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가 되어 잠들다.

무지개가 되어 잠들다.

무지개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노아의 방주’를 생각할 것이고 누군가는 LGBT(성소수자)를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은 1939년에 나온 영화 ‘오즈의 마법사’의 삽입곡 ‘Over the Rainbow’를 떠올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희망, 사랑 등등 기타 긍정적인 것들을 생각하지 않을까?

봄이 오는 것을 시샘이라도 하는 듯이 내일은 눈이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다. 사회는 온통 찌푸린 상태의 연속이고 국민들을 대변할 ○개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정쟁만을 벌이고 있다.

“겨울이면 봄 또한 멀지 않으리”라고 노래했던 영국의 낭만파 시인 ‘퍼시 비시 셸리(Percy Bysshe Shelley)’의 말처럼 과연 봄은 언제쯤이나 다가올까? 봄비 내린 뒤 맑은 하늘을 보면서 우리는 무지개를 발견할 수 있을까?

이렇게 답답한 지금, 지난 2005년 3월 14일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오늘자 중앙일보의 “눈 녹자 나타나는 시신들…에베레스트 ‘온난화 곤혹’”이란 기사를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영화 ‘히말라야’로 인해 2004년 에베레스트 정상을 정복한 후 하산 길에 설맹(각막염증)으로 인해 하산이 어렵게 되자 동료들은 설득하여 하산시키고, 홀로 최후를 맞이했던 산악인 ‘고 박무택’의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원정에 나섰던 엄홍길의 ‘휴먼원정대’의 이야기가 잘 알려져 있다.

출처: 다음 영화

 

신이 허락해야만 오를 수 있다는 에베레스트에는 고 박무택 대원처럼 등반 도중에 고인이 된 산악인들이 2015년을 기준으로 200명이 넘게 잠들어 있는데, 1996년 조난으로 사망한 연두색 부츠를 신고 있던 산악인의 주검을 2001년 5월 21일 프랑스 산악인이 촬영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진 ‘그린 부츠(Green Boots)’ 또는 ‘그린 부츠 동굴(Green Boots’ Cave)’이라고 불리는 산악인의 주검을 비롯하여, 고인이 된 산악인들이 입고 있던 옷과 신고 있던 신발 및 착용하고 있던 색색의 고글들이 무지개를 닮았다고 해서 이를 보도했던 영국의 BBC가 ‘무지개 능선(rainbow ridge)’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부터 8,000미터 이상의 루트에 산악인들이 잠들어 있는 곳을 ‘무지개 능선(rainbow ridge)’ 또는 ‘무지개 계곡(Rainbow Valley)’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히말라야 데이타베이스(The Himalayan Database)’의 통계에 의하면 히말라야에 잠들어 있는 대한민국의 산악인들은 고 박무택 대원을 비롯하여,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등정(1977년)하고 1979년 빙벽에서 추락하여 숨진 고상돈 대장과 이일교 대원 등 모두 11명이라고 하며 이는 세계에서 7번째로 많은 숫자라고 한다.

 

나는 BBC가 표현한 것과는 달리 끝까지 동료의 주검을 수습하려고 나섰던 엄홍길을 비롯한 동료 산악인들이 무지개라는 생각을 해본다.

“걱정 마! 네 곁엔 언제나 내가 있어!” 아마도 이 말은 우리가 국가나 정치인들로부터 듣고 싶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난생 처음으로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수십 년 전 안보교육을 받을 때 들었던 “만일 해외에서 북한공작원으로 의심되는 사람이 접근하면 미국대사관으로 가라.”던 강사의 말처럼 점점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작금의 정치판을 보면서 우리 서민들의 무지개는 어디에 있는지, 무지개 너머엔 과연 희망이 있는지, 정치인을 믿을 수 있는지, 정부를 신뢰할 수 있는지, 이전과 다름없는 의구심만 깊어져 간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의 튤립이 있다.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의 튤립이 있다.

1990년 네덜란드에서는 새로운 흰색의 튤립 품종이 개발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품종의 이름으로 네덜란드의 화훼구근정보센터(Flowerbulb Information Centre)에서는 1993년에 세상을 떠난 배우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의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새로운 튤립에 오드리 헵번의 이름을 붙인 표면적인 이유는 그녀의 헌신적인 유니세프의 활동과 배우로서의 경력을 높이 산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전에도 유명한 사람들의 이름을 따서 튤립의 이름으로 사용한 일들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빙 크로스비, 퀴리부인, 존 F. 케네디와 같은~

하지만 오드리 헵번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는 오드리 헵번과 튤립의 특별한 인연(?)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영국인 아버지 조셉 빅터 안소니 러스턴(Joseph Victor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 귀족가문 출신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사이에서 1929년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태어난 오드리 헵번은 1939년 9월 영국이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하자 1차 세계대전 당시에 중립을 유지했던 네덜란드가 안전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판단에 따라 네덜란드의 아른헴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어머니

 

어린 오드리 헵번과 그녀의 아버지

 

그런데 오드리 헵번의 부모는 모두 나치의 지지자들이었고 영국파시스트동맹(British Union of Fascists)의 회원들이었습니다.

만일 이러한 사실이 그녀가 “로마의 휴일(1953년)”을 비롯하여 사브리나(1954년), 전쟁과 평화(1956년), 파리의 연인(1957년) 등을 히트시킬 당시에 알려졌더라면 그녀는 배우로서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아버지는 1926년 결혼을 하고 1935년에 갑자기 가족을 버리고 런던으로 이주하여 파시스트 활동에 더욱 몰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1938년에 정식으로 이혼을 하게 되고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을 지지하는 신문을 만들기 위한 자금을 괴벨스로부터 받은 사실이 탄로 나서 투옥되게 됩니다.

한편 안전할 것이라던 어머니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의 예상과는 달리 네덜란드도 1940년에 독일의 침공을 받았는데 이 때 영어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판단에 따라 오드리 헵번은 에다 판 헤임스트라(Edda van Heemstra)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오드리 헵번의 어머니는 이혼 후 독일의 뉘른베르크 집회에 참가한 경험을 파시스트 잡지인 “The Blackshirt”에 기고하기도 하는 등 친나치의 행보를 보였지만 그녀의 외숙부는 독일에 저항하였다는 죄로 사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른헴음악원과 기숙학교에서 배운 발레를 이용한 작은 공연으로 돈을 모은 오드리 헵번은 이 돈을 레지스탕스에 전달하기도 하고 많은 당시의 네덜란드 어린이들처럼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연락을 전달하는 활동도 하였습니다.

아무튼 영화 “로마의 휴일”의 스크린 테스트를 앞두고 그녀의 매니저들은 그녀의 부모가 나치를 지지하는 활동을 한 사실을 숨기려고 안절부절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영화 로마의 휴일 중 한 장면

 

촬영장소의 실제 모습

그러나 그 후 오드리 헵번은 인종차별주의자인 그녀의 부모들에 반대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힘으로써 대중들로부터 더욱 많은 찬사를 받게 됩니다.

자, 이제 다시 오늘의 주제인 오드리와 튤립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독일의 침공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을 하게 되었던 네덜란드는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상륙작전 이후 독일의 점령을 방해하기 위해 철도파업을 단행하는데 이에 대한 보복으로 1944년 겨울부터 독일군은 네덜란드 국민에 대한 식량과 연료의 보급을 차단하는 이른바 “네덜란드 기근(Dutch famine)”을 일으켰는데 참혹한 기근의 겨울을 보내는 동안 22,000여명의 네덜란드인이 사망하였으며 그 대부분은 노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급이 차단된 혹독한 겨울을 “굶주림의 겨울(Winter of Hunger)”이라고 불렀는데 이 때 오드리 헵번도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풀을 끓여먹거나 튤립의 뿌리를 먹을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그녀는 천식과 황달, 영양실조에 걸리게 되어 전쟁이 끝났을 때의 몸무게는 불과 40kg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있었기에 네덜란드에서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이름을 튤립에 붙이는 것이 더욱 뜻 깊은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90년 지금은 박물관으로 변한 그녀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Huis Doorn”에서 그녀의 이름이 붙은 튤립의 헌정식이 열렸고 궂은 날씨 속에서 오드리 헵번은 그녀의 이름이 붙은 첫 번째 튤립을 그녀의 숙모 재클린에게 바칩니다.

 

말년이 더욱 아름다웠던 배우 오드리 헵번의 잘록한 허리는 어린 시절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이 숨어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아름다운 백색의 튤립은 그녀의 외모보다는 그녀의 정신과 더욱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 도입하는 이지스 어쇼어

미국바라기 아베정권이 도입하는 이지스 어쇼어

지난 10월 31일 일본 참의원 본회의에서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 시스템을 도입하려는 것은 미국의 의사에 따른 것인가?”라는 의원의 질의에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다.”고 답변했는데 ‘이지스 어쇼어’는 이지스함에서 운용하는 레이더와 미사일발사대 등을 지상에 배치하여 적의 탄도미사일을 공중에서 요격하는 시스템을 말합니다.

미국의 MD방어체계는 모두 4단계로써 적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면 1단계로 해상의 이지스함에서 요격미사일을 발사하고 2단계로 지상에 배치된 요격미사일 GBI(Ground-based Interceptor)를 발사하여 적의 탄도미사일이 상승과 비행을 하는 단계에서 요격하고 이에 실패하면 적의 미사일이 낙하하는 종말단계에서 3단계로 사드, 4단계로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발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가 있는데 일본은 지상에 배치하는 2단계 방어시스템을 이지스 어쇼어로 대체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이지스 탄도유도탄방어체계에 사용되는 요격미사일인 ‘SM-3’의 도입을 결정한 것이 뒤늦게야 공개되었는데 지금부터 일본과 우리 정부의 결정이 옳은 것인가를 한 번 따져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평화무드가 조성되고는 있지만 아직 종전선언을 이끌어내지도 못했기에 우리의 주적은 현재로서는 북한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면 북한의 탄도미사일을 방어하기 위해서 우리가 도입하는 SM-3와 일본의 “이지스 어쇼어”가 과연 방어체계에 도움이 되는지, 그리고 일본정부의 결정은 정말로 자국의 입장에서 내린 판단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 속도의 문제

전쟁에서 적이 총을 쏘는 순간 내가 총을 발사하여 적의 총알을 맞추어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미사일을 요격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총알의 속도가 일반적으로 초속 900미터 전후이니 대략 마하 3 정도인 반면 북한 미사일의 최대속도는 초속 5,000미터, 즉 마하 15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적의 전투기나 폭격기를 요격하는 일반적인 지대공미사일의 경우에는 적기의 속도가 빨라야 마하 2 정도이기 때문에 마하 15 정도의 속도를 내는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려면 더욱 높은 정밀도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미사일이 적의 탄도미사일에 탑재된 핵탄두를 직격하지 못한다면 폭발로 인해 생기는 파편으로는 핵탄두를 요격하지 못한다는 것도 문제점입니다.

 

▶ 높이의 문제

이지스함에서 발사하는 요격미사일은 “SM-3 블록 1A”인데 이것을 지상에서 운용하는 ‘이지스 어쇼어’에서는 보다 크고 고성능인 “SM-3 블록 2A”로 교체하여 사거리를 연장하고 운용레이더를 기존의 “AN/SPY-1(탐지거리 320km)”보다 30배 이상의 표적을 동시에 추적할 수 있는 훨씬 장거리의 탐지거리를 가진 “AN/SPY-6”로 대체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SM-3 블록 1A”의 최대고도는 500km이고 이보다 우수하다는 “SM-3 블록 2A”도 최대고도는 1,000km에 불과하기 때문에 북한의 중거리 지대지 탄도미사일인 ‘화성 12호’의 최대고도 2,000km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지스 어쇼어’가 추구하는 고고도지상방어라는 개념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인 것입니다.

 

▶ 가격의 문제

통상 이지스함에는 90여 발의 미사일이 탑재되는데 이것이 모두 “SM-3 블록 1A”라고 가정하면 1발에 우리 돈으로 200억 원 정도 하니 미사일 가격만으로 이지스함을 20여 척 가까이 건조할 수 있는 금액이 되고 이것을 “SM-3 블록 2A”로 모두 교체한다면 1발에 우리 돈으로 400억 원이 넘는 금액이니 예산이 부족할 수밖에 없게 되므로 고작해야 몇 발 정도만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에 사용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 전자기펄스(EMP: Electromagnetic Pulse)에 취약

북한이 이미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전자기펄스(EMP)의 공격은 30km이상의 고도에서 폭발하여 모든 전자기기를 교란할 것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레이더를 보호하기 위해 금속으로 덮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전파를 송수신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레이더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 미국에 대한 열등감

신냉전시대의 도래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미국과 중국 및 러시아와의 군사적 긴장도 높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냉전이 지속되는 것을 가장 바라는 것은 미국의 군수업체들과 이들의 후원을 받는 상하 양원의 의원들이며 이들은 또한 일본 외무성의 친미파와 끈끈하게 이어져 있다는 지적이 제가 아닌 일본의 여론이며 아베총리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처럼 아베총리가 미국을 경배한다고까지 비난하는 것이 일본의 언론들입니다.

 

▶ 마지막으로…

일본이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배치하려는 지역을 보면 더더욱 일본의 독자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즉 일본은 북한이 괌을 목표로 미사일을 발사할 경우 지나게 되는 야마구치현의 상공과 하와이를 겨냥하여 미사일을 발사하면 지나게 되는 아키타현에 “이지스 어쇼어(Aegis Ashore)”를 설치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면을 더욱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해상자위대에 밀리는 육상자위대의 입김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자국의 안보에서 자국민의 안전보다 미국을 우선시하는 것을 보면서 지난 정부의 사드배치와 썩은내 진동하는 방산비리 혐의자들의 절반이 무죄로 풀려나는 우리나라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비록 남의 나라 일이기는 하지만 화가 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2001년 손석희 앵커와 프랑스의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개고기를 먹는 한국의 문화에 대한 대담을 하면서 “프랑스인도 개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아는가?”라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절대 그런 일이 없으며 거짓말을 하는 사람과 더 이상 얘기할 수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던 일화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10년에 조선일보는 안용근 교수가 펴낸 책 “한국인과 개고기”의 내용 중에서 “1870년대 프러시안-프랑스 전쟁 당시엔 사람들이 개를 모두 잡아먹어 파리 시내에 개가 한 마리도 없었다.”는 내용을 인용하여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고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은 사실관계를 조금 더 자세하게 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사원문: 책펴낸 개고기 박사 “프랑스도 개고기 국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프랑스인들이 1870년대에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프랑스인들이 개고기를 먹게 된 데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점도 자세히 알리는 것이 언론으로서의 바람직한 자세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럼, 이제부터 1870년대에 프랑스인들은 개고기를 왜 먹게 되었는지? 개고기 외에 식용으로 사용한 다른 동물은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870년은 프랑스의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 된 시기인데 더 이상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수업을 하지 못하게 되는 내용의 소설배경이 된 역사적인 사건은 바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었습니다.

1870년 9월 2일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하지만 파리에서 조직된 공화제 국방정부는 독일군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는데 이것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군은 1870년 9월 19일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파리를 포위하고 모든 보급물자를 차단시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입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는 사람들의 거짓말은 일상적인 것이란 생각이 드는데 포위를 당하기 전에 국방정부는 파리에 있는 외국인들은 모두 떠날 것을 명령했으며 군대를 제외한 인구가 200만으로 추정하였고 1~2개월 정도로 예상했던 독일의 포위에도 식량은 충분할 것으로 계산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외국인이 떠난 숫자만큼 다른 지방에서 피난민이 유입되어 인구감소의 효과는 거둘 수 없었고 오히려 20%의 인구가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최대 2개월이면 끝날 것으로 예측했던 포위공격이 점차 기간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식량이 모자라지 않다던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고 마침내 식품은 배급제로 바뀌게 되어 1870년 10월 중순부터는 성인 1인당 섭취량을 300그램으로 제한하게 됩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파리의 시민들은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빵은 아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자 제일 먼저 말을 잡아먹게 되었는데 당시 시장에서는 1파운드에 10센트 정도의 가격으로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출처: 미국인 로버트 시버트가 1892년에 발간한 “The Siege of Paris by an American Eye-Witness”)

그러나 말도 점차 줄어들게 되자 1달 뒤인 11월 중순부터는 배급량이 1인당 100그램으로 줄어들었고 시장에는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종류의 고기들이 판매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은 바로 쥐와 고양이 그리고 개고기였던 것입니다.

미국인 시버트(Robert Sibbet)가 직접 경험한 당시의 일들을 기록한 책에 의하면 개고기와 고양이고기는 파운드당 20~40센트인 것에 비해 살이 찐 쥐고기는 파운드당 50달러 정도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편 11월이 되면서 파리의 유명한 레스토랑들이 식재료를 구할 수 없어 하나둘씩 문을 닫기 시작하는데 계속 영업을 하려는 곳에서는 마지막으로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에게 시선을 돌리게 됩니다.

결국, 동물원에 있던 코끼리를 비롯하여 캥거루와 공작새 등도 잡아먹게 되었고 마지막까지 먹지 않고 남겨두었던 동물은 사자, 호랑이, 하마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 파리 유명식당의 메뉴를 보면 개고기로 만든 커틀릿과 코끼리, 캥거루, 쥐로 만든 요리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이마저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파리시민들은 나무나 풀뿌리로 연명을 해야 했고 포위가 끝나기까지 굶주림이 아닌 음식을 잘못 먹은 것으로 인해 발병한 질병으로만 12,000명이 사망하는 끔찍한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살기 위해 먹었다고는 하더라도 프랑스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브리지토 할머니,

절대 개고기를 먹은 적이 없다고 말하기 전에

프랑스 역사부터

먼저 공부를 하심이 좋아 보입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독일군은 2차 대전 중 병사들에게 메스암페타민(필로폰)을 보급했다.

어제 모 여가수의 이름이 실검에 오르면서 다시 한 번 세인들의 입에 암페타민이 오르내리고 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과 연합군을 막론하고 병사들에게 광범위하게 보급되었던 약물이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독일군에게 공급을 명령했던 히틀러 또한 약물에 중독되었었다.(정확히는 필로폰이라는 메스암페타민에 중독)

지난 번 “마약으로 물든 베트남전쟁”이란 포스팅에서 미군은 지구력 강화와 불안 및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암페타민을 비롯한 각종 진정제들을 무분별하게 사용하였고 미 하원의 보고서에 의하면 196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2억2천5백만 통의 각성제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이처럼 전쟁을 수행하는 각개병사들에게 약물을 보급한 것은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887년 유대인 출신의 루마니아 화학자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가 베를린 대학에서 최초로 암페타민의 합성에 성공한 이래 벤제드린(Benzedrine)이란 상표로 상품화 되면서 천식이나 우울증의 치료에 사용되던 암페타민은 제2차 세계대전을 통해 연합군에 의해서 병사들에게 보급이 되었다.

라자르 에델레아누(Lazăr Edeleanu)

 

벤제드린(Benzedrine)

 

그러나 독일군 병사들에게 보급되었던 것은 이보다 더 심각한 메스암페타민이었는데 이른바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은 1888년 천식치료제인 마황으로부터 에페드린을 추출하는 과정에서 일본 도쿄대학의 나가이 나가요시(長井長義)가 발견한 이후 1919년에 그의 제자인 오가타 아키라(緒方章)가 결정화에 성공하였다.

이렇게 결정화에 성공한 메스암페타민은 1938년부터는 독일의 제약회사 테믈러 베르케(Temmler Werke GmbH)에 의해 페르비틴(pervitin)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어 약국에서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메스암페타민의 부작용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었고, 독일군에게 정식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였다.

페르비틴(pervitin)

암페타민이나 메스암페타민을 막론하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약물을 일반 병사들에게 보급했던 것은 독일군이 먼저였으나 연합군이 사용한 것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연합군 중에서 암페타민을 먼저 사용했던 것은 독일군의 잠수함을 수색하던 영국공군의 정찰병들이었다. 장시간에 걸쳐 온 신경을 기울여 독일군의 잠수함을 탐지하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던 병사들이 암페타민을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이후로는 폭격기의 승무원들 사이에서도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나 공식적으로 보급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영국군이 공식적으로 암페타민을 보급한 것은 1942년 제2차 엘 알라메인 전투가 치러지는 기간 동안 영국의 버나드 로 몽고메리 장군이 1일 20㎎의 암페타민 5일치를 병사들에게 보급하도록 지시한 것이 최초였고, 미군은 1943년 2월 육군군수처(SOS: Services of Supply)에서 하루에 5㎎의 벤제드린(Benzedrine)을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는 발표를 하면서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즉시로 50만 정을 주문하여 북아프리카의 부대에 보급하였던 것이 최초다.

엘 알라메인 전투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도 롬멜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은 있을 텐데 사막의 여우라고 불리는 독일의 에르빈 롬멜을 소재로 하여 1951년에 개봉한 영화 The Desert Fox(사막의 여우 롬멜)가 바로 이 전투를 무대로 하고 있다.

에르빈 롬멜

 

연합군이 암페타민을 보급했던 것과는 달리 독일군이 보급했던 것은 히로뽕이라고도 불리는 메스암페타민이었고 날이 갈수록 중독으로 인한 심각성이 커지자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부터 보급하기 시작했던 것을 1941년 봄부터는 중지하게 된다. 그러나 병사들의 사용을 적극적으로 금지했던 것은 아니었고 보급만 중단하였다.

1939년 가을 폴란드 침공에 나선 독일군은 운전병들에게 메스암페타민인 페르비틴(pervitin)을 보급하였는데 정신적·육체적으로 피로한 상태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 병사들을 보면서 페르비틴(pervitin)의 효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1940년 프랑스 침공에 나서면서는 3,500만 개의 페르비틴(pervitin)을 병사들에게 보급하였다.

독소전쟁 당시 페르비틴(pervitin)을 복용했던 병사들을 관찰한 군의관의 증언에 따르면 “폭설과 영하 30℃의 추위 속에서 6시간의 행군으로 병사들의 피로는 극에 달하고 사기는 저하되었으며 급기야는 쓰러지는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일부는 사망했다. 그러한 병사들에게 페르비틴(pervitin)을 나누어주자 30분이 지나지 않아 기력을 회복하였고 집중력과 판단력이 회복됨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병사들에게서 중독증상과 약물복용으로 인한 심각한 부작용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1941년 봄부터는 페르비틴(pervitin)을 마약으로 규정하고 공식적인 보급을 중단하게 되었던 것이다.

독일군 전투기 조종사를 비롯하여 일반보병에까지 널리 보급되었던 페르비틴(pervitin)은 탱크 운전병들에게는 탱크 초콜릿(Tank-Chocolates)이라는 뜻의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란 이름으로 보급되었다.

판처쇼콜라더(Panzerschokolade)

 

버닝썬 사건으로 촉발된 연예계의 마약과 경찰의 유착의혹에 대하여 명운(命運)을 걸겠다고 했던 경찰이 이번에는 명예(名譽)를 걸고 모 연예기획사의 의혹을 수사하겠다고 한다.

목숨(명운)을 걸고도 밝히지 못한 것을 명예를 건다고 밝힐 수 있을까?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집단의 공허한 메아리와 함께 이 시기에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예인을 보면서 그냥 암페타민과 메스암페타민이 2차 대전을 통해 보급되었던 역사를 한 번 살펴보았다. 멍~멍~

전투기의 위장색

전투기의 위장색

최근 각국이 앞다투어 개발에 나서고 있는 스텔스기는 단순히 레이더뿐만 아니라 적외선과 가시광선 및 소음 등 전투기의 흔적을 지움으로서 관측을 어렵게 하도록 만든 기종을 말합니다.

따라서 가장 원시적인 스텔스기능은 적의 눈을 속이는 위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의 대표적인 케이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비행기를 62대나 격추시켰던 독일의 “에른스트 우데트(Ernst Udet)”가 몰던 “복엽기(Fokker D.VII)”에 사선으로 흰색의 선을 그려 넣어 비행방향을 착각하도록 만들며 “쏘지 말라”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 “Du doch nicht!!”를 적어 넣었던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군용기의 위장색은 최근에 와서는 하늘이나 구름과 비슷하도록 다양한 명암의 회색을 혼합하여 눈에 잘 띄지 않도록 하고 있는데 1970년대 국민이 낸 방위성금으로 구입했던 F-4 팬텀은 도입 당시에는 국방색으로 도장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1970년경까지는 전투기의 위장색에 대한 효과에 대해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는데 기종에 따라 차이는 나지만 위장을 위해 도장하는 페인트의 무게가 적게는 수십 kg에서 많게는 100kg에 달하기 때문에 성능과 연비를 약화시킨다는 이유에서 예전에는 굳이 위장색을 도장하지 않고 표면의 두랄루민이 그대로 노출되도록 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근래 들어 가장 많이 사용되는 위장색은 회색 계열이며 디지털 위장(Digital Camoflage)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아래의 사진은 러시아의 MiG-29기입니다.

 

한편 일본에서는 주변이 모두 바다로 둘러싸여 있다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인해서 전투기의 위장색을 파란색으로 도장하기도 하는데 저공비행을 하면 거의 식별이 어렵다고 합니다.

 

또한 이런 위장색을 이용한 위장 이외에도 러시아의 수호이 Su-27의 경우에는 가짜 캐노피를 그려 넣어 기체의 상하를 오인하도록 하는 위장술을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투기의 위장색과는 달리 비행고도가 낮은 정찰기나 수송기의 경우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지역에 맞도록 위장하게 되는데 우리 공군의 경우에는 산악지형에 맞는 패턴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동에서는 사막의 모래와 비슷한 색깔로 위장하기도 합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의 밤벚꽃작전

일본이 진주만을 습격한 이후 다음으로 준비했던 미국본토에 대한 공격은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생물학전의 첫 번째 시도로 필리핀을 점령하기 위한 바탄전투(Battle of Bataan)에서 미군과 필리핀군의 강력한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생물학전을 전개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1942년 4월 9일 미군과 필리핀군이 투항하게 되면서 바탄전투는 끝이 나고 생포된 포로들이 카파스에서 오도널수용소까지의 행진 도중 7천~1만여 명이 숨진 이른바 “죽음의 바탄행진”이 우리에게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미군과 필리핀군의 저항을 물리치기 위해 일본군이 생물학전을 시도하려던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은 바탄전투를 포함하여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이 시도하려 했던 생물학전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일본군이 계획한 작전명 “밤벚꽃(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악명 높은 731부대장이었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가 수립했는데 주요 골자는 미국 캘리포니아의 민간인 밀집지역에 대한 생물학전의 전개였으며 그 시험단계로서 바탄전투에서의 생물학전 전개를 계획했던 것입니다.

일본군은 바탄지역의 10군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 90kg(1억 5천만 마리)을 살포할 준비를 하게 되지만 그 전에 미군과 필리핀군이 항복을 함으로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습니다.

그 후 패전의 기색이 짙어지면서 최후의 수단으로 일본은 미국의 본토에 대한 생물학전을 계획하는데 애초의 계획과는 조금 변경된 샌디에고의 해군기지에 전염병을 퍼뜨리려는 시도를 하게 되고 1945년 3월 26일 작전의 일환으로 5대의 “I-400” 잠수함과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에 전염병에 감염된 벼룩을 탑재한 폭탄을 터뜨릴 계획을 확정하게 됩니다.

“I-400”

 

“아이치 M6A 세이란”

 

그러나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은 공식적으로 1945년 9월 22일에 실시될 예정이었으나 1945년 8월 15일에 일본의 항복으로 전개되지는 못했습니다.

일본이 계획했던 작전의 내용은 미국의 근해로 접근한 5대의 “I-400” 잠수함에서는 벼룩이 든 풍선폭탄을 발사하고 3대의 “아이치 M6A 세이란” 항공기는 해안선을 따라 비행하면서 폭탄을 투하한다는 것이었으며 수만 명의 인원이 사망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이 사용하려던 방법은 영국의 “HMS M2”잠수함과 같이 “I-400”과 “아이치 M6A 세이란”을 운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밤벚꽃작전(Operation Cherry Blossoms at Night)”과는 별개로 일본은 “트루크 제도(Truk Islands)”라고 부르던 “추크 제도(Chuuk Islands)”에 치명적인 세균과 생물학 전문가 20명을 파견하기 위해 잠수함을 보내는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잠수함 “USS Swordfish”에 의해 발각되어 수중에서 침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생물학무기를 전쟁에 사용한다는 것은 무차별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는 특성으로 민간인의 엄청난 피해를 낳게 되지만 일본군들은 이런 잔인한 작전을 시도할 계획을 했다는 것입니다.

일본의 자위대가 욱일기를 게양하고 제주도의 관함식에 참가하는 것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은데 만일 일본이 계획했던 세균전이 성공적으로 미국에서 실행되었더라면 미국은 일본의 욱일기를 지금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지 이 문제에 대하여 관대한 태도를 보이고 있는 미국의 입장이 궁금해집니다.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노르망디로 맥주를 공수하라!

죽음의 공포가 엄습하는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불안감은 상상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클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미 국방부의 1971년 보고서에 따르면 베트남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의 51%가 마리화나를 피우고 28%는 코카인과 헤로인을 복용했으며 31%는 LSD(Lysergic acid diethylamide)를 복용했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군인들이 술을 마시는 것은 안전사고 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금지하기도 하지만 죽음의 공포와 극심한 불안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일정량을 병사들에게 공급하기도 한다.

오래전 음주로 인한 문제가 계속해서 발생하자 미 해군은 1862년 9월 1일부터 병사들에게 럼주의 배급을 중단하고, 영국해군은 1970년 7월 30일에 럼주의 배급을 중지하기도 하였는데 그날을 “Black Tot Day”라고 부르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감행되고 나서 연합군은 보급물자의 부족을 겪게 되는데 그 품목들 중에는 맥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운이 좋은 일부 병사들은 지역에서 술을 구해 마시기도 하였으나 수요에 비해서 공급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이었고 이에 영국의 양조회사(Heneger와 Constable) 두 곳에서는 무료로 맥주를 제공하겠다는 의사를 영국공군에 전달하게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노르망디까지 맥주를 수송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고 마침내 영국공군(RAF: Royal Air Force-영국 왕립공군)에서는 2차 대전의 주력기였던 스핏파이어를 수송에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스핏파이어는 45갤런(약 170리터)의 드롭탱크(drop tank) 2개를 연결할 수 있었는데 여기에 맥주를 담아 노르망디로 공수하기로 하고, 탱크 내부를 세척한 다음 2개의 드롭탱크(drop tank)에 모두 90갤런(약 340리터)의 맥주를 싣고 비행을 하게 된다.

 

이처럼 비행기로 맥주를 실어 나른다고 해서 붙은 별명이 ‘날으는 펍(flying pubs)’이었는데 그러나 아무리 깨끗하게 세척을 했다고 해도 연료탱크에 담은 맥주에서 금속 맛이 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시 고안해낸 것이 바로 ‘모디피케이션 XXX(Modification XXX)’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스핏파이어의 양 날개 밑에 맥주통을 달고 운반하는 방식으로 병사들은 이를 두고 ‘맥주폭탄(beer bombs)’이라고 불렀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운반하는 방법도 착륙도중에 불안정 하여 깨지는 사례가 빈번하였고 착륙하면서 맥주통을 깨뜨린 조종사는 병사들 사이에서 그야말로 ‘죽일 놈’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맥주폭탄(beer bombs)’은 기존의 드롭탱크에 싣고 가던 것에 비해서는 맛은 유지가 되었으나 운반하는 양이 크게 부족하여 영국공군은 다시 방법을 찾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스핏파이어보다 더 많은 양의 맥주를 실을 수 있는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수송에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을 이용한 맥주수송은 계속되지 못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독일군의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과 착각한 미군의 ‘P-47 선더볼트(P-47 Thunderbolts)’로부터 하루에 두 번이나 공격을 받은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호커 타이푼(Hawker Typhoon)

 

포케불프 Fw 190(Focke-Wulf 190)

한편 이런 영국공군의 모습을 본 미군에서는 맥주뿐만 아니라 아이스크림도 실어 날랐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공군이 노르망디로 수송하던 맥주는 길게 지속되지 못하고 끝을 맺고 마는데 그것은 영국 양조회사들(Heneger와 Constable)이 무료로 제공한 맥주가 세금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영국 간접세무국(HM Customs and Excise)’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막을 내린 영국과는 달리 미국정부에서는 1944년 11월부터는 아예 미국에서 생산되는 맥주의 5%를 전선에 공급하기로 정하고 미군들뿐만 아니라 연합군에게도 제공하였다고 한다.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레드 바론도 하지 못했던 Ace in a day

Ace in a day는 하루에 5대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를 일컫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레드 바론(붉은 남작)이란 별명으로 잘 알려진 독일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도 80기의 격추기록을 가지고는 있지만 Ace in a day를 달성하지는 못했습니다.

물론 레드 바론이 활약하던 1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2차 대전에 비해서 투입된 비행기의 숫자도 적었을뿐더러 조준기나 광학장비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기록을 수립하기는 어려웠겠지만 Ace in a day를 수립한 최초의 기록은 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으로 나왔으며 게다가 이것을 두 번이나 달성한 “Double Ace in a day”도 수립이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최초로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는 1867년부터 1918년까지 존속했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소속의 “Julius Arigi”로서 그는 1916년 8월 22일 이탈리아군의 비행기 5대를 격추하였습니다.

Julius Arigi

 

그리고 1차 세계대전에는 “Julius Arigi”를 포함하여 모두 13명이 Ace in a day가 되는 기록을 수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캐나다 출신으로 영국의 육군에서 조종사로 활약하였던 “Alfred Atkey”는 1918년 5월 7일 Ace in a day의 기록을 세웠고 이틀 뒤에 다시 5대를 격추시켜 두 번의 Ace in a day가 된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에서는 장비의 발달과 함께 많은 수의 조종사들이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게 되었는데 심지어는 하루에 두 번의 기록을 달성하는 “Double Ace in a day”를 비롯하여 세 번을 달성하는 “Triple Ace in a day”를 수립한 조종사들도 있습니다.

물론 2인승 전투기의 경우에는 조종사뿐만 아니라 사수의 역할도 아주 중요하지만 여기서는 조종사들에 대해서만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이 기록을 수립한 사람으로는 유일하게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항공대 소속의 히로미치 시노하라가 1939년 6월 27일에 소련의 비행기 11대를 격추하여 Double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히로미치 시노하라

 

그러면 지금부터 2차 세계대전에서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한 조종사들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Triple Ace in a day

▶ 에밀 랑(Emil Lang)

독일의 에밀 랑은 2차 대전 당시 모두 173기를 격추한 기록을 가지고 있는데 1943년 11월 3일 소련의 전투기 18대를 격추시켰습니다.

 

▶ 한스요하임 마르세이(Hans-Joachim Marseille)

2차 대전에서 모두 158기를 격추시킨 그는 1942년 9월 1일 모두 17대의 연합군 전투기를 격추시켰습니다.

▶ 어거스트 램버트(August Lambert)

단 3주 만에 모두 70대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킨 기록을 가진 그는 1944년 하루에 17기의 소련 항공기를 격추시켰는데 1945년 4월 17일 미국의 P-51 머스탱의 공격으로 전사하였습니다.

 

▶ 휴버트 스트라슬(Hubert Strassl, Hubert Straßl)

2차 대전 동안 모두 67기를 격추한 그는 1943년 7월 5일 17대의 소련항공기를 격추시켜 Triple Ace in a day의 기록을 기록하였으나 3일 뒤인 1943년 7월 8일에 전사하였습니다.

 

■ Double Ace in a day

국적
이름
일시
격추 대수
일본
히로미치 시노하라
1939년 6월 27일
11대
독일
헤르만 그라프
1942년 9월 23일
10대
오스트리아
Walter Nowotny
1943년 9월 01일
10대
독일
Erich Rudorffer
1943년 10월 11일
13대
독일
에리히 하르트만
1944년 8월 24일
10대

 

에리히 하르트만은 총 352대를 격추시켜 세계최고의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 Ace in a day

2차 대전 당시 하루에 5대 이상 10대 미만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는 모두 28명이 있으며 그 중에서 독일의 “하인츠 볼프강 슈나우퍼(Heinz-Wolfgang Schnaufer)”와 미국의 “데이빗 맥캠벨(David McCampbell)” 및 핀란드의 “한스 빈드(Hans Wind)”는 두 번의 Ace in a day 기록을 수립하였고 세계최초로 음속을 돌파한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척 예거(Chuck Yeager)가 1944년 10월 12일에 5대를 격추하여 Ace in a day의 기록을 수립하였습니다.

척 예거(Chuck Yeager)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진주만 공습에 참가했던 일본의 항공모함들

이미지 by Paul M Walsh FLICKR

2019년에 개봉한 롤랜드 에머리히 감독의 영화 미드웨이는 전체적인 평점도 좋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흥행에도 실패했지만 진주만의 공습으로부터 시작되는 스토리의 전개는 일본의 항공모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고 생각된다.

항공모함이 적극적인 공격의 수단으로 사용된 것은 영국이 경순양함을 개조하여 만들었던 HMS Furious(47)로, 1918년 7월 19일 탑재하고 있던 7기의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이 출격하여 지금은 벨기에의 영토지만 당시에는 독일제국의 도시였던 퇴네르(Tondern)에 주둔하고 있던 제플린 비행선을 공격한 것이 역사적으로는 최초로 기록되어 있다.

HMS Furious(47)

 

소프위드 카멜(Sopwith Camel)

제플린 비행선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해상전투의 기본은 함포사격이었고 미국은 영토확장 의지가 크지 않았으며 영국도 유럽에서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필요성이 없었기에 각각 8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는 것에 그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미국과 영국에 대항하여 태평양지역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항공모함의 건조에 공을 기울였고 그 결과 진주만공습으로 시작되는 태평양전쟁의 초기에는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을 보유하게 되었는데 일본이 이처럼 많은 수의 항공모함을 보유할 수 있었던 데에는 1992년 개최되었던 워싱턴해군군축조약에서 주력함의 톤수가 미국과 영국의 60%로 제한되긴 하였지만 상대적으로 제한이 엄격하지 않았던 분야가 바로 항공모함이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만들었던 최초의 항공모함은 기준배수량 7,470t의 호쇼(鳳翔)로서 이견은 있지만 항공모함으로 설계되어 완성된 세계최초의 항공모함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있다.

 

이런 호쇼는 태평양전쟁이 개전되었을 때에는 이미 구식이 되어버려서 진주만공습에는 참가하지 못하고 공격에 참가한 6척의 항공모함을 위한 대잠초계 임무를 수행하다가 오가사와라 제도 부근에서 회항하게 된다. 그리고 진주만공습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을까? 호쇼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한편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항공모함은 짧게는 공습 후 정확히 6개월이 지난 후, 길게는 2년 6개월 뒤에 미국의 공격을 받아 모두 침몰되는 운명을 맞았는데 당시 진주만공습에 참가했던 6척의 일본 항공모함을 취역 순으로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함명
기준배수량
취역일
침몰일
아카기(赤城)
36,500톤
1927년 3월 25일
1942년 6월 6일
카가(加賀)
26,900톤
1929년 11월 30일
1942년 6월 5일
소류(蒼龍)
15,900톤
1937년 12월 29일
1942년 6월 5일
히류(飛龍)
17,300톤
1939년 7월 5일
1942년 6월 6일
쇼카쿠(翔鶴)
25,675톤
1941년 8월 8일
1944년 6월 19일
즈이카쿠(瑞鶴)
25,675톤
1941년 9월 25일
1944년 10월 25일

 

아카기(赤城)

 

카가(加賀)

 

소류(蒼龍)

 

히류(飛龍)

 

쇼카쿠(翔鶴)

 

즈이카쿠(瑞鶴)

 

이들 6척의 항공모함 중에서 즈이카쿠(瑞鶴)는 침몰하기 직전에 참가했던 마리아나해전 이전까지는 단 1발의 피탄도 당하지 않았을 정도로 운이 좋았는데 이름에 상서롭고 운이 좋다는 뜻의 한자(瑞)가 들어있어서였던지는 몰라도 건조과정에서도 중상이나 사망과 같은 재해가 한 건도 발생하지 않고 건조되었다고 한다.

즈이카쿠(瑞鶴)의 취역예정일은 원래 1941년 12월이었으나 미국과의 긴장관계가 고조되면서 일정을 3개월이나 앞당기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사고 없이 건조되어 진주만공습에 참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름처럼 운이 좋은 배였기 때문이었을까? 즈이카쿠(瑞鶴)는 진주만공습에서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차로 출격했던 6기의 0식 함상전투기와 25기의 99식 함상폭격기가 모두 무사귀환하였고, 2차 출격에 가담했던 27기의 97식 함상공격기들도 모두 귀환할 수 있었다.

0식 함상전투기

 

97식 함상공격기

 

99식 함상폭격기

 

뿐만 아니라 모두 9척의 항공모함이 참가하여 1944년 6월 19일부터 6월 20일까지 미해군과 격전을 벌였던 마리아나해전에서 쇼카쿠형 항공모함의 1번함이었던 쇼카쿠(翔鶴)는 침몰되었지만 2번함이었던 즈이카쿠(瑞鶴)는 1발의 명중탄과 5발의 지근탄에도 살아남아 그해 9월 23일에는 진주만공습 3주년을 기념하여 1944년 12월 7일에 개봉한 선전영화 ‘뇌격대출동(雷撃隊出動)’의 촬영에도 참가하였다.

그러나 일본제국주의 수뇌부의 이런 선전은 전쟁의 패색이 짙어가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었고 사실상 일본의 항공모함들은 마리아나해전을 기점으로 궤멸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결국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에 즈이카쿠(瑞鶴)는 레이테해전에서 일본의 참패와 함께 북위 19도 57분, 동경 126도 34분 지점에서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만 모두 22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했던 일본이 다시금 군비의 확충에 나서는 것을 보면서 얘네들은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