준궤에서 광궤로, 광궤에서 협궤로 바뀌었다가 다시 표준궤로 변경되었는데 표준궤로 최종 변경되게 되는 것은 경의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남하하는 러시아에 맞서 만주의 지배권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야심은 결국 러일전쟁을 야기하게 되는데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전비(戰費)를 위한 차관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영국과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었으며 그 이후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일본으로부터 전쟁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신의주까지의 철도 건설을 계획하면서 선로의 폭, 즉 궤간(軌間)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의견은 공기의 단축과 비용의 절감이란 이유로 협궤로 하자는 것이었지만 일본의 속셈은 조선을 넘어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으므로 당시 동맹을 맺었던 영국이 청나라에 건설한 표준궤와 동일한 선로를 건설하는 것이 군수물자의 수송에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1,435mm의 표준궤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제73주년 광복절 기념일을 맞은 오늘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정세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형국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민을 설득할 정도의 정당한 사유 없이 영장의 발부를 거부하고 있는 사법부, 특활비의 폐지를 시간만 끌다가 여론에 못 이겨 결정하면서도 꼼수를 부리는 국회, 대통령 한 사람만이 바뀌었을 뿐인 행정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총기휴대가 법으로 금지된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고애신(김태리)과 같은 의병이 쏘는 총소리를 현재를 사는 우리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저만의 것은 아니겠지요?

 

저격수용 위장복, 길리 슈트(Ghillie suit)의 기원

저격수용 위장복, 길리 슈트(Ghillie suit)의 기원

저격수를 소재로 하는 영화에서 자주 보게 되는 위장복인 길리 슈트(Ghillie suit)는 어디서부터 유래한 것인지 그 기원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먼저 우리가 알고 있는 길리 슈트의 영어 스펠링 길리(Ghillie)는 정확한 것이 아니고 철자 표기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을 알아두자.

다들 아는 것처럼 길리 슈트는 스코틀랜드의 사냥터 관리인들로부터 유래하였는데 길리라는 단어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사냥터나 낚시터에서 가이드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예전에 포스팅한 “스코틀랜드의 낚시에 남아 있는 귀족문화 길리(GILLIE)”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본문의 내용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 “스코틀랜드의 민물낚시는 공공장소에서 하는 것과 사유지에서 낚시를 하는 것으로 구분할 수가 있는데 특히 사유지에서 낚시를 하는 경우에는 규정이 까다롭고, 낚시를 하는 사람들의 숫자도 엄격하게 제한되는데 이런 곳에는 길리(GILLIE)라고 하는 일종의 가이드들이 있다.

여기서 나오는 길리(Gillie)라는 스코틀랜드 게일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저격수의 위장복을 가리키는 길리(Ghillie)의 어원이 되는 말인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서 Gillie가 Ghillie로 잘못 표기된 것이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Tour Scotland

 

스코틀랜드 게일어인 길리(Gillie)라는 말은 스코틀랜드의 전설 속 요정인 길리 두(Ghillie Dhu)에서 유래된 것으로 길리 두(Ghillie Dhu)를 번역하면 “어둠 속의 젊은이” 정도가 되는데 어두운 곳에서 사는 요정이란 말로 이해하면 크게 틀리지 않다.

바로 이 요정이 자작나무 숲에 살면서 나뭇잎이나 이끼로 된 옷을 입고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하여 천조각이나 나뭇잎 등으로 위장하여 덧입는 것을 길리 슈트(Ghillie suit)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군사분야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은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제2차 보어전쟁에서 영국의 로바트 척후대(Lovat Scouts)가 운용했던 저격병들이 착용했던 것이 처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2차 대전 당시의 로바트 척후대(Lovat Scouts) 저격병

전쟁터를 누빈 도넛 걸(DoughGirls)

전쟁터를 누빈 도넛 걸(DoughGirls)

해마다 6월이면 미국에서는 “도넛 데이(National Doughnut Day 또는 National Donut Day)”라고 하는 휴일이 있습니다.

빼○로데이, 삼겹살데이도 있으니 뭐 이상할 것은 없지만 이 기념일이 생기게 된 배경에는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들을 위한 희생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헬멧과 가스마스크, 그리고 45구경 리볼버로 무장한 여성들~ 그들은 1차 세계대전에서 전쟁터를 누비며 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에서부터 기원하여 도넛데이가 만들어졌구요~

그녀들은 과연 전쟁터에서 무슨 일을 한 것일까요? 그리고 그녀들은 어떻게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녀들의 활약상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게 되고 프랑스의 전선에 병력들이 투입되면서 구세군대장이었던 “에반젤린 부스(Evangeline Booth)”는 전선의 장병들을 지원하기 위하여 11명의 여성대원들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고생하는 장병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포탄이 쏟아지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의 폐허가 된 오두막의 한켠에서 프라이팬 대신에 헬멧을 이용하고 반죽을 밀기 위해 빈병을 사용하여 작은 냄비에 한 번에 7개씩의 도넛을 튀겨 첫날에만 150명의 병사들에게 도넛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만든 도넛의 인기는 폭발적이었으니 그 다음날은 첫 날의 두 배를 만들었고 어느 정도 시설이 구축되고 나서부터는 하루에 9천 개씩의 도넛을 만들어 제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차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아래의 포스터는 실제 전쟁에 참가한 구세군 봉사자 “스텔라 영(Stella Young)”을 모델로 하여 제작한 것인데 당시 그녀는 16세의 어린 소녀였다고 합니다.

 

 

이런 도넛걸들의 희생과 봉사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구세군 시카고 지부에서는 1938년부터 “도넛 데이(National Doughnut Day 또는 National Donut Day)”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지원한 구세군 자원봉사자들의 숫자는 모두 250명이었으며 그녀들은 매일 평균 2,500개의 도넛과 800개의 팬케이크를 만들어 병사들의 사기를 높였으며 민간인과 구별하기 위해 미국의 국립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아래와 같은 제복을 착용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들의 이런 희생이 얼마나 장병들의 사기를 높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있는데 당시 전쟁에 참가했던 병사가 보스턴의 지역신문에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고 합니다. “전쟁터에서 뜨거운 도넛과 파이를 먹을 수 있다고 상상하십니까? 거기다 예쁜 소녀들이 주는 것을~ 맛은 유명 상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좋습니다.”

그 후로 도넛 걸(Dough Girls)들의 봉사는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1944년 영국에 주둔하고 있던 그녀들의 활동하는 모습이 라이프지의 사진기자를 통해 널리 알려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개석이 독일과 연합했던 것은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장개석이 독일과 연합했던 것은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

중국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맺어졌던 두 번의 협력관계를 우리는 제1, 2차 국공합작이라고 부른다. 이 중 제1차 국공합작은 당시로는 규모가 작았던 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대등한 관계로 협력을 맺지는 못하고 국민당에 입당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제1차 국공합작이 성립됨으로 인해 장개석은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1923년 8월에는 중국공산당의 지원으로 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방문하여 군사학교와 붉은 군대를 시찰하고, 특히 붉은 군대의 창립자인 ‘레온 트로츠키(Leon Trotsky)’를 비롯한 소련의 지도자들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으로 인해 장개석은 ‘붉은 장군(Red General)’이라는 그리 달갑지 않은 닉네임이 따라다니게 되었다.

또한 제1차 국공합작의 산물로 1924년 6월 16일에는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가 개교하게 되는데 장개석은 이 학교의 초대교장을 맡아 소련의 붉은 군대의 군사조직을 본뜬 학교체제를 만들었으며, 소련에서는 군사고문단을 파견하여 강의를 하거나 군사교육을 지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개교식 모습

 

이렇게 탄생한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는 한국인 입학생들도 많았는데 영화 ‘암살’로 조명을 받았던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도 이 학교의 4기생이었다.

 

그러나 학교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장개석과 소련고문단과의 사이에 자주 마찰이 생기게 되면서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회의를 갖기 시작했던 장개석은 소련의 지원이 실제로는 중국에 대한 통제권을 얻으려는 속셈이라는 판단을 하게 되고, 1926년 3월 20일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당간부와 소련의 군사고문단을 체포·연금하면서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려는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927년 4월 11일에는 공산주의자들을 제거하라는 비밀명령을 하달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4·12 사건’이 일어나게 되는 명령이었고, 이것을 두고 진압한 쪽에서는 숙청이나 정화라는 표현을 쓰지만 반대쪽에서는 참안(慘案: 대학살)이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프랑스의 작가 ‘앙드레 말로’는 이 사건을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인간의 조건’을 1933년에 발표하기도 하였는데 20일 동안에 1만 명이 처형되었던 까닭으로 서양에서는 ‘4·12 사건’보다는 ‘상하이 대학살(Shanghai Massacre)’로 불리고 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제1차 국공합작은 결렬되었고 소련고문단은 추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가게 되지만 장개석은 또 다른 동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 때 장개석이 선택한 것이 바로 독일인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아시아 태평양지역의 식민지를 모두 잃었던 유럽의 강대국 독일이 가지고 있던 전쟁의 경험을 활용하고자 하는 장개석의 속셈과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식민지를 모두 포기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감축해야 했으므로 실직한 군인들이 넘쳐나고 있어서 이를 타개하는 수단으로 삼으려는 독일의 속셈이 서로 맞아떨어져 동맹을 맺기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장개석은 독일의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에게 군대와 민간전문가를 파견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이에 응하여 ‘에리히 루덴도르프(Erich Ludendorff)’는 ‘맥스 바우어(Max Bauer)’ 대령을 단장으로 하는 독일자문단(German Advisory Group)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맥스 바우어(Max Bauer)’는 천연두에 감염되어 중국에 온지 1년만인 1929년 5월 6일 사망하게 되고 후임으로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이 부임하게 되는데 천연두로 숨진 ‘맥스 바우어(Max Bauer)’는 중국 공산당원에 의해 인위적으로 감염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후임으로 부임한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은 히틀러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마지막엔 히틀러에 의해서 숙청되는 운명을 맞지만 당시에는 나치를 지원하는 우익 군사테러조직이었던 자유군단(Freikorps)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1930년에 국민당의 초청으로 ‘히틀러 청소년단(독일어: Hitlerjugend, 영어: Hitler Youth)’이 중국을 방문하기도 하였고 이어서 나치가 권력을 잡으면서 독일과의 협력은 더욱 강화되게 된다.

이와 같은 협력강화의 일환으로 히틀러가 1933년 1월 30일에 총리에 오르기 몇 달 전에 ‘한스 폰 젝트(요하네스 프리드리히 “한스” 폰 젝트: Johannes Friedrich “Hans” von Seeckt)’ 장군이 ‘헤르만 크리벨(Hermann Kriebel)’ 대령을 대신하여 고문단장으로 중국에 부임하게 되는데 ‘한스 폰 젝트’는 기습전을 중국에 도입시킨 인물로 평가받고 있으며, 중국 공산당 홍군(紅軍)이 국민당군의 포위망을 뚫고 370일 동안 9,600km의 거리를 걸어서 옌안으로 탈출하는 대장정에 나서게 되었던 공격작전을 제안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과 함께 독일 내에서는 중국과 일본 중에서 어디를 택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두고 의견이 나뉘게 된다.

장개석을 파시스트로 판단한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는 중국과의 무기무역이 독일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논리로 친중국 정책을 주장하였고, ‘헤르만 괴링(Hermann Goering)’은 일본이 이념적으로 더 가까울 뿐 아니라 소련과의 적대정책을 펴고 있기 때문에 일본과 더욱 긴밀한 관계를 수립하는 것이 좋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장개석은 정치적인 인질의 신분으로 소련에서 공부하고 있던 그의 서얼, ‘장웨이궈(蔣緯國)’를 독일에 보내어 사관학교를 마치고 1938년 3월에 나치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무력으로 합방하는 침공에까지 참여하게 만든다.

장웨이궈(蔣緯國)

 

하지만 독일과의 강력한 동맹을 유지하고자 했던 장개석의 생각은 일본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1938년 1월 16일, 일본은 앞으로 중국국민당 정부를 상대하지 않는다는 ‘제1차 고노에 후미마로 성명’을 발표하는데 이것은 실제로는 국민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며 1940년 9월 27일에는 주저하는 독일에게 이탈리아와의 ‘3국 동맹’의 체결을 제안하여 동맹을 맺게 된다.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하기 전인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중국에 대한 독일군의 지원이 일부나마 계속되고 있었으나 중일전쟁으로 이루어진 ‘제2차 국공합작’으로 인해 공산당과 손을 잡은 중국에 독일의 대한 지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이루어진 3국 동맹으로 인해 완전히 결별하게 되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리고 일본이 패망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본의 점령지에 대한 배분을 둘러싸고 무력충돌을 벌이게 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은 결렬되고 ‘중국 공산혁명’이라고 하는 ‘제2차 국공 내전’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중국의 언론에서 ‘해방전쟁’이라고 부르는 ‘제2차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하여 대만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나치독일과 손을 잡았던 장개석의 정책이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난징 대학살’을 일으킨 일본과 마찬가지로 잔악한 행동을 무수히 저질렀으며 일본과 동맹관계를 맺었던 추축국의 일원인 독일과 동맹을 맺은 국민당정부를 어떻게 지지할 수 있겠는가?”라는 공산주의자들의 외침은 중국인민들의 공감을 얻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처럼 장개석은 정부를 타이베이로 이전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나 본토에서 쫓겨나기 이전인 1947년 2월 27일에 타이베이에서 정부의 전매품이자 독점품목이었던 담배를 허가를 받지 않고 노점에서 판매하였다는 이유로 여성을 공무원들과 경찰이 폭행하는 이른바 ‘원환집연사건(圓環緝煙事件)’이 발생하고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2월 28일에 대만 전역에서 민중봉기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민중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대만의 행정장관 겸 경비총사령 천이(陳儀)는 계엄령을 선포하였고 이에 더욱 반발한 민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는 과정에서 경찰관이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시위대를 향한 기관총을 발사하여 사상자를 내는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사태가 격화되자 천이는 앞으로는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노력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를 취하면서 뒤로는 장개석에게 지원을 요청하는데 ,천이의 요청을 받은 장개석은 내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2개 사단과 1개 헌병대를 파견하여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잔인한 행동으로 시위대를 진압하면서 3만 여 명이 목숨을 잃는 그야말로 대학살이라고 할 수 있는 ‘2·28 사건’ 또는 ‘2·28대학살’의 원흉이 되고 만다.

이런 ‘2·28 사건’은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로 여겨졌으나 40주년을 맞은 1987년에 ‘2·28 사건’을 연구하는 모임이 결성되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하여 1997년에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사죄하기에 이르게 된다.

 

대만 정부에서 공식사죄한 ‘2·28 사건’에 대하여 부정하는 망동을 일삼는 정치인이 없는 대만에 비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부정하는 망언을 일삼는 자들이 버젓이 존재하는 우리나라는 진정한 민주주의국가임을 깨닫게 되고, 망언을 일삼은 자들의 징계를 피하려는 정치권의 꼼수를 보면서는 정말 진정으로 머리가 좋고 국민들을 위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본의 흰 성(城)과 검은 성(城)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일본의 흰 성(城)과 검은 성(城)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성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일본의 히메지성(姫路城)은 흰 성(城)의 대표적인 것으로 백로성(白鷺城: 하쿠로 성)이라고도 부른다.

히메지성(姫路城)

 

이와는 달리 일명 카라스성(烏城: 까마귀 성)으로도 불리는 마쓰모토성(松本城)은 검은 성을 대표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마쓰모토성(松本城)

 

일본에서 성(城)의 색깔이 이처럼 다르게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지금부터 그 유래를 알아보자.

일본에서 성을 쌓는 축성의 기술과 문화는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를 기준으로 전후(前後)로 나뉘는데 1600년 10월 21일 일어난 이 전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이후의 권력을 두고 일어난 것이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이끄는 동군이 승리함으로써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패권을 장악하고 막부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역사에서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는 오늘 이야기의 주제인 축성(築城)에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데, 전투가 발생하기 이전인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축성된 성들은 색깔이 검고, 전투 이후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지어진 것들은 희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 이전에 지어진 성으로는 위에서 언급한 마쓰모토성(松本城) 외에도 구마모토성(熊本城), 오카야마성(岡山城) 히로시마성(広島城) 등이 있는데 성벽의 색상이 모두 검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구마모토성(熊本城)

 

오카야마성(岡山城)

 

히로시마성(広島城)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에 지어진 성들은 외벽에 감물과 옻칠을 하였기 때문에 외벽의 색상이 검게 보이는 것인데, 이렇게 검은 색으로 외벽을 칠하게 된 까닭은 언제 적의 공격이 있을지 모르는 당시의 시대상으로는 적으로부터 몸을 숨기면서 공격하기에 검은색이 유리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금(金)을 좋아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기호에 따라 흰색 보다는 검정색의 바탕에서 금이 더 돋보이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한편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들어와서부터는 화재에 강한 회반죽을 외벽에 바르기 시작하였는데 이 때문에 희게 보이는 성으로는 위에서 언급했던 유명한 히메지성(姫路城) 외에도 고치성(高知城), 히코네성(彦根城), 나고야성(名古屋城) 등이 있다.

고치성(高知城)

 

히코네성(彦根城)

 

나고야성(名古屋城)

 

도쿠가와 이에야스 시대에 외벽을 흰 색으로 칠한 이유는 발전한 축성기술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 시대와 차별화를 시키고 싶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욕망도 크게 한몫을 하여 검정색과 대비되는 흰색을 사용했던 것이었고, 또 다른 이유로는 시각적으로 흰색의 성이 검은색의 성보다는 크게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였다.

흰색이 검정색보다 크게 보인다는 것은 우리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바둑알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개가 검정색이 흰색보다 0.3㎜ 이상 크게 만들어진다.

물론 바둑알 하나는 육안으로 그 차이를 느끼지 못하지만 대국(對局)이 막바지에 이르게 되면 시각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에 비슷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나라에서는 흰 돌은 21.8㎜, 검은 돌은 22.11㎜로 만들고 일본에서는 흰 돌은 21.87㎜, 검은 돌은 22.2㎜를 표준 사이즈로 정해두고 있는 것이다.

모기장 밖(蚊帳の外)의 일본과 아베총리

모기장 밖(蚊帳の外)의 일본과 아베총리

여름은 모기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다. 그런데 요 며칠 사이 언론을 통해 듣게 되는 말 중에 ‘모기장 밖’이라는 것이 있다.

모기장은 사람이 안에 들어가야 모기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것인데, 모기장 밖에 있으면 모기밥이 되기 십상이다. 그러면 ‘모기장 밖’이란 표현은 무언가 피해를 본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이 표현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언론에서 사용하고 있는 ‘모기장 밖’이란 표현은 일본어 카야노소토(蚊帳の外)를 직역한 것인데 선풍기나 에어컨이 없던 시절에는 더운 여름에 잠을 잘 때에도 창문을 열어놓아야 했고 그 때 모기에 물리지 않기 위해 모기장을 사용했다.

따라서 모기장 밖에 있다는 것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거나 왕따(이지메) 당하는 상황, 혹은 무시당하거나 불리한 상황에 놓인 것, 또는 중요한 속사정을 모르는 경우를 나타내는 말로 일본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런데 이 표현이 새삼 주목을 받게 된 것은 지난 6월 30일,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에서 깜짝회담을 가진 사실을 보도하면서 도쿄신문이 북미회담의 과정에서 어떤 형태의 참여도 하지 못한 아베를 두고 모기장 밖(蚊帳の外)에 있다는 표현을 사용한 것을 우리 언론들도 인용하면서 널리 알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번 아베정권이 행한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의 본질을 들여다보면 이 모기장 밖(蚊帳の外)이란 표현이 많은 것을 알려주고 있다.

지난 시간 아베정권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를 단행한 이유로 대북교역에 관한 의문점을 문제 삼고 있다는 것을 알아본 바가 있었다.

또한 아베가 수출규제를 일본의 참의원선거운동이 시작되는 날에 맞추어 단행한 것은 정치적 이유 때문이라는 것은 ‘일본의 수출규제는 양국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를 통해서 짚어보기도 하였다.

그 글에서도 언급했던 일본의 경제와 연금 및 소비세 등등의 문제는 아베정권이 모기장 안에 있기 때문에 해당되지 않으며 단지 한 가지 일본의 외교안보 문제만이 모기장 밖(蚊帳の外)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오사카에서 열렸던 G20에 참가하기 전 가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공격당하면 일본은 우리를 전혀 도울 필요가 없다. 그들은 오직 소니 TV로 공격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고 하면서 현재의 미일안보조약의 불평등을 지적했었다.

트럼프의 이러한 불평은 현재의 미일안보조약 제5조에서 일본의 영토에 대한 무력공격(미군을 포함)에 대하여 미국이 공동으로 대처하도록 한다고 되어있는 것에 비해서 일본의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것은 제6조에서 미군이 주둔할 수 있도록 기지를 제공하는 의무만을 규정하고 있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었다.

아베로서는 트럼프의 협박(?) 때문에라도 일본헌법 제9조의 “교전권, 정규군 보유의 금지” 조항과, 자국 내의 방어만을 수행한다는 “전수방위”의 원칙을 개정하여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런데 2018년 3월 김정은과 중국 시진핑 주석과의 1차 회담을 필두로 트럼프와 김정은의 북미회담 및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과의 역사적인 평양회담에 이르기까지 일본은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북한, 미국, 중국, 러시아와는 달리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한 현안에서 그야말로 모기장 밖(蚊帳の外)의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G20의 개최국이면서도 아베가 문재인 대통령의 면담을 거절한 것에서 우리는 아베총리 스스로가 모기장 밖(蚊帳の外)으로 나와야 한다는 복안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G20을 통해 나타난 아베총리의 외교력 한계를 비난하는 일본 내의 여론이 비등하고, 트럼프로부터는 안보조약의 불평등에 대한 협박성 불만을 받기에 이르자 아베로서는 모기장 밖(蚊帳の外)에서 스스로의 존재감을 과시함으로써 다시 안으로 초대되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졌을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의원 선거에서 2/3를 넘는 의석을 확보해야만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카드는 한국때리기란 것을 아베는 통계부정으로 떨어진 지지율을 ‘초계기 저공비행’이란 방법을 동원하여 보수층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면서 이미 배운 바가 있었다.

트럼프가 불만을 제기하는 미일안보조약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는 논외로 하면) 일본헌법 제9조를 개정하면 해결될 문제이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이번 참의원선거의 승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아베의 당면과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수단으로 꺼내든 것이 우리나라에 대한 수출규제란 카드인데, 이 문제는 앞으로 있을 북한의 비핵화해결과 관련한 과정에서 일본의 의견을 반영, 내지는 입지를 세워줄 수 있는 여지를 미국과 외교적으로 협의하여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우리 외교부가 일본을 WTO에 제소하기보다도 먼저 노력해야 할 부분임이 분명하다.

현재 일고 있는 국민들의 자발적인 일본 불매운동은 요원의 불길처럼 더욱 번지는 것이 좋고, 우리사회의 갈등을 부추기려는 일본의 요구에 맞게 정부를 때리는 식의 보도는 지금 단계에서는 보류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처럼 모기장 밖(蚊帳の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칭얼거리는 아베를 달래서 모기장 안으로 들여보내면 이번 수출규제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다.

표면적인 이유로 아베가 내세우고 있는 위안부 합의와 징용 피해자의 배상 판결 문제는 이번 사태에 숨어있는 문제의 본질은 절대 아님을 알아야만 할 것이다.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