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불안감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 국방부의 1971년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51%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28%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복용했으며 31%는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를 복용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포와 극심한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일정량을 병사들에게 공급하기도 한다.

오래전 음주로 인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미 해군은 1862년 9월 1일부터 병사들에게 럼주의 배급을 중단하고, 영국해군은 1970년 7월 30일에 럼주의 배급을 중지하기도 하였는데 그날을 “Black Tot Day”라고 부르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되고 나서 연합군은 보급물자의 부족을 겪게 되는데 그 품목들 중에는 맥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운이 좋은 일부 병사들은 지역에서 술을 구해 마시기도 하였으나 수요에 비해서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에 영국의 양조회사(Heneger와 Constable) 두 곳에서는 무료로 맥주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영국공군에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노르망디까지 맥주를 수송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마침내 영국공군(RAF: Royal Air Force-영국 왕립공군)에서는 2차 대전의 주력기였던 스핏파이어를 수송에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스핏파이어는 45갤런(약 170리터)의 드롭탱크(drop tank) 2개를 연결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맥주를 담아 노르망디로 공수하기로 하고, 탱크 내부를 세척한 다음 2개의 드롭탱크(drop tank)에 모두 90갤런(약 340리터)의 맥주를 싣고 비행을 하게 된다.

 

이처럼 비행기로 맥주를 실어 나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날으는 펍(flying pubs)’이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을 했다고 해도 연료탱크에 담은 맥주에서 금속 맛이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모디피케이션 XXX(Modification XXX)’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스핏파이어의 양 날개 밑에 맥주통을 달고 운반하는 방식으로 병사들은 이를 두고 ‘맥주폭탄(beer bombs)’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운반하는 방법도 착륙도중에 불안정 하여 깨지는 사례가 빈번하였고 착륙하면서 맥주통을 깨뜨린 조종사는 병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죽일 놈’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맥주폭탄(beer bombs)’은 기존의 드롭탱크에 싣고 가던 것에 비해서는 맛은 유지가 되었으나 운반하는 양이 크게 부족하여 영국공군은 다시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스핏파이어보다 더 많은 양의 맥주를 실을 수 있는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수송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이용한 맥주수송은 계속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독일군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과 착각한 미군의 ‘P-47 선더볼트(P-47 Thunderbolts)’로부터 하루에 두 번이나 공격을 받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

한편 이런 영국공군의 모습을 본 미군에서는 맥주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공군이 노르망디로 수송하던 맥주는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끝을 맺고 마는데 그것은 영국 양조회사들(Heneger와 Constable)이 무료로 제공한 맥주가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영국 간접세무국(HM Customs and Excise)’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을 내린 영국과는 달리 미국정부에서는 1944년 11월부터는 아예 미국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5%를 전선에 공급하기로 정하고 미군들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Ace in a day는 하루에 5대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레드 바론(붉은 남작)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도 80기의 격추기록을 가지고는 있지만 Ace in a day를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레드 바론이 활약하던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2차 대전에 비해서 투입된 비행기의 숫자도 적었을뿐더러 조준기나 광학장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기록을 수립하기는 어려웠겠지만 Ace in a day를 수립한 최초의 기록은 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나왔으며 게다가 이것을 두 번이나 달성한 “Double Ace in a day”도 수립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는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의 “Julius Arigi”로서 그는 1916년 8월 22일 이탈리아군의 비행기 5대를 격추하였습니다.

Julius Arigi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는 “Julius Arigi”를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Ace in a day가 되는 기록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의 육군에서 조종사로 활약하였던 “Alfred Atkey”는 1918년 5월 7일 Ace in a day의 기록을 세웠고 이틀 뒤에 다시 5대를 격추시켜 두 번의 Ace in a day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장비의 발달과 함께 많은 수의 조종사들이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하루에 두 번의 기록을 달성하는 “Double Ace in a day”를 비롯하여 세 번을 달성하는 “Triple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들도 있습니다.

물론 2인승 전투기의 경우에는 조종사뿐만 아니라 사수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조종사들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이 기록을 수립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의 히로미치 시노하라가 1939년 6월 27일에 소련의 비행기 11대를 격추하여 Double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히로미치 시노하라

 

그러면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에서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한 조종사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Triple Ace in a day

▶ 에밀 랑(Emil Lang)

독일의 에밀 랑은 2차 대전 당시 모두 173기를 격추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1943년 11월 3일 소련의 전투기 18대를 격추시켰습니다.

 

▶ 한스요하임 마르세이(Hans-Joachim Marseille)

2차 대전에서 모두 158기를 격추시킨 그는 1942년 9월 1일 모두 17대의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 어거스트 램버트(August Lambert)

단 3주 만에 모두 70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가진 그는 1944년 하루에 17기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1945년 4월 17일 미국의 P-51 머스탱의 공격으로 전사하였습니다.

 

▶ 휴버트 스트라슬(Hubert Strassl, Hubert Straßl)

2차 대전 동안 모두 67기를 격추한 그는 1943년 7월 5일 17대의 소련항공기를 격추시켜 Triple Ace in a day의 기록을 기록하였으나 3일 뒤인 1943년 7월 8일에 전사하였습니다.

 

■ Double Ace in a day

국적
이름
일시
격추 대수
일본
히로미치 시노하라
1939년 6월 27일
11대
독일
헤르만 그라프
1942년 9월 23일
10대
오스트리아
Walter Nowotny
1943년 9월 01일
10대
독일
Erich Rudorffer
1943년 10월 11일
13대
독일
에리히 하르트만
1944년 8월 24일
10대

 

에리히 하르트만은 총 352대를 격추시켜 세계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 Ace in a day

2차 대전 당시 하루에 5대 이상 10대 미만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는 모두 28명이 있으며 그 중에서 독일의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Heinz-Wolfgang Schnaufer)”와 미국의 “데이빗 맥캠벨(David McCampbell)” 및 핀란드의 “한스 빈드(Hans Wind)”는 두 번의 Ace in a day 기록을 수립하였고 세계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척 예거(Chuck Yeager)가 1944년 10월 12일에 5대를 격추하여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척 예거(Chuck Yeager)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이미지 by Paul M Walsh FLICKR

2019년에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는 전체적인 평점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진주만의 공습으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의 전개는 일본의 항공모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생각된다.

항공모함이 적극적인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영국이 경순양함을 개조하여 만들었던 HMS Furious(47)로, 1918년 7월 19일 탑재하고 있던 7기의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이 출격하여 지금은 벨기에의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제국의 도시였던 퇴네르(Tondern)에 주둔하고 있던 제플린 비행선을 공격한 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HMS Furious(47)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

제플린 비행선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상전투의 기본은 함포사격이었고 미국은 영토확장 의지가 크지 않았으며 영국도 유럽에서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각각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여 태평양지역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항공모함의 건조에 공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진주만공습으로 시작되는 태평양전쟁의 초기에는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처럼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92년 개최되었던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력함의 톤수가 미국과 영국의 60%로 제한되긴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제한이 엄격하지 않았던 분야가 바로 항공모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만들었던 최초의 항공모함은 기준배수량 7,470t의 호쇼(鳳翔)로서 이견은 있지만 항공모함으로 설계되어 완성된 세계최초의 항공모함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호쇼는 태평양전쟁이 개전되었을 때에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려서 진주만공습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공격에 참가한 6척의 항공모함을 위한 대잠초계 임무를 수행하다가 오가사와라 제도 부근에서 회항하게 된다. 그리고 진주만공습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호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항공모함은 짧게는 공습 후 정확히 6개월이 지난 후, 길게는 2년 6개월 뒤에 미국의 공격을 받아 모두 침몰되는 운명을 맞았는데 당시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취역 순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함명
기준배수량
취역일
침몰일
아카기(赤城)
36,500톤
1927년 3월 25일
1942년 6월 6일
카가(加賀)
26,900톤
1929년 11월 30일
1942년 6월 5일
소류(蒼龍)
15,900톤
1937년 12월 29일
1942년 6월 5일
히류(飛龍)
17,300톤
1939년 7월 5일
1942년 6월 6일
쇼카쿠(翔鶴)
25,675톤
1941년 8월 8일
1944년 6월 19일
즈이카쿠(瑞鶴)
25,675톤
1941년 9월 25일
1944년 10월 25일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이들 6척의 항공모함 중에서 즈이카쿠(瑞鶴)는 침몰하기 직전에 참가했던 마리아나해전 이전까지는 단 1발의 피탄도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운이 좋았는데 이름에 상서롭고 운이 좋다는 뜻의 한자(瑞)가 들어있어서였던지는 몰라도 건조과정에서도 중상이나 사망과 같은 재해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고 건조되었다고 한다.

즈이카쿠(瑞鶴)의 취역예정일은 원래 1941년 12월이었으나 미국과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일정을 3개월이나 앞당기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사고 없이 건조되어 진주만공습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운이 좋은 배였기 때문이었을까? 즈이카쿠(瑞鶴)는 진주만공습에서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차로 출격했던 6기의 0식 함상전투기와 25기의 99식 함상폭격기가 모두 무사귀환하였고, 2차 출격에 가담했던 27기의 97식 함상공격기들도 모두 귀환할 수 있었다.

0식 함상전투기

 

97식 함상공격기

 

99식 함상폭격기

 

뿐만 아니라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이 참가하여 1944년 6월 19일부터 6월 20일까지 미해군과 격전을 벌였던 마리아나해전에서 쇼카쿠형 항공모함의 1번함이었던 쇼카쿠(翔鶴)는 침몰되었지만 2번함이었던 즈이카쿠(瑞鶴)는 1발의 명중탄과 5발의 지근탄에도 살아남아 그해 9월 23일에는 진주만공습 3주년을 기념하여 1944년 12월 7일에 개봉한 선전영화 ‘뇌격대출동(雷撃隊出動)’의 촬영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수뇌부의 이런 선전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사실상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마리아나해전을 기점으로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결국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즈이카쿠(瑞鶴)는 레이테해전에서 일본의 참패와 함께 북위 19도 57분, 동경 126도 34분 지점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만 모두 22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했던 일본이 다시금 군비의 확충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얘네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역사 속의 인물들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역사 속의 인물들

2011년 4월 17일 시작하여 2019년 5월 24일 시즌8을 끝으로 막을 내린 미국 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마지막 시즌에서 엄청난 혹평을 듣긴 했지만 가장 성공적인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왕좌의 게임 시즌4 에피소드 8에서 라니스터 가문의 우두머리였던 타이윈 라니스터는 그의 아들 티리온 라니스터가 쏜 석궁을 맞고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하는데 역사적으로는 이처럼 화장실에서 암살당한 인물들이 여럿 존재한다.

 

화장실이란 장소가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는 곳이기 때문에 만약 경비인력마저 없다면 암살자에게는 최적의 장소가 될 텐데 지금부터 화장실에서 암살을 당한 인물들을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 에드먼드 2세(EdmundⅡ)

크누트 대왕이 이끄는 덴마크의 침략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웠다고 해서 용맹왕 에드먼드(Edmund Ironside)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에드먼드 2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연사했다거나 질병에 의해서 사망했을 것이라는 설과 함께 암살을 당해 죽음에 이르렀을 것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암살당했다는 설은 12세기 노르만 왕조 시대의 역사가였던 헨리 오브 헌팅던(Henry of Huntingdon)이란 사람이 제기한 것인데 그에 의하면 에드먼드 2세는 화장실 아래에 숨어 있던 암살자가 밑에서 2번이나 찌른 칼에 의해 사망했다고 한다.

■ 바츨라프 3세(VáclavⅢ)

체코의 프라하에서 태어나 헝가리와 보헤미아 및 폴란드의 왕을 역임했던 바츨라프 3세는 1306년 폴란드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다가 체코의 올로모츠(Olomouc)성의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도중 암살당했다고 한다.

암살자를 보낸 인물은 브와디스와프 공작이었는데 그는 바츨라프 3세를 죽이고 난 뒤 1320년 1월 20일 폴란드의 왕위에 올라 브와디스와프 1세(폴란드어: WładysławⅠ)가 되었다.

올로모츠(Olomouc)성

 

그 밖에 암살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화장실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역사속의 인물들을 잠깐 살펴보면 당뇨병을 앓았던 영국의 조지 2세(GeorgeⅡ)는 1760년 이동 간이화장실에서 용변을 보던 중 대동맥이 파열되어 사망하였으며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ЕкатеринаⅡ: YekaterinaⅡ)도 화장실에서 쓰러진 뒤 침대로 옮겼으나 죽음에 이르고 말았다고 한다.

남성편력이 심했다고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의 죽음과 관련해서는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당시 적대관계에 있던 프랑스에서 퍼뜨린 거짓 정보에 불과하다.

예카테리나 2세

 

끝으로 아직은 사실인지의 여부가 정확하지 않지만 영국의 에드워드 2세(EdwardⅡ)의 죽음도 화장실은 아니지만 관련이 있다.(?)

에드워드 2세(EdwardⅡ)는 폐위당해 케닐워스 성에 감금되었다가 버클리 성으로 이감된 다음 폭행당해 숨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동성애자였던 그의 항문으로 불에 달군 쇠꼬챙이와 포크를 밀어 넣어 죽인 것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에드워드 2세(EdwardⅡ)가 동성애자였던 것은 맞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많은 역사학자들의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그 중의 하나는 에드워드 2세(EdwardⅡ)가 죽지 않고 생존했을 것이라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지금도 “에드워드 2세는 어디에 있는가?(Where Is EdwardⅡ?)란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연구가 진행 중이다.

나치의 부활인가? 卍표시를 쓰는 핀란드 공군

나치의 부활인가? 卍표시를 쓰는 핀란드 공군

10월 10부터 14일까지 제주도에서 열릴 2018 국제관함식에 일본 해상자위대의 군함이 욱일기를 달고 입항하는 것을 거부해야 한다는 여론이 뜨거운데 우리가 욱일기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과 유럽인들이 나치를 상징하는 卍자를 보는 시각과는 크게 다를 것이 없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핀란드공군에서는 나치의 상징인 卍자를 공군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과연 핀란드는 나치의 부활을 위해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요? 지금부터 그 사실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핀란드공군이 사용하는 卍자는 나치와는 관련이 없으며 그보다 훨씬 전인 1918년에 이미 비행기에 그려 넣었던 것으로 그보다도 더 올라가면 철기시대에 이미 만자문(卍)의 한 형태인 “투르사스의 심장(The Heart of Tursas)”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표식이었습니다.

투르사스의 심장(The Heart of Tursas)

한편 만자문(卍)과 유사한 갈고리십자가(Fylfot Cross)의 표식은 특히 북유럽을 중심으로 중세에 많이 사용되던 것이었으며 이런 만자문(卍)은 핀란드의 화가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가 그린 유명한 작품에도 등장하고 있는데 핀란드은행에 있는 1889년에 그가 그린 아래의 작품은 테두리가 수많은 만자문(卍)으로 장식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후 “악셀리 갈렌칼렐라(Akseli Gallen-Kallela)”는 핀란드 정부의 훈장을 디자인 하면서 갈고리십자가(Fylfot Cross)를 사용하였는데 이것은 핀란드 대통령의 깃발에도 그려져 있습니다.

 

핀란드 대통령의 깃발

 

이러한 만자문(卍)이 군용기에 처음으로 그려진 것은 핀란드내전이 한창이던 1918년 3월 6일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이 항공기를 기증하면서 행운의 상징으로 그려 넣었던 것이 최초였는데 그 이후부터 핀란드공군에서는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만자문(卍)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은 그보다 이전인 1901년부터 자신의 개인비행기에 이미 만자문(卍)을 그려 넣고 있었습니다.

 

“에릭 폰 로젠(Eric von Rosen)”백작이 기증한 비행기

 

그 후 핀란드는 겨울전쟁의 적대국이었던 소련과는 정전을 하고 독일과의 동맹은 해제하면서 나치 독일을 영토에서 몰아내는 라플란드 전쟁을 치르게 되고 영국과 소련연합통제위원회(British-Soviet Allied Control Commission)가 정전협정의 이행을 감독하기 위해 설치되는데 이때 소련으로부터 만자문(卍)의 사용에 대한 비난을 받아 1945년 3월부터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은 모두 푸른색과 흰색의 원형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 1956년부터 1981년 사임하기까지 25년간 대통령을 지냈던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이 1957년에 다시 핀란드공군이 만자문(卍)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고 그 후 9년 뒤에는 공군사령부와 모든 제복과 배지에 만자문(卍)을 사용할 수 있도록 승인하였습니다.

핀란드공군사령부 휘장

 

핀란드공군 아카데미 깃발

 

그러나 이와 달리 “우르호 케코넨(Urho Kekkonen)”대통령은 핀란드 정부의 훈장인 “백합장미장”과 “그랜드 십자가장”에서는 만자문(卍)을 빼도록 지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오랜 역사를 가진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 사용에 대하여 나치의 상징인 만자문(卍)을 사용하는 것이 어떤 도움이 되는지에 대한 반론도 만만찮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반론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은 “만일 지금 만자문(卍)의 사용을 중지하게 된다면 실제로 공군이 사용하던 표식이 나치의 상징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므로 계속 사용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만자문(卍)의 사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주장의 근거로 들고 있는 또 하나는 2017년에 법원으로부터 폭력단체로 규정되어 해산명령을 받았던 핀란드의 신나치주의자들은 만자문(卍)을 사용하지 않고 화살표 문양의 고대문자를 표식으로 사용하고 있었다는 것인데 참으로 궁색한 변명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핀란드공군의 만자문(卍) 사용에 대한 옹호론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의 사용을 반대하는 여론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고 전 세계로부터 비난의 목소리도 점차 증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욱일기를 단 일본군함의 입항을 반대하는 것처럼 유럽인들 또한 나치의 상징인 만자문(卍)의 사용에 대하여는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핀란드공군과 정부가 주변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좋은 결과를 맺기를 바랍니다.

험비를 대체할 JLTV의 납품연기는 불가피할 듯

험비를 대체할 JLTV의 납품연기는 불가피할 듯

험비(HMMWV: High Mobility Multipurpose Wheeled Vehicl)는 1985년부터 배치되기 시작하여 66개국에서 사용하고 있는 대수만 28만대 이상에 달하는 베스트셀러인데 이를 대체할 차세대 통합경전술차량(JLTV: Joint Light Tactical Vehicle)의 사업추진에 대한 미의회보고서가 어제 날짜인 9월 18일부로 발표되었습니다.

의회보고서에 의하면 2017년 8월과 9월에 캘리포니아 주 모하비 사막의 미해병 공지전투센터((Marine Corps Air Ground Combat Center)에서 있었던 JLTV의 테스트 결과가 성능요구치에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왔다고 하며 이에 따라 차량의 인수도 2040년이 되어야 완료될 수 있다고 합니다.

JLTV의 테스트는 실주행을 통한 검중과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병행되었다고 하는데 그동안 대략적인 사항들만 알려졌던 자료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의 세부적인 내용들이 알려졌는데 이를 충족시키는 차량이 납품된다면 JLTV의 성능은 경이적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듯 보입니다.

JLTV(Joint Light Tactical Vehicle) 자료요청서(RFI :Request For Information)

· 영하 40℃에서 1시간 내에 18℃로 높일 수 있어야 한다.

· 영상 50℃에서 40분 내에 32℃까지 낮출 수 있어야 한다.

· 엔진과 시스템 오류를 실시간으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 JLTV가 다른 JLTV를 견인할 수 있어야 한다.

· 험비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다용도의 기능을 가져야 한다.

· M-ATV와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지뢰 및 폭발물 방어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 M-ATV(MRAP All Terrain Vehicle)는 범용지형지뢰방호차량으로 이전의 지뢰방호차량인 MARP(Mine Resistant Ambush Protected)와 동일한 수준의 방호기능을 가지면서도 기동성은 향상되도록 설계된 차량.

· 1,000km의 오프로드를 고장 없이 주행하여야 한다.

· 타이어 2개가 터져도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3,600미터 이상의 고지에서도 작전이 가능해야 한다.

· 극한의 추위에서도 1분 이내에 시동이 걸려야 한다.

· 중간급유 없이 시속 56km로 560km를 달릴 수 있어야 하고 오프로드는 480km를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7초 이내에 시속 50km로 가속할 수 있어야 한다.

· 수심 1.5미터의 물을 건널 수 있어야 한다.

· 전진과 후진을 불문하고 60cm의 단차를 넘을 수 있어야 한다.

· 45cm의 단차를 시속 24km로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폭 7.6미터, 경사 20°의 호를 건널 수 있어야 한다.

· 스키 상급자도 어려운 경사 40°의 길을 가로로 주행할 수 있어야 한다.

· 엔진에 불이 붙을 경우 이를 감지하여 10초 이내에 자동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 차체의 도장에 손상이 있을 경우 자동 복구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미군당국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킨다면

JLTV는 그야말로 꿈의 자동차가 아닐 수 없겠습니다.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3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3편)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프랑스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의 결성에는 USFSA의 협력이 있었지만, 프랑스 체조 연맹이나 프랑스 사격연맹 등, 원래 USFSA에 반대 입장을 취하고 있던 경기 연맹도 순수한 경기 지향이라는 점에서 CNS에 찬동하는 자세를 표명하기 시작했고 CNS는 각각의 경기연맹이 자립하는 형태를 인정하면서 결집하는 조직으로 1913년에는 올림픽 대표에 관한 결정권을 획득하여 그 산하에 프랑스 올림픽위원회를 설치했다.

CNS는 설립 경위에서 통일된 규칙에 따라 프랑스와 세계의 스포츠를 통합하는 보편적인 모델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단일 경기를 총괄하는 각종 연맹을 통일된 규칙하에서 동등하게 관리한다는 ‘1경기 1연맹’이란 시스템이 CNS에 의해 처음으로 프랑스에서 도입되어 각종 경기 연맹의 설립이 증가함에 따라 프랑스의 보편주의적 가치관에 따른 CNS는 1차대전을 거치면서 더욱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간 반면 USFSA의 영향력은 감소하였다.

프랑스는 물론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였던 축구에 관하여 USFSA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만들어진 프랑스 연방간 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는 1913년에 국제축구연맹(FIF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football association)으로부터 프랑스 챔피언십을 개최할 권한을 얻게 된다.

CFI에는 1차대전 전인 1910년부터 축구의 전문화를 둘러싸고 USFSA를 떠난 쥘 리메가 가입하고 있으며, FIFA에서도 영향력이 컸던 쥘 리메의 생각은 프랑스 축구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쥘 리메(Jules Rimet)

 

CFI는 1919년 4월 7일 쥘 리메를 회장으로 프랑스 축구연맹으로 모습을 바꾸고 명실공히 프랑스에서 축구를 총괄하는 경기연맹이 되었으며 축구 연맹의 설립을 시작으로, 경기마다 연맹의 설립이 잇따라 1920년에는 USFSA의 럭비커미션이 해산하고 프랑스 럭비 연맹을 설립했으며 이어서 필드하키, 육상경기, 동계스포츠, 테니스, 수영과 그 밖에도 롤러스케이트, 바스크 펠로타 (Basque pelota) 등이 잇따라 독립적인 경기연맹을 설립했다.

바스크 펠로타 (Basque pelota)

각종 경기연맹의 설립에 따라 USFSA는 급속히 힘을 잃어 1921년 조직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각종 경기연맹의 설립에 비례하여 CNS는 그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 CNS를 구성하는 연맹은 1919년에는 22개 단체였지만 1921년에는 31개 단체로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경기연맹을 총괄하는 성격상 CNS의 회원들은 대부분 선수출신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같이 프랑스 국내에서의 스포츠계의 지도자는 쿠베르탱과 같은 귀족이나 USFSA를 주도한 엘리트층으로부터 1차대전 후에는 쥘 리메와 같은 스포츠 전문가들로 바뀌고 있었다.

스포츠를 둘러싼 이러한 변화는 1차대전 후 프랑스 사회의 변화와 함께 일어난 것으로 스포츠 미디어의 발전과 국민들의 스포츠에 대한 욕구가 커짐에 따라 이전까지 엘리트층의 독점적인 전유물이라 여겨졌던 스포츠가 일반대중에게로 확대되었고 일부 종목에서 진행된 스포츠의 프로화를 프랑스 스포츠계로서도 무시할 수 없었으며 이런 와중에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가 1922년 3월 정부에 의해 정식 승인되었다.

이처럼 프랑스에서는 CNS 아래 하나의 연맹이 하나의 경기를 통괄한다는 모델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승국이었음에도 엄청난 희생자를 내었으며 국토 또한 황폐화되어 국민들의 정신적 충격 또한 컸다.

특히 국내에서 반독일 정서의 여론이 강해지는 가운데 국력의 쇠퇴를 만회하고 싶었던 프랑스는 국제연맹 등 새로운 국제질서의 형성에 주도적 입장을 취해 국가의 위신회복을 회복하려 스포츠계에서의 영향력 확대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즉,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함으로써 국가로서의 위신을 되찾으려 했던 것이다.

이미 1차대전 이전부터 프랑스 파리는 영국에서 유래한 스포츠를 세계에 펼친 ‘제2의 스포츠 중심지’로 여겨지며 19세기부터 20세기 초에 스포츠의 국제화에 크게 공헌했다고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로 인한 것으로써 예를 들어 라틴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출신의 유학생들 중에는 프랑스에서 처음으로 스포츠의 묘미를 알게 된 사람들이 많았다.

또한 국제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많은 국제 경기연맹이 프랑스인의 영향력으로 1차대전 전부터 설립되었는데 1904년에는 국제축구연맹(FIFA)과 국제자동차연맹(FI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l’Automobile)이 프랑스인을 회장으로 설립되었으며 프랑스인이 회장직에 맡지 않았지만 1908년 국제수영연맹(FINA: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 Natation)과 1913년 국제펜싱연맹(FIE: Fédération Internationale d’Escrime) 등이 설립될 때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런 프랑스의 영향력은 현재까지도 이들 연맹의 약어가 프랑스어 FI(Fédération Internationale)로 시작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통일된 규칙에 따른 국제조직의 형성은 CNS로 이어지는 프랑스의 보편주의에서 유래했다고 할 수 있다. 즉, 법률에 따라 종교와 문화, 인종과 민족에 관계없이 평등을 보장하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계에 이 보편주의 모델의 도입을 추진했고 1차대전 이후 정치적 맥락에서 가속화되었다.

이미 본 것처럼 1차 대전 이후 국제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고 싶었던 프랑스로서는 국제대회에서 승리하는 것 외에 국제 스포츠 조직을 통한 영향력의 확대도 큰 의미를 두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국내에서 확립된 ‘하나의 연맹이 하나의 경기를 통괄한다’는 모델에 따라 각종 국제 경기연맹을 차례로 조직화해나감으로써 1927년에 14개의 국제경기연맹의 본부가 파리와 프랑스 국내에 자리 잡게 되었다.

쿠베르탱이 설립한 IOC는 민주적인 선거가 아니라 귀족과 일부 엘리트층이 상호 추천하는 형태로 멤버를 선출하였는데 이러한 IOC의 비민주성뿐만 아니라 엄격했던 아마추어리즘에 대해서도 스포츠의 대중화 속에서 전문화를 용인하는 경기연맹을 통괄하고 있던 CNS의 모델이 보급되어 가는 것을 IOC로써는 간과할 수 없었다.

한편 경기 연맹의 주도와 함께 프랑스는 각 경기연맹마다 세계선수권을 개최하는 것을 목표로 국제 대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해나갔는데 예를 들면 FIFA에서 회장을 맡고 있던 프랑스인 쥘 리메가 1930년에 월드컵을 창설한 것을 들 수 있다.

1차대전 이후 국제경기가 크게 늘어났다는 것은 이미 말했지만 이것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도 프랑스였다.

1920년부터 1924년 사이에 프랑스 대표팀이 실시한 국가대항전은 총 84회에 달했으며 이 중 절반 이상은 축구, 럭비, 육상경기였다.

 

그러나 이 세 경기의 상대는 모두 1차대전의 연합국들로 특히 영국과의 대항전이 41회로 제일 많았으며 벨기에와 17차례의 국가대항전을 가졌고 그 외의 국가들도 이탈리아, 스위스 등 1차대전의 연합국 또는 중립국들이었다.

1차대전에서 적대관계였던 나라들과의 대항전은 1925년에 오스트리아와 가진 축구 대항전이 최초였으며 독일과의 경기는 육상경기의 대항전이 치러진 1926년으로 1926년은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하는 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이 정치가 국제 스포츠계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가운데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에 프랑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고 1924년 파리올림픽의 개최는 프랑스가 국제적으로 위상을 높일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가 되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파리올림픽 유치의 성공에는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지만 1차대전 이후 쿠베르탱은 프랑스의 스포츠계에서 더 이상 핵심 인물이 아니었다.

그런 가운데 파리올림픽 개최를 향해 프랑스 스포츠계와 쿠베르탱 사이에 어떤 논의가 있었으며 쿠베르탱은 어떤 역할을 했을까? 4편에 계속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2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2편)

올림픽대회처럼 각국의 대표선수가 한 곳에서 자웅을 겨루는 대회뿐만 아니라 개별 종목에서 각 국가 대표팀 간의 국제경기를 보더라도 1차대전 후의 정치 상황이 명확하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24년까지 프랑스 축구대표팀은 주로 1차대전 당시 연합국 또는 중립국 팀들과 경기를 가졌으며 아주 가끔 오스트리아나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등 1차 대전의 적대국 대표팀들과 경기를 치르기도 했지만, 독일에 대해서는 국민들 사이에 반독일 감정이 높았기 때문에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고 10년 이상이 지난 1931년에야 처음으로 대항전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1차 대전 이후의 국제정치 상황은 스포츠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할 수 있으며 1차 대전 후의 상황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스포츠계에 미치는 미국의 힘도 상징적이었다.

1917년부터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한 미국은 국토가 전장으로 되는 일이 없었던 까닭으로 유럽처럼 막대한 희생을 치르지도 않았으며 유럽의 국가들에 무기와 군수물자를 판매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어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1차 대전 후 국제사회에서 패권을 잡게 되었다.

1편에서 언급했던 연합군 경기대회는 미국 육군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과 YMCA가 협력하여 유럽에 남아 있는 연합군 병사를 위한 스포츠 대회로 개최한 것이었다.

존 J. 퍼싱 (John J. Pershing)대장

 

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미국인 병사들은 파리의 방쎈느 산림공원(Bois de Vincennes)에 경기장을 건설했고 나중에 이 경기장은 프랑스에 기증되었는데 2만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이 경기장은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이라 명명되어 1924년 파리 올림픽에서도 사용되었다.

스테이드 퍼싱(Stade Pershing)

 

연합군 경기대회에는 19개국에서 1,415명이 참가했지만, 그 중 282명이 미군, 253명이 프랑스군의 병사였던 것에서 보는 것처럼 경기의 참가는 해당 국가의 힘을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다.

또, 미국 선수의 강인한 체격이나 선진적인 트레이닝 방법 등도 1차대전 직후의 프랑스인들에게는 미국의 국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비쳤다. 게다가 올림픽에 있어서도 스포츠 강국으로서의 미국의 패권은 계속되어 1차대전 이후 1932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까지 미국은 금메달을 획득한 수에 있어서 다른 나라를 계속 압도하였다.

 

이와 같이 1차대전 이후부터 정치성을 수반하며 발전해온 스포츠의 국제화는 프랑스의 주도에 의한 바가 컸으며 국제 스포츠계를 주도하고자 했던 것은 당시 프랑스의 정치·외교정책과 일치하며 프랑스 국내 스포츠계의 변화와도 상호 연관되어 전개되어 갔다.

1차대전 이전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큰 스포츠 관련 조직은 프랑스 스포츠연맹 (USFSA)으로 1890년 11월에 설립된 USFSA는 모든 스포츠를 일괄적으로 조직한 연맹으로 주요 가입자는 파리를 중심으로 귀족계급과 신흥 부르주아들이었다.

그리고 그 산하에 육상, 축구, 론 테니스(Lawn Tennis) 등 종목별 소위원회를 두었고 1901년 7월 1일 결사의 자유를 규정한 법이 통과된 이후로 많은 스포츠 클럽이 가입했는데 예를 들면 1890년에는 13개 단체와 2,000명의 회원수에 불과했던 것이 1차대전 직전에는 약 1,700개 단체와 회원수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한편 프랑스의 엘리트 계급은 영국의 상류계급과 스포츠 교류를 하고 있었으며 스포츠는 자신들이 독점하는 것이라는 의식이 강했는데 쿠베르탱도 “스포츠를 노동자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데 찬성하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였다.

USFSA는 그러한 상류층 및 중산층 사람들의 모임이며 엄격하게 아마추어리즘을 신봉하고 있었지만 이런 USFSA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1903년에는 기독교 카톨릭계 프랑스 파트로나쥬 체조스포츠연맹(FGSPF)이 설립되었는데 FGSPF는 USFSA의 헤게모니에 반대하여 조직된 프랑스 연맹간위원회(CFI: Comité français interfédéral)의 핵심세력으로 1차대전 전에는 1,500단체, 15만 명의 등록자를 가진 주요 조직으로 성장했다.

FGSPF: Fédération gymnastique et sportive des patronages de France

이런 FGSPF에 대해 UFSFA는 반대입장을 표명하고 스스로는 세속적·비종교적인 조직임을 주장했지만 갈수록 프랑스 스포츠계의 이데올로기 투쟁이 격화되면서 쿠베르탱은 1906년에 USFSA의 명예회원으로부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USFSA나 각종 스포츠 종목을 대표하는 사람들은 1907년 1월에 이듬해 열리는 런던 올림픽대회의 참가를 둘러싸고 쿠베르탱의 영향력이 미치고 있던 전국올림픽위원회의 승인을 거부했다.

USFSA는 올림픽 참여에 대해 쿠베르탱과 전국올림픽위원회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맹과의 논의를 거쳐 민주적으로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이 이미 1차 대전 전부터 쿠베르탱과 프랑스의 스포츠계 사이에는 스포츠에 대한 생각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한편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1907년 3월에는 FGSPF가 중심이 되어 USFSA에 반대하는 몇몇 그룹이 결집해 CFI를 결성하게 된다.

즉 올림픽에 대한 쿠베르탱의 영향력과 정치적 갈등을 깊게 하는 프랑스 스포츠계의 위기를 앞두고 각종 경기단체는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지향하는 조직을 결성하려는 기운이 높아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1908년 5월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국가스포츠위원회(CNS: Comité national des sports)였다.

다음 편에 계속.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1편)

정치에 오염된 국제 스포츠(5-1편)

1차 대전이 끝나고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가 활발해지는 가운데,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하는 것으로 인식되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는데 스포츠의 대중화가 진행되었던 프랑스 국민들은 자국 대표선수의 성적에 일희일비하게 되었고 프랑스 정부는 국가의 위신을 되찾는 수단으로서 스포츠에 주목하게 되었다.

프랑스는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것 외에도 스포츠의 국제적인 조직화를 주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고, 1차 대전 후 프랑스의 스포츠계에 퍼진 “한 경기종목은 하나의 연맹이 통괄한다”는 모델은 프랑스의 주도에 의해 국제 스포츠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때부터 각국 정부는 스포츠에 정치적 역할을 기대하게 되었으며 국제정세가 올림픽대회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스포츠와 정치의 연결도 1차대전 이후 시작되었다.

실제로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개최된 1920년 올림픽대회에는 1차 대전의 책임이 있다고 여겨진 독일제국을 비롯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오스만 제국, 불가리아 왕국 등과 같은 동맹국들은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이 올림픽 역사에서 선수단의 참가를 불허한 최초의 배척이었다. 이처럼 스포츠계가 정치적 색조를 띠기 시작하는 가운데, 거기서 조직화를 주도한 것이 프랑스였다.

올림픽과 내셔널리즘의 관계는 지금까지 다양하게 논의되어왔으며 그 계기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여겨졌지만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인 쿠베르탱은 올림픽의 비정치성을 계속 주장하고 있었으며 그의 생각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세계 대전을 경험한 후에도 결코 바뀌지 않았다.

1차 대전 후 프랑스 사회는 대중문화가 발전을 이루는 시대였다.

전쟁에서 받은 정신적인 상처를 치유하는 방편으로써 국민들의 오락에 대한 요구가 커졌고 전기가 일반 가정에 널리 퍼져나가는 것과 함께 라디오 방송이 크게 보급되어 1차 대전을 거치면서 대국화해가는 미국 영화의 상영이 크게 인기를 얻었다.

그런 가운데 스포츠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1차 대전까지는 일부 사람에 한정되어 있던 스포츠였지만, 전후에는 직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의 수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관람하는 것도 문화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또한 실제로 경기장에서 관전하는 것 외에도 라디오나 스포츠 전문 잡지, 혹은 신문의 스포츠란 등 각종 미디어를 통해 경기결과를 알게 되었는데 스포츠 미디어 중에서도 특히 유통량이 많았던 것은 일간지 로토(L’Auto)였다.

 

1903년에 투르 드 프랑스를 시작하고 있던 로토는 전쟁이 끝난 뒤 1923년에는 자동차 르망 24시간 레이스를 창설하는 등 스포츠 대회의 주최나 후원에도 적극적이었고 그런 결과로 신문의 매출도 증가했다.

1923년에는 하루에 27만 7000부, 투르 드 프랑스의 개최 기간에는 하루에 50만 부 가까이 인쇄되었다고 하지만, 10년 후에는 평균 36만 4000부까지 발행 부수를 늘려나갔다.

이와 같이 1차 대전 후의 프랑스에서의 스포츠는 정치화와 동시에 대중화도 진행되었는데 이 시기의 프랑스에서 열렸던 가장 큰 스포츠 이벤트가 바로 1924년에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제8회 올림픽대회였다.

 

프랑스가 1924년 파리올림픽을 개최할 수 있었던 것은 쿠베르탱 남작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앞에서 말했듯이 1920년의 앤트워프 올림픽에는 국제정세를 이유로 독일을 비롯한 몇 개의 나라가 참가할 수 없었던 것처럼 스포츠계는 쿠베르탱이 주창했던 올림픽 정신과 평화적 철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피에르 드 쿠베르탱

 

이런 역사를 지닌 올림픽이 2024년에 다시 파리에서 개최되기로 결정된 이후 지금우크라이나를 무력으로 침공한 러시아의 2024년 파리올림픽 참가를 반대한다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즉 순수한 스포츠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라는 것이 올림픽을 바라보는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과 스포츠의 정치화 및 올림픽을 비롯한 세계적인 스포츠 대회에서 각국의 내셔널리즘이 명확하게 표출하게 된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계기라고 할 수 있다.

1차 대전은 1914년 7월부터 1918년 11월에 걸쳐 사상 처음으로 세계 규모로 펼쳐진 전쟁이며 결과적으로 1차 대전은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고 희생되었던 국가 간의 총력전이 되었다.

이 총력전의 경험과 베르사유 강화조약에 의한 배상이나 제국의 해체, 거기에 따른 영토 등의 지정학적 변화는 유럽을 중심으로 각국에서 내셔널리즘을 증폭시켜 국가끼리의 대항의식은 1차 대전 이전보다 훨씬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베르사유조약의 발효일인 1920년 1월 10일에 국제적인 평화유지기구로서 국제연맹이 설립되어 상호 의존성과 통합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스포츠계에서도 1차 대전 후에 국제적인 연결이 강화되어 국제 대항 경기가 적극적으로 개최되고 있었다.

프랑스를 예로 들면 1차 대전 전까지는 대부분 대영제국에 속한 국가들과의 럭비 경기였지만 1차 대전 후에는 유럽 인근 국가와 육상경기 및 축구경기가 늘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스포츠를 둘러싼 국제적인 연결은 각국 팀 간의 상호 교류를 확대해가는 한편, 국가 간의 대항의식을 강화하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스포츠가 여론을 집중시켜 정치인들의 관심을 끌어당길 정도의 영향력은 없었다.

스포츠의 내셔널리즘을 둘러싸고 1차 대전 이전과 이후에 가장 다른 점은 스포츠에 국가가 대외적인 정치적 의미를 발견하고 적극적으로 관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대회가 증가함에 따라 1차 대전 후 유럽 각국에서 국민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스포츠 내셔널리즘이 크게 확대되었다.

국제무대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것은 국가의 위신을 높여준다는 생각들이 공유되고 확대됨에 따라 스포츠를 둘러싼 국가 간의 경쟁심과 대항의식이 점점 고조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프랑스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20년 1월 20일에는, 프랑스 교육성에 체육스포츠과가 설치되었으며 책임자로는 프랑스 스포츠연맹(USFSA: Union des Sociétés Françaises de Sports Athlétiques)의 의장이었던 가스통 비달(Gaston Vidal)이 선정되었다.

가스통 비달(Gaston Vidal)

 

가스통 비달은 1차 대전을 거치면서 추락한 프랑스의 위신을 스포츠를 통해 다시 세계에 보여줄 것으로 기대되었고 이런 기대에 부응하여 비달은 1920년 앤트워프 올림픽 직전에 “스포츠는 국가의 사업이 되었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1920년에는 프랑스 외무부가 해외사업부에 관광 및 스포츠부를 설치했는데 해외사업부는 말 그대로 국외를 향한 프랑스의 프로파간다를 담당하는 부서로 주된 업무는 IOC에 대한 프랑스 영향력 강화, 외국과의 경기 확대 및 국가대표를 영화로 홍보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이 무렵부터 프랑스 정부는 스포츠를 국가의 이미지를 홍보하는데 유용한 선전도구로 보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스포츠가 내셔널리즘을 환기할 것으로 기대되어 정부가 관여하게 된 것에 따라 국제경기는 정치성을 수반하게 되었고 1차 대전 이후의 복잡한 국제 정치상황은 스포츠계에도 명확하게 영향을 미치게 되었던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앤트워프 올림픽에도 1차 대전 당시의 동맹국들은 참가할 수 없었는데 그 외에도 베르사유조약의 조인과 같은 시기인 1919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되었던 연합군 경기대회(영어: Inter-Allied Games, 프랑스어: Les Jeux interalliés)도 그 명칭 그대로 참가 팀은 1차 대전의 연합국에 한정되었다.

2편에 계속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붕괴사고 Top 6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최악의 붕괴사고 Top 6

SK건설과 한국서부발전이 개발에 참여한 라오스의 수력발전댐 붕괴사고로 수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었는데 아직까지 정확한 사망과 실종자의 숫자가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최대규모의 전차경기장이었던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는 “안토니우스 피누스”황제 재임 시에 붕괴되어 1만 3천여 명이 희생된 기록을 가지고 있고,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은 로마 교외의 피데나이(Fidenae)에 있던 목재로 건축된 원형극장이 붕괴되어 2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5만 명 이상이 부상당한 것이 가장 많은 인명사고를 낸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1800년대에 일어난 사고로는 1807년 9월 20일(음력 8월 19일)에 발생한 일본의 영대교(永代橋) 붕괴사고를 꼽을 수 있는데 토미오카하치만구(富岡八幡宮)의 신사에 몰려든 참배객들로 인해 노후화된 교량이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1,400명이 사망한 사건입니다. 그 후 교량은 1926년에 현재의 철교로 재건되었습니다.

그리고 1889년 5월 31일에는 미국의 펜실베니아주를 강타한 폭풍우로 사우스포크댐의 강물이 범람하면서 댐이 무너져 2,209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었는데 1900년대에 이후에는 인류역사에 기록된 최악의 인명사고를 발생시킨 사고가 일어납니다.

1900년대 이후에 발생한 붕괴사고에는 부끄럽지만 대한민국의 이름도 들어있는데 지금부터 가장 많은 인명이 피해를 입은 최악의 붕괴사고 Top6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6위: 1959년 프랑스 말파셋 댐(Malpasset Dam) 붕괴사고

1952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54년 4월에 완공된 이 댐은 1959년 12월 며칠간 계속된 집중호우를 견디지 못하고 붕괴되어 421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었는데 사고의 원인으로는 하류의 단층으로 인해 댐건설에 적합하지 않은 곳에 건설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되어 부실한 지질조사가 불러온 인재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5위: 1995년 한국의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설계의 부실, 시공의 부실 등 모든 부실이 원인이 되어 발생한 이 사고는 6·25전쟁 이후 발생한 가장 큰 인재로 기록되고 있으며 사망 502명 부상 937명이라는 피해를 낳았습니다.

 

▶ 4위: 1928년 미국의 세인트 프랜시스 댐(St. Francis Dam) 붕괴사고

토지개발붐이 한창이던 1924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926년에 완공된 이 댐은 물을 채울 때부터 균열이 발견되었고 그 후에도 균열과 누수가 발견되었으며 1928년 3월 12일에 댐을 설계한 윌리엄 멀홀랜드가 정기검사를 하는 동안에도 새로운 균열의 보고가 있었지만 이를 무시하는 바람에 결국 몇 시간 뒤에 붕괴되어 432명이 목숨을 잃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 3위: 2013년 방글라데시의 다카 근교 건물 붕괴사고

아직도 이 사고는 기억에 뚜렷이 남아있는데 2013년 4월 24일, 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 근교에 있는 8층으로 된 상업용 건물인 “라나 플라자”가 붕괴되어 1,129명이 목숨을 잃었는데 이 사고로 인해서 다국적 패션기업들에 의해 혹사당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실태가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2위: 1963년 이탈리아의 바이온트 댐(Vajont Dam or Vaiont Dam) 붕괴사고

1960년에 준공된 이 댐은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 부흥의 상징이었으며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댐이었는데 1963년의 이상기후로 인한 폭우 때문에 댐 주변의 지반이 침하되면서 10월 9일 밤 10시 39분에 댐 좌측의 산이 무너지는 산사태로 2억6천만㎡의 토사가 댐에 빠른 속도로(시속 109km)로 흘러들어 거대한 해일이 발생하였고 이 해일이 마을을 덮치면서 2,125명이 사망하는 참사를 낳았습니다.

 

▶ 1위: 1975년 중국의 반차오 댐(Banqiao Dam) 붕괴사고

1949년과 1950년에 연속해서 발생한 회하(淮河)의 홍수로 인한 하천공사의 일환으로 1952년에 완공된 이 댐은 1975년 태풍 “니나(Nina)”로 인해 붕괴되었는데, 당시 반차오 댐을 비롯하여 58개의 중소형 댐들이 무너지면서 발생한 홍수가 민가를 덮치는 바람에 익사자를 포함하여 전염병과 기아로 인한 2차 사망자의 숫자를 모두 합해 17만여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추산되고 있었는데 당시 피해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가 2005년에서야 중국정부가 일부 정보를 공개하면서 알려졌지만 공개한 정보도 축소되었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2000년대 초반 업무상 방문한 북경지역의 고층건물 건설현장을 둘러보면서 정말 위험하다는 것이 육안으로 느껴질 정도의 부실한 현장들을 많이 보았었는데 최소한 부실로 인하여 아까운 인명이 희생되는 일은 더 이상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