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조자동차는 무엇 때문에 공장을 폭파했을까?

​푸조자동차는 무엇 때문에 공장을 폭파했을까?

프랑스의 자동차회사 푸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을 위한 자동차를 생산할 것을 강요받았지만 끝까지 거부했으며 마침내는 공장을 직접 폭파하여 항거하였다고 하는 내용이 언론사의 기사에 나오는 내용들입니다.

물론 푸조자동차가 나치독일에 항거하는 뜻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공장을 직접 폭파하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나치에 대한 항거보다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인명에 대한 존중이 바탕이 되었음을 모르는 내용의 기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푸조(PEUGEOT)가 공장을 폭파하게 된 배경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푸조자동차의 생산공장은 1925년부터 1929년에 걸쳐 소쇼(Sochaux)지방에 집중되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당시에는 6만 명이 넘는 인원이 근무하는 대단위 공장이었습니다. 이처럼 규모가 큰 생산시설이 독일군의 수중에 넘어가자 영국의 SOE(Special Operations Executive)에서는 자체발전설비를 갖추고 있는 푸조자동차의 소쇼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한편 독일군의 지배하에 놓인 푸조자동차는 일부 언론에서 사실관계의 확인조차 없이 작성한 기사에 나오는 것처럼 생산을 거부하지는 못하였으며, 10대를 생산하면 6대의 차량에서 불량이 나오도록 하는 소극적인 사보타지(sabotage)를 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43년 봄에는 독일의 V1 미사일을 생산하는 프로젝트에 숙련공들이 차출되어 V1 미사일에 사용될 부품을 제작하는 업무를 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영국의 SOE에서는 더욱 푸조의 공장을 폭파할 계획을 서두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1943년 7월 15일 밤에 공군참모장 Charles Portal와 “왕립공군 폭격사령부”의 사령관 Arthur Harris의 지휘로 “헬리팩스 폭격기(Handley Page Halifax)”가 출격하여 푸조의 소쇼공장을 폭격하였고, 귀환한 조종사들은 푸조의 공장이 평탄하게 변했다는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정확하게 확인된 바로는 푸조의 소쇼공장을 폭격한 것이 아니라 인근에 있던 4개의 마을을 폭격하는 바람에 민간이 125명이 사망, 25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으며, 가옥 100여 채가 파괴되고 400여 채가 넘는 가옥이 피해를 입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빗나간(?) 일부의 폭탄만이 푸조자동차의 소쇼공장에 떨어졌을 뿐이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폭격에 실패하자 영국의 SOE는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되는데 푸조의 생산라인에 대한 폭격을 시도하기 전인 1943년 4월에 프랑스로 공중침투하여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협력하고 있던 SOE 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푸조공장에 대한 폭격이 실패하고 대신에 민간인 희생자들을 내는 사실을 직접 목격하게 되어 SOE본부에 폭격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출하고 직접 다른 시도를 하게 됩니다.

언론 등에서 나오는 것처럼 “장 피에르 푸조 3세”가 나치에 협력하지 않으려고 단독으로 공장폭파를 결정했던 것이 아니고 동생 “로돌프 푸조(Rodolphe PEUGEOT)”를 만나 설득한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의 노력에 의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 3세”의 동생이자 공장의 기술책임자를 맡고 있던 “로돌프 푸조(Rodolphe PEUGEOT)”에게 전화를 건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자신은 영국의 요원이며 현재 푸조공장에 대한 폭격을 계획하고 있는데 공장을 폭격하면 민간인의 희생도 뒤따르게 되니 직접 폭발물을 설치하여 폭파하는 것이 민간인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 두 가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말을 했습니다.

장 피에르 푸조(Jean-Pierre PEUGEOT) 3세

 

처음에는 해리 리(Harry Ree)의 말을 믿을 수 없었던 푸조 측에서는 영국에 무선조회를 하여 그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자신들의 손으로 폭파한 공장의 파괴된 모습을 보는 것은 정말 하기 싫은 일이었지만 지역주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란 생각에 따라 실행에 옮기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결정을 내림에 따라 공장의 직원으로 변장한 Harry Ree는 낙하산으로 증원된 SOE요원들과 합류하여 그들이 가지고 온 장비와 폭약을 공장에 설치하기로 하였으나 최초의 시도는 축구를 하는 독일군 경비병들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11월 5일 두 번째 시도에서 폭발물을 설치할 수 있었습니다.

폭파는 성공적이어서 공장의 육중한 철문이 20미터 이상 날아오를 정도였으며 더 이상 푸조자동차의 소쇼(Sochaux)공장은 생산라인으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Harry Ree와 SOE요원들은 며칠 동안 더 폭파를 계속하여 독일군들에 의해 사용될 수도 있는 작은 부품들까지도 폭파시켰습니다.

SOE주도의 성공적인 폭파작전은 폭격기를 통한 공중폭격을 막아 민간인들의 희생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인간의 생명을 존중하는 푸조자동차의 경영진들의 결정이 있었음은 물론입니다.

한편 폭파에 성공한 SOE요원 해리 리(Harry Ree)는 게슈타포의 포위망을 피해 총상을 입은 몸으로 스위스로 피신하여 영국으로 귀환하였으며 1947년 SOE요원들의 활약상을 그린 다큐영화 “School for Danger”의 주역을 맡기도 하였고 1962년에는 요크 대학교의 교수가 되어 활동하다가 1991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School for Danger

소련의 청진상륙작전(feat. 간악한 쪽바리)

소련의 청진상륙작전(feat. 간악한 쪽바리)

2018년 5월 14일 유튜브의 스브스뉴스 채널은 북한 조선중앙TV의 뉴스를 인용하여 일본 뼈 때리는 북한 어휘력(feat. 간악한 쪽바리)’란 제목의 영상을 올렸다.

 

 

우리나라에 대한 아베정권의 처사를 보고 있으면 일본이라는 표현보다는 쪽○리라는 말이 먼저 입 밖으로 나오는데 북한과의 대화를 위해 연신 추파를 던지는 아베의 모습을 북한은 과연 어떻게 보고 있을지를 단적으로 판단해볼 수 있는 청진상륙작전 중에 있었던 일화를 한 번 알아보까 한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이 있고 난 이후에도 전투가 계속되었던 청진상륙작전은 러시아어(Сэйсинская операция)의 발음을 따서 영어로는 세이신 작전(Seishin Operation)이라 부르며, 1945년 8월 17일 11시 30분경 소련 제1 극동전선군 산하의 제25군이 상륙함으로써 끝을 맺었는데 오늘은 이 과정에서 전사한 소련 간호병의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얍삽하기로는 자웅을 가리기가 힘든 소련과 일본은, 2차 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8월 9일부터 일소중립조약을 파기하고 일본제국에 선전포고를 한 소련이 일본을 침공하면서 소련-일본전쟁이 벌어지게 되는데 오늘 포스팅의 주인공인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는 8월 13일부터 시작된 청진상륙작전 도중에 전사하였으나 사후에 소련-일본전쟁에서 영웅칭호를 받은 유일한 여군으로 이름을 남긴 인물이다.

 

1924년 9월 14일에 태어났으니 청진상륙작전에서 전사했을 때 그녀의 나이는 정확히 20세였다.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 Мария Никитична Цуканова)가 입대한 것은 17세인 1942년 5월이었고 그해 6월 13일, 그녀는 극동으로 파견되어 51소총사단에서 교환수로 근무하였으나 1944년 의료과정을 수료하고부터 소련 태평양함대 제355 해병대대 3중대에서 간호병으로 근무하게 된다.

 

제일 왼쪽이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

 

그리고 1945년 8월 14일, 청진상륙작전이 시작된 다음 날 전투에 투입되어 이틀 동안 52명의 낙하산병을 치료하였고 8월 15일 저녁이 되어서는 점령한 지역에서 방어를 하고 있던 중 어깨에 부상을 입었는데 치열한 일본군의 탈환전에 그녀는 퇴각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박격포의 공격으로 다리에도 부상을 입고 말았다고 한다.

결국 진지에 남은 그녀는 직접 기관총을 잡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히게 되는데, 그녀를 본 일본군들은 기가 막힐 정도로 벙찌고 말았다.

무려 90명에 달하는 일본군을 저승으로 보내버린 사람이 연약한 여군이었고 게다가 간호병이었다는 사실에 눈이 뒤집힌 쪽바리들은 그녀로부터 정보를 캐기 위해 갖은 고문을 다한 뒤, 잔혹하게 죽이고 말았다.

제국주의 쪽바리 넘들은 그녀의 손목을 자른 다음, 목을 자르고 눈을 파냈다고 하는데 다음 날 다시 고지를 재탈환한 소련군에 의해 그녀의 참혹한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하며 그 해 9월 14일, 그녀는 전사한 지 한 달 뒤에 소비에트의 영웅칭호를 수여 받았다.

북한은 2010년,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를 비롯하여 청진상륙작전에서 전사한 소련군 병사 25명을 기리기 위해 청진에 탑을 세웠다고 하는데 유일하게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의 흉상은 별도로 건립하였다 한다.

 

여군을, 그것도 간호병을 그렇게 무참하게 도륙한 일본군의 만행은 글을 쓰는 나도 치가 떨릴 지경인데 북한으로서야 상상 이상일 것임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근본적인 사과도 받지 않고 돈 몇 푼에 위안부할머니들을 짓밟아버렸던 사람들이 새삼 생각이 난다. 아베도 그들도 국민보다는 정치적 욕심이 그 바탕이었을 터. 다가오는 총선이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북한에서는 마리아 츠카노바(Maria Tsukanova)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것이 확실한 모양으로 1988년에는 소련과 합작으로 지친 태양(Утомленное солнце)으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현재 이 영화는 러시아의 사이트에서 무료로 관람할 수 있고 사진은 IMDb(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Internet Movie Database)에서도 볼 수가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의 장례는 어떻게 치렀을까?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의 장례는 어떻게 치렀을까?

2000년에 개봉했던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마지막 장면에서 황제 코모두스와의 결투에서 승리하고 숨을 거둔, 주인공 막시무스를 루실라는 “명예롭게 모셔라!”고 명령합니다.

그렇다면 막시무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 황제의 누이인 루실라의 명령이었으니 비록 허구이긴 해도 예를 갖춘 장례를 치루었겠지요.

그러면, 실제 검투사들이 죽으면 어떻게 장례를 치루었을까요?

사망한 검투사들은 들것에 실려 옮겨졌는데, 이때 사용한 문을 포르타 리비티넨시스(Porta Libitinensis)라 불렀습니다.

Porta는 문을 뜻하고, Libitinensis는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죽음과 장례의 여신인 리비티나(Libitina)를 뜻하는 것으로 죽음의 문을 통해 운반되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죠.

 

비록 결투에서 패배하여 죽게 되더라도, 의연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의 처리는 크게 달랐는데, 로마시민들에게 영웅적으로 비쳐진 검투사들은 사후에 화장된 다음, 친구나 친지들에 의해 수습되었으며, 일부 지방에서는 검투사들을 위한 별도의 묘지를 마련하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명예스럽게 사망한 검투사들은 강에 버려지거나 황무지에 버려졌는데, 이것은 흙이 유골을 덮을 때까지는 영혼이 쉴 수 없다는 당시의 믿음에 기인했던 것으로 모욕적인 처리를 했던 것이죠.

또한 불명예스럽게 사망한 검투사들은 들것에 실려서 운반되지 않고, 땅바닥에 질질 끌려나가는 수모를 당했는데, 이것 또한 비겁함으로 스스로를 더럽혔기 때문에 고인을 들것에 싣고 나가는 것은 사치라는 당시의 인식에서 기인되었던 것이랍니다.

한편, 영화를 보면 주인공 막시무스가 당시 최고의 검투사였던 티그리스와 싸우는 장면에서 호랑이가 막시무스를 공격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영화적인 허구이고, 실제로 로마에서 동물과 검투사들이 싸웠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동물과 싸우는 검투사들은 특별히 베스티아리(bestiarii)라고 불렀으며, 이것도 두 가지 유형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실제로 동물들과 싸우는 사냥꾼이란 의미를 지닌 베나티오(Venatio)라는 검투사들이 있었고, 두 번째로는 검투사가 아닌 동물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하는 형벌을 뜻하는 담나티오 아드 베스티아스(damnatio ad bestias)형을 받은 담나티오가 있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베나티오로는 키르쿠스 막시무스(Circus Maximus) 경기장에서 맨손으로 20마리 이상의 맹수를 죽였다고 전해지는 카르포포로스(Carpophorus)가 있습니다.

베나티오와는 달리, 담나티오는 검투사가 아닌 사형수들이었는데, 담나티오와 함께 로마 사회의 최하층 신분이었던 녹시(Noxii) 또한, 그들의 범죄에 대한 형벌로 검투사들의 사냥감이 되거나, 산채로 맹수들에게 던져져 처참한 죽음을 맞기도 했었습니다.

 

녹시(Noxii)의 유형에는 기독교인, 유대인, 탈영병, 살인자 등이 있었으며, 당시의 로마인들은 이들의 죽음을 지켜보는 것을 즐겼던 것에서 이미 로마의 몰락은 예견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폴란드 화가, 헨리크 시에미라츠키(Henryk Siemiradzki)가 그린, 기독교인 디르케(Christian Dirce)란 작품을 보면, 네로 황제의 명령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한 여인을 들소에 묶어 죽게 만드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녹시를 죽이는 것을 즐긴 이면에는 법과 질서의 지배를 확립하고, 사회 계층 구조에서의 위치를 ​​상기시키기 위해 공포를 이용하려 했던 정치적인 이유도 숨어있는 것이죠.

영화에서도 공포에 휩싸인 사람이 경기장에 나서기 전, 소변을 지리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는데, 검투사들이 느꼈을 공포감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검투사 교육을 받지 않고 경기장에 나서게 되었던 전쟁포로들과 같은 경우에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극에 달하여, 일부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4세기 로마의 정치인이었던 퀸투스 아우렐리우스 심마쿠스는 20명에 이르는 검투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고 하는데, 경기장에 나가 싸울 시간이 되자, 그들은 서로를 죽이기 시작했고, 마지막 남은 사람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여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인 막시무스를 비롯한 검투사들은 사후에 어떻게 장례를 치렀는지와 검투사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에 대해 알아본 이야기를 마칩니다.

제멋대로 해석해보는 실사판 뮬란

제멋대로 해석해보는 실사판 뮬란

악부시집(樂府詩集)에 있는 목란사(木蘭辭)를 근거로 만든 디즈니의 실사 영화 뮬란이 미국 LA에서 열린 월드 프리미어를 통해 언론들의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한 편의 오락영화에 역사성을 부여하고 큰 의미를 따지자는 것은 아니나 중국자본이 헐리우드에 유입되어 제작됨으로써 국적불명의 이상한 영화들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이번에 디즈니에서 만든 실사판 뮬란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국내개봉이 연기가 되었는데 오늘은 뮬란을 보면서 중국의 소수민족과 뮬란으로 대표되는 중국 역사의 여중호걸(女中豪傑)을 일컫는 건괵영웅(巾幗英雄)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성은 화(花)요 이름은 목란(木蘭)인 이 인물은 중국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많은 중국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는데 그 근본은 효(孝)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영화 뮬란의 예고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중국정부의 고민이 여실히 반영되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중국은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정부는 통일된 다민족국가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소수민족과의 갈등이 끊이질 않고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중국정부의 입장은 영화 뮬란에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

2017년 개봉되어 중국의 박스오피스 기록을 모두 갈아치웠던 영화 ‘특수부대 전랑2’의 감독과 주연을 맡았던 우징(Wu Jing)은 만주족 출신으로 당시에도 여진족의 후신인 만주족을 비하하여 중국역사에서 한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악비(岳飛)가 물리친 것이 바로 여진족이었다는 것을 지껄이는 모지란 한족들도 있었다.

바로 이 점이 중국정부가 고민하는 점으로 한족의 영웅이 나오는 영화는 반드시 소수민족과의 갈등에서 승리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점을 부각시키지 않기 위해 입김이 작용하면서 이상야릇한 영화들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맷 데이먼이 주역을 맡았던 영화 ‘그레이트 월(The Great Wall)’로 정체불명의 가상의 적을 무찌른다는 줄거리의 영화를 만들었는데 이후에 쏟아지는 중국영화를 보면 유달리 괴물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은 신장위구르 자치구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는 때와 그 시기가 대략 일치함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화목란(花木蘭), 즉 뮬란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터로 나가는 게 바로 신장위구르 지역에 있던 돌궐족을 무찌르기 위함이었으니 중국정부로선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일이니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뮬란도 어떤 종족인지를 알 수 없는 가상의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막기 위해 전장으로 떠나는 것을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한 제작자인 리드가 밝힌 것처럼 “애니메이션에서 등장했던 무슈를 삭제한 것은 용은 존경의 상징이며 힘과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지 애니메이션과 같이 웃기는 캐릭터는 중국인들에게는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는 설명도 조금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된다.

그보다는 디즈니의 동양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여성해방을 표현하려는 관점의 충돌 때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사판이든 애니메이션이든 영화 뮬란의 주제는 효(孝)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유교사상의 효(孝)는 디즈니가 표현하고 하는 여성해방과는 충돌을 일으키는 것이기에 황제를 상징하는 용보다는 황후를 상징하는 봉황이 뮬란을 지키는 수호자로 더 어울린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여자가 일을 할 때 흩어지는 머리카락을 손쉽게 처리하기 위해 머리에 두르는 수건을 말하는 것이 바로 건괵(巾幗)이고 이 건괵(巾幗)을 쓴 영웅을 건괵영웅(巾幗英雄)이라 하니 그것은 바로 여성을 뜻하는 표현으로 중국에서는 4명의 걱괵영웅을 4대 건괵영웅으로 부르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뮬란의 주인공인 화목란(花木蘭)이다.

 

그리고 나머지 3명의 건괵영웅(巾幗英雄)은 번리화(樊梨花), 목계영(穆桂英), 양홍옥(梁夫人)을 말한다.

번리화(樊梨花)는 고구려의 멸망에 앞장섰던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의 며느리였으나 실존인물은 아니고 설인귀(薛仁貴)의 아들이라고 하는 설정산(薛丁山)과 함께 허구의 인물이며 두 사람의 이야기는 중국소설 설정산정서(薛丁山征西)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는데 번리화(樊梨花)가 더 뛰어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리고 양문여장(楊門女將)의 주인공인 북송의 목계영(穆桂英)과 금나라에 끝까지 대항해 싸웠던 남송의 양홍옥(梁夫人)이 그 나머지 두 명이다.

이들 4명의 건괵영웅(巾幗英雄)의 이름 앞에는 수식어가 붙는데 뮬란의 앞에는 남장을 하고 싸웠다고 해서 남장여장(男裝女將)이라 부르고, 번리화(樊梨花)는 대당나라의 여장수였다고 해서 대당여장(大唐女將)을 붙이고, 목계영(穆桂英)은 양씨 가문의 여장수라는 의미로 양문여장(楊門女將)을 붙이며, 양홍옥(梁夫人)은 금나라와 싸운 여장수란 의미에서 항금여장(抗金女將)을 이름 앞에 붙이고 있다.

그리고 이들 4명의 건괵영웅(巾幗英雄) 중에서 항금여장(抗金女將) 양홍옥(梁夫人) 만이 유일한 실존인물이며 기녀출신이라고 해서 더러는 기녀장군(妓女將軍)이란 수식어를 붙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뮬란에서 쳐들어오는 오랑캐는 역사적으로는 유연(柔然)이란 나라로 보는 것이 시대적으로 맞으며 유연(柔然)은 돌궐에 의해 멸망하는데 넓게는 두 나라 모두 돌궐로 볼 수 있으므로 중국정부로서는 유연이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신장위구르 자치구 문제 때문에 결코 승인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혼자서 해보는 뻘생각이다.

황금보다 비쌌던 염료,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

황금보다 비쌌던 염료,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

왕가(王家)에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영어 숙어(熟語)에는 보라색이란 단어가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Born to the purple=Born into the royal family)

왕족이란 뜻을 나타낼 때 보라색이란 단어가 사용된 역사는 고대로마로부터 시작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이어져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대관식에서 썼던 왕관도 보라색으로 장식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Ⅱ)의 전임자였던 조지 6세(George Ⅵ)의 공식초상화를 봐도 보라색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작고한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가 주연을 맡았던 영화 ‘클레오파트라’에도 보라색 복장을 한 장면이 나온다.

조지 6세(George Ⅵ)의 초상화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한 장면

 

지중해의 페니키아인들이 뮤렉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라는 소라의 일종에서 추출하여 만든 보라색 염료인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은 가격이 어머어마하게 비쌌기 때문에 평민들은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로마황제 중에는 혹시라도 시민들이 보라색 옷을 입기라도 하면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의 왕족과 치안관들이 착용하던 보라색 복장의 전통은 비잔틴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의 통치자들에게로 이어졌고 나중에는 카톨릭의 주교들도 보라색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1464년 교황 바오로 2세는 더 이상 염료를 구할 수 없기 때문에 떡갈나무에 기생하는 곤충에서 취한 적색의 동물성 염료인 케르메스(kermes)와 백반으로 만든 주홍색(scarlet)의 옷을 입도록 선언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페니키아인들이 만들었던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은 얼마나 비쌌던 것일까?

1온스의 티리안 퍼플 염료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25만 개의 뮤렉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가 필요했다고 하는데 다른 재료로 만든 염료와는 달리 오래도록 색이 바래지 않고 지속되었던 것이 왕실이나 귀족들이 선호하였던 이유지만 뮤렉스 브란다리스의 껍질을 깨뜨려 보라색을 생성하는 점액을 추출한 다음 정확하게 시간을 맞추어 햇빛에 노출시켜서 만들어야만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3세기 말과 4세기 초 로마의 황제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은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의 생산을 국유화할 것을 명령했는데 그의 통치기간 동안 티리안 퍼플로 염색한 양털 1파운드(453g)은 금 1파운드의 가치가 있었고 티리안 퍼플 염료 1파운드는 금 3파운드의 가치가 있었다고 한다.

금 3파운드는 1,360g이니 어제인 10월 19일의 국내금시세로 환산하면 티리안 퍼플 염료 1파운드는 9천5백3십 만원 정도에 해당하고 1g의 가격은 21만 원 정도인 아주 값비싼 염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의 망토와 클레오파트라가 거느리던 기함의 돛에도 사용되었던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의 탄생은 페니키아의 전설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헤라클레스와 동일시하는 티레(Tyre)의 주신(主神)이었던 멜카르트(Melqart)는 어느 날 개를 데리고 해변을 산책하고 있었는데 개가 조개를 물어뜯었더니 개의 입과 코가 보랏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본 멜카르트(Melqart)의 연인이었던 님프가 자신의 옷을 물들이기 위해 보라색 염료를 달라고 부탁하자 멜카르트(Melqart)가 이에 응답하여 티레(Tyre)에 뮤렉스 브란다리스(Bolinus brandaris)가 많이 서식하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아래는 네덜란드 화가 테오도르 판 튤덴(Theodoor van Thulden)이 그린 헤라클레스의 개가 발견한 보라색 염료(Hercules’s Dog Discovers Purple Dye)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테오도르 판 튤덴(Theodoor van Thulden)은 루벤스와 공동제작을 했던 경험이 많았던 때문인지는 몰라도 루벤스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탄생한 보라색 염료인 티리안 퍼플(Tyrian purple)은 지중해 근처의 나라들로 급속하게 퍼져나갔고 알렉산더 대왕도 왕권의 상징으로 티리안 퍼플로 물들인 옷을 입었으며 로마공화국에서는 집정관 및 관직자들은 흰색 바탕에 보라색 줄무늬가 있는 토가 프라에텍스타(toga praetexta)를 입었고, 개선장군들은 전체를 보라색으로 염색한 토가 픽타(toga picta)를 입는 것이 허용되었다.

 

토가 프라에텍스타(toga praetexta):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한 장면

 

서두에서 언급했던 왕가(王家)에서 태어났다는 뜻을 가진 영어 표현인 Born to the purple이란 숙어는 동로마 제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황제가 된다는 것은 보랏빛으로 기른다는 것이었고, 황제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보랏빛에서 태어난다(born in the purple) 것이었다.

그러나 표현의 기원은 불분명하며 동로마 제국에서는 보랏빛이 황실의 문서에 사용되었고 보라색 무늬가 있는 옷을 착용하는 것은 주교나 황실의 행정관 외에는 금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왕가(王家)에서 태어났다는 뜻의 영어 표현 Born to the purple이나 Born in the purple은 혜택과 축복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벗어나야 할 한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의 능력과 권력 및 재력에 의해 그들의 미래가 미리 결정지어져 버리는 것은 결코 축복은 아닐 것이며 평범한 삶의 행복을 느낄 수 없도록 길러지는 그들의 인생에서 그들이 한때는 행복으로 가는 열쇠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아빠찬스’니 ‘엄마찬스’니 하는 것들은 로마의 멸망처럼 한순간에 사라질 수도 있는 신기루와 같은 것임을 작금의 우리 사회에서 발견하게 된다.

영화 미스터 존스와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Holodomor)

영화 미스터 존스와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Holodomor)

신뢰도 최악의 한국의 언론과 기자들을 보면서 화가 치미는 것도 이젠 만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

한국의 기레기님들께서는 이런 영화를 좋아하지 않겠지만 오늘 하고자 하는 얘기의 주제는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Holodomor)를 소재로 한 영화이다.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 2019)의 기본 소재이기도 한 홀로도모르(Holodomor)는 1932년부터 1933년에 걸쳐 일어난 인위적인 기근으로 사람을 학살한 것이란 의미로 영어로 Famine Genocide라고 부르기도 한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국가에서는 스탈린이 주도한 계획적인 범죄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2006년 우크라이나 의회는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규정하였다.

영화 미스터 존스에 대한 네티즌의 평점은 8점 이상으로 높은 편인데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의문으로부터 취재가 시작되는 투철한 기자정신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주인공인 가레쓰 존스(Gareth Jones)는 실존인물로 아돌프 히틀러와 인터뷰를 하였고 영국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의 외교고문을 맡고 있었는데 그가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진 기근에 의한 대학살인 홀로도모르(Holodomor)의 취재에 나선 것은 1930년대는 세계가 대공황으로 신음하고 있던 시절이었는데 어째서 소련 만은 윤택한 경제를 유지하고 있을까 하는 단순한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Gareth Jones

표창장이라는 극악무도한(?) 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한 기레기들에게는 중국집에서 어떤 음식을 주문해 먹었는지 하는 것이 중요한 기삿거리가 될지는 몰라도 진정한 기자들은 이렇게 출발한다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영화 미스터 존스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얼마전 조국 교수가 언급했던 여기자가 시방새 이현영이라는년이라고 한다.
조국 관련 가짜뉴스 생산하고는 아침뉴스 메인 엥커자리를 꿰찼다니 기가 막힌다.? pic.twitter.com/KU90QiZHgY

— Mina #이재명_차기대통령 (@issacjosh) August 2, 2020

우크라이나는 20세기 동안 1921년~1923년, 1932년~1933년, 1946년~1947년의 세 번의 기근(飢饉)을 겪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바로 스탈린에 의해 자행되었던 대학살인 홀로도모르(Holodomor)였다.

193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중앙위원회는 식량징발정책을 실시하였는데 당에서 정한 계획대로 곡물이나 육류를 납부하지 못할 경우에는 15개월치를 할당량으로 납부하여야 한다는 강제조항과 함께 식량을 훔친 사람은 사형 또는 10년의 징역형에 처한다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처럼 약탈에 가까운 징발이 실시되자 마침내는 마지막 비축식량마저도 빼앗기게 되었고 급기야 1932년 12월에는 식료품의 매매가 아예 금지되기에 이르렀으며 1933년 초에는 기아(飢餓)가 발생한 지역에서의 이동조차도 금지되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던 도망도 칠 수 없게 된 우크라이나인들은 옥수수 속대와 나무껍질 등 그야말로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고, 그마저도 구할 수 없게 되면서 하나둘 쓰러져갔던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목숨을 잃은 숫자가 적게는 4백만에서 많게는 1,45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사망의 여파로 600만에 이르는 신생아의 출산이 줄어든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든 것의 발단은 우크라이나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을 수출하여 벌어들인 돈으로 소련의 공업발전을 위해 사용하려던 스탈린체제의 경제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근을 인정하게 되면 스탈린의 5개년 공업계획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 되었기에 국제정치 무대에서 명예가 실추되는 것보다는 감추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따라 소련은 끝까지 이런 사실을 부인하였던 것이다.

우크라이나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아는 역으로 반공·반소(反共·反蘇)정서를 불러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군이 동부전선으로 침공하자 그들을 해방군으로 환영하면서 독일군에 자원하기도 했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2006년부터 11월의 넷째 주 토요일을 홀로도모르(Holodomor) 희생자 추모의 날로 정하여 조기(弔旗)를 게양하고 오후 4시에는 각 가정에서 촛불을 켜고 1분간 묵념을 올리고 있다.

 

영화 미스터 존스(Mr. Jones 2019)는 종반을 향해가면서 식육(食肉)을 할 수밖에 없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의 참혹한 실상을 알리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에게 권력자가 정치적인 이유로 기사를 싣지 못하도록 종용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뿐이 아니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권력에 기생하는 언론이 주인공의 기사를 거짓이라고 폄하하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모습도 나온다.

기가 막히게 한국의 현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 영화의 전문가 평에는 씨네 21의 박평식 기자 쓴 한 줄 평, “기레기와 빨대들에게 치욕과 각성을!”이 가장 돋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는 대한민국에서 득세하는 친일파의 잔재들처럼 소련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엄연히 존재해서 제4대 대통령이었던 친러주의자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1930년대의 기근은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학살이라고 할 수 없으며 당시의 기근은 소련연방에 속한 여러 민족에 일어난 공동의 비극이었다.”고 씨불거렸다고 한다.

일제의 침략이 조선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美친넘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을 하는데, 영화로 시작했으니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하나만 더 하면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 랜드 오브 데드(Land Of The Dead, 2005)는 홀로도모르(Holodomor)를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에서는 개봉이 금지되었었다.

2016년 12월 7일, 우크라이나 정부는 홀로도모르(Holodomor)를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학살로 인정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는데 19개 국가에서 이를 승인하였고 10개국에서는 반인륜범죄로 규정하였으나 대한민국은 아직까지 공식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이 땅에서 기레기들과 가짜 뉴스가 없어지기를 바라면서 숨져간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아우슈비츠의 검투사

아우슈비츠의 검투사

2020년 1월 27일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가 해방된 지 75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인 2월 19일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미국의 안보에 위협이 될 수도 있다는 이유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수용하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 의해 1942년에 서명된 날이었다.

독일과 미국은 이에 대하여 피해자와 피해 당사국에 대하여 사죄하고 보상하는 노력을 하고 있는데 아우슈비츠에 대한 역사적 사실들은 잘 알려져 있으니 언급하지 않더라도 미국도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에 대하여 대통령들이 직접 나서 사과를 하고 경제적 보상을 하는 노력을 다하고 있다.

즉 1983년 미국의 ‘전시 시민이주 및 수용에 관한 위원회’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CWRIC(Commission on Wartime Relocation and Internment of Civilians)는 “백악관 행정명령 9066호는 군사적 필요성에 의해서 정당화 될 수는 없는 것으로 강제수용의 결정은 인종차별과 전쟁 히스테리 및 정치적 지도력의 실패로부터 비롯된 것이다.”는 결론을 내리고 생존자들의 피해보상을 위해 1인당 2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연방의회에 권고하게 된다.

 

이에 따라 1988년 8월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공식사과를 하고 2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함과 함께 일본계 미국인들을 강제로 수용한 역사적 사실을 미국의 학교에서 가르치기 위한 12억5천만 달러의 교육기금이 조성되었으며 1992년에는 조지 부시 대통령이 국가를 대표해 사과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본은 사과는커녕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우기는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금년 2월 22일에도 개최하였으니 이를 바라보면서 치미는 분노를 억제할 수가 없다.

1940년 6월 14일 가톨릭 사제와 유대인을 포함한 폴란드의 정치범 728명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이후,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강제로 수용된 공식적인 기록에 대하여는 역사가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나 가장 최근에 발간된 책(999: The Extraordinary Young Women of the First Official Jewish Transport to Auschwitz)에 의하면 1942년 3월 27일, 주로 10대와 20대로 이루어진 997명의 유대인 여성들이 수용되었던 것이 최초의 유대인 집단수용이었다고 한다.

 

999명의 독일여성 죄수들이 999명의 슬로바키아 유대인 여성들을 감시하도록 하는 히믈러의 명령과는 달리 997명의 유대인여성들이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이래 수많은 유대인들이 목숨을 잃어야 했던 아우슈비츠의 이야기는 우리에겐 영화 쉰들러 리스트로 잘 알려져 있다.

죽음의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자들의 이야기 중에서 권투(복싱)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우슈비츠 강제수용해방 75주년을 맞아 금년 가을에 개봉된다는 소식이다.

권투를 소재로 한 아우슈비츠에 관한 영화로는 가깝게는 2013년의 빅터 영 페레즈(Victor Young Perez)가 있는데 이 영화는 세계 플라이급 챔피언을 지냈던 빅터 페레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1943년 10월 10일 아유슈비츠에 수용되어 경험한 실화를 바탕으로 알제리 출신의 자크 와니쉐(Jacques Ouaniche) 감독이 연출하였으나 영화는 폭망하고 말았다.

 

영화 빅터 영 페레즈(Victor Young Perez)

 

실제의 빅토르 페레즈(Víctor Pérez)

 

그리고 2020년 9월에 개봉할 가칭 “아우슈비츠의 검투사(Gladiator of Auschwitz)”를 연출한 폴란드의 영화감독 마치에 바르체브스키(maciej barczewski)는 할아버지가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공식적인 영화제목은 영어로는 챔피언(Champion)을 뜻하는 폴란드어인 미스츠(Mistrz)가 될 것이라고 한다.

영화는 영국의 잭 페어웨더(Jack Fairweather)가 2019년에 발간한 책(The Volunteer: The True Story of the Resistance Hero Who Infiltrated Auschwitz)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책의 제목에 지원자(Volunteer)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들어간 이유는 책의 주인공인 폴란드의 기병대장이었던 필레츠키(Pilecki)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저항운동을 위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계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비톨트 필레츠키(Witold Pilecki)와 손잡고 저항운동에 동참했던 폴란드인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인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란 인물이다.

1917년 4월 8일 바르샤바에서 태어난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는 20살에 밴텀급으로 권투를 시작하였으며 2차 대전의 시작으로 독일군이 바르샤바로 진군하자 포병에 입대하여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폴란드가 독일에 항복을 하자 프랑스로 가서 저항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헝가리와 유고슬라비아의 국경부근에서 체포되어 1940년 6월 14일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었던 728명 중의 한사람에 포함되게 된다.

아우슈비츠에 수감된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는 수용소의 독일군들을 위한 오락행사로 마련했던 권투경기에 나서게 되었는데 제일 첫 번째로 겨루었던 상대는 독일의 복싱대회에서 미들급 2위를 차지한 경력이 있는 발터 듀닝(Walter Dünning)이란 사람이었다.

당시 두 사람의 체중은 발터 듀닝(Walter Dünning)이 70㎏,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가 40㎏이었다고 하니 결과는 불 보듯 뻔한 것이었지만 예상과는 달리 타데우스는 발터를 이기고 부상으로 받은 빵 한 조각과 마가린을 동료 수용자들과 나눌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모두 37차례의 경기를 치루었던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는 네덜란드계 유대인이었던 린 샌더스(Leen Sanders)에게 유일한 패배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와의 재대결에서는 승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보다 10살이 많았던 린 샌더스(Leen Sanders) 또한 전직 권투선수였는데 네덜란드의 미들급 챔피언을 7차례나 방어한 전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또한 부상으로 받은 음식들을 동료 수용자들과 나누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2018년, 네덜란드복싱협회는 그를 전쟁영웅으로 기념하는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아우슈비츠에서 37회의 경기를 치러 단 한 번의 패배만을 기록하였던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는 함부르크에서 남동쪽으로 15㎞ 떨어진 곳에 있던 노이엔감메(Neuengamme)수용소로 이송된 뒤에도 20차례나 더 경기를 가졌다고 한다.

그 뒤 우리에게는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가 수용되었던 베르겐 벨젠(Bergen-Belsen)수용소로 이송되어 수용생활을 하던 중, 1945년 4월 15일 영국군에 의해 해방된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는 폴란드의 제1기갑사단에서 스포츠 코치로 활동하다가 체육교사가 되어 청소년들을 위해 헌신하였다고 한다.

1991년 4월 17일, 세상을 떠난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만들어지는 것은 이번에 폴란드의 영화감독 마치에 바르체브스키(maciej barczewski)가 만드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타데우스와 그의 딸 엘레노라

 

1962년에 슬로바키아의 영화감독 피터 솔란(Peter Solan)이 복서와 죽음(Boxer and Death)이란 제목으로 타데우스 피에트르지코브스키(Tadeusz Pietrzykowski)의 아우슈비츠에서의 생활을 영화로 만들었고, 이에 영감을 받았던 미국의 로버트 영( Robert M. Young)감독은 또 다른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로서 권투경기를 가졌던 그리스계 유대인 살라모 아루치(Salamo Arouch)의 이야기를 소재로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트라이엄프란 제목으로 국내에 개봉되었던 영화는 로버트 영( Robert M. Young)감독이 연출하고, 우리에게 친숙한 배우인 윌리엄 데포가 주연을 맡았으나 흥행은 쪽박을 차고 말았다.

 

이번 가을에 개봉되는 영화도 작품성이나 흥행 면에서는 그리 큰 기대가 되지는 않으나 아우슈비츠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다는 점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이런 영화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려는 일본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창작자들의 상상력과 활동을 지원하는 정부차원의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패망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던 조선인들을 태웠던 귀국선 우키시마호의 침몰사건은 아직도 그 진상이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일본은 이와 관련한 자료의 공개를 지금까지도 하지 않고 있다.

언젠가 일본의 만행을 소재로 한 영화가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오르게 된다면 수상을 저지하기 위한 일본넘들의 발악은 극도에 달할 것인데 하루빨리 그런 날이 왔으면 좋겠다.

 

아우슈비츠의 여성 도살자들

아우슈비츠의 여성 도살자들

사진은 아우슈비츠와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근무하면서 인체실험을 실시했던 독일의 헤르타 오버호이저(Herta Oberheuser)가 법정에서 20년의 징역형을 선고 받는 모습이다.

어제 포스팅 했던 아우슈비츠의 검투사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것처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집단으로 수용된 것이 언제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으나, 1940년 6월 14일 가톨릭 사제와 유대인을 포함한 폴란드의 정치범 728명이 최초로 아우슈비츠에 수용된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이런 사실에 대해 홀로코스트와 관련한 사회활동과 병행하여 활발한 저술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 헤더 듄 맥아담(Heather Dune Macadam)이 작년 연말에 아우슈비츠에 공식적으로 수감된 최초의 유대인들은 997명의 슬로바키아계 유대인 여성들이었다는 내용의 책을 발간하였는데 제목은 “999: The Extraordinary Young Women of the First Official Jewish Transport to Auschwitz”이다.

 

이 책은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인 에디스 그로스먼(Edith Friedman Grosman) 부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는데 본문의 내용을 보면 수감자들에게 지급된 옷은 전장에서 사망한 소비에트 군인들의 피에 젖은 군복이었고 신발은 얇은 천으로 다리에 묶은 나무판자였다고 한다.

추운 겨울 신발도 없이 생활해야 했던 유대인 여성수감자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야 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이 내용의 이면에는 유대인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독일경비원들이란 존재가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1942년부터 여성경비병들이 아우슈비츠와 마자네크(Majdanek) 강제수용소에 배치되기 시작했었는데 전체 55,000명의 경비병 중에서 여성의 숫자는 3,500명 정도에 달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수용소의 경비업무와는 무관한 교사, 미용사들을 차출하여 강제수용소의 간수임무를 맡겼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SS는 21세~45세까지의 독신여성들로 사상이 투철하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모집된 여성들은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Ravensbrück concentration camp)에서 적게는 1개월, 길게는 6개월 동안 교육을 받은 다음 각 수용소에 배치되었는데 교육의 주된 내용은 수감자들을 처벌하는 방법과 노동자들의 작업속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남성 경비병력에 비해서 조금은 관대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야말로 도살자라는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유대인 수용자들을 학살한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 만들(Maria Mandl)이다.

예전 소련군의 발표에 따라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는 모두 400만 명이고 이 가운데 약 250만 명이 유대인라고 알려져 왔으나 최근에 와서는 100만 명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된 100만 명의 유대인들 중에서 절반에 달하는 50만 명의 수감자들을 가스실에서 처형하도록 하는 서류에 최종적으로 서명한 인물이 바로 마리아 만들(Maria Mandl)이었다.

 

아우슈비츠 내에서 야수(The Beast)라 불렸던 마리아 만들(Maria Mandl)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는지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유대인 여성에게 지루한 업무를 담당하도록 지시한 마리아 만들(Maria Mandl)은 자기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면 유대인 여성을 즉시 처형했으며, 수용자들이 줄을 서야할 때면 겁에 질린 수용자들 중에서 반드시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는 수용자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자신을 바라본 수용자를 처형했다고 한다.

결국 미군에 의해서 체포된 그녀는 폴란드에 인계되었고 크라쿠프(Kraków)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1948년 1월 24일 36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마리아 만들(Maria Mandl)보다는 유대인 희생자들의 죽음에 적게 관여하기는 했지만 잔인하기로는 버금가는 여성이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이르마 그레제(Irma Grese)다.

1900년대 영국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가장 어린 여성이었던 이르마 그레제(Irma Grese)는 1945년 12월 13일, 22살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재판에 증인으로 참석했던 사람들이 밝힌 바에 따르면 이르마 그레제(Irma Grese)는 굶주린 개들이 수용자들을 공격하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희생된 사람들의 가죽으로 만든 전등갓을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잔인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하여 그녀는 아우슈비츠에서 금발의 미녀, 또는 금발의 천사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한편 아우슈비츠에서 간수로 근무했던 독일여성 엘프리드 린켈(Elfriede Rinkel)은 1950년대 후반 미국으로 가서 살았으나 2006년에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Ravensbrück concentration camp)에서 근무할 때 개가 수용자들을 공격하도록 시켰다는 혐의로 추방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홀로코스트의 학살자들에 대한 책임을 규명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아직도 친일파들이 득세하는 대한민국을 보면 암울하기만 할 따름이다.

무궁화 삼천리는 몇 km일까?

무궁화 삼천리는 몇 km일까?

이틀 전에는 낚싯대의 길이를 나타내는 칸(間)이란 용어의 유래에 대하여 살펴보면서 1칸=1.8미터로 정해진 것은 경술국치 이후 일본의 강제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란 점을 알아보았습니다.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고유의 척관법이 있었는데 고종 6년인 1902년 10월에 척관(척근)의 단위를 미터법에 맞추어 새롭게 정하면서 1자(尺)를 20㎝로 하고, 1보(步)는 6자인 1.2m, 1칸(間)은 10자인 2m로 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강제로 일본의 척관법을 사용하게 되면서 1자(尺)는 30.3㎝, 1칸(間)은 6자인 1.81m미터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광복이 되고 6·25전쟁과 정치적 혼란기를 거쳐 1961년 5·16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은 1964년 1월부터는 미터법을 국가 표준 단위로 사용하는 것을 공식화 했는데, 22대 상공부장관을 지냈던 박충훈이 중앙계량국을 통해 규정한 도량형은 대한민국의 애국가를 부정하는 크나큰 오류를 범하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습니다.

왜 중앙계량국이 규정한 도량형이 애국가를 부정하는 것인지를 지금부터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의 준공식장에서 처음 부른 애국가는 안익태 선생이 작곡을 하기 전까지는 “올드 랭 사인”의 곡조에 따라 불렀고, 작사자는 아직까지 미확인으로 남아는 있으나 도산 안창호 선생과 윤치호 선생 두 분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이 세간의 정설입니다.

이런 애국가 가사의 후렴부에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란 구절이 있는데 1964년 쿠데타 정권에서 규정한 도량형에 따르면 대한민국 삼천리금수강산은 12,000㎞에 달해 거의 서울에서 미국 뉴욕까지의 거리에 해당하는 거리가 됩니다.

지금 다음이나 네이버의 단위환산을 보면 1리(里)는 0.39㎞라고 나오는데 박정희 정권에서 펴낸 도량형은 이것의 10배인 3.9㎞라고 규정을 하였습니다. 당시 일반에서 사용하던 통념과도 맞지 않는 이런 기준을 그들은 왜 제정했던 것일까요?

제2공화국에서 제정한 기준, 1리(里)=3.9㎞는 일본의 척근법과 일치하는데 이것은 친일(親日)의 결과일까요? 아니면 무지의 소치였던 것일까요?

조선시대의 척근법으로는 황종척, 주척, 영조척, 조례기척, 포백척 등이 있었는데 어제 “낚싯대 1칸은 왜 1.8미터일까?”란 글에서 언급했던 황종척은 세종대왕 재위 기간에 박연이 만든 것이지만 주로 사용되었던 곳은 악기의 제조와 음률의 교정, 그리고 시신을 검시할 때였으며 거리를 표시할 때에는 주로 주척(周尺)을 사용했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한국의 도량형”이란 책을 보면 조선시대의 각종 척근법의 1척(尺)을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황종척은 34.7㎝, 영조척은 31.2㎝, 조례기척은 28.6㎝, 포백척은 46.7㎝이며 일반적으로 거리를 표시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였던 주척은 20.7㎝로 되어 있고 이런 주척의 사용은 대한제국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간에서 널리 사용하던 주척에 기반 하여 고종 6년, 1902년 10월에 도량형 규칙을 미터법에 맞게 재 정의하면서도 1리(里)를 420미터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주척에 기반한 대한제국의 도량형에 의하면 “무궁화삼천리”는 1,260㎞에 달하는데 정확하게 2천7백 또는 2천8백리라고 하면 음률에 맞지 않으니 “무궁화삼천리”라고 표현한 것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1910년 일본의 강제합병 이후 일본식 척근법의 단위를 사용하면서부터 1리(里)의 거리는 3.9㎞가 되었으나, 일본에서도 조선의 10리(里)가 일본의 1리(里)에 해당한다고 했던 것을 굳이 일본의 단위를 그대로 사용했던 제2공화국의 규정은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일까요?

고종이 도량형 규칙을 새롭게 만든 1902년의 규정에 의하면 삼천리금수강산은 1,260㎞가 되는데 순종 3년인 1909년에 일본의 강압으로 제정된 일본식의 척근법을 그대로 따른 1리(里)를 적용하여 “무궁화삼천리”를 12,000㎞(대략)로 만든 박정희 정권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이었을까요?

 

대한제국 순종 3년이던 1909년 9월 21일에 개정된 도량형법은 1926년 2월 27일 “조선도량형령”이 공포됨으로써 공식적으로 일본식 미터법이 사용되게 되었지만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이후에도 국민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주척(周尺)에 기반한 1리(里)=400미터를 부정하고 일본의 것을 그대로 따른 1리(里)=3.9㎞란 기준을 만든 쿠데타 세력들의 태도는 무지의 소치라기보다는 자신들의 친일(親日)성향에 따른 결과물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는 우리나라 헌정 사상 초유로 대법관 2명의 구속영장실질심사가 있었습니다. 기각될 것이란 예상은 했으나 국민의 정서와는 맞지 않는 결정으로 또 한 번 사법부의 불신을 초래하게 만들고 말았으며, 일본의 강제징용에 대한 재판에 박근혜 정권과 양승태 사법부 및 국내 최대의 로펌인 김앤장이 서로 공모(?)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씁쓸하다 못해 분노가 치밉니다.

과연 그들은 대한민국의 행정부요 대한민국의 사법부였는지? 일본의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면서 조선(朝鮮)의 제도와 관습을 부정하려고 했던 5·16세력과 무엇이 다른지? 매서워진 한파와 함께 읽은 아침뉴스를 보고 주절거려보았습니다.

춥지만 힘들 내시고, 경기가 어렵고 경제사정이 좋지 못하더라도 주변을 살피고 온정을 나눌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KTX의 궤간(軌間)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과 KTX의 궤간(軌間)

tvN의 인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주인공 고애신(김태리 역)이 미국인 로건을 암살할 때 창문을 열어준 기생 소아(오아연 역)가 정체가 탄로나게 되어 탈출을 할 때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펼쳐 일본인들의 이목이 제물포로 쏠리게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극중에 나오는 것이 한국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입니다.

 

경인선은 미국인 모스(Morse)가 1896년 3월 29일 획득한 서울~인천 간의 철도부설권을 일본이 넘겨받아 1899년 9월 18일 인천~노량진 간의 부분개통을 하고 영업을 시작하였는데 개정되기 전까지 철도의 날이었던 9월 18일은 바로 이날을 기념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는데 금년 2018년 5월 8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로 청와대에서 열린 제20회 국무회의에서 철도국 창설일(1894년 6월 28일)로 변경하는 안이 의결되어 철도의 날이 6월 28일로 새롭게 지정되게 되었습니다.

경인선이 처음으로 부설될 때의 궤도 간격은 표준궤에서 러시아의 간섭에 따라 러시아에서 쓰는 광궤로, 다시 일본의 압력을 받아 좁은 협궤로 바뀌었다가 마침내 원래의 표준궤로 정착되게 되는데 광궤를 협궤로 바꾸는 것도 일본이었고, 협궤로 바꾼 것을 다시 표준궤로 바꾼 것도 일본이었는데 그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화물수송에 불편하다는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침략을 위한 그들의 속셈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으로 지배를 받았던 대만과 남부 사할린에 부설한 철도의 궤간은 모두 협궤인 것에 비해 유독 한국에 부설한 철도만 표준궤인 것을 생각하면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노라면 현재의 정세가 주변국들의 이권다툼의 장이 되었던 구한말의 시대상과 겹치는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위정자들의 파렴치한 행동 또한 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되어 씁쓸하기만 합니다.

다들 아는 것처럼 일본의 철도는 협궤입니다. 일본의 궤간이 협궤인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들이 있으나 가장 설득력이 있는 것은 공사기간을 단축할 수 있고 건설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는 경제적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서구열강들이 식민지에 건설한 철도의 대부분은 협궤를 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인 이유로 대부분의 식민지에 부설하던 협궤가 아닌 표준궤를 일본이 한국의 철도에 부설한 것은 러시아의 세력을 견제하고 만주의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야욕의 산물인 것이며 이런 이면에는 영국이라는 나라와 맺은 영일동맹이 자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철도를 얘기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伊藤博文)라는 사람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최초의 철도인 도쿄의 신바시와 요코하마 사이의 구간을 개통(1872년 10월 14일)시키는 사업에 오쿠마 시게노부(大隈 重信)와 함께 책임을 맡았으며 비록 러일전쟁으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악화되기는 하였지만 양국의 이득을 위하여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러시아의 재무대신과의 논의 차 1909년 방문했던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경인선의 궤간(軌間)은 표준궤에서 광궤로, 광궤에서 협궤로 바뀌었다가 다시 표준궤로 변경되었는데 표준궤로 최종 변경되게 되는 것은 경의선 철도가 건설되면서 부터였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남하하는 러시아에 맞서 만주의 지배권을 확대하려던 일본의 야심은 결국 러일전쟁을 야기하게 되는데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미국과 영국은 일본의 전비(戰費)를 위한 차관을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이전에 영국과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을 맺었으며 그 이후 1904년 2월 8일에 러일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 일본으로부터 전쟁물자를 수송하기 위하여 경성(현재의 서울)에서 신의주까지의 철도 건설을 계획하면서 선로의 폭, 즉 궤간(軌間)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의견은 공기의 단축과 비용의 절감이란 이유로 협궤로 하자는 것이었지만 일본의 속셈은 조선을 넘어 세력을 넓히는 것이었으므로 당시 동맹을 맺었던 영국이 청나라에 건설한 표준궤와 동일한 선로를 건설하는 것이 군수물자의 수송에 유리하다는 판단에 따라 1,435mm의 표준궤로 결정되었던 것입니다.

제73주년 광복절 기념일을 맞은 오늘 한반도를 둘러싼 세계정세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는 형국이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국민을 설득할 정도의 정당한 사유 없이 영장의 발부를 거부하고 있는 사법부, 특활비의 폐지를 시간만 끌다가 여론에 못 이겨 결정하면서도 꼼수를 부리는 국회, 대통령 한 사람만이 바뀌었을 뿐인 행정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대한민국의 총기휴대가 법으로 금지된 것이 천만다행한 일이란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고애신(김태리)과 같은 의병이 쏘는 총소리를 현재를 사는 우리가 들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저만의 것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