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10개국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10개국

CNN은 금년 3월 9일자 보도에서 2009년 “미법무성 사법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Justice)”의 보고서를 인용하여 미국의 민간인들이 보유하고 있는 총기의 숫자는 약 3억 1천만 정에 달하는 것으로 발표하였다.

또한 10년 전의 조사이긴 하지만 현재로서는 가장 최근의 자료인 2007년 스위스의 “Small Arms Survey”가 발표한 바에 의하면 전 세계에서 총기를 소유한 민간인들은 모두 6억 5천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세계에서 군인과 민간인을 합하여 인구 100명당 총기보유 숫자가 가장 많은 미국은 2위인 예멘보다도 62%나 많은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장 적은 100명당 0.1정을 보유하는 튀니지보다는 무려 890배나 많은 보유량을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발생하는 총기사망사고도 사고사나 자살 및 살인을 모두 합하여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치를 보여주고 있다.

 

2015년을 기준으로 총기에 의해 사망한 미국인은 모두 1만3,286명이나 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망자는 모두 140만 명에 이르고 있으며 “단일 사건으로 4명 이상을 살해하거나 부상을 입힌 사건”으로 정의하고 있는 총기 난사사건이 2013년 이후 일어나지 않은 미국의 도시는 텍사스의 오스틴이 유일하다.

다행히도 대한민국에서는 총기소유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는데 CNN에 의하면 인구 100명당 총기보유 숫자가 가장 많은 10개국과 가장 적은 10개국은 아래의 그림과 같다.

그러나 인구 100명당 보유하는 총기의 숫자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쉬운 나라라고는 할 수 없는데 “GUNS & AMMO”라는 곳에서 2014년에 발표한 “10 Best Countries for Gun Owners”를 인용하여 어떤 나라들이 총기소지가 비교적 쉬운지를 알아보자.

 

▶ 10위 온두라스

온두라스는 2009년 쿠데타로 문민정부가 무너지고 나서 범죄가 급증하고 총기소유에 대한 단속이 느슨해졌는데 기본적으로 온두라스는 총기소유를 금지하지 않으며 단지 공공장소에서의 휴대만 금지하고 있는데 정부에서 허가를 받은 가게에서 최대 5정까지 총기를 구입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불법총기류의 숫자도 85만 정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9위 핀란드

핀란드는 사냥문화가 남아있는 나라이기 때문에 총기소유에 대한 인식은 관대한 편이지만 특정 총기류에 대해서는 규제가 엄격한 편이어서 반자동권총의 소유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금지하고 있다.

핀란드에서는 총기를 구입할 때도 면허가 있어야 하고 개별 총기에 대한 별도의 면허도 있어야 한다. 또한 모든 총기는 집에 보관해야 하며 호신용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 8위 세르비아

세르비아의 총기보유율이 높은 이유는 규제가 느슨한 것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1990년 유고슬라비아 붕괴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코소보와 치룬 4번의 전쟁도 민간인의 총기소유가 많은 이유이다.

그러나 세르비아정부는 총기규제를 강력하게 시행하지 않고 있으며 단지 권총의 소지에만 아주 까다로운 규제를 받도록 하고 있을 뿐이어서 기타의 총기류에 대한 허가를 취득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지만 탄환의 규제는 아주 엄격하여 매년 60발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 7위 스웨덴

유럽은 사냥문화가 강하게 남아있어 총기소유에 대한 거부감이 상대적으로 적으며 스웨덴에서는 반자동식을 소지할 수도 있다. 총기소유를 허가하지 않는 건수는 매년 1,000건 정도이나 항소하면 대부분 허가되는 편이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도 호신용으로 총기를 보유하는 것은 금지하고 있고 18세 이상이면 총기소유허가를 신청할 수 있다.

총기를 소유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신청할 때 밝혀야 하며 스포츠선수용은 면허취득 전에 6개월의 클럽활동이 필수요건이 되며 사냥용으로 보유하려면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데 만일 음주운전의 전과가 있다면 총기를 보유할 수 없고 스웨덴에서는 사냥용 6정을 포함하여 최대 10정까지 총기를 보유할 수 있다.

 

▶ 6위 캐나다

캐나다가 총기소유가 쉬운 나라라고 하면 갸우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랫동안의 사냥문화가 남아있고 총기를 돌려가며 사용하는 원주민문화도 아직 유지되고 있어서 총기사용을 규제하려는 정부의 움직임은 지금까지 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곤 하였다.

그러나 현재 캐나다에서는 2013년 이후 총기범죄가 30%나 증가하고 범죄조직에 연루된 총기살인이 75%나 급증하는 등 많은 사회적인 문제를 낳게 되자 “저스틴 트뤼도(Justin Trudeau)”총리가 총기소유를 규제하는 법률의 제정을 준비하고 있다.

 

▶ 5위 노르웨이

2011년 테러리스트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Anders Behring Breivik)”가 69명을 총으로 살해하고 8명을 차량폭탄으로 사망케 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총기규제를 강력하게 실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지만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여론을 이기지는 못했다.

노르웨이는 경찰도 총기를 휴대하지 않을 정도로 안전한 나라이지만 사냥을 즐기는 문화가 있어서 주로 겨울철 사냥시즌에만 총기를 사용하며 허가를 받으면 AR-15도 보유할 수 있다.

 

▶ 4위 파나마

총기소유 허가를 얻게 되면 사용하는 탄환의 숫자에 대한 규제도 받지 않으며 휴대에 관한 규제도 받지 않는다. 그러나 총기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혈액과 소변검사를 통해 마약류 복용에 관한 검사를 거쳐야 하고 기간도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중남미 국가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파나마는 총기를 규제하고 있는 영국보다 적은 3% 정도만 총기를 보유하고 있다.

 

▶ 3위 스위스

군인을 포함하여 100명당 총기 보유가 46정으로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는 스위스는 2010년까지는 국방을 위해 성인남성은 1정 이상의 총기를 가정에 보유해야 했다.

그래서 인구의 30%가 총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1997년에 제정된 법률에 의하여 18세 이상은 허가 없이도 단발 및 볼트액션식의 소총을 구입할 수 있다. 그러나 허가 없이 구입할 수 있다고 해도 만일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서 범죄에 사용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다.

 

▶ 2위 체코

총기규제를 강화하려는 EU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테러와 국가안보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체코의회는 총기소유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지 않던 헌법을 수정하여 이를 2017년에 통과시켰다.

이로 인하여 반자동소총의 소지도 가능하게 되었으며 사냥용뿐만이 아니라 호신용으로도 소지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되었고 2개의 권총도 허가만 취득하면 휴대할 수 있게 되었다.

 

▶ 1위 미국

미국의 총기소지에 관한 이야기는 너무 많은 정보들이 있어서 자세한 얘기는 생략하고 그에 따른 부작용만 언급하자면 서두에서 예를 들었던 것과 같이 2015년을 기준으로 총으로 사망한 미국인은 모두 1만3,286명이나 되고 1968년부터 2001년까지의 사망자는 모두 140만 명에 이르고 있다.

또한 2012년의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서 발생하는 살인사건 중에서 총기를 사용한 것이 60%에 달하는데 이것은 영국의 10%, 호주의 18.2%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수치이다.

매일 36명이 총으로 인해 사망하는 미국에서는 전체 인구의 6% 밖에 되지 않는 흑인남성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에 달하고 흑인에 대한 공권력의 지나친 대응을 우리는 자주 언론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유아에 의한 발포사건이 일어나고 2015년에만 총기로 사망한 어린이가 756명에 달하는 미국은 결코 자유롭지도, 정의롭지도, 안전하지도 않은 나라라고 나는 항상 생각하고 있다.

German Chocolate Cake은 독일 케이크가 아니다.

German Chocolate Cake은 독일 케이크가 아니다.

일본 오키나와를 관광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맛집 중에는 두 개의 스펀지 케이크(sponge cake) 사이에 생크림을 넣고 맨 위에 코코넛 필링(Coconut Filling)을 바른 저먼 초컬릿 케이크로 유명한 제과점이 있다.(정확히는 제과점이 아니라 식료품가게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그런데 케이크의 이름에서 보듯이 German Chocolate Cake를 다음과 네이버에서 검색하면 많지는 않지만 독일 또는 독일식 케이크라는 말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케이크는 독일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만들어진 곳도 독일이 아닌 미국으로 케이크의 이름을 굳이 한국어로 번역한다면 영어 그대로 저먼이라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German Chocolate Cake의 저먼은 사람의 이름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미군기지에서 일을 하던 지미(Jimmy)라는 별명을 가진 일본인이 미군들이 즐겨 먹던 케이크를 소개하면서 오키나와의 명물이 되었으며 지금은 지미(Jimmy′s)라는 이름의 식료품 가게에서 판매되고 있다.

 

오키나와의 미군들이 즐겨 먹는다는 저먼 초컬릿 케이크는 미국에서 6월 11일을 기념일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하지만 서두에서 밝힌 바와 같이 독일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1852년 사무엘 저먼(Samuel German)이란 영국계 미국인이 당시 근무하던 American Baker’s Chocolate Company에서 개발했던 Baker′s German′s Sweet Chocolate에서 유래한 것이 오늘날의 저먼 초컬릿 케이크다.

오늘날 미국인들이 기념일로 지정할 정도로 즐겨 먹게 된 동기는 텍사스주의 댈러스에 살던 조지 클레이(George Clay)란 주부가 1957년 6월 3일 달라스 모닝 뉴스에 관련 레시피를 기고한 것을 당시 Baker′s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던 제너럴 푸드(General Foods)가 보고 그 레시피를 미국 각지의 신문에 소개하면서부터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뒤 German′s Sweet Chocolate에서 소유격 S를 빼버리는 실수를 범한 표현이 사용되면서 우리가 독일 또는 독일식 케이크라고 혼돈할 수 있는 지금의 German Chocolate Cake이란 표현이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저먼씨의 레시피를 이용하여 만든 케이크는 독일 케이크가 아니며 현재 베이커즈 초컬릿(Baker’s Chocolate) 브랜드를 소유한 크래프트 하인즈(The Kraft Heinz Company)에서는 사무엘 저먼(Samuel German)의 업적을 기려 새로운 초컬릿의 이름을 Baker’s German’s Sweet Chocolate으로 명명하였으며 이 제품은 아마존에서도 구입이 가능하다.

세계최고의 주방용 칼,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세계최고의 주방용 칼,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낚시를 오래 하다 보면 잡은 물고기를 직접 손질하게 되고 실력이 늘면서는 회를 뜨기도 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칼로는 데바라고 하는 뼈를 자르는데 주로 사용하는 칼과 일명 사시미칼이라고 부르는 회칼이 있다.

일본의 회칼은 관동과 관서지방의 것이 서로 이름과 모양이 다른데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은 칼끝이 뾰족한 관서지방의 칼로 야나기바(柳刃)라고 부르며, 관동지방의 것은 칼끝이 네모난 것이 특징으로 타코히키(蛸引き)라고 부른다.

물론 나는 전문가가 아니기에 저렴한 칼을 사용하고 있지만 세계에는 한 자루에 1백만 원이 넘는 주방용 칼도 있어서 오늘은 이 얘기를 해볼까 한다.

요리사들이 세계최고의 칼이라고 뽑는 미국의 밥 크레이머(Bob Kramer)가 만드는 크레이머 칼(KramerKnives)은 누구나 쉽게 구매할 수가 없고 사전등록을 통한 경매로만 구입할 수 있다고 하는데 밥 크레이머(Bob Kramer)와 독일의 유명한 나이프 제조업체인 쯔윌링(Zwilling JA Henckels)이 손을 잡고 만든 것이 바로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시리즈이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에 수십만 원을 훌쩍 넘을 정도의 가격이어서 사볼 엄두는 전혀 나지 않는다^^

 

밥 크레이머(Bob Kramer)

 

요리사 출신의 밥 크레이머(Bob Kramer)와 손잡고 칼을 만드는 독일의 쯔윌링(Zwilling JA Henckels)은 졸링겐(Solingen)에 본사를 두고 있는 1731년에 설립된 기업으로서 회사의 이름은 창업자인 피터 헹켈스(Peter Henckels)와 그가 1731년 6월 13일에 등록한 로고인 쌍둥이를 뜻하는 쯔윌링(Zwilling)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시리즈가 만들어지는 곳은 미국도 아니고 독일도 아닌 일본의 기후현 세키시에 있는 쯔윌링(Zwilling)의 일본공장이라고 한다.

기후현 세키시는 가마쿠라 시대에 원조인 모토시게(元重)가 큐슈에서 건너와 칼을 만들면서부터 칼을 만들기에 이상적인 풍토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 알려져 수많은 도공(刀工)들이 모여들었고 무로마치 시대에는 그 숫자가 300명을 넘었다고 한다.

이처럼 유서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쯔윌링(Zwilling)의 일본공장에서 만들어지는 밥 크레이머 유로 스테인리스 시리즈에도 밥 크레이머(Bob Kramer)가 만드는 칼의 트레이드마크와도 같은 쉐브론 다마스커스 패턴이라고 하는 물결무늬가 있다.

이것은 101겹으로 층을 쌓으며 만든 스테인리스의 적층으로 인해서 생기는 것이라고 하며 칼의 손잡이는 미국의 웨스팅하우스에서 개발한 마이카르타(Micarta)를 사용하여 만든다고 하는데 이 칼의 손잡이에 새겨진 일본문양과 칼에 각인되어 있는 Made in Japan이란 문구를 보니 샘이 나는 것은 숨기지를 못하겠다.

정정당당(正正堂堂)의 어원

정정당당(正正堂堂)의 어원

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와 팔렘방에서 열리는 제18회 아시안게임이 오는 8월 18일에 개막되고 그보다 먼저 광복절인 오늘 바레인과의 축구 예선전이 열리게 됩니다.

스포츠경기에 언제나 따라붙는 단어 중에는 “정정당당(正正堂堂)”이란 것이 있는데 이 말이 작금의 한국사회와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방송매체의 탐사보도를 통해 대기업에 의해서 자행되는 중소기업의 기술탈취에 관한 얘기를 접하곤 하는데 그럴 때면 저는 우리나라의 대기업들도 펩시콜라의 일화를 보고 무엇인가 배우기를 바라곤 합니다.

2006년 코카콜라의 직원이었던 조야 윌리엄스(Joya Williams)가 펩시콜라에 금전을 제공하면 코카콜라의 제조법을 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는데, 일반의 예상과는 달리 펩시콜라는 코카콜라의 경영진에게 이 사실을 알림과 동시에 FBI에 신고를 함으로써 회사의 기밀을 팔아넘기려던 조야 윌리엄스(Joya Williams)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가고 10년의 징역형을 받게 된 유명한 사건이 있습니다.

 

Dirk이란 이름으로 펩시콜라에 보낸 편지

 

코카콜라의 제조법이 보관된 금고 앞의 CEO 무타르 켄트(Muhtar Kent)

 

우리나라의 대기업들이 이런 제안을 받게 된다면 그들도 펩시콜라와 같은 행동을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저의 생각도 여러분들의 생각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아무튼 공정(公正)과 정의(正義)를 발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이지만 제18회 아시안게임의 개막을 앞두고 정정당당(正正堂堂)이란 말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봅니다.

태도나 수단이 공정하고 떳떳하다는 뜻을 가진 정정당당(正正堂堂)이란 단어는 손자병법 제7편 군쟁편에서부터 유래된 말입니다.

 

손자병법의 제7편 군쟁편에는 “無邀正正之旗(무요정정지기), 勿擊堂堂之陣(물격당당지진), 此治變者也(차지변자야).”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석하면 “깃발이 잘 정렬된 군대를 맞아서는 싸우지 말 것이며(無邀正正之旗), 기세가 당당하게 전열을 갖춘 군대를 공격하지 말 것이니(勿擊堂堂之陣), 이렇게 함으로써 상황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此治變者也).”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유래되어 정정당당(正正堂堂)은 정정지기당당지진(正正之氣堂堂之陣)의 준말이라고도 사전에서는 설명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정정당당(正正堂堂)은 다시 말하면 전쟁에 이기는 방법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전적인 의미와는 조금 다른 뜻을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의미를 살펴보면 “깃발이 잘 정렬되고 기세당당하게 전열을 갖춘 군대”는 바로 정의를 기치로 내걸고 싸우는 군대로써 “우리에게 정의가 있다.”라는 명분 아래 싸우는 것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이라고 손자병법에서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즉, 이 말은 정의로운 방법으로 전쟁에서 승리하여야 한다는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것이기에 정정당당(正正堂堂)은 비겁하거나 부끄러운 온갖 수법을 동원하여 이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란 것이며 이 말을 한국의 재벌들과 파렴치한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다시 한 번 새겨들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입니다.

펩시콜라는 어떻게 세계 6위의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나?

펩시콜라는 어떻게 세계 6위의 해군을 보유할 수 있었나?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끝나면서 퇴임하게 될 트럼프가 맞게 될 각종 민·형사 소송과 관련하여 워터게이트사건(Watergate Case)으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사임한 대통령이란 기록을 남긴 제37대 대통령 리차드 닉슨이 언론에 소환되고 있다.

오늘은 정치적인 이슈보다는 닉슨 대통령 덕분에 펩시콜라가 한때는 세계 제6위의 해군력을 보유할 수 있었던 얘기를 해볼까 한다.

1950년대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치열했던 시기였는데 양국은 긴장완화를 위해 문화를 교류하기로 하고 1958년에 미소문화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그 결과로 1959년 6월에는 뉴욕에서 소련의 박람회가 개최되었으며 다음 달인 7월에는 모스크바에서 미국박람회가 개최되었는데 이곳에서 당시 미국의 부통령이었던 닉슨과 소련공산당 서기장이었던 소련의 흐루쇼프가 벌인 논쟁은 세간의 많은 화제를 낳았다.

당시 두 사람의 논쟁은 녹화되어 미국과 소련에서 방송되었는데 박람회장에 지어진 모델하우스의 부엌에서 논쟁을 한 것에서 유래하여 부엌 논쟁(Kitchen Debate)이라고 이름이 붙었다.

 

당시 흐루쇼프는 “닉슨의 손자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살 것”이라고 주장했고, 닉슨은 이를 맞받아 “흐루쇼프의 손자는 자유체제에서 살 것”이라고 주장했는데 흐루쇼프(니키타 흐루쇼프: Nikita Khrushchev)의 아들인 세르게이 흐루쇼프가 소련의 붕괴로 1991년에 미국으로 이주하였고 1996년에는 귀화를 했기 때문에 닉슨의 주장이 옳았다고 봐야 하는 것일까?

아무튼 두 사람의 논쟁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것은 사실이었고 그 뒤에는 또 하나의 화젯거리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주인공이 오늘 얘기의 주제인 펩시콜라다.

모스크바에 지어졌던 미국의 박람회장에는 디즈니를 비롯하여 IBM 등 굴지의 기업들과 함께 펩시콜라도 부스를 설치하고 있었고 이때 펩시의 전시장을 총괄하던 인물인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닉슨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다.

 

좌측: 로버트 켄달 우측: 닉슨 대통령

그리고 닉슨과 흐루쇼프가 만나기로 되어있던 전날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에서 닉슨을 만나 당일 흐루쇼프를 펩시콜라의 전시부스로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한다.

당시 펩시콜라 내부에서는 해외시장확대에 회의적이었으나 켄달은 펩시콜라를 대대적으로 홍보할 수 있는 기회임을 확신하고 친구인 닉슨에게 흐루쇼프를 데리고 와줄 것을 부탁하였고 미국과 소련의 물로 만든 2종류의 펩시콜라를 준비해두었다.

당일 모스크바는 7월로 더운 날씨였으며 펩시의 부스를 찾은 흐루쇼프가 미국의 물과 소련의 물로 만든 2종류의 펩시콜라를 마시고 “소련 물로 만든 것이 더 맛있다.”고 발언하는 모습은 보도진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았고 공산주의자인 흐루쇼프가 자본주의의 상징인 콜라를 마시는 장면은 전 세계에 퍼져 펩시콜라의 광고효과는 그야말로 대박을 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1971년이 되면서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펩시콜라의 CEO에 취임을 하게 되었는데 그의 절친이자 그가 후원하던 닉슨은 미국의 제36대 대통령이 되어있었다.

이런 두 사람의 관계를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고는 하지 못해도 닉슨과 켄달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은 틀림없었는데 닉슨은 냉전 완화정책으로 소련과의 교역을 확대하려 하고 있었고 켄달은 소련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발판으로 코카콜라를 압도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닉슨의 전폭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펩시는 당시 소련 최고지도자였던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의 협상 끝에 소련에서 콜라를 독점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된다.

그런데 소련의 루블화는 외화로 환전할 수 없었으며 소련을 제외한 외국에서는 사용할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소련은 미국의 달러로도 지불할 수 없다는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래서 짜낸 방법이 펩시콜라를 소련정부가 생산하고 있던 보드카인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와 물물교환 방식으로 거래하기로 하였으며 펩시는 당연히 미국 내에서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를 독점판매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1974년 노보로시스크에 최초로 음료를 병에 담는 공장인 Bottling Plant가 세워졌고 이곳에서는 미국에서 보낸 펩시콜라의 원액에 소련의 물과 탄산가스를 더하여 완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에서 제조되고 판매된 최초의 자본주의 소비재가 되었다.

 

하지만 펩시와 소련이 맺었던 계약이 완료되는 시점인 1989년은 소련의 정세가 극적으로 변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당시 소련공산당의 서기장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개혁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의 일환으로 소비재를 수입하여 소련경제와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키려 노력하고 있었다.

한편 펩시는 소련에서의 사업을 확대하여 26개의 공장을 증설하고 30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는데 그 한 가지 방법에는 당시 보유하고 있던 피자헛을 소련에 진출시키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련 루블화의 가치는 국제시장에서 현저하게 낮은 가치를 형성하고 있었고 물물교환하던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는 판매되는 펩시콜라의 양을 충당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이 큰 문제였다.

뿐만 아니라 1979년에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미국에서는 스톨리치나야(Stolichnaya) 불매운동이 전개되어 매출은 급격히 하락하게 되는 일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콜라사랑 열기는 식을 줄을 몰라서 펩시와의 거래를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펩시가 서방세계에 판매할 수 있는 또 다른 무언가를 소련으로서는 제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경제불안이 계속되던 소련으로서는 서방국가에서 판매될만한 소비재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고 단 한 가지 예외적인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냉전시대의 막대한 군사비로 인해 군에서 과도하게 보유하고 있던 군사장비였다.

그리고 1990년, 마침내 소련은 17척의 디젤잠수함을 비롯하여 순양함, 구축함, 프리깃함 및 민간유조선을 펩시에 인도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당시 펩시가 소련과 체결한 계약의 내용은 소련에 피자헛 매장을 개설할 수 있는 허가와 함께 2000년까지 3억 달러의 펩시콜라를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졸지에 펩시는 세계 6위의 해군을 보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유조선을 제외한 배들은 사용하기에는 심각한 상태여서 펩시는 유조선은 임대하다가 나중에는 노르웨이에 팔고 잠수함과 20척의 군함은 모두 고철로 스웨덴의 조선소에 판매하게 된다.

 

다시 맺은 계약에 의해 모스크바에 2개의 피자헛 매장을 개설하였고 고르바초프가 피자헛에서 정치광고를 찍으면서 펩시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것 같았지만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정책은 소련의 붕괴를 가져왔고 펩시와 구소련 간에 맺었던 계약은 너무 불공정하다는 소련의 판단에 따라 펩시의 독점권은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인플레와 민영화의 과정에 잽싸게 올라탄 코카콜라는 단돈 1센트에 공장을 인수하고 특별히 제작한 코카콜라를 러시아의 우주정거장에 보내는 등 활발한 마케팅에 나섰고 마침내 1996년에는 러시아에서 펩시를 추월하게 되었다.

 

언젠가 펩시의 이사회에서 조지 부시 행정부의 안보담당보좌관이었던 브렌트 스코크로프트(Brent Scowcroft)를 만난 로버트 켄달(Robert Kendall)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가 당신들보다 먼저 소련을 무장해제시켰어.(I’m dismantling the Soviet Union faster than you are.)

홋카이도에는 가리비 껍질로 만든 하얀 길이 있다.

홋카이도에는 가리비 껍질로 만든 하얀 길이 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따끈한 국물과 함께 먹는 조개찜을 비롯하여 꼬막에 굴요리까지 맛있는 안주들이 술을 부르는 날이 잦아지곤 한다.

그러나 맛있게 먹는 대신 남는 조개껍질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준다.

한 해 동안 버려지는 굴껍데기의 양만 대략 30만 톤을 상회한다고 하는데 다행히 근래 와서는 재활용되는 비율이 증가하기는 했지만 아직은 여전히 처리방법에 있어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굴껍데기를 비롯한 패각류의 껍질은 난연성이라 소각처리가 쉽지 않고 분해가 어려운 탄산칼슘으로 인해 자연상태에서 생분해되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껍질에 부착된 염분으로 인해 그대로 매립할 수도 없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비료나 사료로 재활용하는 경우에도 반드시 껍질에 묻어 있는 염분을 제거해야만 하기 때문에 길게는 야적한 상태로 1년간 방치한 채로 비를 맞게 하여 염분을 제거하고 그다음에 지상에 설치한 아래의 사진과 같은 수조에 넣어서 한번 더 염분을 제거하는 공정을 거친 뒤에 비료나 사료의 원료가 되는 분말을 제조하기도 한다.

 

이런 현상은 일본도 마찬가지로 특히 가리비의 생산으로 유명한 홋카이도에서는 버려지는 가리비 껍질을 아스팔트나 콘크리트 대신에 도로에 깔아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로 부상한 곳이 있다.

 

홋카이도 북부의 왓카나이(稚内)에 있는 소야구릉(宗谷丘陵)은 왓카나이 풋패스의 소야구릉코스가 있는데 그 중 숏코스의 후반부 3㎞에 2011년부터 가리비껍질을 분쇄해서 깐 것이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어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는데 일본어로는 시로이 미치(白い道)라 부르며 우리말로는 ‘하얀 길’ 또는 ‘백조개의 길’로 불린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일본산 가리비를 먹고 있을까?”란 포스팅을 통해서 2019년까지 증가일로에 있던 일본산 가리비의 수입실태를 알아본 바가 있었는데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2022년에는 11,745톤을 수입하였고 그 금액은 오늘자 매매기준율로 환산하면 650여 억 원에 이르러 금액과 중량으로 모두 2019년도 대비 2배 이상을 기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많은 양을 수입한 일본산 가리비를 비롯하여 우리가 음식점에서 먹는 패각류의 껍질은 절차와 규정에 따라 일반쓰레기로 잘 처리가 되고 있을까?

앞으론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조사해보아야겠다.

일본산 방어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식량이었다.

일본산 방어는 임진왜란 당시의 전투식량이었다.

오래전 “우리는 일본산 방어회를 얼마나 먹었을까?”란 포스팅을 통해 해마다 증가하는 일본으로부터의 방어 수입에 대하여 알아본 바가 있었는데 일본불매운동이 한창이던 2019에도 일본산 방어의 수입은 증가세를 보였으며 작년, 2020년에도 전년 대비 물량은 8.5%, 금액은 9.4%가 증가한 2,247톤의 방어를 248억 원어치나 수입을 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인터넷을 달구었던 한 장의 사진에 대하여 “등이 구부러진 일본산 방어는 안전할까?”란 제목으로 안정성에 대하여 알아보았는데 오늘은 우리의 간고등어와 유사한 일본의 염장방어에 대한 얘기를 해보려고 한다.

 

우리는 설날이면 떡국을 먹는다. 그리고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더 먹는다고들 말하는데 우리의 이런 풍습과 유사한 일본의 풍습으로 토시토리(年取り)란 것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비교적 많이 알려진 것으로는 12월 31일, 섣달 그믐날 새해의 안녕을 기원하면서 먹는 토시코시소바(年越しそば)가 있는데 이 때 소바 대신에 먹는 물고기를 토시토리자카나(年取り魚)라고 부른다.

토시토리자카나(年取り魚)는 동일본에서는 연어, 서일본에서는 방어가 대표적으로 특히 토야마(富山)의 히미시(氷見市)에서 정치망으로 잡는 방어를 최고로 치는데 예부터 이것을 엣츄부리(越中ブリ)라 불렀으며 최고급 방어의 대명사로 불린다.

옛날 방어의 토야마(富山) 산지가격이 한 마리에 현미 한 말이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부리가도(ブリ街道)를 지나 마쓰모토(松本)에 도착하면 4배로 뛰어 현미 4말을 줘야 방어 1마리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 부리가도(ブリ街道)

토야마만(富山湾)에서 잡은 방어(부리: ブリ)를 타카야마(高山)와 노무기고개(野麦峠)를 넘어 마쓰모토(松本)까지 운반하는데 사용된 길을 말한다.

 

이처럼 비싼 토야마만(富山湾)에서 잡은 방어를 염장한 다음 임진왜란 당시 조선(朝鮮)을 침략한 왜군의 식량으로 사용하도록 마에다 도시이에(前田利家)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게 진상하였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430여 년 전 이 땅을 피로 물들이고 수 많은 백성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왜구의 침략에 사용된 전투식량이었던 방어가 지금은 수 많은 양식업자들의 생계를 위협하고 있다면 너무 심한 비약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해마다 증가하는 일본산 방어의 수입은 우리 스스로가 한 번쯤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

영화처럼 실제로 일어난 2차 대전 당시의 대탈주극

사진은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의 실제 모습 

 

한국에서는 대탈주란 제목으로 1963년 개봉되었던 영화 “The Great Escape”는 독일군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연합군 병사들의 탈출기를 묘사한 것인데 이 영화는 1950년에 발간된 폴 브록힐(Paul Brickhill)의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영화 “The Great Escape”는 1943년 연합군 포로들이 베를린에서 100마일 떨어진 곳(현재의 폴란드 Żagań 마을)에 있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영화에서는 모두 76명의 포로들이 탈출하여 3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10명은 다시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돌아오게 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 당하고 마는데 실제로도 50명의 포로들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 III)

 

제게는 특히 주인공인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의 오토바이 씬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실제로도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은 프로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할 만큼의 오토바이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그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는 이유는 해병대원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다는 것 때문입니다.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한 장면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속의 스트브 맥퀸 오토바이 탈출 영상

이 영화를 아주 많이 보기는 했지만 볼 때마다 허구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웹서핑 도중에 발견한 영국의 신문을 보고는 생각이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영국 익스프레스지의 2017년 9월 1일자 기사를 보면 2차 대전 당시 영화와 흡사한 방법으로 영국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한 독일군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 원문: Uncovered: The tunnel the Nazis used in WW2 to escape PoW camp in South Wales

 

실제로 독일군 포로들의 대탈주극이 감행된 것은 1945년 3월 10일 밤, 사우스 웨일즈(South Wales)의 브리젠드(Bridgend)에 있었던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였다고 합니다.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

 

1938년에 지어진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는 원래는 인근 군수공장에 근무하는 여성들을 위한 기숙사의 용도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군의 캠프로 사용되다가 급증하는 포로들을 수용하기 위해서 전쟁포로수용소로 바뀌었다고 하며 당시에는 총 30개의 막사(Hut)에 2,000여 명의 독일군 포로들을 수용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9번 막사만 남아있다고 합니다.

9번 막사(Hut 9)

 

이곳에서 탈출을 감행한 독일군 포로들은 영화에서와 같이 칼 등을 이용하여 막사로부터 30피트나 떨어진 철조망 너머로 깊이 4미터에 달하는 땅굴을 팠다고 하며 사용한 땅굴의 갱목(받침대)은 벤치를 훔쳐서 만들거나 침대의 다리를 잘라 사용하였고 환기장치는 통조림을 이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화 “The Great Escape”에서와 같이 땅굴을 파는 과정에서 나오는 소음을 숨기기 위해 모두가 노래를 불렀다고 하며 탈출하는 과정에서 1명이 부주의로 떨어뜨린 흰색의 가방이 경계병에게 발견되지 않았더라면 70명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포로들이 탈출하였을 것이라고 하는데 탈출이 있고부터 4시간이 지나서야 포로들의 탈출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뒤늦게야 포로들의 탈출사실을 알게 된 영국은 경찰과 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검문과 수색을 실시하였고 그 결과 모든 포로들을 다시 잡게 되었는데 가장 늦게 잡은 포로가 탈출 후 1주일 만에 사우샘프턴(Southampton)에서 잡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영화에서는 수많은 포로들이 사살되지만 탈출한 독일군 포로들은 사살되지 않았다고 하며 그 이후 아일랜드 팜(Island Farm) 포로수용소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의 피고들을 수용하는 용도로 사용되다가 1990년에 철거되었고 환경보호론자들의 노력으로 지금은 1년에 2회만 공개되는 9번 막사(Hut)만 남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정부에서는 안전상의 이유를 들어 터널은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2차 대전의 기록에도 없는 것을 보면 아마도 치욕스런 일이라 생각하여 감추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화 대탈주 속의 오토바이 이야기

영화 대탈주 속의 오토바이 이야기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비하인드 스토리”란 제목의 글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영화는 호주공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슈퍼마린 스핏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를 몰다가 튀니지에서 격추되어 수감되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Ⅲ)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폴 브릭힐(paul brickhill)”이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 속의 여러 장면들 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기억하는 장면은 아마도 주인공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국경 부근에서 철조망을 오토바이로 넘으려던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영화 속에서 스티브 맥퀸이 타던 오토바이를 많은 사람들이 “BMW R75”로 알고 있는데 사실은 1961년에 생산된 “TR6 트로피(TR6 Trophy)”를 “BMW R75”로 보이도록 개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TR6 트로피(TR6 Trophy)”를 제조했던 회사(Triumph Engineering Co Ltd)는 1885년에 설립되어 1983년 8월 23일 도산하였고, 지금은 “존 블로어(John Stuart Bloor)”라는 사업가가 법정관리 중이던 회사를 인수하여 이름을 “Triumph Motorcycles Ltd”로 바꾸고 운영하고 있습니다.

1961년에 제작된 TR6 트로피

 

트라이엄프사가 만든 오토바이 중에는 지난 번 “군용 오토바이의 변천사”에서도 소개했던 2차 대전 당시에 총 3만 대를 생산한 “Triumph Model H”도 있습니다.

 

Triumph Model H

 

아무튼 영화 제작회사는 적당한 독일의 BMW R75를 구하지 못해 “TR6 트로피(TR6 Trophy)”를 구입하여 당시 자동차와 오토바이의 커스터마이징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던 “케니 하워드(Kenneth Robert Howard)”에게 BMW R75와 유사하게 만들어줄 것을 주문하여 영화에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케니 하워드(Kenneth Robert Howard)”가 죽고 나서 그의 딸들이 “케니 하워드(Kenneth Robert Howard)”가 사용하던 그의 별명이자 상표였던 “Von Dutch”를 판매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다국적 브랜드인 “Von Dutch”입니다.

한편 영화촬영이 모두 끝나고 제작자들은 사용된 오토바이 “TR6 트로피(TR6 Trophy)”를 영국의 한 농부에게 판매하였고, 이를 구입한 농부는 소떼를 모는데 사용하다가 그냥 헛간에 방치해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농부가 방치한 오토바이를 수집가인 “딕 셰퍼드(Dick Shepard)”란 사람이 다시 구매를 하여 정비를 하고 보관하면서 각종 전시회에서 공개하였는데 원형의 95%는 원래의 부품과 모습을 유지하고 있고 나머지 5%만을 교체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딕 셰퍼드(Dick Shepard)”은 영국의 맨섬(Isle of Man)에서 해마다 열리는 저비축제의 2018년 행사(FESTIVAL OF JURBY 2018)에도 이것을 전시하였는데 오토바이를 완벽히 복원하는데 2개월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좌측이 딕 셰퍼드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의 비하인드 스토리

1963년 개봉된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는 다시 보아도 언제나 멋진 영화란 생각이 드는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포로수용소를 탈출하는 내용의 영화인데 오늘은 그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에 대하여 얘기해볼까 합니다.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먼저 영화의 원작이 된 동명의 책을 쓴 작자 “폴 브릭힐(paul brickhill)”은 호주공군으로 전쟁에 참가하여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Supermarine Spitfire)”를 몰다가 튀니지에서 격추되어 수감되었던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Ⅲ)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책을 집필했습니다.

 

슈퍼마린 스피트파이어(Supermarine Spitfire)

 

영화에서는 모두 76명의 포로들이 탈출하여 3명만이 탈출에 성공하고 10명은 다시 붙잡혀 수용소로 돌아오게 되고 나머지는 모두 사살 당하는 것으로 나오는데 실제로도 50명의 포로들이 사살되었다고 합니다.

 

스탈라그 루프트 제3 수용소(Stalag LuftⅢ)

 

그러나 폴 브릭힐은 탈출을 준비하는 작업에는 참가를 하였지만 정작 자신의 폐소공포증으로 인해서 실제로 탈출에 참여할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출연배우들 중에는 포로생활을 한 사람들이 있다.

탈출에 필요한 서류를 위조하는 “콜린 블리스” 역을 맡았던 “도널드 플레젠스(Donald Pleasence)”는 공군조종사로 참전하여 포로가 된 다음 수용소에서 독일군에게 고문을 당한 경험도 있다고 합니다.

도널드 플레젠스(Donald Pleasence)

 

한편 수용소장인 독일군 대령 루거 역을 맡았던 “하네스 메세머(Hannes Messemer)”는 러시아의 포로수용소에서

 

독일군 프릭 역의 “틸 키베(Til Kiwe)”와 헤르쿤 역의 “한스 라이저(Hans Reiser)”는 각각 미군의 포로로 수용소 생활을 하였습니다.

 

틸 키베(Til Kiwe)

 

한스 라이저(Hans Reiser)

 

오토바이로 철조망을 넘는 장면은 대역이었다.

여러 장면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기억되는 장면은 아마도 주인공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이 국경 부근에서 철조망을 오토바이로 넘으려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실제로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은 프로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할 만큼의 오토바이 실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저도 의심을 해보지는 않았는데 사실은 스턴트맨인 “버드 에킨스(Bud Ekins)”가 대역을 한 것이라고 하며 안전을 위하여 철조망은 모두 고무줄로 만들어졌었다고 합니다.

 

스티브 맥퀸과 버드 에킨스(Bud Ekins)

 

스티브 맥퀸은 과속딱지를 끊겼다.

영화를 촬영하던 독일에서 지역경찰의 단속에 걸려 주인공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을 포함한 다수의 출연진과 스탭들이 스티커를 발부받았는데 경찰서장은 “오늘 우리가 여러 사람을 단속했지만 가장 빠른 속도로 상을 받은 사람은 스티브 맥퀸이었다.”고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찰스 브론슨의 농담은 진담이 되었다.

영화에서 땅굴을 파는 대니 벨린스키 역을 맡았던 “찰스 브론슨(Charles Bronson)”은 우리에게는 미드 NCIS로 더 낯이 익은 배우 “데이비드 매컬럼(David McCallum)”과 그의 아내 “질 아일랜드(Jill Ireland)”를 영화 촬영장에서 만난 일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찰스 브론슨은 데이비드에게 “네 아내를 훔칠 거야!”라는 농담을 던졌는데 그만 그것이 현실이 되어버려 데이비드와 헤어진 “질 아일랜드(Jill Ireland)”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찰스 브론슨(Charles Bronson)

 

찰스 브론슨과 질 아일랜드(Jill Ireland)

 

데이비드 매컬럼(David McCallum)

 

또한 영화에서 헨들리 역을 맡았던 제임스 가너(James Garner)는 육군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었는데 스티브 맥퀸(Steve McQueen)도 해병대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었답니다.

 

제임스 가너 (James Garn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