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략사령부가 분류한 좀비의 종류

미국 전략사령부가 분류한 좀비의 종류

천만 관객을 동원한 부산행에 이어서 새로운 좀비영화 “창궐”이 개봉을 앞두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좀비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를 만들어낸 미국에서는 국방부 산하의 “미국전략사령부(USSTRATCOM: United States Strategic Command)”에서 좀비의 종류를 분류하여 8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미국의 전략사령부가 무슨 영화제작사도 아닐진대 이런 우습기까지 한 좀비분류를 왜 했는지 조금 의아하기도 한데 지금부터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미국 전략사령부가 분류한 좀비의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 병원성 좀비(PZ: Pathogenic Zombies)

PZ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의 전염병에 감염되어 만들어진 좀비이다.

■ 방사성 좀비(RZ: Radiation Zombies)

RZ는 전자파나 방사선에 노출되어 만들어진 좀비이다.

■ 매직형 좀비(EMZ: Evil Magic Zombies)

EMZ는 아메리카 서인도 제국의 부두교 주술사가 마술적인 방법으로 소생시킨 시체들을 일컫는 말인 좀비의 사전적 의미에 가까운 좀비이다.

■ 우주형 좀비(SZ: Space Zombies)

SZ는 우주에서 온 좀비(ㅋㅋ), 또는 우주 생물이 지구에 와서 고농도의 독소나 유해 방사선에 의해 오염되어 만들어진 좀비이다.

■ 무기형 좀비(WZ: Weaponized Zombies)

WZ는 무기로 이용될 목적으로 생체역학에 의해 만들어진 좀비이다.

■ 기생형 좀비(SIZ: Symbiant-Induced Zombies)

SIZ는 다른 생명체를 숙주로 하는 좀비이다. SIZ의 증상은 대체로 병원성 좀비와 비슷하지만, SIZ는 숙주를 즉시 또는 완전히 죽일 수는 없으며 기생하고 있는 숙주에서 제거하는 방법도 불분명하다.

■ 채식형 좀비(VZ: Vegetarian Zombies)

VZ는 식물만을 먹는 좀비로 인간에게는 위협적이지 않다. VZ는 인간과 다른 동물을 공격하지 않지만, 대량의 식물을 소비하여 쌀, 옥수수, 콩 등 인간에게 필수적인 식물의 피해와 산림 파괴를 일으킬 수 있다.

■ 치킨 좀비(CZ: Chicken Zombies)

1. 익살맞게 들릴지도 모르지만(전략사령부의 문서에 이렇게 표현되어 있음^^), CZ는 실제로 그 존재가 확인 된 유일한 좀비이다.

2. CZ는 2006년 12월 4일 조나단 M. 포레스터(Jonathan M. Forrester)에 의해 기사화 된 것이다.

이것을 조금 보충하면 2006년 12월 4일자 온라인기사에서 더 이상 알을 낳지 못하는 닭을 안락사 시키기 위해 일산화탄소가 든 상자에 넣는데 이때 죽지 않은 닭들이 비틀거리며 잠시 움직이는 것을 보고 좀비치킨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이며 이런 닭들을 퇴비더미에 섞어서 사용하는 것을 두고 동물학대 논쟁을 촉발시킨 것에 대한 언론기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미국 전략사령부에서 만든 이와 같은 좀비분류 문서가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만들어졌더라면 아마도 지금쯤 국정감사는 모두 이 내용으로 도배가 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좀비분류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는 문서는 “비상계획 8888-11(CONPLAN8888-11)”이라고 하는 “대좀비진압계획(Counter-Zombie Dominance)”으로서 2011년에 발표되었고 2014년에 기밀해제가 되어 일반에게도 공개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서의 전체 내용을 확인하지 못하고 글을 작성하다 보니 온라인에 있는 나와 있는 정보들 중에는 오류가 있는 것들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큰 오류는 문서의 서두에 있는 주의·경고문(Disclaimer) 중에 “This plan was not actually designed as a joke”란 표현 즉 “이 계획은 농담 삼아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을 근거로 좀비퇴치에 관한 진지한 성격의 공식문서라고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문서는 미국전략사령부에서 만든 공식문서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서의 성격은 “전력가 양성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봐야 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입니다.

미국 전략사령부에서 전략가가 된다는 것은 짜여진 계획에 의해 엄격한 훈련을 받는 다소 지루한 교육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에 평범하고 따분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을 조금 재미있게 만들려는 생각에서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문서라는 것입니다.

주의·경고문(Disclaimer)의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면 “이 계획은 우스울 정도의 것이지만 교육생들은 수업을 즐김으로써 기본개념의 수립과 계획을 효과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 이 계획은 새로운 전략가를 양성하고 중요한 지식을 습득하는 아주 재미있는 방법이라고 판단을 했기에 이런 형태로 발표하기로 결정하였다.”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또한 “대좀비진압계획(Counter-Zombie Dominance)”의 목적에도 “허구의 비상계획정책”이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원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 CONPLAN 8888-11, “Counter-Zombie Dominance”

아무튼 이런 수업을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는 그들의 생각이 부럽기는 합니다. 우리 국방부에서 이런 내용의 기안서를 제출하면 돌아오는 것은 아마도 시말서의 작성뿐이 아닐까 싶은데~ 저만의 생각일까요?^^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10대 잔학학행위

2차 대전 당시 일본군이 저지른 10대 잔학학행위

최소한 3,000여 명의 한국인을 포함한 중국인과 몽골인들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하고 전쟁이 끝나자 그나마 살아있던 150여 명까지 모두 죽임으로써 흔적을 말살하려 했던 731부대의 만행도 있지만 서양인들의 시각으로 본 일본군의 잔악행위는 우리와는 조금 생각이 다른 것도 같은데 다양한 주제를 Top10의 형식으로 발표하는 리스트버스(Listverse)가 선정한 일본군이 2차 대전 당시에 저지른 잔악한 행위에 관한 내용을 요약해본다.

※ 10 Japanese Atrocities From World WarⅡ

▶ 10위: 라하 비행장 대학살(1942년 2월)

네덜란드령 동인도(난인: 蘭印) 공략의 일환으로 일본군이 1942년 1월부터 인도네시아의 암본 섬 (Ambon)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주둔하고 있던 호주와 네덜란드군의 저항으로 소해정이 침몰하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총 4회에 걸쳐 300여 명의 호주와 네덜란드군인들을 일본도로 참수하였다.

종전 후 군사재판에서 90여 명의 일본군이 기소되고 4명이 사형에 처해졌다.

▶ 9위: 알렉산드라 병원 대학살(1942년 2월 14일 ~ 15일)

1942년 2월 8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싱가폴 공격은 11일 연합군의 항복으로 끝을 내게 되는데 싱가폴을 함락하기 직전 알렉산드라 병원에 근무하던 어린 인도병사가 일본군에게 발포한 것을 빌미로 병원을 습격하여 의료진과 환자를 가리지 않고 도살하였다.(원문에 도살(slaughtered)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 후 남은 생존자들을 청소를 하기 위해 모두 모이라고 하여 비좁은 방에 몰아넣고 총검으로 찔러 200여 명을 학살하였는데 빗물 배수관에 몸을 숨긴 5명만이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 8위: 팔라완 대학살(1944년 12월 14일)

1944년 12월 14일 필리핀의 팔라완 섬을 수비하던 일본군은 미군이 침공하려 한다는 잘못된 정보를 전달받고 미군포로들이 이에 동조하여 후방에서 자기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미군포로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불을 질러 죽이고 도망가는 포로들은 총으로 사살하였는데 150명의 포로들 중에서 12명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 사건이 있고나서부터 미군은 일본군의 감옥과 포로수용소를 공격하는 해방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게 되었고 그 결과 489명의 미군과 필리핀 민병대와 33명의 민간인을 구조하게 되었다.

▶ 7위: 나우루 강점기 대학살(1942년 8월 ~ 1945년 9월)

1942년 8월부터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던 남태평양의 나우루 섬을 1943년 3월 미국이 폭격을 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호주군 포로 5명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은 섬에 거주하던 1,000여 명의 원주민을 강제로 다른 섬에 이주하도록 추방하였으며 39명의 한센병 환자들은 배에 태워 바다로 나가게 한 다음 함포사격으로 침몰시켜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 6위: 구축함 아키카제 대학살(1943년 3월 18일)

일본군은 뉴기니를 침공하여 섬의 동쪽 지역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곳은 한때 독일의 식민지였던 관계로 독일인을 비롯하여 네덜란드인 등 유럽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들 민간인 포로들을 구축함 아키카제(秋風)에 태워 이송하던 도중 “간첩혐의가 있다.”는 빌미로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60명이 넘는 인원을 임시로 만든 교수대에 손목을 묶어놓고 총으로 쏘거나 매질하여 죽인 다음 바다에 던져 죽이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전쟁이 끝나고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구축함 아키카제(秋風)가 1944년 11월 필리핀 해상에서 어뢰의 공격으로 침몰하여 자세한 진상을 밝히지 못하게 되었다.

▶ 5위 영국 상선 비하르호 대학살(1944년 3월 18일)

1944년 3월 일본의 중순양함 토네(利根)호는 인도양에서 영국의 상선 비하르(Behar)호를 격침시켰는데 함장이었던 마유즈미 하루오(黛治夫)는 바다에 빠진 108명의 승객과 승무원을 구출하여 이송하면서 이 사실을 제16전대 사령관 산콘쥬 나오마사(左近允尚正) 제독에게 보고하였는데 나오마사는 불필요한 일을 했다고 마유즈미를 질책하고 모두 사형시킬 것을 명령하였다.

이에 마유즈미는 포로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여러 번의 부탁을 나오마사 제독에게 하였으나 명령을 거부할 수는 없어서 포로들을 36명, 72명으로 분리하여 비하르 호의 선장이 포함된 36명은 다른 배에 태워 풀어주고 72명의 포로들은 모두 참수하여 그 시체를 바다에 버리게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산콘쥬 나오마사(左近允尚正)는 직접 살해를 결정하였다고 해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토네(利根)호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黛治夫)는 병사들에게 살해를 지시하기는 하였으나 살인에 반대하였다는 사실이 참작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 4위: 싱가폴 숙칭 대학살(1942년 2월 ~ 3월)

숙칭(Sook Ching)은 숙청(粛清)을 의미하는데 싱가폴을 점령한 일본군이 거주하는 중국인 저항세력을 제거하기 위해서 헌병을 동원하여 이들을 청소한다는 의미에서 “숙청작전”을 전개하였고 특히 농촌지역에서 자행된 만행이 극에 달하여 전체마을을 완전히 없애기도 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일본과 싱가폴의 희생자 통계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데 일본에서는 전체 희생자의 규모를 5,000 ~ 6,000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반해 싱가폴과 중국에서는 30,000 ~ 100,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 3위: 잠수함 I-8 대학살(1944년 3월 8일 ~ 7월 2일)

I-8은 I-7과 더불어 2차 대전 이전에 개발된 일본의 잠수함인데 1944년 3월 26일 스리랑카의 콜롬보 연안으로부터 수 백 마일 떨어진 해상에서 네덜란드 화물선(Tsijalak호)을 발견하고 침몰시킨 후 103명의 생존자를 탑승시켜 칼과 망치를 이용하여 학살하고는 그래도 살아있는 생존자들은 갑판에 버려둔 채로 잠수하여 오직 5명만이 살아남았다.(죽일 생각이라면 그냥 바다에 버려둘 일이지, 굳이 승선시킨 다음 잔인하게 살인을 저지른 행동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닝기리~)

그런데 이 사건을 저지르고 난 몇 달 뒤에 또 다시 똑같은 만행을 저지르게 되는데 이번에 희생된 배는 미국의 화물선(Jean Nicolet호)이었다.

일본군은 총검으로 고문하고 살해하여 시체를 바다에 버렸는데 그들이 연합군의 항공기를 발견하고 잠수할 때에는 갑판에 30명의 포로들이 생존해 있었으나 구조된 인원은 단지 2명에 불과하였다.

▶ 2위: 버마(현 미얀마) 철도공사(1942년 6월 ~ 1943년 10월)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라고 불리는 버마 철도(Burma Railway)는 인도로 진격하기 위한 해상로가 영국에 의해 끊기게 되자 병력과 보급물자의 수송을 위하여 육로를 개척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건설된 것이 미얀마와 태국을 연결하는 415km에 달하는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이다.

1년 동안의 공사를 위해 일본군은 6만여 명에 달하는 연합군 포로들과 20만 여명에 달하는 아시아인들을 징집하였는데 전쟁포로 13,000여 명을 비롯하여 강제로 동원된 민간인 노동자 8만~10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죽음의 철도(Death Railway)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1957년에 개봉된 “콰이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River Kwai)”가 그것이다.

▶ 1위: 마닐라 대학살(1945년 2월 ~ 3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1월 필리핀의 루손 섬에 연합군이 상륙하였을 때 당시 일본군 사령관이던 야마시타 도모유키(山下奉文)는 마닐라를 유지하는 것이 어렵다는 판단에 따라 도시가 아닌 시골지역에서 전투를 계속할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에 반대하는 이와부치 산지(岩淵三次) 등 2명이 독자적으로 마닐라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그러나 미군이 상륙하였다는 사실에 그들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는 그에 대한 분풀이를 필리핀 민간인들에게 하기 시작하였는데 총으로 쏘는 것은 물론이고 총검으로 찔러죽이거나 참수하기도 하고 건물에 불을 질러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미군은 일본군이 항복할 수 있도록 폭격을 중지하였으나 그들은 이를 무시하고 만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결과 모두 10만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자를 내게 되었다.

영화 플래툰의 비하인드 스토리

영화 플래툰의 비하인드 스토리

기존의 전쟁영화와는 달리 영웅이 등장하지 않는 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플래툰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인 1987년 7월 4일에 국내에서 개봉하여 흥행성적 1위를 기록하였고, 제5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음향상, 편집상을 수상하는 4관왕의 영예를 얻었다.

미국 영화연구소(American Film Institute)가 선정한 가장 우수한 영화 100편에 83위로 이름을 올리고 있는 플래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들이 있는데 그것을 한 번 알아보자.

▶ 올리버 스톤은 베트남 참전군인이었다.

이 사실은 알고 있는 분들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한 번 더 살펴보면, 올리버 스톤은 1967년 4월, 미 육군에 입대하여 1967년 9월 16일부터 1968년 4월까지 베트남전쟁에 참가하여 두 번의 부상을 당했다.

▶ 미 국방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미 국방부의 지원을 얻지 못해 모든 필요한 장비와 군복들을 필리핀 군대에서 빌리거나 일부는 구매해야 했다. 반면에 같은 해인 1986년에 플래툰보다 7개월 정도 먼저 개봉했던 영화 ‘탑건’은 국방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다.

▶ 베트남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

1975년에 공산통일된 베트남에서는 베트콩에 대한 묘사 때문에 상영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이공 신문에 의하면 1988년 비디오(VHS)가 발매된 후,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되었다고 한다.

▶ 찰리 신은 처음에는 캐스팅 되지 않았다.

1968년에 플래툰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가제를 ‘Break’라고 붙였던 올리버 스톤 감독은 그룹 도어스(The Doors)의 리더 싱어였던 ‘짐 모리슨(James Douglas Morrison)’에게 주역을 제안하였다고 하는 사실은 1971년 짐 모리슨이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난 후 그가 살던 아파트에서 시나리오가 발견됨으로써 알려졌다.

이후 올리버 스톤은 ‘크리스 테일러(Chris Taylor)’ 역을 ‘케빈 코스트너(Kevin Costner)’에게 제안하지만 동생이 베트남 참전군인이었던 관계로 싫어할 것 같다는 케빈 코스트너의 거절로 찰리 신의 형인 ‘에밀리오 에스테베즈(Emilio Estevez)’에게 다시 역할을 제안하였으나 제작비를 마련하지 못해 제작이 연기되면서 다른 작품에 출연하기로 한 ‘에밀리오 에스테베즈(Emilio Estevez)’가 출연할 수 없게 되자 동생이었던 ‘찰리 신(Charlie Sheen: 본명 Carlos Irwin Estévez)’에게 역이 돌아가게 되었다.

플래툰의 ‘크리스 테일러(Chris Taylor)’ 역을 우여곡절 끝에 맡았던 찰리 신은 제62회 아카데미상 감독상을 수상한 올리버 스톤의 영화 ‘7월 4일생’의 주역을 제안 받았으나 고사하는 바람에 ‘톰 크루즈(Tom Cruise)’에게 배역이 돌아갔고, 플래툰의 출연을 고사했던 ‘케빈 코스트너’는 제64회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영화 ‘JFK’의 주역을 맡았다.

출처: 다음 영화

▶ 조니 뎁의 첫 번째 해외여행이었다.

지금은 할리우드에서 이름난 배우지만 당시에는 신인이었던 ‘조니 뎁(Johnny Depp)’은 촬영장소였던 필리핀으로 떠난 것이 그의 생애 최초의 해외여행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화 ‘플래툰’에는 ‘블랙 팬서’에 출연하였던 ‘포레스트 휘태커(Forest Whitaker)’도 출연하였다.

▶ 키스 데이빗은 찰리 신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영화에서 킹 역을 맡았던 배우 ‘키스 데이빗(Keith David)’은 헬기 촬영장면에서 안전장치(harness)가 고정되지 않아 헬리콥터(UH-1 이로쿼이) 밖으로 추락할 뻔했던 찰리 신을 붙잡아 ‘생명의 은인“이라는 감사 인사를 받았다고 한다.

기타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배우들은 일정기간 합숙하면서 군사훈련을 받기도 했고 심지어는 필리핀의 흙색깔이 베트남과 다르다는 이유로 붉은 색의 흙을 공수해서 촬영장소에 깔기도 했다고 한다.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군사자문역할을 맡으며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던 ‘데일 다이(Dale Adam Dye)’는 영화를 참전 예비역들에게 보여주고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감독인 올리버 스톤은 흥행에 자신이 없었다고 하는데 결과는 제작비 6백만 달러를 들여 흥행수입 1억3,850만 달러라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Kindertransport)

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Kindertransport)

온통 코로나 19에 관한 뉴스로만 넘쳐나는 대구에서 지난 2일 한 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셨다.

1928년 5월 17일 경북 영일군에서 태어난 15살 되던 해인 1944년에 끌려가 북만주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시다가 2005년에야 고국에 돌아와 대구에서 생활을 하셨다고 한다.

이제 생존해 계시는 피해자 할머니들은 모두 18분, 아직도 사과 없는 일본과는 달리 이와 유사한 피해를 끼친 독일정부는 작년에 생존해 있는 피해자들에게 일시불로 2,500유로를 보상하기로 결정을 한 일이 있다.

전쟁이 끝나고 독일정부가 나치로부터 피해를 입은 생존자들에게 보상금으로 지급한 금액이 지금까지 우리 돈으로 95조 정도가 되니 이번에 보상하는 금액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일본과는 달리 피해자들로부터 용서를 받을 때까지 끊임없이 사과와 보상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독일의 모습을 일본도 조금 배웠으면 하는 마음이다.

오늘 이야기의 제목인 ‘낯선 사람들의 품속으로’는 2000년 9월 7일 개봉되었던 미국의 다큐멘터리 “Into the Arms of Strangers: Stories of the Kindertransport”의 한국어 제목인데 원제에 있는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어린이 수송작전’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와 떨어져 일본군의 위안부로 생활해야 했던 피해자 할머니들처럼, 유대인 어린이들도 부모와 헤어져 두 번 다시 보지 못하게 되었던 점에 있어서는 유사해 보이지만, 위안부 할머니들이 강제로 동원된 것이었다면 유대인 어린이들은 그들의 안전을 위해 구출되었던 것이라는 큰 차이가 있는데 지금부터 그 얘기를 해보도록 하자.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시작하여 다음 날인 11월 10일 새벽까지 나치대원들은 독일 전역에서 수만 개에 달하는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250여 개의 시나고그(유대교 사원)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이때 깨어진 수많은 유리창의 파편들이 크리스탈처럼 반짝였던 것에서 연유하여 이날의 만행을 ‘수정의 밤(크리스탈나흐트: Kristallnacht)’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유럽의 유대인들 중에서 어린 자녀를 두었던 사람들은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으로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의 유대인들이 나서서 영국정부에 유대인 어린이들의 입국을 허용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재증보증을 서겠다는 약속을 한다.

한편 영국정부는 이와 관련하여 의회에 제출할 법안을 마련하였는데 그 내용은 후견인이 있는 17세 이하의 유대인 어린이들만 입국이 가능하다는 것이었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독일도 이런 이민(탈출)을 허용해주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최초로 200여 명의 유대 어린이들이 1938년 12월 2일 영국의 하리치(Harwich)에 도착을 하게 되었으며, 1940년 5월 10일, 75만의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공격함으로써 국경이 폐쇄되었던 5월 15일의 하루 전인 5월 14일에 마지막 수송선이 74명의 어린이들을 태우고 네덜란드의 에이마위던(IJmuiden)을 떠남으로써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는 1만여 명의 어린이들을 구출하고 종료되었다.

독일이 이와 같은 유대인 어린이들의 이민 형식의 탈출을 용인해주었던 것은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 이후 유대인에 대한 나치의 정책이 자발적인 이민에서 강제추방으로 바뀌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 과정에서 발벗고 나서 노력한 사람들은 많지만 그 중에서도 네덜란드 여성인 게르트루이다 비스뮬러–마이어(Geertruida Wijsmuller-Meijer)는 당시 오스트리아 유대인들의 추방을 담당하고 있던 홀로코스트의 전범이자 유대인 박해의 실무책임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을 직접 만나 600명의 어린이들을 데리고 영국으로 갈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다음 1938년 12월 10일, 비엔나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600명의 유대인 어린이들을 태우고 오스트리아를 벗어난 것으로 유명하다.

 

게르트루이다 비스뮬러–마이어(Geertruida Wijsmuller-Meijer)

 

이렇게 탈출한 600명의 어린이들 중 100명은 30시간 가까이 걸려 도착한 네덜란드의 훅반홀란트(Hoek van Holland)에 내렸고 나머지 500명은 영국에서 피난처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의 박해를 벗어났다고는 해도 어린이들이 타국에서 부모도 없이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일부는 운 좋게 위탁가정에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영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영국 어린이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거나 심한 경우에는 적국의 독일인으로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나이가 많아 영국가정으로 위탁되지 못했던 어린이들은 수용소나 호스텔에서 생활해야 했으며, 18세가 되었을 때에 영국군에 입대할 기회가 주어졌는데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를 통해 영국으로 왔던 유대인 어린이들 중에서 1천 명 정도가 입대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부모형제와 떨어져 살아야 했던 어린이들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가족을 만날 수 없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생존자 중의 한 사람인 밥 커크(Bob Kirk)와 결혼했던 한나 쿤(Hannah Kuhn)이란 여성으로 그녀의 부모님은 모두 아우슈비츠에서 살해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독일 베를린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역에는 가방을 들고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어린이들의 조형물이 있는데 조형물의 제목은 “삶으로 가는 기차–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뜻하는 “쥬게 인 다스 레벤–쥬게 인 덴 토드(Züge in das Leben – Züge in den Tod)”이다.

 

이 조형물은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생존자인 독일의 조각가 프랑크 마이슬러(Frank Meisler)가 영국으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던 프리드리히슈트라세(Friedrichstraße) 역에 설치한 것으로 조형물의 색상과 표정에서 어둡게 표현된 어린이들의 운명은 강제수용소에서 죽음으로 끝이 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나이에 가족의 품을 떠나 타국의 위탁가정에서 생활했던 유대인 어린이들은 위안부 할머니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은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계속해서 진심 어린 사과를 함은 물론이고 기존의 보상금과 중복하여 킨더트랜스포트(Kindertransport)의 피해자들에게 보상을 한다고 한다. 더 길게 적으면 희망 없는 국내 정치권의 얘기까지 거론할 것 같아서 여기서 멈춘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은 방귀 때문에 콩을 먹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영국 공군은 방귀 때문에 콩을 먹지 않았다.

“콩은 하인즈”라는 뜻의 광고 카피, 빈즈 민즈 하인즈(Beanz Meanz Heinz)는 1967년에 만들어져 지난 2017년이 50주년이 되는 해였다.

50주년을 맞은 하인즈 통조림의 슬로건은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라는 삶은 콩을 토마토 소스와 함께 끓여낸 영국인들의 국민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음식의 광고 슬로건이다.

50주년을 맞은 빈즈 민즈 하인즈(Beanz Meanz Heinz) 슬로건을 기념하여 하인즈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버밍엄(Birmingham) 사람들의 80%가 일주일에 한 번은 콩을 먹는다고 답함으로써 1위를 차지하였고, 맨체스터가 70%로 2위, 셰필드가 65%로 3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흰강낭콩(Navy bean)을 원료로 만드는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의 레시피는 원래 보스톤 베이커드 빈즈(Boston baked beans)의 레시피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돼지고기가 들어갔었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돼지고기가 부족해지면서 현재와 같이 돼지고기가 들어있지 않은 레시피로 변경되게 되었다.

세상에서 오직 3명 만이 제조법을 알고 있다는 하인즈의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 통조림은 영국에서는 1928년에 최초로 생산되었으며 영국 식품부(Ministry of Food)는 1940년대에 하인즈의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 통조림을 전시의 필수배급품으로 지정하였다.

이미지 출처: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흰강낭콩(Navy bean)은 건조하면 상온에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고, 토마토 소스도 통조림으로 저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것을 원료로 제작되는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는 전시(戰時)의 군대식(軍隊食)으로는 안성맞춤의 음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1918년 4월 21일에 창설된 영국 왕립공군(RAF: Royal Air Force)에서도 처음부터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주메뉴로 보급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항공기 제작기술이 발달하면서 전투기와 폭격기의 성능이 향상되어 더 높은 고도로 비행하게 되면서부터 조종사를 비롯한 승무원들은 비행 전에 베이크드 빈즈를 먹지 않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포스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방귀 때문이었다.

베이크드 빈즈의 주원료인 흰강낭콩(Navy bean)은 올리고당을 많이 함유하고 있고 식후에 장에 도달하면 발효되어 평소보다 많은 방귀를 배출(?^^)하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지상에서의 경우에 해당하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기압 때문에 지상보다 장내의 가스는 많이 팽창하게 되면서 더 많은 양의 방귀를 방출하게 되었고, 심할 경우 장내의 가스 팽창으로 인해 설사를 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는데 간이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던 핸들리 페이지 헬리팩스(Handley Page Halifax)와 같은 대형 폭격기라고 하더라도 적지의 상공에서는 맘 편히 일을 볼 수도 없었고, 추운 기온에서 엉덩이를 장시간 노출시키는 것도 어려웠기 때문에 병사들은 출격 전에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먹는 것을 스스로 삼가기 시작했던 것이었다.

 

핸들리 페이지 헬리팩스(Handley Page Halifax)

이미지 출처: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그리고 이러한 사정을 알게 된 영국 왕립공군(RAF: Royal Air Force) 지휘부는 제2차 세계대전 초반인 1940년 경에는 비행 전과 기내식으로 제공되는 메뉴에서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제외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지상근무자와 출격을 앞두지 않은 조종사나 승무원들에게는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가 제공되었으며 항공기술의 발달로 여압실이 보급되면서부터는 비행 전과 기내식으로 다시 제공되게 되었다.

이미지 출처: 영국 임페리얼 전쟁 박물관(Imperial War Museum)

 

이런 이유 때문에 민간항공사 중에는 여압실이라곤 해도 지상보다 낮은 기압과 많은 승객들이 뿜는 대량(?)의 방귀를 염려하여 베이크드 빈즈(Baked Beans)를 제공하지 않는 곳도 있는 것이다.

아우슈비츠의 천사와 악마

아우슈비츠의 천사와 악마

코로나19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대구지역에서 봉사할 의료진의 모집에 앞다투어 참가하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모습에서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와 “나는 일생을 의롭게 살며 나의 간호를 받는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헌신하겠다.”는 나이팅게일 선서를 지키는 숭고함을 보면서 그들의 헌신에 감사함과 아울러, 9일로 예정되었던 임관식을 앞당겨 마치고 대구로 내려가 코로나19와 싸우고 있는 국군간호사관학교 60기 신임 간호장교 75명은 감사한 마음과 더불어 안타까움을 갖게 만든다.

군인의 신분으로 인술(仁術)을 베푸는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의사의 신분으로 인간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했던 자들도 있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와 아우슈비츠에서 죽음의 천사(Angel of Death)로 불렸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가 있다.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2차 대전이 끝난 뒤 아우슈비츠에 근무하면서 유대인의 학살에 관여한 자들은 1947년 크라쿠프에서 열린 재판에 모두 41명이 기소되어 23명이 사형을 선고받고 17명은 징역형을 선고받았는데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은 사람이 오늘의 주인공이자 아우슈비츠의 선인(Good Man of Auschwitz)으로 불리는 한스 뮌히(Hans Wilhelm Münch)라는 사람이다.

 

한스 뮌히(Hans Münch)

또한 나치독일에 협력하여 생체실험을 한 혐의로 기소된 의사들을 재판했던 뉘른베르크 의사재판(Doctors’ trial)에도 한스 뮌히(Hans Münch)는 회부되지 않았으나 기소되었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는 남미로 도주하여 신분을 세탁하고 평생을 숨어 살다가 1979년 2월 7일, 브라질의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던 중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무덤에서 채취한 그의 이빨에서 나온 DNA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었다.

1911년 5월 14일 독일제국의 프라이부르크(Freiburg im Breisgau)에서 태어난 한스 뮌히(Hans Münch)는 김나지움을 마치고 튀빙겐 대학교와 뮌헨대학교에서 의학을 전공하고 1939년에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아우슈비츠와 4㎞ 떨어진 곳에 있던 무장친위대 위생연구소(Hygiene-Institut der Waffen-SS)에서 전염병으로 인한 군과 무장친위대의 피해를 줄이기 위한 세균연구를 하고 있던 한스 뮌히(Hans Wilhelm Münch)의 지휘관은 요하임 므루고프스키(Joachim Mrugowsky)란 자로 의사재판(Doctors’ trial)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6월 2일에 처형된 자다.

 

요하임 므루고프스키(Joachim Mrugowsky)

 

한스 뮌히(Hans Münch)가 근무하고 있던 무장친위대 위생연구소(Hygiene-Institut der Waffen-SS)는 전쟁이 지속되면서 강제로 수용하는 유대인들을 노동을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부적합한 자들로 구분하여, 노동을 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자들은 바로 가스실로 보내도록 선별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한스 뮌히(Hans Münch)는 유대인과 특히 아동과 여성을 대상으로 가스실로 보내어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비인간적인 것이라고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재판과정에 증인으로 참가한 유대인들에 의해 밝혀졌는데 나머지 전범들에 대하여 모두 유죄취지의 증언을 했던 사람들이 오로지 단 한 사람 한스 뮌히(Hans Münch)만은 죄가 없다고 증언하여 판사와 검사들을 놀라게 했으며 특히 공산주의검사들조차도 그 증언을 무시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수용자들을 선별하는 일은 참가를 거부하였지만 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에는 빠질 수 없었던 한스 뮌히(Hans Münch)는 실험대상이 된 수용자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시간을 끌면서 최소의 희생을 치를 수 있도록 갖은 노력을 다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뉘른베르크 의사재판

 

지금 대구·경북지역을 휩쓸고 있는 코로나19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의사 출신의 정치인이 대구로 내려가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을 두고, 일각에서는 그가 “환자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는 모양이다.

“여보시오! 그런 말을 하는 당신들은 731부대의 이시이 시로(石井四郎)와 아우슈비츠의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와 무엇이 다르겠소이까?”

마릴린 먼로의 성공 뒤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마릴린 먼로의 성공 뒤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미국영화협회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여배우 6위에 기록된 마릴린 먼로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지만 그녀가 배우로 성공하게 된 이면에는 미국의 40대 대통령이었던 로널드 레이건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이번에는 이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글의 제목에 마침표를 찍지 않고 물음표를 붙인 것은 마릴린 먼로와 레이건 전 대통령과의 숨은 인연이 있는 것은 맞지만 로널드 레이건이 마릴린 먼로의 성공에 결정적이고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릴린 먼로는 1942년 16세의 나이로 항공사 정비원으로 일하던 짐 도허티(Jim Dougherty)와 결혼하였으나 1944년 짐 도허티(Jim Dougherty)는 태평양전쟁에 참전하게 되었고, 마릴린 먼로(당시의 이름은 Norma Jean Dougherty)는 로스앤젤레스의 밴나이즈(Van Nuys)에서 무인항공기 OQ-2를 생산하던 “Radioplane Factory”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미육군항공대의 “First Motion Picture Unit”에서 홍보영화를 제작하는 업무에 종사하고 있던 로널드 레이건 대위는 군인들의 사기진작을 위하여 군수공장에서 근무하는 젊은 여성들의 사진을 찍어오도록 사진병이던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을 마릴린 먼로가 근무하고 있던 공장으로 파견을 보내게 됩니다.

공장에 도착한 데이빗 일병은 3일간 공장의 이곳저곳을 돌며 사진을 찍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자연스런 표정을 짓는 마릴린을 눈여겨보게 되었고, 그녀에게서 모델의 가능성을 발견한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은 아예 2주간의 휴가를 얻어 그녀에게 카메라 포즈를 취하는 법 등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 일병은 공장에서 촬영한 마릴린의 사진을 군에서는 사용하지 않았는데 인터넷에 떠도는 아래의 표지사진은 합성된 것이며 실제로 데이빗이 찍었던 사진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사진이었습니다.

 

아무튼 데이빗 콘오버는 배우가 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던 먼로에게 우선 모델이 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고 이를 수락한 먼로에게 2주간의 휴가 동안 다양한 교육을 하였는데, 1945년 1월 그녀는 공장을 그만 둠과 동시에 데이빗이 소개한 모델 에이전시인 “Blue Book Modeling Agency”와 계약을 맺고 본격적으로 모델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에이전시의 대표였던 에멀린 스니블리(Emmeline Snively)의 소개로 마릴린 먼로는 꿈꾸던 영화계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먼로를 발굴했던 데이빗 콘오버(David Conover)는 필리핀으로 파견되면서 먼로와의 연락이 끊어졌는데 1953년에서야 마릴린 먼로가 바로 자신이 사진을 찍고 가르쳤던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고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의 촬영장에서 다시 재회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뒤 먼로는 배우로도 활동을 하던 로널드 레이건과도 만나게 되는데 과연 두 사람은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아마도 레이건이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요?

“내가 사진을 찍도록 데이빗 일병을 보냈던 장본인이라구~ 밥 한 번 사야지 않겠어?”라고 말입니다^^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세계의 부자들 중엔 한국인도 있을까?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기로 서약한 세계의 부자들 중엔 한국인도 있을까?

200억 원에 달하는 주식을 한 대학에 기부했다 140억 원에 달하는 증여세 폭탄을 맞았던 어느 개인기부자의 선행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는 한편, 대기업들의 총수가 범죄로 인해 재판에 회부되고 나면 으레히 뒤따르는 재산의 사회환원이라는 눈속임과 그들이 설립한 재단들은 또 다른 갑질을 자행하는 수단이 되는 모습들을 우리는 최근 대한항공의 일우재단 이명희씨를 통해서 똑똑히 목격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이런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에는 삼영그룹 창업자인 이종환씨가 8천억 원에 달하는 재산의 대부분을 기부하여 국내최대의 기부액을 기록하고 있다.

한국의 부자들이 기부에 인색한 것과는 달리 미국에서 거부(巨富)들의 기부는 새삼스런 것이 아닌데 우리가 잘 아는 빌 게이츠와 그의 아내는 설립한 재단을 통해 350억 달러 이상의 누적금액을 기부하고 있고 워렌 버핏은 지금까지 기부액수가 230억 달러를 넘어서고 있는데 이것을 한화로 계산해보면 각각 39조 원과 26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금액에 달하며 지금까지 그들이 기부한 금액을 현재가치로 환산하면 빌게이츠가 500억 달러, 워렌 버핏이 467억 달러 정도에 달한다고 한다.

그런데 2010년 6월, 빌 게이츠와 워렌 버핏이 전 세계의 부자들에게 “생전에 재산의 절반 이상을 기부하자!”는 취지로 기부공약(Giving Pledge)을 제안하면서 설립한 비영리재단인 “The Giving Pledge”에는 오늘 날짜(2018. 11. 17)로 22개 나라에서 186명의 거부들이 가입하고 있는데 아시아에서는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타이완의 거부들이 참가했지만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과 중국에서는 단 한 명의 참가자도 없다.(이 글을 작성한 것은 2018년으로 그 이후인 2021년에 한국인 부부 2쌍이 이름을 올렸는데 뒤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참가자 명단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일본과 중국은 남의 나라니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국의 부자들 중에서 단 한 사람의 참가자도 없는 것을 보면서 다시 한 번 국내 재벌들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생색내기용 꼼수 기부행태를 보는 것 같아 과히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다.

※그러나 2018년 이 글을 작성한 이후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형미선 부부와 배달의민족을 개발한 (주)우아한형제들의 창업자인 김봉진 설보미 부부가 2021년에 기부서약을 하였으므로 보충한다.

카카오 창업자인 김범수 전 의장

(주)우아한형제들의 창업자인 김봉진 설보미 부부

역사적으로 부자들의 기부문화와 전통이 강한 미국은 지난 2017년에 가장 많은 4,020억 달러(약 455조 640억 원)의 모금액을 기록하였는데 이 금액은 우리나라의 한 해 예산에 육박하는 액수이며 그 중에서 개인이 기부한 액수는 모두 2,866억 달러(324조 4천억 원)라고 한다.

※ 출처: Charity Navigator

이런 미국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우리나라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서는 지난 해 5,996억 원의 모금실적을 올렸으며 오는 20일 전국적으로 사랑의 온도탑 제막과 동시에 연말 모금캠페인에 나서게 된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로 온도탑의 수은주가 쭉쭉 올라가기를 바라면서 지난 10년간(2008년~2017년) 미국에서 가장 많은 기부를 한 개인기부자들을 연도별로 알아보자.

▶ 2008년 레오나 헬름슬리(5,660억)

2007년 8월에 세상을 떠난 Leona Helmsley는 5억 달러에 달하는 그녀의 재산을 기부하였고, 그녀가 기르던 개에게 별도로 1,200만 달러의 재산을 증여하였는데 이 금액은 재판에 의해 200만 달러로 감액되었다.

▶ 2009년 드러켄밀러 부부(8,773억)

2009년 Stanley Druckenmiller와 그의 아내 Fiona Druckenmiller는 의학연구와 교육 및 빈곤퇴치를 주된 사업목적으로 그들이 설립한 재단(Druckenmiller Foundation)에 7억 7,5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0년 익명의 기부자(2,264억)

2010년에는 자신을 텍사스 주에 있는 베일러대학교 출신이라고만 밝힌 익명의 기부자가 이 대학에 익명으로 2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1년 윌리엄 디트리히 2세(3,000억)

2011년 10월 6일 사망한 윌리엄 S. 디트리히 2세(William S. DietrichⅡ)는 카네기 멜런 대학교에 2억6,500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2년 워렌 버핏(4조 1,540억)

워낙 유명한 사람이니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Warren Buffett은 2012년에 어린이들을 위한 3개의 자선단체에 각각 10억 달러 이상(정확히는 1,027,773,653달러)을 기부하기로 하여 모두 36억 7천만 달러에 달하는 기부액을 기록하였다.

▶ 2013년 마크 저커버그(1조 1,200억)

2013년 페이스북의 CEO인 Mark Zuckerberg는 실리콘밸리에 있는 자선단체(Silicon Valley Community Foundation)에 9억 9,200만 달러의 주식을 기부하였다.

▶ 2014년 랄프 윌슨(1조 1,300억)

2014년 3월 25일에 사망한 미식축구구단 버펄로 빌스의 구단주였던 Ralph C. Wilson Jr.는 그가 설립한 재단에 유산 10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5년 존 산티코스(7,358억)

2014년 12월에 사망한 John Santikos는 샌안토니오 지역재단에 6억 5천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6년 나이트 부부(5,660억)

나이키의 공동창업자인 Philip Knight와 그의 아내 Penelope Knight는 2015년 오레곤 대학교에 5억 달러를 기부하였다.

▶ 2017년 마크 저커버그 부부(2조 1천억)

Mark Zuckerberg와 그의 아내 프리실라 찬(Priscilla Chan)은 그들이 설립한 재단에 18억 5,650만 달러를 기부하여 2017년에 가장 많은 액수를 기부한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저커버그가 세운 재단은 비영리재단이 아닌 정확하게는 “챈 저커버그 이니셔티브(Chan Zuckerberg Initiative)”라는 LLC인데 이것은 유한책임회사와 개인기업의 특징이 결합된 형태로서 세금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 섞인 비판과 함께 비영리단체가 할 수 없는 정치적 로비에 사용될 수 있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어서 기부의 본질이 변색되는 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무튼 앞으로도 기부공약(Giving Pledge)을 하는 한국의 부자들이 더 많이 나오기를 바람과 아울러 한국의 재벌들 중에서도 사회의 지탄이 아닌, 칭송을 받는 사람들이 나오기를 희망한다.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히틀러의 운전기사는 유대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6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학살을 당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유대인의 신분으로 나치에 협력한 사람들도 상당수 있는 것 또한 역사적인 사실이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독일공군의 원수에까지 올랐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를 꼽을 수 있는데 1933년 헤르만 괴링에 의해 국가항공부의 서기관에 임명될 때에는 이미 그의 어머니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이었다는 소문이 널리 퍼져있었던 터라 괴링의 명령으로 그의 개인기록을 변조했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중앙이 에르하르트 밀히

 

서열상으로는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가 유대인으로는 가장 높은 직책에서 나치에 협력을 한 사람이지만 히틀러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치 독일에 협력한 사람으로는 히틀러의 운전사였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꼽을 수가 있다.

1897년 1월 19일, 프랑스 이민자의 집안에서 태어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19년 12월 1일에 나치당(NSDAP)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DAP)에 입당을 하게 되는데 1920년 1월에 교부하기 시작했던 501번으로 시작하는 당원번호가 히틀러는 그의 저서에서 507번이라 주장하고 있으나 555번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594번을 교부받았다.

 

에밀 모리스(Emil Maurice)

 

이것을 계기로 히틀러와 에밀 모리스는 친분을 맺게 되고 1920년에 창설된 돌격대의 전신인 경호·경비대의 최고지도자(Oberster SA-Führer: Supreme SA Leader)에 오르게 되는데 SA는 약자로서 돌격대(Sturmabteilung)를 뜻한다.

그리고 이어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1921년 7월부터는 히틀러의 개인운전사가 되는데 1923년 3월에는 친위대의 전신이 된 히틀러의 개인경호부대의 대원이 되어 1923년 11월 9일의 뮌헨 폭동 실패 이후 정치범으로 히틀러와 함께 란츠베르크 교도소(Landsberg Prison)에 수감되게 된다.

 

수감 당시의 사진: 맨 왼쪽이 히틀러, 그 옆이 모리스

히틀러는 수감기간 동안 그의 저서 ‘나의 투쟁(Mein Kampf)’을 집필하는데 이 책은 그의 부관이었던 루돌프 헤스(Rudolf Walter Richard Heß)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히틀러의 구술을 바탕으로 만든 것이었다.

아무튼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히틀러는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최선봉에서 투쟁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둘 사이의 막역함을 너(Du)라는 호칭을 서로 사용하였다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에 이름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인물의 하나인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눈 1925년에 히틀러의 명령으로 조직되었던 경호대인 슈츠코만도(Schutzkommando)의 대원으로서 히틀러의 전용기사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이 때 에밀 모리스는 히틀러의 조카인 겔리 라우발(Geli Raubal)과 사귀게 되고 1927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결혼을 약속하게 된다. 그리고 히틀러도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기뻐할 것이라는 생각에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두 사람의 결혼을 알리게 되지만 히틀러는 에밀의 예상과는 반대되는 반응을 보인다.

 

겔리 라우발(Geli Raubal)

 

모리스의 예상과는 달리 히틀러는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하는 대신에 헤어질 것을 요구했고, 1927년 연말에는 에밀 모리스를 운전기사에서 해고 하고 당에서도 추방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괴롭히기 시작한다.

이에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느낀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모든 것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자신을 해고하고 탈당까지 시킨 히틀러의 행동이 납득이 가지 않아서 나치당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기에 이르고 마침내 보상금으로 500라이히스마르크(Reichsmark)를 받게 되고, 이를 밑천으로 뮌헨에서 보석가게를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던 것은 아니고 친위대의 신분은 유지할 수 있었는데 1925년 11월 9일에 친위대로서 흔히들 SS라고 부르는 슈츠슈타펠(Schutzstaffel)이 조직되었을 때 1번 대원이 히틀러였고, 2번 대원이 바로 에밀 모리스(Emil Maurice)였던 이유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1932년 친위대가 확장·재조직 될 때 모리스는 친위대의 고위간부에 임명되게 된다. 그러나 조직의 창시자라는 상징성에 대한 예우였을 뿐 주요한 역할을 맡을 수는 없었고 1933년에는 뮌헨 시의원이 되어 같은 해 10월에 열렸던 뮌헨폭동 기념식에서 히틀러와 재회하여 관계를 회복하기에 이른다.

1929년부터 친위대를 이끌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대학살을 주도한 최고책임자였던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친위대의 대원번호가 168번이었는데 1933년부터는 모든 친위대의 대원들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어야만 한다는 요건을 만들어 장교는 1700년, 부사관은 1750년, 사병은 18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혈통을 증명하도록 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하인리히 히믈러

 

그리고 1935년 에밀 모리스(Emil Maurice)가 결혼을 하기 위해 혈통을 증명하는 서류를 제출하는 과정에서 하인리히 히믈러는 모리스가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이 아니라 그의 증조부이자 배우 겸 감독으로 유명한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체리 모리스(Chéri Maurice)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에밀 모리스의 증조부인 찰스 모리스 슈바르첸버거(Charles Maurice Schwartzenberger)가 유대인임을 인지한 하인리히 히믈러(Heinrich Luitpold Himmler)는 이 사실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고하면서 당과 친위대에서 추방할 것을 제안하지만 히틀러는 이를 거부하고 아무런 제재를 하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1937년부터 뮌헨의 상공회의소장을 역임하고 1940년부터 1942년까지는 독일의 공군에서 근무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연합군의 주도로 나치당이나 친위대의 대원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이 속했던 조직을 해체하거나 무력화시키는 탈나치화(Denazification)의 일환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1948년 4년형의 선고와 함께 보유자산의 30%를 몰수당하게 된다.

유대인의 피가 흐르는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막역한 친분을 쌓고 그의 개인운전기사로 일했던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는 그의 최초의 직업이었던 시계기술자의 경력을 살려 시계점을 운영하다 1972년에 사망하였다.

비록 15년으로 감형이 되기는 했으나 종신형을 언도받았던 에르하르트 밀히(Erhard Milch)와, 4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던 오늘의 주인공 에밀 모리스(Emil Maurice)를 보면서 요즘 우리사회의 뜨거운 화제인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을 생각하게 되지만 김원봉과 친일경찰 노덕술에 관한 생각은 적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친다.

헤밍웨이의 유작 파리는 날마다 축제

헤밍웨이의 유작 파리는 날마다 축제

어제(7월 2일)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날이었다. 헤밍웨이의 작품은 책으로 영화로 많이 접했지만 낚시를 좋아했다는 점이 내겐 또 다른 관심점이기도 했다.

헤밍웨이가 죽기 전에 쓴 이 책의 제목은 원제(A Moveable Feast)를 직역한 이동축제일(移動祝祭日)이란 제목보다는 주순애씨가 번역한 제목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가 훨씬 와 닿는다.

2015년 11월 13일에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동시다발 테러사건 이후 헤밍웨이의 유작(遺作)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저항의 상징으로 인식되면서 프랑스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헤밍웨이가 젊은 시절 체류했던 파리에서의 생활을 회고하면서 쓴 이 책의 제목 ‘A Moveable Feast’는 헤밍웨이가 붙인 것이 아니다.

‘A Moveable Feast’라는 제목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비즈니스(원제: Shameless exploitation in pursuit of the common good)’로 소개되었던 책을 영화배우 폴 뉴먼과 함께 쓴 작가 A.E. 허츠너(Hotchner)란 사람이 붙인 것인데 헤밍웨이가 죽고 나서 그의 네 번째 부인 메리 헤밍웨이가 출판에 앞서 책의 제목을 정하기 위해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A.E. 허츠너(Hotchner)였다.

 

헤밍웨이는 유작(遺作)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의 에필로그에서 ‘어떤 친구’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 사람이 바로 A.E. 허츠너(Hotchner)였으며 그가 제안한 제목이 바로 ‘A Moveable Feast’였던 것이다.

헤밍웨이가 그의 책에서 거론할 정도로 A.E. 허츠너(Hotchner)와 가까운 사이였던가 하는 것은 A.E. 허츠너(Hotchner)가 1966년에 출간한 책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헤밍웨이와 허츠너

 

헤밍웨이에 관한 책을 여러 권 펴낸 작가 A.E. 허츠너(Hotchner)는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과 수기로 기록하였고 그를 바탕으로 ‘파파 헤밍웨이(Papa Hemingway)’를 썼는데 이 책은 1948년부터 1961년까지 헤밍웨이의 일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1948년 잡지 코스모폴리탄에 ‘문학의 미래’란 제목의 글을 부탁하기 위해 쿠바의 아바나에 있던 헤밍웨이를 방문한 것이 A.E. 허츠너(Hotchner)가 헤밍웨이와 교류하게 되는 시발점이었으며 이후 A.E. 허츠너(Hotchner)는 헤밍웨이의 손에 이끌려 낚시도 배우게 되고 헤밍웨이 부부의 유럽여행에도 동반하는 등 잦은 교류를 가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에서 “파리는 마치 ‘움직이는 축제’처럼 남은 일생에 당신이 어딜 가든 늘 당신 곁에 머무를 거라고. 바로 내게 그랬던 것처럼.(주순애씨의 번역본에서 인용)”이라고 적고 있는데 아마도 테러로 인한 아픔을 겪고 있던 프랑스인들에게 이 글이 적힌 마지막 장 ‘파리에 끝은 없다(There Is Never Any End to Paris)’란 제목과 내용이 공감을 주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헤밍웨이의 유작인 ‘파리는 날마다 축제(A Moveable Feast)’는 원본 그대로의 것은 아니고 네 번째 아내였던 메리 헤밍웨이(Mary Welsh Hemingway)가 두 번째 아내였던 폴린 파이퍼(Pauline Pfeiffer)와 관련한 내용들은 삭제하고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메리와 어니스트 헤밍웨이