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울타리는 2차 대전 당시의 들것이었다.

런던의 울타리는 2차 대전 당시의 들것이었다.

영국의 런던에는 상하좌우로 둥글게 생긴 철제울타리들이 설치되어 있는 곳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울타리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이 펜스는 2차 대전 당시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철제울타리의 이름은 영어로 “ARP Stretcher Railing”이라고 하는데 ARP는 공습경보(Air-Raid Precautions)의 약자이고 “Stretcher”는 들것을 뜻하는 것으로 2차 대전 당시 공습으로 인한 부상자들을 이송하는 들것으로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의 대규모 공습으로 60만 개 이상이 제작된 이 들것을 스틸로 제작한 이유는 독가스 공격이 있을 경우에도 오염물을 제거하기가 쉽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시제품 점검

 

훈련 중인 모습

 

그리고 이것은 전쟁 중에 실제로 부상자의 이송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자 민간인들의 거주지역에서는 건물의 주변에 설치되어 있던 기존의 울타리들은 전시물자로 사용되면서 대부분이 없어져 버렸고 이에 런던 지방의회에서는 들것을 주택가의 울타리로 사용하기로 결정을 하였던 것입니다.

80여 년 전에 만들어진 들것을 울타리로 사용하면서 지금은 낡고 부식된 것들이 많아 일부 지자체들은 철거를 하고 있는데 The Stretcher Railing Society”라는 민간단체에서는 상태가 양호한 것들은 유물로 보존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의롭지 않은 나라,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

정의롭지 않은 나라,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

매년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은 미국에선 콜럼버스 데이라는 기념일이다. 이날은 1492년 10월 12일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 도착한 것을 축하하는 날로 정확히는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Columbus Day)라고 해야 한다.

미국 외에 10월 12일을 기념하는 나라들은 대부분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이고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태어난 이탈리아에서도 이날을 기념하고 있는데 사용하는 표현들이 나라마다 다르다.

예를 들면 벨리즈와 우루과이에서는 아메리카의 날(Día de las Américas), 바하마에서는 Discovery Day라고 부르며 아르헨티나에서는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날이라는 Día del Respeto a la Diversidad Cultural로 부르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국경일이라는 의미로 Festa Nazionale di Cristoforo Colombo 또는 Giornata Nazionale di Cristoforo Colombo라고 부른다.

그 외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민족의 날(Día de la Raza)로 부르고 있는데 스페인에서는 문화유산의 날(Día de la Hispanidad)이나 종교적인 축일을 뜻하는 피에스타 나씨오날(Fiesta Nacional)이라고 부른다.

스페인에서 10월 12일이 종교적인 축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이유는 서기 40년 10월 12일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야고보가 현재 스페인의 사라고사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 성모마리아의 발현(필라의 성모)을 본 것에서 유래하였으며 제264대 교황이었던 바오로 2세는 필라의 성모를 히스패닉 민족의 어머니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보게 되는 필라 성모 대성당이 성모마리아의 발현을 계기로 만들어진 성당이며 역사상으로는 성모마리아께 봉헌된 최초의 성당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국의 콜럼버스 데이도 미 전역에서 인정되는 기념일은 아니어서 하와이, 알래스카, 오레곤 및 사우스 다코다 주에서는 이날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Discoverers’ Day로 부르는 하와이에서는 명칭의 변경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이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지 않고 있으며 사우스 다코다에서는 공휴일로 지정하였지만 콜럼버스 데이가 아닌 Native American Day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이라는 의미를 지니는 Native American Day는 아메리칸인디언 운동(AIM: American Indian Movement)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매년 10월의 두 번째 월요일이면 미국 각지에서 체포되는 네이티브 아메리칸, 즉 인디언들의 수가 해마다 늘고 있으며 아예 콜럼버스 데이란 명칭을 변경하기 위해 콜럼버스 데이 변경을 위한 동맹(TCAD: Transform Columbus Day Alliance)이 결성되어 있기도 하다.

AIM의 깃발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American Indian Day)로 부를 것을 주장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11년에 결성된 아메리칸 인디언 협회(Society of American Indians)로부터 시작되었다.

1914년부터 1915년까지 이 단체의 대표를 맡았던 아서 파커(Arthur C. Parker)는 미국의 보이스카우트 연맹을 3년 동안이나 설득시키는 노력을 한 끝에 1915년 12월 14일에 24개 주정부로부터 받은 인증서를 백악관에 전달할 수 있었고 마침내 1916년 뉴욕주를 시작으로 1919년에는 일리노이주에서 아메리칸 인디언의 날(American Indian Day)을 의원입법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아서 파커(Arthur C. Parker)

 

한편 콜럼버스의 교환(Columbian Exchange)을 검색하면 유럽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수두와 콜레라, 장티푸스와 같은 질병이 전염되어 원주민의 80%가 줄어들었다는 내용을 볼 수가 있다.

통설에 의하면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는 대략 4천만 명 정도였던 것으로 추산되는 인디언들의 숫자가 500만 명까지 감소했다고 하는데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전염병이 맞지만 이외에도 강철로 만든 칼과 소총을 앞세운 무력에 의해 숨진 숫자도 상당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즉, 유럽인들에게는 새로운 대륙으로 천국이었을지 모르지만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는 지옥이었을 것이고 흑인노예를 해방시켰다는 링컨 대통령도 인디언에게는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댈 정도였으니 콜럼버스 데이는 결코 정의롭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정의를 앞세우는 미국의 진면목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인디언들의 오래되고 지속적인 저항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에 더하여 2015년 10월 11일자 워싱턴 포스트의 인터넷판 기사는 콜럼버스 데이의 진실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1492년에 콜럼버스가 미국을 발견하였으며 산타마리아, 니나, 핀타란 3척의 배로 항해를 하여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다고 하지만 워싱턴 포스트는 콜럼버스는 미국을 발견한 적도 없을 뿐 아니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증명했을 리도 없으며 배의 이름도 정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있다.

콜럼버스보다 500년 전에 북유럽의 탐험가인 레이프 에릭손(Leif Erikson)이 북미(캐나다)에 최초로 발을 디뎠으며 이보다도 훨씬 이전에는 페니키아의 선원들이 대서양을 건너 도착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워싱턴 포스트는 지적하고 있다.

콜럼버스가 발견한 것은 미국이 아니란 사실은 이미 증명되었으며 그가 사용한 배의 이름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수많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날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있는 미국이란 나라는 결코 정의로운 나라가 아님은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오리 아저씨가 마스크도 착용하지 않고 재선(再選)을 위해 날뛰는 모습과 그에 동조하는 무리들을 보면서 다시 한 번 不正義한 나라임을 실감하게 된다.

더 길게 적으면 국내정치에 대한 얘기를 하게 될 것 같아서 이만 주절거림을 끝낸다.

사진은 운디드 니(Wounded Knee Massacre) 대학살로 살해되어 매장된 인디언들의 모습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애완동물이 도살당하다.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애완동물이 도살당하다.

사람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라는 의미의 ‘반려동물’은 예전에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기른다는 의미에서 ‘애완동물’이라 불렸는데 아직도 반려동물보다는 애완용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유기되는 사례가 끊이질 않고 있다.

평상시에도 함부로 버려지는 동물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어떤 대우를 인간으로부터 받게 될까? 전쟁과 동물이라고 하면 우리는 전쟁동안 군에서 활약한 동물들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전쟁 동안 미 해병대에서 활약했던 암말인 레클리스 병장(Sergeant Reckless)을 들 수 있다. 원래는 플레임(Flame)이라는 이름으로 전장에서 탄약과 부상병을 수송하던 임무를 수행하던 이 말은 용감하다 또는 무모할 정도로 임무에 충실하다는 의미에서 레클리스(Reckless)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고 1954년 4월 상병(corporal)에서 병장(sergeant)으로 진급하였고 1959년 8월 31일에는 하사(staff sergeant)로 진급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4마리의 새끼를 낳은 레클리스(Reckless)는 1968년 5월에 생을 마감했는데 2013년 7월 26일에는 레클리스(Reckless)를 기리는 동상이 미 해병대박물관에 건립되었고, 2018년 5월 12일에는 켄터키의 말 공원(Kentucky Horse Park)에도 설치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은 동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고 대부분은 버려지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부터 일주일 동안에만 영국에서는 75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죽임을 당하는 그야말로 홀로코스트와 같은 참상이 벌어졌음을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 영국에서 만들어진 ‘공습대비 애완동물 예방조치위원회(National Air Raid Precautions Animals Committee)’에서는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들을 시골로 보내거나 보살피지 못한다면 죽여야 한다는 안내를 했다.

 

1939년,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결론에 도달한 영국은 가장 중요한 식량문제 때문에도 애완동물들을 죽여야 한다는 홍보를 했던 것인데 실제로 영국은 1940년 1월 8일부터 전쟁이 끝난 후인 1954년 7월 4일까지 식량배급을 실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애완동물들을 키우던 남자들은 징집으로 집을 비우고, 남자들이 떠난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여성들이 군수공장을 비롯한 노동에 참여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1940년 9월 7일부터 267일간이나 지속되었던 독일군의 런던공습(blitz) 당시에도 수십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추가로 도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죽임을 피한 애완동물들일지라도 독일군의 공습이 시작되면서부터 방공호로 들어갈 수 없어서 길거리를 떠돌게 되었는데 1940년 8월에 법으로 통과된 식량배급제도를 어기고 음식물을 동물에게 제공하였다는 이유로 2년형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례가 있을 정도였으니 동물들의 도살은 엄청난 규모로 자행되었음은 충분히 짐작 가고도 남음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일주일 만에 75만 마리의 동물들이 도살당한 사실은 클레어 캠벨(Clare Campbell)이라는 작가가 쓴 책, 본조의 전쟁(Bonzo’s War: Animals Under Fire 1939 -1945)을 통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녀가 이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니콜라 화이트(Nicola White)란 여성이 템즈 강변에서 본조(Bonzo)라는 이름이 새겨진 인식표를 발견한 뒤, 이에 대한 조사를 함께 진행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2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 영국에는 6백만~7백만 마리의 개와 고양이들을 가정에서 키우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영국정부의 “동물들을 죽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친절한 행동이 된다.”는 광고로 인해 동물들을 안락사 시키기 위해 동물병원 앞에 줄을 선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하며 동물병원에 있던 클로로포름은 삽시간에 모두 동나고 말았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홀로코스트와도 같은 학살에 대하여 반대한 사람들도 있었고 영국육군 수의부대(Royal Army Veterinary Corps)에서는 개는 전쟁에 필요하기 때문에 죽여서는 안 된다고 이를 막으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며, 왕립동물보호협회(RSPCA: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에서도 노력을 다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동물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당시에도 이런 학살을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으니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1860년에 설립된 영국의 배터씨 동물 보호소(Battersea Dogs & Cats Home)인데 당시 불과 직원 4명밖에 없었던 보호소에서는 2차 대전을 통하여 모두 145,000마리의 개를 보호하였다고 한다.

전쟁동안 동물을 학살한 사례는 역사적으로도 수없이 많고 1차 세계대전 동안 영국에서만 40만 마리의 애완동물들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는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으로 잘 알려진 독일군의 “파리 포위공격(The Siege of Paris)” 때문에 보급물자가 끊어진 파리에서는 1870년 9월 19일부터 1871년 1월 28일까지 약 4개월 동안 사람들이 집에서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잡아먹었다는 사실도 있다.

※ 프랑스인들도 개고기를 먹었다.

 

함께 생활하던 반려동물을 아무렇지 않게 버리는 사람들이 근절되지 않고 있는 지금, 만일 천재지변이라도 일어난다면 버려지거나 죽는 동물들은 수도 없이 발생하지 않을까? 따라서 이제는 이러한 때를 대비한 행동요령이나 준비에 대하여 지침을 마련하고 알리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의 무덤

세비야 대성당에 있는 콜럼버스의 무덤

4번째 항해에서 병에 걸린 콜럼버스는 1506년 5월 20일, 스페인의 바야돌리드에서 사망하여 매장되었다고 하나 정확한 위치는 지금까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사망하고 나서 3년 뒤 스페인 남부도시 세비야의 가족묘지로 이장되었다가 1544년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던 그의 유언에 따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 성당에 안치되었으며 1795년에는 쿠바의 아바나로 이전되었다가 1898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의 세비야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2005년 그라나다대학의 연구팀이 유골에서 채취한 DNA를 통해 콜럼버스의 시신임을 확인하였으며 2022년에는 마드리드 국립해군박물관에서 콜럼버스의 첫 번째 매장지는 바야돌리드에 있었으나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샌프란시스코 수도원(San Francisco convent)이었다고 발표했다.

샌프란시스코 수도원은 현재 마요르광장이라고 불리는 곳에 있었다고 하는데 사진으로 보는 마요르광장의 아름다움은 실제로는 지독한 담배냄새와 지린내로 얼굴을 찌푸렸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세비야 대성당 안에는 당시 스페인을 구성하고 있던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의 4국왕이 콜럼버스의 관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2005년 DNA를 조사했던 그라나다대학에 의하면 콜럼버스의 유골은 일부가 산토도밍고에 남아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도미니카공화국은 산토도밍고의 콜럼버스 등대에 있는 콜럼버스의 유골이 진짜라는 주장을 하고 있으나 DNA조사에는 응하지 않고 있어서 무덤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아타카마 사막에 내리는 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아타카마 사막에 내리는 비, 좋은 것만은 아니다

칠레 북서부의 아타카마 사막은 지구상에서 가장 건조한 지역으로 1500만 년 동안 건조한 상태가 계속되는 곳으로, 화성의 환경과 유사하여 화성의 생명탄생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는 모델로 이용되어 왔던 곳입니다.

 

그런데 2015년 슈퍼엘니뇨 현상으로 3월에만 12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강우로 7년 동안 내릴 비의 양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피어난 꽃들이 장관을 이루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2015년 8월에도 많은 비가 내렸지요.

 

그러나 이렇게 척박한 땅에 생명의 근원이 되는 비가 내린 것이 반드시 좋은 일만은 아니란 것을 알리는 연구결과가 금년 11월 학술지 “Scientific Reports”에 발표되었습니다.

연구결과에 의하면 비가 내리기 전에 사막에서 채취한 토양에서는 모두 16종이 발견되었던 미생물들이 비가 내리면서 생긴 웅덩이의 토양에서는 대부분인 75~87%가 멸종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건조한 상태에 적응한 미생물들이 대량의 빗물이 유입되면서 생긴 삼투압 현상 때문에 전멸한 것으로, 화성에서 물의 흔적이 발견되었다고는 하지만 만일 물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생명체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적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타카마 사막에 내린 비로 태어난 새로운 생명체인 아름다운 꽃들에 가려진 미생물들의 멸종을 보면서 다시 한 번 인간이 자연에 가하는 인위적인 변화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가려진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가려진 역사의 어두운 그림자

이탈리아에서 코로나 19의 확진자가 현지시간으로 3월 15일 오후 6시 현재 24,747명, 누적 사망자는 1,809명으로 집계되었다고 한다.

이동제한령이 내려진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관광산업의 비중이 높은 곳으로 전체 GDP의 13.2%를 차지하고 있으며 한국은행에 따르면 이번 코로나 19의 여파로 관광산업의 매출이 우리 돈으로 6조 8천억~9조 5천억 정도의 감소가 예상된다고 하는데 하루빨리 치료제가 개발되어 팬데믹(Pandemic)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오늘은 우리나라 관광객들이 빠지지 않고 찾는 명소로 콜로세움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과 이어지는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의 숨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포룸 로마눔(Forum Romanum)

 

카피톨리노(Capitolino)라고도 불리는 캄피돌리오(Campidoglio) 언덕에 오르면 나오는 광장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것으로, 중앙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동상이 자리를 잡고 있으며 캄피돌리오(Campidoglio)란 이름은 유피테르 옵티무스 막시무스 신전을 건립할 때 카풋(caput: 고대어로 사람의 머리를 뜻한다)이 발견된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제가 바로 카풋과 관련이 있으며 죽음의 계단이라고 불리고 있는 제모니안 계단(Gemonian stairs: 이태리어로는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이다.

 

기원전 7세기 경의 고대 로마에는 메르티네 감옥(Mamertine Prison: 이태리어로는 Carcere Mamertino)이 있었는데 이곳에 수감되었던 사형수들은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에서 처형된 다음 그 시체를 계단에 던져 떨어뜨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가 미켈란젤로의 예술성과 로마의 건축양식을 감상하고 있는 이면에는 이같은 어두운 역사가 자리를 하고 있으며 기원전 640년에서 616년경에 만들어진 메르티네 감옥(Mamertine Prison)은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한 명으로 나의 세례명이기도 한 안드레아와 형제지간인 성 베드로가 순교 전에 수감되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라는 계단은 1세기 무렵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만들어졌으나 처형장으로 사용되면서 죽음의 계단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한 것은 로마제국의 제2대 황제였던 티베리우스 때부터라고 전해지고 있다.

정적이 많았던 티베리우스는 그의 측근이었던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이아누스( Lucius Aelius Seianus)를 사형에 처하게 되는데 그를 교수형에 처했던 장소가 바로 죽음의 계단이라고 하는 제모니안 계단(Gemonian stairs: 이태리어로는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이다.

세이아누스의 죽음은 그의 급성장에 두려움을 느꼈던 티베리우스의 견제가 원인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는 티베리우스의 며느리와 불륜을 맺고 그의 아들 드루수스 카이사르(Drusus Julius Caesar)를 암살했다는 것이었다.

드루수스의 죽음은 당시에는 병사로 알려졌으나 그가 죽고 8년이 지나서 세이아누스의 전처 아피카타(Apicata)에 의해서 드루수스의 아내인 리비아 율리아( Livia Julia)와 불륜관계였던 세이아누스가 그녀와 공모하여 드루수스를 독살하였다고 밝힘으로써 티베리우스는 일사천리로 세이아누스의 교수형을 결정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죽음의 계단에서 교수형에 처해진 루키우스 아엘리우스 세이아누스( Lucius Aelius Seianus)의 시신은 계단에 던져져 성난 군중들에 의해 토막이 나고 수많은 모욕을 당한 뒤 테베레강에 버려지고 말았다.

 

공포정치를 일삼던 티베리우스가 서기 37년에 사망하고 나서는 죽음의 계단에서 처형되는 사람은 크게 줄어들었으나 서기 68년 네로가 죽고 나서 4명의 황제가 차례로 즉위했던 혼란기를 말하는 ‘4황제의 해’에 세 번째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아울루스 비텔리우스(Aulus Vitellius)가 베스파시아누스(Titus Flavius Vespasianus)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뺏기고 처형당함으로써 역사적인 장소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죽음의 계단인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에서 교수형이 아닌 참수형을 당한 비텔리우스(Vitellius)의 시신은 로마시민들에 의해 무참하게 유린되었는데 당시의 모습은 프랑스 화가 조르쥬 로슈그로스(Georges Rochegrosse)의 1883년 작품에 잘 묘사되어 있다.

 

죽음의 계단에서 시신을 유린하는 행위는 서기 81년에 로마의 제11대 황제에 재위한 도미티아누스(Titus Flavius Domitianus)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스칼레 게모니에(Scale Gemonie)는 현존하지 않는다.

빅토리아시대에는 애도용 란제리를 입었다.

빅토리아시대에는 애도용 란제리를 입었다.

뚱뚱하든 말랐든 자신의 몸을 사랑하자는 캠페인이 여성들 사이에 확산되는 시대의 흐름을 읽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트렌스젠더나 체구가 큰 모델들은 패션쇼에 세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패션잡지 보그의 질문에 “그들은 빅토리아시크릿이 보여주는 ‘판타지’의 본보기가 아니다”라고 대답한 마케팅 최고책임자의 발언으로 불매운동을 초래하게 된 ‘빅토리아시크릿’이라는 업체의 매출감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됩니다.

‘빅토리아시크릿(Victoria’s Secret)’이라는 회사의 이름은 영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루었던 ‘빅토리아 여왕(Queen Victoria)’과 그녀가 재위하던 시대를 말하는 ‘빅토리아 시대(Victorian era)’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지요~

빅토리아 여왕은 하얀 피부에 병적인 집착을 보였는데, 희다 못해 창백해 보이도록 화장을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얗게 화장을 한 것은 상류층 여성들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유하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는군요~

 

그리고, 이런 메이크업을 빅토리아 여왕은 아예 혈관이 보일 정도로 창백하게 하는 것을 좋아했고, 여왕의 이런 기호에 따라 결핵으로 죽어가는 여성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풍조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편을 얼굴에 바르고 잔 후 아침에 일어나 암모니아로 화장을 하고, 주근깨를 없애고 황갈색의 피부를 희게 해준다고 해서 당시에 쥐를 잡기 위해 약국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던 중독성이 강한 비소를 복용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희다 못해 창백한 피부에 집착하던 당시에는 여성들이 입던 속옷도 순결을 의미하는 흰색이 대부분이었으며 특히 첫날밤을 앞둔 신부는 반드시 흰색 속옷을 입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시대에는 사람들의 억눌린 욕구가 비밀리에 성행하고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창백한 흰색의 피부에 검정색 속옷이 더 아름답게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순결을 의미하는 흰색 속옷 대신에 검정색 속옷을 입는다는 것이 드러내놓고 말할 일은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생긴 문화가 우리말로 장례용 속옷 내지는 애도용 속옷으로 번역할 수 있는 “Mourning Lingerie”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복을 뜻하는 “Mourning Dress”에서 표현을 따온 것인데 당시의 장례문화는 유교의 장례문화와 유사할 정도로서 부모가 사망하면 1년을, 남편이 사망하면 2년의 애도기간을 가져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절차에 대해서도 아주 세세하게 규정하고 있었음을 ‘콜리어 백과사전(Collier’s Cyclopedia)’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례식과 애도기간에 착용하는 속옷은 실크와 솜털로 만들어진 것이어야 하고, 스타킹은 실크나 캐시미어 또는 검정색의 발브리간(balbriggan)이라고 하는 이집트면으로 만든 것을 신어야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이것은 또 하나의 부를 과시하는 수단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상복도 입지 못하는 일반 여성들이 장례식에만 입는 속옷을 따로 준비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어느 작가는 이런 현실을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 돈이 어디서 나오는지 궁금하다.

그것은 슬픔의 사치다.

태즈매이니아의 쥐새끼들 같으니라구~

태즈매이니아의 쥐새끼들 같으니라구~

요즘 장관후보자들의 인사청문회를 보고 있으면 차제에 위장전입 3회 미만, 부동산 시세차익 실현 10억 미만인 자는 후보가 될 수 없다는 내용과 함께 후보자의 병역사항이나 가족의 이중국적에 대해서는 청문회장에서 질의하면 의원자격을 영구히 상실하도록 한다는 법을 만드는 것이 좋을 듯 싶소이다. 당신들이 하는 일이 법 만드는 것이잖소?

촛불혁명으로 정권이 바뀌고 나서 많은 국민들은 이제는 무언가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면서 새로운 정부에 힘을 실어주었으나 지금은 바꿔봐야 도루묵이라는 자조 섞인 한숨만 내쉬고 있소이다.

누가 당신들에게 사회지도층이란 수식어를 붙였는지는 모르겠소 만은 한글은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내가 얘기 하나 해줄 테니 잘 듣고 생각들 좀 했으면 좋겠소이다.

호주의 태즈매이니아 섬에서 남동쪽으로 약 1,500㎞ 떨어진 곳에는 유네스코가 1977년에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한 매쿼리섬(Macquarie Island)이란 곳이 있소이다.

1810년에 발견된 이 섬은 물개와 바다표범 및 펭귄을 잡아 가죽을 채취하고 고래로부터 기름을 얻기 위한 배들의 전진기지로 사용되면서부터 배에서 상륙한 쥐들이 섬에서 번식하게 되었다오.

그리고 쥐의 개체수가 급속도로 증가하자 선원들은 이를 퇴치하기 위해 고양이 몇 마리를 섬에다 풀어놓았는데 이 녀석들의 번식력도 아주 뛰어나서 급속도로 증가하였다고 하오.

그러다가 섬을 발견하고부터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혹시라도 난파한 배의 선원들이 굶어죽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또 토끼를 몇 마리 섬에다 풀었다고 하는구려.

그러자 섬에 있던 고양이들이 토끼를 먹이로 삼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도 요행히 살아남은 토끼들은 빠르게 번식하여 점점 그 수가 늘어났고 먹잇감이 풍부해짐에 따라 고양이의 개체수도 더욱 증가하였다는구려~

그런데 고양이가 토끼만 먹는 것이 지겨웠는지 이제는 별식으로 섬에 있던 조류들을 잡아먹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몇몇 종은 아예 씨가 말라버리는 일이 생겼다고 하오. 우리사회의 중산층이 점점 사라지는 것처럼 말이오.

그러다가 1970년대에 토끼에게 치명적인 병인 ‘점액종증(myxomatosis)’이 섬에 만연하여 그때까지 13만 마리나 되었던 토끼의 개체수는 2만 마리로 격감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먹이가 부족해진 고양이들은 더 많은 새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다오.

이를 보다 못한 환경보호론자들의 활동으로 1985년부터 고양이를 섬에서 퇴치하는 작업을 벌여 마침내 2000년에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의 고양이를 사살했다는 구려~ 조금 쫄리지 않소? 정치인님네들~

그런데 힘없는 국민들처럼 평화가 온줄로만 알았던 토끼들은 자신들의 숫자가 점차 증가하자 이제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섬에 있는 식물들을 닥치는대로 먹기 시작했고 이런 피해는 또 다른 서민인 펭귄이 먹을 것이 없어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오. 아래 사진이 바로 토끼들이 닥치는대로 먹어대는 통에 울창했던 숲이 횡뎅그레 변해버린 태즈메이니아의 모습이라오.

사진 출처: 영국 가디언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구요?

그야 당연한 일 아니겠소! 보다 못한 태즈메이니아를 관리하는 곳과 호주 야생동물보호국에서는 2009년에 토끼 13만 마리를 비롯하여 생쥐 103,000마리, 쥐 36,000마리를 모두 없애버리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는구려~

말로는 국민들을 위한다고 하면서 정작 본인들을 위해서만 아주 열심히 일하는 정치인님네들도 국민이 열 받으면 태즈메이니아의 쥐와 같은 꼴을 면키는 어려울 것이오.

출처: 위키미디어

쥐에 비유해서 죄송하오이다만은 뭐 인용한 가디언지의 기사에 그렇게 나와 있어서 달리 표현하지 못하는 점은 양해 바라오.

그런데 참 신기하고 부럽기는 하오. 경제는 안 좋다는데 작년보다 재산이 증가한 고위공직자가 72%나 된다는 사실이~ 그리고, 내 얘기가 사실인지 궁금하면 아래에 가디언지의 기사를 링크하니 올 연말 외유가서 읽어들 보시든지~

※ Macquarie Island faces ‘ecosystem meltdown’ after conservation efforts backfire

상어의 공격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던 USS 인디애나 폴리스 침몰사건

상어의 공격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낳았던 USS 인디애나 폴리스 침몰사건

1945년 7월 30일, 태평양전쟁을 끝낼 수 있는 원자폭탄의 재료인 우라늄을 수송하는 극비임무를 수행하고 필리핀의 레이테 섬으로 이동 중이던 미국의 USS 인디애나폴리스함은 일본의 I-58 잠수함의 어뢰공격을 받아 침몰하였다.

침몰 직전 바다에 뛰어들었던 900여 명의 생존자 중에서 구조된 인원은 317명에 불과했는데 이에 대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상어의 공격이었다.

인디애나폴리스호에는 25명이 정원인 구명뗏목 35척이 실려 있었지만 13척 만이 탈출에 성공하였던 까닭으로 2/3에 가까운 인원들은 뗏목을 붙잡거나 뗏목의 가장자리에 연결된 밧줄을 잡고 바닷물 속에 잠겨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높은 파도로 인해 뗏목 위의 사람들도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형편이어서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조금이라도 더 안정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구조되기 위한 방편으로 서로의 뗏목을 밧줄로 연결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상자나 사망한 시체에서 나오는 피냄새에 이끌린 상어떼가 몰려들기 시작했고 상어에 희생당한 숫자만 수십에서 많게는 150여 명에 이르렀다는 것이 생존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나 끊임없는 상어의 위협과 함께 바닷물을 마신 인원들은 염분중독으로 신장의 정화능력이 저하되어 호흡이 불규칙해지고 신경마비 증세가 일어나면서 사망에 이르기도 하였고 더러는 저체온증으로 사망에 이르고 또 더러는 정신착란에 의해 서로를 죽이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 바다에 표류할 때 바닷물을 마신 사람의 사망률은 39%로 마시지 않은 사람의 사망률(3%)보다 13배나 높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이처럼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도록 4일간이나 구조활동이 지체되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침몰하기 직전 보낸 구조신호를 해군본부에서 수신하지 못했다는 것이 공식적인 당시의 답변이었지만 나중에 해제된 비밀문서에 따르면 구조신호는 세 차례 레이테의 해군기지에서 수신하였으나 일본군의 기만공작으로 간주하고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도사리고 힜었던 심각한 미군부의 알력을 간과해선 안 된다.

당시 괌을 기지로 하는 태평얌함대 사령부를 지휘하던 니미츠 제독과 레이테 섬에 있는 7함대를 지휘하던 맥아더는 서로 앙숙이었고 그 바람에 서로 교신이 거의 없었던 것도 구조가 지연되는 결과를 가져온 커다란 이유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인디애나폴리스호의 입항이 늦어지자 수색을 위해 2척의 함정을 출동시켰지만 침몰지점과는 동떨어진 지역을 수색하다 철수하는 바람에 더 많은 희생자를 낳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와중에도 과감한 결단력으로 많은 인원을 구조하는 맹활약을 펼친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아드리안 막스(Adrian Marks) 중위였다.

아드리안 막스 중위(왼쪽)와 극중 아드리안 중위 역을 맡았던 배우 토마스 제인(오른쪽)

 

인디애나폴리스가 침몰한지 4일째 되던 날 정기순찰 중이던 록히드 PV-1 벤추라가 조난자들을 발견하였고 무전연락을 받은 미군은 당시 유일한 덤보(Dumbo: air-sea rescue) 구조기였던 PBY 카탈리나를 출동시켰는데 조종사가 바로 아드리안 막스 중위였던 것이다.

 

PV-1 벤추라

당시 아드리안 막스 중위의 구조활동을 묘사한 영화 USS 인디애나 폴리스의 한 장

 

탁 트인 바다에는 착륙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드리안 중위는 승무원들의 동의를 얻어 3미터가 넘는 파도가 치는 바다에 착륙하여 모두 56명의 조난자를 무사히 구조할 수 있었는데 아래의 사진이 조난자들 주위를 맴돌고 있는 상어의 실제 모습을 촬영한 사진이다.

 

이처럼 많은 스토리를 가진 USS 인디애나 폴리스 침몰사건은 미국과 일본 양국에서 모두 영화로 제작되었으며 미국은 니콜라스 케이지 주연의 USS 인디애나 폴리스란 제목으로, 일본은 한여름의 오리온(真夏のオリオン)이란 제목으로 개봉하였으나 둘 다 졸 구린 영화라서 보면 시간이 아까울 것이란 점을 말씀드린다.

 

여기서 국내정치의 현주소와 비교할 생각은 없지만 3번의 조난신호를 무시한 미군 지휘부와 상층부의 알력으로 인한 수많은 인명의 희생은 필연적으로 이태원참사를 떠올리게 만든다.

용산구청장과 용산경찰서장에게 책임을 물어 꼬리를 자르는 모습은 인디애나폴리스의 침몰책임을 함장이었던 맥베이 대령에게 전가하여 회피기동을 하지 않았고 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두 가지 혐의로 기소하여 이 중 회피기동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유죄판결을 내린 것과 너무도 닮았음을 깨닫게 한다.

나중에 인디애나폴리스를 격침시켰던 일본 I–58의 함장이 맥베이 대령의 책임이 아니라는 증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유죄판결을 내림으로써 맥베이 대령은 196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그 뒤의 이야기는 예서 멈추어야겠다. 더 하면 욕이 나올 것 같아서…

일본의 집중호우 피해는 백 빌딩 현상 때문

일본의 집중호우 피해는 백 빌딩 현상 때문

(2018년 7월)9일 오후 10시 현재로 사망자가 123명, 실종자가 61명에 이르는 일본의 집중호우로 인한 피해는 시간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데 우리가 흔히 집중호우라고 부르는 것은 한 시간에 30mm 이상이나 하루에 80mm 이상의 비가 내릴 때, 또는 연강수량의 10%에 상당하는 비가 하루에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몇 시간 동안 계속해서 강한 비가 퍼붓는 현상은 소나기를 내리는 적란운 덩어리(강수 셀)가 단일 셀(single cell)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이런 단일 셀이 연속적으로 발생하는 다중 셀(multi cell)형 뇌우를 형성하면서 강한 비가 몇 시간 동안 내리거나 단일 셀의 규모가 아주 큰 슈퍼 셀 형을 이룸으로써 집중호우가 내리는 것이라고 합니다.

상기와 같은 구분은 미국의 블루스타인(Bluestein)의 연구에 따른 것이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기상학자 오구라 요시미츠(小倉義光: 일리노이 대학의 명예교수이기도 함)가 1980년대의 집중호우를 분석하여 백 빌딩(back building) 형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고 정확하게는 백 앤드 사이드 빌딩(Back and Side building)이라고 부릅니다.

백 빌딩 현상은 적란운이 연속해서 발생하고 이 때문에 폭우가 내리는 것을 말하는데 적란운의 바람으로 다음 적란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모습이 흡사 빌딩이 즐비해 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이름 붙여진 것입니다.

 

백 빌딩 현상으로 인한 일본에서의 피해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며 2014년 히로시마에서 77명의 사상자를 낸 산사태(토사재해)의 원인도 바로 이 백 빌딩 현상에 의한 집중호우 때문이라고 하며 재해대책이 어느 나라보다도 잘 구축되어 있다는 일본에서 이번과 같은 큰 피해를 예방하지 못한 이유에는 발생을 예측하기가 어려운 백 빌딩 현상이란 것도 주요한 이유 가운데의 하나라고 합니다.

 

며칠 동안 내리던 비가 멈추고 오늘부터는 다시 무더위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많은 낚시인들 사이에 예보의 부정확함 때문에 ‘구라청’으로 불리고 있는 ‘기상청’을 아예 없애달라는 국민청원도 올라온 것을 보았는데 개인적으로는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지만 우리의 기상청도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자리 잡았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